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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 1권-1

2014.12.30 조회 1,221 추천 7


 序 章 Ⅰ 神 秘 의 高 手
 
 --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는 누구냐?
 
 지난 백 년 동안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십 년 전의 검도쌍성(劍刀雙聖)이 사라진 이후 수많은 기인고수(奇人高手)들이 나타났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천하제일고수’의 여섯 글자를 쟁취한 사람은 없었다.
 하나 몇 년 전부터인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인물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 옥면청삼(玉面靑衫) 절정신검(絶頂神劍) 육청운(陸靑雲)!
 
 그를 천하제일의 고수로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기인이사가 구름처럼 모여 있고 광활하기 그지없는 무림천하(武林天下)에서 제일고수(第一高手)로 불리는 것일까?
 그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강호무림에는 육청운이라는 신비한 인물에 대한 소문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듯이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인물이 칠 척(七尺) 장신의 청삼을 즐겨 입는 대장부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도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자가 없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할 때마다 달랐다.
 어떤 사람은 그를 정파(正派)의 대협객(大俠客)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신에 사악한 기가 넘쳐흐르는 일대마두(一大魔頭)라고도 했다. 문무(文武)를 모두 겸비한 완벽한 인물로, 얼굴은 전설의 미남자인 송옥(宋玉)이나 반안(潘安)을 훨씬 능가할 뿐 아니라 기상은 한 마리 학(鶴)처럼 고고하고, 시서금화(詩書琴畵)에 고루 능하다고 했다.
 특히 그의 검술은 가히 무적(無敵)의 경지에 달해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손에서 삼 초(三招) 이상을 견뎌 낸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삼초무적검왕(三招無敵劍王)’이라고도 불렀다.
 도대체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은 몇 살이나 먹었길래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만능(萬能)의 인간으로 신격화(神格化)되어 있는 것일까?
 이것 역시 제멋대로였다.
 열몇 살의 소년, 이십 대의 청년, 삼사십 대의 중년인, 심지어는 오십이 넘은 노인이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가 얼마나 변장을 잘하며 신비스러운 인물인지 짐작이 갈 일이었다.
 아무튼 육청운은 그 정체는 물론이고 내력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전 무림인으로부터 ‘천하제일고수’라는 공인을 받고 있었다.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
 마치 밀폐된 상자 속의 보석처럼 너무나 신비스럽기만 한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흑백도(黑白道)를 막론한 모든 무림인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다.
 육청운!
 그는 과연 누구인가?
 
 
 序 章 Ⅱ 殺 人 牒
 
 <건곤령(乾坤令) 제삼십칠호(三十七號).
 
 아래와 같이 살인첩(殺人牒)을 발동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척살(擲殺)하라.
 
 척살일위(擲殺一位) : 옥면청삼 절정신검 육청운.
 척살이위 : 새장자(賽莊子) 남궁봉(南宮蜂).
 척살삼위 : 걸신(乞神) 악구천(岳九天).
 
  건곤교주(乾坤敎主).>
 
 
 第 一 章 風 波 無 雙
 
 춘삼월(春三月),
 날씨는 청량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섬서성의 고도(古都), 장안(長安)은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에 휘감긴 채 인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구맥(九脈)이라 불리는 동서남북의 아홉 개의 커다란 거리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客商)들과 유람객들, 그리고 온갖 사람과 수레와 기마(騎馬)로 붐볐다.
 길 양옆에는 주루와 찻집, 형형색색의 점포로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미시(米時)경.
 장안 동쪽의 성문 부근에 있는 동문대로(東門大路)에 두 명의 중년 장한들이 길을 걸으며 나직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청삼 장한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제 보경루(寶經樓)에서 벌어진 사건을 자네는 들었나?”
 오른쪽 장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말고. 도박귀신(賭博鬼神)이라 불리는 헌원당(軒轅堂)이 화씨세가(華氏世家)의 망나니 가주(家主)인 화일로(華一露)와 도박을 했다가 가진 돈을 몽땅 털리고 입고 있는 옷까지 빼앗겨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 말인가?”
 “그래. 한데 그 뒤에 또다시 일이 벌어졌다는데 그것도 알고 있나?”
 “그건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말해 주지. 헌원당이 개망신을 당하고 도망친 직후에 장안대호(長安大豪) 금경만(金鯨萬)이 흉명(凶名)이 자자한 파동삼귀(巴東三鬼)를 데리고 화일로 앞에 나타났다네.”
 오른쪽 장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파동삼귀라면 산동(山東) 지방에서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고 알려진 흉인(凶人)들 아닌가?”
 “그렇다네.”
 “금경만이 왜 그들을 데리고 화일로를 찾아왔나?”
 왼쪽 장한은 입술에 침을 바른 후 입을 열었다.
 “금경만은 자네도 알다시피 장안에서 제일가는 부자(富者)가 아닌가? 그런데 며칠 전에 화일로가 금경만의 집으로 불쑥 쳐들어와 다짜고짜 은자 십만 냥만 빌려 달라고 했다네.”
 “그래서?”
 “금경만이 어떤 인물인데 남에게 호락호락 돈을 빌려 주겠나? 더구나 화일로 같은 망나니한테.... 당연히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을 했지.”
 오른쪽 장한은 혀를 찼다.
 “저런.... 금경만은 호랑이 콧수염을 건드렸군그래.”
 “그렇지. 금경만은 아무리 화일로라도 설마 자기에게 허튼수작을 부리랴 싶었겠지만 화일로가 어디 그런 걸 가리는 인물인가? 한번 그 작자의 눈 밖에 벗어나면 천자(天子)라도 봉변을 당하고 말 텐데.... 한데 웬일인지 화일로는 아무 말도 없이 금경만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오고 말았네.”
 오른쪽 장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 말을 끝까지 좀 들어 보게. 그다음 날 금경만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자신의 보물 창고로 들어가 보니 자신이 가장 애지중지하던 취와미인상(醉臥美人像)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네. 어디 그뿐인가? 산더미 같이 싸 놓았던 금화가 물경 십만 냥이나 없어졌지 뭔가?”
 “허......!”
 “금경만은 단번에 그것이 화일로의 수작임을 알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어 속으로 이만 부드득 갈았다네.”
 “쯧! 화일로의 비위를 건드렸을 때는 그 정도 손해는 각오했어야 했는데.....”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날 저녁에 누군가가 금경만에게 작은 옥합을 보내왔다네. 금경만이 옥합을 열어 보니 산산이 박살이 난 취와미인상의 조각이 수북이 들어 있지 뭔가? 그리고 그 안에는, ‘이건 십만 냥에 대한 이자요.’라고 쓴 쪽지가 있었다네. 금경만은 그것을 보고 기절을 했다더군.”
 오른쪽 장한은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정말 화일로다운 솜씨로군. 그래서 금경만이 파동삼귀를 데려다가 그 복수를 하려고 했던 건가?”
 “그렇지. 금경만은 단단히 화가 나서 아주 비싼 돈을 주고 파동삼귀를 모셔다가 화일로를 혼내 달라고 부탁했다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어떻게 되긴..... 파동삼귀는 처음에는 제법 큰소리를 치며 화일로에게 덤벼들었으나 모두 저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았네.”
 “아,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네. 그 화일로의 무공은 소문보다 더욱 매서워서 파동삼귀는 몇 수 받아 보지도 못하고 차례로 쓰러졌다는군. 안된 건 금경만일세. 그자는 돈까지 뺏긴 데다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다더군.”
 오른쪽 장한이 돌연 탄식을 했다.
 “제길.... 그놈은 정말 불한당이로군. 화씨세가라면 그래도 제법 전통이 있고 명문 세가(名門世家)로 이름이 높은 곳인데 어쩌다 그런 망나니 같은 놈이 가주가 되었는지..... 그놈은 제 어미 배 속에 있을 때 뭘 잘못 먹고 태어난 게 아닐까?”
 왼쪽 장한이 질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쉿! 목소리를 낮추게.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다가 그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된통 경을 칠 테니....”
 오른쪽 장한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결 조심스러워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자는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나?”
 “만화루(萬花樓)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아니야, 그건 믿을 수가 없네. 그놈은 곳곳에서 사고를 저질러 원수가 허다하게 많네. 그런 입장에 고정적인 곳에 처박혀 있다면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부지할 수 없을 걸세.”
 왼쪽 장한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은자 오백 냥 벌기가 정말 힘들군.”
 오른쪽 장한도 맞장구를 쳤다.
 “그야 그렇지. 파동삼귀는 차치하고라도 그동안 그놈에게 목숨을 잃은 인물들을 생각해 보게.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이번에 그놈을 찾는 데 고용된 것은 그놈과 싸우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걸세. 우린 다만 그놈을 찾아내기만 하면 은자가 손에 들어오네. 또 그놈을 지정된 장소까지 유인해 갈 수만 있으면 다시 일천 냥을 더 얻을 수 있으니 그런 일은 한번 해 볼 만하지 않나?”
 오른쪽 장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내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리의 그 하 보주(何保主)께서 무엇 때문에 그놈을 찾는 일에 이토록 많은 은자를 서슴없이 쓰시는가 하는 것일세.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화일로, 그놈은 비록 화씨세가의 가주라고 해도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계집질과 싸움질뿐이었네. 그래서 그 많던 화씨세가의 재산도 다 거덜 내 먹고 마치 떠돌아다니는 거지처럼 천하를 유랑하며 좋은 일은 한 가지도 해 본 적이 없고 처먹고 마시는 데만 열중했다네. 오죽하면 풍파무쌍(風波無雙)이라고까지 불리겠나? 한데 그런 사고뭉치를 무엇 때문에 찾는단 말인가?”
 왼쪽 장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라면 내게 짐작되는 점이 있네.”
 오른쪽 장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무언가?”
 왼쪽 장한은 막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동료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여보게. 저...... 저 소리를 들어 보게.”
 과연 바로 이 순간, 맞은편 주루 위에서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술을 드세.
 잔을 놓아서는 안 되네.
 그대들을 위해 한 곡 노래하리니.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 주게.
 종이나 북소리에 옥같이 멋진 요리 무엇이 대단한가.
 그저 바라는 것은 깊이 취하여 깨지 않는 것이다.
 예부터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도 죽고 말면 그뿐이었나니.
 오직 술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느니라......
 
