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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검 1권-1

2014.12.30 조회 1,568 추천 15


 序 章 1 出 魔
 
 정말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훈훈한 미풍이 사방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짙어 오는 녹음(綠陰)이 산과 들판을 푸르름으로 물들여, 천지(天地)가 온통 초록 일색(一色)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평상시라면 하늘 높이 새들이 날아다니고, 숲 속에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 뛰어놀 텐데 지금은 전혀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가 없었다. 아니, 동물들뿐만 아니라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들조차 이날따라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보아도 살아 있는 생물의 종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그 많은 토끼며 노루, 새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사시사철 숲 속을 부지런히 기어 다니던 개미 떼와 꽃을 찾아 앞을 다투어 모여들던 나비들은 하늘과 땅속으로 꽁꽁 숨어 버렸단 말인가?
 한데 어느 한순간이었다.
 우우우우웅......
 언제부터인가, 어딘지 모르는 심원(深遠)한 곳에서 울리는 듯한 나직한 굉음(轟音)이 대지를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는 땅속 깊숙이 아득히 먼 지하(地下)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쿠쿠쿠우우우우웅.....!
 울림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러다가 그것은 마침내 천지를 개벽(開闢)시킬 듯한 엄청난 폭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동시에 푸르름으로 물들었던 땅이 여기저기 균열을 일으키며 마구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쩌 ---- 어 ---- 억!
 지반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며 땅거죽이 마치 거북이 등가죽처럼 갈라 터졌다. 집채만 한 바위조차도 갈라진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제 모습을 잃어 갔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대지진이었다.
 지진의 규모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서 눈으로 보이는 모든 지역이 완전히 지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사천성(四川省) 대지진(大地震)이라 불리는 일대참화(一代慘禍)의 시발이었다.
 콰콰콰콰콰쾅!
 쿠아아아아아아앙.....!
 너비가 백여 장이 넘는 균열이 수만 가닥 일어났고, 무너진 돌덩이와 바위들이 지축이 흔들리는 바람에 공깃돌처럼 마구 굴러다녔다.
 산이건 강이건 모두 형체를 잃어버렸고, 천지는 그야말로 태초(太初)의 혼돈(混沌)으로 변해 버린 듯했다.
 미친 듯한 지진의 대광란은 거의 칠 주야(七晝夜)나 계속되었다.
 그 칠 일 동안의 천하는 그야말로 지옥(地獄), 바로 그것이었다.
 지진의 여파는 사천성 전체를 휩쓸어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해 버렸다.
 지진은 강산(江山)을 황폐시켰고, 거의 모든 인가(人家)를 철저하게 파손시켰다. 언덕이었던 곳이 평지가 되어 버렸고, 없었던 계속이 수백, 수천 개가 새로 생겨났다. 양자강(楊子江)의 흐름도 바뀌어 여기저기 호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무섭고 완벽했던 절지(絶地)도 지진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사천성에서 가장 깊숙한 곳.
 깎아지를 듯한 단애(斷崖)와 칼날 같은 바위들로만 이루어진 어느 이름 모를 절봉(絶峯).
 여느 때라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와 새들조차 앉지 못하는 기암괴석뿐이었을 절봉이 지진으로 인해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
 파파파파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절봉이 산산이 터져 버렸다.
 그것은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일대 장관(一代壯觀)이었다.
 높이가 수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봉우리가 단 일순간에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와 돌들이 사방으로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파파파파파파팍!
 짚단처럼 퍼부어져 내리는 바위 조각 틈 사이로 십여 개의 검은 인영들이 솟구쳐 올랐다. 흑영(黑影)들은 절봉의 중앙부근에서 날아올라 사방으로 비산(飛散)되는 바위들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았다.
 “크하하하하하하.... 금마옥(禁魔獄)이 깨어졌다!”
 십여 개의 흑영 중에서 요란한 광소성이 터져 나왔다. 광소성은 엄청난 굉음을 뚫고 주위를 온통 뒤흔들었다.
 “크케케케케케... 영원히 못 나올 줄 알았던 그 악마 같은 금마옥이 설마 지진에 의해 깨어질 줄이야... 하늘이 우리 십이신마(十二神魔)를 돌보는구나!”
 까마득히 허공을 날아오르던 열두 개의 흑영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몸을 돌려 동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가자... 중원(中原)으로....!”
 “켈켈켈켈... 누가 감히 비천십이신마(飛天十二神魔)를 막을 수 있겠는가? 천하는 이제 우리의 것이다...!”
 무시무시한 광소성과 함께 열두 개의 흑영은 허공을 훨훨 날아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마치 허깨비인 양 그들의 몸은 단 한 번도 땅에 내려서거나 멈추지 않았다.
 항차, 중원 천하를 엄청난 피의 폭풍(暴風)으로 몰아넣을 십이신마겁(十二神魔劫)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序 章 2 出 道
 
 그는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다.
 일단 하기로 결심한 이상 그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냇가로 가서 차가운 물에 정성스레 목욕을 하고 정좌한 채 운공(運功)을 했다. 전신에 기(氣)가 충만하고 활력이 넘쳐흘렀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그 순서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몇 번에 걸쳐 자신의 계획(計劃)을 검토하고 여러 각도에서 분석(分析)했다.
 그런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나서자 파란 하늘이 눈을 찔렀다.
 “좋은 날씨로군.”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잠시 이십여 년간 정들었던 모옥을 둘러보았다.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일 년 내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각오한 일이 벌어지겠지.
 두 번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는 감정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서슴없이 몸을 돌렸다.
 곧, 그의 헌칠한 신형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
 
 
 第 一 章 品 劍 大 會
 
 1
 
 항주(抗州)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좌혼지(左魂之)는 잠시 창괄(蒼括)한 하늘을 올려 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춘삼월(春三月).
 날씨는 청량했고, 거리는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에 휩싸인 인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좌혼지는 인파에 묻힌 채 느릿한 걸음으로 봄 내음이 가득한 거리를 걸어갔다.
 행인(行人)들의 웅성거림과 장사치들의 고함 소리... 젊은 여인네들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 골목을 뛰어다니는 개구쟁이들의 노랫소리...
 거리는 이런저런 소리들로 인해 한층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좌혼지는 별로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거리를 걷다가 한 편에 주루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취선거(醉仙居).>
 
