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몽왕괴표 [E]

몽왕괴표 1권-1

2014.12.31 조회 2,453 추천 39


 몽왕괴표 1권
 
 1. 잠자는 소년
 
 하북성 웅현현 민강 어귀에는 포구를 낀 움치란 마을이 있다.
 통상 움치포구라 불리는 이 마을 포구엔 제법 음식이 맛있고 객실이 깔끔하기로 소문난 청풍객잔이 있는데, 아주 가끔 서생이나 무림인이 배를 기다리기 위해 잠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 빼고는, 대부분의 손님은 상선에서 일하는 뱃사람이거나 아니면 그걸 이용하는 상인들이었다.
 보통 객잔은 숙박업을 겸하고 있는데 청풍객잔도 마찬가지로 일, 이 층은 식당이고 삼 층은 객실이었다.
 원래 식탁만 있어야 하는 이 층의 한구석엔 칸막이가 쳐진 조그만 객실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곳에는 객주인 설설용과 장현숙 부부의 아들 설춘몽이 항시 잠들어 있었다.
 설춘몽은 열다섯 살인데 그가 갑자기 쓰러진 후 잠만 자기 시작한 지가 올해로 만 십 년째였다.
 두 부부는 청풍객잔을 운영하며 번 돈을 십 년 동안 아들의 병을 고치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세간에 제법 용하다는 의원이나 귀신을 쫓는 무당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현재로선 고작 죽지 않고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고칠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용하기로 소문난 의원들의 말하기를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가진 자가 그의 십이경락을 막고 있는 불순물을 정순한 내공으로 뚫어 주거나 만년삼왕과 북해빙정 같은 양기와 음기를 가진 두 가지 절세의 영약을 함께 구해 중화시킬 수 있는 일반 약재와 섞어 장기간 복용시켜 혈맥을 막고 있는 불순물을 녹이는 수뿐이라고 했다.
 설씨 부부는 의원들이 말한 이 두 가지 방법을 듣곤 아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포기했다.
 말이 좋아 삼 갑자지, 삼 갑자라면 무려 백팔십 년 동안 쌓은 내공을 말한다. 팔십까지만 살다 죽어도 호상이라고 울지 않는 판국에 백팔십 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설사 그렇게 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죽어라 내공만 축척했을 리도 없었다.
 물론, 아주 많이 백 번, 천 번 양보해 현 중원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긴 세월을 살며 내공을 쌓은 고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생면부지인 그들의 아들을 위해 그렇게 억척같이 쌓은 내공을 소모할 리도 만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년삼왕이나 북해빙정 또한 그림의 떡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객잔을 팔아도 잔뿌리조차 살 수 없는 것이 만년삼왕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그런 영약이 있다는 말만 들어 봤을 뿐 그의 오십 평생 본 적도, 누가 가지고 있단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설춘몽이 깨어 있는 시각은 하루에 한 시진 정도였다.
 그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하는 일이라곤 침을 맞고 탕약을 먹은 후 의원이나 가족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다시 잠드는 게 전부였다.
 비록 하루에 한 시진 정도이긴 하지만 깨어서 대화를 하는 시간이 있기에 부모 입장에서 날마다 은자 석 냥이라는 큰돈이 들어가더라도 치료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날마다 침을 맞고 탕약을 달이는 데 들어가는 은자 석 냥은 객잔 수입의 절반 가까이 되었다. 만약 그 돈이 그대로 쌓였다면 부부는 지금보다 훨씬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
 
 일 층의 객실.
 탁.
 설설용이 탁자 위로 아들 치료비라고 은자 석 냥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평상시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받았을 의원 허곤이 웬일인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은자를 다시 물렸다.
 순간 설설용과 장현숙 그리고 딸인 설난화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맺혔다.
 ‘……?’
 설설용이 막 질문을 하려는데 허곤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은 내게 돈을 줄 필요가 없네.”
 “왜,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설설용은 은자 석 냥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아들이 먹는 탕약의 재료값에 비하면 허곤이 많이 깎아 주는 거란 걸 알았다. 그런데 의원이 그 돈마저 받지 않겠다고 하자 순간 원인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앞으로 길어야 한 달, 그 이후론 병 수발을 할 필요가 없어질 걸세.”
 허곤의 말에 세 사람 모두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맺혔다. 설춘몽의 상태는 분명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길어야 한 달이라니?
 “서, 설마 하, 한 달이 지나면 제 아들이 낫는다는 말씀이십니까?”
 희망을 가진 설설용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허곤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으로서 이런 말을 할 때가 가장 힘들지. 병 수발도 산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네. 듣지도 않는 침을 놓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부터는 그냥 이 처방전에 나와 있는 대로 약재만 사다가 달여 주면 될 것일세. 미안하지만 낫는 처방전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 주는 처방전일세.”
 멍.
 세 사람은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의, 의원님.”
 화들짝 정신을 차린 설설용과 장현숙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허곤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거 놓게. 내게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닌 걸 알지 않나.”
 “의원님, 그래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진 아들을 치료해 주십시오. 돈이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올려 드리겠습니다.”
 “미안하네.”
 허곤은 뜯어질 것 같은 옷깃을 냉정하게 뿌리치곤 빠른 걸음으로 객잔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설설용을 비롯한 세 사람은 달려가서 의원을 잡지 못했다. 아니 잡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 설춘몽이 최근 급격히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조만간 이런 말을 들을 줄 예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려 왔고 눈물이 샘처럼 흘렀다.
 “여, 여보, 불쌍한 내 아들 춘몽이는 이제 어쩌죠?”
 “흑흑, 부, 불쌍한 내 동생. 평생 제대로 한번 뛰어놀아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죽어 가야 하다니! 으아아아앙…….”
 장현숙과 설난화가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설설용은 말없이 두 사람을 꼭 끌어안았다.
 “…….”
 ‘커윽, 하, 하늘이시여. 정녕 저렇게 죽이려고 춘몽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까?’
 소리 내어 울진 않았지만 설설용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해골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삐쩍 마른 몰골. 설춘몽이 겨우 약사발을 들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탕약을 마시고 있었다.
 “크윽, 지독히도 쓰군. 어떻게 된 게 이 쓴맛은 십 년 가까이 먹었음에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탁.
 그는 약사발을 내려놓으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춘몽의 누이인 설난화는 또다시 차오르는 눈가의 습기를 지우며 얼른 당과를 집어 동생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약이니 당연히 쓰지, 달면 그게 어디 약이냐? 엄살 피우지 말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먹어.”
 “한 방울도 안 남겼어.”
 춘몽은 약사발을 들어 누이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잘했어. 아이고, 말 잘 듣는 내 동생.”
 피식.
 살가죽만 남아 있는 춘몽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어렸다.
 ‘또 내가 불쌍하다고 울었나 보군!’
 무려 십 년 동안 설춘몽, 자신의 약을 달여 주고 목욕을 대신해 물수건으로 치부까지 닦아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누나. 오늘따라 그 누나의 눈가가 퉁퉁 부어 있고 토끼 눈처럼 벌겠다.
 설춘몽이 제 딴에는 누나를 위로한답시고 평상시 같지 않은 너스레를 떨었다.
 “누나도 이제 시집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누구 따라다니는 남자 없어?”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야 수천 명이지. 그중에 골라서 갈 생각이니까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병이나 나을 생각해.”
 난화는 동생의 수명이 길어야 한 달이라는 걸 알았지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설춘몽 본인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억지웃음을 지어도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슬픔의 기색은 지워지지 않았다.
 춘몽은 분위기를 바꿔 본답시고 다시 한 번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내 매형 될 사람은 정말 세상에서 다시없는 복을 받은 사람일 거야.”
 “왜?”
 “누나처럼 착하고 예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선녀 같은 얼굴에 백옥 같은 피부…… 만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풍만하고 탱탱한 가슴과 버들잎처럼 가늘고 잘록한 허리, 내가 동생만 아니었다면 진작 보쌈을 해 갔을 거야, 하하하…….”
 춘몽은 자신이 지금 뱉은 말이 당사자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인지 하면 안 되는 말인지 잘 모른다. 그냥 객잔에 오는 손님들 중 일부가 누나에 대해 술주정 비슷하게 하는 말을 듣고 그걸 인용해 한번 웃기려고 한 것뿐이다.
 콩.
 순간 난화의 주먹이 춘몽의 이마에 아주 가벼운 알밤을 먹였다.
 “이게 감히 누나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난화는 동생의 너스레에 오히려 더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억지로 토라진 듯 새치름하게 눈을 부릅떴다.
 춘몽은 어깨를 움츠리며 실실 웃었다.
 “하하,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는 데도 성질을 부려…… 하아함.”
 말을 하던 춘몽의 입에서 긴 하품이 나오더니 그의 눈에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한 시진이 다 돼 가는 건가?”
 춘몽의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하자 난화는 재빨리 약사발을 침대에서 치웠다.
 “누나…… 아하하함.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이 눈꺼풀이 가장 무겁다 대답할 거야…….”
 풀썩.
 마지막 말을 끝으로 춘몽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더니 침대로 쓰러졌다.
 “후.”
 갑작스럽게 쓰러진 채, 잠든 사람 특유의 단 숨을 몰아쉬는 동생을 보는 난화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잘 자라. 얼마 남지 않은 기간만이라도 좋은 꿈꾸고.”
 난화는 춘몽의 몸에 이불을 덮어 준 후 햇빛을 가리는 차양을 치고 문을 닫았다.
 주르르륵.
 그제야 그녀의 눈에서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
 
 원래 객잔 안채에 있어야 할 춘몽이 이 층 객실로 옮겨 온 것은 순전히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부모나 누이 그리고 객잔 점소이 일을 십 년 넘게 하고 있는 강삼, 강채 형제 들은 모르고 있지만 춘몽은 언제부턴가 꿈꾸지 않는 시간엔 눈을 감고 자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쯤 깬 채로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온몸이 굳는 걸 넘어 혈맥까지 굳어 가면서 오는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선잠과 비슷한 상태였다.
 처음엔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춘몽 자신도 소리가 들리는 시간엔 자신이 반쯤 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깨어 있다고 해도 눈을 뜨거나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차츰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듣는 것이 즐거워진 춘몽은 아버지에게 부탁해 이 층 객잔의 한구석에 임시 객실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설설용은 객잔 한구석에,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환자가 누워 있는 것이 손님들에게 불편함을 끼칠까 봐 처음엔 반대했다. 하지만 워낙 아들이 간절하게 부탁하는지라 끝내 그 소원을 들어주고 말았다.
 청풍객잔에 들리는 손님들도 처음엔 자신들이 웃고 떠드는 한편에 객실이 만들어져 있고 그곳에 환자가 누워 있다는 게 불편했지만 세월이 지나며 차츰 그 모습에 익숙해졌다. 심지어 일부 손님들은 약값에 보태라며 적은 돈이지만 잔돈을 거슬러 받지 않은 경우까지 있었다.
 설춘몽은 오늘도 꿈을 꾼다.
 십 년 가까이 잠만 자다 보니 이제는 꿈도 의지대로 꿀 수가 있었다.
 꿈의 대부분은 객잔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들을 키우고 키워 뭐든 돼 보는 것이었다.
 서생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려 봤고, 무림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산과 바다를 가르는 무림 고수가 되어 강호를 질풍처럼 질주해 보기도 했다. 또 시인의 노래를 들었을 때는 바람이 되어 세상을 여행했으며 어부들의 푸념을 들었을 때는 물이 되어 바다까지 흘러가 온갖 고기들과 대화를 해 보기도 했다.
 꿈에서 그는 모든 걸 해 볼 수가 있었고 불가능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왕이나 고수나 바람이나 물은 현실적인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꿈이었다. 만약 천운을 만나 병이 낫는다면 실제로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은 자유표사라는 직업이었다.
 자유표사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객잔의 주 고객이며 단골인 표사와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는 대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다.
 강한 무공과 적당한 정의감을 가진 자유표사는 표물을 지켜 주는 대가로 돈도 벌고 또 중간 중간 꽃 같은 미녀들을 호위하다 은근슬쩍 눈이 맞아 연애도 즐기며 중원 곳곳을 바람처럼 여행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는 고작 고급 낭인 정도의 취급밖에 못 받는 자유표사지만 아파서 누워 있어야 하는 춘몽의 입장에선 만약 몸이 낫는다면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은 일이자 꿈인 것이다.
 
