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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냉혈무정 [E]

냉혈무정 1권-1

2014.12.30 조회 1,360 추천 10


 서 장 1 어 떤 終 末
 
 그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두 손을 가슴 부위에 깍지 껴 얹고,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특이한 자세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코로 숨을 쉬고 있었다.
 절정고수(絶頂高手)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그가 운공(運功) 중이며, 또한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스으으.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 속에서 어디선가 희미한 혈무(血霧)가 피어올랐다.
 마치 시뻘건 선혈처럼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섬뜩한 혈무는 순식간에 실내를 가득 뒤덮어 버렸다.
 그 사나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혈무의 몇 가닥을 코로 흡입한 후였다.
 사나이는 눈을 번쩍 떴다. 방 안은 이미 혈무로 자욱하게 뒤덮여 있었다. 그와 함께 구역질 나는 느끼한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져 왔다.
 미동도 않고 있던 사나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은 이미 검은 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이... 이것은 반구혈장(盤鳩血漿)...”
 그의 입술을 뚫고 경악에 가득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파아아아아!
 우측의 벽이 통째로 박살이 나며 무언가 싸늘한 기운이 폭사해 왔다. 그 기운은 너무도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와 그의 미간(眉間)을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팟!
 “크윽!”
 사나이의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 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이마에 시뻘건 구멍이 뻥 뚫렸다.
 그때 한 사람이 부서진 벽을 넘어 서서히 사나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사나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들어온 사람을 올려 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네가....”
 사나이는 암습자(暗襲者)를 향해 무어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채 몸이 닿기도 전에 사나이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암습자는 차갑게 식어 가는 사나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 듯 사나이의 두 눈은 크게 부릅떠져 있었다.
 암습자는 몸을 숙여 그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확인했다.
 암습자는 시체의 부릅떠진 눈을 감겨 주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본 맹(本盟)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칠혈당(七血黨)도 종말(終末)을 고하게 됐군.”
 암습자의 마지막 말은 어둠에 잠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서 장 2 어 떤 出 發
 
 화창한 날씨였다.
 임조영(林照影)은 침상에 반쯤 걸터앉은 채 창문 너머로 조금씩 환하게 비쳐 오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한쪽 구석에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구레나룻을 기른 적막한 눈빛의 사나이가 알몸으로 우뚝 선 채 자신을 빤히 쏘아보고 있었다.
 흥겹다기보다는 오히려 쓸쓸한, 그리고 성급하기보다는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을 띤 얼굴이었다. 치렁치렁한 흑발은 아무렇게나 뒤로 쓸어 넘겨 대충 묶여 있고, 헝클어진 앞머리는 얼굴을 반이나 뒤덮었다.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내비치는 두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쓸쓸한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코는 사나이답게 크고 우뚝했고, 입술도 두툼했다. 입술 부근과 턱 밑으로는 시퍼런 수염 자국이 나 있었다. 아무리 수염을 자주 깎아도 언제든지 수염 자국이 눈에 띌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나 그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마에서 양미간(眉間)을 지나 거의 턱에 이르기까지 그어진 끔찍한 흉터였다.
 흉터는 얼핏 보기에 예리한 흉기로 그어진 것 같았는데,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듯 길고 선명했다. 그런데도 보기 흉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그의 얼굴의 다른 부분과 어울려 그의 인상을 더욱 음울하고 냉혹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동안 임조영은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감상하듯 자신의 얼굴을 구석구석까지 살펴보았다. 때로는 손을 들어 이마에서 턱까지 길게 그어진 흉터를 만져 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침상으로 돌아왔다.
 침상 위에는 몇 가지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깃구깃한 회색 장삼 한 벌.
 그리고 대여섯 가지의 기이한 모양의 금속제품들.
 그것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살인 병기(殺人兵器)들이었다.
 임조영은 그중에서 하나의 병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끝이 날카로운 톱니바퀴 모양으로 생긴 팔찌였다. 팔찌는 거무튀튀한 색을 띠고 있었는데, 나사 같기도 했고 륜(輪)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의 이름은 조핵표(釣核鏢)라 했다.
 조핵표의 묘용(妙用)은 수십 가지나 되었으나, 그중 가장 큰 묘용은 이것이 당대 최고의 원거리 살상용(殺傷用) 암기라는 것이었다.
 조핵표의 표면에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홈이 여러 개 나 있었다. 때문에 조핵표를 손목에서 분리하여 던지면 이 미세한 홈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면서 괴이한 음향이 터져 나오는데, 공력이 약한 사람은 그 음향만 들어도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제아무리 공력이 높은 인물이라도 파동 치듯 흔들리며 괴이한 각도로 날아오는 조핵표를 제대로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임조영은 조핵표를 자신의 왼쪽 손목에 찼다. 그가 살짝 조핵표를 쓰다듬자 그토록 섬뜩한 빛을 발하던 톱니바퀴 모양의 날[刃]들이 모두 안으로 말려 들어가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한 검은 팔찌 고리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그가 집어 든 물건은 별빛 문양이 가득 수놓아진 금팔찌였다.
 금팔찌에 수놓아진 수십, 수백 개의 별 모양은 어찌나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는지 만지면 금시라도 금빛 별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금팔찌에 새겨진 별 문양은 모두 백여덟 개. 이 백팔 개의 별이 모두 제각기 따로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꺼번에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괴성환(魁星環)이라고 했다. 괴성환은 천하에서 가장 효과적인 단거리 살상용 암기 중 하나였다. 그 백팔 개의 별 문양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당금 천하에 오직 임조영, 한 사람뿐이었다.
 임조영은 괴성환을 오른쪽 손목에 매어 찼다.
 그다음에 있는 것은 길이가 이 장쯤 되는 기다란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의 굵기는 유달리 가느다랬는데, 기이하게도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사슬이었다. 안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것이 북해(北海)의 만년설(萬年雪) 밑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만년백옥강(萬年白玉鋼)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만년백옥강으로 만든 이 쇠사슬은 척혈삭(剔血削)이라 했다.
 척혈삭은 그 섬뜩한 이름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병기였다. 이것은 곤(棍)처럼 쓸 수도 있고, 창(槍)이나 편(鞭)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검(劍)이나 도(刀)처럼 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척혈삭의 양쪽 끝은 다른 부위와는 달리 뾰쪽한 갈고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임조영은 척혈삭을 자신의 허리 부분에 정성 들여 감고는 그 끝 부분을 서로 연결해서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그가 척혈삭을 매자 마치 허리에 붕대를 감은 듯한 모습이 되었다.
 네 번째로 그가 집어 든 것은 두 개의 은편(銀片) 뭉치였다.
 마치 물고기 비늘 같은 수백 개의 얄팍한 은편으로 이루어진 그 물건들은 가죽처럼 연하고 부드러웠다.
 그 은편 뭉치들은 천하에서 가장 질긴 자모은정(子母銀精)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공력을 주입하면 각각의 은편이 모두 일어나 수백 개의 칼날처럼 변하게 된다. 그 은편인(銀片刃)의 예리함은 천하의 어떤 신병이기(神兵利器)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것이어서,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자르고 호신강기(護身罡氣)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고 만다.
 이 두 개의 자모은편(子母銀片)은 팔목을 보호하기 위한 물건들로, 은린갑(銀鱗甲)이라 했다.
 임조영은 두 개의 은린갑을 각각 양쪽 팔뚝에 매어 찼다.
 이제는 오직 두 가지 물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 두 가지야말로 다른 네 개의 병기를 합친 것보다 더욱 가공할 살인 무기들이었다.
 그것들의 이름은 각각 절명인(截命刃)과 귀왕자(鬼王刺)라고 했다.
 절명인은 무색투명의 작은 반달 모양의 칼날이었고, 귀왕자는 거무튀튀한 흙빛을 띤 갈쿠리 같은 날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들은 크기가 유달리 작고 두께가 종이보다 더욱 얄팍해서 언뜻 보이에는 마치 유리 조각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두 개의 병기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들이었다.
 몸통이 전부 칼날, 그 자체였기 때문에 맨손으로는 잡거나 만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명인과 귀왕자는 각각 물소 가죽으로 만든 작은 가죽집에 꽂혀 있었다.
 그 가죽집은 손바닥의 절반 정도 크기였는데, 위쪽은 장갑처럼 손가락을 끼우는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래쪽은 칼날이 반쯤 꽂힌 칼집을 이루고 있었다.
 임조영이 그 가죽집을 양손에 끼우자, 마치 손가락 부분이 없는 가죽 장갑을 낀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 가죽집은 흡착력이 좋고 공기가 잘 통해서 아무리 오래 끼고 있어도 조금도 불편하지가 않았다.
 양손에 가죽집을 낀 채로 임조영은 몇 차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갑자기 두 주먹을 살짝 쥐었다. 그가 다시 주먹을 펴자 그의 양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번뜩이는 칼날이 나타났다. 바로 이 동작이 절명인과 귀왕자를 칼집에서 꺼내는 방법이었다.
 여섯 개의 살인 병기를 모두 장착한 다음 임조영은 몇 차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의 몸은 군살 한 점 없이 깡말랐고, 꼭 필요한 곳에만 단단한 근육이 붙어 있었다. 전신의 피부는 갈색으로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고, 크고 작은 상처가 적지 않게 나 있었다.
 한동안 몸을 움직여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임조영은 마지막으로 침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구겨진 회색 장삼을 걸쳐 입었다.
 장삼을 입자 그는 몸을 곧게 폈다.
 그의 키는 훤칠했고, 몸매는 회초리처럼 날렵하면서도 강인해 보였다. 어느 누가 보기에도 그의 전신에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여섯 개의 살인 병기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임조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햇살은 찬란했고, 날씨는 청량하니 미풍에 꽃향기가 실려 왔다.
 임조영은 고개를 들어 눈을 찌를 듯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숨을 불어 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씨로군.”
 정말 좋은 날씨.
 새로운 출발(出發)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날씨였다.
 