 취선거는 항주에서도 가장 유명한 주루였다.
 좌혼지는 천천히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날은 이미 점심때인지라 주루는 그야말로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한데 그가 주루의 입구에 모습을 나타내자 시장 바닥처럼 시끌벅적하던 주루가 일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좌혼지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
 “........!”
 한동안 넓은 취선거에는 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문득 누군가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굉장한 미남(美男)이구나....!”
 억눌린 듯하던 주루는 그 음성을 시작으로 다시 조금씩 원래대로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다시 먹고 마시고 떠들어 댔다.
 하나 그러는 도중에도 힐끔힐끔 좌혼지의 얼굴을 훔쳐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좌혼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왼쪽 창가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 창문 너머로 항주의 거리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더구나 멀리 서호(西湖)의 절경(絶景)까지 아련히 비치고 있어 전망이 아주 좋았다.
 “무.... 무얼 드시겠습니까?”
 점원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받아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공손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좌혼지는 점원을 힐끗 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간단한 안주 하나와 술 한 병을 주게.”
 그의 음성은 아주 나직했다. 그런데도 그 음성을 듣자 점원은 전신이 상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원은 더욱 정중하게 허리를 굽실거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좌혼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항주의 거리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옛날 호림(虎林)이라 불렸던 항주는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전(錢), 무(武), 숙(肅)의 서울이었다. 그곳에는 전당강(錢塘江)이 굽이쳐 흐르고, 남쪽으로는 수양제(隨楊帝) 때 개설한 운하(運河)가 통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물자가 풍부했고, 산수(山水)가 빼어나서 뛰어난 인물들이 속출했다.
 지금도 첩첩이 이어진 고루거각(高樓巨閣) 사이로 휘영청 늘어진 버드나무가 보이고, 멀리 서호의 푸른 호수에는 형형색색의 유람선이 그림처럼 떠 있었다.
 한동안 항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좌혼지는 문득 하나의 따가운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두 탁자 건너편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황의를 입은 늙수그레한 노인이었다. 아쉽게도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이제 갓 열두세 살이 되었음 직한 나이 어린 소녀였다. 이목구비가 아주 또렷하고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소녀는 그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좌혼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좌혼지와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앙증스럽게도 두 눈을 찡긋해 보였다.
 좌혼지는 어린 소녀의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등을 돌리고 있던 황의 노인이 소녀를 향해 물었다.
 “소홍(小紅)아. 누굴 보고 그러느냐?”
 노인은 궁금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좌혼지를 발견하자 두 눈에 흠칫하는 빛을 떠올렸다.
 ‘정말 잘생긴 청년이로군. 내 평생 이렇게 잘생긴 인물은 처음 보는구나. 석년의 천하제일 미남자라는 옥면금도(玉面金刀) 동해립(董奚立)도 이 청년보다는 못하겠는걸.’
 노인은 좌혼지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가? 괜찮다면 이리로 와서 합석하지 않겠나?”
 좌혼지는 잠시 황의 노인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허허... 잘 왔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말 상대가 없어서 조금 적적했던 참일세.”
 노인은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곽지산(郭地山)이란 변변치 못한 늙은이일세. 이 아이는 내 손녀인데 곽소홍(郭小紅)이라고 하지. 조금 버릇이 없더라도 이해해 주게. 너무 귀엽게만 키웠더니 말괄량이가 되어 버렸네.”
 소녀, 곽소홍은 이 말을 듣자 입술을 삐죽거렸다.
 “핏!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 앞에서 꼭 내 흉을 보더라...”
 곽지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네가 말썽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이 할아비가 어찌 일부러 네 흉을 보겠느냐?”
 곽소홍은 입이 퉁퉁 부어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어제 말썽을 피웠다고 그래요? 나같이 얌전한 아이가 또 있는 줄 아세요?”
 곽지산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허헛... 네 말이 사실이길 빌겠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
 곽지산은 아직도 심술 난 표정을 짓고 있는 곽소홍의 뺨을 톡톡 건드린 후 다시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의 이름은?”
 좌혼지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좌혼지라 합니다.”
 “좌혼지라... 좋은 이름이군.”
 곽지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육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자네같이 준수한 젊은이는 아직 본 적이 없네. 좌씨는 별로 흔한 성(姓)이 아닌데 영사(令師)는 누구신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분이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곽지산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럭저럭 귀동냥을 좋아해서 웬만한 사람은 거의 알고 있네. 말해 보게.”
 좌혼지는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사는 강호산인(江湖山人)이라고 합니다.”
 “강호산인?”
 곽지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내 견문이 빈약한 모양일세. 영사의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 보는군.”
 좌혼지는 조용히 웃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영사께선 조용한 것을 좋아하시는 분인지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꺼려하시지요.”
 “강호에는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과도 같은 기인(奇人)들이 많이 있는데 영사께서도 그런 기인들 중의 한 분이신 모양이군.”
 때마침 점원이 음식을 좌혼지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왔다.
 곽지산은 좌혼지가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하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자네도 품검대회(品劍大會)에 참가하러 이곳에 왔나?”
 “품검대회라니요?”
 곽지산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좌혼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그가 오히려 어리둥절한 듯 되묻자 맥 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정말 품검대회를 모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에 강호에 처음 출도(出道)하는지라 그런 대회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곽지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강호초출(江湖初出)이라면 모르는 게 당연하겠군.”
 이번에는 좌혼지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품검대회라는 게 무엇입니까? 이름이 무척 기이하군요.”
 곽지산은 좌혼지의 차분한 성격이 마음에 든 듯 그의 질문에 자세하게 답변해 주었다.
 “품검대회란 일종(一種)의 비무대회(比武大會)일세. 일반 비무대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검(劍)을 익힌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것뿐이지.”
 곽지산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음성을 더욱 낮추었다.
 “자네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무언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겠나?”
 그의 말에 좌혼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연 한 가지 기이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이곳 취선거에는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武林人)들이 유달리 눈에 많이 띄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기들은 거의 대부분이 장검(長劍)이었다.
 많고 많은 병기들 중에서 유달리 검을 찬 사람들이 많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곽지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들은 거의가 다 이번에 단목세가(端木世家)에서 개최하는 품검대회에 참가하려고 모여든 군웅(群雄)들일세. 이번에 열리는 품검대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무림인들의 흥미를 끌고 있지. 그래서 이처럼 많은 군웅들이 항주로 몰려든 걸세.”
 곽지산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견식을 자랑하려고 작정을 했는지 열띤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단목세가는 상관세가(上官世家)와 함께 무림의 양대세가(兩大世家)로 꼽히고 있는 명문세가일세. 한데 얼마 전에 단목세가의 당금 가주(當今家主)인 신주검왕(神州劍王) 단목자우(端木子羽)가 한 가지 놀라운 일을 공표했지.”
 
 신주검왕 단목자우는 검(劍)에 관한 한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절정의 검객이었다.
 보름 전, 그는 자신의 단목세가에서 품검대회를 개최하겠다고 공언했다. 검을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무런 제약 없이 참가할 수 있고, 승부는 비무(比武)를 통해서 결정한다고 했다.
 하나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무림을 온통 술렁이게 한 것은 품검대회의 우승자에게 주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 알려지고 나서부터였다.
 품검대회의 우승자에게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의 영예와 함께 무림의 기보인 백홍검(白虹劍)을 주겠다는 것이다.
 백홍검은 무림 사상 최강(最强)의 병기로 꼽히는 절대사병(絶代四兵) 중에 속하는 희대(稀代)의 명검(名劍)이었다. 날카롭기가 가히 천하제일일 뿐 아니라, 백홍검의 검집에는 절대무쌍(絶代無雙)의 검학(劍學)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 검집의 비밀을 풀고 백홍검으로 검학을 전개한다면 천하의 어느 누구도 삼 초(三招) 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단목자우가 품검대회를 열겠다고 공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한 가지 엄청난 소문이 무림에 퍼졌네. 그 때문에 품검대회는 단순한 비무대회가 아니라 전(全) 무림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대사건(一大事件)으로 변해 버렸지.”
 곽지산은 눈을 빛내며 좌혼지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자네는 혹시 천년 무림 사상(武林史上) 가장 강했던 무적(無敵)의 검객(劍客)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나?”
 좌혼지는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번쩍 눈을 떴다.
 “곽 노인께서 말씀하신 분은 천검성자(天劍聖子)가 아닙니까?”
 곽지산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바로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신 천검성자 을지 대협(乙遲大俠)이시지.”
 그의 음성에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천검성자(天劍聖子) 을지민(乙遲民)!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사상 최강의 고수였다.
 백 년 전(百年前), 무림에 한 명의 검(劍)의 천재(天才)가 나타났다.
 그는 출도한 지 단 일 년 만에 강남제일검(江南第一劍)으로 불렸고, 삼 년 후에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언제나 단 일 검(一劍)만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의 일 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 년 동안 그는 무려 천이백마흔두 명의 고수와 싸웠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손 아래 일 초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오 년 동안 무림을 그야말로 독보천하(獨步天下)한 후에 쓸쓸히 탄식했다고 한다.
 - 적수(敵手)가 없는 세상은 메마른 사막과도 같다!
 그 후로 그의 모습은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다.
 단 일 검에 해를 가린다는 천검성자의 자취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전설이 생겨났다.
 천검성자가 고독한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자결을 했다느니, 보다 차원(次元)높은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했다느니...
 어떤 사람들은 천검성자가 상대조차 없는 무림에 환멸을 느끼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심산유곡에 은거해 버렸다고도 했다.
 하나 아무도 진정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다만 천검성자의 전설과도 같은 찬란한 행적만이 무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신화(神話)처럼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 그 천검성자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이네. 천검성자가 자신의 그 엄청난 절학(絶學)들을 하나의 동굴 속에 숨겨 놓았으며, 그 동굴을 찾는 자야말로 천검성자의 뒤를 이어 고금제일인이 된다는 것이네...”
 곽지산의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천년 무림 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천검성자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
 가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엄청난 일이 아닌가?
 “그 동굴은 천검동(天劍洞)이라고 하는데,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절지(絶地) 중의 절지에 있다고 하네. 그런데 그 천검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네 가지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백홍검이라는 것이지.”
 곽지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인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자네도 충분히 짐작이 가리라 믿네. 무림은 그야말로 일진광풍(一陣狂風)에 휩싸여 버렸지. 백홍검은 단순한 보검이 아니라 천검성자의 무공을 얻을 수 있는 열쇠인 것이네. 그래서 너도나도 백홍검을 얻기 위해서 단목세가로 몰려들고 있다네. 내가 듣기로는 오래전에 은거했던 기인이사(奇人異士)들도 이번에 거의 모두 무림에 다시 나왔다고 하더군. 무림은 그야말로 용이 날뛰고 범이 춤추는 격전장으로 변해 버린 느낌일세.”
 좌혼지는 묵묵히 곽지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천검동에 들어가기 위한 다른 세 가지 물건은 무엇입니까?”
 곽지산은 조금 신중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네...”
 갑자기 그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하지만 나는 우연히 그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지. 무림에서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채 다섯 명도 되지 않을 걸세. 하지만 자네에게는 특별히 알려 주지. 그것은...”
 좌혼지의 귓전으로 곽지산의 나직한 전음성(傳音聲)이 들려왔다.
 “통천서각(通天犀角)과 금루의(金縷衣), 그리고 선유조(仙遊鳥)라네.”
 좌혼지의 눈이 번쩍 빛났다. 곽지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좌혼지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한쪽에서 눈을 떼구르르 굴리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곽소홍이 불쑥 입을 열었다.
 “참, 할아버지! 고모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됐잖아요.”
 곽지산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내가 깜박 잊을 뻔했구나.”
 좌혼지가 그것을 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이 있으시다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곽지산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딸아이와 만나기로 한 걸 미처 생각지 못했네. 한데 자네는 이번 품검대회에 참가하려는가?”
 좌혼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두 참가할 텐데 저 같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이 어찌 끼어들겠습니까?”
 “하지만 구경하는 것쯤은 어떤가?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네. 이번처럼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앞으로 좀처럼 없을 걸세. 그러니 직접 참가하지는 않더라도 단목세가로 오게나. 우리도 그곳으로 갈 테니 인연이 닿으면 그곳에서 만날 수 있겠지.”
 좌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몸을 돌려 주루를 빠져나갔다.
 곽지산과 곽소홍은 그의 헌칠한 신형이 주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2
 
