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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낯익은 행성

2021.08.18 조회 542 추천 7


 정신을 차리자 어쩐지 낯익은 행성이었다.
 
 ‘......’
 
 아마도 잭이 그랬을 것이다. 착륙이 아닌 추락으로 결정이 나자, 정신을 잃은 나를 사출좌석과 함께 선체 밖으로 튕겨 버렸겠지.
 
 추락 중에 하필 낙하산 캐노피가 나뭇가지에 걸렸고, 나는 마치 그네를 타듯 사출좌석에 앉은 채로 불시착한 행성에서의 생존을 염려하고 있었다.
 
 무방비로, 그것도 홀로, 불시착한 행성에서 생존할 확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로에 수렴한다.
 
 지독히도 운이 좋아 호흡과 혈액순환 같은 생체 활동에 지장이 없는 행성에 떨어졌다 치자. 당장은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곧 토착종들의 공격. 혹은 세균 감염에 노출될 것이다.
 
 억만분의 1의 확률로 위협적인 토착 생물도, 치명적인 세균도 없는 행성에 떨어지는 바람에, 앞서 위험요소들을 극복했다 하더라도 결국엔 보급이 동나는 시점부터 서서히 생존이 저지될 것이다.
 
 일단은 운이 좋았다. 특별한 장구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행성에 떨어진 거 같았다.
 
 호흡도 편안했고, 장기와 관절에 중력 부담도 느껴지지 않았다. 춥긴 하지만 별도의 체온 유지장치가 필요한 수준은 아니다.
 
 마치, 1지구가 이럴까 싶을 정도다. 인류의 고향 행성 1지구.
 
 응?
 
 아직 항성으로 추정되는 별이 완전히 뜨지 않아 시야는 어두웠다. 내키진 않지만, 인공 안구를 작동시켰다. 시야가 밝아지는 동시에 저주파 진동이 일었다.
 
 나는 불쾌한 저주파 진동을 애써 무시하고 행성을 살폈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항성. 대기복사로 인해 서서히 붉게 물드는 하늘. 대지를 덮고 있는 황금빛 식물과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넘실거리는 강줄기.
 
 지금 풍경은 연맹 라이브러리에서 본 1지구의 모습과 흡사하다. 다만, 이론적으로 이런 강과 숲을 가진 지구형 행성이야 우주에 널리고 널렸다. 마찬가지 이론적으로 지구형이 아닌 행성은 수억 배나 더 널렸고.
 
 그때 저 멀리, 수목들 사이로 삐쭉 솟은 도형이 하나 보였다. 주변의 수목들이 만들어내는 무질서한 선과 달리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반듯한 도형.
 
 나는 왼쪽 인공 안구를 통해 도형을 확대했다. 주변과 뚜렷한 경계를 이루는 인위적인 도형. 분명 인공적인 건축물이었다.
 
 저런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이 행성에 지능을 가진 개체가 살고 있다는 뜻.
 
 시선을 돌리는 중에 건축물에 들러붙은 문자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강변 추어탕]
 
 얼씨구?
 
 우주에 널리고 널린 수십억 개의 행성 중에 하필 1지구? 게다가 한글?
 
 온갖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우주다. 그러니 내가 고향 행성, 그것도 하필 내 유전자의 뿌리. 즉 조상님들 나라에 불시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법은 없는데...’
 
 일단 지금 상황부터 정리하자. 내가 지금 이런 사색을 즐기는 이유가 사출좌석 안전벨트에 묶여서 꼼짝도 못 하기 때문이다.
 
 우주선 도약기도 프린터로 찍어내는 마당에 고작 벨트 버클 하나를 제대로 못 만드나.
 
 빌어먹을 연맹 놈들.
 
 잭과 통신이라도 되면 ‘해피’를 불러 이 상황을 벗어날 궁리라도 해 볼 텐데. 내 왼쪽 인공 안구에 이식된 잭과의 통신 모듈이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의자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누구 없소?!!!!”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풀숲에서 기척이 일었다. 노란 갈대들 사이로 녹색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토착종인가?’
 
 이어서 녹색 동물 몇 마리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다소 왜소한 체구. 저 유난히 커다란 대갈통과 대갈통에 비해 기형적으로 가는 팔다리.
 
 ‘역시, 1지구엔 사람은 없나?’
 
 이미 1지구는 괴생명체들에 점령당해 인류는 종말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인류 역시 1지구의 수만 종을 멸종시켰듯이. 인류 또한 다른 종에게 멸종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주개척연맹이 창설되어 온 우주를 헤집고 다니는 이유가 그것이니까.
 
 “......”
 
 신체에 제약이 생기면 두뇌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나는 어쩌다 1지구로 온 거지? 우주에선 불가능하다 느껴지는 일들이 시시때때로 일어난다. 그게 수억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해도.
 
