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게 잠에 빠져 있다. 또는 죽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 ······ ”
흰색 승합차 안, 등받이를 뒤로 끝까지 민 운전석에 파묻힌 강기찬의 얘기였다. 적당히 긴 흑발이 눈을 덮었고, 코트를 이불 삼아 덮은 상태.
바로 그때.
“ 어우~ 추워. 아- 촬영 길어지네. ”
“ 내 말이. 꼬라지 보니까, 두 시간은 족히 걸리겠다. ”
차 밖에서 들리는, 남자 두 명이 지나가며 나누는 대화 소리. 그 인기척 덕분인지.
“ 으음. ”
잠에 빠졌던 기찬의 두 눈이 느릿느릿 떠졌다. 그야말로 힘이 쭉 빠진 생기 소멸한 썩은 동태눈. 그렇게 누운 자세 그대로 잠시간 허공을 바라보던 기찬의 두 눈이 다시금 스르륵 감겼고, 몸을 덮은 코트를 더욱 끌어 올렸다.
하지만.
-덜컥!
어림도 없지. 강기찬이 누워 있던 운전석 차 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마치 용납할 수 없다는 양. 곧, 입은 갈색 패딩 덕에 곰처럼 보이는 사내가 보였다.
“ 선배님. ”
곰 같은 사내는 운전석에 늘어진 기찬을 약간 벌레 보듯 내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 은지님 컷 거의 끝나갑니다. ”
그러자 코트 속 강기찬이 꾸물꾸물 일어났다.
“ ······어, 응. ”
담백한 대답을 마친 기찬은 느적느적 차에서 내려, 덮었던 코트를 대충 입었고 사내와 나란히 섰다.
-스윽.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강기찬은 뭐랄까. 말라비틀어진 분위기였다. 대충 뜬 눈 하며 초점도 뭔가 흐릿, 움직임도 느릿느릿. 전체적으로 생기가 소멸한, ‘게으른’ 아우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
그야말로 나태한 한량.
어쨌든 키가 180은 돼 보이는 강기찬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높은 곰 같은 사내가, 옆에 선 기찬을 시험하는 눈빛으로 힐끗 보며 목소리를 다시 냈다.
“ 선배님, 혹시 아까 실장님이 지시하신 인터뷰 건. ”
“ 그거 기자랑 시간 맞춰놨어. 장소만 따로 잡아. ”
곰 같은 사내 말을 잘라내며 대충 답한 기찬이 산발이 된 자신의 흑발을 탈탈 털었고, 재차 하품을 쩍 하며 천천히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2월 추운 날씨 덕에 입은 코트를 바싹 여민, 좀비가 걷는 것 마냥 느적느적 앞서 걷는 강기찬.
반면, 기찬의 뒷모습을 보던 곰 같은 사내는.
‘ 쯧! 오늘도 나태함 최대치시고. 겁나 마음에 안 드네, 저 멍청한 얼굴. 출근은 왜 하는 거야, 대체. 집에서 잠이나 자지. ’
무시가 팽배한 눈빛이었지만.
‘ 저렇게 게으른 와중에 지 할 일은 아슬아슬하게 안 빼먹는 거가, 은근 더 열 받는 부분이란 말이지······’
이를 알 리 없던 기찬은 힘 빠진 한숨을 픽 뱉은 뒤, 작게 읊조렸다.
“ 촬영장 왜 이렇게 머냐, 하 귀찮네- ”
그렇게 몇 분 뒤.
“ 5분!! 변경된 동선 확인하시고, 5분 뒤에 다시 슛 들어갑니다!! ”
검은 코트에 산발 된 흑발머리의 강기찬과 로드매니저인 곰 같은 사내. 두 남자가 수많은 사람이 뛰어다니는 공원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영화 촬영 현장이었다.
“ 야야! 막내야, 여기 반사판 하나 더 가져와! ”
“ 옙!! ”
“ 분장팀!! 감독님이 은지씨랑 도연씨 핏자국 좀 더 진하게 하랍니다! ”
“ 지금 갑니다! ”
각자 맡은 임무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스탭들, 여기저기 세워진 밝은 조명, 비싸 보이는 촬영 장비, 대본 보는 배우들, 그들의 매니저들,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시민들 등등.
