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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탑 1권-1

2015.01.07 조회 807 추천 1


 서장
 
 수십, 수백 년 아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세월 동안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자리했던 한 공간. 그 공간의 어둠이 지루함에 투정을 부리는 듯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스스스.
 바닥인 듯 보이는 곳에서 한 줄기 미약한 빛이 새 나오기 시작하더니 찰나의 순간 어둠을 밝히며 이상한 도형과 수식, 문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라라랑!
 도형, 수식, 문자들이 나타났던 원형의 바닥으로부터 어느새 빛의 기둥이 솟아올라 어둠의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빛의 기둥이건만 주위로 빛이 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빛의 특성상 어둠을 물리치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뭔가에 막힌 듯 일정 공간 이상 그 영향력을 넓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악!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갑자기 빛의 기둥이 강렬하게 자신을 뽐내더니.
 스윽, 팟!
 빛의 기둥은 뭔가를 토해 내곤 언제 존재했었냐는 듯 어둠 속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그 뭔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미지의 힘에 의하여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져 사뿐히 놓였다. 다시 공간은 적막과 어둠만이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현상 때문인지 어둠은 더욱 짙게 느껴졌고, 고요함 역시 더욱 깊어졌다.
 
 또 다른 공간, 역시 어둠이 모든 사물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곳,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벌어진 현상에 마치 반응이라도 하듯 두 개의 빛이 나타나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그리고 생소한 소리가 어둠의 공간을 흔들었다. 그 뜻은 이러했다.
 
 왔느냐, 길을 따라온 존재여!
 
 
 *선행 후득, 선득 후행
 
 알 수 없는 어둠의 공간에 빛의 기둥과 함께 나타난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서서히 생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깨어나고 있었다.
 “으음, 응?”
 벌떡!
 “여긴… 어떻게 된 거지?”
 깨어난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 본능적으로 주변의 상황을 살폈고, 사방이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에 휩싸여 있자 의혹과 함께 내공을 끌어올려 어둠을 꿰뚫어 보려 했다.
 “이런,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털썩!
 전신에 충만하게 존재해야 할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자 그는 즉시 제자리에서 가부좌를 하고 정신을 모아 몸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내공의 존재 여부와 몸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내공이 없다 해도 마음을 모아 내부를 느끼려고 하면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하… 완전히 비었군. 아니 아예 단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겠다. 내공 수련을 전혀 하지 않은 일반인처럼… 어떻게 된 게 한번 움직였다 하면 내공에 문제가 생기는지. 그리고 여기 역시 내가 첫 임무와 함께 고립되었던 용구의 대공동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걸로 보아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 것 같으니… 이게 나 묵비영의 운명인가?”
 비영은 또다시 고립되었다는 걸 깨닫자 절로 한탄이 나왔다. 그와 함께 이제껏 살아왔던 삶을 떠올려 봤다.
 “후후, 떠올릴 것도 별로 없군. 수 십 년 세월의 대부분을 무공을 익히며 보냈으니, 그나마 사람과 만나 정을 나눈 건 두칠이와 독사파 동생들 정도뿐이고. 가만… 내가 그 대공동의 폭발을 견디며 천마형의 새로운 묘용을 깨달았었는데 그럼 여기가… 아니지, 그때 내가 천마형의 극의를 깨달으며 만든 기의 막은 반경 5장이었다. 이렇게 넓지가 않아.”
 비영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인해 주변을 살필 순 없었지만, 경지에 올랐던 감각이 이 공간의 크기가 최소 반경 5장은 훨씬 넘는 공간임을 말하고 있었다.
 “일단 궁금증은 나중에 풀자.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내공을 회복해 천마심공을 익히는 게 먼저다.”
 언제나처럼 비영은 다시 천마심공의 운기에 들어갔다. 이미 검선 옥허선인의 도움으로 무림에서 논하는 무학 경지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자연경의 경지를 살짝 들여다봤던 비영이라, 자연의 기에 대한 이해와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 결과로 완벽하게 내공을 익히지 않았던 듯 흔적도 없는 단전이지만, 약 반각의 집중된 호흡만으로도 단전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 물론 단전의 크기는 깨알보다 작은 먼지 한 톨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 12시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좋아, 일단 혈맥이 막혔는지를 확인한다. 호흡을 통한 내공의 축적보다는 소주천이라도 가능하다면 보다 빨리 내공을 증가시킬 수 있으니.”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내공이지만 과거처럼 1단계 호흡 수련을 수년간 할 필요는 없었다. 자연의 기에 대한 이해와 천마심공을 경지에까지 익혔던 경험은 단전에 모인 기의 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집중력과 기에 대한 통제력이 문제일 뿐, 그래서 비영은 3단계 혈맥의 타통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 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때와 달리 지금 비영의 기에 대한 이해와 집중력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상승된 상태였다. 그래서 미약한 내공이지만 충분히 기를 이끌어 혈맥 타통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한데, 신중하게 단전에서 첫 번째 혈맥을 향해 내기를 이동시키던 비영은 예상했던 반발은커녕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내기에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응, 혈맥이 막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혈맥이 막히지 않았다면 천마심공의 운기 경로를 연결시킬 수 있고, 4단계까지만 성취해도 이후 빠르게 예전의 수준을 회복시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기란 늘리게 되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압축하게 되면 또한 엄청난 양을 압축시킬 수 있으니.”
 비영이 12시진을 투자해 단전에 쌓은 내공의 양은 굳이 수치로 계산한다면 한 달이 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루 만에 그 정도의 양을 단전에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건 역시 화경의 극을 지나 자연경의 경지를 엿봤었던 경험의 소산이었다.
 기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기를 붙잡아 두기 위해 아주 중요한 강한 집중력은 호흡을 통해 들어온 자연의 기를 낭비함 없이 비영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에 대한 강한 통제력은 얼마 안 되는 내공을 천마심공의 운기 경로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비영은 혈맥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거침없이 흐르는 진기로 인해 처음 예상과 달리 4단계의 대혈맥만이 아닌 6단계의 중소 혈맥 중 중혈맥까지 진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혈맥이 타통되어 있다는 걸 깨닫자 아예 천마심공의 진가가 나타나는 단계인 6단계의 수준까지 진기의 흐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
 
 어둠의 공간에서 비영이 시간의 흐름도 잊고 천마심공의 운기에 전념하고 있을 때, 언제 형성되었는지 모를 빛의 기둥이 가부좌를 튼 비영의 등 뒤쪽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운공 삼매경에 빠져 있는 비영은 전혀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정표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두 개의 빛기둥은 나타난 이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사라질 줄 모르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비영이 깨어나 자신을 봐 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반면 비영은 단전에 쌓인 진기를 중혈맥까지 융화, 관통시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말이 중혈맥이지 그 혈맥들을 모두 한 줄기로 잇는다면 그 길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혈맥의 10배 아니 100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긴 거리를 얼마 되지 않는 자연의 기로 연결시키고 있으니, 그에 필요한 집중력과 인내력이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1주일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비영은 일주천을 하는데, 해냈다는 환한 미소와 함께 눈을 떴다.
 “후, 성공했다. 내 몸이 이렇게 순순하게 변했다니, 신체의 상태만을 보면 이전보다 훨씬 낫다고 볼 수 있겠는걸. 그리고 단전에서 느껴지는 진기로 보아 두 달 내공은 될 것 같고. 후후, 두 달 내공으로 중혈맥까지 기의 흐름을 만들다니 내가 생각해도 기적이군. 옛날 사천의 촉루곡에선 1년 내공으로도 대혈맥, 그것도 머리를 제외한 대혈맥만을 겨우 연결시켰거늘, 응? 빛이다.”
 믿을 수 없는 성취에 혼자 중얼거리던 비영은 문득 등 뒤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끼곤 얼른 뒤돌아봤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꼬르륵!
 “이런,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네. 배가 고프다고 하는 걸 보니… 저 빛이 있는 곳에 먹을 게 있을라나.”
 비영은 현재 운기를 하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준이 없어 그저 오래 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비영이 운공 삼매경에서 1주일 이상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자연의 기를 흡수하며 운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 정신을 진기의 유도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비영의 호흡은 습관처럼 1단계 호흡법에 따라 이루어졌고, 그건 적은 양이지만 지속적으로 자연의 기를 흡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렇게 흡수된 진기의 일부분은 단전까지 이르러 비영의 의지에 따라 내기로 전환되었지만 그 양은 미미했고 대부분은 신체의 활력을 유지하는 데 소비되었다.
 그랬던 것이 운기를 마치고 육체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자 호흡에 의해 흡수된 자연의 기만으론 활동에 필요한 영양분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에 꼬르륵이란 소리로 영양분을 흡수하란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저벅저벅.
 배가 요구한 음식이 있으리란 기대에 빛을 향해 다가간 비영은 조금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건 빛이 기둥처럼 두 개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빛 속엔 같은 글자이나 그 조합에 따라 반대의 뜻이 되는 4자의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득 후행」
 「선행 후득」
 
 “먼저 알고 나서 행할 것이냐 아니면 먼저 행 즉, 경험하고 나서 알 것이냐를 묻는 것인가?”
 비영은 글귀가 의미하는 바를 읽는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불가에서 말하는 면벽이나 명상 등 자아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세상의 진리를 아는 것이나, 행행행行行行 하며 온갖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세상의 진리를 얻는 것이나 그 끝은 같다는 걸 말하고 있음을……. 하지만 비영의 당면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도道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에 다시 빛을 의지해 주변을 살피던 비영은 빛의 기둥 앞에 무언가가 놓여 있다는 걸 발견했다.
 “뭐지?”
 혹시나 하며 다가간 비영은 그게 옷이란 걸 확인했을 뿐 원했던 음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 옷을 입고 저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인가?”
 옷은 재질과 모양이 특이해 한눈에도 중원의 옷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벌거벗은 몸으로 활동할 수 없어 일단 옷을 입었다. 옷은 상의와 하의 단 두 벌뿐이었고, 재질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젠 저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해 들어가야 하는데…….”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원해서든 원하지 않아서든 고립된 장소에서의 수련이나 생활은 사양하고 싶었다. 또한 잠깐이지만 자연경의 경지를 엿보았던 자신이 먼저 얻어야 한다는 곳을 선택할 이유도 없었다.
 “누가 날 이곳으로 옮겼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이미 비영의 몸은 마음에 따라 ‘선행 후득’이란 글이 있는 빛의 기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무공 수련에 빠져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고, 뭔가를 알게 되었을 땐 무작정 강해지기 위해 수련에 전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의 삶을 알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지금은 그저 부딪쳐 보고 싶었다.
 조건도 좋았다. 내공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중원에 나가 삼류에서부터 차근차근 성장하며 동료들과 친구들 그리고 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상태였다.
 사랑!
 비영이 한 곳을 선택해 사라지자 두 개의 빛기둥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곤 그 빛이 있던 곳의 바닥을 시작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어둠의 공간은 순식간에 붕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비영이 떠나감으로 해서 역할이 끝났다는 듯 흔적을 지우는 것 같았다.
 
 *무크비얀
 
 다그닥, 다그닥!
 덜컹, 덜컹!
 상단으로 보이는 행렬이 거대한 산을 뒤로하고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선두와 후미 사이의 거리가 근 300그로나 되고, 그 사이에 12대의 마차가 보이는 걸로 보아 그리 크지 않은 상단임을 알 수 있는 행렬이었다.
 그리고 상단을 호위하고 있는 듯한 이들이 마차 지붕이나 마부 옆, 개인 소유인 것으로 보이는 말에 탄 채 동행하고 있었다.
 탁, 탁, 탁!
 히이잉!
 “어이, 무크!”
 상단 행렬의 끝 부분,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인 듯한 인물이 맨 뒤에서 이동하고 있는 마차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마차 지붕에 누워 있는 용병을 불렀다.
 스윽!
 무크라 불린 용병은 그저 고개만 돌려 자신을 부른 용병을 응시했다. 왜 불렀느냐는 시선으로, 그에 어색한 웃음과 함께 용건을 말하는 용병이었다.
 “하하하, 별건 아니고. 자넨 돌아올 때엔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맞아, 찰리.”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나. 무크 자네가 빠질 경우 돌아가는 여정이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선 재의뢰를 부탁하고 싶거든.”
 “돌아… 아니, 가야 할 곳이 있다.”
 “가야 할 곳? 음, 꼭 지금 가야 하나? 내가 자네와 함께한 지 거의 3년, 적어도 용병으로서 책임감이 있는 자네라고 알고 있다.”
 “처음 계약을 할 때 편도로 했으니 책임은 다했다.”
 “무크, 자네가 말을 번복하지 않는 스타일인 건 알지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겠나.”
 “미안하군.”
 “후, 어쩔 수 없군. 자네가 내 용병단에 속한 것도 아니고……. 대신 나중에라도 용병으로 활동을 하게 되면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쎄… 나중에 연락하지.”
 무크라 불린 용병은 말을 마치자 다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음…….”
 찰리는 무크의 성격을 알기에 무리하게 요구할 순 없었다. 3년 전 신생 상단의 호위를 하던 중 같이 위기를 넘긴 걸 인연으로 계속 같이 행동해 왔지만 자신의 용병단 소속은 아니었다. 처음엔 나이도 어리고 해서 햇병아리 용병인 줄 알았다. 실제로 그리 나서지도 않았다.
 그러다 2년 전 한 영지의 몬스터 토벌 의뢰를 해결하던 중 무크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자신의 용병단에 가입하기를 수시로 권유했지만 그저 홀로 움직이고 싶다며 거절해 왔던 무크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떠나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 시기가 지금이라는 게 너무나 아쉬운 찰리였다.
 용병이라는 직업이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는 특성이 있다지만 이별의 대부분의 이유는 죽음으로 인해서였다.
 이별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마음에 맞는 용병들끼리 모여 다니기도 하고, 괜찮은 실력자가 있는 용병단에 몸을 의탁하기도 한다. 찰리처럼 아예 작은 용병단을 구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용병단으로 인정받기 위한 최소 인원은 12명. 찰리의 용병단은 무크를 만났을 땐 18명의 작은 수준이었지만 무크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30명이 훌쩍 넘어 중간 규모의 용병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성장의 배경엔 바로 무크가 있었음을 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용병 길드에서 발급한 무크의 용병패엔 C급으로 명시되어 있다. 하나 무크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적어도 B급 용병으로 대우한다.
 아니, 어떤 이는 조심스럽게 A급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중엔 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지금껏 무크가 동행한 의뢰 건이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무크가 의뢰에 동행하게 되면 몬스터들과의 조우 확률이 적었다.
 나타나더라도 아주 적당한 수, 그러니까 용병들이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수와 만나 오히려 실전 경험을 쌓기 좋을 정도일 때가 많았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며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되자 용병단의 평판이 좋아졌고, 자연스럽게 찰리 용병단에 가입하려는 용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크에게 의지해 용병단의 규모를 키웠던 찰리는 무크가 떠나간다 하자 아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무크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참, 길드에서 무크 네 등급을 조정했다니까 지부에 들렀다 가라.”
 “…….”
 잠시 찹찹한 마음으로 무크를 응시하다 막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려던 찰리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무크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하여튼, 말했으니까 알아서 해. 난 앞으로 갈 테니 뒤를 좀 부탁하고, 이랴!”
 히이잉!
 다그닥, 다그닥!
 힐끔.
 무크는 말을 몰아 선두로 나아가는 찰리를 슬쩍 쳐다봤다. 그러곤 이내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눈동자의 초점은 하늘이 아닌 다른 뭔가를 쫓고 있었다.
 
