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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레이센 1권-1

2015.01.06 조회 1,473 추천 11


 기본성장 - 블러드 유저
 
 이업성름 : 강정모
 직업성업 : 기본 성장 ‘블러드 유저’
 직업성향 : 극단적인 공격형 전사.
 기술목록 : 피박 (자신의 손끝에 상처를 만들어 피를 흘린다. 아래로 흐르던 피는 응고가 되며 선명한 날을 지닌 창으로 변한다.)
 
  죽음의 키스 (미끄러지듯 상대에게 다가가 적의 목을 물어뜯는다.)
 
  사이코 블러드 (스스로의 피를 뜨겁게 달군다. 사이코 블러드 상태가 되면 공격성향이 극한까지 올라가며 행동이 거칠어지고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우친 전투를 펼치게 된다. 일종의 광란상태.)
 
 프롤로그
 
 0.사고
 
 2075년 대구.
 “하하! 이게 얼마만이냐?”
 멀티유저게임 ‘레이센’의 캡슐이 가득한 가게.
 레이센 룸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 하나의 게임, 레이센을 하기위한 장소였다.
 “몇 년 만에 레이센을 해보겠구나.”
 레이센 룸으로 들어서는 일련의 무리들이 있었다. 술에 취한 다섯 명의 무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우정을 과시했다. 폭우가 쏟아져 비에 흠뻑 젖었음에도 그들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영업을 맡은 직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만취한 상태에서는 곤란합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게임을 즐길 수가 없었다. 캡슐의 센서가 뇌파를 직접 받아들이니 정상적인 실행이 불가능했다.
 “아저씨! 그래서 안 된다고?”
 일행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자 직원은 한 발 물러섰다.
 “익희야. 그만해라.”
 키가 작은 인물이 익희라는 사내를 만류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직원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더니 결국 허락을 얻어냈다.
 “역시 세영이가 저런 건 잘 한다니까.”
 직원은 술에 취한 사내들을 위해 직접 캡슐을 열어주었다.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캡슐은 일반형에 비해 기기도 복잡했고 크기도 달랐다.
 “정모야! 얼른 들어가라!”
 “어? 어…….”
 정모라 불린 사내는 일행 중에 가장 취한 상태에서 캡슐로 들어갔다.
 슈슉.
 사용자가 들어가자 캡슐은 완전한 폐쇄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선 사내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정상 뇌파가 아닙니다. 접속하실 수 없습니다.
 레이센의 센서는 사용자의 접속을 거부했다. 술에 취한 상태로는 게임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건 안전을 위한 장치였고 술이 완전히 깨기 전에는 계속 반복되는 문구였다.
 “쳇. 안하면 되잖아…….”
 술에 취한 정모는 캡슐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렇지만 멍한 정신으로 인해 좀처럼 밖으로 나가는 스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 순간!
 쿠르르릉!
 폭우를 동반한 번개가 가게의 천정을 때렸다. 하지만 이미 그에 따른 대비가 되어 있어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명에게는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접속을 허락합니다.
 정모는 갑자기 씌워지는 헬멧과 고글로 인해 강제로 레이센의 세계로 이동되었다.
 “어? 들어왔네… 그런데… 머리가 너무 아픈 걸…….”
 몇 년 만의 접속이지만 레이센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접속을 그만두었던 인어의 섬은 여전히 편안한 풍경을 선보였다.
 “우… 우…….”
 정상적이지 않은 정신으로는 게임조차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 그는 어느새 인어의 섬을 지나 바다로 들어섰다. 바다를 통해 그가 이동한 곳은 ‘가을의 섬’으로 불리는 버팔로의 점령지였다.
 뭍으로 올라간 그는 달려오는 버팔로를 보자 본능적으로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게임 안에서 그의 직업은 ‘블러드 로드’
 피를 지배하는 공격형 전사였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린 피는 곧바로 붉은색 창이 되었고 달려드는 버팔로와 전투가 벌어졌다.
 “크으…….”
 갑작스런 감정의 변화.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않았음에도 그의 특수스킬인 ‘사이코 블러드’가 펼쳐졌다. 사이코 블러드는 방어력을 깎고 공격력을 올리는 전투스킬이었다. 그가 게임을 즐길 때에는 필수적으로 사용하던 기술이기도 했다.
 공격성향을 극도로 드러낸 그는 버팔로의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크하하! 폭혈!”
 콰콰콰콰쾅!
 붉은색 창에 상처를 입은 버팔로가 피를 흘렸다. 그러자 그곳으로 빛을 동반한 손이 닿았다. 폭혈이라는 기술은 상대방의 피를 폭파시키는 기술이었고 그의 주력스킬이었다.
 오랜만의 전투임에도 그의 움직임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크흐흐흐… 덤벼라…….”
 필요이상의 광기에 젖어든 그는 끝없이 전투를 계속했다.
 
 한편, 그와 함께 레이센 룸으로 들어섰던 친구들은 모두 캡슐을 빠져나왔다. 좀처럼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 때문에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쳇. 술을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치사한 놈들!”
 “그런데 정모는 왜 안 나오지?”
 세영이라는 인물이 정모가 들어선 캡슐로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자 몸이 움찔했다.
 “왜 그러냐?”
 다른 친구들이 이상한 반응에 궁금증을 나타냈다. 그런데 세영은 다시 한번 앞으로 다가가서 이상한 현상을 확인했다.
 치칫!
 정모가 들어선 캡슐에 다가서자 강한 전류가 느껴졌다. 그제야 캡슐 전체를 전류가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뭐…뭐야! 큭!”
 익희라고 불린 인물이 급히 캡슐로 달려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해지는 전류 때문에 곧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봐! 빨리 전원을 내려! 얼른!”
 익희는 황급히 소리쳤다. 직원도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가게 전체의 전원을 내려 버렸다. 그러자 다른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캡슐이 일제히 열리며 모든 손님이 밖으로 나왔다. 개중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슨 일인지 이유를 묻는 이도 있었다.
 “제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모든 사용자가 빠져나왔지만 정모는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레이센 안에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캡슐로 달려들었다. 강한 전류가 흘렀지만 친구를 구하려는 마음에 무작정 캡슐을 열려고 했다. 그 사이 직원은 구급차를 불렀고 다른 손님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제길! 정모야! 야! 강정모!”
 아무리 불러도 정모는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캡슐을 감싼 전류는 강해지기만 했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친구들은 전류가 차츰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직원의 호출로 인해 구급차가 도착했다.
 한 눈에 상황을 인지한 구급대원들은 급히 연장을 꺼내 캡슐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쿠르르릉!
 또 한 번의 천둥과 번개.
 순간, 캡슐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복잡한 기기가 합선이 되면서 사용자의 위험은 극도로 높아졌다.
 “저…정모야…….”
 친구들이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 익숙한 구급대원들이 연장을 이용해 캡슐의 출입구를 열었다.
 끼이익.
 캡슐을 열자 아직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전투를 펼치는 정모가 보였다. 그의 입에서는 위험을 예고하는 거품이 흘러나왔고 몸의 경련도 극에 달했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얼른 병원으로 옮겨!”
 구급대원들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정모를 구급차에 실었다.
 
 한주대학 부속병원 응급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치열한 응급실에 촌각을 다투는 환자가 들어섰다.
 입 주위에는 말라붙은 거품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고 주체할 수 없는 경련이 온몸을 지배했다. 침대에 제대로 누워 있지도 못할 만큼 경련이 심해 환자를 옮기는 구급대원의 몸놀림도 힘겹기만 했다.
 구급대원들은 의사에게 환자를 인도하며 사건의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설명은 계속되었고 급히 수술실로 자리를 옮겼다.
 환자는 얼핏 봐도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아니, 죽음으로 거의 넘어간 상태였다.
 “이런 어렵겠는데…….”
 수술실로 옮겨지는 동안, 환자의 경련은 거의 줄어들었다. 대신 호흡도 똑같이 사라졌다. 맥박만 희미하게 뛰고 있는 상황. 그러나 수술 준비를 하는 동안 그런 맥박도 사라지고 말았다. 의사는 마지막 방법에 희망을 걸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었다.
 그들이 준비한 심장 전기 충격기는 맥박과 호흡이 멈춘 환자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충격의 강도를 높여 전류를 흘렸지만 맥박은 살아나지 않았다.
 “최고로 올려!”
 이젠 몇 번의 충격이 끝나면 환자의 죽음이 확정된다. 드디어 최고의 전류가 환자의 몸속에 흘러들고.
 슈슉!
 “헛!”
 수술실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환자가 갑자기 눈을 뜬 것이다.
 “흐…흐…….”
 환자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붉게 물든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어서 아직도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행위를 이어갔다.
 “큭!”
 그는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작은 고통과 함께 상처에선 피가 흘렀다.
 그 순간,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아니… 저럴 수가…….”
 아래로 흐르던 피는 갑자기 선명한 날을 지닌 붉은 창으로 변했다.
 
 “하암∼.”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하품으로 시작되었다. 평소에도 잠이 많은 정모는 부족한 수면시간을 달래며 출근을 준비했다.
 그가 운영하는 헬스클럽에는 새벽에도 손님이 많기에 항상 이 시간이면 집을 나서야 했다.
 정모는 세수를 하고 밤새 자란 수염을 깎기 위해 면도기를 들었다. 자동 면도기는 시원한 느낌이 없어 항상 손으로 직접 깎는 방식을 선호했다.
 “앗!”
 한참 면도를 하던 그는 따끔함을 느끼며 거울을 보았다.
 잠이 덜 깼는지, 면도기에 턱을 베인 것이다. 그런데 턱에 고여 있는 피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야?”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두근거리던 마음이 사라졌다.
 한 달 전, 레이센 캡슐에서 사고를 당한 그는 이후부터 피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당시에 병원에서 잠깐 깨어났던 기억이 있지만 모든 것이 아련하기만 했다. 주변 의사의 말로는 곧바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고 했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는 것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히 이상해.”
 사고를 당한 이후로 이상한 느낌이 끊이질 않았다. 자신의 혈류를 타고 있는 피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툭-!
 “이런…….”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손에 들려 있던 면도기가 볼썽사납게 부러졌다. 잠시 힘이 들어간 것뿐임에도 면도기는 견뎌내지 못했다.
 정모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분명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확인해봐야겠어.”
 그는 얼른 준비를 끝내고 헬스클럽으로 이동했다.
 문으로 들어선 정모는 주변에 즐비한 운동기구를 보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가장 무거운 아령을 잡은 그는 힘을 주며 팔을 구부렸다.
 “이건 아닌데…….”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손을 끌어내리는 무게는 분명 그대로였다. 그 후로 몇 번이나 같은 시도를 해봤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휴∼∼. 아닌가봐. 요즘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자신의 몸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상념을 떨치고 주변을 정리했다. 어제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바벨을 옮기고 여러 가지 운동기구도 보기 좋게 정열했다. 그러다 문득.
 “아니…….”
 쿵-!
 그는 들고 있는 바벨을 놓았다. 아무 생각 없이 옮기던 바벨.
 믿을 수 없게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무게는 80킬로그램이 넘었다. 그것을 의식하자 강한 무게가 느껴졌지만 분명 평범한 행동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힘이 세다며 자랑을 해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분명히 뭔가 잘못 됐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힘.
 그것은 마냥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사고에서 비롯된 변화라서 불안은 더욱 커졌다.
 “안녕하세요.”
 정모의 고민은 손님이 들어오면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0-1.몬스터 레이디
 
