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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쉬라즈 [E]

쉬라즈 1권-1

2015.01.08 조회 761 추천 8


 프롤로그
 
 인간은 20세 전후부터 자손을 낳아 번성한다. 그리고 평균 4명의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륙에 떠도는 여러 질병과 몬스터의 공격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20세가 되기 전 반절이 죽는다.
 종족 번성의 본능 때문인가? 언젠가부터 인간은 평균 6명의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량이 모자라 잘 먹지 못하고 질병과 몬스터에 의해 20세가 되기 전 평균 3명이 죽어 간다. 그리고 가끔 몬스터의 대대적인 침략에 의해 마을 한두 개가 사라지기도 한다.
 만일 시소 이전 시대였다면 발달한 마법과 지식에 의해 식량과 질병, 몬스터로부터 자유로웠으리라. 하지만 시소에 의해 대륙에 있는 인간은 8만으로 줄었고, 인간의 사회, 역사와 힘의 상징인 마법과 검 그리고 권력의 상징인 신분과 돈, 거기에 지식의 상징인 책 등 모든 것이 소멸되었기에 인간은 대륙에서 제일 나약한 종족이 돼 버렸다.
 
 인간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대륙의 동쪽에 있는 무리들은 가장 큰 호수가 있는 오럴 대평원에 모여들더니 그곳에서 부락을 이루었다. 서쪽에선 산과 강이 많은 움터란 산맥에, 그리고 나머지 적은 수가 각각 북쪽과 남쪽에 작은 부락을 이뤘다.
 그들은 서로 존재도 모른 채 살아갔다. 그리고 3백 년이 지나자 2배로 불어 인간의 수는 16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2백 년이 흐르자 다시 2배가 늘어 32만 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백 년 만에 2배로 늘어 64만 명이 되었다.
 이때부터였다. 인간의 수가 어느 정도 모이자 몬스터의 침략을 잘 막아 내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시작된 부락은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시소 이후 천 년이 지나자 인간의 수는 천만 명이 넘어섰고, 2천 년이 지나자 서로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스스로 살피지 못하는 존재들이 서로 싸우며 멸망의 길을 걷는 모습이란…….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랐다. 시소 이후 인간에겐 마법이 없어졌다. 그런데 그 마법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검은 점점 발달하기 시작해 마나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점점 문화의 체계를 갖추더니 나라를 만들고 신분이 생겨 인간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식을 책에 남겨 두고 뛰어난 정신을 널리 퍼트려 그들은 점점 성장해 갔다.
 그리고 내 나이 6천 살이 되었을 때 대륙에 있는 인간의 수는 1억이 넘어섰고 나라는 32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대륙의 주인을 자처하며 서로 선을 긋고, 대륙의 일부 주인이던 엘프와 드워프, 호빗 그리고 여러 동물과 몬스터를 없애며 인간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서로 싸우고 죽이며 땅을 빼앗았다. 이렇게 천 년 동안 인간은 전쟁의 역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나이 7천 살이 되자 전대 수장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내가 수장이 되었다.
 나는 모든 동족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이때 인간의 수는 3억 명이 넘어섰고 점점 전쟁은 줄어들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8만이었던 인간의 수가 3억이 된 것이다.
 나는 내 동족을 살펴봤다. 동족의 수는 이제 겨우 100존재를 넘었다. 시소 때 동족 역시 대부분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기에 16존재였던 동족이 이제야 백을 넘은 것이다.
 이때 동족과 인간 사이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인간이 동족의 분노를 사 10여 개의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약 2억 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이것이 실수였을까? 이때부터 인간끼리의 전쟁이 사라지고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 수준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점점 계급 신분이 사라지고 서로 존중하는 시대가 왔다. 모든 인간에게 기회와 평등, 자유가 주어지고 마법과 검뿐 아니라 지식의 체계가 완전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내가 9천 살이 되었을 때 인간은 시소 이전과 동등하게 성장해 그들의 수는 15억이 넘어섰다. 대륙의 모든 곳이 그들의 소유가 되었고, 허락하지 않은 대륙마저 그들은 찾아내 정복했다.