 
 第 一 章 冷 血 의 사 나 이
 
  1
 
 
 이곳은 매우 특이하게 생긴 장소였다.
 계절은 신록(新綠)이 우거진 초여름인데도 이 일대에는 나무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사방이 온통 울퉁불퉁한 암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암석군의 너비는 무려 백여 장이나 되었는데, 중앙 부근은 유달리 낮고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일대 사람들은 이곳을 천석평(千石坪)이라고 불렀다.
 천석평은 지형이 험하고 외진 곳에 떨어져 있어 평소에는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한산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드넓은 천석평이 온통 인파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석평의 중앙 부근을 구름처럼 에워싼 채 정신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외지고 험한 천석평에 몰려든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천석평의 가운데에는 반경 오 장 정도 되는 널따란 암반이 있었다.
 지금 그 암반의 중앙에는 청의를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청의 사내의 눈빛은 유난히 날카로웠고, 훤칠한 키에 단단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자가 바로 그 유명한 혈수응조(血手鷹爪) 곽채(郭彩)로군그래. 바늘로 찔러도 몸에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냉혈한(冷血漢)인...”
 “그뿐인 줄 아나? 손속은 또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데... 일전에 듣기로는 자기한테 눈을 흘겼다고 강동팔태세(江東八太歲) 여덟 사람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군. 그것도 하나같이 목을 비틀고 배를 갈라서 말일세.”
 “그게 정말인가?”
 “아무렴. 오죽했으면 지옥에 갈지언정 곽채를 만나지 말라는 소문까지 있겠는가?”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군.”
 “어쨌든 오늘 일은 아주 볼만할 걸세.”
 사람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감도는 눈으로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청의 사내를 연신 훑어보고 있었다.
 혈수응조 곽채!
 무림인들에게 이 이름은 공포와 전율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의 수공(手功)은 무림에서 열아홉 번째, 그리고 조법(爪法)은 여섯 번째로 꼽혔다.
 하나 잔인하고 독하기로 따지자면 누구나 그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그는 비록 무림제일의 살인마들이라는 십이대흉살(十二大兇煞)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십이대흉살보다 아래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곽채를 바라보는 중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은은한 두려움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 곽채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허공을 올려 본 채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해는 금세 중천(中天)에 다다라서 정오가 되었다.
 그동안에도 천석평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는 더욱 많아져서 드넓은 천석평이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인파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차츰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하고 지루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왔다!”
 중인들이 둘러선 북쪽 구석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과연, 인파로 둘러싸인 한쪽 구석에 갑자기 길이 뻥 뚫리며 세 명의 인물들이 앞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들이었다.
 우측의 인물은 비쩍 마른 체구에 독사처럼 예리한 눈매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 앙상할 정도로 말랐는데도 약해 보이기는커녕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민첩해 보였다.
 좌측의 인물은 그와는 반대로 미련하리만치 뚱뚱한 인물이었다.
 살이 뒤룩뒤룩 오른 얼굴에 두 눈은 너무도 작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입가로는 연신 실없는 미소를 짓고 있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하나 이따금씩 그 작은 두 눈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악독한 광망이 뿜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자의 심성(心性)이 외모와는 딴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운데의 인물은 체구가 당당한 금의 중년인이었다. 얼굴이 자줏빛으로 검붉고,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했다.
 세 명의 중년인은 중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곽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 속삭였던 두 사람이 다시 조그만 소리로 소곤거렸다.
 “저들이 바로 신응문(神鷹門)의 하삭삼응(河朔三鷹)이구나!”
 “그렇다네. 저 비쩍 마른 말라깽이가 악독하기 그지없는 독응(毒鷹) 진무양(秦舞陽)이고, 뚱뚱보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인다는 혈응(血鷹) 장문귀(張文貴)라네.”
 “그렇다면 저 금의를 입고 풍채 좋은 인물이 바로 하삭삼응의 우두머리인 금응(金鷹) 범중립(范仲立)이겠군그래?”
 “물어보나 마나지. 그가 바로 조법(爪法)으로만 따지자면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범중립일세.”
 “야! 혈수응조와 하삭삼응이라... 이거 정말 승패(勝敗)를 예측할 수 없겠는데....”
 하삭삼응은 강남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응문의 최고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신응문의 문주인 대응왕(大鷹王) 응천리(應千里)가 가장 아끼는 수하들일 뿐 아니라, 개개인이 무림의 최절정을 달리는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특히 금응 범중립은 대응왕을 제외하고는 손가락 무공이 강호에서 제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혈수응조 곽채의 응조공(鷹爪功)이 제아무리 악독하다고 해도 대응왕은 물론이고 금응 범중립을 당할 수는 없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어 댔다.
 곽채는 날카로운 손속만큼이나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대응왕 응천리는 물론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이니만큼 자존심 강한 곽채로서도 자신이 그보다 한 수 뒤진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대응왕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곽채는 금응 범중립이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라는 소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곽채는 대담하게도 직접 신응문에게 도전장을 보내 금응 범중립과 자신의 무공을 공개적으로 겨루어 보자고 했던 것이다.
 범중립은 처음에는 곽채의 도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무림인들이 온통 그들의 대결에 이목을 집중시키자 더 이상 태연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곽채에게 패하는 날에는 비단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화려한 명성뿐만 아니라 신응문 전체의 위신도 크게 추락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가 평소에 하늘처럼 존경하고 숭배해 마지않는 대응왕 응천리조차도 그들의 대결에 관심을 갖고 은밀히 그들을 성원하는 형편이었다.
 드디어 범중립과 그의 두 명의 아우는 곽채의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곽채는 날카로운 눈으로 독응 진무양과 혈응 장문귀를 훑어보다가 마지막으로 범중립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범중립 또한 곽채의 냉막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방에 구름처럼 둘러선 중인들은 터질 듯한 긴장감을 느꼈는지 쥐 죽은 듯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독응 진무양과 혈응 장문귀가 뒤로 물러나고 범중립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때부터 범중립과 곽채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일언반구 말도 없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혈수응조 곽채였다.
 곽채의 손가락은 정말 매서웠다.
 반쯤 구부러져 갈고리처럼 모아진 그의 손가락은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구부러진 손가락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며 범중립의 요혈(要穴)을 노리고 들어오는 광경은 날카로움을 넘어 살벌하기조차 했다.
 하나 범중립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두 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로 자신의 옆구리를 금시라도 꿰뚫을 듯 무섭게 다가오는 곽채의 손가락을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쉬아악!
 바람을 가르는 그 파공음 소리만 들어도 곽채의 손가락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범중립의 몸이 움직였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범중립의 몸은 엄청나게 빨랐다.
 옆으로 두 걸음, 뒤로 한 걸음, 그리고 다시 앞으로 세 걸음.
 이 모든 동작이 단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범중립의 몸은 어느새 곽채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곽채는 범중립이 단순히 몸을 몇 차례 움직이는 것만으로 자신의 공세를 가볍게 뚫고 들어오자 입꼬리를 묘하게 꿈틀거렸다. 그것은 어찌 보면 경악에 찬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싸늘한 비웃음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범중립은 곽채의 앞으로 바짝 다가오며 양손을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곽채는 피할 생각도 없는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른손을 갈쿠리처럼 모아 범중립의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갔다.
 곽채의 이 한 수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범중립이 계속 손을 내뻗는다면 비록 곽채의 양쪽 관자놀이에 피 구멍을 뚫어 놓을 수 있겠지만, 범중립 또한 곽채의 손가락에 목덜미가 관통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범중립은 곽채가 처음부터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식으로 나올 줄은 미처 몰랐는지 눈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거두고 옆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곽채의 왼손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었다.
 범중립의 몸이 채 완전히 옆으로 물러서기도 전에 곽채의 손이 거의 그의 몸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으로 보아 곽채는 이미 범중립이 그쪽으로 피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앗?”
 구경을 하고 있던 중인들 틈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보기에도 범중립은 피할 사이도 없이 곽채의 손가락에 옆구리를 꿰뚫리고 말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 순간 범중립이 두 팔을 학(鶴)처럼 활짝 벌리며 몸을 맹렬하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그의 몸이 무섭게 선회함과 동시에 한 줄기 기이한 암경(暗勁)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곽채는 막 왼손으로 범중립의 옆구리 늑골을 움켜잡으려다가 황급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와 함께 세찬 경기가 그의 손가락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곽채는 평생 두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하마터면 자신의 손가락이 그대로 부러질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범중립이 조금 전에 사용했던 수법은 금선추(金旋鎚)라는 것으로, 몸을 전력으로 회전시켜 몇 배의 반탄력으로 상대를 격살시키는 상승(上乘)의 무공이었던 것이다.
 곽채는 범중립의 무공이 소문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알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진재절학(眞才絶學)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이 갈쿠리처럼 모아진 채 범중립의 미간을 향해 뇌전(雷電)처럼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놀라워서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매서웠다. 바로 곽채가 천하에 자랑하는 폭뢰구조(暴雷九爪) 중의 뇌봉전별(雷逢電別)이라는 초식이었다.
 폭뢰구조는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은 위력이 있어서 중인들이 무언가가 번쩍거린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곽채의 손은 범중립의 코앞으로 닥쳐들고 있었다.
 범중립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왔다.
 이상하게도 그의 양 손가락에는 은은한 금광(金光)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범중립을 신응문의 제이인자(第二人者)로 만든 그의 독보적인 금룡조경(金龍爪勁)이었다. 범중립의 금룡조경은 대응왕의 대응조력(大鷹爪力)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아무도 감히 정면으로 받아 낸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무서운 무공이었다.
 장내는 금세 수십 개의 조영으로 뒤덮여 버렸다. 마치 뇌전(雷電)처럼 무시무시하게 범중립의 전신을 핍박하는 것은 곽채의 폭뢰조(暴雷爪)이고, 휘황한 금광을 뿌리며 집요하게 곽채의 요혈을 노리며 쳐들어오는 것은 범중립의 금룡조(金龍爪)였다.
 중인들은 두 절세고수의 경천동지할 격전에 입을 딱 벌렸다.
 꽈르릉!
 반경 오 장이나 되는 거대한 암반이 두 사람의 손에서 뿜어 나오는 가공할 경력 때문에 금시라도 박살 날 듯 마구 뒤흔들렸다.
 크고 작은 돌 조각들이 허공에 난비하여 두 사람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실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무서운 격전이 아닐 수 없었다.
 곽채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폭뢰구조 중의 절초를 펼쳐 범중립의 전신을 짓쳐 갔다.
 그의 폭뢰구조는 천하무림의 조법(爪法)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일종(一種)으로,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고 뼈가 박살 나는 살인적인 위력이 있었다. 그에 비해 범중립의 금룡조는 웅후하면서도 유현(幽玄)했다. 때문에 곽채의 폭뢰조는 금룡조의 웅후한 힘에 막혀 원래의 막강한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범중립 또한 조금만 손길을 늦추면 곽채의 폭뢰조가 자신의 금룡조경을 찢고 들어오기 때문에 몹시 힘이 들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은 서로 간에 극성(剋性)을 만난 것 같았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흘러갔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결정적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곽채는 침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그의 폭뢰구조는 그 위력이 강맹한 만큼이나 공력의 소모가 극심한 무공이었다. 더구나 그의 내공은 아무래도 범중립보다는 약간 뒤떨어지는 형편이었다.
 곽채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끝내는 자신의 공력이 바닥을 드러내서 범중립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욱 사납게 폭뢰구조를 전개했다. 하나 범중립의 금룡조경은 그야말로 한 치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어 그의 가공할 폭뢰조로서도 쉽사리 뚫을 수가 없었다.
 곽채의 이마에서 조금씩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코 좋은 징조라고 할 수가 없었다. 땀이 난다는 것은 그만큼 내공이 달린다는 증거였다.
 범중립같이 노련한 인물이 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즉시 그의 손속이 한층 더 빨라졌다. 금룡조경 중의 절초들인 용조천석(龍爪穿石), 용조추혼(龍爪追魂) 등이 줄지어 노도처럼 곽채를 향해 퍼부어졌다.
 곽채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사력을 다해 폭뢰조로 맞서 갔다.
 꽈꽝!
 두 사람의 조영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하여 폭음이 터져 나왔다.
 “으음....”
 동시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중인들이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떠 바라보니,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며 휘청거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혈수응조 곽채가 아닌가?
 곽채의 낯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반면 일단 승기(勝機)를 잡은 범중립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리며 덮쳐 왔다. 당당한 몸집의 범중립이 금의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오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붕새가 비상하는 것 같았다.
 쾌애액!
 미처 그의 손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섬뜩한 파공음이 곽채의 귓전을 갈랐다.
 곽채는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범중립의 양손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공할 경력을 담고 있음을 직감하고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이야말로 범중립이 자랑하는 금룡조경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초식 중 하나인 용조현영(龍爪現影)이었던 것이다.
 곽채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좋다. 이렇게 된 바에는....!’
 곽채는 이를 악문 채 피하지 않고 범중립의 막강한 조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에서 거무스름한 경기가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바로 폭뢰구조 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한 폭뢰분전(暴雷奔電)이 펼쳐진 것이다.
 주위가 온통 휘황찬란한 금광과 거무튀튀한 강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렸다.
 꽈꽈꽝!
 갑자기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천석평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 마구 뒤흔들렸다.
 그 가공할 위세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실색한 채 정신없이 장내를 바라보았다.
 곽채는 처음의 위치에서 거의 삼 장이나 뒤로 주르르 밀려난 채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낯빛은 유령처럼 창백했고, 입가로는 가느다란 선혈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적지 않는 내상(內傷)을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범중립의 모습 또한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범중립은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있었고, 커다란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곽채만큼 창백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핼쑥해져 있었다.
 조금 전의 경천동지할 격돌에서 범중립보다는 곽채가 더욱 낭패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하나 범중립은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내공이 곽채보다 몇 수 위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무공 중 가장 무서운 세 초식 중 하나인 용조현영을 전개했기 때문에, 이번의 일격으로 곽채를 완벽하게 격파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의외에도 곽채는 겨우 약간의 내상을 입은 것에 불과할 뿐,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곽채는 곽채대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원래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그는 곧이어 마음속으로 불같은 살심(殺心)이 마구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빛을 흉흉하게 번뜩이며 오히려 먼저 범중립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범중립은 곽채가 내상(內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을 가해 오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지독한 놈! 끝장을 보자 이거로군....’
 그는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피하지 않고 양손을 기이하게 구부리며 마주쳐 갔다.
 장내는 다시 두 절세고수가 내뿜은 조영으로 뒤덮여 버렸다.
 하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조금씩 곽채가 밀리고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원래 내공이 달린 데다 내상(內傷)마저 입게 되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안목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이제 그들의 격전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조만간에 승패가 판가름 나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중인들 틈에서 꾸깃꾸깃한 회의를 입은 사나이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와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천석평의 중앙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구름처럼 둘러선 중인들은 넋을 잃고 치열한 격전을 구경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그들에게로 다가가자 깜짝 놀라 나타난 사람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2
 
