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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뢰한 1권-1

2014.12.30 조회 1,302 추천 9


 제 1 장 천하광자 ( 天下狂子 )
 
 1
 봉일평(鳳一平)이 그를 처음 본 것은 소주(蘇州)에서 제일 번화한 취선루(醉仙樓)의 이층누각이었다.
 
 * * *
 
 무척 더운 날이었다.
 그날도 봉일평은 더위를 피해 취선루의 이층누각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취선루의 이층누각에 오르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더운 줄을 몰랐으나 오늘의 날씨는 그야말로 폭염(暴炎)에 가까워서 봉일평은 창가에 있으면서도 소매로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제길... 지독하게 덥군. 이 놈의 날씨가 아예 사람을 찌어 죽이려고 작정했나.”
 그는 약간 왜소한 체구에 단정한 용모를 하고 있었고 태도 또한 항상 깔끔했지만, 오늘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오죽했으면 봉일평은 당장에라도 웃통을 훌훌 벗어던지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가는 온 소주성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그의 벌거벗은 몸을 구경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게 뻔한지라 그저 창가에 턱을 고인 채 흐르는 땀을 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이층 밖을 무심코 내다보던 봉일평은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용케도 취선루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도저히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으나, 언뜻 보기에도 키가 엄청나게 컸다. 봉일평은 아직 그 흑의사내처럼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흑의를 입어서 더 커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뭏든 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녹이 잔뜩 슬은 칼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었다.
 “술... 술....”
 흑의사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흐느적흐느적 다가와서는 취선루의 입구에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황소가 쓰러져도 그것보다는 소리가 작았을 것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가 쓰러지자, 입구 쪽에 서 있던 점소이 하나가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점소이는 흑의사내의 몸을 흔들었다.
 봉일평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체구가 작은 점소이가 거대한 그의 몸을 흔드는 모습이 꼭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붙어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흑의사내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술... 술 좀 줘....”
 봉일평은 그 사람이 더위를 먹어서 물대신 술을 찾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술이든 물이든 시원한 것이라면 누구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흑의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술.... 술이다... 술 냄새가 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코를 킁킁 거리더니 눈을 번뜩이며 취선루의 뒤쪽 뜰로 마구 달려갔다.
 점소이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안돼요! 이봐요... 그곳은 술창고란 말이오...”
 하나 흑의사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왔는지 점소이를 확 밀치고는 미친 듯이 후원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꽥?”
 어마어마한 체구의 그가 집어던지자 작고 왜소한 점소이는 그야말로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앗? 저 놈 봐라!”
 “막아라!”
 안에 있던 취선루의 점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으나 그때는 이미 흑의사내는 후원 쪽으로 사라진 후 였다. 점원들은 저마다 몽둥이나 나무막대를 들고 벌떼같이 흑의사내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봉일평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이층에서 내려와 후원 쪽으로 다가갔다.
 취선루의 술창고는 후원의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봉일평이 막 후원으로 나왔을 때 흑의사내는 이미 술창고를 향해서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고 있었다.
 쾅!
 벼락치는 소리가 터지며 두꺼운 술창고의 문이 사람형상으로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저... 저럴수가...”
 막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흑의사내를 뒤쫒아 오던 점원들이 그 광경을 보자 입을 딱 벌리며 들고 있던 몽둥이들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 술창고의 문은 특수주문한 철심목(鐵心木)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것이었다. 그 단단한 문을 흑의사내는 자신의 형체를 생생하게 남긴 채 그대로 뚫고 들어간 것이다.
 흑의사내의 몸은 벌써 술창고 속으로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봉일평 또한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굉장한 내가공력(內家功力)이구나. 저 정도의 공력이라면 소주제일의 고수(高手)라는 대신권(大神拳) 하충광(河沖廣)보다도 강하겠는데...’
 점원들은 구멍이 뻥 뚫린 술창고 앞에서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크... 큰일났다. 더운 공기가 들어가면 술이 금새 상하는데...”
 점원들이 안절부절하자 그들 중 그래도 가장 체구가 크고 힘이 센 주방장이 용기를 내서 커다란 식칼을 들고 술창고로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술창고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방장은 식칼을 힘주어 잡으며 술창고안으로 한 발 들여 놓았다.
 서늘한 공기가 더위를 씻어 주었고, 냄새만 맡아도 취기를 느낄 만큼 독한 술향기가 풍겨나왔다. 주방장은 어두컴컴한 술창고 속을 두리번거리다가 안쪽에 있는 밀실의 문이 박살난 채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곳은 아주 특별한 장소로서 취선루가 천하에 자랑하는 옥빙주(玉氷酒)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옥빙주는 그 맛과 향기가 가히 천하일품이라 할 만큼 뛰어났으나, 그 만큼 제조하고 보관하기가 까다로워서 취선루에서는 특별히 술창고 속에 따로 밀실을 만들어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주방장은 떨리는 걸음으로 밀실로 다가갔다.
 밀실의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콸콸콸콸....
 그것은 마치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작은 폭포에서 물방울 튕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언가 물줄기가 어딘가로 흐르는 듯한 음향이었다.
 주방장은 삐끔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주방장은 눈이 툭 불거져 나온 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밀실안의 옥빙주는 모두 열 다섯 동아리였다. 그 동아리들은 장정 한 사람이 하나를 간신히 들만큼 컸는데, 그 큰 동아리들이 모두 마개가 열려진 채 사방으로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옥빙주는 술이 워낙 독해서 웬만한 술꾼이라도 작은 술병으로 하나만 마셔도 취기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 짧은 순간에 커다란 열 다섯 개의 동아리가 모두 동이 나 버린 것이다.
 주방장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넋을 잃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홀린 듯 밀실의 중앙으로 향했다.
 밀실의 중앙에는 조금 전의 흑의사내가 바닥에 누운 채 입을 딱 벌리고 마지막 남은 동아리를 쳐박고 있었다.
 좔좔좔좔...
 그 이상한 음향은 그 자의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자의 목젖이 꿈틀거릴 때마다 커다란 옥빙주의 동아리에서 폭포수같은 술이 목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주방장은 이곳 취선루에서 이십 여 년을 생활해오면서 별의별 주당(酒黨)들을 다 보았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술을 쳐먹는 인간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이건 완전히 인간세상의 하마(河馬)였다.
 주방장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 옥빙주의 동아리마저 순식간에 바닥이 나 버렸다.
 “꺼억....”
 흑의사내는 커다란 트림을 토한 후 빈 동아리를 바닥에 휙 던졌다.
 콰창!
 파편이 사방으로 튀기자 그제서야 흑의사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 술들로 인해 그의 전신에서는 진한 술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술창고가 온통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었다. 주방장도 작은 체구는 아닌데 그와 비교하면 자라다 만 난장이처럼 왜소해 보였다.
 거대한 체구의 흑의사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자 주방장은 자신도 모르게 식칼을 내던지며 벽에 몸을 찰싹 붙여 길을 비켜 주었다. 흑의사내는 고맙다는 듯 주방장의 통통한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고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크!”
 밖에서 안의 눈치를 보고 있던 점원들이 앞을 다투어 사방으로 피했다.
 흑의사내는 두 팔을 휘적거리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지날 때 우연인지 흑의사내는 봉일평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옴에 따라 봉일평은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가까이서 보니 봉일평은 그야말로그의 얼굴 보기만도 아득할 정도였다. 고개를 들고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겨우 얼굴이 보일둥말둥 했다.
 흑의사내는 휘청거리며 봉일평의 곁을 지나다가 문득 고개를 떨구어 그를 내려다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 자의 하얀 이가 살짝 비쳤다.
 “귀여운 놈이로군.”
 그러더니 솥뚜껑같이 엄청난 손을 들어 봉일평의 뺨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봉일평은 아연해 져서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흑의사내는 봉일평의 뺨을 살짝 쥐고 몇 번 흔들더니 다시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봉일평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가 저만큼 걸어 나갈 때서야 봉일평은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그의 곱상한 얼굴에는 아직도 흑의사내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봉일평은 너무도 화가 나고 약이 올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한참동안이나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봉일평이 그 놈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는 그 자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진 후였다.
 봉일평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눈빛이 점차 가라앉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흑의사내가 꼬집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런 미친 놈이 있다니... 내가 감히 누구인지 알고...”
 봉일평은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취선루의 이층누각으로 올라갔다.
 
 2
 그날 저녁.
 봉일평은 심심하기도 하고 오후의 기분 나쁜 일에 대한 화풀이도 할 겸해서 고노대(高老大)의 도박장을 찾아갔다.
 고노대의 도박장은 소주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번창한 곳으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봉일평은 두 번째로 그를 보았다.
 