 용구의 바다 속, 대공동의 폭발의 와중에 천마형의 극의를 깨달으며 검선에 의해 들여다봤던 자연경의 경지를 다시 맛보았으나, 정신을 차려 보니 이상한 공간이었다. 게다가 내공은 사라지고 몸은 마치 갓난아기처럼 순수하게 변해 모든 혈도가 막히지 않은 최상의 신체로 탈태환골되어 있었다.
 덕분에 천마심공의 1, 2, 3단계를 건너뛴 것도 모자라 바로 6단계의 중혈맥까지 심공의 흐름을 만들 수 있었지만… 물론 경지에 이르렀던 경험과 자연의 기에 대한 깨달음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좀 흐른 뒤였다.
 “선행 후득, 선득 후행의 의미가 당시에 파악했던 깨달음에 대한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지. 후후, 중원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인지도 모르고.”
 무크 그는 바로 십만 마교의 절대자 천마 묵비영이었다. 다시 고립되는 게 싫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선행 후득의 빛무리를 선택해 들어섰던 묵비영, 그가 무크라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
 
 빛의 기둥을 통과해 도착한 곳은 강, 그것도 황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폭을 자랑하는 강의 중앙이었다. 비영의 새로운 세계의 경험은 그렇게 강 위 허공에서 강물로 떨어지며 시작됐다.
 수영이라면 용구에서의 경험으로 달인의 경지까지 이르러 있는 데다, 미미하지만 천마심공의 운기 경로에 따라 흐르는 진기에 의지해 천마형까지 운용하니 육지에 올라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 비영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비영을 당혹스럽게 한 건 자신의 상태였다. 강을 벗어난 비영은 우선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옷을 벗어 햇빛이 잘 드는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강변으로 갔다. 어패류나 물고기라도 잡아 구워 먹을 생각으로, 한데 물고기를 찾기 위해 강물을 본 순간 비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낯선, 아니 어디서 많이 본 소년이 강물에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탈태환골의 과정을 거친 상태나 다름없어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비영은 20대 후반의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열다섯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어린 모습이 되어 버렸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어려진 모습은 반로환동이란 무학 경지상의 한 현상이기도 해 깨달음의 와중에 일어났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놀라긴 했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그러곤 과거의 용구에서의 경험을 살려 물고기를 잡아 허기를 해결한 후, 햇빛에 마른 옷을 챙겨 입고는 인가를 찾아 들어갔다.
 한데, 비영이 마을을 찾아 나선 이후에 겪었던 황당함은 정말 비영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온통 울긋불긋한 색목인에 건물, 옷,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았으니…….”
 그저 중원의 어느 한 곳이라 여겼고, 빛의 기둥이나 그곳을 지나쳐 나온 강 역시 어떤 진법의 영향에서 빠져나가는 길이라 여기고만 있던 비영이었다. 하나, 닥쳐온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비영이 지닌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한동안 꿈이 아닌가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영에게 다가온 하나의 사건은 비영으로 하여금 처한 현실을 인정하게 했고, 닥친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후후, 나 십만 마교의 천마인 묵비영이 노예 상인의 술수에 넘어가 노예로 팔릴 뻔했으니, 하하하, 낯선 세계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 말을 모른다는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때 절실하게 느꼈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사이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어디인지 모르는 조그만 도시.
 멍한 채 서성거리는 10대 어린 소년의 모습인 비영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좋은 목표였다. 하나 정신이 혼란한 상태였지만 좋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자들을 구분하지 못할 비영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달랐다. 중원 무림의 기준으로 접근해 오는 이만을 경계했던 비영은 어느 순간 영문도 모른 채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겉모습만으론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과 함께 좁은 마차 안에 갇혀 있었다.
 “그땐 몰랐지. 마법이란 존재를…….”
 그랬다. 비영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당한 건 바로 슬립이란 마법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마나를 다루거나 정신력이 강하다면 쉽게 걸리지 않는 마법이기도 했으나 당시 비영의 정신 상태는 슬립 마법에 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고, 마침 적당한 대상을 물색하고 있던 납치범들의 이목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만약 비영의 정신이 안정돼 있었다면 미미하지만 천마심공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슬립 마법에 저항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나 당시의 비영은 마음을 다잡는다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론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낯선 세계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과도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불안한 정신 상태는 그렇지 않아도 낯선 납치범들의 수작에 제대로 당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
 
 정신을 차린 비영이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건 금방이었다.
 오히려 낯선 도시, 낯선 인간, 낯선 문화 속에 있는 것보다 분명 갇힌 상태지만 이런 상황이 비영에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위기에 처하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다.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는 이 마차를 벗어나는 것. 그에 비영은 함께 마차에 갇혀 있는 아이들을 살폈다. 마차의 벽을 부수고 난 후 비영이 종적을 감출 때까지 혼란을 야기시켜 줄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그 방법은 바로 포기해야 했다. 전혀 상관없는 아이들이기에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건 제대로 뛸 수나 있을지 염려가 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아이들을 데려다 어디에 쓸지 궁금할 정도였다.
 결국 비영은 일단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내공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비영은 전심전력으로 천마심공을 운기, 내공을 쌓았다. 좁은 마차에 비영을 포함해 여덟의 아이들이 타고 있는 상태라 움직일 수도 없어 운공 말고 달리 할 것도 없었다.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비영은 1주일 만에 탈출을 결행해야 했다.
 하루 한 끼 그것도 빵 한 조각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이 피폐해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창 자랄 나이라 배불리 먹어도 금방 배고플 아이들이 빵 한 조각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으니… 아이들은 납치되기 전에도 굶주림에 시달렸는지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 곧 비영에게도 적용될 터,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을 때 마차를 벗어나야 했다. 일천한 내공으로 천마심공에 의지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겨우 일 년 내공, 겨우 성인의 힘을 감당할 정도이지만 마차를 벗어나기만 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 그동안 살핀 결과 납치범들의 수준은 삼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비록 내공을 잃었지만 새롭게 변한 육체는 오감을 극대화시켜 주었고, 거기에 더해 그동안 쌓은 1년 내공을 활용하자 비영의 귀는 주변 5장까지의 소리를 가려낼 수 있었다.
 소리에 대한 분석은 경지에 올랐던 비영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한 상대의 호흡 상태만으로도 수준을 파악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비영은 순찰대 소속이었다. 밀영대만큼은 아니지만 정보 수집, 잠입, 추적에 일가견이 있어 타 무력 단체의 고수들에 비해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는 요령이 월등했다.
 “숨소리가 고른 걸 보니 모두 잠들었군, 경계는… 모르겠군. 운에 맡겨야 하는가.”
 5장 이내엔 깨어 있는 자가 없다는 걸 확인했지만 그 수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내공의 부족으로 세세하게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불침번의 역할을 한 이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들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슬며시 몸을 일으킨 비영은 굶주림과 불안에 시달리다 깊은 잠에 빠진 아이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목표는 하루 한 번 빵을 넣어주는 조그만 문이 있는 곳, 문의 크기는 겨우 비영의 머리 하나 통과할 정도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찰대에서 배운 내용 중 내공이 제압당해도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탈출법이 있었고, 머리가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몸도 무난하게 뺄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방법 역시 있었다.
 게다가 현재 비영의 몸은 완전히 성장한 성인의 몸이 아닌 어린 소년의 몸, 즉 가슴에 비해 머리의 크기가 큰 시기였다.
 조그만 문에 당도한 비영은 준비해 둔 얇은 나뭇조각을 쥔 채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려 모든 내공을 손끝에 집중시켰다.
 탈출을 결심한 이후 지난 이틀간 문의 잠금장치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 구조를 확인했고, 그 해결 방법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예상대로 문의 잠금장치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여닫이문의 구조상 중앙에 잠금장치가 있게 마련인데 작은 쪽문이라 문을 잠그기 위해 걸친 막대가 작고 가벼웠던 것이다.
 “좋아, 다음은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문을 열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마차는 낡고 오래된 상태라 작은 쪽문이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가 꽤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영은 감각을 집중시켰다. 양손은 쪽문을 받쳐 올리듯 천천히 밀고 있었고, 귀는 마찰로 인해 새어 나오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없는 고요한 밤이라 아주 작은 소리도 멀리 퍼져 나가기에 비영의 행동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진행됐다.
 어느새 비영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일각이 여삼추란 말을 실감하며 문을 열던 비영은 활짝 열린 쪽문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려 버렸다.
 아니, 긴장이 풀렸다기보다는 내공의 소모로 인해 쪽문을 받치고 있던 손의 힘이 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바로 나타났다.
 기기긱!
 ‘헙.’
 움직이던 그 상태, 그대로 비영의 호흡이 멈추었고 몸이 정지됐다. 그와 함께 제발 듣지 못했기를 바라며 사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휴… 확실히 고수가 없는 것 같군. 이류 수준 하나만 있어도 눈치 챘을 텐데. 나에겐 다행이지만.”
 이후는 비영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쪽문의 크기도 생각보다 커 통과하는 데 무리가 없었고, 마차를 벗어나 땅을 밟은 이상 비영의 움직임을 삼류라 할 수도 없는 이들이 느낀다는 건 비영의 자존심상 있을 수 없었다.
 몸을 뺀 비영은 근처의 나무 위에 올라가 납치범들이 자고 있는 곳을 자세히 살폈다. 세 대의 마차가 외부의 적이 공격해 올 경우 방어가 용이하도록 외곽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서 모닥불을 중심으로 다수의 인물들이 흩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일단 빠져나온 이상 스스로의 목숨을 지킬 자신은 있었다.
 전혀 다른 세상이란 걸 받아들인 상태이니 더 이상의 정신적인 혼란은 없었다. 지금 비영이 고민하고 있는 건 복수를 해 납치되어 가고 있는 소년들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홀로 자리를 피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빠져나오면서 소모했던 내공은 이미 회복됐다. 적은 양이라 소모도 빨랐지만 회복도 빨랐다.
 하지만 1년이 조금 넘는 내공으론 아무리 경지에 올랐던 경험이 있고, 혈맥이 타통되어 있다 해도 검을 든 성인, 그것도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있는 삼류 무사들 셋 이상의 합공을 상대하기는 벅찼다.
 거기에 현재 비영의 몸은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최상의 신체로 거듭났지만 아직 단련되지 못한 육체였다. 정신에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적을 살피고 스스로의 상태를 감안해 무리라 판단된다면 홀로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십만마교의 순찰대원이었다면 틀림없이 몸을 피했을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왠지 비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비영은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정을 나누며 살고자 마음먹고 선행 후득이란 빛의 공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더 있을지 모르지만 저들이 목적지에 당도할 때까진 시간이 있었다. 저들은 비영이 정신을 차린 후 이제껏 마차 안에 갇힌 아이들의 수를 한 번도 파악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때까진 비영이 탈출한 사실이 발각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또한 마차 안의 아이들도 이미 반 실신 상태라 비영이 사라진 걸 알아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정인군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순 없지. 며칠이지만 같은 처지에 놓여 있기도 했고……. 우선 뒤를 따르며 저들의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결정을 내린 비영은 이 세계의 숲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곤 조심스럽게 숲 안으로 이동했다. 자신이 떠난 사이 날이 밝아 마차가 떠난다 해도 얼마든지 추적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보단 천마형과 천마비를 변한 몸에 완벽하게 적응시키기 위한 시간도 필요했다.
 깨달음은 극에 달해 있지만 일천한 내공으로 인해 마음만큼 천마형을 운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할 때 가장 급한 사항이었다.
 
 ***
 
 이틀 후.
 밤이 깊어 밤하늘에 별들만이 빛을 발하고 있을 때, 납치범들이 야영하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긴 비영이 눈빛을 빛내며 야영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악은 끝났다.”
 이틀간의 조사와 경험으로 납치범들의 수준은 물론이고 이 숲에서 활동하고 있는 괴상한 괴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된 비영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괴물들이 우글거렸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놀라긴 했어도 그리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러나 황당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비영은 괴물들 중 가장 약해 보이는 놈들을 유인, 납치범들과의 전투를 도발하기도 했다. 적의 수준을 알아보는 덴 그만이었다.
 그때의 전투에서 비영은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삼류 중의 삼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한 전투인과 비전투인을 구분한 것도 소득이면 소득이었다. 처음엔 마부까지 모두 검을 소유하고 있어 그 구분이 모호했었기 때문이다.
 우두머리로 보기엔 너무 약해 보였으나 나머지 인물들이 대하는 태도로 보아 고용주인 것이 확실한 한 명과 전장의 경험이 풍부해 보이는 자들이 여섯, 조금 미숙해 보이는 자가 넷, 마부 셋을 합해 총 열네 명이었다.
 상대의 전력 파악이 끝나자 나름대로 작전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비영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저들 납치범들의 이동 행로는 철저히 인적이 드물면서도 괴물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건 곧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이런 납치 행각이 한두 번이 아니란 증거였다.
 “좋아, 어제 우연히 목격하게 된 녹색 괴물 한 마리만 해도 저들이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강했지, 그놈을 유인한다. 내가 판단하건데 능히 일류 고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힘과 속도를 겸비한 놈이었으니까.”
 사삭!
 결정을 내리자 비영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일단 판단이 서면 망설임 없이 그대로 밀어붙이는 습관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십만마교의 절대자인 천마로서의 자리는 결정에 대한 번복이 쉽게 용납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
 
 비영이 야영지에서 사라지고 약 두 시진이 흘렀을 즈음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그에 납치범들 역시 하나 둘 깨어나 식사 준비와 함께 야영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납치 행각의 주도자로 보이는 중년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하루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을 거요.”
 “그런가? 예상보다 빠르군.”
 “요 며칠간 기분이 이상해 속도를 좀 올렸소.”
 “하하, 나야 일정이 앞당겨지면 좋지.”
 “그건… 응?”
 막 대꾸를 하려던 사나이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심각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이런, 모두 전투 준비!”
 땡그랑!
 탁탁탁!
 “산 쪽이다. 대형을 갖춰, 중형 이상이다.”
 쿵, 쿵, 쿵!
 “트롤이다! 트롤 대형으로 바꿔, 어서!”
 
