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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1권-1

2014.12.31 조회 5,951 추천 50


 해일
 
 따가운 햇살이 눈가를 찡그리게 하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빛깔이 푸른 옥빛천지인 바다.
 하늘과 바다를 구분 짓는 것이라곤 유일하게 좌에서 우로 그려져 있는 수평선이 전부인 곳.
 그 바다 한가운데 사람 다섯 정도만 타도 비좁아 보일 것 같은 조그만 낚싯배 하나가 떠 있었다.
 “어이! 지만! 이제 그만 낚싯줄을 걷어야겠어.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뱃머리에는 구릿빛을 넘어서 검게 그을린 피부와 그에 어울리는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태수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고 고물 쪽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지만이 한 발로 배 키를 고정한 채 낚싯줄을 가늠하고 있었다.
 배의 중앙 물 칸에는 수십 마리의 물고기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는데, 마치 그 모습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듯했다.
 “저도 낚싯줄을 걷으려 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늘이 너무 조용해요.”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은 일명 주낙이라 부르는 낚시 방법으로 낚싯줄 하나에 여러 개의 낚시를 줄줄이 매달아 미끼를 꽂은 다음 물속으로 실타래를 풀어놓는 방법이다.
 그렇게 실타래를 풀어놓으면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한 낚싯줄에 여러 마리의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잡히는 것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꽤 많은 고기들이 잡힌 게 들어가서 소주 한잔 할 수 있겠구먼.”
 “형님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에요.”
 풀어놨던 낚싯줄을 걷어 올리는 두 사람의 입가에는 풋풋한 미소가 어렸다.
 태수는 낚싯줄을 걷어 올리다 말고 왼쪽 가슴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빨아 재낀 후 연기를 내뿜었다.
 “자네야 집에 가면 여우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새끼가 있어 반갑게 마중이라도 나온다지만, 나야 집에 가도 반길 사람 하나 없는데 술과 담배마저 없다면 무슨 낙으로 세상 살겠나?”
 “형님도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새장가 가시지 그래요. 읍내 벚꽃 다방 정 마담이 형님만 보면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게 좋아하는 눈치던데.”
 “예끼, 이 사람아! 실없는 소리 그만하게! 정 마담이 눈웃음 쳐주는 사내가 어디 한둘이던가. 농일랑 그만하고. 어여 시동이나 켜게.”
 “하하, 그런데 왜 형님의 얼굴이 뻘게지는 겁니까?”
 “어여 시동 켜래두!”
 어느새 태수의 목소리는 높아져 있었다.
 통통통통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배가 낮은 몸부림을 치며 흰 연기를 토해냈다.
 나직한 뱃고동 소리를 따라 상상도 못할 엄청난 재앙이 닥쳐오는지도 모르고,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얼굴엔 조가가 좋은 듯 만족한 웃음만이 감돌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 부근에서 그들의 삶을 한입에 삼켜버릴 거대한 파도가 아가리를 떡 벌린 채 무서운 속도로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보게, 지만. 갑자기 수면이 낮아졌다는 느낌이 안 드나?”
 “형님도 느끼셨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를 향한 태수의 눈동자 속에 알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저길 좀 보게! 수평선이 높아졌네!”
 “어디요?”
 운전키를 잡고 있던 지만의 시선이 태수의 손가락을 따라 뒤로 돌아갔다. 분명 한 자 이상 남아 있던 수평선과 태양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 사이를 거대한 해일이 차지한 채 두 사람을 향해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소, 속력을 높여! 속력을!”
 부아앙
 지만의 손은 이미 속도 레버를 최고치로 올리고 있었지만, 머리는 이미 저 해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이를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수평선에서 한 자라면 둘이 타고 있는 배까지 왔을 때의 그 높이는 상상을 불허한다.
 낼 수 있는 모든 속도를 내며 조금이라도 공기의 저항을 줄여보기 위해 자세까지 바짝 낮추었지만, 다가오는 해일의 마수를 벋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꽈우우우우
 “이봐, 속력을 더 올려, 더!”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미 해일의 아성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가까운 위치에 와 있었다.
 “아… 안 돼! 안…!”
 두 사람의 공포로 일그러진 표정을 향해 거대한 물줄기가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꽈아아아앙
 불과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푸른 아가리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낸 해일이라는 괴물은 삽시간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를 집어삼킨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육지를 향해 거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 * *
 
 민호가 살고 있는 곳은 남해에서도 가장 변두리, 지도상으로 보면 거의 땅 끝의 경계선 상에 위치한 소봉 마을이었다.
 약 7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로, 마을사람들 성씨 대부분이 박씨인 집성촌이었다.
 어촌의 마을답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그만 논밭을 경작하며 어부 일로 먹고살았으며, 일부는 읍내에 일자리를 가지고 있어 아침마다 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뒤편으로 해발 300미터도 안 되는 조그만 비봉산이 있었다. 무릇 마을 형태가 산의 끝자락과 바다가 맞닿은 곳의 경사면을 따라 삼각형 형태로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산과 가까운 곳의 집들은 민호네 집을 포함해 몇 가구되지 않았고 해안도로에 가까워질수록 집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민호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전체와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망이 좋다고 하겠지만, 교통수단이라곤 농사지을 때 쓰는 리어카와 두 다리가 전부인 가정형편을 고려했을 때 날마다 등산로에 가까운 길을 걸어서 학교로 가는 민호의 입장에는 동네 아래쪽에 사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즈음 마당에 말려 놓았던 고기들을 걷어 들인 후,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선창가로 걸어가던 민호는 저 멀리 보이는 낯선 바다의 형태에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엄마, 바다가 왜 저래?”
 “바다가 왜?”
 잠시 딴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순임은 아들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헉!’
 저 멀리서부터 해수면을 높이며 다가오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해일이었다.
 “뛰… 뛰어!”
 평상시 들어본 적이 없는 다급한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
 순임은 아들의 손을 잡고 마을 뒤쪽의 비봉산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민호 또한 본능적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서운 재앙임을 아는 듯 엄마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렸다.
 순임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위급상황을 알렸다.
 “해일이! 집채만 한 해일이 우리 동네를 향해 밀려오고 있어요! 어서 피하세요!”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사람들과 집 안에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들리는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뛰쳐나왔다.
 “뭐야? 비상이라니, 대체 뭔 일이야?”
 “저길 보세요!”
 순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껴야 했다.
 아무런 바람도, 그렇다고 하늘에 구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소리 소문 없이 은밀히 나타난 도둑처럼 붉은 노을을 따라 거대한 파도가 저 멀리서 마을을 향해 힘차게 밀려오고 있었다.
 “해… 해일이다!”
 순임은 민호의 손을 꽉 부여잡은 채 마을을 가로질러 산을 향해 뛰어갔고, 그 뒤를 마을사람들이 허겁지겁 따르기 시작했다.
 촌각을 다투는 생명의 위협에 남아 있을 부인이나 부모, 심지어 자식마저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본능만이 사람들의 감성을 뒤흔들었다.
 “헉! 헉! 헉!”
 가쁜 숨소리가 산 중턱에서 메아리 치고, 흘러내린 땀들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뒷산에 도착했을 즈음, 멀리 있는 것으로만 보이던 해일이 어느새 마을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꽈아아앙! 꽝! 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면이 흔들거렸다.
 무자비한 해일은 마을 앞 선창가에 정박해 있던 배들을 박살내며 마을을 덮치고 있었다.
 선착장의 효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정박되어 있던 배들을 장난감처럼 들어 올리며 마을의 집들 위로 내리찍고 있었다.
 와장창!
 바닷가이기에 바람에도 잘 견디고 튼튼하게 지어졌다고 생각했던 집과 담들이 마치 모래성처럼 일순간에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해일이 미치지 않는 범위까지 대피한 마을사람들은 미처 가져오지 못한 살림살이들과 가구, 집기들이 장난감처럼 바닷물과 뒤엉켜 요동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누구 하나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성난 물길은 한 번의 분탕질로는 양이 안 찬다는 듯이 몇 번에 걸쳐 마을을 할퀴고 있었다.
 
 “아… 아버지, 아버지 못 봤어요?”
 잠시 뒤, 화들짝 놀라며 부모를 찾는 우천이네를 필두로 마을사람들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가족이나 친척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우리 딸 주미가 안 보인다. 주미야! 주미야!”
 워낙 경황이 없었음인지, 해일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살았다는 기쁨은 잠시였을 뿐 순식간에 가족을 잃은 슬픔과 재산을 잃은 슬픔이 마을사람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으어엉!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 내 딸 없이는 못 살아. 주미야!”
 여기저기서 대성통곡이 터지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힘들게 왔던 길을 뛰어 내려가 거친 물길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물길 속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주었다.
 “이것 놔! 내 딸이 저 물속에 있단 말이여! 어여, 이것 놔!”
 “이봐! 정신 차려! 자네마저 죽고 싶어!”
 아무리 잘 그려놓은 그림이라도 불길에 닿으면 순식간에 타 없어져 재가 되는 것처럼 마을사람들의 눈에 비친 해일의 횡포는 마을이라는 그림을 순식간에 도화지에서 지우고 있었다.
 이장인 홍천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대피한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가장 절친한 지기인 지만이 안 보이는 걸 깨닫고는 주변사람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호… 혹시 지만, 이 사람 오늘도 바다를 나간 건가? 하지만 오늘은 만조라 물길이 움직이지 않아 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일 텐데?’
 바다라고 해서 날마다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물때가 맞아야 고기가 잡힌다. 오늘처럼 만조일 경우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거의 없어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낚시를 던지고 그물을 펼쳐도 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업이 생계인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오늘 배에 나가지 않았다.
 홍천은 서둘러 순임에게로 가 다급하게 물었다.
 “호… 혹시 지만 이 친구, 오늘도 태수 형님과 같이 바다에 나갔습니까?”
 철퍼덕 주저앉은 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순임의 모습에서 지만이 태수와 함께 오늘도 바다에 나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미 순임의 눈동자엔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민호 엄마, 정신 차려! 민호 엄마!”
 홍천의 부인이 순임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옆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으엉엉엉! 엉엉! 엄마 왜 그래! 엄마! 정신 차려! 왜 그래, 엄마!”
 아들의 외침이 귀에 들어왔는지, 초점을 잃었던 순임의 눈동자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민호를 가슴에 꽉 껴안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흐흐흑,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 여보…!”
 ‘오늘 따라 유난히 된장국이 먹고 싶네! 이따 저녁에 호박이랑 조개 좀 넉넉히 넣어서 된장국 좀 끓여놔!’라고 했던 남편의 소리가 순임의 귓가를 맴돌았다.
 