 회의인은 조금도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걷는 자세는 다소 특이했다.
 걸음걸이 자체가 몹시도 유연했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박자감이 있어 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걷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름다운 미희(美姬)의 우아한 율동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천하에서 둘도 없는 호한(好漢)의 힘찬 동작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회의인의 몸이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암반에서 삼 장여 부근에 도달했을 때였다.
 “잠깐.”
 짤막한 외침과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홀쭉하고 깡마른 청의인과 뚱뚱한 비곗살의 중년인. 그들은 바로 독응 진무양과 혈응 장문귀였다.
 독응 진무양은 날카로운 눈으로 회의인을 노려보았다.
 회의인의 헝클어진 흑발 아래로 번득이는 눈빛, 그리고 이마에서 아래턱까지 길게 그어져 유난히 시선을 끄는 흉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만만히 볼 놈이 아니군.’
 진무양은 칙칙한 회의를 걸친 사내의 전신을 쓰윽 훑다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회의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임조영(林照影).”
 그의 음성은 굵고 나직했다. 그래서 쉰 것처럼 들렸으나 결코 쉰 목소리는 아니었다.
 진무양은 기억을 더듬었으나 당금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 중에서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이내 깨달았다. 그는 조금 눈살을 찡그리다가 다시 물었다.
 “귀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오?”
 임조영은 말없이 턱으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진무양의 눈꼬리가 쭈욱 치켜 올라갔다. 자연히 그의 음성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가 누구요?”
 “곽채.”
 진무양과 장문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진무양은 다시 쏘는 듯한 눈으로 임조영을 응시했다.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려고 하는 거요?”
 “내가 왜 그런 것까지 말해야 되지?”
 임조영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진무양의 눈꼬리가 험악해졌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작자를 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 범중립과 곽채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겨루고 있지 않은가?
 승부는 점점 범중립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변(異變)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삼사십 초 이내에 범중립은 곽채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이들의 결투에 끼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무양은 다시 임조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임조영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앞을 가로막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조용한 음성. 너무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어서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하나 그 음성을 듣자 진무양은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진무양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자신이 한낱 정체 모를 인물의 말 한마디에 순간적이나마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듯 냉막한 눈으로 임조영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네놈이야말로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다가온다면 지옥이 어떤 곳인지 구경을 시켜 주겠다!”
 그의 음성은 어느새 거칠게 변해 있었다. 한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조영은 서슴없이 성큼 그의 앞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정말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로구나!”
 진무양은 싸늘하게 호통을 치며 번개같이 오른손을 내뻗어 임조영의 어깨를 잡아 왔다.
 그의 손이 한 줄기 백선(白線)을 그리며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실로 독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악독한 솜씨였다.
 하나 그의 손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임조영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어느새 저만큼 가 있었던 것이다.
 “엇?”
 진무양은 흠칫 놀라며 급히 뻗었던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을 떨쳐 냈다.
 기이하게도 진무양의 왼손 손가락 끝은 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로 그의 성명절기인 오독조공(五毒爪功)이 펼쳐진 것이다.
 그의 오독조(五毒爪)는 음독괴이하고도 악랄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그의 이 오독조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는지 모른다.
 과연 오독조가 섬뜩한 광망(光芒)을 뿌리며 날아들자 임조영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진무양의 얼굴에 한 줄기 악독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이놈! 이미 늦었다.’
 그는 흉악한 괴소를 흘리며 임조영의 목덜미를 찍어 갔다. 일단 그의 오독조에 걸려들기만 하면 임조영의 목덜미는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기고 말 것이 분명했다.
 한데 막 그의 갈쿠리 같은 손이 임조영의 목덜미에 다섯 개의 피 구멍을 뚫어 놓을 찰나, 임조영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옆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진무양은 자신의 무시무시한 오독조가 허공에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엇?”
 그의 몸이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 순간 임조영은 섬전 같은 속도로 진무양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주먹으로 그의 턱을 강타했다.
 꽝!
 “크악!”
 벼락이 터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진무양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쓰러졌다. 바닥에 몸이 채 닿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거의 형체를 잃어버린 채 시뻘건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끄으으...”
 진무양은 아래턱이 피에 절은 솜뭉치처럼 짓이겨져서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땅바닥에서 몸을 바둥거렸다.
 중인들은 이 기경(奇驚)할 광경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실로 너무도 눈 깜박할 사이에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는 하삭삼응 중의 한 사람이 맥없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 이럴 수가...”
 혈응 장문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작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떴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바닥에 쓰러진 채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진무양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그의 뚱뚱한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임조영은 등을 보인 채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장문귀의 두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임조영의 등 뒤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뚱뚱한 몸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의 살이 통통히 오른 열 개의 손가락은 이미 시뻘건 기류를 뭉클뭉클 토해 내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천하에 흉명을 떨쳤던 혈마조(血魔爪)라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중인들의 눈에는 금시라도 임조영의 머리통이 박살 나 피를 뿌리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하나 그 순간 임조영의 몸이 거짓말처럼 재빨리 빙글 돌아섰다. 그의 시선 가득히 하마 같은 체구의 장문귀가 악독한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임조영은 슬쩍 목을 옆으로 반쯤 수그렸다. 놀랍게도 그토록 가공할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장문귀의 혈마조가 그 간단한 동작에 아슬아슬하게 임조영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문귀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임조영의 왼손이 앞으로 쭈욱 내밀어져 장문귀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우두둑!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장문귀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오른 손목이 부러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럴 사이도 없이 다리가 허공으로 뜬 채 공중에서 거꾸로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처참하게도 장문귀는 머리가 땅바닥을 반쯤 뚫고 들어간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두개골은 완전히 함몰되어 질펀한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쿵!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은 바닥에 힘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조금 전 임조영은 장문귀의 오른 손목을 잡아 부러뜨림과 동시에 그의 몸을 거꾸로 바닥에 메다꽂았던 것이다. 보기에는 단순한 동작 같았으나, 장문귀 같은 고수의 공세를 이토록 쉽게 뚫고 들어가 그의 몸을 공깃돌처럼 가볍게 바닥에 메쳤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죽음 같은 침묵이 장내를 휩쓸고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경악과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냉혹한 회의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임조영의 모습은 공포(恐怖)의 화신(化身), 바로 그것이었다.
 그토록 치열했던 범중립과 곽채의 격전 또한 어느 사이엔가 멈추어져 있었다.
 범중립과 곽채는 모두 싸우는 것도 잊은 채 임조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곽채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싸움이 계속 되었다면 그는 앞으로 십여 초 이상을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그토록 침착하고 여유 만만하던 범중립은 안색이 창백하게 굳은 채 임조영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은 느릿느릿 피바다 속에 나뒹굴고 있는 진무양과 장문귀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흘린 피 속에 누운 채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절친했던 두 의제의 시신을 바라보는 범중립의 눈에 진한 아픔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 빛은 이내 엄청난 분노의 불길로 변해 버렸다.
 범중립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나무도 커다란 분노 때문에 오히려 냉정을 되찾은 것일까?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너는 누구냐?”
 범중립의 물음에 임조영은 짤막하게 말했다.
 “임조영.”
 범중립은 다시 물었다.
 “왜 저들을 죽였느냐?”
 임조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앞을 가로막아서.”
 “네 앞을 가로막아서 저들을 죽였다고?”
 범중립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며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임조영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또 무슨 이유에서 내 아우들에게 손을 썼는지도 관심 없다. 중요한 것은 네가 내 아우들을 살해했다는 것이고, 그런 이상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하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피 빚은 피로 갚는다. 이것이 신응문의 철칙(鐵則)이고 나, 범중립의 신조(信條)다!”
 그의 양손은 어느새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로 그의 독보적인 절기인 금룡조경이 끌어 올려진 것이다. 누구라도 지금 범중립이 최고로 분노하고 있으며, 그의 손이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하늘도 놀라고 땅도 꺼질 무시무시한 공세가 퍼부어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임조영이 조용히 뇌까렸다.
 “당신의 신조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야. 죽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서 비켜 줘.”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범중립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임조영의 음성 속에는 무언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범중립은 곧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가볍게 도리질을 하고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덮쳐 왔다.
