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백작가 도련님이 미쳐날뜀

001화

2021.07.26 조회 115,203 추천 1,679


 ‘······ 손이 작군.’
 
 소란스런 기척에 눈을 뜬 그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이다.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뽀송뽀송하고 앙증맞은 작은 손.
 
 당연하게도 손의 주인 역시 작고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먹구름이라도 끼어있었던 것 같은 혼탁한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슬쩍 주변을 살핀 것뿐이지만 이미 이 공간의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곳과는 꽤나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음.’
 
 방을 구성하고 있는 재질, 몸을 덮고 있는 이불, 누워있는 침상 등등 그의 기억과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 신선하기는 하군.’
 
 꽤나 긴 그의 삶속에서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경험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렌 도련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나직하고 공손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렌은 얼굴을 찡그렸다.
 
 ‘한어가 아니군.’
 
 이제는 아렌이라고 불리는 그는 제법 많은 수의 언어를 알고 있지만 그런 그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언어.
 
 그런데 그 언어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내뱉는 상황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렌?”
 
 어느새 얼굴을 들이미는 중년의 여인을 보면서 아렌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색목인? 여긴 파사국波斯國인가?’
 
 젊었을 적 꽤나 아름다웠을 것 같았던 중년 여인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아렌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낯선 외모.
 
 그가 알고 있던 사람들과는 외모의 형태가 달랐다.
 
 “벡스터 기사님이 시간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조금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년여인이 이불을 걷어내더니 아렌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간이 없다?”
 “추격자가 붙었습니다.”
 
 혼잣말에 가까운 아렌의 중얼거림에 굵은 목소리가 답했다.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추격자? 나에게?”
 “예. 낌새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합니다.”
 
 투박하지만 꽤나 길이 잘 들어 보이는 가죽갑옷을 걸치고 검과 둔기로 무장한 사내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불안한 분위기가 전염된 것인지 하인들의 손놀림이 분주해졌고 아렌도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 이것 봐라?’
 
 작은 체구에 생기가 옅은 몸.
 
 거기에 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이물감까지.
 
 총체적인 난국이라고 할 만한 상황에 아렌의 입가에 어이없는 미소가 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늙었지만 아직 정정해 보이는 하인이 아렌의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적의는 없다.’
 
 적의는커녕 마치 고가의 도자기를 다루는 것 같은 조심스런 손길에 아렌은 가만히 몸을 맡겼다.
 
 어려지고 병약한 신체와 이해가 안 되는 기묘한 상황.
 
 답답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에서 베풀어지는 호의를 거절하기에는 아렌은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갑시다.”
 
 검사로 보이는 중년인의 말에 일행이 따라 붙었다.
 
 아렌을 안고 있는 늙은 하인과 유모로 보이는 중년 여인, 아렌의 또래로 보이는 시동과 시녀.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결의를 굳히고 중년인의 뒤를 따라서 밖으로 나서려는 그때.
 
 ‘늦었군.’
 
 주변을 둘러싼 생명체의 기척을 감지한 아렌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와 동시에 벡스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벡스터의 시선이 건물 내부를 빠르게 훑었지만, 여행자들을 위한 역참에 따로 빠져나갈 길 따위는 없었다.
 
 “뒤로 물러나라!”
 
 쾅!
 
 벡스터의 외침과 동시에 정면의 문이 부셔질 듯 젖혀지며 갑옷을 입은 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벡스터! 도련님을 넘긴다면 네 녀석은 그냥 보내주지!”
 
 “커슨. 개도 믿지 않을 헛소리는 그만하고 검이나 뽑아.”
 
 사내의 나이 불혹이면 얼굴에 책임을 쳐야 한다고 했던가.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커슨의 얼굴을 보니 확실히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아렌은 알 수 있었다.
 
 ‘가문 내 내분인가.’
 
 간단한 문답이었지만 아렌은 꽤나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스르릉.
 
 바로 받아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잠깐 흠칫하던 커슨이 이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뭐. 내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걸.”
 
 여기저기서 검 뽑는 소리가 울렸다.
 
 “쉽게 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커슨의 뒤로 따라 들어온 갑옷 사내들의 수는 열 명.
 
 단련된 육체와 무기에 익숙해 보이는 모습들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노련하군.’
 
 어느새 구석으로 파고들은 일행의 앞을 막아선 벡스터가 검을 뽑아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며 아렌은 생각했다.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진 듯이 불분명한 상황이었지만 최소한 벡스터가 노련한 전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도련님. 그만 영지로 돌아가시죠. 나들이를 너무 멀리 나오셨습니다.”
 