 * * *
 
 그 망할 자식이 온 것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저녁무렵이었다.
 한낮의 무더위도 한결 가셔서 낙칠(洛七)은 즐거운 마음으로 도박장으로 갔었다. 오늘따라 끗발이 잘 붙어서 낙칠은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질 정도로 돈을 땄다. 그런데 그때 바로 그 망할 놈의 자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 자식의 상통만 생각해도 낙칠은 한 달 동안 재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자식은 이 무더운 여름날에 멋대가리도 없는 거무죽죽한 흑삼(黑衫)을 입고, 허리에는 두부도 못 자를 것 같은 녹이 잔뜩 슬은 칼 하나를 달랑 매단 채 흐느적거리며 도박장의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키가 컸는지 그 자식이 들어오자 그 시끄럽던 도박장이 한순간이나마 조용해 졌다. 모두들 그 자식의 커다란 키와 엄청난 몸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낙칠은 그 자식을 처음 볼 때부터 기분이 나빴다. 그 자식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낙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기가 남들보다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망할 놈은 그보다 적어도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자식은 하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이면 낙칠이 한창 끗발을 올리고 있는 탁자로 와서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의자가 뽀개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도 한 판 낍시다.”
 그 자식이 입을 열 때마다 그 입에서는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는 냄새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악취가 풍겨나왔다.
 ‘아니 이 자식은 술집 하수구에서 기어나왔나... 무슨 냄새가 이따위냐?’
 낙칠은 그때부터 재수가 없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 뒤로 벌어진 일은 낙칠의 삼십 생애 중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그 인간하수구가 낙칠의 앞자리에 앉은 뒤로 낙칠은 손에 무슨 망령이 들렸는지 주사위를 던지기만 하면 일(一)아니면 이(二)가 나왔다. 아마 낮은 숫자로 승부를 겨루는 도박이었으면 낙칠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도박은 높은 숫자를 겨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낙칠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다.
 더욱 울화통이 치미는 것은 그 인간하수구는 처음 시작할 때 달랑 한 냥만 가지고 했는데, 도박장에서 돈 잃고 죽은 귀신이라도 씌웠는지 걸기만 하면 족족 이기는지라 차츰 그 돈이 불어나더니 나중에는 낙칠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판돈을 몽땅 휩쓸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인간하수구가 갈쿠리같이 큰 손으로 도박대위의 은전을 긁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속의 심통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단지 그것뿐이면 낙칠은 ‘별 재수 없는 놈 다 보겠네’하고 침이나 탁 뱉으며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인간하수구가 낙칠을 쳐다보며 말을 건네왔던 것이다.
 “돈이 떨어진 것 같은데, 내가 좀 빌려줘도 되겠소?”
 낙칠은 처음에는 애꿎은 자신의 귓구멍만 의심했다.
 세상에 어떤 할 일없는 미친 놈이 도박장에 와서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하겠는가? 그것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말이다.
 그때 아마 천지신명(天地神明)께서 낙칠을 돌봐주셨다면 그의 귀를 순간적으로 멀게 했거나 아니면 그 인간하수구의 아가리를 잠깐 봉해버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천지신명조차도 그 순간만은 선량한 낙칠을 저버리셨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소?”
 낙칠이 귀를 후비며 더듬거리자 그 인간하수구는 씨익 웃더니 시궁창같은 술냄새를 확확 풍기며 말했다.
 “내가 돈을 대줄테니 몇 판 더 놀아보라고 했소. 왜 싫소?”
 그제 서야 비로소 낙칠은 자신의 귓구멍이 완벽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내둘렀다.
 “시... 싫다니...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나... 난 좋소.”
 얼마나 빨리 고개를 내둘렀는지 반대쪽으로 갔던 눈동자가 미처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해서 잠깐동안이나마 낙칠은 사팔이 되었다.
 그래서 낙칠은 그 인간하수구가 주는 돈으로 다시 한 판 벌리게 되었다.
 그때 낙칠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까하고 의심했겠지만 아쉽게도 낙칠의 사전에 선견지명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상하게도 낙칠의 손에 아까와는 반대의 마법이 붙었다.
 던지기만 하면 오(五)아니면 육(六)이 나오는 것이다.
 낙칠은 하도 신통해서 여섯 판을 연거푸 이긴 다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깨물어 보기까지 했다. 물론 손가락만 아팠다.
 낙칠은 그 밤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하고 간절히 바랬다. 새벽 동이 훤히 터오를 무렵, 낙칠의 탁자위에는 은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중에 낙칠은 자기가 그때 왜 그 은화들을 가지고 내빼지 않았는지 정말 저주스러울 정도로 후회를 했으나, 그때의 심정은 이 기세를 계속 밀고나가 후대(後代)에 길이 남을 위대한 벼락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낙칠이 기세를 올리는 동안 그 인간하수구는 재수가 달아났는지 별로 신통치 않게 끄적거리다가 겨우 수중에 은자 몇 푼만 달랑 남게 되었다.
 그때 그 빌어먹을 인간하수구가 다시 낙칠을 바라보며 악취를 풍겨내었다.
 “아까 빌려갔던 돈 좀 다시 돌려주겠소?”
 낙칠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아까 그가 빌려주었던 돈에다가 다시 열 냥 가량 더 얹어 주었다.
 “옛소.”
 그것은 낙칠의 앞에 쌓였던 은자더미에서 아예 표도 나지 않을만한 액수였으나, 낙칠은 지금까지 남에게 이런 선심을 베푼 적이 없었다.
 인간하수구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닥거리더니 그 돈으로 다시 노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바람에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낙칠의 손은 다시 희한한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바로 던지기만 하면 일(一)이 나오는 것이다.
 아까와 다른 것은 이(二)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어...하는 사이에 낙칠의 앞에 쌓였던 수북한 은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 낙칠은 다시 홀라당 모두 털리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부처님 가운데토막같은 심성을 지닌 자라해도 열통이 끓어오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더 낙칠로 하여금 이성(理性)을 잃게 만든 것은 그 인간하수구가 자신이 준 돈으로 야금야금 돈을 따더니 마침내는 탁자에 수북하게 은자를 쌓아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은자는 거의 전부가 낙칠이 잃어버렸던 것들이었다.
 낙칠은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한 채 한참동안이나 그 악취가 풍겨 나오는 인간하수구의 상판을 노려보고 있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 아까 그 돈 다시 돌려주시오.”
 그 인간하수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돈이라니? 무슨 돈 말이오?”
 낙칠은 자기가 돌아버리지 않는 것이 신통했다.
 그는 떨지 말자... 이럴때 일수록 침착하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지 않느냐며 자신을 위로한 후 더듬거렸다.
 “그... 왜 아까 내가 당신에게 줄때 더 얹어준... 그 왜 있잖아요.... 그 돈...”
 인간하수구는 멍청한 얼굴로 낙칠을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히죽 웃었다.
 “아. 그 돈.”
 아마 죽은 애비가 살아 돌아와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칠은 손뼉을 탁 치며 얼굴가죽이 찢어지도록 웃어댔다.
 “하하... 그... 그렇소. 이제 생각이 난 모양이구려...”
 인간하수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수북히 쌓인 은자중에서 가장 꾀죄죄한 걸로 열 냥을 집어내더니 그에게 주었다.
 “여기 있소.”
 낙칠은 그 돈을 받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다... 당신은 더 얹어 주지 않소?”
 낙칠이 수북하게 쌓인 은자를 쳐다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데도 인간하수구는 매정하게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낙칠은 정말 인간적으로 울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 빌려갔던 돈을 돌려주면서 열 냥이라는 거금을 얹어주었는데 이 빌어먹을 녀석은 매정하게도 달랑 원금만 상환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정말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매정한 일로, 낙씨문중(洛氏門中)에서는 상상도 못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돈 가진 놈이 돈 줄 생각이 없다는데야...
 게다가 덩치라도 작으면 험악하게 인상이라도 써 볼텐데, 이건 아무리 봐도 눈이라도 한 번 흘겼다가는 저 무쇠방망이같은 커다란 주먹에 한 방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그 주먹에 한 대 맞았다가는 낙칠이 아니라 낙칠의 할아버지가 와도 살아남지 못할게 뻔했다.
 낙칠은 그 열 냥을 가지고 다시 도박대 앞에 앉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어디 두고 보자. 내가 다시 돈을 따기만 하면 네 놈은 그날부로 나왔던 하수구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낙칠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도박에 열중했다.
 과연...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아니면 천지신명께선 분명 하늘 어딘가에서 낙칠을 돌보고 계시는지... 그 뒤로 낙칠의 손에는 다시 마법이 붙기 시작했다.
 던졌다 하면 계속적으로 육(六)이 나오는 것이다. 아까와 다른 점은 오(五)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 다는 것 뿐이었다. 낙칠은 절로 신이 나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벌써 한나절을 계속 도박대에 매달려 있자 아랫배가 살살 아프며 소변이 마려웠으나, 낙칠은 끗발이 오를 때 따자 하고 나오려는 소변을 억지로 참고 계속적으로 주사위를 굴렸다.
 정말 신나는 밤이었다.
 낙칠의 앞에는 차곡차곡 은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낙칠의 오줌통에도 차츰차츰 소변이 고이기 시작했다. 낙칠은 돈을 따는 재미에 희희낙락했으나 언제부턴가 조금씩 다리를 꼬며 괜히 눈을 부릅뜨곤 했다.
 옆에 있던 인간하수구가 그를 보며 물었다.
 “소변 마려우시오? 그럼 다녀오구려. 내가 대신 봐줄테니.”
 낙칠은 인정사정없는 눈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그 인간하수구녀석은 천벌을 받았는지 그 뒤로 돈을 계속 잃고 있었는데, 낙칠이 자리를 비우면 그새 끗발이 그 놈에게 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별 시덥잖은 소리! 난 맘만 먹으면 하루 왠종일 오줌 한 방울 안나오는 사람이오.”
 낙칠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도박에 열중했다. 하지만 한 번 입으로 오줌이라는 단어를 내뱉고 나자 이상하게도 더욱 소변이 마려웠다.
 낙칠은 끙끙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했다.
 떼구르르....
 그가 던진 주사위가 처음으로 오(五)를 가리켰다. 그 순간 낙칠은 찔끔하고 오줌 한 방울을 저렸다. 낙칠은 차츰 정신이 오락가락해졌다.
 싸고 오느냐.... 참고 버티느냐....
 주사위가 변기통으로 보이면서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소변과 그에 따른 부속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정신이 산만해지는데도 끗발은 신나게 올라서 점차 은자가 수북해졌다.
 ‘참자...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소변으로 날려 보낼 수는 없다. 소변은 지금 안해도 앞으로 평생 신나게 쌀 수 있다.’
 낙칠은 이를 악물며 사나이의 기개로 소변을 참았다.
 마침 이번의 내기는 아주 커다란 것이 걸렸다.
 물주측에서 낙칠에게 단판승부를 제안한 것이다.
 지금 낙칠의 앞에 있는 은자는 대략 보아도 오 만냥에 가까웠다. 물주는 단판에 오 만 냥씩 걸고 대결을 벌이자고 했다.
 낙칠이 이를 거절할리가 없었다.
 ‘이번만 이기면...’
 그때는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아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그리고 소변도 마음껏 볼 수가 있다.
 낙칠은 어서 빨리 승부가 결정되기를 고대했다.
 물주가 먼저 주사위를 던졌다.
 물주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며 낙칠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물주는 겨우 이(二)를 던져낸 것이다.
 ‘으흐흐...’
 낙칠은 절로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쌀 뻔 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일생일대의 벼락부자가 될 것이다.
 은자 십 만냥....!
 실로 어마어마한 거금이 아닌가?
 낙칠은 터질 듯한 아랫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힘차게 주사위를 던졌다.
 떼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주사위가 점차 멈춰지기 시작했다.
 “아... 육(六)이다!”
 중인들 틈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주사위가 멈춰지면서 윗면에 드러나는 숫자는 바로 육(六)이었던 것이다.
 낙칠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툭!
 금시라도 멈춰질 듯 하던 주사위가 무엇에 걸렸는지 발랑 뒤집어 지면서 반대편 숫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끅?”
 낙칠은 눈을 새하얗게 까뒤집었다. 뒤집혀진 주사위는 바로 일(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손아귀에 들어왔던 거금 십만 냥이 그대로 날라 가며 벼락부자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 순간 낙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싸버리고 말았다.
 