“ ······ ”
그런 촬영 현장을 반쯤 뜬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던, 코트에 양손을 쑤신 기찬이 속으로 읊조렸고.
‘ 바로 끝나진 않겠네. 서 있긴 좀 그런데. ’
대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 오. ”
지척에 놓인, 촬영 스탭이 준비해둔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를 발견하곤, 강기찬이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이어 뭔가 은은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역시 배우팀이 꿀이야- 어중간한 배우한테 붙으면 대기 시간도 많고~ ’
반면,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파묻은 기찬을 보며, 곰 같은 사내는 황당한 헛웃음을 뱉었다.
“ 하, 와서 또 앉네. 다리가 부러졌나- ”
이쯤 하늘에서 보슬보슬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촬영은 속행됐다.
“ 자- 다시 갑니다! 하이~ 액션! ”
그렇게 40분 뒤.
“ 캇트!! 오오케이!! ”
콧수염 난 감독의 오케이 사인. 동시에 곰 같은 사내가 커다란 롱패딩을 집어선, 현장으로 뛰어갔다. 그가 롱패딩을 덮어 준 것은 촬영 내내 여주에게 악랄한 욕을 들으며 뺨을 싸맞던 여자.
조연급 여배우 최은지였다.
오른쪽 뺨이 벌게진 최은지는 감독이나 스탭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다, 롱패딩 입혀주는 곰 같은 사내에게 눈웃음쳤다.
“ 아, 경완! 땡큐! ”
방금까지 뺨을 신랄하게 맞은 것 치곤 꽤 발랄했다. 어쨌든 그녀가 롱패딩 지퍼를 목까지 올린 뒤, 사내에게 다시 물었고.
“ 실장님은? ”
곰 같은 사내가 빠르게 답했다.
“ 홍보팀이랑 미팅 있다고, 회사 가셨습니다. ”
“ 그래? 어? 기찬 오빠는 어디에······아. ”
질문하던 최은지가 말끝을 흐렸다. 왜? 곰 같은 사내 등 뒤로, 플라스틱 의자에 파묻힌 강기찬을 발견했기 때문.
“ 쿡쿡, 아- 저기 있네. 헐. 설마 저 오빠 지금 저러고 졸고 있는 거야? ”
“ ······그러신 것 같습니다. ”
입은 코트 양어깨에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음에도, 세상 편히 졸고 있는 기찬을 보며 최은지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 뭐야뭐야? 자기가 무슨 황장군이야? 진짜 ‘강귀찮’이라는 별명 딱이지 않아? 맞지? 캐릭터 완전 확실! ”
그러나 곰 같은 사내는 플라스틱 의자에 늘어진 기찬을 그저 한심한 눈빛으로 볼 뿐.
“ 예, 뭐. 강선배님이야 저런 캐릭터로 회사 내에서 너-무 유명하시죠. ”
“ 기찬 오빠 이번에도 실장 승진 미끄러졌다고 안 했어? 근데 왜 저렇게 태평해? ”
“ 글쎄요. 그런 쪽으론 관심이 없으신 거겠죠. ”
“ 승진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저 오빠면 가능해. 이 바닥이랑 안 어울린다, 진짜. ”
이어 곰 같은 사내의 어깨를 꽤 경쾌하게, 신명나게 툭툭 친 최은지의 얼굴에 장난기가 묻었다.
“ 근데 저러면서도 자기 할 건 은근 다 하잖아, 기찬오빠. 그게 진짜 킬포! ”
“ 네, 욕먹기 바로 직전에요. ”
한편.
‘ 아- ’
어깨에 눈이 쌓이든 말든, 플라스틱 의자에 늘어진 강기찬이 속으로 읊조렸다.
꽤 솔직하게.
‘ 편하다아- 눈뜨면 바로 집이었으면 좋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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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딕!
지정 플레이어(강기찬) 평가서.
평가: [타고난 머리와 능력이 있으나, 워낙 게을러서 그것들을 굳이 사용하지 않는 유형]
상태: [의욕상실, 노력부족, 나태방만]
결과: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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