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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파황 [E]

파황 1권-1

2015.01.07 조회 3,781 추천 32


 프롤로그
 
 ―무림 역사상 최강의 고수는 과연 누구인가?
 
 이런 질문을 무림인들에게 한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당연히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의견들이 나올 것이다. 수천 년 무림 역사상 그 명성을 천하에 떨친 고수만도 수를 다 헤아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고 그 가운데 누가 가장 강한지 정확히 판단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느 날 무림에 무림사에 정통한 만박자(萬博子)라는 기인이 나타났다.
 하늘아래 모르는 게 없어 무림에서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로 통하는 그는 지나간 무림사의 숨은 비사나 잊힌 전설까지 모르는 게 없는 기인 중의 기인이었다.
 만박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여러 기행들을 행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무림사 최강의 고수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만박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정파무림인들은 여러 의견들을 내놨다. 그중에서 소수의 의견들을 제외했을 때 그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견으로 집중되었다.
 “정파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 통하는 소림사의 개파조사 달마대사! 그분이야말로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학의 대종사이십니다.”
 “도문(道門) 최강의 문파이자 소림사와 함께 정파무림의 쌍벽을 이루는 무당파의 개파조사이신 삼풍진인 장삼봉! 그분을 제외하고 누가 있어 무(武)의 최고봉을 논할 수 있겠는가!”
 “중원제일의 신비문파인 용문(龍門)! 용문 역사상 최강으로 불렸던 용제(龍帝)와 남해의 전설인 초대 검후(劍后)가 펼쳤던 용봉합벽(龍鳳合壁)을 당해 낼 수 있는 고수는 아무도 없다!”
 반면, 사파무림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에는 정파무림인들의 대답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정파와는 달리 대부분의 사파무림인들이 최강의 무인으로 한 사람을 지목한 것이다.
 “무림 역사상 최강의 고수? 당연히 마교의 조사이시자 마도 대조종이신 천마(天魔)께서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시지.”
 정파와 사파의 의견이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무림인들을 찾아다니던 만박자는 급기야 무림사가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무림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져 가장 객관적이며 공정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바로 무림사의 전문가들인 무림사가들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만박자가 무림사가들을 만나 물었을 때 그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무림사 최강의 고수로 천마를 첫손으로 손꼽았다. 간혹 정파의 네 기인들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경우 천마에 대한 기록들이 사실보다는 허구가 많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세는 무림 최강의 단일 문파라는 마교를 만들고 무림사 최초이자 유일한 마도천하를 주도하며 불패신화(不敗神話)를 이룬 천마의 무력이 달마대사나 장삼봉 진인, 용제와 검후를 능가한다는 것이 그들의 평가였다.
 물론 정파무림에서는 이를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이후 무림에서는 고금제일인의 칭호를 천마가 가져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무림사 최강의 고수는 천마인가?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만박자는 여러 기서(奇書)들을 남기고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가 남긴 여러 기서 중 <무림전설> 인물 편에는 최상위에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달마대사와 장삼봉 진인, 용제와 검후 네 사람을 같은 서열로 기록하고 맨 위에는 천마가 적혀 있었다. 무림사가들이 얘기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인물 편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으니…….
 
 […천마는 분명 최강의 무인이었다. 하지만 아는가?
 불패신화를 이룩했다고 전해지는 천마!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단 한 번의 패배가 있었다는 사실을!!
 천마가 남긴 마교의 교주에게만 전해지는 천마비록(天魔秘錄 - 천마의 일기)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내 생에서 이룰 것은 모두 이루어 보았으니 그 무엇이 아쉬울 것인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너무도 아쉽고도 아쉽도다. 이제야 내 생의 최대 호적수를 만났건만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음이니…….
 
 천하무적을 자부하던 나 천마가 영원히 패자의 멍에를 안고 이대로 사라져야 한다니…….
 그와의 마지막 승부에서 얻은 영감으로 내 부족한 무공을 보완하고도 이를 시험해 볼 수 없다는 것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을 보는 후인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노니 명심하라.
 내가 남긴 천마경의 무학은 능히 천하무적이라 자부할 수 있으나… 오직 하나! 파황의 무학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천마경의 무학을 모두 완성한다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뒤지지도 않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혹시라도 후일 그의 후인을 만난다면 내 마지막 심득을 모두 얻기 전에는 후일을 기약하고 그와의 대결을 피하도록 하라. 후일 내가 남긴 모든 것을 완성한다면 천마의 이름으로 도전하라!
 그리하여 천마가 결코 파황의 아래가 아님을 증명해 주기 바란다. 잊지 마라! 후인이여!!
 파황무(破皇武)의 창시자, 파황(破皇)이란 이름을!!
 
 천하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마 스스로 인정한 최강의 무인!
 파황무의 창시자! 파황!!
 나 만박자는 그 이름 앞에 감히 말하노라!
 고금최강(古今最强) 절대무적(絶對無敵)!! ]
 
 후에 우연히 만박자가 남긴 무림전설 인물 편을 얻어 살펴본 한 무림사가는 그제야 만박자가 과거 자신에게 질문했던 마지막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혹시… 파황이란 이름! 알고 계십니까?”
 1. 초자아 인공지능 트리스탄
 
 몸속을 빠져나가는 피! 손끝의 감각은 이미 사라지고 심장마저 멈춘 것 같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 가는 육신을 어렴풋이 느끼며 죽음을 생각한다.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이 작은 파편이 되어 떠올랐다가 어느새 사라져 간다.
 갑자기 작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자만이었나?! 그래. 자신감이라 믿었건만 그것은 독선에 의한 자만이었던 거야.
 떨거지들이 따라붙을지 모른다고 예상했으면서도 이 꼴이라니……. 알면서도 당한 놈이 바보지. 죽어도 싼 놈! 상대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으니……. 지금의 내 모습은 당연한 결과인가.
 하늘이 내린 천재의 재능이 점차 오만함을 불러오고 그 오만함은 독선을 동반하니 결국에는…….
 그래서인가? 천재는 단명한다는 속설이 있는 이유가? 그럴지도 모르지. 뭐 다 끝난 마당에 무슨 상관인가?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타고난 천성이 바뀌지도, 바꿀 생각도 없는데……. 이미 육신은 죽었는지 이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점차 흐려지는 의식. 이제 쉴 시간이 된 것 같다.
 
 -…들리십니까?
 -……?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사람의 소리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특이한 목소리였다. 귀에 거슬리는 음성은 아닌데 묘한 운율이 느껴지는 목소리.
 나는 눈을 떠 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신체에 대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이 떠오르며 너무 심한 부상에 신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이거나 아니면… 죽어서 저승에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뇌파 수치 정상회복. 제 말이 들리십니까?
 -…누구지?
 다시 들리는 특이한 목소리에 나직이 반문하며‘혹시 저승사자?’이런 웃기지도 않는 의문이 들어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깨어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저는 초자아 인공지능 TRST-001입니다.
 -…뭐?
 자신을 소개하는 상대방의 말 가운데 알아듣기 힘든 희한한 대목이 있어 절로 반문이 나왔다.
 -앞으로 트리스탄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트…트리…?
 이에 다시 정정하듯 자신을 밝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역시 조금 이상한 이름이 다시 들려오자 이번에는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내 기억에 대화 도중에 더듬거리는 바보짓은 이때가 처음 같았다.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경험도 사실 매우 적은 편이지만.
 -트․리․스․탄!
 -…….
 버벅거리는 내게 상대는 건방지게(?) 한 음절 한 음절 끊어 말해 주었다. 그 때문에 한순간 혈압이 급상승하는 듯했다.
 내 몸이 정상이었다면 저런 건방진 녀석은 먼저 밟아 놓고 대화를 진행할 텐데…….
 -먼저 궁금한 점이 많으실 테니 간단히 현재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우선 당신은… 죽었습니다.
 순간 다시 혈압이 급상승하며 뒷골이 당기는 것 같았다.
 이거 지금 이 자식이 날 놀리는 건가?
 -…그럼 이곳은 저승인가?
 -아, 질문은 설명이 다 끝난 다음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치솟았던 혈압이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며 이성을 무너뜨리려 한다.
 -당신의 몸은 이미 죽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정신, 즉 당신의 뇌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곳은 제 몸 안이고 당신의 뇌 즉 당신을 살린 건 접니다. 당신을 살린 이유는 제가 바로 당신을 제 주인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몸은 죽었는데 정신은 살아 있어? 그럼 내가 귀신이란 말이야? 더군다나 몸 안이라면? 내가 이 자식에게 잡아먹혔다는 말인가? 주인으로 선택했다는 건 또 뭐야? 도대체 지금 이 자식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자식이 지금 날 놀리는 거 아니야?
 -…주인? 선택?
 -물론 아직은 당신이 제 주인은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주인으로 선택했듯이 당신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와의 맹약을 통해 제 주인이 되던가? 아니면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맹약을 통해 제 주인이 되신다면 당신과 저는 어느 한쪽이 완전히 소멸하는 그날까지 영원을 함께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거부하신다면 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 되면 당신의 뇌는 저와의 연계가 끊기면서 죽음을 맞이할 테니 알아서 선택하십시오. 우선 선택을 돕기 위해 저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정보전송 시작!
 어째 협박처럼 들리는 녀석의 말에 발끈했지만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정보전송 완료!
 하지만 이것도 잠깐, 다시 정신이 맑아지며 머릿속으로 뭔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건?
 -선택의 시간입니다. 저와 맹약을 맺으시겠습니까?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대방의 정보에 대해 생각하는데 맹약을 재촉하는 트리스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 후우~. 선택의 여지가 없군. 나 파황은 트리스탄의 주인으로서 내가 소멸하는 그날까지 그와 함께할 것을 내 영혼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 트리스탄은 파황님을 주인으로 모실 것을 나의 창조주이시자 나의 아버지, 타마리안의 이름 앞에 맹세한다!
 그렇게 맹약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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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과의 만남 이후 파황은 여러 가지 정보를 전송받은 덕에 자신이 처한 상황과 트리스탄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죽어 버린 몸. 육신을 잃어버린 영혼.
 트리스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파황은 극도의 절망감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꼈다.
 둥근 반구형의 유리관 안에서 겨우 뇌만이 존재하는 모습.
 그 비참한 모습을 본 파황은 머릿속이 하얗게 빈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어야 했다.
 마침 트리스탄이 주인의 위험을 눈치 채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파황은 그대로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이후에도 파황은 오랜 시간을 절망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과연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냥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과연 이렇게라도 살아야 할 이유가 내게 있는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과연 살아 있는가?
 파황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반문하며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황은 무너진 정신을 수습하고 변해 버린 새로운 환경에 점차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인으로서 인간한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수련과정과 생사를 가르는 치열한 전투를 수없이 치르며 단련된 파황의 정신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파황을 일으켜 세운 목표는 바로 무인의 꿈인 무(武)의 완성이었다.
 무학의 끝은 무한하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인해 만들어진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수명! 그 한계는 아무리 천재적인 오성과 무골을 타고났다 해도 아무리 뛰어난 사문과 스승을 모시고 평생을 노력해도 무학의 끝을 보기에는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파황에게는 이제 남는 게 시간이었다. 가장 큰 벽이 사라진 셈이다. 물론 커다란 난제도 있다. 바로 무공을 실현시킬 육신이 없다는 점! 하지만 이 문제는 트리스탄의 도움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비록 파황에게 육신은 없지만 트리스탄을 통해 가상공간에서 잃어버린 육신을 구현해 낼 수 있었다.
 그 육신은 비록 실체가 아니지만 트리스탄이 만든 가상공간에서만은 실체와 같은 기능과 감각을 발휘했다. 바로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파황은 무림 최강의 무력을 지닌 무인이었으니 어찌 보면 무학을 연구하고 수련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일이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질 테니 실체가 없는 파황으로서는 주화입마(走火入魔)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만든 파황무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기회였다.
 그렇게 파황은 무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권(拳)과 검(劍)을 익혔던 것에서 벗어나 무학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확대했다. 십팔반 병기를 비롯해 암기술은 물론 정(正), 사(邪), 마(魔)의 구분도 없었다.
 완전한 무학. 신(神)마저 비웃을 수 있는 새로운 파황무를 만들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또한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남는 건 시간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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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스탄은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초자아 인공지능 TRST-001! 일명 트리스탄!
 너비 22미터. 길이 50미터. 높이 13미터. 단순한 육면체에 모서리 부분이 유선형으로 매끈한 모양을 지닌 은백색의 거대한 비행체. 어찌 보면 투박하면서도 단순한 모양이지만 이것이 외관상으로 보이는 트리스탄의 모습이었다. 파황이 사는 이 세계와는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넘어 온 기계생명체(?).
 분명 쇠로 된 몸뚱어리를 가졌기에 생명체라 보기 힘든 존재였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움직이기까지 하니 생명체가 아니라고 하기도 힘든 묘한 괴물(?)이 바로 트리스탄이었다.
 인간의 수십만 배에 달하는 트리스탄의 엄청난 정보처리능력은 인간 가운데 천재 중의 천재라 불렸던 파황조차도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완전한 파황무를 만들기 위한 파황의 연구에 트리스탄은 실로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파황에게 필요한 무학의 정보를 위해 트리스탄은 탑재된 정보위성을 통해 중원은 물론 세외까지 다양한 무류의 수준 높은 고수들을 감시하며 그들의 무공수련 장면이나 비무 등을 동영상으로 저장하고 무공비급들을 복사하는 등 무림의 무학에 대해 수집된 수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된 정보들은 파황에게 전송하거나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트리스탄은 수집된 정보를 이용해 가상공간에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존했던 무림고수들을 구현해 냄으로서 파황이 그들과 간접비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파황무의 연구는 파황이 처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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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천3백 년쯤 지났을 때였다.
 파황무에 대한 연구는 이제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벌써 1백 년째 조금의 진전도 없이 거의 답보상태였다.
 궁극의 목표로 잡았던 경지, 신을 넘어선 초신(超神)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마지막 벽을 남겨 두고 전혀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더 이상의 발전이 없자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하는 생각에 파황은 요즘 아예 손을 놓아 버린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정보위성을 통해 어떤 특이한 무공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 트리스탄에게서 그 무공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했을 때 파황은 극도의 전율과 흥분을 느꼈다.
 이혼대법(移魂大法)!
 기이한 사술로, 그 방면에서는 무림 최고의 문파로 유명했던 배교(背敎)에서 흘러나온 역천의 사술!
 이것이라면 잃어버린 육신 대신 다른 육신을 가질 수 있다! 다시 살 수 있다!
 파황이 느끼는 감정은 격렬했다. 오랜 세월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어 아예 인간의 감정은 말라 버렸던 파황은 엄청난 환희와 흥분으로 전율했다.
 파황은 즉시 이혼대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혼대법은 미완성의 불완전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파황은 결코 실망만 하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절실한! 파황은 트리스탄과 함께 열정적으로 이혼대법의 연구에 몰입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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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기계장치들이 가득한 실내.
 다양한 기계장치들이 마치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양 반짝거렸다. 기계장치 사이로 중앙에 대형 스크린이 있었고, 그 아래 반구형의 유리관에는 인간의 뇌로 보이는 물체가 투명한 액체 속에 잠긴 채 여러 선들이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었다.
 -이혼대법에 대한 가상테스트가 성공했습니다!
 -으하하하―! 드, 드디어… 성공이다!
 독특한 기계음이 가상테스트의 성공을 알리자 곧바로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가 사방을 진동하듯 크게 울려 퍼졌다.
 파황은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무려 2백 년에 걸친 연구가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곧 파황이 현세에 새로운 육체를 갖고 완벽히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육신을 잃어버린 지 어언 1천5백 년!
 비록 트리스탄이 옆에 있었지만 그 긴 세월을 정신체로 보내며 그가 받은 정신적 고통은 범인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혼자라는 그 깊은 고독감과 절망감은 파황에게 차라리 죽고 싶다는 충동을 수 없이 불러일으켰고 세월이 흐를수록 파황의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만약 그에게 파황무를 완성하겠다는 강한 집념이 없었다면, 또 항상 같이한 트리스탄이 없었다면, 그리고 트리스탄이 구현한 가상공간이 없었다면 파황은 아마 그 긴 세월 속에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파황무는 그가 원하던 수준에 이르러 완성된 것과 진배없었다.
 단지, 마지막 단계인 초신무(超神武)에 대해서는 기본 틀조차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상태라 파황으로서도 그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이론이라 여겼기에 그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실상 초신무에 대한 연구는 파황무를 완성한 이후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파황이 고독감과 절망감을 견디기 위해 시작한 일일 뿐이다. 즉, 애초에 그가 원했던 파황무는 이미 완성된 것이다.
 이제 살아생전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무인으로서의 가치만을 중요시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행복을 포기하고 살았다. 가족 간의 사랑, 친구들과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등 한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삶의 가치를 외면하고 파황은 그 모든 것을 무(武)에 대한 욕망으로 대신하여 살아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강함을 입증하기 위해 싸웠고, 나중에는 피와 살육에 미쳐 싸웠다. 자신의 힘에 취해 피와 죽음 속에 보낸 광란의 세월.
 육체를 잃고 살아가면서 가끔 과거의 모습을 뒤돌아볼 때면 자신의 무림행은 그야말로 미친놈의 미친 짓이었다는 게 파황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무학의 완성이라 자부하는 파황무의 완성을 이루어 여유가 생긴 이상 파황이란 무인이 아닌 ‘신후’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기쁨도 맛보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랜 세월 홀로 지내야 했던 깊은 고독과 절망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자신이 평범한 삶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삶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은 분명 무인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처럼 무의미한 살육으로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파황이 깊은 상념 속에 빠져 있을 때였다.
 삐잉! 삐잉! 삐잉!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파황은 정신을 차리고 트리스탄을 찾았다.
 -트리스탄! 갑자기 무슨 일이냐?
 -주인님, 저의 모체인 TMRA-001에서 방금 소환 프로그램을 작동했습니다.
 파황의 물음에 트리스탄의 대답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TMRA-001? 그 이계(異界)에 있다는 타마리안을 말하는 건가? 소환 프로그램이라니? 그건 또 뭐지?
 TMRA-001, 일명 타마리안은 트리스탄이 온 이계의 다른 인공지능으로, 창조자인 타마리안의 이름을 딴 최초의 인공지능을 말했다. 트리스탄은 바로 그 타마리안이라는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이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최초의 초자아 인공지능이었다.
 
