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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로드 1권-1

2015.01.07 조회 1,780 추천 10


 제1권: 인생역전, 삐끼에서 전사로!
 
 제1화 무림고수의 출현
 
 1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인이 즐비한 곳.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수와 신인(神人)이 등장하고 또 죽어 간 강자존(强者存)의 세계 무림.
 그토록 많은 초인들이 있었음에도 중원무림을 통일한 자는 없다. 중원무공의 시초가 되었다는 보리달마도, 기존의 무학이치를 뒤집어 놓아 천무진인(天武眞人)이라고까지 불린 장삼봉도 일세를 풍미한 절대자였지만 무림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상일엔 항상 예외가 있는 법이고, 그것은 무림도 마찬가지였다. 무림 역사상 다시없을 절대고수의 등장으로 무림일통이라는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야 만 것이다. 그것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저주하는 악의 종주 마교에서.
 무림역사상 최초의 예외를 만든 인물은 바로 마교의 교주로 본래는 독고환(獨孤奐)이란 이름이었으나 ‘하늘을 부숴 버리고 내가 대신하여 하늘이 되겠다’라며 자신의 이름조차 하늘[天]로 바꾸었다.
 그는 과연 진정한 무황이었다. 마교의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오직 강력한 무력 하나만으로 교주의 자리를 차지하더니 단신으로 화산의 매화검진, 무당의 칠성검진은 물론 소림의 백팔나한대진마저 깨뜨려 버렸다.
 가히 파죽지세!
 누구도 독고천의 이름 앞에서 무공을 뽐내지 못했다. 그 절대적인 무위 앞에 무림인들은 그를 두고 하늘마저 깨뜨리는 악마의 황제 파천마황(破天魔皇)이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파천마황도 태어날 때부터 강한 내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의 사조는 마교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든 절대고수였지만 그의 사부는 오히려 삼류였다.
 파천마황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사부는 처음부터 무공을 잘못 시작했으니까.
 해동무록(海東武錄).
 독고천의 사조가 해동에서 우연히 구한 무경(武經)으로 당시 조선의 성군으로 불리던 세종대왕이 직접 창안한 문자로 적힌 이름조차 없는 기서였다.
 그것을 탐독한 독고천의 사조는 스스로의 무위가 형편없었다고 한탄하며 중원의 언어로 번역하여 자신의 제자, 즉 독고천의 사부에게 남겨 주었다.
 해동무록이라는 명칭조차 독고천의 사조가 직접 지은 것이니 진짜 명칭은 영영 비밀로 묻힐 일이었다.
 절대고수의 한 사람인 독고천의 사조가 한 말이니 틀리지는 않겠지만 첫 문장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거세후십년정진(去勢後十年精進).’
 즉, 남성(男性)을 제거한 뒤 10년간 정진하라는 뜻이 아닌가?
 독고천의 사부는 그 문장을 한 점도 의심하지 않고 비록 성불구가 된다고 할지라도 무림의 절대자가 되고픈 욕심에 남성을 제거하고 10년간 노력 정진했다.
 하지만 그 후 실력을 검증받기 위한 마교대전에서 연전연패.
 독고천의 사부는 그것을 두고 자신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라고 여겨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며 일생을 술로 보냈다.
 고작 삼류에 불과한 마교인이 거둘 제자란 아무리 잘해 봤자 별 볼일 없는 재능밖에 없으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독고천은 오히려 행운아였다.
 그의 사부는 자신보다 자질이 더 없는 게 분명한 아이가 해동무록을 익히리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독고천의 사조가 사용한 마공을 전수했다. 본인도 처음 해동무록을 익히기 전까지는 마공을 익혔기에 그 무공을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독고천의 무공에 대한 재능은 사부가 판단한 대로 별 볼일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부도 미처 몰랐던 그만의 장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노력하는 마음이었다. 남들이 한 번에 하는 것을 못한다면 그는 두 번, 세 번은 물론 수백 번이라도 되풀이하며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재능이 없는 독고천이라지만 남들보다 몇 배씩 노력을 기울이는 데야 발전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
 당연한 일이지만 독고천은 사조가 남긴 마교의 비전무학을 익히며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평생을 삼류로 지내 온 사부의 회한을 풀어 주었다.
 그의 행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연히 조선의 사신이 고작 녹림도 따위에게 습격당하는 것을 구해 주게 된 것이다.
 덕분에 독고천은 조선의 사신과 친분을 맺으며 그들이 언문이라 부르는 조선의 문자를 익히게 되었다. 독고천은 자신의 사부와 달리 해동무록을 보는 시각이 조금 달랐던 것이다.
 해동무록은 처음에 쓰인 글귀와 달리 만물의 조화를 중시했다. 먼저 자신의 몸을 조화롭게 하고, 그 다음 외물(外物; 몸 바깥의 현상)과 조화를 이루면 마침내 대자연과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나와 조화를 이루어 천지만물의 모든 기운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과정을 이루어야만 비로소 해동무록상의 무공에 대한 입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같은 경지야말로 삼화취정 오기조원을 뛰어넘어 마침내 공령(空靈)의 단계가 아닌가?
 공령의 경지는 말 그대로 이미 공력의 제약마저 사라진 선인지경(仙人之竟)을 뜻한다.
 그것을 아예 무공의 입문으로 삼는 해동무록의 내용도 엄청나지만, 가장 중시하는 것이 만물의 조화임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성을 제거하는 행위는 조화를 깨뜨리는 것인데 그것을 무록의 첫머리에 집어넣다니!
 독고천이 힘겨워 하면서도 조선의 문자를 배운 것은 혹시라도 사조가 잘못 해석한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마침내 독고천 스스로 조선의 문자로 적힌 해동무록의 원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책을 펼쳤다.
 “크큭, 사조께서 엉망으로 해석해 버렸군. 그것도 첫머리부터.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원문의 내용은 분명 다음과 같았다.
 ‘좆 빠지게 10년만 노력해라.’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독고천은 안타깝게도 해동무록상의 심법을 익힐 수 없었다. 이미 마교의 무공으로 천지만물의 조화를 깨뜨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동무록의 진실된 내용을 알게 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해동무록으로 얻은 심득을 통해 공령의 경지까지는 몰라도 거기에 거의 근접하는 공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무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무리 하찮은 무공이라 해도 절대적인 공력만 뒷받침된다면 절세의 신공과 마찬가지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림의 상식.
 하물며 독고천의 무공은 마교의 무공 중에서도 절대신공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자연의 힘을 중시하는 마교의 교주가 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가 마교의 교주가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혹시라도 마공을 익혔음에도 해동무록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자연히 마교의 온갖 무공은 물론 헤아릴 수 없는 사술도 두루두루 얻게 되었다.
 해동무록을 얻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한 일념 하나로 마교의 정수를 취한 독고천은 이후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을 깨뜨리고, 무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림일통을 완성한 존재가 되었다.
 그 즈음에야 비로소 해동무록이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독고천은 그것을 없애 버렸다. 어차피 해동무록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으니 반드시 무공비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림의 절대자로서 만족하고 지냈다. 더 이상 강해질 여지도 없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자신의 절대적인 무공을 믿던 독고천도 마교 내부의 반역자에 의해 해를 입게 되었으니…….
 독고천 앞에 감히 불만을 표시하는 자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무림에 그에 반하는 세력이 전혀 없었을까?
 당연하게도 그의 약점을 알아내려는 자들이 있었고, 자연히 그의 사부와 접촉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교의 반역도들은 독고천의 사부를 통해 해동무록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이용할 생각을 품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해동무록을 얻기 위해 조선으로 떠난 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
 본래 자신을 믿는 사람일수록 사소한 소문에 민감한 법이고, 그것은 독고천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만일 누군가 처음부터 해동무록상의 심법을 익힌다면 자신은 감히 상대도 안 될 거라고 여긴 까닭이다.
 독고천은 누군가 함정을 팠으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워낙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한 탓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조선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마교의 반역도뿐만 아니라 정파무림의 절대고수들은 물론 벽력세가와 축융세가의 화탄들마저 포함되었다.
 화약이 폭발하고 마교와 정파무림의 절대고수들이 무림 역사상 다시없을 만큼 긴밀하게 단결하여 보인 합공은 제아무리 독고천이라 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려 보름간을 주야로 싸운 덕분에 대부분의 적을 궤멸시키긴 했지만 독고천의 내상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 주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다행히 독고천이 상처를 입은 곳은 산중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엄청난 정신력으로 움직인 끝에 겨우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한 독고천은 마교의 천마불사대법(天魔不死大法)을 펼쳤다.
 천마불사대법은 마교비전의 대법 중 오직 교주에게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천마불사대법을 펼치면 몸이 일시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진다.
 물론 단지 가사상태에 빠질 뿐이라면 어찌 마교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대법을 통해 가사상태에 빠지면 목이 잘리지 않는 한, 설령 심장이 망가져도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여 자연적으로 치유가 이루어진다.
 다만 이 대법을 펼쳐 스스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1갑자 이상의 공력으로 주위에 강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 역대 마교의 교주들은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이 대법을 펼치곤 했다.
 “이 산에 무공고수가 올 일이 있을까?”
 내심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유명한 명산대첩이라면 수련을 위해서라도 찾겠지만 지금 그가 상처를 입고 숨어든 산은 이름도 모르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오가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굴에는 들개들이 무리 지어 살고 있었지만 그 정도야 독고천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간단히 내쫓고 혹시 몰라 장력을 날리자 커다란 돌덩어리가 출입구를 틀어막았다.
 그만하면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이라면 몰라도 개나 여우 따위는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다. 독고천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에 앉아서 천마불사대법을 펼쳤다. 언제고 누군가 자신을 찾아내길 바라면서.
 독고천의 염려대로 마교는 교주를 찾지 않았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은 그들에게도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무림사에 알려진 파천마황의 실종은 수많은 절대고수들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각 문파의 비전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각 문파는 물론 마교마저 봉문을 선언하여 옛 무공의 정수를 찾는 데 주력해야 했지만, 잃어버린 비전을 하루아침에 되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무림의 쇠퇴와 함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다.
 