 * * *
 
 갑작스런 기상이변에 나라에서는 국가 재난사태를 선포하고 남해안 전역을 피해지역으로 선정했다.
 남쪽에서부터 올라온 해일은 민호가 사는 마을뿐만이 아니고 남해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직 정확한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망자만 해도 천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고, 병원 자체가 해일에 휩쓸려 버린 경우도 많았기에, 상태가 심하다 싶은 환자들은 일단 도시의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렇지 않은 환자들은 인근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단 한순간에 수천 억에 달하는 엄청난 재산과 인명피해가 생겨버린 것이다. 다친 사람과 다르게 해일의 마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피해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당장 먹을 음식과 잠자리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장마 시 나타나는 집중호우나 홍수 같은 경우, 물길에 휩쓸린 일부만 피해를 입기에 근처 학교나 마을 회관 같은 곳에 임시로 수용이 가능하다지만, 이번 해일 같은 경우는 그런 것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학교나 마을 회관이라고 해서 바닷물이 비켜간 것이 아니었기에 가장 시급한 것이 당장 잠자리와 식수였다.
 더군다나 논밭의 식물들이 염분 가득한 바닷물의 손길이 스친 후, 마치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누렇게 말라버렸고, 일부 적응력이 강한 식물만 살아남았을 뿐 일반 곡식과 채소는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닷물이 닿은 모든 물건들이 빠르게 부식되거나 푸석푸석해져버렸고, 곳곳에 죽은 시체들(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사체까지 포함)이 제때 처리되지 못해 부패하면서 예상치 못한 병균들이 득세했다.
 과학의 발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연으로 인한 재해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듯이 해일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면서 뭣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망연자실해 있는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자국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차를 타고 시골로 내려왔다.
 죽어 있는 땅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구호의 손길을 뻗친 것은 싼 임금으로 가장 많이 부려먹을 수 있는 군인들이었다.
 젊고 힘세며 명령을 잘 듣고 일을 잘하는 저임금 고효율의 대명사. 군부대 장비와 장병들은 제일 먼저 도착해 마을사람들과 힘을 합해 쓰레기 처리라든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이송을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자원봉사자들이 도착해 구호물자들을 나눠주며 부서진 가옥과 건물들을 수리하는 작업에 투입이 되었다.
 수많은 소방차들이 동원돼 바닷물이 지나간 곳의 염분을 씻는 작업을 했고 마을 곳곳에 임시 천막이나 컨테이너가 설치되어 사람들이 잠을 잘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해일이 일어나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민호의 아버지인 지만과 그와 함께 낚시를 갔던 태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순임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과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오히려 어린 민호가 멍하고 있는 엄마를 대신해 구호물품을 타오고 있었다.
 학교는 이미 임시 휴교를 선포한 상태였기에 민호는 하루의 대부분을 넋이 나가 있는 엄마를 대신해 밭에 나가 찬거리를 구해오거나 물을 길어 오고 있었다.
 만일 민호가 조금 커 청소년의 상태만 됐더라도 아버지의 죽음에 깊이 좌절하며 방황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민호는 아직 나이가 어린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기 보단 우선 먹을 밥과 잠자리가 더 시급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워낙 높은 위치에 집이 지어져 있어서 이번 해일에 집이라도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 아래쪽에 벽돌만 남아 있는 집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을회관에 구호물품을 나눠주는 곳에 들러 라면 한 박스를 얻어들고 집으로 돌아온 민호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듯 멍하니 앉아 있는 엄마를 대신해 라면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엌으로 들어간 민호는 냄비에 물을 담기 위해 물 항아리를 열었다.
 “어, 물이 없네?”
 그제야 아침에 설거지를 하며 물을 다 썼다는 것이 기억났다.
 원래는 동네 우물에 모터를 연결해 물을 끌어다 쓰고 있었는데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간 후, 우물물에서 짠맛이 나 아직은 먹을 수가 없었다.
 물을 길어오기 위해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 순임이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순임은 일주일 동안 민호에게 밥 정도는 차려주고 있었다. 다만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말을 거의 않고 있었다.
 “…약수터 가냐?”
 ‘엄마가 말을 한다.’
 민호는 간만에 들어보는 엄마의 음성에 매우 반가운 듯 세세히 설명했다.
 “응! 마을 우물은 아직도 짠맛이 나 먹을 수가 없어. 그래서 뒷산 샘터에 갔다 오려고.”
 “길이 가파르니 조심해라.”
 “한두 번 가본 것도 아닌데 걱정 마. 금방 갔다 올게.”
 엄마가 말하기 시작했다는 기쁨에 민호는 단숨에 뒷산을 향해 뛰어갔다.
 집과 약수터와의 거리는 약 500미터 정도 되는 짧은 거리였지만, 길 자체가 가파른 경사 길이었기에 마을사람들은 대체로 약수터로 물을 뜨러 가지 않고 마을회관에 소방차가 오기를 기다려 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초봄의 싱그러움 때문인지 나무와 풀들이 한가득 생기를 머금고 독특한 숲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산길 중간 중간에 산딸기, 솜다리, 설앵초, 애기 괭이눈 등 봄을 상징하는 식물들이 한껏 자신의 자태를 뽐내며 숲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평상시면 한참을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터이건만.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지고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민호의 입에선 문득 한숨이 나왔다. 비록 초등학교 4학년이라지만, 갑자기 변해버린 주변상황들이 마음속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 말로는 이번 해일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체조차 보지 못했기에 죽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아버지의 실종 그리고 갑자기 변해버린 엄마.
 연일 계속되는 마을사람들의 통곡소리.
 어린 나이의 민호에겐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받아들여지기 힘든 가혹한 고문이었다.
 잡다한 생각을 하며 걸었기 때문일까?
 하릴없이 걸음을 옮기던 민호는 순간적으로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다 발을 헛디뎠다.
 “으아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5미터 아래 수풀이 우거진 골 사이로 굴렀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끄으응! 되게 아프네.”
 민호가 정신이 든 것은 수분이 지난 후였다.
 심히 어지러운 듯 힘겹게 고개를 들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굴러 떨어진 바닥에 낙엽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 완충작용을 해주었기에 다행히 이마에 찰과상을 입은 것 빼고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다.
 “젠장!”
 나직이 욕설을 내뱉으며 몸에 묻은 흙과 낙엽들을 털어낸 후, 주전자를 집어 들던 민호는 주전자 뚜껑이 보이지 않자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수풀이 우거져 있어 주전자 뚜껑을 찾는 게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재수가 없으려니… 아이고, 아파라.”
 뚜껑을 잃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고사리 같은 오른손에 꼭 쥐고 있던 주전자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고개를 숙여 수풀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엉? 이런 곳에 구슬이 다 있네!”
 수풀 사이에서 조그만 구슬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에 냉큼 집어 들었다. 주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자 구슬은 제 빛깔을 찾으려는 듯 영롱하게 빛을 바랬다.
 청명하도록 붉은 반투명 구슬.
 “이야! 예쁘다!”
 한동안 구슬의 매력에 빠져 있던 민호는 지금 보고 있는 구슬이 이전에 보아왔던 어떤 구슬보다 아름다웠기에 횡재했다는 표정으로 냉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아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얼른 찾아서 집에 가야지.”
 흐뭇한 미소로 걸음을 옮기던 눈동자에 뭔가가 어슴푸레 들어왔다.
 “에이, 멀리도 날아갔네.”
 저 멀리 고개를 내밀고 있는 뚜껑을 발견하고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컹
 ‘뭐지?’
 발에 느껴지는 감촉이 흙이나 낙엽을 밟을 때 오는 감촉이 아님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하며 수풀을 헤쳐 봤다.
 “으헉! 소… 손!”
 수풀 속에 사람의 손이 보이자 너무나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쿵쿵쿵
 얼마나 놀랬던지 심장은 평상시의 몇 배로 뛰고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축축할 정도로 맺혀들었다.
 “시… 시체다!”
 해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갑작스럽게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엄습하자 무한한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더 이상 수풀을 헤치고 시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은 민호는 재빨리 비탈길을 기어올라 정신없이 집을 향해 뛰었다.
 “어, 엄마! 뒷산, 헉헉! 샘 옆에 시체가… 헉헉! 시… 시체가 있어!”
 “뭐라고? 숨 넘어 가겠다. 천천히 말해봐. 천천히.”
 “헉헉, …죽은 사람이 있다고!”
 아무런 의욕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던 순임의 얼굴에 일순간 혈색이 돌았다. 물론 기뻐서 돌아온 혈기가 아니라 깜짝 놀라서 돌아온 혈기였다.
 벌떡 일어서려던 순임은 너무 오랜 기간 넋 놓고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엄마, 괜찮아?”
 “난 괜찮으니 어서 가서 동네사람들에게 알려라.”
 민호는 잠시 엄마의 상태를 살피며 머뭇거리더니 이내 호흡이 안정되는 게 보이자 안심하고 돌아섰다.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민호가 마을 회관으로 뛰어가 동네사람들에게 자신이 보았던 사실을 전하자 그곳에 있던 마을 사람들과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돌아가려던 소방관들이 서둘러 들것을 비롯한 장비들을 챙긴 후, 민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디냐?”
 “저곳이에요.”
 소방관들은 들것을 가지고 민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소방대원 중 한 명인 철규는 수풀을 헤치고 노인의 시체를 확인하는 순간, 지난 며칠 동안 보아왔던 해일에 의한 익사자의 시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시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몸 여기저기 칼자국과 함께 쇠로 된 날카로운 파편들이 박혀 있었다.
 철규의 동료들도 노인의 시체에 손을 대지 않고 일순간 머뭇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이… 이거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은데?”
 “살인이라면… 이건 경찰에 연락해야겠군.”
 
 반 시각이 흐른 후에야 노인의 시체가 있는 곳을 기점으로 워밍 테이프가 설치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아섰고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올 때까지 제복을 입은 경찰들에 의해 주변이 통제되었다.
 형사들은 노인의 시체를 면밀히 살피더니 이내 곳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풀 주변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누군가 노인을 죽인 후, 이곳 야산에 가져다 버렸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아직 부패하지 않은 걸로 봐선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참 난감하구만!”
 “더 있어 봐야 별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이봐, 김 형사, 일단 시체는 감식반에 넘기도록 하고 이만 철수하지.”
 “이곳에서는 별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겠네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마무리하라고.”
 수첩을 호주머니에 넣고 워밍 테이프를 넘어가던 반장은 뭔가가 생각나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김 형사, 초등학생이 여길 처음 발견했다고 했지?”
 “네.”
 “그 학생 한번 만나보고 가야겠군.”
 잠시 후 형사들이 민호의 집을 방문했다.
 “네가 신고를 한 학생이냐?”
 초등학생인 민호로서는 갑작스런 형사들의 방문이, 호기심이나 반가움이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그냥 아저씨들이 묻는 말에만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주면 된단다.”
 민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엄마인 순임을 찾았다.
 마침 순임이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누구시죠?”
 형사 중 한 명이 호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순임에게 내밀었다.
 “잠깐 이 학생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민호는 재빨리 다가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나서야 형사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형사들도 어린 민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으며 발견 당시 상황과 그밖에 소소한 것들을 물어봤다.
 민호는 아는 것을 모두 말해주었다.
 다만 한 가지 주전자 뚜껑을 찾으려다 주은 구슬에 대해서는 왠지 말하기가 싫어 쏙 빼놓았을 뿐.
 형사들은 수첩에 메모를 끝낸 후,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민호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 * *
 
 경찰청 산하의 과학수사과.
 과학수사과는 크게 과학수사계와 지문계, 채증계로 나뉘는데, 이중 변사자의 신원확인이나 범죄경력 조회 및 지문 자료를 전담하는 부서가 바로 지문계였다.
 지문계의 감식반 관계자들은 요즘 해일로 인한 사망자들의 신원확인 의뢰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거의 며칠을 뜬눈으로 날을 새다시피 일을 했어도 앞으로 해야 할일이 지금까지 했던 일보다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체를 보관하는 냉동실까지 꽉 차 더 이상 시체를 수용할 수 없는 포화상태.
 그때 민호가 발견한 노인의 시체를 실은 구급차가 도착했다.
 “새로운 시체 가져왔습니다.”
 “또야.”
 뒷문을 열고 흰 시트에 담겨 있는 시체를 내리는 구급차 운전사를 바라보는 감식반 직원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봐, 지금 여기 꽉 차서 더 이상 보관할 데도 없어.”
 감식반 책임자인 김 과장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구급차 운전사가 시체를 내리던 행동을 멈추고 감식반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것 어떻게 합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난처한 듯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표정을 짓는 운전사를 보며 김 과장은 자신들의 일을 다른 곳에 떠넘기려고 맘을 먹었다.
 “내가 국과수에 전화해 놓을 테니까 그곳에다 갖다 주게.”
 “알겠습니다.”
 
