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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개정판] 21세기 갑부[甲富]

생존의 끝에서

2021.07.27 조회 1,256 추천 14


 경제란 무엇일까?
 부동산, 수입, 수출, 일자리, 내수, 증시.
 세상엔 경제가 뭐고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가리키는 수많은 말과 단어가 있지만.
 나에게 경제란 어떻게 따져도 생산과 소비의 개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시장과 기업. 상품과 제조. 생산과 소비.
 하나만을 생각할 수 없는, 대립되는 양대 개념의 가운데서 최적의 줄타기를 하는 가운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든 일은 스무 살 마지막 겨울에 시작되었다.
 
 ***
 
 2000년 11월.
 
 “몇 분이신가요?”
 “아. 친구들 먼저 와 있는데요.”
 
 오랜만에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그래도 나는 3차 때나 겨우 시간을 맞춰 올 수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가운데, 머리를 빡빡 민 병찬이가 눈에 띄었다.
 
 “병찬아.”
 “어! 진혁아. 너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하하······ 근데 머리가 왜 그래?”
 “그렇게 이상하냐? 애들 다 뭐라 그러네.”
 “군대가 아니라 어디 출가하러 가는 거 같은데?”
 “미친놈. 머리 짧으면 다 스님인가. 아무튼, 야! 진혁이 왔어! 자리 비켜 봐.”
 
 우리들 가운데 첫 번째 입영자가 나왔다.
 다른 놈도 아닌 병찬이에, 또 이유도 너무나 그럴싸해 참석하게 됐는데.
 근 1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고등학생 티를 벗고 대학생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자리였다.
 
 “와 진혁아. 너 이 새끼 공부를 뭐 어떻게 했길래 몸이 반쪽이 됐냐?”
 “그래? 살이 조금 빠졌나?”
 “조금 빠진 게 아니라 삐쩍 말랐는데?”
 “자자. 어쨌든 다 모였으니까 잔 들어! 건배!”
 “어. 저기. 나 술은······.”
 
 친구와의 이별이 아쉬워 나왔지 술까지 마실 여력은 없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내려앉고, 친구들 가운데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재식이가 잔을 든 채로 물었다.
 
 “너 차 가져왔냐?”
 “······아니.”
 “근데? 같이 마시자.”
 “······.”
 
 마시고 싶지 나도.
 놀고 싶지······.
 그렇지만······.
 
 말 못 할 미소나 짓고 있으니 재식이가 잔으로 병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싶은데 얘 군대 가는 건 알고 있지?”
 “그럼······ 알지.”
 “그래. 다 이해해. 공부 힘들지. 그래도 1년 만에 나타나서 거절은 좀 그렇지 않냐?”
 “그게 아니라······ 나 술 잘 못 마셔.”
 “이 새끼! 그럼 더 오늘 같은 날 형들한테 제대로 주도를 배워야지!”
 
 대충 둘러대고 싶었는데, 이미 녀석은 맥주와 소주를 섞고 있었다.
 
 “자. 이렇게 탁! 한번 쳐 주면! 오케이. 마셔 봐!”
 “······.”
 “진혁아. 먹기 싫음 먹지 마. 저 새끼 어디서 이상한 거 배워 가지고.”
 “이상한 게 아니라 룸 가면 다 이렇게 먹는다니까?”
 “의대생이 룸이나 다니고. 자랑이다!”
 
 병찬이와 재식이가 왁자지껄 떠들어 내려앉은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거절할 수 없어 잔을 받았는데, 소맥이라고? 은근 부드럽네.
 
 “올! 잘 먹는데! 자 한 잔 더”
 “하하. 너는 진짜 대학 가서 술만 마셨나?”
 “뭔 소리야. 늦게 왔으면 늦은 만큼 속도를 맞춰야 할 거 아냐. 자. 여기 한 잔 더.”
 
 피곤할 때 술 마시면 훅 가는데······.
 이따가 또 병원 가 봐야 하는데······.
 아 모르겠다······.
 