 “노부의 손속이 독하다고 원망하지 마라!”
 황금으로 만든 매의 발톱처럼 변한 그의 양손이 수십 개의 조영을 뿌려 대며 임조영의 전신을 휘감아 왔다. 금룡조경 중의 절초인 용조천경(龍爪淺勁)이었다.
 범중립의 지금 공격은 그의 분노와 가슴속 살심(殺心)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어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기충천한 것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공세가 지척으로 다가오는데도 임조영은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막 그의 몸이 범중립의 금룡조에 갈가리 찢겨질 찰나,
 훌쩍!
 그는 간단하게 옆으로 이 장을 건너뛰어 범중립의 손을 피해 버렸다.
 범중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임조영의 행동이 일견 아무렇지도 않은 간단한 동작 같았으나, 조(爪)와 조(爪)가 움직이는 실낱같은 사이를 아주 교묘하게 빠져나간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범중립은 아직까지 자신의 손가락을 이토록 쉽게 빠져나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과연 한 수가 있구나!”
 그는 탄성인지 경악성인지 모를 외침을 토하며 한 마리 붕새처럼 허공을 날아 임조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쾌쾌쾌쾍!
 사방이 그의 손가락으로 덮여 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번의 공격은 금룡조경 중에서도 삼대절초(三大絶招) 중 하나인 용조만동(龍爪萬動)이었다.
 그 위력은 과연 놀라워서 임조영의 전신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손가락 아래 완전히 노출되어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때, 피하기만 하던 임조영이 바짝 앞으로 다가들며 서슴없이 조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우수가 장난처럼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찰나,
 꽈앙!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토록 찬란하게 허공을 뒤덮었던 금룡조경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크으음...”
 동시에 범중립은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비틀거리며 세 걸음 물러섰다. 커다란 충격을 닫은 듯 혈색 좋던 범중립의 얼굴은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하나 임조영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휘청거리는 범중립을 향해 좌수를 쭉 내뻗었다.
 그의 손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단지 빨랐을 뿐이었다. 하나 그 속도의 가공함이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범중립은 수십 년간을 도산검림(刀山劍林)에서 살아오면서 무수한 싸움을 벌여 왔으나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는 손을 가진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당대 무림에서 가장 빠른 장력(掌力)을 구사한다는 섬수서생(閃手書生) 조춘생(曹春生)도 이렇게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범중립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황급히 금룡조경 중의 최대절초인 용조구소(龍爪九霄)와 용조현영을 연거푸 펼쳐 냈다.
 쾌쾌쾍!
 마치 수십 가닥의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임조영의 손은 그 막강한 금룡조의 공세 속을 너무도 수월하게 뚫고 들어왔다. 그토록 강맹한 위력을 자랑하던 금룡조의 경기가 임조영의 손에 닿는 순간 눈 녹듯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범중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이, 임조영의 손은 어느새 그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들고 있었다. 범중립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전력을 다해 두 팔을 벌리고 맹렬하게 회전을 했다. 바로 범중립이 회심의 절학(絶學)으로 생각하는 금선추의 공력을 펼친 것이다.
 따따따딱!
 마치 두꺼운 가죽 북을 연속으로 두드리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우욱....”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는 다름 아닌 금응 범중립이었다. 범중립의 혈색 좋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입가로는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입고 있는 금의의 이곳저곳이 마구 찢겨 한눈에 보기에도 낭패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범중립은 자신이 절세의 무공인 금선추를 펼쳤는데도 임조영의 손을 피하지 못하고 무려 여덟 번이나 맞부딪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임조영의 손에 부딪친 그의 팔다리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가공할 금선추의 회선력(廻旋力)을 생각해 볼 때 임조영이 아무렇게나 내민 듯한 그 한 손의 위력은 가히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그때 임조영이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며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다음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쏴쏴쏴쏴-!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난데없이 수십, 수백 개의 별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허공을 가르는 유성우(流星雨)처럼 눈 깜박할 새 범중립의 전신을 그대로 뒤덮어 버렸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범중립의 전신에서 피 분수가 뿜어 나왔다.
 그토록 당당한 위풍을 풍겼던 범중립의 금의는 이미 시뻘건 혈의로 변해 있었다. 그의 몸은 마치 수백 개의 칼날에 난도질당한 듯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범중립은 입과 코로 시커먼 선혈을 뭉클뭉클 게워 내면서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너... 저... 정말 강하다... 하지만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임조영의 음성은 너무나 담담해서 오히려 냉혹하게 느껴졌다.
 “말했잖나. 내 앞에서 비키라고.”
 범중립의 전신이 격하게 떨렸다.
 “겨...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벼락 맞은 고목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그의 몸은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이것으로 천하를 풍미했던 하삭삼응은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임조영은 묵묵히 범중립의 시신을 내려 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언뜻 살짝 드러난 그의 오른 손목에 별빛 문양이 가득 수놓아진 금팔찌가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바로 고금절세(古今絶世)의 기병(奇兵)인 괴성환이었다. 조금 전 임조영이 사용한 수법은 괴성막(魁星幕)이라는 것으로, 괴성환을 사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수법 중의 하나였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곽채의 모습이 눈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을 받은 곽채는 퍼뜩 정신이 돌아왔는지 한차례 몸을 움찔 떨었다.
 곽채는 솔직히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범중립은 드넓은 무림천하(武林天下)에서도 조법(爪法)으로는 삼대고수(三大高手) 중 하나로 꼽혔고, 가공할 금룡조경으로 천하를 휩쓸던 무서운 인물이었다. 자신조차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막강한 금룡조 앞에서 쩔쩔매지 않았던가?
 그런 범중립이 정체 모를 회의 사내의 손에 제대로 몇 수 버텨 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가 놀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곽채는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임조영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귀하는 정말로 이들이 단지 귀하의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손을 쓴 거요?”
 임조영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못 믿겠소?”
 곽채는 탐색하듯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 임조영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곽채가 그의 얼굴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앞의 이 사내가 아주 냉혹하고 무정(無情)한 인물이라는 것뿐이었다.
 곽채는 다시 물었다.
 “귀하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이오?”
 임조영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짤막했다.
 “당신을 만나러.”
 곽채는 눈을 번쩍 빛냈다.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고 한 거요?”
 임조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은 진괴(陳魁)를 알고 있소?”
 “진괴? 철담객(鐵膽客) 진괴 말이오?”
 곽채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반문했다.
 “그렇소.”
 곽채는 안색이 변한 채 뚫어지게 임조영을 응시하다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요. 그는 바로 내 친구요.”
 “그가 안부를 전해 달라더군.”
 “그는 지금 어디 있소? 그리고 귀하와는 어떤 사이요?”
 곽채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철담객 진괴는 곽채의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다.
 진괴는 한 자루 묵철도(墨鐵刀)를 들고 다니며 강남 지방을 휩쓸던 일세의 고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별호대로 항상 입이 무겁고 신의(信義)를 목숨보다도 더욱 중히 여겨 누구나가 사귀고 싶어 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하나 몇 년 전부터 돌연 강호에서 행방을 감춰 버려 많은 무림인들이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곽채 또한 그동안 그의 행방을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으나 알지 못해 애를 태우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임조영의 대답은 무심함을 넘어 차라리 무정하기까지 했다.
 “그건 알 것 없소. 단지 그는 내가 당신에게 그의 안부를 전해 주면 당신이 내게 그의 아들이 있는 곳을 알려 줄 거라고 하더군.”
 곽채의 눈살이 자신도 모르게 잔뜩 찌푸려졌다.
 이자는 단순히 무공만 고강한 게 아니라 무언지 모를 냉혹함을 지니고 있어서 곽채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곽채 자신도 냉혈한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눈앞의 이 칙칙한 회의를 걸친 훤칠한 회의 사내는 그로서도 일찍이 보지 못한 냉혈무정(冷血無情)의 사나이임이 분명했다.
 곽채는 화를 억누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왜 그의 아들의 행방을 알려고 하는 거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
 곽채의 눈꼬리가 험악해졌다.
 그는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임조영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려고 하면서 나더러는 당신이 알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하니 너무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임조영은 잠시 곽채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그럼 한 가지만 말해 주지. 내가 진괴의 아들이 있는 곳을 알려고 하는 이유는 그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오.”
 곽채는 급히 물었다.
 “무슨 부탁이오?”
 “진괴는 내게 아들을 부탁했소.”
 곽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진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자식을 맡긴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경우밖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죽었단 말이오?”
 그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격앙되었다.
 하나 임조영의 음성은 냉정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오. 이제는 내게 그의 아들이 있는 곳을 알려 줬으면 좋겠군.”
 곽채는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며 임조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결국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먼저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임조영의 눈빛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지독한 자로군.’
 곽채는 마음을 굳히고 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다.
 “갑시다.”
 임조영은 짤막하게 물었다.
 “어디로?”
 곽채는 성큼성큼 몇 발자국 떼어 놓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진괴의 아들 녀석이 있는 곳 말이오. 나도 그 녀석을 본 지가 오래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만나 봐야 되겠소.”
 이어 곽채는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임조영은 잠시 그의 뒷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第 二 章 江 南 의 酒 樓 에 서
 