 그의 몸이 주루를 완전히 빠져나가자 곽지산이 다시 곽소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 말괄량이야. 또 무슨 수작을 하고 있는 게냐? 네 고모는 내일 만나기로 한 걸 잊은 건 아닐 텐데...”
 곽소홍은 방실방실 미소 지었다.
 “호호.... 물론이에요, 할아버지. 내 기억력이 좋다는 건 할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곽지산은 그녀의 뒤로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 말을 했느냐?”
 곽소홍은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조금 전의 그 잘생긴 아저씨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곽지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
 곽소홍은 작은 얼굴에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그 아저씨가 마음에 드시는 거죠?”
 곽지산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말이냐?”
 곽소홍은 그가 시치미를 떼자 귀여운 코를 찡긋거렸다.
 “흥... 난 다 알 수 있다구요. 할아버지가 그 아저씨에게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이 할아비 태도가 어땠는데?”
 곽소홍의 눈꼬리가 잔뜩 치켜 올라갔다.
 “정말 계속 잡아떼실 거예요?”
 곽지산은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발그레한 뺨을 꼭 쥐었다.
 “허허... 이제는 이 할아비가 소홍을 못 당하겠는걸. 그런데 그 일과 네가 거짓말을 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곽소홍은 두 눈을 샛별처럼 반짝이며 붉은 입술을 종알거렸다.
 “할아버지는 그 아저씨가 마음에 꼭 들었는데 솔직히 우리는 그 아저씨에 대해 이름 석 자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곽지산은 성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곽소홍은 그가 시인을 하자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저씨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옳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걸 안단 말이냐?”
 곽소홍은 눈을 찡긋하며 서슴없이 말했다.
 “그 아저씨의 뒤를 쫓아가면 되지요.”
 곽지산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를 미행하자는 말이냐?”
 곽소홍이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미행이 아니라 뒤를 밟자는 말이에요.”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곽소홍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아니에요. 그건 분명히 달라요...”
 곽지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난 다른 점을 찾지 못하겠는데... 그런데 지금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고 뒤를 밟는단 말이냐?”
 곽소홍은 조금 안심이 된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그건 제게 맡기세요.”
 곽지산은 더욱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네가 무슨 수로 그가 간 곳을 안단 말이냐?”
 곽소홍의 작고 귀여운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사실은 아까 그 아저씨와 할아버지가 이야기에 열중할 때 제가 그 아저씨의 소매에 천리향(千里香)을 살짝 뿌려 두었거든요.”
 그제야 곽지산은 곽소홍의 계략을 알고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소홍! 그렇게 말썽 부리지 말라고 했거늘 또다시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천리향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그렇게 함부로 사용한단 말이냐?”
 그가 의외로 엄하게 꾸짖자 희색(喜色)이 만면하던 곽소홍의 작은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 버렸다.
 “하.... 할아비지...”
 “여러 말 할 것 없다. 네가 이렇게 함부로 행동을 하니 내일 네 고모가 오거든 너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
 곽소홍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렸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뽀얀 물기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잉..... 잉.....!”
 그녀가 울자 이번에는 곽지산이 당황했다.
 “소... 소홍아...! 그런 일로 울기는... 자... 자... 울음을 그쳐라.”
 곽소홍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흐느꼈다.
 “흑...흑... 할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미워하니... 나는 어디 가서 콱 죽어 버리겠어요...”
 곽지산은 그녀의 어깨를 열심히 다독거려 주었다.
 “소홍아... 괜찮다. 이 할아비가 용서하마...”
 곽소홍은 울다 말고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그럼 집에 돌려보내지 않을 거죠?”
 곽지산은 쓰게 웃었다.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인데 탓해서 어쩌겠느냐? 그만 울음을 그쳐라.”
 그제야 곽소홍은 고개를 바짝 쳐들고 곽지산을 바라보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방긋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호호... 할아버지는 역시 최고야...!”
 그녀는 곽지산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곽지산은 내심 어이가 없어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멍하니 내려 보다가 너털웃음을 웃고 말았다.
 “허허... 채릉(彩陵)이 너보고 작은 여우라고 하더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곽소홍은 그의 품속에서 헤헤거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 아저씨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할아버지는 자꾸 이야기만 하고... 또 고모에게 소개시켜 주려고 생각했지요?”
 곽지산은 다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곽소홍은 생글생글 웃으며 앵두 같은 입술을 나불거렸다.
 “그것 봐요.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 말씀을 못 하시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뒤를 밟아 보자는 거예요. 고모에게 소개시켜 줘도 괜찮은 사람인지 알려면 그 수밖에는 없잖아요?”
 곽지산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아하니 너는 벌써 그를 네 고모의 짝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구나?”
 곽소홍은 배시시 웃으며 곽지산의 품속에서 뛰어나왔다.
 “그렇게 잘생긴 아저씨를 다른 여자에게 뺏긴다면 아깝잖아요? 할아버지도 내 생각과 같으면서...”
 곽지산의 얼굴에 고소(苦笑)가 떠올랐다. 사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나저나 네 고모의 괄괄한 성품으로 보아 일이 네 뜻대로 될지 의문이로구나.”
 곽소홍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건 나중에 걱정해도 돼요. 그보다 어서 그 아저씨의 뒤를 쫓아가요. 천리향 냄새가 없어지기 전에...”
 곽지산도 내심 좌혼지의 정체가 궁금했는지라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군. 일이 여기까지 됐으니 네 말대로 그를 따라가 보자꾸나.”
 그들 조손(祖孫)은 손을 잡고 주루를 빠져나왔다.
 주루를 나오자 곽소홍은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에요.”
 그녀는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곽지산도 그녀의 작은 몸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곽소홍은 몇 걸음 가다가는 다시 코로 냄새를 맡고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조그만 코를 움씰거리며 냄새를 따라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작은 사냥개 같았다.
 곽지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얼마를 갔을까?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던 곽소홍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데....?”
 “무슨 일이냐, 소홍?”
 곽지산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묻자 그녀는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렸다.
 “이곳에서 냄새가 없어졌어요. 아직 한 시진(時辰)이 지나지 않아 천리향의 냄새가 남아 있을 텐데...”
 그녀는 허공을 향해 이리저리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한 곳으로 달려갔다.
 “여기다!”
 그녀는 미약한 냄새를 따라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순간,
 “어마?”
 그녀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소홍!”
 곽지산이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대경실색해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러다가 그의 몸이 무엇을 보았는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입이 딱 벌어져 있다가 점차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허허... 하하하....!”
 마침내 그는 허리를 잡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얼마나 웃었는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일 뻔했다.
 곽소홍의 몸은 악취가 풍기는 쓰레기 더미에 거의 파묻혀 있었다.
 모퉁이를 도는 곳에는 바닥에서 한 자쯤 되는 곳에 가느다란 실이 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온갖 지독한 냄새를 뿜어내는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곽소홍은 급하게 모퉁이를 돌다가 실에 발이 걸려 그대로 쓰레기 더미 속으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쓰레기 더미가 가득 쌓인 담벼락에는 하나의 물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잘린 청의 소맷자락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장의 종이쪽지가 꽂혀 있었다.
 
 <냄새를 좋아하는 꼬마 아가씨에게.
 꼬마 아가씨가 내 몸에 뿌려 둔 향수(香水)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향수를 준비했소. 냄새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성의를 생각해서 웃으며 받아 주길 바라오.
 냄새를 싫어하는 아저씨가.>
 