 유사 인간인 엘프나 드워프, 호빗은 인간에게 짓밟혀 그들의 노예가 되었고 몬스터는 대부분 사라져 멸종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이면서 도시와 길이 생기고 숲은 사라지며, 그렇게 대륙은 골병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동족의 수명이 만 년인 이유는 시소를 행하는 주기가 만 년이기 때문이라는 걸.
 내가 태어났을 때가 시소가 끝났을 때다. 그리고 태어났을 때부터 동족의 수장으로 자라난 나였기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안다.
 물론 이제 겨우 130존재가 된 동족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전 시소 때 16존재로 줄어 버렸듯,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그렇기에 나는 또다시 시소를 행하기 위해 모든 동족을 모으고 대비한다.
 이번 시소가 끝나면 내가 태어났을 때와 비슷하게나마 되돌아가리라. 그때가 되면 지금의 나처럼 생각하며 성장한 동족이 있을 테고, 또다시 만 년이 지나면 시소를 행하게 되겠지.
 전대 시소를 행했던 수장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
 훗.
 
 [“나 골드 드래곤이자 모든 드래곤의 수장인 루살레이 이드라시크가 명한다. 인류 정화와 대륙의 구원을 위해 아홉 번째 시소를 행하노라!”]
 
 
 1. 아토 마법사
 
 “쉬라즈, 이걸 좀 봐!”
 “우와, 이게 정말로 5만 년 전에 그려졌단 말이야?”
 “응. 이 유적 자체가 대략 5만 2천 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니까.”
 나는 유적지의 벽화에서 눈을 떼 내게 말하는 여인을 바라봤다.
 깊이 눌러쓴 하늘색 모자 밑으로 긴 회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 흔들리고 있다. 흰색 포의 중앙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상체를 덮은 그녀의 흰색 옷과 잘 어울렸다. 역시 작은 얼굴에 큰 눈을 가진 그녀는 언제 봐도 귀여웠다.
 “마나 측정 마법이 정확할까?”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 너도 알다시피 모든 사물에 깃든 마나는 점점 빠져나가고 그만큼 다시 채워지지. 하지만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던 마나가 있어. 마나 측정 마법은 그 마나에게 대답을 들어 사물의 생성 시기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유적 여러 곳에서 5만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이 많이 발굴됐으니 틀림없어!”
 그녀가 자신 있게 말하자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이 허리에서 살랑거리며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내 마음이 넘어갈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녀는 내 여자 친구. 그러니 결과만 놓고 봤을 땐, 하하하! 난 유혹된 것이 확실하다.
 회색 머리카락은 루살 가문의 상징이다. 물론, 회색 머리카락이 루살 가문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은은한 은빛 광택이 나는 회색은 루살 가문만의 특징이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회색이 아니라 은색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그녀의 가문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은색은 아니다. 어떻게 사람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빛이 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다른 회색 머리카락보다 빛에 좀 더 잘 반사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벽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 벽화의 내용은 사실일까?”
 “아니. 그들의 역사는 10만 년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그림은 5만 년 전에 그려진 것이니까 사실이라고 보긴 힘들지.”
 벽화는 너무 오래돼 많은 부분이 지워졌다. 하긴, 아무리 마법으로 보호했다 할지라도 5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정도라도 유지한 것이 대단하다. 어쨌든 그래서 벽화의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으나, 지워지지 않은 부분만으로도 내용을 유추할 순 있었다.
 처음 내가 벽화를 봤을 때가 기억난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고도 단번에 벽화의 내용을 알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은 드래곤의 제작 과정이었다.
 총 4단계로 묘사했는데, 첫 번째는 여러 생물의 조합이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주변에 조합된 여러 생물이 그려 있었으나 많은 부분이 지워져 드래곤을 제외하곤 박쥐와 도마뱀밖에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1명의 사람으로 짐작되는 자가 알아볼 수 없는 기다란 장비로 생물을 찌르고 있었다.
 두 번째는 드래곤이 인간의 전쟁에 사용된 그림이었다. 네 번째 그림에서 브레스를 뿜고 마법을 부리고 있으니, 두 번째 때엔 브레스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나 보다.
 세 번째 그림에선 드래곤이 좀 더 거대해져 웬만한 성보다 서너 배는 더 컸고, 두 눈에 광채가 있는 상태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벽화를 그린 화가가 드래곤이 이성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 같았다.