  1
 
 강우비비강초제(江雨霏霏江草齊),
 육조여몽조공제(六朝如夢鳥空啼).
 무정최시대성류(無情最是臺城柳),
 의구연롱십리제(依舊煙籠十里堤).
 장강에 내리는 보슬비로 강기슭의 풀은 가지런히 우거져 있고,
 육조(六朝) 시대의 영화는 꿈처럼 사라지니 지금은 새들만 지저귈 뿐.
 무정함을 가장 느끼게 하는 것은 대성에 있는 버드나무이니,
 나라는 망했어도 버들가지는 십 리나 되는 둑에서 안개비에 싸여 있다.
 
 금릉(金陵)의 봄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금릉은 강소성(江蘇省)의 고도(古都)로, 대대로 남조(南朝)의 서울이었다.
 삼국 시대의 오(吳)나라 때는 건업(建業)이라고 불렀고, 남조시대에는 건강(建康)이라고도 불렸다. 그 후, 많은 변천을 거쳐 명(明)의 초기의 제도(帝都)였으나 영락제(永樂帝)가 도읍을 북경(北京)으로 옮겼으므로, 그에 대해 남경(南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릉은 절경이 많은 강남(江南) 지방에서도 명승고적이 많기로 이름난 곳으로, 특히 뽀얗게 흐린 속에 내리는 보슬비에 젖어 있는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면서도 촉촉한 정취를 불러일으켜 고래(古來)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노래하곤 했었다.
 지금은 비록 보슬비는 내리지 않지만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는 금릉은 나그네들의 마음을 그대로 흔들어 놓을 듯했다.
 새파랗게 우거진 신록들...
 그 사이로 끝없이 이어진 듯 드러나 보이는 고색창연한 고루거각(高樓巨閣)들...
 유달리 화려한 옷차림의 선남선녀들...
 그리고 주루(酒樓)들...
 강남은 유달리 주루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갯마을과 산동네마다 술집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水村山廓酒旗風).’라는 시 구절까지 있겠는가? 그중에서도 이곳 금릉은 유람객들이 많아서인지 호화찬란한 주루와 누각들이 처처(處處)히 늘어서 있었다.
 
 <열빈루(悅賓樓).>
 
 열빈루는 금릉의 동문대로(東門大路)상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주루였다.
 저녁 무렵.
 석양이 기웃기웃 그 붉은 모습을 서산(西山)에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열빈루의 이 층 누각을 올라오는 두 인영이 있었다.
 청의를 입고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과 꾸깃꾸깃한 회의를 걸친 훤칠한 키의 사나이였다.
 청의 중년인은 빈자리를 찾기 위해서 장내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때가 때인지라 드넓은 열빈루는 구석구석까지 손님들로 꽉 차 있던 것이다. 때마침 창가에 면한 자리에서 몇 명의 손님들이 일어났다.
 “저쪽에 자리가 있구려.”
 청의 중년인은 반색을 하며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회의 사나이는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점원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헤헤... 무얼 드시겠습니까?”
 “음... 나는 오리구이 하나와 홍소전(紅燒煎)을 주고... 임 형(林兄)은 무얼 들겠소?”
 청의 중년인이 묻자 회의 사나이는 짤막하게 말했다.
 “술을 한잔 하고 싶군.”
 청의 중년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나도 그 생각을 했었소. 여기 소흥주(紹興酒)나 몇 병 가져오게.”
 “예.”
 점원이 물러가자 그제 서야 청의 중년인은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의 중년인은 바로 혈수응조 곽채였다.
 곽채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장내를 한 번 훑어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우라지게도 많군.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밥 지어 먹을 집이 없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닐 텐데...”
 금릉의 사람들은 유난히 외식(外食)을 즐겨 항상 주루가 번창했다.
 이곳 열빈루도 다른 주루에 비해서는 상당히 큰 편인데도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고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들어앉아 각양각색의 음식들을 먹어 대고 있었다.
 주루의 한쪽에는 꽃을 팔고 있는 조손(祖孫)의 모습도 보였다.
 곽채는 그답지 않게 싱겁게 웃으며 회의 사나이,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임 형은 내가 왜 진괴의 아들 녀석이 있는 곳으로 곧장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줄 아시오?”
 임조영의 음성은 변함없이 나직했다.
 “당신이 곧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곽채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임 형은 정말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군. 임 형은 그 아이의 외가(外家)쪽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소?”
 임조영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곽채의 안색이 한층 심각해졌다.
 “그럴 줄 알았소. 그렇지 않다면 그 아이를 보살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거요.”
 임조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곽채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결코 임 형을 깔보아서 하는 소리는 아니오. 임 형이 어떤 사람인지는 오늘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까. 내 말은 그 아이가 지금 누가 보살필 필요도 없이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호강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 아이가 자신의 외가에 있단 말이오?”
 “그렇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주 거창한 곳이오.”
 “그곳이 어디요?”
 곽채의 음성이 진지해졌다.
 “임 형은 혹시 천하에서 가장 부유하고 검술(劍術)이 뛰어난 가문(家門)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소?”
 임조영의 눈빛이 처음으로 반짝 빛났다.
 “강남황보세가(江南皇甫世家)?”
 “그렇소. 바로 재산은 하늘까지 쌓여 있고, 검술은 바다를 가른다는 그 황보세가요.”
 
 - 황보세가!
 달리 황보검문(皇甫劍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대로 강남의 황보세가는 그 부귀와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富)는 거의 나라에 맞먹고, 검술은 항상 천하무림(天下武林)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있었다.
 당금의 황보세가는 남해(南海)의 장씨세가(莊氏世家)와 나부(羅浮)의 매가(梅家)와 함께 삼대세가(三大世家)로 손꼽히고 있었다.
 
 곽채는 말을 계속했다.
 “진괴의 아내는 황보세가의 전대 가주(前代家主)인 창궁검(蒼穹劍) 황보광(皇甫曠)의 딸인 황보란(皇甫蘭)이었소.”
 “그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곽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 년 전에 병(病)으로 죽었소.”
 
  * * *
 
 창궁검 황보광은 당금 무림에서 검법으로 따진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세의 검객으로, 천하무림의 십이대명인(十二大名人) 중 하나로 불리고 있었다.
 정파의 십이대명인은 사파(邪派)의 십이대흉살에 비견되는 최고의 고수들로, 개개인이 당금 강호의 최정상을 달리는 초절정의 무인(武人)들이었다.
 그런 만큼 황보광의 자부심과 가문(家門)에 대한 긍지는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황보광에게는 이남일녀(二南一女)가 있었는데, 황보란은 그중의 막내딸로 황보광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황보광은 늘그막에 얻은 황보란을 그야말로 장중보옥(掌中寶玉)처럼 아껴, 그녀를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청년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유일한 소망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나 세상일이란 얄궂은 것이어서, 정작 그녀가 마음을 준 사람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낭인무사(浪人武士)였다.
 그가 바로 철담객 진괴였다.
 진괴는 뚜렷한 명문(名門)의 자손도 아니고 무림을 진동시키는 절세의 고수도 아니었으나, 사리가 분명하고 신의를 목숨보다 귀중히 여기는 장부(丈夫) 중의 장부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 맹렬히 이끌리는 것을 느꼈고, 곧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되었다.
 황보광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황보란은 배 속에 진괴의 아이를 가진 후였다.
 황보광은 불같이 노했으나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다.
 하나 그의 가슴속에는 진괴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고,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황보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짙은 앙금이 되어 남아 있었다. 결국 상심한 황보광은 가주의 직위를 큰 아들인 황보명소(皇甫明霄)에게 넘겨주고는 후원 깊숙한 곳에 칩거하고 말았다.
 진괴는 황보란과 함께 황보세가를 떠나 멀리 외지고 아늑한 곳에 자신들만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얼마 후, 황보란은 귀여운 옥동자를 낳게 되었다. 진괴는 뛸 듯이 기뻐했고, 자신의 아들에게 산중의 호랑이처럼 자라 달라는 뜻에서 ‘산호(山虎)’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진괴일가는 무림을 잊고 평온한 생활을 계속했다.
 하나 그들의 행복도 잠시.
 오 년 전에 황보란이 불의의 병에 걸려 비명횡사하고 만 것이다.
 나중에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황보광은 처음에는 절망했고, 나중에는 분노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세가를 떠나지 않았으면 병에 걸렸을 리도 없고, 설사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완치시켰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데리고 세가를 떠난 진괴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황보광은 진괴에게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진괴의 아들, 즉 자신의 외손자를 빼앗았다.
 
 - 세가를 떠나려거든 이 아이를 두고 가라!
 란아를 잃은 마당에 이 아이마저 너 같은 떠돌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
 
 진괴는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때 그는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무림으로 출도(出道)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험난한 강호행(江湖行)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을 황보세가에 남기기로 결심했다.
 
 - 오 년 내로 반드시 이 아이를 찾으러 오겠소.
 
 진괴는 이 한마디만을 남기고 울며 매달리는 아들을 떼어 놓고 세가를 떠났다.
 그 후 어디에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오 년이 거의 흐른 지금, 냉혈무정의 사나이 임조영이 그의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이다.
 