 여기까지 들리던 노랫소리가 순간 뚝 멈췄다.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요란한 박수갈채였다.
 두 명의 장한은 숨을 죽이고 그 노랫소리를 듣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장한이 다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가세. 그놈이 틀림없네.”
 두 명의 장한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중심가를 벗어나 맞은편의 그 술집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들이 주루에 들어서서 막 계단을 밟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앞에 있는 분들은 혹시 예중쌍패(豫中雙覇) 오(吳) 형과 도(都) 형이 아니오?”
 알고 보니 두 장한은 이 일대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는 예중쌍패 오달(吳達)과 도풍(都豊)이었다.
 오달과 도풍, 두 사람은 뜻밖의 소리에 흠칫하여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들을 부른 사람은 두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흑의인들은 층계 옆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두 흑의인이 앉은 탁상에 아무 음식도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달과 도풍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자 내심 떨떠름했다.
 두 흑의인은 이곳 장안에서 제법 유명한 위원표국(威遠鏢局)의 표두(鏢頭)들이었던 것이다. 하나 그들은 싫은 내색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뛸 듯 기뻐하는 표정으로 반색을 했다.
 “아! 학 표두(鶴鏢頭)와 이 표두(李鏢頭)였군요? 이거 오래간만입니다. 두 분께서는 친구분을 기다리는 중입니까?”
 그러자 학 표두라고 불린 흑의인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오. 두 분께서는 마침 잘 오셨소. 이리 오셔서 함께 앉읍시다. 여보게, 의자를 좀 옮기게나.”
 오달과 도풍은 거절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다가가 앉았다.
 뒤이어 이 표두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두 분께서는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나요?”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만약 식사를 했다면 술과 음식을 파는 주루에 들어올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하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오달이 이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되물었다.
 “두 분께서도 아직......?”
 학 표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씁쓸하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요? 말도 마시오. 정말 말하자면 부끄러운 일이오.”
 뜻밖의 대답에 오달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부끄럽다니요?”
 학 표두는 이 층을 턱으로 한번 가리켰다.
 “두 분께서는 이 주루에 들어설 때 그 노랫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소?”
 이 말에 도풍이 다그치듯 물었다.
 “들었소만..... 그건 왜 묻는 거요?”
 학 표두는 한층 목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은 바로 그놈 때문에 왔소.”
 이 말을 들은 도풍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가장하며 모르는 척 물었다.
 “그놈이라니요?”
 학 표두는 장탄식을 하고 입술을 악물었다.
 “풍파무쌍(風波無雙) 화일로 말고 또 누구겠소?”
 오달이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을 받았다.
 “그놈이 귀 표국과 무슨 관계라도......?”
 그러자 이 표두가 분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말했다.
 “관계가 있을 리 있겠소?”
 “그런데 왜...”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오늘 점심 무렵에 갑자기 그놈이 불쑥 우리 표국에 들어와서는 계산대에 떡 기대고 한다는 말이, ‘국주(局主)는 어디 갔느냐? 어서 본 가주를 모시고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전해라.’ 하지 않겠소?”
 도풍은 파일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속으로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거참, 오늘 일진이 사납군요.”
 학 표두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의라도 구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은자 몇 냥쯤 쓰는 거야 사실 대단치 않소. 하지만 이건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니오? 명망(名望)이 높은 화씨세가에 그런 망나니가 가주로 앉아 있으니......”
 오달과 도풍은 이미 마음이 급해 더 이상 학 표두의 넋두리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달은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며 짐짓 말했다.
 “이왕 두 분께서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면 함께 올라갑시다. 내가 한턱내겠으니 함께 몇 잔 하시는 게 어떻소?”
 학 표두는 이미 입맛까지 잃은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맙소만 두 분께서나 올라가 보십시오.”
 오달과 도풍 두 사람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의 예를 취한 뒤 이 층으로 올라갔다.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났기 때문에 이 층의 널따란 객석에는 다만 십여 명의 손님밖에 없었다.
 객석 중앙의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탁자에 한 명의 화의 청년(華衣靑年)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화의 청년의 얼굴은 취기가 올라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매우 영준했고 키도 몹시 훤칠했다.
 자세히 보면 나이가 채 서른을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임에도 눈꼬리는 치켜 올라가 있었고, 약간 야윈 얼굴에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하고 있었다.
 이 화의 청년이 바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골머리를 썩이게 하고 이름만 들어도 넌덜머리를 낸다는 화씨세가의 당대 가주, 풍파무쌍 화일로였다.
 그의 풍파무쌍이란 외호는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반드시 한차례의 풍파(風波)가 휘몰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얼큰하게 취한 것 같았다.
 화일로의 좌우로 나뉘어 앉은 사람은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늙은이와 중년 나이의 장한이었다.
 위 좌석에 앉아 있는 대머리 노인은 바로 위원표국의 국주인 일월금륜(日月金輪) 조태복(曹泰輻)이었다. 그리고 아래 좌석에 앉은 중년인은 표국의 총표두인 칠화창(七花槍) 사중백(査重百)이었다.
 오달과 도풍이 객청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막 객청 구석의 자리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느닷없이 화일로가 두 사람을 손짓해 부르는 것이 아닌가?
 “두 분께선 이리 좀 오시오!”
 두 사람은 내심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화일로의 성질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을 경우 무슨 험악한 꼴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오달과 도풍, 두 사람은 즉시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풍파무쌍 화일로는 두 사람이 좌석 앞까지 걸어오자 취기로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며 히죽 웃었다.
 “흐흐.... 두 분께선 마침 알맞게 오셨군.”
 오달, 도풍은 화일로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잘못하다가는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고 골로 가는 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파일로가 이곳에 있는 것만 확인하고 갈 것을 괜히 올라왔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그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썩은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다가오는 것을 본 국주 일월금륜 조태복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너무 겁먹지 마시오. 화 가주(華家主)께서 두 분을 부른 건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
 화일로는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국주.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소.”
 조태복은 찔끔하여 목이 자라목처럼 쏙 들어갔다.
 “예예. 노부가 죽을죄를 졌소......”
 황급히 변명을 한 조태복은 두 사람을 향해 계속 말했다.
 “가주께서 방금 말하기를 가주의 노래가 끝난 뒤에 제일 먼저 이 주루로 올라오는 사람은 가주를 대신해서 오늘의 술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었소.”
 오달과 도풍은 비로소 암암리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록 남의 술값을 물기는 억울하기 짝이 없으나 그래도 화일로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보다야 백배나 나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가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이들이 순순하게 응낙하자 화일로는 거나하게 취한 두 눈을 들어 엉뚱하게 입을 열었다.
 “어? 두 분의 말투를 들어 보니 돈 꽤나 있는 모양이구려?”
 오달과 도풍은 어이가 없었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생벼락이 떨어질 판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을 해 버리니 이제 와서는 약까지 바싹 올리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부아가 터질 지경이었으나 행여나 겉으로 나타날까 두려워 동시에 허리를 굽실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 약간 있는 편이죠. 헤헤헤......”
 화일로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히죽 웃으며 칠화창 사중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것 좀 보시오. 남의 술값을 치러 줘야 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대하다니.... 어허..... 나 화일로에게 이런 두 놈의 종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사중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딴청을 부렸다.