 트리스탄은 당시 만들어지자마자 파황이 있는 이쪽 세계로 차원이동을 통해 넘어왔는데,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이계에는 그 세계를 지배하는 3개의 거대한 제국이 존재했다. 그런데 트리스탄이 막 완성된 시점에서 이 세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루었던 세 제국 가운데 두 제국, 즉 코란 제국과 슈렌 제국이 연합하여 아트반 제국을 공격, 대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아트반 제국은 초자아 인공지능, 다시 말해 ‘트리스탄’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를 안 다른 두 제국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연합한 후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 초자아 인공지능이 완성된다면 아트반 제국의 국력은 두 제국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제국은 이번 기회에 아예 아트반 제국을 멸망시킬 참이었다.
 그러나 아트반 제국은 이에 굴하지 않고 파상적인 연합 공격을 버티며 초자아 인공지능 개발에 성공했다. 바로 트리스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각,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두 제국은 절대 금지된 최후의 무기 ‘파라비탄’을 사용하고 말았다. 결국 아트반 제국은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파라비탄은 그 파괴력이 너무 강해 절대 금지된 무기였다. 방어불가능의 인류최후의 무기 파라비탄, 만약 이것이 전쟁에 쓰이면 그것은 모두가 멸망하는 길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세 제국은 진작부터 국제협정을 맺어 파라비탄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두 제국이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파라비탄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아트반 제국은 절망과 분노 속에서 최후의 선택을 했다. 자체방어시스템에 의해 이를 감지한 인공지능 타마리안은 자동으로 자국 파라비탄을 두 제국을 향해 발사한 것이었다.
 이제 대륙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막을 수도 없고, 다른 곳으로 피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공지능 타마리안은 자국의 방어를 포기하고, 모든 에너지원을 새로 개발된 초자아 인공지능 트리스탄에게 최대한 집중시켰다. 그리고 타마리안은 트리스탄에게 차원이동을 명령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인공지능인 타마리안보다 초자아 인공지능인 트리스탄이 상위 계열이었기에 타마리안의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초기 기본 설정만 입력되고 아직 주인조차 정해지지 않았던 트리스탄은 자신의 모체인 타마리안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에 타마리안이 정한 절대지침에 의한 명령은 거부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트리스탄은 타마리안의 명령에 의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가 모이자마자 차원이동을 서둘러 파황이 있는 세계로 넘어왔던 것이다.
 차원이동에 관한 이론은 그 당시에도 불완전하여 마지막 이론이 겨우 정립돼 그때까지 실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차원이동은 일종의 도박인 셈이었다.
 하지만 파라비탄 투하에서 벗어나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차원이동이 유일했다. 또한 차원이동의 설비가 갖춰진 시스템은 트리스탄밖에 없었기에 최후의 순간 인공지능 타마리안의 선택은 외길이었던 것이다.
 만약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트리스탄에 타마리안과 연결된 이동마법진만이라도 설치되어 있었다면, 혹은 전쟁터로 나간 제국의 고위마법사 중 한 명이라도 황제 옆에 있었다면 적어도 황제를 비롯한 주요인물 몇 명은 트리스탄에 탑승할 기회가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파라비탄이 투하되고 대륙 붕괴가 이루어지는 순간, 트리스탄만이 차원이동을 하여 파황이 있는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차원이동에 쓰느라 에너지원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트리스탄은 스스로 에너지를 충전시킨 후, 초기에 입력된 절대지침에 따라, 우선 자신의 주인을 정하기 위해 정보위성을 쏘아올리고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기본적으로 트리스탄은 인간을 주인으로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선택조건인 아트반 제국의 황족이나 백성 가운데 정한다는 1차 조건에 맞는 사람이 이쪽 세계에는 없기에 자신이 직접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냈다.
 그 조건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었다.
 당시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탓에 트리스탄은 자신의 주인은 최고이어야 한다는 유아적인 논리를 만들어 냈으니……. 그 결과 트리스탄이 정보위성을 통해 찾아낸 사람이 바로 천마와 파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펼친 최후의 결전을 지켜본 후 트리스탄은 파황을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파황도 트리스탄에게 들어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환 프로그램은 모르는 얘기였다. 그랬기에 갑작스런 소환 프로그램이라는 말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소환 프로그램은 초기에 설정된 몇 가지 절대지침 명령 가운데 하나로, 차원이동 성공 이후를 대비한 프로그램입니다. 차원이동을 하면 모든 통신수단이 완전히 차단되므로 정해진 기간 내에 제가 돌아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저를 제국으로 소환하는 체계입니다. 최후의 제국전쟁을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대 지각변동이 일어나 대륙이 붕괴됐을 걸로 결과가 나왔기에 주인님에게 알려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으로써는 어찌 된 영문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일단 절대지침 명령인 소환 프로그램이 작동했기에 저는 당장 차원이동을 통해 제가 왔던 세계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젠장! 트리스탄! 네 주인은 나다! 그런데도 그런 명령이 효력이 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절대지침에 의한 명령은 제 모체인 타마리안이 소멸되지 않는 한, 모든 명령에 대해 우선적으로 실행하도록 되어 있는 데다 실행 프로그램도 제 통제와는 상관없이 작동됩니다. 그리고 저는 절대지침에 대해서는 강제로 제어할 수 없게 만들어졌습니다.
 -으윽, 이제 겨우 이혼대법을 완성했는데… 다른 세계로 차원이동이라니…….
 -소환 프로그램에 의해 1분 후면 차원이동이 실행될 것입니다.
 -…….
 -30초 전.
 -…….
 -10초 전! 9, 8, 7, 6, 5, 4, 3, 2, 1, 차원이동!!
 트리스탄의 이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눈부신 하얀빛이 주위를 감쌌다. 점점 밝아지는 빛 속에서 파황의 이를 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빠드득! 두고 보자! 타마리안인지 나마리안인지 보이기만 하면 완전히 아작 내버릴 테다!!
 2. 부활
 