 “휴-, 겨우 성공했다.”
 비영이 납치범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은밀한 곳에서 지켜보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저놈을 찾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해서 실패하는 줄 알았네… 그보다 저 녹색 괴물 이름이 트롤인가 보군.”
 트롤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숲의 먹이 사슬에서 상위의 존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밤이라 활동을 하지 않아서인지 모르는 비영으로선 어쩔 수 없이 운에 맡겨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결국 한 시진 반을 허비한 후에 간신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놈을 발견, 도발을 한 후 천마형과 천마비를 적절히 활용하며 여기까지 유인해 온 것이었다.
 트롤의 속도는 천마비를 시전하는 비영의 속도를 능가할 정도였지만 비영에겐 천마형이란 극상의 신법이 있었다. 트롤의 입장에선 다 잡았다 싶으면 눈앞에서 사라져 어느새 거리를 벌려 약을 올리는 비영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트롤을 찾으며 만들어놨던 표식을 따라 트롤과의 아슬아슬한 곡예를 거의 반 시진이나 하며 유인한 것이었다. 결국 야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유인한 비영은 최후의 힘을 다 사용, 천마형으로 하나의 분형을 만들어 트롤의 시선을 돌리면서 미리 봐 두었던 장소에 은밀하게 숨어들었던 것이다.
 반시진 이상을 트롤과 숨바꼭질을 한 데다 부족한 내공을 깨달음으로 만회하긴 했지만 현재의 비영이 분형을 만들어낸 건 사실 도박이었다.
 비록 어설프게나마 성공했지만 그 영향으로 비영은 지금 완전 탈진 상태였다.
 하지만 편안히 앉아서 쉴 수는 없었다. 트롤의 감각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몸을 숨긴 비영은 최대한 호흡을 길게 유지하면서 트롤의 이목이 야영지로 돌려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다행히 아침을 맞이한 야영지의 움직임은 비영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요란했고, 트롤은 그 소리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지금 비영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트롤과 중원식으로 생각할 때 표사 정도로 보이는 열 명의 전투는 생각 외로 팽팽했다.
 녹색 괴물의 괴력과 순발력이 열 명으로 이루어진 방어벽을 쉽사리 깨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납치범들도 트롤을 어찌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위협적인 공격을 성공시켜 트롤의 가죽에 상처를 내긴 했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 금방 아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죽이 무척 질긴 놈이네. 게다가 상처가 금세 아물어 버리다니. 꼭 전설의 연혼불괴 대법을 연상하게 하는군.”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건 트롤이었다. 사전에 비영을 쫓아오느라 많은 체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다시 열 명으로 이루어진 수비벽을 깨려고 초반에 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원기가 많이 소모되는 듯했다. 이대로 가다간 트롤이 도망을 가거나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결과는 비영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진형을 깨야겠군.”
 납치범들이 트롤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 방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음을 납치범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에서 확인한 비영은 그 움직임을 깨기로 했다. 난전을 유도한다면 단칼에 트롤의 가죽을 뚫고 치명타를 가할 존재가 없는 한 잘해야 양패구상이었다. 아니 납치범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트롤과 납치범들과의 전투는 30분이 넘게 진행된 상태라 비영의 체력과 내공은 진작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윽!
 은신처에서 몸을 일으킨 비영은 천마형의 묘리에 따라 은밀하게 이동했다. 비영의 오른손엔 어느새 송곳 모양의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검이 필요하다. 먼저 가장 가벼워 보이는 검을 소유한 우두머리부터 해결한다.”
 나무 송곳으론 힘과 내공이 부족한 비영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만일에 대비해 날카로운 검이 필요했다. 우두머리와 마부의 신경이 온통 트롤과의 전투에 집중되어 있어 비영의 접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찻, 찌르기.’
 우두머리의 지척까지 접근한 비영은 속으로 기합을 지르며 나무 송곳으로 우두머리의 목을 단숨에 꿰뚫어 버렸다. 단련되지 않았다 하나 검에 대한 이해와 집중력은 무방비 상태의 일반인을 죽이는 정도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또한 천성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진 않지만 마교에서 성장한 비영이라 일단 손을 쓰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푹-!
 “컥!”
 즉사였다. 그리고 우두머리의 비명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상황을 목격한 마부들의 고함이 터졌다.
 “적이다!”
 “뭣!”
 “카악!”
 붕-!
 쾅-!
 “끄억!”
 두려움 가득한 마음으로 전투를 지켜보던 마부들이라 새로운 적이 나타나 고용주를 죽이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놀라 부르짖었다. 비영의 모습이 어린 소년이든 아니든 마부들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고용주가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런 마부들의 비명은 유기적으로 돌아가던 합공을 잠시 멈칫하게 만들었고, 그 틈을 본능에 충실한 트롤이 놓치지 않고 공격하며 상황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빈틈을 파고든 트롤의 몽둥이에 용병 중 한 명이 정통으로 강타당하며 즉사했기 때문이다.
 그 후 트롤과 납치범들과의 전투는 일방적인 공격과 회피로 변해 버렸다. 그사이 비영은 그저 힘만 강한 세 명의 마부들을 가볍게 저세상으로 보냈다.
 비영의 손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검의 모양이 살짝 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게가 적당해 비영이 사용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첫 번째 목표였던 우두머리를 죽이고 강탈한 것이다.
 검을 손에 쥔 비영의 모습은 고요했다. 어린 소년이라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트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납치범들은 그 와중에도 비영이 마부들을 죽이고 몸을 숨기는 모습을 목격,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그런 그들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흩어져!”
 쉭-!
 타탁!
 “캬아!”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트롤을 향해 위협적인 공격을 하며 외치자 나머지 인물들은 지체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절한 선택이었다. 트롤이 쫓아가는 쪽의 인물들은 죽겠지만 다른 방향으로 도주한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하나, 비영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트롤은 비영이 몸을 숨기고 있던 마차가 있는 반대쪽, 자신에게 가장 많은 공격을 성공시켰던 조장을 쫓아가고 있어 당장의 위험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분명 돌아올 것이고 트롤이란 놈도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천마형. 쾌!”
 판단은 순간적으로 끝이 났다. 판단의 결과는 천마형을 시전, 마차 곁을 지나쳐 달려가는 자에게 접근, 파천검결의 1초 쾌를 시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근력, 내공 모두 부족했고 검 역시 익숙하지 않았지만, 일단 검을 든 이상 검의 날카로움은 얼마든지 상대를 죽일 수 있게 해 줬다.
 검의 날카로움에 쾌검의 정수인 쾌결을 삼류의 밑바닥에 불과한 이들이 방어하거나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컥!”
 전의 오크와 이번 트롤과의 전투를 지켜보며 납치범들의 갑옷이 상당히 튼튼하다는 걸 파악한 비영은 얼굴 부위를 노렸다. 아침 준비를 하던 중 트롤이 공격해 왔기에 투구를 착용할 시간이 없었던 납치범들에겐 정말 불행이었다.
 투구를 착용했다면 비영의 기습에 당황하지도 않았을 테고, 갑자기 나타난 비영의 검을 피하려다 재수 없게 목을 관통당해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이후 비영은 천마비와 천마형을 활용, 도망가는 이들을 한 명씩 추적, 제거했다.
 어느덧 1년 6개월 정도로 늘어난 비영의 내공은 몸을 한층 가볍게 해 주었고, 그만큼 더욱 비영의 움직임을 은밀하게 만들었다. 그런 비영에게 트롤과의 전투로 체력이 소모된 납치범들은 한 명씩 사냥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일대일로 붙어도 깨질 판에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암습을, 그것도 비영의 암습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트롤이 쫓아간 둘을 제외한 다섯 모두 비영에 의해 지옥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다섯을 처리한 비영이 한 일은 트롤을 쫓는 일이었다. 마차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는 건 그 다음이었다. 불씨를 남긴 채 움직인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트롤을 어찌할 수 없다면 도망간 두 명이라도 처리해야 했다.
 트롤의 흔적을 쫓은 비영이 트롤을 발견했을 땐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조장과 다른 한 명이 트롤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한 채 트롤의 몽둥이에 당해 피떡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트롤 역시 지친 듯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상황을 확인한 비영은 트롤을 죽이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트롤이 정상이라면 무조건 도망가야 하지만 자세히 보니 왼쪽 허벅지 부분이 반 넘게 잘려 있었고, 상처의 회복 속도도 현저하게 느려져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시도한다. 그대로 가기엔 왠지 불안하다.”
 스슥!
 이대로 돌아가기엔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았던 비영은 결국 천마심공을 운용하며 천마형을 시전 조심스럽게 트롤이 기대어 앉은 나무 뒤로 이동했다.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 저 괴물이 인간형이란 사실을 감안할 때 심장과 뇌가 존재할 터.”
 비영의 공격 목표는 머리 부분의 뇌였다. 심장은 두터운 가죽과 뼈로 보호받고 있어 현재 비영의 능력으론 파괴하기 불가능하다 판단되었지만 뇌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뇌를 보호하는 머리뼈를 부수는 건 어려웠다. 그렇지만 턱 밑과 귀 부분의 뼈는 머리뼈와 달리 약하거나 없었다.
 즉, 지금 비영의 능력으로도 검의 날카로움을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관통해 뇌를 헤집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인간의 머리 구조와 같다는 가정하의 판단이었지만.
 크으, 크으, 크-!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지친 듯 내뱉는 트롤의 신음이 은밀하게 다가서는 비영의 코와 귀를 자극했다. 또한 트롤이 비영의 접근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천마형 산!’
 스윽.
 “파천검결 중!”
 한 번의 도약으로 목표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자 비영의 공격이 개시됐다. 천마형의 산의 묘결에 따라 마치 땅속에서 솟아나듯 트롤의 정면에 몸을 숙인 모습으로 나타난 비영은, 파천검결 전 3초 중 힘을 중시하는 중의 요결에 따라 검을 트롤의 턱 밑으로 쑤셔 넣었다.
 “크륵!”
 갑작스런 비영의 등장에 트롤은 깜짝 놀라 기음을 흘렸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투툭, 툭, 딱!
 검이 턱 밑에서 위쪽으로 파고들면서 자잘한 뼈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뇌를 받치고 있던 보루가 부서졌다.
 휙-!
 손에 느낌이 왔다 여긴 비영은 검을 포기하고 신속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마지막 발악으로 휘두른 트롤의 공격에 스치기라도 하는 날엔 비영도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윽, 쿵!
 뇌가 헤집어진 트롤은 비영의 예상대로 즉사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휘두른 헛손질의 영향으로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
 
 “당시에는 그저 뒷골목 건달들이나 질 나쁜 표사들인 줄 알았지. 인신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나중에 용병이란 직업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야 그들이 용병이란 걸 알았고. 후후, 그때 구한 아이들이 남자 일곱에 여자가 둘이었지.”
 마차 위에서 바라보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당시의 소년 소녀들의 얼굴로 순간순간 변하며 비영을 추억 속에 빠지게 했다.
 “강함에 대한 욕망이 가장 컸던 티모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군.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탈출시킨 아홉의 아이들과 숲을 벗어나기 위해 함께한 한 달간의 고생이 뇌리를 스쳐갔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소지품을 뒤져 귀중해 보이는 것들과 금, 은, 철로 된 동전들을 챙기고 마차에서 먹을 것들을 챙기긴 했지만 막상 움직이려니 막막했다.
 말은 통하지 않고, 겨우 열셋에서 많이 잡아야 열다섯에 불과한, 제대로 먹지 못해 스스로 보호하기는커녕 걷는 것도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비영으로 하여금 무척 고달픈 시간을 보내게 했다. 그나마 하루하루 지나며 몸짓과 간단한 단어를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하루 세 끼를 꼬박 챙겨 먹자 조금씩 건강이 나아지며 비영의 부담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보호하는 건 비영 혼자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느린 걸음과 극도로 조심스러운 이동으로 인해 비영이 마을을 발견한 건 거의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원래 납치범들이 가려고 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납치범들이 머물렀던 지점에서 얼마 안 가 방향을 틀었다면 금방 마을을 발견했겠지만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비영은 그대로 길을 따라 직진했고, 그 선택은 알지 못한 사이에 한 번의 위기를 넘기게 해 준 셈이었다. 그 마을엔 납치범들로부터 아이들을 인계받기로 했던 일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의 숲에서의 생활은 아이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비영이 사전에 위험을 막아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이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한두 마리의 오크들을 유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기도 했다.
 모두 굶주림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경험이 있고, 납치되어 노예로 팔릴 뻔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래도 어린아이였기에 좀 더 정신적으로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긴 비영의 선택이었다. 육체의 단련은 이후에 해도 충분했다.
 비영의 방법은 유효했고, 마을을 발견했을 땐 나이가 열다섯인 아이들은 충분히 자기 앞가림을 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또한 비영이 열다섯 소년인 무크란 이름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들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마을에 도착한 이후엔 오히려 무크가 아이들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문화를 전혀 모르는 무크로선 당연한 상황의 반전이었고, 아이들 모두 그런 사실을 인정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티모시를 주축으로 나이가 열다섯이었던 미치온, 프레드가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 돈을 벌기 시작했고, 열넷의 안나와 사라가 마을의 여관에 심부름꾼으로, 같은 열넷의 동갑이었지만 안나와 사라에 비해 철이 없었던 테리우스와 하만 그리고 열셋의 알반, 테리안은 마을 외곽에 임시로 만든 통나무집에서 무크와 함께 생활했다.
 그 누구도 무크에게 일하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사실 무크의 수중엔 우두머리에게서 갈취한 돈과 귀중품이 있었다. 하나, 그 존재를 아는 건 열다섯의 동갑네기인 티모시, 미치온, 프레드뿐이었고, 무크의 주장에 의해 비상금으로 숨겨 두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힘없는 지금보단 후에 성인이 되었을 때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래서 무크에게 강요를 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하나, 그런 생각보다는 아홉의 소년 소녀들에게 생명의 은인이자 의지할 수 있는 큰형이며 큰오빠라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게 정확했다.
 무크 역시 당장은 일할 생각이 없었다. 일정한 수준까지 내공을 늘리는 게 최우선 과제였고, 그다음이 말을 배우는 것이었다. 돈을 벌든 다른 무언가를 하든, 그건 이후의 문제였다.
 