 끼아아아! 끼아아아!
 창공을 가로지르는 여유로움.
 여유 있게 하늘을 나는 와이번의 율동은 구름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와아! 라딘! 더 빨리!”
 와이번의 등에 앉은 소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바람이 얼굴에 닿으면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났다.
 큰 눈과 하늘색 머리카락이 조화를 이룬 소녀는 양볼이 살짝 튀어나와 귀여움을 더했다. 아직 성인의 반도 되지 않는 키는 열세 살의 나이를 무색케 했고 얼굴과 어울리는 귀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라딘! 아래로 내려가!”
 아래를 내려다보던 소녀는 뭔가를 발견하자 눈빛을 빛냈다.
 끼아아아!
 와이번은 소녀가 이끄는 대로 고도를 낮췄다.
 거대한 섬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지도에 나타난 룰린이라는 지명, 또 하나는 ‘몬스터랜드’라는 이름이었다.
 몬스터랜드는 거대한 섬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의 대륙이었다.
 이곳은 중앙에 있는 마계신전을 중심으로 각 종족들이 치열한 삶을 이어갔다.
 개중에는 연합을 맺어 끊임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집단도 있었고 파괴본능에 이끌려 무작정 공격을 일삼는 생물도 있었다.
 “오우거다!”
 소녀는 오우거의 모습을 확인하며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렸다.
 “쟤도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쿠오오오!
 오우거가 와이번을 발견하고 괴성을 질렀지만 소녀의 큰 눈망울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오우거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몬스터였고 거대한 도끼와 덩치를 자랑했다.
 “저 오우거는 분명 착한 녀석일 거야. 라딘! 내려가자!”
 끼아악! 끼아악!
 소녀의 가슴은 벌써부터 기대로 물들었지만 와이번은 명령을 거부했다. 절대 소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흥! 라딘! 그러면 다음부터 안 놀아줄 거야!”
 소녀가 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와이번은 현재의 고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괴성을 지르는 오우거에게 달려드는 무리가 있었다.
 “어? 멜린 언니다.”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오우거를 향해 달려드는 무리는 웨어울프들이었다. 멜린이라 불리는 대장을 필두로 다섯 명의 웨어울프는 오우거를 공격했다.
 원래 그들은 몬스터를 무작정 공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우거처럼 이성이 없는 종족은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건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행동이었다.
 “앗! 언니! 안 돼요! 내 친구가 될 거예요!”
 마음을 졸이며 소리쳤지만 웨어울프는 신속하게 전투를 마무리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진형을 갖춘 웨어울프는 작은 틈도 없이 공격을 퍼부었고 멜린의 손이 목을 파고들면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씨이! 라딘! 얼른 내려가!”
 오우거가 쓰러지자 라딘도 거부하지 않고 숲으로 내려섰다.
 “언니!”
 땅에 내려선 소녀는 무작정 웨어울프 대장에게 달려갔다. 짧은 발을 움직여 쪼르르 달려간 소녀는 그대로 멜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언니! 미워! 흥!”
 멜린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녀는 얼른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이어서 혀를 삐쭉 내밀며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제 아빠한테 가자!”
 어느새 여운이 사라졌는지 소녀는 하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와이번과 소녀가 도착한 곳은 몬스터랜드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이었다.
 “아빠!”
 소녀의 부름에 먼 풍경을 감상하던 인물이 몸을 돌렸다.
 “미즈. 어서 오너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인물은 소녀를 안아주었다. 쪼르르 달려와 폭 안긴 소녀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봤다. 이어서 치기어린 투정을 부렸다.
 “나도 멀리 보고 싶어요.”
 “라딘이 많이 보여주잖니.”
 “힝. 아빠랑 보고 싶은데…….”
 미즈는 몸을 뒤틀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딸의 그런 모습을 보던 인물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렸다.
 “엄마에겐 비밀이야.”
 “응!”
 미즈는 아빠의 목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아빠의 목을 타는 것은 먼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아빠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 따뜻하고 행복했다.
 딸을 목에 올린 인물은 먼 곳을 바라보며 아련한 기억을 회상했다.
 몬스터랜드를 지키기 위해 인간과 벌였던 전투.
 그곳에서 많은 친구를 잃었다.
 몬스터로드로 불리는 그는 이곳을 장악한 장본인이자 몬스터연합군의 수장이었다. 인간이면서도 몬스터를 친구라 생각했고 그의 딸도 그런 아빠와 같은 마음을 지녔다. 다만 아빠와 달리 모든 몬스터와 친숙해서 최근에는 ‘몬스터 레이디’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빠!”
 “응?”
 “오늘은 오우거를 봤어요. 그런데 멜린 언니가 나타나서 죽여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막 때려줬어요.”
 “미즈야. 오우거는 이성이 없는 몬스터란다.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어.”
 미즈는 아빠의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퉁명스런 표정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내려 아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래?”
 “힝! 오늘은 아빠도 재미없어. 또 갈린 아저씨랑, 강이 오빠랑 여러 친구들 생각하는 거죠?”
 자신을 빤히 알고 있는 딸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미즈는 와이번에게 돌아갔다.
 “오늘은 아빠랑 놀기 싫어! 실프!”
 꼬마는 마지막 인사 대신 정령을 불러 시원한 바람을 선사했다.
 “아빠! 나 먼저 갈게요!”
 미즈는 귀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더니 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루가 지나고.
 “힝. 엄마는 무조건 하지 마라고만 해.”
 늦은 오후, 미즈는 와이번과 함께 마계신전에 닿았다. 엄마에게 혼이 나면 마음을 달래는 장소였다.
 마계신전은 마계몬스터의 보호를 받지만 몬스터연합군에겐 출입이 허락되었다. 몬스터로드의 딸인 미즈는 아무런 제재 없이 신전으로 들어섰다.
 “넌 여기서 기다려.”
 미즈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엄마의 질책 때문이었다.
 엄마는 마계신전에 가더라도 높은 층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미즈에겐 불만을 해소하는 일이 되었다. 엄마에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와서 기분을 풀곤 했다. 엄마의 말을 어긴다는 어린 투정이 이런 행동을 만들었다.
 “칫! 오늘은 실컷 놀다 갈 거야!”
 미즈는 마계신전의 일층에 머물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항상 보던 풍경이 나타났다.
 신전 이층의 중앙에는 거대한 칼이 놓여 있었다. 검은빛을 뿌리며 천천히 회전하는 칼은 항상 신기하게 보였다. 미즈는 한참 동안 칼을 바라보며 아빠의 말을 떠올렸다.
 “데스나이트가 봉인된 칼이라고 했었는데… 데스나이트는 어떤 몬스터였을까? 지금은 사라졌다니 아쉬워…….”
 데스나이트가 봉인된 검은 이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봉인된 몬스터가 인간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아무런 효과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젠 데스나이트가 봉인되지도 않았고 불러낼 수도 없었다.
 “치. 재미없어.”
 미즈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강한 빛이 일었다.
 “뭐…뭐지?”
 미즈는 예상치 못한 빛을 보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빛의 근원은 데스나이트가 봉인되었던 검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켜보면서도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다.
 “아…아악!”
 빛을 바라보던 미즈는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동시에 가까이에 있던 칼은 뿌렸던 빛을 모두 회수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데스나이트의 검이 강한 진동을 만들었다. 데스나이트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변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빠직!
 신전의 천정으로 빛이 뿜어지자 비가 쏟아지는 하늘이 드러났다.
 분명 맑은 하늘이었음에도 어느새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로 바뀌었다.
 파팟!
 칼은 갑자기 하늘로 솟구쳤다. 마치 어디론가 빨려드는 것처럼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데스나이트의 검과 함께 있던 소녀.
 미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0-2.구월문주(久月門主)
 
 장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장관을 연출하는 사천.
 그 중에서도 가장 번성한 땅으로 유명한 성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일이 잘 되어 다행이군.”
 이미 육순의 나이가 넘었음에도 사십 대의 젊음을 유지하는 인물이 성도를 벗어났다.
 굵은 눈썹과 고집스런 턱이 인상적인 인물은 관도를 벗어나 숲으로 접어들었다.
 ‘마검의 전설이 정말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물들었다.
 숲을 가로지르는 그의 움직임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상태였다.
 절정에 이른 경신술만 봐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구월문주 흑월.
 현 무림에서 구월문의 위상은 오대세가에 버금갔다. 특히 최근의 상승세를 볼 때, 머지않아 구대문파에 합류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 왜 이곳에 있을까?
 해답은 마검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마검의 전설은 혈풍을 예고했다. 다행히 전설이 아직 소문을 타지 않아 몇몇 사람만 아는 상태였다. 그나마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은, 소식을 들은 인물들이 터무니없는 소리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월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검의 전설은 사실이었다. 각지에 흩어진 안배를 비롯한 모든 현상들이 사실임을 대변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 반드시 내가 막아야 한다.’
 믿지도 않는 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흑월은 홀로 사천을 가로질렀다. 그의 이동은 사천의 북서쪽에 위치한 석집(石潗)까지 이어졌다.
 석집에 도착한 흑월은 고대 무덤에서 마지막 안배를 확인한 뒤,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찾았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무덤이었다. 하지만 무덤의 뒤쪽에 세워진 작은 현판이 흑월의 시선을 끌었다.
 현회선주(俔晦仙主).
 겨우 넉 자로 구성된 현판이지만 마검전설의 시발점이었다. 흑월은 조용히 현판 앞에 섰다.
 “대단하군.”
 겨우 현판을 바라볼 뿐인데도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절정에 이른 내공으로도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재미있겠군.”
 흑월은 현판을 앞으로 밀었다.
 구르르릉!
 현판이 밀리자 입을 쩍 벌린 주작의 석상이 나타났다. 흑월은 머뭇거리지 않고 품을 뒤적여 작은 원형 고리를 꺼냈다. 그것을 주작의 입에 물리자 다시 한번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쿠쿵!
 주작이 사라진 자리에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나타났다. 흑월은 자신을 공개하지 않는 어두운 계단을 보며 잠시 마음을 진정시켰다. 좀처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흑월이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걸음이 무거웠다.
 “이 정도로 물러날 내가 아니다!”
 스스로를 질책하는 외침이었다. 두려움으로 인해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뚜벅. 뚜벅.
 흑월은 오감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계단으로 들어섰다. 발에 닿는 느낌은 분명 다른 돌계단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계단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민감한 것인가?’
 흑월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질 때쯤.
 콰쾅! 쏴아아아아!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왔다. 이어서 강한 폭우와 함께 번개가 쏟아졌다.
 “이 무슨…….”
 분명 흔히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먹구름은 마치 이곳 무덤을 감싸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흘러가야 할 구름이 제 자리에 머물자 흑월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 순간.
 쾅! 위이이이잉!
 돌계단의 끝에 위치한 문이 갑자기 열렸다. 안에서 폭사된 강한 빛은 곧바로 흑월을 집어삼키면서 비명을 받아냈다.
 “크아아!”
 몇 십 년 만에 질러보는 비명이었다. 흑월은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편안한 느낌이 찾아왔다.
 ‘어찌된 것인가?’
 고통은 사라졌지만 몸의 감각이 없었다. 감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도 없었다.
 ‘이런 일이…….’
 흑월의 의식은 점점 사라졌다. 동시에 강하게 일었던 빛도 자취를 감췄다.
 무덤은 모든 진실을 숨기며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지막 변화는 잊지 않았다.
 파팟!
 멀쩡하던 무덤의 중앙에서 빛으로 둘러싸인 검이 튀어나왔다. 누가 본다면 재앙을 연상할 만큼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검의 존재를 확인한 이는 없었다.
 그렇게 하늘로 솟구친 검은 두 번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1.조우
 