 ***
 
 “세수하냐?”
 “응······.”
 “괜찮아? 취한 거 아니지?”
 “아니야······ 야 근데 니네 술 잘 마신다.”
 “대학이 별거냐. 맨날 술판이지. 너도 내년이면 알 거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는데, 병찬이가 따라 들어왔다.
 녀석은 시끄럽게 오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말투로 넌지시 물었다.
 
 “혹시······ 잘 안 됐어?”
 “뭐가?”
 “아니. 그냥.”
 “병찬아. 너 담배 있지?”
 “담배? 담배도 피워?”
 “이번에 배웠어.”
 “오올~ 그 유진혁이 담배를?”
 
 화장실에서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니, 술기운에 머리가 핑핑 도는구나.
 
 “뭐 하냐? 자리 가서 피지? 이 냄새나는 데서?”
 “뭐 어때. 그냥 여기서 피우고 가. 재식이 또 지랄하는 거 듣기 싫어. 아까도 애들한테 담배가 얼마나 안 좋은 줄 아느니 뭐니. 잔소리하는 거 봐.”
 “하하하. 그런 놈이 술은 또 오지게 권해요.”
 “그러니까. 이상한 놈이야.”
 
 딱히 재식이가 문제가 아니라, 요즘 머무는 환경상 화장실에서 흡연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 그렇지만. 뭐 굳이 떠들 필요 없겠지.
 병찬이도 곁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진혁아.”
 “어.”
 “수능 몇 점 나왔냐?”
 “수능? 무슨 수능?”
 “시험 안 봤어?”
 “아. 아······ 아까도 그 소리였구나.”
 
 보자마자 무슨 공부니 뭐니 하길래 대체 뭔 소리지? 했는데.
 맞다. 친구들은 내가 재수하고 있는 줄 알지. 그리고 지금은······.
 젠장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는구나.
 
 “후······ 공부 어렵네······.”
 “그러니까. 그냥 작년에 가라니까. 시립대는 갈 수 있었잖아.”
 “그러게······ 그냥 갈 것을 그랬나······.”
 
 대학이라······.
 고3까지 줄기차게 떠들던 서열.
 그때는 그게 인생의 척도가 되는 마법의 주문같이 느껴졌었는데······.
 
 “아. 어지럽다······.”
 “취했네. 야 너 그만 마셔.”
 “그래. 네가 재식이 좀 마크해라.”
 “하하. 들어가자.”
 
 비슷한 20대 초중반 또래들이 장악하고 있는 주점.
 대학, 여자, 군대. 연예인. 자동차. 화려한 음색을 자랑하는 핸드폰.
 각 테이블마다 주제도 다양하다.
 그냥 멍한 정신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데, 보통 이렇게들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다.
 스무 살들. 또래. 보통의 사람들.
 좋다. 솔직히 이런 순간도 필요하지······.
 숨이 트이는 기분이 이런 건가.
 
 ***
 
 “잘 가라 병찬아.”
 “그래. 고맙다 새끼들아.”
 “시키는 거 잘하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한대. 괜히 나서지 말고 빼지도 말고.”
 “하하하! 니네 형이 제대했지 네가 제대했냐? 이 새끼 존나 아는 척이네.”
 “아 씨발. 뭐든.”
 “니네도 빨리 신청해. 군대 가기 은근 빡세다고.”
 
 병찬이가 친구들과 이별을 나누는 동안 뒤에서 기다려 줬다.
 
 “진혁이도 들어가라.”
 “어.”
 “야. 다음에 전화하면 꼭 받아. 쌩까면 넌 진짜.”
 “알겠다고.”
 “가자. 진혁아.”
 
 다른 애들과 다르게, 우리는 집이 같은 방향에 있었다.
 한때는······.
 
 “후우······.”
 “너 술 처음 마신 건 아니지?”
 “그 정도는 아냐.”
 
 겨울의 추운 공기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친구가 걱정스레 묻는 질문도 대충 웃으며 얼버무리고 있었다.
 
 “피곤해서 그래.”
 “잘될 거야.”
 “······그래. 잘돼야지.”
 “다른 뭐 없지?”
 “뭐가 있어?”
 “그냥. 오랜만에 보는데 분위기가······.”
 “분위기 뭐. 오버하지 마. 네가 군대 가지 내가 군대 가냐.”
 “······.”
 