  * * *
 
 “아마 지금쯤 그 아이는 완벽한 황보세가의 인물이 되어 있을 거요. 듣자 하니 황보광이 그 아이를 특별히 교육시키기 위해 몇 명의 뛰어난 인물들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말도 있소. 그런 형편이니 당신이 아무리 그 아이더러 함께 가자고 해도 그 아이가 갈 리가 없고, 더구나 황보 늙은이가 그걸 허락할 리도 없단 말이오.”
 곽채는 말을 마친 후 임조영의 기색을 살폈다.
 하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처음 그대로의 무표정한 얼굴뿐이었다. 그는 임조영의 미간에 그어져 있는 흉터와 그 흉터 아래로 번뜩이는 두 눈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는 보면 볼수록 냉정한 인물이군. 저런 강철 같은 눈빛은 악마(惡魔)나 신(神)만이 가질 수 있는 법인데....’
 임조영은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지금 몇 살이오?”
 곽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진괴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아이가 아홉 살이었으니까.... 아! 벌써 열네 살이 다 됐겠군.”
 임조영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열네 살이라... 그 나이면 자신의 진로(進路)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
 곽채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누가 뭐라고 한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임조영은 다시 물었다.
 “황보세가는 어디 있소?”
 곽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쿵! 쿵!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주루의 입구에 하나의 인영이 올라왔다.
 
 
  2
 
 올라온 사람은 짙은 남색 장삼을 입고 염소수염을 기른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흑의 중년인은 눈이 옆으로 쭉 찢어지고 콧등이 길었는데, 얄팍한 입술에 입꼬리가 유난히 길어서 멀리서 보면 커다란 입 밖에 보이지 않을 듯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연신 작은 눈에 박힌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는 모양이 영락없는 생쥐를 연상케 했다.
 남삼 중년인은 주루에 올라오자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주루의 한쪽 구석에서 남삼 중년인을 소리쳐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오사동(吳思東)! 이리로 오게.”
 오사동이라 불린 남삼 중년인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손짓해 부르는 사람 쪽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그쪽에는 서너 명의 장한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사동이 장한들이 둘러앉은 탁자에 가서 털썩 앉자마자 장한들 중 황삼(黃杉)을 입고 유난히 턱수염이 수북한 중년인이 오사동을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자, 우선 시원하게 한 잔 쭉 들이켜게.”
 오사동은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자, 여기 안주도...”
 황삼 중년인이 잘 구워진 오리구이의 다리 한쪽을 쭉 찢어 내밀자 오사동은 아무 말 없이 오리구이를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오사동이 술과 안주를 먹을 동안 모두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중인들뿐 아니라 주위 탁자에 있는 다른 손님들도 관심 있는 눈으로 오사동을 응시하고 있어 갑자기 주루안의 모든 시선이 오사동에게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삽시간에 오리구이 한 마리와 술 한 병이 동이 나 버렸다.
 그제야 오사동은 허기가 가신 듯 트림을 하며 배를 두드렸다.
 “꺼억... 아! 이제 좀 살 것 같군.”
 “술 한 잔 더 하지그래.”
 황삼 중년인이 다시 술잔을 내밀자 오사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제 됐네. 더 마시면 취해 버릴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사동의 시선은 뼈만 수북이 남은 오리구이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황삼 중년인은 그의 심중을 재빠르게 눈치채고는 지나가는 점원을 손짓해 불렀다.
 “여기 오리구이 한 마리 잘 구워서 내오고, 술도 몇 병 더 갖다 주게.”
 오사동은 히죽 웃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자네와 우리 사이에 오리 몇 마리가 대수인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또 무슨 소식을 가져왔나?”
 황삼 중년인의 말에 탁자 주변의 중인들뿐 아니라 제법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관심 어린 눈으로 오사동을 응시했다.
 오사동은 원래 쾌구쾌신(快口快迅)이라는 별명으로 이곳 금릉의 동문대로 일대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쾌구쾌신 오사동은 강호의 소식에 상당히 정통하고 말을 잘해서, 매일 저녁때면 이렇게 술을 한잔 얻어 마시고는 자신이 주워들은 강호의 소식을 전하고는 했던 것이다.
 입담이 좋고 아는 것도 제법 많아서 이 일대 사람들은 이맘때면 늘 그가 무슨 소식을 가져오나 기다릴 정도였다.
 오늘은 오사동의 족제비 같은 눈이 유달리 반짝거리고 술과 안주를 실컷 먹으면서도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법 커다란 소식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별다른 소식이 없는 날이면 오사동은 늘 술 몇 잔 마시고 난 후 바로 입을 열고는 했던 것이다.
 황삼 중년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뜻 술과 안주를 추가로 주문한 것이었다.
 과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제야 오사동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험... 곽삼(郭三). 자네는 혹시 ‘혈월지쟁(血月之爭)’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황삼 중년인은 눈을 반짝이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건 바로 저 유명한 고금최강(古今最强)의 집단인 일월맹(日月盟)과 칠혈당(七血黨)이 무림의 패권(覇權)을 놓고 벌인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닌가?”
 오사동은 자신의 턱에 난 염소수염을 비비 꼬며 다시 물었다.
 “그렇지. 바로 무림사상 가장 처절한 혈투였다는 일월맹과 칠혈당의 싸움이지. 자네는 그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이것은 오사동이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전할 소식을 더욱 흥미 있게 꾸미기 위해 물은 것이었다.
 곽삼은 오사동의 이런 이야기 방식을 잘 알고 있는지 즉시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 그 싸움은 일 년을 넘게 끌다가 결국 일월맹의 완승(完勝)으로 끝났지 않나?”
 “그렇지. 사실 일월맹과 칠혈당의 실력이나 세력은 거의 백중(伯仲)해서 누구도 어느 쪽이 이길지 장담할 수 없었네. 그러다가 갑자기 칠혈당이 너무도 맥없이 무너져 버렸지. 자네는 그 이유도 알고 있나?”
 오사동이 이렇게 주위 사람들과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방식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이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당금 무림에서 일월맹과 칠혈당의 그 처절한 싸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곽삼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잽싸게 대꾸했다.
 “그건 바로 칠혈당의 당주(黨主)이며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인 일도구주혼(一刀九州魂)이 일월맹에서 파견한 첩자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오사동은 얄팍한 혀로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지. 칠혈당이 일월맹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당주인 일도구주혼 때문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가 뜻밖에도 일월맹의 첩자에게 암습을 당하는 바람에 칠혈당이 어이없이 무너진 거지. 그럼 자네는 그 첩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나?”
 곽삼은 수염이 가득한 뺨을 벅벅 긁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모르겠네.”
 오사동은 생쥐를 연상케 하는 머리통을 끄덕이며 쥐눈을 반짝거렸다.
 “그건 자네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른다네. 아마 그에게 살해된 일도구주혼만이 알고 있을 걸세. 하나 많은 사람들은 일도구주혼같이 치밀하고 완벽한 인물이 암습을 당한 것으로 보아 그 암습자가 그의 일곱 명의 아우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네.”
 곽삼은 깜짝 놀란 척을 했다.
 “일도구주혼의 아우들이라면 바로 그와 함께 칠혈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냉혈칠성(冷血七星)이 아닌가?”
 “그렇지. 일혼(一魂)과 칠성(七星)의 여덟 사람이 바로 칠혈당의 실체라네. 일월맹이 수백 명의 초절정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칠혈당을 어쩌지 못한 것도 그 여덟 사람이 하나같이 천하에 보기 힘든 고수들일 뿐 아니라, 결속력이 강해서 허점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네. 더구나 일도구주혼은 자네도 알다시피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아닌가?”
 곽삼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는 조금 들뜬 음성으로 급히 말했다.
 “그렇지.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라 할 수 있지. 자네도 예전에 자네 입으로 일월맹의 맹주(盟主)인 태양신군(太陽神君)과 현음노조(玄陰老祖)도 일대일로 대결하면 그분에게는 반 초(招)가 뒤질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러네. 그러니 그렇게 막강한 일도구주혼이 암습을 당했다는 것은 그를 암습한 인물이 그가 철저하게 믿고 있던 인물이라는 말이 되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일도구주혼이 암습을 당했겠나?”
 “그래서 자네는 그의 아우들인 냉혈칠성을 의심하는 건가?”
 “그게 어찌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나? 무림에 그런 소문이 떠돈다는 말이지. 아무튼 일도구주혼이 쓰러진 후 칠혈당은 철저하게 와해되었고, 냉혈칠성의 모습도 두 번 다시 무림에 보이지 않았다네.”
 곽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을까?”
 오사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을걸. 듣자 하니 그들은 일도구주혼이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더군.”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왜 함께 뭉쳐 일도구주혼의 복수를 하지 않았나?”
 오사동은 거의 습관적으로 자신의 턱 밑에 난 염소수염을 비비 꼬았다.
 “그들도 일도구주혼을 쓰러뜨린 자가 자신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그들은 누구보다도 일도구주혼이 얼마나 완벽한 인간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 중 한 명이 아니고서는 그를 암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아!”
 “그러니 어찌 그들이 결속할 수 있겠나? 그들은 서로 누가 배반자인지를 몰라 의심과 반목(反目)만을 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와해되고 만 거지.”
 곽삼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정말 안타깝군.”
 곽삼뿐 아니라 주위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중인들도 모두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인물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 뒤로 그들의 모습은 무림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네.”
 곽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모두 꼭꼭 숨어 버린 걸까?”
 “그거야 뻔한 얘기지. 칠혈당은 무너졌고 일월맹은 건재하니 그들이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들이라도 일월맹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깊숙이 몸을 숨길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있겠나?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꽁꽁 숨어 버렸는지 일월맹에서 그들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리기 위해 천하의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녔으나 한 사람도 찾아내지 못했다네.”
 그제야 곽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로군그래.”
 오사동의 쥐눈이 반짝하고 빛나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어제까지의 일일세.”
 그제야 곽삼을 비롯한 중인들은 오사동이 드디어 본론(本論)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전에 우선 술 한 잔 더 마시고...”
 오사동은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갑자기 여유를 부리며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곽삼은 그가 전할 소식을 듣고 싶어 조바심이 났으나 이럴 때 독촉해 봐야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한 잔 더 마시게. 자네는 술이 좀 들어가야 말도 잘 나오지.”
 때마침 오리구이가 나오자 오사동은 다시 오리 다리 하나를 뜯어 입에 물었다.
 곽삼은 그가 오리구이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타들어 갔으나, 다행히도 오사동은 다리 하나만을 먹고는 배가 찼는지 이내 소매로 입가를 씻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오사동의 입으로 고정되었다.
 “그래, 오늘은 어떻게 되었나?”
 “오늘은 어떻게 되다니?”
 오사동이 내숭을 떨며 되묻자 곽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칠혈당의 냉혈칠성이 일월맹에게 들키지 않고 숨은 것은 어제까지의 일이라고 말일세.”
 그제야 오사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었다.
 “그래. 그랬지. 그건 어제까지의 일일세.”
 “그렇다면 냉혈칠성 중 누군가의 행적이 발각되었단 말인가?”
 “그렇지.”
 곽삼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그게 누군가?”
 오사동은 주위를 한차례 힐끔 쓸어 보다가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고정된 채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떠올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바로 냉혈칠성 중의 막내인 금지룡(金指龍) 유회빙(劉懷氷)이네.”
 곽삼은 깜짝 놀랐다.
 “유회빙이라면 준수하기가 관옥(冠玉)과 같고 지법(指法)으로 따지자면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절세의 기재(奇才)가 아닌가?”
 “그렇지.”
 “그가 어디서 발견되었나?”
 “알려지기로는 황산(黃山) 근처에서 잠깐 모습을 보였다는군. 그래서 지금 일월맹에서는 절정고수들을 급히 파견하여 그를 뒤쫓고 있다고 하네.”
 “아....”
 곽삼은 알 듯 모를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왜 더 숨어 있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을까?”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네. 다만 상황으로 보아 그가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고 누군가에게 우연히 발각되었던 것 같네. 어쨌든 일월맹에서 혈안(血眼)이 되어 찾고 있는 마당에 발각되었으니 그도 어지간히 재수가 없다고 할 수 있지.”
 곽삼은 칠혈당에 호감이 많은 듯 안타까움이 짙게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까?”
 “글쎄...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나? 이미 일월맹은 천하를 석권(席卷)해서 천하에 그들의 이목이 닿지 않은 곳이 없네. 게다가 냉혈칠성이 모두 모인 것도 아니고 유회빙 혼자라면 아무리 그가 기재 중의 기재이고 고수 중의 고수라도 일월맹의 추격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을 걸세.”
 곽삼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냉혈칠성의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있는 건가? 그들은 설마 자신들의 막내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계속 숨어만 있을 셈인가?”
 오사동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들로서도 다른 방도가 있겠나? 우선은 그들 중 배반자가 누구인지라도 알아야 나머지 사람들이 의심을 풀고 모일 텐데 그건 거의 불가능하고, 결국은 서로 각자 행동을 하다가 유회빙처럼 종적이 발견되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겠지.”
 곽삼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중인들의 얼굴에도 모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칠혈당의 냉혈칠성은 하나같이 당대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기인기재(奇人奇才)들이라 마음속으로 그들을 성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유회빙은 그들 중 나이도 가장 어리고 준수한 미공자(美公子)라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곽삼은 못내 아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오사동은 염소수염을 비비 꼬며 짐짓 대범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서는 전혀 없는 것 같지만, 강호의 일은 원래가 변화무쌍하고 계략이 난무하는 곳이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네. 내막 속에 또 다른 내막이 있어 당사자가 아니고는 누구도 자세히 알 수가 없지.”
 “자네 말은 이 일에 또 다른 내막이 있다는 것인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칠혈당은 와해되었고 냉혈칠성은 산산이 흩어졌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네. 그 외의 일은 추측할 수도 없고 감히 추측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법일세.”
 오사동의 말은 제법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곽삼을 비롯한 중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삼은 다시 오사동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 들었네. 다음 소식은 또 뭔가?”
 오사동은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에헴. 그 전에... 이 타변로(打邊爐)가 조금 식었군. 하도 떠들어서인지 목이 칼칼해서 따끈한 국물이 좀 먹고 싶은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삼은 황급히 점원을 불러 타변로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곽삼은 오사동이 술과 음식이 푸짐할수록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비록 평상시보다 조금 많은 식대(食代)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오사동이 값비싼 타변로까지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 하려는 이야기가 정말 중요하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구나 식대는 같은 탁자에 앉은 다른 세 명의 장한들과 나누어 내기로 미리 약조를 한 탓에 크게 부담되지도 않았다.
 과연 오사동은 곽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 번째 이야기는 요즘 강호를 온통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구룡금장(九龍金杖)에 대한 소식일세.”
 타변로를 맛있게 먹고 난 다음에 오사동이 한마디를 내뱉자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그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특히 이번에는 그동안 오사동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루의 나머지 인물들까지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개중 몇몇 인물들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안광마저 번뜩이는 것이었다.
 