 국립과학 수사연구소.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의 본소는 서울 양천구에 위치해 있었고, 지방에 각각 세 개의 분소를 두고 있었다.
 부산광역시 영등포구에 남부분소를, 전남 장성군에 서부분소를, 대전광역시에 중부분소를 두고 있었다.
 해일 때문에 요즘 경찰청의 과학수사과 못지않게 바쁜 분소가 있었으니 부산에 위치한 남부분소와 전남 장성에 위치한 서부분소였다.
 두 분소는 지금 며칠째 철야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국과수는 원래 경찰청에 소속되지 않고 행정자치부에 소속되어 있기에 과학수사과와는 다르게 수사권이라는 권력은 없었고, 직원들 대부분이 연구원들로 이뤄져 있었다.
 연구원들 자체가 뭔가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즐겨하다 보니 수시로 야근을 할 때는 많았지만, 지금처럼 죽어라 일에 치여서 야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분소 내부에서도 크게 세 개의 부서로 나뉘는데, 총무과와 법의학부, 법과학부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법의학부는 법의학과, 생물학과, 범죄심리과, 문서 사진과 등으로 세밀하게 나누어지는데 각 과마다 연구실을 따로 두어 특정 대상에 대한 분석 자체를 분담해서 하고 있었다.
 검안, 부검, 병리학적 조직진단, 슈퍼 임포스, 복안법, 플랑크톤 감정 등을 전문으로 하는 법의학과와 모발, 인체분비물, 혈액, 혈흔 및 인체조직 등 생물학적 시료에서 면역, 혈청학,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한 개인 식별이나 동식물의 형태학적 감정을 하는 생물학과의 연구원들이 요즘 가장 죽어라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부검관리실에서 부검을 해주면 생물학과의 연구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죽어라 분석하는 것이다.
 항상 가장 늦게 출근하고 가장 일찍 퇴근하기를 일삼던 분소의 소장도 요즘은 거의 두 과의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 연구소 내에서는 가장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소장이 날마다 두 과의 연구실을 오가며 격려를 위장한 감시를 하자 연구원들은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죽어라 일하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순수한 사명감에 불타 열심히 일하는 연구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부검관리실의 실장을 맡고 있는 나성만을 비롯한 부검 전문 연구원들은 요즘 갑자기 밀려드는 엄청난 일감에 며칠 동안 야근을 해서인지 벌게진 눈을 비비며 피곤함을 풀기 위해 서로의 뒷목을 주물러주고 있었다.
 “오늘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마셔보죠!”
 “나는 왜 피를 보고나면 술이 당기는지 모르겠다니까?”
 “자네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부검실 직원들은 다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다네.”
 연구원들 대부분은 피곤함이 몰려오는지 피로에 찌들어 있는 표정이었지만, 얼마 안 있으면 마음 놓고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위생장갑을 벗고 도구들을 정리하는 손길에는 한결 여유가 묻어나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소장이 인심을 썼는지 오늘 부검관리실에 회식비로 100만원이 내려와 있었다.
 일 끝나고 회식비로 화끈하게 술 마시러 가자는 의견이 모아져 여유를 부리며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덜컹!
 갑작스럽게 부검실 문이 열리며 시체를 이송할 때 쓰는 간이침대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또 시체인가요?”
 “실장님, 저도 퇴근시간 다 되었는데 이런 걸 운반하는 게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니 저에게 인상 쓰지 마십시오!”
 시체를 운반해온 사내는 약간 거칠게 간이침대를 밀어놓더니 푸념을 하며 돌아섰다.
 나성만은 방금 대답한 사람이 비록 연구원이 아닌 보조원이긴 하지만, 워낙 오래 근무해 나이가 자신보다 많다보니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보세요.”
 연구보조원이 툴툴거리며 사라지자 나성만을 비롯한 연구원들은 새로 들어온 시체를 짜증이 잔뜩 섞인 눈초리로 쳐다봤다.
 해일로 죽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주변사람들에 의해 신원이 파악되거나, 경찰청 산하의 과학수사과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이곳 국과수까지 신원파악 의뢰가 들어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물난리가 났기에 각 지역에서 한두 구씩 신원파악이 안 된 경우가 있었고, 그런 시체들이 모이다 보니 어느덧 시체가 이십여 구가 되었다.
 부검에서 유전자 분석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15일에서 길게는 한 달 가까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부검한 시체들을 즉시 생물학과에서 분석을 해야 맞지만, 지금처럼 즉시 분석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에는 부검이 끝나면 냉동실(시체보관실을 이들은 냉동실이라고 불렀다)에 보관했다가 생물학과에서 분석한 결과가 나오면 가족에게 연락을 하거나, 가족과 연락이 안 될 경우 화장을 하거나 대학병원 시체해부실로 보내 학생들의 연구 재료로 쓰게 하는 게 통상적인 절차였다.
 나성만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며칠간 한 것은 시체들 속에 파묻혀 피 튀기는 가운데 가르고 자르고 분리하는 부검뿐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이것만 하면 당분간 시체에서 해방이다 하고 속으로 환호하고 있다가 술집에 예약까지 해놓고 퇴근하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실려 온 한 구의 시체가 달가울 리 없었다.
 “이 시체는 내일 부검할 테니 모두 인상 펴고 퇴근 준비해!”
 “네!”
 연구원들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지는 게 보였다.
 나성만은 피곤에 지친 직원들에게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거 냉장고에 넣어놓고 올 때까지 퇴근준비 끝내놓지 않고 있으면 오늘 회식이고 뭐고 없을 테니 그리 알라고!”
 “알겠습니다.”
 나성만은 실장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냉장고 캐비닛에 시체를 넣는 수고를 보이며 우쭐한 마음으로 보관실 물을 닫았다.
 
 다음날, 어제 마신 술 때문에 피로가 덜 풀린 듯 연구원들 전체가 시들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나성만은 어제 직원들이 술 마시는 중에 부하직원들을 위해 자신같이 솔선수범하는 실장은 없을 거라고 추켜세우는 통에 출근하자마자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시체 보관실 열쇠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신 다음으로 부검실의 가장 고참인 김수철 연구원을 대동하고 시체보관실로 향했다.
 “자네도 당분간은 나와 같이 솔선수범의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따라오게.”
 “실장님도 참 단순하십니다.”
 “이렇게 속아주는 것도 윗사람이 알아야 할 덕목 중 하나라네.”
 “알겠습니다. 앞장서시죠!”
 “하하!”
 잠시 후 두 사람은 시체보관실 앞에 도착했다.
 “어, 문이 열려 있네?”
 어제 피곤했기 때문에 문을 안 잠갔다고 생각한 나성만은 별 생각 없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퐁!
 “……?”
 너무나 자연스럽게 문에서 분리되는 손잡이를 보며 나성만은 일순간 무슨 일인지 갈피를 못 잡고 멍하니 있었다.
 “실장님, 안 들어가고 뭐하세요?”
 커피를 홀짝이며 따라오던 김수철은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나성만을 보며 의아해했다.
 “문… 문이 부서져 있어.”
 “네?”
 두 사람의 머릿속은 일순간 찬바람이 불었다.
 “서… 설마!”
 둘은 서둘러 냉동실로 들어갔다.
 이내 시체 저장실 캐비닛 중 문 하나가 열려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시… 시체가 없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봐! 무인카메라 작동되고 있지?”
 “맞다! 카메라! 카메라가 있었지!”
 잠시 연구실 안은 일대 혼란이 찾아왔다.
 많은 연구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른침을 삼키며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시체저장고를 찍었던 필름을 비디오에 넣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지 화면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던 저장고 안의 모습이 화면 하단 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밖에서 잠금장치를 풀지 않으면 열리지 않도록 돼 있는 저장실 캐비닛이 갑작스럽게 쿵쾅거리며 요동을 쳤다.
 꿀꺽!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연구원들의 눈동자는 비디오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서… 설마 살아 있는 사람을 냉동실에 집어넣은 건 아니겠지?”
 한 연구원의 갑작스런 발언에 몇몇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럴 리가 있나? 분명 우리들은 죽은 사람만 저장고에 넣었다네.”
 “그럼, 저 요란을 떠는 건… 설마 귀신?”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말들이 많아질 때 드디어 화면이 한 차례 출렁거리더니 저장실 캐비닛의 잠금장치가 터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순간 모든 연구원들의 입이 닫혔다.
 스르르릉
 캐비닛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한 노인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몹시 추운 듯 몸을 비벼대며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가 출구를 발견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어 열리지 않자 잠깐 인상을 쓰더니 문고리 자체를 확 잡아 뜯은 후, 강제로 문을 열고 나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문고리를 문에 살포시 얹어놓은 후, 추운 듯 양팔을 비비며 사라져 버렸다.
 연구원들은 한참을 말이 없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획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비상벨이 울리지 않은 거지요?”
 “그렇군! 그러고 보니 비상벨이 울리지 않았어.”
 “소장님, 어떻게 된 거죠?”
 연구소장은 직원들의 물음에도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자네 시체보관실의 온도가 몇 도인지 아나?”
 “그야 당연히 영하 5도의….”
 대답을 하던 연구원은 소장이 물었던 것이 무얼 뜻하는지 상기하며 말문을 닫았다.
 “거기다가 저 정체불명의 노인은 캐비닛 잠금장치를 터뜨리며 나왔어. 그리고 쇠로 되어 있는 문의 손잡이가 잡아당긴다고 뽑히는 게 아니지.”
 “그… 그럼, 저 노인의 정체가 설마 진짜 귀신?”
 “눈에 보였으니 귀신은 아닌 것 같고 일단 보통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경찰서에 저 테이프를 복사해서 그대로 넘겨줘야지. 그들도 저걸 보면 우리를 추궁할 생각은 못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과학수사대에서 현장 검증한다고 지랄하기 전에 나 실장과 장 실장, 박 실장 자네들이 먼저 나서서 지문조사부터 시작해 역학조사까지 모두 조사하고 정리해서 내 책상에 가져다 놓도록 하게! 이번 사건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
 “알겠습니다.”
 
 * * *
 
 ‘나는 누구였지? 여기는 도대체 어디인가? 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인가?’
 넝마 같은 삼베옷을 걸친 노인이 시내에 있는 공원 의자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아무 여과 없이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과 산발한 머리가 마치 미친 사람을 연상케 했다.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까?
 오가는 사람들은 많으나, 선뜻 우산 하나를 받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비를 맞고 있던 노인은 갑작스럽게 뭔지 모를 허전함이 마음속에 메아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뭘 잃어버린 건가? 왜 이리도 허전하단 말인가? 누가 나를 부르는 건가?’
 멍하던 눈에 차츰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나를 부른다. …저쪽이로군!’
 산발머리의 노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남쪽을 향해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을 무시하고 그냥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였으나, 신기하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람과 차들을 피해 걸어가고 있었다.
 
 
 제자
 
 2주간 휴교령이 내려졌던 학교가 다시 개교를 했다.
 학교를 다녀온 민호는 40명이었던 반 친구들이 35명으로 줄어있는 것을 보고, 이번 해일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한 송이 국화가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민호의 반만 5명인데 학교 전체로 보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음을 당했는지 생각하기도 끔찍했다.
 수업 자체가 먼저 간 친구들을 애도하는 시간과 재난 발생 시 응급 대피요령 등을 위주로 진행되었고, 정규수업은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었다.
 오전 수업으로 일과를 마친 민호는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2주라는 기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다. 무너진 집들을 보수하거나, 짠물에 토질이 바뀌어버린 논밭에 거름과 퇴비를 주어 식물이 자랄 수 있게 만드는 등의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던 민호는 여러 집들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일하고 있는 동네 어른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학교 갔다 오는 게냐?”
 “네.”
 “그래 엄마가 도시락은 싸주시든?”
 “오늘은 오전 수업만 해서 도시락 안 싸갔어요.”
 “엄마는 요즘 어떠시냐? 지금도 아무 말 않고 멍하니 앉아만 계시냐?”
 “아니요. 어제부터 밭에 나가셨어요.”
 “그래? 하긴 너희 밭은 산 중턱에 있으니 물난리의 영향을 안 받았겠구나.”
 순임은 시간이 지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맘을 바꿨는지 다시 힘을 내어 일하기 시작했다.
 “자, 배고플 텐데 이거 먹어라!”
 민호와 대화를 하던 아저씨가 새참으로 나왔던 빵을 먹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는지 공구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어 민호에게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넙죽 빵을 받아든 민호는 단숨에 비닐봉지를 뜯더니 한입 베어 물며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민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마을 어른들은 들리지 않게 나직이 혀를 차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쯧쯧! 안됐어. 옷도 안 빠는지 며칠째 저 옷만 입고 다니는 것 같은데….”
 “어디 형편 어려워진 게 저 집뿐인가? 그 난리 통에 한목숨 건진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거! 일들 안 할 거여? 담배 다 피웠으면 어여들 일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을 시켰던 집 주인인 듯한 사내가 언성을 높이자 서둘러 연장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집에 도착해 마루에 가방을 던져놓고 어머니를 찾던 민호는 이내 집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밭에 가셨나?’
 심심해진 민호는 동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보물 창고가 있는 도산서(마을 뒷산에 위치한 박씨 문중 선조의 묘)로 향했다.
 ‘어, 누구지?’
 민호는 자신의 보물 창고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도산서에는 거대한 소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뿌리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뿌리와 땅 사이에 조그만 빈 공간을 가지고 있는 소나무가 있었다.
 소나무 주변에 수풀이 자라있어 얼핏 보기에는 공간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곳이 바로 민호의 딱지나 구슬 그리고 팽이 같은 것을 숨겨 놓는 보물창고였다.
 그런 소중한 보물창고 앞에 웬 거지같은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보물창고 안으로 손을 넣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뭐해요? 거기 있는 것들은 다 내 거란 말이에요!”
 산발머리 노인은 민호의 구슬 통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구슬을 꺼내더니 자신의 눈앞에 비춰보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헉! 저것은 그때 그 약수터에서 주은 구슬인데?’
 뭔가 사연이 있는 구슬인 듯 노인은 민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의 손에 있는 구슬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민호는 잠시 동안 갈등을 해야 했다.
 노인의 하는 모양새가 쉽게 구슬을 내놓으라고 말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구슬인데….’
 한참을 구슬을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눈물을 닦은 후, 자신을 노려본 채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아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내단이 어떻게 네 거란 말이냐?”
 “내단? 그게 뭔 말이에요? 아, 아무튼 그건 제가 주운 거니까 제거예요! 당장 돌려주세요!”
 “…주워? 내 몸에서 빼간 게 아니고 주웠다고?”
 노인에게 달려들려던 민호는 구슬이 자신의 몸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상대의 말을 듣자 갑작스럽게 노인의 몰골과 얼마 전에 자신이 뒷산 샘터에서 신고한 죽은 사람의 몰골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똑같은 사람이었다.
 넝마 같은 옷과 흰 눈을 연상시키는 허연 머리 그리고 구슬을 들고 있는 저 손, 자신이 밟았던 그 손.
 “죽은 사람이! 귀… 귀신, 귀신이다! 으아악!”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분명 자신이 마을 어른들에게 죽었다고 신고했던 그 노인이 분명했다.
 “으아아아악! 귀신이다! 사람 살려!”
 민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집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아무리 구슬이 좋다지만, 자신의 목숨과 바꾸고 싶지는 않은지 민호는 순식간에 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민호가 사라지자 노인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붉은 내단을 눈썹과 눈썹 사이의 미간에 갖다 대었다.
 내단을 미간에 갖다 댄 노인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휘이이잉
 바람결에 노인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약 10분 정도가 지나자 노인의 미간에 머물러 있던 붉은 내단은 차츰차츰 노인의 피부 속으로 박혀 들어가더니 잠시 후, 피부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분명 생살을 뚫고 들어갔지만, 신기하게 피 한 방울,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노인은 내단을 원래 있던 상단전에 집어넣은 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마치 득도한 고승 같은 자세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서서히 노인의 존재감이 사라져 갔다.
 