 또 말없이 조금 걷는데 한쪽에 벤치가 보인다.
 
 “잠깐 앉을까? 누가 늦게 와서 이야기도 많이 못 했는데.”
 “그래. 좋지.”
 
 자리를 잡고 병찬이가 건네주는 담배를 받아 물었다.
 
 “대학은 재밌냐?”
 “뭐 재밌어. 별거 없지.”
 “그래도 니네는 연고전 이런 거 하잖아.”
 “새끼야! 고연전이거든! 똑바로 말하라고.”
 “하하하 그거 진짜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의식하는 거야?”
 “그냥 학교 가니까 분위기 따라서 주입이 되더라.”
 “으하하하~~”
 
 얼마 만에 일상적인 이야기에 웃는 걸까. 이 감정을 놓치기 싫어 한참을 껄껄거리고 있었다.
 
 “새끼. 이제 좀 웃네?”
 “아까도 웃었는데.”
 “아까는 진심이 없었지. 지금은 진짜 웃잖아.”
 
 역시 이놈 앞에선 작은 감정도 못 숨기지.
 
 “재식이도 그냥 봐줘. 고등학교 내내 너한테 성적 밀리다 의대 갔는데. 잘난 척 나올 수밖에 없지.”
 “재식이라. 법대라도 들어가야 놈 앞에서 고개 들고 다니려나?”
 “할 수 있을 거야. 삼수해서 설법 들어가면 늦은 것도 아니라는데, 재수야 뭐.”
 “서울대라······.”
 “나 동기 중에도 반수하고 서울대 간다고 학교 나가는 애들 되게 많았어.”
 “그래······.”
 
 대입. 반수. 서울대. 한때는 내 앞에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멀어진 이야기.
 아니 대학 자체가 어쩌면······.
 
 “진혁아.”
 “응······?”
 “너 진짜 별일 없지?”
 “······병찬아.”
 “어.”
 “군대 안 가면 안 되냐?”
 “왜······?”
 “오늘 너 보니까 너무 좋아서.”
 “이 새끼 뭐 있네.”
 
 마음이 무너진다.
 특히 병찬이 앞에서는 내 모든 것을 드러낼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냥. 너 없으면 재식이 날뛰는 거 싫어서······ 고대생이라도 있어야 면이 살지 않겠냐.”
 “감수해. 싫은 것도 부딪히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잖아.”
 “싫은 것도 부딪쳐야 한다라······.”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어 말했다.
 
 “그냥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누구? 너 누구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
 “말하면 죽여 줄래?”
 “누군데?”
 “······나.”
 “미친놈. 오랜만에 지랄이네.”
 “아······ 그냥 다 같이 죽어 버리면 좋겠다······.”
 “이 새끼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지?”
 “그렇지?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건 아니겠지?”
 “아니. 한 방에 다 같이 죽는 방법이 어딨냐고.”
 “그 얘기였냐?”
 “핵폭탄? 이미 미국이나 유럽 중동 부자들은 벙커 다 만들어 놨을걸? 해일? 아니야. 지진? 그것도 아니야. 누군가는 살아.”
 “우와 그렇게 따지니까 다 죽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데? 기근은?”
 “모르냐?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거?”
 “알지······ 잘 알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알지. 세상에 정말 무서운 인간들 많다는 거 심각하게 알고 있지.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 지구가 쪼개지지 않는 한 다 살게 돼 있어.”
 “지구가 쪼개지지 않는 한이라······.”
 
 어떻게든 살아남는 건가?
 다들 그렇게 강한가?
 대체 무슨 수로?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
 
 오랜만에 느끼는 다정한 말투에 터지는 진심을 누르지 못했다.
 
 “병찬아······ 너. 혹시 돈 좀 있으면······.”
 “어?”
 
 아차······.
 
 “돈?”
 “······아니. 돈 있음 좀 주고 가라고. 군대에선 돈 쓸 일 없잖아.”
 “미친놈.”
 “하하하!”
 