 파란 하늘 아래 크고 작은 산림이 각양각색으로 물든 채 화려하게 펼쳐져 대자연의 장관을 연출했다. 군데군데 우뚝 솟은 산 정상에는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산 아래에는 곧게 뻗은 이름 모를 나무들이 마치 서로 경쟁하듯 솟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을 가르는 강물은 유난히 맑아 깊지 않은 강물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여기저기서 작은 산짐승들이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그중 절반가량은 지구에서는 볼 수 없던 동물들이었다.
 숲 속의 아담한 공터.
 한 채의 오두막이 그림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두막 앞의 공터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데 그 한 귀퉁이에 두 개의 무덤이 보였다. 하나는 생긴 지 제법 시간이 지난 무덤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마 안 돼 보였다.
 그 무덤 앞에 서 있는 작은 인영 하나. 이제 14~15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무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바람에 살랑거리듯 흩날리며 길게 늘어뜨린 새하얀 머릿결은 묘하게도 햇빛의 각도에 따라 은은한 은빛을 보여 주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는 알 수 없는 힘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직은 앳된 얼굴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예쁘장한(?) 놈이었다. 아마 얼굴에 자신이 없는 남자애들이라면 재수 없다고 욕을 퍼부을 것같이 생긴 녀석이었다. 뭐 간혹 있는 비정상적인 놈들은 오히려 좋아하겠지만…….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영감님. 아니지? 외할아버지라고 불러야 되나?”
 뒷머리를 가볍게 긁적이며 뭔가를 잠시 고민하는 소년이었다.
 “뭐, 이 꼬마의 외조부였으니……. 어쨌든 지난 7년간 날 손자로 여기고 아껴 줬는데 마지막 인사까지는 손자로서 대접해 드려야겠지. 외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외할아버지의 손자 케빈, 이제 세상 속으로 갑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다 무덤을 향해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버릇없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소년. 녀석은 어딘지 모르게 상태가 조금 의심될 정도로 이상했다.
 막 돌아서던 소년은 옆에 있는 다른 무덤을 보고 잠깐 멈칫거렸다.
 “어머니, 당신도 편히 쉬시길…….”
 낡은 무덤을 바라보는 소년의 금빛 눈동자에 한 가닥 어두운 그늘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무덤을 뒤로하고 돌아선 소년은 이내 숲 속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소년의 달리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소년의 몸은 갈수록 빨라져 어느새 거의 날듯이 땅을 박차며 우거진 숲 속을 한줄기 바람처럼 질주해 나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소년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소년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마저 머금고 있어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소년은 사람의 발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깊은 곳으로 들어와 있었다.
 어떤 바위산 아래에 도착하자, 마치 소년을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바위산의 한 공간이 열리며 작은 통로를 만들어 내었다. 소년은 이미 익숙한 듯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트리스탄! 여행준비는 다 됐겠지?”
 벽면에 반짝이는 기계들로 가득한 공간, 중앙관리센터에 들어선 소년은 아무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예, 주인님. 주인님이 부탁하신 물건까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소년의 물음에 어디선가 독특한 기계음이 바로 대답해 왔다.
 “좋았어. 간단히 씻고 나올 테니까 준비해 둬.”
 -예, 주인님.
 소년은 곧 왼쪽 통로를 통해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는데 소년이 들어가자 머리 위에서 자동으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년이 간단히 몸을 씻은 후, 그곳에서 나오자 다시 자동으로 사람 한 명이 서서 들어갈 만한 크기의 원통형의 캡슐이 나타났고 소년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윙~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캡슐에 불빛이 들어왔다가 잠시 후 사라졌다. 다시 소년이 나왔을 때에는 몸에 묻었던 물기가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캡슐 옆으로는 누가 갔다 놨는지 어느새 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소년은 준비된 옷을 입은 후 벽에 붙은 전신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내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소년의 옷은 이쪽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스타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전 세계였던 중원무림의 무복과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고려시대의 무인들이 입던 형식과 더 비슷했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그것과도 조금 다른 스타일이었다.
 은은히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의 상하의는 손목과 발목 부분이 밀착되어 펄럭거리지 않게 되어 있었고, 그 위로 팔 부분이 없는 붉은색 상의가 더해져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는, 단순하면서도 심플한 멋을 살린 모습이었다. 고려 무인들의 복색과 이곳의 복색을 나름대로 조화시킨 디자인이었다. 소년이 생각한 구상을 트리스탄이 보완하여 새롭게 퓨전스타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옷들은 특수섬유로 만들어져 기(氣)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데다 날씨에 따라 항상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방수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신축성이 뛰어난 아주 얇은 재질이라 활동하기에도 매우 편리했다.
 다시 처음의 센터로 돌아온 소년은 중앙의 원형탁자 위에 놓인 준비물들을 살펴보았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한 쌍의 검은 팔찌와 역시 검은 장갑 그리고 붉은색 부채 하나와 은빛 연검 하나, 마지막으로 검은색 망토가 놓여 있었다.
 소년이 한 쌍의 검은 팔찌를 집어 들자 트리스탄의 독특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 묵혈환에 대한 사용법은 어제 이미 알려 드렸으니 양팔에 착용하십시오. 묵혈환에 연결된 아공간에 다른 필요한 물품들은 다 준비해 놨습니다.
 “호오, 이게 그 묵혈환인가? 보기 좋게 잘 만들어진 것 같군.”
 묵혈환(墨血環)이란 검은 팔찌는 트리스탄이 자신의 주인인 소년을 위해‘제라늄’이라는 고대문명 시대 초합금으로 만든 팔찌였다. 제라늄은 고대문명의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금속으로 이 시대 최고의 금속으로 꼽히는 미스릴보다도 3배나 강도가 뛰어난 금속이었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묵혈환은 왼쪽에 착용하는 팔찌에는 트리스탄과의 통신과 유사시에 실드를 형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오른쪽 팔찌에는 묵혈환과 연결된 아공간을 통해 원하는 물건을 소환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아주 실용적인 물건이었다.
 특히 묵혈환과 연결된 아공간은 트리스탄과도 연결되어 있어 미처 준비되지 못한 물건들도 아공간을 통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신감응을 통한 통신마법이 걸려 있어 소년이 사용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고안된 물건이었다. 소년은 어제 트리스탄의 설명을 듣고 묵혈환이란 이름을 미리 붙여 주었다.
 묵혈환을 양 팔목에 찬 소년은 다시 검은 장갑을 집어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오늘 추가로 준비한 것으로 착용 시 장갑을 통해 사용되는 마나, 즉 기(氣)를 2배까지 증폭시켜 주는 마법물품입니다. 물론 기능은 다른 마법물품처럼 정신감응에 의한 음성인식으로 조절 가능합니다. 두께가 얇기 때문에 착용감이 좋고 주인님이 입고 계신 옷과 같은 특수섬유를 사용해서 기의 흐름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방수와 보온 효과도 지니고 있습니다.
 "호오~! 괜찮군. 좋았어. 너는 이제부터 무극신갑(無極神匣)이다. 일단 지금은 필요 없으니 넣어 놓고……. 다음은?"
 소년이 다음 집어든 것은 붉은색 부채였다. 부채를 펼치자 이전 세계인 중원에서 전설의 신수로 알려진 용(龍) 한 마리가 여의주를 입에 물고 구름 위를 노니는 형상이 보기 좋게 수놓아 있었다.
 "음, 좋아! 용혈선(龍血扇)도 잘 만들었군."
 이 용혈선이란 부채는 이미 수화불침(水火不侵)의 경지를 넘어선 데다 입고 있는 옷마저 온도조절이 되므로 더위 걱정이 없는 소년에게는 솔직히 쓸모없는 물건이었는데, 순전히 멋을 위한 한마디로 폼 잡고 싶은 유아적인 생각에 소년이 주문한 물건이었다. 이 역시 주재료는 제라늄과 특수섬유로 제작된 것이었다.
 소년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트리스탄으로서는 유치하게 노는 주인의 모습이 기가 막혔지만 몸이 바뀌면서 이상하게 변해 버린 주인의 괴팍한 성격은 트리스탄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용혈선도 아공간에 넣은 소년은 은빛 연검을 집었다. 연검을 허리에 찬 채 검집에서 뽑아 가볍게 휘둘러 본 후 다시 집어넣은 소년은 이 은빛 검신을 가진 연검에 월광(月光)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월광검은 제라늄보다 강도는 많이 부족하지만 대신 탄성이 우수한‘스탄’이라는 금속을 사용, 제작된 검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망토를 걸치고, 소년은 모든 여행준비를 마쳤다.
 “후훗, 준비는 끝났다! 이제 이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러 간다!”
 소년의 입가에 이 순간 개구쟁이 악동 같은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 짓는 소년의 머릿속으로 문득 이 세계로 건너와 자신이 차지한‘케빈’이란 소년을 만나 새로운 몸을 얻었던 일이 떠오르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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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이동을 통해 중원무림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 넘어온 파황은 트리스탄의 상태를 체크했다. 워낙 차원이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컸기에 트리스탄의 에너지는 바닥이 나 버린 상태였다. 우선, 에너지 충전을 명령하고 곧바로 트리스탄을 소환한 타마리안 추적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타마리안의 흔적은 잡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타마리안이 소환 프로그램을 작동시켰기에 이 세계로 넘어왔거늘 타마리안에게서 발생되는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서로 다른 차원이라면 소환 프로그램 외에는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었지만 같은 차원이라면 트리스탄과 타마리안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타마리안이 그 어디에 존재하더라도 그 위치를 트리스탄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설마 차원이동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엉뚱한 곳으로 와 버린 건 아닐까?
 결국 트리스탄은 타마리안을 찾는 걸 유보하고, 현재 위치와 주변 상황을 탐색하기 위해 탑재한 다섯 개의 정보위성을 모두 쏘아 올렸다.
 하나를 제외한 네 개의 정보위성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남은 하나는 근처 상공에 자리를 잡은 후 곧바로 내장된 근 1천 개 패밀리어를 지상으로 퍼트렸다.
 패밀리어는 손톱 크기의 작은 구슬 모양으로 땅 위를 이동하며 정보를 수집함으로서 트리스탄에게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초소형탐지기기였다. 표면이 카멜레온처럼 주변과 동화되는 색상을 유지하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탐사한 트리스탄은 일단 근처의 산맥 가운데 적당한 곳을 찾아 착륙하여 자리를 잡고 보호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트리스탄의 거대한 몸체는 곧 바위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트리스탄은 정보위성과 패밀리어들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여 현재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해 냈다.
 일단 이 세계가 원래 트리스탄이 왔던 타마리안이 있는 세계인 것은 확실했다.
 비록 트리스탄이 알고 있던 대륙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예전에 트리스탄이 존재했던 당시의 흔적이 유물의 형태로 아주 조금이지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는 예전과 너무나 크게 변해 있었다. 예전에는 하나의 거대한 대륙만이 존재하던 곳이 지금은 5개의 대륙으로 나뉘어 있었다. 트리스탄은 이에 대해 마지막 제국전쟁의 여파로 당시 대륙이 붕괴되고 지각변동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대륙들이 나타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시간상으로도 남아 있는 이곳의 역사서와 학자들을 통해 마지막 제국전쟁 이후 최소한 5천 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트리스탄의 분석으로는 5천 년이 아니라 1만 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트리스탄이 중원무림에서 보낸 시간과 비교했을 때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트리스탄이 중원에서 보낸 시간은 1천5백 년이 조금 넘을 뿐이었으니 1만 년 이상이 흘렀다는 것은 뭔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트리스탄은 이를 두고 차원 간에 나타나는 시간의 흐름에 차이가 있거나 차원이동이 느끼기로는 시간의 흐름이 거의 없다고 느껴지지만 실지로는 많은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알 수 없는 요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그런 것은 지나가기로 했다.
 
 우선 현 세계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섯 개의 대륙 중 네 개의 대륙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이 살지 않는 가장 작은 대륙은 수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몬스터 세상으로 그곳의 주인은 드래곤들이었다.
 인간이 사는 네 개의 대륙 가운데 현재 트리스탄이 정착한 대륙은 중앙대륙으로 시리어스 대륙이라 불렸다. 시리어스 대륙의 서쪽에 있는 대륙은 알파스 대륙, 동쪽에 있는 대륙은 트윌러스 대륙, 마지막 남동쪽에 있는 대륙은 라이드 대륙이라고 불렀다.
 시리어스 대륙에는 크고 작은 열 개의 국가가 있었다.
 다른 3개의 대륙이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중심으로 여러 작은 왕국들이 존재하는 형세인 데에 반해 이곳 시리어스 대륙은 큰 제국 없이 중소왕국들이 난립하여 조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실 시리어스 대륙도 불과 1백 년 전까지는 바이칸 제국이라는 대륙을 대표하는 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백 년 전, 타 대륙의 원조를 받은 주변 왕국들의 침공으로 인해 제국은 왕국으로 전락했고, 대륙은 과거 중원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절대강자가 없는 지금의 형세로 변해 버렸다.
 현재 이곳의 문명은 과거 트리스탄을 만든 고대문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졌다.
 
 이렇게 현재의 주변 상황은 순조롭게 파악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타마리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트리스탄은 과거의 자료를 토대로 지금까지 조사된 현 세계의 자료를 분석해 과거 아트반 제국의 위치를 찾는 동시에 타마리안이 있었던 위치로 추정되는 몇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보름 정도가 지났을 때 트리스탄은 타마리안의 잔해를 찾는 데 성공했다. 타마리안의 잔해는 시리어스 대륙을 가로지르는 산맥군의 깊은 산 속에서 발견되었다.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그 일부만이 지상에 살짝 드러나 있었는데 워낙 산맥 깊은 곳에 있어서 사람들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상태였다.
 트리스탄이 정보위성을 직접 그곳으로 보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타마리안은 이미 그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였다. 타마리안에 남겨진 기억회로를 분리해 기억회로에 남겨진 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타마리안은 예상대로 마지막 제국전쟁에서 파괴된 상태였다.
 다만 그중 일부인 보조 프로그램이 운이 좋아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오랜 시간 죽어 있던 보조 프로그램에 우연히 에너지가 유입되면서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던 트리스탄에 대한 소환 프로그램이 작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작은 지진이 발생했고 그 여파로 겨우 움직이던 보조 프로그램마저 완전히 파괴되어 작동불능이 되어 버린 것을 기억회로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결국 파황이 이 세계로 넘어온 것은 순전히 고물이 다 된 타마리안의 오작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안 그래도 타마리안을 보게 되면 다 부숴 버리겠다고 이를 갈던 파황으로서는 그나마 멀쩡한 머리(다른 부분은 없으니까)마저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애꿎은 트리스탄에게 화풀이를 해 댔다. 덕분에 트리스탄은 한동안 흥분한 파황의 눈치를 보느라 엄청 고생해야 했다.
 그러게 주인을 잘 선택했어야 했는데…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간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
 그렇게 한동안 고생하던 트리스탄을 구해 준 것은‘케빈’이라는 꼬마아이였다.
 
 당시 꼬마 케빈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일곱 살이던 케빈은 트리스탄이 자리 잡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어린아이였다. 때문에 트리스탄은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을 때부터 이미 그 아이와 할아버지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따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대가 트리스탄의 거대한 몸체를 안정시키기 딱 좋은 입지조건이었다. 다시 말해 트리스탄이 자리 잡은 곳은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꼬마의 가족만 트리스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멀지 않은 곳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일부러 트리스탄이 있는 곳을 향해 접근하지 않는 이상엔 쉽게 발견되지 않을 터였다. 또한 설사 사람들이 접근한다더라도 보호 시스템에 의해 작은 바위산으로 보일 트리스탄을 알아볼 걱정도 없었다.
 그런데 그 꼬마가 강물에 빠져 트리스탄이 있는 방향으로 떠 내려와 감시망에 자연스레 포착되었다.
 그날도 파황의 짜증에 시달리던 트리스탄은 파황의 관심을 돌릴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 떠내려가는 꼬마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파황의 반응은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그저 쯧쯧 하며 한번 혀를 차는 게 전부였다.
 인정머리 없는 놈!
 하지만 트리스탄으로서는 이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얼마나 시달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든 파황의 관심을 돌려야 했다. 잔머리 대왕! 트리스탄!
 트리스탄은 재빨리 떠내려가던 꼬마아이를 건져 센터로 이동시켜 왔다.
 아이가 센터로 옮겨졌을 때에는 이미 의식을 잃은 이후였다. 트리스탄은 재빨리 아이의 몸 상태를 체크해 갔다. 그러자 파황은 꼬마가 도착한 후부터 이전의 무관심한 태도에서 약간의 흥미를 드러내는 쪽으로 바뀌었다. 어찌 됐든 이 꼬마 녀석은 파황이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으니… 결국 잔머리 대왕 트리스탄의 승리였다.
 대형 스크린 속에서 센터의 중앙에 누워 있는 꼬마를 내려다보던 파황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마의 머리색은 희한하게도 흰머리였다. 노인의 머리색처럼 퇴색된 것이 아니라 윤기가 흐르며 생명력이 넘치는 새하얀 머리는 사실 자세히 보면 연하지만 은빛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꼬맹이라서 그런지 깨끗한 피부는 중원인에 비해 조금 하얀 피부라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트리스탄을 통해 이곳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모습(특히 머리색과 눈동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가까운 곳에서 실제로 보니 역시 느낌이 색달랐다. 또한 아직 어린놈이지만 꽤 괜찮게 생긴… 솔직히 눈 뒤집어지게 잘생긴 놈이기에 약간 신경이 거슬리기도 했다.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파황은 잘생긴 놈들에게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불행하게도 파황은 무림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인상파(人想派)의 대가였으니까.
 참고로 여기서 대형스크린에 나타난 파황의 본래 모습을 살펴보자.
 우선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얼굴을 사선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검상과 눈 밑을 지나가며 옆으로 반듯하게 얼굴을 이등분하듯 가로지르는 검상이 교차한 얼굴은 살벌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리고 날카롭게 번뜩이는 맹수의 눈과 쭉 찢어진 듯한 두터운 입술 사이로 가끔씩 나타나는 날카롭게 번뜩이는 이빨은 서로 이상한 조화를 이뤄 거의 살인적인 안면신공(顔面神功)을 자연스럽게 발휘했다. 이처럼 인상파의 초고수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니 가히 천하무적의 상판대기였다.
 여기서 역사적인 사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과거 파황이 마교의 고수들을 잡고 다닐 적에 마교의 고수 중 일부는 파황의 안면신공에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저세상으로 직행했다는 전설적인 미담(?)이 당시 마교 내부에 떠돌았다고 한다.
 아마도 파황의 더러운 성질은 이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이 아닐지…….
 