 집으로 돌아온 민호는 이불속에 들어가 온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안 그래도 노인의 시체를 신고하고 나서 며칠 동안 꿈자리에 귀신이 나타나 가위에 눌렸던 적이 있기에 대낮에 만난 귀신은 어린 민호의 정신세계에는 가히 충격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열고 귀신이 들어와 자신을 덮칠 것 같은 무서운 상상에 이불을 꽁꽁 말아 쥐며 숨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민호 왔냐?”
 민호는 이불속에서 떨고 있다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방문을 열어 젖혔다.
 “으아앙! 엄마 왜 이제 와?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와락 달려들어 엄마의 품에 안기는 민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밭에 김을 매고 돌아와 마루 앞에 벗어져 있는 아들의 신발을 보고 민호를 불렀던 순임은 갑작스런 반응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등을 토닥여주며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도대체 뭘 보았기에? 서… 설마 당신이 내 꿈에만 나타난 게 아니라 아들의 꿈에도 나타났던 거요?’
 순임은 자신의 꿈에 항상 나타나 애간장을 녹이고 사라지는 남편이 혹시 아들에게도 나타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당신 시체라도 찾았으면 좋으련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품에 안겨 있던 아들의 무게가 갑작스럽게 무겁게 느껴지더니 스르륵 흘러내렸다.
 남편에 대한 상념으로 또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나 보다.
 “잠들었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든든한 보호막이 생기자 긴장이 풀렸는지 민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삐쩍 말라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제법 들기가 버거워져 버린 아들이건만 순임은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는 듯 번쩍 안아들어 대청마루에 뉘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엔 잔잔한 떨림이 묻어 나왔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너 하나란다. 불쌍한 것.”
 
 * * *
 
 귀신 사건이 있은 후로 며칠간 민호는 뒷산에 올라가지를 않았다. 그러나 친구들과 놀려면 구슬과 딱지가 필요했다.
 마을 친구들 중 가장 힘이 약한 민호로서는 이런 것들이 없이는 놀이에 낄 수가 없었다.
 그냥 옆에서 노는 걸 지켜보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시간이 지나자 귀신이란 존재의 무서움보다 친구들 사이에 끼지 못한 게 더 큰 비중이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가정형편이 극히 어렵다는 걸 알기에 구슬이나 딱지를 사려고 돈을 달란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마을 친구들에게 구슬이나 딱지를 몇 개 주는 조건으로 함께 산에 오를 것을 요구했다.
 오늘 딱지놀이에서 가장 많이 승리를 한 정수가 민호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짜식, 겁은 많아 가지고 눈에 보이면 귀신일 리가 없잖아.”
 정수는 또래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셌으며 다른 마을 애들과 시합을 할 때 항상 대장을 도맡아 했었다.
 아이들의 서열상 민호가 가장 밑이라면 정수는 가장 위인 셈이다.
 “분명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
 민호가 언성을 높이자 정수가 피식 웃었다.
 “좋다. 한번 가보자. 어차피 구슬이나 딱지도 공짜로 얻을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다.”
 민호가 도산서로 가자고 했을 때 별로 시큰둥하며 무시했던 애들이 정수가 앞장서자 너도 나도 뒤를 따랐다.
 
 “어디 귀신이 있다는 거야? 아무리 봐도 귀신은 고사하고 흔해빠진 다람쥐 한 마리 없구먼!”
 바람이 스치며 나는 솔잎의 노래 소리와 새들의 날갯짓만이 도산서의 휑함을 달래고 있었다.
 혹시나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민호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자 안심하며 자신의 보물창고를 열어봤다.
 “호오! 거기가 너의 보물창고였냐?”
 정수는 신기하다는 듯 민호가 손을 집어넣었던 나무 밑동에 손을 넣어봤다.
 잠시 후 보물창고에서는 딱지며 구슬 팽이 그리고 바퀴 없는 자동차 장난감이 나왔다.
 “우와! 구슬이 한 통이나 있다니, 너 그동안 많이도 모았구나.”
 “뭐, 이 정도 가지고!”
 민호는 약간 우쭐해져서 구슬 통을 흔들어 붉은 구슬을 찾아봤으나, 자신이 찾던 붉은 구슬은 보이지 않자 약간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팽이 맘에 드는데 나는 이걸 가지겠다.”
 정수가 알록달록 물감을 칠해 놓은 팽이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하자 민호는 깜짝 놀라며 정수의 손을 잡았다.
 아빠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어줬기에 유달리 애착이 가는 물건이었다.
 “뭐야!”
 “내가 구슬과 딱지를 준다고 했지 팽이는 준다고 안 했잖아.”
 평상시 민호답지 않은 강경한 태도에 일순간 정수를 비롯한 아이들이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민호와 정수를 번갈아보며 눈치를 보는 아이들.
 정수는 항상 졸병으로 생각했던 민호가 감히 대장인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면근육이 살짝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발길질이 날아갔다.
 퍽
 풀밭을 구르는 민호.
 “크으윽”
 “내가 구슬대신 이걸 가지겠다는데 감히 불만을 표시해! 죽고 싶어?”
 민호는 아픔과 서러움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또래 애들도 정수의 눈치를 보느라 한 명도 자신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애들은 정수의 편을 들며 민호를 두둔했다.
 민호의 두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야이! 개새끼야, 팽이 내놔.”
 벌떡 일어서 머리를 숙인 채 저돌적으로 정수에게 덤벼들었다.
 퍽
 그러나 민호의 주먹이 상대의 몸에 닿기도 전에 정수의 발이 다시 민호의 배를 가격했다.
 다시 바닥을 구르는 민호.
 “이게 그동안 오냐오냐 해줬더니 감히 나에게 덤벼! 넌 오늘 죽었어.”
 순식간에 민호의 가냘픈 몸 위로 정수의 육중한 육체가 올라갔다. 무거운 몸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한번 눌린 몸은 무게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퍽퍽퍽
 정수의 주먹이 연달아 민호의 안면에 작렬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피가 튀고 간간히 반항하던 민호의 주먹이 힘없이 축 늘어지자 옆에서 보고 있던 애들이 정수를 뜯어말렸다.
 “야! 그만해. 그러다 죽겠다.”
 “헉헉!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까불고 있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민호를 노려보던 정수는 더럭 겁이 났다.
 피투성이인 민호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야! 저 새끼 일으켜 세워봐.”
 “왜?”
 “어서 일으켜봐.”
 “아… 알았어.”
 정수를 말렸던 친구들은 민호를 일으키려다 깜짝 놀라 손을 놓고 말았다. 죽은 듯 축 늘어진 몸.
 “우… 움직이지 않아.”
 “뭐?”
 “혹시 죽은 것 아닐까?”
 정수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더럭 겁이 났다.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아이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아래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으아! 난 이 일에 아무 상관없어. 난 몰라.”
 그러자 옆에 아이들도 너도나도 앞 다투어 마을로 뛰어갔다.
 “나도 아무 상관없어.”
 정수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겁이 나자 그냥 군중심리에 휩싸여 무작정 집을 향해 뛰어갈 뿐이었다.
 
 모든 애들이 사라지자 민호의 보물창고로 쓰이는 소나무 가지가 벌어지며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이 노인은 처음부터 모든 장면을 다 보고 있었다.
 민호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보는 노인.
 “죽진 않았군!”
 노인은 민호의 혈 몇 군데를 건드려 응급조치를 해준 후, 다시 나무위로 올라가 버렸다.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민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 분명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한데도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마치 또 다른 나뭇가지 같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부스스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는 민호.
 흐르는 피와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으아아앙, 개새끼들, 쌍놈의 새끼들….”
 노인은 울고 있는 민호를 보며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이리 가슴 한켠이 아련한 거지? 내가 이런 것에 연민을 느끼는 건가?’
 머리의 두통과 함께 뭔가가 기억저편에서 가물가물하면서도 막상 떠오르지 않고 노인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노인이 인상을 찡그린 지 약 이십 초 정도나 지났을 때 점차 두통이 사라지며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 중 일부인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남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으로 민심보다는 왕권쟁탈에 모든 관료들의 시선이 집중되던 시기.
 하늘의 노여움이 땅에 임했음인지 지독한 가뭄이 전국을 휩쓸었다. 논바닥은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져 곡식을 생산하지 못했고, 밭에서는 찬거리 대신 누런 먼지만 날렸다.
 나중에는 우물까지 말라버려 마실 물도 없었다.
 소문난 용한 무당들을 불러 연일 기우제를 올렸건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기만 했다.
 무당들이 아무리 굿을 해도 비가 오지 않자 왕이 직접 기우제에 참가해 사흘을 지성으로 빌었지만,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왕은 모든 무당들의 우두머리 격인 옥황상제를 모신다는 큰무당에게 물었다.
 “짐이 그대의 말대로 사흘간 제를 지내며 지성으로 빌고 빌었건만 어찌하여 비가 오지 않는 건가?”
 ‘사흘간 제를 지내면 비가 옵니다’란 장담을 하지 않았건만, 왕은 자신에게 비오지 않음을 추궁하고 있었다.
 왕에게도 민심을 안정시킬 핑계거리가 필요했으리라.
 곧 목이라도 자를 것 같은 서슬 퍼런 질책에 황급히 잔머리를 굴렸다.
 “정성이 부족해서이옵니다. 상제께서는 살아있는 어린 아이를 재물로 원하고 계시옵니다. 다만 그 숫자를 계시하지 않아 얼마나 많은 아이를 재물로 바쳐야 될지 모를 뿐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
 어떤 신이 어린아이를 재물로 원한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건만, 왕의 마음은 무당의 대답에 신빙성을 두고 있었다. 인간 재물을 제외하고 이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왕명에 의해 어린 아이를 재물로 바치라는 하명이 떨어졌다. 비가 오지 않으면 어차피 굶어죽을 아이들을 차라리 재물로라도 바쳐보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끌어 모은 건 부모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구걸로 연명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 수백 명을 모아 재를 지내려고 했다. 구걸로 먹고 사는 아이들도 죽음을 예감했는지 서로 끌려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중에서 가장 힘없고 조그마한 아이가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 앞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첫 번째 재물이 될 아이는 해골에 거죽을 덮어놓은 듯 삐쩍 마르고 조그마했다.
 박수무당에 의해 빨간 신 줄에 묶인 채 재단 위에 놓인 아이는 자신이 죽을 거란 걸 모르는지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큰무당이 직접 작두를 들고 아이에게로 다가왔다.
 “너의 죽음으로 인해 하늘이 비를 내린다면 그건 오히려 너에겐 축복이니라. 상제이시여, 이 제물을 받으시고 큰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보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운지 작두를 높이 치켜들었다.
 꽈르르르릉!
 순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 무당이 들고 있던 작두를 때렸다.
 새카맣게 탄 채 쓰러지는 무당.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황급히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두려운 마음에 감히 고개를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톡톡톡
 잠시 후 엎드려 있는 사람들 귓가에 너무나 그립고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비… 비다!”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이… 이럴 수가 구름한 점 없는데 비가 내리다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놀라운 기사에 모든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기쁨도 잊고 엎드려 빌기만을 반복했다.
 30여 분간 내리던 비가 멈추고 갑작스런 바람과 함께 저 멀리서 진짜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고개를 드는 사람들.
 기우제를 지내고 있던 사람들은 저 멀리 보이는 먹구름이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는지 누구 하나 환호성을 지르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사흘간 전국의 목마름을 해결해주고 나서야 멈추었다.
 
