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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유성검 [E]

유성검 1권-1

2014.12.30 조회 1,652 추천 12


 서 장
 
 <성명: 혁우곤(赫宇坤).
 별호: 칠절마검(七絶魔劍).
 특징: 빛살 같은 칠채비홍검(七彩飛虹劍)으로 수십 년간 화북제일(華北第一)의 고수로 군림. 절세의 외공(外功)인 금강현마공(金剛玄魔功)을 연성해 전신이 도검불침지신(刀劍不侵之身)이고, 주위에 사살(四殺)이라 불리는 네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항상 잠복해 있다.
 취미: 고대(古代)의 명화(名畵) 수집.
 약점: 금강현마공의 유일한 조문(罩門: 치명적인 약점)은 입천장. 하나 결코 입을 연 적이 없으므로 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함.>
 
 와락!
 창백한 손 하나가 종이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음성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고?”
 
 ***
 
 혁우곤은 짙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며, 일명 꾀주머니라고 불리는 지다성(智多星) 소요풍(蘇遙豊)은 더욱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저 노인이 가지고 온 것은 분명히 북송(北宋)의 곽희(郭熙)가 그린 그 유명한 ‘산장고일도(山莊高逸圖)’입니다.”
 혁우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전면을 주시했다.
 그가 앉은 태사의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듬이 수북한 반백(半白)의 머리, 금시라도 꺼질 듯한 흐리멍덩한 동공, 주름지고 갈라진 얼굴에는 피로와 가난에 찌든 빛이 역력했고 몸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부귀나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노인이었다.
 이런 노인이 북송의 대화가인 곽희의 그림을, 그것도 그의 삼대걸작(三大傑作) 중 하나라는 ‘산장고일도’를 가지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소요풍은 혁우곤의 마음을 짐작이나 하는 듯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노인이 그림을 입수한 경위도 알아 두었습니다. 그는 사십 년간이나 낙양(洛陽)에서만 만보화점(萬寶畵店)이라는 골동품상을 경영하는 조노이(曹老二)입니다. 이십 년 전 우연히 안색이 유달리 창백한 낙척문사(落拓文士) 하나가 그 그림을 가지고 와서 백 냥에 팔겠다고 찾아왔답니다. 조노이는 한눈에 그것이 그 유명한 곽희의 ‘산장고일도’임을 알고 두말하지 않고 그 그림을 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만보화점이 화재로 소실되어 살길이 막막해지자 그동안 비장해 두었던 이 그림을 팔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소요풍은 뾰족한 혀끝으로 입술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저는 사람을 풀어 낙양에 분명히 만보화점이라는 골동품상이 있었고, 얼마 전 그것이 화재로 불타 버렸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이십 년 전 그림을 팔았다는 낙척문사의 소재는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만, 제가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곽희의 후손이 아닌가 합니다. 곽희는 대대로 하남성(河南省)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혁우곤은 보일 듯 말 듯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시일 내에 이런 정도로 치밀하게 조사를 한 것은 소요풍이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 이런 수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얼마쯤 흐뭇한 마음이 들 것이다.
 하나 혁우곤은 수고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는 절대로 입을 연 적이 없었다. 식사를 할 때도 주위에 사람을 물리치고 턱 밑까지 내려오는 도검불침의 특수한 망사를 썼다. 또한, 그는 자신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심복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십 장 이내로 타인을 접근시킨 적도 아직까지 없었다.
 그는 십 장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설사 상대가 천하제일의 고수라 할지라도 자신이 피하기 전에 자신의 입을 찌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금도 그는 정체 모를 노인이 가지고 온 희귀한 고화에 정신을 빼앗기면서도 노인을 살펴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수십 년에 걸친 풍부한 강호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노인은 무공이라고는 아예 접해 보지도 못한 평범한 늙은이 임이 분명했다.
 그의 태사의의 사방에는 사살(四煞)이라 불리는 네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잠복해 있었다.
 게다가 노인과의 거리는 십이 장이나 되었다.
 만에 하나, 노인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온 살수(殺手)라 할지라도 그들을 뚫고 자신에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접근했다 할지라도 혁우곤 자신이 스스로 입을 벌리지 않는 이상 그의 유일한 약점인 입천장을 찌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혁우곤은 안심하고 노인을 부른 것이다.
 그는 소요풍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소요풍은 다시 입을 놀렸다.
 “노인은 이 그림의 값으로 천오백 냥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 그림을 주인님께만 직접 보여 주겠다고 하며 그 즉시 승낙 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합니다.”
 혁우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가난한 노인으로서는 자신의 귀중한 돈벌이가 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보여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혁우곤의 눈짓을 받자 소요풍은 노인에게 다가서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시오, 조노이.”
 노인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초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혁우곤의 싸늘한 눈길을 받자 움찔하며 금세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노인의 주름진 손에는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낡은 종이가 둘둘 말려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소중하게 쓰다듬다가 떨리는 손으로 소요풍에게 내밀었다. 소요풍은 그것을 빼앗듯 움켜쥐고는 다시 혁우곤에게로 돌아왔다.
 혁우곤은 소요풍이 두 손으로 공손히 내민 화선지를 집어 들었다.
 종이를 펴 본 혁우곤의 눈에 흡족한 빛이 떠올랐다.
 그림은 과연 곽희의 ‘산장고일도’가 분명했다.
 그 곽희의 독보적인 특징인 영웅적인 형태의 그림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뻗어 올라간 웅장한 산(山)과 그 아래의 한적한 초가집을 그린 그림이었다.
 혁우곤은 한동안 정신없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한데 그때 그림의 한가운데에 빨간 반점이 일어났다.
 혁우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다.
 화르륵!
 그 순간, 종이 전체가 시뻘건 불길이 되어 타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 불길은 너무도 재빨리 타올라 혁우곤은 미처 손을 떼지 못하고 그 불길에 손을 데고 말았다. 금강현마공을 연마해 전신이 금강불괴(金剛不壞)처럼 되어 버린 그로서도 참기 어려운 지독한 열기가 뿜어 나왔다.
 “앗 뜨거!”
 그는 엉겁결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스윽!
 십여 장 밖에서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실거리고 서 있던 노인의 몸이 희끗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혁우곤은 무엇인가 서늘한 것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벌려진 자신의 입천장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크아악!”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요풍이 무엇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기도 전에 혁우곤은 입부터 뒤통수까지 날카로운 것에 꿰뚫린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순간 소요풍은 분명히 보았다.
 노인의 낡은 소맷자락에서 무언가 시커먼 것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것을……
 콰쾅!
 동시에, 혁우곤이 앉아 있던 태사의의 네 귀퉁이가 박살이 나며 네 명의 검은 인영이 섬전과도 같이 튀어 올랐다. 그들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노인이 서 있는 곳으로 덮쳐 갔다.
 하나...
 “아……!”
 그들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느 사이엔가 그 비루먹은 듯한 늙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거릴 순간에 살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십여 장을 격(隔)해 살인을 하고 어느새 사라지다니…….”
 소요풍을 비롯한 네 명의 절정 고수들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목구멍이 관통되어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는 혁우곤의 흉악한 시체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혁우곤의 두 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不信)과 경악으로 가득했다.
 이것으로 화북 지방을 삼십여 년간이나 주름잡았던 칠절마검 혁우곤은 당금 강호(江湖)를 온통 공포(恐怖)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정체 모를 ‘신비한 살인자(殺人者)’의 서른두 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第 一 章 男 妹 有 情
 
 1
 
 소호(巢湖)의 물은 끝없이 푸르렀다.
 조무상(曹無傷)은 무심한 눈길로 칠리하(七里河)의 물결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호의 물줄기가 만년을 두고 적시어 온 칠리하! 날씨가 맑은 날이면 칠 리(七里)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은사(銀沙)를 쌓은 듯한 고운 모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지금 그의 눈에는 안개에 휘감긴 호수만이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호수 위에는 그의 그림자가 담겨 있고, 그의 허무한 눈에는 드넓은 호수가 담겨지고 있었다.
 새벽의 호수는 한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물안개로 자신의 모습을 감싼다.
 안개에 싸인 호반(湖畔)…… 푸른 호수 물에 허리를 담근 채 하늘어진 갈대들…… 호수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바로 지금처럼 서서히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뽀오얀 물안개를 피우며 모습을 보일 듯 말 듯 할 때이다.
 조무상은 죽간(竹竿) 하나를 호수에 담가 놓고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흑의.... 헝클어진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눈길……
 안개에 싸인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내음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한동안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조무상의 손이 어느 순간 가볍게 움직였다. 그의 손은 흑의와 비교되어 유달리 창백했다. 손마디가 길고 가느다라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불쑥 내밀어 호수에 담겨 있던 죽간을 움켜잡았다.
 파르르……
 생명의 힘찬 고동을 전하듯 낚싯줄이 요란한 진동을 일으켰다.
 파앗!
 호수 물이 튀어 오르며 커다란 은어(銀魚) 한 마리가 요동을 치며 그의 죽간에 끌려 올라왔다.
 조무상은 말없이 낚싯줄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아무런 느낌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그는 낚싯줄을 끌어 올려 은어를 잡고는 입에 물린 미끼를 풀고 은어를 다시 호수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호수 물에 죽간을 드리운 채 멍청히 앉아 있었다.
 한 건(件)의 청부(請負)를 마친 후면 그는 항상 이곳에 나와 죽간을 드리웠다.
 아침 안개에 싸여 조용히 홀로 앉아 물고기들의 유연한 움직임을 지켜보노라면 그 순간만은 자기의 모든 고뇌와 번민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물고기들과 동화되어 함께 유연하게 물속을 노니는 것 같았다. 어쩌면 피로 물든 자신의 영혼(靈魂)을 그것으로 씻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낚시질을 하는 방법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똑같았지만 그 목적만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그는 남들처럼 고기를 많이 낚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 파드득거리는 모양을 보기를 좋아했다.
 물고기마다 그 파드득거리는 모양이 제각기 다르다.
 마치 사람처럼……
 사람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는 그 공포에 떠는 표정과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그는 수없이 많은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 살려고 파드득거리는 것을 보아 왔다. 또한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아 왔던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최후의 순간을 지켜보아 왔었지만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바로 최근에 죽은 그자의 모습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자는 기이한 외문무공(外門武功)과 네 명의 호위만을 믿고 너무 자신에 차 있었다.
 하나, 그자의 죽어 가는 순간만은 지금까지의 찬란했던 그의 행적과는 달리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진실한 실력에 의자하지 않고 요상한 방문좌도(傍門左道)의 무공이나 호위 무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자들을 조무상은 가장 경멸해 왔다.
 어느새, 호수 저편 멀리서 조금씩 붉은 일륜(日輪)이 떠오르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보고 있던 조무상은 주섬주섬 죽간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죽간을 어깨에 메고 우뚝 서니 무척 헌칠한 키였다. 회초리처럼 날렵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물체였다.
 호반의 우측으로는 작은 소로가 나 있었다.
 그는 차가운 아침의 안개에 섞인 신선한 공기를 흡입하며 천천히 소로를 걸어갔다.
 얼마쯤 걸어가니 수림에 둘러싸인 작은 초옥(草屋)이 나왔다. 초옥은 호수에서 나는 갈댓잎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이었다.
 조무상은 초옥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자랐을까?
 소로의 중간쯤에 패랭이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작고 가는 선형(線形)의 패랭이꽃은 담홍색의 화사한 꽃봉오리 하나를 피우고 있었다.
 조무상은 허리를 굽혀 패랭이꽃을 꺾어 들었다.
 그런 채 잠시 그 꽃의 향기를 음미하다가 꽃을 손에 쥔 채로 초옥으로 들어갔다.
 삐걱!
 초옥의 앞에 엉성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립문이 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때 방 안으로부터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예요?”
 그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없어 나약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하나 꾀꼬리처럼 영롱한 울림을 띠고 있기도 했다.
 그 음성을 듣자 무표정하고 허무함으로 가득 찼던 조무상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비록 금시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으나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조무상은 죽간을 벽의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좁고 답답했다. 하나 아늑하면서도 정갈한 데가 있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한 소녀가 길게 누워 그가 들어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열네 살쯤 되었을까?
 한창 꽃처럼 피어오를 나이이건만 소녀의 얼굴에는 병색(病色)이 완연했고, 몸은 허약해 애처로움을 불러일으켰다. 하나, 쭉 뻗은 눈썹과 그 밑으로 반짝이는 샛별 같은 눈, 오뚝한 콧날과 창백한 피부 때문에 유달리 붉게 보이는 도톰한 입술 등은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렇게 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조무상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곁에 앉았다.
 “유향(有香), 오늘은 어떠냐?”
 그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독특한 음색(音色)을 띠고 있었다.
 소녀, 조유향(曹有香)은 친근감과 신뢰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조무상을 올려다보다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오늘은 한결 나아졌어요. 어제 오빠가 가져온 약을 마신 후로는 몸이 훨씬 개운해진 것 같아요.”
 “나아졌다니 다행이군.”
 조무상은 온화한 음성으로 소곤거린 후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불쑥 그녀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조유향의 눈이 커다래지며 창백하던 안색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 패랭이꽃이군요! 어쩜…….”
 그녀가 웃자 방 안이 환해지며 화사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조무상은 차가운 얼굴에 언뜻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호수에 갔다가 오다 보니 길옆에 피어 있더군. 너를 닮아 아주 예쁘고 귀엽더구나.”
 조유향은 두 눈을 별처럼 반짝거리며 손을 내밀어 그의 손에서 패랭이꽃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목은 금시라도 부러질 듯 가느다랗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시퍼런 힘줄이 그대로 드러나 보여 섬뜩하기조차 했다.
 하나 그녀는 패랭이꽃을 손에 들고는 취한 듯 그 담홍색의 꽃봉오리를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패랭이꽃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석죽(石竹)’이라고 하며, 달리 ‘천국(天菊)’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가 태어난 때도 패랭이꽃이 피는 가을이었고, 그녀가 불치(不治)의 병을 얻어 쓰러진 곳도 패랭이꽃이 만발한 뒷동산이었다. 거친 야산(野山)이나 들판에서 홀로 피었다가 가을 한철에 진홍색의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터뜨리고는 사그라지고 마는 패랭이꽃은 인생의 한창 아름다운 시절을 병석에 누워 보내는 그녀의 처지와 너무도 흡사했다.
 한동안 창백한 뺨에 엷은 홍조를 띠며 정신없이 패랭이꽃을 바라보고 있던 조유향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어리기 시작했다.
 “패랭이꽃이 핀 걸 보니 벌써 가을이 다가왔군요.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녀의 음성은 어린 소녀의 음성답지 않게 쓸쓸한 것이었다.
 조무상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메어 왔다.
 그녀는 칠절단혼산맥(七絶斷魂散脈)이라는 희귀한 절맥에 걸려 십오 세를 넘기지 못하는 시한부 생명이었다.
 그들은 고아였다.
 조무상의 나이가 열세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어린 유향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병마(病魔)에 쓰러져 갔다.
 그리고 삼 년 후, 그녀가 불치의 절맥에 걸린 것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 조무상은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를 했었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향의 병을 고쳐 주고야 말겠다!
 
