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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클 1권-1

2015.01.05 조회 1,274 추천 20


 0. 프롤로그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이었다.
 오래된 책장에 손길이 닿지 않은 책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널려 있고,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집기들은 주인의 눈길을 끌지 못해 한쪽 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나마 창조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커튼 아래 놓인 넓은 책상과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테이블이 전부였다.
 테이블 곁으로는 그저 높이를 맞춘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자 두 개가 대칭으로 자리했다.
 다행히 오늘은 조잡한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흔한 차 한잔 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마법석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잘못 들은 게 아니야.”
 하얀 로브에 머리를 뒤로 넘겨 말총처럼 묶은 청년이 말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로브는 오랫동안 빨지 않아 색이 바랬지만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낡았다는 느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청년은 자신의 복장에는 관심이 없는지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했다.
 “마나석은 들어 봤지만 마법석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하고 의문을 표시한 사람은 백발이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노인이었다.
 청년과 경쟁이라도 하듯 낡은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가슴 위에 새겨진 마법진의 문양과 백발이 어우러져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설명해 주지.”
 청년의 말에 노인은 귀를 가까이하며 경청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청년 앞에서 오히려 아랫사람을 자청했다.
 “자연의 기운을 타고난 돌을 마나석이라 하지. 난 그것을 진화시켰네.”
 “돌이 진화한단 말입니까?”
 “하하, 내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군. 진화하는 게 아니라 연구를 통해 진화를 시켰지. 우선 첫 번째로 마력석을 만들었네. 이걸 보게.”
 청년은 테이블에 돌 하나를 얹어 놓았다.
 언뜻 보기에 투명한 돌이었지만, 빛이 닿자 투명한 막이 나타났다.
 “이건…….”
 “마나를 담아 놓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지. 마나석과 달리 스스로 소모한 마나를 보충한다네.”
 “여, 역시 대단하십니다.”
 노인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청년을 보았다. 그의 손은 감히 마력석에 닿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저주가 걸려 있지는 않으니 만져도 되네.”
 “아! 죄송합니다.”
 노인은 뒤늦게 마력석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청년의 설명대로 마력석 안에서 계속해서 자연의 기운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법석은 무엇입니까?”
 호기심도 진화했다. 그는 처음 언급된 마법석을 떠올렸다.
 “직접 보게.”
 청년이 또 하나의 돌을 테이블에 얹었다.
 같은 크기와 모양이었다. 백색 돌에 투명한 막이 있었지만, 하나가 달랐다. 돌 표면의 선명한 문양이 그것이었다.
 “이건 마법 문양이 아닙니까?”
 “그렇다네. 실드의 기본 문양이지.”
 “그렇다면…….”
 노인은 조금씩 이해가 되는 듯했다.
 왜 마법석이라 불리는지.
 “직접 시도해 보겠나?”
 노인은 조심스레 들고 있던 마력석을 내려놓고 청년이 말한 마법석을 들어 올렸다.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네.”
 본래 마법에 앞서서 해야 할 것이 있지만 그 과정이 무시되었다. 노인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청년의 말에 따랐다.
 “실드.”
 그의 말에 따라 마법석의 문양이 빛을 뿌리더니 주변으로 모든 것을 차단하는 막을 형성했다.
 노인은 자신을 보호하는 기운을 느끼고는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노인의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작은 소음이 들렸다.
 툭.
 노인이 급히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자신의 손바닥 안이었다. 마법석은 실드를 발동하는 순간 반으로 갈라져 볼썽사납게 내부를 드러냈다.
 실드는 곧 사라졌고 마법석은 평범한 돌로 돌아갔다.
 청년은 안타깝게 그 모습을 보고는 자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거기까지네. 더 이상은 연구하지 못했지.”
 “그래서 비밀 연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네. 그건 우리를 지켜 주고, 꿈을 현실로 바꿔 줄 것이네.”
 청년이 미래를 상상하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나이를 훨씬 넘어선 인자함을 담고 있었다.
 “마법석이 완성되면 누구나 마법사가 될 수 있다네.”
 노인은 그의 미소에서 희망을 보았다.
 1. 노예의 기록
 
 *아홉 살―7월 17일*
 
 앞과 뒤.
 뚫린 곳은 둘뿐이다.
 천장은 답답한 회색 벽이고 팔을 뻗으면 닿는 양쪽 벽도 먼지를 연상시키는 회색이었다. 눈은 이 길을 답답하게 느끼지만 공기는 묘하게도 상쾌했다.
 기억이 있을 때부터 이런 모양이었다.
 이 길을 지나면 넓은 방이 나타난다. 빛이 나는 돌이 천장 가득 박혀 그림자가 겨우 보일 정도로 밟은 방이다. 그곳에는 붉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을 본 적이 없다.
 “빨리 다녀라, 지렁이 같은 녀석.”
 그는 항상 뭔가를 시킨다. 말끝에는 자신의 뒤틀린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단어를 빼놓지 않는다.
 방의 반을 차지하는 책상 위에 그가 말했던 돌을 올려놓았다.
 주먹만 한 두 개의 돌은 신비한 느낌의 은색이었다. 표면은 매끈했고 거짓말처럼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이곳에서 돌을 지칭하는 이름은 ‘마력석’이었다.
 책상의 반대쪽에는 마법사에 의해 무늬가 새겨진 돌들이 놓여 있었다. 돌의 무늬는 기하학적인 형태라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원래 마력석이었던 이름이, 무늬가 새겨지면 ‘마법석’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마법석의 효과는 몇 번 확인한 적이 있다.
 가장 최근 돌의 효과를 본 것은 열흘 전이었다.
 그날 마법사는 무늬가 새겨진 마법석과 구멍이 뚫린 칼을 가져왔다. 칼의 구멍은 정확히 마법석을 끼울 수 있을 정도였다. 마법석이 끼워진 칼은 금세 불꽃을 일으켰고, 잠시 후에 마법사는 원래의 마법석 대신 다른 무늬의 마법석을 끼웠다.
 이번에는 칼이 움직일 때마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두 번으로 끝이었다. 칼은 비명과 같은 소음을 내더니 볼썽사납게 찢어져 버렸다. 마법석의 힘을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치워라.”
 마법사는 그날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실험 전의 기대감은 항상 이렇게 실망으로 끝이 난 탓에, 완성이 되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여긴 얼마나 클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배정된 마법사의 방과 열 명의 노예들이 잠을 자는 침실, 배설을 위한 공간, 마법사의 주문을 전달하는 창고뿐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5년이 넘었다.
 어쩌면 더 긴 시간 이곳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계가 5년 전이었다.
 결론적으로, 난 기억하는 모든 순간을 이곳에 있었다.
 깡!
 바람 소리가 나더니 마력석이 벽에 부딪쳐 나뒹굴었다.
 “치워라.”
 오늘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
 보통 마력석이 마법석이 되는 과정에서 반 정도는 실패를 한다. 마법사가 최대로 지급받을 수 있는 마력석의 개수는 하루에 두 개.
 오늘은 둘 모두를 실패했으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괜히 눈빛이라도 잘못 맞추는 날에는 어제처럼 채찍을 맞을 수도 있으니.
 그러고 보니 갈라진 피부에 거친 옷감이 스쳐 고통이 느껴진다.
 참아야 한다. 난 노예니까.
 마법을 담지 못하고 실패한 마력석을 들고 마법사의 방을 나섰다. 긴 회색 복도를 지나 창고에 닿았다.
 창고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에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노예인 내가 뭔가 말을 하면 그에 따른 물건을 내줄 뿐이다. 주인의 말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어떤 말에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노예들은 그를 창고좀비라 불렀다.
 “실패한 마력석이에요.”
 간단히 말을 하고 창고 선반 위에 마력석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최대한 느리게 마법사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큰 후회를 할 테니까.
 
 -그래도 넌 운이 좋은 편이야.
 
 일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면 노예들끼리 수다가 시작된다. 어제 다른 마법사를 모시는 알렌이 말했다.
 알렌은 여자 노예로,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그녀는 괴팍한 주인을 모시는 터라 매일 숙소에 도착하면 눈물부터 쏟아 냈다. 온몸에 멍이 있는 것은 당연했고, 여자들만 아는 또 다른 고통을 당하는 듯했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다른 여자 노예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곤 했다.
 그녀의 말대로 난 견딜 만했다. 적어도 실수를 하지 않으면 매질을 당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노예는 주인을 잘 만나고 볼 일이다.
 다행히 오늘은 큰 사건 없이 지나갔다. 마법사가 방을 떠나면 내 일과는 끝이다.
 난 마법사가 따라갈 수 없는 문으로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형!”
 오늘은 정말 운이 좋다.
 항상 바쁘던 형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난 쪼르르 달려가서 형의 무릎에 앉았다.
 “별일 없었어?”
 “응!”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형은 이런 대답을 좋아한다.
 예상대로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양팔을 벌려 안아 주었다.
 형의 품은 내 몸을 모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키는 물론, 목소리도 남자다웠다.
 그래도 가장 좋은 건 형의 눈빛이었다.
 형의 눈빛은 신기하다.
 나에겐 따뜻했고, 주인 앞에서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노예가 날 괴롭히면 맹수처럼 사나워진다.
 “배고프지 않아?”
 형이 내 눈앞에 빵을 내밀었다. 빵이 크게 보였지만 그 뒤에서 웃고 있는 형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나도 크면 형처럼 될 거야.”
 빵을 씹으며 말했다.
 “5년만 기다리면 돼.”
 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열네 살이다.
 같은 나이의 다른 노예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덩치였다. 다만 각이 진 턱 선과 굵은 입술이 고집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티스.”
 형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귓속말을 했다.
 이 말은 절대 다른 사람에겐 말하면 안 된다. 형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했다.
 “넌 절대 노예로 살면 안 돼. 언젠가 꼭 노예를 벗어나게 해 줄게. 형만 믿어.”
 “응. 난 형은 무조건 믿어.”
 형이 웃는다. 나도 기분이 좋다.
 역시 난 운이 좋은 편이다.
 노예 중에 이처럼 가족이 있고 또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형제뿐이니까.
 “형, 난 잘래.”
 “그래.”
 형은 날 좀 더 꼭 안아 주었다. 난 익숙하게 형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
 