 2
 
 “이봐, 여기 다이너마이트 어떻게 된 거야? 아, 그쪽은 그만 하고. 조심해! 양을 조금만 잘못 조절해도 큰일 나.”
 “반장님, 걱정 마세요. 우리가 어디 이 일을 하루 이틀 하나요?”
 “아니야, 이 일은 수십 년을 해도 조심해야 돼. 알잖나. 한 번의 실수로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된다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서울 외곽의 이름 모를 야산에서 터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옛날에는 산을 뚫는 공사라면 어마어마한 대공사였겠지만 지금은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금세 해결한다. 터널 공사나 대형 건물의 철거에 폭발물을 이용하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
 콰콰쾅
 워낙 단단한 지반이라 사람이 파내려면 그저 막막하기만 한 것을 폭발물을 이용하자 단 몇 시간 만에 해결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육체로 해결할 수 없는 파괴력을 과학을 이용해 해결했다. 다이너마이트의 가공할 파괴력은 산을 울리며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한 진동을 일으켰다. 어찌나 위력이 강한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 전체에서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산을 울리자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존재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강한 진동을 느낀 육체에 머물러 있던 기운이 회전하며 잠들었던 피를 깨우고 심장을 일깨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석같이 보이던 존재의 표면에 혈색이 돌았다.
 ‘대단한 내공을 지닌 자군. 대체 누가 이곳에서 장력을 뿌리는 걸까? 더구나 일정한 시간마다 울리는 것으로 보아 싸우는 게 아니라 무공수련에 불과한 것 같은데……. 설마 정말 해동무록의 주인이 나타난 건가?’
 오직 1갑자 이상의 공력으로 타격을 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독고천은 설마 그것이 폭약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다만 그 경이적인 위력에 감탄하며 호승심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긴 호흡을 통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진기를 유통시키고 피를 돌게 하면서 어떤 고수일지 상상해 보았다. 새로운 강자에 대한 기대감에 휩싸인 채 몸 상태를 살피던 독고천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놀랍군. 이 어마어마한 공력이라니!’
 독고천은 단전에 모인 엄청난 공력에 놀랐다.
 본래 천마불사대법은 몸을 화석처럼 굳게 만든 뒤 주변의 진기를 끊임없이 모아 내상을 치료하는 수법이다. 화석이 된 덕분에 몸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지만 흡수되는 진기는 상한 부분을 치유한다.
 대부분의 마교 교주들은 대법을 펼칠 당시 다른 고수가 곁에 있어 몸이 회복되는 즉시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독고천은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도 깨어나지 않은 채 오랜 세월 끊임없이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인 셈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무림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세월 동안 공력만 모았으니 어찌 적은 공력일까? 무려 300년의 세월이니 그냥 대충 생각해도 5갑자의 내공이다.
 물론 독고천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으하하핫! 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연을 얻은 셈이군. 후후훗, 감히 나를 해치려고 한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독고천은 몸이 회복되자 대소를 터뜨리며 동굴을 부수고 뛰쳐나와 폭음이 들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조차 감탄하게 만드는 공력의 소유자가 누군지 정말 궁금했다.
 오랜만에 경공을 발휘하자 기분이 몹시 좋았다. 입고 있던 옷이 다 헤져 벌거숭이가 되긴 했지만 그 정도야 흉이 될 것도 없다. 아무나 대충 때려눕히고 빼앗으면 되는 일.
 “엥, 저게 뭐야? 서, 설마 무공고수가 아니라 화약을 쓴 건가?”
 얼마 되지 않아 독고천은 터널 공사가 한창인 곳에 당도했다. 새로운 강자를 기대했던 마음이 허탈감으로 물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사람들의 복장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머리에 이상한 노란 모자(안전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 누구에게서도 무공고수의 풍모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실로 엄청나군. 저만하면 벽력세가의 진천뢰를 능가하겠어.’
 독고천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이곳은 조선인데 사람들의 복장이 자신이 아는 것과 많이 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것은 우선 몸을 가릴 옷가지들.
 마침 공사 현장에 나온 사람들이 작업복으로 갈아입느라 집에서 가져온 옷을 따로 모아 둔 곳이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들키지 않게 옷을 훔쳐내는 것은 독고천에겐 아주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굴을 뚫는 데 열중하느라 그쪽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설령 신경을 썼다 해도 독고천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처음 보는 복식이었지만 입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옷을 대충 걸치고 경신술을 펼치자 순식간에 수십 장이나 몸이 뻗어 갔다.
 독고천은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의 상쾌함을 느끼고자 한껏 숨을 들이켜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가 탁해서 도무지 상쾌함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원인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전 처음 우마(牛馬)가 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움직이는 수레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튼튼한 철로 만들어 진 수레. 그것을 자동차라 불리는 걸 알게 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독고천은 혹여 귀신이 붙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방술과 사술에 능한 자신이니 귀신을 쫓아내거나 종을 삼는 일도 가능하기에 그 수레를 몰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철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귀신도 요괴도 아니었다.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 철수레 안에는 권태로운 표정의 사람이 타고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혹 저자가 자신의 공력으로 저 철수레를 움직이는 것인가? 놀라운 공력이군. 제아무리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어섰다 해도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할 텐데 오히려 나를 넘어섰다는 뜻인가? 더군다나 지금 이 탁한 공기는 철수레 뒤에서 뿜어지는 독연(毒煙)과 흡사하지 않은가? 이 일대를 모두 독으로 오염시킬 정도라면 엄청난 독공을 익힌 모양이군.’
 생소한 모습의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오랜 시간 잠들었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면 자연히 무공도 발전했을 테니 세상에 새로운 강자도 많아졌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강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독고천은 먼저 저 철수레를 움직이는 자에게 도전하기로 맘먹었다. 앞을 가로막으며 태산 같은 기운을 뿜어내자 과연 철수레가 멈추어 서며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굉음이 울렸다.
 빵빵 빠빠방
 꽤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음공의 일종인 듯싶지만, 그 정도로 파천마황을 꺾을 수는 없지. 정당한 비무를 요청하기 위해 몸에서 더욱 강한 기세를 일으키는데 철수레에 탄 자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왜 도로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깔려서 뒈지고 싶냐?”
 어쨌든 생사를 논하는 것을 보니 비무를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독고천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철수레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개산신권(蓋山神拳)!”
 그의 주먹에서 태산마저 삼켜 버릴 듯한 패도적인 기운이 뻗어 나가 철수레를 후려갈겼다. 그렇잖아도 천하제일의 공력을 품은 그가 적게 잡아도 5갑자의 공력을 더 얻게 되었으니 그 위력이 어떻겠는가?
 콰쾅
 한 방에 철수레의 지붕이 날아가면서 뒤집어지고 안에 있던 자는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는지 정신을 놓아 버렸다.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미약한 공력을 사용하고도 그만한 위력을 보였으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까? 독고천은 흐뭇한 마음에 절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핫! 이제 나는 무림사에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남겨지리라.”
 독고천은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 단전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는 공력이라면 천하에 겁날 게 없다.
 “아마 무림에는 내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겠지? 마교의 교주도 다른 놈이 차지했을 테고. 보나마나 혁련광 그놈이 머릴 썼겠지. 뭐, 교주자리야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든 되찾을 수 있는 거니까 문제될 것은 없겠지. 역시 문제는 정파 놈들이겠군. 내가 없어졌으니 마교의 무림 지배도 끝났을 게 뻔하고…….”
 독고천은 머릿속으로 다시 무림의 절대자가 되기 위한 구상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워낙에 가공할 공력을 지녔으니 설령 강호의 무공이 많이 발전했다 해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독고천은 문득 자신을 향한 살기를 느꼈다. 처음에는 살기의 느낌이 보통 사람들의 것과 비슷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이들의 살기가 느껴지자 그것도 짜증스러웠다. 힘도 없는 것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저럴 수가…….”
 화가 치민 독고천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십 대나 되는 철수레였다.
 내공만으로 철수레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고수가 세상에 이렇게나 많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당황하여 아무것도 못하다가 일단 철수레가 없는 곳으로 몸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여인이 귀에 이상한 도구(핸드폰)를 가져다 대고 말을 하는데, 아무리 봐도 혼자 떠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누군가와 전음밀법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인가?
 “자,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싱싱한 계란을 아주 싸게 팝니다.”
 이번에는 고작 계란장수가 커다란 철수레에 계란을 실고 다니며 외치는데, 보아하니 말투는 나직한데 소리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했다. 비록 위용은 작았지만 드러나는 양상은 전설의 육합전성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독고천이 음공을 펼친다면 그 정도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충격을 떨쳐 내기는 쉽지 않았다.
 하찮은 계란장수조차 육합전성과 비슷한 음공을 사용하며 내력으로 철수레를 끌고 다니는데, 하물며 무림인들은 어느 정도나 실력을 가졌겠는가?
 한편으로는 자신이 죽어 공력이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선인촌(仙人村; 신선들의 마을)에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뭔가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역시 누군가를 붙잡아 천령이환대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군. 그나저나 누구를 잡아야 하지?’
 천령이환대법(天靈異紈大法).
 마교의 사술 중 하나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살아오면서 지니게 된 모든 종류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는 대법이다.
 이것을 사용하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물론 경험과 깨달음마저 고스란히 전해 줄 수 있고, 반대로 다른 이의 것을 쉽게 얻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뭔가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의외로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무엇이든 적은 노력으로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소의 위험이 뒤따르는 것이 인간사의 기본 원리. 천령이환대법을 통해 갑작스레 유입되는 어마어마한 지식과 정보를 감당하지 못하면 미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을 견디려면 어지간히 굳은 심지 가지고는 힘들다. 하물며 독고천의 무학지식과 삶의 연륜은 결코 작다고 할 수도 없다.
 마음을 정한 독고천은 적당한 대상을 물색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밝은 대낮에 일을 저질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적당한 대상을 골라야 했다. 어차피 조금 기다리는 것 정도는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최근 지구상에 자주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근래 유난히 자주 관찰되는 태양흑점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짙어지는 시각. 고치(高治)는 텔레비전을 끄고 옷을 갈아입었다. 캐주얼풍의 양복을 입고 머리에 가발을 얹어 일단 고등학생 티부터 지웠지만 거울에 비친 건 여전히 앳된 소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치는 괜히 표정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 보더니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아, 지겨워. 오늘 하루 정도는 정말 푹 쉬고 싶다.”
 고치는 어깨를 풀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집이 서울 외곽의 한적한 동네라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이웃들이 서로 얼굴을 다 알고 지내는 시골도 아니다. 한쪽을 보면 시골인데 다른 쪽을 보면 아파트촌이며 공단이 들어선 곳이랄까?
 “뭐야, 도 닦는 사람인가?”
 버스정류장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문득 조금 특이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머리는 산발인데다 무천 길어서 허리까지 닳았는데 무슨 모델들처럼 모발 관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되는 대로 기른 것처럼 엉망이었다.
 그렇다고 노숙자로 보기엔 옷도 깨끗했고 눈빛도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가끔 마주치곤 하는 노숙자들처럼 희망도 용기도 잃어버린 체념과 자포자기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뭔가 힘이 있다고 할까?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여하튼 뭔가가 있어 보였다.
 마침 그 사내는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치는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잠시 호기심을 보이며 지켜보았다.
 그러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세상을 살면서 모르는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것이야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고치는 뭔가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지금 당장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과 함께 그자에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고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왠지 그와 계속 눈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마침 그가 기다리던 버스도 왔다.
 하지만 고치는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낯선 사내가 그를 붙잡더니 뒤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고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내의 힘은 그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 이 아저씨가!”
 험하게 살다 보니 자연히 입에도 험한 말이 붙은 고치였다. 힘이 모자라니 일단 악다구니를 쓰며 밀치려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치는 한 대 때리기라도 할 포즈로 주먹을 쥐었지만 사내의 눈빛을 보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무시무시한 눈빛에 그만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파파파팍
 그가 겁에 질려 멈칫하자 사내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몸 이곳저곳을 찔렀다.
 사내는 팔 힘만 센 게 아니었다. 고치도 나름대로 힘이 좋고 눈도 빠른 편인데 사내의 손가락은 더 빨랐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또 아프기는 얼마나 아픈지 꼼짝도 못할 지경이었다. 고치는 너무 놀라서 고함을 치려고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입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사이에 버스는 이미 출발해 버려 따로 구원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사내가 고치를 옆에 끼더니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내달렸다.
 ‘이, 이게 사람이 뛰는 속도야?’
 어찌나 빠른지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의 느낌이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정말 어디 산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맞는지 사내는 힘도 세고 손가락질은 무지 아픈데다 (얼마나 아프면 말도 못하고 몸까지 마비될까?) 달리기는 다리를 기계로 바꿨다는 육백만 불의 사나이를 능가한다.
 입을 열지 못해 속으로만 온갖 욕설을 주절주절 지껄이던 고치는 사내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가까운 야산으로 들어갔다.
 고치가 사는 곳은 서울 외곽이라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논밭이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인적이 드문 곳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굳이 야산으로 들어간다.
 아니, 지금 이 남자의 몸놀림을 보니 돈이 필요한 거라면 벌써 빼앗아 달아났어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더 깊은 야산으로 들어갔다.
 ‘서, 설마……? 말로만 들었던 일을 내가 당할 줄은……!’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고치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언젠가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강간이란 것이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라고. 여자가 남자를 강간할 수도 있고 여자가 여자를, 혹은 남자가 남자를 범할 수도 있다고.
 그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얼굴도 잘생긴 편이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놈이 있으면 일단 조심부터 해야겠다.」
 당시엔 헛소리 말라며 주먹으로 뒤통수를 날렸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자신이 그 일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아직까지 동정을 지키고 있는 중인데 강간을 당하게 되다니. 그것도 예쁘고 섹시한 여자도 아니고 지저분하게 생긴 남자에게?
 17년간 지켜 온 동정을 불한당 같은 놈한테 빼앗긴다고 생각하자 서럽기 그지없었다.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서 눈만 끔뻑거리는 데 벌써 제법 으쓱한 곳까지 들어온 모양이다.
 사내는 고치를 내려놓더니 두 손을 자신의 가슴어림까지 올리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사내의 동작에 주변에 바람이 일면서 나뭇잎이 춤을 추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른 때라면 신비한 현상에 놀라워하며 감탄했을 테지만 지금 고치에게는 오히려 공포감만 조성될 뿐이었다. 두려움에 질려 눈물까지 찔끔거리는데 사내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지며 오른손이 고치의 정수리에 얹혀졌다.
 순간 고치는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여전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도 열리지 않아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는데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기묘한 것이 기어들어 오는 것 같았다.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계속되더니 이번에는 또 뭔가가 끊임없이 들어온다는 느낌이다. 마치 커다란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뇌를 갉아먹는 것 같은 느낌.
 
 3
 
 “흠, 이것 참 곤란하군.”
 아직 어려 보이는 애송이를 붙잡아 천령이환대법을 펼친 것까지는 좋았다. 아니, 정신적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부러 애송이를 붙잡은 것이다. 덕분에 고치라는 소년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독고천에게는 전혀 생소할 뿐이었다.
 독고천은 그제야 자신이 보고 놀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철수레를 탄 무림고수를 이긴 것도 아니고, 계란장수가 육합전성과 비슷한 수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과학이라는 것의 힘이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히 고치의 삶은 독고천이 쌓아 온 연륜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공수련을 거듭해 온 무림인의 정신력은 범인의 것을 뛰어넘는다. 특히 독고천은 고금제일의 고수를 자처할 정도로 절대고수가 아닌가?
 그에 반해 고치의 상황은 심각했다. 고치보다 수배는 더 되는 연륜은 물론이거니와 무학의 이치와 심오한 학문이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파고들며 혼란을 주었다. 살아온 지 고작 17년째에 접어드는 고치가 견디기엔 너무나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고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워하며 발광했다. 독고천이 이미 모든 지식을 받아들인 후 상황을 정리하고 있음에도 고치는 고통에 몸부림칠 따름이었다.
 “별수 없군. 이 세상은 무공보다는 돈이 우선시되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이 애송이의 신세를 질 수밖에.”
 독고천은 내키지 않는 듯 말하면서도 고치를 향해 지풍을 날렸다. 얼핏 보기엔 성의 없이 손가락을 퉁긴 듯 보였지만 순식간에 날아간 지풍은 고치의 혈도를 몇 개나 점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독고천은 마교의 또 다른 비전을 사용했다.
 천마호심공(天魔護心功).
 강호에서 가장 빠른 진전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심마(心魔)에 빠질 위험성이 가장 큰 것도 바로 마교의 무공이다. 마교 역사상 무공을 익히다 심마에 무너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중에는 하급무사뿐 아니라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주요 인물들도 많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하급무사들보다 제법 고위급 인물들에게 그런 위험성이 더 크다. 위력이 강할수록 부작용이 크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천마호심공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최악의 순간이라도 심마에서부터 심지(心志)를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방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마호심공은 무공을 익히면서 스스로 운용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타인에게 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교에서 보유한 활공(活功)의 일종인 셈이다.
 천마호심공이 펼쳐지자 고치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막대한 양의 정보와 지식은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런 고치의 모습을 독고천은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하찮은 애송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는 일도 역시 그랬다.
 “고아인데다 비천한 일을 하는군.”
 무림의 절대자였던 독고천 입장에서 보면 고치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후로 술집의 호객꾼, 일명 삐끼를 하며 돈을 벌었다. 고치가 입학한 고등학교에서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특별히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고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외를 둔 것이다.
 그렇다고 고아가 되자마자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당장 비참한 신세가 된 것도 아니다. 서울 외곽에 허름하나마 작은 집 한 채와 약간의 돈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의 집이 있으니 숙소 문제는 해결되었고, 삐끼를 하기 전까지는 약간의 돈도 있었다. 고치도 조금 노는 축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세상에서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현실감각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독고천 입장에서는 하찮게 보였지만 당장 이용해 먹기엔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특별한 인연이 없으니 함께하기에도 문제가 없고 집도 있으니 얹혀 지내기 딱 좋지 않은가?
 그동안에도 고치는 잠시 몸부림을 치다가 차츰 고통을 잊어 갔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지식을 완전히 소화하기도 전에 그는 독고천에게 화부터 냈다.
 “다, 당신!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천령이환대법을 받았으면 절로 알게 아닌가?”
 고치의 물음에 독고천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 그건……!”
 독고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치는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독고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독고천이 살아온 과정과 지식은 물론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그런 일이……! 무, 무슨 그런 게 어디 있다고…….”
 “그래, 네가 가진 지식을 보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겠군. 노부는 마교의 절대종사이자 파천마황이라 불리던 독고천이다.”
 정체불명의 사내, 독고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치는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독고천이 행한 대법으로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독고천은 정신을 잃은 고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옆구리에 끼더니 경신법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신기하게도 고치의 집이었다.
 “우습군. 무림의 절대자였던 내가 이런 애송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독고천의 목소리엔 불만이 잔뜩 섞여 있었다.
 