 네 번째 그림은 드래곤이 높은 하늘에서 인간의 도시를 향해 강력한 브레스를 뿜는 내용이다. 그리고 드래곤의 주변엔 오로라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적어도 8레벨 이상의 마법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오로라는 8레벨 이상의 마법을 펼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난 정식으로 마법을 배우지 않았기에 오로라 형상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아카데미에 있는 8서클 선생이 응축된 마나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던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흠, 그나저나 벽화가 사실이라면 드래곤은 인간이 만들었고, 피조물인 그들은 창조자인 인간을 몰살했다는 것인데. 이런 못된 놈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언제고 만나면 모가지를 확 비틀어 버릴 테다!
 하지만 내가 드래곤을 만날 일도 없거니와, 만나더라도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지. 하하하하.
 나는 실행 가능성이 없는 상상을 하며 손을 내밀어 벽화를 만지려 했다.
 “크흠,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네. 아무리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지만 자꾸 만지다 보면 돌조각이 떨어질 수도 있지.”
 누구야? 누군데 내게 간섭해?
 난 내게 말한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유적 경비 아저씨군.
 나는 서둘러 사과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경비 아저씨는 나를 한번 보더니 발걸음을 돌려 떠드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마 저곳에 가서도 방금 말한 것처럼 유적을 주의하라는 둥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둥 잔소리를 해 댈 것이다.
 “쉬라즈, 고대 유적을 만지려 하다니, 감상하는 자세가 안 돼 있어.”
 “유시, 넌 유적이 그렇게 좋으면 고고학계론 마법을 배우지 왜 의학계론 마법을 배우냐?”
 그녀의 이름은 유시. 자신의 머리카락이 은빛이라고 우겨 대는 루살 가문 사람으로 내겐 좀 과분한 여자 친구다.
 “치, 나도 고고학계론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그녀가 억울한지 작고 귀여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런데 정말, 너희 가문이 아무리 의학에 정통하다고 해도 딸이 고고학 쪽으로 가고 싶다는데 굳이 의학을 전공하게 했을까?”
 아들이라면 모르지만, 가문을 이을 일이 없는 딸인데 말이야.
 “뭐, 나도 1년 전까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왜 내가 의학계론 마법을 배워야 하는지 알아.”
 “왜?”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불만이란 말야?
 “비밀. 히히. 나중에 말해 줄게. 쉬라즈, 네가 선택해야 될 때가 오면…….”
 내가 선택해야 될 때?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이야?
 “지금 말해 줘라.”
 “안 돼. 아직은 비밀이라고!”
 파다다다닥!
 갑자기 머리 위로 수십 마리의 새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갔다.
 “엄마야!”
 “깜짝이야!”
 유시가 깜짝 놀라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유적이 대부분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벽만 남았기에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이 보였다.
 저기 멀리 날아가는 새 떼가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새와는 약간 달랐다.
 뭐야, 새가 아니잖아!
 “바, 박쥐다!”
 유시가 소리쳤다.
 “뭐? 이런 대낮에 웬 박쥐야?”
 “꽤 크다!”
 으, 소름 끼친다. 박쥐라면 손바닥만 할 텐데, 저건 내 머리보다 2배는 크다. 게다가 수십 마리인 줄 알았는데 수백 마리 아니, 가히 천 마리는 될 것 같다. 해 지는 반대편 한쪽을 완전 까만색으로 메워 버렸으니까.
 “꺄아!”
 “엄마야!”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 마리 이상 되는 커다란 박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였다. 날아가던 박쥐 앞에 거대한 붉은 벽이 나타났다. 어찌나 큰지 천여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였다. 박쥐는 벽이 나타난 것을 모르는지 계속 날아가다가 모두 타 버렸다.
 고소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한 박쥐를 4서클 파이어 월 마법으로 모두 태워 버린 것이다. 하지만 마법의 규모를 보니 2피코 정도의 마나를 사용한 것 같다.
 1피코는 5서클 마법을 펼칠 때 최소로 드는 마나의 사용량이다.
 휴우, 아카데미 선생이라도 왔나?
 2피코의 마나 양으로 매우 큰 파이어 월 마법을 순식간에 펼치는 건 적어도 7서클은 돼야 가능했다.
 “불길하다.”