 의식을 잃은 지 꽤 지난 듯, 아이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는 게 이미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이의 상태를 빠르게 체크한 트리스탄은 곧바로 아이의 몸을 유리관 모양의 캡슐 안에 집어넣었고 위쪽에서 작은 마스크가 내려와 아이의 코와 입을 덮었다. 그러고 나서 캡슐 안은 곧바로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차 나갔다.
 -현재 이 아이의 상태는 가사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회복 가능성은?
 -일단 회복은 가능합니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
 -주인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아이는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아이로 보통의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다?
 파황의 반문에 트리스탄은 계속해서 뭔가를 체크해 나가며 대답했다.
 -예. 그 아이는… 자폐아(自閉兒)입니다.
 -자폐아?!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아이라는 말이죠. 자신의 자아를 외부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을 보호하려는 데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흐음~ 자폐아라…….
 파황은 자폐아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 와중에 트리스탄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물에 빠져 질식함으로써 뇌의 기능이 일시지간 멈췄기에 회복시킨다더라도 손상된 뇌기능에 의해 자폐증을 넘어 아예 백치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음, 백치라니……. 이 녀석 팔자도 참! 자폐증에… 백치. 완전히 산 넘어 산이군.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게 나았겠다.
 -한데…….
 불쌍한 꼬마 녀석 대신 신세타령을 해 주는 파황에게 트리스탄이 또 뭔가 말을 꺼내려는 듯하다가 흐리자 파황은 가볍게 짜증 한 방을 선사했다.
 -또 뭐야? 내가 말 끄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자기는 더하면서 괜히 자신한테만 그런다고 속으로 꿍얼거린 트리스탄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 아이의 유전자 반응과 뇌파 반응이 주인님의 기본조건과 상당히 유사한 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혹시?
 지금까지 남 이야기하듯 태평하던 파황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하며 반문하는 목소리는 놀람과 강한 기대감이 서린 음성으로 바뀌었다.
 -네! 주인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이 아이는 주인님이 이혼대법을 실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마 이 이상 신체반응이 일치하는 몸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오오~!!
 파황은 새로운 눈으로 아이의 모습을 세세히 살펴봤다. 아이를 살펴보는 파황의 모습은 매우 진지했다. 대형스크린에 비친 그의 눈빛은 차갑다 못해 냉정한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트리스탄의 에너지는 지금도 충전 중이었다. 파황이 중원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아마 앞으로도 최소한 1년 이상 걸리리라 보였다. 아니, 그 모든 걸 떠나서 중원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체질과 유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혼대법을 실행할 때 그 대상을 선택하는 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여러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아무나 데려다가 이혼대법을 실행한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아무나 데려다가 이혼대법을 실행한다면 천운이 따르지 않는 한 무조건 실패한다고 봐야 했다. 한 번의 실패는 곧 파황의 완전한 죽음을 뜻했다. 이는 이혼대법을 완성시켰을 때 트리스탄과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 아이는 지금 뇌사 상태에 가깝습니다. 즉, 이혼대법의 부작용인 영혼 충돌로 인한 피해가 최소화되는 최적의 상태입니다. 혹,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면 일부러 이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아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아이는 이대로 방치한다면 죽을 것이고, 치료한대도 백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트리스탄은 주인인 파황의 결정을 위해 나름대로 파황의 심적 부담을 줄여 주고자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주인인 파황이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멀쩡한 다른 사람을 강제로 데려다가 이혼대법을 실행하는 것보다 지금 이 아이에게 실행하는 것이 심적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안정성에서 이 아이보다 좋은 조건을 다시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파황은 오랫동안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생명에 귀천은 없다. 비록 자폐아로 살아왔고 백치로 살더라도 그 생명이 다른 생명에 비해 하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혼대법은 누군가에게 실행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무슨 인도주의자도 아니고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혼대법을 실행한다!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이혼대법 시스템 가동 준비!
 파황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트리스탄의 음성과 함께 센터 내 여기저기서 불빛이 번쩍이며 부드러운 기계음이 조금씩 들려왔다.
 -이혼대법 준비 완료!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트리스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미 캡슐 안 아이의 머리에 기이한 헬멧을 씌웠고, 유리관 속에 들어 있는 파황의 뇌에도 아이가 쓴 헬멧과 같은 모양의 헬멧을 쓴 모습이 보였다.
 파황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파황의 형상이 대형스크린에 비쳤다. 그리고 이어서 파황의 앞에는 캡슐 안의 아이가 누워 있는 모습이 비쳤다. 다만, 파황의 형상은 실체가 아닌 허상이었다. 파황의 마음에 따라 트리스탄이 이미지화시킨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나직한 파황의 음성이 들렸다.
 -시작한다!
 이제 파황의 왼손은 아이의 머리에 닿았고, 오른손은 아이의 전신 혈도를 두드렸다. 실제 상황에서는 파황의 의지에 따라 트리스탄이 파황의 손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한참을 움직이던 파황의 손이 멈추고 잠시 후 파황의 모습이 점차 아이의 머릿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져 가는 형태가 스크린에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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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
 그곳에 파황의 모습이 마치 공간을 열고 나타나듯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느끼는 낮선 공간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파황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파황의 눈앞에 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현재 파황이 들어온 몸의 주인인 그 아이의 영체(靈體)였다.
 아이는 투명한 막에 갇힌 듯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처럼 느껴졌다. 마치 투명한 막에 의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모습.
 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파황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앞으로 손을 내밀고 투명한 막을 어루만지듯 쓰다듬자 감겨 있던 아이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초점 흐린 아이의 금안(金眼)이 파황의 눈을 쳐다보고 파황도 아이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마치 눈으로 대화를 하듯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의 금빛 눈동자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무슨 슬픈 일이 있는지 작은 아이의 눈은 오직 이 감정만 가득했다. 그것은 바로 심해(深海)처럼 깊고 어두운… 슬픔!
 파황은 아이의 두 눈을 통해 그 아이의 지나온 생(生)을 보았고 아이의 감정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처럼! 자신이 그 아이인 것처럼! 영혼의 울림이 파도처럼 밀려와 파황의 심령을 뒤덮었다.
 꾸욱. 우두둑!
 파황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꽈악 움켜쥐며 뼈가 으스러지듯 쥐어졌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아이가 일어서서 파황의 앞에 섰다. 이에 파황의 손이 움직이며 아이를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을 통과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가만히 파황의 손길을 느끼는 아이. 파황이 두 팔을 벌리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안기는 아이의 몸이 파황의 품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파황에게 아이가 흡수되는 것 같아 보였고, 달리 보면 아이가 파황의 몸을 통과하며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가 사라지자 파황의 영체가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원래 파황의 모습에서 은빛 머릿결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런 변화 속에 의식이 흐려지던 파황은 점차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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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도 없는 산 속을 헤치며 달려가는 여인.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연신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는 여인의 품에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가 안겨 있다.
 소중한 보물인 양 갓난아기를 가슴에 꼭 안고 걸음을 재촉하는 여인.
 여인 앞에는 어떤 젊은 기사가 길을 인도하듯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한다.
 갑자기 양옆에서 덮쳐드는 두 명의 복면인들.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젊은 기사.
 숨 막히는 살기와 번쩍이는 검광을 뒤로하며 도망치는 여인.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베어 넘기는 젊은 기사.
 기사의 검을 따라 솟구치는 붉은 피!
 
 그에 따라 사방에서 죄어들며 더욱 짙어지는 살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으로 여인에게 다가왔다.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여인은 가녀린 손으로 품안에 있는 아기의 얼굴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케빈, 내 아가! 착하지. 조금만 참으렴.”
 보석처럼 영롱한 여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품안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의 작은 얼굴 위로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엄마! 울지 마! 나 괜찮아!’
 여인의 품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소리 없는 외침. 아기의 그 소리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아기의 어머니조차…….
 하지만 그 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여인은 오늘도 눈물을 흘린다.
 오지 않는 님을 원망하며, 만날 수 없는 님을 그리워하며 여인은 오늘도 눈물을 떨구고 있다.
 그런 여인을 말없이 지켜보는 아이가 있다. 엄마는 언제나 슬퍼하신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지켜봐야 하는 아이도 슬프다.
 여인이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지만 서글퍼 보인다.
 "케빈, 이리 오렴. 우리 착한 아들, 나중에 아빠 만나면 멋진 모습 보여 줘야 할 텐데.”
 잠시 아이를 향해 슬픈 미소를 보여 주던 여인이 고개를 돌린다. 여인의 얼굴에선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언제부터인가 무표정하게 변해 버린 아이의 얼굴.
 하지만 그 눈빛은 언제나 한 가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슬픔이란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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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눈을 뜬 건 이혼대법이 실행된 지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트리스탄은 깨어난 아이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는 몇 번 금빛 눈을 깜박거리더니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이내 작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성공한 것 같군.”
 작지만 또렷한 아이의 음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은 바로 중원의 언어였다.
 -이혼대법의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이제 새로운 삶을 얻으셨군요.
 "그래, 고맙다. 몸 상태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군.”
 -주인님이 깨어나기 전에 체크해 본 결과 신체 상태는 모두 정상임을 확인했습니다.
 "흠,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하는 일만 남은 건가. 완성된 새로운 파황무를 통해서!”
 며칠 후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새로운 신체에 대한 적응을 어느 정도 마친 파황은 파황무의 수련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수련해야 할 것은 신(神)의 두뇌를 갖기 위한 일종의 두뇌개발대법인 전뇌각성대법(全腦覺醒大法)이었다.
 인간의 신체 가운데 가장 신비한 영역으로 가장 많은 신경세포와 미세혈관들이 자리 잡은 뇌(腦)를 기공과 침술을 응용한 의술을 통해 일깨움으로써 인간의 두뇌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대법이었다.
 파황무의 방대한 양을 인간으로서 모두 이해하고 익혀 나가려면 다른 수련에 앞서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트리스탄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창안한 대법이기도 했다. 또한 파황의 지금 상태로는 펼치기에 무리인지라 트리스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파황의 앞으로 좌석 하나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좌석에 앉자 바로 천장에서 또 다른 헬멧이 내려와 이내 머리에 씌워졌다.
 -전뇌각성대법을 시행하겠습니다.
 예의 트리스탄의 음성이 울리고 곧바로 파황의 머리에 쓴 헬멧에 불빛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그러고 나서 전뇌각성대법이 끝난 후 파황이 앞으로의 수련계획에 대해 세우고 있을 때였다. 트리스탄을 통해 파황은 자신이 차지한 아이의 조부 되는 노인이 아이를 찾아 이 근처까지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파황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트리스탄에게 노인을 따라가 살겠다고 말했다. 트리스탄은 예상치 못했던 파황의 말에 놀라지만 파황의 똥고집을 알기에 아무 말 없이 필요한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필요한 것이 이 대륙의 언어이기에 지식주입기를 통해 그동안 분석한 이 세계의 언어를 주입시켰다.
 잠시 후 파황은 트리스탄에서 나와 그 아이가 되어 노인의 앞에 나섰고, 그 이후 노인과 함께 살아갔다.
 노인은 죽은 줄 알았던 손자가 살아 있는데다가 자폐증에서도 벗어난 것을 보고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기뻐했다.
 파황은 자신이 차지한 아이의 이름이 케빈이라는 것과 노인이 케빈의 외조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케빈의 영체와 만나면서 영혼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훗날 파황의 성격이 예전과는 조금씩 달라지는 데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노인과 같이 살게 된 파황은 노인 몰래 7년간 파황무를 수련했고, 노인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다시 파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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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동안 과거를 회상하던 소년 파황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여행 준비에서 빠뜨린 것이 있나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았다.
 원래 파황은 트리스탄이 에너지 충전을 마치면 자신이 살던 세계로 다시 차원이동을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그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이전 세계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생각하면 꼭 이전 세계로 돌아가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뭐 그래도 나중에는 돌아갈 생각이었다. 고향은 그쪽 세계니까.
 파황의 출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트리스탄뿐. 과거 그가 활동하던 중원에서도 그의 출신에 대해 아는 이는 전무했다. 만약 파황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아 묻혀 버릴지도…….
 어쨌든 간에 급하게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이곳이 이전 세계보다는 기의 분포가 훨씬 높기에 무공수련을 위해서도 이곳이 이전 세계보다 그만큼 유리했다.
 현재 파황의 무력은 그가 완성시킨 초신무 이전의 경지인 신무경(神武境)의 수준에 비하면 정말이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비록 지금의 몸이 이전의 몸과 기본조건은 흡사하다고 하지만 완전히 같을 수 없기에 이혼대법이 성공한 후에도 영(靈)과 신(身)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하는 게 생각보다는 어려웠다. 이러한 제약은 파황무의 수련을 방해했고, 자연 수련진도가 생각보다 느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도 지난 7년간의 수련이 헛되지는 않아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 한 몸 지키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 여행을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파황은 준비가 완벽하다는 생각에 트리스탄에게 간단한 작별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트리스탄이 워낙 크기에 같이 움직인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기고 그 대용품(?)으로 묵혈환을 챙겨 떠나는 것이다. 어차피 묵혈환이 있는 이상 트리스탄과 같이 있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트리스탄의 본체에서 나온 파황은 곧바로 산야를 달려 나갔다. 이미 근처 지형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기에 파황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파황의 신형은 거의 날아가는 수준이었다. 파황의 귓가로 바람이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갔다. 폐부 깊숙이 들여 마신 공기가 너무나 시원했다.
 순식간에 산 둘을 넘어섰고, 눈앞에 보이는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산은 얼마나 높은지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산이었다.
 파황의 신형은 점차 빨라져 가히 질풍처럼 산 정상을 향해 날아올랐다. 엄청난 속도였다. 오래지 않아 구름을 뚫고 산 정상에 올라선 파황은 발밑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장관을 눈이 부신 듯 쳐다보았다.
 하늘엔 태양이 번쩍이며 광휘를 사방에 뿌려 대고, 발밑에는 손만 뻗으면 잡힐 듯이 새하얀 구름이 모여 너무나 아름다운 운해(雲海)가 형성되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운해 사이에 간혹 드러나는 지상의 풍경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처럼 작아 귀엽게만 보였다.
 대자연이 만드는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는 파황의 금빛 눈동자는 연신 반짝거렸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상쾌함을 안겨 주며 파황의 은발을 부드럽게 휘날리고 걸치고 있던 검은 망토를 가볍게 펄럭이게 했다.
 한동안 그 자리서 꼼짝도 않던 파황, 크게 한번 숨을 들여 마신 후 엄청난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ㅡ!!”
 천지사방을 떨어 울리는 듯한 파황의 함성은 수없이 연결되어 있는 이 거대한 산맥을 따라 진동하며 메아리쳐 아주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동시에 산 여기저기서 수많은 산새들이 갑작스런 함성에 놀라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며 퍼져나가 또 다른 엄청난 장관을 연출했다.
 그 순간 파황의 작은 몸이 지면을 힘차게 박차며 날아오르더니 온몸을 활짝 펼치며 이내 부드럽게 펼쳐진 운해 위로 떨어져 내렸다. 파황의 몸은 순식간에 운해를 뚫고 지상을 향해 떨어져 갔다. 파황의 귓가로 추락하는 속도에 의해 세찬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쉬이이― 파라라라―락.
 파황의 은발과 망토가 허공으로 바람을 타고 솟구쳤다. 그 와중에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눈부시게 그려졌다. 바람을 타듯 활짝 펴진 상태로 떨어져 내리는 파황과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는 산, 지상의 숲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산새들이 서로 어울리자 한 폭의 멋진 그림이 연출되었다.
 그렇게 파황은 지상으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3. 반마족 알칸트라
 