 “끄으응, 제길!”
 “이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고치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가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키는데 독고천이 말을 걸었다.
 고치는 설마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었지만 막상 눈앞의 독고천을 다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 당신! 어떻게 우리 집을 안 거야?”
 고치의 외침에 독고천은 피식 웃었다. 천령이환대법이 실패했을 리 없으니 자신이 고치의 모든 지식을 공유한 것처럼 고치도 자신의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겠는가?
 “정말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 그게 그러니까…… 으으, 젠장! 대체 내가 왜 이런 알 수 없는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데? 게다가 당신, 원래는…… 제길!”
 천령이환대법은 단순히 지식과 경험만을 전해 주는 게 아니라 대법을 시전하기 직전까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게 해 준다.
 고치도 마찬가지다. 독고천의 천령이환대법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이 무엇인지도 안다. 독고천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치의 목숨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야 당연하지. 내가 가진 절대무공을 다른 사람이 갖게 하는 건 또 다른 위협을 만드는 거다. 애초에 위험의 싹은 없애는 게 좋아.”
 “이봐요, 아저씨.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무공이야?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 방에 히로시마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어? 경공인지 뭔지를 아무리 잘해 봐야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아?”
 고치의 말에 독고천은 묵묵부답이었다.
 처음에는 고치를 죽일 생각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학의 지식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위협적인가?
 더군다나 만에 하나라도 자기 자신조차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해동무록상의 무공을 얻게 된다면?
 아니, 해동무록상의 무공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해동무록의 심법은 다른 내공심법을 연마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로소 해동무록에 수록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다.
 “할 말 있으면 해봐. 여태까지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다면 나 하나쯤 죽이는 것도 쉽겠네?”
 독고천이 조용하자 고치는 용기백배해졌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기왕 죽을 몸 큰소리나 한번 쳐 보자는 심산으로 더 크게 떠들었다.
 하도 떠들어서 시끄러웠던 걸까? 결국 독고천도 더는 참지 못하고 살기를 일으켰다.
 무공의 고수는 살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독고천은 무림의 절대자였던 인물. 그래도 정말 죽일 생각은 없는지 고치도 웬만큼은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그제야 움츠러드는 고치.
 “정말 죽고 싶은가?”
 “아, 아니!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방금 전까지 싸가지 없이 굴던 고치가 독고천의 살기에 대뜸 공손해졌다.
 “걱정 마라. 나 역시 너를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어차피 지금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당분간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군.”
 “도, 도움이라니요?”
 “이곳은 내가 살던 시대와 너무 많이 다르다. 게다가 무공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중시되는 시대인 것 같고…….”
 “그, 그야 그렇죠.”
 “걱정 마라. 내 밥값은 할 테니까. 그래, 내 무공을 전수해 주면 되겠군.”
 “어, 어차피 내 머릿속에 다 있는데…….”
 “알고만 있다고 진정으로 그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흔히 3일간 배운 것을 3년간 수련한다는 말이 있다. 무공이란 머리로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너는 그냥 보기에도 무공을 익힌 적이 없어 기혈이 막혀 있고 근골도 굳었다. 무공고수가 옆에서 돕지 않으면 머리로만 알지 어느 것 한 가지도 펼치지 못할 게다.”
 “그, 그렇겠네요.”
 그 정도의 이치는 고치의 머리에도 들어 있었다. 무공의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로 쉽게 펼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약 그게 정말 된다면 누가 비싼 돈 들여가며 도장에 다닐까? 그냥 가까운 서점에서 태권도 교본이나 한 권 사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 저절로 고수가 될 텐데.
 더군다나 고치는 독고천의 말대로 다른 무예를 전혀 익힌 적이 없어 옆에서 고수가 수시로 타혈을 시켜 기혈을 열고 근골을 풀어 줘야 비로소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비록 독고천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고치로서도 그런 무예를 익히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직접 보지 못했다면 몰라도 독고천의 손가락질(점혈)과 뜀박질(경공)을 연이어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그런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데 싫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 해동무록이라고 했지? 나는 아예 처음부터 그걸로 해야지. 나중에 두고 봐. 나한테 저지른 짓 열 배로 갚아 준다.’
 “잘됐네요. 그럼 우선은 마교의 수법을 익히면서 내공은 해동무록에 실린 방식으로 배워야겠죠? 어차피 다른 걸 배운 적도 없으니까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어느 정도 가르쳐 주다가 이 시대에 적응하게 되면 곧바로 죽여 버려야지. 해동무록을 알고 있으니 아무래도 위험해. 다행히 몇 년간은 내 상대가 못 되겠지.’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독고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그게 좋겠군. 비록 무공이 필요 없는 시대라지만 나도 해동무록의 참된 위력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우와, 잘됐네요! 그럼 우선은 저랑 같이 지내요. 저도 어차피 혼자 살잖아요. 아, 그렇지! 낮에 심심하시면 게임이나 하면 되겠네요. 저 없는 동안 제 캐릭터나 좀 키워 주세요.”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두 사람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치의 무공수련은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무공은 독고천이 지닌 것을 수련했지만 내공심법만은 해동무록에 수록된 것을 따랐다. 독고천도 그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무공수련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고치가 시간을 내기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치는 낮엔 학교를 다니고 밤엔 일을 한다. 흔히 주경야독이라지만 고치는 그와 반대로 야경주독(夜耕晝讀)이다.
 일하는 시간도 초저녁에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삐끼를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당연히 취객들이 새로운 술집을 찾기 위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자정 전후다.
 고치는 그나마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집에 일찍 돌아온다지만 그래 봐야 새벽 3시다. 자연히 수면이 부족해 새벽부터 수련을 하려면 힘들 수밖에.
 “조,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어차피 너는 학교에서 자지 않나? 약한 소리 말고 어서 일어나라.”
 결국 모든 상황을 해결한 것은 독고천의 폭력이었다. 고치가 아무리 깡다구가 좋다 해도 감히 그에게 대항할 정도는 아니다. 하다못해 자신이 일하는 술집과 연결된 건달들을 모조리 끌고 와도 독고천에게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독고천도 이왕 수련을 시키는 거라면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무림의 상황이라면 천하제일의 고수인 그가 고작 점소이 따위를 기명제자로 삼은 꼴이나 마찬가지. 우선은 위신이 걸린 문제니 대충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고치는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자장가(?)를 들으며 피로를 풀기로 했다. 어차피 학교에서도 그가 학교생활을 하는 목적을 모르지는 않는다.
 일단 마음먹고 시작하자 수련의 진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고치가 가진 무공지식과 깨달음은 모두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독고천의 것이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다만 고치가 그것들을 펼칠 수 없을 뿐이다. 독고천이야 내공이 넘쳐 나니 뭘 해도 상관없지만, 고치에게는 내공은커녕 당장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기만 했다.
 “젠장, 어떻게 몸을 공중에 띄워서 주먹을 뻗으란 거야?”
 연신 투덜투덜. 처음에야 독고천이 지닌 가공할 능력을 자신도 얻을 수 있다니 마냥 좋기만 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사서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치의 투덜거림에 독고천은 간단한 시범을 보였다. 고치는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독고천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면서 세 번의 주먹질에 한 번의 발길질을 더했다. 위력은 둘째 치고라도 눈이 즐거울 만큼 화려했다.
 “내 말대로 기초부터 시작해라. 이론을 좀 안다고 처음부터 펼칠 수 있다면 비급을 많이 모은 사람이 무림의 지배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그렇게 멋있는 거 위주로 하면 좋잖아요.”
 비록 학교 성적을 포기하고 삐끼나 하지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남들에게 폼 나게 보이고 싶은 나이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 앞에서 돋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심정을 독고천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파천마황 독고천의 무공을 물려받는 전인이라면 괜한 욕심으로 몸만 망쳐서는 곤란하다.
 ‘제길, 이 세상에 적응만 하면 네놈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 버리겠다.’
 역시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말은 다르게 나왔다.
 “네가 상승무공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지니고 있음에도 기초부터 수련하는 것은 우선 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술이 있어도 잔이 작으면 조금밖에 담을 수 없듯, 무공을 펼칠 만한 몸이 갖춰지지 않으면 그 많은 무학지식도 모두 쓸모가 없지. 처음에 몸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울 게다. 어쨌든 너는 무공에 관한 한 나 파천마황의 깨달음과 지식을 모두 얻었으니까.”
 독고천의 말속에는 은근히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지만 틀린 부분이 없어 고치도 일단은 수긍했다.
 아무리 멋진 발차기를 알아도 다리가 올라가지 않는데 어쩔 것인가? 독고천의 말대로 먼저 몸만들기에 돌입할 수밖에.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당분간의 무공수련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입문무공으로 몸 풀기.
 이것은 몸만들기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자세로 오랜 시간을 버티는 것들 위주라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근력이 붙고 몸이 유연해졌다.
 다음은 독고천으로부터 타혈받기.
 막힌 기혈을 푼다는 핑계로 행해지는 독고천의 구타다. 맞는 고치 입장에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시간이지만 독고천도 그리 편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독고천이 가격하는 혈도 중에는 치명적인 급소는 물론이거니와 사혈도 포함되어 있다. 자칫 조금만 과하게 손을 쓰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또한 극히 미량이나마 고치에게 공력을 주입해 주다 보니 아무리 넘치는 내공의 소유자라 해도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고치도 처음에는 구타라며 싫어했지만 타혈을 받은 다음엔 온몸에 힘이 넘치고 개운해져 나중에는 오히려 더 바라게 되었다.
 세 번째가 해동무록상의 심법연마.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작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장 크고 중요하다. 공력의 제약이 없는 상태로 펼치는 무공이라면 과연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지.
 그것은 무림사에 최강자로 기록된 파천마황 독고천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2화 불쌍한 양아치들
 