 마을에 정착한 무크는 차근차근히 몸을 만들며 내공을 쌓아 갔다. 십만 마교의 천마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중원 무림을 향한 도전도 해 봤다. 그리고 무인으로서 최고의 경지라는 자연경의 경지를 엿보았던 무크였기에 이후의 삶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저 생소한 세상이라 호기심은 좀 있었지만…….
 무공을 수련하느라 대부분의 생을 보냈기에 다방면에 대한 지식이 조금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십만마교의 천마로서 일반 무림인보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자부했던 무크비얀(묵비영)이었다.
 하나, 마을에 정착한 후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의 현 상태와 어떻게 해서 자신이 이곳 전혀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난생처음 보는, 괴이지란 서적에서조차 본 기억이 없는 괴물들의 존재는 난감함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강력한 괴물들의 존재는 무크에게 야릇한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음도 부인하지 못했다.
 무크는 어서 빨리 내공을 회복해 트롤이란 놈을 상대해 보고 싶었다. 납치범들과의 전투에서 느꼈던 일류 고수가 아니면 정면으로 상대하기 곤란하다 여겼던 게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트롤이란 괴물보다도 강하다는 오우거란 놈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아이들과 마을에 도착한 당시의 무크의 내공은 4년 정도, 아직도 요원하기만 했다. 그래도 숲에서의 한 달 동안의 수련으로 육체의 상태를 성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는 있었다.
 과거 어린 시절 천마수련관 전 8관에서 받았던 것들을 응용, 꾸준히 수련한 성과였다.
 그렇게 마을에 정착한 후 다시 한 달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그날도 무크는 통나무집 뒤 공터에서 혼자 천마형의 보로를 밟고 있었다. 그런 무크에게 미치온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이 다가오자 바로 연공을 중단, 아이들을 바라봤다.
 전혀 다른 세상인 것 같았지만 천마형의 수련 장면은 십만마교의 교도가 아닌 이들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형제로서 대하고 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게 당연했다.
 “무크!”
 묵비영의 이쪽식 발음인 무크비얀이라 부르라 해도 굳이 무크라 부르는 형제들이었다. 이젠 익숙한 상태인 무크는 왜 그러느냐는 뜻이 담긴 시선으로 미치온과 아이들을 봤다. 아직 말이 서투른 상태라 대부분의 대화는 눈빛과 몸짓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아이들 모두 익숙한 상태였다.
 “나, 우리, 너, 배운다. 소드!”
 “소드?”
 “응, 우리 모두.”
 “흠… 생각한다.”
 “알았다. 기다린다.”
 
 ***
 
 “무크, 무크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나?”
 파란 하늘을 보며 회상에 잠겨 있던 무크를 한 용병이 부르고 있었다.
 스윽!
 마차 지붕 위에 누워 있던 무크는 용병들의 부산한 움직임에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착한 모양이지.”
 “그렇다. 성 외곽 경비 초소가 보이기 시작했으니 무크 너도 자리를 잡아라.”
 “그러지.”
 휙, 턱-!
 무크의 자리는 바로 자신이 탄 마차의 마부 옆 좌석이었다. 마차 지붕에서 한 번의 몸놀림으로 마부석으로 이동하는 무크의 모습에 용병은 제 할일을 마친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부 역시 자주 겪었던 일인 듯 묵묵히 말을 다독거리며 마차를 몰 뿐이었다.
 무크는 선두 마차 너머로 보이는 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성 뒤 멀리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산맥도…….
 
 *파르게 수련식
 
 트레이스 왕국은 북쪽 전체가 몬스터의 대지와 인간들의 터전을 가르는 거대한 테리바운드 산맥과 접해 있는 나라다.
 그 접한 지역 중 산맥의 폭이 가장 좁아 몬스터의 대지에 가고자 하는 기사나 마법사, 용병들이 선호하는 영지가 있다. 속칭 사냥꾼들을 위한 영지라 칭해지는 버트란 영지가 바로 그곳이었다.
 산맥 쪽으로 움푹 들어간 지형으로 인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몬스터들로부터 공격당할 위협이 높았지만, 역으로 사냥꾼들에겐 사냥의 대상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도 됐다.
 또한 산맥 건너의 몬스터의 대지는 자신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수련 기사나 자유 기사, 가죽이나 힘줄, 뼈, 트롤의 피 등을 수거해 상인이나 마법사들에 팔아 거금을 모으려는 용병들에겐 천혜의 땅이었다.
 기본 파티 인원인 다섯에 길잡이까지 포함 여섯이 재수 좋게 오우거라도 한 마리 잡는 날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오크 백 마리 잡는 것보다 오우거 한 마리가 더 값이 나갔기 때문이다. 대신 목숨을 보장할 수 없지만.
 보통 사냥꾼의 마을에 발을 들여놓은 후 2년을 견딘다면 성장을 원했든, 돈을 원했든 무난히 성취한 후 돌아갈 수 있었다. 하나 그렇게 떠날 수 있는 숫자는 열에 일곱이 넘지 못했고, 그나마 몸 성히 돌아가는 수는 다섯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버트란 영지에서도 테리바운드 산맥과 가장 가까운 곳에 형성된 사냥꾼 마을이 하나 있다. 사냥꾼 마을 중의 마을로 취급되는 곳으로 마을 이름도 사냥꾼 마을이었다. 약간 후방에 형성된 마을이나 측면에 있는 마을들은 나름대로 이름이 있었지만 유독 사냥꾼 마을만은 이름이 없었다.
 처음엔 있었을 이름이 대부분의 사람이 사냥꾼 마을로 부르다 보니 사라졌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사냥꾼 마을의 가치였다.
 트레이스 왕국은 지역적 특성상 버트란 영지 말고도 테리바운드 산맥에 접한 영지는 많았다. 하나 조건이 같거나 비슷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즉 다른 영지나 마을들과 구별되는 야생동물이나 몬스터 사냥을 위한 최적의 조건은 강한 이들을 사냥꾼 마을로 불러들였고, 그들이 사냥해 가지고 나오는 산물은 자연스럽게 상인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을 상대하기 위한 중간상인 역시 생겨나는 건 당연했다.
 중간상인의 대부분은 사냥꾼 출신이거나 마을 토박이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에 상점을 차린 후 사냥꾼들이 가지고 오는 몬스터 해체물을 구입, 보관했다가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상인에게 팔아 중간 이익을 취득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상점들은 보통 그렇듯이 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있게 마련이고, 그중 가죽류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비파비 가죽점 역시 가죽 코너에 위치해 있었다.
 한적한 낮 시간 비파비 가죽점의 문이 열리며 요란한 방울 소리가 상점 안팎을 울렸다.
 딸랑딸랑!
 “잠시만요!”
 방울 소리에 반응해 작업실인 듯한 곳에서 맑고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막 스무 살이 되었을 것 같은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매장으로 나왔다. 목소리에 어울리는 귀엽고 예쁜 점원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
 가게와 연결된 작업실에서 어제 구입한 오크 가죽을 손질하던 사라는 손님이 왔다는 신호인 방울 소리에 얼른 매장으로 나오며 웃는 얼굴로 접대용 멘트를 내뱉었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지런하지 않으면 타 상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손님이 없을 때면 구입한 가죽의 품질이 떨어지지 않게 한 번이라도 더 꼼꼼하게 손질을 하곤 했다.
 사라는 용건을 묻는 질문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자연스럽게 손님을 살피기 시작했다. 용병인 것 같은데 가죽이나 몬스터 관련 해체물이 있을 만한 가방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쳇, 뜸해졌다 했더니…….”
 사라는 문 앞에 서 있는 용병이 물건을 팔러 온 게 아닌 자신에게 목적이 있어 왔다고 여겼다.
 마을에서 활동하는 사냥꾼들 중엔 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라는 상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사라는 손님에게서 들려온 소리에 잠시 보류해야 했다.
 “사라?”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건 당연했다. 이상한 건 자신을 부른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에 사라는 좀 더 자세히 손님의 얼굴을 살폈다.
 사라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무크, 무크비얀 오빠?”
 “예뻐졌구나, 사라!”
 “진짜 무크비얀 오빠야?”
 “그래, 돌아왔다.”
 사라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얼굴 전체에 기쁨과 반가움의 미소가 번졌고 눈에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노예가 되어 어딘가에서 귀족들의 노리개가 될 운명이었던 자신을 구해주고, 현재의 위치에 있게 해 준 무크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열넷 시절, 감수성 예민하던 그때 사라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던 무크 오빠가, 1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을 알고 싶다며 떠나간 무크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그 기쁨에 사라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하하, 여전하구나. 울보 소녀, 사라!”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사라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땡그랑!
 “사라! 나 가렌이 왔소이다. 응? 뭐야. 너 이 자식 감히 사라에게 찝쩍댄 거냐?”
 20대 초반의 사나이가 방울 소리와 함께 들어서며 사라를 향해 알은척하다가 사라의 눈물을 보곤 갑자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곤 무크가 사라에게 무례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는지 다짜고짜 무크를 윽박질렀다.
 무크는 사라에게 다가가다 손님이 들어서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물건을 매매하러 온 이를 위해 양보를 한 것이다. 회포는 천천히 풀어도 됐다. 한데 들어선 가렌이란 청년이 사라의 눈물에 과잉 반응을 보이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호기심이 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흠, 사라에게 마음이 있는 청년인가 본데… 호, 소드 마나 필러 중급이군. 그렇다면 수련 기사인가?”
 한눈에 가렌이란 청년의 수준을 파악한 무크는 호기심이 동했다. 5년이 좀 넘는 용병 생활로 파악한 이 세계 무공의 단계에서 소드 마나 필러는 중원의 삼류와 이류 무사를 망라한 단계였다. 중원과 달리 이 세계는 무공의 단계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마교의 천마수련관 전8관을 수료하거나, 무림의 구대문파나 거대 세가에서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수련을 쌓아야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이류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특출한 기재들이나 영약을 복용한 이들은 일류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무크 역시 천마수련관 전8관을 수료했을 때 내공 면에선 일류에 근접했지만 실제 경지는 이류 중반의 수준이었을 뿐이다.
 용병 생활 중 같이했던 용병 찰리가 34세의 나이에도 삼류라고도 할 수 없는 소드 노워에 머물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삼류에 확실히 들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눈앞의 가렌이란 청년은 중원에서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세계에선 확실히 강자였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소드 마나 필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기사단이나 기사 가문에서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수련을 쌓았다는 걸 의미했다.
 “가렌 님, 무례하게 행동하지 마세요. 제 오빠입니다.”
 “오빠?”
 무크를 향해 적의를 보이던 가렌은 사라의 외침에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로 반문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곳 버트란 영지의 사냥꾼 마을에서 활동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라를 마음에 두고 있어 사라의 주변 환경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가렌이었다.
 약 7년 전에 아홉의 소년 소녀가 이곳에 나타난 것부터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성장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들로부터 들은 게 아닌 마을 주민과 토박이 상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그것만으로도 가렌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사라의 오빠들 중엔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몇몇이 있어 나중에 자신만의 힘이 필요한 가렌의 입장에선 정말 욕심나는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그 계획의 1차 대상이 사라였다. 출신이 불분명한 게 걸렸지만 관계없었다.
 그 정도는 무마할 능력이 귀족인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사라가 마음에 들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사라로 인해 그런 계획을 세우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가렌이 사라가 오빠라 부르는 이들을 모를 리 없었고, 아무리 봐도 가렌이 알고 있는 사라의 오빠 중엔 눈앞의 사나이와 부합되는 이가 없었다.
 이곳 사냥꾼 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네 명은 익히 알고 있고, 영지의 경비병으로 활동하고 있는 두 명도 봤다. 그리고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나머지 둘에 대해서도…….
 그들 중 누구도 눈앞의 인물처럼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는 이는 없었다. 또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가렌으로 하여금 의문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저 남쪽 미리언 대륙인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요. 제 오빠입니다.”
 “사라의 오빠들에 대해서 남들만큼은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만 그중 누구도 이렇듯 호리호리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가렌은 사라의 확답에 다시 말끝을 흐리며 의문을 제기했다.
 “흥, 그래서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가렌, 당신이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죠?”
 “하하, 이거 참.”
 가렌은 의문을 표시했다가 도끼눈을 뜨고 추궁을 해 오는 사라로 인해 선뜻 대꾸를 하지 못했다. 좋은 인상을 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화까지 돋우어 버린 셈이었다.
 “사라, 누구냐!”
 가만히 듣고 있던 무크가 사라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아니에요. 그냥 마을에서 활동하는 수련 기사인데 가게 단골손님이에요.”
 “흠… 그래?”
 사라는 얼른 대답했다. 사라 역시 가렌에게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 변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무크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때론 무서운 오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라의 대답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한 무크는 가렌이란 청년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난 5년간의 경험이 그저 세월만 죽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선 이전의 중원 무림보다 이곳 낯설었던 세계를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있었다. 세 개의 대륙과 그 대륙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의 생존경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중원 무림에서 무크가 활동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알고 있던 것의 대부분은 책에서 얻은 죽은 지식이었을 뿐이다. 무에 대해선 중원 무림에서 경지에 이르렀다면, 삶에 대한 권모술수나 인간관계에 얽히는 복잡한 요인들에 대해선 이곳에서 체득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지식은 중원 무림에서 읽었던 서적과 경험에서 출발한 건 당연했다. 다만 적용이 이곳이었을 뿐.
 ‘수련 기사라……. 아직 이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곧 도달할 것 같고, 괜찮군. 수련만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30대에 들기 전에 일류, 이곳에서 말하는 소드 마나 유저에 입문할 수 있겠어.’
 짧은 시간에 분석을 마친 무크는 가렌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명가 출신이군.”
 “응, 방금 뭐라고 했나?”
 “명가 출신이라고 했다. 왜 틀렸나?”
 “끄응, 지금 시비 거는 것이냐? 비록 지금은 수련 기사라 나 자신을 나타내지는 못하지만 수련 기사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족이란 걸 모르나!”
 “평민 중에도 수련 기사는 있지. 그리고 중요한 건 수련 기사의 죽음은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관례이지, 아닌가?”
 파직!
 가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상대의 말이 정확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것일 뿐이었다. 귀족치고 미래의 기사이며 힘인 수련 기사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수련 기사를 죽인 자를 가만 놔둘 귀족은 없었다. 한데 마치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듯이 말하며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여기나?”
 “글쎄? 좀 능력이 있어 보이는 평민을 쉽게 회유하려는 심리가 뇌리에 박힌 귀족들이라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렌 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무크 오빠도 그만 해!”
 사라는 무크 오빠가 자꾸 수련 기사 가렌을 자극하자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중재를 했다.
 사라는 무크 오빠의 능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예 상인과 호위 용병들을 제거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산속을 이동할 때 나타난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 무크 오빠가 5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라는 남아 있는 형제들 중 가장 강한 하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수련 기사는 몰라도 C급 용병들은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지만, 과거에 지나왔던 그 산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소년 소녀 아홉을 이끌고 돌파할 자신은 없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건 정규 기사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잠깐만 사라, 기사는 모욕을 당한 후 그냥 물러서지 않습니다. 무크라고 했나?”
 “무크비얀, 나의 이름이다.”
 “좋아, 무크비얀 그대에게 나 수련 기사 가렌이 결투를 신청한다. 본인은 수련 기사이기에 이 결투의 결과는 그대가 원하지 않아도 소속 기사단에 보고됨을 이해하기 바란다. 단, 보복은 없다.”
 피식.
 “보복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이겨 달라는 것이냐, 져 달라는 것이냐?”
 “이익!”
 가렌은 또다시 이어진 상대의 비꼬는 말투에 본능적으로 소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뽑을 수는 없었다. 수련 기사는 기사가 되기 위한 몇 가지 관문을 거쳐야 하고 가렌은 지금 그 첫 번째 과정을 수행 중이었다. 이 마을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가렌으로선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최소 2년 이상의 여행, 또는 감시자가 인정하는 전투를 5회 이상 달성하면 되지만 그사이 기사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할 경우 심하면 기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기사란 실질적인 무력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닌 귀족으로서 대단히 권위 있는 호칭이었다.
 작위와 별개로 기사로 인정받는 순간 능력만이 아닌 신의 있는 자, 명예로운 자라는 인식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가렌이 속한 기사단은 그런 면에서 타 기사단에 비해 매우 엄격한 곳이었다.
 “후읍, 후… 왜 자꾸 날 도발하는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곧 갚아주겠다. 언제라도 좋다. 날짜와 시간을 정해라. 사라가 오빠라 했으니 하만을 가족으로 인정, 대신 출전시켜도 인정하겠다.”
 “하만?”
 무크의 시선이 사라를 향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사라는 바로 대답해 주었다.
 “지금은 하만이 제일 강해!”
 “하만이? 티모시나 미치온이 아니고?”
 “응,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할게.”
 “알았다.”
 말을 하는 사라의 얼굴에서 뭔가 사건이 있었다는 걸 눈치 챈 무크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가렌을 향해 말했다.
 “날짜는 오늘, 장소는 이곳, 시각은 지금, 대리 출전은 없다.”
 “뭐라고!”
 “왜, 문제 있나?”
 “무크 오빠!”
 “하하, 걱정 마라. 심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후… 알았어. 오빠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라로선 무크 오빠가 수련 기사 가렌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부러 결투를 유도했다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잠깐, 지금 여기서 결투를 한다고 했나? 그대와 내가 결투를 하게 되면 이 가게가 엉망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한 것이냐?”
 “그대는 기사, 나는 용병, 용병은 유리한 고지를 놓치지 않지. 그대가 사라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이 가게를 망가뜨리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건 곧 그대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 반면 가게를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면 사라에 대한 그대의 마음은 거짓이란 증거이겠고 말야.”
 “음…….”
 가렌은 무크의 말에 침음성을 흘리며 내심 고민에 휩싸였다. 상대의 말을 바꾸어 생각하면 사라의 가게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사라의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마치 당연히 무크란 자가 이길 것이라는 태도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눈앞 무크란 사내는 평범한 용병이었다. 용병 복장을 한 마법사 같지도 않았다. 또한 비슷한 또래의 수련 기사 중에서도 강하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한낱 용병보다 못할 것이라 여기고 싶지도 않았다. 일전에 B급 용병과 겨뤄 이겼던 경험이 있어 더욱 그랬다.
 고민을 털어 낸 가렌은 사라를 향해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사라, 그대가 오빠라고 한 무크비얀과 이곳에서 결투를 해도 될까요? 만약 가게의 물건이 손상된다면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가렌 님이시니 조언 한마디 할게요. 최선을 다하세요.”
 “하하, 기사는 결투에 임하면 언제나 최선을 다합니다. 걱정을 해 주어 감사합니다. 그럼.”
 저벅저벅!
 가렌은 사라의 동의를 얻자 무크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가게의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가렌의 움직임을 무크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지켜봤다.
 스릉!
 야외라면 10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지만 가게 안이라 약 5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행동반경이 좁아진 상태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가렌은 바스터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나중에 정식 기사가 된 후 자신만의 소드를 제작할 계획이지만, 수습 기사 시절부터 사용해 온 바스터드 소드이기에 가렌의 손아귀에 착 달라붙으며 가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지만, 아니 지금도 모르겠지만 사라의 조언을 받아들여 최선을 다하겠다.”
 스윽, 탁!
 ‘아리안 소드 수련식, 역시 헤브리아 제국 출신이군. 헤브리아 근위 기사단은 물론이고 각 영지의 기사단의 기본 수련 검식이기도 한.’
 가렌이란 청년의 자세에서 무크는 상대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국이나 제국의 기본 소드식은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씩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소드의 위치였다.
 “소드를 뽑아라.”
 “건!”
 탕-!
 휙, 파팍!
 “웃, 이런!”
 무크는 가렌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말을 하느라 생긴 호흡 불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애초부터 무크는 소드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중원 무림에선 독사파에게 가르쳐 주었고, 여기선 맨 처음 인연을 맺은 아홉의 소년 소녀에게 파르게 수련식이란 이름으로 가르쳐 준 팔괘권을 사용 가렌을 공격한 것이다.
 타탁!
 “태!”
 가렌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제대로 소드를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하지만 가게 안은 좁았다.
 턱-!
 사락, 퍽!
 “컥!”
 쿵, 쿠당탕!
 결국 가렌은 무크의 주먹에 정확하게 복부를 격타당하며 벽에 부딪친 후 바닥에 나뒹구는 수모를 당했다.
 