 유시가 말하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뭐가 불길해? 그냥 우연찮게 박쥐 떼가 지나간 것뿐인데. 더군다나 누군가 마법으로 태워 버렸잖아.”
 그 반지는, 반년 전 그녀와 내가 사귀기 시작한 지 1년째 되는 날 서로 교환한 것이다. 유시는 내가 준 반지를 끼고 난 그녀가 준 반지를 목에 걸고 다닌다.
 “그래도 불길해. 박쥐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옮긴다는 이야기가 있어. 더군다나 흉측하고, 또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도 있단 말이야.”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내가 있잖아. 바로 세계 유일의 아토 마법사, 나 말이야. 하하하하!”
 정말이다. 난 아토 마법사다.
 마법 중 가장 마나가 적게 드는 마법이 1서클 라이트 마법이다. 그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최소 마나 양을 1펨토라고 한다. 그리고 5서클의 마법을 부리기 위한 최소 마나 양이 1피코며, 1피코는 천 펨토다. 그러니 정확히 1펨토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5서클 유저가 있다면 라이트 마법을 적어도 천 번은 펼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토는 펨토보다 더 작게 마나를 나눈 수치다. 그리고 천 아토가 1펨토다.
 “치, 아토 마법사는 무슨, 말만 좋지. 1펨토의 마나 양도 가지지 못한 주제에…….”
 그녀의 말은 나를 무시하는 듯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댔다.
 하하하, 속으론 좋으면서 입으론 아닌 척하긴.
 나는 아토 마법을 연구하는 학생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 그래서 스승도 없다. 단지 여러 마법사가 이론적으로만 밝혀낸 아토 마법 관련 책이 내 스승이고, 난 그것을 혼자서 익히고 있다.
 다행히 유시의 아버지가 후원을 해 주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다면 평민인 내가 아토 마법 관련 서적 한 권이나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난 백 아토로, 1서클 라이트 마법을 구현할 줄 안다.
 이것이 내 자랑이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년 안에 50아토로 1서클 라이트 마법을 펼쳐 보는 것이 지금의 목표다.
 유시가 나를 보며 살며시 웃는다. 이에 나도 입 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쉬라즈, 정말로 1아토로 마법 구현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니까 연구하지.”
 내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1아토로 1펨토의 마법을 구현하는 것이다. 아직은 불가능할 것 같지만 먼 미래엔 가능하게 하고 말 테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백 아토로 구현한 마법이 1펨토로 구현한 마법과 위력이 같았어?”
 “물론! 그래서 내 연구가 위대한 거야. 하하하!”
 “그럼, 만일 네가 5서클 마법사가 된다면 1피코의 마나 양을 제어할 텐데, 그럼 그땐 10피코의 마나 양과 동급이겠네?”
 “당연하지. 뿐만 아니라 내가 9서클을 이룬다면, 10여 명의 9서클 마법사가 모여야 겨우 내 마법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아니지, 그때가 되면 난 더 연구를 해서 훨씬 효율이 좋은 마법을 구현할 테니, 10명이 아니라 백 명이 모여야 할 거라고!”
 물론 고서클로 가면 마나 소모량의 일정 규칙이 없어져 계산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뭐, 그 전에 내가 9서클은커녕 5서클 아니, 1서클이라도 이루는 것이 먼저지만, 생각은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하하하.
 “치,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비록 의학계론 마법을 펼치지만 난 엄연히 2서클이라고.”
 “그리고 내일 시험을 치르면 정식으로 3서클이 될 테지?”
 “당연히! 그리고 내일 시험에 합격할 자신도 충만해!”
 그녀가 나를 보며 힘 있게 말한다.
 “치, 어서 유적이나 마저 보자.”
 그렇게 유시를 데리고 다 보지 못한 유적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지? 계속 우리를 지켜보는 것 같은데, 루살 가문의 기사인가?
 가끔 유시를 호위한다며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우리를 바라보던 그 시선이 사라진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갸웃거릴 뿐, 계속 유적지를 둘러보다가 유시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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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싸, 휴. 아빠, 이제 옮길 짐 없지?”
 “그래.”
 “그럼 난 방으로 들어갈게.”
 집으로 돌아온 난 나무 자르는 공구를 옮기려는 아버지를 도와주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비록 평민이지만, 아버지가 도시에서 꽤 이름 있는 목수라 비교적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그 증거로 평민임에도 2층으로 지어진 큰 집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아버지가 지으신 집이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몸을 던졌다.