 1
 
 무공입문 후 한 달이 지날 무렵, 고치는 건강 증진을 위해 수련하는 현대인은 물론 무림인들 입장에서도 상당히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적으로 독고천의 공로다. 그의 무공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되풀이된 타혈로 인해 상당한 진기가 막힌 기혈을 뚫으면서 몸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고치로서도 무공수련으로 인한 효능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어 만족했다.
 처음 무공수련을 할 때만 해도 그는 피로감에 지쳐야 했다. 그나마 학교에서 그리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고, 교사들도 그가 매일 등교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는 상황이라 수업 시간에 부족한 수면을 대신하면서 버텨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치는 아주 적은 수면만으로도 피로를 거의 느끼지 않게 되었다. 아니, 독고천으로부터 비롯된 고치의 무학지식으로 보면 당연했다.
 사람은 몸에 기운을 품고 있다. 비록 무림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살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몸에 진기가 흐른다는 증거다. 피로란 바로 진기를 소모하고 탁기가 쌓이는 과정이다.
 굳이 수면을 취하지 않더라도 소모된 진기를 보충하고 탁기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피로가 풀리는 것은 당연지사. 고치의 수련은 진기를 받아들이고 탁기를 풀어내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특히 독고천의 타혈을 통해 상당한 진기를 받아들이는 중이고, 해동무록상의 심법은 탁기를 몰아내는 데 있어 천하에 으뜸가는 효능을 발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치는 수련을 해도 피로감을 거의 느끼지 않게 되었고, 이제 어느 정도 입문공(入門功)에 익숙해졌다. 어차피 머리로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알고 있으니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몸만들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수련을 시작하는데 독고천이 수련에 필요하다며 돈을 요구했다. 고치로서도 무공수련의 효능이 워낙 대단한지라 그냥 수업료를 지불한다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넉넉하게 챙겨 주었다.
 그날 독고천은 어디서 산건지 커다란 납덩어리를 잔뜩 구해 오더니 삼매진화를 이용해 직접 손목과 발목에 채울 족쇄를 만들었다. 용도는 독고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치의 수련에 필요한 것이었다.
 고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오랫동안 무거운 것을 차고 있다가 갑자기 풀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납이란 게 어디 보통 무거운 물건인가? 적어도 현재까지 지구상에 알려진 물질 중 수은을 제외하고 가장 무거운 물체다.
 그것을 두껍게 만들어 손목과 발목에 채우자 그냥 걸을 때는 몰라도 조금만 빨리 움직이려면 들어가는 힘부터가 달라졌다. 그것뿐이라면 문제가 없겠는데, 독고천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수련을 하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고치는 거부했지만 다짜고짜 쥐어 패는데 장사 있나? 결국 눈물 콧물 흘리며 억지로 대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독고천이 실전을 겸한다고는 했지만 말이 좋아 실전이지 정말 실전으로 붙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치의 성장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고작 한 달 배운 풋내기에 불과하다. 독고천이 공력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고치가 이길 가능성은 애초에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계속 맞다 보니 눈이 빨라지고 있다는 정도랄까?
 더구나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있는 무공들을 끄집어내니 자연히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물론 그래 봐야 독고천에게 얻어맞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야, 너 요즘 운동하냐?”
 “으, 응.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얼핏 봐도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 물어 본 거지.”
 “그러냐? 난 잘 모르겠던데…….”
 고치에게 말을 건 녀석은 함께 삐끼를 하는 동갑내기였다.
 삐기라는 직업 자체가 미성년자가 하기엔 곤란한 일이지만 의외로 미성년자가 많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1, 2년 정도만 지나면 벌써 노인네 취급을 받을 정도다.
 “근데 넌 내일도 학교 가냐?”
 “그래야지. 아무리 학교 졸업하고 술집 하나 낼 거라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지.”
 “너 보기완 다르게 범생이다?”
 “선생들은 다르게 말하더라.”
 삐끼를 하는 녀석들 중엔 학교에 제대로 다니는 애들이 드물다. 개중에는 가출한 다음 따로 숙소를 구해 생활하며 삐끼를 하는 녀석도 있고, 부모와 살면서 고등학교를 포기한 놈도 있다.
 그나마 용돈만큼은 부모 속 썩이지 않으니 다행이랄까?
 그런 녀석들이니 비록 수업 시간에 잠만 잘망정 등교를 거르지 않는 고치가 모범생으로 보일 법도 하다.
 녀석들의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삐끼를 하는 녀석들은 대체로 잘생긴 편인데, 삐끼물이 나쁘면 술집물도 나쁘다는 생각을 하는지 웬만큼 얼굴이 받쳐 줘야 손님을 잡기도 편하다. 얼굴 못난 녀석들은 심지어 삐끼 노릇도 얼마 못하고 포기하기 일쑤다.
 그렇게 제법 잘생긴 얼굴인데다 노는계집들을 만날 기회도 흔하다. 물론 삐끼들의 벌이도 꽤 괜찮은 편이다.
 돈도 여자도 쉽게 꼬이니 자연히 놀고 쓰는 데도 망설이지 않는다. 아무리 돈을 헤프게 써도 그 정도는 하루만 빡세게 돌면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당연하다.
 나이로는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녀석들이 벌써 여자 문제로 사고를 쳤다느니, 유명 메이커 하나 사는 데 몇 십만 원을 줬다느니 하는 말은 이제 삐끼들 사이에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런 형편이니 고치가 얼마나 모범적으로 보일까?
 “솔직히 나는 네가 부럽다. 나나 성태 녀석은 그냥 대충 살아가는 양아치지만 너는 달라.”
 “그래 봐야 겨우 삐끼잖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넌 고등학교 졸업해서 술집이라도 내겠다는 계획이 있잖아. 또 나름대로 돈도 모으고 있고. 정확한 시세는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네 계획대로 술집 하나 내서 앞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겠지.”
 고치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년은 태기라는 녀석이다. 제법 건장한 체구에 고치가 보기에도 상당한 미남이라 속된 말로 제비 노릇을 해도 성공할 것 같았다.
 듣기로는 여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하다는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이 녀석은 그 잘난 테크닉 없이도 여자들만 잘 꼬신다.
 “그게 부러우면 너도 지금부터 착실히 돈 모으면 되잖아. 넌 나보다 수완도 좋고 수입도 많으니까 내가 모은 액수 정도는 금방 따라올 것 같은데?”
 “말이라도 고맙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냐? 여태까지 알고 지내던 형들이나 친구들과 손 끊기가 어렵잖아. 아니, 뭐 그거야 마음만 먹으면 충분하겠지. 내가 앞으로 착실히 살겠다고 하면 설마 그걸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제일 힘든 게 착실히 살자고 마음먹는 거더라.”
 태기는 뭔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더니 곧 어디론가 뛰어갔다. 저기서 술 취한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고치도 고개를 저으며 다른 먹잇감(?)을 찾았다.
 텔레비전에서 연일 계속되는 경기불황 관련 보도에도 불구하고 술집은 여전히 호황이다. 고치의 수완이 늘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처음 삐끼를 할 때보다 수입이 더 높아졌다.
 몸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달고 있으면서도 고치는 취객들을 거의 납치하다시피 해서 수입을 올렸다.
 남자란 술기운이 돌면 의외로 허영심이 생기는지라 ‘사장님!’해가면서 적당히 추켜올려 주면 금방 넘어오곤 한다. 거기다 ‘사장님 정도 멋진 남자라면 우리 업소 아가씨들이 다 반할 겁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면 거의 확실하다.
 굳이 술값이 싸니 비싸니 하는 말은 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추켜올리면 알아서 객기를 부리니 고치로서는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마울 뿐이다.
 태기와 경쟁이라도 하듯 손님을 끌어들이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깊어져 있었다. 아직 삐끼들이 철수할 시간은 아니지만 고치는 슬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침에 학교도 가야하고 독고천과 함께 무공수련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치는 언제나 그렇듯 업소로 내려가 음료수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업소사장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더 중요한 볼일도 있다.
 “사장님,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오늘도 수고했다. 어디 보자. 오늘은 손님을 얼마나 데려왔나?”
 사장은 고치의 말을 듣자마자 테이블 밑에 있는 큼지막한 장부를 꺼내더니 계산기를 두들겼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일 하던 일이니까.
 “오늘은 32만원이네? 자, 여기 있다.”
 “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일한 만큼 가져가는 건데…….”
 사장의 말에 고치는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를 덧붙이고 가게를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
 “꺄아아악!”
 “이런 쌍년이 정말! 야, 이년아! 너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내가 그동안 네년한테 팔아 준 술값이면 벌써 수십 번은 대 줘도 모자랄 것이다. 기껏해야 술이나 따르는 갈보 년이 무슨 열녀 춘향이라도 되는 줄 알아?”
 어느 룸에서 거칠게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여자의 비명과 사내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의례 있는 소동으로 생각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예쁘장한 호스티스에게 반해서 몇 차례 술을 마시고 2차를 가자고 조르다가 안 되자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아주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데서 술이나 따른다고 갈보 운운하는 말엔 화가 나는지 다른 호스티스들까지 나서려고 팔을 걷어붙이더니 상대를 보곤 포기해 버렸다. 제법 험악한 인상에 어깨에 드러난 문신을 보니 조직폭력배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특히 지금 호스티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고함을 지르는 녀석은 인근에서 아주 유명한 개차반이다. 일반 손님이라면 술집에서 고용한 기도가 적당히 알아서 해결하겠지만 상대는 조폭이었다. 그것도 인근에서 악명을 떨치는.
 물론 호스티스나 다른 손님들은 그의 정체까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함께 있는 자들과 그들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 지혜 누나잖아?”
 고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집으로 가려다 그 호스티스가 자신과 유독 친한 누나임을 확인했다.
 그가 다른 삐끼들처럼 쉽게 벌었다고 쉽게 쓰는 게 아니듯 술집에서 일한다고 모두 몸을 파는 건 아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단시일 내에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에 처한 여자들 중에는 의외로 정결한 사람도 많다.
 그것은 지혜도 마찬가지였다.
 술집에서 일할 때 2차를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수입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처음에는 2차를 거부하다가도 그만 돈의 유혹에 넘어가는 여자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지혜는 달랐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에 아는 것도 적지 않아 누구나 떠올리는 그런 싸구려 여자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술집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무슨 병에 걸렸다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엔 온갖 일들을 다 해 봤지만 병원비를 감당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까지 오게 된 것이 바로 술집이었다.
 지혜와 고치는 한동안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직업상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자연히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고치가 먼저 고아라고 밝혔고, 지혜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유독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아무리 고등학생이라지만 고치로서도 잘해 주는데 싫을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그런 지혜는 2차에 대한 유혹을 지속적으로 거부했을 것이고, 손님은 그것이 기분 나빴겠지.
 고치는 싫다는데 굳이 2차를 강요하는 그 깡패가 거슬렸다. 더군다나 친한 누나가 매를 맞는데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침 사장이 먼저 나섰다.
 “아이고, 손님!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실은 이 아이가 2차를 나가지 못하는 사정이 있거든요. 대신 훨씬 예쁘고 화끈한 애를 내보내 드릴 테니까 좀 참아 주십시오.”
 “아, 씨발! 지금 장난해? 내가 이년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 그 돈이면 같이 온 저 동생들한테 전부 하나씩 붙여 줘도 부족하다고. 어쨌든 다른 년은 필요 없으니까 참견하지 말고 절로 꺼져.”
 사장이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녀석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지만 상대는 막무가내였다. 지혜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모양인지 사장을 힘으로 밀어붙이며 억지를 부렸다.
 그 광경에 고치도 화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독고천의 파괴적인 무공이라도 발휘하고 싶지만 고작 한 달 수련해서 무슨 상승의 수법을 쓰겠는가?
 더구나 이곳은 자신의 영업(?) 장소이니 만큼 화가 나도 일단은 비즈니스용 멘트로 나가기로 했다.
 “아이고, 형님! 저희 사장님 말씀대로 하세요. 저희 업소에 정말 예쁜 아가씨들 많거든요. 이왕이면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여자가 좋잖아요.”
 “이 새끼는 또 뭐야? 네가 이년 기둥서방이라도 되냐?”
 “제 주제에 어디 그런 복이나 있겠습니까? 술 한 잔 더 하시면서 기분 푸시고 더 예쁜 아가씨로 고르세요.”
 나름대로 사근사근하게 굴었지만 놈은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뒤에 있는 덩치 중 하나에게 슬쩍 턱짓을 하자 주먹을 우두둑거리며 나서더니 일단 주먹부터 날리는 게 아닌가?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에 고치는 움찔하면서도 두 손이 움직였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독고천과의 대련은 그로 하여금 거의 필사적으로 방어를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독고천의 주먹을 힘으로 막을 순 없다는 것이었다. 독고천이 자신을 봐주느라 공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지만, 그것이 어디 보통 사람의 권각인가?
 그래서 고치가 매일 궁리하며 연습한 것이 상대의 힘을 받아들여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화경(化徑)이었다.
 다가오는 힘은 끌어당기고 물러나는 것은 같이 밀어내는 방식의 박투술을 수련하던 고치에게 갑자기 주먹이 날아오자 평소 연습한 동작이 나왔다. 몸무게까지 실어서 날리는 상대의 주먹을 슬쩍 끌어당기는 간단한 동작에 불과했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쿠당탕
 꽤 커다란 덩치의 깡패가 그만 바닥을 뒹굴었다. 워낙 의외의 결과라 술집 안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봐도 기껏 삐끼나 혹은 웨이터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이 조직폭력배 하나를 엎어 버렸으니 어쩌겠는가.
 그 모습에 화가 났는지 다른 녀석이 룸으로 들어가 맥주병 하나를 깨뜨려서 들고 나왔다. 얼핏 보기에도 깨진 맥주병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깡패는 그것을 들고 고치에게 돌진했다.
 고치는 상대가 갑자기 흉기를 들고 달려들자 놀라긴 했지만 그간 독고천에게 지옥 같은 수련을 받으며 받아치던 습관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앞돌려차기로 병을 든 손목을 차더니 그대로 회전하며 팔꿈치로 안면을 찍어 버렸다.
 꽈직
 달려오던 힘에 고치까지 몸을 회전시키며 팔꿈치로 찍어 버렸으니 그 파괴력은 실로 대단했다. 안면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덩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어쭈, 이거 봐라? 이제 보니 뭘 좀 배웠다 이거잖아? 너 밖으로 나와 봐. 좀 넓은 데서 상대해 주지.”
 깡패 녀석은 이제 지혜에 대한 관심을 버렸는지 밖으로 나가며 고치에게 연신 손짓을 했고, 동생들이라는 덩치들은 쓰러진 놈을 부축하고 있었다.
 고치는 혹시 안면이 함몰되기라도 한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지만 우선 당장은 자신부터 살펴야 할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가게 안에서 버틸 수도 없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섰다.
 물론 한편으론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연속으로 깡패를 둘씩이나 보내 버렸으니 그런 자신감이 붙는 것도 당연했다.
 
 2
 
 고치는 수행의 성과가 있다고 여기며 일단 밖으로 나섰다.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지 사장과 지혜도 그를 따라 나갔다. 의외의 선전에 고치가 저 건방진 깡패를 물리치길 기대하는 사람들도 관객이 되어 밖으로 나섰다.
 고치는 벌써 몸 풀기에 들어간 상대를 보며 내심 긴장했다. 상대도 고치의 표정을 보며 주먹을 풀었다.
 “휴우, 이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밖으로 나설 때는 몰랐는데 막상 나서고 보니 여간 후회되는 게 아니었다.
 이건 져도 문제고 이겨도 문제다. 삐끼를 하면서 건달들에게 찍히면 여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독고천이 활약하던 시기의 고수가 될 수 있다면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이봐, 꼬마. 너 솔직히 고삐리지?”
 상대는 주변 사정을 뻔히 알면서 물었다. 만일 잘못되면 미성년자임을 들어 일을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다. 그제야 고치는 일단 이기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상대를 응시했다.
 “저 새끼 나하고는 말도 하기 싫은 모양이네. 보니까 어디서 뭘 좀 배운 모양인데 사실 나도 그렇거든? 한번 겨뤄 볼까?”
 깡패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고치는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두 손으로 반원을 그리며 상대의 기세를 흘려보냈다. 방금 전 업소에서 덩치 하나를 쓰러뜨릴 때처럼 상대의 몸을 슬쩍 끌어당기며 중심을 흐트러뜨린 것이다.
 하지만 상대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고치가 기세를 흘려보낸다 싶을 때 오른발로 진각을 밟으며 어깨로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고치는 자신의 방어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믿었기에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가슴을 부딪쳤다. 몸무게를 전부 실은 공격이라 고치는 그만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는 달려들며 고치를 밟으려고 했다. 고치도 놀라서 옆으로 뒹굴며 몸을 일으켰다.
 “오오, 생각보다 제법인데? 피할 줄도 알고.”
 상대의 말에 고치는 입술을 깨물며 자세를 고쳤다. 잠시나마 우쭐한 마음을 가졌지만 그로 인한 방심은 금물이다.
 독고천도 비슷한 말을 했다. 가끔은 고수들도 방심과 자만으로 인해 상대도 안 되는 하수에게 당하곤 한다고.
 고치도 자신이 비록 고수는 아니지만 충분히 다른 사람과 싸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신은 기연을 얻은 무인이다.
 “야, 이 십새야! 덤벼.”
 고치가 자세를 가다듬자 깡패가 그를 도발했다. 상대는 고치와 겨루는 것이 재미있는지 웃는 낯으로 손가락까지 까딱거렸다.
 고치는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에 깡패는 오히려 몸을 날렸다. 고치와의 거리가 꽤 되는 듯했지만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또다시 고치가 타격을 입을 듯 보였지만 결과는 달랐다.
 상대의 힘을 슬쩍 옆으로 밂과 동시에 어깨공격이 들어오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고치는 그에 대한 대비도 하고 있었다. 슬쩍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눕히며 두 손으로 땅을 지탱하곤 발로 하늘을 차듯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얼핏 간단해 보였지만 결과는 대단했다.
 빠각
 널리 알려지길, 발차기의 위력은 주먹의 세 배. 그나마도 상대가 달려드는 힘까지 더해졌으니 어디 보통 위력일까?
 고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두 발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연속해서 세 번을 더 가격했다.
 고치가 자신 있게 발휘할 수 있는 무공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독고천이 가진 무학의 깨달음을 이용해 공격하자 이미 평범한 무공이 아니었다.
 흘리고 할퀴고 움켜쥐고 때리고 밀쳐 내며 차내는 동작을 몇 번 되풀이하자 상대의 몰골은 끔찍할 정도로 부어 버렸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깡패들은 감히 달려들지 못하다 고치가 물러난 후에야 비로소 쓰러진 사내의 놈을 일으켜 세웠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덩치 큰 녀석들이 만신창이가 된 깡패에게 우르르 몰려갈 때 어느 틈에 지혜도 고치에게 달려갔다. 이유야 어찌됐든 자기 때문에 싸운 꼴이 된 고치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고치야, 괜찮니?”
 “아, 예.”
 고치는 아까 깡패에게 얻어맞은 가슴이 조금 욱신거렸지만 어쨌든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여겼다.
 한편으론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앞일이 걱정되었다. 건달들의 특성으로 보아 이 일을 빌미로 얼마나 괴롭힐지 알 수가 없었다.
 