 흑의사내는 천천히 도박장을 벗어났다.
 그런 다음 도박장의 뒤쪽 골목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화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는데, 흑의사내를 보자 얼굴에 쓴웃음을 날렸다. 그는 이 도박장의 주인인 고노대(高老大)였다.
 흑의사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고노대는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멀쩡한 어른이 남들 앞에서 바지에 오줌을 쌀 줄은 몰랐소. 정말 세상에는 별의별 놈이 다 있군.”
 그는 품속에서 전표다발을 꺼냈다.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좋은 산서은호(山西銀號)에서 발행한 이십 만냥짜리 전표요. 확인해 보시오.”
 흑의사내는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 자신의 품속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고노대가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커다란 몸은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덩치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갔다.
 고노대의 시야를 벗어난 다음에도 흑의사내의 걸음은 멈추지를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가 자신의 뒤를 쫒아와 돈을 빼앗아 가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걷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간 곳은 하필이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때 흑의사내는 몸을 홱 돌리더니 돌연 껄껄 웃기 시작했다.
 “따라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귀염둥이야.”
 한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골목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물론 봉일평이었다.
 봉일평은 고노대의 도박장에서 흑의사내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줄곧 그의 뒤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흑의사내는 이미 그가 뒤따르는 것을 알고 일부러 막다른 골목으로 온게 분명했다.
 봉일평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요?”
 흑의사내는 거구를 흔들면서 웃었다.
 “하하... 누구긴 누구냐? 귀여운 네 녀석이지.”
 그러더니 그 커다란 손을 내밀어 다시 봉일평의 뺨을 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봉일평은 질겁을 하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 몸놀림은 가히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신속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봉일평이 방금 펼친 신법(身法)은 강호무림에서도 초일류에 속하는 것인데, 느리게 다가오는 흑의사내의 손은 어느 새 그의 뺨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네 놈의 뺨은 정말 말랑말랑하구나.”
 흑의사내는 낄낄거리며 아까처럼 그의 뺨을 꼬집어 몇 번 비틀었다.
 “이... 이런 미친....”
 봉일평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번개같이 비호무영퇴(飛虎無影腿)의 수법으로 흑의사내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하나 그의 발이 채 뻗어나오기도 전에 흑의사내의 거구는 이미 저만큼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하... 귀염둥이야. 다음에 다시 만나자.”
 봉일평이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흑의사내의 몸은 소리 없이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봉일평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흑의사내의 몸은 이미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음성이 저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엽단풍(葉丹楓)...”
 그 음성의 마지막 말은 거의 백 여장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신법이 어찌 이리도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봉일평은 그의 가공할 신법에 놀란 듯 쫒아갈 생각도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엽단풍이라... 강호무림에 정말 괴짜가 나타났구나. 내 무유신보(無遊神步)를 따라잡을 수 있는 무공은 당금 무림에서 다섯 가지 뿐인데, 그 자의 수법(手法)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 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황혼의 햇살을 받은 그의 두 눈은 유달리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 2 장 서천봉희 ( 西天鳳姬 )
 
 1
 취향(聚香)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사내품에 얼굴을 묻었다.
 취향은 기녀(妓女)다.
 소주제일(蘇州第一)의 명기 취향.
 그녀는 이름처럼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볼 때마다 늘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웃는다. 지금도 그녀는 그를 보면서 달콤하게 웃었다.
 이 사람은 특별했다.
 우선 아주 강(强)했다.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부드러웠다.
 단지 그 뿐이라면 그녀가 과거 만났던 몇 사람의 남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주 욕심이 많았다. 욕심이 많다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좋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방면으로 욕심이 많다는 것은 여자들에게는 무척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특히 그녀와 같은 여자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호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지금도 이 사람은 그녀의 몸을 다섯 번 째로 욕심내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이대로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었으나, 그의 욕심어린 손길에 닿은 그녀의 몸은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다섯 번째 욕심을 충족시켜주자 그녀는 이제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예 축 늘어져서 영원히 잠만 자고 싶었다. 허리 아래는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예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내가 다시 커다란 몸을 일으켜 그녀의 배위로 올라오며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그럼 준비운동은 그만하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몸을 풀도록 하지.”
 취향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멀거니 그 사람 얼굴만 올려다 보았다. 그 사람은 벌써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허리 아래로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아 이 사람은 정말로 아직도 싱싱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 안돼요... 나는 이젠 정말 못하겠어요...”
 사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난 이제 조금씩 흥분되려고 하는데 당신이 벌써 이러면 난 어떡하란 말이오?”
 그녀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망설이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보았어요... 정 못견디겠다면 내가 다른 아이를 불러 오겠어요. 난 정말 더 이상 못해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여자는 싫소. 난 적어도 당신 정도의 미인(美人)이 아니면 품에 안을 기분이 나지 않는단 말이오.”
 “이홍(怡紅)을 불러 올께요. 그녀도 저만큼 예뻐요.”
 “그녀는 벌써 열흘 전에 실컷 안아 보았소. 그녀는 아마 지금도 앓아 누어 있을걸?”
 “옥앵(玉鸚)은...?.”
 사내는 오히려 물었다.
 “당신은 그녀를 못 만난지 며칠 되었지?”
 취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런데...”
 “그녀는 이틀 전에 나하고 잤는데 밤새 꼬박 설치더니 뻗어 버렸소. 의식이나 돌아 왔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았다.
 소주일대에서는 이들 세 사람이 제일 아름다운 기녀들이었다.
 보아하니 이 사내는 정말 그녀보다 아름답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나 그녀들만큼 아름다운 기녀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한 번 더 그의 욕심을 채워주다가는 그녀도 다른 두 사람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사내는 이미 그녀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급히 그의 손을 밀어내며 물었다.
 “당신은 꼭 기녀만 안아야 되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오. 당신보다 예쁘다면 직업이 무슨 상관 있겠소?”
 그녀는 웃을 기운도 없었다.
 “당신은 혹시 공손단경(公孫旦瓊)이란 여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사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물론이오. 그녀는 듣자하니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네 명의 미녀중 하나로 꼽힌다고 하던데, 그 여자 맞소?”
 “맞아요. 바로 사대미인(四大美人)중의 서봉(西鳳)이라는 그 공손단경이에요. 그녀 정도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겠어요?”
 사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진작부터 사대미인을 몽땅 안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사내가 입맛을 쩍쩍 다시자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공손단경이 있는 곳을 알려 드릴테니 나를 그만 놔줘요.”
 “그야 이를 말인가? 그녀가 지금 어디 있소?”
 “그녀는 며칠 전에 소주로 유람을 왔는데, 지금은 현묘관(玄妙觀)에 있을거에요.”
 사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아랫도리를 걸친 후 웃도리는 손에 든 채로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그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 급히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려고요?”
 사내는 흑의를 걸치며 씨익 웃었다.
 “어디긴? 현묘관에 가서 그녀를 빨리 안아야지.”
 “하지만....”
 “난 아직 몸도 잘 풀지 못했다구. 그녀가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다 당신 덕인줄 알고 있으시오.”
 이어 그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세상에 이토록 급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은 보다보다 처음 보았다. 천하에 공손단경을 마치 주머니속의 물건처럼 쉽게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도대체 그 사내는 공손단경이 어떠한 신분의 여인인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그녀는 멍하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대체 당신이름은 뭐에요?”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멀리서 아련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엽단풍...”
 
