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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r 1권-1

2015.01.08 조회 2,988 추천 13


 프롤로그
 
 마나 임팩트
 
 “전기 충격을 임계점까지 올려 보게.”
 흰색 가운의 양쪽 어깨에 계급을 나타내는 별 모양의 액세서리가 달린 옷을 입은 자가 명령을 내렸다.
 “알았습니다.”
 찌릭, 피유욱. 타랏!
 “분열이 더 심합니다!”
 “좋아, 그대로 유지.”
 타락, 파바바밧!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밝은 빛 에너지에 강한 전기가 계속해서 주입됐다.
 피유우우욱!
 빛 에너지의 온도를 나타내는 게이지는 어느새 1만도라는 온도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버렸다.
 “온도가 급상승합니다!”
 “그대로 유지.”
 “분열합니다. 이건 마치 핵융합과 유사합니다!”
 “초고속 촬영!”
 “네!”
 촤라라라라!
 빛 에너지가 있는 곳에 설치된 1초에 1만 프레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어느새 에너지가 분열하는 모습을 상세히 담기 시작했다.
 화아악!
 그때였다. 빛 에너지는 갑자기 아주 강한 빛을 발하더니, 유리관 속에 가득 차 버렸다.
 슈우우우욱!
 “온도 급 하락! 영하 297도까지 내려감!”
 “뭐? 말도 안 돼! 1만 도에서 어떻게…….”
 어깨에 별을 달고 있는 자는 온도의 급 하락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뒤끝을 흐렸다.
 쩌적!
 “모, 모두 저, 전원 대피…….”
 그리고 눈앞의 방탄유리가 금이 가는 것을 보고 피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을 다할 수 없었다. 이미 유리가 파괴되고 빛 에너지가 연구실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쏴아아아아! 부그르르르르.
 빛 에너지는 주변의 모든 것을 녹여 버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연구원들도 그 빛을 피할 수 없었다.
 ‘10만 도?’
 어깨에 별을 달고 있던 자는 자신의 몸이 녹기 전에 마지막으로 10만 도를 표시한 채 녹아내리는 온도계를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쏴아아악!
 그 빛은 연구실에 가득 차고도 넘쳐 밖으로까지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콰과과아아아앙! 부르르르르르!
 엄청난 폭발이었다. 마치 핵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은 파급 효과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가장 처음에 그 폭발을 본 자는 눈이 멀어 버렸다. 게다가 폭발의 여파로 순수 빛의 열기로 인해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물체들이 전부 녹아내렸다. 반경 10킬로미터까지 그 영향이 미쳤는데, 그 빛에 노출된 자의 피부는 타들어 가 버렸고, 설사 실내에 숨었다 할지라도 순식간에 높아진 대기의 열에 의해 전신 화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호흡을 하던 자는 폐 속까지 화상을 입어 앞으로 정상적인 호흡을 하기가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폭발은 버섯구름을 만들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도 보일 것처럼 어마어마했고, 그 높이가 하늘을 뚫고 나와 저 높은 창공에서도 확연히 식별이 가능했다. 그리고 엄청난 폭풍을 동반했다.
 때는 2008년. 지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쟁 디 워The War가 일어난 후, 한국의 서울에 위치한 마나를 연구하던 한 연구소에서 일으킨 폭발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가리켜 악마의 유혹에 빠진 자들의 결말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1998년에 있었던 전쟁 디 워의 소산물인 마나를 연구한 죄의 결과요, 신께서 경고의 나팔로써 보여 준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 때처럼 인간들의 타락을 심판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자들은 외계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방해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자들은 이미 디 워로 인해 신의 존재는 부정되었고 오로지 다른 생명체와의 전쟁을 통한 승리만이 앞으로 인류가 살아갈 방향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더 뛰어난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침투해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번 폭발을 마나 임팩트라고 이름 지었다. 세계 모든 기구를 통합한 입코(IFCO)에서는 그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앞으로 마나에 대한 연구를 전면 중단하라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마나에 대한 연구는 어둠 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1.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
 
 우르르르!
 “뭐, 뭐야!”
 그르르르르.
 “형아, 왜 그래?”
 달그락, 달그락.
 지하 7층 임시 병동에 있는 어린 꼬마는 산소 호흡기를 한 채 두려운 눈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봤다.
 “모, 몰라. 땅이 마구 흔들려.”
 이제 막 대여섯 살쯤 되었을 법한 꼬마는 지독한 감기로 죽다 살아난 동생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다다다다다! 부르르르.
 그러나 꼬마의 말처럼 땅은 진짜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땅 위에 있는 선반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와 그 위에 있는 꽃병이나 화분도 그 영향을 벗어날 순 없었다.
 벌컥!
 “애들아, 어서 대피하거라!”
 “네?”
 흰색 옷을 입은 간호사가 문을 열고 꼬마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려 했으나 갑자기 환한 빛이 사방을 가득 매웠다.
 “응?”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있던 작은 꼬마는 빛 속에서 흔들리는 더 밝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갑자기 찾아온 엄청난 고통 속에서 어린 꼬마는 자신의 형을 바라봤다. 하지만 너무나 밝은 빛 때문에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형아, 형아!”
 꼬마는 산소 호흡기 때문에 제대로 소리치지 못한 체 크게 울부짖고 있었다.
 
 -형아!
 벌떡!
 “하악, 하악, 하악!”
 ‘또 그 꿈인가?’
 “하아악, 하아아, 젠장! 내게 형이 어디 있다고 또 이런 꿈이냐! 재수 없게…….”
 이제 20살 쯤 되었을 법한 청년은 인상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 자신의 육체를 깨끗이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끼릭! 쏴아아.
 청년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땀으로 끈적거리는 자신의 육체를 말끔히 씻기 시작했다.
 ‘마나 임팩트라……, 올해로 17년째인가?’
 자신은 마나 임팩트의 생존자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티브이Tv에 출현하기도 했다.
 물론 마나 임팩트의 생존자는 많다. 하지만 그처럼 폭발의 중심부에서 생존한 자는 유일무이했다.
 마나 연구소 옆에 차려진 지상 35층, 지하 7층의 거대한 병원. 핵미사일이 떨어져도 지하로 대피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건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지독한 감기로 인해 죽다 살아났고, 그 병원 지하 7층 임시 병동에서 산소호흡기 하나를 끼고 있었다고 한다.
 ‘쳇, 난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 사건이 3살 때 일어났으니,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3살 이후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억은 없다.
 쏴아아아. 틱.
 청년은 샤워기의 물을 잠근 후 간단히 몸의 물기를 말린 후 욕실을 나왔다.
 “에이, 몰라, 잠이나 더 자자!”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날이기에 아침 일찍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청년은 자신이 좋아하는 잠을 실컷 자리라고 마음먹었다.
 벌컥!
 “최주진, 어서 일어나야지!”
 “아흐음, 네? 아암, 몰라. 잘 거야.”
 최주진이라 불린 청년의 어머니인지, 40대 중반의 여성이 자기 아들을 깨우기 위해 침대로 다가갔다.
 “이 잠탱아!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또 자냐?”
 “아이 참…….”
 주진은 뒤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시계를 바라봤다.
 6시 15분. 이제 3월의 초봄이라 밖은 아직 어두웠다.
 “뭐야, 엄마! 나 어제 새벽 4시에 잤단 말이야, 더 잘래~.”
 “얼래? 이 녀석이! 너 하루 종일 자고 2시간 더 잔 거 알아? 어서 일어나!”
 주진의 엄마는 자기 아들이지만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잠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엄마는 말했다.
 “오늘 대학 첫 날인 거 몰라!”
 “아이 참나~, 등교는 내일부…, 응? 내가 하루를 더 잤다고?”그때서야 주진은 이상하게 몸이 뻐근한 게, 침대에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잠 오는데?”
 “이 녀석아, 어서 안 일어나! 잠은 잘수록 더 오는 거야!”
 “알았어~.”
 그때서야 주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하~ 암, 잘 잤다!”
 주진은 힘껏 기지개를 편 후 거실로 나갔다. 그런 모습을 바라본 그의 어머니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주진은 티브이의 리모콘을 들고 온 버튼은 눌렀다.
 띠릭, 팟.
 “네, 지금 국기가 하늘 높이 게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의 전쟁을 잊을 수…….”
 집의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티브이에선 ‘The War 27주년 기념일’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국기에 대한 경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태극기와 그 옆에 입코를 뜻하는 2개의 원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거리며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디 워가 무엇인지, 어떠한 사건인지 기록한 자료화면이 티브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1998년, 3월 12일.
 이 날은 인류가 최초로 외계 생명체에 대한 가설이 아니라 정설을 쓰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그 생명체로부터 침략을 받은 날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
 지구의 하늘에는 총 27개의 거대한 암흑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은 지구의 모든 대륙에 골고루 분포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두두두두! 피유웅, 콰앙!
 그리고 엄청난 폭발 장면이 뒤를 이었다.
 티브이에서는 그날 목숨을 담보로 촬영한 여러 화면들이 나왔다.
 비록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사람의 머리가 뽑히는 모습이나 다리가 잘리는 모습, 그리고 괴물에게 통째로 먹히는 모습 등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지구인이 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차차 군인들이 투입되었고, 총부터 시작해서 미사일까지 동원되어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으로 괴물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방영했다.
 파앙, 콰아앙! 우르르르르!
 반경 1킬로미터 정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폭탄의 모습도 보였다. 우주에 떠 있는 인공위성이 적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그것을 지상에서 보며 싸우는 모습도 보였다.
 때론 수십 미터의 크기를 가진 괴물이 도시 중앙에 나타나 난리치는 모습과, 그 괴물을 무찌르기 위해 동원된 수십 대의 비행기와 탱크들의 모습도 보였다.
 괴물들 틈에서 인간과 비슷한 자들도 보였다. 아마 그들이 괴물을 조종하는 외계 생명체일 것이다.
 괴물들을 무찌르는가 싶을 때 나타난 도마뱀같이 생긴 거대한 용, 그 용은 서양에서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전설 속의 영물이었다. 하지만 그 용으로 인해 지구는 거의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는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 용이 성경의 계시록에서 나오는 붉은 용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지구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이 날의 교훈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외계 생명체란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전혀 위협되진 않을까? 앞으로 우리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하루 속히 외계 생명체에 대한 연구를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아아아아앙! 피슈우우욱!
 티브이에선 이번에는 우주로 발사된 우주 왕복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곧 화성과 목성의 모습을, 저 멀리 무수히 많은 별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The War 27주년 기념일’이라는 방송을 보고 있던 주진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상황이기에 그리 피부로 와 닿진 않았다. 비록 27년 전의 사건이지만 그 후 지구는 많은 발전을 했고, 그날 입은 피해를 줄어든 인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복구했기에 그럴 것이다.
 “밥 먹어라!”
 “응.”
 주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아빠는 오늘도 일찍 나간거야?”
 “휴우, 그래. 늘 그렇지. 어서 밥 먹어라. 늦겠다.”
 “응.”
 주진은 젓가락을 들어 여러 개의 반찬 중 호박 부침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정면에 보이는 빈 밥그릇을 바라봤다.
 ‘오늘도…….’
 어머니는 밥을 차리면 오늘처럼 빈 밥그릇을 하나 놓는다. 17년이나 지났건만, 죽은 형을 잊지 못해서 저런다.
 하지만 주진은 형이란 존재에 대해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감정에 동참할 수 없었다.
 ‘쳇!’
 주진은 서둘러 밥을 먹었다. 그다음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주진아, 서둘러 학교 갈 준비해라!”
 그의 어머니가 말을 했지만 주진은 무시했다.
 그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두 눈을 감았다. 시원한 3월의 첫 학기를 알리는 아침이건만, 그것이 그를 부지런하게 하지는 못했다.
 두 눈을 감은 그의 시야에는 온통 암흑뿐이었다. 그러다가 중앙에 작은 빛이 나타나더니, 17년 전의 상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몰라, 땅이 마구 흔들려.”
 형의 두려운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어서 대피하거라!”
 문을 열고 들어온 간호사의 긴급한 목소리.
 “네?”
 두르르르르르. 챙!
 이상한 기계 위에 있던 꽃병이 땅으로 떨어지며 깨졌다.
 간호사의 외침과 함께 두려운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형의 모습이 보였고, 그런 그를 산소 호흡기를 쓴 채 의문에 쌓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린 꼬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눈이 시릴 정도로 너무나 밝은 빛이 사방에 가득 차게 되었다.
 화아아아악!
 그 빛은 곧 모든 사물의 그림자까지도 지워 버렸고, 더 나아가 사물의 모습까지도 지웠다.
 
