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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건곤 1권-1

2014.12.30 조회 4,810 추천 62


 서 장
 
 독고무정(獨孤無情)이 그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이름 모를 산봉우리 아래에서였다.
 그때 그는 전신에 피 칠을 한 채 찢겨진 걸레 조각처럼 바위와 바위틈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인간이 이런 상처를 입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독고무정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왼쪽 눈은 어디로 갔는지 시커먼 구멍만 뚫려 있었고, 목에는 날카로운 유엽비수(柳葉匕首)가 박혀 있어 숨을 쉴 때마다 크륵크륵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양팔과 두 다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칼날로 난도질당한 채 간신히 몸통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턱 밑에서부터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예리한 도(刀)에 잘린 상처가 입을 쩍 벌리고 있어서 내장이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로 그는 살아 있었다.
 독고무정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번뜩이며 독고무정을 올려다보았다. 그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처절한 눈빛을 독고무정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독고무정이 걸레 조각처럼 변한 그의 몸을 안아 든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왔던 무쌍류(無雙流)의 새로운 후계자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제 1 장 자네는 누군가
 
  1
 
 그해의 장백산(長白山)은 유달리 추웠다.
 
  * * *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 그는 그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놈이다!’
 발자국을 보자마자 그는 그것이 자기가 찾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 덮인 야산(野山)의 커다란 암반 위에 선명히 찍혀 있는 발자국은 크기가 거의 한 자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큰 짐승의 발자국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발자국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암반의 한쪽 구석에 하나의 작은 털을 집어 들었다.
 노린내가 나는 하얀 털이었다.
 ‘이게 바로 백왕(白王)이구나!’
 그는 오일 만에 발견한 백왕의 발자국을 보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백왕은 장백산(長白山) 일대에서는 거의 전설처럼 알려진 거대한 호랑이였다. 전신이 잡털 한 오라기 섞이지 않은 순백색 털로 덮여 있고, 그 크기가 다른 호랑이보다 두 배는 더 커서 이 일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에게는 외경(畏敬)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백왕의 발자국을 발견하자 그는 자신의 왼팔에 감긴 가죽 붕대가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가죽 붕대는 물소의 가죽을 한 달 동안 철심목(鐵心木)의 수액(樹液)에 담근 다음 은사(銀絲)를 꼼꼼히 박은 것으로, 질기고 단단하기가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아무리 강한 호랑이의 이빨이라 해도 이 가죽 붕대를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죽 붕대와 손에 든 죽창(竹槍) 하나, 그리고 옆구리에 차고 있는 열다섯 자루의 단도가 그의 사냥 도구 전부였다.
 그는 눈을 빛내며 백왕의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해 갔다.
 휘이잉...!
 장백산의 매서운 산바람이 한차례 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뼛골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었으나, 그의 두 눈은 오히려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람을 좋아했다. 바람 소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냥감은 항상 바람 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바람을 등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자국을 따라갔다. 바람을 등지게 되면 자신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사냥감에게로 전달된다.
 한동안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장백산은 유달리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중원(中原)이라면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인데도 이곳은 매서운 한풍(寒風)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계절이었다. 날이 저물어 감에 따라 눈발은 점점 거세어질 것이다. 그러면 발자국 또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런 날에 산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산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난 오일 동안 그는 오직 백왕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서 드넓은 장백산의 깊숙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이제 그 발자국을 발견한 이상 그는 절대로 추적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백왕의 발자국은 장백산에서도 가장 험준한 노호령(怒虎嶺)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한 걸음으로 발자국을 따라갔다.
 노호령의 계곡은 몹시도 가팔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두운 하늘 위로 성벽처럼 서 있는 험준한 산령(山嶺)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끝도 없을 것 같은 고갯마루를 계속 올라가자 멀리 울창한 수림이 나왔다.
 노호령의 정상에 올라서자 그의 전신에는 땀이 흘렀고, 숨이 턱에까지 차 왔다. 눈과 한기(寒氣)로 살갗이 칼에 베인 듯 차갑고 아파 왔고, 가슴은 터질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쉴 수가 없었다. 백왕의 발자국이 점차로 선명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왕의 발자국은 때때로 끊어졌는데, 그것은 백왕이 숲 속 안으로 들어가 먹이를 찾고 있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백왕의 발자국을 따라 노호령 너머의 수림을 향해 다가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의 지형은 조금 색달랐다. 좌측에는 울창한 수림이 전개해 있었고, 우측에는 험한 바위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이런 지형은 습격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만일 백왕이 그를 알아차리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 지형에서는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백왕의 발자국은 수림과 바위 언덕의 저 너머 편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먼 곳에 발자국이 보인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백왕같이 노련한 호랑이라면 커다랗게 우회해서 최상의 장소에서 습격해 올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지형을 만나게 되면 웬만한 사냥꾼이라면 지옥의 사신(死神)이라도 만난 듯이 공포에 떨게 된다. 추적을 중지하자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깝고, 계속하자니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사냥감의 역습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가슴에 묘한 흥분이 일어났다.
 그것은 투지(鬪志)라고 해도 좋았고, 위험을 쫓는 인간 본연의 야성(野性)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튼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그는 사냥감을 잡아 배를 갈라 그 뜨거운 피의 내음을 한껏 맡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는 천천히 수림과 바위 언덕 사이로 발을 들여놓았다.
 호랑이의 동작은 인간보다 몇 배나 더 빠르다. 갑자기 독특한 짐승의 노린내가 나고 거대한 그림자가 언뜻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머리는 날아갈 것이다. 아니면 목이 물리거나 배의 살점이 도려져 자기의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두 눈을 번뜩인 채 온몸의 신경을 집중시키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곳의 길이는 이십여 장에 불과했지만 그는 무려 이각(二刻)이나 허비해서야 간신히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림과 바위 언덕의 경계선을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내리는 눈과 땀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채 바싹바싹하게 얼음 조각을 만들어 냈다.
 수림을 지나기 직전,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 위에 생긴 백왕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윤곽이 선명하여 발톱 자국까지도 생생하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스치기만 해도 얼굴이나 배의 살점을 손쉽게 도려낼 것 같은 무시무시한 발톱이었다.
 휘이이이....
 바람은 더욱 차갑고 강해졌다.
 얼굴 전체가 아팠다. 그는 장갑을 낀 채 죽창을 움켜쥔 양손의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움직임을 멈추면 잠깐 사이에 손가락의 감각을 잃게 된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쉬게 되면 흐르는 땀이 식어 이내 얼음으로 변해 버린다. 피부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면 그것으로 인간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빨리 움직였다가는 체력이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조금씩 조금씩 백왕의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전신이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시위를 당긴 활처럼 예민해졌다. 어디선가 짐승 특유의 느끼한 비린내가 풍겨 나왔던 것이다.
 그는 죽창을 힘주어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자신의 십여 장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향해 전진해 갔다. 바위에 다가갈수록 비린내가 짙어졌다. 눈 덮인 바위는 크기가 무려 이 장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백왕은 틀림없이 그 바위의 뒤에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쓰--윽!
 갑자기 바위가 불쑥 일어났다.
 아니,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새하얀 바위가 꿈틀거리며 일 장쯤 더 커지더니 그 가운데 두 개의 시뻘건 안광이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의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굳어졌다. 그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눈 덮인 바위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바로 거대한 백호랑이였던 것이다.
 바로 백왕이었다. 실제로 본 백왕은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몸통의 길이만도 이 장이 훨씬 넘었고, 키는 거의 서 있는 어른에 육박할 정도였다. 우뚝 선 앞발에 달려 있는 발톱은 날이 시퍼렇게 선 갈쿠리를 연상시켰다. 전신에 나 있는 털은 거의 순백색(純白色)에 가까웠는데, 시력을 잔뜩 돋우어서야 희미한 얼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도 크고 또 하얗기 때문에 그는 눈 속에 웅크리고 있는 백왕을 바위로 착각했던 것이다.
 백왕의 두 눈은 그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대신 백왕의 거대한 앞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랑이는 공격을 할 때 항상 제일 먼저 앞발로 목표를 후려친다. 그다음에 이빨로 물어뜯고, 마지막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사용하여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다.
 오랜 동안의 경험으로 그는 호랑이를 사냥할 때는 그 앞발의 공격을 잘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집채만큼 거대한 백왕을 지척에 둔 채 양손으로 죽창을 들고 백왕의 앞발을 쏘아보았다.
 크르릉....
 백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신경과 시선은 오직 다섯 개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루어진 백왕의 오른쪽 앞발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백왕 또한 그를 응시한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휘이잉...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고, 눈발 또한 한층 더 기승을 부렸다. 그래도 사람과 짐승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눈 속에 파묻힌 채 얼어 가고 있었고, 죽창을 든 채 쳐들린 두 팔은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나 그는 여전히 백왕의 앞발을 노려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아...하아...
 그의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이 새하얀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크르릉.....
 백왕의 입에서도 뜨거운 김이 뿜어 나왔다.
 미친 듯이 퍼부어지던 눈발조차 정지한 듯한 어느 한순간,
 부르르...
 백왕이 숨을 내쉼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던 백왕의 앞발이 조금 더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화광처럼 빛났다.
 어허헝!
 순간,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포효성과 함께 백왕의 거대한 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쉬아악!
 백왕의 앞발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그의 머리통을 후려쳐 왔다. 하나 그때 그의 몸은 어느새 백왕의 발아래로 뛰어들고 있었다.
 파악!
 백왕의 앞발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빠져 바람에 날려 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창으로 백왕의 오른쪽 앞발을 세차게 찍었다.
 죽창이 백왕의 오른쪽 앞발을 관통하여 그대로 얼어붙은 땅바닥에 박혀 버렸다.
 쿠아아아앙!
 고통에 찬 백왕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터질 듯 울려 퍼졌다.
 백왕은 앞발이 죽창에 관통당해 땅에 꽂히자 미친 듯 몸부림을 쳤다. 앞발에서 뿜어 나오는 선혈이 그의 상반신을 시뻘겋게 물들였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몸부림치는 백왕을 향해 번개 같은 동작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콰지직!
 백왕이 거세게 몸부림을 치자 백왕의 오른쪽 발에 박혀 있던 죽창이 부러져 나갔다. 백왕은 시뻘건 입을 벌려 그의 머리통을 물어뜯어 왔다.
 그는 간신히 왼팔을 올려 막았다.
 콰악!
 백왕은 사정없이 그의 왼팔을 물어뜯었다. 철심목의 수액에 절인 가죽 붕대를 몇 겹이나 칭칭 감았는데도 백왕의 커다란 이빨은 너무도 간단하게 붕대를 뚫고 들어왔다.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백왕의 송곳니 두 개가 그의 피부를 뚫고 왼팔에 깊숙이 박혔던 것이다.
 그 고통으로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오른팔로 백왕의 목을 끌어안으며 등으로 올라탔다. 그 동작은 비호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백왕은 그의 왼팔을 문 채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 바람에 그의 왼팔은 금시라도 뜯겨 나갈 듯 너덜너덜거렸다. 그는 왼팔을 떼어 낼 생각은 하지 않고 백왕의 목 위로 기어오르며 오히려 왼팔을 더욱 백왕의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크흐흥!
 백왕은 거친 숨소리를 뿜어내며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의 왼팔은 거의 반 이상이 백왕의 목 안으로 들어가 손가락이 거의 목젖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손가락이 백왕의 목젖에 닿자 있는 힘껏 그 목젖을 움켜쥐었다.
 마침내 백왕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거의 반이나 집어삼켰던 그의 왼팔을 뱉어 내며 그를 떼어 내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쳤다.
 그는 이미 피투성이로 변해 걸레 조각처럼 찢겨진 왼팔로 백왕의 목을 끌어안으며 왼쪽 허리춤에서 하나의 짤막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단도는 길이가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컸는데, 날이 시퍼렇게 서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섬뜩한 것이었다. 백왕은 그를 떼어 내기 위해 왼쪽 발을 휘젓기도 하고 바닥에 몸을 비비기도 했으나 그는 양손으로 백왕의 털가죽을 바짝 움켜쥔 채 단도를 입에 물고 백왕의 이마 쪽으로 다가갔다.
 파악!
 백왕의 무시무시한 왼발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쫘악 갈라지며 네 개의 발톱 자국이 생생하게 새겨졌다.
 그래도 그가 떨어지지 않자 백왕은 몸을 뒤틀어 그가 매달린 부분을 땅바닥에 마구 비벼 댔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은 얼음같이 차가운 바닥에 부딪친 채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깨어져 퉁퉁 부어올랐다.
 하나 그는 필사적으로 두 팔과 두 다리를 움직여 백왕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백왕의 머리 쪽까지 다가간 그는 입에 문 단도를 양손으로 움켜쥔 다음 백왕의 양미간 사이를 향해 단도를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푹!
 꾸아아앙!
 단도가 두개골의 갈라진 틈 사이에 박히자 백왕의 몸부림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백왕의 미간에 박힌 단도를 양손으로 깊숙이 꽂은 채 백왕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거대한 백왕의 목에 매달린 그의 몸은 금시라도 나가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으나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백왕의 몸놀림이 조금씩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백왕의 몸이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주위 사방이 온통 뒤흔들릴 정도로 둔탁한 굉음을 내며 백왕은 눈 덮인 장백산의 대지위에 거대한 몸을 드러 뉘었다. 그제야 그는 백왕의 몸에서 떨어져 바닥에 누운 채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헉... 헉...”
 그의 전신은 얼어붙은 땅바닥에 부딪치고 긁혀서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부어올라 몹시 보기 흉했다. 특히 심한 것은 왼쪽 팔의 상처로, 가죽 붕대는 이미 갈가리 찢겨졌고 팔뚝에는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으로 시뻘건 선혈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주위는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고 눈보라를 동반한 추위는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몸은 흐르는 땀이 식어 이미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일각(一刻)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차가운 눈 위에 누운 채 헐떡거리던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백왕에게 다가갔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백왕의 몸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는 백왕의 미간에 꽂았던 단도를 뽑아서 백왕의 배 쪽으로 다가갔다. 손이 얼어서 좀처럼 단도를 힘껏 움켜쥘 수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단도를 백왕의 배로 가져갔다. 손으로 더듬어서 뱃가죽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확인하자 단도로 그 부위를 갈랐다.
 화악...
 뜨거운 선혈이 뿜어 나오며 백왕의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백왕의 배 속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내장을 갈라 나갔다.
 왼쪽 팔은 이미 통증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백왕의 배를 갈라 안에 있는 내용물을 다 끄집어냈다. 어른의 몸통만 한 간(肝)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는 모두 버리고 배를 비운 다음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백왕의 배 속에서는 아직도 후끈한 열기가 진한 피비린내와 함께 풍겨 나왔다. 그는 가지고 들어간 간(肝)을 잘라 그것을 날로 먹었다. 그런 다음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꺼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쿨룩... 쿨룩...”
 뜨거운 간에 이어 차가운 술이 들어가자 기침이 나왔으나 그는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제야 떨리던 몸이 진정되며 마음속의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독했던 추위가 어느 정도 가시자 그는 몸을 웅크린 채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휘이이잉...!
 밖에서는 매서운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 살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도 백왕의 배 속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그는 겨우 잠이 깨었다.
 그의 몸은 전신이 긁히고 부딪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나 추위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는 백왕의 배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나와 잠시 기지개를 켰다.
 그토록 무서웠던 간밤의 추위도 어느 정도 가시고 하늘에는 조금이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태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굳어진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여 풀고는 옷을 찢어 퉁퉁 부풀어 오른 왼팔을 칭칭 동여맸다. 그런 다음 다시 단도를 잡고 이번에는 백왕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빠르고 능숙했는데도 백왕의 가죽을 모두 벗긴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그동안에 그는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백왕의 간을 반이나 먹었고 술병 속의 술도 모두 마셨다. 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벗겨진 백왕의 가죽은 도저히 혼자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으나 그는 그것을 둘둘 말아 묶은 다음 등에 짊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온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출발했던 마을로 내려오기까지는 다시 네 시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다시 눈발이 나릴 기세였다.
 그 마을의 이름은 백석촌(白石村)이라 했다.
 백석촌 사람들은 그날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백석촌의 사람들은 모두 집 밖에 나와 등 뒤에 산더미 같은 새하얀 호랑이 가죽을 짊어 맨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의 얼굴과 그가 짊어 맨 백왕의 가죽을 번갈아 쳐다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냥꾼 하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저걸 자네가 잡은 것인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늙은 사냥꾼은 주름이 가득 진 눈으로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전신에 나 있는 무수한 상처와 칭칭 동여맨 왼팔, 피로 물든 옷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이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과 날카로운 눈을 쳐다본 늙은 사냥꾼은 문득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백왕을 잡을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
 늙은 사냥꾼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내뱉었다.
 “설마 그날이 오늘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늙은 사냥꾼은 멍하니 그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소리쳐 물었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갔다. 그의 몸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그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노독행(路獨行).”
 