 도련님이라고 경어를 붙이고는 있지만 말과는 전혀 다른 음산한 눈빛이 아렌에게로 쏘아졌다.
 
 “흐흐흐. 그동안 내가 많이 우스워졌나 보군. 커슨. 나를 앞에 두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여유가 생겼나 보지?”
 
 그리고 그렇게 커슨의 시선이 돌린 한 순간.
 
 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벡스터의 검이 흉악한 기세를 담고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한없이 곧은 선이 노리는 곳은 커슨의 목.
 
 챙!
 
 커슨도 만만한자가 아니었다.
 
 다급한 기색이 있기는 했지만 재빠르게 휘둘러진 검이 벡스터의 찌르기를 쳐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흡!”
 
 하지만 튕겨진 검의 힘을 이어 받은 벡스터가 한 바퀴 회전하는가 싶더니 벼락같은 기세로 커슨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뿌렸다.
 
 감탄이 나올만한 한수.
 
 철저하게 실전으로 단련된 것 같은 검이다.
 
 창!
 
 그러나 커슨도 그 사이에 검을 세워 날카롭게 파고드는 벡스터의 검을 막아냈다.
 
 “큭!”
 
 다만 막아내기만 했을 뿐.
 
 커슨의 입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고 검에 실린 역도力道를 이기지 못했는지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기세를 이어서 공격해 들어가려던 벡스터의 몸이 멈췄다.
 
 커슨이 물러선 곳은 그가 이끌고 들어온 일행이 있는 곳.
 
 공격을 이어갔다면 커슨에게 한 칼 정도는 먹일 수 있었겠지만, 그 후에 다른 자들의 검에 난도질당했을 것이 뻔했다.
 
 “빌어먹을 놈. 더 강해진 거냐.”
 “무슨 소리하는 거냐. 네가 약해진 거다. 뭐. 원래 약했지만.”
 
 뒤에 서있던 사내들에게 부축 받은 커슨이 이를 갈며 노려보았지만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도발로 응수하는 벡스터.
 
 ‘괜찮군.’
 
 아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벡스터의 대응을 내심 칭찬했다.
 
 누가 보더라도 절체절명이 상황 속에서 벡스터는 열세를 인정하고 지휘자로 보이는 커슨을 일대일로 제압하여 활로를 모색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짧은 시간 속에서 상황 판단을 끝내고 대처 방안을 이끌어낸 벡스터는 확실히 범상한 기량의 전사는 아니라고 아렌은 생각했다.
 
 “······ 그 주절거리는 주둥이를 반으로 찢어주마.”
 “내 입보다는 네 주둥이가 더 주절거리는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벡스터가 빈정거렸고, 커슨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피어오르며 벡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벡스터의 자세가 낮아지며 두 다리가 단단히 지면을 받쳤다.
 
 마치 단단하게 뿌리박힌 나무를 연상시키는 자세.
 
 커슨의 공격을 힘으로 맞서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으럇!”
 
 비명과도 같은 기합과 함께 양손으로 단단하게 파지한 검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벡스터의 의도 따위는 부숴버리겠다는 사생결단의 일격.
 
 체중까지 실은 강인한 일격에 벡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위로 쏘아 올렸고 커슨의 검과 충돌했다.
 
 쾅!
 
 검과 검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굉음이 역참 내부를 울렸다.
 
 “컥!”
 
 놀랍게도 공방에서 우세를 차지한 것은 벡스터.
 
 내려베기라는 유리한 위치를 점한 커슨의 공격이 벡스터의 올려 베기에 밀린 것이다.
 
 커슨이 인상을 구기며 손목을 흔들어 충격을 흘리려던 그 순간.
 
 “뭣!”
 
 강렬한 충돌에 튕겨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벡스터의 검이 커슨의 검에 달라붙어 있었고 벡스터의 눈이 빛났다.
 
 스아아아.
 
 쇠와 쇠가 마찰하는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은밀한 소리와 함께 벡스터의 검이 커슨의 검을 마치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노리고 있는 곳은 커슨의 목!
 
 필살의 한 수였지만 그 순간 커슨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했다.
 
 “젠장!”
 
 비명과 함께 상체를 뒤로 꺾으며 거칠게 검을 놓아버렸고, 벡스터의 검로가 흔들리며 커슨의 목숨을 살렸다.
 