 그 수억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날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건가?
 
 단순한 확률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면 고향에서 뒈지라는 신의 배려인가?
 
 항성.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뜨고 있었다. 만약 여기가 진짜 1지구라면 1태양이리라.
 
 항성이 뜨는데도 쌀쌀하다. 이런 대기 온도에 신체가 구속된 채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발아래는 녹색 괴수들이 아장거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감처럼 익어 떨어지기라도 바라는 듯했다.
 
 ‘슈트를 입고 있었어야 했는데.’
 
 연맹 과학기술의 정수가 재료기술이라면 재료기술의 정수는 전투 슈트라고 할 수 있다.
 
 전투복이라 활동에는 큰 지장이 없어 선내에서도 착용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G회의 중이라 갑판복을 입고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오만 충격을 버클에 줘봤지만, 풀리지 않았다.
 
 ‘젠장.’
 
 나에게 적용된 강화 신체도 버클 하나를 당해내질 못했다. 도대체 무슨 재료를 썼길래. 날붙이라도 하나 있으면 어떻게 벨트라도 끊어 볼 텐데.
 
 “시발!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연맹력으로만 100년이 넘는 시간을 피바람 부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나다. 점액층이 무릎까지 빠질 만큼 거대한 지렁이와 싸울 때도, 엄지발톱만 한 드래곤 수천 마리를 하나하나 칼로 베어가며 싸우고도 살아남은 나다.
 
 그런 내가 고향별까지 와서 사출의자 벨트가 안 풀려 죽게 생겼다니.
 
 “짹!!!!”
 
 AI의 이름을 외쳤다. 당연히 육성으로 교신될 리가 없다.
 
 “젠장!”
 
 나는 짜증과 답답함이 뒤섞여 체면도 벗어던지고 의자에 앉아 마치 아기 보채듯 온몸을 구르고 비틀어댔다.
 
 투닥투닥! 투다다닥! 툭.
 
 이리저리 몸을 휘젓던 와중에 낙하산이 나무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켁!
 
 그 바람에 아래 있던 녹색 한 마리가 사출좌석에 깔렸다.
 
 곧이어 캐노피가 아래로 떨어지며 나와 녹색 놈들을 덮쳤다.
 
 “어이쿠”
 
 나는 잽싸게 캐노피 천을 들춰내고 시야를 확보했다. 녹색 놈들은 아직 캐노피를 뒤집어쓰고 헤매고 있었다. 한 쪽 방향을 잡고 그쪽으로 벗겨내야 하거늘 특수수지로 만들어진 캐노피를 사방팔방 잡아당기고 있었다.
 
 녹색 놈들의 지능 덕분에 시간이야 조금 벌었지만, 곧 의자에 묶인 채 녹색 괴물 3마리에게 산채로 잡아 먹히게 생겼다.
 
 ‘육식을 즐기는 종만 아니라면 좋겠는데...’
 
 아까 본 놈들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녹색의 척추동물.
 
 팔다리가 각각 한 쌍씩.
 
 꼬리는 없다.
 
 즉 직립보행 사지(四肢)형 개체.
 
 저런 적의 공격 패턴은 예측하기 수월하다. 외형이 인간과 가장 닮은 탓이다.
 
 적어도 시야 밖의 꼬리가 내 발목을 잡아채거나 대가리에 달린 볏이 갑자기 내 왼쪽 눈알을 찌르진 않을 테니까.
 
 이어서 놈들이 착용하고 있는 날붙이들, 목걸이와 반지 귀걸이 같은 장신구와 무기.
 
 그리고 총 4마리.
 
 지능을 가진 개체가 무리를 짓고 있다는 말은 계급이 있다는 뜻이다.
 
 우두머리부터 처리하면 매우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있다.
 
 수적으로 열세인 내가 전투를 풀어나가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구도라 할 수 있다.
 
 이 빌어먹을 벨트만 풀린다면 말이다.
 
 ‘젠장.’
 
 마침내 한 마리가 캐노피에서 빠져나오더니 곧이어 나머지 두 놈도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먼저 놈들의 식성부터 파악했다. 잘 발달 된 하관과 씰룩이는 턱 근육. 바깥으로 돋아 난 송곳니를 보아하니 채식을 즐길 것 같진 않다.
 
 ‘고향 행성에서 죽으라는 신의 뜻인가.’
 
 신에게 욕을 한 사발 퍼부으려는 그때.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그 바람을 타고 낙하산 캐노피가 슬쩍 날렸고 마침 그 아래 단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녹색 놈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단도를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녹색과 나의 거리는 약 5미터.
 
 나와 대치 중인 놈들의 팔과 다리는 몸통에 비해 유난히 앙상하다.
 