 *열 살―1월 1일*
 
 오늘은 주인이 바뀌는 날이다.
 노예는 열 살을 기준으로 취급이 달라진다. 열 살 이상은 좀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형, 걱정하지 마. 난 운이 좋은 편이니까.”
 “그래.”
 형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형도 운이 좋잖아. 잘해 주는 주인을 만났으니까. 나도 그럴 거야.”
 형의 몸에는 상처가 없다. 주인에게 매질을 당하지 않는 듯했다. 형의 주인을 본 적은 없지만, 형은 언제나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난 형의 주인이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덜컹!
 문이 열렸다.
 내가 나갈 차례였다.
 “조심해.”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일까?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문을 나서게 되었다.
 나를 안내하는 사람은 뚱뚱한 중년 사내였다. 뒤에서 보면 어기적거리는 눈사람의 모습이었다.
 “기억해라.”
 숙소를 나서서 미로 방으로 들어섰다. 난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
 미로 방으로 들어가면 다섯 개의 문이 있다. 각 문에는 번호가 있고, 난 4번 안으로 안내되었다. 4번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다섯 개의 문이 있다. 이번에는 3번이었다.
 3번 문이 열리자 복도가 나타났다.
 다행이다. 4번과 3번 두 개만 외우면 된다. 네 개를 외우는 노예도 있다고 했다.
 눈사람은 여기까지만 안내했다.
 난 홀로 복도를 걸었고, 시선은 배운 대로 먼 바닥을 보았다. 정면을 보는 것은 노예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복도는 첫 주인이 있던 곳보다 길었다. 복도 옆으로는 네 개의 문이 더 있었다. 첫 주인에겐 방과 연결되는 문이 전부였다.
 어쨌든 허락을 받기 전에는 문을 열 수가 없어 복도 끝으로 갔다. 다행히 그곳에 문이 있어 혼란스러운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가볍게 노크를 했다.
 “티스라고 해요.”
 이름을 밝혔다.
 “들어와.”
 굵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 성격은 아직 가늠할 수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상대로 사십 대 중반의 사내가 보였다. 얼굴에는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코밑부터 턱까지 이어졌다.
 책상 위에 놓인 물건으로 봐서 마법사가 분명하지만 외모는 산적을 닮았다. 산적치고는 좀 호리호리한 체구지만.
 “이름이 티스라고?”
 산적 마법사가 물었다.
 “네.”
 대답은 짧아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시선도 적당히 아래로 내렸다. 얼굴은 한 번 본 걸로 충분하다.
 “마력석을 가져와라. 왼쪽 첫 번째 방이다.”
 지시받은 방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난 이번 주인이 저번보다 어떤 식으로든 대단한 사람임을 알았다. 창고로 예상했던 그곳에는 서른 개의 마력석이 놓여 있었다.
 난 버릇처럼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방으로 돌아가 책상 위에 마력석을 놓아두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다른 방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외워 둬라.”
 “네.”
 “나가 봐. 부르기 전엔 들어오지 마라.”
 그 역시 나에게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난 방을 나서며 산적의 몸을 가리고 있는 하얀 로브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시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아직은 주인이 날 괴롭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 무시해 준다면 좋은 일이다.
 노예는 주인의 관심을 받지 않는 편이 좋다. 모든 노예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복도와 연결된 네 개의 방에는 지금껏 창고를 통해 받아 냈던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번 주인은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물건을 쓸 수 있는 듯했다.
 물건의 배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우며 마지막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 키의 반에 이르는 거울이었다.
 그곳에 내 모습이 비쳤다.
 열 살의 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작은 체구에 꾀죄죄한 몰골. 노예를 의미하는 갈색 옷은 무척 낡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 손을 어디론가 숨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노예의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거울 앞으로 한발 더 다가섰다.
 열 살 소년의 둥근 얼굴이 보였다.
 내가 항상 보는 형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큰 눈과 웃고 있는 형상의 입은 개구쟁이 같은 느낌이었다. 형에게 응석을 부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그래도 짙고 길게 뻗은 눈썹은 형과 닮았다. 다만 각이 없이 둥근 턱은 불만이었다. 좀 더 형을 닮고 싶었는데.
 가진 것이 없는 탓에 거울을 오래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금세 흥미를 잃고 물건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뒤늦게 산적 주인이 부르기 전에 외우는 걸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지만 그날 주인은 더 이상 날 부르지 않았다.
 
 
 *열 살―4월 1일*
 
 산적 주인은 참 지루한 사람이다.
 물건이 필요할 때 말고는 날 부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주인보다 일찍 나와서 늦게 들어가는 것뿐이다. 청소와 심부름 외에는 할 일이 없다.
 “티스.”
 “네.”
 “세컨 아머.”
 난 방을 나서서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 구멍이 두 개 뚫린 갑옷을 가져다준다. 그러고는 슬며시 방을 나와 문을 살짝 열어 두고 옆에서 기다린다. 그러다 가끔씩 주인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인이 방을 나가면 청소를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벌써 넉 달째 같은 생활이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근 들어 주인이 방에서 자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주인은 그걸 싫어했다.
 “정해진 시간에 나와서 정해진 시간에 돌아가라.”
 규칙이 정해졌고, 그에 따라야 했다.
 산적 주인은 연구에 들어가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알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집중력이 높아져서, 언젠가는 실수로 물건을 떨어트렸지만 주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편하게 생각했지만 점차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허락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괜히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살피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곳에는 꽤나 많은 양의 마력석과 실패로 인해 버려진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손마디 하나를 감싸는 반지와 그에 맞는 작은 마력석이 있는가 하면, 투구와 작은 사슬로 된 갑옷도 있었다. 무기 역시 검뿐만이 아니라 방패, 창, 양손검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다만 직접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날카롭지가 않았다. 대부분 날이 무뎌 몽둥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다섯 개나 있네.”
 어제는 보지 못했던 갑옷이 있었다.
 슬롯이라 부르는 마력석 구멍이 다섯 개나 뚫려 있었고,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갑옷의 색깔이었다.
 지금껏 심부름을 하면서 빛나는 은색 금속은 주인이 아끼는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성능이 좋거나 성공 확률이 높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속이 슬쩍 비칠 정도로 투명한 금속이었다.
 투명한 금속은 본 적이 없다.
 ‘주인이 아끼는 물건일 거야. 조심해야지.’
 혹시나 큰일이 벌어질까 봐 직접 만지지는 못했다.
 그렇게 창고 안에서 봤던 물건들을 다시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고, 주인이 말한 시간이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인사를 했지만 주인은 대꾸도 없었다.
 “형!”
 매일 보는 형이지만 언제나 반갑다.
 “별일 없었어?”
 “응.”
 형의 품에 안기면 내가 많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젠 형의 품에 완전히 안기는 것은 무리였다. 형도 크고 있지만, 나보다 빨리 크진 못했다.
 잠이 들 때까지 형과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원래 노예끼리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도 형과는 예외였다.
 내가 몇 번 방에서 일을 하는지는 물론 주인에 대한 말도 했다. 금지된 일이었지만 한 번도 꺼려 본 적이 없다. 상대가 형이니까.
 그날도 형은 내가 잘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항상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지켜 주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형은 자리에 없다. 내게 남은 것은 형의 따뜻한 체온뿐이었다.
 