 “휴우, 아토 마법사라…… 세상 유일의 아토 마법사. 이 정도면 유시에게 어울리는 남자라고 불릴 수 있을까……?”
 루살 가문의 딸 유시. 그녀의 아버지가 평민인 나와 교제를 허락한 것도 아토 마법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더 나은 연구 성과를 내놔야 할 것이다.
 포근하다. 침대가 내 몸을 끌어당기는구나.
 일어나기가 싫었다. 하지만 난 강한 의지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책상으로 가서 계란 모양의 둥근 돌을 집었다.
 마나석. 최하급이기 때문에 시중에서 적은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능력만 있으면, 시골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 몬스터를 처치해도 구할 수 있다.
 “흐음, 1급의 몬스터 사냥꾼이 돈은 많이 번다더니…… 지금 내 실력으론 흔하디흔한 오크 1마리도 부족하겠지? 운동도 할 겸 검이라도 연습해야 하나…….”
 몬스터를 처치하면 마나석을 얻을 수 있다. 아니, 정확히는 몬스터가 아니라 동물을 잡으면 된다.
 마나라는 것은 무생물보다 생물에 더 많이 깃들어 있고, 식물보다 동물에 더 많다. 그리고 강력할수록 더 많은 마나를 품고 있다.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유리 거울을 들었다. 그 안엔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약 5백 년 전 어느 한 마법사가 개발한 마나 축출 마법진. 그 당시엔 5미터 크기의 마법진이었고, 매개체로 동물을 죽여 그 동물의 마나를 담았다. 그땐 흑마법이라며 지탄받았으나, 몇몇 마법사는 천 년 이래 개발한 최고의 마법진이라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그들에 의해 마법진은 계속 연구돼 1미터 크기로 축소됐다. 그리고 마나석의 재료도 보석이 아니라 돌멩이로 바뀌었는데, 대신 효율은 떨어졌다. 그런데 마법진이 계속 연구되고 손바닥만 한 유리 안에 새겨 휴대할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이때부터 마나석의 값은 급락했고, 마법사들은 쉽게 마나석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아예 몬스터 사냥꾼들이 생겨나 마나석의 수요가 넘치자 일반인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마나를 모으지 못하지만 마법사가 되고 싶은 자들도 쉽게 1서클 마법 정도는 펼치게 되면서 대륙 전체에 마법의 일반화가 이뤄졌다.
 작년에 나는 이런 역사 이야기를 듣고 아카데미에서 마법진에 대한 수업을 듣고 공부했다.
 “최하급으론 한계가 있어. 중급 아니, 상급의 마나석 하나만 있으면 좋겠는데…… 유시의 아버지에게 부탁하기엔 내가 능력이 없는 거 같아 싫고, 그렇다고 지금 검을 잡아 상급 몬스터를 잡는다는 것 역시 터무니없는 발상이지.”
 중급의 마나석은 트롤 정도의 몬스터에서 추출한 마나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상급의 마나석은 상급 몬스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오우거에게서 얻을 수 있다. 보통 1급 몬스터 사냥꾼이면 오우거 1마리 정도는 혼자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엔 상급 몬스터는커녕 중급도 찾기가 힘들다. 약 5백 년 동안 몬스터 사냥꾼으로부터 꾸준히 사냥당한 결과 대륙에 몬스터의 씨가 마른 것이다. 덕분에 인간이 안전하게 대륙 곳곳에 퍼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흐음, 최소한 중급이라도 있으면 2서클까지 이룰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쉽네.”
 말이 좋아 아토 마법사지, 1서클도 이루지 못한 별 볼일 없는 마법사다. 어쩌면 내가 아토 마법을 연구하는 것도 재능이 없어 1서클도 오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마법의 발달로 마나를 느낄 수 있고, 마나석만 있으면 심장에 서클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마나를 모아 서클을 만든 것과 주변의 힘으로 서클을 만든 자의 마법력은 다르다. 그 차이가 바로 마나를 포용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포용력이 달려, 마나는 느끼지만 1서클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나는 손에 들린 작은 책을 유심히 바라봤다.