 
 第 二 章 孤 竹 劍 令
 
 1
 
 호포사(虎跑寺).
 호포사는 항주의 성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었다. 주위의 경치가 뛰어나고, 불심(佛心)이 깊은 고승들이 많아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명승지였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갈 무렵.
 석양(夕陽)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호포사의 경내로 들어서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키가 헌칠한 청의 문사(靑衣文士)였다.
 청의 문사는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호포사 안을 거닐었다. 주위의 풍경은 듣던 대로 뛰어나기 그지없어 청의 문사의 발길은 어느새 호포사의 깊숙한 곳에 닿고 있었다.
 한데 그의 몸이 호포사의 뒤편에 있는 송림(松林) 근처로 다가갈 순간,
 “아미타불... 시주께선 잠시 걸음을 멈추십시오.”
 나직한 불호성(佛號聲)과 함께 송림 안에서 한 명의 승인(僧人)이 걸어 나와 청의 문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청의 문사는 별빛 같은 눈으로 승인을 주시했다.
 “스님. 무슨 일이십니까?”
 승인은 청의 문사의 얼굴을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죄송하지만 이곳은 주지(主持) 스님께서 수도를 하시는 곳이라 외인(外人)은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그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태도는 강경했다.
 하나 청의 문사는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승인은 같은 남자인데도 그의 미소를 보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미타불... 정말 준수한 인물이로고... 여난(女難)이 닥치겠구나.’
 승인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 청의 문사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주지 스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승인은 깜짝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주지 스님을요?”
 “그렇습니다.”
 승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허어... 주지 스님께서는 요 근래는 통 외인을 접견하지 않으시는데...”
 청의 문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품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어른의 손바닥만 한 죽검(竹劍)이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푸른색이 아니고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승인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주지 스님께 보여 드리면 저를 만나 주실 겁니다.”
 승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으나 청의 문사의 얼굴이 워낙 신중한지라 엉겁결에 죽검을 받아 들었다. 승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합장을 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청의 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인은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죽검을 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청의 문사는 얼굴에 여유 있는 미소를 띤 채 주위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후.
 조금 전의 승인이 재빠른 걸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승인은 청의 문사를 발견하자 더욱 빨리 다가왔다.
 “따라오십시오.”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청의 문사는 천천히 승인을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승인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하나 승인은 앞서서 가느라고 미처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송림을 지나자 한 채의 아담한 정실(靜室)이 나왔다.
 승인은 정실의 앞에 선 채 안을 향해 공손하게 합장을 했다.
 “주지 스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안에서 나직하면서도 인자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으로 모시고 너는 물러가 있거라.”
 승인은 청의 문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정실의 문을 열어 준 후 자신은 송림 속으로 사라졌다.
 청의 문사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정실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욱 간소했다.
 벽(壁)에는 아무런 장식물도 달려 있지 않았고, 방 안도 몹시 단출했다.
 중앙에 작은 탁자와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중 한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청의 문사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그 인물은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백미 화상(白眉和尙)이었다.
 백미 화상이 정중하게 몸을 수그리자 청의 문사가 급히 제지했다.
 “이러실 필요 없소.”
 백미 화상은 그가 제지하는 바람에 절을 하지 못하고 의자 옆에 공손히 시립했다.
 청의 문사의 얼굴에 고졸(古拙)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사, 너무 이러시면 제가 오히려 불편하외다. 편히 앉으시지요.”
 백미 화상은 그가 너무 난처해하자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령주(劍令主)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러면 이 늙은 화상이 죄를 짓겠습니다.”
 “하하... 죄라니 당치 않소. 나이로 따져도 대사는 나의 할아버지뻘인데 죄라면 오히려 내가 짓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백미 화상은 할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웃었다.
 “고죽검령주(孤竹劍令主)는 천하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인데 빈승이 이런 결례(缺禮)를 범한 걸 아신다면 선사(先師)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청의 문사도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백미 화상의 앞에 앉았다.
 “하하... 무림에서 신승(神僧)으로 추앙받고 있는 료료대사(了了大師) 앞에 앉은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영광이거늘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보다 몇 년 안 뵌 사이에 대사의 신수가 더욱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백미 화상, 무림에서는 천하제일신승(天下第一神僧)이라 불리는 료료대사는 청의 문사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령주의 용모는 점점 더 빛을 발하는군요. 허허... 자칫하다가는 검령주로 인해 무림에 한차례 평지풍파(平地風波)가 닥치겠구려.”
 “평지풍파라니요?”
 “허허... 검령주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을 여인들이 검령주를 만나 정(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다면 이게 바로 평지풍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청의 문사, 좌혼지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만하십시오. 말씀만 들어도 걱정이 앞섭니다.”
 “허허허....”
 료료대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몇 년 만에 검령주를 다시 뵙게 되니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오래 살게 되니 이런 기쁨도 맛보는군요. 한데 무슨 일로 다시 무림에 나오셨습니까?”
 그제야 처음으로 좌혼지의 얼굴에 미소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무거운 안색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료료대사는 이것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는 좌혼지를 지금까지 모두 다섯 번 보았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박 않으실 이분이 이렇게 침중하실까?’
 그는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으나 좌혼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좌혼지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료료대사를 주시했다. 료료대사는 바짝 긴장되어 그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좌혼지는 아까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사실은 한 가지 엄청난 일이 벌어졌소.”
 말과는 달리 그의 어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료료대사의 얼굴은 그 한마디에 납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 무거워졌다.
 “얼마 전에....”
 좌혼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료료대사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뜨였다.
 하나 그것은 이내 불안과 커다란 근심으로 침침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밀담(密談)을 나누었다. 말은 대부분 좌혼지가 했고, 료료대사는 주로 듣기만 했다. 때로 그는 궁금하거나 의혹이 있는 부분만 되물었을 뿐, 한마디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밀담은 거의 한 사진이나 계속되었다.
 밀담이 끝났을 때 료료대사의 얼굴은 더 이상 놀라거나 불안에 떨지 않았다.
 그는 탄복하는 눈으로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검령주의 신산묘계(神算妙計)에는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그의 음성에는 진정으로 경탄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하나 좌혼지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그는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계획에 조금의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오히려 일을 악화(惡化)시킬 뿐이오. 이번 일은 톱니바퀴처럼 들어맞지 않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소.”
 료료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검령주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일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오직 검령주만이 가능한 일이지요.”
 좌혼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나를 치켜세우지 마시오. 진짜로 칭찬을 들으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끔 노력했어야 했소.”
 “아미타불... 하늘의 일은 인력(人力)으로 어쩔 수 없는 법. 검령주께선 자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좌혼지는 착잡한 기색을 털어 버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그렇소. 이 일은 촉박하여 더 이상 시일을 늦출 수가 없소.”
 료료대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빈승에게 맡기신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늙은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좌혼지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 마시오. 이 일이 모두 끝나면 이곳에 와서 며칠 묵으려고 했는데 대사가 없으면 내가 무슨 낙(樂)으로 이곳에 오겠소?”
 료료대사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빈승에게 일이 닥치기 전에 아랫사람들에게 검령주를 깍듯이 모시라고 신신당부를 해 둘 테니까...”
 “나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의 시중은 받지를 못하오. 오직 대사만이 잘해 줄 거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좌혼지는 한동안 료료대사를 마주 보다가 고개를 까닥이고는 몸을 돌렸다.
 “잘 있으시오, 대사.”
 료료대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료료대사가 숙였던 허리를 폈을 때 좌혼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료료대사는 한동안 그가 사라졌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겁게 굳어 있었다.
 “흐음.....”
 그는 답답한 가슴속을 뚫으려는 듯 깊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료료대사의 정실을 나온 좌혼지는 잠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포사의 경내를 거닐었다.
 땅거미가 수림에 짙게 드리워져 더욱 어두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앞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모두 여인(女人)이었다. 아마 호포사에서 불공을 드리고 돌아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오른쪽의 여인은 화의(華衣)를 입은 소녀였다. 나이는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얼굴에 병색(病色)이 완연했고, 몸매가 나이보다 가냘파서 애처로워 보였다. 하나 커다랗게 반짝이는 두 눈은 지혜로운 빛이 가득했고,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화의 소녀는 왼쪽의 시비인 듯한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포사를 벗어나려다 좌혼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이 좌혼지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아.....”
 시비는 눈을 크게 뜨고 넋 나간 듯이 좌혼지의 준수한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화의 미소녀와 좌혼지의 눈빛이 잠깐 마주쳤다.
 순간 화의 미소녀의 병색이 가득한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화의 미소녀는 커다란 속눈썹을 가늘게 떨다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몸을 살짝 돌리며 걸어갔다.
 한두 걸음을 걷다가 그녀는 아직도 시비가 멍청하게 좌혼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시비의 팔을 툭 쳤다.
 그제야 시비는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종종걸음으로 화의 미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시비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두 여인은 무엇에 놀란 사람들처럼 빠른 걸음으로 호포사를 벗어났다.
 좌혼지는 잠시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에 아주 잠깐 보았을 뿐인 화의 미소녀의 커다란 눈이 뇌리에 어른거렸다.
 그녀의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좌혼지는 여인의 미색(美色)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인상이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그녀의 유난히 커다란 눈이 아주 지적(知的)이면서도 티 없이 깨끗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은 많지만 머리가 좋은 여인은 드물다.
 그리고 영리한 여인일수록 순진하기보다는 약삭빠른 법이다.
 좌혼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신선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한데 그가 막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문(寺門)을 나서려는 순간,
 “아악!”
 왼쪽 수림에서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좌혼지는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이 조금 전 두 여인이 걸어갔던 곳과 같은 방향임을 알고 눈을 번쩍 빛냈다.
 동시에,
 스으으으....
 발을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의 헌칠한 신형은 허공을 미끄러지듯 날아 수림으로 다가갔다.
 눈 깜박할 사이에 그의 몸은 무려 사십여 장을 날아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실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허깨비라고 믿을 만큼 놀라운 신법(身法)이었다.
 