 
 第 3 章 九 龍 金 杖
 
  1
 
 오사동은 다시 술잔을 들고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곽삼을 바라보며 물었다.
 “곽삼, 자네 혹시 백 년 전의 무림제일인(武林第一人)이 누군지 아는가?”
 곽삼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백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라면 당연히 남북쌍기(南北雙奇) 어르신네들이 아닌가?”
 “그렇지. 바로 그 무림사상 보기 드문 고수들이라는 남극선옹(南極仙翁)과 북해치수(北海痴叟)라네. 그들은 그야말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고금제일(古今第一)을 다투었을 인물들이었는데, 아깝게도 한 시대에 태어나는 바람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만족을 해야만 했지.”
 “그래도 천하제일인이라는 게 어딘가?”
 “그만큼 그들의 무공이 뛰어났다는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혹시 이런 의문이 안 드나?”
 곽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의문 말인가?”
 “그들, 남극선옹과 북해치수가 서로 누구의 무공이 더 높은지 알고 싶은 욕심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 말일세.”
 “그야.... 그들 같은 절대기인(絶對奇人)들도 그런 욕심이 있었을까?”
 “그들도 인간인데 어찌 그런 생각이 없었겠나? 서로 상대를 꺾어 진정한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군림하고 싶었겠지. 사실 말하자면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몇 번인가 서로 손속을 비교해 본 적도 있었다고 하더군.”
 곽삼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왜 무림에서는 그런 소문이 들리지 않았나?”
 “그건 그들이 아무도 모르는 외딴 절지(絶地)에서 은밀히 겨루었기 때문일세. 더구나 그들은 그 일을 철저한 비밀에 부쳐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림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거라네.”
 곽삼은 다시 물었다.
 “그들의 승부는 어떻게 되었나? 두 사람 중 누가 승리했나?”
 중인들도 모두 그것이 궁금한 듯 오사동의 입을 주시했다.
 하나 의외로 오사동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승리한 사람이 없었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림에 구룡동부(九龍洞府)에 대한 전설이 생겨날 수 있었겠나?”
 곽삼은 이제 이야기가 슬슬 중요한 부분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은...”
 곽삼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오사동은 염소수염을 비비 꼬며 재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구일(九日) 밤낮을 싸웠으나 결국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네. 그 대신에 그들은 서로의 무공에 대해 깊은 감탄과 존경을 느끼게 되었지. 결국 두 사람은 손을 멈추고 형제지연(兄弟之緣)을 맺게 되었네. 나이가 세 살이 더 많은 남극선옹이 형이 되고 북해치수가 동생이 된 것이지.”
 곽삼은 이럴 때 말을 가로막으면 오사동의 이야기가 엉뚱한 쪽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맞장구만 쳤다.
 “그랬군!”
 “그들은 의형제가 된 후 무림에서 은거를 했네. 그들은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심산유곡에 거처를 정한 후 보다 높은 무도(武道)를 얻기 위해서 서로 무공을 교환하고 공동으로 연구를 계속했지. 그들이 무공의 대도(大道)를 터득했을 때는 이미 그들은 너무 나이를 먹어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던 것일세.”
 그다음 이야기는 곽삼도 알고 있는 듯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말이지?”
 “그렇지. 그들은 자신들이 구일 동안 승부를 벌인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자신들의 거처를 구룡동부(九龍洞府)라 이름 짓고 그 안에 자신들이 연구한 필생의 절학(絶學)들을 비장했다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했지.”
 구룡동부에 대한 전설은 강호 무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전설 속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꿈꾸어 온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에 대한 환상이 너무도 알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신화(神話)적인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꺼내는 것은 바로 오사동이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고, 또 앞으로 꺼낼 이야기에 중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었다.
 오사동은 중인들의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한결 신이 난 모습으로 입을 조잘거렸다.
 “남북쌍기의 모습이 무림에서 사라진 후 무림에는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구룡동부에 대한 소문이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구룡동부를 찾아 천하의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다네.”
 “구룡동부를 찾아서 그 안에 숨겨진 남북쌍기의 절학을 익히려고 말이지?”
 “그렇지. 그렇게만 된다면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건 실로 여반장(如反掌)이 아니겠나? 하나 무려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써 보았지만 누구도 구룡동부의 행방을 발견하지 못했다네. 심지어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룡동부의 전설은 사실이 아니라고까지 말했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한 가지 청천벽력 같은 소문이 무림에 퍼졌다네.”
 오사동의 음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중인들 또한 입에 침을 삼키며 오사동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소문이란, 구룡동부는 실제로 존재하며 그 동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열쇠를 사해광객(四海狂客)이란 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네.”
 “아! 그럼 그 열쇠가 바로...”
 “그렇지. 그게 바로 구룡금장(九龍金杖)라네.”
 구룡금장은 현재 강호 무림 최대의 관심사였다.
 무림인이라면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구룡금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 ‘구룡금장’의 ‘구’ 자만 들어도 눈을 번뜩이며 몰려오는 형편이었다.
 오사동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구룡금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겻들이고 있었다.
 “듣기로는 그것은 길이가 세 자쯤 되는 금빛 지팡이라더군. 그 지팡이의 표면에는 서로 뒤엉킨 아홉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문양 자체도 하나의 절학(絶學)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네.”
 곽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 구룡금장을 가지고 있는 사해광객이란 어떤 사람인가? 나는 견문이 얕아서인지 무림에 그런 명호를 가진 인물이 있는 줄 몰랐는데...”
 “하하... 자네뿐만이 아니라 강호의 어느 누구도 사해광객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지. 이 사건이 일어나지만 않았으면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을 걸세. 다만 언뜻 듣기로는 그자는 머리에 죽립을 쓰고 흑삼을 즐겨 입으며 체구가 몹시 당당하다는군.”
 “아무튼 이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
 “물론이지. 그는 이제 천하제일의 유명인(有名人)이 되었다네. 하나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닐걸.”
 “그건 또 왜 그러나?”
 “자네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그가 구룡금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든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의 행방을 뒤쫓기 시작했다네. 그 이유는...”
 곽삼은 알았다는 듯 잽싸게 말을 받았다.
 “바로 그에게서 구룡금방을 빼앗아 구룡동부를 열려는 것이로군?”
 “그렇지. 이렇게 되니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지. 아무튼 무림에서 조금이라도 구룡동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해광객의 행방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단 말일세.”
 곽삼은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유명해진다는 게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로군. 그런데 자네가 전할 소식이란...?”
 “바로 그 사해광객에 관한 것이라네.”
 곽삼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급히 오사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언가? 사해광객의 행방이라도 알아냈단 말인가?”
 오사동은 득의의 웃음을 날렸다.
 “흐흐... 왜 아니겠나?”
 곽삼은 물론이고 모든 중인들의 얼굴에 바짝 긴장된 표정이 떠올랐다. 심지어는 주루에서 음식을 나르던 점원들조차도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구룡금장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사동은 한차례 침을 삼킨 후 특유의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이곳에 오기 바로 조금 전에 들은 소식인데... 사해광객이 구화산(九華山)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하네.”
 곽삼은 절로 긴장되고 흥분되어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아.. 안휘성(安徽省)의 불문성지(佛門聖地)인 구화산 말인가?”
 “그렇지. 그래서 지금 수많은 무림인들이 구화산으로 몰려들고 있다네.”
 곽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 이상하군. 그자는 왜 무림인들의 추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지 않고 구화산으로 가고 있는 걸까?”
 “이런 답답한... 그거야 뻔한 거 아닌가?”
 “뻔하다니?”
 “당연히 구룡동부를 열려고 가는 거겠지.”
 오사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삼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 그럼 구룡동부가 구화산에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가겠나?”
 곽삼은 입을 딱 벌렸다.
 “아! 정말 놀라운 일이로군.”
 “그렇지. 정말 놀라운 일이라네.”
 “그러면 이제 머지않아 구룡동부가 열리겠군?”
 곽삼은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수염 가득한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하나 의외로 오사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과연 그렇게 될는지는 더 두고 봐야 알 걸세.”
 곽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해광객이 구룡동부를 열 수 있는 구룡금장을 가지고 구화산으로 갔으니 그건 뻔한 일 아니겠나? 설사 그가 다른 사람에게 구룡금장을 뺏긴다 할지라도 결국은 구룡금장을 얻은 누군가가 구룡동부를 열 게 아닌가?”
 오사동은 생쥐 같은 얼굴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눈동자를 떼굴떼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이치상으로야 그렇지만 세상일이란 게 어디 이치만 가지고 돼야 말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원래 그런 귀한 물건들은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법이네. 더구나 남북쌍기 같은 절대기인(絶對奇人)들이 아무나 자신들의 유물(遺物)을 얻을 수 있게 방치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구룡금장이 있으면 구룡동부를 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무림에 전해지는 소문일 뿐이네.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닥쳐 봐야 알 수 있겠지. 게다가 설사 구룡동부를 열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필시 남북쌍기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다 이 말일세.”
 “자네의 말은 구룡동부 안에 기관장치라도 있을 거란 말인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유학(遺學)을 얻을 인물의 심성(心性)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여러 가지 관문(關門)들이 있을 것 같네. 그런 기인들일수록 자신들의 유학이 아무에게나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곽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힘들군.”
 오사동은 얼굴을 구겨지도록 웃었다.
 “헤헤.... 그래서 옛말에도 보물은 인연자(因緣者)만이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게지.”
 오사동은 이것으로 할 이야기가 모두 끝났는지 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홀짝거렸다.
 