 
 *열 살―9월 1일*
 
 “하하하!”
 주인이 큰 소리로 웃어 댔다. 열린 문 틈으로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 개의 슬롯을 가진 검을 들고 주인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표정은 희열에 찼고, 몸은 주체할 수가 없는지 하늘을 향했다.
 “드디어 성공이다!”
 두 개의 마력석이 박힌 검은 지금까지와 달리 엷은 막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검의 아랫부분은 서리가 낀 흰색, 윗부분은 불꽃이 일어난 붉은색이었다. 두 개의 마법이 동시에 발현되었지만 검은 멀쩡히 버텨 냈다.
 주인은 방을 돌며 몇 번이나 괴성을 질렀다. 나는 큰 감흥을 받지 못하고 문밖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쾅!
 갑자기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음이 들렸다. 난 자연스레 소음이 들린 뒤를 보았다.
 누군가 다급하게 나를 향해 달려왔다.
 “형?”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무슨 일이 있나 봐.’
 그 일이 평범하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형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땀범벅이 된 얼굴.
 형의 얼굴이 저렇게 다급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게다가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형…….”
 내 짐작보다 훨씬 큰일임을 알았다.
 다가온 형은 대뜸 날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형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형은 내 손을 잡더니 방금 뛰어온 문을 향해 달렸다.
 “형, 왜 그래?”
 다급히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대신 형이 뛰어 들어왔던 문 뒤에서 소음이 들렸다.
 “안 되겠어.”
 형은 주변을 살피고는 창고 문을 열었다. 난 형의 손에 이끌려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복도에선 곧바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혀…….”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형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말을 해선 안 돼. 여긴 습격을 받고 있어. 모두 죽이려고 할 거야.”
 불안해졌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산적 주인의 비명이 들렸다. 비명에 이어진 둔탁한 소음은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내는 소리 같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상상될 것 같아 질끈 눈을 감았다.
 덜컹!
 단순히 문을 여는 소리가 이처럼 공포스러운지는 몰랐다.
 우리가 숨어 있는 방문이 열렸고, 검은 그림자가 문이 있던 자리를 메웠다. 문은 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림자는 거대해 보였다.
 형이 날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뭔가를 움켜쥐었다.
 난 모든 상황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점점 커지는 그림자에 머리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한 발. 한 발.
 그림자는 가까워졌다. 그림자는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있나?”
 문밖에서 약간은 격양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 길이 멀다. 빨리 수색해.”
 “네.”
 대답을 마친 그림자의 행동이 빨라졌다.
 문밖으로는 복도를 뛰어가는 그림자들이 무수히 지나갔다. 수십 명은 될 듯했다.
 툭.
 그림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시선을 조금만 내리면 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형의 몸이 움직였다.
 “읍!”
 그림자가 답답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허리를 숙였다. 그 앞에는 양손을 모아 그림자의 배에 대고 있는 형이 있었다.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때, 형이 쓰러지는 그림자를 받치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티스, 오른쪽 벽에 붙어.”
 형이 시키는 대로 오른쪽 벽으로 기어갔다.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난 벽에 바짝 붙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유로운 것은 형을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뿐이었다.
 형은 쓰러진 그림자를 내 옆으로 끌고 왔다.
 “혀, 형, 문을 닫으면…….”
 “의심할 거야. 잠시 이대로 있어.”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한 사람의 발소리는 남았다. 아무래도 이곳을 지키는 사람인 듯했다.
 형은 그림자의 시체를 좀 더 벽으로 붙이더니 문을 향해 기어갔다.
 형은 이 상황이 조금도 무섭지 않은 듯했다. 그의 발끝이 떨리는 걸 보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밖을 슬쩍 내다본 형은 이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나도 자연스레 긴장을 했다.
 형은 뭔가 고민하던 표정을 하더니 손짓으로 날 불렀다. 그러고는 문밖에서 정확히 볼 수 있는 곳에 날 세워 두었다. 만약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문 안을 본다면 내 얼굴까지 자세히 볼 것이다.
 “날 믿어.”
 형의 말에 두려움이 진정되었다. 형은 날 꼭 안아 주고는 열린 문 옆에 몸을 붙였다.
 복도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자 호흡이 진정되질 않았다. 잠시 잦아들었던 두려움은 순식간에 높아졌다.
 그렇게 그림자가 날 보았다.
 열린 문을 통해 날 발견한 그림자는 눈을 부릅뜨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곧장 내 목을 잡으려던 그림자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털썩.
 그림자가 쓰러졌고, 그 뒤에서 단검을 움켜쥔 형이 나타났다. 형의 몸은 그림자들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서 나가야 돼.”
 형은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몇 가지 갑옷을 발견하고는 하나씩 들어 보았다. 그러다 형이 선택한 것은 다섯 개의 슬롯이 있는 투명한 갑옷이었다.
 “이게 제일 가벼워. 이걸 입어.”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형의 지시는 모든 규칙에서 예외였다.
 갑옷은 양팔을 안으로 넣을 수 있을 만큼 컸지만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마치 천 옷을 한 벌 더 입은 느낌이었다.
 형은 쓰러진 그림자의 윗옷을 벗겨 갑옷 위에 걸쳐 놓았다. 투명한 갑옷이 빛을 반사해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가자.”
 형과 함께 방을 나섰지만 탈출은 쉽지 않았다.
 습격자들은 점령 지점에 어김없이 한 명씩을 남겨 놓았고, 밖으로 나가려면 꽤나 많은 적을 만나야 했다.
 복도에서 잠시 고민을 하는 사이, 숙소와 이어진 방의 문이 열렸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문이 열린 주인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연구실에는 목이 잘린 주인의 시체와 연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목을 잃은 주인의 몸은 두 개의 마력석이 박힌 칼을 품에 꼭 쥐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
 대답은 없었다. 형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날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날 믿어.”
 몇 번을 들어도 형을 믿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눈 감아.”
 복도에서 다가오는 습격자의 걸음 소리가 들렸고 형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고기를 써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다시 눈을 뜨자 형이 칼을 들고 있었다.
 “가지고 있어.”
 형은 주인이 꼭 안고 있던 칼을 나에게 내밀었다. 형의 뒤로 잘려 나간 주인의 팔이 보였다.
 그렇지만 이건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 나에게 무기를 주느라 주인의 팔을 자르면서 자연스레 소리가 났다. 습격자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가슴 떨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더욱 위험했다. 상대가 조심스럽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방심하지 않는 상대를 죽일 수 있을까?
 형은 날 오른쪽 벽에 세워 놓고 자신은 왼쪽 벽에 섰다.
 난 불꽃과 얼음이 공존하는 칼을 꾹 움켜쥐었지만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인식은 없었다. 그저 형이 주는 걸 받아 놓은 것뿐이었다.
 드디어 습격자가 열린 문 앞에 섰다.
 상대는 어린 우리에 비해 거대했다.
 형은 긴장한 모습으로 자세를 낮췄다. 움켜쥔 단검 아래로 피가 섞인 땀방울이 흘렀다. 정면으로 보이는 형의 모습에서 나는 사신을 보았다.
 피범벅이 된 채로 먹이를 노리는 사신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쿵!
 문 앞에서 멈췄던 상대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칼을 들고 있는 날 보았다. 순간, 뒤에서 움직이는 형이 보였다.
 ‘성공이야.’
 난 확신했다. 형이라면 어떤 실패도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깡!
 예상은 빗나갔다.
 형의 공격은 정확했지만 단검은 상대의 살을 뚫지 못했다.
 ‘갑옷…….’
 사내의 찢어진 옷 사이로 은색의 금속이 보였다.
 갑옷에 공격이 막히자 사내의 거대한 손이 형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는 형을 들어 올려 들고 있던 칼을 움직였다.
 “그만둬!”
 노예인 나에게 용기는 필요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형의 위기는 모든 감정을 무시하게 했다.
 난 무작정 칼을 휘두르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내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지만, 여유 있게 칼을 막아 냈다.
 내가 휘두른 칼이 사내의 칼에 막혔을 때.
 화르르!
 갑자기 내가 들었던 칼에서 불꽃이 튀어나와 사내를 덮쳤다.
 “으아!”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티스!”
 형이 멍해 있는 나에게 검을 빼앗더니 비명을 지르는 사내의 목을 찔렀다.
 비명은 없어졌고, 사내는 여전히 불이 붙은 채로 쓰러졌다.
 “헉. 헉.”
 숨소리가 진정이 되질 않았다. 혹시나 숨소리가 커서 다른 습격자가 들을 것이 두려웠지만 뜻대로 조절되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리고 이자는 내가 죽인 거야.”
 사람을 죽였다.
 어쩔 수 없었지만 그 행위에 대한 충격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형은 모든 부담과 고통을 떠안으려 했다. 웃기게도 그 순간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형의 말은 위로가 되었고, 그때는 이기적이게도 편해지고 싶었다. 형의 고통이 가중된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다.
 “어서 나가자.”
 복도를 지나고 숙소로 이어지는 방 앞에 섰다.
 첫 번째 방에는 사람이 없었고, 두 번째 방에는 인기척이 있었다.
 형은 내가 가지고 있던 칼을 들어 바닥을 내려쳤다. 순간 엄청난 불길이 일더니 습격자가 있는 방을 덮쳤다.
 “뛰어.”
 습격자가 비명을 지르자 우리의 행동도 급해졌다.
 형은 여러 개의 문이 어디로 통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익숙하게 길을 찾았고, 난 뒤따르기만 했다.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습격자를 더 만나야 했다.
 하지만 주인이 가지고 있던 칼의 위력은 대단했다. 불덩이뿐만 아니라 화살 같은 얼음이 튀어 나가기도 했다. 거기다 닫힌 문을 얼려 상대의 추격을 따돌릴 수도 있었다.
 “이제 나갈 수 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문이 아닌 마법진 앞이었다. 둥근 원 안에 기괴한 문양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원은 계속해서 빛을 내며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올라가자.”
 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법진 안으로 움직였다. 나도 늦지 않게 뒤를 따랐다.
 쉬익!
 예상치 못한 바람 소리.
 뭔가가 바람을 뚫고 날아오는 소리였다. 형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티스!”
 형이 날 부르는 순간,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람 소리는 점점 커졌다.
 목표는 나였다.
 돌아볼 틈도 없었다.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깡!
 몸이 크게 흔들렸다. 갑옷이 울렸기 때문이다.
 “티스! 어서!”
 형은 멍해 있는 내 손을 잡고 마법진으로 몸을 날렸다. 우리는 뒹굴다시피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몸이 흩어지는 느낌이 났다.
 점점 희미해지는 눈앞으로, 바닥에 떨어진 단검과 그것을 여유 있게 집어 드는 젊은 사내가 보였다.
 사내는 우리를 보며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곧이어 내 몸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의 사물이 모두 바뀌었다.
 평범해 보이는 둥근 바위 두 개의 중앙이었다.
 주변으로는 생전 처음 보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세상에 도착했다.
 
 
 *열한 살―1월 1일*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형제는 축제를 즐길 틈이 없었다. 누군가 우리 뒤를 쫓았고, 초원은 몸을 숨길 곳이 많지 않았다.
 넉 달이나 계속된 도망은 우리를 지치게 했다. 형은 여전히 날 지켜 주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널 노예로 살게 하지 않을 거야.”
 형은 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형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다.
 마음과 달리 어린 우리에게 넉 달간의 이동은 신체의 한계를 경험하게 했다.
 떨리는 발은 더 이상 움직여 주지 않았고, 가벼운 갑옷마저 벗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형은 그것이 지난번처럼 날 지켜 줄 것이라 믿고 절대 벗지 못하도록 했다.
 이동은 계속되었지만 우리는 적을 따돌리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누가 따라오는지는 몰랐지만, 형은 그 점을 가장 불쾌해했다. 연구소를 벗어나고 넉 달 동안 계속된 일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그들을 따돌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털썩.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티스, 조금만 더 견뎌.”
 쓰러진 건 나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잠을 자고 싶었다.
 “정신 차려. 조금만 더 가면 돼.”
 거짓말이었다. 형이 알고 있는 건 연구소의 내부 구조뿐이다. 연구소 밖은 형도 알지 못했다. 넉 달이라는 시간은 그것을 깨닫게 하는 데 충분했다.
 “여기까진가?”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르르!
 형이 칼을 들고 일어났다.
 내가 본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시 눈을 뜬 때는 늦은 밤이었다.
 웬일인지 몸이 가뿐했다. 게다가 코를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도 났다.
 “일어났어?”
 언제나처럼 형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이 자리를 잡아 준 듯, 곱게 누여 있던 몸을 일으키자 모닥불이 보였다. 지금까지는 위험하다며 피우지 않았던.
 모닥불 위에는 잘 구워진 멧돼지가 올려져 있었다. 금방 일어났지만 배가 고파졌다. 침을 꿀꺽 삼키자 형이 고기를 한 움큼 베어서 내밀었다.
 “먹어.”
 익숙하지 않은 여유였다.
 “형,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이제 다 해결됐어. 그러니 천천히 많이 먹어.”
 “정말?”
 “다 잘될 거라고 했잖아.”
 형이 웃어 주었다.
 난 이날을 분명히 기억한다.
 따뜻한 형의 웃음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고기.
 밤을 밝히는 모닥불.
 잠잠하던 바람.
 그리고…….
 혼자 잠든 밤.
 형이 남긴 편지.
 
 자고 일어나니 형은 없었다.
 대신 웬 낯선 사내가 편지를 들고 있었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단 한 번이었다.
 “따라와라.”
 두려움에 떨며 그를 따라가는 와중에 형의 편지를 읽었다.
 
 -티스
 그 사람을 따라가.
 네가 살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거야.
 난 마법사가 되기로 했어.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서 돌아갈 거야.
 그때는 영원히 함께 살자.
 잊지 마.
 우리는 운이 좋은 형제야.-
 
 난 그렇게 낯선 사내에 의해 ‘앙트’라는 도시로 안내되었다.
 앙트의 뒷골목 조잡한 판잣집, 사내는 유일한 가구인 조잡한 침대 위에 돈이 든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난 물었다.
 “형은 정말 마법사가 되러 간 건가요?”
 사내는 대답 없이 사라졌다.
 나의 홀로서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꼭 다시 돌아올 거야.”
 티스는 일기장 사이에 끼워 둔 낡은 편지를 읽었다.
 벌써 6년 전에 받은 편지였다. 편지가 끼워진 곳에는 같은 필체의 다른 편지들이 있었다.
 1년에 두 번, 티스에겐 생활비가 될 만큼의 보석이 도착했다.
 함께 있지 않지만 파츠는 여전히 티스를 지켜 주었다.
 “어서 돌아와.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있게 도와줄게. 나도 형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어.”
 아쉽게도 티스는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어디로 보낼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기다릴 수 있어. 꼭 다시 만날 거야.”
 티스는 편지와 일기장을 투명한 갑옷 속에 집어넣었다. 일기장 겉에 붉은색의 손자국이 찍혔다.
 오래되어 말라붙은 핏자국 위에 선명한 붉은색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일기장의 딱딱한 감촉이 가슴을 채워 주는 듯했다. 그제야 티스는 걸음을 옮겼다.
 처벅.
 끈적끈적한 붉은 액체가 가죽 신발에 밀려났다.
 처벅.
 티스는 규칙적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
 강을 이룬 피와 찢긴 시체들이 지옥처럼 펼쳐져 있었다.
 