 2
 봉일평은 운(運)이 좋았다.
 이번에 보기만 하면 반드시 본 때를 보여줘야지 하고 이를 갈며 돌아다닌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는 다시 그 자식을 만나게 되었다.
 봉일평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았다.
 봉일평이 아침부터 하루 종일 소주성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목이 말라 주루에 들어가려 할 때, 거리 저편에서 막 모퉁이를 돌아가는 하나의 인영을 보았다.
 봉일평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한 번 슬쩍 보기만 해도 그 인영이 누구인지 금새 알 수 있었다. 그 장대같이 커다란 키하며 거무튀튀한 흑의... 흐트러진 흑발에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광오한 모습... 그리고 고철덩어리를 연상케 하는 그 녹이 잔뜩 슬은 칼...
 ‘이 놈! 정말 잘 만났다.’
 봉일평은 눈을 번뜩이며 급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흑의사내 녀석은 특유의 휘적휘적하는 걸음으로 저만큼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봉일평은 먼저 도박장에서 그의 뒤를 밟다가 들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한결 조심스런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나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 흑의사내는 누가 자신을 따라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는지 느긋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만 있었다.
 봉일평은 이 자식을 어떻게 혼내줄까 하고 고민하면서 그의 뒤를 밟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저곳은 현묘관으로 가는 길인데...‘
 그 흑의사내는 소주성의 북문(北門)을 나와 왼쪽 모퉁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한산한 길로서, 오 백여장 쯤 쭉 나아가면 현묘관이 나온다. 현묘관은 여도사(女道士)들만이 수양하는 곳으로 남자들은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저 자식이 또 무슨 행패를 부리려고 저곳으로 가는 거지?’
 봉일평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의사내는 성큼성큼 현묘관의 앞으로 다가갔다.
 현묘관은 소주의 북쪽에 위치한 오래된 도관(道觀)으로, 역사가 유구할 뿐만 아니라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여고수들을 여러 명 배출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현묘관의 고색창연한 대문(大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흑의사내는 현묘관의 닫혀진 문 앞으로 가더니 그 솥뚜껑만한 손으로 냅다 문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쾅!
 마른 하늘에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두꺼운 문짝이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그의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오던 봉일평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저... 저 미친 자식이...’
 흑의사내는 부서진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서더니 내당(內堂)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봉일평은 막 그쪽으로 몸을 날리려다 무엇을 보았는지 황급히 길옆의 돌담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 다음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전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엽단풍(葉丹楓)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그의 손은 다른 사람의 손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손가락 하나 하나가 비단 굵고 억셀 뿐만 아니라 굳은 살이 잔뜩 박혀 있어서, 웬만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거칠고 투박한 느낌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건 손의 마디마디가 유난히 길고 피부가 하얗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현묘관의 안에서 세 줄기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포를 걸친 세 명의 여도사(女道士)들이었다. 여도사들은 굉음소리에 놀라 급히 달려 나왔다가 대문이 부서진 것을 보고 안색이 대변했다.
 엽단풍은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그 커다란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 참. 이렇게 이상한 일이 있나...”
 세 명의 여도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도사 하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게요?”
 엽단풍은 그녀를 힐끗 돌아보더니 그 커다란 손을 그녀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것 좀 보시오. 내 손은 분명 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사람 좀 나오라고 문을 두드렸더니 이렇게 부서져 버리고 말았소.”
 그는 정색을 하며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현묘관에서 일부러 대문을 부실하게 만들리는 없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구료.”
 여도사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멍하니 부서진 문짝과 엽단풍을 번갈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녀들은 그의 장대 같은 키와 태산 같은 몸집, 무쇠솥 같은 주먹을 쳐다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세상에 이렇게 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에 입을 열었던 중년여도사가 합장을 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량수불... 현묘관이 생긴지 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본 관(觀)에 시비를 건 사람은 없었습니다. 시주께서 본관에 와서 이런 짓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요?”
 “글쎄 고의가 아니라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저 문짝이 너무 오래되어 썪은 게 분명하오.”
 엽단풍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널려져 있는 부서진 문의 파편(破片)중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보시오. 문이 이렇게 푸석푸석하지 않소?”
 그가 문조각을 양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비자 과연 그 조각이 가루처럼 맥없이 부서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중년여도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는 물론 현묘관의 대문이 썪은 나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썪기는커녕 단단한 참나무에 특수한 옻칠을 해서 비바람에도 부식되지 않는 단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단단한 나무조각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손가락 두 개로 비벼서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공력이 출신입화(出神入火)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무... 무량수불.... 시주께서 본 관에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 는 모르지만 오늘 본 관에는 급한 일이 생겨서 외인(外人)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시지요.”
 “급한 일이라니 그게 뭐요? 어느 놈이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중년여도사의 얼굴에 고소(苦笑)가 떠올랐다.
 “아닙니다.”
 엽단풍은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괜찮소. 말해 보시오.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아주 따끔한 맛을 보여 줄테니...”
 중년여도사는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는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묘관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은 바로 엽단풍 자신이 아닌가? 그가 아무 염려 말라는 듯 큰 소리를 칠수록 중년여도사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만 흘러 나올 뿐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 관에 오늘 귀중한 손님이 오셔서...”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귀한 손님이란 게 혹시 공손단경인가 하는 여자 아니오?”
 중년여도사는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시... 시주께서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내가 이곳에 온게 다 그녀 때문인데.”
 중년여도사는 급히 되물었다.
 “시주는 공손소저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엽단풍의 하얗고 싱싱한 이빨이 살짝 내보였다.
 “과연 도(道)를 닦는 분답게 눈치가 빠르시군. 바로 그렇소. 그녀는 안에 있소?”
 중년여도사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계... 계시긴 한데...”
 “왜 안된단 말이오?”
 엽단풍이 그 커다란 몸으로 성큼 다가오자 중년여도사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그게 아니라... 사실은 공손소저에게 이미 손님이 와 계셔서 아마도 시주를 만나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거 잘 됐소. 손님을 만나고 있다면 한 사람쯤 더 있어도 상관이 없겠군.”
 엽단풍은 오히려 반색을 하며 그녀의 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막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중년여도사가 자신의 코앞에 무언가 희끗거린 것을 본 순간, 그의 몸은 어느 새 그녀의 뒤 십 여장 밖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중년여도사는 놀라고 당황해서 어쭐 줄을 모르다가 그의 몸이 벌써 내당(內堂)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 다른 두 명의 여도사들과 함께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엽단풍은 보무도 당당하게 현묘관의 내당으로 들어서며 종이 울리듯 큰 소리로 외쳤다.
 “단경! 내가 왔소! 어서 나오시오!”
 그는 공손단경의 이름을 아무 거리낌없이 부르며 내당 안을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마누라를 만나러 온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내당의 문이 벌컥 열리며 싸늘한 폭갈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떤 미친 놈이 감히 이곳에 와서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게냐?”
 언제 나타났는지 내당의 문 앞에 괴이한 몰골의 노파가 우뚝 서서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파의 키는 오 척(五尺)이 될까말까 했는데, 전신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용두괴장(龍頭拐杖)을 들고 있었다. 허리는 구부정했고, 백설같이 흰 머리는 뒤로 아무렇게나 대충 묶었다.
 얼굴 전체에는 도저히 나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무성한 주름살이 가득했는데,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 한 복판에 박힌 두 개의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무시무시한 안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섬뜩해 질 정도로 냉막한 인상의 노파였다.
 그런데 그 노파를 본 엽단풍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백발노파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나이 많은 할망구가 무슨 목청이 그리도 크단 말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자신의 음성은 백발노파보다 몇 배나 더 우렁찬 것이었다. 그의 음성이 어찌나 컸던지 그를 뒤따라 왔던 여도사들은 고막이 진동하고 귀가 윙윙거려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발노파의 안색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개뼉다귀 같은 놈이 감히 노신(老身)이 누구인줄 알고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는 거냐?”
 엽단풍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웃었다.
 “나같이 큰 개뼉다귀라면 아무리 집채 만한 개라도 물어뜯기가 쉽지 않을 거요. 게다가 내 뼈다귀는 워낙 단단해서 웬만한 이빨로는 어림도 없지.”
 이어 엽단풍은 백발노파의 작달막한 몸을 쭈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크기로 보나 뼈다귀의 오래된 정도로 보나 나보다는 할망구가 더 어울릴거요. 아암... 할망구의 뼈다귀는 크기도 아담한데다 연하고 부드러워서 틀림없이 온 천하 개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요.”
 “뭐... 뭐라고?”
 백발노파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만큼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서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백발노파가 화를 내고 안색이 욹으락붉으락 해질수록 엽단풍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녀를 놀려댔다.
 “이보시오, 할망구. 자꾸 화를 내면 뼈다귀가 질겨져서 맛이 없게 되오. 이왕이면 개들에게 맛좋은 뼈다귀를 주는 게 좋지 않겠소?”
 “이... 이...”
 백발노파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수중에 들고 있던 용두괴장을 번개같이 쳐들어 불문곡직하고 엽단풍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왔다.
 쿠와앙!
 마치 해일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백발노파의 성격이 어떻든 그녀의 공력이 가히 절정(絶頂)에 다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어른의 키만한 용두괴장이 빛살같은 속도로 날아드는 광경은 천하의 누구라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쇠로 만든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해도 그 용두괴장에 정면으로 맞았다가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엽단풍은 피할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피할 능력이 없는지 두 눈을 멀뚱멀뚱하게 뜬 채 용두괴장이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는 광경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용두괴장은 한 치의 사정도 없이 엽단풍의 머리통을 정면으로 강타해 버렸다. 엽단풍의 커다란 몸이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오 장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나와 보았던 여도사들이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게중에는 엽단풍의 머리가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시뻘건 선혈과 뇌수를 뿌리는 광경이 눈에 선한지 눈을 질끈 감아버린 사람도 있었다.
 백발노파는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하는지 씩씩거리며 엽단풍이 나가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용두괴장에 정통으로 격중당해 머리통이 박살난 줄 알았던 엽단풍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앗?”
 백발노파는 물론이고 주위에 늘어서 있던 현묘관의 여도사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일제히 경악성을 질러냈다.
 특히 용두괴장의 주인인 백발노파의 놀라움은 경악을 넘어 기절초풍에 가까웠다.
 ‘이... 이럴수가... 내 두 갑자(甲子) 공력이 실린 용두괴장을 정면으로 맞고도 일어나다니...’
 노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을 띄고 멍하니 엽단풍을 쳐다보았다.
 엽단풍은 그때 봉두난발한 머리를 손으로 마구 비비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장난 좀 한걸 가지고 그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사람 머리를 후려 갈기다니... 내 머리가 쇠처럼 단단했길래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잖소, 할망구!”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그의 전신에는 털끝만한 상처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백발노파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오지 않았다.
 이 체구가 태산(泰山)만한 놈은 비단 간덩이도 그만큼 클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특이한 한목(寒木)으로 만들어서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용두괴장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하겠는가?
 더구나 그것도 두 갑자의 공력이 실린 것을 말이다.
 엽단풍은 용두괴장에 강타당했던 부분을 쓰다듬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할망구치곤 팔힘이 상당하군. 하마터면 내 머리통이 박살날 뻔 했으니까 말이오. 아마 할망구의 뼈다귀는 보기보단 연하지 않을 것 같소. 개들도 좋아하지 않겠는걸.”
 자세히 보니 맞은 자리가 조금 붉으스름해지기는 했다.
 엽단풍은 커다란 걸음으로 성큼성큼 노파 앞으로 다가오더니 노파를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빚지고는 못사는 성미지만 할망구의 나이를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나를 공손단경인가 뭔가 하는 여자에게 데려다주면 조금 전의 일을 잊도록 하겠소.”
 백발노파는 이 녀석이 과연 제정신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녀가 엽단풍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바짝 쳐들고 한참이나 올려다보아야 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어서 용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흑발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눈빛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서 정신이 이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엽단풍은 노파를 내려보며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할망구.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아니면 너무 늙어서 귀까지 먹은 거요?”
 백발노파는 너무도 분노가 치밀어 오히려 화도 나오지 않았다.
 백발노파는 한참동안이나 그를 노려보더니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너는 노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망구는 젊은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데 내가 어찌 알겠소?”
 “네 놈은 두여랑(杜如娘)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여랑? 그게 할망구의 이름이오?”
 “그렇다.”
 “이름은 그런대로 괜찮군. 하지만 난 할망구의 이름 따위는 관심 없소.”
 엽단풍의 퉁명스러운 말에 백발노파는 어이가 없는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주위에 늘어서 있던 현묘관의 여도사들의 얼굴에도 아연한 기색이 가득했다.
 ‘세상에... 칠살파파(七煞婆婆) 두여랑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다 있다니...’
 그녀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발노파의 정체를 다른 무림인들이 알았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칠살파파 두여랑!
 그녀는 수십 년전부터 한 자루 용두괴장으로 무림천하를 주름잡았던 절세의 고수였다. 그녀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사천(四川)지방과 서장(西藏)이었지만, 그녀의 명성은 중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말년에 이르러 그녀는 서역의 패자(覇者)인 벽요궁(碧瑤宮)에 몸을 두어 무림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수십 년만에 불쑥 현묘관에 나타났던 것이다.
 