 “최주진! 이 녀석아, 서둘러 학교에 안 가!”
 벌떡!
 “응? 아, 응.”
 주진은 잠깐 잠이 들었는지 어머니의 외침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아, 누굴 닮아서 그렇게 게으르냐! 벌써 8시 30분이다!”
 “벌써? 알았어.”
 “방에 들어가서 학교 갈 준비하나 싶었더니 또 자냐? 그렇게 자고 어떻게 또 자냐! 아마 네가 잠만 좀 줄였다면 서울대를 들어갔을 거다!”
 “에이, 몰라!”
 주진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었는지 얼른 방을 나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씻은 다음 다시 방으로 들어와 옷걸이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아무거나 주워 입었다.
 찢어져서 걸레 같은 청바지에 목 부위가 늘어난 티의 조합은 그의 옷 입는 센스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방구석에 처 박혀 있는 가방은 한 달 동안 만지지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이 쌓여 그가 얼마나 공부를 싫어하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엄마, 나 갈께!”
 “그래.”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며 한소리 했다.
 “에휴, 정말 누굴 닮았는지. 왜 저리 게으른지 모르겠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안에 작게 울렸다.
 
 “이야아~암, 그래도 상쾌하고 기분 좋구나!”
 3월의 이른 봄이기에 아직은 약간 추웠다.
 그러나 주진은 추위나 더위를 잘 타지 않았기에 춥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시원하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뭐, 이미 늦은 학교, 느긋하게 가자.”
 그의 느긋한 성격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후후, 대학의 등교 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두어 번 가 보긴 했지만, 등교를 목적으로 가는 것은 처음이기에 내심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아파트를 벗어나 도심에 오자 거리에 차가 많았다. 그리고 회사의 출근 시간에 늦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런데 다른 때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플랜 카드를 내걸고 길거리에서 작은 홍보지를 나눠 주는 사람들이었는데, 카드에 쓰인 ‘판타몰 피해 모임’이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판타몰이라…….’
 하늘의 27개의 구멍에서 쏟아진 외계 생명체들,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가 판타스틱하다고 해서 ‘판타지Fantasy의 동물Animal’이라는 말을 합성해 ‘판타몰Fantamal’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판타몰 피해 모임’이라는 플랜 카드를 내걸고 있는 저들은 아마 디 워의 피해자 모임일 거라는 추측이 주진의 생각이었다.
 그들의 구성을 자세히 바라보니, 대부분이 중년 이상의 나이였다. 디 워가 27년 전에 일어났으니 그 시대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아, 오늘이 디 워 27주년이었지.’
 이제야 주진은 평소 보이지 않던 플랜 카드가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계속 걸어가자 곧 그들이 있는 곳의 근처에 다다랐다.
 “우리는 그때의 사건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판타몰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리고 자녀들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여러분들,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이 우리 사회에 숨어들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욱 더 법을 강화해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3일 전에 있었던 폭파 사건을 기억합니까? 그 사건의 범인은 판타몰 중 강화 오크라는 짐승이 벌인 사건입니다. 우리들의 안전은 아직…….”
 그들은 한 맺힌 목소리로 뜻을 모아 판타몰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주진은 그들의 외침이 피부에 직접 와 닿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 사건은 이전 세대의 일이고, 자신은 그 후에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지나쳐 계속 걸어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껴 그도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의 광경은 아마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손잡이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는 광경. 그런 와중에 두 손에 신문을 들고 무아지경에 빠진 채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들은 지하철의 흔들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아 존경심마저 일었다.
 한쪽에는 중년을 갓 넘겼을 법한 사람이 젊은 청년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차가운 눈총을 보냈지만, 정작 청년은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는지 아니면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총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인지 두 눈을 감고 평안하게 졸고 있었다.
 ‘응? 은행 폭파 사건 범인 검거?’
 어떤 아저씨가 읽고 있는 신문 1면에 큰 사진과 함께 흥미를 끄는 제목이 보였다.
 ‘저 사람이 범인인가? 아니, 짐승인가?’
 사진에는 사람의 얼굴이지만 코가 눌리고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동그랗고 험악하게 생긴 외모에 일반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가 두 손에 수갑을 차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까 판타몰 피해 모임 단체 옆을 지나갈 때 외쳤던 말 중 한 단어가 떠올랐다.
 ‘강화 오크인가?’
 초기에 저들은 저렇게 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전자 공학의 발달로 수없이 많은 병을 고치며 장기 이식으로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지만, 사진에서처럼 나쁜 곳으로도 쓰이고는 했다.
 이미 현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는 유전자 공학이 특정 단체의 이익을 위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강화 오크가 그러한 한 예이다. 원래 중학생만 한 키에 근육질이었던 오크라는 종족은 지능이 너무 낮아, 비록 언어를 가지고 있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지만 거의 괴물 취급을 받고 있던 종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외모가 너무 흉측해 그 누구도 그들을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구를 침략한 외계 종족들, 즉 판타몰들 중 어떤 이들이 그들의 종족을 강화 오크로 개조해 지금과 같이 지능이 올라갔고 외모를 개선해 그나마 인간처럼 보이게 했다.
 ‘오늘날 범죄의 주범들이지.’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포악하고 천성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범죄자의 길을 걷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지구인들이 그들을 배척하기에 사회 한 구석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랬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간 입장에선 디 워 세대가 아닌 자라 할지라도 절대 저런 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들의 어미는 침략자이며, 가족들과 친구를 죽인 자들의 자녀이다. 아니, 어쩌면 저들 중 나이 많은 자는 지구를 침략한 본인일 수도 있다.
 -딩동, 이번 내리실 역은 서울대 역, 서울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주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열차는 주진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크! 서두르자!”
 주진은 곧 닫히려는 문을 통과하여 열차에서 내렸다.
 그는 서둘러 역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왔다.
 “히야, 이곳이 서울대인가? 젊음과 패기가 느껴지는 구나!”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지나가는 평범한 꼬마마저 천재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서울대로 들어가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앞에 펼쳐진 꿈과 이상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들의 몫일 뿐, 주진은 서둘러 서울대 옆에 있는 서울 전문대로 향했다.
 ‘쳇,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나?’
 괜히 서울대생을 보니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서울대가 일류대학교라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 전문대는 삼류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도에 있다는 이유로 지방에서 많이 올라오기에 학생의 수가 줄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삼류는 삼류다. 아니, 어떤 이들은 서울대 옆에 있기 때문에 삼류라고 하는 이들도 많다. 그 이유는 서로 비교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벼락치기 1주일로 서울 전문대를 갔으면 잘 한거지. 암~.’
 주진이 이곳에 간 게 그의 친구는 놀랄 일이라며 떠들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 꼴찌를 겨우 면하던 주진이 1주일 벼락치기 공부로 그래도 수도에 있다는 학교―삼류라 할지라도 서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반에서 중간은 가야 들어갈 수 있는 학교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주진의 어머니 말대로 만일 주진이 잠이 별로 없고, 게으르지 않았다면 서울대는 쉽게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기억력이 좋았다.
 하루는 고등학교 수련회 날 밤, 아이들이 모여 게임을 했다.
 종목은 ‘울음소리 기억하기’라는 게임인데, 일단 아이들이 동그랗게 앉은 다음 한 사람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차례대로 동물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람은 처음 사람이 낸 소리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몫까지 동물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 게임은 처음에는 쉽지만, 대여섯 명 째가 되면 중간 중간 울음소리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략 열명 째가 되면 탈락자가 나온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생존한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주진은 반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전교 1등과 같은 조였고, 모든 이들이 그가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게임이 시작되고 동물 울음소리를 10번 정도 냈을 때부터 탈락자가 나왔다. 그리고 20번째가 되었을 때 전교 1등과 주진만 남았다. 둘의 대결은 무려 40번째 동물 울음소리를 냈을 때 전교 1등의 탈락으로 주진이 승리했다.
 사람들은 반에서 꼴지를 겨우 면하던 주진의 승리에 경악했다. 그리고 전교 1등 친구는 어이가 없는지 주진에게 말했다.
 ‘난 한 번 본 것은 1년 동안 기억한다. 그러니 내가 진 것이 말이 안 된다. 다시 해 보자!’
 그때 주진이 말했다.
 ‘어? 난 3살 이후 모두 기억하니까, 최소한 한 번 본 것은 17년 동안 기억하는 걸?’
 그 말에 전교 1등은 할 말을 잃었다.
 주진이 말했다.
 ‘나는 기억하기 보단 기억을 찾거든. 책꽂이에 잘 정리된 책을 찾아 읽어 보듯이 말이야.’
 그 이후 최소한 전교 1등만큼은 주진을 무시하지 않았다.
 
 주진은 발걸음을 놀려 서울 전문대로 향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재수할까? 아니야. 아마 재수한다고 할지라도 1년 동안 놀 거야. 암, 내가 나를 잘 알지.’
 지지리도 공부를 싫어하고, 학교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오로지) 수능 1주일 전에 지방으로 내려가면 고생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남은 기간 동안 벼락치기로 공부한 것조차 기이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 서울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 서울 전문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주진은 계속 걸어 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이전에 한 번 왔던 기억을 더듬었다.
 ‘과학관이라…….’
 그의 머리는 정확히 중앙 분수대에서 30도 오른쪽으로 돌아 107걸음 걸은 후 왼쪽에 보이는 흰색 9층 건물 206동이 자신이 가야 할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라고 기억했다.
 그는 기억을 찾은 다음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목적지인 흰색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소속된 연구소 문 앞에 섰다.
 ‘후흡, 하아~. 이거 긴장되는 걸?’
 대학 생활이라…….
 예전에는 대학교라는 제도가 4학년 혹은 6학년까지 공부하고 그 다음 대학원에 들어가 연구하는 식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연구소에 소속해 연구하는 시스템으로 변했다. 그리고 대학 내에 있는 교양 일반 과목을 수료해야 한다.
 대학 내에 존재하는 연구소는 다양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연구소가 존재했다. 하지만 주진이 들어간 학교는 삼류대학, 옆에 있는 서울대와 비교하면 연구소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교양 일반 과목으로 ‘언어의 이해’나 ‘사회학’ 같은 것을 배운다.
 대학의 졸업은 교양 과목보다는 연구소에서의 실적이 70%를 차지한다. 그리고 연구의 실적은 곧바로 사회에 나가게 되면 경력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니 연구 시스템이 좋은 학교가 일류 학교로 인정받는다.
 