 @
 
 후우우웅.
 숭산 소실봉 꼭대기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검은 연기 같은 것을 토해 냈다.
 후두두두둑.
 “크윽, 역시 신이 만들어 놓은 차원의 벽이라 이건가. 모든 것을 견디던 최강의 육체가 갈가리 찢겨 사라져 버리다니, 참으로 지독하군.”
 검은 연기가 몽글거리며 모이더니 그 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크크큭, 그나저나 장장 천 년 만의 이계 나들이니, 실컷 즐기다 가야겠지. 일단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고 몸부터 만들어야겠다.”
 태양이 비추고 있는 낮이긴 하지만 검은 마기로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기에 몽마의 본질인 정신체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스르르르륵.
 검은 연기는 바람결과 상관없이 허공을 부유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숭산 소실봉에는 조그만 암자 하나가 있는데 그곳에는 소림사의 전대 방장이었던 공야성승이 은거를 하고 있었다.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현재 도달한 자가 몇 없다는 현경의 고수이며 지극한 불심 때문에 서역의 라마승들도 찾아와 배움을 청한다는 공야.
 성승이라는 칭호는 서역의 그 라마승들이 공야의 깊은 불심과 높은 학문을 존경하여 붙여 준 것이었다.
 흠칫.
 부처상 앞에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염주를 돌리던 공야성승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뭐지?’
 소실봉을 감싸고 있는 청정한 기운 속에 있어서는 안 될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이, 이건 마구니의 기운인데. 어찌, 부처를 모시고 있는 신성한 이곳에 마구니의 기운이 침범을 한단 말인가?’
 정신을 집중하자 느껴지는 기운의 사악함은 심령을 떨리게 할 정도로 지독하고 강력했다. 염주를 돌리고 있던 공야성승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세상으로 뻗어 나가면 크게 해악을 끼칠 기운이로고!’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할 정도로 사악하고 음습한 기운이 소실봉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갈!”
 공야성승의 염주가 백팔 개로 분리되더니 창을 뚫고 날아갔다.
 
 “크억!”
 몽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지상 쪽 허름한 암자에서 갑자기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이미 육체는 없고 정신체를 감싼 마기만 남아 있는 상태이기에 물질이 쏘아져 오는 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빛을 발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화아아아악.
 그물처럼 넓게 퍼져 그를 덮치는 도토리만 한 알맹이들, 그 알맹이들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어처구니없게도 마계의 왕이라는 그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이건 신성력! 신성력이 어떻게 이런 곳에!”
 차원을 넘어오느라 육체가 만신창이로 찢겨 소멸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신성력으로는 그를 압박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육체를 재구성하지 못한 정신체의 상태였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하지만, 마기만 남아 있는 이런 상태에서 신성력을 쏘이는 건 치명적이었다.
 “갈! 세상에 해악만을 끼칠 사악한 기운이로고,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그때 몽마의 눈에 신성력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대머리 인간 한 명이 지상에서 그를 향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대머리 인간은 손을 활짝 펴더니 금빛 손 그림자를 만들어 그를 후려치려 하고 있었다.
 ‘제, 젠장, 하필 차원의 벽을 뚫고 넘어온 곳이 신전 위였던가!’
 저 정도의 신성력이라면 대신관이 틀림없었다.
 “감히 고작 신관 따위가!”
 마왕의 체면에 천사장도 아닌 고작 신관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몽마의 의지가 강력하게 마기를 움직이자 검은 번개가 쏘아졌다. 비록 육체가 갈가리 찢겨 정신체만 남은 상태라지만 마기를 공격력으로 전환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번쩍. 콰드드득.
 검은 번개는 빛이었다. 그 빛이 순식간에 대머리 인간의 가슴을 꿰뚫었다.
 ‘후훗, 대마왕이신 이 몽마 님에게 함부로 나댄 대가는 오직 죽음뿐이…… 커억! 제, 젠장!’
 검은 번개를 쏘아 보낸 후 비웃음을 흘리던 몽마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가슴이 꿰뚫린 대머리 인간의 동작은 멈추었지만 어떻게 된 게 손에서 빛나던 금빛은 쏘아진 화살처럼 계속 날아와 그를 후려친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이 대머리 새끼가 전투신관이었던 건가…….’
 화르르륵.
 금빛 신성력과 검은 마기가 만나자 대낮인데도 태양의 밝기를 능가하는 화려한 불꽃이 피어났다.
 캬아아아악.
 검은 연기가 불꽃으로 산화해 소멸되자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터졌다.
 쿨럭.
 공야성승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흐, 흑뢰! 마구니의 기운이 만악을 멸하는 뇌雷와 같은 형태로 변환되어 도리어 불력을 소멸시켜 버리다니. 어, 어처구니가 없도다…….”
 그냥 사악하고 음습한 기운의 응집체인 줄 알았는데 반야신공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그의 가슴이 꿰뚫렸다. 십이 성 대성한 반야신공이면 마기를 막아 낼 뿐만 아니라 금강불괴에 버금가는 단단함 가지게 해 준다. 하지만 마기가 변환된 흑뢰는 그런 그의 가슴을 꿰뚫고 심장을 박살 내 버렸다.
 풀썩.
 땅으로 떨어진 공야성승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허허, 내 비록 열반에 들기를 원했지만, 그래도 이런 방법은 아니었는데…….”
 공야성승은 엄청난 내공과 수련 덕에 심장이 부서져도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차츰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죽기 전에 세상에 해악을 끼칠 악한 기운을 소멸시켰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로다. 허허허…… 커억!”
 공야성승은 고통 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반야심경을 외웠다.
 ‘마하반야 바라밀타…….’
 후두두두둑.
 잠시 후 백팔개의 염주가 힘을 잃은 채 공야성승의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기나긴 영생의 삶을 사는 동안 지금처럼 최악인 경우는 처음이로군, 젠장 할!’
 몽마의 입에서 연방 욕이 터져 나왔다.
 차원을 넘어오며 육체의 대부분이 갈가리 찢겨서 겨우 마기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대머리 신관과 싸우며 그나마 남아 있던 마기마저 소멸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처음 몽마라는 이름으로 창조됐을 당시의 온전한 정신체뿐이었다.
 ‘족히 만 명이 넘는 인간의 정기와 생기를 빨아먹어야 겨우 마기를 회복하고 육체를 만들 수 있겠군.’
 영혼과 같은 상태인 정신체는 신이 간섭하지 않는 이상 소멸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태로 천 년에 한 번뿐인 유희를 즐기고 싶진 않았다.
 몽마는 몸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을 찾아 빠르게 허공을 날아갔다.
 
 @
 
 ‘젠장, 이놈의 햇볕. 꼭 불로 지지는 것 같군!’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을 찾아 헤매던 몽마의 인상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존재 자체가 몽마여서 그런지 몰라도 이상하게 햇볕을 쏘일 때마다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물론 마기가 있거나 육체가 있다면 햇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정신체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태양이 떠 있는 기간 동안은 그림자에 숨든 땅속으로 스며들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직 고통스럽지 않은 공간은 인간의 꿈인 정신세계뿐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많은 곳을 살폈지만 마땅히 들어갈 만한 몸이 없었다.
 몽마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잠을 자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밤이 아닌 낮이었다. 하다못해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게 그런 인간조차 보이질 않았다.
 ‘찾았다.’
 온몸이 타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을 참으며 빠르게 세상을 훑고 다니던 몽마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이를 악물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는 중에 대낮인데도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을 발견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삐쩍 마른 게 아무래도 정상적인 인간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햇빛부터 피하고 보자.’
 몽마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서둘러 인간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병들어 다 죽어 가는 인간의 꿈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면 이 인간의 손톱만큼밖에 남아 있지 않은 미약한 정기와 생기를 빨아먹고 건강한 인간의 꿈속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만 명의 꿈속을 돌아다니려면 족히 사나흘은 걸리겠군. 젠장, 천 년 만의 유희인데 몸을 만들기 위해 사흘이나 소모해야 하다니!’
 
 @
 
 산과 강 그리고 바다. 여기저기 뛰어노는 수많은 동물과 영물 들. 대기 중에는 바람이 불었고 하늘에는 태양과 달이 동시에 떠 있으며 형형색색의 오색구름이 떠다녔다.
 “뭐야, 삐쩍 말라 다 죽어 가는 놈의 꿈이 어떻게 이렇게 풍족할 수 있는 거지?”
 인간의 꿈속으로 들어온 몽마의 얼굴에 대번에 의아함이 어렸다.
 이 정도의 환자라면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에 당연히 꾸는 꿈이 악몽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다 죽어 가는 인간의 꿈이 풍족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단순히 풍족함뿐이라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몽마가 놀란 것은 이 인간의 꿈이 단편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풍족함과 평안함이라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세계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거창하게 꿈에서 세계를 창조한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이놈 삐쩍 말라 다 죽어 가던 육체와는 다르게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녀석이었구나!”
 별것 아닌 햇볕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마기나 육체 따위보다 더 고차원적인 몽마 본연의 정신체를 성장시켜 줄 커다란 정신력을 가진 좋은 재료였다.
 정신체가 성장을 하려면 최소한 중간계의 조율자라는 드래곤이나 최상급 정령, 천사장 정도를 잡아먹어야 하는데 고작 말라비틀어져 다 죽어 가는 인간이 그 같은 존재들과 맞먹는 터무니없는 정신력을 지닌 것이다.
 돌멩인 줄 알았는데 줍고 보니 보석인 격.
 “회, 횡재했다.”
 꾸르르르륵.
 몽마가 환호성을 지르는 그때 드래곤처럼 생겼지만 배가 나오지 않고 뱀처럼 생긴 이상한 놈이 몽마를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꼬리를 치며 날아왔다.
 이 뱀처럼 생긴 이상한 놈은 춘몽이 상상으로 만든 용이었다.
 몽마의 기분 좋았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감히 몽마인 내게 호감이라는 역겨운 감정을 풍기다니…….”
 몽마는 전투와 피를 즐기는 마왕이다. 안 그래도 춘몽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안기려고 달려드는 용까지 보자 단숨에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올랐다.
 “어디서 변종 뱀 따위가 감히 나에게 안기려 드는 것이냐!”
 촤르르르륵.
 몽마가 손을 뻗자 허공중에서 거대한 사슬낫이 만들어지더니 날아오는 용의 몸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서걱.
 쿠에에에엑.
 설마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반갑다고 꼬리 치며 날아왔던 용은 대번에 반으로 쪼개지며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댔다.
 “크큭, 그렇지. 그렇게 비명을 질러야 제대로 된 세상이지.”
 몽마는 용의 비명을 들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도 모두 비명을 질러라!”
 촤라라라락.
 몽마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자 허공중에서 만들어진 사슬낫이 저 멀리서 움찔거리고 있는 수많은 동물들을 향해 날아갔다.
 키에엑, 끼룩, 까아악…….
 동물들은 용을 반으로 쪼개 버린 사슬낫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자 놀란 듯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크큭, 그렇게 느린 발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몽마가 의지를 변형시키자 갑자기 사슬낫이 수백 개로 쪼개지더니 모든 동물들을 그물처럼 포위하며 덮쳐 갔다.
 “무슨 짓이냐! 당장 멈춰!”
 그때 천지가 흔들리는 듯한 고함이 터지더니 땅에서 수십 개의 흙기둥이 솟아나 사슬낫을 막았다.
 콰콰콰콰콱.
 수많은 사슬낫들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모두 흙기둥에 박혀 사라졌다.
 몽마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호오, 꽤 빨리 나타났네…… 엉? 뭐야, 이거 완전히 웃기는 놈일세. 현실에선 삐쩍 말라 다 죽어 가는 놈이 어처구니없게 자기 꿈속이라고 신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다니.”
 꿈속이라 그런지 춘몽은 비단옷에 황제 같은 왕관을 쓰고 구름 위에 앉아 있었는데 주변으론 금강야차 같은 천왕과 선녀 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설춘몽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꿈에 들어와 함부로 용을 죽여 버린 징그러운 생명체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오래간만에 잡귀가 내 꿈에 들어왔군.”
 예전에는 귀신에게 한없이 쫓기거나 도적에게 죽는, 더러운 기분이 드는 꿈을 참 많이도 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설춘몽은 의지대로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이후로도 몇 번 저런 잡귀들이 꿈에 나타난 적이 있었지만 그런 잡귀들은 모두 그가 친절하게 죽여 줬다.
 둥실.
 몽마는 하늘로 날아올라 설춘몽과 같은 위치에 섰다.
 “크크큭, 역시 터무니없는 정신력을 지녔군. 네놈은 이만 죽어 내 정신체가 성장할 수 있는 밥이 돼 주어야겠다.”
 꿈에서 몽마에게 죽임을 당하면 현실에서도 그 사람은 모든 정기는 물론 영혼마저 흡수된 채 죽는다.
 촤르르르륵.
 거대한 사슬낫이 춘몽을 향해 날아갔다.
 “감히, 고작 잡귀 따위가 내 꿈 안에서 함부로 나대다니! 금강야차, 당장 저 잡귀를 포박해라.”
 “네, 상제님.”
 설춘몽을 호위하고 있던 금강야차가 앞으로 나서더니 가시가 돋친 철곤을 휘둘러 쏘아져 오는 사슬낫을 후려쳤다.
 까아아앙.
 불꽃이 튀며 사슬낫이 튕겨져 나왔다.
 순간 몽마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뭐야! 비록 가볍게 휘둘렀다지만 모든 꿈에서는 왕인 내 공격이 막히는 일이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하급이나 중급도 아닌 고위 마족을 넘어선, 완전한 정신체인 마왕 몽마다. 지금까지 드래곤을 제외하곤 꿈에서는 공격을 막혀 본 적이 없었기에 황당함은 상당했다.
 “금강석 사슬로 결박해 불지옥에서 영원토록 구워 주마!”
 금강야차는 철곤을 바람개비처럼 돌리더니 몽마를 장작 패듯 찍으려 들었다.
 “꿈의 주인도 아닌 고작 상상의 부산물 따위가 나에게 덤빌 생각을 하다니, 잘근잘근 씹어 먹어 주마!”
 쿠쿠쿠쿠쿠쿵.
 몽마의 덩치가 순식간에 산처럼 커지며 금강야차의 철곤과 그걸 들고 있던 팔을 박살 내 버렸다.
 “크어억!”
 팔이 사라진 금강야차가 공처럼 튕겨져 나갔다.
 츄아아악.
 순간 몽마는 목을 길게 늘이더니 금강야차를 덥석 물고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어 버렸다.
 “클클클, 고작 상상의 부산물 한 놈을 먹었을 뿐인데 내 정신체에 포만감이 들다니. 좋구나, 아주 좋아!”
 “감히, 잡귀 따위가!”
 자신의 동료인 금강야차가 먹히자 남은 천왕이 분노를 표하며 몽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몽마는 천왕들을 보며 또다시 입맛을 다셨다.
 “어서 와라 맛있는 먹잇감들아!”
 크아아아앙.
 몽마의 입이 단번에 천왕들을 먹어 치울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잡귀치고는 대단한데…….”
 설춘몽은 순식간에 산처럼 커져 버린 몽마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비록 금강야차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먹혀 버렸지만 어차피 이곳은 자신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꿈의 세계. 금강야차를 비롯한 천왕들 정도는 만들려고 하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 수가 있었다.
 “누나의 눈물을 봤기 때문인가? 오늘의 꿈은 참 요란하군.”
 설춘몽은 자신의 꿈에 잡귀가 나타난 것이 누나의 눈물을 봐서 기분이 안 좋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비슷하게 싸워야 하니, 천왕의 덩치를 저 사마귀만큼 키워 줘야겠군.”
 춘몽의 마음이 움직이자 잡귀를 맞이하던 천왕들의 덩치들이 순식간에 산처럼 커졌다.
 콰콰콰콰쾅.
 ‘크윽, 뭐, 뭐야? 이 자식 꿈의 활용이 보통이 아니잖아!’
 갑자기 자신과 비슷한 덩치로 커져 버린 천왕들과 싸우게 된 몽마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의 꿈에서도 산처럼 커다랗게 변해 그에게 맞서는 인간은 없었다.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도망치다 죽는 게 보편적이었다.
 오직 드래곤만이 브레스를 뿜으며 대항했었다. 하지만 그 드래곤도 결국은 그에게 정기와 정신력을 빼앗기고 죽었다. 물론 그 덕에 한 천 년 정도 드래곤의 몸으로 유희를 즐긴 적이 있었다.
 “고작 인간의 꿈에 들어와서 마왕 본연의 힘을 쓰게 될 줄이야! 영생의 삶 중에 이번처럼 흥미로운 이계 유희는 처음이군.”
 콰르르르릉.
 갑작스럽게 뇌성이 치고 하늘과 땅이 흔들거렸다.
 몽마는 완성된 정신체이다. 그가 꿈의 왕이라 불리는 진정한 능력을 드러내자 그를 공격하던 천왕들은 번개를 맞고 수수깡처럼 터져 버렸다.
 