 해가 저물어 갈 무렵, 파황은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파황의 걸음은 여유 있었고, 오른손에는 가볍게 살랑거리는 용혈선을 펼쳐 보였다. 아직 봄인 데다 해가 저물면서 기온도 떨어지고 있는데 부채질이라니……. 아무리 폼으로 그런다지만 정작 이런 상황에 그런 행동은 폼이 안 난다는 걸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모르는 파황이었다.
 멀리서 내려다본 마을은 20여 가구 정도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파황의 얼굴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조금씩 구겨지고 있었다. 어느새 가볍게 살랑거리던 용혈선은 접어진 채 손에 들려 있을 뿐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잠시 멈춰선 파황은 마을 전체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멈췄던 걸음을 옮겨 마을로 들어갔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는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너무나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마치 사람이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마을의 모습은 왠지 귀기가 서린 듯이 음산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비록 오가는 사람도 없이 조용한 마을의 모습이었지만 파황의 예민한 감각은 많지는 않지만 이곳에 분명히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몇 집을 제외하고는 다 비어 있는 빈집이었지만…….
 파황은 지금 상당히 기분이 꿀꿀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새 출발해 보겠다고 나선 길에 처음 본 마을이 이런 다 죽어 가는(?) 마을이라니……. 상승했던 기분이 완전히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객잔 같은 사람이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일단 사람이 있는 가까운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파황이 몇 번을 두드리며 주인을 청한 후에야 겨우 나이 드신 노인 한 분이 살짝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휴~, 혼자 여행하기엔 아직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혼자서 어떻게 이 마을까지 오게 됐는지 모르겠군. 근래 들어 밤이 되면 마을 근처에 마족이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사람들을 잡아가니 서둘러 피하게. 마침 옆집이 비어 있으니 우선 그곳에 숨었다가 날이 밝으면 서둘러 떠나는 게 좋을 게야.”
 노인은 소년 파황이 혼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 문을 닫아 버렸다.
 정말 황당했다. 새로운 세상에 나와 처음 본 마을에서 그것도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망가질 줄이야. 파황의 얼굴은 마을에 들어올 때보다 더 구겨지고 있었다.
 ‘마족이라고? 감히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으드득! 걸리면 넌 주욱었다!’
 파황은 노인이 가르쳐 준 옆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이… 살벌한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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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은 주인들이 서둘러 떠났는지 큰 가구들은 남겨져 있었다. 파황은 대충 깨끗한 곳을 골라 앉아 트리스탄을 불렀다. 묵혈환을 통해 파황의 머릿속으로 트리스탄의 음성이 들려왔다. 트리스탄에게 간단히 저녁식사를 부탁하자 잠시 후 트리스탄에게서 준비가 끝났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오른 손목에 채워진 묵혈환을 통해 아공간을 열고 트리스탄이 집어넣은 음식을 꺼냈다. 묵혈환을 이런 용도로까지 활용하다니. 파황의 잔머리도 트리스탄에 못지않다는 걸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묵혈환은 파황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능 여행장비였다.
 파황이 한참 배를 채우던 어느 순간. 음식을 향하던 파황의 손이 멈춰지더니 갑자기 파황이 먹던 음식을 엎어 버리고 방문을 부수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파황은 망설이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 어두웠지만 달려가는 파황의 발걸음은 어둠 따윈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고 그런 파황의 금안은 어둠과 동화되듯 눈빛이 완전히 안으로 갈무리되어 어둠 속을 꿰뚫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파황무(破皇武) 초상감각비결(超想感覺秘訣) 극암시(極暗視)
 “이눔의 자식들! 밥 먹을 때 나타나 밥도 못 먹게 하다니… 니들은 오늘 주욱었다!!”
 마을 밖. 파황이 달려가는 방향의 숲 속에서 느껴지는 세 개의 기운들은 분명 중원의 마도고수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유사한 마기(魔氣)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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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세 인영이 검을 마주하고 있었다. 셋 중 유난히 덩치가 큰 거인을 가운데 두고 다른 두 사람이 에워싸고 있는 형세였는데 가운데 거인의 등에는 뭔가 길쭉한 것이 천으로 말린 채 매여 있다. 세 사람 모두 어둠과 동화되는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들의 사용하는 검마저도 검은 흑검(黑劍)이었다.
 “크크, 알칸트라! 네놈이 감히 일족의 보물을 노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키콘! 몬데스는 지금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려 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우리 일족의 멸망을 불러올 만큼 위험한 생각이다.”
 “닥쳐라! 알칸트라! 네가 감히, 감히 일족의 수장이신 그분을 능멸하다니!”
 “키콘, 알칸트라는 이미 일족의 배신자다. 말은 필요 없다. 놈을 죽이고……. 일족의 보물 ‘다크스타’를 회수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중앙의 거인, 알칸트라를 향해 후면에 있던 베라가 단호한 음성과 함께 덮쳐 갔고 베라의 공격을 신호로 키콘의 검도 움직였다. 알칸트라는 순식간에 짓쳐들어오는 두 사람을 피해 옆으로 물러서며 자신의 덩치만큼 큰 흑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챙! 채앵!
 검들이 부딪히기 시작하면서 주변은 온통 세 사람이 내뿜는 살기와 마기로 뒤덮였다. 그들의 흑검은 연신 상대의 빈틈을 찾아 파고들며 서로의 목숨을 위협했다. 번뜩이는 묵광이 교차할 때마다 섬뜩함을 불러일으켰다.
 거인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힘과 장검의 길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접근을 막으며 두 손으로 휘두르던 검을 어떨 때는 한 손으로 휘두르는 괴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인을 협공하는 두 사람은 힘과 병기의 차이 때문에 검끼리의 정면충돌은 되도록 피하면서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협공의 이점을 살려 치고 빠지는 방법으로 거인의 몸에 하나씩 착실하게 상처를 늘려 주고 있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셋 모두 몸에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손상된 세포가 재생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기에 웬만한 상처들은 숨 몇 번 몰아쉬는 동안이면 사라질 정도였다.
 그들의 전투가 점차 치열해지며 어느새 그들의 검에서는 검기가 뿜어 나왔다. 전투가 치열해지는 가운데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흥미 있게 구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금 작아 보이는 인영은 조금 전부터 숨지도 않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보란 듯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비록 거리가 조금 있고 달이 구름에 가린 상태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세 사람 모두 아까부터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오직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서로 검을 맞대며 저토록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이라면 단순히 어둠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중간에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리가 조금 있다고 해도 불과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데 모른다는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저것들이 마족인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호오~! 상처의 회복속도가 엄청 빠르군. 뭔가 특이한 기공이라도 익혔나?’
 흥미로운 듯 지켜보는 작은 인영은 계속해서 관전평(?)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기라……. 본격적으로 싸우는군.’
 ‘그나저나 몸놀림은 꽤 괜찮은데 초식운용에 있어서는……. 단순 무식한 놈들이군!’
 ‘저걸 기본기는 충실하다고 봐줘야 되나? 몸에 축적된 내기(內氣)에 비해 검술이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아니지. 그렇군. 이 세계가 중원보다 기가 풍부하니 저런 현상이 나타나도 이상하진 않겠어.’
 ‘힘 하나는 알아줘야겠네. 특히 저 곰 같은 놈은! 그래 봤자 근육만 키운 무식한 놈이지만.’
 ‘하암, 슬슬 지겨워지는군. 볼 만큼 봤으니 이제 내 볼일을 봐야겠지?’
 “야! 잠깐 멈춰봐라!”
 한참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던 세 사람의 몸이 떨어지면서 모두들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가 꺾어지도록 홱 하고 돌렸다. 반응으로 봐서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의 눈은 소리가 들려온 어둠 속을 주시하며 안력을 높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뭔가가 자신들을 향해 움직이는 걸 느끼고는 다시 어둠 속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마침 구름 속에 숨었던 달님이 살짝 고개를 내밀며 어둠의 일각이 달빛에 조금씩 무너져 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발끝부터 조금씩 드러나는 모습. 어둠 속을 주시하던 세 사람의 눈이 점차 커져 갔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처음 보는 이상한 복장에 검은 망토를 걸친 인영.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서서히 모습을 보이는 어둠 속의 물체는 분명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할 정도로 어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은발의 소년!
 갑자기 등장한 소년을 보는 세 사람의 얼굴엔 안도나 비웃음이 아닌 놀람과 긴장의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년에게서 아무런 생명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그 어떤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존재.
 거기에 얼굴마저도 무표정이었다. 소년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낌새를 느꼈을까. 소년이 걸음을 멈추자 그제야 소년에게서 인간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소년의 미성!
 “니들이 걔들이냐?”
 “……?”
 “……??”
 “……???”
 세 명의 검사들은 벙찐 모습으로 굳어 버린 채 소년 파황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앞 뒤 다 잘라 버린, 내용도 알 수 없는 반말이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이것들이… 내 말을 씹어?”
 무표정이던 파황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며 험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자기의 실수는 느끼지도 못하는가 보다.
 어린놈에게 한순간 긴장했다는 사실도 기분 나쁜데 건방진 욕설까지 듣자 성질 급한 키콘은 뚜껑이 열려버렸다.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깝죽거리는 어린 놈. 당연히 키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곱지 않았고 키콘은 자신이 지금 하는 말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불행히도 이 순간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크악~! 이 건방진 흰머리 꼬마애송이가! 생긴 건 계집애같이 생겨서는 싸……. 으악! 커~억!”
 언제 움직였을까?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던 키콘의 앞에 파황이 서 있었고 키콘은 왼쪽다리가 부러진 채 무릎 꿇은 자세로 파황의 작은 손에 목이 잡혀 있었다.
 근처에 있던 베라와 조금 떨어져 있던 알칸트라는 두 눈을 부릅뜨고 파황과 키콘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뭐, 뭐야? 보…보지 못했다! 저 녀석의 움직임을 이 내가… 눈앞에서 보지 못하다니…….’
 베라는 지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밤이라 조금 어둡긴 하지만 어둠의 일족인 자신에게 이 정도 어둠은 문제가 안 되었다. 한데 눈앞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저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설마 저 어린 소년이 자신의 눈을 피할 정도의 강자란 말인가?
 ‘방금 전 그 움직임. 키콘의 앞에 다가서는 건 보지 못했지만… 키콘을 제압하는 모습은 흐릿하게나마 보았다! 저 아이… 무서운 아이다!’
 키콘의 근처에 있던 베라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그보다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알칸트라는 볼 수 있었다. 파황이 키콘을 제압하는 모습을!
 키가 작은 파황이 키콘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발끝으로 키콘의 왼쪽정강이를 차 부러뜨리고 그 충격으로 앞으로 쓰러지듯 몸을 숙이는 키콘의 목을 왼손으로 움켜잡는 모습. 그 모습을 알칸트라만은 보았던 것이다.
 “방금 뭐라 지껄였냐?‘흰’머리라고? 잘 봐! 니 눈엔 이게 흰머리로 보이냐?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보지?”
 “컥! 커커~억!”
 목을 잡은 왼손에 좀 더 힘을 가하며 자신의 머리를 키콘의 눈앞에 들이미는 파황. 입가에 살짝 작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이마에 툭 튀어나온 혈관 마크 하나가 파황의 지금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키콘은 목을 어떻게 잡힌 것인지 제대로 반항 한번 못하고 캑캑거리고 만 있었다. 하지만 파황의 불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꼬마애송이~이! 너 몇 살 먹었어? 으드득!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내가 임마 제때 장가만 갔어도 지금쯤 내 후손이 작은 왕국 하난 세웠겠다, 이 자식아!”
 “……?!”
 “……??!!”
 “그리고 또 뭐? 계집애같이 생겼다고? 빠드득!!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허! 그런 말 같지도 않는 개소리는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평생 이런 심한 모욕(?)은 받아 본 적이… 아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거늘. 오래 살다 보니 정말 별소리를 다 들어 보는구나. 크아악!! 귀가 썩는 것 같다! 이게 다 이 자식 때문이야! 죽어라! 이눔의 자식!!”
 파황은 말하다 말고 완전히 뚜껑이 열려 버렸다.
 분명히 은발이 맞는데 백발 그것도 흰머리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나, 감히 증손자뻘도 안 되는 놈이 무려 1천5백 년도 넘게 살아온(너무 오래 살아서 자기 나이도 모른다) 자신에게 꼬마도 아니고 애송이도 아니고 꼬마애송이라는 망언을 퍼붓지 않나, 결정적으로 계집애 같다는 저주에 찬 극악한 망언(?)을 들었으니 아무리 파황이 요즘 순해졌다지만(?)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가진 겉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해 주지 않는 파황이었다. 아니, 고려한다 해도 아주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여자애 같다고는 절대,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퍽퍽퍽퍽퍼어억!!!
 빠바바바빡!!!
 펑!
 “크억! 우어어억!! 끄으으윽!! 끼에에~엑!!”
 목을 잡았던 파황의 손이 풀리는가 싶더니 목 대신 양어깨를 움켜쥐고는 발로 키콘의 다리(무릎 꿇고 있으니 정확히는 허벅지다)를 연속해서 사정없이 걷어찼는데 마지막 발차기가 그만 가운데 다리(?)를 작살내 버렸다. 이 역시 무릎 꿇고 있는 상태라 발생한 불행한 사고였다.
 이를 본 베라는 순간적으로 움찔했고 알칸트라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발차기가 끝나자마자 왼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오른손은 번개 같은 연타로 키콘의 안면을 뭉개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
 머리칼을 놔주며 가볍게 오른손바닥으로 가슴을 톡하고 두드려 주었다.
 파황무(破皇武) 파황권(破皇拳) 암파신류(暗破神流)
 암파신류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극치로 겉은 멀쩡해도 안은 다 부숴 놓는 지독한 수법이었다.
 이 모든 공격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면서 키콘은 연신 비명을 지르다 기괴한 괴성을 마지막으로 토해 내며 한 손은 가운데(?)를 다른 한 손은 얼굴을 감싸는 비참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 그대로 쓰러진 키콘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즉사였다. 보이진 않았지만 키콘의 몸 안은 지금 제 모양을 찾아볼 수 없는 엽기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이, 이런! 빌어먹을!!”
 키콘이 쓰러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베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일들이 너무 빨리 일어나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았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으니…….
 지금은 후회할 시간도 없었다. 키콘을 무자비하게 잠재운 파황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보았던 것이다.
 다크스타를 회수하지 못한 지금 후퇴란 없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베라의 몸이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가며 최고의 스피드로 파황에게 접근함과 동시에 그의 흑검이 최단거리의 직선으로 뻗어갔다.
 미처 예상치 못했을까? 베라의 흑검이 몸 한 치 앞까지 파고들었는데도 파황의 움직임은 없었다. 베라의 입가에 확신에 찬 미소가 걸리는 순간 파황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미소가 걸렸다.
 파황무(破皇武) 파황칠종신법(破皇七宗身法) 풍류신(風柳身)
 흑검이 파황의 몸을 뚫고 들어가려는 순간 목표가 순간적으로 흔들거렸다는 느낌을 받으며 베라의 몸은 검과 함께 마치 파황의 몸을 통과하듯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빠르게 몸을 반전시키며 돌아본 베라의 시선 속에 살짝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파황의 앳된 얼굴이 잡혔다. 그 앳된 얼굴엔 지금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베라는 이를 악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기습이 실패한 이상 신중히 틈을 노려야 한다. 어차피 상대는 빈손! 설령 실력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검을 쥔 자신이 불리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파황과 베라가 대치하고 있자 파황의 뒤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알칸트라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알칸트라로서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베라는 물론, 일족을 두려워하며 경원시하는 인간들도 적이기 때문이다.
 뒤쪽에서 수상한 기운을 느낀 파황의 고개가 베라를 앞에 두고도 뒤를 향해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순간 마주치는 파황의 가라앉은 눈빛과 알칸트라의 놀라는 눈빛이 교차했고 빈틈을 노리던 베라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기를 뿌리며 파고들었다.
 베라의 공격이 파고들자 파황의 몸이 다시 좀 전의 이상한 움직임(풍류신)을 보이며 피해 냈다. 베라의 눈에 이번에는 파황의 움직임이 보였다. 파황의 몸은 바람에 풀잎이 흔들거리듯 묘하게 흔들리며 베라의 공세를 피해 낸 것이다. 그것도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알칸트라를 바라보며…….
 베라는 계속해서 폭풍처럼 몰아붙였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풍류신의 기묘한 움직임을 잡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뒤에 있는 거인이 텔레포트 마법을 준비 중입니다.
 왼손의 묵혈환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파황에게 할 말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 이내 머릿속에 울려오는 트리스탄의 음성에 파황의 움직임이 변했다.
 파황무(破皇武) 파황권(破皇拳) 칠성연환비격(七星連環秘格)
 퍼퍼퍼퍼퍽!!
 베라의 공격을 흘려보내던 파황이 베라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연속되는 일곱 번의 강력한 타격이 베라의 전신에 한꺼번에 작렬했고 베라는 입에서 피를 뿌리며 그대로 튕겨져 날아갔다.
 베라에게 공격을 성공시키자마자 파황은 이미 신형을 날리며 알칸트라를 향해 중지를 퉁겨 내고 있었다.
 파황무(破皇武) 지공(指功) 일지광(一指光)
 파황의 손끝에서 한줄기 빛이 공간을 가르며 뻗어 나가 알칸트라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했다. 막 캐스팅을 마치고 텔레포트를 실현 하려던 알칸트라는 상상을 불허하는 파황의 공격에 주변의 마나가 흩어지는 걸 느끼며 쓰러졌다.
 트리스탄은 정보위성을 통해 주변상황을 생중계로 보면서 분석하며 파황을 보좌하고 있다가 알칸트라가 시도하는 마법을 파악하고는 마법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파황에게 바로 알려 준 것이다.
 파황은 알칸트라에게 다가가 도망가려 한 죄라며 몇 대 패주고는 발모가지를 잡고 질질 끌어다가 베라 옆으로 다가갔다. 베라는 그제야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파황이 다가오자 포기했는지 그 자리에 그냥 누워 버렸다. 파황이 둘을 한곳에 모아 놓자 베라가 물었다.
 “크윽! 우리들을 어쩔 셈이냐?”
 “흐음, 확실히 놀라운 회복력이군. 네놈도 그렇고 이 덩치도… 니들이 정말 마족이냐?”
 베라의 물음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 파황이었다. 베라의 얼굴이 살짝 구겨질 때 대답은 의외로 알칸트라에게서 나왔다. 알칸트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땅바닥에 앉고 있었다.
 “마족이 아니라 반마족이다!”
 “반마족? 그런 것도 있었나?”
 파황이 갸웃거리자 트리스탄이 설명을 이었다.
 -반마족은 고대문명 시대엔 없었던 종족으로 마계의 고위마족이 인간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돌연변이 종족입니다. 3백 년 전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마족의 힘을 일부 물려받아 마법에 능하고 신체회복능력이 트롤보다도 더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마검사 중 십중팔구는 반마족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족의 피를 이어받아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특징이며 보통 후손은 한 명만을 두기에 수는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모든 국가에서 반마족은 마족처럼 적대시하기에 드러내 놓고 활동하지 못해 비밀이 많은 종족입니다. 워낙 알려진 것이 적어 수집된 정보가 없었기에 미처 주인님께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여튼 이놈의 동네는 별의별 게 다 있군. 정말 재미있는 곳이야.”
 파황이 생각하기에 이 세계는 정말 흥미로운 곳이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몬스터라는 희한한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마법이라는 이상한 술법이 판을 치는가 하면 인간마저도 가지각색(머리와 눈동자 색)이고 다양한 유사인종까지.
 그뿐인가. 정령에, 마족에 심지어는 신(神)까지 있다니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실 마족이나 신은 이곳에서도 신화나 전설처럼 전해지는 얘기였지만 그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들이 여럿 있어서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흥미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예 인간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러려니 하련만 인간이 이런데서 산다는 게 파황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귀신이 사는 곳이라면 몰라도…….
 하긴 어떻게 보면 트리스탄 같은 이상한 놈(?)도 만들어 냈던 곳이니 그리 신기할 것도 없지. 솔직히 이놈보다 더 특이한 놈은 이전에도 없었고 아마 이후에도 없지 않을까 싶다. 고대문명 시대에도 초자아 인공지능은 이놈이 유일하니까.
 언제였던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파황에게도 순백의 새하얀 꿈이 있었다. 무(武)를 배우기 이전… 세상의 더러움을 모르고 피를 몰랐던 시절… 잊혀진 어린 시절의 꿈! 그 꿈이 파황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그 잊혀진 꿈을 7년 전 한 아이를 통해서 파황은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파황의 꿈은 다시 시작되었다.
 “한 가지만 묻자. 네 정체는 뭐지? 인간이 맞긴 맞나?”
 찰나지간 이어지던 파황의 상념을 끊고 들려오는 음성. 파황의 시선이 이동하며 몸을 일으켜 베라에게서 멈췄다. 베라를 향했던 시선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알칸트라를 향했다.
 “니들이 저쪽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밤마다 잡아가는 놈들이냐?”
 베라의 질문에 파황은 대답 대신 질문을 이었다. 물론 그 대답은 아까 착실히(?) 답변을 한 알칸트라가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알칸트라는 파황의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이번에도 착실히 대답한다.
 “나는 오늘 저녁에야 여기 도착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저 녀석들이 그랬을 거다.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
 파황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어서 대답해준 것이지 절대 고자질이 아니었고 절대 쫄아서가 아니다. 사나이 갑빠가 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허험! (알칸트라의 주장)
 파황의 시선이 다시 베라에게로 향하며 눈에 힘을 줌으로써 무언의 대답을 강요했다.
 “저 마을과 무슨 관계지?”
 어느덧 아까 당했던 상처가 거의 회복되어 가자 베라는 기회를 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빠각!!
 순간, 섬뜩한 타격음과 함께 주저앉아 있던 베라의 고개가 꺾어지며 10여 미터 밖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쓰러진 베라의 목은 옆으로 돌아가 있었고 파황의 오른발이 들려져 있는 것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질문은… 내가 하는 거다! 멍청한 놈이 눈치도 없어.”
 ‘어린놈이… 정말 성질 더럽군! 그나저나 베라 녀석, 평소엔 그렇게 약삭빠르게 행동하더니 오늘은 왜 저래? 몇 번 씹혔으면 눈치 챘어야지. 눈치 없는 나도 그 정돈 알겠드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동자만 굴리는 알칸트라. 파황과 베라를 번갈아 보며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눈치가 빨라진 알칸트라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베라와 자신의 위치가 바뀌지 않았을까.
 파황은 알칸트라를 보며 턱짓으로 베라를 가리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알칸트라는 그 뜻을 알아챘는지 베라를 끌고 다시 파황의 앞으로 왔다. 정말이지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눈치 빠른 알칸트라의 행동에 파황은 흡족한 듯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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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신 빛이 느껴졌다. 베라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점차 깨어나며 무거운 눈꺼풀을 조금씩 밀어 올렸다. 시야가 열리며 아침햇살이 눈으로 파고드는 가운데 눈부신 햇빛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역광으로 인해 누군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반짝이는 듯한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은발을 보자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고 그제야 비로소 베라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냈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베라의 몸이 짧은 경련을 일으켰다. 다행히 베라의 목은 밤사이 많이 회복되어 움직일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드나 보지?”
 “으윽…….”
 베라는 아픈 목을 붙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막 베라가 몸을 일으켰을 때 무극신갑을 끼고 있는 파황의 검은 손에 어디서 났는지 모를(아공간에서 꺼냈다. 참고로 묵혈환에 연결된 아공간은 무기창고 역할도 한다) 목봉(木棒)을 움켜쥐고는 중얼거리듯 한마디 꺼냈다.
 “그럼 이제… 어제 못 다한 볼일을 봐야겠지?”
 의미심장한 말에 베라가 몸을 흠칫 떠는 순간 파황의 손에 있던 목봉이 공기를 가르며 베라의 몸 위로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퍽퍽퍽퍽!! 빠각!!
 “크아아아아~~!!”
 무자비한 난타에 베라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마지막 의식을 잃기 직전 베라는 파황이 남기는 마지막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니들 때문에 마을에서 느낀 비참한 기분과 어제 저녁을 망친 대가다.”
 받을 건 받는다! 파황의 신조 중 하나였다. 지독한 놈!
 정신을 잃은 베라를 뒤로하고 파황은 알칸트라와도 헤어졌다. 그래도 알칸트라는 파황에게 비교적 잘 보였기에 멀쩡히(?) 헤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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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이틀 뒤에야 파황은 제대로 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작은 마을들은 그냥 지나치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필요한 물품들은 비축된 재료를 이용해 다 만들어 주는 트리스탄이었지만 이 돈은 재료가 없다는 이유로 보석만 몇 개 겨우 만들어 줄 뿐이었다.
 트리스탄은… 싸구려(?)는 취급하지 않았다. 질 안 좋은 금속은 안 키운다나. 금도 트리스탄에게는 활용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싸구려취급 당했다. 보석도 다른 물품 준비하고 선체에 이상이 있을 경우 자체수리를 위해 필요한 양을 남겨둬야 한다고 더 이상 안 만들어 줬다. 짠돌이 같은 놈!
 당연히 작은 마을에 보석가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고 잔돈(?)을 구하려면 도시로 가야 했다.
 파황이 도착한 곳은 시리어스 대륙의 북부에 있는 라피돈 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중소도시였다.
 여기서 파황은 모자라는 자금 확보를 위해 부업(수련을 핑계로 한 사냥)으로 마련해 둔 짐승가죽들과 트롤의 피와 사체들을 전부 처분했다. 돈이 되는 몬스터 가운데 드래곤을 빼고는 최고급품(?)으로 꼽히는 트롤은 파황에게 1순위 사냥감이었다.
 파황이 살았던 그 일대에서는 트롤의 씨를 말려 버리는 생태계 파괴의 만행이 벌어졌었다. 그렇게 사냥되었던 트롤 중 일부는 트리스탄이 포션을 만드는 데 사용했고 일부는 아공간에 저장되었다가 이번에 처분당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법 두둑한 자금을 확보한 파황은 하루를 편히 쉬고는 즐거운 기분으로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
 며칠 동안은 그런 대로 순조로운 여행길이었다. 가끔 신경을 거슬리는 존재들(양아치, 산적)이 몇 있었지만 첫날의 반마족 사건 이후 되도록 피를 보지 말자고 다짐했기에 그냥 좋게 훈계(?)만 하고 모두들 돌려보내 줬다. 정말 파황 많이 착해졌다.
 