 두여랑은 안색이 수십 차례 변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로구나. 오늘 노신이 네 놈의 못된 버릇을 고쳐놓지 못한다면 성을 갈아 버리겠다.”
 엽단풍은 껄껄 웃었다.
 “하하... 할망구가 성을 갈던 이름을 갈던 그건 내 알바 아니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공손단경을 만날테니 할망구 마음대로 하구려.”
 엽단풍은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은 아예 무시를 하고 내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두여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갈을 터뜨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놈! 죽어라!”
 쾌애액!
 벼락같은 노호성과 함께 그녀의 용두괴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 속도와 용두괴장에 실린 힘의 무게는 조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두파파(杜婆婆)!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내당 안에서 맑고 그윽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마치 깊은 계곡 속을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청량하게 하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 음성을 듣자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덤벼들던 두여랑의 몸이 허공에서 빙글 돌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내려섰다. 그녀의 수중에 들린 용두괴장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위치해 있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원래 공력이란 펼치기보다 거두기가 더 어려운 법인데, 그녀의 공력을 수발(收發)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절정고수다웠다. 덤벼들었다가 물러나는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한 차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두여랑은 싸늘한 눈으로 엽단풍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몸을 비켜섰다.
 “이 놈!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반드시 네 놈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 주고야 말겠다.”
 엽단풍은 히죽히죽 웃으며 커다란 몸을 어슬렁 움직였다.
 “제발 부탁이오. 나도 이 버릇을 고치려고 밤마다 고민 중이라오. 하지만 할망구 실력으로 그게 될까?”
 그가 내당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 번 두여랑의 울화통을 북돋우는 말을 내뱉었으나, 두여랑이 무어라고 쏘아붙이기 전에 그의 몸은 어느 새 내당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여랑은 한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본 채 씩씩거리고 서 있다가 솟구치는 노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들고있던 용두괴장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엄청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듯이 크게 일어나며 바닥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현묘관의 여도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묘관의 바닥은 굳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다. 비록 강철만큼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천근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한 결코 쪼개지거나 부서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 화강암 바닥이 두여랑의 간단한 손짓에 움푹 커다란 구멍이 파인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두여랑의 공력이 얼마나 초절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두여랑은 그래도 노화가 풀리지 않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득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그 냉가(冷家)놈이 가장 버르장머리가 없는 줄 알았더니 저 놈은 한 술 더 뜨는군. 두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서로 만나면 어떤 광경이 벌어질지 궁금해 지는군.”
 
 
 제 3 장 절정공자 ( 絶情公子 )
 
 1
 내당 안은 정결하게 꾸며진 넓은 대청이었다.
 대청의 중앙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좌우로 앉은 채 걸어 들어오는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좌측에는 회색 도포를 걸친 육십 가량의 여도사 하나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여도사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깨끗했는데,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 깊이를 알 수 없게 했다.
 그녀가 바로 이곳 현묘관의 관주이며 강남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묘우사태(妙雨師太)였다.
 그녀의 옆에는 화려한 궁장(宮裝)을 하고 머리를 틀어올린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아쉽게도 얼굴에는 검은 망사를 하고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나 궁장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와 자태는 그야말로 사내라면 누구나가 침을 흘릴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녀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귀공자가 앉아 있었고, 귀공자의 뒤에는 쌍둥이로 보이는 두 명의 청의중년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귀공자의 용모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뛰어난 것이었으나, 눈빛이 차갑고 냉랭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엽단풍의 엄청난 체구에 모두들 놀란 듯했다.
 엽단풍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의 장대같이 큰 키와 우람한 체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만나본 후에 품게 되는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엽단풍은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중앙에 앉아 있는 궁장망사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특유의 휘적휘적하는 걸음걸이로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는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시오?”
 궁장망사녀의 망사사이로 두 줄기 눈빛이 반짝거렸다.
 “당신은 나를 아시나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듣기만 해도 절로 시원한 감을 느낄 정도로 맑고 깨끗한 것이었다.
 엽단풍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당신은 사대미인 중에서 서봉(西鳳)이라고 알려진 서천봉희(西天鳳姬) 공손단경이 아니오?”
 궁장망사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공손단경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요?”
 엽단풍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를 모르오?”
 이것은 참으로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공손단경이 생면부지의 그를 알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공손단경은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몰라요. 당신은 누군가요?”
 엽단풍은 친절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엽단풍이란 사람이오. 고향은 산서성(山西省) 분양(汾陽)이며, 나이는 이십 육세이고, 아직 미혼(未婚)이오. 신체는 보다시피 건강해서 충분히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고, 그렇게 게으른 편도 아니오.”
 엽단풍은 입가에 침도 바르지 않고 주절주절 잘도 지껄여댔다.
 “게다가 잠을 잘 때 코를 고는 버릇도 없고, 남들처럼 술버릇이 나쁘지도 않소. 손재주가 좋아서 아무 거나 다 잘만들고, 어린 아이를 싫어하지도 않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아주 믿음직하고 성실하며 자상한 남편감이란 이야기요.”
 그의 일사천리같은 말에 공손단경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멍한 표정이었다.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칭 훌륭한 남편감이라고 떠벌이고 있으니 누가 보기에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공손단경은 한동안 멍하니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망사사이로 나직하게 웃었다.
 “풋!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 말을 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했나요?”
 다른 건 몰라도 엽단풍의 낯짝은 철판보다 두꺼운 게 틀림없었다.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꺼리끼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남들하고 대화하는 걸 별로 바라지 않소.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한건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 과연 소문처럼 대단한 미인인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오.”
 공손단경의 눈빛이 망사사이로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내가 만일 소문과 달리 별로 예쁜 미인이 아니라면?”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나는 잘 있으란 말을 하고 이대로 술집에 가서 술이나 진탕 퍼마실거요.”
 “만일 내가 소문처럼 미인이라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엽단풍을 주시했다. 엽단풍은 히죽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꼬셔서 술을 한 잔 같이 마신다음 데리고 잘 생각이오.”
 사람들은 아연해져서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눈앞의 이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공손단경을 술집에서 몸을 파는 기녀(妓女)처럼 손쉽게 데리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가 존재하다니...
 설사 그런 마음을 품었다 해도 어찌 그걸 당사자 앞에서 직접 말할 수 있겠는가?
 혹시 이 자는 공손단경이 어떤 신분의 여자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커다란 체구만 믿고 천하의 누구도 감히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공손단경도 일시지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화가 나서 말을 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 대답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아무튼 그녀의 심정이 지금 어떠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엽단풍만은 제외였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넉살좋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은 물론 싫다고 하겠지만, 나하고 조금 지내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요. 나는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니 당신은 그저 내게 모든 일을 맡기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오.”
 대체 이런 일에 경험이 많다는 건 무슨 말이고, 모든 일을 맡기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공손단경의 얼굴은 망사에 가려 있어서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그린 듯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히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냉막한 인상의 귀공자였다. 귀공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은 엽단풍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의 얼굴에 고정된 채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벌려지며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이나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작자로군. 소궁주(小宮主)는 이런 자와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시오?”
 공손단경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냉공자(冷公子)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냉공자라 불리운 귀공자의 음성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소궁주만 괜찮다면 나는 이 자를 물리치고 소궁주와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소. 소궁주의 의향은 어떻소?”
 공손단경은 망사 속에서 조용하게 웃었다.
 “냉공자님이 하시려는 일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어요? 냉공자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녀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를 치켜세우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조금 미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냉공자는 그 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표정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냉공자는 짤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운(程雲)! 이 자를 밖으로 내보내라.”
 그의 뒤에 말없이 시립해 있던 두 명의 청의중년인중 입가에 깨알만한 점이 찍혀 있는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운이라 불리운 청의중년인은 즉시 엽단풍의 앞으로 다가왔다.
 “귀하. 따라오시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라오라니?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한단 말이오?”
 정운은 입가에 냉랭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이곳은 귀하가 더 있을 자리가 아니오.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밖으로 나오시오.”
 엽단풍은 봉두난발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 공손단경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소?”
 “좋게 말 할 때 순순히 나를 따라 오시오.”
 “난 이곳에 있는 게 더 좋소. 정 나가고 싶으면 당신이나 나가구료.”
 정운의 눈가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정말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소?”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난 철이 든 이후로 뭘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도 없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용건이 없으니 당신 혼자서 밖을 싸돌아다니든 관을 보고 눈물을 질질 짜든 마음대로 하구료.”
 정운의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로 해서는 안될 작자로군.”
 그는 엽단풍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우수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엽단풍의 어깨를 잡아왔다.
 스읏!
 정운의 손은 마치 매의 발톱처럼 강인하고 빨랐다. 누구라도 그 강철 같은 손아귀에 걸린 다면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갈라질 것 같았다. 더구나 그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과연 엽단풍은 피하지 못하고 정운의 갈쿠리같은 손에 그대로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내 손이 독하다고 탓하지 마라!”
 정운은 악독하게 외치며 엽단풍의 어깨를 움켜잡은 손에 잔뜩 공력을 돋구었다.
 뚝!
 뼈가 으스러지는 음향이 들려오며 한 사람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크으윽...!”
 냉공자는 냉랭한 웃음을 지으며 그쪽을 돌아보다 안색이 홱 변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고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정운이 아닌가?
 그는 오른 손가락이 모두 부러졌는지 손가락이 기이하게 뒤틀린 채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모... 몸뚱아리가 이렇게 단단하다니...”
 엽단풍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 몸이 단단한 게 아니라 당신 손가락이 너무 약한 거요. 그래가지고야 어디 닭목아지라도 비틀 수 있겠소?”
 정운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미... 미친 놈! 어디 내 검을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그는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쾌액!
 검을 뽑는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이 허리춤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섬뜩한 검광(劍光) 한 가닥이 엽단풍의 가슴팍을 향해 폭사해 나오고 있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쾌검(快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단풍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덥석 오른 손을 내밀어 그 무시무시한 검광을 잡으려 했다.
 “이 놈!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검광 속에서 정운의 폭갈소리가 터져 나오며 검광이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팟!
 검광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엽단풍의 오른손을 그대로 궤뚫어 버렸다. 아니, 궤뚫었다고 느꼈다.
 검광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이란...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날아들던 정운의 검이 엽단풍의 커다란 손아귀에 그대로 잡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수가...”
 정운은 검을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경악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검이 어떻게 상대방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놀란 것은 비단 정운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주인인 묘우사태는 물론이고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공손단경의 눈가에 마저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냉공자였다.
 냉공자만이 정운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뢰쌍검(奔雷雙劍)의 검을 맨 손으로 잡아내다니...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군.’
 그는 엽단풍에 대한 생각을 달리한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전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운과 그의 쌍둥이 형인 정풍(程風)은 과거 하남(河南)일대를 석권했던 절정의 검객들이었다. 십 여년 전만 해도 분뢰쌍검 정씨형제(程氏兄弟)의 명성은 강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검법은 비단 빠르고 날카로울 뿐 아니라 강맹하기 그지없어 별호 그대로 마치 뇌전(雷電)이 치는 듯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의 검을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인 양 쉽사리 빼앗아 버리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중인들의 이런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른손에 움켜잡은 정운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저 자는 이게 굉장히 무서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 처럼 큰소리를 쳤는데 어째서 이렇게 변변치 못한 것일까?”
 그가 검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검의 한 부분이 뚝뚝 부러졌다.
 “이것 좀 봐! 이건 유리로 만든 게 분명하군. 손가락도 그렇고 차고 있는 검도 이 지경이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로군.”
 그는 쯧쯧하고 혀까지 차는 것이엇다.
 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의 검은 비록 절세의 신병(神兵)은 아닐지라도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강검(靑剛劍)으로서 분뢰쌍검의 명성을 천하에 날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청강검이 엽단풍의 수중에 들어가자 정말 유리로 만든 것인양 맥없이 부러지고 있으니 그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는 상대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인물임을 알았으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을 생각하자 도저히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이... 이 미친 놈...!”
 그가 막 노성을 지르며 엽단풍에게 달려들려 하는 순간, 냉공자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정운. 물러나라.”
 정운은 이를 악문 채 엽단풍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냉공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엽단풍을 돌아보았다.
 “내가 귀하를 잘못 보았군. 귀하는 확실히 이곳에 와서 큰 소리를 칠 실력이 있소.”
 엽단풍은 여전히 장검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아 주는군.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의 얼음덩어리같은 얼굴이 아니라 저기 앉아 있는 저 여자요.”
 그는 턱으로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공손단경을 가리켰다.
 냉공자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흐흐... 광오(狂傲)하군. 내가 누구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엽단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소. 나는 원래 남자에게는 별로 관심없소.”
 냉공자의 낮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나 절정공자(絶情公子) 냉우빙(冷宇氷)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 자는 아직 없었소.”
 “그거야 당신이 견문이 좁은 탓이지. 그런데 참... 당신 이름이 냉우빙이라 했소?”
 엽단풍이 묻자 냉공자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렇소. 왜 이제 생각이 달라졌소?”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이름이 생긴 것하고 아주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소. 과연 당신은 내 짐작대로 얼음(氷)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구료.”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단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망사속 에서 나직하게 웃었다.
 심지어 근엄한 표정의 묘우사태마저 웃음을 참느라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냉우빙의 안색이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정도로 냉막하게 변했다. 그의 일생(一生)에 이와같은 모욕을 받은 적은 일찌기 없었다.
 절정공자 냉우빙은 강남무림(江南武林)에서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손꼽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용모가 출중하고 공력이 초절할 뿐 아니라 검법에 있어서는 젊은 층의 고수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강남제일공자(江南第一公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냉우빙은 별호만큼이나 냉혹하고 차가운 성격이라 모두들 그를 두려워해서 누구도 그의 앞에서 그를 무시하거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언제 엽단풍같은 사람을 만나 보았겠는가?
 