 
  2
 
 무공(武功)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누가 만약 나에게 무공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을 할 것이다.
 
 “무공을 배우는 목적은 반드시 적을 쓰러뜨리는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그렇다.
 적에게 공격을 가해서 명중을 시키고, 적을 쓰러뜨리는 것 외에 다른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무공이란 다시 말하면 숙련된 살인술(殺人術)인 것이다.
 나는 평생을 이런 믿음하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어떻게 하면 상대를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가 하는 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한 번 손을 펼치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는 무공!
 그것이 바로 나의 무공이었다.
 즉, 무쌍류(無雙流)의 ‘필살무예(必殺武藝)’인 것이다.
 
 - ‘무쌍류비전총요(無雙流秘傳叢要)’ 중에서.
 
 
 제 2 장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1
 
 황혼이 붉게 물든 가을 저녁에 철각령(鐵角嶺)의 고개를 넘어 본 사람이라면 그 단풍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등에 백왕의 가죽이라도 짊어지고 있다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철각령은 산서성(山西省)의 동북쪽에 있는 높다란 고갯마루였다. 안문관(雁門關)에서 멀지 않았고, 대(代)에서 대동(大同)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고개이기도 했다.
 노독행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철각령의 단풍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철각령의 단풍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장백산을 떠난 지 십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곳은 아직 단풍이 떨어지지 않았다. 철각령은 산이 많은 산서성 내에서도 험준하기로 유명한 고개였지만 그는 조금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가 막 철각령의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
 등 뒤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산 아래에서 한 떼의 인마(人馬)가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독행이 옆으로 비켜서자 말의 거친 숨소리가 다가오며 세 필의 말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독행은 힐끗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말 위에는 세 명의 남녀(男女)가 타고 있었다. 가장 앞선 인물은 짙은 남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고, 그 뒤에는 체구가 거대한 금포 중년인이 있었다. 제일 마지막의 인물은 전신에 흑의 경장을 한 여인이었는데, 얼굴에는 검은 망사를 써서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두두...
 세 필의 말이 달려 나가며 뿌연 흙먼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는 흑의 경장 여인의 눈과 잠깐 마주쳤다. 망사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유성처럼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려 사라져 갔고, 노독행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하나 그 짧은 만남이 두 사람의 앞길에 그토록 질긴 운명(運命)의 끈을 드리우게 될 줄을 그들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 * *
 