 고치가 바깥에서 좌충우돌, 깡패들과 싸우고 돌아오는 동안 독고천도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게임 캐릭터의 스킬도 새로 배우고, 퀘스트 수행에 대한 정보도 확인하다가 그마저 지겨워지자 비로소 운공을 통해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군.”
 독고천은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기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조금씩 더 나빠졌다.
 단전을 가득 채운 묵직한 공력의 힘을 몸이 견디지 못해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워낙 느리게 진행되어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두고 관찰해 보니 약간의 차이를 간파할 수 있었다.
 원인은 독고천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하나는 무려 300년이나 끌어 모은 공력의 양이 너무 많아서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세월의 힘에 밀렸다는 것. 어쩌면 두 가지 다 원인일 수도 있다.
 “이대로라면 1년도 버티지 못하겠군. 그전에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역시 공력을 없애는 방법뿐인가?”
 독고천은 한숨을 불어 내며 주먹을 쥐어 보았다. 워낙 어마어마한 공력이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진기가 유통하다 보니 가히 의형수형(意形手形)의 표본이었다.
 그렇다고 단전을 없앨 수도 없다. 가공할 기운 탓에 몸의 내부가 무너지고 있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그 공력으로 육체가 단련되어 버티고 있는 중이다. 만일 살기 위해 단전을 파괴하여 내공을 상실시킨다면 가공할 기운이 빠져나가는 순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독고천이 고민에 빠진 이유는 적당한 해결책을 알지만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차라리 무림에서라면 제자 하나를 구해 잘 구슬린 다음 내공의 일부를 주고 은거해 버리면 된다.
 그리하면 제자 입장에서는 단번에 절세고수가 되어 마교의 주인이 될 수 있어서 좋을 테고, 독고천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분상 마교교주의 보호를 받게 된다.
 아무리 막나가는 마교라 해도 공력을 전하고 은거한 전대교주를 해칠 사람은 없다. 뭐, 덤비는 놈이 있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천하제일의 무공을 전수한다고 하면 당장 정신병자 취급을 할 시대이니 원……. 그렇다고 해동무록의 심법을 익히는 놈에게 마교의 공력이 잘 전달될지도 의문이고.”
 공력을 주는 것도 아무에게나 마구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일 공력을 받는 사람이 다른 성격의 심법을 익혔다면 두 기운이 서로 반발하여 참혹한 결과를 빚게 된다. 보통은 오장육부가 터져 죽음에 이르고 운이 좋아 목숨을 건져도 주화입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잠시 고민하던 독고천은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별 상관은 없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공력을 줘 봤자 한계가 있겠군.”
 독고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어도 3분의 1 이상의 내공을 없애야 한다. 그렇다고 공력을 주는 일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도 아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공력을 건네받는 순간 명문혈에 기운이 통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이야 독고천이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방법은 어느 정도 수련을 통해 최소한의 수준이 갖추어진 자를 찾아 전해 주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고치 녀석의 무공수련을 더욱 몰아붙여야겠군. 아직 삼류무사에도 못 미치는 녀석이니 공력을 전해 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
 독고천은 자신이 아는 모든 종류의 대법과 의술을 떠올리며 고치를 빠른 시간 안에 고수로 만들 계책을 세웠다.
 아니, 다른 무공은 할 줄 몰라도 상관없다. 오로지 내공을 전수하기 위한 가장 최적의 상태로만 만들어도 충분하다. 어차피 고치도 내공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닐 테니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늦었군.”
 “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독고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고치는 어느 정도 마음을 연 상태였다. 적잖은 세대차이(?)가 나긴 하지만 무공이라는 것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믿었다.
 또한 갑작스레 고아가 되었으니 얼마나 정이 그리웠을까? 비록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지만 독고천의 존재가 나름대로 의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고치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묻지도 않았는데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독고천은 다른 말에는 별 관심이 없어 귀에 담지 않다가 싸움을 벌인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바로 사혈을 찍었으면 됐을 텐데…….”
 “지금 절더러 살인범이 되라는 거예요? 아저씨의 시대는 어쨌는지 몰라도 요즘은 옛날하고 달라요.”
 “먼저 공격한 건 그들이 아닌가? 먼저 건드린 쪽이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한 거다.”
 “그래도 폭력범은 아직 나이가 있어 훈방조치될 수도 있지만 살인은 아무리 잘해 봐야 장기징역감이잖아요.”
 “그깟 교도소 정도는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게다가 정 겁나면 주변의 입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지.”
 평생토록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청소년과 무림, 그것도 약육강식의 상징이랄 수 있는 마교에서 살아온 무인의 사고방식이 다른 건 당연했다.
 “그랬다가 경찰력이라도 동원되면 어쩌구요?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수십 명이 총을 쏘면 감당하기 힘들걸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독고천은 예전에 관부에서 사용하던 화포의 위력을 떠올리며 고치의 말에 동의했다. 현대의 병기는 과거의 화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보인다는데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도 귀찮게 할지 모르겠군. 개들은 떼를 지으면 강해지는 줄 아는 습성이 있으니까. 어디 공력이 얼마나 쌓였나 볼까?”
 뭐든 생각나면 바로 시작하는 것이 독고천의 방식. 천하에 자신을 막을 존재가 없다는 자신감이기도 하고, 불필요한 고민은 도움 될 게 하나 없다는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다.
 간단히 손을 뻗어 완맥을 잡자 고치는 수법을 알아도 피할 재간이 없었다. 깡패 몇 잡고 의기양양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어, 어때요?”
 “이상하군. 지금 정도면 미약하나마 진기의 흐름이 느껴져야 하는데…….”
 독고천은 정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싶어 기해혈에 약간의 진기를 흘려 봤지만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고치는 독고천의 표정에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긴 건가 싶어 긴장했다. 아무리 독고천의 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다지만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게 워낙 많으니 당연했다.
 “뭐가 잘못됐어요?”
 “이해가 되지 않는군. 분명 해동무록에 있는 심법은 중원무림의 그 무엇보다 뛰어나다. 그건 내가 파천마황이란 이름을 걸고 보장할 수 있지.”
 “그런데요?”
 “그 뛰어난 심법을 익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전에서 내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근골이 좀 더 튼튼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무공을 익힌 후로 신체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럼 됐죠, 뭐.”
 상승무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상에서 살다 온 독고천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고치가 생각하는 무공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양아치들과 싸워서 이길 정도의 무력을 손에 넣었고, 독고천의 지도가 계속되는 한 발전 가능성은 더욱 컸다. 무공에 대한 고치의 생각은 그저 건강하게 제 한 몸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자연 독고천의 무공을 일반 태권도장이나 쿵푸도장에 다니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아마 독고천이 알게 되면 무공의 위력을 증명해 주기 위해 도장격파라도 다닐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하찮은 무공이라도 공력만 뒷받침되면 신공절학이 될 수도 있다. 그와 반대로 뛰어난 상승무공을 공력 부족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즉, 내공이란 무공을 쓸 수 있는 근간이다.”
 “그럼 초식은 뭐 하러 익혀요? 그냥 열심히 내공만 키우면 되지. 내공만 많으면 초식 같은 건 상관없다는 소리잖아요.”
 고치의 말에 독고천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부터 저었다. 무공에 대한 이치를 자기만큼 알고 있으니 내공과 초식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 텐데 헛소리다. 결국 지기 싫어하는 소년의 억지겠지.
 “다행히 몸은 잘 다듬어지고 있으니 수행을 계속하는 것도 좋겠지.”
 독고천은 고치와 말다툼이나 하는 것도 체면상 꺼려지는 일이라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고치도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굳이 계속하지는 않았다.
 
 3
 
 독고천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긴, 해동무록의 심법을 시험 삼아 익혔을 때 공력이 소실되는 느낌이었지.’
 처음에 스승이 그릇된 수행을 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허탈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환희를 느꼈다. 천하제일의 기서를 얻었으니 뭐가 두려울까?
 즉시 해동무록에 실린 심법을 익혔다.
 심법을 수행하면 공령의 단계에 들어 공력의 제약이 사라진다. 공력이 마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력적인 무공이라 해도 끊임없이 쓸 수 있다는 뜻. 그리되면 천하에 감히 자신을 건드릴 존재는 없어질 터였다.
 ‘그러나 결과는 내 예상을 벗어났다.’
 반년쯤 폐관하면서 해동무록의 심법을 연마하자 독고천은 오히려 공력이 쇠퇴함을 느꼈다. 어찌된 영문인지 마공으로 닦은 공력이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독고천은 해동무록의 심법이 우선 기존의 공력을 폐하고 완전히 백지가 된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럭 겁부터 났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그것은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동안 쌓은 공력을 모두 소실하고 처음부터 다시 닦는다면 얼마큼의 세월이 흐를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잖아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 넘쳐나는데 공력마저 잃게 되면 어찌될까?
 앞으로 최소 10년 이상의 미래를 바라보고 그동안 마음 졸인 채 숨어살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재수 없게 하찮은 것들에게 죽을 가능성이 더 컸다.
 강자존의 원칙이 철저한 마교라면 더욱 그렇다. 뛰어난 심법임을 알면서도 해동무록을 포기해야 했던 것은 결국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
 그런데 지금 고치의 몸 상태를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두 달 전에 비해 공력을 담을 그릇이 훨씬 커지긴 했지만 공력 자체는 전혀 쌓인 게 없었다.
 “그렇군. 해동무록의 심법은 그저 그릇만 만들 뿐이었어. 아마 해동무록은 다른 무공을 익히기 위한 입문공이겠지. 공력을 담을 그릇을 최대한 키운 다음 비로소 다른 상승심법을 더하는 것이리라.”
 독고천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확신하며 내심 통쾌한 생각이 들었다. 공력을 담을 그릇만 만들어 놓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자신의 공력을 소모시킬 도구로서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독고천은 오랜만에 흥겨운 마음으로 고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런 뒷골목 파락호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무리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물론 요즘 사람들에 비해 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겠다만 상대의 수가 많아지면 위험하겠지. 할 수 없으니 학교에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초상감각(超像感覺)을 가르쳐 줄 수밖에…….”
 “초상감각이라니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으며 몸으로 느끼는 것을 뛰어넘는 감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쳇, 그냥 육감이라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해요? 자, 잠깐만요! 그렇다고 굳이 때릴 필요는 없잖아요.”
 “허험! 뭐, 어쨌든 네가 위험에 빠지는 건 바라지 않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익히도록 하자.”
 “저, 오늘 학교 가서 공부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야……! 아하하, 당연히 무공수련이 우선이죠. 손에 공력은 좀 풀고 말씀하셔도…….”
 독고천의 무언의 협박 덕분에 고치는 학교에 가기 전까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다행히 독고천의 타혈과 잠시간의 심법수련으로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등교 이전에 잠을 못 자는 건 그날 하루만이 아니었다. 그 후로 독고천의 지옥 같은 수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나마 이곳이 무림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넘어가 준다니 어찌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치도 처음엔 약간 거부했지만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게 현실.
 무공입문 1개월 차의 고치가 파천마황으로 불리던 무림의 절대자를 무슨 수로 이길까? 죽어라 맞고 나자 자연스레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착한 청소년이 되었다.
 수련 방향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고치의 눈을 가린 채 독고천의 구타(?)가 시작된 것이다.
 말로야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감각만으로 상대을 읽고 공수를 펼치라는데, 눈뜨고도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을 눈까지 가리고 무슨 수로 이길까?
 다행히 독고천도 그냥 때리는 것이 아니라 타혈을 겸하는 것이라 아주 불이익은 아니었다. 미약하나마 그가 몸에 진기를 불어넣어 공력을 증진시켜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간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고치는 머릿속에 있는 초식들을 연마하고 해동무록상의 심법을 수련했다. 수련성과는 만만치 않아 여전히 독고천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지만 그래도 주먹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이는 대단한 진전이었다. 눈을 가린 상태라면 이제 겨우 무공에 입문한 자의 공격도 알아채기 힘들 텐데, 고치는 독고천의 기세를 읽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고작 며칠 만에 성공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독고천이나 고치나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치의 몸은 날마다 기혈이 열리고 근골이 부드러워졌으며 힘이 넘쳤다. 심지어는 정말 내공이 없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뿐인가? 민첩성과 육체적인 감각도 날이 갈수록 예민해져 마치 사나운 들짐승 같았다.
 독고천은 해동무록상의 심법이 육체에 조화를 찾아 주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고치가 새로운 수련에 들어간 지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고치는 밤이면 삐끼 일을 했다. 처음에는 업소사장과 지혜는 물론 고치 자신도 적잖이 걱정했지만 다행히 건드리는 놈들은 없었다.
 같이 일하는 성태라는 녀석은 건달 체면에 고삐리한테 얻어맞은 게 쪽팔려서 오지 않는 거라고 분석했고, 고치도 나름대로 그 말에 동의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창피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못 가서 모두 잊어버릴 무렵 그 녀석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한꺼번에 꽤 많은 인원을 끌고 온 것이다.
 갑자기 많은 인원이 몰려오자 삐끼를 하던 녀석들은 물론이거니와 행인이나 취객들까지 겁을 먹고 미리 다른 길로 달아났다. 덕분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어이, 고삐리! 잘 있었나?”
 그들 앞으로 얼마 전에 지혜를 끌고 나가려다가 고치에게 얻어맞은 녀석이 나섰다. 고치는 한숨을 내쉬며 눈대중으로 얼른 상대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무려 스물한 명이나 되었다.
 “야, 인기 좋은데? 나한테 맞았다고 이르니까 엄마랑 아빠가 혼내 준다고 온 거야?”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란 생각이 들자 고치는 또다시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하긴, 독고천을 처음 만났을 때도 까불던 녀석이니 고작 깡패들 따위야 무서울 것도 없었다. 더구나 요즘 새로운 수련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소리치지 마! 넌 오늘 죽었어.”
 “그래, 내가 보기에도 혼자 상대하긴 좀 벅차 보인다.”
 고치가 자신의 위험을 순순히 인정하자 상대는 나름대로 신이 난 모양이다.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해졌다.
 “그런데 어쩌나? 지금 내가 한 가지 결심을 했거든.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한 놈만 죽여 놓고 죽자고. 너도 전에 싸워 봐서 알지?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 한 놈 정도는 죽여 놓을 수 있다는 거. 아무나 먼저 덤벼. 내가 죽더라도 그 새끼는 같이 데리고 간다.”
 고치가 눈을 부릅뜨며 말하자 깡패는 오히려 비웃었다.
 “야, 그때 네가 실력으로 이긴 줄 아냐? 내가 방심해서 그랬지, 아니었으면 넌 지금까지 병원 신세야.”
 “패거리들 끌고 와서 말하면 누가 믿어 준대?”
 “아, 이 새끼 졸라 시끄럽네. 꿇어, 새꺄!”
 “싫어.”
 “이 새끼 정말 정신 못 차리네?”
 한 녀석이 고치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하는 척하더니 갑자기 주먹을 날렸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고치는 재빨리 그 손을 잡아채 안으로 끌어당기며 손날로 목젖을 때렸다.
 “크허헉!”
 한 방 얻어맞은 녀석은 목을 잡고 쓰러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때부터 고치는 21대 1의 싸움을 시작했다.
 먼저 발차기를 날리는 녀석의 삼족리혈을 찍고 다리의 오금을 차내며 이문정주 한 방, 뒤에서 각목을 내리찍는 녀석에겐 선풍각 한 방을 날려 주면서 착지와 동시에 앞으로 재주넘기를 한 뒤, 그 회전력을 실은 발길질로 또 한 녀석을 떨쳐 버렸다.
 내공은 없지만 몸이 어찌나 유연하고 빠른지 고치 스스로도 감탄스러울 지경인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오죽할까?
 더구나 그간의 수련성과가 있는지 사각에서 공격을 해도 고치는 미리 눈치채고 감각으로 피하고 공격했다.
 뿐인가? 고치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역근의 묘리마저 숨어 있었다.
 근골을 조금씩 비틀면 온몸의 기혈에 자극을 주어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몸을 조금씩 비틀어 근력과 기운을 집중하여 보다 큰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을 역근이라고 한다.
 똑같은 주먹질이라도 역근의 묘리가 섞이면 근력을 뛰어넘는 위력이 발휘된다.
 하물며 고치는 꾸준히 수련을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독고천에게 매일같이 타혈을 빙자한 구타를 당하는 몸. 적어도 맞는 데 있어서는 무척 익숙하다.
 그것도 때리는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무림의 절대자가 어지간한 깡패 따위와 같을 리 없다. 손의 빠르기도 그렇지만 위력도 엄청나다. 그런 빠르기를 매일같이 경험한 고치에게 지금 녀석들의 몸놀림은 한없이 느리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하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고치는 아예 여유를 부리며 상대에게 손짓까지 했다. 처음에는 도망갈 기회를 엿보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서넛을 쓰러뜨리자 자신감이 붙었다.
 고치가 길게 호흡하고 몸을 날리자 움찔하는 것은 오히려 숫자가 많은 쪽이었다.
 고치의 몸은 탄력이 좋은 고무처럼 움직이면서도 급소만을 정확히 가격했다. 몸의 민첩성이나 동체시력도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왼쪽에서 주먹을 날리면 손을 잡아채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녀석의 얼굴로 향하게 하고, 그 힘의 여파를 빌어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왼발을 들어 후려차기로 정면에서 달려오는 이를 저지한다.
 정면에서 한 놈이 달려들면 상대의 무릎과 어깨를 발판 삼아 허공으로 몸을 띄우더니, 발뒤꿈치로 얼굴을 찍고 떨어지며 다른 녀석의 정수리에 무릎 찍기!
 처음엔 많은 숫자에 겁을 먹었지만 어쩐지 싸우면 싸울수록 몸에 감각이 붙는 게 재미마저 느껴졌다. 순식간에 절반을 쓰러뜨리는 동안 고치는 옷깃조차 상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약골들이야? 죽인다며? 죽여 보라니까?”
 의외로 결과가 좋게 나오자 고치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자존심까지 건드리며 도발했지만 섣불리 달려드는 놈은 없었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는 게 옳을 것이다.
 아무도 먼저 달려들지 않자 고치가 먼저 몸을 날렸다. 슬쩍 다리를 모으는가 싶더니 단숨에 땅을 박차고 나가는데, 제일 앞에 서 있던 녀석이 나가떨어지며 뒤에 있던 패거리까지 함께 붙잡고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다들 놀라는데 고치는 어느새 허공으로 몸을 날려 다른 녀석을 공격했다.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돌려차기에서 뒤돌려차기 후 다시 앞돌려차기. 강한 원심력을 실어 무려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발차기를 당하자 상대는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고치는 옥상 바닥에 사뿐히 착지하며 아직 멀쩡한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나도 더 때리고 싶지 않다. 어이 멀쩡한 놈들, 쓰러져서 골골거리는 것들 좀 일으켜서 데리고 가라. 그리고 너!”
 “으, 응!”
 고치의 부름에 복수를 위해 달려온 녀석은 깜짝 놀라며 몸이 굳었다. 단단히 혼내 주려고 패거리들을 끌어 모았다가 오히려 고치가 모두 쓰러뜨리자 넋이 빠져 버렸다.
 녀석은 고치가 자신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고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고생해서 무공을 익혔더니 머릿속에 든 무공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비록 내공을 이용한 신공절학은 써먹지 못하지만 지금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앞으로 수련을 계속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모른다. 고치는 짐짓 과장스럽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 건드리지 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 안 그러면 알지?”
 “그, 그래.”
 “그럼 가라.”
 고치의 말에 깡패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앞 다투어 도망쳤다. 그러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다음에 보자!’는 객기에 찬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고치는 그저 담담하게 중지를 뻗었다.
 “자신 있으면 지금 덤벼 보시지? 병신들…….”
 