 푸슉!
 
 벡스터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커슨의 목젖을 스쳤다.
 
 비록 스치기는 했지만 날카로운 예기에 커슨의 목젖에 실 같은 자상이 생겼고,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은 커슨의 사타구니를 벡스터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걷어차 버렸다.
 
 “단장님!”
 
 공방을 지켜보던 사내들이 다급히 커슨을 받아 세웠고 벡스터가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군.’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아렌이 감탄사를 토했다.
 
 묵직해 보이는 검과 기세로 강검强劍일변도인 것처럼 상대를 유도하더니만 상대의 빈틈을 만들어서 치명적인 일격을 섞어 넣은 심리전에 감탄한 것이다.
 
 거기다가 꽤나 무거워 보이는 검으로 저런 표홀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보면 벡스터가 얼마만큼의 고련과 실전을 거쳐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크으윽!”
 
 가늘게 피가 흘러내리는 목을 부여잡고 커슨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벡스터를 노려보았다.
 
 “이런! 자네 수하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줬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자네가 너무 약해서 힘 조절이 과했어. 이거 미안한걸.”
 
 그런 커슨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치면서 벡스터가 이죽거렸다.
 
 도발을 계속해서 커슨을 끌어내려는 속셈이었지만 상황은 벡스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 개새끼! 잡을 필요도 없다! 죽여!”
 
 커슨이 으드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단장님!”
 
 수하 중의 하나가 커슨을 불렀지만, 이미 커슨의 눈은 돌아가 버린 상황.
 
 “시끄러! 뒷일 걱정하지 말고 죽이라면 죽여! 왜? 알량한 인연이 걸리나?”
 “아닙니다.”
 “그럼 가서 처리해!”
 
 그제야 사내들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벡스터의 앞을 막아섰다.
 
 슬그머니 반원을 그리며 벡스터를 둘러싼 형태가 꽤나 효율적으로 포위하는 모습.
 
 사내들의 탐탐치 않아하는 표정들을 바라보는 벡스터의 얼굴에 긴장이 빛이 떠올랐다.
 
 한손이 열손을 당해내기는 힘든 법.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벡스터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젠장. 적당히들 하자고.”
 
 벡스터의 말에 몇몇 사내들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뿐.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겨누며 압박하는 모습을 보더니 벡스터도 검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검술. 포위하는 모습을 보면 문파라기보다는 군에 가깝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벡스터였지만 아렌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태연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군.’
 
 벡스터의 계책이 통했다면 좋았겠지만 아니더라도 아렌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낯선 상황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상태.
 
 그에게는 벡스터나 커슨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음?’
 
 늙은 하인이 힘을 주며 아렌을 제 품속으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유모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앞을 가로막았고 시동과 시녀가 품에서 단도를 하나씩 꺼내들더니 단단히 거머쥐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잠시만 눈을 감아주시겠어요? 금방 끝난답니다.”
 
 작은 등 너머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사내들을 견제하던 벡스터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아렌을 바라보았다.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과 강한 의지가 어려 있는 눈빛.
 
 아렌은 저런 표정과 눈빛을 가진 자들을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필요하다면 목숨으로 활로를 열었던 자들이 지었던 표정과 눈빛.
 
 아렌의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
 
 중년여인의 작아 보이는 등에서는 결사의 각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늙은 하인의 몸은 갑옷과 같았으며 비록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눈빛만큼은 각오를 마친 시동과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진심으로 아렌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흑백으로 보이던 세상에 선명하게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댓글(58)

양마루    
건필
2021.08.01 12:54
ze****    
상태창도 없고, 호구도 아니고, 레벨업도 없어 재미가 있습니다.
2021.08.01 17:50
명소옥    
어? 예전에 본거 같은데 리메이크인가요?
2021.08.02 09:36
[탈퇴계정]    
빙의말고 회귀였으면 더 재밌었을듯
2021.08.02 21:46
풍뢰전사    
건필하세요
2021.08.04 22:04
독행남아    
재밌는데요
2021.08.10 08:23
뿌아아왕    
한자는 도력아닌가여?
2021.08.10 15:41
김누구    
졸라맨 표지 너무 호감이야ㅋㅋㅋㅋㅋㅋㅋ
2021.08.10 16:07
대웅이    
나를 이렇게 대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
2021.08.11 13:11
풍뇌설    
짱이 판타지에 코로나19퍼뜨리러가나
2021.08.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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