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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패검 1권-1

2014.12.30 조회 1,379 추천 8


 序 章(1) 알려진 신화(神話)
 
 백 개의 손.
 백 자루의 검(劍).
 백 명의 검객(劍客).
 
 - 백검회(百劍會)!
 
 백검회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백 명의 검객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회주가 누구인지, 또 그 회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영원한 신비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 무림에서 활동하던 절정의 검객들은 모두 백검회의 회원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강한 백 명의 검객들이 하나의 조직하에 모일 수 있다는 자체를 기적으로 생각했다. 백검회주는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으로 추앙되었다.
 회원 개개인이 능히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백 명의 절정검객들로 이루어진 무적(無敵)의 집단(集團)! 천하의 어느 문파도 그들에게 견줄 수는 없었고, 그들의 성세(盛勢)는 천만 년을 갈 것 같았다.
 한데 청천벽력(靑天霹靂)이랄까?
 그들은 웬일인지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서 신비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흡사 태양을 받아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검회는 그 탄생부터 종말까지가 온통 철저한 비밀에 쌓인 채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숱한 의문과 경악, 신비를 무림에 전설처럼 남긴 채.
 그로부터 유수(流水)같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백검회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신화는 무림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하나 언제부터인가 나직한 속삭임이 소리소문없이 퍼지기 시작했다.
 
 - 언제고 백검회보다 더욱 강한 ‘검(劍)의 초인(超人)’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 인해 검의 진정한 신화가 이룩되리라!
 
 검의 신화(神話)!
 검의 전설(傳說)!
 그것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한낮 부질없는 한 줄기 꿈으로 사라져 버릴 것인가?
 
 
 序 章(2) 알려지지 않은 신화(神話)
 
 열 명의 인간(人間).
 열 명의 무적고수(無敵高手).
 여덟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八男二女).
 그들은 어느 날 만났다.
 그들의 모임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신비스럽게 진행되었고, 그들은 피로써 결속을 맹세했다.
 
 - 십자맹(十字盟)!
 
 이 이름은 철저한 신비에 싸여 있었다.
 하나 그들의 맹세는 언제고 천하를 혈세(血洗)할 것이다.
 
 
 第 1 章 불상(佛像)을 조각하는 소년(少年)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다.
 전옥심(錢玉心)은 힘껏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따악! 딱!
 불똥이 튀며 텅빈 허공에 돌을 쪼개는 소리만이 쓸쓸히 울려 퍼졌다.
 우수수-! 석벽에서 돌조각이 요란스럽게 떨어지며 애뇌산(哀牢山)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석벽(石壁)에는 벌써 어색한 솜씨로 수십 개의 불상(佛像)이 조각되어 있었다. 크기가 어른의 머리통만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불상들이었다. 표정 없는 불상의 거친 얼굴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 표면 때문에 험상궂게 보였다.
 햇살은 찬란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 한 쌍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전옥심은 이마의 땀방울을 씻어주는 시원한 미풍을 맞으며 망치질을 계속했다.
 따악! 딱!
 단조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울림소리가 운남성(雲南省)의 적막한 강산(江山)을 뒤흔들어 갔다.
 우둘두둘한 머리, 움푹 들어간 눈과 약간 튀어나온 볼품없는 코, 그리고 배가 불룩한 몸통과 그곳에 네 개의 팔다리가 어색하게 붙어있는 불상이 그의 섬세한 손끝을 통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석벽의 옆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다.
 거친 흑의를 입은 노인 하나가 숲속에서 걸어 나와 석벽을 따라 전옥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나이답지 않게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한 쌍의 눈은 혜성(慧星)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계곡의 바람이 그의 왼쪽 소매를 허공에 펄럭였다. 이제 보니 그는 한쪽 팔이 없는 외팔이 노인이었다.
 외팔이 노인은 묵묵히 전옥심에게 다가와 번쩍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옥심은 무심히 망치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불상을 조각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심혼(心魂)을 내건 사람처럼 보였다.
 전옥심이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한참동안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외팔이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젠 제법 불상 같군.”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팔이 노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몇 개의 불상을 조각했는지 알고 있느냐?”
 전옥심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것까지 일흔다섯 개요.”
 외팔이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네놈이 천불상(千佛像)을 완성하려면 아직도 구백스물다섯 개의 불상을 더 조각해야 된다.”
 전옥심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쓸데없는 말을 하는데 자신의 진력(眞力)을 조금이라도 소비하려고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 외팔이 노인은 이미 그의 그런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놈은 천불상 말고도 해야 될 일이 산같이 쌓여있다. 그런데 지금같이 불상 하나 조각하는데 삼사일 씩이나 걸린다면 네놈은 늙어 죽을 때까지 노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문득 전옥심은 불상을 조각하던 손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만일 당신이 내 옆에서 계속 떠들어 댄다면 내 손길은 더욱 늦어질 것이오.”
 외팔이 노인은 그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금세 노호성이라도 터뜨릴줄 알았는데 노인은 이내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은 굶주린 늑대를 연상시키는 사나운 웃음이었으나 왠지 흥겨워 보이기도 했다.
 “흐흐……. 처음 몇 달간은 입도 뻥긋하지 않던 놈이 그래도 말이 많이 늘었군.”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과거에도 노부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놈들이 가끔 있었다. 너는 노부가 그놈들을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그는 전옥심의 말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흐흐... 노부는 그놈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단지 그놈들의 눈알을 파내고 혀를 끊어버렸을 뿐이지.”
 노인은 흉악하기 짝이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전옥심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전옥심이 듣던 말던 득의만면한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열 놈쯤 노부에게 그런 일을 당하자 어느 놈도 감히 노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는 놈이 없었지. 노부가 나타나면 천하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중원제일루(中原第一樓)의 모든 점원들이 정문까지 마중을 나오곤 했었다. 노부가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갈 때면 천하의 모든 고수들이 부러워했었지.”
 외팔이 노인의 음성은 어느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유성(流星)같이 번쩍이는 두 눈에서는 과거의 찬란했던 추억들이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문득 전옥심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눈을 파내지도 못하고, 그들의 혀를 끊을 수도 없소.”
 외팔이 노인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한 무서운 눈빛이었다.
 하나 전옥심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돌아갈 수 없는 일을 말했을 뿐이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과거(過去)의 일을 말이오.”
 노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는 광폭하게 외쳤다.
 “그래! 그건 모두 지난 일이다! 다시는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겠지……. 이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도 않고, 나를 두려워 하지도 않겠지. 그러나...”
 노인은 전옥심의 멱살을 세차게 움켜잡았다.
 “그러나 네놈만은 노부를 기억해아만 한다. 네놈만은 반드시!”
 그는 악을 바락바락 쓰며 전옥심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전옥심은 그가 몸을 흔드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소, 섭혼광인(攝魂狂人) 엽소천(葉小天)! 나는 절대로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까.”
 노인은 이를 부드득 갈며 불타는 눈으로 그를 잡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는 언제 화를 냈느냐 싶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겠다. 하지만 노부의 얼굴도 보지 못하는 놈이 큰소리는…….”
 외팔이 노인은 전옥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자! 이제 감각도(感覺道)를 익힐 시간이다.”
 전옥심은 망치와 정(釘)을 든 채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끝없이 푸르른 하늘…….
 새들은 울창하게 우거진 신록을 박차고 저 하늘을 마음껏 비상하고 있겠지.
 하나 그에게는 모두 부질없는 꿈일 뿐이었다. 푸른 하늘도, 울창한 신록도, 창공을 나는 새들도……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전옥심, 그는 맹인(盲人)이었던 것이다.
 
 
 第 2 章 회상(回想)(1)... 황연화(黃燕華)
 
 소년은 우울했다. 커다란 장원(莊園)의 후미진 구석에 홀로 쭈그려 앉은 십육 세 소년은 우울했다.
 헝클어진 머리, 나이보다 더욱 왜소해 보이는 몸집, 우울한 눈빛…….
 소년은 주위의 화려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봄날은 화창했고, 청량한 미풍에 꽃향기가 실려 왔다. 아담한 누각이 겹겹이 늘어져 있고 그 사이 사이로 온갖 꽃들이 울긋불긋 만발했다. 멀리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나 도화(桃花)가 만발한 뒤뜰을 지나 푸른 대나무가 가득 심어진 이 작은 뜨락에는 그런 화려함도, 흥겨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소년의 우울한 눈빛만이 사방을 잔잔한 물결처럼 가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곳에 있었군요. 얼마나 찾았다고…….”
 소년의 머리 위로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엷은 청의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황연화(黃燕華). 그녀는 부드럽고 인정이 많으며 아름다웠다. 그녀는 비단 이름이 나 있는 미녀일 뿐 아니라 또한 이곳, 황가장(黃家莊) 장주의 무남독녀였다.
 소년이 황가장에 온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작년 겨울, 유달리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떠돌이 거지였던 소년은 추위와 허기에 못 이겨 눈 속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를 구해주었다. 그가 바로 황가장의 장주인 황지원(黃知遠)이었다.
 그때부터 소년은 황가장에 붙어사는 신세가 되었다.
 황연화는 두 눈 가득 유유(柔柔)한 눈빛을 띄우며 소년에게 나직이 소곤거렸다.
 “왜 이곳에 있어요? 남들처럼 넓은 뜰에 나가 놀지 않고?”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포근해 마치 큰 누나가 어린 남동생을 꾸짖는 것 같았다.
 하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연화는 그 눈빛을 받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눈은 정말 이상해. 보면 볼수록 괜히 슬퍼져.’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꾹 참고 소년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잠시 그들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날씨가 좋지 않아요?”
 황연화는 대나무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에 은어(銀魚)같이 하얀 손을 비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소년은 그녀의 옥(玉)같이 깨끗하고 포동포동한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난 떠나야겠소.”
 그 음성은 나이답지 않게 무거워 보였다.
 황연화는 소년의 말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하나 소년은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황연화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떠나다니……. 이곳을요?”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연화는 갑자기 숨이 가빠지며 얼굴이 붉어져 왔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안돼요!”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소년은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연화도 자신의 목소리에 덩달아 놀라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좀 더 작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물었다.
 “왜 떠나려고 하지요?”
 그녀는 애가 타는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이곳이 싫어서 그래요?”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욱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싫어서……?”
 소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이런 곳이 어울리지 않소.”
 황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이곳의 어떤 점이 당신에게 어울리지가 않죠?”
 소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곳은 내게는 너무 화려하고 번잡하오. 그리고 부담스럽소.”
 황연화는 소년의 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왜 이리 떨리고 답답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년을 막아야만 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크나큰 힘이 그녀에게 소년을 붙잡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소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돼요! 가지 말아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지 말아요……. 나를 위해서라도…….”
 소년은 그녀의 눈을, 그 티없이 맑으면서도 이슬이 아롱거려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위해 가지 말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반쯤 쉰 것처럼 들렸다.
 황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난 당신을 보내고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느 새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고, 두 눈에서는 수정(水晶)같이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주처럼 반짝이는 순결한 소녀의 눈물.
 소년의 가슴은 세차게 격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당신은…….”
 그녀는 그의 손을 세차게 움켜잡았다.
 “내 마음은 내게는 없어요……. 이미…… 당신이 모두 빼앗아가 버렸어요…….”
 소년은 몸을 가늘게 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얼굴이, 온 몸이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소년은 착잡하게 웃었다.
 그보다 두 살이나 많은 그녀가……. 천만금을 쌓아놓고 사는 거부(巨富)의 무남독녀가……. 개봉(開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소문난 미녀가……. 부모도 없고 고향도 모르는 떠돌이 거지소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웃기는 일이군.’
 소년은 크게 소리쳐 웃고 싶었다. 하나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얼굴의 근육이 마비되어 버린 것처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목은 메어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고, 눈은 가물가물 물기가 번져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도 잘 볼 수가 없었다.
 그제야 소년은 어느 새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힘주어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쏴르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 잎사귀가 흔들리자 마치 파도 소리가 퍼지는 듯 했다.
 