 철각령의 정상을 넘자 저 멀리 집의 대문이 보였다.
 노독행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한 달 만이었다. 한 달 전에 훌쩍 집을 나선 뒤 이천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장백산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노독행은 늦지 않게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방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노독행은 방 한쪽에 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때 누군가가 방해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자신도 남들이 무엇을 할 때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안색은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아버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한쪽 구석에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때는 벌써 그가 방에 들어온 지 거의 반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언제 돌아왔느냐?”
 아버지의 음성은 언제 들어도 묵직했다. 노독행은 아버지의 이 묵직한 음성을 좋아했다.
 “방금 왔습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푸르뎅뎅했고,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어 흉흉해 보였다. 옷에 가려져 있지만 전신에도 적지 않은 상처들이 나 있을 게 뻔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그의 상처가 가득한 얼굴을 보다가 시선이 왼쪽 팔로 향했다.
 “팔은 괜찮느냐?”
 그의 왼쪽 팔은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는데 붕대 사이로 붉은 혈흔(血痕)이 내비치고 있었다.
 노독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가 어디에서 이런 상처를 입었는지 묻지 않았다. 노독행도 그것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혼자의 의지(意志)로 자신의 몸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였고, 아버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럼 됐다. 이제 가서 쉬거라.”
 노독행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손님이 왔습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느냐?”
 “철각령을 넘을 때 몇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 걸 보았습니다.”
 “그들은 후원에 있다. 잠시 후에 나는 그들과 어디를 갔다 와야겠다.”
 아버지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과 어디를 가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노독행도 더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들에 대해 말해 주고 싶었으면 벌써 말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천하의 누가 물어보아도 아버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방을 나오자 그는 형을 찾아갔다.
 “돌아왔구나.”
 형은 언제나처럼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백왕의 가죽을 내밀었다. 형은 백왕의 탐스러운 털가죽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동여맨 왼쪽 팔을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놈을 잡으려고 고생깨나 했겠구나. 나도 다행히 늦지 않게 완성을 했지.”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으로 다가가더니 벽에 두른 휘장을 걷었다.
 휘장 뒤에는 하나의 커다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노독행은 한눈에 그 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오동나무를 잘라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단 한 군데도 못질을 하거나 이은 곳이 없이 통째로 연결된 것이었다. 공예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훌륭한 조각품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일이 결정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때 그들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생일날에 무엇을 선물할까 하는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좋은 의견을 말한 사람은 형이었다.
 “아무래도 의자를 만들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지금 아버님이 사용하시는 의자는 조금 작아서 가끔 불편해하시는 것 같다.”
 “그럼 형이 의자를 만드세요. 나는 그 의자에 씌울 짐승 가죽을 구해 오겠습니다.”
 형은 승낙을 했고, 그는 그날 밤에 집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형의 솜씨는 과연 뛰어났다.
 백왕의 가죽을 그 나무 의자에 씌우자 그것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호피(虎皮) 의자가 되었다. 아마 형 외에 백왕의 가죽에 이토록 어울리는 의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형은 온화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백왕의 가죽을 씌운 의자를 만졌다.
 “내일 아버님께서 이것을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가죽이 정말 좋구나.”
 노독행은 잘라 말했다.
 “의자가 더 낫습니다.”
 형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형의 나이는 노독행보다 네 살이 더 많았다. 노독행과는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전혀 닮지 않았다. 아버지도 형을 보고 생김새나 행동이 꼭 죽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노독행은 아버지를 닮은 편이었다.
 “바람을 좀 쐴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서쪽 하늘은 온통 노을에 물들어 세상을 붉은색으로 칠해 놓은 것 같았다. 노독행은 문득 그 붉게 물든 노을이 꼭 핏빛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이 정말 아름답군.”
 형은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한동안 두 형제는 우두커니 노을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형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오기 조금 전에 세 사람이 아버님을 찾아왔다.”
 노독행은 말없이 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후원에 있는데,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을 전에 본 적이 있지. 그의 이름은 신도비응(神刀飛鷹) 엽표(葉豹)라고 한다.”
 노독행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노독행은 잠시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자는 혹시 남삼을 입고 얼굴이 길쭉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형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다. 그들을 만났느냐?”
 “이곳에 오기 전에 세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 걸 보았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누구지요?”
 “둘 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짐작은 할 수 있지. 체구가 큰 금삼 중년인은 아마도 엽표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무적철환(無敵鐵丸) 구여해(丘如海)일 거야.”
 구여해란 이름을 듣고서야 노독행은 엽표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생각이 났다.
 엽표와 구여해!
 그들은 바로 강북(江北)을 석권한 천상회(天上會)의 고수들로, 새외쌍절(塞外雙絶)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천상회는 강북의 크고 작은 십삼 개 문파(門派)를 연합하여 명실상부한 강북무림의 최고 세력으로 부상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조직은 엄밀하고 방대했으며, 행사가 치밀하고 집요해서 강호무림에서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천상회의 고수들이 이곳을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노독행은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들과 동행한 여자는?”
 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엽표와 구여해는 천상회에서도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절정고수들이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온 그 여자도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
 형의 눈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노독행은 형의 눈빛이 꼭 별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엽표와 구여해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 그녀는 그들보다 지위가 높은 게 분명하다. 천상회에서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자는 오직 세 명뿐인데, 그중 한 여자는 머리가 백발(白髮)이고 한 여자는 기형적으로 뚱뚱하다.”
 노독행이 조금 전에 본 흑의 망사녀는 백발도 아니고 뚱뚱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남은 여자는 오직 하나뿐이지.”
 “그녀가 누굽니까?”
 “그녀는 바로...”
 바로 그때 그들의 뒤에서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마표향(司馬飄香).”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직한 저음의 음성이었다.
 두 형제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의 뒤에는 흑의 경장을 한 훤칠한 키의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의 여인의 얼굴에는 검은 망사가 드리워져 있어 아쉽게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나 망사 너머로 내비치는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유성보다도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혼(心魂)마저 녹아 버릴 듯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형은 눈을 빛낸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무어라고 하셨소?”
 흑의 망사녀는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사마표향이라고 했어요.”
 그녀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어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사마표향이라는 이름을 듣자 형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노독행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마표향!
 그녀에 대한 이름은 노독행도 들은 적이 있었다.
 
 - 강남(江南)에는 피다 만 연꽃 하나, 강북에는 떠도는 향기 하나...
 
 이것은 요즘 강호무림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노래였다. 이 노래가 가리키는 것은 두 명의 여인으로, 남연(南蓮)과 북향(北香)이라고 했다.
 그중 북향이 바로 사마표향이었다.
 그녀는 천상회의 당대(當代) 회주(會主)인 사마일력(司馬日歷)의 외동딸로, 미모나 무공이 백 년 내 무림에서 배출된 여고수들 중 가장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마표향의 시선은 줄곧 형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마표향이 다시 예의 독특한 저음으로 말했다.
 “그전부터 당신을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형은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사마표향의 눈빛은 유성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노가살수문(路家殺手門)에 수재(秀才)와 독종(毒種)이 한 명씩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당신이 바로 노가수재(路家秀才)라는 노군행(路君行)이지요?”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노군행이오. 그리고 이쪽은 내 동생인 노독행이라 하오.”
 형은 그녀에게 노독행을 소개했으나 그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짤막하나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이에요.”
 노독행은 여전히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형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그를 막지는 않았다.
 누구라 해도 노독행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독행이 이곳에 더 있고 싶었다면 누구도 그를 떠나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다면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독행은 형과 사마표향을 남겨 두고 혼자서 뒤뜰로 갔다.
 휘이잉...!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고 지나갔다. 그는 커다란 고목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생각만큼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마표향과 형이 혼사(婚事)가 오가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만나고 싶은 상대가 다름 아닌 형이라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형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야릇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형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재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됨이 준수하고 관옥(冠玉)같아서 그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탄복해 마지않는 젊은이였다.
 반면에 노독행은 말이 없고 무뚝뚝하며 과격했다. 그의 냉혹하리만치 거칠고 과격한 성격은 어려서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 때 노독행은 형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형이 머리를 잔뜩 헝클어 주면 그 상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다.
 한 번은 막내 삼촌의 친구 한 사람이 멀리에서 놀러 왔다가 그런 그를 보고 미친 망나니 같은 꼬마라고 웃은 적이 있었다.
 노독행은 그 사람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는 삼촌의 친구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고사리 같은 손에는 주방에서 들고 온 날이 시퍼런 식칼이 쥐여 있었다.
 삼촌의 친구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영원히 왼쪽 팔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막내 삼촌은 그 일로 그를 꾸짖지는 않았다. 단지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너는 너무 살기가 짙구나. 아마도 우리 가문(家門)은 너로 인해 흥하거나 망하게 될 것이다.”
 그 뒤로 그를 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와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우연하게 그를 마주쳐도 슬슬 피하기만 했다. 노독행은 그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람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짐승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사냥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짐승의 뒤를 쫓고, 추격을 하고, 습격을 해서 그 배를 가르고 신선한 피를 마실 때처럼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고, 그의 유일한 말 상대는 오직 형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아버지가 있다.
 그는 항상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일생(一生)에서 좋아하는 일이 있고, 이야기할 상대가 있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노독행은 문득 어두워 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밤하늘에는 보석 같은 별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저 별빛을 닮았군...’
 그 찬연히 빛나는 별빛을 보며 노독행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검은 망사 사이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
 한 번 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刻印)이 되어 버린 눈이다.
 아쉽게도 그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눈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오직 다른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그 사람이 형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반대인가?
 쾅!
 노독행은 왼손으로 옆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후려쳤다. 상처가 다시 터지며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왔다. 짜릿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온몸으로 퍼져 오는 통증을 느끼며 노독행은 피식 웃었다.
 ‘다시 사냥을 가야겠군.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갈까?’
 그는 이번에 길을 떠나면 형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쯤이면 모든 일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별빛을 닮은 눈 같은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는 사마표향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노독행은 그들이 가는 곳이 천상회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마 사마일력을 만나서 형의 혼사를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겠지...
 떠나기 전, 사마표향은 형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형이 그것을 받아 들었을 때, 그녀는 말 머리를 돌려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다가닥... 다가닥...
 형은 뿌연 흙먼지를 뿌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손에 잡힌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피처럼 붉게 핀 한 송이 장미꽃이었다. 붉은빛이 너무도 선명해서 어둠 속에 핀 한 떨기 혈화(血花) 같았다. 형은 붉은 장미꽃을 천천히 코에 갖다 대었다.
 아마 진한 향기가 풍겨 나오겠지....
 떠도는 향기(飄香)가...
 노독행은 당장 내일 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2
 