 주진은 눈앞에 보이는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라는 간판을 바라봤다.
 ‘좋아! 듣기로는 이곳이 놀기에 가장 좋은 연구소라지?’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연구할 재료나 특정 물질을 수집하기 위해 밖으로 많이 놀러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진은 망설임 없이 이곳을 택할 수 있었다.
 ‘만일 대학 생활이 빡센 연구소였다면 내 꿈을 버려야 했을 거야.’
 주진으로선 다행이었다.
 ‘좋아, 들어가자!’
 드르륵.
 주진은 양손으로 연구소의 문을 힘껏 밀었다. 그리고 한 걸음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
 쏴아악!
 그러나 인사를 마저 하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갑자기 천장에서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순간 주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물풍선?’
 그의 눈은 순식간에 그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리고 곧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눈이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는 속도와는 다르게 그의 몸은 너무나 느렸다.
 ‘안 돼!’
 퍽, 쫘아악!
 “오예~.”
 “나이스! 이번 신입생은 제대로인 걸?”
 “느낌 좋은 출발이야!”
 ‘…….’
 주진은 제자리에 서서 좋아하는 연구소 사람들을 바라봤다.
 “윽!”
 그리고 곧 코로 들어온 지독한 고린내에 신음을 흘렸다.
 “크크, 그거 씻어도 1주일간 냄새날 거다.”
 “그게 ‘냄새나 돌연변이 생물’에서 채취한 물질이거든. 하하하!”
 “읍, 우읍!”
 곧 주진은 빈속임에도 속이 울렁거리며 무언가가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오, 쏟는다!”
 “으악, 피해!”
 “신입생, 화장실은 저곳이야!”
 주진은 일단 급한 대로 얄미운 선배들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우읍!”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왼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랬더니 숨 쉴 구멍이 없어 힘들었지만, 토하기도 싫었고 지독한 고린내를 맡기도 싫었다.
 주진은 재빨리 달려가 밖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벌컥! 쏴아아아!
 “…….”
 그러자 또 다시 머리 위로 이상한 가루가 떨어졌다.
 “오예!”
 “역시 이번 신입생은 제대로인걸? 크큭.”
 “이연타 성공~.”
 ‘사, 사이코 집단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온몸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윽, 뭐야, 이거!’
 “그 가루는 가려움을 유발하는 생물의 줄기를 말려서 만든 거야. 아마 1주일간 고생할 거야. 하하하!”
 긁적긁적. 주진은 아까부터 자신에게 설명해 주는 사람을 봤다.
 “하하하하! 유쾌하다. 하하하!”
 맨 앞에서 자랑스럽게 웃고 있는 더벅머리의 남자였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저 사람이 가장 연장자 같았다.
 ‘제길, 가려워! 우선 씻고 보자!’
 비록 화가 났지만, 먼저 가려운 것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 한쪽에 있는 샤워장으로 갔다. 그리고 일단 옷을 벗은 후 온 몸에 뭍은 끈적거리는 물질과 가루를 씻으려고 했다.
 ‘뭐, 뭐야 이거?’
 “하하하, 그거 잘 안 씻길 걸? 이상하게 냄새나 물질과 그 가루가 만나면 딱딱하게 굳어서 잘 안 씻기더라고.”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뚫고 아까 그 남자가 설명하는 목소리가 주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
 주진은 온몸을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비, 빌어먹을!’
 생각 같아서는 다 뒤집어 버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주진은 벗어 버린 상의를 들어올렸다. 이물질 두 가지가 묻어 옷이 굳었는지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다.
 주진은 옷을 손으로 두들겨 봤다. 단단했다.
 “하하하.”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바지를 주워들었다. 다행히 이물질이 묻은 양이 적어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팬티 위에 바지만 입고 화장실을 나왔다.
 “하하하! 이것이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에서 매년마다 하는 환영식이다. 그러니 너무 화 내지 말라고.”
 “하하, 나 때는 더 심했지. 암, 그땐 정말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
 연구소 선배들은 각자 자기가 당한 일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런데 너 몸이 상당히 좋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 왔는지 주진은 비교적 훌륭한 몸매를 자랑했다.
 “그런데 키가 너무 작잖아? 크큭!”
 ‘윽!’
 주진은 아픈 곳이 찔리자 다시 한 번 화가 났다.
 “무슨 운동 했어?”
 “안. 했. 습. 니. 다.”
 주진은 화를 참는다는 듯 하나하나 끊어서 말을 했다.
 “그런데 몸이 너무 좋은걸? 아, 이럴 게 아니라, 이걸로 씻어라.”
 가장 연장자로 보이던 더벅머리 선배가 주진에게 무언가를 주며 말을 했다.
 주진은 그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하, 걱정하지 마라. 그것은 네게 뭍은 이물질을 희석시키는 물질이니까 믿고 씻어.”
 하지만 주진은 더 이상 이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뭐, 씻기 싫음 말구. 그대로 집으로 가던지.”
 더벅머리 연장자 선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연구소로 들어갔다.
 “저 선배 말 듣는 것이 좋아. 성격 꽤 고약하거든.”
 “그렇지. 저 선배에게 잘못 걸리면 1년 동안 고생해.”
 두 명의 선배가 충고를 해 준 후 연구실로 들어갔다.
 “환영식은 아까 끝났다. 설마 더 너를 괴롭히겠냐? 귀여운 후배가 들어왔는데 내쫓을 생각은 없단다.”
 또 다른 선배가 이렇게 말한 후 다른 이들을 따라 연구소로 들어갔다.
 “휴우.”
 이제 화장실 앞에 주진 혼자 남자 한숨을 쉬었다.
 “대학 생활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저들이 특이한 건가?”
 처음이기에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어서 몸을 씻어야겠지.”
 주진은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더벅머리 선배에게 받은 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냄새를 맡아 봤다. 코를 상큼하게 하는 냄새가 났다.
 살짝 손가락으로 물질을 찍어 보니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신나 같은 휘발성 물질인가?’
 하지만 약간 점성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런 물질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주진은 그것을 손에 묻혀 굳어 버린 상의에 한 방울 떨어트려 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이물질이 녹아내렸다. 그러나 옷은 녹지 않았다.
 “오, 이 물질이 뭐지? 휘발유 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후 주진은 바로 옷과 머리를 씻었다.
 ‘이곳이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라는 곳인가? 연구소 이름답게 특이한 물질이 많은 곳이구나!’
 채소 연구소라기에 채소를 기르며 거름을 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이 주된 연구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재밌는 곳에 들어온 것 같구나!’
 비록 환영식에 화가 났지만, 그래도 지루한 연구소가 아닌 것 같아 좋았다. 사람들도 개성이 강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심 사이코 집단이란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주진은 온몸에 묻은 이물질을 녹인 후, 샤워기를 틀어 다시 온몸을 씻었다. 그리고 옆에 설치된 전신 건조기에 몸을 말렸다.
 “우와, 이상하게 피부가 뽀송뽀송한 느낌이네. 아까 그 물질 때문인가?”
 주진은 곧 옷을 입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물론 문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함정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은 당연했다.
 “신입생, 환영한다.”
 “네가 올해 들어온 두 명의 신입생 중 한 명이구나.”
 “이거 우리 연구소 너무 인기 없는 거 아냐? 이러다가 곧 문을 닫겠어.”
 “하, 뭘 잘 모르는 소리. 원래 사회는 상위 0.1퍼센트만 원하는 법이야. 그러니 소수가 뛰어난 것이 진리지. 즉, 우리는 뛰어나기에 수가 적은 거야. 하하하!”
 신입생의 적어서 한탄하는 말에 이상한 논리로 그들의 말을 반박하는 더벅머리 선배의 말이었다.
 “자, 내 소개를 하지. 이름은 유관림, 졸업반으로써 이곳 연구소의 리더를 맡고 있다. 참고로 학년은 5학년이다. 1년 꿇었지. 하하하!”
 그리고 더벅머리 선배가 자기소개를 하자, 다른 선배들도 각자 소개하기 시작했다.
 “난 차유미. 4학년으로 나도 졸업반이야.”
 “난 고공례. 3학년이다.”
 “나도 3학년, 박지균. 우리 연구소로 온 것을 행운으로 알 거야.”
 “난 유일한 2학년 김수유. 우리 연구소가 좀 특이한 곳이지. 아마 마음에 들 거야.”
 선배들의 소개가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진에게 향했다.
 “에…, 전 최주진. 1학년이…겠죠?”
 주진은 더듬거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 녀석아, 뭐가 그리 패기가 없냐? 우리 안 잡아먹어!”
 리더라고 소개한 선배가 말을 했다.
 “아, 네.”
 “그래, 왜 이곳에 왔냐?”
 선배가 주진에게 물었다.
 “그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아니, 목표라기보다 기왕 뭔가 해야 한다면 예전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형이 한 명 있었는데, 제가 3살 때 마나 임팩트로 인해 이 세상을 떠났죠.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마나 임팩트라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런 사건이 생겼는지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쪽으로 연관된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어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주진이 길게 말을 하자 선배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엥? 이곳이 마나 임팩트와 무슨 상관인데?”
 “이곳에 오면 그 사건을 알게 된데? 누가 그래?”
 선배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3개월 전에 만난 입코 관계자가 그러던데요?”
 “엥?”
 “입코에서 그런 말을 해?”
 “네. 3개월 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입코 체력장에서…….”
 주진은 선배들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그때 있었던 일을 짧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3개월 전,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말,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입코에서 직접 운영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체력장 시험을 응시하러 입코 본사에 간 적이 있었다.
 여기서 말한 입코란, 판타지 생명체와의 전쟁 디 워 이후 만들어진 국제기구로써 국제 판타몰 청소 기구(International Fantamal Cleaning Organization)의 약자를 따서 입코(IFCO)라고 부른다.
 즉, 쉽게 말해 판타몰 범죄 관련 사건을 해결하는 국제 경찰청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판타몰이 날뛰지 않는 곳이 없고, 세계 각국의 거물급 범죄자는 대부분 판타몰이기 때문에, 오늘날 그 어떠한 단체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범국가적인 단체가 되었다.
 주진은 이상하게 마나 임팩트 때 환한 빛에 의해 형이 죽는 꿈을 자주 꾸었고, 어머니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봐 왔기에 그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입코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사건을 종결시킨 곳이 입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날 체력장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비록 주진이 겉보기에는 마치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온 사람처럼 몸이 좋지만 그는 게을러서 운동을 싫어하는 타입이다. 그러니 100미터 달리기 12초, 1분 안에 팔굽혀 펴기 100회, 도움닫기 멀리뛰기 5미터, 숨 안 쉬고 3분 버티기 등등, 웬만한 초인이 아니고서는 통과하기 힘든 체력장을 통과할 리가 없었다. 듣기로는 입코에 들면 판타몰들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이 정도의 체력을 기본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떠나려는 주진에게 찾아온 입코 관계자가 공부는 잘하냐는 질문을 하자 꼴등은 면할 실력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만일 진짜로 입코에 들고 싶으면 서울 전문대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에 가라고 했다. 주진이 그곳이 어느 곳이기에 그러냐고 묻자, 가 보면 안다고만 말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곳 연구소에 오게 된 것입니다.”
 “흠, 그런데 입코 관계자가 뭐가 아쉬워 너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아슬아슬하게 체력장에 떨어진 거야?”
 주진의 이야기를 듣던 중 더벅머리 리더 유관림 선배가 물었다.
 “아뇨. 전 100미터 달리기 18초, 멀리뛰기 3미터, 팔굽혀 펴기 14회 등, 꼴등으로 체력장에서 떨어졌죠.”
 “에엥? 18초? 팔굽혀 펴기 14회? 그게 말이 되냐?”
 “그건 초등학생 성적이잖아!”
 주진의 말에 선배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하, 하지만 전 체력으로 입코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전 기억력이 좋습니다. 3살 이후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죠. 그리고 전 눈이 매우 좋습니다. 독수리눈이라고 할 정도로 시력이 20. 0입니다. 그리고 야구 선수가 던진 공에 있는 글자를 알아볼 정도로 동체 시력이 좋죠. 그리고…….”
 “그리고?”“어려서부터 이상한 환상을 자주 봅니다. 그것이 유령인지 아니면 괴물인지 아니면 정말로 환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그래서 입코에 들어가 몸으로 뛰는 것보다 사건을 추리, 정리하는 쪽으로 가려는 거였죠.”
 “흠, 그런 것들이 입코에서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특이한 녀석임은 잘 알겠다. 그래, 원인이 뭐든 간에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래, 환영한다. 하하하!”
 “신입생 파이팅! 하하!”
 주진은 갑자기 자신을 축하하는 선배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뭐야, 그럼 정말로 이곳이 입코와 무슨 연관이 있나? 내 이야기만 듣고 이곳에 대한 말은 회피하네?’
 그는 자신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 ‘사실은 말이지, 이곳은 입코 비밀문타야. 하하하’라든지 아니면 ‘그래, 그 입코 관계자가 너를 약 올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착각을 즐겨 하는 사이코가 분명해. 우린 입코과 전혀 무관하거든.’라는 긍정이나 부정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은 회피였다.
 “쉬!”
 “또 한 명의 신입생이다!”
 “어디, 어디?”
 선배들은 갑자기 연구실 한쪽에 있는 작은 티브이를 보았다. 그것을 통해 연구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오는 청년이 보였다.
 “이 녀석 여자야, 남자야?”
 “그러게. 여자 아냐?”
 티브이에 보인 모습은 선이 곱고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청년이었는데 키가 제법 커 보였다.
 “어서!”
 “서둘러!”
 곧 선배들은 환영식을 위해 연구소 문 위에 아까 주진에게 떨어뜨렸던 이상한 액체를 넣은 풍선을 놓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화장실에도 같은 장치를 설치했다.
 “온다!”
 “쉿!”
 선배들이 긴장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좋아, 걸려라!’
 주진도 어느덧 이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과 같은 꼴을 당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잠깐, 만일 여자라면 화장실로 가서 씻기 위해 옷을 다 벗겠는 걸? 그럼……?’
 주진은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선배들의 눈빛을 살폈다. 그리고 곧 알 수 있었다. 선배들이 이상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주진은 유일하게 여성인 4학년 차유미 선배를 바라봤다. 그 선배만이 불쌍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하, 설마 몰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이 열렸다.
 드르륵. 툭, 빠직.
 “에게?”
 “얼레?”
 “얼라리?”
 이상한 액체를 넣은 물 풍선은 문이 열리자 아래로 떨어졌지만, 신입생은 연구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유히 자유낙하 했고 바닥으로 떨어진 후 터졌다.
 “윽, 고약한 냄새!”
 “젠장, 어서 뿌려!”
 곧 선배들은 또 다른 이상한 액체를 뿌려 그 액체를 제거했다.
 신입생은 그럴 동안 연구실 밖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들이 모두 청소한 후 느긋하게 연구실로 들어왔다.
 “신입생 익사윤입니다.”
 그는 간단하게 한마디 한 후 입을 다물었다.
 “에?”
 “어래, 그걸로 끝?”“재미없는 놈이잖아?”
 선배들은 제각기 신입생에 대해 간단한 평을 했다.
 ‘밋밋한 가슴, 이상한 남자다.’
 주진도 간단한 평을 남겼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걸?’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선이 고운 여자 같은 남자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특히나 기억력 좋다는 거 하나밖에 내세울 게 없는 주진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주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슷한 사람이 떠올랐다. 입코에서 체력장을 봤을 때 자신에게 이곳으로 가라고 했던 여성, 그녀도 긴 머리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선이 고운 여성이었다. 단, 키는 170센티미터가 약간 못 되었다.
 ‘둘이 남매지간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연구소 리더 역할을 맡은 유관림 선배의 말이 이어졌다.
 “자자, 아무튼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의 팀원이 다 모인 것 같으니 여기를 주목!”
 연구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바라봤다.
 “우리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는 내가 들어온 이후 5년 동안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회에서 인정받은 논문은 하나도 없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지. 아직까지는 사회의 분위기상 겉으로 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니까.”
 그가 이런 말을 하자 주진은 하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연구를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선배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회에서 우리의 논문을 인정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코를 통해서 일을 성사시킬 것이다. 여기 오늘 온 새로운 친구 익사윤은 마침 입코 활동자 중 대학생이 된 자로서 그런 부분을 도와줄 것이다.”
 “에에? 어쩐지 인기 없는 연구소에 신입생이 2명이나 들어오나 싶더라니…….”
 “오호라. 어쩐지 특이한 친구다 했더니 그렇군.”
 “뭐, 아무렴 어때? 좋은 결과만 나오면 됐지 뭐.”
 리더 유관림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을 했다.
 “자, 어쨌든 신입생 두 명은 여기에 신상명세를 자세히 적어라.”
 리더 유관림은 신상명세서를 나눠 주며 그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연구해 왔는지 차차 알게 될 것이야. 단, 놀랄 만한 것들이라는 사실만 말해 두지. 하하하!”
 ‘오호라. 그래서 아까 내가 이리 오게 된 이야기를 듣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구나!’
 어쨌든 주진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좋아! 앞으로 좋은 성적을 내서 입코에 들어가자. 그리고 마나 임팩트에 대한 사실을 조사하자!’
 그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 연구실을 둘러보지 않았구나!’
 주진은 신상명세서를 다 쓴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유리관 속에 든 것들이 모두 돌연변이 채소들인가?’
 썩지 않도록 하는 액체를 넣고 그 안에 여러 종류의 채소들을 넣어 둔 유리관들이 많이 보였다.
 ‘저건 뭐지? 저것도 식물인가?’
 그런데 간혹 정말로 식물인지 의심이 가는 것들도 있었다. 주진은 그것을 자세히 바라봤다.
 ‘사람? 하지만 크기는 손바닥만 한걸?’
 주진이 본 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작은 인형 같은 물체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위로 풀이 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리관 겉에 ‘만드라고’라고 쓰여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저게 생물?’
 그 옆에 있는 것도 특이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여러 가지 끝에는 눈이 달려 있고 기다란 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입은 마치 악어의 입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눈으로 먹이를 보고 잡아먹는 건 아니겠지?’
 왠지 줄기를 자르면 그 안에서 근육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치 문어의 다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것만 같았다.
 ‘지구상에 저런 식물이 있었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다.
 ‘설마, 저건 산삼?’
 그리고 다른 쪽엔 한 뿌리에 수백만 원씩 하는 산삼들도 보였고, 특이한 모양의 뿌리를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도 있었다.
 “자자, 우리 주진 군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구나. 호호호. 내가 신기한 것 보여 줄까?”
 그런 주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유일한 여성 4학년 차유미 선배가 말을 했다.
 “신기한 것이요?”
 “그럼. 잠깐만.”
 유미 선배가 그렇게 말한 후 연구소 구석으로 가더니 서랍을 열고 안에서 어른 한 뼘만 한 화분을 가지고 왔다.
 “짜잔, 주진 네가 본 것들은 모두 죽어 있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살아 있는 샘플이지. 봐라.”
 유미 선배는 그렇게 말한 후, 화분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안에는 날카로운 잎사귀를 가진 식물이 심어져 있었다.
 유미 선배는 또 다른 병에서 작은 유리관을 이용해 무언가를 담았다.
 ‘파리?’
 그것은 흔한 파리였는데, 아마 실험을 위해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애앵~.
 파리는 작은 유리관 안에서 날아다니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유미 선배는 그것을 식물 위에 가지고 가서 한쪽을 열었다. 그러자 파리는 그쪽으로 가더니 곧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힘찬 날갯짓을 할 때였다.
 촤락!
 “응?”
 “나이스!”
 유미 선배와 주변의 다른 선배들이 동시에 말을 했다.
 ‘식물의 잎사귀가 창이 되서 파리를 잡았다?’
 주진은 의아한 눈빛으로 식물을 유심히 바라봤다.
 “잘 봐. 신기한 것은 이제부터니까.”
 식물의 뿌리에서부터 방사형으로 자란 잎사귀들이 주변에서 날아다니던 파리를 정확하게 꿰뚫더니 그것을 뿌리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자 곧 뿌리로부터 작은 막대기 같은 것이 나오더니 그것이 벌어지면서 파리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하하하.”
 주진은 어이가 없는 웃음을 흘렸다.
 “호호, 신기한 것은 이 식물의 뿌리에는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소화 기관을 있다는 것이지. 단, 동물의 것처럼 복잡하진 않고 식물에 필요한 영향분만 흡수하도록 구조가 간단하지.”
 유미 선배의 설명에 주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한 눈빛으로 눈앞의 식물을 바라봤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마 그동안 수없이 많이 봐 온 모습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식물의 구조나 생태계가 아냐.”
 “네? 그럼……?”
 주진은 의아했다. 이런 식물이라면 기존의 식물에 대한 정의를 새로 쓸 지로 모를 대 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대 유미 선배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과거부터 이제까지 이런 식물은 단 한 번도 보고 된 바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 이건 최근에 생긴 것이지. 그럼 과연 뭣 때문에 지구상에 이런 식물이 생긴 것일까?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식물은 하나뿐이 아니야. 아까 주진 네가 유리관 속에서 본 만드라고도 그중 한 예이지. 먼 땅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식물이 오늘날 나타난 거야.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유미 선배는 주진의 눈을 주시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아니면 누가 만든 것일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아!”
 주진은 유미 선배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디 워가 이 세상을 많이 변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몬스터가 거리에서 활개 치며 사람을 잡아먹고, 인간 비슷한 존재들과 지구의 운명을 건 전쟁을 한 것이 고작 27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진은 유미 선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입코에서 대학생이 된 익사윤이란 친구를 이곳에 입학하게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설마 이거, 내가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딘 건 아니겠지?’
 주진은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양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니야. 어차피 입코에 들면 판타몰로부터 많은 위험을 당한다고 했어.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 해!’
 주진은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2. 데이트
 