 그녀를 완치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의 지금까지의 인생은 오직 그것을 위해서 바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 아무리 백방으로 찾아보아도 칠절단혼산맥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원래 칠절단혼산맥이란 인체 내에 있는 일곱 가지의 중요한 맥(脈)이 끊어진 것으로, 오음절맥(五陰絶脈)이나 태양절맥(太陽絶脈) 같은 난치병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었다.
 조무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녀의 병세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그녀가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게끔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는 데만도 상당한 돈이 들어갔다.
 겨우 이 년 전에야 조무상은 칠절단혼산맥을 완치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영약(靈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한 가지, 한 가지는 모두 인세(人世)에 보기 힘든 무가지보(無價至寶)로서 억만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그는 그 영약을 구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얼마 전에야 간신히 그중 한 가지인 ‘만령신과(萬靈神果)’를 입수할 수 있었다.
 하나, 이제 올해가 지나면 조유향은 더 이상 살지 못한다.
 칠절단혼산맥에 걸려서 십오 세 이상을 산 사람은 아직 없었다.
 조무상이 초조해지고 고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조무상은 자신의 이런 마음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에게 물었다.
 “유향. 전에 이 오빠가 너에게 약속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조유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무상은 두 눈을 빛내며 그녀의 가녀린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때의 약속대로 내년에는 반드시 네가 밖에 나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강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조유향의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그녀는 신뢰에 넘친 눈으로 조무상을 올려 보며 나직이 소곤거렸다.
 “오빠를 믿어요.”
 “그래야지.”
 조무상은 그녀의 뺨을 사랑스러운 듯 가볍게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유향의 눈에 서운한 빛이 가득 떠올랐다.
 “벌써 나가시려고요?”
 조무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유향의 시선이 그의 헌칠한 등을 뒤쫓아 갔다.
 그녀는 조무상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물어본 적도 없었다.
 비록 조무상이 입을 열어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그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상당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빠를 이해하고 있었다. 조무상은 일단 결심한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사나이였다. 그녀는 늘 그러한 오빠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단지, 그녀는 어서 빨리 병에서 완쾌되어 오빠의 노고를 덜어 줘야겠다는 마음만 간절할 뿐이었다.
 
 
 2
 
 만경루(萬經樓).
 만경루는 칠리하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서점이었다.
 만경루는 생긴 지 약 십여 년가량 되는데, 처음에는 제법 번듯하니 손님이 많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점점 손님이 끊겨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해가 막 대지를 환하게 밝힐 즈음,
 조무상은 신선한 공기를 밟으며 만경루의 입구를 들어섰다.
 만경루는 크기가 겨우 오 장이 될까 말까 한 작고 허름한 서점이었다. 쾌쾌한 고서(古書)의 냄새가 코를 찔렀고, 바닥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책을 사러 들어왔다가도 눈살을 찌푸리며 금세 나가 버리고 말 정도로 지저분했다.
 하나, 조무상은 서점의 악취와 먼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불쑥 안으로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 구석에는 만경루의 주인인 듯한 초로(初老)의 늙은이가 아침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조무상은 그를 힐끗 보다가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만경루는 크기에 비해서는 소장하고 있는 책이 상당히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이 온통 낡고 먼지가 뽀얗게 낀 고서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조무상은 오른쪽의 서고(書庫)로 가서 책 목록을 쓰윽 살폈다.
 이른 아침부터 이런 볼품없는 서고에 들어와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니 그는 보기보다는 독서를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서고를 훑던 무표정한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당시선(唐詩選)>.
 
 그는 서고의 우측 모서리에 꽂혀 있는 당시선을 발견하고는 서슴없이 그것을 빼 들었다.
 그것은 시중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당시선이었다.
 그는 재빨리 손길로 책장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책의 중간쯤에 작은 쪽지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쪽지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남주욕서취여주(南州辱署醉如酒),
 은궤숙면개북유(隱几熟眠開北牖),
 일오독각무여성(日午獨覺無餘聲),
 산동격죽고다구(山童隔竹敲茶臼).
 유주의 여름은 무더위 마치 술에 취한 듯하여,
 책상에 기대어 깊이 잠자고 북창을 연다.
 대낮에 홀로 깨면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오직 산마을 아이들이 대밭에서 찻잎 가는 기척뿐.>
 
 이것은 당나라의 시문(詩文)의 대가인 자후(子厚) 유종원(柳宗元)의 ‘하주우작(夏晝偶作)’이란 시였다.
 당시선에 꽂혀 있는 당시 하나.
 아마 누군가가 당시선을 읽다 말고 흥이 돋아 유종원의 시 한 수를 적어 본 것이리라.
 조무상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 종이를 내려 보다가 슬쩍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스스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종잇조각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당시선에 끼여 있는 쪽지는 하나의 비밀통신이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종이에 적힌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해독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것이었다.
 시(詩)의 행(行)과 글자를 배열하는 것이었다.
 즉, 시의 첫 행은 첫 번째 글자, 둘째 행은 두 번째 글자……. 이런 식으로 글자를 모으면 되는 것이다.
 당시선에 쓰여 있는 글귀는 <남궤독죽(南几獨竹)>, 남쪽 책상에 있는 홀로된 대나무란 뜻이었다.
 조무상은 당시선을 다시 서고에 꽂고는 남쪽 서고로 갔다.
 과연 남쪽 서고의 구석에는 허름한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의 위에는 투박한 모양의 물병이 있었고 누군가가 꽂아 놓았는지 대나무 한 그루가 줄기째 꽂혀 있었다.
 서고의 한쪽 구석에 있는 푸른 대나무 하나.
 이것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발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무상은 망설이지 않고 물병을 잡고 대나무를 뽑아 들었다.
 물병 아래에는 물이 없었다. 대신 하나의 봉투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봉투 안에는 한 다발의 전표(錢票)와 종이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조무상은 먼저 전표를 펼쳤다.
 전표는 천하에서 신용(信用)이 가장 좋다고 소문난 산서은호(山西銀號)의 것이었다.
 액면 금액은 이만 냥(兩).
 이만 냥이라면 일반 사람들은 한가족이 평생 놀고먹으며 지낼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하나, 화북제일고수(華北第一高手)의 목숨값으로는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조무상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액수에 불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가 청부받은 금액은 정확히 사만 냥이었다. 그중 절반은 그의 몫으로 돌아오고, 나머지 이만 냥은 삼등분되어 다른 세 사람에게 돌아간다.
 이 배분은 정확하여 지난 세월 동안 언제나 확실하게 지켜졌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 해야 할 임무가 있었고, 그 임무에 대한 적절한 보수가 주어질 뿐이었다.
 세 사람 중 하나는 살인 청부를 맡아 오는 일을 했다.
 청부를 맡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밤하늘의 별보다도 많이 있으니까.
 그의 일이 힘든 이유는 청부를 맡는 것을 철저한 비밀 속에 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수업(殺手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기밀 유지였다.
 만에 하나, 살인 청부에 대한 일이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혀 살수의 정체가 알려지게 된다면 그것은 곧 살수의 최후를 의미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급 살수들이 우연치 않게 정체가 발각되어 자신이 죽였던 자들의 친지나 측근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 갔다.
 자객(刺客)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면 좋지 않다. 자객은 이름이 자꾸 선전되면 그것으로 끝장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일은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비단 청부를 맡아야 할 뿐만 아니라, 청부한 사람에게 반드시 청부가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줘야 했다. 그리고 청부가 완수된 후 청부자에게서 무사히 보수를 받아 내야 했다.
 이 모든 일을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완벽했다. 그래서 그는 보수의 육분지 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세 사람 중의 또 한 사람은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고 있다.
 청부가 들어오고 살해될 사람이 정해지면 그 표적으로 된 인물에 관해서 조사할 수 있는 데까지 조사해야 한다. 그자의 기호라든지 취미, 장점과 약점, 가족 상황과 휘하 세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면에 걸쳐 보다 상세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표적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어야만 언제, 어떻게, 어떤 형태로 활동을 개시해야 하는가를 결정지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보다 완벽한 인물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는 비단 발이 넓을 뿐 아니라 지식이 해박했고 안목이 날카로웠다. 그는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입수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또한 보수의 육분지 일을 받을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세 사람 중의 마지막 인물은 살인에 필요한 도구들을 제조, 공급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그들 중 가장 위험 요소가 적은 것이었다. 하나 결코 빠져서는 안 될 것이기도 했다.
 살인을 살수의 무공과 한 자루 검(劍)에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청부를 안전하게 끝마치려면 철저한 조사와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계획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행한 청부에서도 그랬다.
 표적으로 된 인물이 고서화(古書畵)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즉시 고서화의 위조에 들어갔다.
 칠 주야에 걸쳐 그는 북송의 대가(大家)인 곽희의 ‘산장고일도’를 곽희 자신이 살아 나온다 해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진짜와 똑같이 모방을 했다.
 단지 그뿐이라면 별로 대단할 게 없지만 그는 그 모조품에 약간의 장치를 해 놓았다.
 모조품을 그릴 때 그는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인(燐)과 유황(硫黃)을 개서 썼다. 그 위에 그는 휘발성이 강한 약품을 살짝 발라 놓았다. 마지막으로 양피지의 뒷면에 엄청난 열을 발산해 내는 혈장석(血掌石)을 엷게 깔아 붙여 놓았다.
 그 효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타났다.
 표적자가 양피지를 펼치는 바람에 표면에 묻어 있던 인과 유황이 불붙기 쉬운 상태로 들떠 일어났다. 거기에 표적자의 코에서 나오는 숨소리가 닿자 휘발성이 강한 약품이 인과 유황에 격발되어 양피지는 불이 붙게 되었다.
 열을 받으면 수십 배로 재발산하는 혈장석은 그로 인해 용광로보다 뜨겁게 변해 버렸고, 표적자는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그 순간, 조무상의 수리검(袖裡劍)이 표적자의 목구멍을 꿰뚫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도 보수의 육분지 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나, 그들이 제아무리 비밀스럽게 청부를 얻어 오고, 완벽한 정보 수집을 하고, 신기한 무기를 만들어도 그것들을 활용해서 청부를 완수하는 사람은 바로 조무상이었다.
 조무상은 청부의 핵심이며, 실행자였다.
 조무상이 없이는 그들 세 사람의 일은 모두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무상은 완벽한 살수(殺手)였다. 그는 비단 침착하고 끈질길 뿐 아니라 냉혹하고 집요했다. 어떤 상태에서도 그는 냉정을 유지하고 임무를 완수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서른두 번의 청부를 그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완벽하게 해치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수의 절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조무상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보수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표와 함께 들어 있는 쪽지 때문이었다.
 이곳 만경루는 세 사람 중 청부를 담당하는 자의 소유였다.
 그자는 비단 청부를 담당할 뿐 아니라 청부가 완수된 후 청부자에게서 약속된 보수를 받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조무상이 이곳에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청부가 끝나고 이틀 후 조무상은 이곳에 와서 당시선을 뒤적거린다. 그 안에는 보수를 숨긴 장소를 적은 비밀통신이 있고, 조무상은 그 통신대로 보수를 찾아가면 그뿐이다.
 그들은 서로 만나는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또 청부 외에는 서로 전할 말도 없었다. 이것은 비밀 유지를 위한 좋은 방편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이곳에는 전표만이 들어 있을 것이다.
 한데 오늘따라 그에게 전갈이 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 그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중대한 소식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조무상은 쪽지를 펴 들었다.
 전갈은 짧았다.
 