 “흐음, 여섯 번째 서클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군. 자칫 잘못하면 심장 속의 마나와 충돌할 수도 있겠어. 그럼 죽는 건가? 와우!”
 나는 책을 넘기며 계속 내용을 읽었다. 그러면서 중요한 부분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암기하기도 했다.
 손에 들린 책은 유시의 아버지가 보내 준 것으로 억지로 서클을 만드는 법이 적힌,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책이다.
 난 이미 책을 전부 읽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이기에 암기하며 또 읽는 것이다.
 그나저나 내게 이 책을 보내 준 이유는 뭘까? 억지로 만든 서클은 불안정해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데, 이런 것을 누가 익힐까?
 나는 계속 읽다가 다시 침대로 누웠다. 창밖 어둠 사이로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난 두 눈을 감은 후 주변에 떠도는 마나를 느끼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집중했다.
 현재 내가 느끼는 양의 마나는 1서클 라이트 마법을 펼치기엔 약간 모자란 약 0.6펨토. 내가 품을 수 있는 마나 양의 한계다. 하지만 난 라이트 마법을 펼칠 수 있다.
 자, 내가 모은 마나를 줄 테니, 넌 내게 빛을 다오.
 난 주변에 느껴지는 마나를 의지로 움직여 머릿속으로 넣었다. 서클이 있다면 정해진 약속의 언어로 쉽게 마법을 펼칠 테지만, 서클이 없어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펼쳐야 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 눈을 감으면 빛이 없어 어둠이 되지. 하지만 눈을 뜨면 빛이 나타나 어둠은 물러가. 내가 필요한 게 바로 이거야.
 마법 주문이 아닌 생각과 의지, 이 두 가지가 뇌 속에 들어간 마나를 새롭게 정제한다. 그래서 자연 상태의 마나가 빛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된 마나는 심장을 거쳐 손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마법의 주체인 피지플래시가 나타나 마나를 먹고 대가로 마법을 부린다.
 내 생각을 마나가 읽었음인가? 따스한 기운이 뇌에서 나와 심장에 머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나의 세계에선 힘찬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면 식사를 하는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 감각이 무뎌져 잘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기운이 손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 처음으로 나라를 만들고 전쟁을 할 당시엔 대륙에 마나가 지금보다 서너 배 이상 풍족했다던데, 만일 내가 그때 태어났다면 적어도 1서클 정도는 이루지 않았을까?
 나는 1서클을 이룬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러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빛의 속성으로 정제된 마나가 오른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적은지 피지플래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까진 마법을 배운 학생이라면 대부분 할 수 있다. 다만 정제된 마나 양이 1펨토 이상이면 피지플래시가 마나를 먹고 빛의 마법을 부린다. 하지만 1펨토 이하라면 지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은 처음엔 나처럼 마법을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1펨토 이상의 마나를 모으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한다. 그중엔 한 달 만에 1펨토를 모으는 자도 있고, 나처럼…… 잠깐. 내가 마법을 15세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1년 동안 이론과 마나 감각을 배웠지. 그리고 처음 마나를 느끼고 마법을 시도한 것이 2년 후인 18세 때. 그리고 지금 21세니까 3년이군. 그러니까 난 무려 3년 동안 마나를 모았지만 1서클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보통 나 정도면 마법에 재능이 없음을 알고 포기한다. 하지만 난 생각을 달리했다.
 왜 1펨토 이하의 마나론 마법이 실현되지 않는 것일까? 사람이 꼭 밥을 많이 먹어야 일하는 것은 아니다. 굶어도 일할 수는 있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휩싸인 난 아토 마법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일단 빛의 속성으로 정제된 마나의 질, 즉 적은 양이지만 질을 높이고 거기에 마법의 주체인 피지플래시와의 친분을 높인다. 쉽게 말해 1골드로 한 달 동안 일꾼을 부릴 수 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일꾼과 친분이 있어 0.5골드로도 일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할지는 일꾼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피지플래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마음속으로 피지플래시를 불렀다. 요 근래 1년 동안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무지 애썼다. 잠자기 전 매일 그들을 불러 생각을 공유하고 이야기도 해 보려 했다. 물론 성공하진 못했다. 거기에 마나의 질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더 강한 의지와 생각 그리고 뚜렷한 형상.