 * * *
 
 쏴아아---!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침상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빗소리는 어둡고 우울했다. 소년의 마음속에도 어둡고 우울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떠나야 한다!’
 소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떠났어야만 했다. 만약 그랬다면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겠지만 아무튼 그는 별다른 마음의 고통 없이 떠날 수가 있었다.
 하나 이제는 이미 늦어 버렸다. 머리는 떠나라고 외치건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멍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오일 후 결혼을 한다. 하남성(河南城) 제일의 거부인 위가장(魏家莊)의 소장주와 혼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와 그녀는 맺어질 수가 없는 사이였다. 뿌리도 없는 떠돌이 소년과 부유한 집안의 무남독녀와는 어울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정(情)을 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자고로 다정(多情)하면 한(恨)이 남는 법이다. 만약에 그가 정녕 그녀를 사랑할 수 없고, 감히 사랑해서도 안 된다면 아무리 정(情)이 뼛속 깊숙이 파고든다고 해도 그 정을 뼛속에 묻은 채 떠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심정은 어떠한 것인가?
 갑자기 소년은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빗줄기는 안개처럼 그의 몸을 적셔왔다. 그는 차가운 빗방울이 온 몸에 맞도록 내버려 두었다.
 풍우(風雨)는 무정한 것이었다. 하나 몇 사람이나 무정의 맛을 알 수 있겠는가?
 홀연 그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웃었다. 빗발이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핥았다. 이상하게도 빗물의 맛이 찝찌름했다
 ‘나도 이 비처럼 무정할 수만 있다면…….’
 그때 누군가가 빗속을 뚫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였다.
 그녀는 비를 맞아 가녀린 참새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얼굴은 핼쓱하니 창백했고 눈가에는 거무스름한 자국이 생겨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하나 소년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상하리라 만치 굳어 있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우리 떠나요.”
 그녀는 불쑥 말했다.
 “이대로 같이 떠나요. 어디로든 당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나는 기꺼이 가겠어요.”
 그녀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은 채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안되오.”
 소년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했다. 황연화는 도발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안 된다는 거지요?”
 그녀의 당돌한 물음에 소년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그는 한동안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탄식을 터뜨렸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하나 황연화는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나에게는 당신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해요. 무엇보다도…….”
 그 말을 듣자 소년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연화는 물기 머금은 눈으로 원망스레 그를 바라보다가 와락 소리쳤다.
 “모르겠어요? 난 당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단 말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절규에 가까웠다.
 소년은 가슴 한 구석이 저미도록 아파왔다.
 ‘그녀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려 한다. 하지만 나는……, 나는 과연 그녀를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조금도 깜박거리지 않고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그의 슬프게 반짝이는, 뭔가 많은 말을 터뜨릴 것 같은 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허공에 엉켜 빗물과 함께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속으로 진정(眞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사랑해요.”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고 나직하게 소근 거렸다. 그 음성은 너무도 보드랍고 달콤해서 소년은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도 따사로움을 느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차디찬 손을 꽉 움켜잡았다.
 “같이 가는 거지요?”
 황연화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소년은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의 눈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언제?”
 소년은 웃었다. 처음에는 눈이 웃다가 그것이 차차 아래로 번져 마지막으로 입이 웃었다.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한없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애정(愛情)이었다. 못 견딜 고통이 있고 꿀 같은 달콤함이 있으며,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애정인 것이다.
 
 
 第 3 章 감각도(感覺道)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감각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예로부터 무예를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이 오감(五感)을 발달시켜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의 발달을 중요시했다. 빠른 눈과 예민한 귀는 무예의 기초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남들보다 뛰어난 상승무공(上乘武功)을 배우려는 자들은 오감을 발달시키는 것에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인간이 가지고는 있으나 표현할 수 없는 감각, 즉 육감(六感)의 존재를 확신했으며 그것을 더욱 더 중요시했다. 그들은 육감이 뛰어난 사람만이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다고 믿었다. 뛰어난 육감은 절정의 무공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졌고, 무공이 어느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은 육감을 발달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나 단지 그뿐일까?
 무도(武道)의 끝을 달려가는 무인(武人)들은 한 발자국 더 내딛고 있었다.
 그들은 끝없이 펼쳐지는 무도의 극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감이나 육감을 능가하는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그 ‘제삼(第三)의 능력’을 익혀야만 비로소 무공의 끝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사물을 움직이고 통찰할 수 있는 능력!
 그들은 이 ‘초감각(超感覺)’을 계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들 중 극소수는 이 ‘초감각’을 익히는 방법을 발견해 냈다.
 천기수사(天機秀士) 주자앙(朱紫昻)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주자앙은 자신이 발견한 방법을 ‘감각도(感覺道)’라 명명했다.
 주자앙의 감각도를 익히는 첫 번 째 방법은 우선 많이 맞는 것이다.
 
 파앗!
 채찍은 독사의 혓바닥보다도 더욱 매섭게 살갗을 찢고 들어왔다.
 하나 전옥심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니 낼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아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이곳은 사방이 은폐된 반경 오 장 가량의 커다란 밀실(密室)이었다. 전옥심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전신의 신경을 바짝 돋우고 다음 번 공격을 기다렸다.
 파르르...!
 주위의 공기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떨리더니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그의 등쪽으로 다가왔다. 그 기운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빨라서 미리 알고 있더라도 피하기가 불가능 했다.
 쫘악!
 다시 시뻘건 혈흔(血痕)이 그어지며 그의 등줄기에 뱀이 기어간 듯한 끔찍스런 자국이 생겨났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감각도를 수련시키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무형편(無形鞭)은 가늘고 질긴 수천 개의 비늘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휘두르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또한 이 채찍이 사람의 몸에 격중되면 비늘이 꼿꼿이 일어나 살갗을 후비고 들어왔다.
 외팔이 노인, 엽소천은 다시 영활하게 손목을 움직여 채찍을 휘둘러갔다.
 그의 채찍을 쓰는 수법은 신비롭고도 빨랐다. 몸의 다른 곳은 움직이지 않고 오직 손목만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때문에 전옥심은 그가 언제 채찍을 휘둘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엽소천의 팔은 분명이 하나이건만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수백 수천 가닥이 되는 것 같았다. 눈이 수십 개 달린 사람이라도 채찍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파앗!
 다시 전옥심의 이마에서 목까지 긴 혈흔이 그어졌다.
 엽소천은 전옥심이 속수무책으로 채찍에 맞고 있자 싸늘한 폭갈을 터뜨렸다.
 “이놈! 노부의 채찍은 무턱대고 움직인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포기하지 말고 마음의 눈[心眼]을 뜨란 말이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그는 전옥심의 몸에 다시 다섯 개의 혈흔을 남겨 놓았다.
 채찍에는 기이한 힘이 실려 있었다. 채찍이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인체의 중요한 혈맥(血脈)과 혈도(穴道) 부위였다. 채찍이 그의 몸에 감길 때마다 채찍의 끝에서 신비한 힘이 흘러나와 전옥심의 혈맥과 혈도를 강하게 단련시키고 있었다. 이 수법은 불경진맥(拂勁震脈)이라는 상승의 무공으로, 원래 상대를 상하게 하거나 죽이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일종이었다.
 하나 엽소천은 교묘하게 힘을 조절하여 그의 혈맥과 혈도에는 충격을 주지 않고 적당한 자극만을 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적(敵)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다. 전옥심의 몸에 혈흔이 한 가닥 생길 때마다 엽소천의 이마에도 굵은 땀방울이 매어 달렸다.
 하나 그는 쉬지 않고 손목을 움직였다.
 전옥심의 몸에 피가 나지 않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손을 멈추었다. 그는 혈인(血人)이 된 채 사지를 꿈틀거리고 있는 전옥심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놈! 오늘도 단 한 번도 피하지 못했구나. 노부 평생 네놈같이 둔한 놈은 처음 보았다.”
 하나 그의 땀에 젖은 얼굴에는 한 줄기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놈은 정말 천부의 무골(武骨)이다. 오늘은 세 번이나 채찍이 오는 부위를 알아차리고 몸을 움직여 엉뚱한 곳을 맞았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놈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형편의 종적을 알아차리다니……. 흐흐……, 이런 반사신경을 가진 놈이 있을까?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그는 벌레처럼 꿈틀대면서도 억지로 일어나려는 전옥심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열천(寒熱泉)에 몸을 씻어라. 한 시진 후에 다시 시작한다.”
 이어 그는 거대한 몸을 천천히 돌려 석실 밖으로 사라졌다.
 “허억... 허억...”
 전옥심은 온 몸이 칼로 저미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석실의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벽을 잡고 후들거리는 몸으로 비틀비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은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상처투성이였다. 하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절을 하던 그였으나 이제는 좀처럼 정신을 잃는 법이 없었다. 대신에 고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처음에는 제법 손속에 사정을 두던 엽소천이 지금은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손을 쓰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석실을 나와 뒤로 돌아갔다. 석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전옥심은 벽을 더듬으며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깊고 캄캄했으나 앞이 안 보이는 그로서는 좁은 이곳이 오히려 밖보다 행동하기는 편했다.
 동굴의 길이는 이십 여장. 신비스럽게도 둥굴에서는 열기(熱氣)와 냉기(冷氣)가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후끈한 열기와 차가운 냉기가 뒤섞여 짙은 안개를 뿜어냈다.
 동굴의 끝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못. 그것은 천하에서 하나밖에 없다고 알려진 한열천이었다.
 기이하게도 이 한열천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정도의 뜨거움과 함께 전신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움을 동시에 맛보아야만 했다. 너무 뜨거워서 차갑게 느껴지는 것인지,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차갑고 뜨거운 두 기운이 서로 엉켜 있는 두 마리 뱀처럼 연못 속에 잠겨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이 한열천은 인간에게는 다시없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그가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꿈에서도 그릴 무가지보(無價之寶)였다.
 이 한열천에 목욕을 하면 비단 막혔던 혈맥(血脈)이 트일 뿐 아니라, 전신에 뻗어 있는 수없이 많은 모세혈관 하나하나가 모두 뚫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전신에 퍼져 있는 모세혈관은 대개가 막혀있다. 이곳으로는 기(氣)가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 이 한열천에 목욕을 하게 되면 이 모세혈관들이 모두 타통 되어 기가 전신의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단 무공을 극한까지 익힐 수 있을 뿐 아니라 피부의 감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영민해져서 눈을 감고도 능히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 수가 있었다.
 전옥심은 피로 물든 옷을 조심스레 벗고는 천천히 한열천 안으로 들어갔다.
 상처 사이로 차갑고 뜨거운 기운이 쏟아져 들어와 참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다. 하나 익숙해서인지 금세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좋군…….”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연못 안에 편하게 몸을 뉘였다.
 곧, 한열천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하얗게 그의 몸을 감춰 버렸다.
 
  * * *
 
 인간의 의지(意志)란 무엇일까?
 의지는 인간의 생명 활동이다.
 힘은 의지를 통해서 생긴다.
 하나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단순히 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일까?
 인간의 의지는 표면의식(表面意識)일 뿐이다. 표면의식은 뇌가 발달함에 따라 후천적으로 발달되는 것이다.
 반면에 이 표면의식보다 수십 배의 활동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 활동을 좌우하는 것은 잠재의식(潛在意識)이다.
 잠재의식이란 인간이 생명과 함께 갖추어지는 선천적인 생명활동을 말한다. 인간의 활동은 얼핏 보아 표면의식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고 있으나, 의지에는 실행력이 없고 다만 방향을 제시할 뿐이며, 실행은 잠재의식이 주체가 되어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표면의식은 잠재의식과 충돌하여 때로는 인간의 활동을 무력하게 만든다. 상호 분열적 모순으로 본래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상호보완하게 만든다면 하나의 거대한 힘이 되어 인간의 능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가지 작용을 하나의 의지의 명령에 복종시킬 수 있다면, 인간의 능력은 상상 이상의 힘을 발현시켜 능력의 한계가 없어진다.
 이른바 '초감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중 표면의식을 움직이는 것은 대뇌(大腦)의 작용이지만 잠재의식의 중추는 복뇌(腹腦)이다.
 대뇌는 보이지만 복뇌는 인간의 몸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발견할 수가 없다.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복뇌는 분명 존재하며, 그 중요성이야 말로 인간의 모든 잠재의식을 총괄하는 엄청난 것이다.
 '초감각'의 완성은 이 복뇌의 단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주자앙이 완성한 감각도에는 이 복뇌를 단련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을 익히려면 두 가지 물건이 필요하다.
 질긴 노끈 하나와 날카로운 쇠침이 그것이었다.
 