 아이는 자신을 안고 하늘을 훨훨 나는 노인의 얼굴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날벼락이 친 후,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안고 줄행랑을 놓았던 노인.
 노인의 눈과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원하는 거라도 있느냐?”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아무 말이 없던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줄 좀 풀어주세요.”
 그제야 노인의 시선은 아이의 몸으로 옮겨졌다.
 빨간 신 줄이 아이의 몸을 꽁꽁 묶고 있었다.
 머쓱해진 노인은 서둘러 아이를 묶고 있던 줄을 풀어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이요? 전 고아라 그런 것 없는데요.”
 “뭣이라? 이름이 없어!”
 한동안 황당한 표정을 보이던 노인은 이내 아이가 불쌍하단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느냐?”
 “이름은 어떻게 지어줘도 상관은 없는데, 밥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밥? 지금 나에게도 밥은 없단다. 그 대신 허기를 면하게 해주는 것은 있지.”
 노인은 소매 춤에서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단을 꺼내었다.
 “먹어라.”
 “이게 뭔데요?”
 “솔잎에 벌꿀과 약재들을 혼합해서 만든 곡단이란다.”
 벌꿀이라는 말이 나오자 아이는 곡단을 입에 넣었다.
 단맛과 함께 솔잎의 청아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과거 어렸을 때의 곡단의 솔향과 지금 입 안에서 씹히고 있는 솔잎의 향이 매치가 되며 노인은 아련히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과거의 기억이 다시 끊겨버렸다.’
 노인은 계속 이어질 것 같은 과거의 기억에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이제는 흐릿한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이어지지 않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과거가 생각나겠지.’
 저 멀리 어깨를 들썩인 채 울며 집으로 가고 있는 민호의 뒷모습이 노인의 망막에 각인이 되었다.
 “왠지 너와 나는 강한 인연의 고리가 얽혀 있다는 느낌이구나.”
 민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솔잎 하나를 따서 입에 넣은 채 하늘을 향해 팔베개를 하고 눕는 노인.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저 멀리 있는 하늘에는 뭔지 모를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 * *
 
 민호가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정수에게 두들겨 맞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난 후였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 아이들은 민호를 은근히 피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지금까지 마을또래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민호는 강해지고 싶었다.
 정수같이 힘이 센 친구가 부러웠다.
 ‘무술을 익혀서 나도 강해지고 말겠어.’
 오늘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한 중국무술영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거대한 바위도 한주먹에 부숴버리며 나쁜 악당들을 통쾌하게 물리치고 꽃 같이 예쁜 미녀와 부하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영웅의 모습.
 민호는 영화 속에서 수련하던 주인공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펼쳐졌다.
 나뭇가지에 앉아 솔잎을 씹고 있던 노인은 어린 꼬마가 펼쳐 보이는 중국무술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건 뭐지? 소림사 중들이 했던 권법과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 엉망이군. 그런데 왜 조선의 아이가 중국의 무술을 익히는 거지?’
 폼이 엉망인 것보다 우리민족 고유의 무예들을 놔두고 타국의 무예를 익히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얼마 전 두들겨 맞은 걸 본 후, 생긴 연민인지 아니면 자신의 예전 기억 때문인지 인연의 고리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엉터리 수련을 하는 것까지 보고 있자니 괜히 참견이 하고 싶어져 몸이 근질거렸다.
 바둑의 고수가 하수들이 바둑 두고 있는 걸 보면 훈수를 두고 싶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에잇, 더 이상 못 보고 있겠다.’
 노인은 솔잎을 뱉어버린 후, 몸을 일으켰다.
 착
 바닥에 착지를 하며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민호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소음이 발생한 곳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붉은 구슬을 가져갔던 귀신으로 짐작되는 노인이 바로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너는 왜 택견이나 고무도 같은 우리 무예를 익히지 않고 중국무술을 익히는 것이냐?”
 민호에겐 노인의 질문보다 그의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헉! 귀신!”
 한동안 보이지 않자 겨우 겨우 잊고 있었는데 또 나타난 것이다.
 공포감이 밀려오자 수련을 멈추고 집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노인의 손이 민호의 뒷덜미를 잡고 있어 저번처럼 부리나케 달리지를 못했다.
 “이것 놔요! 귀신님아, 절 잡아먹지 말아요!”
 “내가 어째서 귀신이란 거냐?”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던 민호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노인을 쳐다봤다.
 “주, 죽은 사람이 살아났으니 귀신이지, 뭐가 귀신이에요?”
 “넌 말하는 귀신 봤냐?”
 “아니요. 귀신은 할아버지가 처음이에요!”
 “하지만 난 귀신이 아닌데?”
 한참을 버둥거렸지만 그래도 놔주지 않자, 결국 도망가는 걸 포기한 민호는 눈물을 닦으며 노인을 쳐다봤다.
 “…그럼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나?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귀신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 할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민호는 아직 상대가 귀신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신기하게 무서운 감정만은 사라진 것을 느꼈다.
 아마 대화를 하다 보니 조금 적응이 된 듯했다.
 민호가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는 걸 멈추자 노인은 잡고 있던 뒷덜미를 놔주었다.
 “이름? 이름이라… 일단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으니 그냥 부르기 편하게 무명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어떻겠냐?”
 “무명 할아버지요? 알았어요. 앞으로 무명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 저는 민호예요, 박민호.”
 바닥에 내려선 민호는 옷소매에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노인을 자세히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고 피부도 탄력이 있는 게 죽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입고 있는 옷이 찢어지고 헤진 넝마이기에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이란 생각이 잠깐 들었다.
 “뭔 생각을 하느냐?”
 귀신이 아니란 생각이 들자 조금씩 용기가 나기 시작했다.
 “근데 할아버지는 어디 살아요?”
 “나는 이 나무 위에 산단다.”
 무명노인이 가리키는 나무는 민호가 보물창고로 쓰고 있는 바로 그 나무였다.
 “할아버지가 뭐 날아다니는 새에요? 사람이 어떻게 나무 위에서 살아요?”
 “날아다닐 수가 있기 때문에 나무에서도 살 수가 있단다.”
 “에이! 거짓말 말아요! 사람이 어떻게 날아다녀요!”
 “한번 보여주랴?”
 “만일 진짜로 난다면 저번에 가져갔던 붉은 구슬은 없었던 일로 해드릴게요.”
 어느새 민호의 어린 얼굴엔 두려움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하하! 좋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보거라!”
 무명노인은 가볍게 땅을 박차더니 마치 새처럼 하늘로 솟구치며 나뭇가지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어떠냐?”
 그러나 민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영화와 현실을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자신이 수련을 한다고 손발을 휘둘렀지만, 그렇다고 하늘을 나는 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단지 영화의 주인공처럼 강해지고 싶어 흉내를 낸 것뿐이다.
 그런데 코앞에서 사람이 3미터 정도를 가볍게 뛰어오르는 것을 봤으니 어찌 정신이 있겠는가.
 이윽고 노인이 바닥에 내려서자 민호는 뭔가가 두려운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다. 너도 나처럼 무공이 강해지면 이런 걸 할 수가 있다.”
 “무… 무공이요?”
 민호는 문득 영화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진짜로 무공이 강해지면 그런 걸 할 수 있는 건가요?”
 두려운 마음과 호기심 등이 혼합되며 정신이 없었지만,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한번쯤은 영웅이고 싶었다.
 “강해지는 속도가 더디기만 한 중국무술 말고 우리 민족의 고유놀이무예를 익히면 이런 것쯤은 금방 할 수 있지. 극한에 이르면 진짜 새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단다.”
 민호는 문득 자신의 약함이 떠올랐다.
 “저는 키도 작고, 힘도 없고, 몸도 약한데….”
 노인의 손이 민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옛날에 너보다 더 작고 약했단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강하지 않느냐?”
 “정말로 무공이란 걸 배우면 날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단다. 단, 배우는 과정이 무척 힘들지. 그걸 견뎌낼 수 있겠느냐?”
 노인의 물음에 민호의 고개가 정신없이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네! 강해질 수만 있다면, 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럼, 아무에게도 우리 둘의 일을 말하면 안 된다는 약속도 할 수 있겠느냐?”
 민호는 ‘아무도’란 말에 순간 멈칫했다.
 “저… 엄마에게도 말하면 안 되나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그걸 약속한다면 너를 내 제자로 삼고 놀이무예를 가르쳐 주겠다.”
 엄마에게 말하면 안 된다는 말에 약간 고민을 했지만, 이내 고개가 끄덕여지며 덜컥 무명노인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직 어린 민호에게 영웅의 꿈은 엄마와의 비밀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시체가 제 발로 걸어가 사라져버린 초유의 사태.
 나성만 부검실장은 시체보관실에서 사라져버린 이름 모를 노인의 현장조사 자료를 들고 몇 번씩 읽고 또 읽어 머릿속에 외울 정도가 됐지만, 선뜻 소장에게 보고서를 넘길 수가 없었다.
 “…이 조사대로라면 이건 인간이 아니잖아. 영화에 나오는 슈퍼맨도 아니고….”
 나성만의 손에는 연구소 직원들이 시체실험실을 자체 조사하고 내린 결론에 대한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 1) 법과학부
 물리분석과 역학조사실 분석 결과(TON : 무게 단위. G : 기압 단위. MPA(메가파스칼) : 압력단위)
 * 시체보관실 캐비닛에 가해진 중력 또는 충격 : 1TON*10G
 * 시체보관실 문고리에 가해진 압력 : 1TON*20MPA
 
 약 독물과 현장조사 결과
 * 특정약물의 흔적 없음
 
 마약분석과 현장조사 결과
 * 환각성 유기용매나 항정신성 의약품 또는 가스류 흔적 없음
 화학분석과 현장조사 결과
 * 고분자 유기 무기물 등의 특정화학물 사용 흔적 없음
 
 교통공학과
 * 동 시간대 비상경보기의 상태 양호. 문제점 발견할 수 없음
 
 2) 법의학부
 법의학과 현장조사 결과
 * 부검이나 병리학적 조직진단 이전에 분실물로 해당사항 없음
 
 생물학과 현장조사 결과
 모발, 인체 분비물, 혈액, 혈흔 및 인체조직 등의 유전자 분석 가능
 모발 : 20대 초중반의 건강한 남자의 모발로 판명
 혈흔 : 20대 초중반의 건강한 남자의 혈흔으로 판명.(혈액형 RH(+):O)
 유전자 분석(DNA) : 뉴클레오타이드의 포스포에스테르 결합(A,T,G,C) 분석. 유전자 정보은행의 데이터 분석 결과 동일 유전자 없음
 지문 : 분실체의 지문 자동분류검색 결과 동일 지문 없음
 
 범죄 심리와 비디오 판독결과
 분실 체의 심리에 대한 기초자료부족으로 판독불가.
 
 문서 사진과
 해당 사항 없음 -
 
 
 “캐비닛에 가해진 충격이 1톤의 무게에 10기압이라니, 그 밀폐된 공간에서 결국 10톤의 무게로 내려쳤단 소린데 그건 인간의 힘이라고 부를 수가 없지 않나?”
 나성만 실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소장실로 향했다.
 