 나처럼 강화 신체를 이식한 게 아니라면 저 정도 근육에 깃들 수 있는 근력은 한계가 있다.
 
 놈들은 나를 향해 순간적인 도약을 할 근력은 없다.
 
 나쁘지 않은 상황.
 
 슬그머니 단도를 쥐며 칼의 재료와 칼날의 연마 정도를 체크했다.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벨트를 자르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연맹놈들이 벨트 소재를 어처구니없는 재료를 쓰지만 않았다면.
 
 “후...”
 
 최대한 빠른 동작으로 벨트 두 개를 잘라 내고, 놈들의 공격에 대응해야 한다.
 
 슈트만 입고 있었으면 일도 아닐 일이, 일이 되었다.
 
 적은 약해 보이지만 혼자 여럿을 상대할 때 방심은 금물이다.
 
 게다가 개활지.
 
 다수를 점한 놈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조건.
 
 어쩌면 나 또한 다칠 것을 각오해야 승산이 있다. 강화 신체가 있기는 하나 놈들도 보기와 다를 수 있으니까.
 
 놈들이 눈빛을 주고받는다.
 
 곧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지식과 경험을 통해 상대를 분석하고 파훼법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전투에서 최선은 선빵이다. 놈들도 이를 아는지 이내 거리를 좁히며 들어왔다.
 
 ‘벨트가 잘려야 하는데...’
 
 나는 단검으로 벨트를 그었다. 다행히.
 
 그때 녹색 한 놈의 몽둥이가 시야를 가리며 다가왔다. 나는 몸을 비틀어 첫 번째 놈의 몽둥이를 피했다.
 
 이어 두 번째 벨트를 마저 잘라 낸 다음 일어서서 첫 번째 놈의 머리를 향해 킥을 박아 넣었다.
 
 -빠직
 
 두개골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고, 내가 킥을 날려 등 뒤가 보이자 곧바로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놈들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제법 손발을 맞춰본 느낌이다.
 
 앞선 놈이 조공. 다시 말해 미끼였다면, 주공은 이 두 녀석이다.
 
 아무리 허접한 적일지라도 조직된 협공이 들어오면 피해를 면하긴 어렵다.
 
 나는 앞선 놈에게 킥을 날리느라 이미 몸이 돌아가 있는 상황.
 
 그렇다면, 몽둥이를 든 녀석에게.
 
 육참
 왼쪽 허벅지를 내어주고.
 
 아가리를 벌리고 점프해오는 놈의 관자놀이에
 
 골단
 단도를 박아 넣는다.
 
 내 왼쪽 허벅지를 공격했던 놈과 1대 1로 대치한 상황.
 
 이런 구도는 예상치 못했는지 놈의 움직임이 더디다. 놈이 뒤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냅다 줄행랑을 놓는다. 하지만 나는 보내줄 생각이 없다.
 
 단순히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놈들은 무리 생활을 하는 지능도 갖춘 놈들이다. 지원군을 부르러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이런 이유로 적을 향한 어설픈 관용 어쭙잖은 자비는 아군에 대한 범죄다.
 
 나는 들고 있던 단도를 놈을 향해 있는 힘껏 투척했다.
 
 -퍽!
 
 놈은 후두골에 뿔을 달고 즉사했다.
 
 적을 향한 내 관용과 자비는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
 
 그것뿐이다.
 
 싱거운 싸움임에도 유난히 고양되었다. 노 슈트 육박전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겨우 이런 전투에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직 허벅지에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드레날린 분비가 끝날 때쯤이면 통증은 조금 있겠지만. 이정도면 개척 행성에서의 다구리 전 치고는 예상을 웃도는 전과다.
 
 “...”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주의 온갖 것들과 싸웠고 10만 유닛을 이끄는 극동은하 사령관까지 오른 나다.
 
 고작 이런 잔챙이 셋을 해치웠다고 고양되어 있다니. 스스로 웃음이 났다.
 
 조막만 한 승전에 도취 되어있을 때가 아니다. 지휘선을 찾아 부대 복귀를 모색해야 한다.
 
 행성 진입 각도와 속도. 선체 진행 방향을 알면 찾기가 수월할 텐데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AI잭이 생각이 있는 AI라면 사출 타이밍을 최대한 늦췄을 것이다. 그래야만 사출된 나와 난파된 선체와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테니까.
 
 “......”
 
 방법은 내가 추락한 지점을 중심으로 조금씩 반경을 넓혀가며 수색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이 밀려온다. 사령관 짬밥에 직접 수색이라니.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
 
 놈이 없다.
 
 분명 사출의자 아래 뭉개져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는다. 등 뒤 기척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퍽!
 
 젠장. 기본을 소홀히 한 탓이다. 다구리엔 장사가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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