 4
 
 고치가 보여준 뜻밖의 무용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소식을 들은 업소사장과 아가씨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주 난리가 났다.
 심지어는 굳이 힘들게 삐끼 노릇이나 할 것 없이 당장 건달로 나서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마저 나왔다. 덕분에 인근의 양아치들은 적어도 고치 앞에서 만큼은 행패를 부리거나 삐끼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고치는 특별히 자신의 힘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나 할까?
 예전 같으면 우쭐대고 싶었겠지만 독고천과 수련을 거듭하면서 그런 것들이 모두 시시하게 느껴졌다. 원한다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지만 막상 가져 봤자 깡패 소리밖에 더 들을까?
 하지만 항상 편한 것도 아니었다. 건달들 중에 주먹 좀 쓴다는 녀석들 중 몇몇은 마치 자신이 비무행(比武行) 중인 무사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놈들이 있었다.
 “여어, 네가 그 유명한 고치냐?”
 “뭐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덩치 좋은 놈들이 고치를 가로막았다.
 얼핏 보기에도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었는데, 운동깨나 하는지 드러난 팔뚝이 상당한 근육질로 덮여 있었다.
 대여섯 명 정도라 보통 사람에게는 위협적이겠지만 무려 스물한 명과도 싸운 적이 있는 고치가 겁먹을 리는 없었다.
 “보기엔 순진해 보이는데 의외로 강단이 있군. 듣던 대로야.”
 “그런데 별로 센 것 같지는 않은데…….”
 “원래 진짜 고수는 평범해 보인다잖아. 저 녀석도 그런 모양이지.”
 녀석들은 고치의 앞을 가로막은 채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고치는 어차피 상대가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고치의 싸움실력도 아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냥 빨리 끝내는 게 최선이다.
 “사람들 겁먹잖아. 꺼져.”
 고치는 ‘사람’이라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몸을 날려 제일 앞에 선 녀석의 무릎을 밟고 뛰어오르며 무릎으로 턱을 쳤다. 그리곤 곧장 떨어지면서 또 다른 녀석의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어 버렸다.
 ‘겁’이라는 대목에서 이상함을 느낀 한 녀석이 잽싸게 잭나이프를 꺼냈지만, 고치는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만들더니 놈의 손목을 찍으며 손등으로 목젖을 때렸다.
 뒤이어 세 놈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러나 ‘꺼져’라는 말을 하면서 일보삼권! 단 한 걸음에 세 번의 권을 내지르며 쓰러뜨렸다. 한마디 내뱉는 동안 순식간에 여섯 명에게 한 번씩의 타격을 가한 셈이다.
 비록 단 한 방에 불과했지만 모두 치명적인 급소가 될 수 있는 곳들이었다. 만일 고치가 조금만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크게 상했을 것이다.
 “힘도 없으면서 길을 막고 지랄이야.”
 고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깡패들을 일별하더니 히죽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그 모습에 제일 먼저 턱을 맞은 녀석이 극통을 참아 내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더니 택시를 잡아타고 뒤쫓았다.
 고치는 혹시 집이라도 알아뒀다가 보복을 하려는가 싶었지만 이내 걱정을 접었다. 만약 정말 집으로 찾아와 보복을 하려는 생각이라면 겁낼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깡패들을 걱정해야 한다. 집에 있는 또 한 사람은 고치 정도는 100명이 달려들어도 비웃으며 때려눕힐 실력자니까.
 집에 돌아오자 독고천이 고치를 맞아 주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깡패 하나가 뒤쫓고 있었지만 독고천과 고치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네 몸의 상태를 좀 확인해야겠다.”
 “왜요?”
 “내가 궁금해서 그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드는데 고치가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간신히 몸을 뽑아 뒤로 물러서는데 독고천의 손이 갈고리처럼 변하더니 손목을 잡아끌었다. 평생을 익혀서 모든 무공이 몸에 밴 고수를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독고천은 얼른 고치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고 기해혈에 진기를 흘려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공격할 테니 간단하게 놀아 보자.”
 독고천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고치는 흠칫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막았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을 슬쩍 손을 회전시키며 흘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독고천은 손날을 세워 빠르게 그으며 팔꿈치를 들어 주먹 끝으로 향하게 했다.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가는 독고천의 팔꿈치에 뭉그러질 상황이었다. 고치는 별수 없이 몸을 슬쩍 뺐다.
 그러나 독고천의 손이 뱀처럼 따라붙으며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고치는 마교의 온갖 초식들을 사용해가면서 독고천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상당히 늘었구나.”
 “그럼 뭘 해요. 아저씨한테는 안 되는데.”
 “고작 몇 달밖에 안 배운 네가 나를 이긴다면 그것이 비정상이지. 헌데 이상하군.”
 “뭐가요?”
 “해동무록의 심법을 익힘에도 불구하고 단전은 텅 비어 있는데다 육체의 발달은 경이적일 만큼 대단하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독고천의 말에 고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래 무공연마는 신체능력을 향상시켜 준다. 이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니, 굳이 무공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꾸준히 운동을 하면 신체적으로 발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고치의 신체적인 발달 자체는 이상할 게 없지만 능력의 향상치가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신기하게도 감각은 보다 예민해졌고 몸을 움직이는 반응속도는 물론 순간적으로 발휘하는 파괴력도 대단했다. 내공이 쌓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 비밀은 역시 해동무록의 심법에 있었다. 중원무림의 여타 심법들이 우선 내공부터 향상시킨 다음 육체의 다른 기능을 열어 준다면, 해동무록은 제일 먼저 몸만들기를 해 준다. 탁기를 씻고 막힌 기혈을 뚫고 불균형한 기운을 바로잡아 준다.
 다시 말해서 무림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공력을 쌓아야 이루어지는 환골탈태의 경지를 해동무록상의 심법은 꾸준히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는 셈이다.
 뭐랄까? 매일 열심히 운동할 때 당장은 드러나지 않아도 조금씩이나마 근육이 발달하고 몸이 건강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고치가 공력의 증진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해동무록의 심법은 전체적인 조화에 있다. 따라서 해동무록상의 관점에서는 단전에만 공력이 쌓이는 것도 일종의 부조화다.
 모든 기운은 몸 전체에 골고루 퍼져 끊임없이 운행하고 순환되어야 한다. 그러니 해동심법의 진기는 중원무림의 다른 심법처럼 단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치의 몸 전체를 휘감고 있었기에 막상 단전에는 기운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고치는 공력이 쌓이지 않은 게 아니라 단전 이외에도 온몸에 공력을 쌓은 셈이다. 뭐, 그래 봐야 단전의 특성상 다른 곳보다 좀 더 많은 진기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오래전에 독고천이 잠시나마 해동무록을 익혔을 때 공력이 소실되는 것처럼 느낀 이유도 마찬가지다.
 마공은 짧은 시간에 강한 힘을 얻기 위해 한 가지 기운을 과도하게 모으는 경향이 있다. 해동무록의 심법은 그의 단전에 모인 기운을 조금씩 몸 전체로 흩어 놓으며 한 가지에 치중한 그 기운마저 중화시켰다.
 당연히 단전의 기운은 약해졌고 오랜 세월 단전에 기운을 모아 온 독고천은 공력이 쇠퇴하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막상 해동무록에서조차 설명되지 않았다. 다만 책의 첫머리에 적힌 민망한 표현처럼 10년간 죽어라 수행해야 비로소 효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만일 독고천이 해동무록을 몇 년만 더 아무런 의심 없이 수련했더라면 조선까지 달려와 봉인되는 불운은 겪지 않았으리라. 하다못해 지금처럼 고치에게 뜻밖의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해동무록에 수록된 심법만 익히면 저절로 해결되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 내 공력을 너에게 넘겨준다는 얘기다.”
 “아니 왜요?”
 독고천의 느닷없는 말에 고치는 등교할 생각도 잊고 반문을 거듭했다. 밑도 끝도 없이 내공을 줄 테니 몸만들기에 주력하자는데 의혹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고치가 습득한 독고천의 기억으로 볼 때 무림인에게 있어 공력은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 그런데 그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주겠다고?
 “어쩔 수 없군. 실은 내 몸이 지금 정상이 아니다. 혹시 그동안 내가 무공을 연마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아뇨. 저 없는 시간에 한 거 아녜요? 무림인들은 자신이 수련하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주지 않잖아요.”
 “그것은 자신의 무공이 유출될까 봐 그러는 거다. 네 경우 이미 내 무공을 전부 알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그럼 정말로 무공을 전혀 연마하지 않은 거예요? 지난번에 나한테는 사흘간 익힌 것을 3년간 연마한다느니 어쩌니 그러더니만…….”
 “맞는 말이다. 무공고수가 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구지. 하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많은 공력이 쌓이는 것을 막아야 할 입장이었으니까.”
 “뭐, 공력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런데 굳이 불어나는 것을 억지로 막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네 말이 맞긴 하다만 나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다.”
 “목숨이라뇨?”
 “말 그대로다. 그렇지 않다면 네게 공력을 나누어 줄 생각 따위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겠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천마불사대법을 통해 다소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공력을 손에 넣었다. 현재의 공력이라면 별다른 초식도 없이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여도 무림의 패자가 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공력이 내 몸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독고천과 이야기를 나누던 고치는 그제야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독고천의 무학지식을 바탕으로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육체가 견디지 못할 만큼 과도한 공력이 모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만일 정상적인 수련을 통해 공력을 얻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공력을 모으는 것도 육체를 통하는 것이기에 그릇에 넘치는 공력은 더 이상 채워지지 않기 마련이지. 그런데 나는 정상을 벗어난 상황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공력의 문제가 아니라 천마불사대법을 통해 비껴간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대법을 통해 잠들었다지만 나는 벌써 죽었어야 마땅할 만큼의 세월을 산 셈이니까. 과도한 세월을 버틴 육체가 내부에 강대한 힘을 품고 있다면 견디기 힘들겠지. 다행히 어느 쪽이든 내가 가진 공력의 일부를 덜어낸다면 살아남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좋네요, 뭐. 곧 400번째 생일이 다가오는 사람치곤 무척 젊어 보이는데다, 솔직히 저 정도만 되도 요즘은 엄청 센 거예요. 아마 그 유명한 최배달도 아저씨보다는 약할 거예요.”
 “하긴 그렇지.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네게 마교의 대법 한 가지를 시술할 참이다.”
 “……!”
 독고천의 폭탄선언에 고치는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독고천이 자신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다. 요즘 건강하게 지내는 것도 모두 독고천이 행한 천령이환대법 덕분이 아닌가.
 “그러니 너는 내일 은으로 된 물건을 충분히 구해 와라. 솔직히 너의 집에 있는 것을 찾아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이 많더구나. 일단은 내일 네가 은을 구해 오면 내가 공력을 이용해 108개의 은침을 만들 것이다. 그걸로 너의 기혈을 뚫고 체질을 바꿔 내 공력을 담을 만한 그릇으로 바꿀 참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늦지 않도록 하거라.”
 “아, 무극개혈금침대법(無極開穴金針大法)?”
 “벌써 눈치챘군. 그럼 밤에 보도록 하지.”
 “예…….”
 고치는 독고천의 선언을 듣고 한편으론 두려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가슴이 설레었다.
 무극개혈금침대법은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가 자신의 공력을 이용해 다른 이의 체질을 바꿔 주는 마교의 비기 중 하나다. 무림에 알려진 여타의 벌모세수보다는 공력의 소모가 적지만 어떤 면에서는 시술이 오히려 더 힘들다.
 우선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심력의 소모도 만만치 않다. 독고천으로서도 목숨이 걸린 일만 아니라면 굳이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학교에 다녀오면서 사 올게요.”
 “알았다. 그런데 저 밖에서 기웃거리는 놈은 대체 뭐냐?”
 “글쎄요? 그냥 하찮은 건달 같은 데 데려올까요?”
 “아니다. 저런 하찮은 것들까지 상대하긴 귀찮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일하면서 조금 다퉜는데 그거랑 관련 있는 것 같아요. 절더러 세다느니 뭐라고 하면서 헛소리를 하던데요?”
 “그래? 그렇다면 알아서 해결해라. 내 도움은 기대하지 말고.”
 “예, 그럴게요.”
 독고천은 방금 전에 고치와 손을 섞었던 터라 실력을 믿었다. 웬만한 건달 따위에게는 질 리가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명심해라. 무극개혈금침대법은 하루에 한 번씩 총 일곱 번에 걸쳐서 시전된다. 그로부터 꼭 열흘 후에 공력을 전해 줄 테니 마음을 굳게 가져라.”
 “예, 알았어요.”
 독고천의 진심을 알 리 없는 고치는 성의 없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앞으로 17일 후면 독고천에 맞먹는 고수가 될 것을 기대하며.
 