 
  2
 
 수림 속으로 가늘게 뻗은 오솔길에 몇 개의 인영이 보였다.
 조금 전에 그의 앞을 지나갔던 두 여인은 네 명의 회의인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두 여인 중 비명을 질렀던 시비는 이미 한 명의 회의인의 손에 의해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화의 미소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네 명의 회의인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분은 무슨 일인가요?”
 그녀의 음성과 태도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회의인들은 화의 미소녀의 침착한 모습에 약간 움찔한 기색이었으나 곧 얼굴에 흉소를 떠올렸다. 그들 중 가장 왼쪽의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회의인이 징그럽게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흐흐.... 무례를 용서하시오. 우리는 단목세가에 일대재녀(一代才女)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진작부터 소저를 한번 뵙고 싶었소.”
 화의 미소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단지 그 일뿐인가요?”
 사마귀가 난 회의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흐흐... 소저를 잠깐 모셔 갔으면 하오.”
 화의 미소녀는 눈빛을 영롱하게 굴리다가 도톰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천동사살(川東四煞)께서 병약한 소녀를 어여삐 봐 주시니 고맙군요. 하지만 저는 지금 몸에 병(病)이 있어 네 분을 따라가지 못하니 양해해 주시기 바라요.”
 네 명의 회의인은 그녀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눈빛을 싸늘히 굳히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흐흐.... 한눈에 우리의 정체를 알아내다니 과연 단목 소저에 대한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구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시오. 단목가주(端木家主)께서 우리의 요구 조건만 들어주신다면 우리는 소저를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다시 단목세가로 보내 드리겠소.”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으로 보아 그들의 결심이 자못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화의 미소녀는 다시 물었다.
 “저의 아버님에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하시죠?”
 사마귀 회의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 절세(絶世)의 신병(神兵)이라는 백홍검을 한번 보았으면 하오.”
 그 말을 듣자 화의 미소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과연 그 일 때문이로군. 이런 일을 예상해서 상관 공자(上官公子)에게 마중을 나오라고 일러뒀거늘 왜 아직 오지 않는 걸까?’
 그녀는 조금 초조한 심정이 되었으나 일대의 재녀답게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 분께서 백홍검을 보고 싶다면 저를 붙잡고 승강이할 게 아니라 저와 함께 본가(本家)로 가시지요. 저의 부친께서는 기꺼이 네 분께 백홍검을 보여 주실 거예요.”
 “흐흐... 소저, 우리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시오. 지금 단목세가에는 천하의 고수(高手)들이 모조리 모여 있어 그야말로 용담호혈(龍潭虎穴)이 되어 있는 걸 우리가 모르는 줄 아시오? 아마 단목가주가 우리에게 백홍검을 주고 싶어도 다른 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회의인들은 서서히 얼굴을 굳히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하나 사방이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는지라 어디로도 피할 곳이 없었다.
 “단목 소저. 용서하시오. 단목가주께서 순순히 우리에게 백홍검을 준다면 소저를 곧 풀어 주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사마귀 회의인은 번개같이 화의 미소녀에게 덤벼들었다.
 팟!
 화의 미소녀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의 손에 격중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한데 회의인이 막 쓰러지려는 그녀의 몸을 안으려는 순간,
 “비겁하군! 천하의 천동사살이 무공도 모르는 여자에게 함부로 손을 쓰다니....”
 싸늘한 호통 소리와 함께 근처의 나무 위에서 한 인영이 섬전처럼 장내로 날아내렸다.
 천동사살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라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웬 놈이냐?”
 그들은 순식간에 상대를 에워쌌다.
 나타난 인영은 황의(黃衣)를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얼굴이 네모나고 눈빛이 날카로워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천동사살은 황의인의 얼굴을 보자 흠칫 놀란 표정이 되었다.
 “누가 감히 우리의 일을 방해하나 했더니 현현교(玄玄敎)의 적성수(摘星手) 진일강(秦日剛)이었군.”
 사마귀가 난 회의인이 냉기가 감도는 눈으로 황의인을 노려보았다.
 현현교는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사파(天下第一邪派)였다. 그들의 문하는 수천 명에 달했고, 세력은 강북(江北) 일대를 거의 석권하고 있었다.
 그들은 혜성처럼 나타나 강남(江南)을 제패한 정파(正派)의 영웅회(英雄會)와 함께 당금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으로 손꼽히고 있기도 했다.
 적성수 진일강은 현현교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절정 고수였다.
 천동사살이 비록 수십 년간 위명을 떨쳐 온 고수들이라고 하지만 강북의 패자(覇者)인 현현교의 고수인 진일강을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진일강은 천동사살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안색은 거의 무표정했다.
 “힘없는 아녀자를 공격하다니 천동사살답지 않은 일이었다.”
 천동사살의 눈꼬리가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흐흐... 진일강! 현현교의 이름으로 우리를 겁줄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누구든 우리의 일을 방해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진일강은 서서히 뒷짐을 진 양손을 풀었다.
 “그렇다면 긴말은 필요 없겠군.”
 천동사살은 서서히 두 눈에 살기(殺氣)를 띠며 그에게 조금씩 다가왔다.
 “흐흐... 진일강. 죽기를 자초하는구나.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동시에 그들의 몸은 네 줄기 회색 선(線)을 그리며 진일강을 향해 쏘아져 들었다.
 쐐쐐쐐!
 병기를 뽑은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허공에 도광(刀光)이 난무하며 진일강의 전신으로 무서운 도기가 날아들었다. 진일강은 두 눈을 딱딱하게 굳힌 채 가만히 그들이 공격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도기가 거의 자신의 몸에 거의 닿을 순간이 되어서야 양손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파파파파.....
 엄밀하게 그를 향해 다가오던 도기(刀氣)의 가운데에 구멍이 뚫리며 손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었다. 이상하게도 손그림자는 은은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조심해라.... 저것은 최심장(催心掌)이다...!”
 도기 속에서 경악에 가득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 순간, 이미 손그림자는 구멍 난 도기를 그대로 휩쓸고 말았다.
 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거푸 터져 나왔다.
 “크윽!”
 “끄아악!”
 천동사살 중의 두 명이 최심장의 가공할 장력(掌力)을 이기지 못하고 각기 가슴과 이마에 손도장[掌印]이 찍힌 채 훨훨 날아갔다.
 그들의 이마와 가슴뼈는 모두 산산이 으스러지고 심맥(心脈)마저 가닥가닥 끊어져 그들은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실로 무서운 위력이었다.
 “아.... 악독하구나...”
 사마귀가 난 회의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나 그가 미처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진일강의 쌍수가 무시무시한 음향을 내며 날아들었다.
 쑤아아앙!
 푸른 수영(手影)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 엄청난 위세에 살아남은 두 명의 회의인들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따따땅! 땅!
 도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破片)을 튀겼다.
 동시에,
 “끄윽!”
 “아아악!”
 나머지 두 회의인들도 피 분수를 뿜으며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쿵! 쿵!
 그들의 몸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각기 시퍼런 장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실로 너무도 어이없게도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천동사살이 간단하게 도륙이 난 것이다.
 진일강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네 구의 시신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천동사살을 몰살시켜 버린 그의 무공은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몇 배 더 무서운 것이었다.
 진일강은 천동사살이 모두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하고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화의 미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혈도(穴道)를 풀어 주려고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녀에게 손대지 마라!”
 날카로운 폭갈과 함께 허공에서 하나의 백영(白影)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빠르고 가공했는지 진일강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오른손을 황급히 위로 뻗었다.
 꽝!
 폭음이 터지며 답답한 신음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음!”
 놀랍게도 조금 전 그토록 무서운 신위(神威)를 보였던 진일강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고 있지 않은가? 진일강의 냉막한 얼굴에 한 줄기 경악의 기색이 어렸다.
 놀라기는 허공에서 날아내렸던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하구나. 한 손으로 내 벽공장(劈空掌)을 막아 내다니...”
 낭랑한 음성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화의 미소녀 옆으로 하나의 백영이 떨어져 내렸다.
 진일강은 차가운 눈으로 백영을 노려보았다.
 백영은 눈부신 백삼을 걸친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쭉 뻗어 올라간 짙은 검미(劍眉), 별빛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성목(星目), 태산준령처럼 우뚝 솟은 콧날과 여인의 그것처럼 붉은 입술...
 가히 절세의 미남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입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약간 오만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하나 그것으로도 그의 임풍옥수(臨風玉樹) 같은 모습을 가릴 수는 없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왼쪽 허리에 일곱 가지의 보석이 박힌 도(刀)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진일강은 그 특이한 모양의 칠성도(七星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냉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가 바로 상관세가(上官世家)의 소가주(少家主)인 경천도(驚天刀) 상관천록(上官天祿)이오?”
 백의 청년은 그가 단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자 약간 의외인 듯 눈꼬리를 슬쩍 치켜 올렸다.
 “내가 바로 상관천록이오.”
 그의 음성은 자신만만한 패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경천도 상관천록!
 그는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첫째 둘째를 다투는 절세의 기재(奇才)였다.
 단목세가와 쌍벽(雙璧)을 이루는 상관세가의 소가주일 뿐 아니라 도법(刀法)에 관한 한 젊은 층의 제일고수(第一高手)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더구나 준수한 용모로 인해 강남제일공자(江南第一公子)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상관천록은 별빛 같은 눈으로 진일강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귀하는 혹시 현현교의 자랑이라는 적성수 진일강이 아니오?”
 진일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상관천록의 준수한 얼굴에 한 가닥 엷은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실망이오. 천하에 명성을 자자하게 떨치고 있는 적성수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여인을 납치하려 하다니...”
 진일강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상관천록은 손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화의 미소녀를 가리켰다.
 “부인할 셈이오? 귀하가 단목 소저를 납치하려 했다는 것을...?”
 진일강은 그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상관 공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사실은 그 반대요. 천동사살이 그녀를 납치하려는 것을 내가 구한 것이오.”
 그의 말에 상관천록은 바닥의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는 천동사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시체의 몸에 나 있는 푸른색 장인을 보자 그의 눈빛이 조금 굳어졌다.
 “저것은 모두 당신의 작품이오?”
 진일강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소.”
 상관천록은 뜻밖인 듯 경탄 반, 조롱 반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마도(魔道)의 구대장력(九大掌力) 중 하나인 최심장을 익혔을 줄은 몰랐소. 보아하니 천동사살은 몇 초 버텨 보지도 못하고 모두 쓰러졌겠군. 하나 그렇다고 당신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소.”
 진일강은 궁금해서 물었다.
 “그건 왜 그렇소?”
 “단목 소저는 단목가주께서 애지중지하시는 금지옥엽(金枝玉葉)이시오. 더구나 단목가주는 성격이 괴팍해서 자신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소. 천동사살이 그것을 알고도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소. 다시 말하면 천동사살 따위는 감히 단목 소저를 납치할 담량이 없다는 말이오.”
 확실히 천동사살이 단목세가의 천금(千金)인 단목산산(端木珊珊)을 납치하려 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하나 분명 그것은 진일강 자신이 직접 목격한 엄연한 사실이지 않는가?
 진일강이 입을 다물고 있자 상관천록은 더욱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진상(眞相)은 이렇소. 틀림없이 당신은 단목 소저를 급습하여 제압했을 거요. 그때 마침 이 근처를 지나던 천동사살이 그 광경을 목격하자 당신은 비밀 유지를 위해 그들을 모두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한 거요.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이곳에 도착했더라면 당신은 단목 소저를 안고 유유히 사라졌을 게 분명하오.”
 진일강은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상관천록을 노려보다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단목 소저를 납치한단 말이오?”
 상관천록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야 그녀를 인질로 해서 단목세가의 백홍검을 취하려 한 게 아니겠소?”
 진일강은 그가 계속해서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자 불같은 노화가 끓어올라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거칠어졌다.
 “그렇다면 어쩔 테요?”
 상관천록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이제야 마각(馬脚)을 드러내는군. 단목 소저를 건드리려 했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지.”
 진일강의 음성도 곱지는 않았다.
 “흐흐... 당신 실력으로 말이오?”
 상관천록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특히 시시한 장력 하나를 믿고 함부로 인명(人名)을 살상하는 사파(邪派)의 조무래기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두 사람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은 서로 상대를 노려본 채 전신에 공력을 가득 끌어 올렸다.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인해 경천동지할 격전이 벌어질 찰나였다.
 갑자기,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의 눈앞에 청영(靑影)이 어른거렸다.
 “하하... 도저히 혼자서는 아까워서 구경을 못 하겠군. 다 큰 어른들이 별것도 아닌 일로 서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하다니...”
 그들은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놀라 흠칫 고개를 돌렸다.
 