 “하아악.”
 “아아~.”
 뜨거운 호흡이 주변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은은하게 밝힌 붉은 불빛이 그런 두 명의 육체를 비추었다.
 반나체의 젊은 남자가 자신의 위로 올라간 여자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아~, 좀 더 세게…….”
 남자는 연신 여자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자신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여자의 혀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 여자의 상의를 벗기고 있었다.
 툭.
 등 뒤의 끈이 풀어지자 여자의 마지막 남은 작은 가리개는 헐렁해졌다. 남자는 아직 완전히 벗겨지지 않는 가리개를 벗기기 위해 어깨에 걸쳐 있는 얇은 끈을 어깨 너머로 넘기고 있었다.
 “아앗!”
 남자는 여자의 입이 갑자기 자신의 목덜미를 세게 흡입하자 강하지만 짧은 신음을 흘렸다.
 스르륵, 툭.
 어깨에 있는 끈을 넘기자 작은 가리개는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 남자의 손이 가리개 대신 살포시 그것의 목적을 대신하려고 할 때였다.
 “아악!”
 갑자기 남자는 짧은 고함을 질렀다.
 “아아악, 아흐윽!”
 쯔으읍, 쯥!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을 흡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악, 아아악! 아히익, 아아, 아아~!”
 남자의 고함은 점점 신음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쯔으읍, 쯥쯥.
 흡입 소리가 강하고 계속 될수록 점점 남자의 신음은 높아졌다.
 그렇게 커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 위에 있던 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여자는 혀로 입 주변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아, 아아아~.”
 남자는 계속해서 깨어날 수 없는 쾌락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 연신 쾌락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자는 땅에 떨어진 가리개를 주워 천천히 입었다. 그리고 붉은 핑크색의 블라우스를 마저 입은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의 늘씬한 다리는 아름다움을 뽐내려는지 아래로 거침없이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여자는 땅에 떨어진 치마를 들어 입은 후 남자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2개의 작은 상처가 있었는데, 벌써부터 아물고 있었다.
 “칫, 뭐야. 오늘도 그렇게 싱겁게 끝내는 거야?”
 “너…, 언제부터 있었니?”
 “언제부터긴. 언니가 남자를 데리고 올 때부터였지. 치, 그런데 오늘도 여기까지인 거야?”
 이제 15세쯤 되었을까?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았는지 약간 부풀어 오른 볼 살이 그녀의 귀여움을 더했다.
 “그럼, 어디까지 가길 바라? 방금 까딱 잘못했으면 가슴까지 허용할 뻔했구먼.”
 “아아, 21살 먹도록 처녀인 뱀파이어는 언니밖에 없을 거야!”
 “아아, 아~.”
 둘의 대화 중 갑자기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이제 우리의 침 효과가 끝나 가나 봐. 언니, 어서 여기를 나가야겠다.”
 긴 생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오는 소녀는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동류인 언니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물론 지금 쾌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남자에게 들킬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프 뱀파이어로 태어났는데도 남자와 몸을 섞는 것에 큰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게 걱정이었다.
 “그럼 난 가 볼게, 언니. 아 참, 제발 부탁인데 남자를 다룰 때 너무 배려해 주지 좀 마. 저게 뭐야, 남자 혼자만 쾌락에 빠져서 기뻐 좋아 죽네, 죽어! 아니면 같이 즐기던가!”
 “흥, 싫어. 나는 남자가 내 몸을 만지는 것이 싫단 말이야!”
 “베에~ 그럼 간단하게 피만 빨고 기억을 지우던가! 그럼 난 이만, 바이바이!”
 소녀는 언니의 인삿말을 듣지도 않고 창문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녀가 앉아 있던 창문을 여자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해가 떨어진지 한참 지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갑자기 오른손으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흥, 뱀파이어의 식사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난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여자는 이제 곧 쾌락의 시간을 끝내고 눈을 뜨려는 남자를 바라봤다.
 뱀파이어의 식사는 남자의 피에 섞인 정기를 빨아 먹는 것이다. 물론 다른 뱀파이어는 남녀의 정사를 통해 빨아 먹는다. 피에 섞인 것보다 정사를 통해 발출하는 정기가 훨씬 더 맛있고 둘도 없는 음료이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제 태생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맡에 무언가 작은 주머니를 놓았다.
 ‘이게 제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배려입니다. 이것으로나마 저의 죗값을 용서해 주세요.’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아…….”
 남자가 막 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여자가 뒤돌면서 손을 흔들자 무언가 알 수 없는 냄새가 주변을 가득 매웠다.
 그 냄새는 밖으로 나가려는 여자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남자의 코로 들어갔다.
 “…아, 저, 저기…….”
 남자는 이상하게 여자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그녀를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여자는 어느덧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 있지? 아, 맞아.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와… 예쁜 여자?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게 예쁘다는 건 알고 있을까?”
 남자는 스스로의 기억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틀림없이 기억은 있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이상한 여자. 약혼자에게 줄 반지를 잃어버려 헤매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온 알 수 없는 여자.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러브호텔이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느낌과 이 감각… 뭐지? 뭐가 이리 아쉽지?”
 남자는 그 느낌과 감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선화. 선화야!”
 남자는 약혼자의 이름을 불렀다.
 “아, 반지!”
 당장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약혼자에게 가고 싶었지만, 잃어버린 반지가 떠올랐다.
 툭!
 그때였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상한 주머니가 보였다. 남자는 그것을 주었다.
 ‘뭐지?’
 그것을 열자 작은 상자가 나왔다.
 “어? 이, 이건!”
 남자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허겁지겁 작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작은 빛이 들어와 작은 상자 안에 있는 반지의 중앙에 달린 보석에 부딪쳐 빛을 산란시켰다.
 “바, 반지다!”
 남자는 순간 반나체인 자신의 상황도 잊고 침대 위로 올라가 신나게 춤이라고 추고 싶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여자를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보내 버렸다.
 