 노독행이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형이 들어왔다.
 준비라고 해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소금에 절인 쇠고기를 바짝 말린 육포와 두툼한 털옷 두 벌, 팔에 감을 수 있는 물소 가죽으로 된 붕대 몇 개, 십여 개의 단도, 쇠로 만들어 깨어지지 않는 술병과 약간의 은자, 그리고 죽창 한 개면 그만이었다.
 이 이상은 장비가 아니라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었다.
 노독행은 이보다 적은 장비로도 산속에서 석 달 동안 겨울을 지낸 적도 있었다. 그것은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혹독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당시의 일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형은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노독행이 장비를 꾸리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독행이 가죽 붕대를 왼팔에 감고, 검고 윤기가 나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옆구리에 차자 형은 불쑥 물었다.
 “그 주머니는 무엇에 쓰는 거냐?”
 “갓 잡은 짐승의 간(肝)을 넣어 두는 거예요.”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왜?”
 노독행은 형도 모르는 것이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식지 말라고 그러는 겁니다. 뜨거운 간은 산속에서는 최고의 식량이 되거든요.”
 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형은 별다른 말없이 노독행이 각반을 메고 열다섯 개의 단도를 허리띠에 차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두 번인가 형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다가 머뭇거렸다. 평소의 형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떠날 생각을 했느냐?”
 노독행은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재작년에 제가 오대산(五臺山)에서 몇 달간 지낸 적이 있지요?”
 “그래. 겨우내 그곳에서 보냈지. 그때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오대산의 겨울은 매섭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노독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오대산 현통사(顯通寺)의 주지 스님에게 몇 년 후에 다시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형님도 알다시피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성미 아닙니까?”
 형은 노독행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성격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너는 아직도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오대산에 가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오늘 가야 할 필요는 없지.”
 형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사냥을 다녀온 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길을 떠나곤 했다. 더구나 이번처럼 부상이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사냥을 가지 않았지. 무엇 때문에 너는 집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떠나려는 거냐?”
 노독행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별빛을 닮은 눈동자 때문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전혀 평소의 형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만... 이번에 아버님이 가신 일은 어쩌면 상상외로 흉험할지 모른다.”
 노독행은 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제 아버지가 떠난 것은 형의 혼사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의 음성이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나는 요즘 천상회 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님께서 천상회에 가신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어젯밤에 아버님은 그들과 떠나기 바로 전에 나를 불러 월영도(月影刀)를 맡기셨다.”
 처음으로 노독행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월영도는 그의 가문의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보도(秘傳寶刀)였다. 그것은 그의 집안의 상징이며 가주(家主)의 신물(信物)이었다. 그것을 맡긴다는 것은 곧 가주의 지위를 인계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형에게 가주의 지위를 인계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노독행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형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침울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님이 월영도를 내게 맡기신 것으로 보아 이번 길은 생사(生死)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험하고 위험한 여정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이 무사히 돌아오실 때까지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노독행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에는 어제저녁과 마찬가지로 붉은 노을이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정말 붉은 노을이었고, 아름다운 석양이었다.
 노독행은 묵묵히 붉게 물든 황혼을 바라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형은 그 핏빛 노을과 같은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형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참 후에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하나 그가 채 장비를 풀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들을 찾아왔다.
 그 사람은 하나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사람 하나.
 상자 하나.
 상자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질 좋은 오동나무로 만든 상자는 사방 길이가 한 자 정도 되어 보였다.
 상자를 들고 온 사람은 흑의를 입고 비쩍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낯빛이 유령처럼 창백했고, 두 눈에도 별다른 신광(神光)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 흑의 중년인을 보는 순간 형의 안색은 약간 변했다.
 “저자는 천상회의 삼대사자(三代使者) 중 하나인 냉면판관(冷面判官) 임빙(任氷)이다.”
 형은 노독행에게 소곤거렸다.
 노독행은 강호의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냉면판관 임빙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상회의 삼대사자가 천상회주(天上會主)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형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임빙은 불쑥 상자를 내밀었다.
 형은 조금 망설이다가 상자를 받았다.
 노독행이라면 상자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유 없이 남에게서 물건을 받지 않는다.
 하나 어찌 되었건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받았든 받지 않았든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금세 알게 되었을 테니까.
 뚝... 뚝....
 상자 밑으로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 그리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비릿한 피비린내...
 형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상자 속에는 하나의 잘린 손이 있을 뿐이었다. 피가 잔뜩 묻은 채 손목 아래로 잘려 나간 커다란 손.
 바로 아버지의 손이었다.
 
 
 제 3 장 그는 갔습니다
 
  1
 
 “손의 임자는 아직 살아 있다. 그를 살리고 싶으면 노가살수문의 식솔들 전원을 데리고 오늘 밤 삼경(三更)까지 적석평(赤石坪)으로 와라. 단 한 명이라도 오지 않는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
 임빙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내뱉었다.
 두 형제는 그가 한 말은 들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는 임빙이 유유히 밖으로 사라질 때도 그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 눈과 신경은 오직 상자 속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
 너무도 익숙한 손.
 이 손은 어린 시절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이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보챌 때면 그들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을 했을 때는 그들을 때려 주던 손이기도 했다.
 그 손의 마디마디, 손금 하나하나에 추억이 담기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두툼한 가운데 손가락에 끼여진 누렇고 볼품없는 금가락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기신 유일한 물건이라고 했다. 가끔 그 반지를 빙빙 돌릴 때 아버지의 두 눈은 유달리 깊게 가라앉고는 했었다. 이제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금가락지를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대신 노독행은 풀어 놓았던 단도집을 다시 허리에 둘러맸다. 벗어 놓았던 가죽 붕대도 다시 양쪽 팔목에 단단히 감았고, 각반을 매었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 놓았던 죽창을 움켜잡았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 된다. 독행아.”
 노독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의 어깨를 붙잡았던 손이 더욱 바싹 다가들며 그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가면 안 된다.”
 형은 억지로 그의 몸을 돌렸다.
 “나를 봐라.”
 노독행은 고개를 들어 형을 쳐다보았다.
 형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눈꼬리가 양쪽으로 찢겨져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형은 그런 채로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은 가면 안 돼. 그건 그들이 바라는 거야.”
 형의 얼굴은 피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형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형은 목소리를 떨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살아남아 복수할 것을 제일 두려워할 거야. 그런데 이대로 그들에게 달려간다면 그들의 걱정거리를 해소시켜 주는 일이 될 거야.”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우뚝 서 있었다.
 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먼저 계획을 세워야 돼. 절대로 성급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성급한 행동?
 글쎄... 이게 성급한 행동일까?
 노독행은 이성(理性)보다는 본능(本能)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본능은 지금 복수를 하라고 외치고 있다. 노독행의 눈동자는 잔뜩 핏발이 깔려 있어 보기에 한 마리의 부상을 입은 야수와 같았다.
 형은 그의 몸을 있는 힘껏 부둥켜안았다.
 “네가 죽는다면 아버지의 복수는 영원히 할 수 없게 된다.”
 노독행의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났다. 그의 몸이 세차게 떨리며 입가로는 가느다란 실핏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한 만큼 갚아 준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 있는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는 이를 악다물며 형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형은 손을 뻗어 그의 혈도(穴道)를 짚었다.
 
 노독행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형의 얼굴이었다. 형의 얼굴은 초췌해 있었으나 그를 보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깨어났구나.”
 형의 음성은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노독행은 아직도 속에서 기혈(氣血)이 들끓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일어나려고 바둥거리자 형은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억지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가만히 누워서 내 이야기를 듣거라.”
 노독행은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침상에 길게 누웠다.
 형의 눈가에 어딘지 쓸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나도 네 생각을 무조건 반대하려는 건 아니다. 나도 역시 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싶다.”
 노독행은 묵묵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침울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는 지금은 절대 갈 수 없다. 난 너를 무덤으로 보낼 수는 없다.”
 형은 속삭이듯 말했다.
 “죽은 자는 복수를 할 수 없지.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언제고 반드시 복수를 할 수 있다. 우선은 살아남는 게 중요해.”
 노독행의 몸속에 끓어오르던 기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마 형이 옳을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형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냉정을 잃은 적이 없었다. 냉철한 이성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형과 노독행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임빙이 왔다는 것은 그자들도 이미 와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이 근처를 에워싼 채 우리들이 뛰쳐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나간다면 그건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그들은 아마도 아직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지만 우리들을 오늘 밤 적석평으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지.”
 처음으로 노독행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곳에 가면 우린 모두 죽을 겁니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말로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도망갈 수는 없다.
 가도 죽고, 가지 않아도 죽는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형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들이 이런 수를 쓰는 것은 우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 중 하나라도 살아남아서 복수를 할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이지. 풀을 벨 때 뿌리까지 뽑아 두 번 다시 자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형의 눈에는 이상한 광채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노독행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제가 적석평으로 가겠습니다. 형님은 이곳에 계십시오.”
 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 않다.”
 형은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처절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떠한 위험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지.”
 “......!”
 “우리 둘 중에서 아버님을 보필하고 세가의 식솔들을 잘 다스려서 집안을 융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노독행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형님입니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순간의 굴욕을 참고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뚫고 나가 마침내 복수를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노독행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형은 느릿하나 진중(眞重)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누가 그 일에 더 적합한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복수의 길은 너무도 고되고 어렵다. 나는 그런 일에는 자신이 없다. 하지만 너라면...”
 형은 노독행을 보면서 웃었다.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너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지.”
 “형님....”
 형은 노독행의 손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독행아. 나는 아버님에게로 가겠다. 너는 살아남아서 복수를 해 다오.”
 “.......”
 노독행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의 말이 옳았다.
 형은 언제나 옳았다. 노독행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어찌 형을 두고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형님... 같이 갑시다.”
 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님의 죽음을 보고 피할 수는 없다. 또 내가 같이 간다면 네게는 짐이 될 뿐이다. 나는 나대로의 길이 있고, 너는 너대로의 길이 있는 것이다.”
 형은 노독행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노독행은 눈을 부릅뜨고 형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형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형의 눈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였다.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형을 말리겠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마음속으로 부르짖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날 테다! 살아서 반드시 이 복수를 하고야 말 테다!
 두 형제는 서로의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 노독행은 간신히 소리를 죽여 입을 열었다.
 “적석평으로 갈 때... 저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노독행은 백왕 가죽으로 된 의자를 가리켰다.
 “아버님을 의자에 앉혀 주세요.”
 형은 그 의자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눈이 부신 듯 형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오늘은 아버님의 마흔다섯 번째 생일날이었다.
 
