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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재벌가를 먹다.

1화

2021.08.05 조회 1,419 추천 6


 1장 떨어지라는 혜성은 안 떨어지고...
 
 
 “김재호 씨, 재검 결과도 같네요. 폐암 4기입니다. 당장 입원하셔서 항암치료를······.”
 쓸데없는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걸 물었다.
 “치료 받으면 살 가능성이 있습니까?”
 “음. 아마 어렵겠지요.”
 “수명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항암치료 받으면 6개월, 그렇지 않으면 3개월을 넘기기 힘들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니, 입원은······?”
 당황한 의사를 무시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남은 배터리 수명이 고작 3개월이고, 충전해봐야 6개월이라는데 이런 데서 낭비할 시간이 없지.’
 대학병원답게 로비에는 밤 9시에도 사람이 많았다. 초진 때 이미 들은 얘기라 마음의 각오는 하고 왔지만 막상 빼도 박도 못하는 사형선고를 들으니 기분이 꿀꿀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 서둘러 로비를 가로질렀다.
 ‘나도 참, 하루에 한 갑씩 20년 넘게 피워온 덕분에 폐암까지 걸렸으면서 뭐가 좋다고 또 담배냐. 하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담배나 실컷 피우고 죽자.’
 정문을 나서기 전에 무심코 대기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대형 사고라도 났나? 하나같이 시선 고정이네.’
 “시청자 여러분들, 맥길 혜성을 보시려면 얼른 밖으로 나가셔야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뒤인 9시 10분경에 혜성이 우리나라를 지나갑니다. 심보라 기자, 맥길 혜성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화면이 야외로 전환되었다. 추운 날씨에 얼굴이 빨간 여기자가 말했다.
 “발견자 맥길 씨의 이름을 딴 이 혜성은 관측 사상 가장 밝은 혜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인 2016년에 못 보시면 9000년 후에나 다시 볼 수 있으니 빨리 가족과 함께 가까운 공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병원에 좋은 일로 올 턱이 없는 로비의 환자 혹은 보호자들은 앵커와 기자의 호들갑에 심드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9000년은커녕 2017년까지도 못 사는 마당에 혜성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정문을 나와 병원 건물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병원 부지 전체가 금연이었지만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니 딱 한 대 정도는 이해해주겠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콜록, 콜록.”
 한 반 년 전부터 담배를 피울 때마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때 무시하지 않고 담배를 끊었더라면 조금 나았으려나. 아니다. 20년 동안 혹사당한 폐가 몇 달 끊는다고 확 좋아질 리가 없지.
 ‘반 년 전이 아니라 한 20년 전인 1996년으로 돌아가면 모를까.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담배를 배우지 않았다면 적어도 폐암으로 죽지는 않겠지.’
 뭐 폐암으로 죽지 않는다고 해도 10년 넘게 다니던 출판사에서 잘리고 1년 가까이 백수 신세이니 곧 굶어죽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이래나 저래나 나, 김재호는 죽을 팔자였던 것이다.
 ‘아니야. 96년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길을 갈 수 있었을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막을 수도 있었을 테고.’
 IMF 때 운영하던 삐삐가게가 망하고 쫓기듯이 이사 간 낡은 집에서 가스 누출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자 담배 맛이 썼다. 그날 집에 일찍 귀가해 보일러만 껐다면 아버지는 지금도 곁에 계실 텐데.
 ‘그것뿐만이 아냐. 아버지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학 중퇴하고 온갖 알바 하면서 시름을 잊으려고 담배에 손을 댔으니, 그때로만 돌아가면 나도 담배를 아예 배우지 않았겠지. 그럼 아버지도 살고 나도 사는 거잖아. 진짜 96년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타임머신을 믿는 어린애 같은 망상에 불과하다. 담배를 땅에 던지고 발로 짓밟을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떨어지는 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었지. 나도 한 번 해볼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려다 피식 웃었다. 상황이 급해지니까 별 허황된 얘기에 빠져든다 싶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사이비종교에 홀리지. 고개를 땅에 처박고 여기를 떠나려는데 왠지 모를 아쉬움에 발길이 멎었다.
 ‘밑져야 본전인데 해보자. 안 되면 어때. 어차피 죽을 거.’
 결심한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을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혜성······ 이 아니라 뭔가 검은 물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저게 뭐지?”
 낙하하는 물체는 꽤 커다랬다. 쌀가마니보다 커서 웬만한 성인 남성의 크기 정도는 돼 보였다. 그런데 잠깐, 저거 내 쪽으로 떨어지고 있잖아!
 “으아아아아아아악!”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중력의 가속을 받은 물체의 낙하 속도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막 한 발을 옆으로 내딛으려 할 때, 쿵!
 머리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찾아왔다!
 잠시 후,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내 곁에는 피투성이의 40대 남자가 팔다리가 이리저리 꺾인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얼핏 봐도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으으으으······.”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점차 의식이 아득해졌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냐. 폐암 말기도 모자라서 투신자살한 사람과 부딪쳐 죽다니······.’
 그치만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며 3개월 더 사는 것보다 고통 없이 한 방에 가는 게······.
 