 <하 노대(何老大)에게 갈 것.>
 
 조무상의 무심한 눈에 기광이 일렁거렸다가 사라졌다.
 하 노대는 정보 수집의 담당자였다.
 조무상은 청부를 맡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직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청부가 들어왔다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연락이 왔을 것이다.
 하 노대는 대체 무슨 일로 그를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조무상은 무심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쪽지를 없애 버리고는 전표를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서점을 벗어났다.
 한쪽 구석에는 여전히 초로의 늙은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칠리하의 아침은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주민이래 봐야 천 명을 넘지 않고 가구 수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거리가 시끄러워지려면 해가 중천으로 올라올 무렵이 되어야 한다.
 하나 단 한 곳, 화평루(和平樓)만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화평루는 이 근처에서는 가장 커다란 주루였다.
 이른 아침, 화평루는 분주한 움직임과 외침으로 가득 찼다.
 점원들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여기저기에 뛰어 다닌다. 청소를 하는 사람…… 음식거리를 장만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들을 호령하는 사람…… 이 모든 것이 뒤섞여 화평루의 아침은 언제나 신선하고 활력에 넘친다.
 조무상은 이른 아침의 공기를 마시며 화평루의 문을 들어섰다.
 주루는 아직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 명의 점원들만이 분주히 움직이며 청소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무상은 입구에 가까운 탁자에 가서 털썩 앉았다. 청소를 하고 있던 점원 하나가 그에게 엽차를 가져왔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조무상은 점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팔보대전탕(八寶大全湯)을 주게.”
 팔보대전탕이란 여덟 가지의 진귀한 약재를 넣어 만든 보약이었다. 주루에 와서 보약을 찾다니 그는 혹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한데, 더욱 이상한 것은 점원의 행동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조무상의 얼굴을 찬란히 살피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려면 시간이 약간 걸릴 테니 그동안 안에 들어가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지요.”
 점원은 먼저 안으로 걸어갔다. 조무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점원은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점원이 그를 안내한 곳은 화평루의 뒤꼍이었다. 그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가자 화평루의 안채가 나왔다. 점원은 그중 한 곳으로 불쑥 들어갔다. 조무상은 서슴없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별실인 듯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작고 아담한 방이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데도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가 어려 있었다.
 점원은 방 안에 조무상을 남겨 놓고 머리를 조아리고는 사라져 갔다.
 조무상은 방 안의 탁자에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 방에 온 것은 서른두 번이나 되었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어도 이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환하게 알 정도였다.
 또한 조금 전의 점원이 하 노대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도 조무상이 하 노대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 조무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조무상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에 오직 다섯 사람뿐이었다. 그중 세 사람은 그의 동업자이고, 한 사람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그의 사부였다.
 조무상은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다섯 사람이나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그의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간에 조무상은 상대의 목을 끊어 놓을 것이다. 자신을 위험한 지경에 몰아 놓는 사람이 있다면 조무상은 결코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고, 조무상도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젓번 일은 잘 해결해 주었네.”
 문득, 그의 뒷전에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그의 뒤에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풍채가 좋고 기골이 장대한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이곳 화평루의 주인인 하원형(何元衡)이었다. 하나, 그가 주루업 외에 다른 일을 겸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바로 하 노대인 것이다.
 조무상은 그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하원형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조무상은 언제나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용건과 관계되는 일 외에는 말하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원형은 그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바로 대답했다.
 “실은 급히 자네를 볼 일이 있었네.”
 “무엇이오?”
 “자네가 찾던 것 중 하나의 행방을 발견했네.”
 순간, 무표정하던 조무상의 눈에서 번쩍 신광이 일어났다.
 그는 잠시 하원형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어느 것이오?”
 “빙백옥지(氷魄玉芝)라네.”
 
 빙백옥지!
 빙백옥지는 깊고 깊은 빙굴(氷窟) 속에서만 서식해 세인(世人)들은 평생을 가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절세의 영약이었다.
 오천 년 이상이 지나야만 비로소 약효가 생기며, 만 년이 되어야만 전신이 옥(玉)처럼 하얗게 변한 옥지가 된다고 한다. 그 효능은 무림인이라면 꿈에서도 그럴 엄청난 것이었다.
 하나 조무상이 그것을 찾는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빙백옥지는 조유향의 칠절단혼산맥을 고칠 수 있는 세 가지 영약 중의 하나인 것이다.
 
 조무상은 어느새 예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이 어디에 있소?”
 하원형은 그의 냉정하다 못해 차가운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혹시 천하에서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불행한 여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그 말에 조무상은 잠시 침음하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은 혹시 유삼고(劉三姑)가 아니오?”
 하원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바로 그 아름답기로는 천하에서 세 번째 안에 들고 돈이 많기로는 두 번째 안에 든다는 비환유문(飛環劉門)의 청상과부(靑孀寡婦) 유삼고일세.”
 유삼고!
 이 이름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최소한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는 신비와 유혹의 대상이었다.
 비환유문은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형산(衡山)의 노가(盧家)와 진주(晋州)의 언가(言家)와 함께 천하의 삼대세가(三大世家) 중 하나로 손꼽혔었다.
 유삼고는 그 비환유문의 문주인 탈명마환(奪命魔環) 유효광(劉曉光)의 셋째 딸이었다.
 십이 년 전, 그녀는 응조왕(鷹爪王) 누남진(婁南辰)과 결혼했었다. 응조왕 누남진은 준남(準南) 응조문(鷹爪門)의 창시자로, 삼십육수대응조력(三十六手大鷹爪力)과 막강한 내공으로 일세를 풍미한 개세의 고수였다.
 한데, 그는 유삼고와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돼 어느 날 신비스럽게 실종되었다.
 그의 실종은 당시 무림에 최대의 충격과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숱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유삼고를 비롯한 비환유문의 고수들은 천하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종내 그의 행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혼한 지 불과 일 년 만에 그녀는 어이없이 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건만 그녀에 대한 염명(艶名)은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알려지기로는 그녀는 응조왕 누남진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여 지금도 그를 위해 수절(守節)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데 하원형이 왜 갑자기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빙백옥지는 바로 그녀의 수중에 있네.”
 하원형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사람을 풀어 그것을 찾고 있었는데 바로 최근에야 그 빙백옥지가 비환유문의 가보로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것은 십여 년 전까지 탈명마환 유효광이 가지고 있었는데 유삼고가 누남진과 혼인을 할 때 유효광은 그것을 딸의 결혼 예물로 주었다네. 그 후로 지금까지 유삼고는 그 빙백옥지를 자신의 몸에서 단 하루도 떼어 낸 적이 없다고 하네.”
 빙백옥지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전신의 혈액순환이 촉진되어 여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효능을 지니게 된다. 유삼고가 삼십이 다 된 나이에도 염명을 떨치고 있는 것도 그 빙백옥지가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리라.
 그런 보물이라면 그녀가 그것을 순순히 내놓을 리는 만무했다.
 빙백옥지는 조유향의 절맥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영약이었다. 한데 그것이 유삼고의 수중에 있다면 절대로 쉽사리 그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삼고는 상대하기 쉬운 여인이 아니었다.
 하원형은 조유향을 완치시키기 위한 조무상의 집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유삼고를 찾아가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 대체 무슨 수로 그녀에게서 빙백옥지를 입수한단 말인가?
 “자네는 이제 어찌하려는가?”
 조무상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여 하원형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조무상은 묵묵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하원형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조무상은 짤막하게 말했다.
 “정당한 거래(去來)!”
 