 소장은 보고서를 몇 번 반복해서 읽더니 책상 위로 던지며 질문을 했다.
 “나 실장이 보기엔 이번에 사라진 분실체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나?”
 “저도 몇 번이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정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혹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슈퍼사이보그가 아닐까 하고 상상만 해봤을 뿐입니다.”
 “요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조사결과를 놓고 보면 분실체를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적합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정말 자네 말대로 우리나라 군에서 이런 생물학적 무기를 만들어낼 과학력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미국 따위의 속국으로 살진 않겠지.”
 소장은 얼마 전에 있었던 전투기 강매 건이 떠오르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은 자국에서도 거의 쓰지 않는 구형 전투기모델을 비싼 값에 한국에 강매시켰고, 소장은 이 미국 비행기의 성능이 좋다고 언론에 거짓말을 해야 했었다.
 “소장님, 이번 사건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나 실장이라면 어떻게 처리하겠나?”
 “글쎄요? 너무 과학에서 벗어난 일들이라….”
 소장은 보고서를 부채처럼 흔들며 상체를 뒤로 제쳤다.
 “다들 간과하고 넘어간 게 있어. 비상경보기의 경보음이 울리지 않았다는 것 말이지.”
 “무슨 말입니까?”
 “물리분석과에 물어보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체실에 설치된 비상경보기의 센서가 민감한 걸 알겠더군. 약간의 물리적 충격만 가해져도 그 진동의 영향으로 경보기가 곧바로 반응하게 되며 방호시스템이 작동을 해야 맞대. 그런데 비상 경보기에는 아무런 진동이 잡히지 않았다고 하더군! 결국 기계로 잡아낼 수 없는 진동을 주며 쇠 문고리를 뜯어냈다는 소리인데, 그런 비상식적인 존재가 일반 형사범들도 잡지 못하는 몽타주 따위로 잡힐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될까요?”
 “별수 없지 않겠나? 그냥 X파일로 남겨놓는 수밖에! 경찰들이 조사한다고 하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결국 X파일로 남겨지고 말걸?”
 
 * * *
 
 민호는 학교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무명노인이 있는 뒷산으로 찾아와 기초적인 무공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맘때쯤 다른 아이들은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태권도 도장이나 속셈학원, 피아노 학원 등 갑자기 몰아닥친 교육열풍에 학원으로 내몰려야 했고, 집이 가난했던 민호는 다행히 그 대열에 합류를 안 할 수 있었다.
 갑자기 교육열풍이 몰아닥친 이유는 해일로 인해 어린아이들도 많이 죽었고 그 덕에 남은 자식이라도 훌륭하게 키워 시골에 살지 않게 하겠다는 욕심이 생겨 하나둘 학원을 보내다 보니 나중에는 너도나도 우리 자식이 남에게 뒤지게 할 수 없다며 빚을 내서라도 학원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기본적인 호흡법을 배운 후, 무명노인에게 날마다 제기차기, 수벽치기, 씨름, 자치기, 사방치기, 투호놀이, 토끼몰이 등 수많은 민속놀이를 통한 수련을 해 나갔다.
 민속놀이라고 해서 별것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간단한 예로 제기차기만 보더라도 그 효능이 여러 가지였다.
 제기를 차다보면 발의 움직임이 아주 자연스러워지며 제기를 보는 눈 또한 날카로워져 안법과 각법을 익히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중국무술인 마보나 궁보처럼 고정형 수련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하는 수련이기에 지루함이라든지 고통스러움 같은 것이 훨씬 덜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 외에도 수벽치기나 씨름 또한 균형감각과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고, 투호놀이나 사방치기 같은 것은 암기를 다루거나 무기를 다루는데 적합한 놀이들이었다.
 한편, 무명노인은 부분 기억상실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익힌 무공이나 신선도 등은 모두 생각이 나는데 자신이 어떻게 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이름이 뭐였는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은 자신이 익힌 신선도가 상처를 회복시키고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걸로 돌리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언젠가는 잃어버린 기억도 모두 되찾을 걸로 판단한 그는 민호를 가르치며 느긋하게 기억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맘먹고 있었다.
 
 * * *
 
 어느새 1년이란 시간이 흘러 민호는 5학년이 되었다.
 1년이란 시간동안 무명노인이 가르쳐준 호흡법을 꾸준히 연마해온 민호는 이제 평상시 생활할 때뿐만 아니라 잠자는 동안에도 신선도의 기초호흡법대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신선도 기초호흡법을 생활화해버린 민호를 보며 무명노인은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시골이다 보니 탁한 기운이 몸에 덜 쌓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만큼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신선도의 기초호흡을 몸에 배게 하는데 넉넉히 2년 정도를 잡고 있던 무명노인으로서는 당연히 흐뭇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민호의 호흡법을 한 단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호흡법을 한 단계 높인다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호흡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다만 지금까지 도입되지 않았던 경락의 개념을 호흡법에 도입시키는 것으로, 몸에 흐르는 12개의 경락을 호흡과 의념을 통해 단련하며 길을 넓히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무명노인은 지금까지 기초 호흡을 통해 몸 안에 있는 경락들도 충분히 단련이 됐을 거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경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런 딱딱한 한문들을 꼭 외워야 하나요? 그냥 쉽게 한글로 외우면 안 될까요?”
 나무로 1미터 크기의 사람모양의 목각인형을 만들고 온몸에 수많은 점들을 찍어 한문으로 표기해놓은 명칭들을 보며 기가 질렸는지 민호의 입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
 “한문은 뜻글자이기 때문에 한글로 외워놔서는 의미를 읽어버리기 쉽단다. 나라고 네게 어려운 한문을 가르치고 싶겠냐마는 그래도 한문으로 외워놔야 경락 하나하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엔 힘들더라도 참고 외워라. 뒤에는 네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평상시와는 다른 진지한 눈빛을 보며 민호는 자신의 투정이 통하지 않을 거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저런 엄한 눈빛이 되면 양보를 받아낼 수 없다는 걸 체득한 상태였다.
 “알았어요. 오늘부터 열심히 외워볼게요!”
 “이 경락이란 것은 너의 몸뿐만 아니라 남을 치료하는 데도 쓸 수 있기 때문에 한 치의 틀림이 있어서도 안 된단다. 그러니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걸 다 외우고 나면 정확히 혈 자리를 찾는 법들을 가르쳐 주겠다.”
 의외로 진지하고 강경하게 나오는 스승의 태도에 장난스러움을 버려야 했다.
 “알겠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죠!”
 안 한다고 했으면 모를까 한번 한다고 다짐을 하면 반드시 하는 민호의 성격을 알기에 무명노인의 엄숙한 표정 속에는 한 가닥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경락의 명칭들은 집에 가서 외우기로 하고 오늘은 무얼 하며 놀지?”
 다시 장난스런 표정으로 돌아온 노인을 보며 민호의 표정도 활짝 펴졌다.
 “토끼 잡으러 가요!”
 “저번처럼 토끼 꽁무니만 쫓아다니려고?”
 “오늘은 기필코 한 마리 잡을 거예요!”
 잠시 후 둘은 숲속으로 토끼를 잡으러 들어갔다.
 이들이 토끼를 잡는 방식은 일반적인 토끼몰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일반적인 토끼몰이는 낮은 곳에 그물을 쳐놓고 여러 사람이 높은 곳에서 빙 둘러 경사면 상부를 점령한 다음에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토끼를 그물을 쳐놓은 곳으로 모는 방식이었다.
 토끼는 선천적으로 뒷다리가 발달하고 앞다리가 짧아 경사면일 경우 위로 올라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위를 선점하고 밑으로 내모는 것이다.
 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토끼는 할 수 없이 아래를 향해 줄행랑을 치게 되는데, 이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그물방향으로 몰이를 할 수가 있게 된다.
 여러 사람이 하는 토끼몰이를 두 사람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물이나 몰이를 하지 않고 토끼를 두 발로 직접 쫓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물론 무명노인이 맘만 먹으면 토끼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민호를 훈련시켜야 했기에 지금까지 무명노인의 역할은 토끼를 발견해 주는 것밖에 없었고, 토끼를 향해 뛰는 것은 언제나 민호였다.
 물론 훈련이 끝나면 종종 무명노인이 토끼를 한 마리 잡아 두 사람이 함께 구워먹곤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민호에게 토끼구이의 맛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바스락!
 민호와 노인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갔고, 그와 동시에 수풀 속에서 토끼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토끼다!”
 민호는 뛰어가는 토끼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숲속인지라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오는 나뭇가지나 가시덤불에 걸릴 법도 하건만, 민호는 그런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토끼의 뒤를 쫓고 있었다.
 “흠!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
 뛰어가는 민호의 뒤를 산보하듯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노인의 입가에는 농부가 들판에 잘 자라는 곡식을 볼 때, 짓는 그런 미소가 보이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찰나에 순간적으로 방향을 트는 토끼를 보며 민호의 손과 발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거의 야생토끼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민호의 체력은 이미 일반 사람의 체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토끼도 나름대로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에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지만, 자신을 잡으려는 인간을 뿌리치지 못했고, 곧 잡힐 것 같은 상황이 왔다.
 팟!
 순간적으로 방향을 트는 토끼를 향해 손이 자연스럽게 함께 방향을 틀더니 마침내는 토끼의 귀를 잡는데 성공했다.
 “야호! 스승님, 드디어 잡았어요!”
 거의 1년 만에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민호는 토끼를 들고 방방 뛰고 있었다.
 “드디어 잡는데 성공했구나. 축하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맛있는 구이를 만들어주마!”
 “와아! 맛있겠다!”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토끼를 향해 민호는 한껏 군침을 흘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무명노인이 준 목각인형의 혈도를 다 외우는 데는 무려 한 달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평상시 쓰지 않는 생소한 한문들로 명칭 되는 경락과 혈도들인지라 한 달 만에 다 외운 것도 민호가 상당히 노력한 결과였다.
 