 도시를 벗어난 이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곳.
 자연의 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 일상의 괴로움도 잊을 수 있었다.
 한국의 명산이라 불리는 지리산.
 등산로의 입구에서는 한 명의 청년이 아련히 보이는 산언덕을 감상하고 있었다.
 “휴∼. 헬스클럽은 잘 운영되고 있겠지?”
 정모는 등산로로 접어드는 길에서 익희에게 맡겨놓은 헬스클럽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몸을 확인하기위해 도시를 벗어났다. 우선 여행을 다니면서 차분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잊자. 지금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날려 버린 그는 천천히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싱그러운 풀냄새와 초록 나뭇잎을 만끽하자 어느새 자신을 괴롭히던 답답함도 한풀 꺾였다.
 걷고 또 걷고.
 정상에 다가갈수록 주변 경관은 더욱 아름다워졌고 자연히 정모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이렇게 좋은 걸.”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연을 만끽하며 정상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자.
 “역시 이상해.”
 처음 느꼈던 자유로움과는 달리 정모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등산객의 입에서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정상에 거의 도착한 지점이라 모든 이가 힘들어하는 코스였다.
 하지만 정모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올라오는 시간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뭔가 잘못 됐어.”
 분명 자신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산의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뜻밖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등산객 여러분은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을 듣고 하늘을 바라보자 어느새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모는 바람이 강하지 않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등산객들도 같은 생각인지 꾸준히 목표한 지점으로 이동했다.
 “쳇. 내 몸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정모는 등산로의 한쪽에 쭈그려 앉았다. 괜히 산에 오르는 바람에 걱정이 더욱 커졌다.
 이렇게 산길을 올라도 지치지 않는다니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갑자기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현재 그에게는 모든 상황이 공포였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초능력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한 적도 있었다. 치기어린 행동이지만 그런 소망이 꿈에서 이뤄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막상 남들과 다른 몸을 가지게 되자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앞섰다.
 문제는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고민과 걱정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모는 자신의 주변에 더 이상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았다. 벌써 땅거미가 지면서 어둠이 찾아온 것이다.
 “얼마나 앉아 있었던 거지?”
 무려 여섯 시간 이상을 같은 자세로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짓무를 법도 하건만 그러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관념을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었다.
 촤아아아.
 “비가 오고 있었던 거야?”
 등산객도 없는 등산로. 쏟아지는 비.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그런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느낌은 있었지만 고통이나 불편함이 아니니 그냥 넘겨 버렸다.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처벅. 처벅.
 정모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목적한 곳도 없지만 이 자리에 있기가 싫었다. 그렇게 그의 이동은 멈추지 않았다.
 
 두 시간 후.
 “여기가 어디지?”
 쏟아지는 빗길을 걷던 정모는 주변을 돌아봤다.
 그는 이미 등산로를 벗어난 상태였다. 밤길에 비까지 내리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 덕분에 그는 길을 헤매다 아무도 없는 곳에 닿고 말았다.
 “제길! 어떻게 되어 버린 거야!”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언제나 쾌활한 그라도 이런 상황은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털썩.
 결국 정모는 비를 맞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질펀한 진흙이 느껴졌지만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콰르릉! 번쩍!
 그의 행동을 축하라도 하듯이 하늘에선 번개를 동반한 천둥이 울렸다.
 “쳇. 마음대로 하라고!”
 정모는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비를 맞고 있음에도 전혀 춥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에 닿는 비의 감촉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나뭇잎에 닿는 비의 선율에 정모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이 들고 싶은 편안함이 밀려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재 정모에게는 가능했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치기도 했지만 왠지 지금의 느낌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던 정모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위이잉. 위이잉.
 “별똥별인가?”
 먹구름 사이로 하얀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번개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먹구름 사이를 춤추던 빛은 서서히 영역을 넓혔다.
 “어? 하나가 더 있네.”
 먹구름 사이를 신비하게 오가던 빛은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과 똑같은 형태의 빛이 다시 하나 생성되었다. 뒤에 생성된 빛은 파란빛을 뿜어내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뭔가… 이상한데?”
 빛의 율동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모는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먹구름에 별똥별이라니!’
 비 오는 날에 보이는 별똥별은 말이 되질 않았다. 더군다나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물체도 존재할 수 없었다.
 “꿈인가?”
 자신도 모르게 팔뚝을 꼬집어보았다. 하지만 찌릿한 고통은 현재의 상황이 진실임을 말해주었다.
 “사실이잖아.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빛의 율동은 점차 거세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뭐야? 으헉!”
 정모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빛을 보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너무나 갑작스런 공격이었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스스슥.
 정모는 몸을 뒤로 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의 크기로 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다렸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바닥으로 뭔가가 깊숙이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푹! 푹!
 “엥?”
 허무한 기분이 들었던 정모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우웅. 우웅.
 빛으로 화했던 물체는 두 자루의 검이었다.
 파란빛을 머금었던 칼은 검신이 넓고 검날이 무딘 대신에 기하하적인 고대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반대로 하얀빛으로 화했던 칼은 검신이 얇고 수수한 문양에 손잡이 부분에 마(魔)자가 새겨져 있었다.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지만 검신에서 뿜어지는 신비함은 비슷했다.
 “뭐…뭐야?”
 두 자루의 검은 바닥에 스며든 채로 강한 진동을 일으켰다. 빛으로 감싸인 검을 보자 정모는 혼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흔한 감탄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에서 칼벼락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슈슉. 슈슉.
 두 자루의 검에서 갑자기 환영이 나타났다. 금세 나타났다 사라진 환영은 한 중년과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무표정한 중년은 강한 눈빛이 인상적이었고 귀여운 여자아이는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검의 진동과 어울린 그들의 환영은 정모를 더욱 당황케 했다.
 “꿈일 거야… 꿈일 거야…….”
 정모는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지금의 장면은 분명 자신이 직접 겪고 있는 일이었다.
 웅웅. 웅웅.
 두 자루의 검은 마치 정모를 부르는 듯이 진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모는 한참 동안 울고 있는 검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서서히 진동이 가라앉자 드디어 이성을 찾았다.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그의 말처럼 자신이 검과 굳이 관련될 이유가 없었다. 결심을 굳힌 정모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달아나 버릴 생각이었다.
 “미안해. 날 원망하지 마.”
 왜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고 동시에 몸을 돌렸다.
 탁탁. 탁탁.
 정모는 무작정 뒤를 향해 뛰었다. 검과 멀어지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휘이잉!
 갑자기 정모의 정면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정모도 도저히 버티지 못할 강풍이었다.
 “크으!”
 바람에 맞서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발은 점차 바닥에 끌리며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어찌나 바람이 강한지 상체를 숙여도 쓰러지지 않았다.
 “헉. 헉.”
 결국 검이 있던 자리로 돌아온 정모는 숨을 몰아쉬며 원망스런 눈길로 검을 바라봤다.
 “망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갑자기 자신에게 들이닥친 운명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웅. 우웅.
 검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다시 진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정모도 오기가 생겼다.
 “제길! 해보자는 거야? 좋아! 마음대로 해봐!”
 정모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검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꽂힌 두 자루의 검은 정모가 다가갈수록 진동이 심해졌다.
 이제 정모와 검의 사이는 한 걸음 남짓.
 정모는 마지막으로 손을 뻗으려다 움직임을 멈췄다. 마지막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불길해. 하지만 기대도 되는 걸.’
 고민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운명처럼 자신에게 찾아온 검은 묘한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무의식이 그를 막아섰다.
 어떤 결정을 할지는 스스로의 몫이었지만 좀처럼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운명과 선택, 이성과 감성, 모든 것이 상반되었다.
 웅웅. 웅웅.
 두 자루의 검도 정모의 선택을 기다리는지 마지막으로 강한 진동을 보인 후, 잠잠해졌다. 대신 은은한 빛을 뿜으며 자신의 몸을 신비롭게 변화시켰다.
 “쳇. 유혹한다 이거지? 좋아. 어떻게 되나 보자고.”
 정모도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이어서 빛을 뿌리는 검을 양손에 하나씩 움켜잡았다.
 순간!
 “크아아!”
 마치 몸속의 모든 신경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검이 머금었던 빛이 정모에게로 옮겨오자 지금껏 겪어본 적이 없는 고통이 찾아들었다.
 “으아아!”
 아무리 비명을 질러 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검을 놓으려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울고 있는 여자아이, 무표정한 중년.
 정모의 눈에는 두 명의 이방인이 뚜렷하게 보였다. 형체가 뚜렷해질수록 고통도 커졌다. 이 순간이 얼른 끝나길 원했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고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정모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는 건가?’
 이것도 괜찮았다. 의식을 잃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정모는 멀어지는 의식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검을 움켜진 정모는 질퍽한 바닥에 몸을 눕혔다.
 