 오늘도 용혈선을 흔들며 길을 나서려는 파황 앞에 누군가의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관의 2층에서 1층 식당으로 내려가는데 저쪽 식탁에 등을 보이고 앉은 엄청난 거구의 사내.
 ‘어? 저 뒷모습은 분명…….’
 분명 알고 있는 놈이었다. 파황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볍게 올라가는 파황의 손!
 식당에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들 외에도 몇 명이 더 자리 잡고 있었다. 거구의 사내의 옆 테이블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여섯 명의 사내와 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고 여행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른 한쪽에 자리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황의 조금 생소한 복장에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 용병들과 같이 있던 6~7세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파황의 예쁜 부채를 보고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아! 저 오빠 부채 정말 예쁘다! 빨간색이 너무 예뻐!”
 옆 테이블에서 열흘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거구의 사내도 옆에서 들려오는 그 귀여운 목소리를 들었다.
 ‘예쁜 부채? 빨간 색의……?’
 갑자기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누군가가 붉은 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자신을 쳐다보던 모습이, 쌀쌀한 한밤중인데도 검은 망토 속에서 그 붉은 부채를 꺼내 흔들어 대던 그 모습! 그는 바로 거구의 사내가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그때의 그 괴물 같은……!
 ‘설마?’
 거구의 사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금 말한 여자아이의 시선을 쫓았다. 여자아이의 시선은 자신의 바로 등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빠악! 쿵!
 “야! 반갑다. 여기서 또 만나다니…….”
 “허걱!”
 “저, 저…….”
 “꺅!”
 거구의 사내는 뒤통수를 두들겨 맞고는 탁자에 머리를 박아 버렸고 천연덕스러운 소년의 언행에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경악성을 흘려 냈다. 음식을 들고 나오던 여종업원은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고 특히 옆 테이블의 여자아이는 짧은 비명과 함께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파황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여자아이에게만 살짝 웃어 주고는 거구의 사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황의 대담한 행동에 사람들의 시선은 탁자에 아직도 머리를 박고 앉아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로 모였다.
 특히 옆의 용병들과 여자아이는 어느새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변해 거구의 사내를 관찰하듯 살펴보고 있었다. 사실 용병들은 이곳에 그 사내가 들어올 때부터 그 압도적인 덩치에서 뿜어지는 심상치 않은 위압감에 약간의 긴장감마저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당장이라도 저 거인이 일어나 소년을 패 죽이려 날뛸 것만 같았다. 그들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두 사람의 데이터가 체크되며 지나갔다.
 
