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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명품 패션 재벌

1화&프롤로그 - 가자! 1995년으로

2021.08.03 조회 332 추천 1


 “한국 패션 브랜드 회사로는 처음입니다. 세계 패션 브랜드 가치 8위로 선정된 주식회사 다다름패션 한영웅 대표님을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반갑습니다.”
 MC 박애리가 몇 가지 사전 준비된 질문을 시작했다.
 “패션 사업을 하고 계셔서 그런가요? 오늘 입은 의상도 대표님 외모와 정말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TV 첫 출연이라 신경을 좀 썼는데, 괜찮나요?”
 “입고 계신 의상이나 외모, 모두 40대 후반 나이로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정말 멋진걸요. 비결이 따로 있으신가요? 대표님.”
 “글쎄요······ 늘 패션 사업을 생각하고 빠져 있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요?”
 “후훗. 그렇군요. 패션에 빠져 있는 한영웅 대표님. 다른 질문 드려 볼까요? 동대문에서 시작한 사업을 세계적인 위치까지 올린 노하우. 그걸 많은 분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역시 이십여 년을 넘게 사업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으셨겠죠. 그 얘기는 중간중간 나누도록 하구요. 먼저 다다름패션의 대표 브랜드인 사르템에 대해서 얘기 나눌까요?”
 박애리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내 브랜드 이야기로 넘겼다. 유럽 브랜드가 주축인 하이엔드급 브랜드 시장에 당당히 얼굴을 내민 사르템. 내가 만든 대한민국 브랜드다. 이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노력한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한국 브랜드로? 처음에는 모두 비웃었다. 불가능한 도전이라고. 하지만 점점 떠오르는 내 브랜드 가치에 모두가 놀랐다. 세계 4대 패션 위크에서 내게 VIP 초대장을 보냈고, 지난달에는 패션 전문지 <보그>와 BBC사가 공동 진행한 조사에서 당당히 브랜드 가치 8위라는 타이틀을 쥐었다.
 이름만 들어도 환호하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브랜드가 여덟 개. 그리고 엄청난 자본력으로 몇 년 전 진입한 미국 브랜드 한 개와 어깨를 당당히 맞댄 것이다.
 브랜드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중에 박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최근 다국적 패션 그룹인 LOX 그룹에서 다다름패션 주식과 사르템 브랜드를 인수하겠다는 기사를 냈는데요. 이건 사실인가요? 대표님.”
 “아닙니다. 그쪽에서 우리 브랜드를 탐낸다고 들었지만, 제 브랜드를 그곳에 넘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LOX 패션 그룹. 패션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만 들으면 아는 명품 브랜드를 몇 개씩이나 보유하고, 핫한 디자이너 브랜드와 내셔널 브랜드 수십 개를 가진 곳. 세계 최대 패션 그룹이다. 그야말로 공룡 집단.
 처음 LOX 그룹에서 제안이 왔을 때는 마음이 혹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패션 브랜드 그룹인데,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LOX 그룹이 어떻게 기업을 인수하고 폐기처분하는지 뒷얘기를 알게 되면서 거절 의사를 밝혔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적대적인 인수는 기본이고. 더러운 행태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었다. 인수당한 업체 대표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쫓겨났다. 대표뿐 아니라 핵심 임원을 갈아치우고, 직원 절반을 회사 효율성 증대라는 명목으로 내쫓은 곳이다.
 거기에 안 좋은 소문까지 더해져 있었다.
 
 * * *
 
 슈아악!
 손바닥이 겨우 빠져 나갈 창문 틈으로 엄청난 물이 홍수처럼 터져 들어온다.
 안전벨트를 풀어보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푸확! 썩을!”
 ‘정신차려! 한영웅! 정신차리자!’
 벨트는 풀었지만, 뿌연 이끼에 가려진 시야.
 티딕티딕.
 아무리 창문 버튼을 눌러도 시동이 꺼져 버린 차는 대답이 없다.
 발버둥을 쳐 봐도 꿈쩍도 않는다.
 꾸르륵!
 ‘왜!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거야!’
 