 
 2. 앙트의 작은 악마
 
 지독한 불길이 치솟았다.
 비명이 뒤따르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불꽃의 파도는 멀쩡하던 땅에 붉은 장벽을 만들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이는 하나뿐이었다.
 빌어먹게도 혼자 한 일이었다.
 꿈임을 알기에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늘 그렇듯이 꿈임을 인지하는 순간 잠에서 깼다.
 
 아침이라 하기에는 이른 새벽이었다.
 어스름한 빛이 창문을 넘어 침대를 비췄다.
 밝은 빛이 감은 눈에 닿자 티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다 푹신한 침대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돌아왔었지.”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주인님, 일어나세요.”
 어린 여자의 목소리에 티스가 대답했다.
 “좀 더 잘래.”
 티스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투정을 부렸다. 이에 하녀는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님이 오신대요. 얼른 일어나세요.”
 “너무하잖아. 난 어젯밤에 도착했다고.”
 “아이사 님이 중요한 일이라고 했어요. 제가 혼나길 바라세요?”
 “쳇, 알았어.”
 티스가 스스로 이불을 걷어 내자 하녀는 웃으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쪼르르.
 찻잔에 채워진 차는 금세 방 안에 향기를 퍼트렸다.
 “침대 위에 있는 옷으로 입으세요.”
 “이런 옷은 불편해.”
 티스는 하녀가 앉았던 자리에 있는 옷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리부터 일자로 뻗은 검은색 바지와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흰색 상의는 티스가 즐겨 입던 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옷은 질색이야.”
 “아이사 님이 지시했어요.”
 “도대체 누가 오는데?”
 “나르제 남작이라고 들었어요.”
 말을 하는 동안 하녀는 ‘모르트’ 차가 채워진 찻잔을 티스에게 내밀었다.
 차를 담은 찻잔은 고급이었지만 모르트 차는 서민들이 먹기에도 부담이 없는 저가품이었다.
 “주인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둥근 얼굴의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머뭇거렸다.
 열네 살의 나이에 어울리는 하얀 피부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이었다.
 “아이사 님에게 혼이 나서.”
 “넌 아이사만 무서워하지? 나도 화내면 무섭다고.”
 “하지만…….”
 “내가 싫다고 했잖아. 그냥 이름을 부르든지…….”
 덜컹.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녀와 달리 노크는 없었다.
 “아이사, 여긴 내 방이라고. 노크 정도는 해.”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이사라 불린 여인은 스무 살의, 늘씬한 키를 가진 여성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뒤로 늘어트리고 반듯하게 선 자세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과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 미인임이 분명했지만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났다.
 “언니.”
 하녀가 아이사에게 다가갔다.
 “아까 말한 손님이 곧 올 거야. 중요한 사람은 아니니까 적당히 준비해. 문을 열어 달라고 해도 두 번 정도 기다렸다가 열도록 해.”
 “응, 알았어.”
 지시를 받은 하녀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이린.”
 “응, 언니.”
 “내일부터는 좀 쉬어. 당분간 조용할 거야.”
 “고마워, 언니.”
 아이린이라 불린 하녀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아이사가 문을 열고 나가는 아이린을 보며 돌아서자 티스에게 그녀들의 목덜미가 보였다. 타오르는 듯한 불꽃의 형상이 검게 새겨져 있었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티스의 눈빛이 슬퍼졌다. 하지만 아이사가 돌아설 때쯤 모든 표정을 지웠다.
 동생이 사라지자 아이사는 테이블 앞에 섰다. 비워진 찻잔을 채워 준 그녀는 티스의 등 뒤에 자리를 잡고 차가 모두 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사.”
 “네, 주인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주인님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티스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찻잔을 비웠다. 아이사는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찻잔을 채워 주었다.
 “그래서 동생한테도 그렇게 지시한 거야?”
 하녀 역할을 하고 있는 아이린은 다른 사람에게 언니를 지칭할 때 ‘아이사 님’이라고 부른다. 이것 역시 아이사가 지시한 일이었다.
 “주인님께서 당당해지셔야 동생도 안전해집니다.”
 “너희는 노예가 아니야.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이미 약속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된 대화.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티스는 구겼던 인상을 폈다. 하지만 아이사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동생을 구해 주신 은혜는 평생 목숨으로 갚을 것입니다.”
 마치 군인과 같은 말이었다. 예쁜 외모가 아니라면 진짜 남자 군인으로 착각할 만큼 딱딱하고 건조한 말투였다.
 “좋아.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둘게.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떠나.”
 “그런 일은 없…….”
 “됐어. 그 이야기는 그만해.”
 티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이 점점 강해지는 창가에 서자 아담한 정원이 보였다. 정원 끝의 철제 문 뒤에는 귀족임을 자랑하듯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사내 둘이 보였다.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였다.
 “나르제 남작과 첫째 아들입니다.”
 티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벌써 두 달이 지난 거야?”
 “주인님께서 두 달 만에 돌아오셨습니다.”
 “뭔가 따지는 듯한 말투네.”
 “아닙니다. 본래 한 달 만에 오신다고 하셔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티스는 아이사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나르제 남작은 열리지 않는 문을 짜증스레 두드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초조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계획대로 된 모양이지?”
 “로칸의 영주는 마이스 남작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로칸은 이곳 앙트와 열흘 정도 거리에 있는 소규모 도시다. 이번에 그곳의 영주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영주를 선출했고, 나르제와 마이스 남작이 경합을 벌였다. 이를 위해 두 귀족가는 막대한 로비 자금을 필요로 했고, 그 자금을 빌려 준 이가 티스였다.
 “예상대로군.”
 그들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아이린은 아이사의 지시대로 곧바로 열어 주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문을 열어 주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슬슬 가 볼까?”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아이사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티스는 충분히 여유를 부리며 뒤늦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티스의 집은 저택이라 부를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었다. 2층은 그의 집무실 겸 침실이었고, 1층은 아이사와 아이린의 방 외에 거실 겸 응접실로 되어 있었다.
 작은 규모지만 내부의 장식이나 가구는 고급스럽게 꾸며 놓았다. 아이사의 의견대로였고, 본래 풀 한 포기 없던 정원을 꾸민 것 역시 그녀의 뜻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르제 남작 부자와 아이사가 마주 앉아 있었다. 아이사의 의도대로 분위기는 냉랭하게 식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티스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아이사 옆에 자리를 잡았다.
 “200골드는 가지고 오셨나요?”
 특별한 인사는 없었다. 티스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고, 남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한 달만 시간을 주게. 그 말을 하려고 왔네.”
 남작은 표정과 달리 근엄한 음성을 내려고 애썼다. 어찌 되었든 그는 귀족이고 티스는 아니다.
 이에 티스가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남작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티스는 아이사를 보며 물었다.
 “아이사, 돈을 갚지 못할 경우 뭘 받기로 했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남작가의 모든 노예 문서입니다.”
 “총 몇 명이지?”
 “남작가 안에 다섯 명, 외부에서 일을 하는 두 명, 남작가 소유지만 다른 가문에서 일을 하고 있는 노예가 두 명입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선물로 보낸 한 명의 노예가 있습니다.”
 “열 명이라. 생각보다 많은데?”
 티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반대로 나르제 남작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두 번째는 뭐지?”
 “오색 다이아몬드입니다.”
 아이사의 대답에 남작의 인상은 더욱 구겨졌다.
 오색 다이아몬드는 대륙 전체에도 몇 개 없는 희귀품으로, 남작가에서 가보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물건이다. 실제로 경매에 부쳐도 500골드는 거뜬히 받을 만큼 귀했다.
 “오늘까지입니다. 200골드에 약속하신 이자 50골드까지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오늘 밤 자정까지 가지고 오지 않으시면 노예 문서와 오색 다이아몬드를 가지러 가겠습니다.”
 “날 몰아붙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나르제 남작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협박의 의미가 다분했다. 이에 티스의 웃음도 짙어졌다.
 “전 목숨보다 돈이 좋은 놈이에요. 소문을 들으셨으면 아실 텐데요.”
 “사람을 구분할 정도의 눈은 있을 텐데.”
 “황제가 와도 달라질 건 없어요.”
 “이……!”
 이야기를 듣던 나르제 남작의 아들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앙트의 주 병력인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기사단이라는 자리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직이다.
 “말을 가려서 하라!”
 그가 허리에 있던 검을 뽑으려 했다. 이에 아이사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검을 뽑는 순간 죽게 될 것입니다.”
 “감히!”
 남작의 아들은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반쯤 뽑았다. 순간, 그의 목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이에 남작이 크게 소리쳤다.
 “그만!”
 어느새 일어선 아이사가 단검을 꺼내 상대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피가 쏟아질 상황이었다.
 남작의 아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사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자신을 주시하는 차가운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아이사, 그만둬.”
 “이자는 죽여야 합니다. 주인님을 위협했습니다.”
 “피를 닦으려면 아이린이 고생할 거야. 그러니 참아. 밖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말리지 않을게.”
 결국 아이사는 명령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고, 남작은 자신의 판단이 크게 어긋났음을 깨달았다.
 ‘앙트의 작은 악마.’
 티스가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소문에서의 티스는, 귀엽고 작은 아이의 외모를 가졌지만 돈에 대한 집착은 악마와 같다고 했다. 남작은 그래 봤자 귀족인 자신은 어쩌지 못할 것이라 여겼지만, 실제로 만난 티스는 달랐다. 그의 말대로 황제라 해도 뜻을 굽히지 않을 듯했다.
 “쿠키 드세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이 쿠키를 쟁반에 담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지금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
 티스의 대답에 다시 한 번 웃어 준 아이린이 물러가자 티스는 조금 전의 분위기를 잊은 듯이 말했다.
 “먹어 보세요. 아이린의 음식은 특별한 맛이 있으니.”
 티스가 보란 듯이 쿠키를 집어 먹었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티스의 여유가 못마땅한지 구긴 인상을 펴지 못했다.
 티스도 쿠키를 먹느라 말을 하지 않자 테이블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르제 남작이 답답한 한숨을 쉴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셨나 보네요.”
 티스의 지시로 아이린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들어서는 인물은 남작과 비슷한 또래의 중년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나르제 남작의 얼굴이 굳었다.
 “넌…….”
 “어서 오세요, 마이스 남작님.”
 나르제 남작과 경합을 벌였던 마이스 남작이 티스의 집으로 들어선 것이다.
 남작은 곧장 티스에게 다가오더니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약속했던 돈이네.”
 아이사가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다이아몬드와 큰 금괴 하나가 들어 있었다.
 “500골드는 충분합니다.”
 아이사의 판단에 티스가 크게 웃었다.
 “마이스 남작님께서는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 고마워요.”
 “자네 덕분에 일이 잘되었네. 고맙네.”
 “별말씀을요. 저도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니 고마워하실 거 없어요.”
 티스가 인사를 하는 사이에 아이사가 품에 있던 서류를 꺼내 마이스 남작에게 건넸다.
 “이걸로 거래는 끝났어요.”
 “그럼 돌아가겠네.”
 “지난번에 드셨던 쿠키예요. 드시겠어요?”
 티스는 일부러 마이스 남작에게도 쿠키를 권했다. 마이스 남작은 웃으며 쿠키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아이린의 솜씨겠군. 지난번의 오리구이도 정말 대단했네. 언제든 그녀가 요리를 한다면 초대해 주게.”
 “물론이죠.”
 “아쉽지만 난 이만 가 봐야겠네.”
 마이스 남작은 나르제 남작에게 슬며시 웃어 보이고는 집을 나섰다.
 나르제 남작은 충격으로 인해 말을 잃었다. 곁에서 화를 삭이던 아들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고 입을 열었다.
 “두 가문 모두에 돈을 빌려 준 건가?”
 그의 말대로였다.
 이번 일은 영주 선출이 갑작스레 결정 나면서 벌어졌다.
 두 남작가 모두 많은 재산이 있지만 200골드라는 현금을 단시간에 구하기는 무리였다. 결국 곧바로 돈을 빌릴 수 있는 티스를 찾았고,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티스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나르제 남작이었다. 티스는 그에게 로비 자금으로는 충분한 200골드를 빌려 주고는 담보를 받았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마이스 남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티스는 나르제 남작이 다녀간 사실을 알리고 마이스 남작에겐 400골드를 빌려 주었다.
 두 배에 이르는 로비 자금을 가졌으니 결과는 뻔했다.
 예상대로 마이스 남작이 영주가 되었고, 티스는 이자까지 500골드에 이르는 돈을 회수했다.
 나르제는 티스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영주가 되기 전에 갚아야 할 250골드를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이곳을 찾아왔다. 자신이 직접 찾아오면 날짜를 미룰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 자정이에요. 전 한번 한 약속은 어기지 않아요.”
 티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르제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자네에게 마이스 남작을 죽이라고 의뢰할 걸 그랬군.”
 “앙트 내부의 귀족을 죽이는 의뢰라면 전 재산을 내놔도 부족해요.”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금액만 맞는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어요.”
 티스가 자리를 떠나자 아이사가 뒷일을 맡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티스는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피부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운 천 옷이었고 무늬가 없어 투박한 느낌이 났다.
 “일은 잘 끝나셨나요?”
 “물론이지.”
 아이린이 귀엽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그녀는 언니인 아이사와 달리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소녀였다.
 “이제 당분간 손님은 받지 마. 연구실에 다녀올 거니까.”
 “네, 주인님. 그럼 전 식사 준비를 하러 갈게요.”
 “그래.”
 아이린이 물러가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이사가 들어섰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제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용병들로는 안 되겠어?”
 “네.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차라리 내가 갈까?”
 “아닙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연구실에는 아이린을 동행시키겠습니다.”
 아이사는 아이린을 추천했다.
 “벌써 함께 다닐 수 있을 정도야?”
 “재능으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너무 착한 심성만 극복하면 주인님을 지키기엔 충분합니다. 어차피 연습을 해야 하니 이번에 동행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뭐, 아이사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알았어. 아이린과 다녀올게.”