 ***
 
 무림의 유수한 문파들은 자파의 인재들에게 어린 시절 익히도록 하는 권법들이 존재했다. 소림의 나한권과 무당의 태극권이 대표적이었고, 그와 비교해 못하지 않는 권법들 중엔 팔괘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권법 자체에 동공의 묘용이 포함되어 있어 제대로 된 형과 구결을 익혀 꾸준히 수련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한 권법이기에 제대로만 익힌다면 범재라도 10년 수련에 이류에 입문할 수 있었다. 소림이나 무당에선 오로지 나한권과 태극권만을 평생 수련해 말년에 절정을 넘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도 했으니 팔괘권도 제대로만 익힌다면 삼류 무공이라 무시할 수는 없는 무공인 것이다.
 그런 무공을 무의 극에 달한 무크가 시전했으니 형이면 형, 구결이면 구결 완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팔괘권을 이류에도 들지 못한 가렌이 막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파르게 수련식! 저게 진짜 파르게 수련식이구나. 하만도 가렌 님에겐 상대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런 가렌 님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패배시키다니.”
 벌떡!
 “이, 비겁하게 기습을!”
 상대가 소드를 뽑기를 기다리다 갑자기 파고든 공격에 미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가렌은 말 그대로 볼썽사나운 모습을 사라 앞에서 보이게 되자 황급히 일어서며 소리쳤다. 가렌의 얼굴은 창피함에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상대의 공격을 마지막 순간에 최대한 몸을 틀어 충격을 완화시켰기에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자존심엔 엄청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치욕이었다. 하나 이어진 무크의 언급에 가렌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난, 용병. 용병은 승부에 있어서 유리한 상황을 놓치지 않지. 난 기사가 아니거든. 그리고 진짜 기사라면 그 정도의 기습에 당하지도 않겠지만 말야.”
 “후, 좋아. 내 실수를 인정하지. 하지만 아직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 하압!”
 타탁!
 가렌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아리안 소드 수련식을 사용하여 무크의 전신을 소드의 공격권 안에 넣기 위해 접근했다. 아리안 소드 수련식의 시작이랄 수 있는 기본자세로 다리만을 움직인 가렌은 소드의 영역 안에 상대가 들어오자 기합과 함께 소드를 움직였다.
 “차앗!”
 바로 그때, 가렌의 소드가 무크를 향해 휘둘러지려는 그 순간, 가만히 서서 가렌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무크가 자연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터진 고함은…….
 “건!”
 텅-!
 퍽-!
 “컥!”
 쿠당탕!
 가렌은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무크의 공격에 당한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완전한 아리안 소드 수련식을 시전했다고 여겼지만 이미 다리가 풀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과도한 힘을 온몸에 실었으니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할 소드와 손목, 어깨의 연계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런 상황을 가렌에 비하여 몇 단계 위에 있는 무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든 무크의 진각에 이은 일 권이 재차 가렌의 복부를 정확하게 가격해 버린 것이다.
 “크윽, 이럴 수가. 어떻게 그 자세가 공격 수단이 될 수가 있지? 그건 사라와 형제들이 매일 아침마다 하는 체력 단련술의 한 동작일 뿐인데.”
 “그걸 설명할 이유는 없지. 자, 더 할 텐가?”
 “하, 졌다. 완벽하게 졌다. 피스트를 수련한 자들을 만나면 접근 전을 하지 말라던 기사들의 충고를 이제야 깨닫다니.”
 “승부는 찰나이지. 만약 내가 적이었다면 그대는 죽었다.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위에 있으면서도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예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원래라면 그저 말없이 돌아섰을 테지만 사라가 마음에 둔 것 같아 충고를 해 주고 있는 무크였다.
 “끄응, 제대로 맞았군. 이거 혹시… 마나가 사용된 건가?”
 “글쎄? 사용됐다 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았다 할 수도 있지.”
 “그게 무…….”
 “그만. 더 이상의 대화는 사절이다. 5년 만에 만난 동생과 회포를 나누어야 할 시간이거든.”
 “5년 만에… 알았소. 다시 오겠소. 사라, 내일 봐요.”
 “가렌 님, 미안해요.”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미안하지요. 그리고 오늘 사라의 오빠 덕분에 참으로 유익한 경험을 했습니다.”
 가렌은 조금은 허무한 목소리로 사라의 사과에 대꾸하곤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가게를 나섰다. 사라에게 쏟았던 그동안의 정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귀족으로서 나중을 위해 자신만의 힘이 필요했고, 그런 목적으로 접근했지만 어느새 사라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투에서 사라의 오빠인 무크가 자신의 목적을 눈치 챘다는 것을 느낀 상황에서의 패배라 가렌의 마음은 찹찹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두 번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상대의 실력이 한 수 위라는 걸.
 이젠 함부로 사라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어졌다는 의미였다.
 ‘무크, 무크비얀이라……. 심상치 않은 인물인 건 틀림없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벌써 기사 급의 실력이라니.’
 가렌이 알고 있는 한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기사는 없었다. 수련 기사가 2년간의 수련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고 해서 바로 기사로 인정받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되기 위해선 기사의 증표를 보여야 했다. 몸 안에서 느낀 마나를 소드에 주입해 소드의 날카로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계, 비로소 소드로 마나를 다룰 수 있다 하여 소드 마나 유저라 명명되는 단계에 입문해야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남들보다 빠른 진전을 보인 가렌도 소드 마나 유저에 입문하기 위해선 아무리 빨라도 3년은 더 수련해야 함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자신할 수 없었지만.
 
 ***
 
 “어떻게 된 거지?”
 “그게.”
 잘 손질된 가죽들이 진열된 매장과 달리 안쪽 작업실엔 대충 손질된 가죽들이 널려 있었다. 사냥꾼들이 사냥한 몬스터들의 가죽을 깨끗하게 작업한 후에 팔긴 하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터라 다시 손볼 필요가 있어 따로 분류해 둔 상태였다.
 그런 작업실의 한쪽 구석에 조그만 탁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탁자에서 무크와 사라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민트허브티가 놓여 있어 은은한 허브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무크 오빠가 떠나고 난 후 우린 정말 열심히 살았어. 매일 아침 함께 모여 오빠가 가르쳐 준 파르게 수련식을 연습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저녁에 다시 파르게 수련식으로 마무리하면서, 그렇게 2년 정도가 흘렀을 때 우리 모두의 삶에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 일어났어.”
 무크는 가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사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안나, 안나의 미모가 문제였어. 귀엽긴 했지만 통통한 몸매에 키도 작았던 안나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지더니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 거야. 게다가 아침저녁으로 매일 하는 파르게 수련식 덕분에 안나의 몸매 역시 환상적이었고.”
 “안나가 일했던 곳이 나그네의 쉼터란 여관이었지, 아마?”
 사라의 이야기처럼 안나가 미녀로 성장했다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것도 거친 사냥꾼들이 많은 이곳에선.
 “응, 나그네의 쉼터가 맞아. 바로 그 여관에 마법사와 함께 투숙한 용병들이 안나의 미모에 혹해 안나를 귀찮게 한 게 사건의 시작이었어. 오빠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미치온 오빠가 안나를 무척 아꼈다는 걸.”
 “기억하지.”
 “용병 중의 한 명이 안나에게 치근대는 걸 안나를 데리러 왔던 미치온 오빠가 보게 된 거야. 화가 난 미치온 오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용병을 향해 돌진했어, 오빠가 가르쳐 준 파르게 수련식을 꾸준히 한 덕분에 생긴 웬만한 어른보다 강하다는 자신감에다 안나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지자 다른 생각을 못했던 거지.”
 “죽은 거냐?”
 무크는 결과가 눈에 그려졌다. 사라의 이야기에 마법사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그 용병들은 마법사의 가디언으로 고용된 자들이었다. 즉 최하 C급 상위 용병인 것이다.
 평범한 재질의 미치온이 그것도 실질적인 구결이 빠진 팔괘권, 즉 파르게 수련식만으론 성과를 보기 힘들었다.
 그저 육체의 힘을 강하게 하고 반사 신경을 약간 예민하게 하는 수준일 뿐, 그 정도론 용병으로 닳고 닳은 자를 이길 순 없었다.
 “아니, 죽진 않았어. 그 용병의 검이 미치온을 죽이려 할 때 2층에서 내려온 마법사가 말렸거든, 하지만 그 전에 당한 오른팔이 잘린 부상으로 죽어 가고 있었어.”
 “오른팔?”
 무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인에게 있어서, 아니 일반인이라도 팔 하나가 없다는 건 육체적인 상처만이 아닌 마음까지도 불구로 만들 수 있었다.
 “응, 그래도 그 마법사가 응급조치를 해 줘서 살긴 했는데, 그 이후 미치온 오빠가 많이 변했어.”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그럼 티모시는 어떻게 된 거지?”
 사라는 무크 오빠가 떠나 있었던 지난 5년 동안의 일들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팔 하나를 잃으며 안나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마법사에게 빼앗긴 안나로 인해 변해 버린 미치온 오빠의 이야기부터, 2년 전에 말없이 사라진 티모시 오빠, 영주의 성에서 병사로 근무하고 있는 알반과 테리안, 몬스터 사냥꾼들의 길잡이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미치온 오빠와 테리우스, 길잡이 겸 사냥꾼인 하만 그리고 사냥꾼들이 판 가죽을 손질해 상인들에게 넘기는 프레드 오빠와 사라 자신에 대한 내용을 하나씩 풀어 갔다.
 무크는 사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답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말 몇 마디, 글 한 조각 배운 채 이 세상을 알고자 떠날 땐 느끼지 못했지만, 용병으로 떠돌며 알게 된 이 세계의 문화는 연고지 없는 고아들이 자리 잡고 뭔가를 하기엔 그 벽이 너무 높았다. 중원에서도 고아들이 자립하고 성공을 하기가 쉬운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었는데 이곳은 그 문이 너무 좁았던 것이다.
 무크가 떠날 때 비록 평범한 자질이었지만 파르게 수련식을 꾸준히 수련한다면 몸은 물론이고 정신 역시 활성화되기에 미치온이나 티모시라면 충분히 두각을 나타내리라 조금은 기대하기도 했었다.
 한데 기대했던 둘은 행방불명에 외팔이가 되어 버렸고, 나머진 그저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무크 입장에선 어이없기까지 했다.
 “문화의 차이인가… 중원 무림이었다면 어디 뒷골목의 대장이나 조그만 표국의 표사가 되어 있을 실력은 될 텐데.”
 무크가 사라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떠나간 안나와 티모시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과 모이게 된 건 3일이 지난 뒤였다.
 그사이 무크는 5년간의 용병 생활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냥꾼 마을의 외곽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은 5년 전 무크가 아홉의 소년 소녀들과 함께 임시로 생활을 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과거엔 바로 마을에 들어갈 형편이 되지 못해 무단으로 머물렀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역적으로 버트란 자작 영지에 포함되어 있어 혹시라도 제재를 가하면 곤란하기에 아예 영주성의 관리를 찾아가 구입해 버린 것이다.
 이곳도 중원 무림과 같이 모든 땅은 왕의 소유이기에 구입했다. 실질적으로 임대나 다름없지만 왕국이 망하거나 반역을 하지 않는 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무크가 구입한 땅은 과거 머물렀던 개울가를 중심으로 약 1만 그로투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무크가 계획하고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장소로 활용될 곳이기도 했다.
 