 “뭐, 뭐야? 무슨 잡귀가 저렇게 강해!”
 설춘몽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몽마를 보던 중 갑작스럽게 지독한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뇌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
 몽마의 몸에서 뿜어진 번개와 검은 기운이 천왕들을 터뜨려 버린 것을 넘어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까지 지우고 있었다.
 지워진 세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깜깜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위험하다.’
 설춘몽은 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기에 비록 잡귀가 들어왔다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두통과 함께 꿈의 일부가 지워지자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게다가…….
 ‘크윽, 아무리 상상해도 지워진 세계가 다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까지 꿈이 지워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지워진 후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다시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꼭 그의 꿈 자체가 먹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컥.
 위기감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은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자 지독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도 억울한데 마지막 남은 꿈마저 저딴 사마귀 새끼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설춘몽은 상상의 부산물을 배제하고 자신이 직접 전투에 나섰다.
 화아아아악.
 그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구름 위로 머리가 치솟아 오를 만큼 거대해졌다.
 
 
 2. 몽마를 먹다
 
 “크하하, 덩치가 커진다고 해서 꿈의 왕인 나 몽마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모든 꿈의 지배자다.”
 몽마가 춘몽을 향해 손을 뻗자 세상을 찢어발기던 번개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었다.
 “크윽, 머리가 깨질 것 같군!”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춘몽은 밀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허공중에 산처럼 거대한 주먹의 형상이 만들어지더니 몽마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콰콰콰쾅.
 번개와 주먹이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번개가 폭발하자 몽마의 눈에 황당함이 어렸다.
 ‘뭐, 뭐야! 꿈에서는 절대 소멸의 권능을 발휘하는 내 번개가 어떻게 막힐 수 있는 거지?’
 태초에 몽마라는 존재로 창조됐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권능이 꿈을 잡아먹는 거였다. 또 권능을 실은 검은 번개는 그 어떤 꿈이라도 갈가리 찢어 버릴 수가 있었고 그렇게 사라진 꿈은 정기로 환원돼 그에게 흡수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검은 번개가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터졌다.
 ‘헉!’
 몽마는 더 이상 황당한 표정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번개와 함께 폭발한 줄 알았던 주먹이 여전히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자신을 향해 뻗어 오고 있었다.
 ‘서, 설마 이 자식의 정신력이 내 소멸의 권능을 능가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그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파팟.
 서둘러 옆으로 피했지만 옆구리가 한 뭉텅이 정도 뜯겨 나갔다.
 와드드득.
 뜯겨져 나갔던 살이 사라졌다.
 “뭐, 뭐야? 정신체인 내 일부가 사라졌어……. 어떻게 이런 일이”
 몽마의 감각에 사라진 옆구리 살이 꿈의 주인인 상대에게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이럴 수는 없어! 난 꿈의 지배자란 말이다!”
 몽마는 분노하며 온몸으로 검은 번개를 만들었다.
 우르르르릉. 번쩍.
 검은 번개를 창을 던지듯이 춘몽을 향해 던졌다.
 몽마의 옆구리에 한 방 먹인 춘몽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어? 두통이 수그러들었다.’
 몽마의 옆구리가 한 움큼 사라진 순간 두통의 일부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제는 두통의 원인이 저 사마귀처럼 생긴 악마 때문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을 죽여야 이 두통이 사라지겠군.’
 춘몽은 몽마를 향해 뻗었던 주먹을 회수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의 동작에 따라 몽마의 옆구리를 뜯어 버리고 나아가던 주먹이 방향을 틀어 몽마의 등을 후려쳤다.
 콰콰콰쾅.
 “커억!”
 던진 번개를 조종하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몽마는 미처 주먹을 피하지 못해 그대로 등을 얻어맞았다. 폭발과 함께 등이 터지며 폭포 같은 피를 쏟았다.
 “크윽!”
 그 순간 몽마와 마찬가지로 춘몽의 얼굴도 창백하게 바뀌었다.
 몽마가 던진 번개를 손으로 막으려 했는데 그게 뱀처럼 꾸불꾸불 휘어지며 방향을 틀어 끝내는 창처럼 배에 박혀 버렸다.
 “꾸, 꿈인데도 이런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다니!”
 몽마의 등을 후려친 덕에 두통은 훨씬 더 많이 사라졌지만 반대로 배에서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 밀려왔다.
 춘몽은 이를 악물고 배에 박힌 번개를 뽑아 몽마를 향해 던졌다.
 ‘헉!’
 등을 맞은 몽마는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번개를 봤다.
 ‘등에 난 상처 때문에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다.’
 게다가 어떻게 된 게 검은 번개의 속도가 그가 던진 것보다 훨씬 빨랐다.
 움직임이 불편한 몽마는 서둘러 전면에 방패를 만들었다.
 콰드드드득.
 검은 번개는 방패와 부딪치며 소멸했고 몽마는 팔이 역으로 꺾인 채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춘몽은 검은 번개를 뽑아낸 배에서 피가 쏟아지자 서둘러 의지를 일으켜 몸을 치료하려 했다.
 ‘어? 왜 살이 아물지 않는 거지?’
 어떻게 된 게 의지를 일으켜도 여전히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물론 창자가 끊어지는 지독한 통증 또한 여전했다.
 지금까지 십 년 가까이 의지대로 꿈을 꿔 오면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서, 설마 꿈속인데도 내 의지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섬뜩.
 갑자기 온몸이 싸늘해지는 오한이 밀려왔다. 왠지 저 악마에게 춘몽 자신이 죽으면 실제로 죽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는 서둘러 몽마를 바라봤다. 몽마는 역으로 꺾인 팔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목을 고무줄처럼 길게 늘려 입으로 춘몽의 목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언제!’
 잠시 배를 치료하려고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이 몽마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춘몽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몸을 틀었다.
 콰드드득.
 목 대신 어깨가 물렸고 순식간에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사마귀 새끼가!”
 지독한 통증에 화가 난 춘몽도 몽마의 목을 잡고 물어뜯었다.
 ‘크어어억, 이런 개자식이!’
 몽마의 눈에도 지독한 고통이 어렸다.
 그가 문 것은 상대의 어깨였지만 자신이 물린 곳은 목이었다. 고통의 강도도 다르고 어쨌거나 목은 어깨보다 더 치명적인 급소였다.
 와드드득.
 몽마는 사력을 다해 춘몽의 어깨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연약한 정신체를 가진 동물이라 고통을 당하면 비명을 지르게 되어 있다. 몽마는 이렇게 어깨뼈를 통째로 씹으면 고통 때문이라도 비명을 지르기 위해 물고 있는 자신의 목을 뱉어 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두두둑.
 몽마의 귀에 자신의 목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씹히자 춘몽도 가만있지 않았던 것이다. 똑같은 복수를 하려는 듯 몽마의 목을 같이 씹어 먹었다.
 ‘이, 이런 독종 새끼가!’
 