 “가주께선 술을 더 드시지 않겠습니까? 안주도 거의 다 식었으니 아예 이 접시들을 다 치우고 다시 따끈한 안주로 시키는 것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도풍이 화일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헤헤..... 가주께서 싫어하지만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가주님을 모시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화일로의 취해 게슴츠레한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인가?”
 도풍은 재차 허리를 굽혀 코가 땅에 닿을 지경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정말이구 말굽쇼. 저희들도 약간 무공을 알고 있어 오래전부터 가주님의 풍채를 흠모해 왔습니다. 만약 가주님께서 받아 주시기만 한다면 저희들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이겠습니다.”
 화일로는 다시 오달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분은?”
 오달도 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저는 가주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부터 가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평생토록 따라갈 것인즉, 가주님께서는 그저 제게 밥만 먹여 주십시오.”
 화일로는 입을 벌려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밥만 먹여 달라고? 으하하하핫! 이게 얼마나 우스운 얘기요? 당신들에게 말하지만 본 가주를 끝까지 따라다니면 당신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놀 것 등 한 가지도 걱정 없이 해 줄 수가 있소. 뿐만 아니라 영원히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도 않고 어딜 가나 위풍이 당당할 거란 말이오. 하하하......”
 “고...... 고맙습니다.”
 오달과 도풍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이미 아무도 모르게 눈짓을 교환한 뒤였다.
 기왕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든 이상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제이차의 공작을 진행시켜 화일로를 지정된 장소까지 끌고 가 달리 하사하는 일천 냥의 은자까지 벌어 놓자는 심산이었다.
 천오백 냥이라는 막대한 은자가 수중에 들어온다면 이 넓은 천하에 몸담을 곳은 얼마든지 있는 판이었다. 꽃같이 예쁜 기녀를 끼고 진탕 먹고 마셔도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다.
 이때 화일로는 웃음을 뚝 멈추고 갑자기 조태복과 사중백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두 분께서는 이제 가 보시오. 본 가주에게 이런 마음에 드는 두 명의 종이 생겼으니 이곳에는 이제 당신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소.”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조태복과 사중백은 내심 뛸 듯이 기뻤으나 감히 분부를 거역하지 못하는 듯 황망히 좌석에서 일어나 예를 취하고는 작별을 고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화일로는 즉시 양쪽의 빈 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이리 와 앉게나.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과 본 가주의 종이 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네. 그리고 본 가주는 자네들과 나눌 얘기가 있네.”
 이제는 아예 하인 취급을 하는지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늙은이에게 해라를 하는 것이었다.
 오달과 도풍은 군말 없이 화일로의 분부대로 각각 자리에 앉았다.
 화일로는 즉시 물었다.
 “너희들은 이름이 뭐냐?”
 오달이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소인은 성이 오(吳)이며 이름은 달(達)이라 합니다. 손이 제법 빨라서 친구들은 소생을 섬쾌수(閃快手)라고 부릅니다.”
 화일로는 탄복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별호로군. 번개처럼 빠른 손이라...!”
 이어 그는 도풍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예. 소인은 도풍이라 합니다. 그러나 남들은 순풍이(順風耳)라고 합니다.”
 화일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풍을 단 귀라... 정말 별호 한번 희한하군그래.”
 도풍은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었다.
 “그 별호는 소인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시면 가주님께서 소인을 위해 별호를 하나 지어 주십시오.”
 화일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들이 기왕 자네를 순풍이라고 부른다니 구태여 고칠 필요는 없네. 꺼억... 별호야 아무러면 어떠나?”
 오달과 도풍은 암암리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이 타락한 명문 세가의 젊은 가주가 상당히 취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일로는 심하게 딸꾹질을 하면서 재차 물었다.
 “너희들은.... 이 성안에... 또 무슨 볼만한 곳이 있는지 모르느냐?”
 두 사람의 가슴은 재차 방망이질을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완연히 달랐다. 지난번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지만 이번에는 비할 데 없는 흥분 때문에 방망이질을 한 것이다.
 도풍은 일부러 생각에 잠긴 척하고 신통치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곳 성안의 몇몇 군데는 가주님께서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어 이미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놀아도 그게 그거라 재미가 없습니다.”
 화일로는 그렇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네 말이 옳아. 제기랄, 아무리 놀아 봐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니 재미가.... 꺼억.... 하나도 없어. 정말 재미가 없단 말씀이야.”
 얼마나 퍼마셨는지 혀가 꼬부라져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형편이었다.
 오달이 은밀하게 권고하는 척했다.
 “가주님께선 먼저 쉴 곳을 찾아 좀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화일로는 취중에도 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아니야. 괜찮아. 나는... 나는 거의 매일 이래서... 이제는 습관이 되었네.”
 그러자 도풍이 말했다.
 “가주님께서만 흥미가 있다면 소인이 한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인이 어제 한 가지 기막힌 얘기를 들었습죠. 다만 길이 좀 멀고 이 근처에 있지 않은 것이 흠이긴 합니다만.....”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과연 화일로는 취한 술이 확 깨는 듯 다급하게 말했다.
 “길이 먼 것쯤은 문제가 안 되네. 무슨 기막힌 일이란 말인가? 빨리 말해 보게.”
 도풍은 강권에 못 이기는 척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는 혹시 낙양(洛陽) 근처에 한 채의 커다란 보(堡)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화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말하는 보란 혹시 풍운보(風雲堡)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바로 무림삼보(武林三堡) 중 하나인 풍운보입니다.”
 화일로는 김이 팍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풍운보라면 별로 흥미가 없네. 풍운보주인 용호풍운검(龍虎風雲劍) 하조천(何朝天)은 비록 검술이 뛰어나지만 별로 재미있는 인물이 아닐세.”
 “한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번에 풍운보에서 열리는 비무초친(比武招親)은 필시 가주님께서도 큰 흥미를 느끼실 겁니다.”
 화일로의 귀가 쫑긋했다.
 “비무초친이라니? 풍운보에서 비무 대회라도 연단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기발한 비무 대회입니다.”
 “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겠나?”
 화일로의 바싹 몸이 달은 표정을 슬쩍 바라보고 도풍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풍운보주인 하조천에게는 자식이 오직 딸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딸이 이미 시집을 갈 나이가 되어 하 보주는 사윗감을 고르기 위해 특별히 무술 시합을 열어 천하의 영웅과 호걸을 모으고 있답니다.”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조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로군.”
 이때 오달이 화일로의 흥미가 가실세라 잽싸게 말을 받았다.
 “특히 하 보주의 따님은 그 용모가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 침어낙안(沈魚落雁)의 절세미녀로 구천(九天)의 선녀(仙女)나 달나라의 항아(姮娥)보다도 더 아름답다더군요. 하 보주는 이번에 그녀의 배필을 고르게 되면 그에게 풍운보의 모든 직무를 인계하고 자신은 은퇴할 생각이랍니다.”
 “흐음......”
 오달이 넌지시 의향을 떠보았다.
 “가주께서 한번 가 보셔서 행운을 잡아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주님의 실력이시라면 충분히 비무 대회의 승리자가 되어 아름다운 미녀를 부인으로 삼고 더구나 무림의 삼대보(三大堡) 중 하나인 풍운보의 대업을 계승하게 되어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실 겁니다.”
 “음.... 자네는 말을 썩 잘하는군.”
 오달은 화일로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입을 놀렸다.
 “풍운보주인 하조천은 당금 무림에서 내로라는 절정검객 중 한 사람이니 그런 분을 장인으로 모시게 되면 가주께서 장차 무림에 커다란 명성을 떨치실 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갑자기 화일로의 눈꼬리가 실쭉해졌다.
 “장차라니.... 그럼 지금은 내가 별 볼일 없는 존재란 말인가?”
 오달은 아차 싶어 떨리는 음성으로 급히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강호인들이면 가주님의 함자만 들어도 모두 벌벌 떠는 형편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단지 소인의 말은 그런 일로 해서 가주님의 위풍이 더욱 세워질 수 있다는 뜻이올시다.”
 그제야 화일로의 안색이 풀어졌다.
 “음, 그럴듯하군.”
 도풍이 뒤질세라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그곳에 가신다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겁니다. 그리고 사실 하 소저(何少姐) 같은 천하절색의 미녀는 가주님 같은 영웅께서 품으셔야 옳은 일이 아닙니까?”
 화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녀와 영웅이라..... 확실히 가 볼 필요가 있겠군.”
 오달과 도풍,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내심 펄쩍 뛸 듯이 기뻤다.
 “그.... 그럼 가시겠습니까?”
 화일로는 마음을 결정한 듯 호쾌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내일 당장 길을 떠나세.”
 화일로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달은 뛰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만화루(萬花樓)다.”
 만화루가 장안 제일의 기루(妓樓)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第 二 章 닭 쫓 던 개
 