 티스는 간단히 결정을 내렸다.
 아이린은 티스와의 동행에 뛸 듯이 기뻐했지만, 아이사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아야 했다.
 “상대를 죽여야 할 일이 생기면 절대 주저하면 안 돼. 널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지?”
 “응, 언니. 주인님을 지키기 위해서.”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언니.”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면 영락없이 사이좋은 자매였다.
 “살 물건들이 많아. 늦으면 도도루가 투덜댈 테니까 어서 가자.”
 “네, 주인님. 그런데 무기와 갑옷은 어쩔까요?”
 “없어도 돼.”
 티스가 집을 나선 것은 아침 식사 직후였다.
 정문 앞의 마차에 오르면서 티스가 홀로 남는 아이사에게 말했다.
 “한 달 후에 떠날 거야. 적당한 의뢰를 알아봐.”
 “좀 더 쉬셔야 합니다.”
 “아니야. 지시대로 준비해.”
 아이사는 평소와 달리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사.”
 “네, 알겠습니다.”
 티스는 대답을 듣고서야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는 가장 먼저 시장에 들러 물건들을 실었다. 그 후에야 성문을 나서서 넓은 초원으로 들어섰다.
 “아이린, 옆으로 와. 여기가 더 재미있으니까.”
 “네!”
 아이린은 소풍 가는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이처럼 앙트를 벗어나는 것은 그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와!”
 초원은 아이린의 탄성을 자아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녹색 융단은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린은 도도루를 오랜만에 보는 거지?”
 “음, 여덟 살 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요.”
 아이린은 겨우 열네 살이다. 어릴 때부터 특수하게 자란 환경이 없었다면 아직 한창 응석을 부릴 나이였다.
 “도도루도 많이 변했나요? 전 많이 변한 거 같은데.”
 “어디까지 기억이 나?”
 “다 기억나요. 저에게 무척 잘해 줬어요.”
 “잘해 줬다고?”
 티스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아이린을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흑심이 있었을 거야. 그때는 아이린이 어려서 몰랐던 거고.”
 “네? 흑심요? 하지만 도도루에겐 링링이…….”
 “너, 도도루와 링링이 어떻게 사랑을 확인하는지는 알아?”
 “아뇨. 그냥 좋아서 같이 있는 거 아니었나요?”
 아이린은 티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도도루와 링링, 모두 너무 보고 싶어요.”
 “그래. 일단 직접 보고 판단해. 분명히 어릴 때와는 느낌이 다를 테니까. 넌 도도루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았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직접 보면 알아. 그리고 조심해야 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티스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초원 가운데 만들어진 울창한 숲이 그들의 목적지였다.
 우거진 나무들을 헤치고 들어가자 풀로 교묘하게 가려 놓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구덩이의 흙을 치워 내자 나무판자가 나타났고, 티스는 그 위를 노크하듯 두드렸다.
 잠시 후에 판자의 중앙이 접히며 한쪽으로 밀려나고 털이 가득한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거대한 몽구스의 얼굴이었다.
 “악!”
 아이린이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꺼내 들고는 티스의 앞을 막았다. 불쑥 튀어나왔던 얼굴도 같이 놀라며 구덩이로 숨어 버렸다.
 “이봐, 도도루! 나야!”
 구덩이 안에 티스의 목소리가 울렸고, 몸을 숨겼던 도도루가 다시 나타났다.
 “이 여자애는 누구야?”
 도도루가 말을 하자 아이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도도루! 나예요, 아이린! 여전히 몽구스네요.”
 “아? 아이린? 아직 저주를 풀지 못했어. 그나저나 훨씬 예뻐졌네. 역시 성장기에 있는 여자는 금방 달라져. 어서들 들어와.”
 몽구스의 얼굴을 한 도도루가 사라지자 티스는 아이린에게 슬쩍 말했다.
 “변태 마법사야.”
 “네?”
 “원래 변태 마법사였어. 아이린이 몰랐을 뿐이지. 조심하는 게 좋아.”
 도도루는 티스의 주의를 들었는지 다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털이 가득한 몽구스의 얼굴에도 분명히 표정이 나타났다.
 아이린은 도도루를 빤히 쳐다보더니 긴장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역시 귀여워요!”
 “위험해, 그런 발언은.”
 티스가 먼저 구덩이 앞으로 갔다. 몽구스가 구덩이 속으로 사라지자 티스가 바닥에 앉았다.
 “아이린, 바로 따라와.”
 티스가 구덩이 안으로 미끄러졌고, 아이린은 그를 따라 했다. 그들이 사라진 구덩이는 스스로 입구를 막더니 풀과 흙이 몰려들어 완벽하게 은신이 되었다.
 “우와!”
 구덩이 안으로 들어선 아이린은 감탄을 연발했다.
 연구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구덩이 안은 저택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규모에,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초원에서 보던 일정한 크기의 풀이 자라고 천장에는 수십 개의 빛나는 돌이 박혀 있었다.
 연구실은 특별히 방이 없고, 큰 홀이 전부였다. 그곳이 연구실이자 침실이었고 화장실이 되기도 했다.
 벽면으로는 정리된 집기들이 가득하고 중앙의 커다란 책상에는 현재 진행 중인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아이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지러운 문자가 쓰인 양피지와 은색의 돌이었다.
 “혹시 이게 마법 스크롤인가요?”
 종이를 찢으면 그 안에 담겨 있던 마법이 발동되는 것이 마법 스크롤이다. 일반인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아이린이 관심을 나타냈다.
 “끌끌,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물어보시니 제가 설명을 해 드립죠.”
 도도루가 아이린에게 다가갔다. 어릴 때도 보았지만 두 발로 서서 걷는 몽구스의 모습은 여전히 신기했다.
 도도루는 손가락 대신 돋은 발톱으로 익숙하게 스크롤을 집어 들었다.
 “여길 이렇게 잡고 찢으시면 됩니다.”
 “네? 지금 해 보라고요? 이렇게 귀한 걸…….”
 “끌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드립지요.”
 아이린은 도도루의 말대로 스크롤을 찢었다. 순간, 홀 안으로 강렬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서 화산처럼 솟아오르는 바람에 아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하체가 시원해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끌끌.”
 치마가 뒤집어져 다리가 드러나는 것을 도도루가 느끼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말했잖아, 변태 마법사라고.”
 “아…….”
 아이린은 뒤늦게 티스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는 도도루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티스의 등 뒤로 가서는 고개만 내밀어 도도루를 관찰했다.
 “이봐, 도도루. 연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큼. 그게 말이지…….”
 도도루는 곤란한 대답을 할 때는 콧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를 냈다.
 “큼, 자네가 말한 마력석이란 것 말인데, 특별한 조제법이 있는 것 같아.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자네가 말한 돌은 없더란 말이지.”
 도도루는 책상 위에 있는 은색 돌을 집어 들더니 티스 앞으로 던졌다.
 “이것도 아니란 말이야? 분명히 마법에 반응을 한다고 했잖아.”
 “마나석으로는 아주 우수해.”
 “그런데?”
 “어디서 그런 고가품을 구했는지는 몰라도 마력을 저장하는 건 무척 우수하더군. 하지만 실체화된 마법을 저장하진 못해. 그건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야. 피를 공급하는 심장 말이야. 하지만 자네가 말한 마력석은 두뇌가 되어야 하거든. 정해진 공식이 확실히 각인되어 있는 두뇌 말이야. 그러니까 종류가 달라.”
 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도도루가 티스에게 바짝 다가오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말한 그 완성된 검을 달라고. 불과 얼음이 동시에 있는 검 말이야. 그걸 나에게 주면 연구가 진척될지도 몰라.”
 “그걸 주고 나면, 난 나가서 죽으란 말이야?”
 “그만큼 싸움질을 하고 다녔으면 이제 없어도 되지 않나?”
 “내 목숨과 같은 거야.”
 티스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큼.”
 “줄 수 있는 물건이면 벌써 줬어.”
 도도루는 여전히 아쉬운지 책상 앞에서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네가 좋아하는 마법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게 해 주겠다, 내가 그 말에 속아서 이 컴컴한 굴속에서 청춘만 낭비하고…….”
 “원하는 대로 해 준 거 같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 내가 원하는 연구가 뭔지 알잖아. 자네가 의뢰한 마법을 연구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다고.”
 “그건 네가 척척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둘은 말싸움을 하는 듯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친구끼리 농담을 하는 분위기였다.
 “좋아. 일단 몇 가지 보여 줄 게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도도루는 대화를 멈추고 털이 가득한 손을 움직여 양피지를 잡았다. 그러고는 펜 모양의 금빛 돌을 집어 들고는 눈을 부릅떴다.
 양피지에 닿은 금빛 돌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양피지는 돌이 지나간 자리에 핏빛 무늬를 남기기 시작했다.
 “저기, 주인님.”
 아이린이 티스의 등을 쿡쿡 찔렀다.
 “왜?”
 “도도루가 연구하고 싶어 하는 마법이 뭔가요?”
 돌연변이 몽구스가 원하는 마법은 뭘까? 어릴 때 잠시 같이 있었을 뿐이라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사람이 되는 마법 같은 거예요?”
 그녀의 순진한 생각에, 티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보다는 좀 더 화려하지.”
 “음, 그럼 하늘을 나는 마법?”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뭐예요?”
 티스는 궁금해하는 그녀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
 “네?”
 운석을 불러 원하는 지점에 떨어트린다는 궁극의 마법이었다.
 학자들은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발현되면 대륙 전체가 망할 것이라 예측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실현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런 마법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건, 오래전, 드래곤이 남긴 문헌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메테오 스크라이크라면…….”
 워낙 유명해 아이린도 알고 있었다.
 “맞아. 저 녀석이 원하는 건…….”
 티스가 장난스레 무서운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세상의 파멸이야.”
 “네?”
 아이린은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떨었다. 그러다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공할 수 없는 마법이죠?”
 “글쎄.”
 “글쎄라니요?”
 티스는 그녀와 달리 별다른 감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저 녀석이라면 성공할지도 몰라. 세상에 가진 게 마법밖에 없는 녀석이거든.”
 “그렇게 되면…….”
 “뭐, 우리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되겠지.”
 “주인님은 너무 속 편한 소리만 해요. 당연히 말려야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마법이 곧 완성될 거 같으니까.”
 티스의 말대로 도도루의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티스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아이린에게 말했다.
 “아 참, 미리 말해 두는데, 변태 부부야.”
 “네?”
 “알고 있잖아? 도도루의 부인.”
 “아! 링링!”
 아이린은 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또 다른 인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티스는 그런 아이린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슬며시 웃기만 했다.
 티스가 아이린의 표정을 즐기는 사이, 도도루는 스크롤을 완성했다. 문자가 새겨진 양피지는 한차례 빛을 뿜어내고는 잠잠해졌다.
 “후우.”
 도도루는 두꺼운 발톱 두 개로 스크롤을 들어 올리더니 티스를 보며 흔들었다.
 “끌끌, 시험해 봐.”
 티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스크롤을 받고는 한발 뒤로 물러나 힘차게 찢었다.
 공중에 도도루가 그렸던 문자들이 떠오르더니 빛을 뿌리며 흩어졌다. 순간, 티스의 몸이 사라졌다.
 “어? 주인님!”
 아이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티스가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그러다 뭔가에 부딪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이고! 아이린, 날 보호해 준다더니, 죽일 셈이야?”
 아이린의 옆에 티스가 쓰러진 채 나타났다.
 “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티스를 부축하며 아이린이 물었다.
 “끌끌, 투명 마법이지. 어제 성공했어. 시간이 짧은 것이 아쉽지만.”
 투명화 마법은 고위 마법으로, 대륙 전체에서도 성공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스크롤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도도루의 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냥 농담한 거야.”
 티스는 아이린을 진정시키고 도도루에게 또 하나의 스크롤을 받았다.
 “부탁했던 스크롤들은?”
 “여기 있어. 가속화 마법과 근력 마법.”
 “고마워.”
 티스는 스크롤을 품속에 챙겼다.
 “그런데 양피지가 다 떨어졌어.”
 도도루가 양팔을 벌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곧 보내 줄게.”
 “자네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꽤나 비싼 물건인데 한 번도 곤란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마음껏 연구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잖아.”
 양피지에 마법을 새기는 건 분명히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난해한 것이 양피지 제작이었다. 마법을 담을 수 있는 양피지를 제작하려면 수십 가지의 재료와 스크롤 제작에 관한 특별한 연구가 필요했다.
 “그런데 링링은 어디 있는 거야?”
 “곧 나타날 거야. 좀 전에 죽었거든.”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티스의 머리 위에서 작은 불이 반짝였다.
 “티스!”
 여자아이같이 귀여운 목소리였다.
 “어…….”
 이번에도 아이린은 놀라고 말았다.
 불빛 안에서는 투명한 날개를 가진 요정이 작은 손과 발을 움직여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붉은 불빛에 어울리는 녹색 머리카락과, 얼굴에 비해 커다란 눈이 특징이었다.
 “잘 지냈어?”
 “남편이 잘 놀아 주고 있어!”
 그녀는 항상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야?”
 링링이 작은 날개를 움직여 아이린 얼굴 앞에 섰다.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 구석구석을 살핀 링링은 한쪽 손을 허리에 대며 위협하듯 말했다.
 “내 남편을 어쩔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링링! 저예요, 아이린!”
 “아이린? 아! 도도루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줬던 꼬마? 역시 인간은 성장 속도가 빨라. 만날 징징거리더니 벌써 이렇게 컸네.”
 금세 웃음을 보인 링링은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큰 도도루의 머리 위에 앉았다.
 “남편, 한 번 더 하자.”
 “또 하자고?”
 “이번에는 정말 짜릿했어. 전율을 느꼈다고.”
 “좋다고 너무 자주 하면 안 돼.”
 “에이, 그러지 말고 강하게 한 번만 하자. 응?”
 도도루는 티스와 아이린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링링이 계속해서 머리 주변을 날며 투정을 부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준비해.”
 “와!”
 링링이 아이처럼 좋아하며 연구실의 구석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자리를 잡자 도도루는 스크롤 더미에서 가장 아랫장을 뽑았다.
 “물러서게.”
 티스가 아이린과 함께 뒤로 물러서자 도도루가 스크롤을 찢었다. 순간 그의 손에 거대한 빛의 창이 생성되었고, 도도루는 그것을 구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피해요!”
 아이린이 놀라서 소리쳤다. 창이 날아가는 방향에 링링이 있었기 때문이다.
 팡!
 창은 정확히 링링을 뚫었다. 작은 몸은 양쪽으로 갈라져 아래로 떨어지다 작은 불꽃을 일으키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아이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지만 도도루와 티스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나빠요!”
 아이린이 단검을 꺼내더니 도도루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티스의 말이 먼저였다.
 “곧 살아날 거야.”
 그 말이 아이린을 멈춰 세웠다.
 “뭐라고요?”
 “불사조야. 조금 있으면 살아나.”
 아이린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도도루, 지금까지 연구한 건 잘 기록하고 있지?”
 “자네가 시킨 일 중에 가장 귀찮은 거지.”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 절대 잊지 마.”
 “물론이네. 그리고 그 기록의 소유권도 자네한테 있지. 하나도 잊지 않았어.”
 말을 마치면서 도도루는 여러 가지 물건의 이름이 적힌 목록을 내밀었다. 티스는 그것을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 많이 벌어야겠네.”
 티스는 그 말을 끝으로 도도루와 인사를 하고는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3. 목표
 