 
 第 二 章 정 당 한 去 來
 
 1
 
 그녀는 창문 너머로 꽃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꽃들로 아름답게 꾸며진 화원은 속세의 그것이 아닌 것처럼 주위를 온통 휘황찬란하게 꾸미고 있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미녀였다.
 미녀 특유의 오만(傲慢) 같은 것이 항상 입 언저리에 떠돌고 있었다. 금시라도 피를 베어 문 듯한 탐스럽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도 가장 특징이 있었다.
 호수처럼 축축이 젖은 듯 빛나는 눈, 둥그런 뺨과 균형이 잘 잡힌 턱, 그림처럼 우아한 콧등....
 탐스러운 흑발은 궁장형으로 틀어 올려져 그녀의 미태를 더해 주고 있었다. 조각 같은 아름다움은 가느다란 허리와 날씬하게 긴 다리, 그리고 풍만한 가슴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몸에 산뜻하게 달라붙는 간편한 궁장을 하고 있었다. 허리는 칠채(七彩)로 된 옥대(玉帶)로 졸라맸고, 널따란 깃 사이로 백설보다 더 고운 듯한 하얀 살결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그녀의 피부는 창문 너머로 비쳐 보이는 실푸른 비단 하늘과 같은 아늑한 촉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가 가진 부(富)로 인해서 더욱 빛이 났다.
 그녀의 남편은 천하에서 누구나 손가락을 꼽는 대장부였으며, 부친은 무림삼대세가의 가주 중 하나였다. 누구나 그녀를 부러워했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하나 어느 날, 그녀의 행복은 뜬구름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신비스럽게 실종되었으며, 부친은 가주(家主)의 자리를 동생에게 맡긴 채 병석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의 미모와 부를 탐하는 무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가를 좀먹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점차 불행해져 갔다.
 유숙빈(劉淑嬪)!
 세인들에게는 단순히 유삼고라고 알려진 그녀는 지금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요즘 그녀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또 한 가지의 고민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하기만 해도 그녀는 소름이 돋았고 사지가 떨려 왔다.
 하나 지금 그녀는 전혀 다른 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상인이라고?”
 “그렇답니다, 마님!”
 시비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요사이 유삼고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자칫하면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한다더냐?”
 “한 가지 거래를 하겠다고 합니다.”
 “거래라니?”
 시비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합니다.”
 유삼고의 고운 아미가 다시 살짝 찌푸려졌다.
 몇 년 전부터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의 미와 부를 노리고 접근하는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야밤에 그녀의 침실로 잠입하려다 발각되어 쫓겨난 자들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그녀가 외출할 때를 기다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고 다가오거나, 자신의 용모나 세력을 믿고 그녀의 주위를 배회하는 자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이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거의 매일 그녀에게 찾아오며 치근덕거리는 치들도 있는 형편이었다.
 한데 이번에는 상인으로 변장하고 접근하는 사람도 있는 건가?
 아무튼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온갖 수법이 있지만 이런 새로운 수법도 있다는 것이다.
 시비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시비는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듯 약간 머뭇거렸다.
 “저…… 뭐랄까…… 몹시…….”
 시비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막상 말을 하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유삼고는 문득 흥미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시비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십여 년을 거느리고 있어서 보는 안목이 남다른 데가 있는 아이였다. 더구나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 접대하고 있어서 웬만한 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었다.
 한데 지금은 이토록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찾아온 사람이 누구길래 이 아이가 이럴까?’
 유삼고는 마음을 굳혔다.
 “좋다. 만나 보겠으니 대청으로 안내해라.”
 시비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한 인물을 데리고 다시 대청에 나타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인물을 보고는 유삼고는 실망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시비를 따라 들어온 인물은 머리를 헝클어뜨린 이십 대의 흑의 청년이었다. 키가 헌칠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눈길을 끄는 데가 없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눈빛이 침침했고 양손이 유달리 창백해 보였다.
 유삼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흑의 청년의 전신을 쓰윽 훑어보고는 무관심한 표정이 되었다.
 흑의 청년은 그녀가 지겹도록 보아 온 다른 남자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부유해 보이지도 않았고 준수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쓸어다 내버릴 정도로 흔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저 아이도 요즘 들어서는 눈이 형편없군. 이런 작자를…….’
 유삼고는 시비에게 싸늘한 눈길을 보낸 후 흑의 청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했나요?”
 그녀의 음성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흑의 청년은 묵묵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거래를 하러 왔소.”
 그의 음성은 무뚝뚝함을 넘어 무례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삼고의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아직까지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퉁명스러운 태도로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거 안됐군요. 나는 거래할 만한 것이 없어요.”
 그녀의 말은 너무도 매몰차서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말 한 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이 흑의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담담히 말했다.
 “아니 있을 거요.”
 그녀는 더한층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무례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생처음 대하는 이 사나이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유삼고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가요? 그건 나도 몰랐군요. 그게 무언가요?”
 흑의 청년의 음성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것은 하나의 뿌리요. 크기는 어린아이의 주먹만 하고 전신이 눈처럼 하얗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소.”
 순간 유삼고의 얼굴이 얼음을 씌운 듯 냉랭해졌다.
 “당신이 말하는 건 바로 빙백옥지가 아닌가요?”
 “그렇소.”
 유삼고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그것이 있는지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절대 팔 수가 없는 물건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칼날로 자르듯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흑의 청년은 묵묵히 말했다.
 “이 세상에 팔 수 없는 물건은 없소.”
 그녀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이제 보니 이 사나이는 비단 무례할 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기조차 하지 않은가? 그녀는 몹시 기분이 불쾌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억만금(億萬金)을 주어도 그것은 팔 수 없어요. 설사 판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팔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나는 피곤하니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실로 단호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그녀는 더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했다.
 덥석!
 순간, 하나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돌려오는 뼛골이 시릴 듯 차가운 음성 하나.
 “당신은 나와 거래를 해야만 하오.”
 유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하니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 있는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손의 임자를 바라보았다. 흑의 청년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 장(五丈)이었다.
 무려 오 장의 거리를 그는 그녀가 감지하지도 못할 순간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은 것이다.
 그녀는 천하에 이름이 나 있는 절세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천하삼대세가의 하나인 비환유문에서 자라나 무공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결단코 말하건대, 그녀는 이 사나이만큼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강호제일의 경공대가(輕功大家)로 소문난 풍도인(風道人)조차도 이자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리라.
 그녀의 눈과 흑의 청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은 일점의 감정도 없는 완벽한 무심(無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시비가 이 사람을 이상하다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드디어 그의 인상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바로 공포(恐怖), 그 자체였다. 그자가 그녀의 가슴속에, 또 시비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킨 감정은 바로 공포였던 것이다.
 충격은 컸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공포감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도 남자를 보고 무서움을 느낀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천천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창백한 손이 어깨에서 떼어지자 그녀는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갑자기 그녀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조금 헝클어졌던 머리를 단정히 고친 후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당신과의 거래를 응해야 하지요?”
 그녀의 음성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흑의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일이 우리 두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두 사람에게?”
 “그렇소.”
 “당신에게 유리하다는 건 알겠는데 나에게도 유리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는 묵묵히 입을 열었다.
 “이번 거래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가장 친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소, 그리고 당신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흑의 청년은 그녀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당신의 주위에 있는 귀찮은 짐들을 덜게 될 것이오.”
 그 말에 그녀는 눈을 번쩍 빛냈다.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당신의 말은 빙백옥지를 당신에게 넘겨주면 그 다섯 명의 파락호들을 물리쳐 주겠다는 건가요?”
 유삼고가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기거하며 그녀에게 청혼을 하는 고수들은 많았지만 그들 중 특히 지독한 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한 지방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거나 아무도 무시 못할 막강한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래서 유삼고로서도 그들이 눈 아래 가시처럼 성가셨지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들 때문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 왔다. 그녀의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았다면 벌써 그들 중 한 명에게 시집을 갔거나 비환유문의 당금 문주(門主)이며 그녀의 삼촌인 구룡환(九龍環) 유효풍(劉曉風)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한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이 나타난 인물이 그들을 물리쳐 주겠다니……
 흑의 청년은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뿐이 아니오. 오랫동안 당신의 주변을 맴돌던 그 신비한 그림자의 정체도 벗겨 주겠소.”
 그 말에 유삼고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신비한 그림자!
 그것이야말로 요즘 유삼고를 고민에 빠뜨리게 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그것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심한 고통에 몸부림쳐 왔다. 이 일에 비하면 그 다섯 명의 파락호들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신비한 그림자가 그녀의 주변에 처음 나타난 것은 벌써 삼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그녀는 부친인 탈명마환 유효광이 병환으로 가주의 직위를 동생인 구룡환 유효풍에게 넘기고 무림에서 물러나자 자신도 비환유문을 나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가를 나올 때 그녀는 네 명의 시비와 한 명의 종복만을 데리고 왔을 뿐이었다. 네 명의 시비는 각각 춘매(春梅), 하란(夏蘭), 추국(秋菊), 동죽(冬竹)으로 불리며, 그녀가 어려서부터 거느려 거의 친자매와 다를 바가 없는 사이였다.
 종복은 그녀의 유모의 남편이었다.
 이름은 채복(採福).
 채복은 정말 이름 그대로 복을 찾는 재주가 있는지 그녀가 태어난 이래 충성스럽도록 그녀만을 섬기고 있었다. 채복은 나이가 육십이 넘었지만, 본래부터 세가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 아직도 그녀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고 있었다.
 한데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자의 행적은 너무도 신비스러워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 특유의 감각으로 그녀는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를 주시한다는 것을 명백히 느끼고 있었다.
 그 시선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했다.
 심지어 그녀가 식사를 하거나 목욕을 할 때도 그 시선은 그녀의 몸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처음에 그녀는 그 시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았다. 하나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종내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으니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점점 초조해졌고 신경질적이 되어 갔다. 네 명의 시비들과 채복은 그녀가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져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을까 고민했었지만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누가 그녀의 말을 믿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믿는다 해도 그녀조차 어쩌지 못하는데 그들에게 달리 어떤 방도가 있을 것인가?
 이런 세월이 계속되자 그녀는 자신이 정신이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 정체 모를 신비한 그림자는 매일 그녀를 떠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생활을, 심지어는 여인으로서의 은밀한 부분까지 낱낱이 주시하고 있는 그 그림자가 무서웠고 소름이 끼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무지 사람의 종적조차 발견할 수 없으니 달리 손써 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든 형편이었다.
 한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 비밀을 난생처음 만난 이 사나이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이 삼 년 동안 그렇게 노력해도 알아내지 못한 그림자의 정체를 무슨 수로 밝혀낸단 말인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듯 흑의 청년은 담담히 말했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지만, 이 거래는 당신에게 하등 불리할 게 없소.”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일 다시 오겠소. 그때는 그 다섯 명의 파락호들은 두 번 다시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요. 그리고 내일 저녁 그 신비한 그림자의 정체를 밝힐 것이오.”
 유삼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손해를 볼 것이 없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빙백옥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인생(人生)을.
 또한,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녀는 귀찮은 거래를 응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유삼고는 갑자기 이 괴이한 사나이에게 부쩍 흥미를 느꼈다.
 “이것은 정말 정당한 거래로군요. 한데 당신은 누군가요?”
 흑의 청년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누구라는 건 이번 일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소. 중요한 것은 내가 약속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일 이맘때쯤이면 밝혀질 것이오.”
 말을 마치자 그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봅시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훤칠한 뒷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2
 
 팔수표(八手鏢) 전린(錢麟)!
 그는 삼상(三湘) 지방 제일의 고수였다.
 여덟 개의 혈리표(血裡鏢)로 이루어진 그의 팔수표는 한 번 발출될 때마다 반드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지난 십여 년간 그는 무려 이백열두 명의 고수를 고혼(孤魂)으로 만들었다. 그는 당금 무림에서 암기 무공(暗器武功)에 관한 한 삼대고수(三大高手) 안에 언제나 손꼽혔고, 자신은 그중 제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느 맑은 봄날.
 그는 친구를 찾아왔다가 우연히 꽃구경을 하러 나온 그녀를 보게 되었다.
 그때 그는 난생처음으로 커다란 충격을 맞보았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언제나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말던 터였다. 한낱 여인 때문에 모두들 그런 법석을 부린다고 속으로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한데 화창한 봄날 그녀를 우연히 만난 후로는 그는 어이없게도 사랑의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신체가 건강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끌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 전린은 자기와 같은 남자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찾아가서 본심을 털어놓기만 하면 그녀가 반색을 하며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대해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전린은 처음에는 경악했고, 나중에는 분노했다.
 
 - 감히 나의 구혼(求婚)을 거절하다니……!
 
 그는 자신이 그녀를 차지하지 못하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차지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는 때마침 그녀를 찾아온 구혼자 열두 명을 죽여 버리고 그녀의 집 근처에 눌러앉았다.
 그 후로 그는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리는 작자들을 볼 때마다 절대로 그들을 살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구혼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그들을 살해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꼭 그녀의 대문 앞에서 살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전린은 구혼자들을 죽인 후에는 그들의 수급(首級)을 그녀의 대문 앞에 세워 놓고는 했던 것이다.
 아무리 담이 크고 대담한 여자라도 죽어 있는 사람의 머리통을 보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다섯 명의 파락호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
 