 다음 날 진시(辰時)경.
 장안에서 동관(童關)으로 향하는 넓은 관도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세 사람과 한 필의 말이 나타났다.
 오연한 표정으로 말 잔등 위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은 화의를 걸친 준수한 청년이었다.
 청년이 탄 말의 양옆에는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장한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오달과 도풍, 그리고 가는 곳마다 풍파를 일으키는 화씨 세가의 망나니 가주 화일로였다.
 화일로는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말 위에 올라탄 채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세 사람은 화음현(華陰縣) 부근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화일로가 두 사람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네들 몸에는 아직 얼마의 은자가 있나?”
 오달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인의 수중에는 칠팔 냥가량 남았습니다.”
 도풍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인에게도 그만한 액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화일로는 손가락을 꼽으며 혼자 계산을 했다.
 “음.... 전부 합해도 이십 냥이 안 되는군. 그만한 은자로 우리 세 사람이 낙양까지 갈 노자가 충분할까? 자네들이 보기엔 어떤가?”
 오달이 잠시 생각한 끝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약간 절약해서 쓰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화일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건 자네들의 일이지. 본 가주는 절약이라는 것을 모른다.”
 본의 아니게 하인이 된 두 사람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걸. 주인이 종놈의 은자를 쓴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한 천고의 기문(奇聞)이로구나.’
 그러나 화일로는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건 아랑곳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말고삐를 잡고는 마을 끝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음식점으로 걸어 들어갔다.
 음식점에 들어서자 화일로는 과연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을 했다.
 그는 자기의 상을 가득히 채울 만큼 요리를 주문하고 게다가 최상의 술까지 시켰으나, 두 사람은 다른 자리에 앉히고는 다만 한 접시의 최하급 밀가루로 만든 만두와 한 그릇의 제일 값싼 음식을 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화일로는 두 사람에게 뻔뻔스럽게도 그럴듯하게 해명을 했다.
 “강호인(江湖人)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규칙과 법도일세. 기왕 명분상으로 주인과 종의 사이라 피차 한계를 두지 않을 수가 없군. 그렇지 않은가?”
 두 사람은 이 말을 듣자 속에서 분통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곧 수중에 들어올 천오백 냥을 위해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공경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가주님.”
 결국 이런 식으로 해서 화일로는 가는 곳마다 최상급의 객잔에 묵었고, 식사 때는 언제나 고기와 술이 빠진 적이 없었다. 화일로는 상방(上房)에 묵고 말까지도 최고급의 사료를 먹였다.
 반면 오달과 도풍은 이를 악물고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헛간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동장군(冬將軍)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추위를 견뎌 나가야만 했다.
 하나 불과 열여덟 냥의 은자로 얼마나 지탱해 나갈 수 있겠는가?
 나중에 일행이 가까스로 하남성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한 푼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하남성에 도착하자 화일로는 두 사람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넌지시 물었다.
 “자네들은 이 근방에 아는 사람이 없는가?”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두 사람이 이 일대에서 정말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
 물론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이 타락한 젊은 가주가 묻는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기만 하면 그 뒷말은 물어볼 여지도 없이, ‘은자 좀 꿔 쓰자.’라고 할 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제아무리 모자란다 해도 단맛을 보기도 전에 먼저 빚을 질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서로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저놈이 또 우리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한번 두고 보자.’
 그러나 뜻밖에도 화일로는 실망하는 기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지으며 무릎까지 탁 치는 것이 아닌가?
 “잘됐어! 정말 아는 사람들이 없단 말이지?”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아연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망나니 가주가 또 무슨 농간을 부리려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일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조금 전 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노상(路上)에 있는 그 술집을 아나? 화춘루(華春樓)인가 뭔가 하는 술집 말일세.”
 두 사람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화일로는 만족한 듯이 씨익 웃으며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본 가주의 뜻을 자네들은 알겠는가? 오늘 밤은 달도 밝지 않으니 일을 하기가 제일 좋은 때지. 가서 한탕 뛰고 오게.”
 그제야 화일로의 말뜻을 알아들은 두 사람은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이 화씨세가의 젊은 가주가 설마하니 자신들에게 강도질을 하라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도 놀라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일로는 난처해하는 두 사람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눈빛을 빛냈다.
 “어떤가? 설마 싫다는 건 아니겠지?”
 오달은 머뭇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일로의 입에서 엄포가 터져 나왔다.
 “그건 뭐란 말인가? 한탕 뛸 용기가 없다는 건가, 아니면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도풍도 안 나오는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은 별 지장이 없으나 만약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가주님의 명예에 혹시 누가 될까......”
 화일로는 대뜸 그의 말을 가로챘다.
 “맞았어. 내가 자네들더러 가라는 것도 바로 그 뜻이네. 자네들은 뭘 걱정하는가? 자네들은 자네들이고 나는 나지. 만약 소문이 퍼진다 해도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로 어처구니없는 궤변이 아닐 수 없었다.
 오달이 뭐라 대꾸를 하려 하자 도풍이 돌연 손을 내저어 오달을 잡아끌었다.
 “이보게, 가주님께서는 이미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 자네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가?”
 오달은 할 수 없이 도풍을 따라 나섰다.
 화일로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자 오달은 원망하는 투로 투덜거렸다.
 “자네는 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쑥 대답하나?”
 도풍은 냉소를 쳤다.
 “내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구? 흥! 내가 보기엔 자네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보네. 자네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끝까지 버티고 나갈 텐가?”
 오달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제기랄.....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한다지?”
 도풍은 탄식을 하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다니? 다행히 이곳에서는 낙양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아 도리 없이 우선 성 밖의 내 작은 마누라 집에 가서 얼마라도 얻어 내 봐야지.”
 이 말을 들은 오달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도풍의 어깨를 탁 쳤다.
 “참! 나는 하마터면 이곳에 자네의 어부인이 한 분 계시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군. 그럼 늦지 말고 빨리 갔다 오게.”
 도풍은 돌연 정색을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나는 사전에 말해 둘 것이 있네. 친형제끼리라도 계산이란 항상 분명히 해야 하니까 말이네. 그 은자가 얼마가 되든 우리는 반반씩 부담을 해야 되네. 알겠나?”
 오달은 쾌히 승낙했다.
 “그거야 여부가 있나? 당연한 일이구말구!”
 “그럼 자네는 이곳에 잠시 기다려 주게. 내 곧 갔다 올 테니.... 그리고 은자를 수중에 넣으면 우리는 먼저 조용한 곳을 찾아 한 식경가량 시간을 보내세. 저놈은 굉장히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우리가 이미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 이상 가장을 해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네.”
 오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가 보세.”
 