 *열한 살―2월 1일*
 
 자유란 것은 익숙하지 않은 자에겐 깊은 두려움이 된다.
 열한 살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얻은 자유는 날 공황 상태에 빠트렸다.
 앙트의 판잣집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나의 소유였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누구도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노예 신세에서 해방된 기쁨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밥조차 먹을 수 없는 고난이 시작되었다.
 날 안내해 준 사람이 떠난 첫날. 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허름한 단칸방 문을 열면 두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골목이 보였고, 골목의 끝은 조금 큰 길로 연결되었다. 꺾어진 큰길을 따라가면 앙트의 성문이 멀지 않은 큰길이 나왔다. 그 주변에는 여관과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본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난 내가 가진 것들을 확인했다.
 다섯 개의 슬롯이 있는 갑옷과 이미 두 개의 마법석이 박힌 검 한 자루, 형의 편지와 돈이 든 주머니 그리고 기본적인 가구밖에 없는 판잣집.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은 사흘이나 계속되었다.
 방 한쪽에 놓인 물통이 갈증을 해소해 주었지만 음식은 없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는 불청객까지 찾아왔다.
 쾅!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찢어진 옷과 악취가 나는 부랑자였다. 그는 내가 없는 동안 이곳을 이용한 듯했다.
 부랑자는 내가 어린 것을 보고는 대뜸 안으로 들어왔다.
 난 멍하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여긴 내 집이다.”
 부랑자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나의 집이었다.
 “나가세요.”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노예는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다. 항상 소유를 당할 뿐이다. 난 처음으로 뭔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꼬마 녀석아, 괜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꺼져라.”
 부랑자는 인상을 썼다. 날 무섭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다가오자 악취가 강해졌다. 불쾌했고, 또 두려웠다.
 “당장 꺼져!”
 부랑자가 목소리를 높였고 난 놀라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형…….’
 형이 없었다. 날 지켜 주던 형이 없었다.
 그때서야 실감했다.
 난 혼자다.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해야 한다.
 위기를 느꼈을 때, 난 형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우린 운이 좋은 형제야.
 
 왜 늦게야 눈물이 났을까?
 난 부랑자 앞에서 울고 말았다. 갑자기 터트린 울음에, 부랑자는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마치 승리자처럼 거만하게 몸을 젖혔다.
 나에게 더 크게 보이려는 수작인지 꼿꼿하게 허리를 폈지만, 내가 본 어떤 지배자보다 허술했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영원히 함께 살자.
 