 ‘괘씸한 놈이로군.’
 전린은 눈꼬리를 쭈욱 치켜 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괘씸할 뿐 아니라 간덩이가 부은 놈이었다.
 최소한 전린이 보기로는 그랬다.
 그 작자는 어제도 그녀의 대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무슨 수를 썼는지 용케도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것만 해도 눈에 불이 날 일이거늘, 오늘 또다시 찾아와서는 문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지 않은가?
 ‘저놈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군.’
 전린이 어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어제가 하필이면 그의 서른다섯 번째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린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지만 자신의 생일날에까지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살심(殺心)을 간신히 억눌렀던 것이다.
 한데, 그 시커먼 옷을 입은 작자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한목숨 건지게 된 것도 모르는지 오늘 또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오늘은 물론 그의 생일이 아니므로 그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린은 흑의를 입고 키가 휑하니 큰 작자의 앞으로 서슴없이 다가갔다. 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이 전린의 모습을 보고는 허겁지겁 사방으로 피했다.
 전린은 거친 흑의를 입고 머리를 까치집처럼 헝클어뜨린 청년의 앞에 우뚝 서서 차가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전린의 용모는 그리 준수한 편이 아니다.
 코는 매부리코에 그 끝이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고, 눈은 독사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세모꼴로 쭉 찢어져 연신 흉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가 단지 노려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지 못할 것이다.
 한데 이 흑의 청년은 그의 사나운 눈길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린을 더욱 기분 나쁘게 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전린은 가슴속에서 서서히 노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눈을 더욱 차갑게 치켜뜨며 빙골이 시릴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지금 나온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알고 있느냐?”
 그의 음성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냉랭했다.
 하나 흑의 청년은 웬 개가 짓느냐는 듯 눈을 멀뚱멀뚱 뜬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린의 얼굴이 석고상보다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유삼고의 집이란 걸 알고 있겠지?”
 흑의 청년은 여전히 멍청히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오?”
 전린의 몸이 치솟는 분노로 가늘게 떨려 왔다.
 주위에서 이들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전린이 얼마나 악독한 인물인가를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흑의 청년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흑의 청년은 무엇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전린의 팔수표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리라!
 과연, 전린은 더 이상 살기(殺氣)를 억제하지 못하고 서서히 양손을 늘어뜨렸다.
 이제 곧 그의 손이 들리게 되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짧은 순간에 여덟 개의 혈리표가 그의 손에서 날아가 흑의 청년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다.
 전린은 조금씩 손을 늘어뜨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흐흐…… 무슨 상관이 있냐고? 유삼고에게 접근하는 놈들은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
 흑의 청년은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듣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왜 그렇소?”
 구경꾼들 틈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보니 이 흑의 청년은 대담무쌍한 것도, 간덩이가 부은 것도 아니었다. 틀림없이 정신이 조금 모자라는 바보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살성(煞星)으로 유명한 전린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할 리가 만무했다.
 전린은 두 손을 번개같이 들어 올리며 폭갈했다.
 “내가 바로 네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쐐애액──!
 그가 뽑아 든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에서 난데없이 여덟 줄기의 붉은 광채가 피어올랐다.
 그것이 바로 전린이 천하에 자랑하는 팔수표인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팔수표에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던가?
 여덟 가닥의 혈리표는 눈 깜짝할 순간에 멍청히 서 있는 흑의 청년의 몸을 그대로 훑고 지나가 버렸다.
 “크아악!”
 흑의 청년은 중인의 예상대로 무엇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의 가슴과 배, 겨드랑이는 혈리표에 길게 베인 채 시뻘건 피를 뿌리고 있었다.
 “흐흐흐…….”
 전린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를 원망하지 말고 유삼고를 찾아온 네놈의 어리석음을 원망해라.”
 순식간에 흑의 청년의 몸을 자르고 지나간 여덟 개의 혈리표는 허공에서 선회를 하며 전린에게로 날아왔다.
 전린은 능숙한 손길로 혈리표를 하나하나 받아 들었다.
 그가 이 혈리표들을 사용한 지는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이제는 완전히 그의 수족(手足)처럼 되어 그는 눈을 감고도 이 혈리표들을 마음대로 수발(收發)할 수가 있었다.
 착! 착! 착!
 혈리표가 그의 넓적한 손에 빨려 들듯 하나둘씩 내려앉았다.
 한데 그가 막 일곱 개째의 혈리표를 거두고 마지막 여덟 번째의 혈리표를 받아 들려는 순간,
 스윽!
 혈리표가 세인들이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움직임을 보였다.
 동시에 그 속도가 배나 빨라졌다.
 전린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그 혈리표가 그가 예상하고 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전린은 사색이 되어 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나 혈리표는 이미 그의 목에 사정없이 꽂혀 버리고 말았다.
 파악!
 “끄윽!”
 전린의 입에서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괴이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혈리표는 그의 목을 절반이나 꿰뚫고 거의 반대쪽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선혈이 그의 몸을 따라 대지로 흘러내렸다.
 “으으…… 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멍청히 서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전린은 두 눈을 뜬 채 그대로 절명(絶命)하고 말았다.
 실로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천하가 인정하는 암기의 달인(達人)이 자신의 암기에 목숨을 잃다니……
 주위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씩 전린의 시체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누구도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전린은 분명히 상대방을 암기로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에게 날아오는 암기들을 거두다가 그중 하나를 미처 거두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구경꾼들 중에서 전린의 친구인 무림의 고수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들도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전린의 시체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그가 암습을 받거나 독약을 복용한 흔적은 없었다.
 결국 그들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린이 너무 자신의 암기를 다루는 데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비록 의문점이 많기는 했지만, 이것 외에는 다른 해석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린의 시체를 거두고 힘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전린의 친구들이 그의 시체를 둘러메고 떠나자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전린의 손에 쓰러진 흑의 청년의 시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장내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바닥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정체 모를 흑의 청년의 시체 한 구만이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때, 돌연 흑의 청년의 시체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움직이더니 마침내는 점차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시체, 아니 흑의 청년의 몸에는 아직도 여기저기 혈리표가 훑고 지나간 상처가 나 있었고 입가에는 선혈이 잔뜩 묻어 있었다.
 흑의 청년, 조무상은 창백한 손으로 입에 묻은 선혈을 쓰윽 닦았다.
 선혈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남들이 생각한 것처럼 많이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혈리표가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조무상 자신이 슬쩍 혀끝을 깨문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여기저기에 난 상처도 모두 피부가 살짝 그어진 것에 불과했다. 상처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몸은 사업의 도구여서 그는 항상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건강의 좋고 나쁨에 그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또한 그는 번거로움을 몹시 싫어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전린을 죽이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럴 경우 그의 친구들이 복수를 하려고 그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런 일들이 비록 두려운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공연히 번잡하게 일을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목표는 전린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유삼고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함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경우, 만에 하나 자신의 정체가 남들 눈에 뜨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편법(便法)을 쓴 것이다.
 전린이 혈리표를 회수하는 습관을 알고 있는 조무상은 그의 혈리표들이 자신의 몸을 스칠 때 일부러 피부의 겉만 스치도록 슬쩍 몸을 비킨 후 스스로 혀끝을 깨물어 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스치고 가는 혈리표에 살짝 힘을 가해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모든 일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전린은 두 번 다시 유삼고를 괴롭힐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은 정체를 발각당할 염려가 조금도 없었다.
 조무상에게 있어 이런 일은 거저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치밀하고 완벽하게,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말 것.
 이것이 조무상이 일을 하는 방법인 것이다.
 
 
 第 三 章 除 去 作 業
 
 1
 
 금극태세(金戟太歲) 범전수(范全秀)는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무림에서 제일인자라 할 만했다.
 바로 허영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이번 일도 순전히 그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하남성(河南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문(名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날 때부터 남달리 준수했고 두뇌가 총명했다. 무공은 전대(前代)의 기인(奇人)인 천산노인(天山老人)에게 사사(師事)했고, 젊은 층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되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엄지손가락을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부유하고 준수하며, 무공이 고강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자만심이 들뜨기 시작했다.
 
 - 천하에 누가 감히 나와 견줄 수 있겠는가?
 
 그는 점차 유아독존격의 광오한 생각에 사로잡혔고, 돈과 명예를 보고 그의 주위에 몰려든 아첨꾼들이 그의 이런 사고방식을 부추겼다. 그의 말 한마디는 곧 법(法)이었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성취되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과연 소문대로의 여인이라면 그녀의 배필이 될 만한 남자는 나밖에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미모도 아니고 부(富)도 아니었다. 천하에 누구나가 선망해 마지않는 여인을 아내로 거느린다는 남자로서의 허영심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를 그녀에게 보내 청혼을 했던 것이다.
 그녀가 승낙할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으면서,
 그런데 대답은 그의 상상을 완전히 박살 낸 것이었다.
 그녀는 웬 미친놈의 수작이냐는 듯 답장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처음에 부하에게서 이 말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 감히 나의 청혼을 거절하다니……
 
 그는 당연히 분노했고 당장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거기서 그는 두 번째 충격을 맛보았다. 그녀의 집 주위에는 그녀를 노리고 접근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달려온 이유도 잊고 다시 허영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앙모하는 여인을 품 안에 넣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더욱 우러러볼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꼭 취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녀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커다란 저택 다섯 개를 동시에 사들였다.
 그러고는 거기서 날마다 주연(酒宴)을 벌렸다. 유삼고의 집은 주위에 둘러싼 다섯 개의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풍악 소리와 웃고 떠드는 외침 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는 날마다 그녀에게 부하를 보내 주연에 초청을 했으며, 온갖 호화로운 선물들을 산더미같이 갖다 바쳤다.
 그녀는 그가 보낸 사람들은 절대로 만나지 않았고, 그가 보낸 선물들은 집 안에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하나 그는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집은 그가 보낸 선물로 뒤덮였고, 시일이 지나자 그곳에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그것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악취로 거의 눈을 뜰 수가 없게 되었고, 쓰레기 더미에 파묻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가장 귀찮아하는 다섯 명의 파락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
 
 그날도 범전수는 자신이 사들인 저택에서 성대한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오늘의 연회는 보통 때보다 더욱 흥겨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낙양(洛陽)에서 재사(才士)로 이름난 산수재(酸秀才) 고홍광(古鴻光)이 이 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고홍광은 시문(詩文)이 탁월하기로 유명한 인물인데, 오늘 느닷없이 연회에 나타나 범전수를 기쁘게 했다. 허영심이 강한 범전수는 고홍광같이 유명한 인물이 자신의 연희에 참석함으로써 남들이 자신을 더욱 우러러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고홍광은 검은 수염을 턱 밑까지 길게 기른 사십 대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하하…… 말로만 듣던 고 학사(古學士)를 직접 뵙게 되니 기쁘기 한량이 없소이다.”
 범전수는 준수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하남제일의 미남자 소리를 듣던 그의 용모도 거듭되는 주연과 퇴폐적인 생활로 많이 찌들어 있었다.
 고홍광은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허허…… 청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온 불청객을 이토록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 고 학사께선 일부러 청해도 오시지 않는 분인데 오히려 본인이 감사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소?”
 범전수는 은은한 금색을 띠고 있는 술잔에 호박색이 아롱거리는 미주(美酒)를 한 잔 가득 부어 고홍광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것은 강남(江南)의 유명한 옥로춘(玉露春)인데 마침 얼마 전에 구입했소이다. 변변치 않지만 고 학사께서 한 잔 드시구려.”
 고홍광은 눈을 크게 떴다.
 “허! 옥로춘이라면 천금(千金)을 주어도 구하지 못하는 천하의 명주(名酒)가 아닙니까? 이런 귀한 술을 주시다니…….”
 범전수는 미소를 띠며 얼굴을 자랑스럽게 빛냈다.
 그는 자신에게는 옥로춘 따위를 구하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너무 자화자찬하는 말 같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사실 그는 바로 며칠 전에야 간신히 옥로춘 두 병을 구했던 것이다. 상대가 고홍광이 아니었다면 어렵게 구한 옥로춘을 절대로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옥로춘은 명성만큼이나 독한 술이어서 한 병을 비우자 그들은 얼큰히 취기가 돌았다.
 범전수는 일찍부터 고홍광이 시문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어 왔던터라 이 기회에 그의 명성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전부터 고 학사의 시문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는데 실례가 아니라면 한 수 부탁드리겠소.”
 고홍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쑥스럽소이다. 범 공자 같은 분께 자랑하기에는 너무도 미천한 재주라서…….”
 “그게 무슨 말씀이오? 고 학사라면 천하가 다 아는 시문의 대가이거늘 미천하다니…… 혹시 이 범전수에게 보여 주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그러시는 것 아니오?”
 범전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고홍광은 더 이상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정 그러시다면…… 이러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시구를 읊조리면 범 공자께서 그것을 종이에 옮기시는 것이?”
 범전수는 그렇지 않아도 이 시문의 대가에게 자신의 학문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좀이 쑤셨던 터였다.
 그러니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허헛, 참! 고 학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졸필이나마 고 학사의 말대로 하겠으니 나중에 너무 비웃지 마시구려.”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범전수는 희색이 만면해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지필묵을 대령해라!”
 고홍광은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범 공자가 신필(神筆)인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곧, 지필묵이 마련되고 고홍광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범전수는 두 눈을 화광(火光)처럼 빛낸 채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들고는 고홍광의 입을 주시했다.
 고홍광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시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롱한 과거사는 잊을 수가 없구나,
 가을바람이 뜰을 스쳐 주렴을 젖히건만,
 하루 종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간절한 생각은 단 것인지, 쓴 것인지,
 달콤한 때에는 오만해져서 입가에 가는 웃음이 떠오르고,
 쓴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니라.
 쌀쌀한 밤하늘에 달빛만 밝으니,
 눈물을 흘리며 단장의 고통이 스러지는구나.
 