 다음 날, 다시 길에 오르자 화일로는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보게. 본 가주의 말이 옳았지? 바람이 크면 불이 나기 쉬운 법이고, 밤이 어두우면 사람을 죽여도 성공률이 높기 마련이네. 마음을 크게 먹기만 하면 또 손쉽게 은자가 생기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그저 쓴웃음만 머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두 번째의 은자가 거의 달랑달랑할 무렵에야 겨우 낙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즉각 풍운보의 비무초친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소식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비무대는 서문(西門) 성 끝에 위치한 풍운보의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청년 협객들이 저마다의 꿈을 안고 풍운보로 모여들었다는 소문이 낙양성을 떠들썩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어느 호화로운 객잔에 여장을 풀자 화일로는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탁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일 자네들은 본 가주만 믿게. 내가 풍운보의 사위만 되면 틀림없이 자네들에게 은자와 황금을 무더기로 안겨 줄 것이니 앞으로의 여생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을 걸세.”
 그가 제멋대로 씨부렁거리자 오달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가주님께 한나절 동안 휴가를 얻었으면 합니다.”
 “뭘 하려고?”
 “예. 소인에게는 고모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곳의 동쪽 마을에 살고 계십니다. 이 기회에 다녀올까 하고....”
 화일로는 쾌히 승낙을 했다.
 “허! 자네에게 그런 효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좋아, 다녀오게.”
 오달이 인사를 하고 떠나자 화일로는 넌지시 도풍에게 물었다.
 “자네에게는 이곳에 고모님이 없는가?”
 도풍은 황급히 대답했다.
 “소... 소인에게는 없습니다.”
 화일로는 다시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이것 보게. 오달은 믿을 만한 놈인가?”
 도풍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자 화일로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내가 쓸데없이 의심을 한 모양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그 녀석이 이대로 가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도풍은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그렇다. 그놈이 만약 내 몫까지 타 간다면 은자는 무려 삼천 냥이나 된다. 만약 나와 입장을 바꿔 놓고 보더라도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만약 이놈의 말대로라면 나 도풍은 여지껏 누구를 위해서 고생을 해 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화일로는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저 농담으로 해 본 말이네. 설마하니 그런 일이야 있을라구. 기왕 내일이면 한바탕 뛰어야 하니 나는 먼저 자겠네. 그리고 자네는 뭘 먹고 싶으면 혼자 점원에게 시켜 먹게.”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벌렁 누워 버렸다.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풍은 안절부절못하며 뜨락을 배회했다.
 날이 저물어 가니 그의 마음속은 점차 불안감이 확대되어 갔다.
 얼마를 망설이던 끝에 그는 기어코 결단을 내렸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즉시 달려가 본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화일로는 이미 잠에 떨어져 세상모르고 코를 골고 있다. 그리고 자기는 사람을 이미 이곳까지 데리고 왔으니 임무를 완수한 거나 진배없다.
 그런데 무엇하러 이곳에 계속 남아 있겠는가?
 하지만 일이란 항상 공교로울 때가 많다. 도풍이 막 객잔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한쪽에서 그에게 손짓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오달이었다.
 도풍은 오달을 보자 납덩이같이 무겁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르르 사라져 마음이 턱 놓였다. 그가 오달에게 급히 달려가자 오달이 나직이 물었다.
 “그놈은 어떻게 되었나?”
 “잠이 들었지. 그래, 은자는 받았나?”
 “아직은 못 받았네.”
 도풍은 아연실색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그건 왜?”
 “응. 이총관(二總官)께서 곧 오셔서 확인을 한 뒤에 한 사람 앞으로 이천 냥씩 주겠다고 했네.”
 “뭐? 이천 냥씩이나?”
 찢어질 듯 입이 벌어지는 도풍에 못지않게 오달도 방금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후후후... 내가 무엇 때문에 자네를 속이겠나? 아! 소리를 낮추게. 저기 이총관께서 오셨네.”
 이총관이라는 자는 뚱뚱보였다.
 혈색이 좋고 옷차림새가 깨끗하며 제법 위풍이 당당한 체구였다.
 하인이 무언가 등에 한 짐 짊어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도풍은 그 속에 들은 것이 금덩어리가 아니면 필경 은덩어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총관은 그들 두 명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굽실거리는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후원으로 들어갔다.
 도풍은 어깨로 오달을 툭 치며 의기양양하게 속삭였다.
 “우리도 들어가 보세.”
 그러나 오달은 황급히 그를 가로막으며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 총관이 방을 보는 것은 일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 곧 돌아올 텐데 무얼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오달의 예상대로 이총관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마치 파리가 썩은 고기 냄새를 맡은 듯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이총관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리고 나직하게 물었다.
 “틀림없지요, 총관 어른?”
 그러자 이총관은 표정을 굽힌 채 싸늘하게 대답했다.
 “틀림없다. 너희 두 명은 정말 일을 잘하는구나!”
 동시에,
 철썩! 철썩!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달과 도풍의 뺨에서 난 소리였다.
 “병신 같은 자식들......!”
 이총관은 기분이 잡친 듯 포대를 짊어진 하인을 데리고 휑하니 객잔을 나가 버렸다.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총관과 하인이 나가는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면서 오달은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졌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도풍도 돌부처인 양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얻어맞는 바람에 부러져 나간 이빨 하나를 퉤 하고 뱉어 냈다.
 “혹시...... 그놈이 가짜가 아닌가?”
 “가짜라구?”
 오달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실성한 듯이 소리쳤다.
 “그렇지! 그놈이 정말 화일로였다면 며칠 전에 우리들더러 강도질을 하라고 하진 않았을 거네. 빨리 가 보세. 내 이놈을 그냥 찢어 죽이고 말겠네.”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후원으로 달려갔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질탕하게 마시고 즐길 이천 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은 둘째 치고라도 지금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유인해 온 놈이 가짜라는 점에 분기가 탱천한 것이다.
 후원 상방에는 밝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방금까지 코를 골며 잠들어 있던 화일로는 유령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한 장의 종이쪽지가 등불 밑의 벽 위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본 가주도 고모님을 만나러 가네.
 본 가주는 두 분께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깍듯이 시중해 준 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네.
  화씨세가 십삼대 가주 화일로.>
 
 
 第 三 章 比 武 招 親
 
 낙양의 서성(西城)문을 막 나서면 한 채의 웅장하게 지은 장원이 나타난다.
 이 장원은 겉으로만 보아도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높다랗게 쌓아 올린 청색 담장 안에는 대궐과도 같은 집이나 정자들이 호화찬란하게 꾸며져 있었고, 돌난간이며 창문 할 것 없이 모두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이곳이 바로 천하무림에서 삼대보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풍운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풍운보의 거대한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문밖에는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쳐져 있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풍운보로 향하는 넓은 대로(大路)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시(巳時) 무렵,
 풍운보로 향하는 대로에 갑자기 시선을 끄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이가 서른서넛가량에 옷차림이 똑같았다. 더구나 생김생김도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도록 완전히 똑같았고, 심지어는 허리에 찬 장검도 똑같은 기형검(奇形劍)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첫눈에 보아도 그들이 세 쌍둥이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누가 형이며 누가 동생인지를 분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침 길을 가고 있던 볼따구니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장한이 우연히 뒤를 돌아보다가 이들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움찔 놀라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이크!”
 그러다가 뒤에서 걷고 있던 회색 옷을 입은 늙은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노인장도 풍운보로 가시는 길입니까?”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이런 흥미 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지.”
 칼자국 장한은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더구나 이번 대회는 쟁쟁한 인물들이 많이 참석해서 정말 볼만할 것 같습니다.”
 이어 그는 세 쌍둥이 형제를 슬쩍 가리키며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노인장은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노부도 제법 사람 보는 눈은 있네. 저자들은 관동(關東) 지방에서 명성이 자자한 철가 삼형제(鐵家三兄弟)가 아닌가?”
 “알아보시는군요. 소문에 듣기론 저 철가 삼형제는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특히 합격술(合擊術)에 능해서 금릉(金陵)의 팔보추혼(八步追魂)도 저들의 검진(劍陣)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 비무 대회에서는 검진을 펼칠 수가 없으니 그들도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할 걸세.”
 칼자국 장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런데 신붓감은 하나이고 그들은 세 사람인데 과연 그들 중 누가 나갈까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그들은 어느새 풍운보의 정문 가까이에 다가서고 있었다.
 정문은 그야말로 대궐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도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문의 좌우에는 경사를 축하하는 ‘희(囍)’ 자가 쓰인 큰 초롱이 걸려 있었으며 오른쪽 청색의 담벼락에는 황색 종이에 고시(告示)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회의 노인은 마침 정문 앞에 서 있는 풍운보의 인물 하나를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여보게. 저 고시에는 뭐가 적혀 있나?”
 풍운보의 인물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던 듯 지체하지 않고 재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고시에는 저의 보주(堡主)님이 이번 시합에 대한 목적과 지시 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가 있으며 또 절대 사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승패가 가려지면 즉시 손을 거두어야 합니다.”
 회의 노인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는 듯 피식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모두 참가할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예를 들면 팔다리 병신이나 출신이 정파(正派)인지 사파(邪派)인지도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풍운보의 인물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물론 규칙이 정해져 있지요. 일단 무술 시합을 하는 사람은 몸이 건강하여야 하며 정신이 뚜렷하고 질병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마흔 살 이하여야 합니다.”
 그는 지겹지도 않는지 입술에 침을 살짝 바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출신이 정파인지 사파인지는 가리기가 힘들어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출신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마음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가 없으며 출신이 부정하다고 해서 꼭 마음이 나쁘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회의 노인은 그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자네는 말재주가 퍽 좋군그래.”
 풍운보의 장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멋쩍게 웃었다.
 “헤헤헤..... 과장된 말씀이십니다. 사실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만약 품덕(品德)이 좋은 사위를 얻게 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후일 우리는 그를 감화(感化)시켜야 합니다. 그 속에는 역시 우리 아씨의 운명과 연분도 따르겠지요.”
 “말은 그렇게 간단하지만 만약 당신네 보주께서 정말 덕행이 좋지 않은 친구를 사위로 삼게 되면 그를 감화시키기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걸세.”
 장한은 급급히 부인했다.
 “아마 그렇게까지 재수가 없지는 않겠지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칼자국 장한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 정면은 지극히 넓은 광장이 있고, 지면은 대리석으로 깨끗하게 단정되어 있었다. 광장의 넓이는 못 되어도 반경 오십 장은 충분히 되었고, 광장 한가운데는 이미 비무대(比武臺)가 세워져 있었다.
 비무대는 느릅나무 원목을 깎아 만든 것이며 강철로 묶여 있었고, 거대한 못들이 박혀 있었다.
 이것을 열두 개의 통나무 다리가 지탱하고 있어 매우 튼튼하게 보였다.
 비무대 위에는 햇빛을 가리는 천막이 높다랗게 처져 있었고, <비무초친(比武招親)>이란 네 글자가 금빛을 발하며 걸려 있었다.
 비무대 위에는 사회석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팔자(八字)수염을 기른 사나이 하나가 사회석에 앉아서 약상자를 든 몇 명의 사람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초빙된 의원들인 것 같았다.
 비무대 뒤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대청이 있었고, 대청 뒤로는 많은 누각과 호화스럽게 지어진 집들이 즐비했다.
 회의 노인은 칼자국 장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광장 한쪽으로 걸어갔다.
 칼자국 장한은 사방을 휘둘러보며 감탄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노인장, 정말 대성황이로군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풍운보의 명성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한데 노부는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한 가지 있네.”
 회의 노인은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 보주같이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 왜 이런 대회를 열어 자기 딸의 종신대사(終身大事)를 결정하려는지 알 수가 없군. 하 보주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명문 세가의 자손을 사위로 맞이할 수 있을 텐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맡기려 하다니 이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네.”
 칼자국 장한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노인장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 보주님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많네. 그렇다면 그 사정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
 칼자국 장한은 실없이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노인장, 우리는 시합에 참가하지도 않을 건데 상관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회의 노인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번 일은 노부로 하여금 옛말을 생각해 내게 하는군.”
 “무슨 말입니까?”
 칼자국 장한이 궁금한 듯 묻자 회의 노인은 나직하게 말했다.
 “바로 옥보천(玉寶川)과 설평귀(薛平貴)의 고사(故事)라네.”
 그러자 칼자국 장한은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큭..... 채루(彩樓)에서 수놓은 공을 던져 사위를 구했다는 고사 말입니까?”
 회의 노인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옥보천은 한(漢)나라의 상국(相國:재상)이었다.
 그에게는 한 명의 아리따운 딸이 있었는데 평소 술을 좋아하던 옥보천은 어느 날 기루에서 다른 고관(高官)들과 술을 마시다가 취중(醉中)에 기루의 창문 밖으로 오색 칠을 한 공을 던지며,
 “이 공을 주운 사람에게 내 딸을 시집보내겠다.”
 고 공언(公言) 해 버렸다.
 한데 그때 마침 설평귀라는 거지가 동냥을 하러 기루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공을 줍고 말았다.
 술이 깬 옥보천은 이 사실을 알고 대경실색했으나 수많은 고관대작들 앞에서 재상의 신분으로 발설한 말인지라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어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거지인 설평귀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였다.
 