 엽소천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몸을 길게 뉘인 채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때때로 불어오는 미풍이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하늘로 뻗친 수염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그는 사르르 눈을 감은 채 춘풍(春風)에 실려오는 꽃향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흐음……, 상쾌하군!”
 그는 힐끗 위를 올려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위에는 이상한 물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상한 물체는 사람이었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고, 올 봄으로 십칠 세가 되는 소년이었다.
 하나 그는 지금 전혀 소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술취한 노인 같았다. 피가 머리로 쏠려 술을 마신 듯 시뻘갰던 것이다.
 그는 물론 전옥심이었다.
 지금, 그는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다. 그의 발목에는 질긴 노끈 하나가 단단히 나무에 동여매져 있었다. 그 바람에 두 다리는 하늘로 향했고 머리는 땅을 바라봐야만 했다.
 때마침 따사로운 햇살이 삐끔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무언가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것은 쇠침이었다. 어른의 팔뚝만한 쇠침의 끝은 날카롭기 그지없어 가볍게 찔려도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그 쇠침은 전옥심의 머리가 닿을 위치에 꽂혀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쇠침에 머리를 찔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쯤 상반신을 쳐들고 있어야만 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얼마쯤 따분하고 심심하다면 허공에 매달린 채 이런 자세로 잠시만 매달려 있어보라. 아마 두 번 다시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자세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자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 일각(一刻)도 이런 자세로는 견디지 못한다.
 하나 이 자세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 피가 머리로 쏠려 대뇌에 신선한 산소를 잔뜩 공급해 주어 대뇌의 기능을 극대화 시킬 뿐 아니라, 복압(腹壓)이 증대되어 복뇌가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간단해 보이는 방법이 감각도의 두 번째 훈련이었다.
 하나 이 훈련은 무형편으로 맞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전옥심에게 안겨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훈련보다도 지독한 것이었다.
 지금 전옥심은 한 시진 째 이런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목욕을 해도 서너 번은 하였을 만큼 흠뻑 젖어있었다.
 힘든 사람이 있으면 편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엽소천은 전옥심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작작하게 나무 그늘에 누워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가끔 심심해지면 그는 전옥심의 땀에 찌들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리치기도 했다.
 “이놈아! 호흡을 잊어버리지 마라. 호흡을 흐뜨러트리면 그만큼 더 힘들어 지니까.”
 봄날의 한낮은 제법 햇살이 따사로웠다.
 전옥심은 노끈에 묶인 발목이 시큰거리며 저려왔다. 때마침 그의 얼굴은 태양을 향하고 있어 따가운 햇살은 그의 이마와 코, 뺨 등을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런데 실은 이것도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태양을 마주보며 호흡해야만 복뇌에 잠재된 태양신경총(太陽神輕叢)이 발달하며, 태양신경총이 발달해야만 복뇌도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에 두 시진씩 꼬박 이런 자세로 매달려 있다 보면 전신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또한 이 방법이 감각도를 익히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힘드냐?”
 엽소천은 능글맞게 웃으며 전옥심을 올려다보았다.
 전옥심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입을 열 힘도 없었다. 그에게는 일각일각이 지옥과도 같았다.
 하나 엽소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느물거렸다.
 “사실 이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지. 하나 알면서도 이것을 익히려는 사람은 없다. 너무 무지막지하기 때문이지. 너 같은 독종(毒種)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히죽 웃으며 하나 남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넌 정말 독종이다. 그건 노부가 보증하지.”
 그는 전옥심이 듣던 말던 계속 혼자 떠들어 댔다.
 “그래도 노부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아암……. 노부에 비할 수는 없지. 노부가 얼마나 독종이냐 하면 옛날에 우문양(宇文陽), 그 빌어먹을 자식이 내 팔을 잘랐을 때도 난 그 잘려진 팔을 그 녀석의 입속에 처넣었지. 그 덕분에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흐흐. 그때의 놈의 기절초풍하는 꼴이라니…….”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한참을 킬킬 거리다가 잠시 기침을 했다.
 “쿨룩, 쿨룩! 제기랄! 하도 오랜만에 웃었더니 목이 다 메이는군. 네놈도 노부같은 독종이 될 소질이 다분히 있는 놈이다. 벌써부터 재질이 엿보이는 걸? 네놈이 장차 무림에 나가면 볼만한 구경거리가 벌어질 것이다. 흐흐, 그때 네놈이 우문양, 그놈을 만나 노부의 복수를 할 것을 생각하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군.”
 그는 하나 남은 팔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때 네놈은 시간이 나는 대로 중원제일루에 들러 보아라. 아니 꼭 가봐야 한다. 네놈이 그곳에 가게 되면 아무나 붙잡고 노부의 이름을 말해보아라. 흐흐, 모두들 노부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네놈을 극진히 모실 테니까. 당시 무림에서 출입할 때마다 중원제일루의 모든 점원들의 환송을 받은 자는 노부 외에는 없었다. 우문양 같은 피라미는 죽어도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지. 흐흐흐…….”
 전옥심은 이 말을 꼭 여든 두 번째 들었다.
 하나 그는 싫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창창한 앞날이 있지만 엽소천에게는 오직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화려한 명성에 살았던 과거…….
 미래를 가지고 있는 청년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노인을 탓할 수 없다. 노인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옥심은 알고 있었다.
 엽소천이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오직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더욱 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단지 전옥심은 지금 너무 힘이 들어 짜증이 날 뿐이었다.
 한낮의 태양은 끝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 * *
 
 인간의 몸은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몸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어떨까? 신체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자기 것이면서도 자기의 의지로는 근육 하나도 좌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몸이다.
 근육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의 명령이 아니라 신경의 작용인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고 믿고 있는 부분도 신경과 근육의 조화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인체에는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귀라든가, 코, 기공(氣孔), 내장기관 등은 인간의 의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지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불수의근(不隨意筋)을 자신의 의지(意志)의 지배(支配)하에 두게 된다면, 그의 능력은 그야말로 뜻이 움직이는 곳에 몸이 있는 의행일치(意行一致)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고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하게 될 것이다.
 감각도의 마지막 부분은 이 불수의근의 단련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특수한 행법(行法)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다.
 그럼 피보다 진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천일신수(天一神水)였다.
 천일신수는 물의 일종이지만 그 성질은 서로 판이했다.
 우선 천일신수는 물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한 방울의 천일신수는 커다란 독에 가득 찬 물보다도 훨씬 무거웠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천일신수를 마시면 살 수가 없다. 천일신수가 몸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무게 때문에 내장을 비롯한 혈맥들이 모두 터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일신수는 천하의 어떤 독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었다.
 다행히도 천일신수는 세상에서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천일신수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나 이곳만은 예외였다.
 이곳에는 비단 천일신수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양도 엄청나게 많았다. 사람의 키보다 더 큰 거대한 욕조 속에 천일신수가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단 한 방울도 구하기가 힘들다는 천일신수가 이렇게 많이 있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전옥심은 그런 면에서 행운아(幸運兒)였다. 그는 비단 천일신수를 직접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천일신수가 가득 담긴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정좌(正坐)를 한 채 욕조의 바닥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의 전신은 천일신수에 잠겨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욕조에 들어가는 즉시 천일신수의 무게에 짓눌려 짜부라 들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전옥심은 달랐다. 그는 비단 몸이 짜부라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숨을 쉬지 않고도 그 속에서 견딜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특수한 행공법 때문이었다.
 이 행공법은 주자앙이 불수의근을 단련하기 위해서 특별히 창안한 것으로, 이름하여 ‘제륜통각귀진법(臍輪統覺歸眞法)’이라 했다.
 이 행공법을 익히게 되면 숨을 쉬지 않고도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몸 자체에 기이한 반력(反力)이 생겨 천일신수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륜통각귀진법’의 요체는 내관(內觀)이었다. 내관은 강력한 관념력(觀念力)으로 잘못된 체내의 악기(惡氣)를 없애고 생명의 협력을 얻어 잠재력을 의지에 복종시키는 방법이다.
 불수의근이 인간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에는 외력(外力)이 가해지면 저절로 반응하는 자체의 반력(反力)이 있다.
 천일신수는 무거워서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신체의 각 부분이 골고루 강한 압력을 받는다. 때문에 자발적으로 몸의 각 부분에 반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예전에는 미처 사용치 못했던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자극을 받아 반응을 하게 되고 점차 의지의 조정에 따르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천일신수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것을 해결한 것이 바로 ‘제륜통각귀진법’이었다.
 덕분에 전옥심은 천일신수에 몸을 담그고 불수의근을 단련할 수 있었다.
 하나 ‘제륜통각귀진법’이 천일신수의 무게마저 제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온 몸으로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이미 무형편으로 인해 피부가 강철같이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그의 피부는 아주 쭈글쭈글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한열천에 목욕을 해서 모세혈관이 모두 트이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모두 터져버렸을 것이다.
 천일신수는 무색투명한 액체였다.
 욕조도 투명했다.
 그래서 엽소천은 욕조의 밖에서도 전옥심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엽소천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이따금 가늘게 몸부림을 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엽소천은 마치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 했다.
 ‘정말 지독한 녀석이군. 무척 고통스러울텐데 신음조차 내지 않다니.’
 그의 짐작대로 전옥심은 지금 머리털 하나하나가 빠지는 듯 했고 피부가 통째로 뜯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입을 열어 마음껏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나 만일 그랬다가는 천일신수가 목안으로 들어와 ‘제륜통각귀진법’이 제 아무리 신묘한 행공법이라 해도 그의 몸은 당장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튼 참는 수밖에 없었다. 감각도를 익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참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 아직까지 아무도 감각도를 익힌 사람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각도는 무도(武道)와는 또 다른 것이다. 이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감각' 자체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시킨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오직 끝없는 고통을 참으면서 직접 몸으로 익히는 방법 외에는 없다.
 전옥심이 과연 이러한 고통을 참고 감각도를 완성할 수 있는 지는 오직 신(神) 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第 4 章 회상(回想)(2)... 주자앙(朱紫昻)
 