 그의 시구는 애절하면서도 비장한 데가 있었다.
 고홍광이 낭송을 끝내고 고개를 드니 범전수가 몹시 감탄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 학사의 정취가 이토록 남다른 줄은 몰랐소. 듣고 있자니 괜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것만 같구려.”
 고홍광은 멋쩍게 웃었다.
 “과찬의 말씀에 송구스러울 뿐이오. 괜한 짓을 해서 흥겨운 분위기를 깬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홍광은 말을 하며 범전수가 써 놓은 화선지로 눈길을 모았다.
 고홍광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과연……!”
 화선지에는 드물게 보는 뛰어난 필체로 고홍광이 조금 전 읊조린 시구가 적혀 있었다.
 고홍광은 그 필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획마다 힘이 넘치면서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흠이라면 너무 기세가 당당해 글씨가 조금 차분하지 못하고 들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는 것이었다. 하나, 비록 그렇더라도 이 정도의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고홍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범 공자의 신필(神筆)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공연히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지는군요.”
 범전수는 고홍광의 칭찬에 내심 기쁨을 참지 못했지만 짐짓 겸손을 떨었다.
 “무슨 말씀을…… 신필이라고까지야……. 그보다는 고 학사의 글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덩달아 내 글씨가 좋아 보이는 것이겠지요.”
 두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범인들은 평생을 가도 보기조차 힘들다는 옥로춘을 두 병 모두 비운 다음에야 고홍광은 사의를 표하고 물러났다.
 “오늘은 여러모로 폐가 많았습니다.”
 “하하…… 앞으로도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들러 주시오.”
 범전수는 고홍광을 배웅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는 시종들에게 잠자리를 차리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범전수는 그의 침실에서 목을 대들보에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그의 심복 중 한 사람이었다.
 범전수는 자신의 허리띠로 대들보에 목을 매단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침실 머리맡에서는 그의 친필로 보이는 유서(遺書)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세상에 나왔으나 허명에 눈이 멀었다.
 검은 녹이 슬고 호기마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욕됨을 보이기 전에 자진(自盡)함이 대장부의 마지막 도리이리라.
 범전수 유필(遺筆).>
 
 그것은 분명히 범전수 본인의 필적이었다.
 그 힘차게 뻗어 올라간 독특한 필체하며 약간 거친 듯한 선(線)은 시종들의 낯에 익은 범전수의 것이 분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을 눈 아래로 보며 떵떵거리던 범전수가 하룻밤 사이에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범전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짙은 의혹을 느꼈다.
 하나, 범전수의 시신에는 아무런 격투나 상처의 흔적이 없었다.
 범전수 같은 고수가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목을 매달렸다고는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 모방할 수 없는 범전수의 특이한 필체로 된 자필 유서까지 있으니 아무리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자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범전수의 시종들은 목을 매단 그의 시신을 가지고 범전수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범전수의 시체가 시종에 의해 발견된 그 시각.
 조무상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허름한 객점에서 변장을 지우고 있었다.
 턱 밑에 붙인 가짜 수염을 떼어 내고 양 볼과 이마에서 엷은 가죽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에 하얀 가루를 풀고 얼굴과 머리를 정성스레 씻었다. 얼굴색을 변형시키느라 사용한 물감과 머리카락을 반백(半白)으로 물들였던 염색약이 빠져나가자 그는 다시 젊고 무심한 청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의 살결은 매끈한 편이었다.
 어제 깎은 수염은 아직 자라나지 않아 가짜 수염을 또 붙일 수도 있었다. 근육은 팽팽하니 탄력이 있었고 눈가와 이마에는 주름살이 하나도 없었다.
 조무상은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무령(柳無靈)에게서 배운 모사법(模寫法)은 확실히 자기가 생각해도 효과가 좋았다.
 유무령은 그의 세 명의 동업자 중 도구를 제조, 공급하는 담당자였다.
 그는 모방의 천재(天才)이며, 병기 제조의 달인이었다. 그는 모든 병기의 제조법을 알고 있으며, 또한 모든 종류의 서화체(書畵體)에 능통해 있었다.
 조무상이 유무령에게서 이 모사법을 배운 것은 그의 사부(師父)의 분부에 의해서였다.
 그의 사부는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재주와 모든 종류의 무공에 숙달되어 있어야 한다.
 너는 어쩌면 그것들 중 태반은 영원히 써먹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서 꼭 그것들을 익혀야만 한다.
 너는 언제 그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무상은 사부의 말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삼 년 전 십만 냥을 주고 유무령에게서 모사법을 배운 것이다.
 그는 그동안 그것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번에 범전수의 죽음을 자살로 꾸미기 위해 그의 유서를 쓸 때 그는 사부의 가르침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고홍광으로 변장을 하고 범전수를 찾아간 것은 범전수의 필체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모사의 천재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필체를 보지도 않고 모사할 수는 없었다.
 조무상은 시구를 쓴 범전수의 글씨를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범전수 자신이 읽어 본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의 필체와 똑같이 모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범전수의 자살에 많은 의혹을 품었을 테지만, 그의 유서가 있는 이상 의심을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전수가 타인에 의해 목이 졸려 숨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 흉수로 고홍광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누군가 진짜로 고홍광을 찾아가 이 일에 대해 물어본다 할지라도 아무 걱정 할 것은 없다.
 고홍광은 자신이 범전수를 만나 술 한 잔 마시고 헤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증언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범전수의 죽음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홍광이야말로 조무상의 동업자이며, 만경루의 실제 주인이고, 청부를 담당하는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2
 
 강호의 모든 여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 화화공자(花花公子) 양옥기(梁玉奇)!
 
 그는 두 가지의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능란한 화술(話術)과 절묘한 방사술(房事術).
 이 두 가지를 무기로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품속에 끌어안았다.
 여인들이 반드시 얼굴이 반반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양옥기 자신도 그렇게 특출한 미남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여자들을 마음대로 호릴 수 있는 것은 그의 외모가 여인들에게 모성 본능(母性本能)을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언변(言辯)이 좋았다.
 제아무리 요조숙녀라도 그와 반 시진만 대화를 나누면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일단 그에게 안긴 여자는 그의 기막힌 애무 솜씨와 절륜(絶倫)한 정력(精力)에 몇 번이고 까무러치고 만다. 그리하여 자신의 체면과 가족도 잊고 양옥기의 발밑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집과 가정을 버리고 양옥기에게 몰려든 여인이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던 유부녀가 어느 날 가출을 했다. 불심(佛心)이 깊기로 소문난 여승(女僧)이 갑자기 파계를 했다. 명문(名門)의 규수로 아름답고 현숙한 처녀가 난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여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양옥기의 침실에 가면 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형편이니 양옥기에게 원한을 가진 남자들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양옥기가 아직도 건재한 것은 그의 무공이 말솜씨와 방사술만큼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양옥기는 자신에게 빠진 여인들을 짜낼 수 있는 데까지 짜내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이 마침내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모질게 발로 차 버렸다. 양옥기에게 몸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절망하여 자살한 여인도 상당히 많았다.
 이 희대(稀代)의 탕아(蕩兒)가 그녀에게 구혼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양옥기는 누구보다도 여인에 대한 경험이 많으므로 여인들이란 벗겨 보면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탐내는 것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 엄청난 부(富)였다.
 그가 지금까지 여인들에게서 짜낸 모든 재물을 합쳐도 그녀의 재산의 오분지 일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저주하는 다섯 명의 파락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
 