 뚝. 뚝.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뭇잎을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정모의 얼굴을 간질였다.
 비가 그친 숲은 햇빛을 반사하는 물방울들로 가득했다. 나무에 걸쳐진 이슬마냥 작은 해를 반사시키며 고통을 이겨낸 인간을 축복했다.
 “으…….”
 정모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조용한 숲의 풍경이 들어왔다. 이곳은 자신이 의식을 잃었던 그 자리였다.
 ‘살아 있는 건가?’
 아직도 뼈마디가 쑤셨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미했다.
 정모는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아직은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갑작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으아앙!
 “크헛!”
 정모는 튕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머리에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여자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영문을 알길 없는 정모는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다.
 -흑흑. 아빠! 으아앙!
 “어…어디야!”
 여자아이의 서글픈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정모는 여전히 원인을 알지 못했고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설픈 녀석이군. 자신의 손을 봐라.
 이번에는 음침한 중년의 목소리였다. 정모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여다봤고 양손에 각각 쥐어져 있는 칼을 발견했다.
 자신이 고통을 참으며 움켜잡았던 두 자루의 검이었다.
 “카…칼이 말을 한다고?”
 -이상하겠지. 나도 믿을 수 없으니.
 “헛!”
 정모는 이제야 자신이 들고 있는 검에서 말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자루의 검.
 정모가 느낀 고통은 검과 자신의 영혼이 연결되는 과정이었다.
 검에 봉인된 영혼은 주인을 통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고 이처럼 영혼을 통한 대화도 가능했다. 다만 지금은 정모가 느끼는 충격이 워낙 컸기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울고 있는 아이는?”
 -흑흑. 전 미즈라고 해요.
 “미즈? 그럼 아저씨는?
 -난 흑월이다.
 “흑월? 미즈?”
 아직도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정모도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바보군.
 “이런! 싸가지 아저씨!”
 -쉽게 설명해주지. 이곳이 어딘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쥐고 있는 두 자루의 검에는 각각 하나의 영혼이 봉인되었다. 아니 몸도 같이 봉인되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어쨌든 미즈라는 꼬마와 나는 검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검에 봉인된 흑월과 미즈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덕분에 자신들이 다른 세계로 왔다는 것과 검에 봉인되었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 흑월이 있던 무림세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미즈가 있던 판타지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미즈는 여러 가지 사실을 유추하며 정확한 결론을 내렸다.
 현재 흑월과 미즈가 봉인된 검은, 차원의 문을 넘어 정모가 사는 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흑월과 미즈에게 여러 가지 사실을 전해 들은 정모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당연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차원의 문이라느니 다른 세계라느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흑월이 다시 한번 짧은 설명을 곁들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가?
 정모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모가 한동안 말이 없자 미즈의 서글픈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세요. 이제 우리를 버리면 안 돼요.
 검에 봉인된 영혼은 주인과의 맹약을 따라야 했다. 맹약의 조건은 간단했다.
 영혼으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그가 바로 주인이었다.
 대신 주인이 죽게 되면 다른 주인을 섬길 수 있었다.
 “내가… 주인이라고?”
 -도와주세요. 아직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봉인을 풀고 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걸 찾아야 해요. 도와주세요.
 미즈는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절하게 부탁했다.
 “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지금은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일단 여러 가지를 알아봐야 해요. 그러려면 오빠의 도움이 필요해요.
 “오빠?”
 정모는 오빠라는 호칭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시킬 이유를 찾고 있었다.
 -멍청하군. 이런 놈이 주인이라니.
 -이봐요! 아저씨! 입 좀 다물어요! 다 된 일에 자꾸 재 뿌릴 거예요? 나는 뭐 좋아서 오빠라고 하는 줄 알아요?
 -쳇. 너도, 주인이라는 작자도, 마음에 안 드는군.
 둘은 사이가 좋지 않은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정모는 어이가 없었다.
 “너희들… 다 들리거든?”
 -흠흠.
 -힝. 오빠. 아잉∼.
 흑월의 헛기침과 미즈의 애교가 이어졌지만 정모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쩐다?”
 이젠 그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남은 것은 자신의 결정뿐이었다.
 분명 이들과 함께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또한, 자신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도 애매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겠어.”
 정모는 우선 미즈와 흑월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때부터 미즈와 흑월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검에 봉인이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어떤 이유에서 차원을 넘어왔는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모두 펼쳐냈다.
 “구월문주? 몬스터 레이디?”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정모는 익숙하지 않은 호칭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째서 내가 필요하다는 거야?”
 -우리는 검에 봉인되었어요.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요. 주인이 힘을 쓸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주어야 해요.
 “그럼 조금 전처럼 바람을 일으킨 것도 네가 한 짓이야?”
 -네? 네…….
 “그게 작은 힘이라면 날 이용할 경우 더 큰 바람도 일으킨다는 거네.”
 -맞아요.
 정모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흥분했다.
 “좋아! 결정했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와주겠어!”
 드디어 그들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결심을 굳힌 정모는 곧바로 산을 내려왔다. 아니, 내려오려 했다. 하지만 이미 길을 잃은 상태라 목적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만 맴도는 기분이었다.
 “하긴 길을 찾는다 해도 이런 칼을 들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지치지는 않았지만 점차 허기를 느꼈다. 마음이 급해졌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칼을 생각하니 내려가기도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방법이 필요했다.
 -길은 제가 찾을 수 있어요.
 한참 고민을 이어가던 와중에 미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이 약간 빠질 거예요. 놀라지 말아요.
 미즈의 말대로 정모는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가슴이 허해지고 근육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어? 이게 뭐지?”
 힘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눈앞에 하얀빛으로 이루어진 요정이 나타났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요정은 미즈의 명령에 따라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자신의 일을 마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기한 일도 연속으로 당하니까 담담한 걸.”
 정모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이젠 익숙해진 것이다. 레이센이라는 게임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내려가요. 길은 제가 안내할게요.
 정모가 보았던 요정은 실프라고 불리는 바람의 정령이었다.
 정령을 이용해 길을 알아낸 미즈는 정모가 내려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었지만 정모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산을 내려온 정모는 두 자루의 칼을 옷 속에 집어넣었다. 상의와 하의를 모두 이용해 칼을 숨기자 갑자기 미즈의 비명이 들렸다.
 -꺄악!
 “뭐…뭐야?”
 -오빠! 뭐하는 짓이에요!
 -더럽군.
 “왜…왜 그래?”
 정모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긴 칼을 숨기려다보니 검의 손잡이가 아랫도리 속옷으로 들어간 것이다. 미즈는 그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쳇. 가지가지 하네.”
 정모는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목소리만 들리다보니 정말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몸도 같이 봉인되었다고 했지만 아직은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한참 이동하던 정모는 자신의 숙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정모는 자신이 숨긴 검을 슬며시 만져보았다. 그러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거 꽤 비싸겠는데?”
 우웅. 우웅.
 지금까지 불만을 터트리던 미즈와 흑월은 강한 진동과 함께 울고 말았다.
 