 
 간밤에 내린 비로 강물은 많이 불어 있었다. 그들은 불어난 강을 보며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황가장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낙석진(落石津)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강물에 부닥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요?”
 황연화는 안타깝게 넘실대는 강물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쯤 황가장에서는 그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쩌면 분노한 황지원이 사람을 이끌고 그들을 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금시라도 뒤편 언덕 너머로 그들의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소년은 그녀보다는 좀 더 침착했다.
 나이는 그녀가 더 많았지만 소년은 항상 그녀보다 어른스러웠다.
 사실 그로서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하나 그는 그녀를 불안에 떨게 놔둘 수가 없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강물이 불어났어도 우리를 태우고 이곳을 건너갈 배가 한두 척쯤은 있을 것이오.”
 황연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스럽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나 배는커녕 주위에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차츰 소년의 얼굴에도 어두운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강에는 노을이 비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푸르게만 출렁거리던 강물이 어느새 노을에 물들어 강은 붉은 바다로 변해 버렸다.
 그때 저 멀리서 작은 조각배 하나가 나타났다. 배는 넘실거리는 강물을 타고 이쪽 기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황연화는 펄쩍 뛰며 환성을 질렀다.
 “저기 배가 와요!”
 그녀는 소년을 재촉해 급히 배가 오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배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배에 탄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배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 있었다.
 소년과 황연화는 초조히 배가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들처럼 기이한 사람은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늙었다는 것은 별로 기이할 게 없었다. 단지 기이한 것은 그의 다리가 하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없는 것은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눈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검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비쩍 마른 노인이 외다리로 서서 노를 젓는 모습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나 배에 앉아 있는 사람은 외다리 노인보다 더욱 기이했다.
 그는 키가 어린아이보다 작았다. 소년은 이렇게 작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머리나 몸집은 보통 어른과 똑같았다. 소년은 자세히 보고서야 그가 두 다리가 없기 때문이지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그의 기이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볼 때보다 그는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두 다리가 없는 괴인은 팔도 하나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뿐인가?
 눈도 외다리 노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왼쪽 팔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인간이 이런 몰골을 하고 살아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아주 평화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미목이 청수했고 검은 수염이 탐스럽게 입술을 덮고 있었다. 사십이 조금 넘어 보이는 깨끗하고 영준한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띄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 중년인은 예전에 많은 여자의 환심을 샀던 남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아무리 남자에게 눈이 먼 여자라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소년은 그 중년인을 단 한번 밖에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고, 또 안타까워서 차마 볼 수 없었다.
 황연화는 소년의 팔을 꼭 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윽고 배는 기슭에 당도했다.
 소년은 비록 그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배로 다가갔다.
 “이 배를 팔지 않겠습니까?”
 외다리 노인은 노를 든 채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그 처량하기 짝이 없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외눈으로 소년과 황연화를 바라보며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이 배를 타려고 하느냐?”
 그는 대뜸 반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년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 부드러웠고,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이 아주 온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소년은 노인 대신 중년인이 그들의 말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런 불구자일수록 다른 사람과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말하는 것을 꺼려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려하는 것이다.
 중년인은 소년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원래 남들 앞에 나서서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그 버릇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소년은 갑자기 전신에 찬물을 끼얹은 듯 등에서부터 발끝까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중년인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평생 이런 몰골로 살아가야할 사람이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탄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년인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나에게 탄복할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몸이 온전하지 못하지만 세상에는 몸보다 더 중요한 마음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많이 있지. ”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찬찬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침착해 중년인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너는 아직까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 배를 타야 합니다. 당신들에게 이 배가 필요치 않다면 저희들에게 팔지 않겠습니까?”
 중년인은 빙긋 웃었다.
 “배를 팔라니.... 보아하니 너는 제법 돈이 많은 것 같구나.”
 그 말에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때 황연화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돈은 제게 있어요. 뱃삯을 말씀하시면 얼마든지 치러 주겠어요. 그러니 저희들을 강 건너로 태워 주시기 바라요.”
 중년인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물론 너희들을 강 건너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수 있다. 하나 그러려면 뱃삯이 약간 비싸구나.”
 황연화는 재빨리 말했다.
 “얼마라도 상관없어요.”
 중년인은 다시 웃었다.
 “보아하니 오늘 난 운(運)이 무척 좋구나. 내가 부르려는 값은...”
 바로 그때였다.
 히히히힝.......!
 요란한 말울음을 소리가 들르며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언덕에 한 떼의 인마(人馬)가 나타났다.
 소년과 황연화는 그들을 보자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인마의 선두에서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말을 질주하고 있는 인물을 본 것이다.
 그는 온화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는 황가장의 장주인 황지원이었다. 보통 때 그의 얼굴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소소야(笑笑爺)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나 지금 질풍처럼 말을 타고 달려오는 그의 얼굴은 마치 철갑을 씌운 듯 시퍼렇게 굳어 있었다.
 황연화는 사색이 된 채 중년인에게 급히 말했다.
 “어... 어서 우리들을 태워 주세요. 값은 달라는 대로 다 드릴 테니...”
 중년인은 달려오는 인마와 그들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급하다면 왜 빨리 배를 타지 않느냐?”
 소년과 황연화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급히 배에 올라탔다.
 그러자 말없이 서있던 외다리 노인이 다시 노를 저어 배를 강 가운데로 몰아갔다.
 “서.... 서라....!”
 달려오던 황지원은 이것을 보자 다급해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고래고래 외쳤다.
 “뱃사공...! 배를 멈추어라! 멈춘다면 은화 천 냥(千倆)을 주겠다!”
 중년인은 그 소리를 듣자 피식 웃었다.
 “이거 갑자기 돈복이 마구 굴러들어오는군. 천 냥이라면 보통 사람은 평생가도 만져보기 힘든 돈인데...”
 황연화는 그의 마음이 변할까봐 급히 말했다.
 “이대로 가요. 천 냥이라면 제게도 있어요.”
 “하하... 이거 재신(財神)이 옆에 있는 줄을 미처 몰랐군.”
 그는 외다리노인을 쳐다보았다.
 “장노인(張老人)! 배를 강 건너로 대시오.”
 외다리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답지 않게 힘찬 몸짓으로 노를 저었다.
 황지원은 강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외쳤다.
 “연화야....!”
 그의 음성은 멀리 강둑을 타고 어두워오는 강물 위로 애타게 울려 퍼졌다.
 그 애절한 음성을 듣자 황연화의 눈에는 뿌옇게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버님, 불효여식을 용서하세요.’
 그녀는 소리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두 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소년은 말없이 그녀에게 다갔다. 그는 그녀의 지금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살짝 안은 채 고개를 쳐들게 했다. 그녀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말없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욱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 미안해요.”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연화!”
 그때 갑자기 그들 뒤에서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이거 심각한 분위기를 깨서 안됐지만 이제 슬슬 흥정을 해야겠군.”
 그들은 고개를 돌려 입가에 미소를 띈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황연화는 그제 서야 소년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깜박 잊었군요. 당신은 가격을 부르세요.”
 그녀는 집을 떠나올 때 상당한 양의 금은보화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중년인이 어떤 값을 불러도 지불할 자신이 있었다.
 “너희들은 내가 어떤 것을 요구해도 달라는 대로 준다고 했지?”
 중년인은 기이하게 웃으며 물었다. 황연화는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 어서 말씀하세요.”
 하나 중년인은 소년을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너는 그녀가 값을 치르게 놔둘 작정이냐?”
 소년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갑자기 엄숙한 안색이 되었다.
 “너는 남아 대장부이다. 그런데도 아녀자의 뒤에 서서 모든 일을 그녀에게 의지하려 하느냐?”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나 그는 중년인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뒤에 숨지 않았습니다.”
 중년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마땅히 네가 계산을 해야 되지 않느냐?”
 중년인의 말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다. 사실 소년은 빈털터리라 단 일전 한 푼도 그에게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중년인은 이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부득부득 그에게 대가를 치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침묵을 지키자 중년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남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나섰을 때 내가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내가 그녀에게 몸을 요구하면 너는 끝까지 그녀를 지킬 수 있겠느냐?”
 이 말에 소년은 흠칫 놀랐다.
 중년인은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너는 내가 이런 몸이라 그녀를 범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나 저 노인은 비록 다리가 하나밖에 없지만 다른 곳은 멀쩡하다. 나는 그를 시켜 그녀를 범하게 할 수도 있다.”
 소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이 일은 그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몸이 불편하고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설마 아직도 여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중년인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너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일이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설사 지불할 능력이 없더라도 그녀 대신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제야 소년은 그의 뜻을 깨달았다.
 이 중년인의 생각하는 양식은 다소 이상한 데가 있지만 상대방이 반발을 할 수 없게끔 하는 일종의 깊은 철학(哲學)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육신(肉身)은 비록 불구이지만 생각은 대다수의 사람들 보다 더 깊고 영민했다.
 소년은 이 중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귀하는 내게 요구하십시오. 나는 무슨 일이든 귀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중년인은 빙긋 웃었다.
 “너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니 제법 용기가 있구나. 어떤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법이 없지. 하지만 이번에도 너는 말을 잘못했다. 너는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소년은 다시 어리둥절하여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너에게 그녀를 데리고 온 길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
 소년은 다시 멍해졌다.
 비단 소년뿐만이 아니라 황연화의 고운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만약 중년인의 말대로 된다면 그들로서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소년을 바라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에만 내 명령을 따르겠다고 말해야 한다.”
 소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어리석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한데 이 중년인을 만난 후로는 그는 자신이 아주 어리석은 바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비단 어리석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총명했다.
 단지 중년인이 너무 뛰어난 것이다. 그 때문에 소년이 어리석게 보일 뿐이었다.
 중년인은 다시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너는 알겠느냐?”
 소년은 길게 탄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떤 명령이든 내려주십시오.”
 “하하... 너는 이제야 말을 제대로 하는구나. 너는 내가 네게 어떤 명령을 내릴지 아느냐?”
 소년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간단한 것이다. 너는 내 앞에 와서 누워라.”
 소년은 다시 멍해졌다.
 이 중년인은 너무도 기이해서 그는 중년인의 행동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무슨 엄청난 요구라도 해올 것처럼 떠들더니 기껏 한다는 것이 그의 앞에 와서 누으라니...
 소년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귀하의 요구는 겨우 그것입니까?”
 중년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 너는 단지 배가 저쪽 강가에 닿을 때까지만 내 앞에 누워있으면 된다. 내 요구는 단지 그 뿐이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시선으로 중년인을 응시했다.
 “당신은 무척 이상한 사람이군요.”
 중년인은 다시 피식 웃었다.
 “사실 나는 왕왕 그런 말을 듣는다.”
 그는 마치 귀중한 도자기를 감상하듯 소년을 응시했다.
 “하지만 너는 남들이 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모르겠지?”
 소년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이상하다구요?”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도 이상한 사람이다. 최소한 나의 눈에는 너도 나 못지않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다.”
 소년은 여전히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그런데도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굴강(屈强)하다. 아마 너 정도의 나이에 그런 침착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기 드물 것이다.”
 소년의 표정은 울적하게 변했다.
 그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나이답지 않게 노련해 보인다는 것을.
 하나 그것은 결코 좋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어려서부터 떠돌이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칫밥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끼니와 잠자리 걱정으로 지내다보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침착성을 풍기는 것이다.
 지난 과거 일을 생각하니 그는 돌연 가슴이 아팠다. 그만큼 그의 지나간 과거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쓰라린 추억들뿐이었다.
 중년인은 소년의 기색을 살피고 있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이냐?”
 그제야 소년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서서 그의 앞에 길게 몸을 뉘었다.
 중년인은 누워 있는 그를 보며 돌연 엄숙하게 말했다.
 “너는 마음을 편히 하고 몸을 길게 쭉 뻗어라.”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다.
 갑자기 중년인은 하나 남은 팔로 그의 전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너무도 쾌속해 소년은 피할 생각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중년인은 그의 전신(全身)을 핥듯이 샅샅이 더듬고 있었다. 그 수법의 기묘함과 능숙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찬탄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 그는 소년의 몸을 더듬을 뿐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외다리 노인은 그 모양을 힐끗 보더니 묵묵히 노를 저었다.
 강물은 어두워져 오는 암천(暗天)을 따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어느새 배는 강기슭에 도착했다.
 그제야 중년인은 손을 멈추었다.
 “됐다.”
 소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가도 되겠습니까?”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소년은 황연화의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겨 배를 떠나갔다. 황연화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소년이 잡아끄는 바람에 그들에게 미안해하는 눈빛을 던지고는 총총히 그를 따라갔다.
 중년인은 배에 앉은 채 묵묵히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부드러움과 함께 무언가 번쩍하는 빛이 담겨있었다.
 중년인은 그들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천하는 역시 넓구나.”
 그의 말은 혼잣말처럼 나직했으나 외다리 노인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외다리 노인은 몸을 가늘게 떨다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설마하는 의혹과 격동이 가득 차 있었다.
 중년인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감각도를 익힐 인재가 천하에는 없다고 생각할 뻔 했소. 하나 역시 천하는 넓고, 인재는 남아 있구려.”
 외다리노인은 격동하는 기색으로 그를 보고 있더니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중년인은 온화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로 격동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나 그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의 음성도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주자앙(朱紫昻)아! 주자앙아! 너는 이제야 네 꿈을 이루어 줄 사람을 만났구나......”
 