 @
 
 몽마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와 상대는 둘 다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손해를 보고 있는 건 그였다.
 몽마의 크기가 산 정도로 커진 것이라면 춘몽의 덩치는 머리가 구름 위로 치솟아 오를 만큼 커졌다. 춘몽이 몽마에 비해 두 배 정도 큰 덩치인 것이다.
 같이 씹어 먹으니 당연 몽마가 먼저 먹혀 사라질 판국이었다. 게다가 이 인간은 교활하게도 그의 목을 비롯해 팔다리를 먼저 먹어 치워 버렸다. 멍청하게 한쪽 어깨만 겨우 먹어 치운 몽마에 비해 움직일 수 있는 몸의 기관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젠장, 이렇게 고통을 잘 참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몽마가 간과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마족에 비해 인간은 상대적으로 고통에 훨씬 민감한 편이다. 어깨뼈가 바스러질 정도의 고통이면 보통 인간은 비명을 지르다가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놈은 어깨뼈가 통째로 다 먹힐 때까지 비명은커녕 몽마 자신의 목과 팔다리를 맛있게 먹어 치워 버렸다.
 신경이 없는 인간도 아닐진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흐뭇.
 사마귀 귀신을 전투 불능의 상태로 먹어 치운 춘몽의 눈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고통.
 사실 그에게 고통이란 건 항상 따라다니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전신의 모든 경락이 굳어 가고 피가 제대로 흐르지 못함으로 오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
 그건 마치 수천 마리의 개미가 물어뜯는 것과 온몸을 불로 지지는 것, 손톱이 빠져라 긁어도 가시지 않는 가려움이 복합적으로 함께하는 것과 같았다.
 비록 침과 탕약으로 치료를 하고 있다지만 그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의 지독한 고통을 무려 십 년 동안 겪었다. 만약 부모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하기 싫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 없었다면 진작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이놈의 몸을 먹으면 먹을수록 내 몸이 살아나고 있다.’
 춘몽이 징그러운 사마귀 귀신을 맛있게 먹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검은 번개가 박혔던 배도 어느새 정상으로 아물었다. 게다가 먹으면 먹을수록 먹혔던 어깨가 새로 자라나고 있었다. 사마귀 대가리가 씹는 속도보다 어깨가 자라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했기에 그의 몸은 다치더라도 얼마든지 재생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마귀 귀신에게 당한 상처는 어떻게 된 게 치료가 되지 않았다.
 그랬던 상처가 사마귀 귀신을 먹어 치우자 회복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의지를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일어난 일이었다.
 ‘생긴 것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맛있군.’
 춘몽은 이제 사마귀 귀신의 머리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어느새 목 아래 부분은 다 먹어 치운 것이다.
 쩝.
 사마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집어 든 춘몽이 입맛을 다시자 몽마의 눈에 간절함이 맺혔다.
 “사, 살려 줘!”
 영생의 삶을 살아왔던 몽마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나 마기야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처음 신이 창조했던 정신체는 아니었다. 지금 먹혀 소멸되고 있는 건 정신체였다. 즉 다른 의미로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지랄!”
 춘몽의 입에서 대번에 욕이 튀어나왔다.
 지금도 사마귀 귀신의 입가에는 춘몽 자신의 어깨뼈와 살점 그리고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너 같으면 살려 주겠냐?”
 “제, 제발…… 크아아악!”
 와드드득.
 춘몽은 사마귀 귀신의 마지막 남은 머리통을 과자처럼 바삭바삭 씹었다.
 꿀꺽.
 결국 머리통까지 완전히 씹어 삼켰다.
 ‘맛있다. 다음에도 이것보단 약하지만 먹음직스러운 귀신이 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꾸었던 꿈 중에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기에 많이 힘들긴 했다.
 쏴아아아.
 그때 일순간 온몸에 파도가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던 어깨와 팔이 자라났고 지금까지 한 번밖에 느껴 보지 못한 청량한 기운이 배에서 퍼져 나가 전신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어? 뭐지? 이거 마치 오 년 전쯤에 산삼 들어간 보약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네…….”
 언젠가 설설용이 금 한 관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삼 한 뿌리를 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달여 먹었던 보약이 준 상쾌한 느낌과 지금의 이 느낌이 어쩐지 비슷했다.
 꽈아아앙, 꽈아아아앙, 꽈르르르르릉!
 상쾌한 느낌에 한참 도취되어 있던 중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연속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춘몽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커어어억.”
 ‘왜 갑자기?’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
 삽시간에 전혀 알지도 못하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수많은 광경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오직 혼돈만이 존재하는 우주에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생겨나더니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로 인해 수많은 별들이 만들어졌으며 은하계와 차원이 갈라지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생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것들이 점점 자라 나무가 되고 동물이 되고 인간이 되었다.
 춘몽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길고 장엄한 우주와 차원의 역사를 보게 됐다.
 긴 역사와 함께 밀려들어오는 추측하기 힘든 방대한 양의 지식과 지혜들…….
 “끄아악…….”
 지독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던 춘몽은 자신의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
 풀썩.
 
 ‘휴우, 이제 좀 두통이 가시는군. 근데 이 알 수 없는 기억들은 다 뭐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두통에서 벗어난 후 깨어난 춘몽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귀 귀신이 품고 있던 기억들이 나에게 전이된 건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터무니없잖아?’
 생전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하고 강한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세상, 마치 지옥의 한 단면 같았다.
 사마귀 귀신은 그 세상을 지배하는 일곱 마왕 중 한 명이었다.
 의지만으로 사물을 지배하고 전투 시에는 검은 번개를 만들어 산을 관통시키기도 했다.
 ‘사마귀 귀신, 이놈도 나처럼 꿈속에서만 살다 보니 신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었나 보군.’
 춘몽은 생소한 기억들을 한참 동안 더듬어 보다가 황당한 마음에 절로 고개를 흔들었다.
 사마귀 귀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인지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허어, 세상의 모든 기운을 의지만으로 부릴 수 있다니……. 어느 정도 말이 돼야 비슷하게 꿈이라도 꿔 보지. 괜스레 사마귀 귀신, 이놈의 꿈에 동조하다가는 나도 바보가 돼 버리겠다.’
 춘몽은 고개를 흔들며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소한 기억들을 뇌리 한쪽으로 밀어 놓고 서서히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했다.
 
 @
 
 ‘어? 이상하다. 왜 오늘은 허곤 할아버지가 침 놔 주러 오지 않은 거지?’
 춘몽은 누워 있는 상태로 의문을 품었다. 물론 아직 몸이 움직이거나 눈을 뜰 수는 없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눈을 뜨려면 적어도 반 시진 정도 더 지나야 했다.
 의원 허곤이 침을 놓고 간 후 누나인 설난화가 탕약을 달여 올 때쯤이 춘몽이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거참 신기하네. 꿈에서 몽마라는 사마귀 귀신을 잡아먹은 이후로 희한하게 점점 몸의 통증이 사라지고 있어.’
 불로 지지고 개미가 물어뜯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어제 악몽을 꾸고 난 이후로 고통이 많이 감소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지금까지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런 상태만 계속된다면 정신을 따로 분리해 놓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겠는데.’
 춘몽은 의지대로 꿈을 꾸기 시작한 순간부터 몸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바로 정신과 몸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었다.
 몸이 아무리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정신을 따로 분리해 버리면 고통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꿈도 고통과 상관없이 의지대로 꿀 수가 있는 것이다.
 스멀스멀.
 그때 누나의 사뿐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춘몽의 콧속으로 익숙한 냄새가 밀려왔다.
 ‘누나가 약을 달여 오는군, 어, 그런데 오늘은 탕약 냄새가 좀 다르네?’
 하루 이틀 맡아 본 냄새가 아니기에 쉽게 구별이 되었다.
 ‘흠, 이제 드디어 일어날 시간이로군.’
 춘몽은 서서히 눈을 떴다.
 화아아악.
 차양을 쳐 놔 햇볕이 가려진다고 해도 눈을 뜰 때면 항상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처럼 눈부심이 밀려왔다.
 내일도 과연 이 눈부심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아주 짧지만 강렬한 삶에 대한 미련이 몇 번의 눈 깜빡임과 함께 태양을 맞이한 아침 이슬처럼 사라졌다.
 ‘후우, 이놈의 욕심이란.’
 “일어났어?”
 언제나 기분 좋은 누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거렸다.
 “응, 누나. 어? 근데 또 울었어?”
 춘몽은 누나를 향해 미소를 짓다가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누나가 이렇게 우는 건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분명히 그 때문에 울었을 거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더 아파 왔다.
 “누나 울지 마, 누나가 울면 내가 더 힘들어진단 말이야.”
 춘몽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팔을 들어 누나의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아파, 그만해.”
 난화는 앙상한 동생의 팔을 치우더니 탕약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허곤 할아버지가 침 놔 주러 안 오시네?”
 춘몽은 탕약을 마신 후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흑.’
 순간 난화의 눈에 또다시 습기가 차올랐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침을 맞기에, 춘몽은 허 의원이 안 온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게 알고 있었다.
 난화는 동생에게 이제 죽을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으며 의원마저도 포기했단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면 춘몽이 계속 허 의원을 기다릴 것 같아 머리와 꼬리를 떼고 결론만 말했다.
 “아, 앞으로 허곤 할아버지는 안 오실 거야.”
 춘몽은 눈치가 빠른 편이다. 누나의 말 한마디로 많은 것을 유추할 수가 있었다.
 ‘이, 이제 더 이상 침이 듣지 않는 건가?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비로소 허곤이 오지 않은 이유와 탕약의 맛이 바뀐 이유 그리고 누나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그래!”
 춘몽이 너무나 쉽게 수긍을 하자 난화도 동생이 현 상황을 눈치챘다는 걸 느꼈다.
 ‘흑.’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또다시 울컥 치솟아 오르고 말았다.
 ‘이, 이런 또 눈물이……. 고통으로 죽어 가는 춘몽이 앞에서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잖아.’
 난화는 서둘러 사발을 들고 일어났다.
 “오,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너랑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겠다.”
 씨익.
 춘몽은 억지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게 좀 있었는데 잘됐네. 어서 가서 일해.”
 “그, 그래, 푹 쉬어.”
 난화는 끝내 눈물이 쏟아지자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갔다.
 “후우.”
 누나가 나가자 춘몽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아프다고 해도 객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다.
 누나의 말과는 반대로 손님이 많지 않았다. 아니 오늘따라 손님이 다른 때보다 훨씬 적었다.
 “후우, 정말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군.”
 누나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았다. 갑작스럽게 가슴이 메여 왔다.
 설춘몽은 이상하게 자신의 몸이 아픈 것보다 지금처럼 누나나 엄마의 눈물을 보는 게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내, 내가 죽어 없어지면 지금까지 하던 수고도 사라질 거야. 못난 동생을 둬서 지지리 고생만 해 오던 누나도 이제는 조금 자유로워져야지……. 시집도 가고.”
 주르르륵.
 ‘몸에 아직도 이렇게 많은 수분이 남아 있었던가?’
 어느새 춘몽의 눈가에도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늘따라 더럽게 꿈도 꾸어지지 않는군.’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춘몽은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니지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오늘 따라 즐거운 꿈이 꾸어지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뒤숭숭하고 온갖 잡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잠깐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봤지만 아무런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자 이내 모두 지워 버렸다.
 ‘한 시진이 지나지 않은 것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건가?’
 괜히 이유를 딴 데로 돌린 춘몽은 이내 잠자는 걸 포기하고 햇볕이나 쏘이자는 생각으로 차양을 걷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거뜬.
 ‘어? 어라. 모, 몸이 왜 이리 가벼운 거지?’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이런 가벼움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평생을 따라다니던 그 지독한 고통이 절반 정도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 아까보다 고통이 훨씬 줄었다. 게다가 이런 가벼움이라면…….’
 문득 이런 가벼움이라면 침상 밖으로 몸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마룻바닥에 발을 내디뎌 봤다.
 가벼움은 여전했고 침상 밖으로 나와 똑바로 섰음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물론 삐쩍 마른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서, 섰다.”
 두 발로 섰다는 게 보통 사람에겐 평범한 일이지만 춘몽에겐 하나의 커다란 기적이었다.
 ‘내, 내가 두 발로 설수가 있다니. 호,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는 당연히 기뻐해야 함에도 너무 큰 기적이기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혹시 아직도 꿈을 꾸고 있지 않나 생각될 정도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꿈이라면 다리가 이렇게 후들거릴 리가 없지.’
 이건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다.
 ‘지금이라면 걸을 수도 있겠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휘청.
 하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예전 아프기 전 다섯 살 때와는 다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어, 어, 어…….”
 풀썩.
 비틀거리다 끝내는 주저앉아 버렸지만 춘몽의 얼굴엔 오히려 미소가 어렸다.
 “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좀 전에 중심을 잡아 보려고 휘청일 때 느꼈다. 분명 크게 원 한 번 그리기도 힘든 팔이 허공을 서너 번은 허우적거렸던 것이다.
 와락.
 침상 모서리를 잡자 예전에는 없던 완력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도와줄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충분히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끄응, 삐쩍 마른 몸이 더럽게도 무겁군!’
 춘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의 힘으로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약사발을 들기도 힘겨웠던 손이 그보다 몇 배는 무거운 그의 몸을 끌어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걷기.
 춘몽은 몇 번을 휘청거리다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일다경 정도가 지나자 땀을 뻘뻘 흘리긴 했지만, 세 평 정도 되는 객실 안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3. 유체이탈과 꿈의 통로
 