 칼자국 장한도 이 고사를 알고 있는지 해죽거리며 말했다.
 “옥보천도 자기가 던진 공을 알거지인 설평귀가 받을 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몰랐을 겁니다.”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노부도 하 보주가 걱정된다는 말일세. 만약 그 역시 설평귀와 같은 사위를 얻게 된다면 옥 상국(玉相國)처럼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일세.”
 칼자국 장한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술 시합이니만큼 고사의 내용보다는 좀 더 나을 게 아닙니까?”
 회의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라고 성품도 좋은 것은 아니네.”
 “노인장의 말이 맞습니다. 요즘 악명(惡名)이 자자한 풍파무쌍 화일로라는 놈도 제법 얼굴이 번듯하고 무공이 상당히 높다더군요. 게다가 화씨세가 하면 누구나 명문 중의 명문(名門)으로 꼽는 집안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놈은 누구나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내젓는 사고뭉치에 악질 중의 악질이 아닙니까?”
 회의 노인은 화일로가 화제에 오르자 언뜻 생각이 났는지 무릎을 탁 쳤다.
 “참! 듣자니 그 화일로가 낙양 근처에 나타났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자 입에 침을 튀기며 화일로의 악평(惡評)을 하던 칼자국 장한의 얼굴이 벌레를 씹은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엣?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더군.”
 칼자국 장한의 얼굴이 갑자기 싯누렇게 변하며 불안한 눈초리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회의 노인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듯 빙그레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설마하니 그자가 이 근처에 있을 리 있나?”
 칼자국 장한은 조금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하나 그는 감히 더 이상은 화일로에 대한 험담을 하지 못하고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제길.... 그런 줄 알았으면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노인장의 말대로 그자가 이 근처에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회의 노인은 히죽 웃었다.
 “그자가 그렇게 무섭나?”
 칼자국 장한은 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노인장께서도 그자에 대한 소문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아무튼 천하에서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두 명의 괴물(怪物) 중 하나가 아닙니까?”
 이렇게 소곤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회의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의 생각으론 그 풍파무쌍 화일로가 이번에 낙양에 온 것은 비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설까요?”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칼자국 장한은 매우 흥미가 생기는지 몸을 가볍게 떨기까지 했다.
 “그..... 그렇다면 이번 대회는 그야말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되겠군요. 제 생각에는 그 화일로가 적어도 우승할 가능성이 반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노인장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의 노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이번에 참가하는 다른 인물들도 결코 얕볼 사람들은 아니지 않나?”
 바로 이때였다.
 둥둥둥......!
 요란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비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비무대 주변은 인파들로 가득 메워졌다. 장내는 수많은 군웅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고함 소리로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그때 사회석에 앉아 있던 팔자수염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친구분들께서 이렇게 많이 왕림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저희 보주님께서 나오시겠습니다!”
 그자의 말이 막 끝나자 두 번째로 북소리가 울려왔다.
 둥둥둥......!
 수백 명의 군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대청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때 대청에서 육십여 명의 회색 경장 차림의 사나이들이 두 줄로 나뉘어 질서 정연하게 뛰어나왔다.
 그들은 머리에 회색 두건을 쓰고 가벼운 신을 신고 있었으며 손에는 모두 귀두도(鬼頭刀)를 든 채 비무대 양쪽으로 뛰어왔다. 이어 그들은 팔자진식(八字陣式)으로 나뉘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막 자리를 잡고 나자 대청 문에서는 다시 칠팔 명의 대한이 나이가 육십가량 되는 한 노인을 에워싸고 모습을 나타냈다.
 노인은 전신에 회색 꽃을 수놓은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상투를 높이 틀어 올렸다. 그러나 두 눈은 나이에 비해 유난히 번뜩였으며 얄팍한 입술이 바싹 마른 얼굴에 보기 좋게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몸도 깡말랐으나 그의 행동과 용모는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다.
 노인을 호위하고 있는 여덟 명의 사나이들도 제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었으며 호걸다운 기풍이 역력했다.
 그들은 지극히 빠른 걸음으로 비무대 앞에 도착했다. 여덟 명의 장한들은 비무대를 등지고 앞에 모인 군웅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시하며 정렬했다.
 노인은 큰 걸음으로 나무 층계를 올라서더니 비무대 가운데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우선 비무대 밑에 모인 군웅들을 한차례 쓸어 보다가 포권의 예를 취하고 나서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풍운보의 보주인 용호풍운검 하조천이오. 이번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이시게 한 목적은 여러분께서도 모두 알고 계시니 생략하기로 하겠소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목적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소.”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의 귓전에도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내공이 얼마나 정심(精深)한지 알 수 있었다.
 “이번 무술 시합을 개최하는 목적은 노부의 딸인 하옥령(何玉鈴)을 혼사(婚事)시키는 한편 본보(本堡)의 지위와 사업을 계승할 후계자를 찾는 것이오. 또 규칙에 대해서도 여러분께서는 이미 잘 아시리라 믿고 요점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사방을 휘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첫째, 승리자는 자만해서는 안 되오. 또 패했다고 해서 실망을 해서도 안 되오. 더구나 후일에 그것으로 원한을 삼는 분이 없기를 바라겠소. 둘째, 겨루는 동안 승부가 판가름 나면 즉시 손을 거두어야 하며 절대로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안 되오. 셋째, 마지막 승자는 이달 안으로 노부의 딸과 성혼(成婚)을 하는 동시에 노부의 사업을 계승하게 되어 노부가 칠십 살이 되는 해에 모든 권한을 물려 드리겠소.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는 전문은(纏紋銀) 열 냥씩을 증정해 드리겠다는 것을 약속하겠소.”
 하조천의 인사가 끝나자 광장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와아......!”
 “하 보주 만세......!”
 하조천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정숙해 달라고 하고는 최종적으로 말을 맺었다.
 “어느 분이시건 전력을 다해서 노부와 친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소이다.”
 “와아......!”
 다시 박수갈채와 터져 나갈 듯한 함성이 일었다.
 하조천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포권을 하여 군웅들의 갈채에 답례를 하고는 층계를 내려와 여덟 명의 인물들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때 세 번째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둥둥둥......
 이와 동시에 사회석에 앉아 있던 팔자수염의 사나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럼 이제부터 시합을 개최하겠습니다. 어느 분께서 먼저 등장하시겠습니까?”
 비무대 밑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칼자국 장한은 의아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아무도 올라가지 않지요?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먼저 올라갈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회의 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네. 노부가 보기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수법을 본 후에 그 상황에 따라 올라갈 것 같네. 그렇다고 절대 해로울 것은 없으니까......”
 바로 이때였다.
 휘익!
 하나의 인영이 눈앞에 어른 거리더니 체구가 엄청나게 큰 사나이 하나가 비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 사나이의 몸집이 얼마나 컸던지 그토록 튼튼한 비무대가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거대한 사나이는 광장이 떠나갈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소생은 신력웅(神力熊) 포화(鮑火)라고 하오. 어느 분이 나와 겨루겠소?”
 칼자국 장한은 감탄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자는 아주 기세가 당당하군요.”
 회의 노인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저 녀석은 틀림없이 쫓겨 내려올 걸세.”
 그 순간 키가 작달막하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나이가 날렵하게 비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 사나이는 포화와 마주 서더니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희궁(姬穹)이라 하오. 사람들은 나를 독비응(毒飛鷹)이라 하오. 자! 친구는 어서 손을 쓰시오.”
 포화는 두말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들어 마구 후려쳐 왔다.
 쐐앵!
 그의 주먹은 제법 빠르고 상당한 힘이 있어 보였다. 하나 희궁은 독비응이란 외호답게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 유유하게 몸을 피했다.
 “이얏!”
 날카롭게 고함을 지른 포화는 재차 우직하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희궁은 조그마한 몸집을 한차례 맹렬히 회전시키더니 훌쩍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발로 상대방을 걷어찼다.
 쐐액!
 이 단 한 번의 공격에 포화는 도리 없이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포화는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다.
 이때 밑에 있던 하조천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크게 소리쳤다.
 “포 대협, 당신은 졌소!”
 포화는 즉시 공격을 멈추고 발을 한 번 쾅 구르더니 비무대에서 뛰어 내려와 뒤로 돌아보지 않고 장원 밖을 향해 달려갔다.
 하조천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비무대 위에 있던 희궁은 점잖게 포권의 예를 하더니 자신 있게 웃었다.
 “그럼 어느 분이 나오시겠습니까?”
 이때 또 하나의 인영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사뿐히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는 바싹 마르고 키가 멋없게 컸으며 인상이 몹시 차가웠다.
 “나는 고등(古燈)이다.”
 그의 음성은 얼굴만큼이나 싸늘한 것이었다.
 희궁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상대방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바로 사망유자(死亡幽子) 고등이오?”
 고등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 고등이 강호에서 둘이 있을 수 있겠느냐?”
 오만한 고등의 대꾸에 희궁은 화가 치밀었는지 목줄기에 굵은 심줄이 튀어나오도록 악을 썼다.
 “당신의 사망유자라는 별명이 나를 겁주지 못하오!”
 고등은 징글맞게 웃었다.
 “어디 그렇다면 한번 시험을 해 보시지. 흐흐흐......”
 “이얍!”
 희궁은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을 지르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삼장(三掌)을 갈겨 댔다.
 파파팍!
 과연 독비응이라는 외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눈부신 속도였다.
 고등은 싸늘한 눈으로 희궁을 노려보고 있다가 번개같이 쌍장을 밀어냈다.
 싸싸싸......싹!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장내를 진동하더니 희궁은 대번에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으음......”
 깜짝 놀란 희궁이 급급히 몸을 가누고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쐐액!
 어느 틈엔가 고등의 비수 같은 손끝이 희궁의 아랫배를 뚫고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크악!”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희궁은 멍청히 서 있다가 배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썩은 고목이 넘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
 “과연 악독하구나......!”
 비무대 밑에서 경악과 탄성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두 명의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즉시 뛰어 올라와 총총히 희궁의 시체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본 하조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고 대협, 손속에 정을 남겨 살생(殺生)을 삼가는 게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이 대회는 빛을 잃게 되고 마오.”
 그러나 비무대 위에 있는 고등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하 보주,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공력이 모자라는 탓이지 소생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입맛이 쓴 듯 하조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고등은 자만이 넘치는 오만함을 드러내며 비무대 밑을 쓸어 보았다.
 “나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올라오는 사람이 없다면 하 보주께서는 그만 종을 치십시오.”
 종소리는 바로 이 시합의 최후 승리자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다. 다시 말해서 종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풍운보의 계승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칼자국 장한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노인장, 저놈은 소문대로 매우 악독하군요.”
 회의 노인은 표정 하나 없이 대답했다.
 “저런 놈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네. 역시 당하고 말걸.”
 둘이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돌연 입술이 붉고 치아가 백옥같이 깨끗하며 풍채가 당당한 청년 유생(靑年儒生) 하나가 바람을 타고 오는 듯 경쾌하게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유생의 의젓한 자태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고등은 약간 의외라 생각했는지 그 청년 유생을 집어삼킬 듯이 매섭게 노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름을 대라!”
 청년 유생은 멋들어지게 웃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이름을 댈 필요도 없다, 고등! 네가 살아서 이 풍운보를 나가고 싶다면 지금 기회를 주겠다. 내가 너에게 내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게 될 때 너의 일생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되며 두 번 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도 없게 될 것이다.”
 고등은 상대가 아까 각어풍(脚馭風)의 경신술을 쓰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바로 내가(內家)의 고수들만이 전개할 수 있는 절정의 신법(身法)이었다.
 그 신법 하나만 보아도 고등은 자기가 상대방 청년 유생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하나 그는 자신의 위신도 있고 해서 억지로 격동하는 가슴을 억눌렀다. 그렇다고 해도 명색 없이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이며 또 섣불리 덤빌 용기도 나지 않았다.
 고등은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으나 겉으로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나 고등이 그런 공갈에 넘어갈 위인인 줄 아느냐? 만약 네가 진짜 맛을 보고 싶다면 우리 장소를 바꾸어 대결하자. 공연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전에......”
 청년 유생은 고등의 엉큼한 속셈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등의 그 말은 스스로 자기의 약점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년 유생은 두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더니 조용하면서도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모두가 풍운보의 비무초친에 참가하기 위함이니 무슨 일이건 이곳에서 해결하자. 공연히 얕은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고등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이놈, 내가 너를 무서워하는 줄 아느냐?”
 청년 유생은 유유하게 미소를 던졌다.
 “원래 너는 나의 안중에 있지도 않다는 걸 아느냐?”
 고등은 치욕으로 인해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네놈이 정말 발악을 하는구나. 어서 신분을 밝혀라!”
 그러자 청년 유생은 담담하게 웃으며 지극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이미 죽기로 마음을 정했느냐?”
 고등은 두 손을 쫙 벌리더니 열 손가락을 꼿꼿하게 세우며 마치 호랑이가 여우를 잡아먹으려는 것 같은 자세로 사납게 이를 갈았다.
 “내 오늘 기어코 네놈을 지옥으로 보내 주마.”
 청년 유생은 표정이 추호도 변하지 않고 태연했다.
 “그렇다면 말해 주지. 나는 생사판(生死判) 여절심(呂絶心)이다.”
 “으엣?”
 고등은 대경실색했다.
 그만 놀란 것이 아니라 밑에 있던 군웅들도 모두 크게 놀라 동요를 일으켰다.
 무수한 눈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모두 여절심에게로 집중되었다.
 생사판 여절심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일대살성(一代殺星)이었다. 그는 싸움을 했다 하면 절대로 상대방을 살려 두지 않기 때문에 생사판이란 외호가 붙은 것이다.
 군웅들은 살명을 떨치고 있는 생사판 여절심이 이토록 준수한 청년 유생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라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등은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뒤로 물러섰다.
 “여절심이라고......?”
 