 
 第 5 章 천불상(千佛像)
 
 
 사람이 자신이 목표로 했던 일을 막상 완성하게 되면 오히려 허탈해진다.
 엽소천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의 임무는 전옥심으로 하여금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감각도를 익히게끔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 일에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달리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조련사라 할만 했다.
 지금 그는 멍한 시선으로 석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벽은 거대했다. 그리고 석벽에는 빽빽하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불상(佛像)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수는 정확히 구백구십구 개였다. 지금 전옥심이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는 불상이 완성되면 그 수는 천 개가 된다. 석벽은 이른바 천불상(千佛像)이 되는 것이다.
 천개 째의 불상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는 엽소천의 얼굴은 복잡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기분이 좋은 것인지 울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년 반(二年半) 동안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심혼(心魂)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전옥심을 몰아왔다. 그는 최선을 다했으며, 이제 그 결과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나 그의 마음은 생각했던 것만큼 흥분되거나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착잡한 허탈감이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이제 내 할일은 다했다.’
 그는 울적한 시선으로 전옥심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년 반 동안 전옥심은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단지 좀 더 나이를 먹고 좀 더 침착해졌을 뿐이었다.
 따악.....딱!
 망치로 석벽을 쪼개는 그의 손길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그에게서는 엽소천이 느끼는 것 같은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감겨진 태엽이 풀리는 자동인형처럼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몸 안에 인류가 최초로 개발해낸 가공할 능력이 잠재(潛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신체의 유일한 특징은 우람한 팔의 근육뿐이었다. 그것은 천불상을 조각하는 지난 세월동안 자연적으로 그의 몸에 형성된 것이었다.
 천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감각도를 익히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하나 전옥심에게는 두 가지 일의 비중이 거의 같았다.
 그것은 그를 엽소천에게 보낸 사람의 생각이기도 했다.
 전옥심은 그 사람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그가 천하제일의 천재(天才)이며, 자신을 ‘초인(超人)’으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이 천불상을 조각하는 진실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도 오직 그뿐이었다.
 천불상과 감각도는 그가 목표로 하는 ‘초인’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훈련에 불과했다. 그 ‘초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 궁극적인 형태는 무엇인지도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엽소천은 단지 그의 과업을 도와주는 조수(助手)일 뿐이며, 전옥심은 그 실험물에 불과했다.
 지금 전옥심은 망치와 정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천불상은 완성되었다.
 반경 수십 장의 거대한 석벽에 뻑뻑하게 새겨진 천개의 불상!
 어떤 것은 손바닥만큼 작았고 어떤 것은 어른의 몸통만큼이나 컸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성한 것도 있었고, 섬세한 손길로 다듬은 뛰어난 작품도 있었다.
 이 모두가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나 이것은 모두 한 사람의 피와 땀의 결정(結晶)이었다.
 전옥심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의 키는 헌칠했고, 머리는 더부룩했다. 양손에 정과 망치를 든 채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엽소천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엽소천은 그가 무척 고독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옥심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다만 전옥심을 수련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제 그것을 달성했다. 그는 전옥심에게 무언가 다정한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극한(極限)의 고통을 참아온 그에게 칭송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네 녀석이 약속을 지켰으니 노부도 약속을 지키겠다.”
 전옥심은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나 그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그가 말하는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엽소천을 처음 만난 날, 엽소천은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던 것이다.
 “너는 노부에게서 앞으로 지옥보다 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하나 만일 네가 그 모든 고통을 참고 천불상과 감각도를 완성한다면 노부는 네놈이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
 그 당시 전옥심은 그의 말을 반신반의했었다.
 하나 이제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막상 전옥심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비단 기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슴 한 구석이 아련히 저려오고 있었다. 그 약속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진정한 대장부(大丈夫)는 자신이 한번 입으로 뱉은 말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엽소천은 누가 뭐래도 당당한 대장부였다. 전옥심은 그를 졸장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엽소천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옥심은 가슴이 아픈 것이다.
 자신에게 광명(光明)이 오면 다른 사람에게는 암흑(暗黑)이 오기 때문이었다.
 
 
 第 6 章 회상(回想)(3)... 위종산(魏鍾山)
 
 숲은 점점 깊어졌다. 그곳에서 그들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길을 잘못 왔나 봐요. 벌써 마을이 나올 때가 훨씬 지났는데...”
 황연화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벌써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인가(人家)를 발견할 수 없었다. 비가 온 뒤라 하늘의 별빛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때 홀연 멀지않은 곳에서 등잔불이 보였다.
 황연화는 반색을 하며 소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저것 봐요. 사람이 살고 있나 봐요. 어쩌면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을지 몰라요.”
 소년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이런 깊은 밤중에 등잔불을 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소년은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등불이 반짝이는 곳으로 다가 갔다.
 등불은 낡은 재신묘(財神廟)의 앞에 걸려 있었다.
 이것을 보고 소년의 마음속에는 더욱 짙은 의심이 피어올랐다. 이 등불은 마치 그들을 유인이라도 하듯 잘 보이는 곳에 걸려있는 것이다.
 재신묘는 낡았다. 지붕은 헐어 금시라도 무너질 듯 했고, 어스름한 등불을 받아 한층 음산해 보였다. 그들은 조심조심 재신묘 안으로 들어갔다.
 재신묘에는 재신상(財神像)이 있었다. 그 시커먼 얼굴의 흑호(黑虎)를 타고 있는 재신상은 벌써 금칠이 벗겨지고 입고 있는 옷도 누더기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재신상의 아래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잘 알아볼 수 있는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낡디 낡은 재신묘에 있는 사람이 질이 좋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몹시 기이했다. 안타깝게도 그 백의인은 등을 돌리고 있어 소년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소년은 잠시 침음하다가 황연화에게 간단히 있으라는 눈짓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말씀 좀 묻겠소.”
 하나 백의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몸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은 더욱 기이함을 느끼고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실례지만 근처에 인가(人家)가 있으면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백의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소년은 혹시 그가 귀머거리이거나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황연화는 백의인의 등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소년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상한 사람이군요.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백의인에게 한 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혹시 이 근처에...”
 그때 갑자기 백의인이 불쑥 말했다.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니 두 번씩 말할 필요는 없소.”
 황연화는 깜짝 놀라 다가서던 몸을 급히 멈추었다. 그녀는 약간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요?”
 백의인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건 당신들이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몰랐기 때문이오.”
 황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그렇소.”
 이렇게 깊은 밤 외진 곳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물어 보았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에요?”
 문득 백의인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공(恩公)을 배신한 패륜아(悖倫兒)와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를 안 가리는 철부지요.”
 그 말에 황연화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년은 눈을 반짝 빛내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는 불쑥 물었다.
 “당신은 그들이 이 길로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소?”
 그의 음성은 여전히 침착해 조금도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백의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비단 그들이 이 길로 오리라고 확실할 뿐 아니라 내가 그들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있소.”
 소년은 백의인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소?”
 백의인은 문득 나직하게 웃었다.
 “그건 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들이 바로 당신들이기 때문이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백의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홱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의인의 키는 무척 헌칠했다. 이목은 수려했고 눈빛은 싸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장검이 비스듬히 걸려있었고, 가슴에는 선명한 매화 다섯 송이가 새겨져 있었다.
 소년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백의인이 자신과는 생면부지의 인물임을 확인하고는 차분하게 물었다.
 “당신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백의인은 황연화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 뼈골이 시릴 듯한 싸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다.”
 그의 말투는 갑자기 거칠어졌다.
 하나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백의인은 소년의 침착한 태도가 몹시 의외인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매화검(梅花劍) 오상(吳常)이란 사람이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전에 만난 일이 있소?”
 “없다.”
 소년은 이번에는 황연화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 사람을 알고 있소?”
 황연화는 백의인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때 백의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희들을 모른다. 그렇지만 나와 친한 친구 한 사람이 너희들을 알고 있지.”
 “친구라고요?”
 소년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 그는 비단 너희들을 잘 알뿐만 아니라 꼭 만나고 싶어 한다.”
 그 말에 소년과 황연화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어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그 친구는 누구요?”
 백의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친구는 위종산(魏鍾山)이라 한다.”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백의인의 신형이 희끗거렸다. 소년은 눈앞에 허연 그림자가 번뜩이는 것을 느끼고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번개같이 소년을 제압한 백의인, 오상은 천천히 뒤를 보며 소리쳤다.
 “위형(魏兄), 이제 그만 나오시오.”
 어둠속에서 한 인영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는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금의(錦衣)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오상보다 약간 어려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였는데, 준수한 얼굴에 입술이 여자처럼 빨갰다. 코는 오똑했으나 그 끝이 약간 꼬부라져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게 했다.
 그를 보자 황연화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나타난 금의청년은 황연화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잘 있었소, 화매(華妹)?”
 황연화는 몸을 부르르 떤 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큰 두려움에 그녀의 피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금의청년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누구보다도 아껴왔다고 자부했는데, 당신은 그런 나를 실망시켰소. 설마 나를 버리고 저 거지 녀석과 좋아 지낼 줄은 몰랐소.”
 그의 눈빛은 음성 만큼이나 싸늘했다.
 황연화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는 눈앞의 이 금의청년이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금의청년은 그녀의 정혼자(定婚者)였다. 위종산은 이미 십 년 전에 그녀와 혼약하기로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무인(武人)은 아니지만 많은 무림고수들을 친구로 사귀고 있었다. 그의 집은 하남성(河南省)에서도 첫째둘째를 다투는 거부(巨富)의 집안이었다.
 그는 앞뒤가 깨끗하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으나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운 맹수로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성질은 왕왕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황연화는 자신보다도 소년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들어간 이상 소년의 운명이 어찌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종산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평생 내가 누구에게 뒤진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외모나 학식, 그리고 가문(家門)으로도 어느 누구보다 낫다고 자부했었다. 그건 여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묵묵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을 싸늘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매가 나를 사랑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결혼날짜까지 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건 내 정혼녀인 그녀가 정체도 확실히 모르는 떠돌이와 눈이 맞아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 다가오는 그 치욕감...! 나는 그것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감히 나를 버리고 달아나다니... 내가... 이 위종산이 떠돌이 거지녀석보다 못하단 말인가? 나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과 치욕스러움에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거칠게 쓰러져 있는 소년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켰다.
 “흐흐... 이 위종산에게 생애 최대의 모욕과 수치심을 안겨준 놈. 나는 그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꼭 그놈을 붙잡아 내가 당한 고통만큼 놈에게 베풀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 것이다. 흐흐...”
 그의 눈은 끔찍한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피라미보다 변변치 못한 놈이로군. 흐흐... 그녀가 설마 이런 놈을 좋아할 줄이야....”
 소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무겁게 탄식을 했다.
 “원래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틀린 법이오.”
 소년의 침착한 태도가 위종산의 노화를 더욱 부채질 했다.
 “생각하는 것이 틀리기 때문이라고? 흐흐...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그는 소년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한자 한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어디 네놈이 조금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보자.”
 그는 한 손을 불쑥 오상에게 내밀었다.
 “오형. 그것을 내게 주시오.”
 오상은 약간 머뭇거렸다.
 “자네는 꼭 그것을 해야겠나?”
 위종산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오형. 내 성질을 알고 있지 않소? 난 꼭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오상은 가늘게 탄식하더니 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위종산에게 건네주었다.
 “아!”
 황연화는 그것을 보더니 안색이 대변해 짤막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것은 끝을 날카롭게 깍은 두 개의 나무못이었다. 굵기는 손목만 했고, 길이는 한 자 가량 되었다.
 위종산은 두 개의 나무못을 받아들고 흉악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감히 내 여자를 빼앗아 가고 내 자존심에 흑칠을 하다니...”
 황연화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아... 안돼요!”
 하나 그녀의 가녀린 몸은 곧 오상에게 붙잡혔다.
 위종산은 더욱 싸늘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흐흐... 화매! 이것은 모두 저놈이 자초한 일이오. 나는 평생 누구에게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소. 내 면목은 이제 땅에 떨어져 다시는 일으켜 세울 수가 없게 되었소. 정혼자를 빼앗긴 놈이 세상에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니겠소?”
 황연화는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그러니 제발 그를 그냥 놓아주세요.”
 하나 이 말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흐흐... 그렇게도 이놈이 좋단 말이지?”
 위종산은 음산하게 웃더니 갑자기 나무못 하나를 소년의 한쪽 눈에 깊게 쑤셔 넣었다.
 푸욱!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며 소년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아악!”
 황연화는 이 끔찍한 광경을 보자 그대로 실신하고 말았다.
 위종산은 한쪽 눈에 커다란 나무못이 꽂힌 채 비틀거리고 있는 소년을 흉악하게 노려보았다.
 “흐흐... 고통스러운가? 하나 그걸로 내 수치심을 씻을 수는 없지.”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나머지 한 개의 못을 소년의 다른 한 눈에 박아 버렸다.
 “크으으...”
 소년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전신이 학질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떨려왔다. 그의 양 눈에서는 시뻘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입가로는 선혈이 주르르 흘러나와 혈인(血人)을 방불케 했다.
 “눈... 내 눈...”
 소년은 몸부림치며 두 손으로 눈을 부여잡았다. 하나 나무못은 뽑혀지지 않았다. 그 처참한 모습에 기절한 황연화를 안고 있던 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려 버렸다.
 위종산은 득의양양하게 소년의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크하하... 이놈! 이제 나를 화나게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 알겠지?”
 그는 커다란 나무못 두 개를 얼굴에 꽂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화매는 오일 후 내 여자가 될 것이고, 곧 네놈 따위는 잊어버릴 것이다.”
 그의 눈에는 흉악한 빛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네놈을 죽이지는 않겠다. 죽이는 것은 네놈에게 너무 인정을 베푸는 것이다. 네놈은 평생 벌레처럼 살아야 한다. 내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뼈져리게 느끼며 평생을 두고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소년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너무도 극심한 고통에 반쯤 혼절(昏絶)한 상태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소년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위종산은 그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는 몸을 돌려 오상에게서 황연화의 몸을 받아들고는 천천히 재신묘 밖으로 나갔다. 오상과 그의 몸은 곧 밤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갑자기 한 개의 길쭉한 그림자가 재신묘 밖에서 날아들었다.
 “마음이 심란하군. 혹시 그 소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낭랑하고도 온화한 음성이 밤의 고요를 깨뜨렸다.
 동시에 재신묘의 앞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한 다리로 불안하게 서 있는 삐쩍 마른 노인이었다. 하나 그의 신형은 너무도 표홀해서 두 다리를 가진 사람보다 더욱 경쾌해 보였다.
 외다리에 애꾸의 노인. 그는 바로 소년을 태우고 강을 건넜던 뱃사공이었다.
 노인의 등 뒤에는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하나 그것은 고깃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두 다리와 한팔, 한 눈이 없었지만 분명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입을 연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재신묘의 밖에 걸려 있는 등불을 보더니 갑자기 다급하게 말했다.
 “장노인,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게.”
 장노인은 급히 그를 업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칠흑같은 어둠. 이윽고 희끄므레한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는 물체 하나가 시선 속으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아!”
 장노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중년인은 탄성을 지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온화하고 미소가 끊이지 않았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을 뿐이다.
 “어째서 인간들은 은혜보다 원한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그는 탄식을 하더니 자신을 업고 있는 노인에게 자신을 쓰러진 소년의 옆에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는 소년의 옆에 앉더니 그의 눈에 박힌 나무못을 침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잔인한 솜씨군. 얼마나 악독한 심보이기에 어린 소년에게 이런 짓을 했을까?”
 그는 탄식을 하며 천천히 나무못을 잡았다. 이어 가볍게 힘을 쓰니 나무못이 피와 함께 뽑혀져 나왔다. 그 끝에는 눈알이 힘줄과 함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하나 중년인은 개의치 않고 다른 나무못마저 뽑아 버렸다.
 이제 소년의 얼굴은 뿜어 나오는 피로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두 눈이 있었던 부위는 단지 시뻘건 두 개의 구멍만이 뻥하니 뚫려 음산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중년인은 품에서 가루약을 꺼내 소년의 두 눈 부위에 뿌려 주었다. 그 손길은 차분하면서도 신속했다.
 “으음....”
 가루약이 뿌려지자 소년의 몸이 가볍게 진저리를 내며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소년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그에게 가장 먼저 엄습한 것은 얼굴의 참을 수 없는 통증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으로 천천히 눈 부위를 더듬었다.
 “내 눈이....”
 그의 입가가 쉴 사이 없이 경련으로 떨리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 모습을 측은한 눈빛으로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누가 너를 이렇게 했느냐?”
 소년은 난데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흠칫 놀랐다.
 그제야 그는 지금 자신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받았음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그 음성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도 알아차렸다.
 “당신은 누구요?”
 그의 음성은 반쯤 목이 쉰 것 같았다.
 중년인은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오늘 저녁에 나를 만났지 않았느냐?”
 그 특이한 음성을 듣고서야 소년은 자신이 만났던 불구의 기이한 중년인을 기억해 냈다.
 중년인은 다시 물었다.
 “누가 너를 이렇게 했느냐?”
 하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몸의 기력이 모두 뽑혀져 나간 것 같았다.
 중년인은 그런 그를 측은한 눈으로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너는 네가 이렇게 된 것을 비관하고 있느냐?”
 소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중년인은 말을 계속했다.
 “너에게는 그래도 싱싱한 두 다리와 튼튼한 팔이 있다. 나는 이미 두 다리를 써보지 못한지 십 년이 넘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소년을 보며 말을 계속했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무척 고통스럽지. 하나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너는 잠시 내 이야기를 들어보겠느냐?”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 중년인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옛날에 무림에 한 명의 천재(天才)가 나타났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무공도 한 번 보기만 하면 기억을 했고, 또 아무리 무서운 초식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 냈다. 사람들은 그를 무림사(武林史) 최고의 기재(奇才)라고 했지. 하나 그는 비록 천재였으나 천부적으로 몸이 허약해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 중 가장 약한 것조차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공 없이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수십 년의 노력 끝에 결국 그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원초(原初)적으로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潛在能力)을 극한까지 개발하는 것으로, 그는 그것을 ‘감각도’라 이름 붙였다. 하나 그것을 완성한 직후 그는 불의(不意)의 사고로 두 다리와 한 팔, 그리고 한쪽 눈을 잃어버려 영원히 그것을 익힐 수가 없게 되었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하나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외눈에서는 착잡한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 어딘가에 그 감각도를 익힐만한 인재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숙원(宿願)을 달성하리라 결심했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도 다른 두 명의 불구자를 만나게 되었다. 한 명은 한 팔이 없는 인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리 하나와 눈 하나가 없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곧 의기투합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친구에게 배신당한 영원히 씻지 못할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중년인이 침울한 어조로 말하자 말없이 서 있던 장노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과거의 원한이 생각나는 듯 장노인의 외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 모습을 보며 탄식을 하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도를 익힐만한 인재를 찾아 그를 통해 자신들의 원한을 갚고자 생각했다. 외팔이노인은 그 인재를 단련시키는 일을 맡았고, 외다리노인과 불구의 천재는 인재를 찾아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하나 천하는 넓었지만 인재는 드물었다. 그들은 수개 성상(星霜)을 돌아다녔지만 감각도를 익힐만한 인재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감각도를 익히려면 천부의 재질과 함께 초인적인 인내력이 필요한 것이다. 기재들은 있었지만 그와 함께 강한 인내력을 소유한 자는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우연히 강가에서 쫒기고 있는 한 소년과 소녀를 만났다.”
 그 말을 듣자 소년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중년인은 그런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때 천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의 체질이 자신의 이상(理想)과 너무도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년의 몸을 조사해보고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이 소년이야말로 자신이 완성한 감각도를 익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인재라고...”
 중년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불행히도 소년은 뜻하지 않게 두 눈을 실명(失明)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천재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감각도를 익히는데 두 눈은 별로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 눈은 비록 많은 걸 볼 수 있지만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년은 묵묵히 있었다. 그러다가 보이지 않는 눈을 들고 물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중년인은 온화하게 웃었다.
 “외팔이노인은 섭혼광인 엽소천이란 사람이다. 외다리노인은 신풍귀견수(神風鬼見愁) 장무기(張無忌)이고, 불구의 천재는 천기수사(天機秀士) 주자앙(朱紫昻)이라고 하지.”
 소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미 두 눈의 고통은 멎은 상태였다. 가루약 때문인지 상처도 얼마쯤 아물고 있었다.
 하나 그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천기수사 주자앙! 당신은 나를 받아주겠지요?”
 천기수사 주자앙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뿌연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십 년 동안 너를 찾아다녔는데 거절할 리가 있느냐?”
 외다리노인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커다란 외눈에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떨리는 손으로 소년의 몸을 안아들었다.
 문득 천기수사 주자앙은 소년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소년은 다시 가만히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옥심(錢玉心). 내 이름은 전옥심이오.”
 