 형은 마법사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분명히 이겨 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노력해야 한다.
 형과 다시 만나려면 지금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꺼, 꺼져…….”
 힘을 내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뭐라고? 잘 들리지도 않는데?”
 부랑자는 비웃었다. 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이 잡혔다.
 피부를 파고든 한기가 심장까지 얼려 버리는 듯했다.
 나쁘지 않았다. 무기라는 것의 든든함에는 용기가 따라왔다.
 “꺼져!”
 부랑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화르르!
 불꽃이 일어 부랑자를 덮쳤다.
 “악!”
 부랑자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러났다. 다행히 불꽃이 약해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 잠깐…….”
 “당장 꺼져!”
 난 다시 한 번 칼을 들어 올렸고, 부랑자는 거의 기다시피 도망을 가 버렸다.
 “헉. 헉.”
 난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유란 이런 것이다.
 지키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는 전쟁터와 같았다.
 부랑자를 몰아낸 다음 날.
 난 바닥의 판자 하나를 뜯어내 내가 가진 것들을 숨겼다. 갑옷과 무기, 돈과 편지를 숨긴 다음 집을 나섰다. 밖으로 가지고 나간 건 은화 하나가 전부였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나는 자유에 익숙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깨달았다.
 음식은 항상 비싼 값에 샀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대답에 돈을 주기도 했다. 소유라는 개념이 약한 나에게 소유에 집착하는 자유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유하기 위해 남의 소유를 빼앗는 데 익숙했다. 거기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다.
 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
 석 달을 그렇게 보냈다.
 그때서야 겨우 다른 사람과 비슷한 가격에 음식을 사고, 그들의 행동을 깨달았다. 또 하나, 돈의 중요성을 알았다.
 형이 준 돈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겨우 허기만 채우는 식으로 살아도 1년이면 끝이었다. 꽤나 많은 돈을 받은 탓에 1년이라는 시간을 벌었지만 그래 봤자 겨우 열두 살이 될 뿐이다.
 일을 찾아야 했다.
 돈이 줄어들면 자유를 지키는 힘도 약해진다.
 자유 속에 살아간다는 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열한 살―5월 1일*
 
 “그럼 내일부터 나오너라.”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허락을 받았다.
 석 달 동안의 노력 끝에 겨우 얻어 낸 자리였다.
 다음 날 아침.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빨리 일할 장소로 갔다.
 그곳은 앙트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중산층들의 주택가였다. 크지 않은 주택들이 열을 맞춰 지어진 탓에 조용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났다. 난 그중에서 큰 나무 두 그루가 대문을 대신하는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두드리고 한참을 기다리자 중년 여성이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벌써 왔어?”
 “네!”
 “씩씩하구나. 들어오렴.”
 난 중년 여성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저분이란다. 잘 모셔야 한다.”
 거실에서 이어진 방문 하나가 열렸다.
 넓은 유리로 햇볕이 들어오는 자리에 흔들의자가 놓여 있고 무릎에 담요를 덮은 노인이 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난 그를 보살피는 일을 맡았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나마 아직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노인이라 일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먼저 다가가 인사를 했다.
 “오늘부터 제가 돌봐 드릴게요.”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날 하루 종일, 난 노인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일을 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름이 뭐냐?”
 “티스예요!”
 놀라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착하구나.”
 “그런가요?”
 “넌 네가 착한 줄도 모르는구나.”
 노인이 웃었다.
 목소리도 들려주고 웃기도 하고. 그날 노인은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그 후로 노인은 지금까지의 침묵이 착각이라 생각할 정도로 많은 말을 했다. 처음에는 주로 나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말을 했다.
 그때가 열한 살 6월 1일.
 노인과 만난 지 한 달이 되던 때였다.
 그와의 대화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많은 경험과 지식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었고, 나는 공부를 하듯 하나하나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의 이런 점을 노인은 무척 좋아했다.
 “넌 내 말을 잘 들어 주는구나.”
 “더 말해 주세요.”
 노인의 말을 들어 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건 어디서든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어떻게든 이야기를 들으려는 내가 노인에겐 큰 즐거움이 되었다.
 결국 두 달쯤이 지났을 때, 노인은 나에게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았다.
 “돈이라는 녀석이 문제였지.”
 