 
  2
 
 그때 갑자기 한쪽 구석에서 시끌벅적한 소란이 일어났다.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감히 어르신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에서 장사를 하다니...”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금의를 입은 체구가 좋은 중년인이 눈을 부라린 채 한 명의 노인과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의 중년인은 얼굴에 개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혈색이 대추처럼 불그스름했다. 하나 눈빛을 연신 흉악하게 굴리는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금의 중년인의 모습을 보자 중인들 중 대부분의 얼굴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제길...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기어코 저 동가(董家) 놈이 나타났군.”
 “에이... 술맛 떨어져.”
 몇 사람은 몰래 바닥에 침까지 뱉는 것이었다.
 하나 아무도 감히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 금의 중년인이 이곳에서는 제법 대단한 위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인 듯했다.
 금의 중년인의 앞에서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은 꾀죄죄한 남삼을 걸치고 연신 곰방대를 빨고 있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과, 이제 갓 열일곱 살쯤 되었을 아리따운 황의 소녀였다.
 남삼 노인이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가 더덕더덕 기운 데다 너무나 세탁을 많이 해서인지 이미 희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새하얀 백발이고 얼굴에는 크고 작은 주름이 가득 뒤덮여 있었다.
 황의 소녀는 한창 아름답게 피어오를 나이여서인지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도 탄력 있었고, 두 눈은 흑백(黑白)이 분명해서 총기가 가득해 보였다. 치렁치렁한 흑발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서 더욱 청순하면서도 발랄함을 느끼게 했다.
 남삼 노인과 황삼 소녀는 각기 한쪽 팔에 각양각색의 꽃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들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꽃을 파는 조손(祖孫)들인 모양이었다.
 금의 중년인은 거들먹거리는 모습으로 남삼 노인과 황의 소녀의 위아래를 연신 쏘아보고 있었다.
 “흐흐.. 간덩이들이 부었군.”
 그의 얼굴에 흉악한 빛이 가득했다.
 남삼 노인은 주춤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지....”
 금의 중년인은 싸늘한 눈으로 남삼 노인을 꼬나보다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려면 이 동(董) 어르신네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걸 몰랐단 말이냐?”
 남삼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이곳 주루의 주인인 신 노야(申老爺)께 허락을 받고 꽃을 팔고 있는데... 왜 귀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오?”
 금의 중년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 영감탱이가 누굴 바지저고리로 아나? 신노야가 허락을 했든 안 했든 금릉 일대에서 장사를 하려면 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 알겠느냐?”
 그의 억지스러운 말에 남삼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허거렸다. 그러다가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가 꽃을 팔아서 얼마를 번다고 자꾸 장사를 했다고 그러는 거요? 더구나 우리는 아직 귀하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불문곡직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정말 영문을 모르겠구려.”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금의 중년인은 더욱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이 망할 놈의 늙은이가? 감히 이 화화태세(花花太歲) 동광(董光) 어르신네의 말이 틀렸다는 거냐?”
 그의 흉흉한 기세에 남삼 노인은 움찔하여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동광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럼 분명히 여기서 장사를 한 거지?”
 남삼 노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제야 동광의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그렇다면 이제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장사를 했으니 어쩔 셈이냐?”
 남삼 노인은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힘없이 물었다.
 “우리가 어찌했으면 좋겠소?”
 “이제야 조금씩 말귀를 알아듣는군. 흐흐흐...”
 동광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남삼 노인의 뒤에 서 있는 황의 소녀에게로 향했다. 황의 소녀는 그의 시선을 받자 몸에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동광은 황의 소녀의 아리따운 얼굴과 한창 피어오르는 몸매를 쓰윽 살피다가 눈가에 탐욕의 빛을 떠올렸다.
 “흐흐흐... 원래는 장사한 돈을 모두 빼앗고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지만...”
 동광은 은근히 말꼬리를 흘렸다. 과연 남삼 노인은 덜컥 겁이 나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그의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동광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곳이 처음이라 사정을 잘 몰라서 한 일 같으니 특별히 봐주지. 대신에...”
 남삼 노인은 동광의 시선이 황의 소녀에게 향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흐흐... 저 계집은 오늘 본 어르신네의 술시중을 들어야 한다.”
 동광은 제법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나 그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황의 소녀의 몸매를 훑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단순히 술시중만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삼 노인은 어쩔 줄 모르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동광의 눈빛이 흉악하게 번뜩였다.
 “감히 본 어르신네의 지시를 거역할 셈이냐?”
 남삼 노인은 그의 호통에 찔끔했으나 그렇다고 그의 흑심(黑心)을 빤히 알면서도 승낙할 수가 없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동광은 남삼 노인이 머뭇거리자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정말 눈 뜨고는 더 이상 못 보겠군. 천하에 이렇게 막돼먹은 놈이 다 있다니...”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동광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번개같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서 두 탁자 건너편에 회의인과 청의인이 앉아 있었다. 그중 청의를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날카로운 눈으로 동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광은 흉악한 눈으로 청의인을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지껄인 것이 네놈이냐?”
 청의인은 바로 혈수응조 곽채였다.
 곽채는 동광이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자신을 꼬나보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놈이 점점 더 귀엽게 노는군. 그렇다. 내가 그랬다.”
 동광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뻣뻣하게 나오는 작자를 본 일이 없었다.
 “이런 육시를 낼 놈! 감히 본 어르신네가 누구인 줄 알고...”
 곽채의 눈빛이 독사의 그것처럼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 눈빛을 받자 동광은 전신에 소름이 쭈욱 끼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곽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이미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동광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곽채는 느릿느릿 동광의 앞으로 다가왔다.
 동광의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나 그는 곧 두 눈을 흉악하게 번뜩이며 곽채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놈! 본 태새(太歲)에게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똑똑히 느끼게 해 주겠다!”
 그의 오른 주먹이 제법 예리한 각도로 곽채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곽채는 이를 보고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동광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이제 보니 별로 대단한 놈도 아니었군. 난 또....’
 그의 주먹은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곽채의 옆구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쾅!
 우두둑!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크악!”
 한 인영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이 황급히 보니 놀랍게도 그는 주먹을 휘둘렀던 동광이 아닌가? 동광은 오른손이 부러졌는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채 고통을 참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으으...”
 그의 입을 뚫고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곽채는 냉랭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에게 대항하면 뭐가 어떻게 된다고?”
 동광은 부러진 오른손을 움켜쥔 채 고통과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곽채를 바라보았다.
 ‘으... 이 .. 이놈이 이렇게 무서운 고수일 줄이야...’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먹이 곽채의 옆구리에 격중했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손목이 부러진 것을 알고 상대가 무서운 무공을 지닌 절세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는 고통을 참고 교활하게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더듬거렸다.
 “귀... 귀하는 누구요?”
 곽채의 입꼬리에 스산한 미소가 감돌았다.
 “왜? 이제 겁이 나느냐?”
 동광은 진땀을 주르르 흘린 채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 그게 아니라...”
 곽채는 빙글빙글거리며 동광에게로 다가갔다.
 “조금 전의 그 무시무시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가셨소, 동광 나리!”
 한데 바로 그때였다.
 “누가 감히 황보세가의 인물을 건드리느냐?”
 싸늘한 호통이 터지며 두 개의 인영이 주루의 입구에 나타났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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