  * * *
 
 “후원의 뒤쪽을 돌아가면 하나의 절벽이 나온다. 절벽 밑에 뚫어 놓은 통로를 지나면 이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귀면암(鬼面岩) 부근으로 나갈 수 있다.”
 형은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귀면암에서 금계령(金鷄嶺)을 지나면 이곳을 벗어나게 되지. 그다음에는 길이 두 갈래인데, 남쪽으로 가면 항산(恒山)이 나오고 북쪽은 관외(關外)다. 너는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
 노독행은 주저 없이 말했다.
 “북쪽.”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북쪽은 네가 사냥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기 수월할 것이다.”
 형은 노독행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의 목적은 절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탈출하는 게 급선무다. 그 점을 명심해라.”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노독행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과 코, 입 등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자세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자신을 바라보는 형의 눈길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형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화를 내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형의 음성은 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자들은 화를 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
 “내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진정으로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냉정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것이다.”
 “......”
 “내 말을 잊지 않겠느냐?”
 노독행은 이를 악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 내쉰 다음 그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형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노독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 *
 
 형은 하얀 소복(素服)으로 갈아입었다.
 형뿐만 아니라 세가의 일흔다섯 명의 식구 전원이 하얀 백의를 입었다.
 이경(二更) 무렵. 노독행을 제외한 일흔여섯 명의 노가살수문 식솔들은 백의를 입고 백색 두건을 한 채 대청 앞에 나란히 섰다.
 노독행은 대청의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중에는 그의 삼촌도 있었고, 사촌 형도, 외숙모도 있었다. 그를 좋게 생각한 사람도, 그에게 별로 좋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노독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좋아한 사람이건 싫어한 사람이건, 그들의 눈은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 부탁한다!
 아마 노독행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시선들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선들 속에 담긴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독행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고, 표정 또한 변함이 없었다. 어찌 보면 감정 하나 없는 목상(木像)과도 같았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형이었다.
 형은 하나의 그릇을 들고 있었다. 형은 품속에서 작은 칼을 하나 꺼내어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나오자 그릇에 떨어뜨렸다.
 똑... 똑...
 떨어지는 몇 방울의 선열한 핏물들...
 형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형의 앞으로 다가와 칼을 건네받았다.
 그는 노독행의 막내 삼촌이었다. 막내 삼촌은 노독행을 힐끗 보더니 주저 없이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그런 다음 형과 마찬가지로 그릇 속에 자신의 피를 담았다.
 세 번째로 나선 사람은 오촌 당숙이었다. 네 번째로 새끼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노독행을 친아들처럼 귀여워해 주던 둘째 숙모였고, 다섯 번째 인물은 노독행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사촌 형이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노독행은 고개를 돌려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박혀 있는 수많은 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별들 하나하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들의 숫자는 일흔여섯 개였다.
 일흔여섯 개의 별...
 일흔여섯 개의 목숨....
 그들은 모두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
 
 - 노독행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 그라면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그가 우리의 복수를 해 줄 테니까...!
 
 이제 그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그가 어디에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일흔여섯 명의 혼백이 그와 함께할 것이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복수를 하는 그날까지 그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가 노독행을 한 번 쳐다보고는 주저 없이 자신들의 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을 그릇에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릇은 금세 핏물로 가득 찼다.
 일흔여섯 번째로 세가의 오랜 충복이었던 하노이(何老二)가 자신의 피를 떨어뜨리자 형은 그 그릇을 들고 노독행에게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노독행은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은 말없이 그릇을 내밀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자 노독행은 하마터면 눈물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급히 형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일흔다섯 명의 얼굴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노독행은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씩 차례로 마주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은 다시 형에게로 돌아왔다. 한동안 두 형제는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독행은 형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 들고 단숨에 그 안에 든 핏물을 들이켰다.
 피를 모두 마시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그의 손에는 하나의 장미꽃이 쥐여 있었다.
 피처럼 붉은 장미 꽃 하나...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장미꽃 하나가...
 노독행은 그 장미꽃을 보면서 형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내 무덤에 이 장미꽃을 꽂아 주어라.
 
  * * *
 
 임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노가살수문을 바라보았다.
 삼경 무렵.
 노가살수문의 정문이 열리며 하얀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빙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정말로 싸우기를 포기했군. 총호법(總護法)의 지략은 정말 무섭구나.’
 그는 노가살수문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열둘... 스물 다섯...’
 소복을 입은 무리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지 않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임빙은 그들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한 것을 보고 그들이 마치 유람을 나온 사람들처럼 생각되었다. 죽음을 향한 유람....
 ‘예순일곱... 예순여덟... 일흔넷... 일흔다섯... 일흔여섯!’
 막 마지막으로 나온 인물을 세던 임빙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일흔여섯! 분명히 일흔 일곱 명이어야 할 텐데...’
 그는 아직 나오지 않은 인물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하나 일흔여섯 명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임빙의 눈빛이 부르르 떨렸다.
 ‘한 놈이 도망쳤군. 틀림없이 그 독종(毒種) 중의 독종이라는 노독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허공을 올려다보며 잔인한 웃음을 떠올렸다.
 ‘네놈은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날개가 달렸다 해도 네놈은 우리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흐흐...’
 그는 괴이한 미소를 흘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휘잉!
 한 줄기 밤바람이 텅 빈 허공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2
 
 “독행은?”
 “그는 갔습니다.”
 그 순간 노일환(路一環)은 희미하게 웃었다.
 노군행은 아버지의 미소 짓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두 팔과 다리는 이미 잘린 채였다. 아랫배에는 시뻘건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가슴은 쩌억 갈라진 채 금시라도 내장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두 귀도 잘렸고, 양쪽 눈알은 움푹 파여 검은 구멍만이 공허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그자들은 두 번 다시 두 발을 뻗고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노군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이 조금 붉게 충혈된 것 외에는 그는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의 잘린 몸뚱어리를 부둥켜안아서 의자에 앉혔다.
 백왕의 가죽이 덮인 의자....
 새하얀 백왕의 가죽이 아버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핏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아버님...”
 노군행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가 정말 편안하군. 사실 그동안 의자가 조금 작아 답답했었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편하게 쉬십시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편안한 자세로 등을 의자에 기댄 채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구멍 뚫린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이 아버지의 얼굴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 붉게 물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노군행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다섯.
 대대로 이곳 철각령에 뿌리를 내려온 노가살수문의 열두 번째 후손이며, 열아홉 살에 무림에 발을 내디뎠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동안 아버지는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강북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정의 도객(刀客)이 되었다.
 ‘염라도(閻羅刀) 노일환’이라고 하면 적어도 화북(華北) 일대에서는 지옥의 염라대왕보다도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토록 강하고 굳건했던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당연히 천상회일 것이다.
 그들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당대의 천상회주인 사마일력과 아버지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와 사마표향의 혼사가 거론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친분 관계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지속되었으며, 두 사람의 성격상 상대의 신의(信義)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군행은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가의 일흔다섯 명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 저편...
 희끄무레한 수림 속에서 번뜩이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들은 세가의 인물들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싼 채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찍이 보지 못했던 가공할 살기들이 주위를 질식시킬 듯 눌러 오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노가살수문의 전체 인원보다 다섯 배는 많아 보였다. 어둠 속에서 번쩍거리는 그들의 안광으로 보아 그들 하나하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노군행은 조금도 두렵거나 움츠러드는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고요했다.
 그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아니, 노가살수문 전체가 오늘로서 강호무림에서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고 반드시 한 사람이 이 혈채(血債)를 갚아 줄 것이다.
 동생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리자 노군행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 노독행이 있는 한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천상회의 무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휘영청한 월광(月光) 아래 그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간 노군행의 안색이 홱 변했다.
 “다... 당신은...?”
 생전 떨릴 줄 몰랐던 그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달빛 아래 나타난 인물은 노군행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흐흐... 놀랐나? 설마 이곳에서 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그는 훤칠한 키에 청삼을 걸친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런데 청삼 중년인의 신형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였다.
 안광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청삼 중년인의 왼쪽 팔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삼 중년인을 보는 노군행의 얼굴이 여러 차례 변했다.
 청삼 중년인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띤 채 느릿느릿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지난 팔 년 동안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당시의 원한을 설욕할 수 있게 되었구나.”
 노군행의 뒤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양홍(曹陽虹)!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가 어찌 그런 말을...”
 버럭 소리치며 앞으로 나오는 인물은 막내 삼촌이었다. 막내 삼촌은 청삼 중년인을 바라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네가 설마 아직도 그때의 일을 가슴에 묻어 두고 있었단 말인가?”
 조양홍은 그를 보며 냉소를 날렸다.
 “흥. 쉽게 말하지 마라, 진환(進環). 자기가 직접 당해 보지 않고서는 당한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법이다.”
 막내 삼촌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아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짜리 소년이 한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벼르고 있었다니... 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조양홍의 눈가에 흉흉한 빛이 감돌았다.
 “겨우라고? 자, 이걸 봐라!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조양홍은 이를 부드득 갈며 자신의 왼쪽 소매를 잡아 뜯었다.
 부욱!
 옷이 찢겨지며 그의 왼쪽 팔이 거의 어깨까지 드러났다.
 “그놈이 내게 한 짓을 봐라. 이 팔을 보란 말이야. 난 그놈 때문에 병신이 되었다. 평생 병신이란 소릴 들으면서 살아가게 되었단 말이다!”
 그의 팔꿈치 중앙은 마치 뱀이 지나간 듯 끔찍한 흉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양홍은 그 흉터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그 악마 같은 놈이 내게 한 짓을 보라구... 너라면 이걸 잊을 수 있겠느냐? 섬서(陝西)에서 제일가는 기재(奇才)로 불리며 장래가 촉망되던 내가 불구자가 되어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 처절한 원한을 잊을 수 있겠느냐?”
 조양홍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난 그놈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그놈을 잡아서 그 뼈를 가루로 만들고 살을 짓이겨서 내가 당한 고통을 수백 배로 갚아 주고야 말 테다!”
 막내 삼촌은 우두커니 조양홍의 드러난 팔을 보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막내 삼촌과 조양홍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한 사이였다.
 노가살수문의 젊은 고수인 전궁도(電穹刀) 노진환(路進環)과 섬서성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후기지수인 창응검객(蒼鷹劍客) 조양홍은 누가 보기에도 서로 잘 어울리는 단짝이었다.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일...
 노진환은 아직도 팔 년 전의 그날에 벌어진 일을 어제 일처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이런 망나니 같은 꼬마 놈...!
 무심결에 내뱉은 한마디가 조양홍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낙인(烙印)을 찍어 주었다.
 아홉 살짜리 꼬마는 힐끗 그를 올려 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조양홍은 껄껄 웃었다.
 - 하하... 그놈 눈빛 한번 매섭군.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올려 보던 어린 소년의 쏘아보는 듯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곧 그 일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그 꼬마가 잠시 후 자신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을 때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곧이어 왼쪽 팔꿈치 안쪽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아악!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팔꿈치 안쪽에 날이 시퍼렇게 선 고기 써는 칼이 박혀 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무서운 눈빛의 꼬마 하나...
 조양홍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는 그렇게 많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다만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을 뿐이다.
 조양홍은 자신이 두 번 다시 왼팔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반광란 상태에 빠졌다. 그는 자신을 불구로 만든 그 어린 꼬마 놈을 당장에라도 때려죽이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꼬마는 노가살수문의 문주인 염라도 노일환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너희들은 그놈이 단순히 문주의 아들이라고 해서 아무런 징계도 가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지. 언제고 반드시 그 꼬마 놈과 너희들에게 내가 당한 고통을 몇 배로 되돌려 주겠다고.”
 조양홍은 두 눈에 악독한 광망을 뿌리며 노가살수문의 고수들을 둘러보았다.
 “과연 내 짐작대로 노독행, 그 독종 놈은 혼자서 내뺐구나. 틀림없이 후원 뒤쪽에 있는 암도로 도망쳤겠지. 하지만... 흐흐...”
 노진환과 노군행을 비롯한 노가살수문의 모든 고수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노진환은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 나왔다.
 “아.... 암도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조양홍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너희들은 그 독종 놈이 지금쯤 암도를 빠져나가 무사히 도망쳤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아마 그놈은 지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만큼 혹독한 꼴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노군행의 신형이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흔들렸다.
 노가살수문 후원의 뒤쪽 절벽에 뚫려 있는 암도(暗道)는 은밀하기 그지없어 노가살수문에서도 몇몇 수뇌급 인물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노군행이 노독행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그 암도를 통해 탈출한다면 이들의 마수(魔手)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미 암도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노독행은 그야말로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나방 신세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만에 하나 노독행이 그들의 손에 쓰러지게 된다면 자신들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순간 노군행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조양홍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 4 장 왜 걷냐고?
 