 집을 알고 이동경로까지 알고 있다면 중간에 함정을 파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치는 굳이 자신을 두고 함정을 파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침부터 길을 막는 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져 척 보기에도 운동깨나 했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들이 앞을 가로막아도 부담스러운 판국에 덩치 좋은 녀석들이 앞을 막는데 좋게 보일 리 없지.
 “아저씨들 누구야?”
 “네가 그 고치라는 고삐리냐?”
 “맞긴 한데…… 내가 이렇게 유명해졌나?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아는 걸 보면…….”
 “유명하지. 고등학생치고 꽤 괜찮은 주먹을 가졌다기에 확인 좀 하려다가 내 동생들까지 당했더군. 그만하면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잖아.”
 “어제 그 약해 빠진 양아치들이 아저씨 동생이었군. 미안…….”
 고치는 넉살좋게 손까지 흔들며 낯선 자들을 지나쳐갔다.
 하는 행동이 워낙 자연스러워 말을 걸었던 사내는 하마터면 그냥 보내 줄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해서야 어디 건달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어딜 가시나?”
 “나 안다면서요? 고삐리가 학교에 가지 어딜 가겠어?”
 “정말 겁대가리가 없군.”
 “미안하지만 나 빨리 안 가면 지각이거든요? 그럼 나중에…….”
 싸움이 겁나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 지각하는 것은 싫다. 막상 등교한 후론 줄곧 잠만 자지만 지금까지 결석이나 조퇴는 물론 지각도 한 적이 없다. 우등상이나 공로상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니 개근상이라도 받아 보겠다는 다소 소박한 마음 때문이다.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거부하는 마음이 일자 자연스레 온몸에서 강한 기세가 일면서 일보일보가 움직여졌다. 고치의 몸에서 풍기는 위압적인 기운은 하찮은 깡패 따위가 막아설 수준이 아니었다.
 깡패들은 감히 고치에게 덤빌 생각도 못한 채 가만히 구경만 했다. 덕분에 고치는 무사히(?) 그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여 급히 달려가 올라타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지각을 면했다는 생각에 흐뭇해하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깡패들이 덤비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라도 펼친 건가? 하긴, 말도 안 되지. 내공도 없으면서 천마군림보라니.’
 고치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깡패들도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고치가 홀연히 사라지는 동안 공포에 질린 채 멍하니 있었던 자신들의 추태를 떠올렸다.
 차라리 싸우다 맞았다면 덜 기가 막힐 텐데 처음부터 겁먹어서 덤비지도 못했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달이 겁을 먹고 덤비질 못해?’
 건달생활을 하면서 칼침 한 번 맞아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텐데 어떻게 고삐리한테!
 분노의 불길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 이거 쪽팔리게. 야, 그 새끼 집 안다고 했지?”
 “아, 예!”
 “안내해. 그 새끼 식구들이라도 조져 버려야겠다.”
 “그러죠. 절 따라오십시오.”
 3, 40명쯤 되는 사내들이 기세등등하게 우르르 몰려가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압감을 주었다.
 마침 고치를 학교에 보낸 독고천은 마당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는 투기를 뚜렷이 느꼈다. 눈을 번쩍 뜨자 벌써 어떤 녀석들이 대문을 발로 차 부수고 들어오고 있었다.
 독고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흉흉한 기색을 드러내는 깡패들을 쭉 둘러보았다.
 꽤 많은 싸움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투기 자체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들은 전혀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손짓 한 번에 모두 죽여 버릴 수도 있겠지만…….
 “간단한 교훈 정도만 안겨 주는 게 좋겠군.”
 독고천이 자비로운 마음을 먹고 있는데 한 녀석이 성질을 건드린다.
 “썅, 저 새끼 뭐라고 시부렁거리는 거야?”
 “지금 나에게 욕을 한 건가?”
 독고천은 ‘지’라는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몸을 날렸는데, 말이 끝났을 때는 욕설을 지껄인 녀석의 목을 움켜쥔 채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깡패들은 독고천의 움직임을 미처 보지 못한 터라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되었다. 아니, 알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라니!
 “그, 그게, 그러니까…….”
 “결국 그냥 개새끼로군. 여럿이 뭉쳐야 비로소 짖어댈 수 있는…….”
 간단히 목젖을 비틀며 내던져 버리자 죽지는 않았지만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살인으로 오해하기 쉬운 모습이었다. 물론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무공의 경지가 상당해야 하지만 깡패들 주제에 고수가 있을 리 없었다.
 사람을 죽였다고 흥분해서 우르르 달려드는데 독고천은 일일이 손을 섞기도 귀찮아 일보를 내딛으며 강대한 위압감을 일으켰다. 일보에 천하를 굴복시킨다는 마교교주의 지존신공 중 하나인 천마군림보였다.
 단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깡패들은 감히 덤벼들기는커녕 소리를 지를 의지조차 잃어 버렸다.
 “감히 하찮은 것들이 내게 덤비겠다는 것이냐?”
 다시 또 일보!
 독고천이 공력을 조절하여 적당한 힘을 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깡패들 모두의 심맥이 뒤틀려 미쳐 버릴 수도 있는 위압감과 공포감이 일었다.
 본래 마교의 고수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지존신공이니 고수는커녕 깡패밖에 안 되는 것들이 견딜 수는 없다.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기세에 무의식중에 바닥에 납작 엎드린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옛 생각이 나서 독고천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에게 물어 보았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찾은 거냐?”
 “그, 그게 실은…….”
 쿠웅
 제대로 말을 못하고 더듬거리자 독고천은 진각을 밟아 보였다. 그 바람에 바닥에 무려 세 치 깊이의 발자국이 생겼다.
 그렇잖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그 모습을 보고 깡패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토해 내듯 입을 열었는데, 비록 중언부언에 앞뒤가 잘 맞지 않았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독고천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 애송이도 천마군림보를 썼다는 건가? 아니, 상황을 들어 보니 위력은 형편없어도 천마군림보가 틀림없군. 그런데 그 녀석, 공력도 없이 천마군림보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독고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내 생각을 지웠다. 자신의 진단이 결코 틀릴 리 없다는 자만심 때문에 해동무록의 진실을 알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셈이다.
 어쨌든 해결할 것은 끝내야겠지.
 “이봐, 네놈들이 부순 대문은 어쩔 셈이지?”
 “그, 그건 저희가 변상을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복구해. 아니지. 네놈들 발길질 때문에 흠집이 생겼으니까 새 것으로 달아 놔. 단,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나도 책임질 수 없다.”
 “옛!”
 불쌍한 양아치들, 머릿수만 믿다가 독고천에게 삥 뜯겼다.
 