 
 3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가? 그들의 전면에 한 명의 청삼 문사(靑衫文士)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얼굴을 보자 두 사람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같은 남자가 보고도 마음이 두근거릴 정도로 준수한 인물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임풍옥수같이 빛나던 상관천록의 용모가 빛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상관천록은 그동안 용모에 관한 한 천하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눈앞의 청삼 문사를 보자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묘한 시기심이 끓어올랐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청삼 문사를 응시했다.
 “귀하는 누구요?”
 청삼 문사는 그의 냉랭한 말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나는 처음부터 이번 일을 모두 목격했던 사람이오.”
 상관천록은 눈썹을 치켜떴다.
 “처음부터 이번 일을 목격했다고?”
 청삼 문사는 기이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주 자세하게.”
 상관천록은 그의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미소를 보자 더욱 기분이 상했다.
 “그러면 이자가 단목 소저를 납치하려는 것을 보았단 말이오?”
 “하하... 그 반대요. 이 사람은 분명 그녀가 납치당하려는 것을 구해 주었소.”
 상관천록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 정말이오?”
 청삼 문사는 여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소. 천동사살인가 뭔가 하는 네 명의 불한당들이 길을 막고 여인들을 습격하는데 마침 이분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친 것이오.”
 상관천록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소.”
 이 말에 진일강은 다시 인상이 험악해졌으나, 청삼 문사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하... 이번에는 내 말도 믿지 못하겠다는 거요?”
 상관천록은 단호하게 말했다.
 “귀하가 저자와 처음부터 일행인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그러니 내가 어찌 당신 말을 무작정 믿을 수 있겠소?”
 진일강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분명 저 사람을 지금 처음 보는 거요.”
 하나 상관천록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 두 사람을 모두 믿을 수 없소.”
 진일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는 설마 천하에 대명이 자자하고 강남제일공자로까지 불리는 경천도 상관천록이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인물일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노화가 끓어오르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때 청삼 문사가 껄껄 웃었다.
 “하하... 그렇게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왜 그녀를 깨워 물어보지 않는 거요?”
 상관천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청삼 문사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단목산산을 가리켰다.
 “그녀는 죽은 것도 아니고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오. 단지 혈도를 제압당했을 뿐이오. 그러니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보았을 게 아니겠소? 당신이 진작 했어야 할 일은 더 이상 그녀를 차디찬 바닥에 내팽개쳐 둘 것이 아니라 그녀의 혈도를 풀고 직접 그녀의 입으로 사건 전모를 직접 듣는 일이었소.”
 상관천록의 얼굴에 한 줄기 낭패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이 밉상스러운 인물을 쳐다보다가 단목산산에게 다가가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으음...”
 단목산산은 너무 오랫동안 혈도가 막혀 있었던지라 사지에 힘이 없는 듯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상관천록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오, 단목 소저! 마음이 너무 급하여 미처 소저를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소. 어디 다친 데는 없소?”
 단목산산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일로 상관 공자께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스러워요.”
 그녀는 이마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쓸어 올리며 조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 두 분의 말씀이 옳아요. 처음에 천동사살이 나타나 저를 납치하려고 했을 때 진 대협(秦大俠)께서 나타나 저를 구해 주셨어요.”
 상관천록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랬구려. 내가 조금 심했던 것 같군.”
 하나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미안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진일강은 상관천록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다시 화가 났으나 청삼 문사는 넉살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우리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을 해도 믿지 않더니 소저의 한마디에 금세 달라지는군. 과연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말밖에는 없군.”
 단목산산의 얼굴이 홍조로 붉게 물들었다.
 하나 상관천록은 심기가 상한 듯 싸늘한 눈으로 청삼 문사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그는 몸을 홱 돌리며 단목산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소저, 더 이상 차가운 바람을 맞지 말고 어서 돌아갑시다. 오늘 당한 일만 해도 소저의 병세(病勢)가 한층 악화되었을 거요.”
 과연 단목산산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창백해져 있었다. 게다가 이따금 몸을 가늘게 떠는 것이 오한(惡寒)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단목산산은 감사해하는 표정으로 진일강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진 대협께서 소녀를 도와주신 은정은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나실 때 저의 집에 들러 주신다면 오늘의 은혜를 백배 사례하겠어요.”
 진일강은 냉막한 얼굴에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움이라니 당치 않소. 오늘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밤바람이 차갑소.”
 단목산산은 송구스러운 듯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청삼 문사에게 향했다. 갑자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했던 그녀의 뺨에 엶은 핏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목을 발그스레 붉힌 채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대협께도...”
 청삼 문사가 빙그레 웃으며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너무 늦었소. 단목가주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가십시다.”
 질투에 가득 찬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상관천록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칠게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단목산산은 더 이상 말을 맺지 못하고 상관천록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몸을 돌렸다.
 “그럼....”
 그녀는 나직이 소곤거리며 상관천록과 함께 멀어져 갔다.
 진일강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놈이로군. 저런 자가 강남의 제일공자라니 강남에 인재가 얼마나 없는지 짐작이 가는군.”
 그는 고개를 돌려 청삼 문사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진일강은 청삼 문사가 자신이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준수한 미남자임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귀하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청삼 문사는 빙그레 웃었다.
 “신세랄 것까지야 없소. 나는 좌혼지라는 사람이오.”
 진일강의 냉막한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귀하가 아니었다면 그 오만방자한 놈과 한바탕 겨루었을 텐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미적지근한 싸움은 별로 좋아하지 않소. 더구나 그런 부류의 놈과는 더더욱 싸우지 않소. 괜히 내 손만 더럽혀질까 봐 그런 거요.”
 좌혼지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가 어떤 부류요?”
 진일강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뻔하지 않소? 명문정파(名門正派)의 후예랍시고 거들먹거리며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는 치들 말이오. 조금 전에 그자가 단목 소저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았소? 정말 구역질이 나는 걸 참느라고 혼났소.”
 좌혼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만 머금었다.
 진일강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다시 투덜거렸다.
 “정파란 작자들은 모두 저렇소. 무슨 일이든지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거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도 말이오.”
 좌혼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불쑥 말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진일강은 어리둥절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좌혼지는 두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충분히 심사숙고한 끝에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진일강은 더욱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좌혼지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진 형은 아직도 조금 전에 상관천록이 오해를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소.”
 “내 생각은 반대요.”
 진일강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가 모든 걸 알면서도 일부러 나를 범인(犯人)으로 몰았단 말이오?”
 좌혼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니 그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좌혼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야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진 형을 살해하고 자신의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오.”
 진일강은 펄쩍 뛰었다.
 “뭐라고요?”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진 형은 조금 전에 상관천록이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걸 기억하시오?”
 진일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했소?”
 “그는 천동사살 따위는 감히 단목 소저를 암습할 담량이 없다고 말했소.”
 그제야 진일강은 상관천록이 그 말을 한 것을 기억해 냈다.
 “아! 그렇군.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말이오?”
 “그 말은 사실 정곡(正鵠)을 찌른 것이었소. 천동사살은 분명 그들 단독으로 단목 소저를 납치할 배짱이 없는 인물들이오. 그런데도 그들은 단목 소저를 납치하려 했었소.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겠소?”
 진일강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손뼉을 탁 쳤다.
 “그렇군. 그들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겠군!”
 좌혼지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도 아주 바보는 아니구려. 그렇소. 분명 그들을 사주한 인물이 따로 있을 거요. 천동사살은 그 인물을 믿고 감히 단목세가를 건드릴 생각을 했던 거요.”
 진일강은 다시 궁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누가 그 배후 인물이란 말이오? 누가 감히 신주검왕 단목자우의 비위를 거스르는 줄 뻔히 알면서 단목 소저를 납치하도록 그들을 부추겼단 말이오?”
 진일강은 의혹을 참지 못하고 거듭 질문을 던졌으나 좌혼지는 느긋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내 알 수 있는 일이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는 없소.”
 “그게 누구요?”
 “바로 상관천록이오.”
 “뭣?”
 진일강은 너무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멍청하게 좌혼지를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는 단목 소저와 보통 친한 사이 같지 않던데 어찌 그럴 수가...”
 “잘 생각해 보시오. 단목 소저는 무림에서 일대재녀로 알려져 있소. 그런 그녀가 무림인들이 백홍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인질로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소?”
 좌혼지는 진일강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단목세가를 벗어날 때는 자신을 지켜 줄 호위를 거느리고 있어야 했소. 특히 이번처럼 수많은 무림인들이 근처에 득실댈 때는 평범한 여염집 여자라도 든든한 남자를 대동하는 법이오. 하물며 그녀같이 전 무림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단목세가의 천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소? 그런데 실제로 그녀는 어떻소? 그녀는 오직 무공도 모르는 시녀 한 명과 함께 외딴 이곳 호포사로 왔던 거요.”
 진일강은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는 생각할 수 없소. 하나는 누군가 비밀 호위가 눈에 보이지 않게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경우요. 한데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천동사살에게 위협당할 때 그 비밀 호위가 나타나지 않았을 리가 없소. 그러니 이건 아니오. 둘째는....”
 좌혼지의 음성이 조금 강해졌다.
 “누군가 이곳으로 그녀를 마중 나오기로 한 경우요.”
 “아!”
 진일강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마중을 온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 놓고 시비와 단둘이서 호포사로 불공을 드리려 왔던 거요. 한데 실제로 그는 마중을 오지 않았소. 아니, 너무 늦게 왔다고 해야 옳겠군.”
 “그럼 상관천록이 바로 그녀의 마중을 오기로 한 사람이란 말이오?”
 “상황으로 보아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소. 그녀는 상관천록에게 이곳으로 자신을 마중 나오라고 했소. 한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상관천록은 제때에 오지 않았고, 그때 마침 공교롭게도 천동사살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소. 그들은 당연히 그녀의 주위에 호위가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도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소. 그들은 이미 그녀에게 아무런 호위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요.”
 좌혼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모든 상황은 절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오. 천동사살을 배후에서 사주한 사람이 바로 상관천록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요. 상관천록은 단목 소저의 신임을 얻고 있는 것을 이용해서 그녀를 납치하려고 했소. 그래서 그는 그녀가 호포사로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을 기회로 삼으려고 작정했소. 하나 자신이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으므로 천동사살을 포섭하여 일을 시킨 거요. 그의 계획대로 단목 소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천동사살은 거의 그녀를 납치하는 데 성공할 뻔했소. 그때 마침 진 형이 등장한 거요.”
 그는 진일강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상관천록은 필시 숨어서 천동사살이 그녀를 납치하는 것을 득의만면한 채 지켜보고 있었을 거요. 그런데 난데없이 진 형이 나타나서 단 두 수만에 천동사살을 도륙한 것이오. 그가 진 형의 등장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그 당시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군. 필시 기절초풍할 정도로 깜짝 놀랐을 거요. 아울러 낭패했겠지. 그때 그는 다시 즉흥적으로 절묘한 계획을 떠올렸소. 바로 모든 걸 진 형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그녀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그는 그토록 진 형을 몰아세웠던 거요.”
 진일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후레자식 같은 놈이...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의 오해를 풀어 준답시고 계속 지껄여 댔으니...”
 “하하... 상관천록도 상당히 초조했을 거요.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늦게 마중 나온 것을 의심받을 테니까 그로서도 반드시 진 형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겠지.”
 진일강은 성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놈이 단목 소저를 납치하려 한 것도 바로 백홍검 때문이겠구려?”
 좌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요. 진 형도 알다시피 상관세가는 검이 아니라 도(刀)를 전문적으로 사용하고 있소. 그래서 그들은 이번 품검대회에 참가조차 할 수 없게 되었소. 하지만 천검동에 대한 유혹이 너무 강한지라 이런 편법(便法)을 이용하려 한 걸게요.”
 진일강은 조금 전 자신이 상관천록에게 혹독하게 추궁당한 걸 생각하자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좌혼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단목 소저의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이 나는군.”
 좌혼지는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진일강은 껄껄 웃었다.
 “하하... 이곳을 떠날 때 단목 소저가 좌 형을 바라보던 애틋한 눈빛이 떠오르는구려. 그것을 보니 아무래도 단목 소저는 한눈에 좌 형에게...”
 좌혼지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진 형도 보기보다는 짓궂은 사람이로군. 갑자기 쓸데없는 말을 하다니...”
 “하하... 쓸데없는 말인지 아닌지는 내일 단목세가에 가 보면 알게 될 거요. 단목 소저가 나를 더 반기는지 좌 형을 더 반기는지... 아무튼 좌 형은 자신의 얼굴을 탓할 수밖에 없소. 내가 여자라도 좌 형 같은 미남자를 한 번 보면 그대로 빠져들고 말 거요.”
 좌혼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진일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자! 갑시다. 상관천록인지 하는 무지렁이는 다음에 만나면 단단히 혼내 주기로 하고 오늘은 좌 형을 만난 기념으로 내가 한잔 사겠소. 우리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음껏 마셔 봅시다!”
 