 
 2.사건
 
 미즈와 흑월이 정모와 함께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흘렀다.
 그동안 두 이방인은 주인과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흑월은 여전히 정모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미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모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깊은 밤.
 미즈는 잠든 정모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항상 밤이 되면 정모의 힘을 이용해 이곳저곳을 살폈고 어떻게든 이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직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뚜렷한 방법이 없지만 우선은 차원의 문에 의한 현상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이 세계는 너무 넓어. 힝.
 미즈는 자신의 세계에서 천부적인 친화력을 가진 정령사였다. 몬스터 레이디로 불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아빠에게 따뜻한 바람을 선물하던 정령사이기도 했다.
 -겨우 중급정령이라니. 아웅.
 정모의 힘을 이용하면 중급정령까지 소환이 가능했다. 원래 미즈의 능력은 정령왕을 제외하고 모두 불러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직 정모의 힘이 약해 거기까지는 불가능했다. 자신의 최고 능력인 최상급 정령을 불러내면 정모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나마 정모가 비정상적인 능력을 가진 덕분에 중급도 가능한 것이었다.
 미즈는 중급정령에 만족하며 끊임없이 전 세계를 살폈다. 대부분 차원이 뒤틀린 곳이 없는지를 살피는 정도였다.
 벌써 두 달이나 계속된 일이라 흑월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엇! 차…찾았어요!
 미즈의 외침에 흑월이 반응을 보였다.
 -정말인가?
 -차원의 문은 아니지만… 우리와 분명 관련이 있는 곳이에요.
 그들은 주인이 잠들어 있는 사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미즈와 흑월은 몸과 영혼이 모두 검에 봉인된 상태였다. 영혼의 속박은 칼을 부술 만큼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몸이 온전하다면 순간적으로 몸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정해진 시간만큼 칼을 벗어나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일정시간이 지나면 다시 검으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미즈와 흑월에겐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상태로 봉인이 되었기에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는 상상만으로도 행복에 젖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힘을 쌓으면 칼을 벗어날 수 있어요.
 -좋은 소식이군.
 아직은 그들이 봉인에 익숙하지 않아 본 모습으로 소환될 수가 없었다. 만약 본모습으로 소환만 된다면 직접 전투를 펼치거나 최상급 정령을 부르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좀 더 빨리 차원의 문을 찾을 수 있겠군.
 -아저씨도 이제 꽤나 똑똑해졌네요. 어쨌든 빨리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돼요.
 미즈는 곧바로 진동을 시작했다. 정모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모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시끄러! 음냐.”
 채챙!
 정모는 흑월을 들어 미즈를 찍어 버렸다.
 -아악!
 -큭!
 결국 그들은 정모의 잠버릇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일 다시 말해야겠어요. 힝.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군.
 괜히 봉변을 당한 이방인들은 숨을 죽이며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그렇게 아침이 되자 미즈는 곧바로 자신이 알아낸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모의 반응은 냉랭했다.
 “미즈. 지금은 정신이 없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에 하자.”
 결국 정모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미즈의 이야기를 무시했다. 어쩔 수 없이 미즈는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그날 저녁.
 “휴∼∼. 오늘은 여기까지!”
 그는 헬스클럽의 창문을 하나하나 열면서 하루일과를 마무리했다. 원래는 청소를 해야 끝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젖힌 정모는 사무실에 숨겨놓은 검을 가지고 나왔다. 고대문자가 잔뜩 그려진 검이었다.
 “미즈, 부탁해.”
 -네, 오빠. 실프!
 휘이잉.
 미즈는 정모의 부탁대로 바람의 정령을 불러냈다. 그러더니 구석구석에 있는 먼지까지 바람에 날려 창밖으로 보내 버렸다. 헬스장은 먼지하나 없는 깨끗한 상태가 되었고 정모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역시 넌 쓸모가 많아.”
 -힝. 전 청소기가 아니라고요.
 “시끄러! 그럼 오랜만에 걸레질도 해볼까? 미즈. 얼른 해.”
 -알았어요……. 운디네!
 이번에는 물의 정령을 불러냈다. 실프와 모습은 똑같지만 몸을 감싼 빛이 파란색이었다. 물의 정령은 곧바로 헬스장의 바닥을 물로 뒤덮었다. 그러더니 물결을 일렁여 바닥을 깨끗이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소환했던 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면서 청소가 마무리되었다.
 “역시 완벽해.”
 정모는 깨끗한 헬스장이 마음에 드는지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한참 동안 웃음을 짓던 그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청소회사를 운영해볼까? 5초 안에 청소해드립니다! 이거 죽이는데?”
 -아…안 돼요!
 미즈는 강하게 반발했다. 정모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지만 미즈에게 그런 일까지 강요하진 않았다.
 ‘하긴 부려먹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다 들린다고요!
 “헛! 생각은 읽지 말라고 했잖아!”
 -치. 들리는 걸 어쩌란 말이에요? 어제 TV보면서 야한 생각한 것도 다 알아요.
 “험험! 시끄러!”
 최근 미즈와 흑월은 이 세계의 문화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하나하나 가르치는 중이었다.
 “흑월은 잘 있으려나?”
 정모는 청소를 끝내고 사무실로 들어가며 흑월을 불렀다.
 “흑월. 어때? 할 만해?”
 현재 흑월의 검신은 달력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런데 정모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흑월을 감싼 달력을 풀었다.
 “흠. 오늘도 말이 없네. 아직도 적응이 안 돼?”
 -오빠는 변태예요!
 “시끄러! 내가 그 말 싫어하는 거 알지?”
 미즈는 달력에 인쇄된 사진을 보더니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흑월을 감쌌던 달력.
 그건 여성이 속옷만 겨우 걸친 야한 사진이었다.
 처음 흑월이 헬스장에 왔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검을 울려댔다. 그의 의문은 아주 단순했다.
 -어째서 여자들이 속옷만 입고 있느냐?
 흑월이 보기에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때부터 정모는 흑월을 숨길 때면 항상 야한 사진을 사용했다. 이 세계에 적응하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하루 종일 툴툴대는 흑월을 놀리려는 의도가 더욱 컸다.
 “흑월. 이제 그만 항복하시지?”
 -어림…없다.
 흑월은 분명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좀처럼 정모에게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다.
 미즈는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정모의 말은 무조건 듣기로 했다. 당연히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은 아니었다. 정모는 미즈와 흑월이 자신의 말에 계속 토를 달고, 반항을 하자 고문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흑월과 미즈의 검신에 대못으로 상처를 냈다. 끽끽거리는 소음이 듣기 싫었지만 어떻게든 둘을 굴복시키기 위해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첫 번째 고문을 무사히 견뎠다. 그러자 정모는 더욱 심한 고문을 시작했다. 물에 담그기도 하고 불로 구워도 봤지만 단단한 검신에는 큰 충격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미즈와 흑월은 서로 합심하여 정모의 고문에 맞섰다.
 한 번은 심술이 난 미즈가 실프를 몰래 불러 정모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정모는 그것도 모르고 거리를 활보했고 헬스장에 출근을 해서야 그런 사실을 알았다.
 이때부터는 정모도 이를 갈며 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이 중에서 미즈가 충격을 받은 일은 시장의 노점상 사건이었다.
 정모는 사람들이 가득한 시장에 돗자리를 깔고 흑월과 미즈를 진열했다. 이어서 ‘천원에 팝니다!’라는 문구를 걸어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미즈는 정모가 실제로 돈을 받고 검을 넘겨주자 눈물을 흘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워낙 큰일이라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항복을 선언한 미즈는 그때부터 정모의 말을 고분고분히 따랐다. 하지만 흑월은 아직도 반항을 계속했다.
 “음. 야한사진으로 안 통한다면? 흐흐. 이제 슬슬 이 싸움도 끝낼 때가 됐지.”
 -무…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두고 보면 안다고. 흐흐. 좋은 장면을 보게 될 거야.”
 정모는 사무실 서랍에 있던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화면에 빨간딱지가 붙어 있어서 누가 봐도 성인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즈야. 너에겐 너무 충격적일 테니까 밖으로 나가자.”
 정모는 일부러 플레이 버튼을 누르며 밖으로 나갔다. 물론 흑월이 TV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의자에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흑월과 미즈는 자체적으로 검신을 통해 사물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정모와 몸이 닿아 있으면 정모의 시야도 똑같이 공유했다. 여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미즈와 흑월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정모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보게 되었다.
 대화 역시 몸이 닿아 있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대화를 하려면 정모의 힘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영혼이 연결되면서 흑월과 미즈는 정모의 힘이 필수였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움직임이나 대화에도 많은 기력이 소모되었다.
 “흑월. 행복한 시간되라고.”
 TV 볼륨을 최고로 높인 정모는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의 틈새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이게 무슨 소리예요?
 “흠흠. 어린애는 몰라도 돼. 볼륨을 너무 높였나?”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여성의 신음이었다. 물론 아픔이 아니라 쾌락을 동반한 음성이었다. 당연히 미즈는 정모에게 변태라는 말을 쏟아냈다.
 “시끄러.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고.”
 지금 화면에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침대를 뒹굴고 있었다. 흑월은 보기 싫어도 그 장면을 봐야 했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 뻔했다.
 “후후. 흑월. 현대문화의 힘을 얕보지 말라고.”
 그의 말이 현재 상황에 어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한 시간이 지나자 정모의 얼굴에는 득의에 찬웃음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그는 신음소리가 사라지자 슬며시 사무실로 들어섰다.
 우웅. 우웅.
 흑월의 검신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언뜻 봐도 심한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흑월. 이제 그만 항복하라고.”
 울고 있는 흑월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 정도로… 물러서지 않는다.
 흑월의 의지는 아직도 꺾이지 않았다. 이에 정모는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혹시 즐기고 있는 거야?”
 -무…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음. 이거 의심스러운데.”
 정모는 여전히 흑월의 마음이 의심스러웠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정모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사무실 서랍에 있는 다른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기존에 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딱지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건 자신조차도 모두 보지 못했다.
 헬스클럽의 여성회원이 정모를 놀리기 위해 주었던 테이프였다. 버리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그냥 구석에 처박아둔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날 원망하지 마.”
 -후후. 소용없다.
 “글쎄. 이번에는 좀 다를걸.”
 정모는 테이프를 갈아 끼우고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이어서 조금 전처럼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통하지 않을 거예요. 그걸 몰라요?
 미즈는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모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게 드디어 한 시간이 흐르고.
 정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흑월은 아무런 진동도 없이 조용한 상태였다.
 -거봐요. 소용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글쎄.”
 정모는 천천히 흑월을 잡았다. 그렇지만 흑월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흑월∼. 한 번 더 볼래∼?”
 -헛! 하…항복!
 흑월답지 않은 말투였다. 얼마나 절박한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미즈만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봐요, 아저씨. 왜 항복하는 거예요?
 -말할 수… 없다.
 -히잉. 뭐냐고요! 궁금하잖아요!
 미즈는 흑월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이번에는 정모를 닦달했다. 조용히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던 정모는 미즈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이럴 거예요?
 “널 위해서야. 모르는 게 좋아.”
 -칫. 안 봐도 뻔하다고요. 조금 전이랑 같은 내용이었죠?
 TV의 특성을 이해한 미즈가 어느 정도는 정확한 답변을 했다. 그러자 정모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처음에 보여주었던 비디오랑 같은 내용이야.”
 -그래요? 그런데 이번에는 왜 항복한 거예요?
 정모는 한숨을 쉬며 드디어 사실을 털어놓았다.
 “분명 같은 내용이었지. 그런데…….”
 -그런데?
 미즈는 자신이 받을 충격도 알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정모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중요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남자만 나오거든.”
 정모는 말을 하면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나도 급하다고요!
 “오늘은 안 돼.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저녁에 이야기하자고 했잖아요! 벌써 밤이란 말이에요!
 미즈는 조금이라도 빨리 어제 발견한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정모가 응해주지 않았다.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
 정모는 미즈와 흑월을 위해 TV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도 정모가 주로 애용하는 TV가 있었지만 최근에 두 대를 새로 구입했다.
 “근데 참 신기하단 말이야. TV가 그렇게 재미있어?”
 TV가 많아진 것은 전적으로 미즈와 흑월 때문이었다. 그들은 방송이 흘러나오는 TV를 무척 신기해했고 최근에는 마니아적인 성향까지 보였다.
 미즈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는 자연현상과 과학, 흑월은 무협영화와 역사분야였다. 다행히 케이블 채널을 통해 해당 프로그램은 24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시청이 가능했다. 덕분에 둘은 시간이 날 때마다 관심분야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즈와 흑월은 잠을 잘 필요가 없었기에 정모의 수면시간에는 항상 관심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TV로 채워지지 않는 지식은 정모를 닦달해서 책을 구입하기도 했다.
 “잘 보고 있어.”
 -오빠, 잠깐만요.
 “왜 그래?”
 -책이 필요해요.
 정모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흑월은 단순히 TV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미즈는 왕성한 호기심 덕분에 하루에도 몇 권씩 책을 읽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전문 도서다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고 처음에는 기초적인 지식이라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점차 전문적인 분야를 요구하는 바람에 책값도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
 -힝. 오빠는 잠들지 않는 고통을 몰라요.
 “알았어. 그러니 우는 소리 좀 그만해.”
 정모는 미즈의 부탁을 받아들이며 집을 나섰다.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한 정모는 약속장소인 익희의 맥주집에 닿았다. 익희와 세영이, 현로와 민용이는 자신이 레이센이라는 게임을 할 때, 백수군단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생활했던 친구들이었다.
 익희는 방어력이 강한 프로레슬러, 세영이는 무덤을 파헤치고 던전을 찾아다니는 도굴꾼, 현로와 민용이는 각각 보조와 공격이 조화된 성직자와 흑마법사였다.
 지금은 레이센을 열심히 즐겼던 만큼 현실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청년들이었다.
 “정모야! 여기다! 어서 와라!”
 정모를 제외한 인원은 이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정모도 급히 친구들에게 합류했고 인사를 나누며 맥주잔을 들었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한 거냐?”
 한참 동안 잡담을 나누던 정모가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익희를 빤히 쳐다봤다.
 “다른 게 아니고 보름 후에 여행이나 같이 가자고. 이번에 세영이가 휴가를 얻은 김에 다 같이 가는 건 어떨까 해서.”
 현재 익희는 맥주집을 운영했고, 세영이는 외국회사의 뛰어난 인재였다. 또한, 현로와 민용이는 둘이 동업으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다.
 “가게는 어쩌고?”
 “난 어차피 그쯤해서 내부공사를 시작해야 되거든. 민용이랑 현로도 그때는 시간이 된다니까 다 같이 가자. 어떠냐?”
 익희는 벌써부터 들뜬 표정으로 정모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모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난 헬스장을 비울 수가 없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들과의 추억도 소중하지만 꼭 해야 할 일까지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이미 코스도 정해놨는데.”
 “그래. 너도 같이 가야지. 어떻게 안 되겠어?”
 친구들이 아쉬워했지만 정모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친구들이 선택한 코스는 이집트의 고대문명이었다. 피라미드를 비롯한 고대유산이 가득한 곳에서 열흘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정모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친구들도 아쉬워하는 정모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다음에 가면 되지. 자! 오늘은 술이나 마시자!”
 “그래! 재미있게 놀고 사진이나 보여주라!”
 그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맥주잔을 들었다.
 그렇게 술자리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정모는 친구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얼큰하게 취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들아! 잘 놀다 와라!”
 “그래!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
 정모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맥주집을 나섰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정모는 미즈의 투정을 모두 받아주어야 했다.
 -빨리 온다고 했었잖아요!
 여전히 TV 프로그램에 빠져 있는 미즈를 들자 제일 먼저 잔소리가 쏟아졌다.
 “그렇게 됐어.”
 -흥! 이제 오빠랑 말도 안 할 거예요!
 “그럼 난 이만 잔다.”
 결국 아쉬운 사람은 미즈였다.
 -오…오빠! 잠시 만요!
 “왜 그래?”
 -TV에 나오는 MC3라는 기계가 필요해요.
 정모의 눈썹이 갑자기 가운데로 몰렸다.
 MC3라면 최근 개발된 회로로 과학 분야에서도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부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MC3는 처음부터 과학 전문 분야의 부품이라 가격이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미즈야. 내가 가진 전 재산을 털어도, MC3에 쌓인 먼지도 못 사.”
 -힝. 오빠는 무지 가난한 사람이구나.
 “시끄러! 그걸 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알았다고요.
 “그런데 그게 왜 필요해?”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모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재미를 위해 날 거지로 만들려고 했다니…….”
 술로 인해 노곤함을 느낀 정모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기분이 축 처지며 머리도 무거워졌다. 술을 마실 때마다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정모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그때부터는 미즈의 시간이 시작됐다. 미즈는 제일 먼저 잠이 든 정모의 힘을 빌려 정령을 소환했다. 이어서 현 세계를 둘러싼 공간의 장벽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현실에서와의 거리에는 상관없이 공간의 일그러짐을 찾는 것은 정령 특유의 능력이기에 큰 힘을 소모하진 않았다. 다만, 인내심을 가지고 해야 하는 작업이라 지난 두 달 동안의 시도에도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한참 동안 정령과 대화를 나누던 미즈는 검신을 부르르 떨며 깊은 잠에 빠진 정모를 깨웠다.
 “음… 무슨 일이야?”
 -오빠! 일어나세요!
 “왜? 무슨 일인데?”
 수면을 방해받은 정모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차원이 뒤틀린 곳을 찾았다고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을 거예요.
 “그래? 거기가 어딘데?”
 -그거야… 저도 모르죠. 거리는 알지만 이 세계를 모르니까.
 정모는 미즈를 위해 세계지도를 꺼냈다. 바닥에 넓게 펼쳐놓고 방향을 잡아주자 미즈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드디어 결론을 말했다.
 -힝.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네가 있던 곳과는 다른 방식인가?”
 -안 되겠어요. 우선 우리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세요. 그 다음에는 눈을 감고 힘을 빼세요.
 “왜?”
 -해보면 알아요.
 미즈의 말대로 정모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멍해졌다. 이어서 미즈의 영상이 강하게 떠오르며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었다.
 “뭐…뭐야?”
 정모는 자신의 팔이 의지와 상관없이 지도를 훑자 눈을 부릅떴다.
 -놀라지 말아요. 제가 움직인 거예요.
 미즈나 흑월은 정모의 몸을 직접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정모가 어떤 움직임에 대한 의지가 없어야만 가능했다. 예를 들어, 의식이 없다거나 일부러 생각을 지우면 쉽게 주인의 몸을 지배할 수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이쯤이 될 것 같아요. 좀 더 자세한 지도는 없나요?
 정모는 미즈가 짚은 곳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집트?”
 친구들이 여행을 가기로 한 장소였다.
 “미즈야.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네? 무슨 소리예요?
 “됐어. 그만둬.”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마당에 미즈의 말까지 듣자 기분이 나빠졌다. 정모는 지도를 한쪽으로 집어던지며 침대로 올라갔다.
 -오빠! 얼른 가야 해요!
 “시끄러. 이집트까지 어떻게 가?”
 -어떻게 가긴요! 자동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잖아요!
 이 세계의 문명을 이해한 미즈가 자신 있게 소리쳤다.
 “자동차? 택시라도 부를까? 이집트까지 부탁합니다. 이러면 헬스장을 내놓으라고 할 걸?”
 정모도 미즈의 일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했다.
 “너무 멀어. 그러지 말고 좀 더 가까운 곳은 없어?”
 -그건… 더 알아봐야 해요.
 “그럼 더 알아봐. 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미즈도 정모의 마음을 읽었는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직은 살펴봐야 할 곳이 많았고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결국 직접적인 탐사를 포기한 미즈는 또 다시 정령을 불러 세계각지를 살펴봤다.
 “미즈야. 너무 더우니까 바람 좀 부탁해.”
 -힝. 또 부려먹어.
 미즈는 실프를 불러 선선한 바람이 불도록 했다. 정모가 깊은 잠에 빠지자 미즈도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정찰을 계속했다.
 