 -흥,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건드리다니, 언니 알고 보니 뱀파이어의 재능이 상당히 많은 걸?
 뱀파이어의 식사를 한 방을 나와 밖으로 나가려는 찰라 머리를 울리는 이상한 언어가 들렸다.
 -흥, 넌 간 줄 알았는데?
 -응. 가려고 했는데 언니가 걱정 되서 다시 왔지. 아니, 말 돌리지 마. 그것보다 역시 언니야. 이제 저 남자는 약혼녀는 잊어버리고 언니만 찾아다닐 거야. 축하해 언니, 잘하면 훌륭한 종 한 명 만들겠어.
 -오해하지 마. 저 남자는 나를 잊고 약혼녀에게 줄 수 없었던 선물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둘의 사이는 더 좋아질 거야.
 -선물? 설마 그 작은 반지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반지? 그건 아냐. 그것보다 더 큰 것이지. 아직 어린 넌 이해하지 못할 그런 거야. 안녕.
 여자는 더 이상 동생과 말하기 싫은지 정신의 끈을 끊었다. 그리고 이제 막 호텔을 나와 한 발짝 걸었을 때였다.
 콰당!
 “아!”
 “어이쿠, 아야!”
 여자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와 부딪치자 가슴 부위에 약간의 통증을 느끼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남자는 뒤로 벌러덩 넘어져 큰 통증을 느끼고 있는지 오른손으로 연신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군요.”
 “아니, 갑자기 그렇게 호텔에서 나오면 어떡합니까? 제가 잽싸게 충격을 줄이기 위해 뒤로 물러나…, 응? 탤런트 문… 아름?”
 남자는 자신과 부딪친 여자에게 정신 차리라고 강하게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녀의 신분을 알자 말이 막혔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서 나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남자는 그녀가 나온 곳을 바라봤다.
 “호, 호텔?”
 남자는 손가락으로 문아름을 가리키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탤런트 문아름은 갑자기 냉정해지더니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상한 냄새가 남자의 콧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응? 이 냄새는 뭐지?’
 “이만.”
 그리고 그녀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남자는 냄새를 다시 한 번 맡아봤다.
 “이거 참 묘하네. 왜 갑자기 성욕이 일지? 킁킁.”
 남자는 갑자기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성욕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런 감정은 사그라졌다.
 “그건 그렇고, 오예! 오늘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빅뉴스를 목격했다. 탤런트 문아름, 호텔에서 나오다. 우하하!”
 하지만 남자는 과연 친구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지 의문이 들었다.
 “아, 지금 몇 시지?”
 그러다가 해가 져 어두운 밤하늘을 본 후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봤다.
 “이크, 10시 14분! 10시 약속인데!”
 다다닥!
 남자는 뛰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약속 장소가 멀지 않았는지 남자는 곧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흠, 데이트라, 솔직히 관심 없는데…….’
 친구와의 약속은 삼성 역에 있는 후르츠 레스토랑에서 저녁 10시에 대학 입학 기념 데이트다. 물론 그는 친구들의 우정 때문에 온 것이지, 여자들을 만나 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 좀 늦었다.”
 “주진, 이제 오냐!”
 “옷은 그게 뭐냐!”
 그 남자는 주진이었다.
 그의 인사에 두 명의 남자가 대답했는데, 둘 다 고등학교 친구였다.
 “인사해라. 이쪽 숙녀 분들이 오늘 우리와 함께 어울릴 분들이다.”
 데이트를 주선한 간의학이 말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던 친구로서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는 판타몰 연구학과에 들어갔는데 5년 전에 새로 생긴 학과였다. 말이 연구지 대부분 범죄나 그들의 힘을 알아내는 것을 생업으로 하기 위한 기초단계를 배우는 곳이다.
 주진의 친구 간의학이 그런 곳에 들어간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판타몰들이 일으킨 사건에 휘말려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와 운동에 신경을 써서 판타몰 연구학, 그것도 서울대를 목표로 열심이었던 친구다.
 간의학이 말하자 또 다른 친구 이채섭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대 이채섭입니다.”
 ‘윽!’
 순간 주진은 친구 이채섭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채섭은 허풍이 심한 게 흠이지만, 우정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쪽으로 비상하게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번 데이트도 그가 간의학을 꼬드겨 이루어 낸 일이다.
 ‘여기서도 허풍이냐!’
 주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봐서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채섭은 아까부터 진짜 금발인지 아니면 염색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여성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는 그가 평소 말했던 ‘한 눈에 반해 버릴 여성이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녀의 마음을 취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천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서울 전문대생이 서울대생이라고 속이는 것은 결국 자기 무덤을 미리 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주진은 말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절대 거짓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어서 지금 상황이 싫었다.
 “그리고 이쪽은 같은 서울대생 최주진입니다.”
 이채섭은 주진까지 학교를 속이며 소개했다.
 “아니, 난…….”
 “그렇지, 최주진?”
 “아, 그게…, 그렇습니다.”
 주진은 사실대로 말하려 했지만, 이채섭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 가려 온다!’
 거짓말을 한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상황이 싫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긁적긁적.
 주진은 남들 모르게 손을 내려 무릎을 긁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배 부위와 옆구리를 긁었다.
 ‘크윽! 젠장!’
 “하아, 하아.”
 숨도 가빠졌다. 그래서 그는 오직 지금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왜 이러지? 고작 거짓말 한마디 때문에?’
 주진은 자기 몸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저, 실례합니다만, 몸이 안 좋은 거 아닌가요?”
 그때, 이채섭이 점찍어 둔 금발의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주진을 보더니 말했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간의학이 의아한 듯이 주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쾅!
 주진은 순간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외쳤다.
 “죄송하지만, 전 서울대생이 아니라 서울 전문대생입니다.”
 결국 그는 지금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채섭아, 미안하다.”
 그리고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친구에게 계속 말했다.
 “어차피 밝혀질 거, 나중에 실망을 주는 것보다는 지금이 좋겠지.”
 그런 말을 하며 상대방 여성들을 바라봤다.
 ‘응?’
 주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런 얼굴이지?’
 세 명의 여성은 뭔가 대단히 실망한 얼굴이었는데, 특히나 채섭이를 향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래서 채섭이가 거짓말을 한 건가? 흥, 사람을 학벌로 판단하는 여자라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낫지.’
 주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계산은 내가 할게.”
 주진은 그렇게 말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나가는 것이 억울했지만, 거짓말을 하기 싫어 데이트를 파투 놓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산대에서 돈을 내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네가 거짓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너무 무리했다. 여자보다 친구가 먼저인데, 미안.”
 뒤에서 이채섭이 주진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먼저 돈을 내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주진은 간의학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주고는 채섭이를 따라 나갔다.
 데이트에 나온 여성 세 명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서로 바라보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눈빛을 데이트 주관자 간의학에게 보냈다.
 “하하, 참나.”
 “호호호.”
 “큭큭!”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화를 내지는 않고 서로 웃었다.
 “저 녀석들이 제 친구입니다. 어떠세요, 재미있는 녀석들이죠?”
 “킥킥, 그러게요. 좀 특이하신 분들이네요.”
 채섭이가 점찍어둔 금발의 예쁘장한 여성이 말을 했다.
 “뭐, 학벌이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을 한 것이 싫었지만, 그래도 그 뒷일처리는 마음에 드네요.”
 그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이 말했다.
 “둘 다 능력이 아까운 녀석들이죠. 나보다 뛰어난 친구들인데 한 명은 천성이 게으르고, 한 명은 놀기를 좋아하죠.”
 “호호, 게으름과 놀기 좋아하는 것도 능력의 일부분이죠. 그런 면에서 의학씨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파투난 데이트에 남은 네 명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남겨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봐, 채섭아!”
 “어, 그래.”
 주진의 부름에 앞서가던 이채섭이 뒤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나가면 어떻게 해?”
 “응? 까짓것 데이트야 다시 하면 되지.”
 허풍이 좀 있지만 우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채섭이었기 때문에 아까의 거짓말로 그를 싫어할 순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낙천적인 사고방식이 주진에게까지 옮겨져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렇지. 그런데 제발 그땐 나 좀 빼 주라.”
 “흥, 그렇게는 안 되지! 그런데 아까 나올 때 나 멋있었냐?”
 “응?”“그러니까 레스터랑에서 나올 때 여자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땠어? 나보다 늦게 나왔으니 봤을 거 아냐?”
 “이, 이 녀석이! 크큭!”
 주진은 채섭을 보며 웃었다.
 “헤드록!”
 그리고 길거리에서 쪽팔리지도 않는지 친구의 목을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케켁! 하, 항복!”
 “너 이 녀석아, 아까 좀 멋있었다. 최소한 남자인 내가 보기에는!”
 주진은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케켁, 여자가 보기에는… 목 좀 놓아 주라!”
 둘은 그렇게 장난을 치며 거리를 배회했다.
 “근데 말이지 주진아, 너도 멋졌다.”
 “뭐?”
 주진은 채섭이의 말이 작았기에 잘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락실 가자!”
 늦은 밤, 길거리에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양쪽으로 늘어서서 그들을 비추기 위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진과 채섭은 그 사이로 가뿐한 발걸음을 옮겼다.
 
 
 3. 슈퍼맨?
 
 크아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티브이에서 보여 주는 자료 화면에서 남자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네, 어제 저녁 7시 운성 타운 지하 주자창에서 CC 티브이에 찍힌 모습입니다. 범인은 끔찍하게도 유명 연예인 주기철을 찢고 그 살을 뜯어 먹었습니다. 사건의 끔찍함 때문에 이번 사건은 잎코에서 나와 해결할 것 같……”
 벌컥, 탁!
 “이런, 젠장! 늦었다!”
 주진은 아침 7시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7시 48분! 주진, 서두르자!”
 촤르르르. 탈칵.
 “밥은 패스, 양말!”
 뉴스는 곧 끝났고, 샤워실 문이 열리며 주진이 나왔다.
 그의 머리가 물에 젖어 있는 것으로 봐서 집을 나가기 위해 씻은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양말을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대강 아무 옷이나 걸쳐 입었다. 바지는 청바지였지만 한 10년은 입었는지 누리끼리했고, 위에는 목이 늘어진 노란색 티에 흰색 외투를 입었는데 소매가 다 뜯어져 옷이 너덜거렸다. 가만히 보니 수염이 짧게 자라있었는데 깍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그의 친구들이 봤으면 10미터 이상 떨어져 알은 채 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을 것이다.
 
 “10미터 떨어져서 걸어!”
 “어이, 친구!”
 “알은 채도 하지 마!”
 “이봐, 우린 친구잖아?”
 “네가 내 친구라면 나를 위해 옷을 잘 입고 왔어야지! 더군다나 너 기다리느라 13분이나 늦었단 말이야!”
 주진과 그의 친구 이채섭의 대화였다.
 둘은 같은 서울 전문대에 입학했다. 그래서 데이트를 파투 놓고 둘이서 오락실에 가서 놀다가 각자의 집으로 헤어질 때 학교에 같이 가자고 채섭이가 제의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크윽, 이 녀석이 이런 놈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던 것이 후회로구나!’
 “야, 양복은 못 입을망정 집에서 입던 목 늘어진 그 티는 뭐냐!”
 “하하, 옷이 뭐 대순가…….”
 “대수닷!”
 주진의 옷에 대한 센스는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옷을 그저 추우면 따스하게 하는 정도의 개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둘은 학교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대 앞에서 내려 다시 달려가던 중 채섭이가 호흡이 가파졌다.
 “하아, 주진아, 좀 하아 하악 쉬다 가자 하아.”
 “응? 아, 응.”
 둘은 달려가던 것을 멈췄다. 채섭이는 체면도 잊은 채 바닥에 앉아 쉬기 시작했다. 그 옆에 있던 주진은 멀뚱히 서서 채섭을 바라봤다.
 ‘언제 저 녀석이 저렇게 달리기를 못했던가?’
 주진 자신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직 숨도 골랐고 다리의 힘은 달릴수록 더욱 넘쳐났다. 이제 달릴 만해지니까 채섭이가 쉬자고 한 것이다. 그런 주진을 채섭은 의아하게 바라봤다.
 “하아, 이봐, 주진아. 너 겨울방학 때 달리기 연습이라도 했냐?”
 이제 어느 정도 숨을 고른 채섭이 말했다.
 “응? 아니, 전혀. 그런 귀찮은 것을 내가 하겠냐?”
 “그렇지, 그렇군.”
 그는 주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참 잘 달린다. 내가 너 따라가다가 더 지쳐 버렀어.”
 “그래? 네가 못 달린 거겠지.”
 뒷말은 작아서 채섭은 잘 듣지 못했다.
 둘은 잠시 더 쉰 다음에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같이 뛰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게 발이 허전했다.
 “이런, 신발 끝이 풀어졌잖아. 잠깐.”
 주진은 자리에 앉아 신발 끈을 묶기 시작했다.
 “어래?”
 주진은 끈을 잘 묶은 다음 강하게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신발 끈이 끊어져 버렸다. 그는 그것을 눈앞으로 가져와 쳐다봤다.
 “이 신발 신학기여서 그저께 구입한 건데, 불량인가?”
 그는 방과 후 신발 가게에 가서 교체하리라 마음먹고 일단은 그냥 신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채섭이와 같이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채섭이의 체력이 돌아오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주변의 여러 학생들을 지나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문이다!”
 주진은 저 멀리 보이는 학교 정문을 바라보고 외쳤다.
 “어래?”
 그때 신발 끈이 끊어져 헐렁해진 신발이 벗겨졌다.
 “젠장, 바빠 죽겠는데!”
 그는 신발을 신기 위해 뒤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눈앞에 보행자를 조심하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 간판은 어른 손목만 한 봉으로 땅에서부터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발은 간판 뒤로 떨어져 있었다.
 “에잇!”
 퍽!
 화풀이 좀 할 겸 신발이 벗겨진 발로 간판의 봉을 찼다.
 “어?”
 그런데 그 봉이 휘어졌다. 그래서 간판은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채섭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봐라봤다.
 “하하, 봉이 알루미늄인가? 아이쿠, 발아!”
 “……?”
 채섭과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주진의 모습을 바라봤다.
 주진은 괜히 무안해져 아프지도 않는 발을 아프다고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그러다가 신발을 들어 보았다.
 “이건 또 뭐야, 진짜 불량인가?”
 밑창이 움푹 파였고 바닥은 신은 지 1년은 넘은 신발처럼 닳아 있었다.
 “야, 서둘러!”
 “응!”
 나중에 신발 가게에 가서 따지기로 하고 일단은 학교로 향했다.
 