 
 第 三 章 黑 顔 少 年
 
 1
 
 서호(西湖)의 호반(湖畔)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서호는 항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그림처럼 푸른 호수였다.
 주위에 청산(靑山)이 병풍처럼 둘러섰으며, 호수 물이 어찌나 맑은지 십여 장이나 되는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아름다움이란 달리 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서호의 북쪽에 고산(孤山)이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서 동쪽으로 약 오 리(五里)가량 호수를 가로지르는 산책길이 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백제(白堤)이며, 당(唐)의 대문호(大文豪)인 백거이(白居易)가 항주자사(抗州刺史)로 있을 때 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백제가 빤히 바라보이는 고산의 중턱에 한 채의 웅대한 장원이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무림이대세가(武林二大世家) 중의 하나인 단목세가였다.
 
 - 검풍단목세가(劍風端木世家)!
 
 단목세가는 예로부터 웅후한 검법으로 그 명성을 떨쳤거니와, 특히 당금 가주인 단목자우는 자타가 공인하는 절대검객(絶代劍客)이었다.
 서호의 아름다운 호반에 자리 잡은 단목세가는 오늘따라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단목세가의 정문으로 이르는 너비 오 장여의 거대한 길이 몰려드는 군웅들로 꽉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들은 거의 가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그들 중 유달리 검(劍)을 차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단목세가에서 개최하는 품검대회 때문에 몰려드는 군웅들의 행렬인 것이다.
 