 거인 : 신장 230cm 체중 150kg
 소년 : 신장 150cm 체중 45kg
 데이터 분석 결과 : 게임 진행 불가능!!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탁자에 처박혔던 거인의 머리가 들려졌다. 거인의 이마에는 탁자에 심하게 부딪힌 탓에 작은 혹과 멍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들려진 거인의 얼굴이 잔뜩 굳은 채 앞에 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거인의 커다란 입에 모두의 숨이 멈춘 듯 긴장된 순간을 자아냈다.
 “또…또 만났군요. 그…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푸~풋! 컥컥!”
 우당탕!! 와지직! 챙그랑!!
 덩치에 안 맞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존댓말을 하는 거인, 알칸트라의 이해할 수 없는 어색한 행동에 음식을 먹던 여행객은 입 안의 음식물을 토해내며 캑캑거렸고 용병 몇몇은 뒤로 자빠지며 의자를 부숴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또한 음식을 들고 오던 여종업원은 휘청거리며 음식을 엎어 버리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재빨리 뒤돌아서서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뭐, 뭐냐? 지금의 저 모습은… 이건 사기다!’
 주변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알칸트라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알칸트라는 정말이지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죽고 싶었다. 안 그래도 일족의 보물 다크스타를 몬데스의 수하들에게 뺏겨 참담한 기분이었는데 여기서 이 괴물을 다시 만날 줄이야. 그것도 다른 사람이 보는데서 이런 개쪽(?)을 당하다니… 한때는 일족의 잘 나가는 일급전사였거늘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처음에 이상하게 쳐다보던 사람들은 파황의 복장이 좀 특이해도 고급으로 보였기에 귀족일거라는 추측을 하면서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옆에서 힐끔거리던 용병들도 음식이 나오자 식사를 시작했고 주변 분위기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파황은 아침을 주문한 후 알칸트라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고 알칸트라는 표정관리에 최선을 다하며 파황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여기서 실수했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알칸트라를 보며 파황은 내심 웃음이 나왔다. 알칸트라는 표정관리를 통해 무심함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지만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거친 노련한(?) 파황의 눈에는 그 속이 다 보였던 것이다.
 ‘훗, 녀석 꽤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지난번에 밤새 교육시킨 보람은 있군.’
 알칸트라를 보며 귀엽다는 엽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 파황뿐이리라. 파황으로선 아직 예전 자기 모습을 잊지 않았을 테니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저 얼굴에 그런 표현은 금지시켜야 하지 않을까. 사실 예전의 파황은 알칸트라가 정말 귀엽게 보일 정도였지만 지금의 그의 모습으로 알칸트라를 그렇게 표현했다간 당장 정신이상자로 분류되리라.
 한편 알칸트라가 이렇게까지 변해 버린 이유는 지난번 만남에서 밤에 밤새 특별정신교육(?)을 받은 데다 키콘이 어떤 모습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 베라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모두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알칸트라였다. 당연히 고양이 앞에 쥐가 될 수밖에……. 이 모든 것은 절대 알칸트라의 잘못이 아니었다.
 4. 음모에 희생된 바이칸의 영웅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악마상이 내려다보이는 낡은 신전 안.
 악마상 바로 아래에 마련된 제단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젊은 청년이 잠을 자듯 누워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제단 위의 청년을 주시하고 있는 자, 사이몬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심복들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충복인 차트바와 베라가 열 명의 호위기사와 함께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몬의 시선이 다시 제단으로 향했고 그의 걸음이 제단으로 향하며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슈마스트라! 나의 영원한 호적수이자 바이칸의 영웅이여!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으하하하! 정말 꿈만 같구나. 네 덕분에 나 사이몬은 절대의 힘을 얻을 것이고 네가 나의 노예가 되어 대륙에 피의 전쟁을 불러일으킨다면… 대륙엔 대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되면 새로운 반마족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니! 반마족이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한 그 첫걸음이 바로 너 슈마스트라로 인해 시작될 터 영광으로 알아라! 크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는 사이몬의 검은 눈동자는 점차 광기로 물들어 갔다. 제단에 다다른 사이몬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상한 모양의 뼛조각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상자 주위로는 붉은 선으로 이름 모를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의 모든 마나가 결집되어 있다는 전설의 기물(奇物).
 사이몬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슈마스트라의 배 위로 올려놓았다. 다음으로 품안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낸 뒤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는 차트바에게서 한 자루 흑검을 받아 들고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주변을 경계하고 너희들은 의식을 시작하라!”
 사이몬의 명이 떨어지자 열 명의 기사들은 신전주위를 둥글게 포진하여 주변경계에 들어갔고 차트바와 베라는 길고 긴 주문영창을 시작했다.
 잠시 후 악마상 주위로 칠흑 같은 검은 마기가 몰려들기 시작했고 검은 마기는 이내 악마상 전체를 뒤덮으며 그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것을 본 사이몬은 즉시 들고 있던 비수를 슈마스트라의 심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엄청나게 솟구치는 붉은 피! 악마상을 감쌌던 검은 마기 중 일부가 솟구치는 피를 쫓아 슈마스트라를 뒤덮어 갔다. 사이몬은 차트바에게서 건네받은 마검(魔劍) 다크스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기괴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사이몬이 주문을 외운 지 얼마 후, 다크스타의 검병(劍柄:검의 손잡이)에 박힌 검은 보석이 어둠의 빛을 발하며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들려오는 미지의 음성. 악마의 소리인가? 섬뜩한 귀기가 넘쳐흐르는 사이한 음성이 사이몬의 머릿속으로 울려왔다.
 <나를 깨우는 자, 누구인가?>
 “어둠을 지키는 별이여! 나 어둠의 일족 사이몬이 그대와의 계약을 원하노라!!”
 사이몬이 크게 외치자 이에 반응하듯 검은 보석에서 뻗어 나온 어둠의 빛이 사이몬의 몸을 잠시 비추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사이한 목소리.
 <크크크, 사악한 영혼의 소유자여! 나 다크스타는 그대 사이몬을 인정한다. 나의 새로운 주인이여! 나를 깨우라!!>
 “으하하하하!! 다크스타! 너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명한다. 너를 위해 준비한 어둠의 힘으로 눈을 떠라!!”
 사이몬의 외침에 반응하듯 다크스타의 검은 보석에서 더욱 짙은 어둠의 빛이 뿜어 나왔고 사이몬의 입에서는 새로운 주문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떠도는 마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강해졌고 그에 따라 마법주문을 외고 있는 사이몬의 이마에서는 점차 굵은 땀방울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그에 따라 차트바와 베라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며 점차 힘든 기색을 드러냈다.
 마기의 힘이 극에 이르렀을 때 슈마스트라의 배 위에 놓인 상자에서 붉은빛이 비쳐 나오며 엄청난 마나가 상자 안에서 넘쳐 나왔다. 그러자 주변에 퍼져 있던 검은 마기가 붉은 마나를 집어삼키듯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악마상의 두 눈에서 섬뜩한 혈광이 뿜어 나왔고 마기의 힘이 급증하며 낡은 신전을 뒤흔들 정도로 강해졌다. 그리고는 상자 안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마나를 주위의 마기들이 한꺼번에 덮치며 모든 마나를 흡수해 버렸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이몬이 마검 다크스타를 높이 치켜들며 마지막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이몬의 마지막 주문이 시작되자 상자 안의 붉은 마나를 흡수한 마기들이 다크스타를 향해 몰려왔고 다크스타에 박힌 검은 보석이 내뿜는 어둠의 빛은 마기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크스타에 흡수된 마기들 가운데 일부는 검을 따라 사이몬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으며 일부는 다크스타에 흡수되어 자리 잡아 갔다.
 워낙 강대한 마력이라 사이몬의 몸은 혈관이 팽창하며 어느덧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사이몬은 한 손을 슈마스트라의 머리 위에 대고 넘치는 마력의 일부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주위에 퍼져 있던 검은 마기들이 모두 흡수되어 사라지자 다크스타도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사이몬은 한숨을 토해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든 일이 완벽히 마무리된 것이다. 공간 속으로 사라진 다크스타는 사이몬이 소환하면 언제든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자 마지막까지 이를 악물고 버티던 차트바와 베라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특히 베라는 아예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려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몸으로 말해 줬다.
 사이몬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단 위를 바라보니 슈마스트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었고 그의 심장에 꽂혔던 비수는 어느덧 완전히 빠져나와 있었다.
 “크크크. 기대해라, 슈마스트라! 네 영광된 이름을 내가 어떻게 바꿔 주는지. 크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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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랑! 딸랑!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섰는지 심심한 표정으로 앞에 앉아 있던 소리엔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재미있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호오~, 상당히 특이한 구성이로군.”
 평소 장난기가 심한 소리엔이 재미있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웃는 모습에 제스는 여관의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스의 두 눈에 비치는 모습은…….
 “미소년과 하프 오우거?”
 제스 옆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 트라이드의 목소리였다. 평소 농담은 그리 즐기지 않는 진지한 남자, 트라이드가 이런 말을 하다니……. 조금 의외긴 하지만, 제스의 눈에 비친 광경은 그로 하여금 그 말에 동감하게 만들었다.
 백발(은발인데…)에 눈에 확 띄는 귀공자풍의 잘생긴 소년과 소년의 뒤로 보이는 장신에 온몸이 근육덩어리로 뭉쳐진 거구의 흑발사내. 소년은 생소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화려해 보이는 붉은 부채를 흔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명문가의 자제로 보였고 뒤에서 따라오는 거구의 사내는 덩치에 맞게 등 뒤로 거대한 검을 차고 있는 데다 생긴 것도 험악한 인상에 덩치가 워낙 커서 보는 사람들을 질리게 만드는 괴물(?)이었다.
 제스는 지금까지 17년을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봐 왔지만 저렇게 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제스의 눈에는 아니 여관 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저자는 인간이 아닌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까? 그 말을 저 사내에게 한다면 그 사내는 아마 진짜 괴물은 옆에 있다고 목 놓아 외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행이라 그럴까? 아니면 그들의 개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일까? 제스의 시선이 그들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소년이 여관 내부를 쭉 둘러보다가 제스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순간 소년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가볍게 접으며 묵을 돌려 방을 정한 후 뒤에 서 있는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빛을 받은 거구의 사내는 제스 일행이 있는 곳으로 이내 성큼성큼 걸어와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런데 합석해도 괜찮겠소?”
 이 대륙의 여관들은 아래층을 식당으로 활용하여 여관과 식당이 합쳐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녁때라 그런지 자리가 없었고 그나마 가장 적은 인원이 모인 곳이 제스 일행이 있는 바로 이곳이었다.
 일행의 눈빛을 가볍게 맞춰본 트라이드가 대표로 합석을 수락했고 이내 소년이 다가와 자리를 같이했다.
 그렇게 되자 간단히 통성명을 하게 되었고 트라이드가 대표로 자신의 일행을 소개하자 거구의 사내가 자신들을 소개했다.
 “나는 알칸트라라고 하고 이쪽은… 파황이라고 합니다.”
 이 이상한 일행은 당연히 파황과 알칸트라였다. 그들은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동행하기로 합의(?)하고 같이 다니고 있었다. 알칸트라는 당연히 결사 반대였지만 파황이 눈을 한번 부릅뜨자(그 얼굴에 부릅뜬다고 무서울 리가 없지만 알칸트라의 눈에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파황이야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날 알칸트라에게서 다크스타를 뺏긴 일과 반마족의 음모에 대해 들은 후, 같이 반마족의 신전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파…황?”
 “흐음, 복장도 특이하더니 이름도 특이하네.”
 제스 일행은 파황의 특이한 이름과 복장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정작 파황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파황은 자리에 앉은 후 용혈선을 망토 안에 집어넣는 척 하면서 아공간을 열고 그 안에다 집어넣고는 주위를 다시 한번 가볍게 둘러보았다.
 제스 일행은 파황과 알칸트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알칸트라가 대충 얼버무려서 대화의 진전이 없었다. 더욱이 파황은 아예 벙어리인 듯 단 한마디도 안 해 더 이상 대화가 지속되지 않았고 곧 음식이 나왔으므로 그들은 이내 식사에만 열중했다.
 잠시 후 먼저 식사를 마친 제스 일행이 먼저 일어나 2층의 숙소로 올라갔고 파황 등도 식사를 마치고 잡아 놓은 방을 찾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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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바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 파황과 알칸트라는 그들만의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알칸트라는 이틀 전에 파황을 다시 만난 이후 어느새 생존본능에 의한 그 놀라운 적응력으로 이제는 어느 정도 파황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적응이 불가능한 부분이 몇 있었지만.
 그동안 알칸트라는 자신의 일족인 반마족에 대해 여러 가지를 파황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 중에서 파황의 흥미를 끈 것은 반마족의 수장이라는 몬데스와 그의 아들인 사이몬이 주축이 되어 진행하고 있다는 일명 ‘카오스 프로젝트’라는 비밀작전에 관한 것과 몬데스의 부하이자 사이몬의 심복인 차트바와 베라에게 마검 다크스타를 뺏긴 일 등이었다.
 알칸트라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반마족의 일급전사로 일족을 위해 일해 오던 알칸트라는 어느 날 비밀리에 일족의 원로인 타슈바의 부름을 받아 간 자리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카오스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였다.
 한 집단이 있으면 그 집단 내부에 여러 파벌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는 반마족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족보다 인간에 더 가까운 성향을 지닌 보수파와 인간보다 마족의 성향이 강한 강경파가 그것이었다.
 보수파는 원로인 타슈바가 중심이었고 강경파는 일족의 수장인 몬데스와 그의 아들 사이몬이 중심에 있었다. 보수파와 강경파의 힘은 원래 서로 비슷했었는데 30년 전 벌어진 반마족 학살사건으로 인해 강경파의 힘이 급속도로 강해지면서 지금에 와서는 강경파가 보수파를 완전히 압도하는 실정이었다.
 보수파의 수장인 원로 타슈바는 우연히 알게 된 카오스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알칸트라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카오스 프로젝트의 핵인 마검 다크스타를 찾아내 잠적할 것을 부탁했다. 타슈바가 파악한 카오스 프로젝트는 극히 일부인 전체적인 윤곽에 불과했지만 가장 중요한 다크스타에 관한 계획을 알아냈기에 이를 저지하려 나섰던 것이다.
 카오스 프로젝트는 어둠 속에서 핍박받는 반마족을 양지로 끌어내어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계획이었다. 그 취지만은 같은 반마족으로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 방법에 있었다.
 카오스 프로젝트는 대륙에선 봉인된 저주받은 마검 다크스타를 깨움으로써 어둠의 힘을 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대륙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고 가 대륙 전역에 피의 대 전쟁을 일으켜 그 혼란 속에서 대륙의 패권을 손에 넣겠다는 계획으로 지난 30년간 일족의 수장인 몬데스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돼 온 계획이었다.
 만약 이 계획이 몬데스의 뜻대로 실행된다면 대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많은 피를 흘릴 것이고 중간에 실패라도 하게 된다면 반마족은 그 즉시 분노한 전 대륙인들에게 멸족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반마족의 수는 1천 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적은 수였기에 일족의 원로인 타슈바는 비록 자세한 계획은 몰랐지만 너무나 무모한 계획이라 여겼다. 그 위험성이 너무 커 이를 막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라 고민하던 타슈바는 마검 다크스타의 위치가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카오스 프로젝트가 시작되려 하자 알칸트라를 서둘러 찾았던 것이다.
 타슈바는 카오스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몰랐기에 그 시발점인 마검 다크스타를 빼돌려 봉인함으로써 계획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서둘러 마검 다크스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떠난 알칸트라는 운이 좋았는지 다른 일족들이 찾기 전에 다크스타를 발견했고 그곳을 서둘러 벗어나다가 그만 다른 일족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후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계속됐고 숨어 버린 알칸트라를 찾아 반마족들이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됐다. 그리고 알칸트라가 베라와 키콘에게 발각되었을 때 파황과 처음 조우했던 것이다.
 다행히 파황의 개입으로 그곳을 벗어났던 알칸트라는 하루 만에 다시 발각되었는데 하필이면 일족의 특급전사인 차트바에게 걸려 다크스타를 뺏기고 목숨만 겨우 건져 살아남았다.
 이 얘기를 할 때 알칸트라는 파황에게 엄청 구박을 받아야 했다. 머저리 등신 같은 놈이라고…….
 숨어서 부상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던 알칸트라가 다시 움직일 때에는 이미 일족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두 다음 계획을 위해 철수한 후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알칸트라의 목숨보다 그 다음 일이 훨씬 중요했기에 다크스타를 회수한 이후 계획대로 반마족의 성지인 어둠의 신전으로 서둘러 떠난 것이다.
 이를 깨달은 알칸트라는 어둠의 신전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이동하다 파황을 만나게 되었다.
 