 ***
 
 조그만 시냇가에 접해 지어진 급조한 티가 나는 통나무집에 여덟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그중 일곱은 자신들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랄 수 있는 무크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그들은 욕심을 모르는 단순한 청년들이었다. 아니 이 세계의 평민들 대다수가 그러했다.
 “모두들 훌륭하게 성장한 것 같아 다행이다. 미치온도 사라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고.”
 “하하, 이게 전부 무크 네 덕분이지. 네가 가르쳐 준 파르게 수련식이 아니었다면 허약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미치온의 이야기에 나머지 여섯 역시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파르게 수련식이 그저 몸을 튼튼하게 만드는 정도의 어설픈 수련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무크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무크 형,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야?”
 “당분간은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한데 하만, 너 소드를 익힌 거냐?”
 “응, 미치온 형이 당한 이후 티모시 형하고 연습했어. 미치온 형이 오른팔을 잃고, 안나를 어쩔 수 없이 마법사에게 보내야 했을 때 실감했거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우리가 파르게 수련식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였어. 내가 안나에게 치근대는 용병과 붙었을 때 처음엔 거의 대등하게 싸웠거든. 용병이 소드를 뽑아 사용하자 바로 팔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무크는 하만과 미치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머지 형제들의 표정 역시 살폈다. 그리고 이들이 뭔가 목표를 정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그때부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희들이 원한 만큼 힘을 얻었어?”
 “휴우, 그게 쉽지 않았어. 안면을 익힌 용병들이 소드 수련하는 법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으니까. 아니 없을 수밖에 없었지, 용병이 가르쳐 준 거라곤 그저 소드를 쉽게 휘두르는 것뿐이었으니까. 그 정도론 어디 가서 칼 맞아 죽기 딱 좋은 수준이었고. 그래서 생각한 게 돈이었어. 돈이 있다면 실력 있는 용병을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으니까.”
 “그 결과가 몬스터 사냥꾼들을 위한 길잡이와 가죽 상점이구나.”
 “응, 다행히 프레드가 장사에 소질이 있어서 일을 빨리 배운 데다 파르게 수련식 덕분에 길잡이 일에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
 “녀석들!”
 무크는 같이 자리한 일곱의 형제(실제 살아온 세월을 따진다면 거의 증손자뻘이지만 이왕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로 한 이상 형제로 여기고 있었다.)들을 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들의 재질은 평범, 그 자체였다. 즉 고급 무공을 가르쳐 봐야 평생 이류, 이쪽 세상에서 말하는 소드 마나 필러를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파르게 수련식을 시작한 나이도 너무 많았고 결정적으로 무크가 이들과 같이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만약 계속 같이 있었다면 소드 마나 유저에 입문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평범한 자질이라도 스승에 따라 성취가 달라지기에…….
 물론 소드 마나 필러만 해도 B급 용병에 해당하기에 용병계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대우받을 순 있었다. 하지만 무크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크는 이 세계에서 첫 인연인 형제들을 위해 한 가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중원 무림의 절대자였던 천마의 형제가 어디 가서 대항도 못 해 보고 당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소드 마나 필러에 입문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기초는 충분했다. 파르게 수련식(팔괘권)을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해 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각각의 초식에 따른 동작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 않아 동공으로서의 효과를 얻진 못했지만 신체 조건만은 충분했다.
 나한권이나 태극권, 팔괘권 같은 권법이면서 동공인 무공을 수련하여 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동작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숙지하는 게 중요했다. 즉, 각 동작은 근골을 단련시키고 혈맥을 확장시키는 역할과 함께 몸 안의 기운이 이동하기 쉽게 하는 역할 역시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그런 이치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크가 형제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건 언어 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게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극히 부실한 육체의 상태였다.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마나의 수련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손해이기 때문이다.
 마교도 그렇지만 중원 무림의 유수한 대문파들의 수련 과정엔 반드시 육체의 단련이 포함되어 있고, 보통 10세 이전엔 내가토납법 같은 기초 호흡법을 가르치다가 본격적인 내공 수련은 그 후에 이루어지는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입증된 가장 효과적이면서 안정적인 무공 수련 과정이기 때문이다.
 육체 수련을 등한시하는 사파에서 절정 이상의 고수가 나타나기 힘든 이유이기도 했다.
 
 미치온은 무크가 돌아온 이후 몬스터 사냥꾼들을 위한 길잡이 일을 중단했다. 테리우스와 하만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무크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그것이 어느 정도 숙련되기 전까진 일을 쉬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치온이나 테리우스, 하만 등은 무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7년 전 어린 시절에 목격했던 무크의 실력은 지금 생각해도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데, 7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더 강해졌을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 무크가 가르쳐 주는 것이 평범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던 시절에 배웠던 파르게 수련식만으로도 웬만한 건달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미치온 자신과 형제들이 바로 그 증거였다.
 미치온 등이 가장 먼저 배운 건 지난 6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 왔던 파르게 수련식에 대한 것이다.
 과거엔 설명할 길이 없어 동작만을 가르쳐 주었다며 진짜 파르게 수련식을 동작 하나하나와 함께 설명하는데 미치온은 그 설명을 열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치온은 낙담하지 않았다. 당장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암기한 후 파르게 수련식을 행할 때마다 그 의미를 되새긴다면 언젠간 전부 이해할 수 있다는 무크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64개의 동작을 연결해 반복하던 것이 각각 8개의 동작을 한 묶음으로 8개의 수련식으로 나누어지고, 그 각각의 수련식마다 고유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상태였다.
 처음 여덟 동작은 건형이라 하여 육체를 강건하게 만드는 데 의미가 있고, 다음 여덟 동작은 태형이라 하여 육체를 강하게 단련함으로써 경직된 근육을 부드럽게 하는 데 의미를 둔다.
 이형 여덟 동작은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그에 더해 근육의 탄력을 신장시키고, 진형 여덟 동작은 건형, 태형, 이형에 의한 단련으로 긴장한 근육을 안정시키며 수련으로 인해 촉발되었던 혈의 흐름을 가라앉히는 데 의미가 있다.
 여기까지는 전4형이라 하여 미치온 등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하나 전4형이 육체의 단련만이 아니라 몸 안에 마나를 받아들이는 역할까지 한다는 무크의 설명에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나, 마법사나 기사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마나를 한낱 몇 가지 동작에 불과한 파르게 수련식으로 몸 안에 받아들인다고 하니 미치온 등이 선뜻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후4형은 전4형에서 받아들인 마나를 육체에 적응시켜 저장하고 거기에 더해 활용하는 동작이라고 하니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치온과 나머지 형제들은 그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사실이 아니어도 무크가 가르쳐 준 그대로만 하면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르게 수련식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완벽하게 암기한 이후 미치온이 배운 건 기사들의 전유물이라고 알려진 스텝이었다. 용병들 중에도 스텝을 익힌 이가 있다곤 하지만 대부분 하급이거나 흉내나 내는 정도일 뿐인 그 스텝을 무크가 가르쳐 준 것이다.
 물론 미치온이 보기에도 무크가 가르쳐 준 써드 스텝(삼재보)은 아주 간단해 하급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치온은 써드 스텝을 연습하면 할수록 그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정말 간단한 세 가지의 걷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걷는 법이 적을 앞에 두었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장난이 아니었다. 한 걸음만에 적의 사각을 파고들기도 하고, 때론 적을 끌어들여 허점을 유도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미치온이 써드 스텝을 익히며 생각한 것은 과거 자신의 오른팔을 잃게 만들었던 용병과 대결할 때 이 써드 스텝을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적어도 그리 허망하게 오른팔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고, 잘하면 이길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기사란 존재들이 용병들 위에 군림하는 이유가 단지 마나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만이 아님을 깨달은 미치온이었다. 정말 간단해 보이는 써드 스텝 하나만으로도 이전에 비해 배는 강해졌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무크는 형제들이 익히기 시작한 써드 스텝의 숙련을 위해 통나무집 옆 한구석에 간단한 장치를 만들었는데 천마수련관 전8관의 장치 중 몇 가지를 응용한 것들이었다. 약 20그로의 길이의 조성된 장치는 한번 발동되면 약 2분간 이어졌는데 그곳을 써드 스텝만으로 전부 피하며 통과하는 수련 장치였다.
 그 수련 장치에 가장 빨리 적응한 건 역시 미치온이었다. 팔 하나가 없어 무력 면에선 하만에게 부족할지 몰라도 기본적인 재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열정 또한 강했고, 물론 완벽하게 통과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영주성의 병사로 근무하고 있는 알반과 테리안의 경우는 쉬는 날 외에는 함께하지 못해 뒤처지긴 했지만 근무지에서 틈틈이 수련해 그 차이는 미미했다.
 무크는 써드 스텝으로 수련 장치를 무난하게 통과한 순서대로 각자에게 어울리는 무기와 그에 대한 수련법을 가르쳐 줄 계획이었다. 진기도인법으로 간단한 내공심법을 전할까도 했지만 역시 그건 무리라 판단하고 과거 무림에서 인연을 맺었던 독사파의 동생들처럼 길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했다.
 쉽게 얻은 건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건달 세계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겪으며 성장했던 독사파와 비교할 때 이 여린 동생들은 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저 위급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할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무크였다.
 