 정오경.
 해가 막 중천으로 기를 쓰고 기어오를 무렵.
 인파들로 붐비는 단목세가의 정문 앞에 한 명의 꾀죄죄한 황삼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얼굴이 누리끼리했고, 턱에는 몇 가닥의 염소수염을 길러 볼품없는 인상이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양손만은 유난히도 하얗고 보드라웠다. 마치 여자의 손처럼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황삼 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정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노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끝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인물은 얼굴이 유달리 기다란 말상의 중노인이었다. 전신에 음침한 기색이 가득했고, 눈꼬리가 쭈욱 찢어져 올라가 왠지 음산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황삼 노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길... 저 노괴물(老怪物)도 이곳에 왔군. 보아하니 천검동의 유혹이 크긴 큰 모양이구나. 구대흉인(九大兇人) 중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혈조(血爪) 나귀(羅歸)까지 나타나다니...’
 황삼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의 눈이 무엇을 보았는지 잔뜩 부릅떠졌다.
 ‘저... 저 할망구는...’
 황삼 노인이 걷고 있는 곳에서 오 장 정도 떨어진 건너편에 한 명의 쪼글쪼글한 노파가 젊은 여인과 함께 걷고 있었다.
 노파는 허리가 구부정하고 왼손에는 자신의 키만 한 용두장(龍頭杖)을 들고 있었다.
 한데 그 얼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끼치도록 할 만큼 추악하지 않는가?
 노파의 얼굴은 온갖 병기에 그어진 듯 수십, 수백 가지의 징그러운 흉터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야말로 도저히 원래의 용모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상처들로 뒤덮여 있어 마음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주위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이 노파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몸을 피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사람의 벽(壁)으로 둘러싸인 길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한데 그와는 반대로 노파의 옆에서 얌전한 걸음걸이로 따라오고 있는 여인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뛰어난 미녀였다.
 노파와는 달리 키도 늘씬했고, 피부가 옥(玉)처럼 희고도 고왔다. 게다가 얼굴은 선(線)이 또렷하면서도 귀염성이 있어 보였다.
 그야말로 노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노파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고개를 바짝 쳐들고 당당하게 걷고 있는 반면, 미녀는 수줍은 듯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따라오고 있었다.
 황삼 노인은 조금 복잡한 눈으로 두 노소를 바라보았다.
 ‘칠살파파(七煞婆婆)가 다시 세상에 나올 줄은 몰랐군. 다시는 무림에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깊은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마침 주위를 둘러보던 노파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노파의 눈이 갑자기 커지더니 이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황삼 노인은 움찔하며 혀를 찼다.
 ‘이런 제기랄... 재수 옴 붙었군. 저 할망구가 나를 알아본 모양이니...’
 노파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두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황삼 노인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이쿠!”
 마침 길을 걷고 있던 몇몇 사람이 노파가 휘적휘적 내젓는 팔에 떠밀려 저만큼 밀려갔다.
 황삼 노인은 이것을 보고 방정맞게 다리를 달달 떨었다.
 ‘빌어먹을... 아직도 그때 일을 잊지 않은 모양이군. 그동안 저 지랄 같은 성미가 좀 나아졌나 했더니 그대로군그래.’
 황삼 노인은 피할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했다.
 그때 마침 그의 눈에 바로 근처를 지나가는 한 청삼 문사가 들어왔다.
 황삼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 이렇게 잘생긴 놈이 다 있지....? 옳지. 그러면 되겠군!’
 황삼 노인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내심 쾌재를 부르며 급히 청삼 문사에게 다가갔다.
 “노제(老弟)! 이곳에 있었군.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지 뭔가?”
 그는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다짜고짜 청삼 문사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정말 반갑네그려.”
 청삼 문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생면부지의 노인이 불쑥 다가와 아는 척을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누구신지....”
 황삼 노인은 그가 더 말하려는 것을 급히 막으며 더욱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지금 급한 볼일이 있어 급히 어디를 가야 하니 우리가 자주 만나는 그 장소에서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하세.”
 청삼 문사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황삼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삼 노인에게 다가오던 노파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더욱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곁눈질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황삼 노인은 절로 다급해져서 주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럼 노제! 조금 있다 만나세.”
 그는 청삼 문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후 급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노파가 마구 사람을 밀치고 달려오며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이 망할 놈의 소가(蘇家)야! 어딜 도망가느냐?”
 그녀는 마치 성난 준마처럼 거친 숨결을 토하며 황삼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왔다.
 하나 황삼 노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인파 속에서 노인의 낄낄대는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헤헤... 두 소저(杜少姐)! 그동안 더욱 젊어진 것 같구려. 하지만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할 말이 있거든 내 노제에게 하시오....”
 그의 마지막 말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노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마구 사방을 휘적거렸으나 황삼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성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용두장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 생쥐 같은 늙은이! 어서 썩 나오지 못해?”
 쾅!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그녀의 사람 키만 한 용두장이 손잡이만 남고 모두 땅속에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주위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중인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노파가 밀치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졌던 몇몇 인물들은 막 성을 내려고 하다가 노파의 무시무시한 공력을 보고는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 슬금슬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식식... 이 소가 쥐새끼야! 네놈이 십 년 전에 한 짓을 내가 잊었는 줄 아느냐?”
 노파는 미친 사람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가뜩이나 으스스하던 노파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하자 완전히 나찰악귀(羅刹惡鬼) 같았다.
 그러다가 노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번쩍 몸을 돌렸다.
 “그렇지. 그놈의 노제가 있다고 했지. 그놈을 족쳐 보면 그 늙은 생쥐를 찾을 수 있겠지!”
 휙!
 무언가 희끗한 것이 중인들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노파의 몸은 어느새 조금 전의 청삼 문사의 코앞에 가 있었다.
 정말 가공(可恐)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신법이었다.
 청삼 문사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노파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단단히 당했군.”
 노파는 무서운 눈으로 청삼 문사를 잔뜩 노려보다가 갑자기 두 눈이 동그래지며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놈이 있다니...’
 그녀는 성을 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청삼 문사의 절세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용모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라오던 미소녀도 청삼 문사의 얼굴을 취한 듯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청삼 문사의 별빛 같은 눈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주위에 있는 중인들도 연신 청삼 문사의 얼굴을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청삼 문사를 바라보고 있던 노파가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노파의 음성은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게다가 얼굴에 떠오른 표정까지도 언제 성을 냈느냐 싶게 온화했다.
 청삼 문사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좌혼지라 합니다.”
 노파는 그의 웃음을 보자 더욱 그가 마음에 드는 듯 쪼글쪼글한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호홋... 정말 좋은 이름이로군. 노신(老身)은 두추랑(杜秋娘)이라고 하네.”
 그녀는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한데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두..... 두추랑!”
 “으.... 치... 칠살파파다!”
 주위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중인들의 틈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칠살파파 두추랑!
 그녀는 수십 년간 한 자루 용두철장으로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온통 헤집고 다녔던 일대의 고수였다. 더구나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화급한 성미 때문에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데 십여 년 전부터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그녀가 이곳 단목세가에 나타난 것이다.
 
 두추랑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자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결혼을 했는가?”
 좌혼지는 난데없는 그녀의 질문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두추랑의 추악한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 잘됐군.”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수줍은 표정으로 서 있는 미소녀를 잡아끌었다.
 미소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녀의 손에 억지로 끌려 나왔다.
 “이 아이는 내 손녀인데 두옥향(杜玉香)이라고 하네. 모두 젊은 사람들이니 서로 잘 지내보도록 하게.”
 그제야 좌혼지는 그녀의 의중을 짐작하고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쓴웃음만 짓고 있자 두추랑의 쌍심지가 치켜 올라갔다.
 “왜 내 손녀와는 인사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녀의 음성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좌혼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고는 미소녀에게 포권을 했다.
 “두 소저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좌혼지라고 합니다.”
 두옥향은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푹 수그린 채 목까지 새빨개져 좌혼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두추랑이 그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아!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받아야지.”
 두옥향은 움찔 놀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두옥향이 좌 공자를 뵙습니다...”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두추랑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제야 두추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호호.... 이 아이가 수줍음이 많기는 해도 숙맥은 아니니 앞으로 자네가 잘 보살펴 주도록 하게.”
 그야말로 완전히 두옥향을 좌혼지에게 맡기겠다는 투였다.
 좌혼지는 할 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두추랑의 뒤에 숨어 있던 두옥향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그를 쳐다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두추랑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그녀의 눈빛이 조금 굳어졌다.
 “한데 자네는 언제부터 그 늙은 생쥐를 알게 되었나?”
 좌혼지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늙은 생쥐라니요?”
 그녀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지 음성이 퉁명스럽게 변했다.
 “조금 전의 그 늙은 소가 놈 말일세. 도둑질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쥐 같은 늙은이!”
 좌혼지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은 그 노인을 모릅니다.”
 두추랑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모른다고?”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보기 전까지는 생전 만난 적이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제야 두추랑은 자신이 그 황삼 노인의 꼬임에 빠졌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제 알겠군... 그 늙은 생쥐가 내 손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생면부지인 자네를 이용한 거야. 이런 때려잡아 죽일 늙은이 같으니라구...”
 그녀는 여자의 입으로는 담기 어려운 욕을 마구 내뱉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조금 퍼졌다.
 ‘그래도 그 덕분에 이런 훌륭한 손주 사윗감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그녀는 좌혼지를 연신 살펴보며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그때 문득 그녀의 귓전으로 늙수그레한 전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헤헤... 두 낭자! 내가 아니었으면 어디 가서 그런 미끈한 손주 사윗감을 구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그걸 봐서라도 옛날 일은 용서해 주시구려.”
 두추랑의 안색이 다시 험악해지며 주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나 어디에도 황삼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음성이 다시 그녀의 귓전에 울려왔다.
 “두 낭자가 끝까지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생각이 있소. 그 좌(左)가인지, 우(右)가인지 하는 녀석을 다른 여자에게 소개시켜 줄 테니 그리 아시오.”
 두추랑은 움찔하여 몸을 굳혔다.
 ‘이 소가 늙은이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직도 좌혼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두옥향을 바라보았다.
 두옥향은 확실히 아름다운 소녀였다.
 ‘하나 이 계집애는 성질이 너무 온순하고 수줍음이 많아 탈이지... 다른 년들이 이놈에게 눈이 뒤집혀서 적극적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그냥 뒷전으로 물러나고 말지 모르지...’
 두추랑은 서서히 안색을 폈다.
 아무래도 과거의 원한보다는 미래의 손주 사위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사람들 틈에 숨어서 두추랑의 얼굴 표정을 훔쳐보았는지 황삼 노인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전음으로 들려왔다.
 “헤헤... 두 낭자! 마음을 푸신다면 고맙소. 내가 적극적으로 두 사람이 맺어지도록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번에는 진짜로 사라지는지 그의 음성이 점차 작아졌다.
 두추랑은 그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맥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좌혼지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선배님께서 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두추랑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와 같이 가야지.”
 그녀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두옥향도 간절한 눈으로 좌혼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좌혼지는 난처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옆에 바짝 붙어 있었던 진일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좌혼지가 주위를 둘러보니 저쪽에서 진일강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진일강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듯한 중년인이었다.
 검은 수염을 턱 밑으로 기르고 이목이 청수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좌혼지의 시선을 느꼈는지 진일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진일강은 좌혼지에게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손짓을 하고는 검은 수염의 중년인과 함께 몸을 돌렸다. 막 인파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우연인지 검은 수염의 중년인이 힐끗 고개를 돌려 좌혼지를 쳐다보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들의 몸은 이내 사람들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좌혼지는 눈을 빛내며 잠시 우뚝 선 채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검은 수염의 중년인이 떠나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 표정이 좌혼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살기(殺氣), 바로 그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중년인이 무엇 때문에 좌혼지에게 살심(殺心)을 품고 있단 말인가?
 또 진일강과 그자와의 관계는 무엇일까?
 진일강도 또한 그자와 마찬가지로 좌혼지에게 흉심(兇心)을 가지고 있을까?
 좌혼지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생각할 게 뭐 있나? 아무 소리 말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세.”
 두추랑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좌혼지는 고개를 막 저으려다가 힐끗 고개를 돌려 한쪽에 말없이 서 있는 두옥향을 바라보았다.
 두옥향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인 채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다가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좌혼지는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나직이 탄식을 했다.
 ‘료료대사의 말대로 내가 또 잔잔한 여심(女心)에 평지풍파를 일으켰군...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는 싫었는데...’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가 승낙을 하자 두옥향의 시무룩했던 얼굴이 활짝 피듯 환해졌다.
 그녀는 입가에 기쁜 미소를 매달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좌혼지를 주시했다. 마치 시들었던 꽃봉오리가 다시 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두추랑은 상처투성이의 얼굴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신이 나서 외쳤다.
 “호호... 그럼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그녀는 좌혼지의 마음이 바뀔까 봐 급히 그의 소매를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두옥향은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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