 2
 엽단풍은 냉우빙의 안색이야 어떻게 변하건 신경쓰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럼 용무가 끝났으면 얼음공자께선 이만 비켜주시지 않겠소? 난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오.”
 이어 성큼성큼 냉우빙의 옆을 지나 공손단경에게 다가가려 했다.
 냉우빙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작자로군.”
 그의 오른쪽 소매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거렸다.
 파아아....
 그와 함께 무언가 노도와 같은 암경(暗勁)이 엽단풍의 상체를 향해 밀려왔다.
 이것은 금강무영수(金剛無影袖)라는 초절정의 상승무공(上乘武功)으로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도 박살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금강무영수는 그야말로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기 그지없어 엽단풍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대로 가슴을 강타당하고 말았다.
 쾅!
 굉음이 터지며 엽단풍의 커다란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오히려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냉우빙 자신이었다.
 “으음....”
 그는 주춤 뒤로 두 걸음 물러난 뒤 얄팍한 입술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호신강기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엽단풍은 물끄러미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은 완전히 먼지로 화해 맨 가슴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조금 전 그가 당한 일격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엽단풍은 별다른 충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투덜대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건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옷인데 벌써 못쓰게 되었으니... 나는 마음이 너무 좋은 사람이지만 이건 도저히 참지 못하겠군.”
 그는 냉우빙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옷 값을 물어내던지 아니면 새 옷을 하나 사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옷을 홀라당 벗겨 버리고 말겠소.”
 냉우빙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검을 피할 수 있다면 물론 그렇게 하지.”
 엽단풍은 팔짱을 낀 채 히죽 웃었다.
 “그렇게 하다니... 옷을 물어주겠다는 거요? 아니면 홀라당 벗겠다는거요?”
 냉우빙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그는 냉정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경천삼검(驚天三劍)을 모두 받아낸다면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겠소.”
 경천삼검이란 말에 공손단경과 묘우사태의 눈에 경악어린 빛이 떠올랐다.
 하나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 좋소, 좋아! 당신의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당신의 알몸도 얼굴처럼 그렇게 차가운지 알아봐야겠소.”
 냉우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얼음장같이 냉막한 그의 얼굴 한가운데 박힌 두 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殺光)이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경천뢰(驚天雷)!”
 갑자기 그의 얄팍한 입술을 뚫고 싸늘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서 십 여 가닥의 번갯불같은 검광이 폭사해 나왔다.
 파파팟!
 그것은 마치 마른 하늘에 수십 개의 뇌전이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수십 개의 뇌전은 허공을 갈가리 찢어 놓으며 엽단풍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그야말로 보기만해도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가공스러운 위력이었다.
 경천삼검은 강호무림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상고절학(上古絶學)으로서, 한 번 펼치면 능히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다고 알려진 절세(絶世)의 검법이었다. 지난 수십년동안 이 검법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어느 누구도 익혔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냉우빙의 손에 의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엽단풍의 전신은 그 폭발치듯 퍼부어지는 수십 개의 검광 속에서 금시라도 조각조각 잘려질 것만 같았다.
 폭죽처럼 피어오르던 검광이 사라지고 장내의 광경이 나타났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경탄성이 흘러나왔다.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입고 있는 흑의도 그대로 였고, 흐트러진 흑발 또한 변함이 없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중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검광이 그의 전신을 수십 차례나 지나갔을 텐데 아무런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니....
 냉우빙은 엽단풍의 일 장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우유빛 검광이 번뜩이는 연검(軟劍)이 쥐어져 있었다. 냉우빙은 엽단풍을 뚫어지게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문득 엽단풍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왼쪽 소매 한구퉁이가 조금 잘려져 나가 있었다. 엽단풍은 잠시 잘려나간 자신의 옷소매를 내려보다가 냉우빙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멋진 초식이오. 과연 경천삼검의 이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냉우빙은 여전히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엽단풍은 별반 표정 없는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빠른 것에 비해서 어째 변화의 묘미는 좀 떨어지는 것 같군.”
 냉우빙의 몸이 움찔거렸다.
 엽단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그 말은 사실은 경천삼검중 제일초식인 경천뢰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짧은 순간에 경천뢰의 가공할 쾌검을 피하면서 언제 그 초식의 약점을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냉우빙의 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다음 순간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재차 엽단풍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으으....
 그의 연검에서 뿌연 안개같은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바로 경천삼검의 두 번째 초식인 경천무(驚天霧)가 전개된 것이다.
 경천무는 비단 빠르기도 빠를 뿐 아니라 검이 떨쳐나가는 범위와 변화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엽단풍의 몸은 순식간에 그 검의 안개속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앗?”
 안개속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는 바로 냉우빙이 아닌가? 엄청난 기세로 공격해 들어갔던 냉우빙이 너무도 간단하게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냉우빙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더니 이내 두 손으로 연검을 잡은 채 커다랗게 휘둘렀다.
 “이야압!”
 주위를 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소리가 터져나오며 그의 검에서 마치 그물같은 검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파파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그 그물같은 검광의 소용돌이속에 휩싸여 버렸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그물 속에서는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경천삼검의 마지막 초식인 경천망(驚天網)이었다.
 경천망의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은 경천뢰의 빠르기에 경천무의 변화무쌍함을 가미한 것으로, 절대로 맨손으로는 견뎌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엽단풍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오른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주먹은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별다른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하나 그 다른 사람의 주먹보다 두 배는 더 클 듯한 주먹이 천천히 움직이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스스...
 그 느리게 다가오는 주먹에 닿는 순간 냉우빙이 펼쳐낸 막강한 검광의 그물이 맥없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예리한 도끼에 닿은 그물이 가닥가닥 끊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냉우빙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사력(死力)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자신의 검세 속을 천천히 뚫고 들어오는 그 커다란 주먹을 막을 수가 없었다.
 쾅!
 주먹과 검이 정면으로 격돌하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져나왔다.
 “크윽!”
 냉우빙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왈칵 피를 토하고 말았다.
 “우웩!”
 냉우빙은 한 차례 시뻘건 피를 토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든듯 경악과 불신어린 표정으로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천하에 이렇게 무거운 권법(拳法)이 있다니...”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마치 천하의 무엇으로도 꿈쩍하지 않을 거대한 철탑(鐵塔)을 보는 것 같았다. 거친 흑의를 장대한 체구에 감추고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말 못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엽단풍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담담한 눈으로 냉우빙을 응시했다.
 “당신의 검을 피하면 당신의 알몸을 구경시켜준다고 한 것 같은데...”
 냉우빙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엽단풍은 빙긋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약속이 약속이니만큼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그의 커다란 손이 흡사 거대한 문어발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자 냉우빙은 급히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하나 이상하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오는 그 손그림자의 위세가 실로 기이하여 도저히 피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찌익!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냉우빙의 어깨부분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어허. 옷벗는 걸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왜 피하는거요? 당신은 그럼 스스로 벗겠단 말이오?”
 엽단풍은 오른손에 찢어진 냉우빙의 옷자락을 든 채로 히죽히죽 웃었다.
 냉우빙은 멍하니 찢어진 자신의 옷자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치욕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옷 좀 찢어진 걸 가지고 치욕은 무슨... 약속 안 지키고 도망가면 그게 진짜 치욕이지.”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어 냉우빙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냉우빙은 다시 전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엽단풍의 그 커다란 손그림자를 피할 수가 없었다.
 찌찌찍!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냉우빙의 허리부분 옷자락이 찢어져 그의 속살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냉우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날아갔다.
 “하하... 그냥 가면 어떡하오? 약속을 지켜야지.”
 엽단풍이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 할 때 돌연 그의 양쪽에서 섬뜩한 검광이 폭사해 왔다.
 정운과 정풍이 냉우빙을 쫒아가는 엽단풍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엽단풍은 수중에 들고 있던 냉우빙의 찢겨진 옷자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네들 알몸이 아니라니까. 난 저 얼음공자의 알몸이 보고 싶단 말이오.”
 까까깡!
 불똥이 튀기며 정운과 정풍의 몸이 뒤로 주르르 격퇴되었다.
 “크윽!”
 “큭!”
 놀랍게도 옷자락이 닿은 순간 그들의 검은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하나 그 순간 냉우빙의 몸은 어느 새 창문을 뚫고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엽단풍! 이 복수는 반드시 해 주겠다...!”
 멀리서 냉우빙의 분노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엽단풍은 찢어진 옷자락을 든 채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것 참. 저 자는 속살이 뽀얗고 보들보들해서 여자 알몸 보는 기분이 날 것 같았는데...”
 그가 혼자 주절거리고 있는 동안에 정운과 정풍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냅다 냉우빙이 사라진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도망쳐 버렸다.
 실로 천하가 경동(驚動)할 일이었다.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절정공자와 분뢰쌍검이 한 사람이 무서워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엽단풍은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명색이 강남제일의 공자라는 작자가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그까짓 알몸 좀 보여주는 게 그렇게 큰 일인가? 그냥 목욕하러 왔다고 생각하면 될 텐데 말이야....”
 그는 연신 히죽히죽 웃더니 고개를 돌려 공손단경을 바라보았다.
 