 ***
 
 용병 생활을 끝내고 버트란 영지에 돌아온 무크에게 미치온 등이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을 열심히 배워 익히고 있을 무렵, 이스 대륙의 패자인 헤브리아 제국의 한 영지에서 무크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영주님, 티모시가 이야기했던 무크비얀이란 자가 돌아왔다는 보고가 당도했습니다.”
 “티모시? 아, 그 특이한 신체 단련 체조를 행하던 경비병!”
 “그렇습니다. 당시 티모시가 행하던 파르게 수련식에 관심을 표명하셨고, 그때 지시하신 대로 티모시를 예비 기사 수련생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트레이스 왕국의 버트란 영지에 정보원을 파견했었습니다.”
 “그래 기억나는군. 자네가 말한 대로 뭔가 의미가 담긴 수련식이었지, 그게 한 1년 전인가?”
 “정확히 1년 8개월 전입니다. 그리고 티모시는 그 짧은 기간에 예비 기사 수련생 중 수위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고, 적어도 2, 3년 안에 소드 마나 필러에 입문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사실입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티모시란 자는 소드를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것도 용병들에게 어설프게 배운… 한데 그 짧은 시간에 어린 시절부터 소드를 수련해 온 다른 수련생들을 능가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티모시가 소드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티모시의 소드에 대한 재능은 평범합니다. 따라서 순수한 소드 실력만을 놓고 봤을 때는 여타 예비 수련 기사들보다 오히려 떨어집니다. 하나 다른 부분, 즉 육체의 유연성, 탄력 그리고 순발력이 상당히 뛰어납니다.”
 “역시 그 파르게 수련식은 평범한 게 아니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티모시에게 파르게 수련식을 가르쳐 준 무크비얀이란 자가 고향에 나타났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자네 생각에 그가 나 모리아테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모리아테스 후작은 영지 기사단장 슈로크를 향해 직접적으로 물었다. 무력만이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슈로크라면 이미 결론을 내렸을 터 괜히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무크비얀이란 자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닙니다.”
 “호,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모리아테스 후작은 예상외의 대답에 눈빛을 빛내며 슈로크를 향해 이유를 물었다. 슈로크의 입에서 나올 성질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 티모시에게 얻은 정보와 버트란 영지의 정보원이 이번에 보내온 정보 그리고 무크란 이름으로 용병 생활을 했다는 사실에서 용병 길드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종합해 볼 때 무크비얀이란 자는 마스터로 분석되었습니다.”
 “뭐라고, 마스터? 내가 비록 그동안 황도의 일로 정신이 없어 티모시의 일을 잊고 있었다 하나 기억을 떠올린 이상 당시에 그와 나눴던 대화 역시 기억한다. 분명 티모시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였다고 했다. 그럼 많아 봐야 이십대 중반이란 말인데 그 나이에 마스터란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모리아테스 후작은 슈로크가 근거 없이 말하진 않았겠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후작님, 소드 마나 유저 상급인 후작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알려진 마스터의 경지가 실제론 소드 오러 유저에 불과하다는 걸, 다만 너무 오랜 세월 소드 블레이드를 발현시킨 마스터가 나오지 않아 언제부터인가 소드 오러 유저를 마스터로 부르기 시작했음을.”
 “설마, 슈로크 자네가 언급한 마스터가 육체가 재구성되면서 소드 블레이드를 발현시킬 수 있는 진 마스터를 말한 것인가?”
 모리아테스 후작은 혹시나 하고 재차 물었다. 그냥 마스터라도 놀라운 일인데 진 마스터라면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후작님. 전 대륙을 통틀어 우리 제국에 두 분, 코른 제국에 한 명, 포린 제국에 한 명이 진 마스터로 확인된 상황에서 새로운 진 마스터가 출현한 것입니다. 제가 무크비얀이란 자를 진 마스터로 여긴 이유는…….”
 모리아테스 후작은 기사단장 슈로크가 분석한 내용을 듣자 그의 주장처럼 무크비얀이란 인물이 진 마스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슈로크, 제국의 자랑인 스티폰 한 샴 대공님이나 코벤텔 공작님의 경우 진 마스터에 오른 후 30대의 청년의 모습으로 변하신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10년, 1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시고, 무크비얀이란 자처럼 어린 모습에서 다시 성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나를 상실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의문이십니다. 그 의문에 대해선 과거 코벤텔 공작님이 저와 같은 소드 오러 유저들, 세칭 마스터들을 모아 놓고 하셨던 말씀이 있는데 그걸 들으시면 해소될 것입니다.”
 슈로크의 입에서 코벤텔 공작이 대외적으로 마스터라 알려진 소드 오러 유저들에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함께 귀를 기울였다.
 한때 촉망받는 소드 마나 유저였던 자신이었고 이제 소드 오러 유저를 눈앞에 둔 상태였다. 비록 중앙 정치와 영지의 일로 수련 시간이 부족해 진전이 없었지만 조만간 시작될 2차 정복 전쟁이라면 부족한 수련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코벤텔 공작이 해 주었다는 이야긴 진 마스터가 되는 과정 시 나타나는 현상과 그때 취해야 할 주의 사항에 대한 것이었다.
 마나 수련식과 함께 소드 수련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체내에 쌓인 마나가 격렬하게 움직일 때가 온다. 그때 절대로 격렬하게 움직이는 마나를 제어하려 해선 안 된다. 그저 마나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만 해라.
 그러면 마나는 스스로 갈 길을 찾아 육체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그 영향으로 육체의 재구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체내에 쌓인 마나를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마나 스스로 자신의 그릇을 키우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육체의 재구성 정도는 체내에 쌓인 마나의 양과 소드에 대한 깨달음에 따라 달라진다.
 즉, 체내의 마나가 육체의 재구성에 사용되고, 그 효율은 소드에 대한 깨달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소유했던 마나는 육체의 재구성이 완료되면 거의 사라진다.
 그렇다고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새롭게 바뀐 육체는 마나에 대한 엄청난 친화력을 발휘하여 재구성이 끝나는 순간부터 빠르게 마나를 흡수하니까.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이내에 이전의 마나를 회복할 수 있고, 재구성된 육체에 충만할 정도로 마나를 쌓는 데는 1년이면 가능하다.
 그때에야 비로소 소드 블레이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진짜 마스터가 되었다 할 수 있다.
 명심할 것은 격렬하게 움직이는 마나를 제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주변에 신뢰할 수 있는 수하에게 미리 당부하여 깨달음의 기회가 왔을 때 보호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제어에 성공한다면 육체의 재구성이 없이도 진 마스터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실패하거나 깨달음의 상황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 이해가 되는군. 한낱 노예 상인에게 납치된 점이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었던 것까지… 진 마스터란 경지를 나 같은 하수가 모두 알 수는 없겠지. 슈로크, 무크비얀이란 자가 진 마스터라 가정할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모리아테스 후작은 일단 슈로크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리고 진 마스터라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까지 바라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휘하에 둔다는 건 후작에 불과한 자신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타국에서 마스터로 대우받을 수 있는 슈로크만 해도 후작에겐 감지덕지였다. 만일 슈로크가 어린 시절부터 영지의 기사단에서 자신과 함께 수련하며 정을 쌓지 않았다면 떠나도 벌써 떠났을 터였다.
 또한 무크비얀이란 자가 어려 보인다고 수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외모로 볼 땐 20대이지만 실제론 60대 이상일 건 당연하니 어설픈 수작은 통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모른척 하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그에 슈로크를 향해 인연의 끈을 연결할 방법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트레이스 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이때에 적국의 영토에 사는 진 마스터와의 인연은 어찌 보면 이적 행위일 수도 있지만, 무크비얀이란 자가 트레이스 왕국과 인연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와 인연 끈을 맺어 두어야 합니다. 어쩌면 한 번쯤 부딪칠 수도 있지만 삶이란 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후작님껜 티모시란 아주 적당한 대상이 있습니다.”
 “티모시라… 그가 티모시를 믿을까?”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반드시 보내야 합니다. 정보원이 보내온 내용에 따르면 그가 티모시의 형제들에게 새로운 뭔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까요.”
 “호, 진 마스터가 뭔가를 가르친다? 그럼 슈로크 자네는 티모시로 하여금 그것들을 배우게 하자는 건가?”
 “티모시만 보내선 안 되지요. 우리에게도 티모시는 후작님의 사람이라 할 수는 없으니… 제 계획은 가신이나 기사들의 자식 중에서 10∼13세 사이의 소년들 다섯 정도를 같이 보내는 것입니다. 티모시가 거둬들인 고아로 말입니다.”
 “어차피 15세 이전엔 기본기에 충실해야 하니, 가르치는 것이 별게 아니라 해도 파르게 수련식만으로도 손해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무크비얀이란 자가 경계를 한다 해도 이미 알고 연습하는 파르게 수련식을 못 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 시행하게.”
 “알겠습니다.”
 
 ***
 
 한편, 무크가 생활하고 있는 사냥꾼 마을이 속해 있는 버트란 영지의 영주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발단은 성의 경비병으로 근무하고 있는 알반과 테리안이었다.
 쉬는 날마다 무크의 통나무집으로 직행하여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을 수련하고, 근무 중에도 틈이 날 때마다 연습하니 실력의 상승은 당연했고 그런 현상을 영지의 기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트레이스 왕국은 인트 왕국 그리고 웨스 대륙의 다린 왕국과 함께 3대 상업 국가이면서 또한 북쪽으로 테리바운드 산맥이라는 몬스터들의 산지가 있어 무력도 각 대륙의 제국들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편이었다.
 게다가 버트란 자작 영지는 테리바운드 산맥 건너의 몬스터의 대지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라 전통적으로 기사단의 수준이 아주 높았다. 왕궁 기사단에 버금가는 강한 기사단을 수하 귀족들이 보유하는 걸 견제하는 게 왕과 중앙 귀족들의 심리이지만 오직 버트란 영지만은 예외였다.
 이유는 몬스터의 대지에 용건이 있는 수많은 사냥꾼들과 자유, 수련 기사, 마법사들이 왕래하는 곳이라 자칫 잘못하다간 영지가 왕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작 영지로 그 면적이 그리 넓진 않지만 버트란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왕국 1년 수입의 10퍼센트에 가까우니 상업 국가인 트레이스 왕국이 투자를 하는 건 당연했다.
 중요성을 인식한 왕국에선 전통적으로 버트란 영지의 기사단장은 왕궁 근위 기사단 출신을 파견, 임명했으며, 실력 역시 항상 소드 마나 유저 중급 이상이었다. 거기에 그를 보좌할 두 명의 기사를 함께 보냈는데, 그 둘이 영지 자체의 기사들과 함께 영지의 치안을 감독하고 예비 기사 수련생들과 병사들의 훈련까지 담당하는 것이다.
 원래 영지의 일에 대해서 왕궁에서 관여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지만 버트란 영지의 중요성은 그 관례를 무력화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일반 행정 분야까지도 관여하는 게 아닌 기사단과 병사들 즉 군사에 대한 것만을 간섭하는 것이라 버트란 자작에게 그리 큰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번거로운 치안을 떠넘길 수 있어 책임이 가벼워진 셈이었다. 사실 영지의 수입은 충분했고, 그 돈으로 별도의 기사단을 키워 호위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중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버트란 영지의 경비병인 알반과 테리안이 근위 기사단 출신의 기사에게 훈련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일반 경비병 같지 않은 힘과 정확성, 안정된 자세와 뛰어난 순발력을 보여주는 알반과 테리안을 오랜 수련을 쌓은 기사가 모르고 지나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경비병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기사가 취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직접 물어보는 것과 동태를 살피는 것. 기사는 우선 은밀히 알반과 테리안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고, 그 와중에 특이한 체조(언뜻 보면 미리언 대륙인들이 한다는 피스트 수련식 같기도 했지만 그와 달리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격렬한 동작이 없어 기사는 체조로 여긴 상태였다.)를 아침저녁으로 연습한다는 것과 쉬는 날이면 영지의 최외곽 마을이면서 영지의 가장 중요한 곳인 사냥꾼 마을에 갔다 온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기사는 직속상관인 기사단장에게 간단히 보고를 한 후 알반과 테리안이 쉬는 날 그들을 뒤따랐고, 거기서 상당히 인상 깊은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울, 자네의 말은 새로운 스텝이 등장했다는 것이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보고 드린 특이한 체조도 파르게 수련식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수련식이란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육체를 단련하는 체조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울은 부동자세로 직속상관인 존경하는 프로테인 기사단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소드 마나 유저 하급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과 달리, 소드 마나 유저 상급의 경지에 도달한 프로테인 기사단장은 격이 달랐다. 기사단장의 나이 현재 43세이니 적어도 10년 이내에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지도 모르는 소드의 기재였다.
 “흠…….”
 톡, 톡, 톡!
 하울은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프로테인 기사단장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검지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는 행위가 단장이 뭔가를 고민할 때 하는 습관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장실에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 지 5분여가 흘렀을 무렵 마침내 프로테인 기사단장의 입이 열렸다.
 “준비해, 직접 가서 확인하겠다. 그 경비병들도 동행한다. 출발 시간은 30분 후다.”
 “옛, 단장님!”
 하울은 짧으면서도 박력 있는 목소리로 복창하고 즉시 기사단장실을 나섰다. 30분이란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프로테인 기사단장의 성격을 알고 있어 미리 알반과 테리안을 대기시켜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뻔한 하울이었다. 아마 자신이 미리 준비해 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30분이란 짧은 시간을 언급했을 터였다.
 확인되지 않고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보고를 하지 않는 자신이 마음에 든다며, 여타 기사들에 비해 소드 실력이 부족함에도 하울을 직접 선택해 이곳 버트란 영지에 데리고 온 기사단장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신뢰를 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
 