 * * *
 
 “헉!”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앗! 억! 으앗!”
 나는 연신 비명을 터뜨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온몸을 만져보았다. 팬티만 빼고 홀딱 벗은 몸은 위아래 모두 방금 병원 꼭대기에서 추락한 사람과 부딪친 것치고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이마를 만져보니 척척한 것이 묻어나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역시 피가 낭자하······지 않고 그냥 땀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 모든 게 꿈이었나? 손등으로 땀을 닦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네. 하하.
 ‘아니야! 모든 게 꿈일 리가 없잖아. 한 달 전에 폐암 진단을 받고, 오늘 재검 결과까지 받은 건 진짜인데.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을 확인했다고. 아! 그럼 폐암까지는 사실이고 투신자살한 남자랑 부딪친 것만 꿈이었나 보다.’
 올바른 결론을 내리자 살짝 안심이 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죽을 때가 되니까 불안했나. 별 이상한 꿈을 다 꿨네.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을 리가······ 있구나. 쩝, 사고사는 아니라도 어차피 세 달 있다가 폐암으로 죽을 테니.’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떠오르자 곧바로 기분이 다시 착잡해졌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8평 단칸방을 둘러보았다. 죽는 날까지 20년 넘게 살아온 이 골방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앗!
 이 방은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내 허름한 단칸방이 아니었다!
 큼직큼직한 TV와 냉장고, 에어컨 등은 윤이 반짝반짝 났고, 옷장과 테이블을 비롯해 널찍한 방에 비치된 모든 가구는 화려하고 세련됐다.
 ‘이건 꼭 호텔방 같잖아? 그것도 3성 정도가 아니라 방송에서만 본 5성급 호텔.’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확실히 고급 호텔방 안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깔고 앉은 것도 사시사철 골방 안에 깔아놓는 누런 담뱃진에 찌든 이불이 아니라, 폭신폭신한 거위털 이불에 쿠션이 끝내주는 킹사이즈 침대였다.
 ‘폐암 말기 선고 받고 충동적으로 호텔에 왔을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호사를 누려보려고?’
 그렇다면 체크인한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억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 술을 마시고 만취했었나? 나는 배를 쓰다듬어보았다.
 ‘숙취 같은 건 없는데? 아니, 숙취는커녕 컨디션이 너무 좋아. 반 년 전부터는 폐 근처가 칼에 찔린 듯이 아플 때가 많아서 자주 배를 부여잡고 뒹굴곤 했었지. 근데 지금은 날아갈 듯이 몸이 가볍잖아.’
 마치 여우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담뱃갑과 크리스털 재떨이가 보였다. 버릇처럼 한 대 피우고 찬찬히 생각해보려고 담뱃갑을 집었다. 나는 막 담배 한 개비를 꺼낸 손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꼭 피워야 할까? 담배 때문에 그렇게 인생 망쳐놓고도.’
 왠지 허연 담배가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죽는 날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그래봐야 석 달이지만 그동안만이라도 나라는 인간의 의지를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잘 가라.”
 꺼낸 담배 한 개비를 재떨이에 거칠게 눌러 부서뜨리고 담뱃갑은 꽉 움켜줘서 쓰레기뭉치를 만들었다. 기분 탓인지 담뱃갑이 비명을 지르는 듯해 괜히 흐뭇했다.
 “선우 오빠, 안 씻어요?”
 “헉!”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고 딱 두 배 더 놀랐다. 흰 가운을 걸친 날씬한 여자가 침대 오른쪽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여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흰 수건으로 싸매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가 나온 곳은 욕실이고, 여자는 방금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이, 이 여자는 대체 누구이지? 나, 난 여친도 없는데.’
 여자가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근처에서 본 여자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녀였다. 갓 10대를 지난 듯 동안의 얼굴에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가 싱그럽게 느껴졌다.
 ‘우와, 어마어마한 미인이네. 이렇게 예쁜 여자는 10미터 안쪽에서 본 적도 없어. 하물며 이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문득 자신의 상태를 떠올리자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나는 이불을 홱 끌어 올려 드러난 나체를 최대한 가렸다. 여자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이미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아니, 알긴 알지만 실은 모르기도 하고. 아니, 모르는 것에 가까운가 하면 알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알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모르겠는 게 여자이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설마 또 약 했어요?”
 어이없다는 듯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두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화장을 지워 얼핏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찡그린 표정은 분명 낯이 익다. 이건 분명 그녀의 시그니처 표정.
 “아, 알 것 같아요. 확실히 당신은······.”
 그래, 나는 확실히 그녀를 알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최고의 신예로 화려하게 데뷔한 은막의 별, 성형외과 의사도 얼굴의 비례가 완벽에 가깝다고 혀를 내두른 미녀 배우, 국민 여동생에서 국민 누나로 성장한 정희연이 아닌가!
 “저, 정희연 씨······.”
 “네, 맞아요. 저 정희연이에요. 사인해드릴까요?”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 정희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다가 불현듯 생각했다.
 ‘그런데 왜 정희연이 나랑 호텔방에? 그것도 이렇게 헐벗은 상태로?’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멍해져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마침 방 중앙에 놓인 원목 테이블에 가까이 있던 정희연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오빠, 전화 왔어요.”
 무심코 정희연이 가져다준 휴대폰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이, 이, 이 휴대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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