 다급하게 농담인 듯 웃어 보지만, 친구 녀석의 얼굴은 자못 심각하게 변해 버렸다.
 
 “얼마나 필요한데?”
 “글쎄다. 1억?”
 “미안한데 내가 지난주 뉴욕에 땅 좀 사느라 1억이 지금 없는데.”
 “하하하 미친놈. 1억으로 뉴욕에 무슨 땅을 산다고.”
 
 다행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게 우리는 한참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좋아도, 낼모레면 나라의 부름을 받아 가는 친군데, 적당히 보내 줘야지.
 
 “그만 들어가라. 너무 늦었네.”
 “그래. 벌써 시간이······ 어이구야. 간다.”
 
 손을 들어 멀어지는 친구에게 말했다.
 
 “병찬아.”
 “왜?”
 “······부모님한테 잘해라.”
 “당연하지. 들어가.”
 “응.”
 
 진짜 잘해 드려라.
 후회하지 말고.
 
 한참을 녀석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병원으로 돌아갔다.
 
 ***
 
 “아빠. 일어나셔.”
 “으으윽······.”
 
 나가 있던 사이 또 대변을 보신 거 같다.
 빨리 씻겨 드려야 하는데, 힘드셨겠다.
 
 “······씻자. 씻고 주무시자.”
 
 실어증. 사지 마비. 뇌졸중이다.
 아버지를 힘겹게 부축해 샤워를 해 드리고 새 환자복을 받아 오는 길이었다.
 간호사님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으셨다.
 
 “저기. 진혁 학생.”
 “네. 간호사님.”
 “아버님. 수납이 밀려 있다고 이야기가 왔거든?”
 “아. 네······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
 
 아버지를 병실에 눕혀 드리고 간호사들을 다시 볼까 후다닥 몸을 낮춰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통과해 병원을 빠져나왔다.
 수납이 벌써······.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뭐 일할 거 있나 찾아볼까?
 야간을 한번 뛰어? 아니야. 오늘은 쉬어야 돼.
 술까지 마셨는데, 오늘까지 뛰면 진짜 기절할지 몰라.
 그래도 돈 걱정에 병원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버지 병실 창문을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솟구치는 걸 참기 어려웠다.
 
 “후우.”
 
 울지 말자. 지금은 울 때가 아니잖아.
 울 시간에도 돈을 마련해야지. 울면 돈이 나와 떡이 나와.
 그런데 어떻게. 대체 어떻게······.
 평생을 부잣집 도련님으로 대우받으며 자라 온 내가.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빈곤과 결핍이라는 걸 사전에서만 보았던 내가.
 아침에 밤까지 알바 두 탕으로 뛰어도 어쩔 수 없는 이 현실에.
 버는 건 다 병원비에 들이붓는 가운데, 무슨 수로 더 돈을 벌라는 말인지······.
 
 “······.”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버겁다.
 건강하던 아버지의 저런 모습도 매일을 옥죄여 온다.
 정말 한계다. 이제 더 할 수가 없어.
 이렇게 살 바엔 그냥 아버지랑 같이······.
 
 눈을 질끈 감으며 심장 저 아래서 솟구치는 어두운 마음을 억누르는데.
 
 부스럭. 부스럭.
 
 멀지 않은 곳에서, 10년도 넘게 들었던 발소리가 나의 고개를 꺾어 버렸다.
 
 “야······.”
 “······.”
 
 하여튼 이 새끼. 진짜 뭐 하나 숨길 수 없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모습으로 좌절해 있는데.
 옆으로 친구가 다가와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아저씨 왜 저러셔······?”
 “후우 병찬아······”
 “새끼야······ 이거 다 뭔데?”
 “야. 나 진짜 너무 힘들어······ 죽고 싶어······.”
 
 친구의 어깨에 기대자, 그간의 힘겨운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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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안녕하세요. [21세기 갑부]를 쓴 김상준입니다. 개정판 버젼에는 제가 무리하게 집어넣은 설정이 있어 그 부분을 거둬내면서 개정판이 새로 나왔습니다. 내용상 전 과 바뀐 건 없습니다. 21세기 갑부를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10.1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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