 
 제 4 장 세 가 지 조 건
 
 1
 “자. 이제 훼방꾼이 모두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해 볼까.”
 엽단풍은 기세좋게 말하며 공손단경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공손단경은 여전히 처음의 그 자세대로 앉은 채 침착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엽단풍은 그녀의 일 장 앞에 와서 우뚝 섰다.
 “어떻소? 이제 망사를 벗고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
 공손단경은 잠시 눈을 반짝인 채 엽단풍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와 술을 마시고 싶은가요?”
 엽단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무래도 먼저 분위기를 잡아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오늘 반드시 그녀와 술을 마시고 그녀를 안고 자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손단경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하고나 같이 술을 마시지는 않아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여자라면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당신이 정 원한다면 할 수는 있어요.”
 “그거 참 바람직한 생각을 했구료.”
 “그런데....”
 공손단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엽단풍은 그녀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나는 취향이 독특해서 결코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아요.”
 엽단풍은 손뼉을 탁 쳤다.
 “정말 신통하군. 나도 바로 그렇소.”
 “나는 술은 혈리홍(血裡紅)밖에는 마시지 않아요.”
 엽단풍은 술을 광적(狂的)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혈리홍이란 술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당장 가서 그 술을 구해 오겠소.”
 공손단경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혈리홍은 워낙 예민한 술이라 보통 술잔에 따르면 그 독특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차게 보관한 취옥배(翠玉杯)에 따라 마셔야만 그 진미를 만끽할 수가 있어요.”
 “그럼 그 취옥배란 것도 구해 오지.”
 엽단풍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공손단경의 요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입맛도 조금 까다로운 편이에요.”
 엽단풍은 빙그레 웃었다.
 “예쁜 여자들은 대개 그렇지.”
 “나는 생선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잉어요리만 먹어요.”
 “최고의 잉어요리 전문가를 데리고 오겠소. 그러면 나와 함께 술을 마시겠소?”
 그제서야 공손단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술 한 잔 마시기 힘들군. 하지만 이렇게 격식을 차려 마시는 술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엽단풍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공손단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데 나하고 술을 마실때는 그 보기싫은 망사는 벗어버리는 거요.”
 공손단경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순순히 승락을 했다.
 “그렇게 하겠어요.”
 엽단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하... 그럼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 벼락같이 갔다 오리다.”
 그러더니 그대로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시끄럽게 나타났다가 일진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장내에는 아직도 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실내에는 공손단경과 묘우사태만이 달랑 남아 있었다.
 그때 문득 공손단경이 한쪽을 돌아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오거라.”
 그러자 허공에서 하나의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하하... 이제야 말로 그 자식이 보기 좋게 당했군.”
 낭랑한 음성과 함께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인영은 다름아닌 봉일평이었다.
 봉일평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공손단경의 앞으로 걸어왔다.
 공손단경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일러준대로 그 자에게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마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냐? 혈리홍은 뭐고 취옥배란 또 무엇이냐?”
 봉일평은 이미 그녀와 친분이 두터운 듯 조금도 꺼리낌없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활짝 웃었다.
 “하하... 그야 혈리홍은 술이고 취옥배는 술잔이지 뭡니까?”
 “그런 물건들이 진짜 있기는 있는 거냐?”
 봉일평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분명히 혈리홍이란 술이 있고 취옥배란 술잔도 있습니다.”
 공손단경의 얼굴이 망사속에서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만일 그 자가 그것들을 구해온다면 정말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해야 되는게 아니냐?”
 봉일평은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하하... 그 자와 술 한 잔 같이 마신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무얼 그리 두려워 하십니까?”
 공손단경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너 정말...”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테니...”
 봉일평은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급히 말했다.
 “비록 혈리홍과 취옥배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자가 그걸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솜씨좋은 잉어전문 요리사는 결코 흔하게 구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걱정마시라니까요. 설사 만에 하나 그 자가 그걸 구해온다해도 그때는 그 작자는 아마 누님과 술을 마실 시간도 없을 겁니다.”
 공손단경은 귀가 솔깃한 듯 눈이 반짝 빛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봉일평은 득의만면한 웃음을 머금었다.
 “누님은 혈리홍과 취옥배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곳이 어디냐?”
 봉일평은 공손단경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조그맣게 소근거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무척 친밀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체높고 고고하기로 유명한 공손단경이 어찌 외간남자가 자신의 몸에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여 귀속말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겠는가?
 봉일평의 말을 듣고난 공손단경의 아름다운 봉목(鳳目)이 활짝 커졌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니까요. 그 자가 만일 혈리홍과 취옥배의 행방을 찾아 그곳으로 간다면 그 자는 호랑이수염을 건드린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언제 누님에게 엉뚱한 수작을 부릴 경황이 있겠습니까? 하하...”
 봉일평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제서야 공손단경의 안색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봉일평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보니 너는 진작부터 그 자를 잘 알고 있었구나.”
 봉일평은 웃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잘 알기는요. 제가 그런 천하의 불한당같은 놈을 알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를 골탕먹이지 못해 그렇게 안달이냐?”
 “글쎄 그 미친 자식이...”
 봉일평은 자신이 엽단풍에게 봉변을 당한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항상 침착했던 공손단경도 봉일평이 그에게 두 번씩이나 뺨을 꼬집혔다는 말을 듣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붙잡고 웃었다. 심지어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묘우사태마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호호호...”
 공손단경이 큰 소리로 웃자 봉일평은 입이 잔뜩 부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아뭏든 전 태어나서 그런 꼴은 처음 당해봤다니까요. 그래서 그 놈을 만나기만 하면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호호... 그가 이곳으로 오는걸 보고 네 그 약아빠진 꾀가 발동을 한 게로구나.”
 “난 단번에 그 미친 놈이 누님에게 엉뚱한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는걸 알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그 자식을 골탕먹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 자식이 술을 좋아한다는게 생각나서 누님에게 전음(傳音)을 보낸 겁니다.”
 “호호...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봉일평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하긴요. 이런건 약과입니다. 다음에는 그 작자에게 좀 더 쓴맛을 보여줄 생각이에요.”
 공손단경은 아직도 눈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네가 아니라 그 엽단풍이란 사람말이다.”
 봉일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런 작자가 뭐가 대단해요?”
 공손단경은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단 하루만에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던 너를 두 번씩이나 낭패스럽게 하고 명성이 무림을 진동하고 있는 절정공자와 분뢰쌍검을 놀라서 도망치게 했으니 어찌 대단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봉일평은 툴툴거렸다.
 “그 자의 무공은 그런데로 쓸만하지만... 내가 당한건 다 그 자가 설마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에요.”
 “호호... 누가 뭐라더냐?”
 공손단경은 여전히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봉일평은 공연히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거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급히 물었다.
 “참. 그런데 그 절정공자 냉우빙이 무엇때문에 누님을 만나러 왔습니까?”
 그 물음에 공손단경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걷히며 눈가에 일말의 수심(愁心)이 떠올랐다.
 그녀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봉일평은 누가 밤에 자신의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오기라도 한 듯 펄쩍 뛰며 놀랐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그 자가 무슨 커다란 걱정거리라도 됩니까?”
 공손단경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갑자기 궁(宮)을 떠나 이곳에 온 것도 다 그 일 때문이다.”
 “그 일 때문이라니요?”
 “한 달전에 궁으로 몇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절정공자와 나의 혼사(婚事)를 추진했으면 한다며 아버님께 의향을 물어보러 왔다.”
 “누님은 그 전에 절정공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공손단경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들이 올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절정공자를 만난 일이 없다.”
 “그러면 그냥 거절해 버리면 되는 일 아닙니까?”
 공손단경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무엇때문에 궁을 나와 이곳까지 왔겠느냐?”
 봉일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렷다.
 “아니 왜 거절을 못합니까?”
 공손단경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을 찾아온 사람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버지께서 차마 거절의 말씀을 하실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이 누구이길래 서천(西天)의 패자(覇者)이신 공손숙부(公孫叔父)께서 거절하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
 “찾아온 사람은 쌍수전원(雙手纏猿) 교원(喬原)과 귀영자(鬼影子) 당대붕(唐大鵬), 그리고 독효(毒梟) 고홍(古洪)이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을 듣자 봉일평은 안색이 변하며 입을 다물었다.
 공손단경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무림에서 차지하는 명성이나 비중으로 보아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그들의 제안을 무작정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셨고 그들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제시했다.”
 봉일평은 어지간히 놀란 듯 한참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체 절정공자의 내력이 무엇이길래 그런 인물들이 그를 위해서 중매를 서려고 하는 겁니까?”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절정공자의 뒤에는 막강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봉일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그 배경이 대체 무엇입니까?”
 공손단경은 그녀답지 않게 약간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나직한 탄식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바로...”
 