 양옥기는 얼굴 가득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나는 강호 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다.’
 그는 가슴속에서 득의만면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곳에 와서 유삼고의 거처를 기웃거린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갔다. 그동안에 어인 일인지 그는 유삼고의 코끝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자 그녀가 모습을 꽁꽁 숨겨 버린 것이다.
 양옥기는 일단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능란한 화술로 그녀를 유혹할 자신이 있었다.
 하나 당사자가 통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날고 기는 그일지라도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드디어 오늘, 그는 유삼고의 집에 음식거리를 날라다 주는 일꾼 하나를 포섭할 수 있었다.
 유삼고의 식솔들은 모두 그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심지(心志)가 굳어 그는 도무지 손써 볼 방도가 없었으나 때마침 주방에서 일하는 종업원 중의 한 명이 급히 돈이 필요하게 된 것을 알고 그를 유혹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여 간신히 회유하게 된 것이다.
 오늘 저녁, 그는 그 일꾼 대신 유삼고의 집으로 잠입해 들어갈 작정이다.
 일단 그녀의 거처로 들어가 그녀의 침실로 접근하기만 한다면 일은 절반이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사 발각된다 할지라도 그녀의 침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면 시끄러워서라도 그녀가 나와 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와 얼굴이 마주치게 된다면……
 ‘흐흐…… 그때는 그녀는 이미 내 품속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는 그때를 대비하여 이미 몇 번이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애처로운 얼굴 표정을 연습해 두었다.
 그녀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처량한 표정을 지은 후 입을 놀리면 그녀가 설사 대리석으로 만든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양옥기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땅거미가 짙어 오고 있었다.
 양옥기는 초조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이 녀석이 아직 왜 오지 않지?’
 그러다가 그는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돌아 그에게 다가오는 한 인영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아, 오는군!”
 그는 머리에 누런 두건을 쓰고 허름한 베옷을 입은 사나이였다.
 얼굴은 노리끼리했고, 한쪽 뺨에 커다란 사마귀가 나 있어 더한층 초라해 보였다. 그가 바로 양옥기가 포섭한 주삼(周三)이었다.
 “이제 오면 어떻게 하나?”
 양옥기는 그가 자신을 기다리게 한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 엄하게 꾸짖었다.
 주삼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굽실거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오느라 그만…….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양옥기는 조급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 준비는 다 되었는가?”
 주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데 한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양옥기는 눈을 치켜떴다.
 “아니, 일이라니……?”
 주삼은 그에게 다가오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사실은…… 너를 죽이려는 자가 있다!”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삼의 손이 칼날처럼 변하며 양옥기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그 손길이 어찌나 빠르고 쾌속했던지 양옥기가 미리 알았더라도 피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쾅!
 “크윽!”
 목덜미에 상대의 손이 닿는 순간 양옥기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통증에 신음도 제대로 못 지르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하나의 차디찬 시선이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자 양옥기는 절로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는 아직 이렇게 무시무시한 눈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너…… 너는 주삼이 아니로구나.”
 주삼, 노란 두건의 사나이는 무표정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서히 얼굴에서 하나의 인피면구를 벗겨 내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구레나룻을 잔뜩 기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였다.
 나이는 사십 대가량 되었을까?
 웬만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질려 버리고 말 정도로 거칠게 생긴 작자였다.
 양옥기는 겁이 덜컥 났으나 억지로 고성을 질렀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어서 이 줄을 풀고 막힌 내 혈도(穴道)를 풀어 주지 않는다면 너는 큰코다치고 말 것이다.”
 그의 폭갈에도 털보 사나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무시무시한 고리눈을 부릅뜨고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을 뿐이다.
 “네놈이 누군지는 안다. 네놈은 그 때려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화화공자 양옥기가 아니냐?”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그는 연신 이를 갈아붙였다.
 양옥기는 내심 움찔했다.
 ‘나를 알면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아무래도 내게 좋은 감정을 품은 놈 같지는 않구나.’
 양옥기가 생각을 굴리기도 전에 털보 사나이는 냅다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빠악!
 “우욱!”
 양옥기의 고개가 백팔십도로 회전하며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 나왔다.
 양옥기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신음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선혈과 함께 그의 이빨이 옥수수처럼 부서져 흘러내렸다.
 털보 사나이는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두 눈을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네놈이 감히 내 마누라를 등쳐 먹고 발로 차 버려? 그동안 네놈을 잡으려고 온 천하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오늘은 아주 요절을 내 주마!”
 양옥기는 이 사나이가 생면부지의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전과(前過)가 있는지라 절로 가슴이 다급해졌다.
 ‘크…… 큰일 났군……. 보아하니 내게 마누라를 빼앗긴 놈 같구나…… 내가 하필이면 이런 무지막지한 놈의 마누라를 건드렸다니…….’
 그는 급히 애걸하는 눈빛으로 털보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나…… 나는 당신을 본 적도 없는데…….”
 “이런 망할 녀석이…….”
 털보 사나이의 강철 같은 주먹이 다시 그의 콧등으로 날아왔다.
 쾅!
 벼락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양옥기의 콧등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크윽!”
 양옥기는 너무도 아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 그의 마음속은 그보다 몇 배 고통스러웠다. 그의 콧등은 오뚝하니 시원하게 뻗어 있어 그의 얼굴 중에서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콧등이 주저앉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럴듯해 보이던 양옥기의 얼굴이 아주 볼품없어졌다.
 털보 사나이는 그래도 양이 차지 않는지 그의 눈을 노려보며 커다란 주먹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네놈이 내 마누라를 차 버린 후 그년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네놈이 이 눈깔로 그녀를 보고 유혹했을 테니 내가 이 눈깔을 아주 빼 버리겠다.”
 이 말을 듣자 양옥기는 사색이 되었다.
 그는 다급히 부르짖었다.
 “제…… 제발…… 눈만은…….”
 하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털보 사나이는 양옥기의 두 눈 부분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빠악!
 괴이한 음향과 함께 양옥기의 두 눈이 있던 부분이 움푹 파이고 말았다.
 “케엑!”
 양옥기는 너무도 엄청난 고통에 그대로 실신하고 말았다.
 털보 사나이는 그제야 분이 풀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양옥기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이놈! 오늘은 이쯤 해 두겠다. 만일 한 번 더 다른 여인을 건드렸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려오면 그땐 아주 없애 버리겠다.”
 그는 침을 탁 뱉고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으음…….”
 양옥기는 두 눈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귀를 기울여 그 털보 사나이가 떠났음을 확인하자 이를 갈아붙였다.
 “으음…… 악마 같은 놈! 감히 내 눈과 귀중한 코를…….”
 양옥기는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자신의 얼굴 중 가장 잘생긴 두 눈과 코가 망가진 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낄낄거렸다.
 “흐흐…… 그러나 내게 이 혓바닥이 무사한 이상 나는 얼마든지 계집들을 요리할 수 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네놈은 화화공자 양옥기가 아니냐?”
 그의 앞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양옥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날 알아보는 놈이 있다니…… 혹시 이놈도…….’
 그가 미처 생각을 굴리기도 전에 난데없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이 나쁜 놈! 잘 만났다! 어디 혼 좀 나 봐라!”
 퍼퍽!
 상대는 무공의 고수인지 쉴 사이 없이 스물두 번이나 발길질을 해 댔다. 혈도가 막히고 밧줄에 묶여 있던 양옥기는 꼼짝없이 그의 발길질에 당해야만 했다.
 “어이쿠…… 아야……!”
 그자의 발길질은 몹시 정확해서 양옥기는 안 아픈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전신이 쑤셔 왔다.
 상대는 그래도 적성이 풀리지 않는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이놈! 번지르르한 얼굴과 혓바닥만을 믿고 여인들을 희롱하더니 꼴이 좋구나. 네놈 때문에 몸만 망치고 중이 되어 버린 내 동생을 생각하기만 하면 이가 갈린다. 이런 곳에서 네놈을 만나게 되다니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
 양옥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상대의 말투로 보라 조금 전의 털보 사나이보다는 젊은 나이인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은 왕왕 흥분하기가 쉽다. 이 청년도 하필이면 그의 여성 편력의 피해자가 분명했다. 그는 성질 급한 이 젊은이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그의 목덜미를 바싹 움켜쥔 젊은이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좋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껄껄 웃었다.
 “하하…… 그렇군. 네놈에게 좋은 형벌이 생각났다.”
 양옥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어 들려온 젊은이의 음성은 그를 거의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네놈이 내 동생을 유혹한 것은 바로 그 번지르르한 말솜씨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네놈이 내 동생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네놈의 혓바닥을 못 쓰게 만들어야겠다.”
 양옥기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젊은이의 주먹이 그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뭉그려 놓았다.
 콰앙!
 양옥기는 천지가 아득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실신해 버렸다.
 그의 코 아래는 완전히 짓뭉개져서 혓바닥도 한 줌 살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젊은이는 그제야 양옥기의 축 늘어진 몸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놈! 이제는 두 번 다시 순진한 어린 소녀들을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 못하겠지.”
 젊은이는 손을 탁탁 털고는 사라져 갔다.
 양옥기는 근 일 각 동안이나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아래턱에서 도저히 참지 못할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으음…….”
 그는 아래턱을 만져 보고는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만져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아래턱은 산산이 뭉개져 두 번 다시 원상태로 회복할 수가 없었다. 혓바닥은 이빨에 가닥가닥 잘린 데다 한데로 뭉그러져 있었다.
 그의 가장 커다란 장기 중 하나인 화려한 언변술은 앞으로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은 얼굴이 망가진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양옥기는 한참을 피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뒤,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낄낄거리고 있었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지만 내 아랫도리는 아직 건장하니 아직도 여자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그는 아픈 중에도 이런 생각에 입가를 실룩거리며 웃었다.
 바로 그 순간,
 “앞에 누워 웃고 있는 사람은 누구요?”
 어둠 속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렸다.
 양옥기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이미 두 번이나 된통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사람의 음성만 들어도 겁부터 났다.
 노인의 음성이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뉘신데 길바닥에 누워 계시오?”
 노인은 양옥기에게 다가오다가 갑자기 경호성을 질렀다.
 “아니 이런 상처를 입다니…….”
 양옥기는 노인의 손이 자신의 몸을 안아 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마조마해서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아니 대체 누가 사람에게 이런 몹쓸 짓을…… 쯧쯧…… 얼마나 아프겠소. 젊은이.”
 노인의 음성에 양옥기의 미간에 밝은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다…… 다행이군……. 이 노인은 나를 몰라보는군…….’
 노인은 양옥기의 처참한 모습이 안쓰러운 듯 혀를 쯧쯧 차며 수건으로 그의 피에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어느 분이시기에 이런 봉변을 당하셨소…….”
 노인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양옥기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를 안고 있는 노인의 손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순간 양옥기는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져졌다.
 “이…… 이제 보니 네놈은…….”
 쿵!
 ‘크윽!’
 양옥기는 땅바닥에 엉덩이가 부딪히는 충격에 눈물이 핑 돌았으나 지금은 그보다는 노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아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네…… 네놈은 바로 내 딸아이를 꼬드겨 집을 나가게 만든 양옥기란 놈이 아니냐?”
 노인은 격노를 참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양옥기는 아예 절망하고 빠져 버렸다.
 ‘제…… 제기랄……! 처음에는 마누라, 다음에는 동생, 이번에는 딸이라니……. 내가 여자를 이렇게 많이 건드렸던가?’
 양옥기는 처음에는 공포에 빠졌으나 이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들었다.
 ‘맘대로 해 봐라, 이 늙은이야! 난 더 이상 다칠 곳도 없다.’
 그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을 때 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 아이는 내가 늘그막에 얻은 유일한 아이였는데 네놈 때문에 집을 나간 후 결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네놈을 찾아 복수할 일념에 살아왔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창!
 노인이 칼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렸다.
 양옥기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내 딸아이가 집을 나간 건 네놈이 그 애를 능욕해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 네놈이 그런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아예 화근을 제거해 버리겠다.”
 양옥기는 이 말을 듣자 안색이 샛노래졌다.
 ‘이…… 이 늙은이가 혹시…….’
 그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의 벌거벗은 아랫배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그는 그것이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임을 알고 공포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칼날은 그의 아랫배를 타고 내려와 축 늘어져 있는 그의 남성에 가 닿았다.
 이윽고 터져 나온 노인의 음성은 양옥기를 지옥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놈을 거세(去勢)시켜 버려 영원히 여인을 범할 수 없도록 하겠다.”
 양옥기는 사색이 되어 속으로 부르짖었다.
 ‘안 돼──!’
 순간, 그는 하복부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까무러쳐 버렸다.
 그제야 조무상은 천천히 칼날을 거두었다.
 양옥기는 아랫도리가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
 그에게 지독한 짓을 했던 세 사람은 실은 모두 한 사람의 분장이었다. 조무상은 여전히 털보 사나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변성(變聲)해 동생을 잃어버린 젊은이와 땅을 빼앗긴 늙은이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양옥기에게 너무 심한 짓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인의 정절을 함부로 유린하고 비웃는 그런 작자는 응당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설사 그가 아닌 다른 누가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피바다 속에 잠겨 있는 양옥기를 뒤로하고 떠날 수 있었다.
 
 
 第 四 章 뜻 밖 의 보 수
 
 1
 
 가빈루(嘉璸樓),
 가빈루는 이 근처에서는 가장 번화하고 커다란 주루였다.
 은검랑군(銀劍郞君) 송자운(宋子雲)과 회하일도(淮河一刀) 강풍(姜風)은 가빈루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다닌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은검랑군 송자운은 하남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고수였다. 그는 용모도 준수하고 풍류를 하는 인물로 소문이 났다. 그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남들처럼 그녀의 미나 부를 탐하거나 허영에 들떠서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녀를 취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만이 탈혼마환 유효광의 마지막 절기인 구환살(九幻殺)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환살은 비환유문에서도 익힌 사람이 거의 없는 최고의 암기 수법(暗器手法)이었다. 문주 외에는 아무도 익히지 못하게 되었는데, 유효광은 그녀를 끔찍이 아껴 자신이 병석에 있을 때 그녀에게 구환살의 구결(句訣)을 알려 주고 말았다.
 그녀는 물론 무공에 별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구환살을 직접 익히지는 않았다. 하나, 그 절세무쌍(絶世無雙)의 암기 수법을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드넓은 강호 천지에도 그들 부녀와 송자운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송자운이 이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유효광의 약 수발을 든 여인이 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모는 일 년 전 병으로 죽었는데, 그때 송자운에게 자신이 모시던 유효광이 유삼고에게 구환살의 절기를 전해 주었다는 말을 했다. 물론 그녀는 별다른 뜻 없이 추억을 회상하다가 우연히 말한 것에 불과했다.
 하나 평소부터 무공에 남다른 뜻을 두고 있던 송자운은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 만일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구환살의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송자운은 단순히 하남(河南)의 풍류공자가 아니라 천하를 떨어 울리는 초절정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송자운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유혹이었다.
 그래서 송자운은 부랴부랴 이곳으로 온 것이다.
 하나, 청운의 뜻을 품고 이곳으로 달려온 송자운은 내심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이미 그녀를 노리고 접근하려는 수많은 사람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갈 기회를 노리고 배회하다가 우연히 회하일도 강풍을 만나게 되었다.
 강풍은 회하(淮河) 지방에서는 거의 사신(死神)처럼 군림하는 무서운 고수였다. 그가 한 자루 철산도(鐵山刀)를 질풍처럼 휘두르면 아무도 감히 막아 내는 사람이 없었다.
 강풍이 유삼고를 만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비환유문에서 문주인 탈혼마환 유효광이 병환으로 문주의 지위를 동생인 구룡환 유효풍에게 넘기는 회식이 있었다. 비환유문은 천하에 이름이 높은 문파였으므로 당시에 많은 고수들이 그 성회에 참석을 했었다. 회하일도 강풍도 당시 초청을 받고 참석을 했었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난생처음 보는 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한눈에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는 거기서 그녀가 유효광의 딸이며 천하에 이름이 나 있는 그 유명한 유삼고임을 알았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라 내색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를 잊을 수 없어 고민하다가 그녀가 이곳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달려와 보니 어이없게도 그녀는 수많은 구혼자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풍은 혹시나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고 매일 그녀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때 한 사나이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바로 은검랑군 송자운이었다.
 송자운은 강풍이 그녀의 미모에 빠졌음을 단번에 알고 합작을 제의했다.
 즉, 강풍이 그녀와 결합하는 것을 송자운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으니 일이 성사되면 그녀에게서 구환살의 비밀을 알아내어 송자운에게 넘겨준다는 것이다.
 강풍은 두말하지 않고 제안에 승낙을 했다.
 그의 목적은 그녀를 품 안에 넣는 것이므로 그 후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며 함께 행동했다.
 