  1
 
 암도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노독행은 질풍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암도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그렇게라도 달리지 않으면 그의 가슴은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자신이 형과 가족들을 죽음 속에 놓아두고 혼자서만 도망친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후벼 파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의식적으로 한 가지 생각만을 하려고 했다.
 -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복수를 해야만 한다.
 멀리 짙은 어둠 속에 암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곳을 빠져나가면 그는 우거진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출 수 있을 것이다.
 휘이잉!
 차가운 밤바람이 암도의 끝에서 불어왔다.
 그 순간 노독행은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이상한 종적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본능(本能)이 갑자기 그를 제지했던 것이다.
 노독행은 그 자리에 몸을 멈춘 채 한동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다시 한차례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비로소 노독행은 왜 자신이 몸을 멈추었는지를 깨달았다. 불어오는 밤바람 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냄새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냄새...
 바로 사람의 냄새였다. 오랜 세월 동안 사냥으로 단련된 그의 예민한 후각이 아니었으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암도의 밖에 사람이 있다.’
 노독행은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독행은 두려움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는 어떤 심각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위험에 대한 그의 예감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몇 번이나 맹수들의 무서운 습격에서 살아난 적도 있었다.
 평상시라면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위험은 부딪치는 것보다 피하는 게 더 안전했다.
 하나 이곳에서 다른 길이란 없었다. 온 길을 돌아갈 수 없다면 앞에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뚫고 나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노독행은 즉시 겉옷을 벗어서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벗은 겉옷으로 칭칭 싸맸다. 그런 다음 허리에 차고 있는 단도집을 뽑기 쉬운 상태로 다시 고쳐 매고는 죽창을 오른손으로 힘껏 움켜잡았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는 암도 밖의 짙은 어둠 속을 노려보다가 돌멩이로 싼 겉옷을 밖의 어둠 속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쐐액!
 겉옷이 막 암도를 벗어난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
 싸늘한 폭갈이 터지며 어디선가 시퍼런 광망이 겉옷을 향해 그대로 짓쳐 들었다.
 쾅!
 겉옷과 그 속의 돌멩이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속았다!”
 탄성인지 신음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오며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그들은 전신에 피처럼 붉은 홍포(紅袍)를 걸친 세 명의 괴인들이었다. 혈포 괴인들은 암도의 입구에 내려서자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이다!”
 그들 중 중앙의 혈포 괴인이 북쪽 수림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짙은 어둠 속, 이십여 장 밖에 하나의 인영이 우거진 수림 속으로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는 광경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였다.
 혈포 괴인은 차갑게 웃었다.
 “흐흐... 제법 약은 수작을 부리는군. 하지만 그쪽에는 이미 넷째와 일곱째가 지키고 있다. 우리 장홍칠절(長紅七絶)이 있는 한 네놈은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혈포 괴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다른 두 명의 괴인들과 함께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몸은 어찌나 빨리 움직이던지 시뻘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고 느낀 순간 그들의 신형은 어느새 북쪽 수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형(形)이 부정하면 법(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형이란 무엇인가?
 형이란 형태다.
 도자기의 그릇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예로 말하면 초식(招式)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진리이다.
 도자기 속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예로 말하면 무도(武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 부정하면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뜻은 모든 무예는 형 속에 법이 존재한다, 즉 초식 속에 무도가 있다는 말이다.
 무도란 초식과 초식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며, 무도가 곧 초식 그 자체는 아니다. 마치 그릇으로부터 그릇으로 옮겨 가듯이 초식과 초식의 움직임의 흐름에 따라서 무도가 움직이며, 이 흐름의 강약과 완급에 따라서 무도의 생명이 좌우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형(形)은 과연 무도를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릇은 그 빈 속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무쌍류는 ‘그릇 없는 속’과 같다.
 무쌍류 무예의 본질은 상대에 따라 어떻게 응용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무쌍류는 형이나 초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쌍류는 무형지형(無形之形)이며 무식지식(無式之式)이다.
 하지만 형이 없는 무쌍류 속에 천하의 모든 기법이 있다. 최강의 무도는 바로 형을 초월하는 것이다.
 무쌍류가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형을 초월한 최강의 무도이기 때문이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 * *
 
 암도를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화악 닿아 왔다.
 노독행은 전력을 다해 겉옷을 던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암도의 밖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울창한 수림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나뭇가지와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굴이 잔가지에 사정없이 부딪쳐 왔으나 쓰라림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
 노독행의 몸이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십여 장 앞.
 칠흑같이 어두운 수림의 어둠 속에 두 개의 희끗한 붉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두 붉은 인영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어둠을 환히 밝힐 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전신에 시뻘건 혈포를 걸친 삼십 대 초반의 괴인들이었다. 우측의 괴인은 수중에 두 자 크기의 붉은빛이 감도는 손도끼를 들고 있었고, 좌측의 괴인은 독사를 연상시키는 채찍을 왼쪽 팔뚝에 칭칭 감고 있었다.
 혈부(血斧)를 든 괴인이 노독행을 바라보며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과연 이곳으로 도망쳐 왔구나. 노가 애송이! 이제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노독행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없이 앞으로 질풍같이 달려가며 양손을 휘둘렀다.
 쾌액!
 두 가닥 뇌전과 같은 광망과 함께 두 개의 단도가 혈포 괴인들에게로 쏘아져 갔다. 그 속도와 위력은 십칠 세 소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 혈포 괴인들의 얼굴에는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가소로운 짓을 하고 있군.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까깡!
 혈부를 든 괴인이 장난처럼 손을 휘두르자 두 개의 단도는 도끼에 맞아 맥없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하나 그때 혈부 괴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가 막 두 개의 단도를 튕겨 내고 손을 거두려는 그 순간에 날카로운 죽창 하나가 어느 사이엔가 그의 코끝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설마 노독행이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을 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그는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혈부를 얼굴로 치켜올렸다.
 땅!
 아슬아슬하게 죽창의 끝이 혈부에 가로막혔다.
 혈부 괴인은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마터면 그 죽창에 그대로 머리를 꿰뚫릴 뻔했던 것이다.
 그가 미처 놀란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발이 날아왔다.
 하나 그때 다른 한편에 있던 혈편(血鞭)을 든 괴인이 오른손을 쭈욱 내뻗었다.
 쉬악!
 마치 하나의 시뻘건 독사가 꿈틀거리며 날아오는 듯했다.
 쫘악!
 노독행의 오른발이 혈편에 휘감기며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통증을 느낄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몸은 혈편에 이끌려 그쪽으로 주르르 딸려 갔다. 노독행은 자신의 오른 발목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핏빛 채찍을 힘껏 잡고 오히려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혈편 괴인을 향해 몸을 던지듯 날아가는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하나의 단도가 예리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미친놈!”
 혈편 괴인은 탄성인지 욕설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채찍을 든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파아앗!
 노독행의 오른쪽 발목에 감겨 있던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허공으로 쭈욱 솟구쳤다. 노독행의 몸은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그런데도 그는 혈편 괴인의 목을 찔러 가는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혈편 괴인이 나직한 욕설을 터뜨리며 채찍을 거두고 훌쩍 뒤로 물러났다. 땅에 몸이 채 내려서기도 전에 노독행은 다시 두 괴인을 향해서 네 개의 단도를 내던졌다.
 팟! 팟!
 어둠 속에서 시퍼런 광망을 뿌리며 날아드는 단도는 음산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두 혈포 괴인이 다시 몸을 날려 네 개의 단도를 피했을 때 노독행의 몸은 이미 짙은 수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두 혈포 괴인이 노독행의 앞을 가로막고, 노독행이 아무런 말 없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격퇴시키고 사라지기까지는 그야말로 숨 한 번 크게 내쉴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두 혈포 괴인은 어이가 없는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평생을 무림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보내며 온갖 괴이한 일을 겪었지만 아직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 녀석에게 이런 꼴을 당한 적은 없었다.
 혈부 괴인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이런 찢어 죽일 놈! 사도형(司徒兄), 어서 그놈을 쫓아갑시다. 내 오늘 그놈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뽑아내지 않는다면 성을 갈아 버리겠소!”
 혈편 괴인은 그보다는 한결 침착했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노독행이 사라진 어둠 속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서두르지 말게. 그놈이 도망친 곳은 곽이형(郭二兄)이 있는 곳일세. 그놈에게는 오늘 밤이 지옥보다도 더 끔찍한 것이 될 걸세.”
 