 “자, 신입생도 두 명이 들어왔으니 단합을 위해 당연히 엠티를 가야겠지?”
 주진은 채섭과 헤어진 후, 돌연변이 채소 연구소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과 교수를 만나고 온 리더 유관림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럼, 이번 주 연구는 쉬는 건가요?”
 “물론! 그리고 이미 교수님에게 허락은 받고 왔지. 하하하!”
 2학년 선배들의 물음에 유관림 선배가 말을 했다.
 “오늘이 수요일, 그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엠티를 간다. 이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없지요.”
 “있을 턱이 있나요.”
 신입생을 제외한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찬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놀러 간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엥? 내일부터요?”
 그러나 주진은 갑작스럽게 가는 엠티에 놀랐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빨리 날짜를 정한 것이 아닌가, 해서요.”
 “하하, 생각은 신중하게, 행동은 빠르게! 그리고 우리들의 엠티는 단순히 단합만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야. 앞으로 연구할 식물을 채집하러 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수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라고.”
 리더 유관림은 그렇게 말을 한 후 신입생들에게 앞으로 공부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은 일단 식물의 이해와 성장이란 책을 보거라. 그리고 화학이 중요하니까 앞으로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할 거야. 일단 1학년 때는 전문 지식이 짧아 연구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주로 옆에서 지켜봐야 할 거야. 그래서 시간이 넉넉할 테니 앞으로 틈틈이 공부를 해 둬라. 그렇지 않으면 2학년이 되어도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할 거다.”
 “네.”
 주진은 선배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나 같은 신입생인 익사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 그럼 엠티에 대한 계획을 짜자!”
 리더 유관림은 연구원들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런 후 엠티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서로 준비할 준비물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
 그러던 와중에 주진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머리가 상쾌해지는 것이 좋은데?’
 그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의심되는 곳을 바라봤다.
 ‘저건 뭐지? 화학 반응으로 뭔가를 만들고 있나?’
 그곳은 4학년 차유미 선배의 자리였는데, 여러 가지 시험관이 복잡한 구조로 놓여 있었다.
 순간 주진은 이 냄새가 어디선가 맡은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제?’
 순간 주진은 자신의 기억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특이한 기억 방식은 곧 원하는 것을 찾았다.
 ‘신입생 환영한다며 내 머리 위로 이상한 물질을 떨어트렸을 때군. 그때 이물질을 씻기 위해 선배들이 준 이상한 액체…, 그러고 보니 그 액체로 몸을 씻었을 때도 매우 상쾌했는데, 저 액체가 뭐지?’
 주진은 그 액체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은 유관림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 그럼 오늘은 일찍 마칠 테니, 각자 집으로 가서 엠티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나도 개인 준비물로 챙겨야 할 것이 많으니 어서 가 봐야겠다.”
 유관림 선배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연구원들에게 각자 하고픈 일을 하라고 했다.
 “난 일찍 집으로 가야겠다.”
 “나도 집으로~.”
 다른 선배들은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난 하던 것이나 끝내고 갈게.”
 그러나 4학년 차유미 선배는 집으로 갈 생각이 없는지 여러 개의 유리관으로 복잡한 실험을 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진은 그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유미 선배에게 다가갔다.
 “뭐 하는 건가요?”
 “응? 귀염둥이 신입생 주진군. 어서 자리에 앉아 봐.”
 3년 아래의 후배인 주진을 유미는 귀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주진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진은 선배의 말에 옆 자리에 앉았다.
 “뭐하냐고? 보시다시피 돌에서 한 가지 물질을 분리하고 있어.”
 주진은 유리관으로 얽혀 있는 실험 도구들을 바라봤다.
 비커 속에 아기 주먹만 한 돌이 들어 있었고, 그곳에 이상한 액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비커를 계속 달궈 액의 점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액체를 스포이드로 뽑아 내 다른 비커에 담고, 그곳에 정수를 섞었다.
 “우리들은 이 돌을 성장석이라고 이름 붙였어. 왜 그런지 알아? 이상하게 이 돌이 있는 땅에서는 식물이 빠르게 자라더라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돌 속에 식물을 빨리 자라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 지금 하는 작업은 그 성분을 특수한 액체에 녹이고 있는 작업이야.”
 “에에?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있죠?”
 “호호호, 이것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방법을 다 써 본 결과, 그중 가장 나은 반응을 보인 것을 찾은 거야. 너도 앞으로 자주 하게 될 테니 꼭 알아 둬. 우리가 하는 연구는 인내와 끈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실패해도 또다시 희망을 가지고 다른 방법을 찾아 도전하는 정신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네.”
 “지금 하는 것도 돌의 그 성분을 알기까지 1년이 걸렸고, 그것을 빼내는데 거의 2년이 걸렸어. 지금 이 연구는 내가 졸업 논문으로 쓸 내 생애 최고의 연구가 될 거야.”
 “네…, 그런데 이 액체가 뭐죠?”
 “정확한 답은 아직 없어. 단지 정수와 섞은 그 액체는 말이지, 아주 훌륭한 거름이 되는 거야. 황무지 땅에 뿌리면 비옥한 땅이 되고, 사람이 마시면 무병장수도 가능할 거야. 하지만 아직 동물 실험은 안 했으니 함부로 마시지 마라.”
 “아, 네. 혹시 어제 저에게 씻으라고 준 액체가 이것이죠?”
 “응. 어떻게 알았어?”
 “그게 같은 냄새가 나잖아요.”
 “응? 뭔 소리야. 이건 무색무취야.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아.”
 “네? 하지만 상쾌한 냄새가 나는 걸…….”
 “호호, 상쾌한 냄새는 어떤 냄새인데? 너무 추상적이잖아. 아마 네 기분 때문이겠지.”
 “그래도 나는데…….”
 주진은 선배의 주장에 뭐라 답변할 수 없었다.
 ‘하긴, 상쾌한 냄새라니. 상쾌한 기분이면 이해를 하겠지만 냄새를 표현하는데 ‘상쾌한’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군. 하지만 정말로 상쾌한 냄새가 나는데 이거 참 뭐라 표현할 수가 없네.’
 주진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돌에서 액체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계속 지켜봤다. 그러나 계속 같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이 꽤 지루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작업을 약 3년 동안 해 온 것인가? 나보고 하라고 하면 1개월도 못 버티고 포기하고 말 거야.’
 주진은 유미 선배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빠아앙! 위이잉~.
 거리에는 차들이 질주했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걷고 있었다.
 -파란 불이 켜졌습니다. 건너실 분은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신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길을 건넜고, 차들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멈춰 있었다.
 주진은 학교를 나와 번화가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껴서 교차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곧 눈앞에 교성 문고가 보이자 안으로 들어갔다.
 “오, 꽤 크잖아?”
 서점은 대형 백화점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바로 서점 검색을 위해 컴퓨터로 향했다. 그리고 ‘식물의 이해와 성장’이란 책을 검색 창에 쳤다.
 ‘에엥? 5만8천 원! 뭔 책이 이리 비싸?’
 그는 가지고 온 돈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결국 빈손으로 집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다시 번화가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가 헛수고한 것이 아까워 다시 오락실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오른쪽에 난 좁은 길을 바라봤다.
 ‘이쪽 길이… 지름길이겠군.’
 가 본 적은 없지만 주진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 서울 시내의 지도를 샅샅이 훑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지도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길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진은 거침없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아악!”
 ‘비명?’
 주진은 골목에서 들려온 소리에 재빨리 그곳으로 뛰어갔다.
 
 탤런트 문아름은 스케줄을 취소하고 동생이 식사를 하고 있는 번화가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향했다.
 ‘제발, 이번에는 아무 일이 없기를…….’
 아름은 뭐가 그리 걱정인지 서둘러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다다르자 재빨리 그리로 들어갔다.
 “아앙!”
 “하아악, 하악, 아앙~!”
 거기에는 알몸이 되어 정사를 치르는 두 명의 남녀가 있었다.
 “아악, 아, 어…, 언니 왔어? 아앙~.”
 “유경아!”
 아름은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동생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아, 걱정 마. 아앙~. 원래 우리들 하프 뱀파이어는 이 모습이 정상 아아~, 정상이라고. 하아악~.”
 유경이라 불린 소녀는 젊은 남자 위에 올라가 열심히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쾌락에 젖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아래에 있는 남자는 쾌락에 젖은 모습이면서도 얼굴은 찡그리고 있었다.
 “봐, 언니. 이것이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이야. 아앙!”
 유경이 그렇게 말하며 하체에 강한 힘을 주었다.
 “아악!”
 순간 남자는 무언가가 빨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경! 그 방법으로 정기를 먹으면 남자의 수명이 줄어든다고!”
 “아아악! 나도 알아. 그런데 아앙… 우리가 뭔 상관이야!”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
 “몰라! 우리가 하등한 인간을 아악! 이해해야 될 이유가 뭔데! 언니 말대로 아아앙! 숨어 살기 위해 살인하지 않는 것도 많이 참는 거라고! 아앙, 앙~.”
 하프 뱀파이어로 태어나 남자의 정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1달에 1번씩 남자의 정기를 먹는다. 만일 그때마다 남자를 죽인다면 범죄 수사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입코가 개입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들이 발각될 수 있다.
 그래서 절대 살인은 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원칙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을 연인 대하듯 대할 필요성을 유경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이들은 우리의 식사꺼리야. 식사라고!’
 유경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경아! 아직 모르겠니? 우리들의 운명을…….”
 창!
 순간 유경이 남자에게서 떨어져 아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날카롭게 변해 버린 손톱으로 아름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아름에게 막혔다. 그녀도 날카로운 손톱으로 유경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흥, 언니라고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내 운명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차륵! 창!
 순간 유경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름도 그 공격에 맞섰다.
 그러나 어느새 유경은 뒤로 몸을 뺐다.
 “흥, 방금 난 언니를 죽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언니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료니까. 하지만 언니…, 언니같이 그렇게 약한 정기만 먹으니까 나 같은 어린애에게도 지는 거야. 그럼, 안녕.”
 “유경!”
 아름이 저 멀리 사라지는 유경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스르륵
 갑자기 아름이 입고 있던 원피스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어느새?”
 그제야 아름은 유경이 말한 어린애에게도 진다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다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유경의 공격이 자신의 어깨를 스친 것이다. 물론 유경이 마음만 먹었다면 옷이 베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깨가 잘렸을 것이다.
 유경은 바닥으로 흘러내린 원피스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성폭행?”
 “꺄악!”
 아름은 고함을 지르며 땅에 떨어진 원피스로 옷을 가리고 몸을 움츠렸다.
 주진은 순간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뭐지? 오히려 여자가 멀쩡하고 남자가 알몸으로 쓰러져 있다? 그럼 저 여자가 성폭행을 한 것인가? 거참, 세상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오래 살아야겠네.’
 주진은 어이없는 상황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였다. 속옷 차림으로 움츠리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주진을 바라봤다.
 “어? 탤런트 문아름? 하하, 서, 설마…….”
 주진은 성폭행을 한 여자가 유명 연예인이란 사실에 더욱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여길 알고 왔죠? 우리가 보이지 않았을 텐데?”
 하프 뱀파이어가 식사를 할 때는 유혹의 향을 뿌려 사람의 시야를 흐린다. 그래서 설사 옆을 지나가도 식사 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저 남자는 이쪽을 확실하게 보고 자신의 이름까지도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는 호텔에서 나오더니. 이거 알고 보니 변태녀 문아름이었잖아? 그동안 티브이에선 알랑방귀를 뀌고 있던 것이었군.’
 주진이 연예인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지만, 요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탤런트였기에 문아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청순미와 조용한 성격으로 여러 남자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그녀는 선행도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설명할 여유가 없군요.”
 순간 문아름의 표정이 냉정하게 변했다.
 ‘싫지만 해야겠지?’
 문아름은 조금이나마 몸을 가리고 있던 원피스를 치웠다. 그러자 그녀의 뽀얀 속살이 거의 다 드러났다.
 “커윽!”
 순간 주진은 눈앞의 모습에 황당하면서도 보기 좋은 장면이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문아름은 그렇게 말하더니 두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하프 뱀파이어만이 가지고 있는 유혹의 향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향은 주진의 이성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뭐지? 또 몸이 흥분되는데?’
 주진은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럼. 저 남자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예요. 단지 1달 동안 거동이 불편할 것입니다.”
 아름은 알몸으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서, 설마 판타몰!”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주진은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쳇! 고작 잠깐의 기억을 흐리는 것이라니, 언니는 저렇게 해결하면 어떻게? 아무리 기억을 지운다 할지라도 지금 상황을 또다시 볼 텐데…, 나 같음 저 남자를 죽였겠다.
 아까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유경은 건물 옥상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알몸으로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옷을 입혀 줄 때 자리에서 사라졌다.
 주진은 일단 경찰에게 신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목형 핸드폰을 들어 전화했다.
 경찰은 판타몰의 범죄라는 말에 1분도 안 되어 현장에 왔다. 그리고 주진으로부터 모든 경황을 들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주진이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경찰이 말을 걸었다.
 “네? 하지만 이제 전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지금과 비슷한 사건이 몇 년 동안 계속 있었습니다. 범인의 몽타주를 그릴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잠깐만요. 기절한 저 남자가 깨어나면 범인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비슷한 사건이 많았다면 목격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몽타주가 그려지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동안 이런 짓을 했다면, 이거 완전히 성에 미친 여자 아냐?’
 정신 나간 여자가 아니고서는, 몇 년 동안 길거리에서 남자를 성폭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잡히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설마, 남자 쪽에선 오히려 환영하며 받아들일 일이라 신고하지 않은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경찰의 말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피해자는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쾌락과 고통만 알 뿐이었고, 1달 동안 온몸에 힘이 없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네? 기억을 못 해요?”
 주진의 반문에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주진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주진이 간 곳은 서울 남부지부 경찰서였다. 그곳 13층에 위치한 비교적 넓은 별실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 몇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경찰들은 그중 하나의 책상에 주진을 앉혔다.
 그의 앞에는 중년의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경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4절지 캔버스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여러 종류의 연필이 놓여져 있었다.
 “일단 마음을 편하게 먹으세요.”
 중년 경관이 부드럽게 말을 했다.
 “자 그리고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생각을 해 보세요.”
 주진은 중년 여인의 말에 두 눈을 감았다.
 “얼굴은 달걀형입니까?”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어느 정도가 달걀형이죠?”
 “눈을 떠보세요. 이 정도입니까?”
 눈앞엔 턱 라인만 그린 그림이 있었다.
 “네? 아니요. 좀 더 갸름합니다.”
 “네? 흐음, 알았습니다. 이 정도입니까?”
 “아니요, 조금 더요. 아니, 이 부위가 약간 더 들어갔습니다.”
 “생각보다 범인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군요.”
 “하하, 제가 기억력이 좋습니다.”
 “아니면 아는 자입니까?”
 “네? 아닙니다.”
 순간 주진은 중년 경관의 말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예리하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티브이에서 몇 번 보았다고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았으니까.
 