 불과 이십여 걸음 정도 걸었을 뿐인데 춘몽은 지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보통 잠들면 정신없이 깊은 꿈나라로 빠져 들어가는 법인데 춘몽은 예외였다. 잠들어 몸은 수면의 상태지만 의지대로 꿈을 꿀 수 있기에 정신은 멀쩡했다.
 ‘내일은 객실 밖으로 나가서 부모님과 누나에게 내가 걸을 수 있다는 걸 자랑해야지.’
 춘몽은 사실 몇 번 넘어지고 난 후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누나와 부모님을 불러 자신이 걸을 수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지만, 혹여 그게 오늘은 되고 내일은 안 되면 몇 배로 실망할 것 같아 참았다. 만약 내일도 걷는 게 가능하면 당당하게 걸어가 누나와 부모님을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네?’
 꿈에서 사마귀 귀신을 잡아먹은 후 신기하게도 십 년간 겪어 왔던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벌써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사실, 춘몽은 모르고 있지만, 태초에 신에게 직접 창조됐던 몽마의 정신체가 그에게 먹힘으로 인해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 복속되어 완전한 육체를 복원하는 권능을 몸의 주인에게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춘몽은 통증이 사라진 원인은 모르지만 고통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문득 또다시 지난 꿈이 생각났다.
 ‘확실히 보통 잡귀는 아니었어!’
 돌이켜 보니 전날의 꿈은 너무도 생생해 자칫하면 그가 꿈에서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영영 죽을 수도 있었다는 황당한 생각까지도 들었었다.
 ‘몽마라고 했던가? 꿈의 악마라! 참, 거창한 이름을 가져도 될 만큼 대단하긴 했어.’
 스르르륵.
 그때 춘몽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던 빛의 양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벌써 해가 지고 있군. 이제 저녁 식사 손님과 술손님들이 올 시간이네.’
 투닥투닥. 쿵쿵쿵.
 춘몽의 예상대로 손님 들어오는 소리와 주문받는 소리 그리고 요리하며 나는 소음들이 일 층에서부터 들려왔다.
 ‘오늘은 이곳 이 층으로 어떤 손님들이 올라오려나?’
 통상 일 층은 술과 밥 손님이 대부분이었고 물결의 출렁임에 따라 별빛과 달빛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민강의 야경이 보이는 이 층은 차를 마시거나 가볍게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즐기는 연인들 위주였다.
 왁자지껄. 하하하…….
 ‘어? 오늘 이 층으로 올라오는 손님들은 꽤 요란하네?’
 계단을 밟는 발자국 소리도 무거웠고 숫자도 열 명쯤은 되는 것 같았다.
 점소이 강삼과 손님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공자님들 이쪽 창가가 저희 청풍객잔에서 가장 전망이 좋습니다.”
 “크하하하, 오늘 본 공자가 먼 이곳까지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이리로 다른 잡것들이 올라오면 안 되느니라. 알겠느냐!”
 ‘이 층을 통째로 빌려 버린 모양이군. 누구지? 몇 번 들어 본 목소리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술과 안주는 최고급으로 알아서 가져오고 이건 행하行下다.”
 행하는 술집이나 기루에서 술값 이외에 점소이나 기녀에게 봉사료로 주는 돈이었다.
 제법 큰돈을 받았는지 놀란 듯 강삼의 목소리가 커졌다.
 “해, 행하로 이렇게나 많이 주시면 부담스럽습니다.”
 “새끼, 놀라기는. 귀한 손님을 모셔 왔으니 특별히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신경 쓰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강삼이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청년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다.
 춘몽은 저 청년들을 이끌고 온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서른이 다 돼 가는 점소이 강삼을 아무렇지 않게 새끼라고 부르는 놈은 수많은 손님 중 딱 한 놈밖에 없었다.
 ‘싸가지 없는 말투하며…… 웅현 진주언가장의 둘째, 개망나니 언소추로군.’
 하북 안평현에는 진주언가의 본가가 있고, 이곳 웅현현에는 그 진주언가의 지부인 웅현 진주언가장이 있었다.
 진주언가는 정사正邪 중 사邪 쪽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문파로 내기를 격발시켜 순간적인 폭발력을 내는 언가권과 배교의 술법을 기반으로 한 강령이나 강시 제조에 능했다.
 약 백 년 전, 환희밀교와 함께 중원 이대신비문파 중 하나인 배화교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그들은 배화교라는 신비 문파와의 연관성 때문인지 정파나 오대세가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중소 문파나 작은 상단들은 진주언가장에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횡포를 빈번하게 당하고 있는 게 현 실정이었다.
 언소추는 그 웅현현 진주언가장의 장주 언명우의 둘째 아들로 형 언대추와 마찬가지로 세간에 개망나니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자였다.
 참고로 웅현현 진주언가장은 세간엔 부적을 만들어 팔거나 사람이 죽었을 때 염을 해 주고 제를 지내는 장의사 무리로 알려져 있지만 뒷골목 왈패들 사이에서는 사파에 가까운 무림 도장으로, 주로 사채와 밀매를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언소추가 같이 온 일행 중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부진 인상의 청년에게 잔을 내밀어 한가득 술을 따랐다.
 “동철 형님, 참으로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언소추는 술을 따르며 주변에는 들리지 않게 동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아픈 노모 그대로 죽어 가도록 놔둘 작정은 아니지 않소? 본 가에서 빌려 간 사채와 이자까지 모두 탕감해 주고 앞으로 들어갈 약값 조로 금 한 관을 줄 테니 딱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쇼.
 남은 사채를 모두 청산해 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들어갈 돈까지 준다는 말에 잔뜩 찡그리고 있던 동철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는 술을 단번에 털어 넣은 후 언소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랜만이긴 하군, 너도 술 한 잔 받아라.”
 -그녀가 그렇게 좋으냐?
 동철과 언소추는 겉으론 평범한 대화를 하면서 속으로는 계속해서 둘만의 은밀한 전음을 주고받았다.
 -좋다 뿐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건드렸던 계집들은 아미일화 한묘경에 비하면 썩은 호박꽃입니다.
 -그렇게 좋으면 이런 비열한 방법보다는 차라리 순수하게 사귀자고 해 보는 게 낫지 않느냐?
 피식.
 -형님도 참, 말이 되는 소릴 하쇼. 세간에 알려진 내 평가가 개망나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그녀도 귀가 있는데 나에 대한 소문을 못 들었을 것 같소.
 -그러게 왜 인생을 그딴 식으로 사냐?
 와락.
 순간 언소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철문도 동철 형님, 아무리 제가 형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참견이 지나치면 다치는 수가 있소. 말을 조심하쇼.
 -아, 알았다. 내가 잠깐 말실수를 했다.
 동철의 입장에선 언소추나 그 패거리는 무섭지 않지만 뒷배경인 진주언가장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크흠, 그건 됐고. 어떡할 거요?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면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려면 확실히 약조를 하쇼.
 -정말 그녀가 새벽 수련할 때 찾아가 싸워서 녹초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녀를 녹초로 만든 이후에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나머진 형님이 걱정할 것 없소.
 -조, 좋다. 그 약속 꼭 지키리라 믿는다.
 -어차피 내 품에 들어온 이후엔 그녀에게 형님을 원망할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오.
 -크흠, 사실 나도 아미파의 난피풍검이 소문처럼 날카로운지 궁금하긴 했다.
 “역시 화통하십니다. 애들아 뭐하냐. 형님 잔에 술이 떨어지지 않았느냐!”
 갑자기 언소추가 다른 이들을 닦달하자 서둘러 동철의 잔에 술이 따라졌다.
 