 쾌액!
 검(劍)은 독사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노독행이 정신없이 앞으로 치달려 가고 있을 때 문득 어둠 속에서 하나의 검이 불쑥 날아든 것이다. 그 검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빠르게 날아왔는지라 설사 알고 있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노독행이 그 살인적인 일검(一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반사 신경 덕분이었다.
 우수수...
 검날이 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잘려 허공에 나풀거렸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쾍! 쾍!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인영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두 가닥의 예리한 검광이 주춤거리고 있는 노독행의 미간과 오른쪽 어깨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그 출수(出手)의 악독함과 방위의 완벽함은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창!
 노독행은 간신히 죽창을 들어 미간으로 날아드는 검광을 막아 냈다. 죽창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하나 그 순간 어깨를 향해 날아들던 검광은 사정없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팟!
 오른쪽 어깨가 쫘악 갈라지며 핏줄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노독행은 거의 반사적으로 왼손으로 두 개의 단도를 어둠 속으로 날렸다.
 인영은 너무도 수월하게 두 개의 단도를 피하며 그에게로 바짝 다가들었다.
 쾌액!
 그와 함께 거의 빛살 같은 검광 하나가 그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폭사되어 왔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노독행은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왼쪽 눈을 검에 관통당했다.
 쭈악!
 시뻘건 선혈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오히려 검으로 자신의 눈을 찌른 인물에게 덤벼들었다.
 “엇?”
 그 인영이 움찔하여 몸을 멈추는 순간에 노독행은 번개같이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그 인영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물체를 손으로 잡았다.
 순간 그는 질겁을 했다.
 그의 손에 잡힌 물컹한 물체는 다름 아닌 시뻘건 선혈이 묻어 있는 사람의 눈동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검에 관통당했던 노독행의 눈알이었다.
 그 인영은 장홍칠절의 둘째인 홍검유명(紅劍幽命) 곽일로(郭一怒)였다. 곽일로는 수십 년간 강호를 종횡(縱橫)하면서 수많은 잔혹한 장면을 겪어 왔지만, 자신의 눈알을 파내 상대에게 던지는 인물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동안에 노독행의 몸은 벌써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곽일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노독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 과연 노가살수문의 제일가는 독종(毒種)답군. 하지만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음산한 미소를 날리며 노독행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려 갔다.
 
 
  2
 
 형의 시체를 보았을 때 노독행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형의 시체는 그가 달려가는 귀면암의 한쪽 바위 모퉁이에 보기 흉하게 걸려 있었다. 바위 사방에 횃불이 환하게 불타고 있어 그는 형의 시체를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갈가리 찢겨져 거의 누더기처럼 변한 옷... 멀쩡한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이 철저히 짓이겨진 양팔과 다리... 난자질당한 가슴과 아랫배....
 그리고 풀어 헤쳐진 머리....
 그 머리를 보는 순간, 그 머리의 중앙에 뚫려 있는 두 개의 눈을 보는 순간 노독행은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그것은 너무도 눈에 익은 형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한쪽 눈이 검에 꿰뚫렸다는 고통은 어디론가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형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원한에 가득 차 부릅떠진 형의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서 있었다.
 “크흐흐... 이놈!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겠지?”
 그의 등 뒤에서 한 줄기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을 때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칼로 그의 등을 찌르지 않았으면 그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왼쪽 등허리 부근을 파고들자 노독행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고통보다는 엄청난 분노를 느끼며 홱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에 청삼 중년인 하나가 막 그의 등을 장검으로 찌르고 있다가 그가 몸을 돌리자 움찔하여 쳐다보았다. 노독행은 단번에 그 청삼 중년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는 그대로 청삼 중년인에게로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청삼 중년인, 조양홍은 노독행의 왼쪽 눈에 뚫린 시뻘건 구멍을 보고 한순간에 기가 질린 것이 분명했다.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져 움찔해 있을 때 노독행의 주먹은 정통으로 그의 콧등을 가격했다.
 쾅!
 벼락 치는 듯한 음향이 울리며 조양홍의 우뚝 솟은 콧날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조양홍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 그는 이를 악물며 노독행의 등에 꽂았던 검을 더욱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푹!
 장검이 노독행의 옆구리를 뚫고 반대쪽으로 삐져나왔다. 그런데도 노독행은 고통을 모르는 한 마리 야수처럼 조양홍을 향해 거푸 주먹을 날렸다.
 한 마리의 미친 야수와도 같았다. 옆구리에 검이 꽂힌 상태에서도 그는 거의 광기(狂氣)에 가까운 살기에 사로잡혀 조양홍의 전신을 무차별로 강타했다.
 조양홍의 광대뼈를 움푹 꺼지게 했을 때 노독행의 오른쪽 손목뼈가 탈골(脫骨)되었다. 조양홍의 갈비뼈 두 대를 부러뜨렸을 때 왼쪽 손목뼈도 금이 갔다. 그래도 노독행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조양홍이 참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여... 여러분... 어서 이놈을...”
 열린 그의 입으로 노독행의 반쯤 부서진 주먹이 틀어박혔다.
 쾅!
 조양홍의 앞 이빨 다섯 개가 모조리 부러져 나갔다.
 그때쯤에야 노독행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장홍칠절의 세 사람은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장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노독행과 조양홍의 치고받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토록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싸움은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조양홍이 노독행의 등에 장검을 꽂았을 때는 싸움은 이미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조양홍은 이미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지 않았다.
 가장 우측에 선 인물은 홍장회풍(紅掌廻風) 이태(易颱)였다.
 이태는 말없이 몸을 날려 노독행의 왼쪽으로 다가갔다.
 스윽!
 그때까지도 노독행은 정신없이 조양홍을 향해 주먹과 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태의 손바닥은 사정없이 노독행의 옆구리에 가서 처박혔다.
 쾅!
 단 일수(一手)였지만 그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노독행의 왼쪽 갈비뼈는 이태의 그 일수에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막 조양홍의 턱을 가격하려던 노독행은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코에서 시커먼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거의 몽롱해질 정도의 통증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노독행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너는 절대로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바로 형의 음성이었다.
 형의 마지막 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노독행은 그 말을 잊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무엇인가?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탈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다니...
 그 순간 이태의 손바닥이 다시 무서운 힘으로 아랫배를 가격했다.
 쾅!
 노독행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나 그의 몸은 쓰러질 때보다 더욱 빨리 일어났다. 이태는 자신의 두 번에 걸친 강력한 공격을 맞고도 상대가 다시 일어날 줄은 몰랐는지라 몸을 움찔거렸다. 노독행은 아직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쾌액!
 두 개의 단도가 섬뜩한 광망을 뿌리며 이태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이태는 황급히 쌍장(雙掌)을 휘둘러 날아오는 단도를 쳐 냈다.
 그 순간 노독행은 전력을 다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장내에는 이태 말고도 장홍칠절 중의 두 명이 더 버티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채 일 장도 움직이기 전에 붉은빛이 어른거리며 두 인영이 그의 앞뒤를 막아섰다. 그의 앞을 버티고 선 인물은 홍지단혼(紅指斷魂) 조표(趙杓)였고, 뒤를 막은 인물은 장홍칠절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는 홍안사심(紅眼蛇心) 북리강(北里薑)이었다.
 노독행은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조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삐식!
 조표의 메마른 입꼬리에 스산한 미소가 감돌았다. 조표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노독행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오른손이 갈쿠리처럼 변해 노독행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의 손가락은 특이한 철마지력(鐵魔指力)을 익힌 것이라 일단 그 손가락에 걸리기만 하면 황소의 힘줄도 그대로 끊어지고 마는 살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노독행은 오른손을 마주 내밀었다.
 ‘미친놈. 내 손이 어떤 것인 줄 알고 감히...’
 조표의 내심 쾌재를 부르며 더욱 빠르게 손을 뻗어 갔다. 그의 손가락과 노독행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얽혔다.
 뿌드득!
 그 순간 노독행의 손가락은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조표의 철마지력이 담긴 손가락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그때 노독행의 왼손은 어느새 단도 하나를 움켜쥔 채 조표의 옆구리를 가격하고 있었다.
 “조표, 조심해!”
 뒤에 있던 북리강이 노독행의 왼손에 들린 단도를 보고 놀란 외침을 토하며 달려왔다.
 조표는 막 노독행의 오른 손가락을 모두 부러뜨리고 득의해하다가 그 음성을 듣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북!
 그의 옆구리 부근 옷자락이 길게 잘리며 피가 솟구쳤다. 노독행의 단도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피부를 베고 지나갔다. 조표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옆구리에 단도가 박힌 채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노독행은 그림자같이 그에게 달라붙으며 다시 단도를 휘둘렀다. 하나 그때 북리강의 무쇠 같은 주먹이 노독행의 등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쾅!
 노독행의 허리가 이상하게 꺾이며 코와 입으로 시커먼 핏물이 왈칵 치밀어 올라왔다.
 “컥!”
 처음으로 노독행의 입에서 한 가닥 비명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독행의 몸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것을 보고 물러나 있던 조표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그것이 조표의 일생일대의 실수가 될 줄이야...
 조표는 방금 전의 공격으로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라 단숨에 노독행의 숨통을 끊어 놓을 욕심에 전력을 다해 오른손을 내밀어 노독행의 목덜미를 잡아 갔다. 노독행은 등뼈가 반쯤 부서진 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콱!
 조표의 매 발톱 같은 손가락이 노독행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하나 그 순간,
 “헉!”
 조표는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힌 노독행이 왼손에 들고 있던 단도로 그의 아랫배를 쑤셨던 것이다.
 “이... 이...”
 조표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분노와 고통으로 노독행을 노려보았다. 노독행은 전신에 유혈이 낭자한 채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자 조표는 고통 속에서도 한 줄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눈빛 속에는 실로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냉혹하고 살기 어린 빛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 괴물 같은 놈...”
 조표는 이를 부드득 갈며 노독행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부득!
 노독행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그의 입으로 다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노독행은 얼굴이 핼쑥하게 질린 채로 조표의 아랫배에 꽂은 단도를 더욱 힘껏 틀어박았다. 조표는 아랫배를 관통당하는 예리한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보다 못한 이태가 노독행의 등을 향해 맹렬하게 쌍장을 휘둘렀다.
 퍼펑!
 노독행의 등짝이 너덜너덜해지며 그의 몸이 조표와 함께 앞으로 쭈욱 밀려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의 몸은 서로 뒤엉킨 채 바닥을 몇 차례나 계속 굴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표는 노독행의 목을 바싹 움켜쥔 채 목을 졸랐고, 노독행은 조표의 몸에 박힌 단도를 더욱 깊숙이 꽂아 넣고 있었다.
 “지독한 놈!”
 북리강이 두 눈에 흉흉한 살기를 뿜은 채 허공을 날아왔다.
 쐐액!
 그의 손에는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날카로운 유엽비수가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먹이를 본 매처럼 사오 장을 날아 조표와 뒹굴고 있는 노독행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노독행은 사력을 다해 조표의 배에 꽂힌 단도를 위로 쳐올렸다.
 “으으윽...”
 마침내 조표가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으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르고 올라오는 단도를 붙잡았다. 그 순간 노독행은 무릎으로 그의 가슴을 강타하며 그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쾅!
 조표의 몸이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노독행은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북리강의 앞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북리강이 노독행의 뜻밖의 행동에 놀라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옆으로 일 장쯤 움직였다. 노독행이 기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남아 있던 다섯 개의 단도를 번개 같은 속도로 북리강과 이태를 향해 내던졌다.
 파파팟!
 다섯 줄기의 빛살 같은 섬광이 어둠을 뚫고 북리강과 이태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와 함께 노독행의 몸은 귀면암의 옆에 있는 절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북리강은 이대로 단도를 피했다가는 노독행을 또다시 놓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두 눈에 악독한 빛을 떠올렸다.
 “살아서 갈 수 없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단도를 피하지 않고 왼손으로 막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유엽비수를 세차게 내던졌다.
 파팍!
 그의 왼팔에 두 개의 단도가 박히며 피가 솟구쳤다.
 “윽!”
 북리강은 왼팔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단도를 피한 이태가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괜찮은가?”
 북리강은 팔의 통증도 잊고 급히 물었다.
 “그놈은 어떻게 되었소?”
 이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상에 그런 지독한 독종 놈은 보다 보다 처음 보았네. 유엽비수가 목에 꽂힌 채로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네.”
 북리강은 안색이 변한 채 황급히 노독행이 뛰어내린 절벽가로 달려갔다.
 절벽은 높이가 사오십 장 정도 된 가파른 협곡이었다.
 협곡의 아래는 칠흑같이 어두워서 도저히 노독행의 생사(生死)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북리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자신의 팔에 박힌 두 개의 단도를 뽑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절벽 아래를 보며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 봐야겠소.”
 이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등뼈가 박살 나고 목에 비수가 꽂힌 상태에서 이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면 살아 있을 리가 없네.”
 북리강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놈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안심할 수 없소. 당신도 보지 않았소? 그놈은 절대로 쉽게 죽을 놈이 아니란 말이오.”
 이태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내려가 보세.”
 두 사람은 곧 어두운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3
 