 “무엇하는 것이냐, 어서 나서지 못할까!”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간간이 무크의 형제들이 수련하는 소리만이 전부였던 통나무집 앞 공터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두 무리였는데 하나는 영지의 기사단장인 프로테인과 기사, 병사들로 통나무집 전면에 포진해 있었고, 나머진 이곳 사냥꾼 마을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정규 기사들과 병사들이 나타난 이유가 궁금해 모여든 마을의 사냥꾼들이었다.
 외곽에 모여든 사냥꾼들은 몬스터의 대지를 드나들 정도로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이들이라 그들의 얼굴엔 기사들에 대한 두려움보단 진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마을과 약간 떨어진 한적한 외곽지에 지어진 통나무집과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된 이상한 장치들이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급 용병, 수련 기사와 자유 기사, 자유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숨을 죽인 채 선두에 위치한 기사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무크의 오두막엔 지금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기사가 아무리 떠들어 봐야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지난 1년간의 집중적인 수련으로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이 어느 정도 숙달이 되자 형제들 각자가 다시 생활 전선으로 돌아갔고, 무크 역시 형제들이 없는 낮 동안엔 테리바운드 산맥으로 들어가 별도의 준비와 함께 천마심공을 수련, 내공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크는 현재 용병 생활 중에 세운 계획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반, 테리안, 설마 너희들이 정보를 누출시킨 거냐?”
 “아닙니다, 하울 기사님. 그럴 시간도 없었지만 우리를 피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마 모두 일을 하러 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곧 날이 어두워질 테니 슬슬 돌아오겠군. 만약 거짓이라면 너희들의 목숨은 없다. 알겠나?”
 흠칫.
 “아, 알겠습니다.”
 알반은 그러지 않아도 기사 하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고함을 치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그때. 알반과 테리안을 압박감에서 구해 주는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감히 나 무크비얀의 동생을 핍박하는가!”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음성을 들은 자 중 소드 마나 유저에 해당하는 이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음성에 마나가 실려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렸음에도 말한 자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30그로 이상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큰형!”
 무크의 등장에 알반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곁에 가고 싶었으나 알반과 테리안의 주변엔 다른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대가 무크비얀이란 자인가?”
 “그렇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날 납득시키길 바란다. 만일 아무런 이유 없이 내 동생들을 핍박해 나의 보금자리를 침입한 것이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뭣이! 감히 평민이…….”
 “하울!”
 “옛!”
 “나서지 마라. 네 상대가 아니다.”
 “옛!”
 하울은 단장의 제지와 이어지는 말에 내심 승복할 수 없었다. 하나 일단 지시가 떨어진 이상 물러났다.
 프로테인은 무크비얀이란 자가 등장한 순간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이야기하는 건 소드 마나 유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상대의 음성은 멀리서 울려 퍼진 것이 아닌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가까이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의 수준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겉모습만으론 소드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평범해 보였다.
 하울의 보고에 의하면 분명 5년간 용병 생활을 하다 돌아왔다고 했고 등급도 B급이라 했다. 그런데도 소드 마나 유저 상급인 자신이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크비얀이란 자가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눅이 들 정도로 약한 프로테인은 아니었다.
 “묻겠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들에게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을 가르쳐 준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 내가 배우고 익힌 걸 형제들에게 가르치는 데 별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나? 아, 한 가지 확실한 이유가 있군. 미치온, 이리 나와 봐라.”
 사사삭!
 무크가 부르자 군중 속에 묻혀 있던 미치온이 특유의 몸놀림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와 무크의 옆에 섰다. 그 모습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는 듯 자연스러웠다. 써드 스텝의 효과였던 것이다.
 “이야!”
 “대단한데!”
 모여든 사람들의 입에서 한마디씩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 그 탄성은 곧 무크의 마나가 실린 음성에 묻혀 버렸다.
 “보이는가, 내 형제다. 그의 오른팔은 또 다른 형제를 지키려다 잃었지. 결국 힘이 없어 지키지도 못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르치고 있다. 됐나?”
 무크의 목소리에 실린 힘은 구경꾼들의 마음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나 프로테인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왕국의 근위 기사이자 영지의 기사단장이었다.
 “그런가… 하나, 스텝과 마나 수련식, 소드 수련식을 외부에 노출시키는 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그 정도 이유만으로 비전의 수련식을 아무런 방비 없이 가르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대가 노리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여긴다. 아닌가?”
 제법 뛰어나 보이는 기사가 계속 추궁해 오자 무크는 짜증과 함께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각종 수련식이나 스텝에 대해 각 가문이나 기사단이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누구나 소중한 건 감추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형제들에게 누가 봐도 기초라 여길 파르게 수련식과 간단한 써드 스텝을 가르쳐 귀족들의 신경을 건들지 않으려고 했었다. 또한 무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을 위해선 형제들이 기초만이라도 정확하게 숙련되어 있어야 했다.
 한데 눈앞의 기사는 뭔가 대단한 것을 전수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무크가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이곳 기사들이 수련하고 있는 각종 수련식의 수준을 상당히 높게 봤다는 점이었다. 그런 착각을 하게 된 이유는 중원 무림보다 절정(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드물었지만 일류(소드 마나 유저)라 할 수 있는 기사들의 수는 중원 무림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는 사실에서였다.
 그런 판단 착오는 무크로 하여금 각 가문이나 기사단이 소유하고 있는 각종 수련식과 스텝 등의 수준을 일류 이상으로 여기게 했고, 삼류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을 형제들에게 가르쳐도 기사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리라 여기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파르게 수련식의 완성도는 삼류라 할 수 없고, 써드 스텝 역시 간단함 속에 허를 찌르는 묘가 있어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능히 그 가치가 상승하니 결코 허투루 볼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사실은 각 귀족 가문이나 기사단이 소유하고 있는 수련식들의 수준이 무크의 생각처럼 그렇게 높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에 대한 건 이어지는 대화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뭔가를 노린다? 설마 내 형제들이 배우고 있는 기초적인 것으로 당신들 같은 기사, 아니 저 뒤에 있는 용병 같은 몬스터 사냥꾼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보나?”
 “하하하? 시치미를 떼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내 이미 하만이란 자가 C급 상위 용병과 대등하게 겨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만이라면… 며칠 전에 사냥해 온 트롤의 수거품 때문에 용병하고 한판 했던 사냥꾼이잖아!”
 “그러게, 그가 저 청년의 형제였었나?”
 웅성웅성!
 하만의 이름이 거론되자 갑자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크는 모르고 있었지만 하만이나 미치온은 사냥꾼 마을에서 상당히 유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하만은 길잡이뿐만이 아닌 사냥꾼으로서도 제 몫을 하기에 몬스터 사냥을 위한 파티 구성에 있어 상당히 환영받는 존재였다. 그러니 마을에 거주하는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만의 실력이 그저 개인의 뛰어남에서 기인한 게 아닐 수도 있는 사태가 전개되고 있으니 사냥꾼들의 관심이 한층 강해진 것이다.
 “그대는 평범한 자라도 4, 5년이면 될 수 있는 C급 용병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또한 내 형제들이 근 7년 이상 육체를 단련했는데도 고작 C급 용병을 상대할 수 있는 파르게 수련식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7년? 거짓말하지 마라. 내가 너에 대한 정보를 조사도 하지 않고 이곳에 온 줄 아는가. 그대가 이곳에 나타난 건 겨우 1년 전, 어떻게 7년이란 말이 나오나!”
 “저… 프로테인 기사님!”
 “어딜 끼어드는 것이냐, 알반!”
 프로테인 기사단장의 바로 곁에서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던 기사 하울은 일개 경비병이 기사단장의 대화에 끼어들자 호통과 함께 제지했다. 어찌 보면 이번 사건의 당사자이지만 엄연히 지금은 영지의 경비병일 뿐이었다.
 “아니, 됐다. 뭔가, 알반!”
 “정확히 7년 6개월 동안 파르게 수련식을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무크 형님은 8년 전 저희와 함께 이곳 사냥꾼 마을에 왔고, 그 후 1년 뒤 마을을 떠났다가 1년 전에 돌아왔습니다. 증인은 마을에 얼마든지 있으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알반은 기사단장이 허락하자 모여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조금 큰 목소리로 무크 형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밝혔다. 경비병으로 가끔 영지 내의 분쟁을 처리하기도 했기에 이런 상황에선 사실 여부를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밝히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좋아, 확인하면 진실 여부는 알 수 있겠지. 하나 문제는 또 있다. 평범한 재질이라면 그대 말처럼 어느 수준을 넘기 힘들겠지만 재질이 뛰어난 자라면 어떻게 될까? 난 그걸 염려한다.”
 “이상하군. 당신 같은 기사들이 이런 초보적인 수련식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인가!”
 프로테인은 상대의 능글맞은 태도에 화가 나 목소리에 마나를 실음과 동시에 기세를 상대에게 집중시켰다. 그런 후 다시 강한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보기에 그대 역시 나와 비슷한 경지. 그렇다면 어딘가의 기사 가문이나 기사단에서 수련을 했었던 경험이 있으니 잘 알 것 아닌가!”
 “난!”
 프로테인의 고함이 끝남과 동시에 무크에게서 짧고 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프로테인과 구경 온 사냥꾼들의 귀가 집중됐다. 이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오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
 “홀로 수련했다.”
 “뭐라고?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것이냐. 그대 나이에 소드 마나 유저 그것도 중급 이상인 것도 놀라운데 홀로 수련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프로테인은 이 무크비얀이란 자가 자신을 우롱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 어떤 천재도 스승이 없다면 한 분야에서 성취를 얻기 힘들고, 만일 이룬다 해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청년이 홀로 소드 마나 유저 그것도 중급 이상의 수준에 이르렀다 하니 프로테인으로선 자신을 기만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찮군. 난 사실을 말했다. 더 이상의 쓸데없는 논쟁은 사양하겠다. 그대가 날 찾아온 용건을 말하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무크였다. 알반과 테리안이 속한 곳의 기사단장이라 조금 양보했건만 계속해서 추궁을 해 오자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무크는 남에게 추궁 받는 것보다 추궁하는 게 더 익숙한 절대자였다. 그래서 천마심공을 운용, 기운을 기사단장에게 집중시켜 프로테인이 가하는 기세의 압박을 되돌려 주기 시작했다.
 “헉!”
 ‘이 정도였다니, 가히 마스터 수준의 포스 피어… 설마!’
 느닷없이 상대를 압박하던 자신의 포스 피어(기세)가 무산되며 역으로 밀려든 상대의 포스 피어에 프로테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식으로 포스 피어끼리 부딪쳤을 때 압도적으로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선 적어도 한 단계 이상 차이가 나야 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인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려 보긴 근위 기사 시절에 딱 한 번 겪었을 뿐이다. 그것도 마스터인 근위 기사단장으로부터였다. 소드 마나 유저와 마스터의 포스 피어 사이의 차이를 그때 처음 느끼기도 했다.
 마스터의 포스 피어는 일반인의 경우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해 기절하거나 절명하고, 소드 마나 필러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전설의 드래곤 피어와 비슷하다 하여 마스터 피어, 소드 피어, 마나 피어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포스 피어란 용어로 굳어진 상태였다. 한때는 마스터만의 기술이었지만 포스 피어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면서 소드 마나 유저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그대, 정말…….”
 “그만, 이제 부족함을 깨달았을 터 다시 한 번 묻겠다. 용건은?”
 프로테인은 포스 피어에 대항하기 위해 마나를 잔뜩 끌어올린 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믿을 수 없지만 정말 마스터라면 함부로 상대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었다. 마스터란 존재 한 명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우선 감정 상하지 않게 물러난 후 브라이튼 공작님께 보고한다. 그리고 주시하며 기다린다.’
 “좋소, 용건은 그대가 형제들에게 가르친 것들을 타인에게 전수하지 말라는 것이오.”
 어느새 프로테인의 말투가 반 경어체로 변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니 잘됐군.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이참에 공언하지. 누구라도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을 배우고자 한다면 배울 기회를 줄 것이다.”
 “이놈, 감히 영지의 기사단장님이 정중히 요청했건만,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창-!
 “하울! 누가 나서라 했나. 어서 소드를 거두지 못할까!”
 “하지만 단장님!”
 “어서!”
 “옛, 단장님!”
 하울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프로테인 단장을 향해 무언의 시위를 했으나,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하울은 결국 소드를 거두어야 했다. 프로테인 단장과 함께한 이래 저처럼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진정 그리할 것이오?”
 “내가 배우고 익힌 걸 내 뜻대로 하겠다는데 왜 타인의 간섭을 받아야 하지?”
 “음… 한 가지만 더 묻겠소.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만 가르칠 것이오?”
 중요한 문제였다. 눈앞의 무크비얀이란 자가 말했듯이 기초만으론 한계가 있고, 특히 평범한 자질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수련을 하지 않는 한 평생 소드 마나 필러에도 이르지 못한다.
 반면 마나 수련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경험 많은 C급 용병이 마나 수련식을 익힌다면 오래지 않아 소드 마나 필러에 이르게 되고 재질이 있는 자라면 소드 마나 유저에도 입문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 익히는 것이기에 그게 한계이기도 하지만 소드 마나 유저만 해도 엄청난 것이다. 대륙에는 엄청난 수의 용병들이 있고 그중엔 재질이 뛰어난 자도 많았다. 만일 그들이 이 무크비얀이란 자에게 마나 수련식을 배운다면 차후 그들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왕국의 아니, 대륙의 세력 판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해서도 대답할 가치가 없다.”
 “끄응… 방금 누구라도 배우고자 한다면 기회를 주겠다는 건 대상의 한계가 없다는 의미요?”
 “당연히 배우고자 한다면. 단 정해진 규칙을 어긴다면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
 “이해할 수 없군. 그대 정도라면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작위를 얻고 가문을 세울 수 있을 텐데, 도대체 목적이 무엇이오.”
 “난, 누구의 밑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번쩍!
 무크의 말에 프로테인의 눈빛이 빛났다.
 “그 말은 그대는 트레이스 왕국의 국민이 아니란 뜻인가?”
 “글세… 뭐, 떠나라 한다면 떠나 주지. 이 넓은 대륙에 머물 곳이 없겠나.”
 “…….”
 무크의 묘한 의미가 담긴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방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이들 역시 숨소리마저 죽인 채 프로테인 기사단장과 무크비얀,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어진 대화를 모두 들었고, 만약 기사단장이 이대로 물러난다면 자신들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장이 직접 움직일 정도라면 파르게 수련식과 써드 스텝이란 것이 어설픈 흉내만 내는 수준이 아니란 증거였고, 그건 용병들에겐 꿈에도 그리던 상황이었다. 자유 기사나 수련 기사 역시 새로운 스텝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마법사들 역시 무심할 수만은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프로테인 기사단장이 원하던 게 아니었다. 타 대륙이나 왕국에서 흘러들어 온 기사가 자신의 세력을 쌓기 위한 행동으로 판단, 일벌백계의 효과를 노려 일부러 요란스럽게 사냥꾼 마을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래서 사냥꾼 마을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몰려드는 걸 방치했다. 하나 상황은 원하던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고, 오히려 몰려든 이들이 프로테인의 선택의 폭을 좁히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명예로운 자, 신의 있는 자인 기사, 그중에서도 하나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자신이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일개 용병을 협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크비얀이란 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있었다. 처음 등장할 때 음성에 마나를 실어 잠깐 드러낸 후엔 오로지 자신에게만 그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 그러니 더더욱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타 영지라면 조금 비겁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얼마든지 무마시킬 수 있지만 이곳 사냥꾼 마을은 불가능했다.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믿음하에 수련과 함께 몬스터 사냥을 위해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그런 믿음에 금이 간다면 그 파장은 금방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사냥꾼 마을이 이곳 버트란 영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곳에 계속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는 버트란 영지만의 문제가 아닌 왕국의 재정에도 파장이 미치고 사냥으로 인해 조절되던 몬스터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군대와 기사단의 증가 배치를 불가피하게 만들 터였다.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프로테인 단장으로선 이 사태를 일단 원만히 해결해야 했다. 사후 조치는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좋다. 일단 그대가 이곳에서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나의 재량으로 인정하겠다. 하나 그대에게 배우는 자들의 인적 사항을 수시로 보고해야 한다.”
 결국 프로테인은 인정했다. 마스터에 관련된 사항이라 보고가 우선이라 여긴 것이다.
 “귀찮군. 원한다면 직접 조사해라. 방해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내 동생들을 두고 가도록. 너희들을 믿지 못하겠다.”
 “그렇게 하지.”
 결정을 내린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알반, 테리안은 이 시간부로 경비병의 직위를 해제한다. 하울!”
 “옛, 단장님!”
 “너는 남는다.”
 “알겠습니다.”
 기사 하울은 부가적인 지시가 없었지만 프로테인 단장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에 아무런 의문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조사해 소드 마나 유저 상급인 프로테인 단장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한 이유를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무크는 프로테인 기사단장이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천마심공의 기세를 집중시킨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었지만 내심 덤벼들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아쉽기도 했다.
 용병 생활을 통해 여러 가지 경험을 했지만 눈앞의 기사단장 수준은커녕 제대로 된 기사와도 손속을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사들이 어떤 형태의 소드를 시전하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그 기회가 무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 없이 분란을 자초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크가 알고 있는 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헤브리아 제국의 기초 소드식인 아리안 소드 수련식과 트레이스 왕국의 기초 소드식인 트라이 소드 수련식뿐이었다. 만났던 대부분의 기사들은 왕국과 제국의 자유 기사나 수련 기사들이었고, 그들이 주로 사용했던 게 그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쩌다 만난 정규 기사들은 웬만해선 용병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한 채 틈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폐쇄적이야, 이 세계는……. 마법이란 분야나 소드의 세계 모두.’
 “나머지는 모두 돌아간다.”
 무크의 상념과 달리 프로테인은 간결하게 조치를 취한 후 일행들을 향해 복귀를 지시했다. 그러곤 무크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슬쩍 쳐다본 후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미 사위는 어둠에 묻혀 있어 바로 영주성으로 돌아가긴 힘들 터, 마을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마을 토박이로부터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프로테인 기사단장과 그 일행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무크의 형제들이 뛰어나왔다. 그러곤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무크, 어쩌려고 그래. 상대는 기사야! 오늘은 보는 눈이 많아서 그냥 갔지만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그래 오빠, 빨리 가서 잘못했다고 해. 오빠 실력은 알지만 상대는 기사단장이란 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해가 져서 오늘은 여관에서 머물 테니 조금 있다 같이 가자. 내가 돈을 좀 준비할 테니까.”
 미치온과 사라, 프레드가 번갈아가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무크를 향해 말했다.
 그들은 무크와 달리 기사들의 무서움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어왔기 때문에 거의 세뇌되다시피 해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미치온 등은 모두 헤브리아 제국의 1차 정복 전쟁에 의해 고아가 됐었기에 두려움의 정도는 더 컸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그보다 안으로 들어가자. 간만에 형제들이 모였으니 회포나 풀자.”
 무크는 형제들의 걱정하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기분 좋게 웃으며 다독거렸다. 사실 오늘의 이 사태는 예상보다 빨랐지만 무크가 원하던 상황이기도 했다. 원래 무크는 세 개의 대륙 전체를 다 돌아보기 전에는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용병 생활 중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목적 없이 대륙을 떠돌고 있을 무크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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