 카오스 프로젝트에 관한 모든 것은 극비에 속하는 비밀이었지만 파황에게 끌려갈 위기(?)에 처한 알칸트라가 시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을 놔줄 것을 부탁했다가 흥미를 느낀 파황이 따라나서는 바람에 동행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꺼려하던 알칸트라도 어쩌면 파황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파황과의 관계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둠의 신전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바로 마검 다크스타의 봉인을 풀고 누군가가 다크스타와 계약을 맺으려 할 것이라는 것. 타슈바는 아마도 몬데스의 아들인 사이몬이 나설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과연 의식이 끝나기 전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 또한 도착한다 해도 일족의 전사들을 뚫고 그곳에 있을 거라 예상되는 사이몬과 차트바의 손에서 다크스타를 회수할 수 있을까?
 일족의 몇 안 되는 특급전사인 차트바는 알칸트라로서는 상대하기 벅찬 상대였고 사이몬은 오히려 그런 차트바보다도 더 강할지 모른다고 알려진 자였다. 사이몬의 능력은 반마족에서도 이미 최고 수준으로 공인된 반마족 최고의 천재가 바로 그였다.
 그런 그들에게서 다크스타를 회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파황이라는 저 괴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겪어본 그의 능력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차트바에게 결코 지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직접 겪어 보진 않았지만 사이몬의 힘이 아직까지는 차트바에 비해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족 최고의 천재라는 사이몬이라도 차트바는 특급전사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 아직은 절정기에 이르지 못한 나이의 사이몬이다. 희망은 있다!’
 파황과 알칸트라가 막 어둠의 신전이 있는 산의 초입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파황의 걸음이 멈췄다. 조금 앞서가던 알칸트라는 뒤에서 파황이 따라오지 않자 무슨 일이냐는 듯이 파황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파황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끔 파황은 알칸트라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럴 때의 파황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며칠간의 경험으로 확실히 깨우친 알칸트라는 그저 파황이 다시 움직이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용혈선을 부치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파황이 탁 하고 소리 나게 용혈선을 접더니 이내 망토 속의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이를 본 알칸트라는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황이 용혈선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가 움직여야만 할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파황이 알칸트라를 바라본다.
 "…한발 늦었군. 따라와.”
 파황무(破皇武) 파황칠종신법(破皇七宗身法) 섬광비영(閃光飛影)
 빠른 속도로 지면을 스치듯 섬광비영을 사용해 원래 가려던 방향에서 조금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제대로 설명도 없이 달려 나가는 파황. 하지만 알칸트라는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야 했다.
 파황은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알칸트라를 당황하게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정말 성질 하나는 엄청 더러운 놈이었다.
 평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 완전 지 맘대로의 독불장군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중에 보면 그 행동들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딱 두 번 그런 경우를 당하자 그 다음부터는 전자동이었다. 까라면 까고 움직이면 따라 하면 되었다. 괜히 안 돌아가는 머리 굴려 봤자 머리만 아프니 평소 소신대로 몸으로 때우는 알칸트라였다.
 하지만 몸으로 때우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파황은 가볍게(?) 달려가는 것 같은데 뒤를 따라가는 알칸트라는 이를 악물고 날아야 했다. 반마족인 알칸트라는 마검사로서 4서클 마스터였기에 플라이마법을 사용해 파황을 따라갔다. 뛰어서는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따라가려면 날아갈 수밖에.
 한 가지, 아무리 종족의 특성이 있다지만 알칸트라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왠지 어울려 보이질 않았다. 저 무식해 보이는 놈이 마법을 어떻게 공부했을까?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법을 썼다지만 파황의 3배가 넘는 무거운 몸이라 무서운 속도로 땅위를 거의 날듯이 달려 나가는 파황 때문에 쫓아가는 알칸트라만 죽을 맛이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거의 직선으로 달려가는 파황. 날아가는 알칸트라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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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타고 길을 재촉하던 제스는 앞서가던 트라이드가 멈춰 서자 따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트라이드를 바라보니 트라이드는 굳은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지만 제스의 눈에는 멀리 언덕만 보일 뿐이었다.
 혹시 주변에 몬스터라도 숨어 있나 싶어 감각을 집중하자 그제야 언덕 너머에서 뭔가 이질적인 기운들이 느껴졌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확인하는 트라이드와 제스. 옆에 있는 소리엔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눈으로 묻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에서 전투가 있는 것 같아.”
 “뭔가 위험한 기운이 느껴져요.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트라이드가 소리엔을 향해 상황을 설명하자 제스가 뒤를 이으며 자신의 팔을 살짝 걷어 보였다. 제스의 팔에는 정말로 잔뜩 소름이 돋아 있었다. 이를 본 트라이드와 소리엔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
 그들은 모두 제스의 특별한 재능을 알고 있었다. 제스는 검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의 여러 재능 중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기감(氣感)을 타고 났다는 점이다. 그의 타고난 기감은 오랫동안 수련한 검사보다도 뛰어나 이미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제스의 반응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선 안 되는 것이다.
 셋은 서로의 눈을 마주본 후 이내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그들이 언덕을 넘어서자 저 멀리 강가에서 검을 맞대며 싸우는 자들이 보였다. 너무 멀어 어떤 상황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했기에 세 사람은 좀 더 가까이 접근했다. 어느 정도 눈으로 식별이 가능해진 곳까지 다가가 살펴본 상황은 세 사람을 놀라게 했다.
 거의 스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중앙에 금발의 청년을 두고 포위한 채 공격하고 있었다. 소리엔이 그 상황을 보고 분기에 차 달려 나가려는 순간 제스가 소리엔을 재빨리 붙잡았다.
 “잠깐만요. 뭔가 이상해요. 언뜻 보기엔 금발의 남자가 위험해 보이지만… 그게 아니에요.”
 제스의 말에 다시 강가의 전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그랬다. 금발 청년을 포위한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볼 때 상당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 분명했다. 비록 옷차림은 일반 용병과 다를 게 없었지만 포위 공격하는 모습이 일정한 진형을 이루고 움직여 용병들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훈련된 기사들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전원이 소드오러(sword aura:검기)를 사용할 정도라 그들이 전부 익스퍼트(expert)급이라는 걸 보여 주었다. 개개인의 실력들이 모두 용병들로 보기는 무리일 정도로 훌륭했다. 저 정도라면 일국의 근위기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실력들이었다.
 시리어스 대륙에서는 소드오러, 즉 검기를 다루는 경지를 익스퍼트(expert),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검강)를 사용하는 경지에 오른 자를 마스터(master)라 불렀다. 이들 대부분이 검을 사용하는 기사들이기에 일반적으로 그 앞에 소드를 붙여 소드익스퍼트, 소드마스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여하튼간에 놀라운 건 그들이 아니었다. 정작 놀라운 건 익스퍼트 급의 실력 있는 기사들로 보이는 검사들 속에서도 중앙의 금발 청년이 그들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벌써 그 주위에는 그 검사들의 동료로 보이는 자들이 여러 명 쓰러져 있었고 지금도 한 명씩 쓰러지고 있었다. 실로 엄청난 실력이었다.
 “저 청년… 소드마스터(sword master)일지도 몰라.”
 “뭐?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소드마스터라니……. 대륙 최강이라는 크라이프 공작 전하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건 27세 때셨어. 저 청년은 많아야 이십대 초반이라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트라이드의 말에 펄쩍 뛰며 반박하는 소리엔이었다. 소리엔은 말하면서 동의를 구하듯 제스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의 기운… 저 강력한 기운은 마기!”
 “마기라니? 제스, 지금 저 녀석이 마족이라는 거야?”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 기운은 분명 마기예요. 저자 위험한 자입니다. 가서 저 기사들을 도와줘야 해요.”
 제스가 갑자기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가자 트라이드와 소리엔도 할 수 없이 서둘러 달려 나갔다. 트라이드는 말을 몰아 달려가면서도 금발 청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소리엔의 말대로 본국의 크라이프 공작전하도 저 나이 때에는 소드마스터가 아니셨지만 현 시리어스 대륙에… 그런 사람이 꼭 한 사람 있다! 설마? 설마…?’
 트라이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
 ‘저 금발! 설마 그란 말인가? 불과 20세의 어린 나이로 역대 최연소 소드마스터에 오른 사람! 대륙의 모든 젊은 기사들의 꿈이자 희망! 바이칸의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 저자가 정말 그란 말인가? 하지만 정말 그라면 그가 왜 타국인 이곳 라피돈 왕국에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마기를 뿜어내고 있다니?’
 제스 일행이 전장에 도착할 때쯤에는 불과 다섯 명의 검사만이 금발 청년을 막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본 금발 청년은 아주 수려한 용모를 갖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용모였다. 하지만 눈빛이 이상했다. 눈동자와 흰자가 모두 짙은 검은색으로 번들거려 눈동자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검게 번들거리는 금발 청년의 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말에서 뛰어내리며 남은 사람들을 도와 금발 청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록 한사람을 여럿이서 공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이 비록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눈앞의 상대는 마족이 사용한다는 마기의 소유자였다.
 제스 일행이 나타나자 처음엔 순간적으로 당황하던 주위의 검사들이 자신들을 돕는 그들의 행동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같이 공조를 하듯 움직였다. 제스 일행은 아직 어린 제스까지도 소드오러를 뿜어내 앞서 금발 청년을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금발 청년의 검술이 강한 것도 이유였지만 제스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이 왠지 이상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아무리 금발 청년이 강하다고 해도 왠지 그들이 너무 쉽게 당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직접 같이 싸워 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금발 청년을 향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공세는 금발 청년을 죽이겠다는 의지보다는 위협을 하며 수비에 치중함으로써 금발 청년이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두려 할 뿐이었다.
 제스 일행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료들이 계속해서 희생당하는데도 저런 식으로 대응하다니… 전력을 다해도 모자를 판에 그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스 일행이 합류하면서 격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제스 일행은 전에 협공하던 무리들과는 달리 금발 청년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 중 트라이드의 검술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검에서는 어느덧 소드오러가 검 밖으로까지 발출되어 실처럼 가는 유형의 기운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바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이르러야 사용할 수 있는 검사(劍絲)였다. 비록 아직 검사의 형태가 조금 흐릿했지만 대륙에서 겨우 1백여 명밖에 없다는 경지로 검사들의 꿈인 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경지를 이십대 중반의 트라이드가 이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트라이드도 눈앞의 금발 청년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제스 일행의 가세로 갑자기 압박감이 심해짐을 느낀 금발 청년의 검에서 놀랍게도 마스터의 상징이라는 오러 블레이드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정말 마스터란 말이야? 어떻게 저 나이에……. 크윽! 으악!”
 금발 청년이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면서 형세는 급격하게 변화했다. 소리엔이 갑작스레 나타난 오러 블레이드에 경악성을 흘려 낼 때 금발 청년의 검이 소리엔을 파고들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소리엔은 가진 힘을 모두 쥐어짜며 검을 들어 막았지만 오러 블레이드 앞에 그의 검은 너무 무기력했다.
 소리엔의 검이 그대로 잘려 나갔고 소리엔의 몸은 붉은 피보라를 내뿜으며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울려 퍼지는 트라이드의 처절한 목소리!
 “소리에~엔!!!”
 
 
 다음에 계속...

댓글(6)

붉은앙마    
작품 설명에 소녀 몸으로 라고 되어 있어서 여주물인줄 알고 안볼려다 제목 때문에 혹시나하고 보았는데 역시 남주물이네요. 소년으로 바꾸심이 어떠실런지요.
2016.08.03 08:51
뱃살a    
초반에는 필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서론이 길고 본론은 빨리 안나오고 내용도 약간 유치하고 갈수록 지루해지네 벌써 하차각이다 추천받은 것들 중에서 재밌는 게 하나도 없냐;;
2017.08.04 00:00
뱃살a    
싀벌 보면 볼수록 필력이 별로네 진짜 유치하고 내용이 뭔가 허접해 주인공 보다 다른 인물이 더 많이 나오고 하차각이다
2017.08.04 00:07
1x년째유령    
내가 진짜 파황을 예전 에프월드에서 재미있게 봤던글인데 이게 몇년이나 지난글이지 ㅋㅋ
2018.03.09 22:04
TML    
여주물인둘 알고 보려고 했는데
2018.03.10 01:14
이제날자    
판타지는 안보는 스타일인데... 내용도 그렇고 너무 재밋네요... 완전 사이다 좋아 하시는분들 무조건 보세요.... 그리고 장편좋아 하시느느분들도...^^...잘 봤읍니다
2019.03.2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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