 슥삭, 슥삭.
 “아니, 그게 아니고요. 이렇게 입니다!”
 “아, 그렇군요.”
 “좀 더 얇게요. 입술이 더 얇았다고요. 아니요. 이렇게 얇게 그려야지요!”
 “아, 그렇군요.”
 몽타주를 그리는 중년 여인은 주진의 말에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사람의 말을 듣고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두껍다고 하면 어느 정도가 두꺼운 것이며, 크다고 하면 그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중년 여인이 오랜 시간 동안 몽타주를 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격자의 말을 듣고 한 번에 그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 그냥 제가 그릴게요. 줘 보세요!”
 그런 상황이 주진의 속을 태웠는지 결국 주진이 연필을 뺐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으아, 집에 가서 낮잠이나 실컷 자려고 했는데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괜한 일에 휘말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갑갑했다.
 “이렇게 눈이 약간 쳐졌지만 그건 화장을 잘 못해서 그렇지 실은 약간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랫입술이 좀 얇은데 음, 이 정도입니다.”
 슥슥, 슥삭.
 주진은 빼앗은 몽타주를 직접 그리며 설명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끝!”
 탁!
 주진은 마지막으로 연필을 책상 위에 놓으며 몽타주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중년 여인과 최반장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단해요. 엄청난 소질입니다. 미술 전공입니까?”
 중년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아뇨. 전 카피는 잘 하는데 창작은 영 꽝입니다. 하하.”
 그는 한 번 본 것은 그대로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의 재능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기억력과 그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몸의 능력이었지, 창작력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몽타주를 그리는 것을 마치고 주진은 별관을 나왔다.
 “최 반장님, 이번엔 동일범이 아닐 수도 있겠는 걸요.”
 몽타주를 그리던 중년 경관은 주진이 나가자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계속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남자 강간 사건은 4년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모든 피해자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얼굴형만은 기억을 하고 있었죠. 그들은 모두 비슷한 얼굴형을 말하고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얼굴형은 조금씩 갸름하게 변해왔습니다.”
 중년 경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랍장을 뒤졌다. 그리고 하나의 파일을 가지고 오더니 그것을 펼쳤다.
 “이 그림을 보세요. 범인의 얼굴형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파일 안에는 총 40개 정도의 그림이 있었는데 모두 얼굴형만 있었다. 그리고 처음 것의 그림은 젖살이 많았지만, 그 뒤로 갈수록 조금씩 빠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진군이 그린 그림은 15세 소녀에서 20세 여인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래서 모방 범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네, 하지만 이 얼굴 어디선가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네? 하긴,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네요.”
 “아!”
 “아아!”
 둘은 어느 한 인물이 떠올랐는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탤런트 문아름!”
 “네, 그녀이군요.”
 “젠장! 그 녀석 어디 갔어!”
 순간 최 반장이라던 경관이 화를 냈다.
 “참으세요.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화를 내면 안 됩니다.”
 “쳇! 어쩐지 이상하게 기억을 잘한다 싶었어.”
 몽타주를 그리다 보면 이런 일이 많다.
 목격자는 범인의 얼굴을 기억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흐려진다. 그래서 몽타주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종종 이번처럼 아는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목격자를 뭐라 할 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수사에 혼란이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몽타주는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중년 경관이 최 반장에게 말했다.
 “정말로 탤런트 문아름이 범인이라면?”
 “하하, 설마요. 유명 연예인에다가 주변에 멋진 남자들이 수두룩할 텐데 굳이 음침한 골목에서 처음 보는 남자를 성폭행한다니,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하긴, 그렇군요. 그동안 쌓은 이미지를 굳이 버리면서까지 실행해야 할 가치는 눈곱만큼도 없군요.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몽타주와 너무 다른 그림이니까요.”
 둘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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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출발!”
 “이야호!”
 “우치산으로!”
 다음 날, 주진은 약속한 엠티를 가기 위해 오전 8시라는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르면 9시, 보통 10시에 일어나던 그의 생활을 볼 땐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9시 집결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의 가방은 헐거웠는데, 그는 준비해야 할 것들 대부분을 챙기지 않았다. 원래의 준비물들은 여벌로 챙길 옷과 여러 가지 식도구와 밑반찬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가방에는 쌀만 잔뜩 들어 있을 뿐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낳은 결과였다.
 어쨌든 이렇게 대강 챙긴 결과 9시 집결에 늦진 않았다.
 