 
 第 四 章 芭 面 飛 叉
 
 이미 여절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고 싸늘한 살기만이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고등은 마음을 악독하게 먹고 즉시 쌍장을 높이 쳐들어 십이성의 공력으로 장력을 밀어냈다.
 꽈르릉!
 사나운 경력이 비무대 위를 채우고도 남아 밖으로까지 거세게 몰려 나갔다.
 그러나 여절심은 고등보다 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쐐액!
 그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한 가닥 광채가 고등의 몸을 향해 번뜩이며 날아갔다.
 “흑!”
 나직하게 신음을 토한 고등은 즉시 뒤로 물러났으나 그의 안색은 완전히 핏기를 잃고 있었다. 하나 고등은 몇 번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재차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두 손과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며 공격을 가했다.
 파파파팍!
 이 특이한 수법은 고등이 비장의 절기로 생각하고 있는 팔권참(八圈斬)이라는 것이었다.
 여절심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다가 그의 몸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갑자기 비조처럼 몸을 날렸다. 이어 그는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고등의 머리통을 향해 내질렀다.
 푹!
 둔한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여절심의 네 손가락이 고등의 머리통을 향해 파고 들어갔다.
 “으아악!”
 소름이 오싹 끼치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공중에 떠 있던 고등의 몸뚱어리가 그대로 비무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쿵!
 비무대 바닥에는 고등이 흘린 선혈이 낭자했다. 고등도 자기가 죽였던 희궁처럼 두 사람에 의해 치워졌다.
 밑에 있던 군웅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 중에는 부푼 꿈을 지니고 온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토록 무공이 고강하고 수법이 잔인한 여절심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뒤에 서 있던 회의 노인은 장탄식을 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일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하는군. 정말 소름이 끼치는 혈투일세.”
 칼자국 장한은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 저 여절심의 기세가 아주 당당하군요. 아무도 올라가서 도전을 못 하니 그가 뽑힐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걸세.”
 칼자국 장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고도 할 수 없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법이니 그 누구도 여절심보다 강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걸세. 그리고 몇 수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일찍 나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그때 사회석에 있던 팔자수염의 사나이가 소리쳤다.
 “또 도전할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셋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시면 이것으로 시합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사나이가 군웅들 틈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자...... 잠깐만, 아직 내가 있소!”
 그렇게 말하는 사나이는 온통 곰보에다 눈이 밑으로 축 처졌는가 하면 심한 들창코였다. 더구나 걷는 발걸음조차 정확하지 않고 뒤뚱거렸다.
 “와하하......!”
 한바탕 비웃음 소리가 군웅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괴상한 사나이는 개의치 않으며 고르지 못한 걸음을 비무대 위로 옮겼다.
 그 시합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이번 시합을 주선하여 자기의 사위를 고르려 하는 풍운보의 보주인 하조천이 있었다. 하조천은 도전한 사나이를 보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별 미친놈이 다 나서는군.’
 그는 옆에 앉은 까만 얼굴의 장한을 툭 쳤다. 그 사람은 하조천의 의중을 짐작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친구, 잠깐 기다리시오!”
 괴상한 사내는 비무대에 올라서서 그 소리를 듣자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하늘을 향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나를 부른 거요?”
 까만 얼굴의 사내는 냉랭하게 웃었다.
 “그렇소!”
 괴상한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껄껄 웃었다.
 누구도 이렇게 더럽고 무질서한 이빨을 보면 메스꺼움을 느낄 것이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요?”
 “나는 본 보의 팔대총관(八大總官) 가운데 삼총관(三總官)이오. 그런데 친구에게 몇 가지 의문이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소?”
 “물어보시오.”
 “우선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괴상한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세라니 무슨 연세 말이오?”
 “나이가 어떻게 되셨느냐는 말이오?”
 괴상한 사내는 다시 누런 이를 드러내 놓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하..... 나는 올해 서른아홉 살이오. 그 정도밖에 먹지 않았소. 그리고 아직 미혼(未婚)이오.”
 삼총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좋소. 하지만 또 다른 규칙이 있소. 무술 시합을 할 사람은 몸이 건전하고 병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친구께선 아시지 않소?”
 또다시 악취가 물씬 풍길 것 같은 입을 쩍 벌리고 사나이는 괴상하게 웃으며 팔다리를 흔들어 보였다.
 “이만하면 건강하지 않소? 다리가 없소? 팔이 없소? 이것이 바로 건강이 아니고 또 무엇이오?”
 삼총관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으나 애써서 참았다.
 “하지만 친구께서는 다리를 절고 있지 않소?”
 사나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은 날 때부터 그런 것이오. 하지만 다리는 어디까지나 다리가 아니오?”
 삼총관은 고개를 저었다.
 “다리는 다리지만 저는 게 문제란 말이오!”
 그러자 괴상한 사나이는 분연히 말했다.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하오. 왜 당신들은 나를 따돌리려고 하는 거요? 당신들이 직접 고시판을 한번 보시오. 절름발이는 응모할 수 없다고 되어 있나? 이것은 불공평한 모욕이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위요!”
 말이 막히게 된 삼총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 하조천의 눈치를 살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하조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삼총관은 즉시 사나이에게 말했다.
 “좋소. 친구의 말이 맞다고 칩시다.”
 사나이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그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내 비록 이렇게 생기기는 했지만 당신네 아가씨께서도 좋아할 것이오. 하하... 사람이란 얼굴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오. 바닷물을 어찌 되로 다 담을 수 있겠소?”
 그의 말은 비록 그럴듯했지만 그의 말투나 행동이 너무 우스워 비무대 밑에 있는 군웅들은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삼총관은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어 오만상이 일그러졌다.
 “이제 제발 그만두시고 빨리 시합이나 하시오.”
 사나이는 히죽이 웃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여절심을 바라보았다.
 “아주 준수하게 생겨 먹었군.”
 여절심은 빙그레 웃음을 날렸다.
 “내가 보기에도 귀하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소.”
 이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다시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괴상한 사나이는 코를 휑 풀어 비무대 밖으로 팽개쳤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콧구멍을 쓱 닦더니 낄낄거리고 웃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너는 이 두 마디를 들은 적이 있는가?”
 여절심은 유들유들하게 빈정거렸다.
 “귀하, 무슨 말씀이시오?”
 사나이는 괴상망측하게 웃으며 말했다.
 “옛말에 자신이 없으면 심산(深山)으로 가지 말라고 했으며 또 내자불선(來者不善) 선자불래(善者不來)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아는가?”
 여절심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게 어떻다는 거요?”
 사나이는 답답한 듯이 자기의 머리를 박박 긁는데 이 바람에 그의 머리에서 허연 머리비듬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너는 본인의 뜻을 모르느냐?”
 “어디 얘기해 보시오.”
 “나의 뜻은 내가 이곳에 올라온 이상 너를 처단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만약 두렵다면 일찌감치 내려가는 것이 좋을 거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절심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런 식의 유치한 공갈 협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흐흐..... 당신은 정말 나를 처치할 자신이 있소?”
 사나이는 연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여절심은 준수한 얼굴에 조롱의 빛을 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믿지 못하겠는걸.”
 사나이는 만면에 실망의 빛을 떠올렸다.
 “정말 믿지 못하겠나?”
 “그렇소. 믿지 못하겠소.”
 여절심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사나이는 다급하게 추궁했다.
 “무엇 때문에 믿지 못하는 거냐?”
 여절심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하오. 첫째, 노형은 별로 무서운 인물 같지가 않구려. 둘째, 최소한 당신의 무공이 어떻다는 것을 한 수만이라도 보여 줘야 할 것이 아니겠소?”
 사나이는 눈을 크게 뜨며 진지하게 물었으나 그의 이러한 꼴은 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한 수를 시전해 보라고? 어떤 수를 보이면 좋겠나?”
 “어떤 수를 쓰건 노형에게 달려 있소.”
 사나이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이윽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내 한 수를 펼쳐 보이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비무대 밑에 있는 군웅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어느 분께서 내게 잠시 칼을 빌려 주시겠소?”
 그러자 비무대 옆에서 사회를 맡고 있던 사나이가 그 소리를 듣고 차고 있던 귀두도(鬼頭刀)를 비무대 위로 던졌다. 번쩍이는 광채를 빛내며 귀두도는 허공에서 서너 번 돌더니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에 꽂혔다.
 “고맙소.”
 사나이는 뒤뚱뒤뚱 걸어가더니 손을 내밀어 귀두도를 뽑아 들고 한번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칼날을 왼손에다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땅! 땅!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귀두도가 사나이가 오른손으로 내리칠 적마다 뎅강뎅강 부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사나이는 나중에 그 부러진 칼날들을 한데 모아 주먹을 불끈 쥐고 한차례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난 다음 그가 손을 펴자 그의 왼손에는 강철 부스러기가 한 주먹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사나이는 그 쇳가루를 비무대 밑으로 털어 버리더니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여보게, 이 한 수면 충분하겠나?”
 “와아......!”
 “굉장하다!”
 이때 비로소 사방에서 놀라운 외침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군웅들은 사나이의 무서운 솜씨에 경악의 빛을 나타냈으며 하조천까지도 몹시 놀란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군웅들은 보기에도 흉악한 괴인에게 이토록 놀라운 무공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절심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하하..... 좋소! 친구의 단옥수(斷玉手)와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은 매우 좋았으나 아직 약간 모자라오.”
 사나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모자란다고?”
 “그렇소. 아직 모자라오.”
 사나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후에야 품에서 크기가 오리 알만 한 차돌 한 개를 꺼냈다.
 “이것은 차돌이다. 매우 단단하지.”
 여절심은 아직도 여유가 만만한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사나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차돌을 공중으로 휙 내던졌다.
 차돌이 공중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순간 그는 탁! 하고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순간,
 쾅!
 가래침이 차돌에 가서 부딪치자 차돌은 산산조각이 났다. 깨어진 차돌이 사방으로 튕기는 순간 사나이는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두 손을 쫙 내뻗었다.
 휘이이이......
 그의 옷소매에서 세찬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부서진 차돌들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한 톨도 남지 않고 모두 소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실로 귀신도 곡할 솜씨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여절심의 얼굴에 처음으로 짙은 불안이 떠올랐다.
 “옥금강(玉金剛)과 대흡력(大吸力)!”
 사나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맞았어, 바로 그것이다.”
 말을 마친 사나이는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몸은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몸이 점점 커졌다.
 우우웅......
 뒤이어 그의 몸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커졌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는 비무대 오른쪽에 있는 공지를 향해 신음 비슷한 소리를 지르더니 거대하게 늘어난 쌍장(雙掌)을 번쩍 밀어냈다.
 꽈르릉!
 꽝!
 엄청난 폭음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뒤이어 와장창하며 무엇이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 십장(十丈)이나 떨어진 곳에 깔렸던 네모난 대리석이 무형의 거센 강기에 의해 산산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비무대 밑에서 관전을 하고 있던 하조천은 대경실색했다.
 “아... 저 무공은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대신장(大神掌)의 절예가 아닌가...?”
 하조천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사나이는 온몸을 한 번 크게 흔들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냄새가 풍기는 이빨을 드러내며 여절심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는 되었나?”
 여절심은 심각한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수를 더 보여야 하오.”
 사나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히죽 웃었다.
 “또 한 수를 보이란 말인가?”
 이때 여절심의 안색은 핏기를 잃어 약간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소. 이번에는 나도 심사숙고하여 측정하겠소.”
 “만약에 내가 해낸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여절심의 목소리는 어느 틈에 오만함이 없어지고 음침하게 변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린 시합을 할 필요도 없소. 나는 즉시 물러나겠소이다.”
 “그게 정말인가?”
 여절심은 그의 행동이 밉살스럽기 짝이 없어 발로 비무대를 한번 쾅 구르며 냉랭하게 외쳤다.
 “친구, 너무 기뻐하기에는 이르오. 아직 결과를 보아야 하니까.”
 사나이는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반짝이며 쾌히 승낙했다.
 “좋아! 단 마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네.”
 “물론!”
 소리친 여절심은 즉시 비무대 밑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 보주, 사람을 시켜 목판(木板)을 하나 올려 보내십시오.”
 하조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수하에게 목판을 가져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곧 회색 옷을 입은 건장한 대한 한 명이 관을 짜는 나무와 같은 두께의 널빤지 하나를 들고 비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두 손으로 공손히 여절심에게 바쳤다.
 여절심은 그 널빤지를 매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당신의 장력(掌力)과 내공(內功)은 과연 놀랍소. 진심으로 감탄하는 바이오. 하지만 나는 귀하가 손을 쓰는 속도가 어떤지 한번 보고 싶소.”
 사나이는 추악하게 생긴 얼굴에 미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자네는 나더러 이 목판을 가지고 시험을 해 보란 말인가?”
 “그렇소. 칼, 검, 주먹, 다리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쓰시오. 단 흔적을 남겨야 하오. 당신이 손만 쓰면 나는 친구가 이 방면에 대해 나보다 고명한지 판단할 수가 있소.”
 사나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절대로 안심하게.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여절심은 귀찮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 시작하시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나이는 서 있는 상태에서 쌍장을 내밀더니 열 손가락을 쫙 펴 목판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팍!
 이 한차례의 동작에 여절심이 들고 있던 널빤지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하는 사이였다. 동작을 멈춘 괴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목판을 뒤집어 본 여절심의 안색은 그대로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목판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손가락 자국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손가락 사이마다의 거리와 간격은 모두가 똑같았으며 신기하게도 길이까지 모두 일정하다는 것이었다.