 “크륵... 크륵...”
 거친 숨소리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노독행은 커다란 암벽 아래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여서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고통은 이루 말할 나위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유엽비수가 박힌 목에서 도저히 참기 어려운 통증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하나 그는 목에 박힌 유엽비수를 뽑지 않았다.
 그는 결투 시에 사람이 죽는 것은 검(劍)이 꽂히기 때문이 아니라 뽑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이 꽂히면서 검이 박혔던 자리에 공기가 드나들어 상처를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검을 뽑으면 바깥의 공기가 침범하는 구멍이 생기지만 검이 꽂힌 채라면 구멍이 열리지 않아 출혈(出血)은 곧 막을 수 있다.
 옆구리에 박힌 장검은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쉬고 싶었다. 그에게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그는 쉬는 대신에 기를 쓰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두 다리와 두 팔을 필사적으로 바둥거려서 간신히 일어섰다.
 그의 앞,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홍포 중년인이 우뚝 선 채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홍포 중년인의 얼굴은 네모지고 눈빛은 유성처럼 차고 맑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는 하나의 기형도(奇形刀)가 매여 있었다.
 핏빛 홍포... 허리춤의 기형도! 바로 당금 강호에서 가히 공포스러운 존재로 군림하는 장홍칠절의 우두머리인 홍도낙백(紅刀落魄) 영호명(令狐命)이었다.
 노독행은 영호명을 힐끗 보다가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런 다음 이를 악물고 그 손잡이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우욱!”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사력을 다했는데도 검은 채 반도 뽑혀 나오지 않았다. 오른손의 손가락이 모두 부러져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다시 한 번 힘껏 뽑았다.
 스으윽...!
 왠지 소름이 끼치는 음향과 함께 그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던 장검이 간신히 뽑혀 나왔다. 장검이 뽑혀 나온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노독행의 낯빛은 아주 창백했다. 노독행은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양손으로 장검을 잡았다. 이로써 그도 상대의 칼에 대항할 무기를 갖게 된 것이다.
 영호명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독행이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아 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자세를 갖추자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스르르...
 별다른 신법을 펼친 것 같지 않았는데 그의 몸은 마치 미끄러지듯 노독행의 앞으로 다가왔다.
 노독행은 흔들거리는 신형을 억지로 멈춰 세우며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영호명은 노독행의 이 장 앞에 다다라서야 몸을 멈추었다. 그는 노독행을 바라보다가 백지장처럼 얄팍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너는 운이 없었다. 애송이.”
 눈빛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노려본 채 서 있었다.
 영호명의 눈빛은 칼날과도 같았다.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네게 경의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자리가 나빴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
 “내 한칼을 막을 수 있으면 너를 그냥 보내 주겠다. 하지만 너는 결코 내 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스릉!
 영호명은 칼을 뽑았다.
 칼도 붉고, 사람도 붉었다.
 그 붉은 칼이 붉은 사람과 함께 움직이자 노독행의 눈에는 그저 하나의 붉은 그림자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중에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막는 일뿐이었다.
 창!
 한차례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노독행은 자신이 가슴에 세운 장검이 부러지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신의 가슴에서 아랫배를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
 한동안 장내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뚝... 뚝...
 노독행의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그어지며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혈선은 점차 짙어지며 흘러내리는 피의 양도 많아졌다.
 노독행은 천천히 양손을 늘어뜨려 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호명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칼을 허리춤에 꽂은 자세로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노독행의 갈라진 배가 아닌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속대로 나는 한칼만 사용했다. 네가 떠나도 나는 너를 막지 않을 것이다.”
 노독행은 아랫배를 움켜쥔 자신의 열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영호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결코 영호명의 한칼을 받아 낼 수 없었다. 하나, 비록 영호명의 칼이 그의 몸을 가를지라도 그의 정신만큼은 가르지 못할 것이다.
 주춤!
 노독행은 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옮겨진 그의 발자국 밑에 선혈이 흥건하게 고였다.
 영호명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노독행은 다시 한 발자국을 떼었다. 더욱 많은 선혈이 아랫배를 타고 하체를 지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답답할 정도로 느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호명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쩍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노독행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저벅...
 노독행이 지나가는 자리는 그야말로 피의 바다였다. 사람의 몸에서 이토록 많은 피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 노독행을 지탱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복수를 해야 한다!
 자신은 결코 혼자만의 목숨이 아닌 것이다.
 일흔여섯 개 혼백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아니, 일흔여섯까지도 필요 없다. 오직 하나, 형의 혼백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걸었다. 너무나도 많은 피가 흘러 정신이 아득해져 왔고, 아랫배를 움켜잡은 양손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푸르스름한 내장이 삐져나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걸을 뿐이었다.
 왜 걷냐고?
 나는 살아야 하니까.
 살아서 이 복수를 해야 하니까.
 그는 이 소리만을 중얼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다리가 풀리고 몸이 바닥으로 쓰러질 때도 그는 걷고 있었다.
 쿵!
 자신의 몸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 그 순간에도 그는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채로 누워 있었다. 다리가 꼬이고 배를 움켜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차가운 바위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하늘은 검었고, 별빛은 차가웠다. 그는 한동안 차가운 별빛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그를 비추는 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의 시야가 갈수록 좁아져 하나의 별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멍하니 그 별을 올려 본 채 누워 있었다.
 그 별빛조차 점차로 희미해져 갔다.
 그때 문득 그는 그 별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형의 얼굴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노독행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별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백발노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그 주름살만큼이나 많은 상처들이 잔뜩 나 있었다. 노독행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 상처투성이의 백발노인이 자신을 내려다본 채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죽지 않아, 노인장. 비웃지 말라구...’
 노독행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의식의 끈을 잃고 끝없는 암흑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먼저 공(功)을 추구하고, 다음에 의(意)를 배우며, 그런 후에 무도를 깨닫는다.’
 
 이것은 무쌍류 무예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구결이다.
 공이란 자신이 배워서 터득한 하나하나의 무공의 위력을 말한다.
 의란 올바른 무공의 사용 기법을 가리킨다.
 위 말의 뜻은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공과 의를 합쳐서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느 쪽이 결여되어도 실전에서 승리를 얻기는 어렵다.
 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자세로 초식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그다음에는 기본기를 바른 동작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본인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의를 배우기 위에서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바로 일인계승(一人繼承)의 무쌍류 천 년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무쌍류의 무공은 천 년 동안 전해 내려왔다.
 그것은 무수한 선조(先祖)들이 필승(必勝)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체험과 처절한 수련을 쌓아 수십 대(代)에 걸쳐 창조된 것이다. 실로 무쌍류의 기법 속에는 실전(實戰)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응용하기 위한 완벽한 필승의 절예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처럼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절예라 할지라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올바른 의(意)를 이해하지 못하면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본인 스스로가 그 기법 하나하나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실로 너무도 많은 세월이 소비된다. 때문에 무쌍류의 무예는 절대로 혼자서는 익힐 수 없다. 사부의 도움이 없이는 무쌍류의 필살무예는 완성되지 않는다.
 무쌍류의 무예를 익힌 사람은 한 가지 사명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후계자에게 완벽한 무쌍류의 무예를 전수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무쌍류의 무예는 일인(一人)에게 계승되어 왔다.
 두 명은 필요 없다. 오직 단 한 명에게라도 무쌍류의 절예를 완벽하게 전수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쌍류가 천 년 동안 오직 일인에게만 전해져 내려온 이유였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다음에 계속...

댓글(3)

바봉    
크아 독고무정이라니,,, 독보건곤과 태극문으로 무협의 세계에 재진입하게 만든 작품인데,, 음 용대운 작가님과는 악연인듯 하네요,,, 고등학교떄는 마검패검으로 무협의 세계로 첫발을 디디게 하시고 끊었던 세계를 독보건곤과 태극문으로 다시 진입하게 하셧으니,,,
2015.01.27 18:50
풍뢰전사    
흠 ... 무심결에 9살짜리 어린 꼬마에게 한, 말 한마디에 평생 불구 ...... 모욕을 한것도 아니고, 부모욕을 한것도 아닌데 ...
2018.03.27 16:41
a흑마왕a    
내가 1983년도에 무협에 입문한이래 최고중의 최고로치는 무협소설이 잇습니다 중국의 독고구검과 한국의 독보건곤 영웅문이니 뭐니 떠들지만 무협의 본질을 완전히 꿰뚫는 작품은 두 작품뿐이라 생각합니다
2024.05.0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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