 그렇게 열흘이 흐르고.
 정모는 공항으로 출발하는 친구들을 배웅했다.
 “잘 놀다 와라.”
 “그래.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
 “별 소릴 다한다. 사진이나 많이 찍어와.”
 친구들은 정모를 두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쉽게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다음에는 나도 꼭 같이 갈 테니까 이제 그만 가봐.”
 “그래. 이번에만 우리끼리 다녀오마.”
 결국 정모의 재촉에 친구들도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떠나고 홀로 남은 정모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나도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잖아.’
 빠듯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려웠던 이십 대 초반을 생각하면 무작정 놀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웃으면서 가자고!”
 정모는 애써 아쉬움을 떨치며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린 정모는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점차 잊어갔다. 삼일이 지나면서 아쉬움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히려 친구 녀석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떠들썩하게 자랑을 해댈 친구들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친구들의 일정은 총 열흘로 잡혀 있었고 아직 칠 일이나 남았다. 지금쯤 이집트에서 추억을 만들 친구들을 떠올리며, 정모도 하루를 정리했다.
 “미즈야! 청소시간이야!”
 -네! 오빠!
 이젠 미즈도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청소를 마쳤다.
 헬스클럽을 나선 정모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TV를 틀었다. 그가 잠들기 전이면 항상 보는 뉴스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뉴스라면 질색했지만 레이센이라는 게임을 끝낸 후로는 웬만하면 꼬박꼬박 챙겨봤다. 아무래도 사회인이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생긴 것이다.
 “오늘은 별 내용이 없네.”
 한참 뉴스를 보던 정모는 더 이상 관심을 끄는 내용이 없자 TV를 끌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미즈가 심한 진동을 보였다.
 “왜 그래?”
 -차…차원의 문이 열렸어요.
 “뭐라고?”
 미즈는 아직까지도 뒤틀어진 차원의 문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쉽게 설명해봐.”
 -누군가 차원의 문을 넘었어요. 한두 곳이 아니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느껴지던 곳이 갑자기 커지고 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모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이어질 틈도 없이 뉴스에서 급박한 소식을 전했다.
 
 “뉴스 속보입니다. 이집트 카이로 지역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괴물은 지금까지 보고 된 바가 없는 생물로서 출현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을 여행하던 여행객들이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여행을 계획하셨던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그 후로 뉴스에서는 군대에 의해 사살된 몬스터의 형체를 공개했다. 그런데 정모보다 더욱 놀라는 이가 있었다.
 -오…오크!
 “뭐야?”
 -오크의 시체예요!
 “오크? 판타지의 오크?”
 정모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차원의 문이 열렸다는 말이…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생물이 있다는 거야? 너처럼?”
 -아니에요. 저와 흑월 아저씨는 이곳으로 넘어와도 흔적이 없어요. 특별한 경우니까요.
 쉽게 말해서 검이나 보물은 이곳으로 옮겨져도 흔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흔적이 남는 경우는?
 바로 생물체의 이동이었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판타지의 몬스터가?”
 -제가 있던 세계의 몬스터뿐만이 아니에요. 아마 흑월 아저씨가 있던 곳에도 차원의 입구가 열렸을 거예요.
 정모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해는 가지만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멍해 있는 사이,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소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실종된 여행객 중에는 한국인도 섞여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뉴스 기자의 말에 정모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든 정모는 기자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실종된 한국인은 모두 네 명으로 이세영씨, 김익희씨, 정현로씨, 장민용씨입니다. 이들은 삼 일전에 이곳으로 왔던 친구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핑-!
 정모의 귀로 뭔가가 끊어지는 묘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시야가 흐려지며 뒷골로 강한 충격이 닿았다.
 충격적이고 불쾌한 느낌. 정모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친구들이…….”
 실종자들의 이름을 듣던 정모는 멍하니 천정을 쳐다봤다. 지금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빠! 정신 차려요!
 -침착하라.
 흑월과 미즈가 정모의 이상상태를 느끼자 급히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정모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눈물을 흘려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상황이 꿈이기를 바랐다. 정말 꿈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좋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은 전부 사실이었다.
 “찾아야 해… 찾아야 해…….”
 -오빠!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요!
 정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작정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려 했다. 그렇게 거리를 헤매면 친구들이 나타날 것 같았다.
 -오빠! 내 말부터 들으라고요!
 미즈는 정모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크게 소리쳤다.
 “닥쳐!”
 정모는 미즈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멍청한! 정신 차려라!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없지 않은가!
 흑월의 강한 질책이 정모의 이성을 되돌려놓았다.
 “그…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실종되었을 뿐이야…….”
 실종이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허다했다. 아니, 뉴스에서 보도하는 실종은 대부분 사망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정모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집트…….”
 -어쩔 생각인가?
 흑월은 정모의 생각이 빠르게 이어질 수 있도록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정모는 미즈와 흑월을 꾹 움켜쥐었다. 친구들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어디에서 실종이 되었는지도 불투명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자신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가자. 이집트로.”
 정모의 강한 다짐과 함께 집을 나섰다.
 