 “아.... 저럴 수가....!”
 경악에 가득 찬 탄성이 파도처럼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여절심의 안색은 파랗다 못해 하얗게 변했고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이 배었다.
 그는 목판을 내동댕이치고 막 몸을 돌려 내려가려 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친구의 존성대명과 사승(師承)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사나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의 사부께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네.”
 여절심은 사악하게 눈알을 부라렸다.
 “강호인이라면 이름이나 사부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친구는 어찌 말을 하지 않으려 하시오? 설마 떠돌아다니는 낭인(浪人)은 아닐 테고......”
 사나이는 곰보투성이 얼굴에 당혹한 빛을 떠올리더니 도리 없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별명이 파면비차(芭面飛叉)이고 이름은 우풍광(禹風狂)이라 하며, 나의 사부는 색명무상(索命無常) 정구살(丁九殺)이라 하네.”
 “새... 색명무상 정구살?”
 여절심의 안색은 순식간에 칠면조처럼 변했다.
 비무대 밑에 있던 많은 군웅들도 그제야 그가 누군지를 알고 제각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절심은 한참 후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보니 정 노선배님의 전인(傳人)이셨군요.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우 형. 오늘의 일전은 귀하가 승리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생사판 여절심은 자기의 쟁쟁한 대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무공이 고강한 여절심마저 꽁무니를 빼고 사라지자 참가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여러 응시자들도 제각기 탄식을 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비무초친을 주최한 하조천은 일이 이렇게 되자 화를 낼 수도 없고 놀랍기도 하여 거의 넋이 빠진 상태였다. 하조천은 벌써부터 색명무상 정구살의 대명을 수천수만 번이나 들어왔던 터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듣자 하니 정구살의 공력은 이미 최절정에 달했으며, 거의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그의 편협된 마음이었다.
 그는 너무도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을 죽일 때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색명무상이란 별호도 그의 비위를 건드린 사람치고 아직 살아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금 무림에는 가장 다루기 힘든 인물이 열 명이 있었다.
 그들을 통틀어 일검(一劍), 이괴(二怪), 삼사(三邪), 사절(四絶)이라 칭한다.
 색명무상 정구살은 그들 중 삼사(三邪)의 한 명인 것이다.
 강호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이 파면비차 우풍광을 상하게 하거나 패배시키려면 색명무상 정구살과 적대시하는 위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정구살을 꺾을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감히 그를 격패시키겠는가?
 더구나 이 우풍광만 하더라도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 정도의 고수였다.
 하조천은 먹은 음식이 꽉 체한 듯 마냥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이 추한이 색명무상의 제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이놈을 이겨 내는 사람이 없다면 이놈이 당선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하조천은 애초부터 이번 비무 대회로 자신의 사위를 고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은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상대가 우풍광이라면 계획대로 일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섣불리 행동을 하다가 탄로가 나는 날이면 색명무상 정구살이 이 풍운보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추악한 인물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경우에는 어찌 되었건 간에 자기의 사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리 못생긴 곰보에게 어떻게 자신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을 맡긴단 말인가? 이 세상에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제야 하조천은 자신의 계획에 커다란 맹점(盲點)이 있었음을 깨닫고 깊이 후회하며 탄식했으나 만시지탄이었다.
 하조천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수석 총관(首席總官)인 현학(玄鶴) 단홍(端紅)이었다. 단홍은 비단 무공만 고강한 게 아니라 지략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하조천이 가장 믿는 수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비무초친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단홍은 하조천의 침통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나 꾀주머니라 불리는 그도 일시지간은 하조천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하조천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보주, 일이 귀찮게 되었습니다.”
 “흐음......”
 하조천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몰아쉬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비무대 위에서 기고만장하여 상대를 기다리는 우풍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조천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놈이 될 것 같군. 단 노이(端老二), 어떻게 하면 좋겠나? 만약 저놈을 당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건 내 딸에게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라는 격이 아닌가?”
 단홍은 고개를 돌려 군웅들을 휘둘러보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다.
 “보주, 너무 조급히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은 도전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조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려운 일이네. 만약 저놈이 자기 사부의 이름을 들먹거리지 않았다면 혹시 도전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미 그놈이 자기 사부가 누구라는 것을 밝힌 이상 그 누구도 감히 섣불리 도전을 하지 못할 걸세.”
 단홍은 주먹을 불끈 쥐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게 다 여절심이란 놈의 실책 때문입니다. 저놈의 출신 내력을 묻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하조천은 갑자기 단홍을 향해 짜증스럽게 말했다.
 “단 노이, 자네의 그 신기한 계책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는 분명 화일로, 그놈이 이 시합에 나설 거라고 단언하지 않았었나?”
 단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놈이 이 근처에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종적이 묘연해져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자네의 계책대로라면 화일로는 이 시합에 참가해서 당연히 우승을 해야 하지 않나? 한데 그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난데없이 낮도깨비 같은 녀석이 우승하게 생겼으니..... 자칫하다가는 쥐새끼를 잡으려다 장독마저 깨뜨려 버리는 꼴이 되지 않겠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화일로는 호기심이 강하고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놈이니 필시 이 근처에 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보주께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이때 비무대 위에 있던 우풍광은 몇 년 동안이나 이를 닦지 않았는지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기고만장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빨라 올라오시오. 여러분 중에서 어느 분이 한 수 가르쳐 주시겠소? 그래도 올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이만 징을 치라고 하겠소. 징 소리만 들리면 당신들은 가망이 없소.”
 이것을 본 하조천은 좌불안석, 앉았다 일어섰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아직 화일로, 그놈이 나타나지 않지?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쯤 그놈이 비무대에 나타나야 옳은 일이 아닌가?”
 단홍은 급히 고개를 빼내 군웅들을 두리번거렸으나 화일로는커녕 그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비무대 위에 있는 우풍광은 어색한 몸집으로 몸을 흔들며 왔다 갔다 하고 큰 소리로 악을 썼다.
 “아무도 상대할 사람이 없소? 내가 보기에는 그만 징을 울려야 할 것 같군.”
 그러고는 사회를 맡고 있는 사나이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시오. 당신이 세 번 소리를 지르시오. 그래도 올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그때는 징을 울려야지.”
 하조천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수시로 변했다.
 그러나 좌우에 시립한 여덟 명의 총관들도 속수무책인 듯 서로 얼굴만 마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사회자의 귀에 거슬리는 흐늘흐늘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빨리 해라. 만약 소리치지 않으면 내가 화를 내겠다!”
 가뜩이나 우풍광의 추악한 용모와 무서운 무공에 겁을 집어먹고 있던 사회자다. 그는 날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워 즉시 소리를 높이 외쳤다.
 “또 도전하실 분이 없으십니까?”
 이렇게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컸다 작았다 하여 극히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수백 명이 넘는 군웅들은 서로 얼굴만을 마주 볼 뿐 누구 한 사람 대답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사회를 맡은 사나이의 목소리는 마치 목구멍에 한 줌의 모래가 들어간 듯 가까스로 다시 터져 나왔다.
 “도전하실 분이 없습니까?”
 “......”
 역시 광장은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만 흐를 뿐 마치 공기마저도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때 비무대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회의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칼자국 장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노부는 그만 자네와 헤어져야겠군.”
 칼자국 장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갑자기 어딜 가려 하십니까?”
 회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노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네. 그들을 더 실망시킬 수야 없지.”
 회의 노인이 몸을 돌리자 칼자국 장한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아직까지 노인장의 성함도 모르고 있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소인은 담대경(譚大經)이라 하며 외호는 흑표자(黑豹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장의 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회의 노인은 담담하게 웃으며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다.
 “노부의 이름은 자네가 얼마 전에 꺼내지 않았는가?”
 엉뚱한 대답에 칼자국 장한은 일순 멍청해졌다.
 “제가 언제 노인장의 이름을 꺼냈습니까?”
 회의 노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노부의 성이 화(華)씨이고 이름은 일로(一露)라고 하네.”
 “네?”
 칼자국 장한은 기겁을 하게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회의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렇소. 본인이 바로 그 풍파무쌍이라는 화일로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몸을 솟구쳐 사 장여쯤 올라간 후 허공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마치 바람결에 흐르는 연기와 같이 군웅들의 머리 위를 넘어 비무대 위로 날아갔다.
 “와아......!”
 “굉장한 신법(身法)이다!”
 화일로가 비무대 위에 사뿐히 내려서자 온 장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군웅들은 설마 정구살의 위명에 겁을 먹지 않고 우풍광에게 도전하는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라 하나같이 놀라고 경악스러워했다.
 화일로는 비무대의 중앙에서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우풍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비무대 아래 군웅들을 향해 포권의 예를 올리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열렬한 성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웅들은 비무대에 오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화일로는 노인으로 분장을 했었지만 다만 얼굴에 약 가루를 얇게 발랐을 뿐이었다. 따라서 오관(五官)과 얼굴의 형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었다.
 그가 아까 몸을 날려 비무대 위로 날아갔을 때 이미 약 가루를 지워 버렸기 때문에 지금 군웅들과 마주하고 있는 얼굴은 그의 진짜 영준한 얼굴이었다.
 “화일로!”
 “와, 화일로다!”
 “저 사람이 바로 풍파무쌍 화일로다!”
 광장에는 마치 강(江)의 물이 갑자기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같이 괴소, 찬탄, 경악, 비명의 소리가 쉴 사이 없이 터져 나왔다.
 한마디로 말해 열광의 도가니였다.
 잔뜩 찌푸려졌던 하조천과 단홍의 얼굴도 활짝 펴져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사람들 같았다. 단홍은 하조천을 돌아보며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일단 비무대 위에 오른 화일로는 발로 바닥을 두드려서 그 탄력을 시험해 본 다음 우풍광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우풍광의 괴상한 두 눈이 초점을 화일로에게 맞추더니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연 지금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던, 아니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이 우풍광의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몹시 불안한 것처럼 보였으며, 지금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한 위축감 같은 것을 의식하는 듯했다.
 드디어 이 색명무상의 고명한 제자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이 바로 풍파가 무쌍하다는 그 화일로요?”
 화일로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왜 이제야 올라오는 거요?”
 “하하...... 본 가주의 신분으로 어찌 조무래기들과 겨룰 수가 있겠소? 적어도 색명무상의 제자 정도는 돼야 상대할 기분이 나지 않겠소?”
 바짝 긴장한 채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군웅들은 이 말을 듣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풍광의 괴상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당신은 내 사부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이오?”
 화일로는 느긋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남들은 그를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는 아직까지 누구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소.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남자라면 사부를 가지고 거들먹거릴 게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실력으로 위세를 나타내야 하오.”
 우풍광의 얼굴이 흥분으로 인해 더욱 시뻘게졌다.
 “내가 언제 사부님을 내세웠단 말이오? 당신 정도는 굳이 사부님이 아니더라도 나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그건 당신의 희망 사항일 뿐이지. 당신의 사부가 직접 와도 나를 어쩌지 못할 텐데 당신 혼자 나를 당해 낼 수 있겠소?”
 화일로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대꾸하자 우풍광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화를 냈다.
 “이.... 이놈! 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다니..... 너는 나의 사부를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나까지 비꼬았으니 내 기필코 네놈의 목을 베고 말겠다!”
 우풍광이 화를 낼수록 화일로의 표정은 여유만만해졌다.
 “우풍광! 너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산 넘어 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본 가주가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어서 내려가도록 하시오!”
 우풍광의 얼굴이 온통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목에다 핏발을 세우며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 어서 병기를 뽑아라! 단번에 박살을 내 버리겠다.”
 화일로는 피식 웃었다.
 “당신에게 병기를 쓴다면 당신의 사부가 나를 욕하지 않겠소?”
 우풍광은 어리둥절하여 급히 물었다.
 “사부님이 왜 너를 욕한단 말이냐?”
 “하하...... 어린아이를 너무 심하게 다룬다고 말이오.”
 이 말을 듣자 비무대 아래에서 폭소가 터졌다.
 “우하하하하......!”
 그제야 우풍광은 화일로가 자신을 놀렸음을 깨닫고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이놈이......”
 우풍광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벼락같은 노호성을 지르며 화일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어헝!”
 그의 동작은 생긴 것과는 달리 비호처럼 재빠른 것이었다.
 파파팍!
 순식간에 그는 화일로의 코앞으로 달려들며 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화일로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우풍광의 주먹이 거의 자신의 지척으로 다다랐을 때야 슬쩍 두 발을 움직였다.
 휘휘휙!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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