 
 2
 천석평(千石坪).
 천석평은 소주의 동쪽 외곽에 있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공터였다.
 서쪽 하늘이 온통 붉은 노을로 물들어오는 천석평의 공지에는 오직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두 명의 인물이 천석평의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한 채 금시라도 무시무시한 격투를 벌일 듯했다.
 우측의 인물은 수중에 커다란 감배산도(坎背山刀)를 든 중년인이었다. 그는 소주일대에서는 가장 큰 표국(票局)인 대하표국(大河鏢局)의 국주인 팔괘만승도(八卦萬勝刀) 범여립(范汝立)이었다.
 좌측의 인물은 시뻘건 혈검(血劍)을 들고 있는 비쩍 마른 초로의 인물이었는데, 소주혈검문(蘇州血劍門)의 문주인 혈검추혼(血劍追魂) 궁일지(宮逸志)였다.
 범여립과 궁일지는 소주일대에서는 가장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대하표국에서 표물을 운송하다가 혈검문의 수하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두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결투에 임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휘잉...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자 두 사람은 드디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아니, 손을 쓰려고 막 병기를 뽑으려했다.
 바로 그때,
 슷!
 어디선가 하나의 인영이 그들사이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정말 마치 한 줄기 허깨비와도 같았다. 범여립과 궁일지는 물론이고 그들의 결전을 참관(參觀)하기 위해서 와있던 강남삼호(江南三狐)조차도 그 인영이 어떻게 장내에 나타났는지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칙칙한 흑의를 입고 허리춤에는 녹이 잔뜩 슬은 칼 한 자루를 달랑 매어단 봉두난발의 사내였다. 얼마나 체구가 컸는지 그가 범여립과 궁일지의 가운데에 우뚝 서 있자 마치 종달새들 무리에 황새 한 마리가 끼어든 것 같았다.
 흑의사내는 멍청히 서 있는 범여립과 궁일지를 돌아보더니 돌연 불쑥 물었다.
 “당신들 싸우려고 그러시오?”
 범여립은 난데없이 나타난 집채만한 크기의 흑의사내가 자신을 향해 묻자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흑의사내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나와 한 판 붙어봅시다.”
 그러더니 그는 불문곡직하고 범여립을 향해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범여립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어처구니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하마터면 흑의사내가 휘두른 주먹에 정통으로 턱주가리를 맞을 뻔 했다.
 범여립은 안색이 대변해 간신히 흑의사내의 그 커다란 주먹을 피했다.
 “아니 이런 미친 놈이 있나?”
 범여립은 발연대노해 흑의사내를 향해 수중에 들고 있던 감배산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가 내리친 일도는 팔괘만승도라는 외호답게 무시무시한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 그의 일도가 채 내리쳐 지기도 전에 범여립의 턱을 비껴갔던 흑의사내의 주먹이 허공에서 뚝 꺾여지더니 그대로 그의 이마를 가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신속했기 때문에 강호경험이 풍부한 범여립으로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쾅!
 “크윽!”
 순식간에 무쇠솥같은 주먹에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당한 범여립은 눈앞에 별똥이 아른거렸다. 그의 이마는 금새 퉁퉁 부어올라 마치 커다란 혹을 매달은 것 같은 형상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앞에 서 있던 궁일지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날렸다.
 이마가 퉁퉁 부은 범여립의 모습이 몹시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하나 그의 웃음은 채 반도 계속되지 못했다. 넌 뭐가 잘나 웃고 있느냐는 듯 흑의사내가 돌연 그를 향해 발차기를 해왔던 것이다.
 흑의사내가 휘두른 발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궁일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옆구리를 강타당했다.
 퍽!
 “우욱!”
 그는 허리가 반으로 뚝 꺽인 채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나 통증이 심했는지 궁일지는 오십 평생 처음으로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다 나왔다.
 흑의사내는 두 사람의 가운데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당신들은 이런 실력으로 서로 싸우려고 했단 말이오? 그것 참...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그의 말은 범여립과 궁일지의 가슴을 박박 긁는 것이었다.
 “이 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범여립이 분기탱천하여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다시 흑의사내의 주먹이 그의 입을 향해 날아왔다.
 범여립은 급히 입을 다물고 수중의 감배산도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파앗!
 섬뜩한 도광이 번뜩이며 흑의사내의 주먹이 별안간 없어져 버렸다.
 범여립이 어리둥절하여 칼을 멈추려는 순간, 돌연 그의 코앞에서 바위덩어리만한 주먹이 불쑥 나타나더니 퉁퉁 불거져 나온 그의 이마를 냅다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빠악!
 “아이쿠!”
 범여립은 너무도 아파서 머리를 싸매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이마는 퉁퉁 부어오르다 못해 아예 부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궁일지는 간신히 아픈 배를 움켜쥐고 비실비실 바닥에서 일어나다가 얼굴이 샛노랗게 변했다. 그의 눈앞으로 하나의 발이 다가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팍!
 궁일지는 정통으로 뺨을 강타당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벌려진 그의 입술 사이로 옥수수같은 이빨이 우수수 흘러나왔다.
 “끄으응....”
 궁일지는 바닥을 바둥거린 채 한손으로는 배를,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감싸안은 채 끙끙거렸다.
 흑의사내는 번개같이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는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강남삼호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이거야 원 너무 싱거워서 재미가 없군. 어디 당신들 실력은 어떤지 한 번 볼까?”
 강남삼호는 이 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무공실력도 뛰어나지만 특히 두뇌가 비상하고 견식이 풍부해서 세 사람이 합쳐서 모르는 일은 적어도 강남(江南)일대에서는 없다고 까지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원래 이번 대결의 참관인을 의뢰받고 느긋한 마음으로 범여립과 궁일지의 대결을 구경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마어마한 체구의 흑의사내가 나타나 그들을 단숨에 때려눕히자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그의 말을 듣자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방금전 흑의사내의 놀라운 실력을 보았는지라 절로 안색이 대변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나 그때 흑의사내의 몸은 어느 새 허공을 날아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헛?”
 그들은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제각기 손을 휘둘러 흑의사내에 맞서가려 했다.
 흑의사내의 주먹이 별안간 수십 개로 변했다.
 파파파팍!
 마치 천지사방이 온통 주먹의 그물로 덮어 씌운 것 같았다.
 강남삼호의 둘째인 병호(病狐) 하수인(何守仁)이 질겁을 하고 피하려 했으나, 사방이 온통 권영(拳影)에 휩싸여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격중당하고 말았다.
 파팍!
 “케엑!”
 그는 옆구리와 가슴팍을 다섯 번이나 가격당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흑의사내는 쉬지 않고 빙글 몸을 돌리며 발길질을 해댔다.
 파라라락!
 허공이 온통 발그림자로 뒤덮혔다. 강남삼호의 나머지 두 사람은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발길질 한 번에 마흔 여덟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퍽! 퍽! 퍽!
 “크윽!”
 “헉!”
 그들은 제작기 다섯 번의 발길질을 당하고 사방에 널부러졌다.
 그제서야 흑의사내는 공격을 멈추고 장내를 둘러 보았다. 장내는 그야말로 한바탕 세찬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다섯 명의 고수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광경이 마치 폭풍우에 뿌리가 뽑혀진 채 널려진 나무들 같았다.
 “쳇! 무시무시한 싸움이 있을거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왔더니 이거 너무 싱겁군. 신나게 몸좀 풀어보려고 했는데...”
 흑의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연신 툴툴거리고 있었다.
 강남삼호의 우두머리인 비호(飛狐) 하수광(何守廣)은 바닥에서 바둥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대... 대체 무엇때문에 우리에게 손을 쓴거요?”
 그는 가슴이 빠개지는 듯 아픈 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흑의사내는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별건 아니고 당신들한테 뭣 좀 물어볼게 있어서...”
 “무... 물어볼 거라니...”
 “간단한 거요. 당신들이 내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준다면 나도 기분좋게 이 자리를 떠날거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는...”
 흑의사내는 아직도 바닥에 개구리처럼 뻗어 있는 범여립과 궁일지를 가리켰다.
 “당신들도 저 자들 꼴이 되지 말라는 보장을 도저히 할 수가 없구료.”
 하수광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어보시오. 아는대로 대답해 드리겠소.”
 흑의사내는 입을 벌리고 활짝 웃었다.
 “참으로 자상한 마음씨로군. 당신은 틀림없이 복(福)을 듬뿍 받을거요. 내가 알고 싶은건 딱 세 가지인데...”
 그는 강남삼호 세 사람을 쓰윽 흝어 보았다.
 “마침 당신들도 세 사람이니 한 사람이 하나씩 대답하면 되겠구료. 이런 공평한 일은 아마 다시 없을거요. 그렇지 않소?”
 강남삼호는 완전히 벌레씹은 듯한 얼굴이었으나, 흑의사내가 커다란 주먹을 들어올리자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아주 공평하오.”
 흑의사내는 히죽 웃으며 들어올린 손으로 봉두난발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음... 며칠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더니 영 간지럽군.”
 그는 보기에도 시원하리만치 박박 머리를 긁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싶은건 단지 혈리홍인가 뭔가 하는 술과 취옥배인지 뭔지 하는 술잔이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하고, 이 일대에서 잉어요리를 제일 잘하는 요리사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아주 간단한 것이오.”
 이어 그는 무시무시한 안광을 번뜩이며 강남삼호를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물론 이것을 잘 알고 있겠지?”
 강남삼호는 서로 앞을 다투어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오. 물론 알고 있소이다.”
 엽단풍은 안광을 거두며 다시 히죽 웃었다.
 “그럼 차례로 한 사람씩 대답해 보시오. 먼저 낮두꺼비같이 생긴 당신부터 말해보실까.”
 그의 커다란 손은 강남삼호의 첫째인 하수광을 가리켰다.
 하수광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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