 * * *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칼날 같은 봉우리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하여 어떤 이는 봉우리의 수를 어림잡아 일만 이천 봉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숫자는 파악이 안 돼 인간의 눈으로는 봉우리의 수를 세다가 잊어버린다는 금강산.
 그 금강산의 봉우리 중 하늘을 향해 그 기상을 우뚝 드러내고 있는 가장 큰 봉우리를 사람들은 비로봉이라 부른다.
 휘이이잉
 비로봉 정상에는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눈을 반개한 채 앉아있었다.
 바람이 거칠 뿐만 아니라 워낙 높고 험준해 하늘을 나는 새나 숲에서 생활하는 산짐승조차 올라가지 않으며, 전문적인 등산장비기 없으면 쳐다볼 엄두도 못내는 급경사를 이루는 봉우리에 삼베옷을 입은 노인은 어떻게 올라왔는지 아무런 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올라와 있었다.
 분명 자연색과 일치하지 않는 흰 삼베옷이건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의 존재감은 마치 색깔의 대비를 무색하게 하듯 바위나 나무처럼 자연 그 자체로 느껴졌다.
 몰아치는 바람에 펄럭이는 옷과 수염과 머리카락마저도 흰색 일색으로, 얼굴마저 희었다면 마치 눈덩이로 오인할 정도로 흰색일 색이었다.
 “후우!”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신선 같은 노인의 입에서 뜻 모를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신선 같은 노인은 며칠간 틀고 있던 가부좌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대체 왜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 건가?”
 노인은 마치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되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하늘 저편에 다른 세계가 있음이 느껴지건만! 나의 도량이 아직 선계에 들기에 부족하단 건가?”
 무극선인은 자신의 영감 상으로 느껴지는 하늘 저편의 다른 세상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깨달음의 벽을 한 번만 더 허물면 선계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놈의 깨달음의 벽이 어찌나 두껍고 단단한 지 벌써 100년 가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깨달음의 벽을 뚫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놈의 벽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완전히 버려야만 모든 걸 다 얻을 수 있고, 또 다 얻은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예전에 우화등선했었던 선도의 선조들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들을 오늘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무극선인이었다.
 “설마 내가 진짜로 죽어야만 신선도가 완성된다는 뜻인가?”
 이미 할 수 있는 시도는 다해 봤다.
 희로애락의 감정도 버렸고 가족도 버렸다.
 일본이나 중국이 나라를 침범해와 강토를 더럽혀도 남의 일로 여김으로 조국도 버렸고, 심지어 자손이 남에게 죽임을 당해도 못 본 체하니 핏줄까지 버렸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느껴지는 오감까지도 버렸건만, 아직도 마지막 깨달음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버릴 수 있는 건 다 버렸고, 이제 남은 시도는 오직 하나, 바로 자신의 육체가 완전히 죽는 것뿐이었다.
 노인은 선조들이 말하던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죽는다는 걸 생각은 했어도 막상 죽으려고 하니 계속 머뭇거려졌다.
 이번 죽음에 대한 도전은 만일 선계에 이르는 길이 아닐 경우엔 우화등선을 못할 뿐 아니라 육체는 썩어 없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두 번의 기회란 없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전부를 건 모험이었다.
 “…어차피 300년을 넘게 살았는데 선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깟 육체, 한줌의 흙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육체는 썩어 없어지더라도 영혼만은 선계에 들고 말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몇 년간 고민해온 자살에 대한 결정을 마침내 내리게 됐다.
 모든 걸 다 해보고 마지막으로 명을 끊을 독한 결심을 한 무극선인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오른손을 치켜세우더니 심장을 향해 그대로 찔러 넣었다.
 몇 년간 망설였던 거지만, 한번 결단을 한 이상 마음이 변하기 전에 결단을 과감히 실행한 것이다.
 푹!
 한껏 기가 응축된 무극선인의 오른손은 갈비뼈를 부수며 자신의 심장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컥!”
 ‘…크윽, 굉장히 아프군! 그러나저러나 이제 심장이 파괴되었으니 죽음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심장이 갈라졌으니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무극선인은 몸에 피가 빠져나가, 현기증과 함께 몽롱한 기분이 들자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한껏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죽음만이 모든 걸 버린 것이라 생각했기에 죽음이 성공하면 자신은 죽음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어 마지막 벽을 뚫거나, 그도 아니면 영혼이라도 선계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차츰 정신을 놓아갔다.
 풀썩
 싸늘한 바람이 비로봉 정상을 휘감으며 무극선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심장이 갈라진 채 쓰러진 무극선인은 조그만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
 누워 있던 무극선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함, 잘 잤다.”
 길게 하품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무극선인은 가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어제 자살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음! 어제 내가 죽었었지? 헉! 뭐… 뭐야? 분명 어제 심장을 반으로 갈랐었건만, 왜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무극선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점검해봤다.
 ‘이… 이럴 수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으로 갈라놓았던 심장은 정상적으로 복원이 되어 펄떡펄떡 뛰고 있었고 부려졌던 갈비뼈와 갈라졌던 피부들도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호… 혹시?’
 혹시나 하며 깨달음의 벽을 두드려봤다.
 ‘젠장!’
 역시나 예상대로 깨달음의 벽은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고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바깥 저편에 느껴지는 선계를 쳐다보며 자신의 문제점이 뭔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혹시 자살했기 때문에 선계가 안 열린 것인가? 아니면 내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에 선계가 안 열린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자신이 완전히 죽어야만 깨달음의 벽이 허물어질 걸로 결론을 내렸다.
 ‘심장이 파괴됐음에도 몸이 스스로 복원해버리다니, 반신의 경지라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군! 이렇게 되면 죽기 위해서는 목을 잘라야 하는 건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목이 잘리면 확실히 죽을 수 있겠지 생각하며 손에 기를 집중했다.
 우우우우웅
 손에서 새하얀 수강이 피어나 검의 모양을 형성했다.
 마치 형광등 불빛처럼 빛나는 수강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지그시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목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서걱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여 한 번에 목을 잘라냈다.
 툭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후, 앉아 있던 몸도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쿵!
 머리의 잘려진 단면과 몸의 잘려진 단면 사이에서 붉은 피가 콸콸 흘러넘치며 바닥을 흥건히 적셨지만, 잘려진 무극선인의 얼굴표정은 드디어 죽는데 성공했다는 기쁜 표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아함, 잘 잤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기지개를 켜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난 어제 분명히 목을 잘라 자살에 성공했는데…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혹시 어제 했던 일이 꿈인가 하며 바닥을 살피다가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에 검게 굳어 있는 핏자국을 보며 어제 목을 잘랐던 일들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몸 스스로가 죽는 걸 거부하고 있는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목이 잘렸으면 죽어야 마땅하건만,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복원되어 있었다.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며 눈을 감고 깨달음의 벽을 두드려봤다.
 쿵!
 역시 깨달음의 벽에는 아무런 흠집도 가지 않은 채 굳건한 강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죽는 것도 답이 아닌 건가? 아니면 내가 자살했기 때문인 건가?’
 목을 잘라도 죽지 않는 것을 알게 된 무극선인은 마침내 자살이 아닌 타살로 자신을 죽이는 방법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근데 누가 날 죽일 수 있지?’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이미 자신의 몸이 신선도의 극에 이르러 반신의 상태로 불사의 몸이 돼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챠우 베이나 히무라시 겐죠 정도면 나를 죽일 수 있으려나?”
 반신에 이른 자를 죽일 수 있는 것은 같은 반신의 반열에 오른 자들뿐이라는 것이 생각나자 무극선인의 고개는 먼 중국과 바다 건너 일본을 향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과연 나를 죽일 수는 있을까?’
 같은 반신의 경지라고 하나, 음양의 도를 깨우쳐 반신의 경지에 이른 후 선도를 닦는 사람들 사이에 태극 선인으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챠우 베이나, 혼과 검의 일치 하나에만 매진해 검도의 끝을 봄으로 혼검지도를 완성해 검선으로 불리는 일본의 히무라시 겐죠는 실질적으로 무극선인과 약간의 실력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무극선인의 신선도는 한 가지의 도를 극으로 연마해서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됨을 목표로 자신을 갈고 닦아 신선에 이르는 수련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태극의 도를 깨우치거나, 검의 도를 깨우쳤다고 해도 같은 반신의 경지일 경우 결국은 자연의 도를 깨우친 사람을 이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는 나를 죽일 수 없겠지만, 둘이 합공한다면 나를 죽일 수 있겠군!’
 드디어 타살로 죽는 방법이 생기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 챠우 베이에게 먼저 들러볼까?’
 무극선인은 허공을 마치 평지처럼 걸으며 발걸음을 북쪽으로 향했다.
 가볍게 걷는 한걸음에 10여 미터를 쭉쭉 뻗어나가자 옷깃은 태풍이라도 만난 듯 심하게 펄럭이며 갈 길을 재촉했다.
 “날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친구들, 아직 그 성정이 변함은 없겠지.”
 무극선인은 반신이 된 후로 자신의 경지를 시험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반신에 든 자들에게 대결을 신청했던 적이 있었다.
 결과는 압도적인 우세승.
 그때의 패배를 치욕으로 여기고 있는 그들은 무극선인을 보면 반드시 보복을 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
 수련을 하고 있던 챠우베이에게 기습을 가해 한방을 먹여놓고 냅다 도망쳐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의 히무라시 겐죠도 동일한 방법으로 유인해 한국의 남해바다로 날아왔다.
 한참을 날던 무극선인은 마침내 비행을 멈추고 한껏 기를 발산하여 두 사람이 자신을 올바로 찾아올 수 있게 유도했다.
 웅우우우
 기세를 뿜은 지 채 1분도 되지 않았을 때, 공기를 가르는 소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슈아아아앙
 “드디어 오는군! 이제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저 둘이라면 실컷 싸우다 죽을 수 있겠군!”
 자신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신선도를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주변 자연의 기운들과 공명을 시작했다.
 이른바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양쪽에서 날아오던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검과 장풍을 발하며 무극선인을 공격해 들어왔다.
 “무극선인! 이번엔 기필코 너를 죽이고 말겠다.”
 히무라시 겐죠의 검에는 어느새 시퍼런 검강이 맺혀 있었는데, 그 크기가 수십 미터에 달했다.
 취아아아악
 대해를 반으로 갈라버릴 것 같은 검강으로 이루어진 거검이 무극선인을 향해 쏘아져 왔다.
 거의 동시에 챠우 베이의 오른손에서 뿜어지는 시뻘건 홍염의 기운과 왼손에서 뿜어지는 새하얀 극냉의 기운이 서로 교차하며 회전하더니 직경 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태극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콰우우우우
 마치 세상 모든 기운을 다 빨아들인 듯한 극한의 태극 또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무극선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래, 이렇게 해야 제대로 싸울 맛이 나지!”
 양팔을 번쩍 치켜든 무극선인은 양쪽에서 날아오는 두 기운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힘차게 기압을 내질렀다.
 “하아아압!”
 츄아아앙!
 기합소리와 함께 발아래 있던 바닷물이 갑작스레 치솟아 오르더니 거대한 쌍룡의 형상을 갖추며 검강과 태극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꽝아아앙!
 쿠아아앙!
 세 개의 기운이 정통으로 부딪치자 결코 인간의 부딪침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미증유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앙!
 순식간에 폭발로 인한 거대한 해일이 만들어졌지만 세 사람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안 쓴 채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음양의 도를 깨우쳐 태극을 완성했기에 무극선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챠우 베이는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자신이 자만에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뒤질 것이 없는 일본의 검선이라는 히무라시 겐죠의 검도 함께 막아내었기 때문이다.
 맞은편에 있던 히무라시 겐죠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에 대한 깨달음만으로 반신의 경지에 들었으며 조그만 동산 정도는 일 합에 갈라버릴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제 무극선인과 자신의 차이는 고작해야 백지장 한 장 정도의 차이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막상 부딪쳐보니 백지장 한 장이 아니라 수십 장의 차이가 나고 있었다.
 “정녕 당신은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벽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기회에 끝장을 내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당신을 이길 수가 없겠군!”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선계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오직 무극선인을 이기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두 사람인지라 비겁하지만, 협공으로라도 이 기회에 상대를 죽여 버릴 생각을 했다.
 어차피 뛰어넘을 수 없다면 그 장애물을 치워버리려는 것이다.
 비록 비겁하긴 하지만, 두 사람만 입 다문다면 누가 알 것인가?
 전혀 반신의 경지에 오른 초월자이고 깨달은 자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게 두 사람은 너무나 현실적인 생각으로 공격에 집중했다.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던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오직 최선을 다해 싸울 수 있다는 것에 흥겨운 무극선인은 이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표출해 보고 죽을 각오를 했다.
 어차피 죽으려고 작정했는데 뭐가 아쉽겠는가.
 손짓에 따라 수많은 수룡들과 풍룡들이 생겨나 두 사람을 압박해 들어갔고, 두 사람도 이에 질세라 수많은 검강과 태극을 만들어 내며 무극선인이 만들어낸 용들에 대항했다.
 꽈아앙!
 꽝! 꽝!
 타살을 기대했던 무극선인의 희망과는 다르게, 자신도 모르게 목숨을 도외시한 채 공격에 임하자 챠우 베이와 히무라시 겐죠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안 그래도 강한데 수비를 전혀 안 하고 공격 일변도로 나가버리자 생명을 잃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은 오히려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 이렇게 강했다니!’
 ‘설마 반신의 경지를 벗어난 것인가?’
 자신들의 최상의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허점을 파고들어 공격을 해도 잔 수 한방 먹였다가 역공을 당해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보다 훨씬 강해진 수룡이 태극모양을 부숴버린 후, 시커먼 아가리를 벌려 챠우 베이를 삼키려 들었다.
 ‘헉! 음양의 조화라는 태극이 부서지다니!’
 간신히 몸을 틀어 수룡의 아가리를 피했다.
 ‘이대로 계속 된다면 결코 이길 수 없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
 자신의 검격에 반으로 갈라졌던 수룡이 갑자기 되살아나며 두 마리의 수룡으로 탈바꿈해 공격해오자 두 마리의 수룡까지 일 검에 베어버린 히무라시 겐죠는 이번엔 네 마리가 되어 덤벼드는 수룡의 아가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으득!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자.’
 네 마리의 수룡을 베며 아마도 여덟 마리의 수룡이 덤벼들리라!
 저 수룡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동일한 힘으로 산산이 부숴버리지 않으면 결코 소멸하지 않을 수룡을 보며 히무라시 겐죠는 숨겨 놓은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내놓았다.
 일명 검파!
 자신의 검을 산산이 부숴 그것을 암기처럼 상대를 향해 날리는 기술이다.
 성공하면 대박이요 실패하면 검사의 손에 검이 없음으로 역공을 당해 죽을 수 있는 비장의 수이건만, 히무라시 겐죠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검파를 시전했다.
 챠우 베이도 히무라시 겐죠의 검에 가공할 기세가 모여드는 것을 보며 자신이 개발한 비장의 한 수를 검파의 시전에 맞추어 내놓았다.
 태극의 극점은 결국 무극, 무극선인의 외호와 비슷해 기분 나쁘긴 하지만, 히무라시 겐죠가 비장의 수를 쓰기에 자신 또한 비장의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수비를 위해 쓰던 기운까지 모두 이번 한 번의 공격에 집중하며 전력을 다했다.
 챠우 베이의 손에 생성되었던 30미터가 넘는 태극이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주먹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크기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파괴력이 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밀도로 압축했기에 그 파괴력은 거대한 태극을 훨씬 능가했다.
 크기가 줄어들며 태극의 모양이 사라지고, 시커먼 구체가 되어 날아가는 무극의 기운을 보며 챠우 베이는 이번 한방에 제대로 먹히길 간절히 바라고 바랬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수룡과 버금가는 기운들이 생성되어 쏘아져 오자 무극선인은 지금까지 뿜어냈던 기세를 갑자기 지워버렸다.
 ‘보아하니 비장의 마지막 수인가 보군! 이제 제대로 죽을 수 있는 건가?’
 꽈아아아앙
 피이이이잉
 무극선인을 둘러싸고 있던 수룡과 풍룡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고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몸에 수십 개로 조각난 검편들이 통과했고, 그와 동시에 챠우 베이가 쏘아 보낸 무극의 기운이 가슴을 관통했다.
 “커억! 이제 드디어 죽는 건가? 고맙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어이없는 결과.
 챠우 베이와 히무라시 겐죠는 유혈이 낭자한 채 바다로 떨어지는 무극선인을 멍하니 쳐다보며 반문을 던졌다.
 “왜?”
 “도대체 왜?”
 절대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설사 비장의 한 수라고 날렸던 기술들이 먹혀들었더라도 그 힘들이 무극선인의 몸을 휘감아 돌던 풍룡과 수룡을 통과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시간에 모든 기운을 흩어버리고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공격을 허용했다.
 풍덩
 무극선인의 시체는 요동치는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두 사람은 갑작스런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멍한 시선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왜 이런 결과가?”
 “무극선인이 마지막에 고맙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러게 말이오. 도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또 왜 고맙다고 한 것인지….”
 풀 수 없는 의문을 안고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망연자실해 있는 두 사람.
 이긴 것 같은데 전혀 기뿐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실 가서 일 보고 뒤를 안 딱은 듯 찝찝한 느낌이 더 강했다. 아마도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서 이번에 있었던 무극선인의 대결과 그 속내를 짐작하려고 한동안 골머리를 싸매리라!
 그들이 벌인 대결의 여파로 기상청 예측과는 전혀 상반된 대형 해일이 발생해 죄 없이 애꿎은 사람들이 해일에 휩쓸려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가옥들이 파괴를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 * *
 