 이런 내 노력이 통했음인가? 난 처음으로 1년 전에 내가 가진 0.5펨토의 마나 양으로 마법을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0.2펨토의 마나 양으로 피지플래시를 계속 불렀다.
 내게 다가와 내 부탁을 들어줘. 난 너희의 친구잖아. 뭐? 아직 친구는 아니라고? 치, 친구가 별건가? 서로를 존중하고 생각하며 위해 주면 그게 친구지. 그래, 바로 그거라고. 나를 위해 작은 부탁을 들어줘. 적은 양이지만 여기 이것을 줄게.
 쏴아아아!
 갑자기 손에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1서클 라이트 마법 중 가장 약한 것이지만 0.2펨토로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0.1펨토로도 성공한 것이 그저께의 일이다.
 빛은 얼마 동안 방 안을 비췄다.
 너흰 언제 내게 모습을 보일 거야?
 현재 피지플래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단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나부끼는 것으로 바람의 존재를 알듯, 마법의 발현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 뿐이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아니 어쩌면 피지플래시는 인간을 잘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
 고마워. 역시 너희들은 날 친구로 인정하는구나. 내가 너희를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대신 때때로 더 맛있는 마나를 줄게. 물론, 마법을 발현하진 않아도 돼.
 아토 마법의 연구는 질 좋은 마나를 정제하는 법과 피지플래시를 알아 가는 것이다.
 좋아, 오늘도 성공이다.
 난 웃으며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2. 휴리스 하우스
 
 다음 날 아침 일찍 난 매직 아카데미로 향했다. 처음 아카데미가 생겼을 땐 귀족들의 자제를 양육하기 위한 기관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평민에게 기회와 평등이 주어지자 오늘날에는 입학금과 수업료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아카데미는 크게 마법을 배우는 매직 아카데미와 검을 배우는 소드 아카데미가 대표적이고, 음악이나 미술 혹은 정치나 행정 등을 가르치는 콤퍼지션 아카데미가 있다.
 물론 난 매직 아카데미 학생이다.
 매직 아카데미가 소드 아카데미보다 3배 이상 많은 학생을 가르친다. 그만큼 대륙엔 마법이 일반화되어 있다.
 길을 걷는 내 옆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어? 저놈은 아카데미에서 매일 꼴등만 하는 스틸반이잖아?
 “야, 스틸반! 무슨 일이야?”
 그는 뭐가 그리 바쁜지 황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어? 쉬라즈잖아! 야, 너 아직 소식 못 들었어? 어제저녁에 라옴 유적지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대!”
 “뭐라고?”
 라옴 유적지면 어제 나와 유시가 갔던 곳인데?
 “몰라, 빨리 가야 해! 왕궁 기사단이 유적지를 정리하기 전에!”
 “왕궁 기사단?”
 “너도 구경하려면 서둘러!”
 스틸반은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어제 갑자기 박쥐도 나타나더니…… 뭐지?”
 나는 유적지에서 나왔다는 몬스터가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스틸반의 뒤를 따라 나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물속에 빠졌달까? 물속이지만 물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 몸이 붕 뜬 느낌, 끝이 없는 구덩이에 빠져 몸이 떨어지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불길해!
 나는 유적지로 향하는 발걸음을 좀 더 서둘렀다.
 꺄아아!
 뭐지? 아직도 몬스터가 활개 치고 있나?
 유적지 근처로 오자 여성의 고함이 들렸다. 다행이라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 공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곧 유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야를 가리고 있어 몬스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더니 오른쪽으로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리로 움직이는 왕궁 기사단원 4명이 보였다.
 벌써 몬스터를 잡았나?
 기사단의 뒤로 작은 마차가, 그리고 그 속에 그물망이 있었다. 그리고 망 사이로 기사단이 잡은 무언가가 얼핏 보였다.
 사람? 아니야. 미라?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몸에는 털이 하나도 없지만 사람의 피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말랐는데, 의외로 덩치는 컸다. 마르지 않았다면 일반 어른보다 2배는 컸을 것 같다.
 그런데 몬스터의 피는 누구 것이지?
 피가 아직 굳지 않은 것을 보니 방금 상처를 입은 것 같다.
 응?
 순간 난 누군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엔 하늘이었다.