 
 第 7 章 초인(超人)의 길
 
 엽소천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만약 사람이 눈이 안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기분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좋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이 안보이는 기분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나 이제 그는 머지않아 그 기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살아 있으면 말이다.
 
 석실은 좁고 답답했다. 사방에서는 쾨쾨한 약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석실의 중앙에는 작지만 깨끗한 침대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전옥심은 그 침대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그의 몸은 전신이 잘 발달되어 있어 엽소천은 같은 남자로서 내심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이제 나이를 먹고 몸이 불편해 예전같이 건강하지가 않았다. 배에는 군살이 붙었고, 한창 시절의 우람했던 근육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인들은 왕왕 청춘(靑春)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들의 젊음이 부럽고 무한한 가능성이 부러운 것이다.
 엽소천은 전옥심의 건장한 몸을 쓰윽 흝어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전옥심의 널찍한 가슴부군에 세 개의 작은 점(點)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개의 점은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점의 색깔이 검지 않고 붉었다.
 전옥심의 가슴에 있는 세 개의 홍점(紅點). 그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엽소천은 흥미를 느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엽소천은 조심스럽게 전옥심의 얼굴부위를 살펴보았다.
 전옥심의 코는 크고 오똑했다. 입술은 두터웠으며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다. 눈썹은 짙고 검어 남성미를 듬뿍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 눈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게 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퀭한 구멍 두 개만이 시커멓게 뚫려 있을 뿐이었다.
 엽소천은 차분한 눈길로 그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신경은 살아있군.”
 그가 바늘로 찌를 때마다 전옥심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눈동자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시신경(視神經)은 살아있다. 처음에 상처를 치료했던 사람이 신속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지.”
 그는 전옥심이 듣던 말던 혼자서 중얼거렸다.
 엽소천은 원래 떠들기를 좋아했다. 그는 항상 말이 많았고 농담을 즐겨했다.
 하나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 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전옥심은 그가 무척 외로운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하나 엽소천은 자신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자신이 말을 많이 한다는 것도 부인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다만 한 가지, 자신이 한때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로 불리웠다는 것만은 시인을 했다.
 그는 젋어서부터 섭혼술(攝魂術)이나 미혼법(迷魂法)에 대해 취미를 가지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었다. 원래 섭혼술이나 미혼법은 의술(醫術)에서 파생된 무공의 일종으로서 심오한 의술을 알지 못하면 평생을 가도 그 오의(奧意)를 깨우치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엽소천은 자연적으로 의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나중에 그가 자신의 섭혼술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엽소천은 자신이 이미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 그는 그것을 거의 내색하지 않았다. 환자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번거로움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천하제일의 의술을 선보이게 될 기회를 만났다.
 왕왕 그렇지만 그런 기회는 전혀 뜻밖으로 오게 되는 법이다.
 엽소천은 전옥심의 몸을 샅샅이 살핀 후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네 녀석은 보기보다 더 건강하군. 이 정도면 노부의 신묘한 의술에 실험대상으로 쓰일 만 해.”
 그는 전옥심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자. 이제 마취를 하겠다. 그전에 할 말은 없느냐?”
 전옥심은 가만히 있었다.
 엽소천은 다시 싱겁게 웃으며 침대의 구석에 놓인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 속에는 그가 직접 수십 가지의 약재(藥材)를 섞어 만든 마취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전옥심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쳐들고는 그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때 전옥심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엽소천은 엉거주춤 약그릇을 든 채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전옥심은 짤막하게 물었다.
 “왜 결혼하지 않았소?”
 그 말에 엽소천은 어리둥절해졌다.
 “네 녀석이 노부가 결혼하지 않은 걸 어떻게 아느냐?”
 전옥심은 태연히 말했다.
 “여자의 시중을 조금이라도 받았던 사람이라면 적어도 당신같이 거칠게 약을 먹이지는 않을 것이오.”
 엽소천은 입가를 씰룩거리며 쓰게 웃었다.
 “녀석. 끝까지 노부의 속을 발칵 뒤집어 놓는구나.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 말해주겠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 할 때 전옥심이 다시 말했다.
 “그럼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시오.”
 “그게 무엇이냐?”
 전옥심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제발 내가 눈을 뜰 때까지 죽지 마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약그릇을 집어 들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엽소천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전옥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눈가를 실룩실룩 거렸다. 그의 눈빛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녀석. 눈치 하나는 빠르군. 좋다! 네 녀석이 노부의 얼굴을 볼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겠다....”
 마침내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나 전옥심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는 이미 마취제에 의해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 * *
 