 오늘도 두 사람은 가빈루의 한쪽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중요한 일은 다른 구혼자들을 어떻게 따돌리고 그녀에게 접근하느냐 하는 걸세.”
 안색이 창백하고 눈초리가 날카로운 송자운이 열띤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자들은 볼 것이 없지만 그중 몇 명은 우리도 조심해야 할 걸세.”
 강풍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풍은 회색 장삼을 걸치고 비쩍 마른 인물이었다. 보통 때도 그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다. 언제나 떠드는 것은 송자운이고 강풍은 주로 듣는 편이었다.
 지금도 송자운은 눈을 반짝이며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오늘 아침에 팔수표 전린이 어처구니없이 죽은 일은 우리에게도 크나큰 도움이 되었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모르지.”
 신나게 떠들어 대던 송자운은 목이 타는지 술을 한 잔 들이켰다.
 “크…… 오늘따라 술맛이 좋군. 여기 술 한 병 더 주게!”
 그는 지나가는 점원에게 술을 한 병 더 청한 후 다시 강풍을 바라보았다.
 “전린은 사실 무공이 고강해 우리의 가장 큰 적(敵) 중의 하나였네. 그 외에 다른 작자들은 우리들만의 힘으로 충분히 물리칠 수 있네. 그다음 문제는 자네도 알다시피 그녀를 어떻게 설득시키느냐 하는 걸세. 듣자 하니 그녀는 성격이 고고해서 아첨이나 입에 발린 말들을 굉장히 싫어한다더군. 그러니 자네는 그녀를 보면 되도록이면 싸늘하게 대하도록 하게.”
 강풍은 앙상하게 마른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송자운은 그가 자신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내심 시큰둥했다.
 ‘이 말라깽이 녀석은 너무 말이 없군.’
 그는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입으로 계속 지껄여 댔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던 응조왕 누남진은 강호에서 가장 거칠고 사나이다운 사람이었네. 그런 걸 볼 때 그녀는 아무래도 박력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네.”
 그가 한참 침을 튀기며 이야기에 열중할 때 점원이 술을 가지고 왔다.
 송자운은 술병을 잡고 자신의 잔에 먼저 한 잔 따른 후 강풍의 잔에도 가득 따라 주었다.
 “자, 한 잔 드세.”
 그는 강풍에게 술잔을 쳐들어 보이고는 막 그것을 마시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마시지 마오.”
 그의 귓전으로 실낱처럼 가느다란 전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송자운은 흠칫 놀랐다.
 전음성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송자운은 누가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다시 전음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돌아보지 마시오. 당신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발각되면 곤란하니, 또 당신은 나를 보아도 알지 못할 거요.”
 송자운은 자신도 모르게 강풍을 힐끗 쳐다보았다.
 강풍은 술잔을 만지작거린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음이 계속되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선의(善意)의 피해자를 없애기 위해서요. 당신이 마시는 그 술잔에는 치명적인 극독이 들어 있소.”
 송자운은 몸을 가늘게 떨며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바라보았다.
 술은 자신이 언제나 즐겨 먹는 죽엽청(竹葉淸)이 분명해 보였다.
 한데 이 정체 모를 전음의 주인공은 왜 이 안에 독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일까?
 송자운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한단 말인가?
 전음성의 주인은 그의 이런 마음을 짐작하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독은 물론 내가 넣은 것이오. 나는 주방에서 사람을 매수하여 당신들이 마실 술병에 독약을 넣었소. 하나 당신을 죽이려고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오. 내 목표는 바로 당신의 앞에 앉아 있는 그 빌어먹을 놈의 강풍이오.”
 송자운은 그 말을 듣자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강풍은 내 선친(先親)을 살해한 불구대천의 원수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당신까지 애꿎은 내 복수의 희생물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당신에게만 살짝 알리는 것이오.”
 송자운은 자신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 전음성의 주인의 말대로 만약 그가 자신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독주(毒酒)를 마시고 차디찬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전음성의 주인에게 고마워해야 될지 화를 내야 될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당신까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은 원치 않소. 죽는 사람은 강풍 하나면 족하오. 그러니 당신은 무슨 수를 쓰던지 강풍보다 먼저 독주를 마시면 안 되오. 강풍이 독주를 먼저 마셔야 그가 쓰러지고 당신은 안전하게 되오.”
 전음성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만에 하나 당신이 이 일을 강풍에게 알린다면 나는 다음번에는 강풍만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노릴 것이오. 강풍과 당신은 내 얼굴을 모르니 설사 당신이 강풍에게 알린다 해도 나를 잡지는 못할 것이오. 나를 밀고하든지 강풍이 죽는 걸 방관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요. 신중히 선택하기 바라오.”
 이 말을 끝으로 전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송자운은 어깨를 추스르는 척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하나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그런 인물의 모습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주위에는 상인인 듯한 사십 대의 장사꾼 차림의 인물과 중년 부부, 술 취한 장한들만이 가득 있을 뿐이었다. 한쪽에는 술에 취해 탁자에 엎드려 잠에 떨어진 늙은이도 있었다.
 송자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는 눈부시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자의 말이 맞다. 설사 내가 술 속에 독약이 들어 있다고 알려 주어도 강풍은 그자의 정체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에는 나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지 않는가?’
 그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절대로 하기 싫었다.
 더구나 엄격히 따지자면 강풍은 그의 경쟁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송자운은 강풍을 배신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나를 원망하지 말게. 자네가 나였더라도 아마 이랬을 것이네.’
 송자운은 안됐다는 듯 강풍을 힐끗 바라보았다.
 강풍은 여전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송자운은 문득 시선을 돌려 한쪽을 보다가 경호성을 터뜨렸다.
 “엇?”
 강풍은 그의 외침에 퍼뜩 놀라 그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 하나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강풍이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그 순간에 송자운은 번개같이 자신의 잔에 들어 있던 술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강풍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송자운을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인가?”
 송자운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눈이 많이 흐려진 것 같네. 인상이 내가 알던 기인 한 분과 비슷한 것 같아 착각을 했네. 한데 생각해 보니 그분은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이 아닌가?”
 강풍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했으나 별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송자운은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가리켰다.
 “나는 막 들었네. 자네도 한 잔 하지.”
 강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송자운은 전신의 신경이 강풍의 손에 들린 술잔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강풍은 유달리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술잔이 그의 입으로 다가갈 때마다 송자운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빨리 마셔라…… 빨리…….’
 하나 송자운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풍은 막 술잔을 입에 대려다가 갑자기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송자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이놈이 눈치를…….’
 하나 강풍은 태연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송자운은 바싹 긴장이 되었다.
 그는 양손에 공력을 가득 돋운 채 여차하면 먼저 선수(先手)를 쓰리라 결심했다.
 “무슨 일인가?”
 송자운이 잔뜩 긴장을 한 채 물어보자 강풍은 피식 웃었다.
 “뭐 이렇게 놀라나? 다름이 아니라 그녀는 박력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는 박력과는 거리가 머니 어떻게 하면 좋겠나?”
 송자운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난 또 뭐라고……. 그거야 내게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송자운은 전신에 활처럼 바짝 조여졌던 긴장이 풀어져 맥없이 대답했다.
 강풍은 그의 말이 믿음직스러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송자운은 강풍이 눈으로는 그를 보고 있으면서도 귀로는 다른 사람의 전음을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강풍은 난데없이 귓전으로 들려오는 전음성에 온통 정신이 홀려 있었다.
 “조금 전 내가 왜 당신을 제지했는지 아시오? 그건 당신의 앞에 앉은 사람이 당신의 눈을 속이고 당신의 술잔에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내가 목격했기 때문이오.”
 전음성의 주인은 청년인 듯했다.
 “나는 이런 번거로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겠소. 하지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무도인(武道人)으로서 이런 비열한 짓을 보고 참을 수 없기에 당신에게 알려 주는 거요. 조금 전 당신의 앞에 있던 자는 당신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유인한 후 품에서 무언가 가루약을 당신의 술잔에 탔소. 그 약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약을 넣을 때 그자의 표정을 보니 흉악한 기색이 가득했소. 그러니 당신은 조심하도록 하오. 상대방은 무인(武人)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파렴치한 작자요.”
 전음성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하나, 강풍은 가슴속에 치솟는 살기를 억제하기 어려웠다.
 송자운이 무언가 흑심을 품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가 전설상의 절기인 구환삼을 거들먹거리며 자신은 유삼고에게는 조금도 흑심을 품고 있지 않다고 누누이 말해 왔지만 이 세상에 남자치고 그녀를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필시 송자운이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둘러댄 핑계임이 분명했다. 우선, 유효광이 아들도 아닌 딸에게 가문의 최고 절기를 전수해 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신은 송자운이 무슨 의도에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 치사한 녀석은 경쟁자 중에서 가장 강적인 자신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와 함께 있으면서 완전히 경계심을 풀어 놓고 있었다. 만약 미지(未知)의 그 인물이 무사도(武士道)를 발휘하여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았으면 자신은 벌써 송자운의 손에 비명횡사하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아까 다른 사람을 잘못 보았다며 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한 송자운의 행동이 수상해 보였다.
 송자운 같은 고수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만무했다. 송자운은 그때 독약을 자신의 술잔에 넣을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리라.
 강풍은 이런 생각에 송자운을 향한 살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송자운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강풍이 무언가 심사숙고하는 표정이자 일이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쳐들고 그를 쳐다보는 강풍의 눈자위에 살기가 번뜩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안 되겠다 싶어 강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강 형, 조금 전에 말이오. 나는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소…….”
 송자운은 강풍에게 조금 더 다가앉으며 속삭였다.
 강풍은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송자운을 노려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송자운은 자신이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막 술을 마시려고 하는 순간…….”
 그때, 강풍은 갑자기 무언가 차디찬 것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은 것을 느꼈다.
 동시에 조금 전 자신에게 중요한 제보를 했던 그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조심하시오! 암습이오!”
 강풍은 더 이상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송자운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놈! 감히 나를 암습하다니…….”
 송자운은 강풍이 설마 이렇게 자신을 공격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라 피하지 못하고 그의 칼에 가슴을 격중당했다.
 파앗!
 “크윽!”
 피 분수가 뿜어 오르며 송자운의 상체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송자운은 고통과 분노로 사력을 다해 자신의 장검을 뽑아 강풍에게로 휘둘렀다.
 이상하게도 강풍은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송자운의 검은 강풍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쭈아악!
 “크아아악!”
 강풍은 목이 절반이나 베어진 채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송자운도 쓰러진 강풍의 시체를 노려보다가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슴은 이미 심장까지 강풍의 칼에 베어진 상태였다.
 송자운은 자신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선혈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숨이 끊어지려는 마지막 순간에 송자운의 머리에 문득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 술잔에 과연 진짜로 독이 들어 있었을까?’
 송자운은 영원히 그 의문을 풀지 못했다.
 “사…… 살인이다!”
 “두 사람이 서로 상잔(相殘)했다!”
 그제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점원들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고, 손님들은 허겁지겁 주루를 벗어났다.
 강풍과 송자운의 뒤에 앉아 있던 술 취한 노인도 다른 손님들을 따라 주루를 빠져나갔다. 주루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는 턱에 붙은 수염을 떼어 냈다.
 조무상은 두 구의 시체로 소란스러운 가빈루를 힐끗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술 한 방울에 두 사람이라……. 이것도 괜찮군.”
 조금 전 두 사람에게 보냈던 전음성의 주인은 물론 그였다.
 그들의 술잔에 독 같은 것이 들어 있을 리는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격장지계(擊將之計)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무상은 송자운이나 강풍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마디 말로써 그들을 서로 이간(利間)시킨 후 적절한 시기를 보아 강풍에게 손을 썼다.
 송자운이 강풍에게 이상한 전음성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조무상은 자신이 마시고 있던 술병에서 술 한 방울을 손가락에 묻혀 강풍에게 퉁겨 보냈다.
 술은 강풍의 목에 있는 혈맥(血脈)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강풍은 그것이 술인 줄도 모르고 송자운이 자신을 암습하는 것으로만 알고 먼저 손을 쓴 것이다.
 하나 그는 송자운이 마지막 발악으로 휘두른 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무상이 술 한 방울을 던질 때 날혈수법(捏穴手法)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날혈이란 타혈(打穴), 불혈(拂穴) 등 모든 점혈수법(點穴手法) 중에서 가장 고도의 수법을 말한다.
 인체에는 수십, 수백의 혈맥이 있다. 이 혈맥은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일정한 부위를 지나간다. 이 혈맥의 위치와 시간을 조절하여 상대의 혈도를 제압하는 것이 바로 날혈인 것이다.
 이 수법은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고도의 정확성이 없으면 익힐 수 없다. 언제 어느 시간에 혈맥이 어느 곳을 지나가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수법을 익히게 되면 상대방을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제압할 수 있다.
 조무상은 강풍이 단 일 초를 사용하게끔 시간을 조절하여 날혈수법을 사용했다. 그의 계산은 정확하여 강풍은 송자운이 펼치는 최후의 일격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다섯 명의 파락호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하나 이것으로 거래가 성사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통상 마지막 일은 가장 중요한 법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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