 
 *열한 살―7월 15일*
 
 처음으로 노인이 나에게 눈물을 보인 날이었다.
 “난 돈의 노예였단다.”
 노예라는 말에 괜히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였지. 먹고살 것이 없어 돈을 벌어야 했단다. 운이 좋아 많은 돈을 벌었지. 그런데도 하나를 얻으면 둘을 벌려고 살았고, 그게 나중에는 열, 백, 천이 되더구나.”
 노인은 불과 3년 전까지 계속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꽤나 큰 상단을 꾸렸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만두기로 했다.
 “건강을 잃고는 다 부질없음을 알았단다. 상단을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 집을 샀지. 그때 이곳으로 왔단다. 그런데 말이다.”
 노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손님이 많이 찾아오더구나.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목적은 하나였단다. 내가 가진 돈이었지. 그리고 멀리 살던 자식들도 찾아왔지.”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더구나. 내가 녀석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돈이 녀석들을 불렀어.”
 노인은 자신의 인생을 후회했다.
 “돈은 쓰려고 버는 것임을 잊었단다. 난 모으기만 했지. 결국 그것이 화가 되었어. 자식들이 날 돈으로만 보더구나.”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문을 열어 준 이가 노인의 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내면서 다른 두 명의 아들도 보았다.
 그들은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대부분 노인의 재산에 대해서 말을 할 때였다.
 “넌 돈을 어떻게 쓰고 싶으냐?”
 무작정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돈을 벌려고 했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일단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잖아요.”
 “그럼 살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 생긴다면 어쩌겠느냐?”
 난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그 대답을 들려주겠느냐?”
 노인은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생각이 나면 말해 다오. 기다리고 있으마.”
 어려운 질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은 의외로 간단히 떠올랐다.
 “생각났어요.”
 “그래, 말해 보아라.”
 대답을 기다리는 노인에게 난 당당히 말했다.
 “형을 위해서 쓸 거예요.”
 처음으로 목표라는 것을 정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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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성문 앞에서 아이사를 발견한 아이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사는 직접 성문 밖에서 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제가 몰겠습니다.”
 아이사에 의해 티스는 마부석에서 쫓겨났다. 이제 그는 주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어제 일은 어떻게 됐어?”
 “노예 문서와 오색 다이아몬드를 가져왔습니다.”
 “문제는 없었어?”
 “네.”
 아이사는 간단히 대답했지만 티스는 귀족들이 순순히 약속대로 물건을 내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수고했어.”
 어려운 과정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아이사를 믿는 탓에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온 것은 정오쯤이었다.
 아이린이 만든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이사는 몇 가지 보고를 했다.
 “당분간 다툼이 있을 수 있는 일은 중단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최근 경계가 강화되어, 다툼이 일어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경계가 강화되었다고?”
 티스가 잠시 식사를 멈추고 물었다.
 “사흘 후에 대마법사 아르나제가 앙트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마법사 길드에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공식적인 방문이라 호위병들이 긴장한 상태입니다.”
 아르나제라는 이름에 티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불가능합니다.”
 아이사는 예상을 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그가 무슨 일로 온 건지라도 조사해 봐.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식사를 하며 화제를 바꿨다.
 “도도루 쪽은 어떻습니까?”
 “요구하는 물건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연구가 잘되고 있다는 뜻이지.”
 “오색 다이아몬드를 처분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도도루가 원하는 물건을 구하는 게 먼저야.”
 아이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티스의 말에 이견을 달 때면 항상 보이는 버릇이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용병 길드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 확보 완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도도루 쪽에서 조금만 참아 주면 인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자칫 자금이 막히면 지금까지 투자한 것까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네가 적절히 조절해. 너한테 맡겨 놓은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보다, 흩어진 마법사들에 대한 정보는?”
 아이사는 갑자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상한 반응에 티스가 재촉했다.
 “뭔가 알아낸 거야?”
 그녀는 여전히 침묵했다.
 “말해. 시간만 끌 뿐이야.”
 아이사는 오랫동안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최근 용병 길드에 스무 명을 모으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의뢰비도 높고 모집 인원이 많아 조사를 해 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니?”
 “용병 길드에 직접 의뢰가 들어왔고, 선수금으로 전액이 지급되었습니다.”
 티스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비밀 의뢰가 숨어 있다?”
 “그렇습니다.”
 “비밀 의뢰가 뭐였어?”
 “겉으로는 정찰이지만, 적의 전멸이 목적이었습니다.”
 분명 평범한 의뢰가 아니었다.
 “마법사들과 관련이 있는 거야?”
 “지금까지의 의뢰 형태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티스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나 혼자 갈 수 있게 만들어.”
 “안 됩니다.”
 아이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하지만 티스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진지해지자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해야 돼.”
 “주인님,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아이사는 그 말을 후회했다. 티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기 때문이다.
 “날 화나게 하지 마.”
 처음 티스를 만났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아이사는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음을 알았다.
 ‘불쌍한 분.’
 녹색 피를 뒤집어쓴 악마가 붉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사는 티스와의 첫 만남을 잊지 않았다.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티스와 아이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안해.”
 “아닙니다.”
 티스는 다시 웃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귀족들 사이에서 내 평판이 나빠지고 있다고?”
 “나쁜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당한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런데 자기가 당한 건 꼭꼭 숨기는 녀석들인데, 꽤 빨리 퍼졌어.”
 “더린 상회에서 소문을 퍼트리는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역시 그 녀석들이네.”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서 식사가 끝나고 티스가 즐기는 모르트 차가 준비되었다.
 대화는 아이사와 티스가 진행했지만 아이린이 듣는 걸 차단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이린은 알고 있는 정도로만 끝냈다.
 “더린 상회가 주인님의 소문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나쁘게 하고 있지 않아?”
 “귀족과 뒤가 구린 단체를 상대로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용병 일은 그들의 의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객관적이지 못해. 아이사답지 않아. 내가 하는 짓은 분명 나쁜 짓이라고. 상대가 어떻든.”
 아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어쨌든 좋아.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비난을 받는다고 멈출 수는 없지. 더린 상회를 집어삼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뭐지?”
 “상회는 카이잔이라는 자가 3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의 명령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앙트 안의 상인 중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자가 절반에 달합니다.”
 “관리 능력은 어때?”
 “우수합니다. 빚을 진 상인들 대부분이 상환 능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도의 부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융통성 있게 상환을 조절하고 있어 평판도 나쁘지 않습니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티스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좋은 놈을 무너트리자는 거지?”
 “그렇습니다.”
 “날 더 나쁜 놈으로 만들려고?”
 “길드 확장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길드에 속하지 않은 상인들은 철저히 짓밟는 녀석들입니다. 좋은 평판은 같은 편일 때뿐입니다.”
 예상했던 대답인지, 티스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녀석들의 약점은 찾았어?”
 “그를 죽이고 현재 보유한 자금으로 상인들을 회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용병 길드의 인수가 늦어지겠지만, 상인 길드를 장악한다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후의 계획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티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아이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에 의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해.”
 “저 역시…….”
 “아이사, 잘 들어. 이곳의 길드들을 통합하면 네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해. 알다시피 난 귀족들이 마음만 먹으면 수십 가지의 죄목을 붙일 수 있어. 그래서 넌 깨끗해야 돼. 적어도 이 도시 안에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심각한 이야기가 끝나고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 참, 어제 확보한 노예들은 어떻게 됐어?”
 “말씀하신 대로 모두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각자 일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좋아. 완벽히 풀어 줘. 그들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거야.”
 현재까지 티스가 풀어 준 노예는 백여 명에 달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꽤 큰돈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모으려는 티스의 목표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하지만 이건 티스의 힘이 되어 주는 일이었다.
 ‘생명의 은인이 되는 거지. 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최고의 정보력이 될 거야. 가장 험하고 위험한 일들을 할 테니까.’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이 당장 고급스러운 일을 할 수는 없다. 대부분 단순 노역이나, 다른 사람이 꺼리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 곳에는 특별한 정보들이 넘쳐 난다.
 티스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물어보기 위해 접근하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은 신이 내린 구원과 같다. 적어도 해방된 노예들에게 티스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 난 마법사 의뢰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지하실에 있을게.”
 “네,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티스는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아이린!”
 “네!”
 쿠키를 만들던 아이린이 곧장 대답하며 달려왔다.
 “지하실에 갈 거야. 준비해.”
 “네!”
 아이린은 크게 기뻐하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다시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티스가 아이사에게 물었다.
 “내가 어릴 때 어디서 탈출했는지는 찾았어?”
 “아직 조사 중입니다.”
 “틈틈이 보고하도록 해. 거기가 어딘지 알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아무리 기록을 뒤져 봐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
 “보고할 사항이 생기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진심이야.”
 조금 전에 화를 냈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티스는 다시 한 번 아이사를 달래 주었다.
 “주인님! 준비됐어요!”
 아이린은 어느새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연결된 푸른색 로브를 걸치고 나왔다.
 “가자.”
 “네!”
 아이사를 남겨 두고 그들이 향한 곳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뒤쪽이었다.
 계단을 지탱하는 벽 앞에 선 티스는 모서리로 손을 뻗었다.
 철컥.
 모서리의 끝이 티스에 의해 살짝 비틀어지자 벽면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약간 뒤틀린 공간을 밀자 벽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아이린이 먼저 등을 들고 계단으로 내려갔고 티스가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지하 창고는 큰 책상을 중심으로 벽면이 책장으로 채워진 서재의 형식이었다.
 티스가 책상에 자리를 잡자 아이린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끌어와 정면에 앉았다.
 “상자를 가지고 올까요?”
 “그래.”
 서재에 들어서면 버릇처럼 확인하는 것이 있는 터라 아이린이 먼저 질문을 하고는 비워진 책장 아래 놓인 상자를 책상으로 가지고 왔다.
 상자는 아이린이 혼자 들 수 있는 무게였지만 길이가 만만치 않아서 양팔을 쭉 뻗어야 끝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티스는 익숙하게 상자의 자물쇠를 열어 안을 보았다. 제일 먼저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고 얼음과 같은 한기가 뒤따랐다.
 상반된 기운은 상자 안의 칼에서 발생했다. 검 아래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하얀 갑옷이 자리했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과 전장을 누비던 무구였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티스는 도도루를 떠올렸다.
 “어쩔 수 없어. 난 아직 죽으면 안 되거든.”
 확인이 끝나고 상자가 치워지자 티스는 오른쪽 책장 앞으로 갔다. 책상의 정면을 제외하고는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책장은, 오른쪽은 거의 채워졌지만 왼쪽과 뒤쪽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없었다.
 “아이린, 지난번에 상태가 어떻다고 했지?”
 “불이 커지니까 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지도 않아요.”
 “어디 보자. 여기 있네.”
 티스는 서류를 모아 둔 듯 조잡하게 엮인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분명 여기서 봤는데.”
 책상으로 돌아간 티스가 열심히 책을 뒤적거렸다.
 “주인님은 참 신기해요. 그 글자를 어떻게 다 읽어요?”
 티스가 보고 있는 글자는 흔히 사용하는 제국어가 아니었다. 고대의 문자로, 해석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티스는 마치 익숙한 글을 보듯이 빠르게 읽었다.
 “3년이나 이 일을 했거든.”
 “주인님이 우릴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싶은데, 언니가 묻지 말라고 했어요.”
 “그건 말해 달라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둘 다예요. 궁금하지만 언니가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럼 아이사에게 허락을 받으면 말해 줄게.”
 절충안을 내놓은 티스는 다시 책을 주시했다.
 “어디 보자. 그래, 여기였지.”
 티스는 원하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목하고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완성된 입자의 구성을 조절하지 못하면 의지의 기억이 번진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린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직접 해 보자.”
 “네!”
 아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이 없는 벽면에 섰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오른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도록 내밀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뜨자 손바닥 위로 얼굴만 한 불꽃이 만들어졌다. 불꽃은 손바닥과 한 뼘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커지더니 손바닥과 멀어졌다.
 “그만. 거기가 문제야.”
 아이린이 손을 오므렸고 불꽃은 사라졌다.
 “불꽃을 만들고 나서 안심하는 사이에 입자 구성 기억이 주변 공기에까지 전달되는 거야. 그래서 불꽃이 커지는 거지. 불꽃의 크기가 네가 조절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점점 떠오르는 거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불꽃을 만들어 낼 때 가장 집중이 잘될 거야. 그 기분을 계속 유지해. 그리고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다시 불꽃을 만들어 낸다는 기분으로 해 봐.”
 아이린은 곧바로 다시 마법을 시현했다.
 불꽃이 떠오르고 시간이 지나 점점 커지기 시작하자 아이린이 눈을 감았다. 이내 불꽃은 안정을 찾았고, 아이린은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히자 티스가 말했다.
 “이제 불꽃을 움직여 봐. 던진다는 기분이 아니라 공중에 선을 그어서 얹어 놓는다는 기분으로.”
 아이린은 지시한 대로 시도를 했지만 불꽃은 흔들리기만 했다.
 “움직이려고 하는 게 아니야. 네가 목표로 한 지점까지 가상으로 선을 그어. 불꽃은 그 선에 매달려서 미끄러지는 듯이 가는 거야.”
 “후우.”
 긴 한숨으로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킨 아이린은 지시대로 불꽃이 움직일 경로를 만들었다.
 “좋아. 조금만 더.”
 손바닥 위에서 흔들리던 불꽃이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경로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됐어. 거기까지만 해.”
 팟!
 불꽃이 사라지자 아이린은 땀을 닦으며 의자로 돌아왔다.
 “괜찮았어요?”
 “좋아. 역시 아이린은 습득이 빨라.”
 “주인님이 더 빠르잖아요.”
 “내가 뭐가 빨라? 아직 제대로 성공한 마법이 없는데.”
 “그거야 어려운 마법만 시도하시니까 그렇죠. 전 주인님이 그런 마법을 연구하는 게 걱정돼요. 언니도 걱정하고 있어요.”
 티스는 원치 않는 주제가 나오자 웃으며 넘겨 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린이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했다.
 “주인님, 그러지 말고…….”
 “아이린, 말했잖아. 누군가는 해야 돼. 그리고 좋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내가 하는 거야. 나쁜 건 나쁜 놈이 해야지. 안 그래?”
 “주인님은 나쁘지 않아요!”
 “됐어.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할 일이 많아.”
 아이린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원래 하던 대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날 깨워.”
 “네.”
 “그렇게 기죽어 있지 마. 다 잘될 거니까.”
 “네!”
 힘찬 대답에 마음이 편해진 티스는 책상 한쪽에 치워져 있던 책을 끌어왔다.
 검은 양피지에 눌어붙은 피가 글자의 형상으로 모인 책이었다. 모두 스무 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모든 페이지마다 한 장씩 그림이 있었다.
 ‘다크 패밀리어.’
 다크 패밀리어라는 마법이 티스가 도전 중인 두 가지 마법 중 첫 번째 목표였다.
 마계에 있는 생물과 주종 관계의 계약을 맺는 것으로, 흑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종이 될 대상의 능력에 따라 시전자에게 요구하는 능력도 늘어났다. 이 마법의 난이도는 어떤 마계 생물을 종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이코 스파이.’
 또 하나의 마법은 상대의 생각을 훔치는 것으로, 독심술과 같은 형태였다.
 흑마법사들조차도 자주 시도하지 않는 마법으로, 효과는 크지만 위험 역시 컸다. 이 마법은 한 번이라도 실패를 하면 자신의 정신이나 기억이 손상을 입는다. 더불어 성공한다 해도 자신의 정신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
 두 가지 마법 모두 최근에는 사라지다시피 한 종류였다.
 티스는 책을 읽는 것과 눈을 감아 집중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을 읽을 때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아이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다 어느새 티스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가 시작되자 티스는 한마디도 없이 마법에 집중했다.
 붉어진 눈이 금방이라도 피를 쏟아 낼 것처럼 진해졌을 때, 티스는 눈을 감아 새로운 세계의 소리를 들었다.
 ‘좀 더.’
 처음 들리는 소리는 알 수 없는 잡음들이었다.
 목소리인지 소음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귀에 이상이 생긴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또렷해졌다.
 크릉.
 경각심을 잔뜩 세운 개의 소리였지만 현실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마치 피부를 찢어 놓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쿵!
 다음은 땅을 울리는 발소리였다.
 화르르!
 익숙한 불꽃 소리도 이어졌다.
 티스는 더욱 소리에 집중했고, 감은 눈으로 무거운 회색빛이 들어왔다.
 안개와 같은 회색빛은 사물들을 정확히 보여 주지 못했다. 더욱 집중을 하려는 순간, 티스는 누군가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쿵!
 충격이 느껴졌다. 누군가 티스의 등을 때렸다.
 아이린이었다.
 티스는 현실로 돌아와 긴 한숨을 쉬었다.
 위험한 순간에 아이린이 빠져나올 수 있게 한 것이다.
 “괜찮으세요?”
 “아직도 부족해. 원하는 녀석이 나타나지 않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과정은 단순했지만 시간은 꽤나 흘러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식사부터 하고 하세요.”
 “아니야. 한 번만 더 해 보자.”
 티스는 짧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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