 이 층 구석, 문이 잠긴 객실에 누워 있던 춘몽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이 모기처럼 왱왱거리는 듯하면서 뚜렷하게 들리는 소리는 뭐지?’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속에 섞여 있는 가늘고 긴, 작은 소리였지만 어떻게 된 게 춘몽의 귀에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구분되어 들리고 있었다.
 ‘거참, 이상하네. 어제부터 내 몸이 꼭 내 몸이 아닌 것 같더니 이제는 예전엔 들리지 않던 이상한 소리까지 들리네.’
 사람들의 대화 소리보다 모기처럼 가늘고 긴 소리에 관심이 더 갔다.
 청력을 집중하자 모기처럼 가늘고 긴 소리가 신기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철문도 동철이라니, 어찌 그가 언소추 같은 놈과 어울리는 거지?’
 춘몽은 현재까지 동철과 언소추가 나누는 대화의 비술이 전음이라는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절기인 줄은 몰랐다.
 둘의 전음을 엿듣던 춘몽은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알기로 철문도 동철은 북경에 있는 하북팽가의 방계제자쯤 되는 자로 이곳 웅현현에서 상대할 자가 별로 없는 도법의 고수였다. 언소추 같은 개망나니와 어울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아미일화 한묘경은 이곳 청풍객잔에서 술을 먹는 손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언급할 정도로 하북 일대에서는 소문난 미녀였다.
 ‘아미일화 한묘경을 언급했어! 저 망나니 새끼가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거지? 동철이란 자의 사채를 청산해 주고 금 한 관까지 줄 정도면 보통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동철 형님, 새벽에 거사를 치르려면 미리 푹 자 두어야 할 테니 먼저 올라가서 주무십쇼.”
 “알았다.”
 언소추는 강삼을 불러 삼 층 객실을 예약한 후 동철을 먼저 올려 보내고 자신은 다른 일행들과 술을 마셨다.
 잠시 후 강삼이 동철을 객실로 안내해 주고 돌아왔다.
 언소추는 그런 강삼에게 뭔가를 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내가 잘 특실은 신방처럼 꾸며 놓고 곳곳에 이 사향을 뿌리도록 해라.”
 특실은 다른 객실에 비해 특별히 방음장치가 잘돼 있는 방이었다.
 “사, 사향을요? 이곳은 기방이 아닌데…….”
 “왜? 기방이 아니면 계집을 끼고 잘 수 없는 거냐?”
 “그, 그건 아니지만.”
 “잔말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해.”
 “아, 알겠습니다.”
 강삼은 언소추의 명령으로 다시 삼 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강삼이 삼 층으로 사라진 후 언소추와 그 일행들이 전음으로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전음이란 건 귓속말의 발전된 형태이기에 내공을 지닌 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사용할 수가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고수는 몇십 장 떨어진 먼 거리에서도 전음을 나눌 수 있는 반면 하수는 지금처럼 일 장이나 이 장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만 전음을 나눌 수 있었다.
 -대형, 말씀하신 춘약 여기 있습니다.
 -흠, 좋은 걸로 준비했구나.
 -천상의 꽃을 꺾는 일인데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크크, 고생했다.
 -대형, 그나저나 동철이 저놈이 아미일화와 양패구상하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저희만으로 놈을 죽이기에는 조금 버거울지도 모릅니다.
 -천상의 꽃을 내 마누라로 얻는 일인데 나라고 가만히 있겠느냐. 나도 손을 쓸 생각이니 동철이 놈이 살아서 제 노모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형께서 직접 나서시겠다니, 저희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모두 기루에 데려가 원하는 만큼 계집을 붙여 주겠다.
 -감사합니다, 대형.
 “하하, 이거 우리도 그만 마시고 올라가서 자자.”
 “네, 대형.”
 언소추와 그의 아우들이 나눈 전음까지 듣게 되자 춘몽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동철과 아미일화가 대결을 끝내면 언소추와 그 일행이 동철을 죽이고 아미일화는 이곳 청풍객잔으로 납치해 와 겁탈을 할 것 같았다.
 춘몽이 특별히 의협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언소추가 하려는 일이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겁탈을 하려는 장소가 자신의 청풍객잔이다 보니 더욱 신경이 쓰였는데 훗날 예상치 못한 피해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혹여 언소추 저놈에게 겁탈을 당한 아미일화가 자결이라도 한다면 아미파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객잔에 아미파의 고수들이 들이닥쳐 진상을 조사한다고 난리를 치겠지.’
 언소추가 형수 될 사람이라고 떠벌리는 걸로 봐서는 아미일화를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꿈일 뿐이고 아미일화가 그대로 끌려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명문정파의 제자인 그녀라면 복수를 하거나 자결을 할 거라는 게 춘몽의 생각이었다.
 춘몽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이 사실을 아빠나 누나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그는 현재 누구를 부르거나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 깨어 있을 수 있는 한 시진이 이미 지나서 다시 그 시간이 오려면 아직도 여덟 시진이나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이면 언소추 무리가 계획한 일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춘몽은 다급한 마음에 어떻게 해서든 몸을 움직여 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눈꺼풀조차 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걷기까지 했다. 고작 이십여 보 정도지만 그 육체적 피로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몸에 많은 무리를 주었다.
 ‘제발, 제발!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 썩을 놈의 몸아 좀 움직여라!’
 춘몽은 집안에 우환이 닥치리라는 걸 아는데도 움직일 수 없자 저주받은 자신의 몸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할! 제발 좀 움직이란 말이다!’
 그는 내심으로 절규하며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썼다.
 ‘…….’
 생전 처음 해 보는 극한에 가까운 정신 소모와 몸부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아아아악.
 어느 순간 갑자기 뭔가가 뻥 뚫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튕기듯 솟아올랐다.
 ‘우, 움직였다.’
 드디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 일단 몸이 움직였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다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이제는 당장 누나나 부모님에게 걸어가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었다.
 춘몽은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온 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휘리리릭.
 손목이 가볍게 돌아갔다. 하지만…….
 멍.
 춘몽의 동작은 거짓말처럼 멈춰 버렸다.
 문고리를 잡은 손목은 돌아갔지만 문고리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스르르륵.
 거짓말처럼 손이 문고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득 섬뜩한 가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서, 설마!’
 춘몽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문고리, 아니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손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홱.
 춘몽의 고개가 팽이처럼 자신의 침상을 향해 돌아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삐쩍 마른 또 하나의 춘몽이 잠든 듯 누워 있었다.
 멍.
 ‘서, 서, 설마 내가 주,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의원이 침놓는 걸 포기했던 일, 탕약의 맛이 바뀐 일, 누나가 연이틀 토끼 눈이 되도록 울었던 일 등등.
 ‘오늘 하루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힘을 낸다는 회광반조 같은 현상이었나?’
 춘몽은 걸을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걸을 수 있게 된 걸 가족에게 자랑하지 않음으로 해서 희망을 주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실감 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상은 분명 육체를 빠져나온 혼이 자신의 죽은 몸을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허허, 십 년을 침상에서만 누워 지내더니 겨, 결국은 내가 주, 죽었구나!’
 이제는 객잔의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현실도 왠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너무 큰 충격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 죽음이란 게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구나!’
 춘몽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침대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림자처럼 그의 손은 얼굴을 통과해 들어갔다 나왔다.
 온 마음이 허무감으로 가득 찼다.
 ‘겨, 결국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로구…… 어?’
 흠칫.
 뭘 봤기 때문일까? 순간 춘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어떻게 죽었는데 숨을 쉬고 있는 거지?’
 황당하게도 죽었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몸이 코로 숨을 쉬고 있었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계속 반복했다.
 ‘서, 설마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건가? 그런데 어떻게 혼백이 몸 밖으로 빠져나온 거지?’
 의문이 연속해서 들었지만 답을 해 줄 사람은 없었다.
 ‘호, 혹시! 그래, 아직 죽은 게 아닐지도 몰라. 꿈처럼 잠시 내 혼백이 밖으로 나온 것뿐이야. 지금이라도 빨리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거야.’
 춘몽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죽은 듯 숨 쉬고 있는 몸 위에 서둘러 반듯하게 누웠다.
 쏴아아아아…….
 파도치는 듯한 소리가 나며 허무했던 모든 감각들이 사라지고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연결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일체감이 들기 시작했다.
 피부를 덮고 있는 옷과 이불의 느낌, 여전히 떠지지 않는 눈꺼풀, 앙상하게 마른 몸과 축 처진 몸뚱이, 미약하지만 혈관 속을 꾸준히 흐르는 피의 흐름, 쿵쿵거리는 심장과 맥박들의 소리까지.
 몸의 모든 감각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 죽은 게 아니었어……. 자, 잠깐, 죽은 게 아닌데 어떻게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지?’
 죽지 않았다는 기쁨이 끝나자 다시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혹시 노력하면 조금 전처럼 또다시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몸은 죽지 않고 잠자듯 숨 쉬고 있었잖아. 만일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텐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기에 포기하고 있었던 것들이지만 조그만 가능성을 발견한 지금은 이대로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용암처럼 뜨거운, 강한 열망이 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춘몽은 강한 열망을 담아 다시 한 번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나 시도를 해 봤다.
 콱.
 하지만 뭔가 단단한 껍질이 둘러싸고 있는 듯 꽉 막힌 기분만 들 뿐 기대했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그냥 일시적으로 한 번 일어났던 현상인가? 아냐 내가 지금 무슨 나약한 생각을……. 분명히 겪었던 일이니 끝까지 노력하면 틀림없이 될 거야.’
 춘몽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갔던 상황을 되새겨 봤다.
 ‘…….’
 얼마쯤 생각했을까. 한 가닥 실마리가 떠올랐다.
 ‘설마 다급했기 때문에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가는 게 가능했던 것인가?’
 순전히 혼자만의 가설이었으나 그것밖에 마땅한 근거가 없었다.
 춘몽은 의지로 다급한 마음을 일으키며 혼백이 몸 밖으로 나갈 수 있게 애를 썼다.
 파삭.
 처음엔 잘되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 애를 쓰자 뭔가 얇은 막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상체가 일으켜졌다.
 화아아악.
 또다시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춘몽이 고개를 숙여 보니 잠자는 듯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서, 성공했다. 이, 이렇게 다급한 마음을 담아 애를 쓰면 혼백이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군.’
 신기한 경험을 해서인지 원인 모를 희열이 생겼다.
 춘몽은 그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혼백을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가 빼내기를 반복했다. 한두 번이 어려웠지 여러 번 하다 보니 쉽게 몸과 혼백의 분리가 가능해졌다.
 발도 바닥을 밟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그의 무의식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을 뿐 실상은 혼백 전체가 문이나 바닥 천장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춘몽은 신기한 능력이 생기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부터는 세상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얼마 후 머릿속에 소추 일행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런 혼백의 상태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춘몽의 혼백은 언소추와 동철이란 자의 얼굴이나 보자는 심산으로 객실 밖으로 나갔다.
 ‘없네? 설마 벌써 삼 층 객실로 들어간 건가?’
 순간 그는 자신이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동안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춘몽은 유령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이 층 천장을 통과해 삼 층 객실로 들어갔다.
 삼 층 객실은 열다섯 개의 방 중 두 개의 큰 방과 하나의 특실이 있는데 언소추는 특실, 두 개의 큰 방은 언소추의 동생이란 자들, 마지막으로 동철은 일반 객실에서 자고 있었다.
 춘몽은 방을 뒤져 그들을 찾아낸 후 언소추 일행과 동철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내려다봤다.
 적당히 마신 술 때문인지 모두들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저 고급 옷을 입은 놈이 언소추고 큰 대감도를 품고 자는 놈이 동철이겠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대충 두 사람이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놈들을 혼내 줄 방법이 없을까?’
 혼백의 상태이긴 하지만 도덕적 양심이나 객잔의 안위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었다.
 ‘호, 혹시 내가 저놈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유체이탈을 몇 번에 걸쳐 경험했기에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어, 근데 저 구멍은 뭐지?’
 그때 춘몽의 눈에 언소추의 양미간 사이에 뚫려 있는 구멍이 보였다. 실제로 피부가 뚫려 있는 건 아니고 혼백의 눈을 가진 춘몽에게만 보이는 구멍이었다.
 ‘분명 보기에는 작은데 엄청 큰 문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뭐지? 마치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가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달랐기에 일단 의구심이 들었지만 시도는 해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꼭 어서 들어오라고 반기는 문 같단 말이야…….’
 춘몽은 혹시나 하며 언소추의 미간 사이에 뚫려 있는 구멍에 발을 올려 봤다.
 스르르륵.
 예상대로 작은 구멍이지만 들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미끄러지듯이 춘몽은 언소추의 몸 안으로 쉽게 들어갔다.
 화아아아악.
 ‘어? 이게 뭐지?’
 언소추의 몸 안으로 들어간 춘몽은 일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몸에 들어갔을 때와 같이 정신과 몸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눈앞에 봄 들판을 연상시키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하아아악, 흐흠…….”
 “아잉, 아아아…….”
 그리고 그 꽃밭 속에서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이상야릇한 신음이 들렸다.
 “서, 설마 내가 이놈의 꿈속으로 들어온 건가?”
 일단 드는 생각이었지만 왠지 그게 확실한 것 같았다.
 꽃밭을 헤치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걸어가자 벌거벗은 남녀들이 뱀처럼 한데 엉켜 있는 게 보였다.
 다섯 살 이후로 계속 아파 누워만 있었던 춘몽이라 할지라도 저 장면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정도는 알았다. 다만 눈으로 그런 걸 처음 봤기에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남자 한 명에 여자 세 명. 남자는 언소추였고 세 명의 여자는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그중 한 명의 여자는 자신이 꿈에서 만든 선녀에 버금갈 정도로 예뻤다.
 춘몽이 뻔히 보고 있음을 느낀 건지 여인들과 뒹굴고 있던 언소추가 벌떡 일어나더니 검을 꺼내 들고 춘몽을 겨냥했다.
 “넌 뭐하는 개자식이냐!”
 순간 춘몽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어? 너 내가 보이냐?”
 “이런 미친놈, 감히 겁도 없이 본 공자의 운우지락을 방해하다니, 단칼에 목을 베어 주마!”
 언소추는 단번에 십여 장을 날더니 춘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뭐야? 꿈에서 검을 휘두르는데 뭐가 이렇게 조잡해!”
 자신이 꿈속에서 무공 고수 역할을 하며 천하를 제패했을 때는 한주먹에 산과 바다를 갈랐었다. 고작 저렇게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남의 꿈인데 내 맘대로 되려나?”
 춘몽은 어차피 해 보다 안 되면 훌쩍 뛰어 저 위에 나 있는 구멍으로 도망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험적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콰르르르르릉.
 순간 천지가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중에 커다란 권형이 만들어져 언소추를 향해 뻗어 나갔다.
 “되네.”
 “허억!”
 언소추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초, 초절정고수! 이자,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언소추는 죽어라 몸을 틀며 검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 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크아아악!”
 그러나 서둘러 피한다고 피했지만 조금 늦었는지 권형에 스치고 말았고, 그 덕에 검과 함께 오른팔이 사라져 버렸다.
 여풍에 휩쓸려 십여 장을 날아간 언소추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꾸역꾸역 피를 토해 냈다.
 주먹을 뻗었던 춘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언소추 저놈은 자신의 꿈속인데도 더럽게 무기력하네. 나 같으면 당장 팔과 검을 재생시키고 산도 갈라 버릴 무공을 펼칠 텐데?”
 하지만 춘몽이 기대한 것과 다르게 언소추는 아직도 피를 토하고 있을 뿐 여전히 일어나질 못했다.
 화아아아악.
 한순간에 안개가 걷히듯, 어느새 꽃밭의 정경과 함께 벌거벗고 있던 여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황량한 벌판엔 고통으로 떨고 있는 언소추만 있을 뿐이었다.
 “고작 이런 정도의 고통에 상상이 바뀌어 버리다니, 꿈에 대해 나처럼 능하지 않은 건가? 뭐, 어찌 됐든 여기서라도 싸가지 없는 네놈을 실컷 괴롭혀 줘야겠다.”
 춘몽은 아직도 피를 토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언소추를 사정 봐 주지 않고 두들겨 패 버렸다. 물론 잠깐 꿈속이기에 ‘죽여 버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 열다섯 살의 어린 춘몽인지라 살인의 의욕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우, 속이다 후련하군.’
 개구리처럼 뻗어 버린 언소추를 내려다보던 춘몽은 허공중에 있는 구멍을 통해 꿈에서 빠져나왔다.
 ‘어? 꿈에서 두들겨 맞은 게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나?’
 춘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언소추를 내려다봤다. 그는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입으로는 연방 미약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척 봐도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오호라, 이런 효과가 있었군. 잘됐다.’
 춘몽은 언소추가 자고 있는 특실에서 나와 그의 일행들이 자고 있는 큰 객실로 들어갔다.
 ‘소추라는 놈을 대형이랍시고 따라다니는 이놈들도 인간쓰레기이긴 마찬가지. 모두 혼쭐을 내 줘야지.’
 잠시 후 춘몽은 그 일행들의 꿈속을 다 돌아다니며 지독한 악몽을 꾸게 만들어 줬고 마지막으로 동철의 몸으로 들어가려 했다.
 번쩍.
 그 순간 동철의 눈이 떠졌다.
 막 동철의 몸으로 들어가기 위해 양미간의 사이의 구멍에 발을 집어넣고 있던 춘몽은 자신의 발이 강한 반탄력에 의해 튕겨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잠에서 깨 버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건가?’
 어느새 동철의 이마에 뚫려 있던 구멍은 사라지고 없었다.
 “크흠, 술을 마셔서 그런가? 두통을 느껴 보기는 참으로 오래간만이군.”
 동철은 가볍게 고개를 털더니 이내 창가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어? 사람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나네?’
 춘몽은 신기하단 표정으로 동철의 몸을 살폈다.
 호흡에 따라 아지랑이 같은 뿌연 것들이 동철의 몸에서 피어났다가 코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이게 무인들이 사용한다는 내공인가?’
 춘몽은 동철의 몸 주위에 아른거리는 기운들을 손으로 만져 봤다.
 ‘어? 이게 내 손에 묻네?’
 신기하게 지금까진 물체를 만지거나 사람을 만져도 아무런 감각이나 반응이 없었는데, 동철의 몸 주위를 어른거리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먼지가 묻은 것처럼 손에 들러붙었다.
 탈탈.
 어떻게 된 게 손을 흔들었지만 한 번 붙은 그것은 떨어지지가 않았다.
 ‘뭐야, 떨어지지가 않네?’
 번쩍.
 그때 동철의 눈이 떠졌다.
 “후우, 이제 약속을 이행할 시간이로군.”
 동철은 검은 천을 꺼내 복면을 하더니 대감도를 허리에 차고 훌쩍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헉! 여기는 삼 층인데!’
 춘몽은 깜짝 놀라며 서둘러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동철은 사뿐하게 지상으로 착지하고 있었다.
 ‘무림 고수라 그런가, 이런 높이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발목조차 삐질 않네.’
 동철이 어느 한 곳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자 호기심이 일어난 춘몽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동철의 속도가 무척 빨랐지만 혼백의 상태로 하늘을 나는 춘몽은 아무런 무리 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혹시 한묘경이라는 그 여자에게 가는 것인가?’
 정확히 동철과 언소추 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전음 내용을 통해 대충 유추가 되긴 했다.
 ‘따라가 보면 확실히 알겠지.’
 동철이 가다가 멈춘 곳은 청풍객잔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갈대 평지 근처였다.
 갈대가 많기도 하지만 곳곳에 연인들이 오락을 즐길 만한 평지도 제법 있는 곳이었다.
 쉭쉭…….
 동철이 다가간 곳에는 선녀처럼 예쁜 여자가 검을 휘두르며 새벽 수련을 하고 있었다.
 쿠웅.
 춘몽은 한묘경을 보는 순간 혼백의 상태임에도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화아아아악…….
 온 세상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시야에 한 명의 선녀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꿈에서 환상으로 만들었던 선녀들은 지금 보이는 저 한묘경이란 여자에 비하면 평범하다 못해 박색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이 천상의 꽃이니, 하북 제일의 미녀니, 하는 말을 듣긴 했지만…….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아니 저 정도라면 아름답다는 단순한 표현을 훨씬 넘어섰다.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있구나!’
 동그랗게 떠진 춘몽의 눈은 못이라도 박힌 듯 한묘경에게 고정되어 버렸다.
 ‘언소추, 이 개자식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꿈에서 고작 그 정도로밖에 상상하지 못하다니!’
 문득 언소추의 꿈속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있던 한묘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꿈속의 그 여인은 그녀의 얼굴만 빌려 갔을 뿐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는 고고한 천상의 꽃 같은 분위기는 하나도 살려 내지 못했다.
 ‘누나에겐 미안하지만 한묘경이 최소한 열 배, 아니 구십 배쯤 더 아름답다.’
 동철은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누구냐?”
 검무를 추며 수련을 하던 한묘경은 동작을 멈추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동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4. 기적
 