 
 3.혼란
 
 이집트 카이로공항.
 전 세계는 괴물의 습격소식을 전해 듣고 그곳으로 이동하는 자국인들을 모두 만류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있는 자국인들의 귀환 때문에 공항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커다란 가방을 들고 공항을 나서는 청년.
 정모는 산만한 공항의 분위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여길 벗어나요. 힘들어요.
 정모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굳어진 표정을 보자 괜히 불안해졌다. 하지만 미즈와 흑월을 위해 우선 공항을 벗어났다.
 그가 이토록 급하게 공항을 벗어난 것은 미즈와 흑월이 자신들의 기로 금속성분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월과 미즈도 검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보니 공항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고 무사히 이집트에 도착했다.
 “좋아! 피라미드로 간다!”
 지체할 틈도, 불안해할 틈도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친구들을 찾아야 했다.
 녀석들이 실종된 지역은 피라미드가 밀집된 아스완 지구였다.
 방향을 가늠한 정모는 급히 택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뭐…야?”
 항상 공항에 대기해야 할 택시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있던 택시들이 급히 하나둘 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공항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안내 메시지가 흘렀다.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신속한 대피를 위해 항공편을 증설했으니 상황판을 보시고 안내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대피?”
 정모는 그제야 사람들이 급히 움직이는 이유를 알았다.
 -몬스터의 습격이 시작된 것 같아요.
 “습격이라니? 그런 말은 없었잖아.”
 -그건 저도 몰라요.
 정모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지금은 미즈의 어려운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아스완 지구로 가자.”
 마음이 급해진 정모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
 택시 앞에 뛰어든 정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화에서 보면 급한 장면에서 항상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과연 택시는 급제동을 걸며 바닥을 미끄러졌다.
 끼이이익!
 쿵-!
 ‘헉!’
 정모의 몸이 날아올랐다. 다가오는 택시와 부딪히고 만 것이다.
 택시기사는 사람을 치었다는 생각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10미터나 날아간 사람은 한동안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엄살이 심하군.
 바닥에 누웠던 정모는 낮은 음성에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고통은 컸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아참. 내가 정상이 아니지.”
 정모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더니 자연스럽게 택시에 올랐다.
 “아스완 지구.”
 택시기사는 뭔가에 홀린 듯 정모를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사고를 당하고도 멀쩡하게 택시에 오르자 어이가 없었다.
 “아스완 지구로 가자고!”
 “히익!”
 정모의 어색한 발음을 들은 택시기사는 급히 차를 몰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피난을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정모가 더욱 무서웠다.
 택시는 분주한 공항을 벗어나 정모가 원하던 도로로 접어들었다. 이미 아스완 지구의 관광객들은 모두 대피한 상태라서 도로는 한적했다.
 미끈한 도로는 점차 주변의 풍경을 지나치며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사막을 한참이나 지난 정모는 드디어 멀리 피라미드를 볼 수 있었다.
 
 고대의 피라미드.
 230만 개 이상의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왕가의 무덤.
 쿠푸 왕을 시작으로 건설된 피라미드의 비밀은 아직까지도 과학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젠 비밀의 근원지에서 완벽한 관광지로 탈바꿈했지만 한 편에서는 아직도 신비의 매력을 잊지 못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관광객으로 분주하던 아스완 지구의 피라미드에는 딱딱한 표정의 군인들로 가득했다.
 “이럴 수가…….”
 국제형사경찰기구(Interpol)의 수사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쏟았다.
 갈가리 찢겨진 시체와 튀어나온 내장.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신이 그들의 눈에 잡혔다.
 붉던 심장은 어느새 검은빛으로 변했고 누군가에 의해 반쪽이 잘려 나간 상태였다.
 “누군가 물어뜯었다는 것인가?”
 심장에 남은 선명한 이빨자국은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군. 느낌이 좋지 않아.”
 왜애애앵!
 인터폴 수사관 룩스는 한참 시체를 지켜보다 사이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딱딱한 음성이 들렸다.
 -지금부터 이곳은 국제연합군이 관리합니다. 관계자 외에는 모두 해당지역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룩스를 비롯한 인터폴 수사관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민간에서 일어난 일이고 더군다나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국제연합군이 나타나면서 나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번 사건의 책임자인 룩스는 급히 국제연합군이 도착한 본부로 뛰어갔다.
 간이건물을 통해 이미 완벽한 본부를 갖춘 국제연합군의 건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입구에서 제재를 받은 룩스는 급히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들어갈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이곳의 담당자란 말이오!”
 “지금부터 이곳은 국제연합군이 수사합니다.”
 입구를 지키던 군인은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았다. 건물의 주변으로는 각종 화기를 비롯한 무기가 진열되고 있었고 멀리서는 탱크의 이동도 보였다.
 “당신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거요?”
 아무리 미지의 사건이라도 전쟁에나 쓰일 법한 무기가 등장하자 룩스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 순간.
 딸깍!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고집스런 얼굴을 가진 인물이 나타났다. 이미 육순에 달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매가 인상적인 중년이었다. 입구를 지키던 군인은 중년 군인을 보자 급히 경례를 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하사. 무슨 일인가?”
 중년 군인은 입구에 있는 룩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하사가 입을 열기 전에 룩스가 앞으로 나섰다.
 “로저 대령이십니까?”
 “그렇소.”
 로저 대령은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는 국제연합본부로부터 이번 일을 배정받은 담당자였다.
 “전 인터폴의 룩스라고 합니다.”
 룩스는 다시 한번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로저 대령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이곳을 떠나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수사를 의뢰 받은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입니다.”
 룩스 입장에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수사를 의뢰받으면 어떻게든 범인을 밝혀내던 그로서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하지만 로저 대령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당신들이 물러나줘야 할 만큼 큰 사건이오.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물러나시오.”
 “큰 사건이라면……?”
 이번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의문이 많았다. 최근 이 지역에서 발견된 괴물도 그렇고 시체의 형상도 너무 잔인했다. 또한, 수많은 실종자들의 행방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만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물러나시오. 더 이상의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소.”
 로저 대령은 볼 일이 끝났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분명 큰 사건이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룩스는 마음을 굳히며 군인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국제연합군 작전수행 5시간째.
 위이잉. 위이잉.
 체온감지기와 특수센서를 동반한 군인들이 길게 늘어선 상태로 피라미드의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느릿한 걸음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쳤군. 한시라도 빨리 실종자를 찾아야 하건만.’
 커다란 모래언덕에 몸을 숨긴 룩스는 군인들의 굼뜬 행동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모두 죽는다.’
 실종자들이 살아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잡아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어쩔 수 없지.’
 룩스는 자신의 허리에 있는 권총을 집어 들었다. 총알을 꼼꼼히 확인한 그는 조심스럽게 아직 수색이 되지 않은 피라미드에 접근했다.
 ‘뭐지?’
 끄으으. 끄으으.
 어둠으로 가득한 피라미드의 입구.
 그곳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악!”
 룩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의 비명소리다.’
 거친 숨소리는 분명 사람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비명은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딸칵.
 룩스는 긴장을 높이며 다시 한번 총을 확인했다. 이어서 마음을 굳게 먹으며 피라미드로 들어섰다.
 조심스러운 전진은 1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발자국소리를 숨기며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입구가 넓어지면서 커다란 석실이 나타났다.
 룩스는 최대한 벽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석실을 살폈다. 그러던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이럴 수가…….’
 어지럽게 만들어진 모닥불. 그 위에는 바비큐처럼 뭔가가 묶여 있었다.
 ‘사람이다. 잔인한 놈들…….’
 어이없게도 산 채로 바비큐가 되어 버린 생물은 사람이었다. 피부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데에도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아무런 동요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이 아니다.’
 녹색 피부에 작은 몸.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덩치지만 그들의 행동은 누구보다 악랄했다.
 한 손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단검이 들려 있고 입에서는 끊임없이 침이 흘렀다. 사람과 같은 구조를 지녔음에도 커다란 눈과 툭 튀어나온 입 때문에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고블린.
 초원의 작은 악마로 불리는 그들은 피라미드에서 사냥한 인간을 보며 침을 흘렸다.
 ‘믿을 수가 없다…….’
 룩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정신이상자나 돌연변이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완벽히 다른 종족.
 뚝. 뚝.
 룩스의 권총으로 손에서 시작된 땀이 흘러내렸다.
 키키키. 키키키.
 고블린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한 자리에 모였다. 무리생활을 하는 그들은 항상 조를 이뤄 다녔고 이번에 등장한 고블린도 일곱이나 되었다.
 “사…살려주세요!”
 룩스의 눈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생명이 붙어 있는 다른 인간들이 있었다.
 숫자는 모두 둘.
 금발의 중년 여성과 이집트인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고블린 하나가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가자 룩스는 더욱 다급해졌다.
 ‘총알은 충분하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망할 녀석들!”
 룩스는 죽을힘을 다해 방아쇠를 당겼다.
 