 잠을 깼다.
 눈을 감고 잠들었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주위는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수술이 실패한 걸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곧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다듬었다.
 눈 부위가 아련한 통증으로 저려왔다. 그는 갑갑함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손으로 눈을 더듬었다. 눈은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감겨 있었다. 전옥심은 곧 그것이 삼베라는 것을 촉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풀어버리려고 손을 움직였다.
 그때 어디선가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풀지 마라.”
 그 음성은 아주 온화하면서도 귀에 익은 것이었다.
 전옥심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감각도를 완성한 그의 신체는 주위에 자신 외에 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감각은 놀랄 만큼 생생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들이 어떤 자세로 어디쯤에 앉아 있는지조차 훤히 알 수가 있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초감각’ 이라 불리우는 제삼(第三)의 눈이 아주 똑똑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온화한 음성은 다시 말했다.
 “붕대를 풀기 전에 우선 햇빛에 눈가를 쬐어야 한다. 그래야만 눈이 충격을 받지 않는다.”
 전옥심은 붕대를 풀려는 손을 멈추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는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곧, 그는 자신의 몸이 건장한 팔에 들린 채 밖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옥심은 그 팔의 주인의 몸이 아주 가볍고 날렵한데도 어딘지 모르게 신형이 약간 불안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팔의 주인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햇살은 따스했다. 미풍에 실려 오는 공기는 지난밤의 악몽을 없애주려는 듯 그의 전신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은은히 흘러오는 꽃향기를 좀 더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음이 아주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붕대를 맨 눈 부위에 햇살이 닿아 간지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는 그런 자세로 한 시진쯤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기 싫었고 이런 상태로 계속 누워있고 싶었다.
 하나 머지않아 그는 다시 들려진 채 석실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석실은 사방이 꽉 막힌 곳이었다.
 그의 몸이 다시 침대위에 조심스럽게 뉘어지며 예의 온화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제 붕대를 풀겠다.”
 전옥심은 숨을 고르게 내쉬며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차분한 손길이 다가와 그의 눈에서 서서히 붕대를 풀었다. 그 손길은 느릿느릿했으나 조금도 멈추어지지는 않았다.
 이윽고 붕대가 모두 풀렸다.
 전옥심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두 사람의 입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전옥심 자신은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이 일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두 눈을 되찾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일보다도 중대하고 더 급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그 사람의 일은 자신보다 중대했다.
 자신에게 눈을 준 사람. 그를 생각하자 전옥심은 가슴이 저려왔다. 그는 그 사람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혹시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하나 이미 붕대는 풀려졌고, 그는 눈을 떠야만 했다.
 이 일이 중대하건 중대하지 않건 이미 끝난 일이었다.
 이제 그는 그 결과를 보아야만 했다. 한 사람의 희생을 무의미 하게 해버린다면 두고두고 천추(千秋)의 한(恨)이 될 것이다.
 전옥심은 천천히 눈을 떴다.
 
 천기수사 주자앙은 천하에서 아는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는 인간의 눈빛이 그 사람의 눈동자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하나 이제 그는 알 수 있었다. 눈빛이란 그 사람의 눈동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오직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눈은 비록 변했지만 전옥심의 눈빛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처음 이름 모를 강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가슴에 진한 인상을 남겼던 그 쓸쓸한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허무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하소연을 하는 듯한 눈빛. 전옥심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한때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이 눈빛을 영원히 못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주자앙은 자신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전옥심은 가만히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거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초라한 석실. 작고 깨끗한 침대. 석실의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약초 덩어리. 그것에서는 쾨쾨한 약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 황량해 보이는 풍경들이 처음으로 전옥심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것들이었지만 전옥심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이기도 했다.
 그는 이어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모포가 단정하게 깔려있는 침대.
 침대 옆에는 키가 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삐쩍 말랐고 한쪽 눈과 다리가 없는 노인이었다.
 항상 말이 없는 노인, 신풍귀견수 장무기. 한때는 천하제일의 경공대가(輕功大家)로 명성을 날렸던 그는 지난 세월동안 부쩍 늙어버렸다.
 그는 하나 남은 눈가에 물방울을 매단 채 전옥심을 보고 있었다.
 장무기 옆에는 이상한 모양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커다란 두개의 바퀴가 달려 있었고 의자의 손잡이에는 몇 개의 단추가 달려 있었다.
 다른 의자보다 두 배는 큰 듯한 그 의자의 이름은 만보거(萬寶車)라고 했다.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한 사람이 만든 것이다. 만보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이한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어 일종의 움직이는 가옥(家屋)이라고 할 수 있었다.
 커다란 만보거 위에 한 사람이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그의 팔다리가 없는 몸뚱어리를 보자 전옥심은 아련히 과거가 그리워졌다.
 전옥심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주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거의 삼년이 다 되어 가는군.”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모두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전옥심은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에는 장무기가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컸는데 이제 같이 서보니 오히려 장무기가 작아 보였다. 장무기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흐믓함과 함께 아릿한 슬픔을 느꼈다.
 새 사람은 자꾸 자라건만 늙은 사람은...? 사람의 청춘은 한번 물러가면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그는 자기가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슬퍼졌다.
 전옥심은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자신이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그는 살아 있습니까?”
 장무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전옥심은 아직까지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때 그는 장무기가 벙어리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나 이제는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과거 장무기는 누구보다도 말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강호(江湖)의 소식에 정통했으며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었다.
 무림제일통(武林第一通)!
 이것이 과거 사람들이 장무기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하나 이제 과거의 무림제일통은 무림제일묵(武林第一黙)이 되고 말았다.
 십여년 전, 그는 남의 비밀을 공공연히 말한 대가로 아내와 두 딸, 그리고 한쪽 다리와 한쪽 눈을 잃어야만 했다. 그 뒤로 그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비록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전옥심은 그가 앞으로 죽을 때까지 결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주자앙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장무기 대신 대답을 했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
 전옥심의 가슴에는 한 차례 격동이 휘몰아쳤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물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자앙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너는 그에게 가볼 생각이냐?”
 전옥심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자앙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뒤쪽 석실에 있다.”
 그는 다시 뭔가 말하려 했으나 고개를 돌려버렸다.
 전옥심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석실을 벗어났다.
 그가 나온 석실을 뺑 돌아가면 다시 하나의 석실이 나온다.
 그 석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엽소천의 무형편에 시달려야만 했던 곳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고통에 허덕여야만 했다.
 하나 이제 그 석실로 들어가는 그의 마음은 오히려 그때의 고통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과거 누구보다도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천하제일광(天下第一狂)이었고, 천하제일괴(天下第一怪)였다. 어떤 사람은 천하제일살(天下第一煞)이라고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라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죽였고 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그는 지금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없었고 자신을 살릴 수도 없었다.
 “크으음...”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그의 입술을 뚫고 새어나왔다. 두 눈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그는 침대에 누워 가느다랗게 몸을 떨고 있었다.
 전옥심은 그런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그의 눈은 더욱 울적해지고 우울하게 변해 있었다.
 전옥심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묵묵히 보고 있다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엽소천은 그 손길에 흠칫 놀라 떨던 몸을 멈추었다.
 “누구냐?”
 전옥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굵은 손을 좀 더 힘주어 움켜잡았을 뿐이었다. 엽소천의 투박한 입가에 언뜻 엷은 미소가 어렸다.
 “흐흐... 네놈이군. 어떠냐? 노부는 약속을 지켰다.”
 전옥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엽소천은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노부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품지 마라. 네 녀석의 눈을 고치기로 한건 처음 네 녀석을 보았을 때부터 결정한 일이었다. 단지 우리 셋 중에서 눈이 제대로 박혀 있는 건 노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했을 뿐이다.”
 전옥심은 침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동안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했었소. 한데 막상 이렇게 보니...”
 엽소천은 그의 말이 궁금한 듯 고통도 잊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옥심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내 생각보다는 훨씬 잘 생겼소.”
 그 말에 엽소천은 껄껄 웃었다.
 “크하하...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한때는 세상 여자들이 노부를 죽자살자로 쫓아다녀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의 음성은 차츰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옥심은 그게 아주 나쁜 징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결혼을 하지 않았소?”
 그는 전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엽소천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쓸쓸하게 웃었다.
 “녀석...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그렇소.”
 잠시 엽소천의 얼굴에는 미미한 경련이 계속 되었다. 엽소천은 고통에 찬 숨소리를 내쉬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이 이야기는 아직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것인데... 너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전옥심은 자신이 잡은 그의 손에 식은땀이 가득 고이는 것을 느꼈다.
 “약속하겠소.”
 엽소천은 몸을 학질 걸린 사람처럼 가늘게 떨면서도 툴툴 거리며 웃었다
 “크흐흐... 사실 노부는 어렸을 때 계모(繼母)밑에서 자랐었다... 한데 그 계모라는 여자가 나를 몹시 구박했지.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세상여자들이란 모두 그녀같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 그래서 나는 내가 크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었... 지...”
 “겨우 그거요?”
 “그렇다... 흐흐... 왜 너무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서 실망했느냐? 쿨룩... 쿨룩...”
 엽소천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빛이 갑자기 나빠져서 거의 회색에 가까웠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입가로 검은 피가 새어나왔다.
 전옥심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엽노인.”
 엽소천은 손으로 입가를 쓱 훔치며 거칠게 말했다.
 “흐흐.. 녀석아. 그런 처량한 투로 말하지 마라. 노부는 남에게 동정을 받을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 전옥심의 마음은 더욱 침울해졌다.
 그는 엽소천이 이미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자신의 신묘한 의술이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백골이 되었을 몸이었다.
 십 이년전, 그는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왼팔을 잘리고 오장(五臟)이 거의 가닥가닥 끊어졌었다. 그런 몸으로 십여 년을 살았던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번 수술로 무리하게 많은 피를 흘려서 이제는 대라신선이 와도 살 수가 없었다.
 과거 그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천뢰장(天雷掌) 우문양(宇文陽)이었다.
 우문양은 엽소천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한데 어느 날, 엽소천은 약초를 구하러 심산(深山)을 뒤지다가 우연히 천하의 영약(靈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건곤이화과(乾坤離火果)라는 것으로, 천하에서 가장 극양(極陽)의 영물이었다. 특히 양강(陽剛)의 무공을 익힌 자가 이것을 복용하게 되면 무공을 거의 화경(化境)에 이르도록 익힐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안 우문양이 그에게 접근해 방심한 사이 그를 암습하고 건곤이화과를 빼앗아 간 것이다. 우문양의 무공은 극양으로서 그가 천뢰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의 무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도 같은 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엽소천은 지금도 그때의 한(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네놈도 알아야 한다. 원수가 많으면 이익이 될 때도 있지만 친구는 거의 한 두 명이면 족하다. 때로는 친구가 적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기 때문이지...”
 엽소천의 목소리가 갑자기 더욱 가늘어졌다.
 그것은 그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너는 나와 약속 한 걸 잊지 않았겠지...? 그 중원제일루에 간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소.”
 “너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노부 대신 중원제일루의 모든 점원의 환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아직도 노부를 잊지 않았음을 천하에 알려야 한다...”
 “알고 있소.”
 엽소천은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너는 좋은 놈이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리라는 걸 알지... 옥심!”
 전옥심은 나직이 탄식을 하며 대답했다.
 “왜 그러시오?”
 엽소천의 몸에 격렬한 진동이 왔다. 그는 전옥심의 손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어... 언제고 우문양... 그놈을 죽일 때...”
 “말하시오.”
 엽소천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말듯 했다.
 “먼... 먼저 그놈의 왼팔을 잘라... 입속에 넣어.. 주.. 어라..”
 전옥심은 착잡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엽소천은 입가에 미소를 남기고 죽었다. 한때 천하를 풍미하던 일세의 고수는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것이다.
 전옥심은 묵묵히 차가워지는 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소. 당신은 정말 진정한 대장부라고...”
 엽소천의 시신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 * *
 
 “나와 말을 좀 하지 않겠느냐?”
 엽소천의 시신을 화장(火葬)하고 난 후 주자앙은 조용히 전옥심을 불렀다.
 “인간이란 모두 언젠가는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지.”
 전옥심은 말없이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주자앙은 온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엽소천은 자신의 분신(分身)이랄 수 있는 것을 남겼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엽소천은 전옥심에게 두 눈을 남겨 주었다. 전옥심이 살아있는 한 엽소천도 그 눈을 통해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엽소천에게 기대했던 것은 너에게 ‘초인(超人)’으로서의 기반을 닦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대는 이루어졌다고 본다.”
 초인!
 주자앙이 말하는 ‘초인’이란 어떤 것일까?
 주자앙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전옥심을 응시했다.
 “천하에는 수없이 많은 무공의 종류가 있다. 너는 그 중에서 가장 심오하면서도 위력이 강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전옥심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검(劍)이 아닙니까?”
 주자앙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또한 검은 왕왕 익히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지. 검법을 익히는 사람은 비록 많지만 그 진정한 오의를 터득한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검의 극치에 다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검로(劍路)에는 끝이 없다.”
 주자앙은 홀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바로 이 검법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신비한 힘이 실려 있었다.
 “검으로 천하제일이 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천 년 전 무적(無敵)의 고수였던 검신(劍神) 이후 아직까지 완전한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공인된 검사(劍士)는 없었다.”
 