 ‘끄응, 예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언소추, 그놈이 모든 사채를 청산해 주고 금을 한 관이나 내놓을 만하군.’
 꿀꺽.
 복면을 한 동철은 한묘경의 뛰어난 외모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복면 때문에 그런 모습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크흠, 내, 내가 지금 무슨 헛생각을……. 지금은 아름다움에 현혹될 때가 아니잖아.’
 머리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은 동철은 서둘러 대감도를 꺼내 들었다.
 “그대가 아미파의 속가제자 중 최고의 미모를 자랑한다는 천상의 꽃, 한묘경인가?”
 한묘경은 새벽 수련 하는 중에 갑자기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쓴 놈이 나타나 대뜸 흉기를 꺼내 들자 반사적으로 마주 검을 겨냥했다.
 “웬 놈이냐?”
 그녀의 입장에서 복면을 쓰고 무기를 꺼내는 저런 자는 무조건 악당이었다. 그녀의 몸과 검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동철도 마주 기세를 피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속가에 전하는 절기 중 최고라는 아미파의 난피풍검을 견식해 보고 싶었지.”
 언소추의 의뢰를 받고 일을 하는 입장이라 동철은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의뢰의 내용대로 그녀를 녹초로 만들어 놓고 자리를 뜨면 그의 할 일은 다 하는 것이 된다.
 쿠쿠쿵.
 동철의 도에서 뿜어지는 묵직한 기운이 새벽 공기를 진탕시켰다.
 ‘뭐, 뭐야, 공기의 흐름이 바뀌다니. 이자, 보기와 달리 만만한 자가 아니잖아.’
 한묘경은 상대의 도에서 복면 쓰고 여자를 희롱하는 악당 따위가 풍길 수 없는 강한 기운을 느끼곤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미, 미친놈치고는 꽤 강한 기운……. 평상시 그런 무력으로 여자를 함부로 희롱했나 본데,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한편으론 저 정도의 수련을 한 자가 아녀자를 희롱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무인으로서의 분노가 치솟았다.
 파파파팟…….
 동철을 향해 훌쩍 뛰어오른 한묘경이 모이를 쪼는 닭처럼 검을 현란하게 뻗어 동철을 찌르려고 했다.
 ‘내 기운을 정면으로 받고도 전혀 위축됨이 없다니, 사정을 봐주면서 해야 하는데……. 젠장, 자칫 내가 다칠 수도 있겠군.’
 동철은 한묘경의 검을 보며 내심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어찌 됐든 내키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휘우우우웅.
 순간 그의 대감도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한묘경의 검을 튕겨 냈다.
 “차압!”
 한묘경은 동철의 대감도에 튕겨진 검을 회수하며 우아하게 몸을 틀었다.
 ‘난피풍검亂披風劍 제삼 초 난호접蘭胡蝶!’
 난초에 가볍게 앉은 나비를 뜻하는 난호접. 하지만 이 초식은 이름과 달리 가볍지 않았다. 난초는 상대의 심장을 뜻했고 가볍게 앉은 나비는 검을 뜻했다.
 심장에 가볍게 날아 앉는 검. 생을 취하는 살검이었다.
 동철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화려함 속에 이런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다니. 역시 아미파의 절기로군!’
 난호접이 무서운 절기이긴 하지만 동철 또한 이십 년 가까이 팽가에서 도법을 수련한 자였다. 그는 초식의 현란함을 따라잡진 못하지만 그걸 단번에 튕겨 낼 수 있는 패력이 있었다.
 콰드드드득.
 대감도에서 일어난 강맹한 기운이 난호접의 화려함을 단번에 깔아뭉개며 부숴 버렸다.
 ‘어, 엄청난 패력! 정면으로 맞서면 내가 불리하다.’
 난호접이 실패했음에도 한묘경의 눈빛은 오히려 더 투지로 불타올랐다.
 팽그르르…….
 한묘경은 동철의 대감도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밀려오는 거력을 회전함으로 흘려보내며 계속해서 난피풍검의 절기를 펼쳤다.
 콰콰콰콰콱.
 이번에는 눈을 찔러 가는 검. 동철의 도가 면을 드러내며 눈을 보호했다.
 
 ‘우와, 저게 말로만 듣던 무인들의 싸움인가!’
 춘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이 꿈속에서 상상으로 무공 고수를 하며 천하를 질타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상상으로 만들었기에 산과 바다를 가르는 강맹함은 있었지만 지금 저 두 사람처럼 ‘과연 인간의 몸으로도 저런 움직임과 속도가 가능하구나!’ 하는 감탄이 나올 만한 동작은 없었다.
 사실 춘몽은 사람의 몸이 저렇게 움직일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는 막연한 상상의 빈약함과 실전의 처절함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춘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두 사람의 대결을 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한묘경의 검은 가벼움과 우아함 속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고 동철의 도는 빠름과 경쾌함 속에 무거움을 담고 있구나!’
 각자의 신체 특성과 무기에 맞게 특화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지만 어느 한쪽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콰콰쾅.
 “크윽.”
 “꺅.”
 한묘경의 검이 동철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고 동철의 도는 그녀의 허벅지를 베었다.
 춘몽은 두 사람의 대결이 점점 치열해지고 그녀가 실제로 피가 튀는 부상을 입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대결을 보며 놀라는 것이 전부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 기분이군.’
 피 튀기는 치열함에 보는 춘몽이 되레 실제로 싸우는 사람인 양 움찔거렸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의 몸에 생기는 부상이 늘어났다. 동철은 옆구리와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렸고 한묘경은 허벅지와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훌쩍.
 그때 갑자기 한참 싸우던 동철이 몸을 뒤로 빼더니 삼 장여를 물러났다.
 “역시 아미파의 절기 난피풍검! 잘 구경했소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기더니 냅다 도망가 버렸다.
 “이, 이런 미친놈, 멈춰라!”
 한묘경은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인상을 쓰며 동철의 뒤를 쫓았다.
 “크으으윽!”
 하지만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지 얼마 못 가서 멈추고 말았다.
 “미, 미친놈의 새끼!”
 한묘경은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옷을 찢어 자신의 상처를 싸매곤 서둘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춘몽은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대결의 치열함과 동작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계속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후우, 부럽다.’
 자신도 해 보고 싶었지만 해골같이 삐쩍 마른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없는 부러움만 밀려왔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춘몽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부러움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
 
 눈 밑으로 검은 테두리 같은 것이 생겼고 온몸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점심나절이 다 되어서 일어난 언소추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언소추는 서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춘약을 바라봤다. 새벽에 한묘경에게 내상약이라 속이고 먹이기 위해 준비했던 그것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느, 느, 늦잠을 자 버리다니!”
 아미일화 한묘경을 취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계략을 짜고 준비를 했던가. 그런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세상모르고 자 버리다니, 이건 그에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크아아아악, 어떻게 이런 일이!”
 언소추는 발광하다시피 들고 있던 춘약을 바닥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드르렁, 드르렁, 커푸우 푸우우…….
 그때 옆방에서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언소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바로 옆 큰 방에서 단체로 자고 있는 놈들은 그가 부하라며 데리고 다니는 ‘아’씨 성을 가진 패거리였다.
 “으아아악! 아일, 아이, 아삼! 이 멍청한 새끼들…….”
 그가 설혹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들은 그를 깨워 계획했던 거사를 치르게 했어야 맞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 언소추는 속에서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쾅쾅…….
 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야 이, 개새끼들아. 당장 튀어 오지 못해!”
 “헉!”
 “뜨억!”
 우당탕. 콰직. 우당탕탕…….
 언소추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씨 형제들이 벌떡 일어나며 부산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아씨 형제들이 정신없이 언소추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 대형!”
 그들도 자신이 늦게까지 잤다는 걸 알고 죄송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형!”
 언소추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아씨 형제들을 두들겨 팼다.
 “이게 지금 죄송하단 말로 끝날 일이냐? 내가 이번 일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아는 놈들이 지금까지 퍼질러 자!”
 퍼퍼퍼퍽…….
 ‘크으으윽!’
 ‘씨벌, 보아하니 자기도 늦잠을 잤으면서…….’
 아씨 형제들은 억울했지만 언소추에게 구속돼 있는 게 많기에 묵묵히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휘청.
 “어, 내가 왜 이러지?”
 한참 아씨 형제를 패던 언소추는 갑작스럽게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대, 대형!”
 아씨 형제는 맞던 와중에도 언소추가 비틀거리자 재빨리 부축했다.
 “내, 내가 현기증을 느끼다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언소추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엄청난 고수는 아니지만 자신은 내공을 축척하고 있는 무림인이었다. 격렬하게 싸운 것도 아닌데 이런 현기증을 느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벽을 부수려고 주먹을 휘둘렀는데 부서지지가 않았었어!’
 그는 몸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언소추는 서둘러 자신의 몸을 관조하며 내력을 운기해 봤다.
 텅.
 순간 언소추의 얼굴과 등허리 쪽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럴 수가! 내, 내공이 몽땅 사라졌다.’
 고작 한 줌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공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비틀거리며 침상에 앉은 언소추는 허무함이 가득한 한숨을 뱉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 괜찮으십니까?”
 아씨 형제들이 언소추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언소추의 눈에 그제야 그들의 몰골이 들어왔다.
 아씨 형제들의 눈가에도 검은 테두리 같은 것이 생겨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다.
 “너, 너희들도 혹시 내공이 사라진 거냐?”
 “네? 저희들의 내공이 왜 사라집니…… 헉!”
 반문하던 아씨 형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반사적으로 내력을 운기해 봤더니 한 줌의 공력 정도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 내공이 사라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언소추는 문득 같이 술을 마셨던 일행 중 동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동철 이놈이 우리에게 암수를 쓴 것인가?’
 “동철, 동철을 찾아봐라.”
 “네, 대형.”
 아씨 형제들은 서둘러 일어나 동철이 자고 있을 객실로 향했다.
 휑.
 하지만 새벽에 나간 동철이 아직까지 객실에 있을 리 없었다.
 “대형, 동철은 없습니다.”
 “이, 이 개자식이 감히 나에게 암수를 쓰다니! 뼈를 갈가리 짓이겨 주마!”
 언소추는 자신과 아씨 형제들의 몸이 이렇게 된 게 동철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언소추와 아씨 형제들은 숨을 씩씩거리며 청풍객잔을 나섰다.
 