 
 제3화 오크의 노예가 되다
 
 1
 
 무극금침개혈대법.
 은침을 108군데의 주요 혈도에 꽂은 다음 진기를 불어넣어 혈도를 열어 주는 대법이다.
 혈도가 열리면 진기의 흐름이 보다 원활해져 공력을 쌓기가 수월해진다. 심지어 어떤 이는 무공을 쌓는 과정은 일생토록 혈을 뚫는 과정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니 지금 고치가 무공을 익히는 입장에서 얼마나 큰 기연을 얻는 셈인지 알 수 있다.
 “힘들어도 참아라. 온몸에 진기의 흐름이 보다 거세질 것이다. 또한 너의 각 혈도를 통해 유입되는 진기도 생소한 것이라 힘들지 모르지만 참아라. 그것이 곧 너의 힘이 될 테니까.”
 독고천은 고치에게 은침을 꽂을 때마다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소림의 벌모세수에 비해 적은 공력이 소모된다지만 하나하나의 은침을 꽂을 때마다 진기를 소모하는 일이니 결코 쉬울 리 없다. 더구나 하나도 아니고 무려 108개.
 그렇다고 그냥 아무렇게나 꽂을 수도 없다. 진기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린다.
 마지막 은침을 꽂고 다시 처음 것부터 서서히 뽑아내는데, 그것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진기의 흐름이 막히지 않았는지 확인해가면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치의 체질이 좋은 건지 각 혈도의 흐름은 좋았다.
 ‘이상하군. 내가 불어넣은 진기가 어째서 단전에 모이지 않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불어넣은 기운이 단전에 머물지 않고 전신으로 퍼져 몸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다듬어졌지만 독고천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고치의 단전이 텅 비어 있다면 나쁠 건 없지만 말이다.
 해동무록의 심법은 정말 자신의 생각대로 공력을 모을 수 있는 그릇만을 만드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결론짓자니 예전에 깡패들이 말한 고치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마군림보가 맞는 것 같은데…….
 ‘무인은 생각이 복잡하면 대성할 수 없는 법이지.’
 독고천은 결국 잡념을 떨쳐 버리고 대법을 계속했다.
 그렇잖아도 해동무록의 수련으로 고치의 몸에 남아 있던 탁기가 몸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데 독고천의 대법으로 그 속도가 배가되었다.
 사람의 몸은 태아일 때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몸을 지니지만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탁기가 쌓이기 시작한다. 공기를 호흡하고 화식(火食)을 하는데다 현대는 더욱 더럽고 탁한 것들이 넘친다.
 그 탁기가 전신세맥을 조금씩 틀어막아 몸을 노쇠하고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진기의 흐름마저 방해한다. 그러니 몸속의 탁기를 씻어 내는 것은 공력을 쌓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호오, 이건 정말 대단한데요?”
 독고천의 대법을 받은 고치는 몸을 일으키며 감탄했다. 온몸에 기운이 넘치고 기분도 몹시 상쾌했다.
 특히나 근래 들어 좋은 일이 많았던 터라 더욱 즐거웠다. 요즘 태양의 흑점이 자주 나타나면서 신기한 현상이 많아진다더니 그것이 행운을 주는 건가?
 고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몸을 점검하고 슬쩍 주먹까지 뻗어 보았다.
 “오옷, 주먹에서 바람까지 이는데요?”
 “음, 권풍(拳風)을 일으키는군.”
 아무 생각 없이 받아치던 독고천은 고개를 돌리고 기해혈을 짚어 보았다.
 약간의 진기가 있긴 하지만 워낙에 온몸에 기운이 넘치는 녀석이라 특별히 공력이 쌓였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권풍을 일으킨다는 것은 공력이 운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신기하군. 단전에 공력이 없어도 진기의 운용이 된다는 건가?”
 독고천이 보기에 고치의 상태는 체질적인 변화 이외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내공을 쌓으면 온몸에 진기가 흐르며 자연히 체질도 좋은 쪽으로 변한다. 피부가 질겨지고 독성에 강해지며 보다 윤택하게 된다. 술에 빨리 취하지 않고 설령 취하더라도 숙취 해소가 빨라진다.
 그뿐인가? 무림고수들은 불면증이나 소화불량, 변비 등으로 고생하지도 않는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잠들려고 맘먹으면 금세 곤한 잠에 빠져든다. 보통 사람보다 온몸에 진기의 흐름이 원활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전신세맥이 다 뚫리고 나서야 단전에 공력이 쌓일 모양이군. 하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 더 이익일까?’
 독고천은 내심 해동무록을 다시 익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몸속의 모든 공력을 없애고 처음부터 다시 익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하찮은 공력이라면 포기하기가 쉽겠지만…….
 아니, 목숨이 걸리지만 않았다면 고치에게 공력을 전해 주는 것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극개혈금침대법의 시행은 그 후로도 무려 여섯 차례나 더 치러졌다. 그 과정을 통해 고치는 독고천이 준 기운을 상당히 많이 얻었지만 여전히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어도 30년은 일로정진(一路正進)해야 얻을 수 있는 공력을 쌓은 셈이었다. 그러나 고치는 몸만 더 튼튼해졌다. 그나마 단전이 조금 더 확대되어 독고천이 원하는 만큼의 공력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그동안 고치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천령이환대법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비단 무학지식만이 아니었다. 독고천의 중국어 실력은 물론 그 당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학문마저 얻었다.
 지식이 곧 지혜는 될 수 없더라도 지혜를 위한 바탕이 될 수는 있다.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뭔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니까.
 자연히 고치에게서는 은연중에 지적인 분위기가 풍겼고 학교 성적도 조금씩 향상되었다. 몸에 영명한 기운이 흐르면서 집중력이 높아진 덕분에 영어나 수학처럼 기초가 필요한 학문이라면 모를까 암기과목을 공부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고치의 모습이 몰라보게 달라질 즈음, 마침내 독고천이 자신의 공력을 전해 주기로 마음먹은 날이 다가왔다.
 “그, 그런데 꼭 벗어야 돼요?”
 “그게 가장 이상적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무공을 익힐 때 가장 이상적인 복장은 바로 나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야말로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좋다. 모든 진기의 흐름은 코와 입을 통한 호흡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상으로는 백회로 하늘의 기운을 모으고, 용천으로 땅의 기운을, 코로는 대기의 기운을 흡입한다고 하지만, 피부를 통해 호흡하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다.
 진기를 받아들이고 뿜어내는 것은 피부의 모공 하나하나까지 관여한다. 일반적으로 단학을 수련하는 이들도 가장 중대한 수련을 할 때는 옷을 모두 벗고 동성끼리 수련한다.
 “내공을 전해 주는 것은 하다못해 운공을 통해 주변의 기운을 쌓는 것과는 또 다르다. 아니, 오히려 전해지는 기운의 양을 감안한다면 훨씬 위험하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너에게 공력을 전해 주는 동안 네 피부에서도 상당한 기운이 외부로 뿜어지고 흡입되길 반복할 게다. 그러니 피부에 옷이 닿아 있다면 약간이나마 방해물이 되는 셈이지.”
 “하아, 알았어요.”
 고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벗었다. 독고천은 이미 벌거벗은 몸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독고천은 고치가 옷을 벗는 모습을 흘깃 쳐다보며 덧붙였다.
 “솔직히 나도 남자와 단둘이 옷을 벗고 있다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아.”
 “그럼 여자랑은 유쾌하다는 소리예요?”
 “당연하지.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으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고치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묻자 독고천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험험!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테니 딴소리 말로 어서 와서 앉아라.”
 “……예.”
 “아니, 마주보지 말고 등을 돌리고 앉아.”
 “예…….”
 어쨌든 시키는 대로 옷을 다 벗은 채 등을 돌리고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고치. 자신의 등에 독고천의 손이 닿자마자 뜨거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해동무록상의 심법으로 진기를 받아들이며 마음을 집중하는데, 처음에는 그런대로 참을 만하던 기운이 갈수록 거세게 밀려들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만일 여기서 조금만 잘못되면 자신은 물론 독고천마저 흉한 꼴이 될 수도 있다.
 밀폐된 방에서 두 남자가 위독한 상태인데 벌거벗고 있다면 무슨 오해를 살지. 왠지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보다 그런 상황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 탓일까?
 다행히 해동무록상의 심법을 운용하자 고통이 한결 수그러들었다. 명문혈을 통해 들어온 기운이 등과 척추를 따라 온몸을 휘감고 도는데 왠지 짜릿한 쾌감마저 들었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기운이 잠시 단전을 지나치는 듯싶더니 곧 전신을 향해 퍼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전신세맥에 남아 있던 탁기들이 바깥으로 배출되었다.
 이미 대법을 통해 상당히 깨끗해진 상황이라 해도 여전히 완벽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달랐다. 탁기를 몰아내는 위력 자체가 달랐다.
 고치의 몸에 깃들어 있던 탁기가 주위에 검은 운무(雲霧)를 만들면서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전신의 탁기를 거침없이 몰아낸 기운들은 아직 막힌 혈도를 뚫어 나갔다.
 중원의 여타 심법과 달리 전신의 혈도를 골고루 자극하는 성격상 고치의 몸은 더욱 빠른 속도로 개혈을 이루었고, 마침내 임독양맥을 가로막은 단단한 벽을 때리기에 이르렀다.
 보통 이 정도 상태라면 공력을 전해 주는 이가 힘을 늦추기 마련이지만, 독고천은 애초부터 고치의 몸에 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는 살피지도 않았다. 고치가 어찌되든 그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그사이 고치의 몸속을 맴돌던 기운들이 생사현관의 타통을 이루었다.
 퍼펑
 고치의 귀에 마치 뭔가가 터지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생사현관이 뚫리는 충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치로서는 무림의 상식을 벗어난 초고속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내심 생사현관의 타통에 기뻐하고 있는데 독고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후훗, 어리석은 것. 솔직히 내 공력의 양은 네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너는 내 공력을 이기지 못해 곧 죽고 말겠지. 만에 하나 네가 운이 좋아 환골탈태를 이루었다면 내 공력을 감당할 수 있겠지만, 고작 몇 달 만에 그런 경지에 이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독고천은 주입하는 공력의 양을 조금씩 줄이며 이죽거렸다. 그동안 고치 때문에 적잖이 마음 고생한 것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줄여 나가는 공력 정도라면 고치가 중간에 다른 짓을 해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어, 어떻게 그런……!’
 독고천의 전음에 고치는 기가 막혔다. 자신은 독고천에게 일말의 정이라도 느꼈는데 독고천은 그저 자신을 이용대상으로만 생각했다니!
 〔얼마간은 내 공력이 너의 단전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겠지만 그뿐이다. 단지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 뿐이다. 그동안 너는 기해혈이 손상되고 다른 기혈들이 뒤틀리며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겠지. 물론 나는 네 덕분에 살아남을 테고.〕
 독고천이 살살 약을 올리자 고치는 화가 났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고아로 살다가 독고천과 함께 지내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긴, 독고천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믿은 게 잘못이긴 하다. 마교의 교주가 되고 무림의 절대자가 되는 과정에서 정말 순수한 무공만으로 가능했을까?
 그동안 독고천이 쓴 술수가 한둘이 아니고, 그 술수들은 모두 고치의 머릿속에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른 사람의 기억이라 마치 책으로 읽은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보 아저씨, 나는 아저씨의 무공도 모두 알고 있다고.’
 한 번도 수련한 적 없이 방법만 알고 있는 마공 중에는 북명신공(北溟神功)이란 것이 있다. 장자 소요유 편을 보면 곤이라는 물고기가 나온다. 그 물고기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고 한다. 그토록 엄청난 물고기가 사는 바다의 이름이 바로 북명이다. 뜻을 따지면 그만큼 큰 그릇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신공인데 결국 따지고 보면 공력갈취신공이다.
 고치는 독고천이 살살 약을 올리는 게 공력전이를 끝내려는 수작임을 알아채고 급한 마음에 북명신공의 운용을 시도했다.
 독고천의 말대로 어차피 죽는 거라면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토록 목숨처럼 아끼는 내공이라도 완전히 바닥내 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뭐, 뭐 하는 짓이냐?〕
 그제야 독고천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분명 독고천도 북명신공을 알고 있다. 공력도 고치보다는 독고천이 훨씬 높다. 둘 다 북명신공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공력의 고하마저 분명하니 평상시라면 고치가 독고천의 내공을 빼앗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독고천에게 역으로 진원진기마저 빼앗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독고천이 자발적으로 공력을 전해 주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더욱 힘껏 끌어당기자 공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고천의 공력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독고천이 내공전수를 그만둘 수도 없다. 흐르는 물줄기를 거꾸로 역행시킨다면 그 피해가 누구한테 돌아가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독고천은 공력을 상당 부분 빼앗기고 말았다. 처음 계획한 것과 달리 공력의 절반을 잃고 만 셈이다.
 〔어, 어리석은 것! 네놈은 곧 단전이 터져 죽게 될 것이다.〕
 독고천의 저주 섞인 전음에도 불구하고 고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독고천은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해동심법을 연마하면서 조금씩 변화된 고치의 신체는 환골탈태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그의 공력 역시 고치의 단전에 머무는 게 아니라 몸 전체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
 덕분에 한 곳에만 강한 기운이 뭉치지 않았다. 이것은 고치에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당한 기운이 급격히 들어오자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나마 견딜 만은 했으니까.
 반면 독고천은 급격히 잃어 가는 공력으로 인해 이제 원망 어린 전음조차 보낼 수 없었다.
 ‘이, 이런 어리석은! 놈에게 공력의 전이를 완전히 끝낸 다음에야 알려야 했던 것을……! 아니, 끝까지 침묵했어야 하는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자만이 스스로를 망쳐 버린 셈이었다.
 독고천은 설마 고치가 이런 식으로 대항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공력을 빼앗긴 후 겨우 고치에게서 벗어나게 되자 이번에는 내공의 힘으로 밀어냈던 세월의 무게가 육체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주름살이 생기며 머리가 빠지고 뼈가 삭아 버리는 게 아닌가!
 독고천은 원망 어린 눈초리로 고치를 노려볼 뿐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고치의 상태도 상당히 불안했다. 과연 독고천이 품고 있던 공력은 엄청났다. 아니, 그만한 공력을 단전에 뭉쳐 놓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독고천이라는 무인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잘 대변해 주었다.
 고치는 그 가공할 기운을 단전만이 아니라 온몸에 균등하게 퍼뜨려 놓았다. 그러고도 남아돌아 사방으로 기운을 뿜어냈으니 그 양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어찌나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지 고치를 중심으로 공간마저 일그러져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일그러지고 있었다.
 주변의 기물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강한 반탄력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독고천마저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벽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제는 더욱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독고천은 고치의 상태가 결코 주화입마가 아님을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기색은 역력하지만 내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육신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독고천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지식들이 잠들어 있었다. 특히 무공에 관해서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제야 독고천은 자신이 크게 오판했음을 깨달았다.
 ‘저, 저놈은 공력을 단전에 모으는 게 아니었어. 해동무록은 단전을 구분하지 않는 심법이었던 거야. 그래서 저놈이 저렇게…… 하하! 이제야 지금까지의 상황이 설명되는군. 결국 나는 저놈에게 좋은 일만 한 셈이야.’
 사실 독고천은 예전에도 고치의 상태를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해 오면서 쌓아 온 편견이 그런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비극을 낳았다.
 ‘그, 그런데 저건 대체 무슨 현상인가?’
 고치를 중심으로 공간에 균열이 일더니 시커먼 틈새마저 생겼다. 그 틈이 생겨나면서부터 묘하게 방안에 휘몰아치던 기운이 잠잠해졌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치에게서 뿜어진 기운이 그 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고치와 독고천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천문대에서는 태양의 흑점이 어느 때보다 크게 관찰되는 중이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태양흑점의 등장과 고치에게서 벌어지는 저 기현상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그러진 공간의 틈 사이로 고치의 몸이 빨려 들어가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춰 버렸다는 것이다.
 ‘어, 어떻게……?’
 독고천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흠칫 놀라는데 공간의 틈새가 사라지더니 가공할 폭발이 일었다. 금세 사방이 화염에 휩싸였고 독고천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날 무림 역사상 최강의 고수였던 파천마황은 백골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다음날 저녁, 서울 외곽의 한 집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유골 한 점만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태양의 흑점도 더 이상 관측되지 않았다.
 
 2
 
 인간의 육체는 연약해서 작은 충격에도 쉽게 망가진다. 날카로운 금속 조각 하나에도 목숨을 잃으며, 뜨거운 수증기에도 화상을 입는다. 심지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은 장미꽃 가시 하나에 목숨을 잃었다.
 그만큼 깨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가 공간의 틈새로 떨어진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힘은 신의 영역. 당연히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두 힘이 서로를 밀쳐 내고 당기며 가공할 힘의 파장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인간의 육체가 견뎌 낸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겠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절대의 어둠과 극한의 빛이 공존하는 공간의 틈새에서 고치는 가공할 힘의 파장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보통 그만한 힘에 휩쓸리면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야 정상이지만 독고천이 불어넣어 준 공력과 해동무록상의 심법이 외부의 가공할 기운을 버티게 해 주었다.
 독고천은 무림 역사상 가장 심후한 공력의 소유자였는데, 거기다 300년간의 공력을 더 보탰다. 그 가공할 힘이 한 줌 남김없이 고치의 몸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해동무록의 심법이 중원의 다른 내공심법과 판이하게 다르지 않았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해동심법의 묘용은 또 한 번 고치의 목숨을 구해 주고 있었다.
 독고천이 지녔던 가공할 기운을 온몸으로 골고루 퍼뜨려 놓더니 이번에는 외부의 기운에 맞서는 것이 아닌가. 바깥에서는 가공할 기운이 그를 찢어 놓으려고 하는데 내부의 기운은 외부로 뿜어지며 그에 맞섰다.
 그뿐이 아니다. 해동심법은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여 내부의 기운을 조금 더 보강했다.
 여기서 고치는 또 다른 기연을 맞았다. 하나의 공간은 곧 하나의 세계. 세계와 세계의 틈새는 천하의 어떠한 명산보다도 순수한 기운들로 가득하다.
 고치가 사는 세상의 기가 대기 중에 퍼진 수분과 같다면 이곳의 기는 말 그대로 거대한 강물.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물을 마시는 것이 호흡을 통해 공기 중의 극소량의 수분을 취하는 것과 같을 수 있을까?
 주변의 기운이 워낙 가공하여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질 뿐이지 지금 고치가 몸으로 받아들이는 기운은 감히 설명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고치의 육체가 느끼는 것은 고통이었다.
 독고천의 공력으로 인해 죽을 위기를 겪고 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독고천의 공력 덕분에 살아남는 기현상이 반복되던 중, 빈 공간에 또다시 공간의 균열이 일었다.
 공간과 공간 사이는 완벽한 균형을 전제로 유지되는데 고치라는 불순물이 생겨 토해 내려는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그 틈새로 고치의 몸은 가공할 기운과 함께 토해졌다.
 고오오오오
 고치를 토해 낸 세상은 한 차례 굉음을 터뜨리더니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하나의 불순물을 토해 낸 운동력을 근본으로 또 다른 세상이 창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의 영역.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섭리가 담겨 있으니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저 작은 폭발을 시작으로 또 다른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대폭발이 일어났을 뿐이다.
 새로운 우주가 아주 작은 불순물로 인해 열렸듯, 고치의 새로운 세상은 조용한 숲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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