 * * *
 
 일본과 중국은 물론이고 콧대 높던 유럽 백화점에서도 앞 다투어 내 브랜드를 찾았다. 이제 꽃길만 걸을 것 같던 내게 청천병력 같은 일이 생겼다.
 “한 대표님.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서 상무만 믿고 갔다 오겠습니다.”
 “민준이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야죠.”
 그때 서성태 상무 그 새끼,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걸 의심했어야 했는데.
 평소 같았다면 한 번 되짚어 봤겠지만······.
 한 달 전 그 날은 정신이 없었다.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후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이 맞겠다.
 아침부터 열이 심하길래 그저 독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내뱉은 말. 난생 처음 들어 보는 병명이었다. 불치병이라고 했다. 수많은 검사, 고작 7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고통이다. 한 달 동안 회사 일은 당연 뒷전이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고, 손잡고 얘기하고······.
 아들은 온갖 치료에 고통만 받다가 내 손을 꼭 잡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행이라도 다니고 하다못해 놀이공원이라도 갈걸······.
 
 * * *
 
 아들은 결국 한 줌 재를 남긴 채 떠났다.
 그리고 오늘 은행에서 받은 전화. 서 상무가 회사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아내분께서 모든 서류를 가지고 같이 오셨어요. 저희도 미심쩍긴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바아알!”
 아무리 나와 관계가 소원해졌대도, 그래도······ 그래도! 아들이 세상 떠나는 날에는 왔어야지!
 그리고 눈이 맞았으면 모텔을 잡아야지, 왜 회사를 잡아먹어!
 상복을 풀지도 못한 채 차에 올랐다.
 액셀을 밟아 터져 나갈 듯 길을 달렸다.
 끼릭. 끼릭.
 브레이크가 먹히지 않는다. 풀린 나사처럼 맥없이 밟혔다.
 쿠콰쾅!
 가드레일을 뚫었다.
 한강이 어서 와, 하고 내 차를 집어 삼킨다.
 
 * * *
 
 숨이 찬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쿠르륵.
 ‘내 사업을, 내 브랜드를 얼마나 고생해서 키웠는데.’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중견기업으로 만들었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늘 한계에 부딪혔었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 한계는 단단한 벽처럼 뚫리지 않았다. 마치 감히 너 따위가! 하고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벽을 허물고 당당히 정상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런 나를, 세상이 시샘이라도 한 걸까? 오늘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차라리 잘된 건가? 상복을 수의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오늘 죽으면 아들하고 같이 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겠다. 못다 준 부정을 저곳에서라도 쏟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 선루프 위로 한강을 내리 비추는 햇살이 들어온다.
 배가 불러 온다. 그동안 낸 세금으로 한강물 많이 먹고 갑니다.
 눈이 스륵 감겨 온다.
 [한영웅~]
 머릿속을 울리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
 벌써 죽었나?
 아니면 내가 미친 건가. 환청?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움직임을 따라 꽉 찬 한강물이 뿌연 이끼를 뿌려 댔다.
 [그렇게 죽으려고?]
 “꾸르륵푸르륵?”
 ‘누구예요? 무슨 장난입니까?’
 [이게 장난으로 보여?]
 촤르륵!
 순간 눈앞에 영사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어렸을 적 내 모습.
 아이가 태어나고.
 아장아장 걷는 아들을 보며 손뼉 치며 좋아하던 나.
 즐거웠던 기억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병원에서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순간까지.
 남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비밀까지도.
 정신이 번쩍 든다.
 [어이?]
 “······.”
 [이봐. 내 말이 안 들려? 신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면 쓰나.]
 “꾸르륵푸롸락”
 ‘···신? 무슨 말도 안 되는! 진짜 신이라면.’
 [난 예로부터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업의 신. 여행과 학예의 신.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헤르메스!]
 “콰르릅커허헙”
 ‘썩을! 말 엄청 많네. 신이면 이 상황을 어떻게 좀 해 보든지!’
 [어허~ 말이 거칠군. 내가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의 신이래도 말이야. 푸하하.]
 꾸르륵!
 [어이! 나를 만난 건 엄청난 복이라고! 한영웅. 너에게 새로운 인생을 줄 수 있으니까. 어때?]
 새로운 인생이라니. 상복을 수의로 삼으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삶에 대한 의지가.
 [너를 과거의 시간으로 보내줄게.]
 “후르릅콰르륵?”
 ‘과거? 그런 게 가능해요?’
 [물론! 난 경계를 넘나드는 신 헤르메스! 푸하하하!]
 어이. 나 진짜 죽는다고. 과거로 보내든. 한강 위로 건져 올리든. 더 이상은 무리라고!
 [어때? 내 제안에 동의하나?]
 “커륵!”
 ‘그래!’
 