 점소이 강삼은 언소추 일행들이 나가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개망나니 새끼, 어제 끼고 잤던 계집이 맘에 안 들었나? 뭣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강삼이 겪기로 분명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평상시 한 번도 줘 본 적이 없는 행하까지 줄 정도로 언소추의 기분은 굉장히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화를 내는 데다가 다리까지 후들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상당히 불편한 듯했다.
 ‘난 아직까지 숫총각인데……. 개 같은 새끼, 밤새 얼마나 계집을 괴롭혔으면……. 가다가 엎어져 콱 코나 깨져 버려라.’
 콰당.
 순간 강삼의 바람이 통했음인지. 돌부리에 걸린 언소추는 비틀거리다 앞에 가던 아일의 어깨를 안면으로 들이받고 코피를 줄줄 흘렸다.
 “크윽, 이런 개 같은 일이!”
 “대형, 괜찮으십니까?”
 “됐으니까 손 치워! 씨벌, 무공을 익힌 내가 고작 이런 충격에 코피라니!”
 강삼은 언소추 일행이 사라지자 특실의 문을 두드렸다. 언소추는 갔을지라도 특실엔 함께 잤을 거라고 추측되는 여자는 아직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똑…….
 “저기 시간이 다 됐는데 이만 나오시죠.”
 “…….”
 특실 안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들리지 않았다.
 강삼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역시 안에선 답변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강삼은 조심스럽게 특실 문을 열었다.
 휑.
 특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여자와 잠을 잤으면 뭔가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네?”
 점소이 생활을 오래했기에 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밤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방에는 언소추의 잠자리만 남아 있을 뿐 일체의 다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하하. 개망나니 새끼, 바람을 맞았나 보군. 고거 쌤통이다.”
 강삼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
 
 “아가씨, 어디서 이렇게 심하게 다치신 겁니까?”
 이번 표행의 책임자를 맡고 있는 표두 강행상은 놀란 표정으로 이른 아침에 피를 흘리며 들어온 한묘경의 상처를 살폈다.
 “크게 다친 건 아니니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세요.”
 “어서 등에 업히십시오. 당장 의방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의방에 갈 정도는 아니라니까요.”
 한묘경은 강행상의 호들갑에 손사래를 치며 주저앉더니 잠시 후 봇짐에서 수건을 꺼내 물에 적신 후 자신의 허벅지와 가슴 부위의 피를 닦고 아미파 비전의 금창약을 발랐다.
 아미파 비전의 금창약은 웬만한 검상은 흉터도 남지 않을 만큼 깨끗이 치료하는 효능이 있어 금창약 중 최고로 쳤다.
 “크흠.”
 강행상이 비록 한묘경을 아가씨라고 부르며 존칭을 쓰고 있긴 하지만 성삼표국의 국주 한재경과의 오랜 친분을 생각하면 숙부라 불리거나 아니면 삼촌이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 큰 처녀가 희멀건 허벅지와 가슴을 드러내 놓고 약을 바르는 모습은 그로서도 보기가 민망했는지 크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피식.
 한묘경은 고개를 돌리는 강행상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은 일부러 그녀가 유도한 상황이었다. 만약 상대가 그녀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무림의 영재들이나 세가의 자제들이었다면 도상이 곪아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속살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불만 중 하나는 강행상 같은 표두들이 자신에게 갑작스레 존칭을 쓰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표두들은 성삼표국의 창립 때부터 한재경을 도와 일하던 사람들로,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아버지와 형님, 동생 하며 지내는 사이였고 그녀가 어렸을 때는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미파에서 오 년의 속가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그들은 거리를 두며 갑작스럽게 경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번 표행에 따라나선 이유 중 하나가 대표두인 강행상과의 보이지 않는 격식의 벽을 허물어 예전의 그 편한 사이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아저씨가 마음으로 두고 있는 거리감을 허물려면 내가 예전의 어렸을 때처럼 구는 것이 좋겠지.’
 한묘경은 살짝 치기 어린 미소와 함께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어렸을 땐 똥 기저귀까지 갈아 주셨다던 분이 왜 그러세요.”
 “커흠, 그, 그야, 아가씨가 아주 어렸을 때고 지금은 다 큰 처녀가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컸다고 해도 아저씨 눈에는 아기로 보인다면서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 큰 처녀가 애기로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다 큰 처녀여도 아저씨에게는 아가씨가 아니라 예전의 코흘리개 묘경이로 불리고 싶어요.”
 “크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이젠 성삼표국도 제법 커졌기에 위계질서를 확실히 다져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호칭이나 경어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시행되어야 할 항목이고요. 몸을 다치셨으니 이제부터는 말 대신 마차를 타십시오.”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 강 표두라고 부르래도요. 그럼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강행상은 밖으로 나와서 살짝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 표두들과 상의하는 중에 성삼표국의 위상을 높여 한묘경을 좋은 남자에게 시집보내자는 결론을 낸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표국주인 한재경이나 그의 딸인 한묘경에게 경어를 쓰자는 것도 그때 합의를 본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묘경이라 불렀던 그녀를 새삼 아가씨라고 부르려니 땡감이라도 씹은 것처럼 입안이 껄끄러웠다.
 “처음이라 어렵지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강행상은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다. 살짝 본 것만으로도 한묘경의 상처가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안심하며 밖으로 나갔다.
 ‘흠, 그나저나 누가 아미파의 정식 속가 수련 과정을 모두 마친 아가씨의 몸에 저런 상처를 입힌 거지?’
 이제는 설사 대표두인 자신이라고 해도 쉽게 이길 수 없는 게 한묘경의 무공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새벽 수련을 갔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온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를 만난 게 틀림없었다.
 ‘아직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서두르면 아가씨가 새벽 수련을 한다고 갔던 갈대밭을 둘러볼 수 있겠군.’
 강행상은 한묘경이 단순히 상처만 입었다고 할지라도 내심으로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그는 서둘러 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갈대밭으로 향했다.
 갈대밭을 살피던 강행상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도를 쓰는 상대를 만났던가?’
 주변에 나 있는 자국들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수가 아닌 일대일의 대결이었군. 혼자서 묘경이, 아니 아가씨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도법의 고수는 이곳 웅현현에 몇 없는데…….’
 팽가 출신인 철문도 동철, 막격도 증장, 야수도 자문 정도가 강행상의 머리에서 떠올랐다.
 강행상은 몇몇의 인물을 떠올린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물을 노렸다면 우리를 습격했을 텐데, 설마 목표가 아가씨인 건가? 아니, 목표가 아가씨였다면 그 정도의 상처만 입히고 그냥 갔을 리는 없는데. 그냥 단순한 대결인 건가? 하지만 단순한 대결을 꼭두새벽에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노리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표행이 끝나면 개방에 의뢰를 넣어 조사를 해 봐야겠군.’
 성삼표국이 있는 천진은 거지들의 방파인 개방의 총타가 있는 곳으로 예전부터 그들과 성삼표국은 친분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강행상은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한 구상을 마치자 서둘러 표물이 있는 객잔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춘몽은 꿈속에서 무림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휘둘렀던가?”
 한묘경과 동철이 싸웠던 장면을 회상하던 춘몽은 첫 번째로 한묘경의 움직임을 따라하고 있었다. 물론 가상으로 만들어진 상대는 동철이었다.
 춘몽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동철은 처음엔 난피풍검에 반격하지 않고 오직 수비만으로 일관했다.
 “훗, 이제 좀 익숙해지는군. 실제 몸이 아니고 정신으로 만든 몸임에도 이렇게 어렵다니, 만약 실제 몸이었으면 족히 몇 년은 수련해야 되겠는데.”
 그가 한묘경이 실전에서 써먹었던 동작들에 익숙해지자 수비만 하던 동철이 반격을 시작했다.
 콰콰콰콰콱.
 ‘빈틈이 보인다.’
 보았던 동작을 회상하며 상상으로 만들었기에 공격 중에 동철의 허리에 검을 쑤셔 넣을 수 있는 빈틈이 보였다.
 슈아아악.
 춘몽이 동철의 허리를 베어 가자 동철의 도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베어 왔다.
 ‘헛!’
 춘몽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스파팟, 서걱.
 춘몽은 동철의 허리를 겨우 스친 반면 동철의 도는 허리를 가를 듯하다가 중간에 방향을 틀어 춘몽의 다리 하나를 깔끔하게 잘라 버렸다.
 “뭐야? 허리를 노리던 도가 방향을 틀어……. 설마 처음부터 다리를 노렸던 건가?”
 그가 보았던 장면을 분명 똑같이 복기하고 있는데 한묘경일 때와는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그 당시 한묘경은 겨우 허벅지를 살짝 스친 정도였지 지금처럼 다리 한쪽이 완전히 잘리진 않았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 리 없는데, 이상하다? 다시 한 번 해 봐야겠다.”
 혼백의 상태에서 봤기에 장면 하나하나가 각인되듯 생생했다. 절대 희미한 기억이 아니기에 결과가 다른 것에 대해 의문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파팟, 서걱.
 또다시 복기를 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똑같았다. 춘몽은 다리 하나가 허벅지부터 잘렸고 동철은 고작 허리가 살짝 베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춘몽은 자신의 몸을 한묘경의 몸으로 만들어 복기를 해 봤지만 그래도 결과는 똑같았다.
 “흐흠, 설마 동철이 한묘경을 봐줬다는 건가?”
 몇 번 같은 장면을 복기해 보는 동안 동철이 한묘경을 봐주며 대결했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동철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한묘경은 살아남지 못했겠군.”
 고작 몇 수만에 다리 한쪽이 잘려 나갔는데 더 겨루면 목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춘몽은 잘렸던 다리를 다시 붙이고 다음 장면을 복기해 봤다.
 서걱.
 “이런 젠장, 이번엔 몸이 반 토막으로 쪼개져 버리는군. 한묘경인 고작 가슴이 살짝 스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확실해졌다. 춘몽은 오른쪽 어깨부터 시작해 왼쪽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반듯하게 잘려 버린 자신의 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기엔 박빙의 전투였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군.”
 춘몽은 이번엔 모습을 동철로 바꿨다.
 동철의 도법을 복기해 동작이 익숙해진 후 한묘경과 대결을 했다.
 차차차창. 서걱.
 세 수만에 한묘경의 허벅지를 잘랐고 여섯 수에는 그녀의 몸통 그리고 열 수엔 목을 자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검법과 도법을 복기해 본 춘몽은 동철의 도법이 훨씬 더 정교하고 완성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한쪽의 절기가 더 우수하다고는 말 못 하겠고 사람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의 완성도가 다른 것이로군.”
 춘몽은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두 사람의 무공을 복기하고 꿈을 마쳤다.
 “하암, 잘 잤다.”
 눈을 뜬 춘몽은 하품을 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우두두둑.
 뼈 마디마디에서 개운한 소리가 났다.
 “어, 뭐야?”
 춘몽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지금까지 일어나 기지개를 켜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켜기 싫어서가 아니라 몸이 워낙 약해 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도 모르게 기지개를 켰다. 게다가 알 수 없는 힘이 몸 곳곳에서 불끈거리고 있었다.
 ‘웬 힘이 이렇게 많이……. 설마 내가 죽어 가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는 허 의원이 침을 놓으러 오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이제 살 가망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의 몸 상태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침을 놓지 않은 건 다 나아서 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던가?”
 몸에 힘이 생기는 이유로 짐작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항상 내가 눈뜨기 전에 누나가 탕약을 가지고 왔었는데, 오늘은 조금 늦네. 히히, 누나가 들어오면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이 정도의 힘이라면 어제보다 더 쉽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춘몽은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섰다.
 “오호,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려 몇 걸음 걷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했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삐쩍 마른 다리에 믿기지 않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걸어 봤지만 역시 흔들림이 아예 없었다. 마치 다리가 굵은 쇠기둥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저, 정말 내가 다 나았구나.”
 감동과 함께 기쁨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좁은 객실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어제처럼 숨이 차는 증상마저 없었다.
 ‘이 정도라면…….’
 “누나가 오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나가는 게 낫겠다.”
 어서 빨리 가족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춘몽은 서둘러 문을 열고 객실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