 “언제나 즐거운 열차 여행!”
 일행들은 역전에 모여 들뜬 기분으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야 이 놈들아, 9시 30분 출발이니까 빨리 표 끊어!”
 리더 유관림이 소리쳤다.
 “알았슴더!”
 “네.”
 돌연변이 채소 연구원들은 각자 소리치며 표를 끊은 후 열차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열차가 오자 삼삼오오 짝을 지여 탑승을 했다.
 -열차가 1분 후 출발합니다. 아직 탑승하지 않은 승객께서는 급히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 후 1분 후에 열차는 출발했다.
 주진은 옆에 앉은 동기를 바라봤다.
 ‘왜 이 녀석이 내 옆에 앉아 있지?’
 그는 여자같이 생긴 익사윤을 바라봤다.
 ‘생긴 것처럼 성도 참 특이하군. 익씨라, 새로운 성씨인가? 하긴 혼혈아 같으니까.’
 해외에서 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로 성을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서양 쪽에서 넘어와 한국인과 결혼한 남성도 있다. 그래서 익사윤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졌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오뚝한 코가 혼혈아라는 증거를 보여 줬다. 이들은 조국의 성을 버리고 새로운 성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성격이 뭐 이리 무뚝뚝해?’
 주진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익사윤이라는 이 친구가 입을 여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크큭, 여성같이 미성이기 때문에 말을 꺼리는 걸까? 흠, 설마 살아오면서 남자들한테 강간당하진 않았나?’
 보면 볼수록 여성 같았다.
 주진은 의심을 가지고 그의 가슴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 설마 여성인데 가슴이 없어 남자라고 속이고 다니는 걸까?’
 혹시 모른다. 여성으로서 이상하게 가슴이 없어 쪽팔리니까 아예 남자라고 할런지도…….
 주진은 그의 주민등록 카드를 보고 싶어졌다. 앞자리가 4면 여성이니까.
 그때 열차가 왼쪽으로 돌았다. 주진은 살짝 원심력이 생기자 자세를 흐트러뜨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어?”
 ‘좋았어, 나이스!’
 그러면서 넘어지는 척하며 손을 익사윤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탁!
 “응?”
 그런데 익사윤은 왼손을 들어 가볍게 주진의 손을 방어했다. 덕분에 자세가 이상해진 주진은 어정쩡한 자세로 웃었다.
 “하, 하하…….”
 ‘젠장, 젠장! 수상해, 더욱 더 수상해! 보통 남자라면 가슴 정도는 허용한다고!’
 생각이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수상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순 없었다.
 차르르르.
 특수 공법으로 만든 철도는 틈이 없다. 그래서 열차 특유의 ‘철컹 철컹’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철로 만든 바퀴가 철도 위를 굴러가는 소리만이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열차는 계속 목적지를 향해 갔고, 주진은 일찍 일어나 잠이 모자랐는지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단, 얼굴을 옆에 앉은 동기의 어깨에 올려놓고서.
 익사윤은 그런 주진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차르르르륵, 솨아아아.
 열차는 바람을 가르며 철도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째짹, 솨르르르.
 녹음이 우거진 깊은 산속에는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바람이 화답하며 아름답고 시원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자, 어서 여기다 텐트를 쳐라. 저 나무에다 끈을 묶고, 넌 여기다 정을 박아라.”
 이미 이곳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는지 학교 선배들은 후배들을 시키며 텐트를 치게 했다.
 “넌 저기로…, 아니다, 유미야. 너 저기에 있는 골짜기 기억나지? 거기서 물 좀 떠와라.”
 “알았어, 오빠.”
 리더 역할인 유관림이 여러 사람에게 지시를 해서 점심 먹을 준비를 했다.
 9시 30분에 출발한 열차는 11시 30분에 목적지에 도착했고, 버스를 타고 산 어귀에서 내린 일행들은 1시간 동안 산을 탔다. 그리고 오후 1시에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모두들 배가 고팠다.
 “자, 어서 움직이자.”
 “응차!”
 리더 유관림이 목소리를 외쳐 지시를 할 때 주진은 커다란 배낭을 땅에 내려놨다.
 ‘젠장! 막내라고 저 무거운 것을 들게 하다니!’
 엠티에서 술을 빼 놓을 수 없다며 맥주와 소주, 그리고 막걸리를 몽땅 사온 이들은 그것의 반을 주진의 어깨에 짊어지게 했다.
 ‘같은 막내인 익사윤에게는 겨우 저걸 매게 하고!’
 여자같이 몸이 비실비실해서 무거운 것을 들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익사윤이었기에 선배들은 그에게 반찬꺼리만 들게 했다. 덕분에 한쪽 어깨에 매달려 있는 가벼운 가방은 주진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크으! 1시간이나 이걸 매고 오다니, 내가 자랑스럽도다!”
 가방에 가득한 술은 능히 20리터는 됐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병 무게까지 더하면 적어도 25킬로그램은 나갈 것이다.
 처음에 그 무거운 것을 맸을 때는 너무 무거워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걸을 만하자, 그는 비교적 쉽게 산을 탔다. 그런 그를 뒤에서 걷고 있던 익사윤이 이상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주진은 아픈 허리를 반듯하게 펴며 몸을 풀었다.
 “주진, 어서 텐트 구석 좀 잡아서 땡겨 봐!”
 “네? 아, 네.”
 주진은 허리를 펴기도 전에 일을 시키는 선배의 말을 듣고 바로 움직였다. 그는 그가 바라보는 쪽에서 왼쪽 구석으로 가서 텐트를 잡아당겼다.
 “그렇지. 조금만 더!”
 텐트는 쫙 펴지면서 팽팽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텐트의 살을 집어넣으며 모양을 만들어 갔다. 대강 모양이 나오자 끈을 나무에 매달고, 주진이 잡고 있는 쪽에 정을 밖아 끈을 묶기 시작했다.
 “어이, 주진. 더 잡아당겨봐, 힘차게!”
 “네, 응차! 어어?”
 뚝, 철퍼덕!
 “…….”
 순간 주진은 있는 힘을 다해 텐트를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나무에 묶은 부위의 끈이 팽팽해지며 텐트의 모양을 만들고 있던 살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텐트가 넓게 펴지며 주진은 엉덩방아를 쪘고, 그런 모습을 주변에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풉!”
 “하하!”
 “이런 제길! 이게 웃긴 상황이냐!”
 몇 명이 웃었으나, 리더 유관림은 상황을 알고 소리쳤다.
 “텐트 하나가 없으면 잠은 어떻게 자라고!”
 텐트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하나는 6인용, 하나는 4인용. 비록 인원이 많진 않았지만, 남녀가 한 곳에서 잘 순 없었기에 2개를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6인용 텐트를 고정하는 살이 끊어져 버려서 곤란해졌다.
 “망가진 텐트를 가져오면 어쩝니까?”
 주진은 리더 유관림 선배를 향해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엠티를 온 연구원들은 그를 바라봤다.
 “어? 어제까지 이거 멀쩡했는데…….”
 순간 유관림은 자기 잘못인가 해서 변명을 했다. 하지만 텐트는 틀림없이 어제까진 멀쩡했다.
 ‘휴,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다.’
 주진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유독 익사윤이 그런 주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부러진 텐트의 살에 막대기를 대고 끈으로 묶어 응급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팽창한 텐트의 힘을 버티기엔 모자랐다. 덕분에 이상한 모양의 텐트는 네 모서리의 끈을 나무 높이 묶어 그저 이슬만 막을 정도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엠티를 온 돌연변이 채소 연구원들은 점심을 먹고 1시간 동안 자유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힘들게 오느라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엠티라지만 노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얼 차렷’ 같은 것은 없었다.
 “자, 모두들 위치 추적기를 켜고, 마음껏 돌아다녀라. 대신 위험한 동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이거 하나씩 가지고 가고.”
 손목에 차여진 시계는 핸드폰 역할도 하지만, 수신을 받아 위성으로 보내 위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더 유관림이 가져온 노트북에는 산의 모양을 등고선으로 표현한 지도가 있었고, 거기에 각자의 넘버가 들어간 포인트가 있었다. 그러니 길을 잃어버리거나 일행에서 이탈할 염려는 없었다. 단지 간혹 맹수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기에 전기 충격기 하나씩 가지고 다니라고 한 것이다.
 “주진. 너는 나와 함께 같이 움직이자.”
 “네? 왜요?”
 그는 불만 섞인 얼굴로 물었다.
 “크크, 이런 곳에 오면 자고로 직접 사냥을 해서 모닥불을 만들고 구워 먹는 재미가 빠져선 안 될 것 아니냐. 으하하!”
 “네? 이런, 귀찮은데.”
 주진은 자유 시간에 텐트로 들어가 낮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어서!”
 “끙.”
 할 수 없이 누우려던 몸을 일으켜서 유관림의 뒤를 따랐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때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 좋지.”
 “오, 어쩐 일로 말을 하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익사윤이었다. 그는 자신을 놀리는 주진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노려봤다.
 “하하, 관림이 형, 어서 가죠.”
 “그래.”
 그러나 주진은 그런 익사윤을 무시하고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고, 유관림이 답을 했다.
 ‘예, 예쁘잖아! 젠장, 여자 같으니라고!’
 주진의 이성은 남자라는 것을 알지만, 계속 여자가 남장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특히나 방금 째려보는 모습에선 영락없이 여자가 남자를 째려보는 것이었다.
 주진의 머릿속에서 열차 안에서 가슴을 만지려는 손을 막은 그의 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하하. 이게 무엇이냐!”
 그때 앞서 걸어가던 유관림이 이상한 장비를 꺼냈다.
 “오, 뭐죠?”
 주진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와 바라봤다.
 거기에는 등고선이 있었고, 여기저기에 파란 점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주변의 파동을 잡아 움직이는 것을 점으로 나타내는 것이지. 여기 세 점이 너와 나 그리고 사윤이고, 여기 작은 점들이 움직이지? 이건 바람에 부는 나무들이지. 그리고 자세히 보면 이런 움직임과는 다른 움직임이 보이는데, 그것이 동물일 확률이 많지.”
 “오!”
 설명을 들은 주진은 놀라워했다. 군에서 쓰이는 장비 같았기에 일반인은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처음 보는 것이어서 신기했다. 단지 익사윤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것을 들고 있는 유관림을 바라봤다.
 “화면의 축적은 몇이에요?”
 “이 화면이 4인치, 그리고 실제 거리는 200미터지.”
 “호오, 꽤 넓군요.”
 움직임의 파동을 감지한다고 했다. 그리고 주진 일행은 화면의 중앙에 있으니 약 100미터의 거리를 감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산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좀 떨어지지. 그래도 이게 있으면 사냥은 이미 성공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하하하!”
 주진 일행은 곧 화면에서 동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지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확도가 좀 떨어진다더니, 그곳에 동물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걸어가다가 화면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마치 물방울이 흘러가듯, 화면의 점 하나가 위에서 아래로 이동을 했다. 그러다가 화면 왼쪽으로 틀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오, 이건 틀림없이 동물이다! 그것도 이렇게 확연히 들어나는 움직임, 그리고 속도면 산 멧돼지 정도쯤 되겠는 걸!”
 유관림은 갑자기 화면을 주진에게 주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빨리 이걸 받고 내 뒤를 따라와! 그리고 방향을 일러 줘!”
 “네?”
 주진은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몰라 반문했다.
 “방위 표시가 나오니까 동물의 움직임 방향을 알려 달라고!”
 “아, 네!”
 그는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화면에는 방위가 나오고, 동물이 움직인 방향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방향이 나오니 동물이 왼쪽으로 갔는지 오른쪽으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왼쪽이요!”
 부스럭, 다닥!
 멧돼지로 생각되는 목표물은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그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길이 아닌 산행이다 보니 여기저기 긁히기도 하고, 땅이 좋지 않아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샤샥!
 그런데 익사윤은 이런 곳에서 상당히 빠른 몸놀림을 보였다.
 ‘무슨 운동이라도 했나?’
 그 움직임이 재빠르고 정확했으며 산길이지만 이동하기 좋은 곳만 골라 움직이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헤쳐 나가는 듯했다. 덕분에 그 뒤를 따르는 일행은 비록 길이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쉽게 갈 수 있었다.
 “약간 우측으로!”
 부스럭.
 “아니, 약간 더! 응?”
 그런데 언젠가부터 주진이 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갔다.
 ‘어?’
 그리고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주진은 멧돼지로 생각되는 목표물이 있는 방향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멧돼지가 지나간 길을 가는 것이다. 즉, 추적을 하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익사윤이 가장 앞서가고 있었고, 그 뒤로 유관림 선배가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맨 뒤에서 주진이 화면을 보면서 뒤따랐다.
 부스럭, 다다닥.
 그는 의아하면서도 멧돼지가 가는 길을 따라 정확히 추적하는 현 상황이 의아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일행이 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어래?”
 저 앞에 멧돼지가 힐끔 보였다가 없어졌다.
 ‘하하하, 눈에 보이니까 추적이 가능한 것이었나?’
 혹시나 익사윤이 영화에서 나오는 추적의 대가라도 되는 줄 착각했던 주진은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순간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굳이 설명하자면 어려운 수학문제의 답을 알지만 뭔가 거리낌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 답을 말했지만 뭔가 더 정확한 답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뭔가의 부조리함이었다.
 순간 주진의 머릿속에서는 처음 이곳에 와서 이상한 기계의 화면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화면이 마치 영화 필름이 지나가듯 훑어갔다. 그리고 그동안 지나간 길을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주진은 곧 이상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화면의 점들이 이상하다. 틀림없이 이 점들은 움직이는 물체의 파동을 파악해 나타낸 것이라 했다. 그러나 점들의 위치와 움직임 그리고 우리들이 이동하면서 바라본 산의 땅과 나무들의 위치…….’
 우우웅.
 순간 주진의 머리 속에서 2개의 화면이 그려졌다.
 그중 하나는 기계의 화면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움직이면서 보아온 주변의 모습이었다.
 두 그림은 그동안 이동한 시간에 따라 수십 장이 그려졌다. 그리고 각각 화면의 점을 그린 그림과 주변의 환경을 그린 그림이 겹쳐졌다.
 수십 수백 장이 겹쳐지더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조를 했다. 그리고 주진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저쪽, 내 뒤로 6시 방향, 여기서 거리는 140미터 정도.’
 순간 그 지역을 표시한 점을 떠올리고, 텐트를 친 곳과의 일직선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방향과 거리를 쟀다.
 꾸에에엑!
 “하하하, 어딜!”
 쾅!
 꾸웨에에엑!
 화아악!
 순간 뭔가 터지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 때문에 주진의 머릿속에 그려지던 그림이 흩어지면서 눈앞의 시야가 보였다.
 ‘내가 정신을 놓고 있었군.’
 “이봐, 최주진!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하하하, 놀라 뻥 찐 저 모습 봐라. 키킥.”
 주진은 흐리멍덩한 초점을 맞춰 소리치는 유관림을 바라봤다.
 그는 약 20미터 위에서 튀어나온 돌에 팔꿈치를 걸쳐 개 폼을 취하고 있었다. 그 옆에 익사윤이 서서 한심하다는 듯 주진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진은 생각하던 것을 잠시 미루고 외쳤다.
 “우와! 잡은 거예요?”
 저 멀리 멧돼지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쓰러져 있었다.
 “하하하, 당연하지!”
 유관림이 뭔가를 들어 올렸는데, 자세히 보니까 총이었다.
 “으학, 총이다!”
 “하하, 총 처음 보냐? 이거 총이긴 하지만 군용은 아니다. 사냥용 총이지.”
 유관림이 쥐고 있는 총은 길이가 약 30센티미터 정도 되었는데, 사냥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마치 권총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쪽에 지식이 없는 주진은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익사윤이 보이자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까 크게 터지는 소리는 총 소리였나?’
 주진은 고개를 돌려 멧돼지를 바라봤다.
 멧돼지는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 주변으로 나무들을 헤치며 움직인 흔적이 있었다. 아마 총을 맞은 후 계속 도망간 것 같았다.
 “쯧쯧, 사내 녀석이 뭐가 그리 굼떠? 그리고 저 흐리멍덩한 표정 하곤…….”
 유관림은 주진에게 이죽거렸다.
 “어서 저거 들쳐 매라. 돌아가자!”
 유관림은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아래로 익사윤과 함께 내려왔다.
 주진은 산을 올라 멧돼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응차!”
 그리고 피를 흘리는 멧돼지를 품에 안 듯이 들어올렸다.
 ‘어래? 땅이 안 보이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으이구! 이봐, 최주진. 그 무거운 멧돼지를 그렇게 들어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런 주진의 모습을 유관림이 보더니 다가왔다.
 ‘별로 안 무거운데…….’
 이런 주진의 생각은 무시된 채 선배의 도움으로 마치 어린아이를 업듯 멧돼지를 뒤로 들쳐 맸다.
 “하여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군.”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주진도 그 뒤를 따랐다.
 ‘저기부터 저기까지인가?’
 주진은 아까 뭔가 부조리함을 느꼈던 지역을 바라봤다.
 ‘밤에 몰래 와 보자!’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텐트로 돌아왔다.
 “우와! 역시 관림 선배!”
 “멧돼지다!”
 텐트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선배들이 잡아온 멧돼지를 보더니 만세를 불렀다.
 아마 그들은 엠티가 처음이 아니므로 그가 이런 야생 동물을 잡아올 것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나머지들은?”
 “글쎄, 화장실 만든다며 천과 도구를 들고 가더니 아직 안 왔네.”
 아무리 숲이라지만 여성도 있기 때문에 땅을 파고, 천을 둘러 간이 화장실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뭐, 이런 엠티 한두 번이 아니니 알아서 잘 하겠지.”
 유관림은 그렇게 말하며 텐트 안에 있는 노트북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의 위치가 나와 있었는데, 그 중 2개의 점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텐트에서 서쪽 방향으로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좀 먼 느낌인데? 아무튼 알아서 할 일을 잘 하고 있군.”
 간이 화장실을 만드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이 간단하게 차린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1시간 동안 편안하게 쉰 후 바로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일단, 죽은 멧돼지를 손질하기 시작했는데 유관림은 이런 경험이 많은지 능숙하게 해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화덕을 준비했다. 어디선가 돌을 가져와 높게 쌓고, 그곳에 쇠창살을 이용해 멧돼지를 끼울 준비를 했다. 그 아래에는 불을 지필 수 있게 준비를 해 놨다.
 “하하, 통째로 멧돼지를 구우면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 놔야 한다. 그래야 제때 저녁을 먹을 수 있지.”
 이렇게 아홉 명이 온 엠티는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할 일을 하며 조금씩 친분을 쌓고 있었다.
 사실 두 명의 신입생인 주진과 익사윤을 위한 여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여기저기에 많이 불려 다녔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진, 어서 와서 멧돼지 좀 뒤집어 봐!”
 “주진아, 여기 돌 좀 잘 쌓아 봐라. 높이가 제각각이어서 멧돼지를 구울 때 기울어지겠다.”
 “주진아, 유미 선배만 산으로 보내긴 위험하니 네가 따라가 봐라.”
 “네, 네, 네!”
 익사윤은 평소 몸을 곧게 펴서 올바른 상태로 있었고 말이 없기에 선배들이 부려먹기에 거리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자면서도 여자보다 더 예쁘고 가슴을 제외하면 몸매도 좋았기에 주진같이 막 부리기에는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불공평 해!’를 외치고 싶은 주진이었지만, 그는 뭔가 좀 흐리멍덩하고 순진한 것이 선배들이 부려먹기에 너무 좋은 먹잇감이었다.
 
 
 다음에 계속...

댓글(3)

토마토81    
환영식이다 머다 뻘짓하는 놈들은 다 쳐죽여야됨
2015.11.09 23:40
공중변소    
지구는 둥글다..아무리 큰 폭발도 지구 반대편에선 안보인다..
2018.08.13 13:03
천개의가면    
매력적인 필체와 흡입력있는 글을 쓰는 작가임. 그러나 이 작가는 꼬인 것을 넘어 독자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은, 뭐 그런 작가임. 글이 가장 궁금할 때쯤 자를 수 있는 자제력만 있다면 일독을 권람.
2022.11.10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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