 한편, 택시를 타고 이동 중이던 정모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밖을 살피던 정모에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휘익!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면서 택시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자 옆으로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신비한 느낌의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은 시원스레 뻗은 눈썹과 갸름한 턱 선이 인상적이었다. 왠지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분명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올 만한 외모였다. 단 하나 단점이 있다면 아름다운 외모에 비해 표정이 무척 차갑다는 점이었다.
 “이…이럴 수가!”
 여인을 지켜보던 정모가 비명을 질렀다. 여인의 외모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여인이 택시와 같은 속도로 달려왔기에 놀란 것이다.
 “더 이상은 갈 수 없습니다.”
 정모가 놀라는 사이, 택시기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차를 세웠다. 총을 든 군인이 도로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뭐라는 거야!”
 “더 이상은 갈 수 없다고…….”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정모는 택시기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처음 말했던 지명도 승무원을 통해 아스완 지구라는 발음만 배운 것이었다.
 “미즈. 뭐라는 거야?”
 -힝. 저도 몰라요.
 정모는 어쩔 수 없이 택시기사에게 손짓발짓을 사용하며 의사를 교환했다. 그러다 결국 군인이 앞을 막아선 것을 발견했고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음을 알았다.
 “쳇. 할 수 없지.”
 전진이 불가능해지자 정모도 택시에서 내렸다. 어차피 진입이 통제되겠지만 미즈를 이용해 몰래 잠입할 생각이었다.
 휘익!
 ‘아차!’
 택시에서 내리자 옆으로 달려오던 여인이 앞을 스쳐갔다.
 ‘누구지? 정말 사람인가? 혹시 나처럼 어떤 이유로 능력이 달라진 걸까?’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녀보다 친구들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정모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속을 뒤집어놓는 일이 일어났다. 군인들이 그녀의 행동에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막으면서 여인은 내버려두자 정모는 화가 치밀었다.
 “이봐! 지금 사람 차별하는 거야? 저 여자는 내버려두면서 난 왜 막는 건데?”
 정모가 크게 소리치자 군인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해도 표정과 행동을 보자 뭔가를 따지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쳐다봐? 망할 자식들아!”
 화가 풀리지 않은 정모는 더욱 따지려 했지만 일이 급했기에 우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택시기사가 급한 얼굴로 자신에게 달려왔다. 그는 정모의 손을 꼭 잡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정모는 알아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어떻게든 들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짜증이 일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자 택시기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택시로 돌아갔다.
 “왜 울지?”
 택시가 떠나고 한참 뒤에도 정모는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뭔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정모는 멀어져 가는 택시를 바라봤다.
 “요금을 못 줬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이곳의 첫 감상을 말했다.
 “이집트는 인심도 좋구나.”
 정모는 흐뭇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이 흐르고.
 -조심해서 움직여요!
 “너나 조용히 해. 다른 사람이 듣겠어.”
 -바보! 제 말은 오빠밖에 못 들어요.
 “시끄러워!”
 정모는 엉겁결에 소리쳤지만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할 자식들. 급해서 봐준다.”
 그는 자신을 막았던 군인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동을 계속했다.
 “미즈. 다시 한번 가자.”
 정모는 자신을 막은 커다란 벽을 보며 미즈를 불렀다.
 -알았어요.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요.
 정모는 조금 전, 철책을 넘었던 방법을 다시 시도했다.
 “후으읍!”
 -실라페!
 미즈는 중급정령 실라페를 불러 정모의 발밑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정모는 자신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중심을 잡았다.
 “좋아!”
 -시끄러워요!
 미즈가 아무리 주의를 줘도 정모는 몸만 떠오르면 환호성을 질렀다. 다행히 이번에는 미즈가 빨리 막는 바람에 특별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긴장감이 없어요! 친구들이 걱정되지도 않아요?
 미즈의 질책에 정모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다만 지금은 일부러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꼭 찾아낼 거야. 녀석들은 죽지 않았어.”
 정모는 강한 다짐과 함께 멀리 보이는 피라미드로 달려갔다.
 그가 피라미드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던 시간은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군인들의 이목을 피하다보니 시간이 지체되었고 드디어 첫 번째 피라미드로 들어섰다.
 -뭔가 있다.
 피라미드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흑월의 경고가 들렸다.
 “뭔가 있다고?”
 -제발 입 좀 다물어라!
 흑월은 경계심이 없는 정모를 질책했다.
 “쳇. 알았다고.”
 정모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피라미드로 들어갔다. 안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크흐. 크흐.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갈수록 묘한 숨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멈춰라.
 정모는 흑월의 말에 따라 걸음을 멈췄다.
 -준비하라. 전투가 시작될 테니.
 “뭐라고?”
 전투라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흑월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기괴한 음성이 들렸다.
 카카카! 카카카!
 어지러운 발자국소리와 커다란 괴성이 통로를 가득 메웠다. 주변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정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라이트!
 미즈는 일부러 검신에 정령의 기운을 모아 불을 밝혔다.
 “헛!”
 밝아진 검신 덕분에 갑갑하던 통로가 훤히 보였다. 이에 정모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급히 미즈와 흑월을 앞으로 내밀었다.
 카카카!
 통로의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일련의 무리들.
 작은 단검을 꼬나 쥔 고블린 다섯이 정모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뭐…뭐야?”
 현실과 게임은 달랐다.
 게임에서는 전투가 익숙했지만 지금은 현실이라 그렇지 않았다. 고블린이 몸을 날리며 자신에게 솟아오르는 데도 정모는 당황하며 팔을 휘젓기만 했다.
 채챙!
 비릿한 웃음을 지은 고블린이 흑월의 검신을 때리며 뒤로 넘어갔다.
 “헛!”
 -오빠! 정신 차려요! 그레이트 윈드!
 휘이이이잉!
 뒤로 넘어갔던 고블린은 곧바로 단검을 내밀려 했지만 강한 바람에 의해 중심을 잃었다.
 -정신을 집중하라!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다!
 흑월의 충고 덕분에 정모도 정신을 차렸다. 이어서 미즈를 등에 있는 가방에 꽂아 넣고 흑월만 움켜쥐었다.
 “이놈들! 징그럽게도 생겼네!”
 크크. 크크.
 고블린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여전히 목이 끓는 소리를 냈다. 정모는 긴장감을 높이며 흑월의 말에 따랐고 조금씩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선두에 있는 녀석이 대장이다. 그 녀석을 먼저 처리하라.
 “충고 고마워!”
 차찻!
 정모는 바닥을 구르며 빠르게 전진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의 몸은 어느새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전진하던 정모는 고블린의 심장을 향해 흑월을 내밀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다른 고블린이 검을 때리면서 방향이 비틀리고 말았다.
 -검을 회수하고 자세를 똑바로!
 “알았다고!”
 정모는 얼른 흑월을 회수하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뒤에서 서늘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여라!
 “히익!”
 투툭!
 등으로 돌아갔던 고블린이 정모의 목을 그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만 자르고 말았다.
 -기회다! 몸을 낮추고 상대의 배를 찔러라!
 “잔소리 좀 그만해!”
 신경질적인 대답과는 달리 정모는 정확히 고블린의 배를 갈랐다.
 푸푹!
 날카로운 흑월의 검신은 고블린의 피부를 간단하게 파고들었다.
 살을 파고드는 느낌은 정모의 손을 통해 적나라하게 전달되었고 알 수 없는 오한이 느껴졌다.
 촤아아앗!
 배에서 튀어나온 피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정모의 얼굴을 흥건하게 적셨다. 쏟아진 내장은 비릿한 냄새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고 죽은 고블린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정신 차려! 정신…….
 흑월은 급히 충고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모의 이상상태를 느꼈지만 지금은 이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흐흐흐.”
 몬스터의 괴성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녹색 피를 뒤집어쓴 정모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이미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강한 살기를 뿜어냈다.
 사이코 블러드.
 스스로의 분노를 끌어내 공격력을 높이는 기술이 펼쳐진 것이다.
 고블린의 피는 ‘피의 전사’로 각인된 그의 본성을 깨웠고 조금 전의 산만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모는 어느새 자신의 오른손 중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강한 이빨로 손끝을 베어 물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피는 어느새 날카로운 창으로 변모했고 정모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툭-!
 그는 급기야 흑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어서 살기에 압도된 고블린들을 덮쳤다. 피로 만들어진 창은 고블린들을 손쉽게 요리했다.
 원래부터 전투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놈들이라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고블린의 특성상 몇 십 마리에서 몇 백 마리까지 뭉쳐 있는 경우가 많으니 전투를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하긴, 이런 규칙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정모는 전투를 길게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끄끄끄.
 피박이라 불리는 정모의 창은 고블린들을 철저히 유린했다. 배가 갈라지고, 목이 뜯기고, 멀리 달아나는 놈까지 생겨났다.
 “크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고블린이 등을 보이며 피라미드의 깊숙한 곳으로 도망갔지만 정모의 공격을 벗어나진 못했다.
 끄으…….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고블린의 머리가 꿰뚫렸고 정모도 그제야 상대가 사라졌음을 알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헉.”
 그는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힘이 넘치는 몸. 하지만 느낌은 좋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묻은 끈적끈적한 피도 불쾌했다.
 “휴∼∼∼.”
 붉어졌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정모도 이성을 찾았다.
 “이제 알겠어…….”
 크게 두려울 것도, 실망한 것도 없었다. 다만,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의문이 풀렸을 뿐이다.
 “게임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가?”
 정모는 반사적으로 다시 뽑아 버린 피박을 바라봤다. 직접 이름 지은 피박은 여전히 핏빛 광채를 뿜으며 전투를 기다렸다.
 “지금은 고민하지 말자. 친구들을 찾아야 하니까.”
 아직도 손이 떨려왔다.
 생물을 직접 죽이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피박을 공기 중으로 흩어 버린 정모는 흑월과 미즈를 들어올렸다.
 -오빠! 멋있어요!
 -그래도 바보는 아니었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월과 미즈는 속을 긁어놓았다.
 “쳇. 나도 때로는 진지해지고 싶다고.”
 정모는 말싸움을 그만두고 피라미드의 내부로 진입했다.
 “크윽! 이게 뭐야?”
 피라미드 안을 지켜보던 정모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아무렇게나 쏟아진 내장과 살덩이들. 그곳에 선명하게 남은 이빨자국. 이건 분명 고블린의 짓이었다.
 또한, 정모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시체가 된 생물의 실체였다.
 “사람을…….”
 여기저기 찢겨진 옷가지로 봐서, 분명 내장은 사람의 것이었다.
 이미 죽어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시신이 다섯 구정도 보였다. 다행히 친구들이 입고 갔던 옷은 없었고, 그러자 정모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빨리 찾아야 해!”
 아직까지도 눈으로 본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처절한 장면이라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정모는 미친 듯이 피라미드를 빠져나왔다. 이어서 다른 피라미드를 향해 달려갔다.
 탕! 탕! 탕!
 정모가 한참 다음 피라미드로 접근할 때, 어디선가 불꽃과 함께 총성이 들렸다. 피라미드를 조사하던 군대가 몬스터를 발견하고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군대는 피라미드를 보존하기위해 밖에서는 총을, 안에서는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 커다란 불은 피라미드 입구를 완전히 집어삼켰고 고블린과 오크들을 숯덩이로 만들었다.
 “저놈들이!”
 군대들의 강한 화력을 지켜보던 정모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러면 사람까지 죽잖아!”
 군대는 정모와 달리 생존자가 없다고 확신했다. 때문에 최대한 빨리 몬스터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오빠! 어서 움직여요!
 정모는 미즈의 말대로 얼른 다음 피라미드로 들어갔다.
 “뭐…뭐야?”
 피라미드로 들어갔던 정모는 이번에도 충격을 받았다.
 “누가 왔다간 건가?”
 오크 두 마리의 시체가 입구에 엎어져 있고 조잡한 모닥불 주변에도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어.”
 정모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오크의 시체를 살폈다. 정확히 목과 심장에 총으로 인한 상처가 보였다.
 “군대는 아닐 테고, 도대체 누구지?”
 정모의 궁금증이 더해갔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급히 다음 피라미드로 이동한 정모는 그때부터 지루한 술래잡기를 계속했다. 몬스터가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전투가 벌어졌고 조금 전처럼 누군가 먼저 다녀간 곳도 있었다.
 “제길! 도대체 어디야!”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도 급해졌다.
 지금까지 많은 피라미드를 지나왔지만 아쉽게도 생존자는 없었다. 이렇게 되자 친구들의 생존가능성도 점점 희박해졌다.
 “젠장! 젠장!”
 욕지거리를 뱉으면서도 정모는 꾸준히 탐색을 계속했다.
 그렇게 다섯 번째 피라미드로 들어서는 순간.
 쿵-!
 정모는 입구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와 몸이 부딪혔다. 얼른 피박을 꺼낸 정모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상대방도 같은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엇!”
 “헉!”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상대가 사람임을 알아본 것이다.
 정모는 상대방이 권총을 내민 모습을 보며 사람인 것을 알았고 상대 역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정모를 확인했다. 정모는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권총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들어올렸다. 이건 반사적인 두려움이었다.
 “하…항복.”
 정모의 모습에 상대방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국인인가?”
 그의 입에서는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권총을 내려놓은 그는 정모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룩스다. 이곳에 뭐 하러 온 거지?”
 “내 이름은 정모다. 이곳에 뭘 하러 온 거다.”
 룩스는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는 정모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피라미드를 조사하며 생존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미 정리한 피라미드를 나서다 정모와 부딪힌 것이다.
 “칼이라. 특이한 친구군.”
 “총이라. 치사한 놈이군.”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의 얼굴을 깊이 새겼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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