 현재 무명노인은 무척이나 답답한 상태였다.
 무공이나 언어 또는 사람을 대하는 예절까지 거의 모든 것이 기억이 나는데 이상하게 자신의 과거의 이름이라든가, 뭘 했던 사람이란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를 듯하면서 확연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자 조바심이 나며 애가 타기 시작했다.
 벌써 계절이 한 바퀴 이상 돈 것이다.
 솔잎의 진한 향에 취한 채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러다가 영영 기억이 안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이 정도 시간이 지났다면 뇌가 모두 복원되어 당연히 자신은 옛날 일을 기억할 수 있어야 맞건만, 꼭 뭔가가 기억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후우! 부분 기억상실이라니. 도대체 내 이름은 무엇이며 왜 이런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데 그 지경이 됐던 걸까?”
 무명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주변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가공함 그 자체였다.
 날아가는 새도 손짓으로 부를 수 있었으며 허공을 평지처럼 걸을 수도 있었고, 심지어 어지간한 상처는 약을 바를 필요도 없이 즉시로 복원이 되었다.
 “도대체 나는 뭘 했던 거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무 밑에서 민호의 말소리가 울렸다.
 “스승님,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세요?”
 답이 나오지 않는 긴 상념에 잠겨 있던 무명노인은 민호의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오느냐? 오늘은 숙제가 없나 보지?”
 확실히 평상시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민호였다.
 불과 1년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민호의 키는 처음 봤을 때보다 한 자 이상은 커져 있었다.
 영양실조라도 걸린 것처럼 삐쩍 말라 있었던 몸도 이제는 제법 살이 붙어 있는 것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비슷한 몸집이 되어 있었다.
 하늘을 날고 싶어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명노인이 가르쳐준 무공의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 개교기념일이라 조금 여유가 있었어요!”
 “학교 하루 쉬는 게 그렇게 좋으냐?”
 “그럼요! 말할 수 없이 기쁘죠!”
 소나무 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린 무명노인은 민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이 귀에 걸렸구나.”
 “헤헤, 스승님, 오늘은 뭐할 거예요? 어제 구워먹은 토끼는 정말 맛있었는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은근히 토끼를 잡으러 자가는 운을 떼는 민호를 보며 무명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조그만 산에 토끼가 얼마나 된다고, 토끼 사냥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안 된다.”
 무명노인은 그러면서 허리를 숙이더니 민호의 보물창고에서 제기를 꺼냈다.
 “오늘은 제기 두 개를 차는 놀이를 할 거다.”
 “두 개요? 왜 갑자기 두 개로 늘리신 거죠?”
 “나중에는 아홉 개까지 늘릴 건데 뭘 그리 놀라느냐?”
 “네? 그게 말이 돼요?”
 “처음에 어렵더라도 하다보면 늘게 돼 있지. 아홉 개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오늘 두 개나 잘 하거라.”
 “으윽, 점점 어려워지네.”
 “하늘을 날려면 이런 건 기본기에 불과하단다.”
 순간 민호는 처음 무명노인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무공을 배우는 목적이 하늘을 날기 위함이 아니던가?
 헤에~
 배시시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오늘은 무얼 걸고 내기를 할 거냐?”
 “스승님은 저에게 뭘 가르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가르침을 핑계로 날마다 내기할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녀석,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언제는 솔잎만 먹어도 된다고 했으면서.”
 “솔잎은 주식이고 때론 간식도 먹어야지.”
 어느새 무명노인의 입맛은 민호의 집에서 나는 농산물을 얻어먹는데 길들여지고 있었다.
 “알았어요! 고구마 열 개 걸게요”
 군침이 흐르는지 나직이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저녁은 고구마 구이를 먹을 수 있겠군!”
 당연히 이길 것 같은 말투에 민호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또다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날 밤, 무명노인은 민호가 가지고 온 김치와 고구마를 가지고 모닥불을 피웠다.
 고구마를 모닥불 속으로 집어넣은 지 10여 분 정도가 지나자 고소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 사이에 스며 있는 고구마 냄새는 두 사람의 입에서 절로 군침이 흐르게 했다.
 민호가 나뭇가지를 사용해 고구마를 찔러보았다.
 “거의 다 익어가네요.”
 “조그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역시 고구마는 신 김치와 같이 먹어야 맛있어요.”
 잠시 후, 두 사람은 검게 탄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내며 한입씩 베어 물더니 신 김치와 고구마의 절묘한 궁합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막히군! 왜 예전엔 이런 맛을 몰랐을까?”
 “뭘 먹어도 다 맛있어 하시면서.”
 “시골 음식은 다 맛있단다. 특히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식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약성이 생기게 되지. 그렇기에 뜸을 뜰 때 최고로 치는 게 해풍을 맞고 자란 쑥을 최고로 치는 것이지.”
 “그럼, 이 고구마도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서 더 맛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근데 스승님, 지금 하신 말씀이 과학적 근거는 있어요?”
 “과학적 근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란다. 비근한 예로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 약성이 가득한 식물들을 먹기에 자신도 모르게 건강하게 되고 장수하는 것이지.”
 “에이, 스승님. 요즘 추세는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요.”
 “허허! 자연의 이치를 과학으로 설명하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누가 그러더냐?”
 “저희 선생님이요!”
 “선생님이?”
 선생이 가르쳐준 것이 다 진리가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어린 민호에게 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수긍해주었다.
 “선생님이 그랬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렇게 되면 이 고구마가 맛있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해봐야겠구나?”
 “하하! 스승님, 너무 심각해지지 마세요.”
 웃고 즐기는 가운데 무명노인은 민호의 몸속에 쌓여 있는 내공의 양을 측정해보며 한 1년 정도 더 수련하면 본격적인 신선의 숨결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 내공을 수련한 지 이제 겨우 1년이건만,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했는지 벌써 내기가 하단전의 절반을 채웠구나.’
 무명노인은 민호의 아랫배에 파랗게 빛나고 있는 내기를 꿰뚫어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개교기념일이라 다른 날보다 무척 한가해진 민호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도산서로 득달같이 뛰어갔다.
 “어? 내공을 수련하고 계신 건가? 그런데 저 빛은 뭐지?”
 나뭇가지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고 있는 무명노인의 모습이 민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은 약간의 어둠이 머물고 있는 이른 아침이었다.
 주위 배경에 대조되게 무명노인의 몸에서 하얀 서기가 비춰지고 있었다.
 잠시 후.
 스스슷
 어린 민호가 보기에도 엄숙하며 장엄해 보이는 서기가 점점 비대해지더니 마침내 주변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민호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 같은 순간에는 절대 방해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스승님이 이런 순간은 절대 방해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해줬던 것이다. 은근히 몸을 휘감던 서기가 갑작스레 세력을 확장하며 주변으로 뻗어나간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무명노인의 기억하려고 애썼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안겨주던 기억들이 일순간 봇물 터지듯이 터지며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콰아아아
 가뭄에 쩍쩍 갈라져 있던 논밭에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죽으려고 용을 쓰던 기억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에 성공한 모습과 그 여파로 발생한 해일까지 모조리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필름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편린들.
 번쩍!
 모든 서기가 걷히고 해가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즈음 마침내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아주 짧은 순간 빛나던 눈은 어느새 착잡한 빛을 띠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눈빛이 착잡한 빛을 띠는 이유는 다름 아닌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호 때문이었다.
 “…민호야, 네 아버지가 해일 때문에 죽었다고 했더냐?”
 “예, 스승님!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나요?”
 “아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어본 것이다.”
 뭔가 죄라도 지은 듯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무명노인.
 그러나 스승의 그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호의 호기심이 가득한 질문이 이어졌다.
 “스승님, 좀 전에 그 빛은 뭐예요? 굉장히 멋있어 보이던데.”
 “네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기를 본 모양이구나. 그것은 그냥 내공이 수준 높이 쌓이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별것 아니란다. 나중에 너도 경험하게 될 현상에 불과하단다.”
 무명노인은 민호가 고아가 된 것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천억의 재산 피해가 난 것이 자신이 일으킨 해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른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야만 몸에서 발한다는 서기를 단순한 내공이 높아지면 나타나는 증상으로 비하시켜버렸다.
 “우와! 그럼 나중에 제 몸에서도 그런 빛이 날 수 있는 건가요?”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계속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떠나지 않았다. 하늘을 쳐다보며 이어지는 상념의 꼬리들을 일단 뒤로 밀어놓았다.
 ‘일단 오늘 수련을 마친 후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그렇단다. 근데 오늘 너무 일찍 온 것 아니냐?”
 “오늘 개교기념일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맞다. 개교기념일이랬지.”
 머쓱한지 자리를 털고 일어며 서둘러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래, 오늘은 파리 맞추기(전라도 지방의 민속놀이로 납작한 돌을 세워놓고 먼 거리에서 다른 돌을 던져 넘어뜨리거나 깨는 놀이)나 한번 해볼까?”
 파리 맞추기라는 말에 민호의 얼굴이 싱겁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혹시 그 여자애들이 하는, 돌 세워놓고 멀리서 던져 쓰러뜨리는 게임을 말하는 건가요?”
 말투와 표정에서 약간은 실망한 기색이 느껴지자 무명노인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너도 알고 있었느냐? 그러나 여자애들과 우리가 같은 수준으로 놀 수는 없으니 우리는 훨씬 멀리서 돌을 던질 거란다.”
 “멀리서요?”
 “그렇지, 멀리서. 일단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가볼까?”
 “……!”
 ‘멀리서’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스승의 뒤를 따랐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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