 * * *
 
 하얀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끝을 알 수 없는 무색. 무취의 공간. 오직 빛만 가득한 이곳에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아들과 한 마지막 약속. 잊은 건 아니겠지?]
 “마지막 약속······.”
 
 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내 손을 꼭 잡은 채 작은 입으로 연신 얘기했다.
 “아빠가 최고야. TV에 아빠 나온 거 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들의 말이 오히려 내 마음을 밉게 만들었다. 아들은 이름 모를 병에 걸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방송국에 나가 히히덕거린 내 모습이 겹쳐졌다.
 울음이 터졌다. 절대 아들 앞에서 보이지 않으려고 참아 왔던 눈물이. 한번 샘이 터지자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 쏟아졌다. 그런 내 얼굴을 아들이 작은 손바닥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조막만한 부드러움이 나를 위로하듯 쓸어내렸다.
 “아빠. 울지 마. 뚝!”
 “어,어······ 뚝. 헝, 어허허헝.”
 “아빠.”
 “어흐허헝. 어, 어.”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줘.”
 “그래. 뭐든, 뭐든! 해 주께. 말만 해.”
 “아빠가 지구에서 최고가 되는 거.”
 “응?”
 “아빠는 이미 잘 생겼으니까. 얼굴은 일등!”
 아들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 어른들은 뭘 해야 일등이야? 지호는 돈이라고 하던데, 맞아? 그런 거 같기는 한데, 나는 대통령이라고 했거든.”
 아들의 유치원 단짝 친구가 돈이라고 했단다. 요즘 얘들이 빠른 건 알지만, 그래도 일곱 살 아이 입에서 돈이 최고라니. 나는 대답 대신 아들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호가 그러는데 돈은 안 바뀌는데, 대통령은 바뀐대. 맞아? 그럼 아무래도 돈이겠지?”
 “글쎄··· 그것보다 무슨.”
 “아빠, 그럼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돼야 해! 알았지? 꼭! 약속!”
 “그, 그게 무슨 소원이야.”
 게임기나 장난감을 사 달라고······ 그런 걸 얘기해 달라고. 일곱 살 아이 소원이 무슨 이런 거냐고.
 “할 수 있어? 우리 아빠는 TV에도 나오고 엄청 먼 나라에서도 찾는 사람이니까.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 그럼, 할 수 있어. 근데 무슨 소원이 그래? 내일 아빠랑 놀이공원에 갈까? 아니면 네가 좋아하는······.”
 
 [아들 하나는 잘 뒀어. 크게 될 아이였는데, 참 안타까운 영혼이야.]
 “그게 무슨.”
 뒷말을 삼키는 듯한 신의 목소리에 의문이 들었다.
 [욕심 많은 인간들 때문에 네 아들이 안타깝게 제 운명을 끝까지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지.]
 “그 말은···.”
 대답 대신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성태 씨 괜찮겠어요? 혹시 누가 확인이라도 하면······.”
 “괜찮습니다. 전문가 솜씨예요. 전문가. 흐흐.”
 “호홍, 그럼 우리 여기 좀 들어갔다 갈까요?”
 차가 꽉 들어찬 모텔로 남녀 둘이 들어갔다.
 남자의 속마음이 그대로 들렸다.
 “한영웅 녀석 회사에서 떼어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냐. 크크. 이제 그놈은 제 아들 따라서 저세상으로 갈 테고, 이년하고도 바이바이구만. LOX에서 받을 돈만 생각하면. 흐흐. 오늘 마지막으로 힘껏 눌러 주마.”
 
 “서어어어어성태애애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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