 검신(劍神)!
 이 이름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었다. 너무나도 오래되어 강호의 명숙(名宿)중에서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나 그 당시의 그의 찬란했던 행적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무림의 전설(傳說)이었고, 무인(武人)이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했던 사람이었다.
 고금무적(古今無敵)의 고수!
 검도(劍道)의 마지막 경지에 도달한 절대의 신(神)!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도 송구스러워 했고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무림역사상 그와 같은 고수는 절대로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나 검신은 사람들의 칭송에도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무도(武道)에는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검도에도 끝이 있을 수 없다. 나는 겨우 검도의 한 가지 경지를 넘었을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경지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그 새로운 경지는 심검(心劍)의 경지이다. 그리고 그 심검의 경지 끝에는 아무도 이루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무형검(無形劍)의 경지가 있다.
 무형검을 이룩해야만 비로소 검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의 말은 전설이 되었고, 검을 배우는 모든 검사들의 귀람(龜藍)이 되었다.
 검신 이후, 검은 모든 무림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천하에서 가장 흔한 병기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검을 익혔고, 수많은 문파가 생겨났다.
 하나 그 많은 문파 중 돋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이십 년 전 혜성같이 나타나 천하를 주름잡았던 오직 한 문파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뿐이었다.
 
 백검회(百劍會)!
 
 그들은 검신 이후 최고의 전설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백검회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백 명의 검객(劍客)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했다.
 하나 백검회는 어느 날 신비스럽게 사려져 버려 세인들을 경악시켰다. 홀연히 나타나 천하를 석권(席捲)하고 다시 바람처럼 사라진 백검회에 대한 전설은 지금도 수많은 무림인들의 가슴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검신과 백검회 이후, 또 다시 수많은 검수들이 나타났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무적(無敵)이라 불릴만한 사람은 없었다. 검의 영역은 끝없이 넓어갔지만 우후죽순같이 일어나는 수많은 검파(劍派)들 중 진정한 강자는 보이지 않았다.
 
 주자앙은 외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는 검신과 백검회 이후 전정한 검도의 고수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느냐?”
 전옥심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주자앙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 이후의 사람들이 검을 초식(招式)으로만 익히려 했기 때문이다.”
 전옥심은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주자앙은 계속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검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불리우는 만큼 그 속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경지가 담겨져 있다. 한데 사람들은 단지 내공(內功)과 초식의 쾌속함으로만 승부를 내려하고 있다. 그 정도로는 감히 검도라고 칭하지도 못할 천박한 경지 밖에는 이루지 못한다. 검은 무릇 혼(魂)과 함께 시전 해야 하는 법이다.”
 그제야 전옥심은 그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이란 것은 단순한 병기 이전에 하나의 인생(人生)이었다. 그것은 얼마만큼 익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잘 조화시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論理)는 자칫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심오하기 그지없어 세인들은 등안시 하기가 쉽다.
 주자앙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너로 하여금 천불상을 조각케 한 이유를 하느냐?”
 그는 전옥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너에게 검도를 익힐 기초를 닦아주기 위해서였다. 검도를 익히려면 우선 기본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무공들과는 다르지. 검을 익히려면 우선 강한 어깨와 완력(腕力)이 있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악력(握力:손아귀로 물건을 쥐는 힘)이지. 악력이 강해야만 어떤 일이 있어도 수중에서 검을 놓치는 법이 없게 된다.”
 검은 바로 검객의 영예(榮譽)다.
 검객의 영예는 생명보다 훨씬 중요하다. 검객이 손에서 검을 놓친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보다 더욱 중대한 과실을 저지르는 셈이다.
 주자앙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 것들을 배양하는 데는 천불상을 조각하는 것 이상의 좋은 방법이 없다. 물론 천불상은 더욱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문득 주자앙은 입을 다물고 전옥심을 바라보았다. 그 부드러운 눈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어린 안광은 천하의 어느 것 보다도 더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여덟 가지[八種] 검법(劍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중 네 가지는 네 명의 검객들에게서, 다른 네 가지는 비급을 통해 배우게 된다. 네가 그 여덟 가지 검법을 완성했을 때, 비로소 천불상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내가 말하는 ‘초인(超人)’의 진정한 의미까지도....”
 그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전옥심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전옥심은 눈빛을 가다듬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잠시 허공을 올려다 본 후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주자앙의 대답은 짤막했다.
 “오늘부터.”
 
 
 第 8 章 능광백팔형(凌光百八形)
 
 검의 생명(生命)은 그 쾌속함에 있다. 아무리 무서운 검법이라도 출수(出手)하는 속도가 빠르지 못하면 그 검법은 쓸모없는 검법이 되고 만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삼십 년 전에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쾌검(快劍)을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침 이곳에서 멀지않은 청축림(靑竹林)에 살고 있다.
 너는 그곳에서 그의 쾌검을 배워야 한다.
 
 * * *
 
 애뇌산은 운남성(雲南省)에 위치한 절산(絶山)이었다.
 산세는 험악하여 계곡은 깊었고, 봉우리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사시사철 밤낮없이 구름과 안개에 덮여 있는 봉우리는 그 전모를 눈으로 볼 수가 없었으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천길 절벽 사이에는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험한 골짜기들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굽이굽이 기복을 이룬 산줄기는 백 리나 뻗쳤고, 온 산은 나이를 알 수 없는 거목(巨木)들로 끝없이 뒤덮여 있었다.
 청죽림은 애뇌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해가 정확하게 중천(中天)을 가리키고 있을 때 전옥심은 청죽림의 입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청죽림은 이름 그대로 푸른 대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대나무란 놈은 이상한 놈이었다. 그것은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쪼개질지언정 잘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대나무는 때로는 가장 무서운 흉기(凶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전옥심이 청죽림의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대나무는 무서운 흉기가 되어 그의 몸을 덮쳐왔다. 난데없이 불쑥 코앞으로 날아 들어오는 대나무의 끝은 날카롭게 베어져 있어 찔렸다가는 꼬치모양이 되기 십상이었다.
 한데 어느 새 전옥심의 몸은 대나무에서 한자 쯤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전옥심 자신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단지 대나무가 갑자기 날아오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을 뿐인데 그의 몸은 벌써 그것을 피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삼년 동안 고련(苦鍊)해 감각도를 익힌 결과였다.
 하나 그는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 새 더 많은 대나무칼이 그의 전신으로 짓쳐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세 군데서 죽검(竹劍)이 날아들었다. 그 방위와 속도의 배합은 실로 기묘하기 그지없어 피할 곳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전옥심은 팔과 다리를 절묘하게 움직여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그것을 피해 버렸다.
 그때 전옥심은 머리뒤쪽에 서늘한 기운이 다가옴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굴렸다. 거의 동시에,
 푹!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대나무가 매섭게 꽂혔다.
 그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의 몸은 죽창에 관통당해 버렸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 검법을 배우러 왔다. 한데 기다리는 것은 검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아니라 대나무로 이루어진 가공할 살수(殺手)들 뿐이었다.
 살수는 갈수록 악독해지고 무서워졌다.
 앞으로 몸을 굴린 전옥심의 코앞으로 이번에는 일곱 개의 죽창이 날아들고 있었다.
 어떤 것은 느리고 어떤 것은 빠르게, 어떤 것은 앞서고 어떤 것은 약간 늦게 날아오는 일곱 개 창의 절묘한 배합! 이것은 강호에서는 이미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칠살마창(七煞魔槍)의 수법이었다. 그 악독한 위력은 일명 죽음의 창이라 할 만큼 강호인들의 치를 떨게 하는 것이다.
 전옥심의 오른손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불가사의하게도 그의 손은 가장 앞으로 날아 들어오는 죽창의 끝을 가볍게 잡을 수 있었다. 동시에 왼손으로는 두 번째 날아오는 창을 잡았다. 이어 그의 두 손이 흔들려지며 푸른 그림자가 일어났다.
 파파파파팍!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어느새 일곱 개의 창은 모두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전옥심의 손에 들린 두 개의 창이 창졸지간에 나머지 다섯 개의 창을 모두 떨어뜨린 것이다.
 한 번 펼치면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전설의 칠살마창이 이리도 허무하게 깨어질 줄이야.
 하나 살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아홉 개의 죽창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슈우우---우우!
 주위가 온통 대나무의 그림자에 휩싸이며 먼지가 사방으로 마구 날려 왔다.
 하늘이 온통 푸른 대나무로 휩싸인 듯한 이 수법은 천하에서 가장 무섭다는 다섯 가지 암기수법중 하나인 구천현녀(九天玄女)였다. 그 가공할 빠르기와 악독한 위력은 천하인들로 하여금 구천이란 말만 들어도 안색이 대변하게 했다.
 전옥심의 옷이 여기저기 죽풍(竹風)으로 찢어졌다. 하나 전옥심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가 않았다.
 그는 별로 서두르지도 않고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그 순간 머리끝을 거의 스치듯 죽창 하나가 땅으로 꽂혔다.
 이어 그의 몸은 엎드린 채로 기묘하게 일곱 번을 뒤틀 거렸다.
 팍! 팍! 팍!
 그가 한번 몸을 뒤틀 때마다 죽창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땅에 박혔다.
 일곱 개의 죽창을 피한 후 전옥심은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쐐애 -- 액!
 마지막 하나의 죽창이 번개같이 그의 가슴팍으로 날아 들어왔다.
 이 수법이 구천현녀 중에서 가장 무서운 현녀천심(玄女穿心)의 수법이었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이 악독한 수법 때문에 가슴을 뚫린 채 쓰러졌는지 모른다.
 하나 전옥심의 몸은 어느 새 날아오는 창과 거의 수평으로 길게 기울어졌다.
 그는 몸을 허공에서 반쯤 수평으로 뉘운 채 창이 그의 가슴부위를 지날 때 오른발로 그 끝을 툭 찼다. 창은 위력을 잃고 허공에 맴돌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전옥심은 어느 새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내려오는 창을 잡고 우뚝 섰다. 그 행동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깨끗하고도 자연스러웠다.
 구천현녀를 끝으로 더 이상 죽창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한 사람이 불쑥 그의 앞으로 나타났다.
 그는 낡은 백의를 입은 노인이었다. 얼마나 늙었는지 온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갈라졌고, 머리에는 백발이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하나 그의 몸은 꼿꼿이 선 채 반듯이 세워져 있었고 눈에서는 싸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전옥심은 마치 한 자루의 예리한 검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의노인은 한동안 전옥심을 쏘아보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주자앙이 설치한 죽마오절진(竹魔五絶陣)이다. 주자앙은 이 죽마오절진을 뚫고 오는 자가 노부가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전옥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또 어째서 이곳에 험악하기 그지없는 절진이 설치되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주자앙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 너는 비록 감각도를 익혔지만 그 무궁무진한 효능(效能)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이번에 너는 그 효능에 대해 비록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신비스럽게 웃었다.
 이것은 과연 주자앙이 자신에게 감각도의 효능을 알게 해주기 위해 설치한 것일까?
 백의노인은 전옥심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가 주자앙이 보낸 놈이냐?”
 전옥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백의노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의 전신을 흝듯이 살펴보았다.
 “주자앙은 과연 약속을 지키는군.”
 그는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따라오너라.”
 전옥심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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