 이상하다. 하늘에선 유시를 호위할 수 없을 텐데, 아니 그 이전에 내 옆에 유시가 없으니 주변에 호위 기사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오싹!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어제부터 느껴졌던 이상한 시선은 유시의 호위 기사가 아니다. 그 시선은 날 보고 있던 거다! 그럼 누가?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늘에서 몰래 훔쳐보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혹시 몬스터?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근두근.
 주변에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난 혼자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왁!”
 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쉬라즈, 왜 그래?”
 “아, 어? 아, 스틸반이구나. 휴우.”
 “뭐야, 뭔 일 있었어?”
 “아, 아냐.”
 스틸반이 날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나저나 이상하지 않아? 왕궁 기사단이 잡아간 몬스터 말이야, 어제저녁에 나타났다던데 왜 오늘 아침에 잡지? 그리고 그사이 다른 곳으로 도망갔을 텐데 나타난 이곳에서 잡히다니, 뭔가 이상해.”
 “뭐, 또 나타난 건가 보지.”
 난 무심코 말했다.
 “오, 그래! 바로 그거야!”
 응? 뭐가 그거야? 아, 잠깐! 또 나타난 것이라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피를 순환시키자 온몸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느껴졌던 시선이 설마?
 난 두려움을 느끼며 스틸반의 손을 잡았다. 이에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난 용기를 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으왁!”
 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까 잡힌 몬스터와 비슷한 자가 허공에서 고개만 내밀고 날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짐작대로 또 나타났다!
 “꺄아아!”
 “아아악, 몬스터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 고함을 듣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몬스터를 발견하고는 비명부터 질렀다.
 그러곤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쳤다.
 몬스터는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이에 나도 뒷걸음치다가 얼른 뛰기 시작했다.
 곧 뒤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왕궁 기사단이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 허공에 고개만 내민 자를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몬스터는 다시 고개를 집어넣어, 검은 허공만 베는 꼴이 되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럼, 어제부터 느껴진 시선이 방금 그것? 이런, 밤에 혼자 있기 무섭겠어!
 난 서둘러 매직 아카데미로 향하려고 했다.
 “야, 쉬라즈. 방금 뭘까? 뭔가 흥미로운 사건이 터질 것 같지 않아?”
 “그, 글쎄. 불안하긴 해. 오늘 사건이 마치 요리가 나오기 전에 먹는 디저트 같아.”
 “그렇지? 며칠 안에 본요리인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아. 하하하, 흥미로워, 매우 흥미로워.”
 이 녀석은 뭐가 이리 즐겁지? 아카데미에서 매일 꼴지만 하는 놈이…….
 
 난 아카데미로 와서 마법 수업과 함께 역사와 고대어를 배웠다. 다행히 이해력보단 암기력을 요구하기에 머리가 좋지 못한 나도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수업은 수학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학.
 “쉬라즈, 뭐 해?”
 그때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유시?”
 “오늘 하마터면 큰 화를 당할 뻔했다며?”
 “큰 화? 아, 유적지에서의 일?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어.”
 날 위로하기 위해 온 것인가? 역시 유시야.
 난 그녀의 말에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자 웃으며 유시를 바라봤다.
 “그 유적, 출입 금지 구역으로 바뀌었어. 위험 지역이라나 봐. 참, 오늘 저녁에 나와 함께 우리 집에 가자. 할 말이 있어.”
 “아버지 만나 뵈러?”
 “응.”
 크, 왠지 꺼려지는데, 싫다고 하면 실망하겠지?
 “좋아.”
 나는 선뜻 대답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유시의 아버지는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만일 유시와 계속 사귄다면 결혼도 해야 할 테니 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나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다.
 “중요한 이야기니까 혹여 충격적인 대답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어.”
 뭐야, 유시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설마 날 잡아먹으려는 건 아닐 테고, 결혼하자고 하려나? 아니지, 이제 21세인데 결혼이라니? 너무 빠르잖아.
 “알았어. 무슨 일인지 곧 알게 되겠지. 기대할게!”
 나는 가슴을 펴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는 곧 돌아가고 나는 다음 수업을 기다렸다.
 “뭐? 이 자식이, 죽을래!”
 “싸움이다!”
 “게릭이다. 용병의 아들 게릭!”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싸움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비켜, 이 자식아!”
 그때 게릭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밀쳤다.
 뭐야, 저놈!
 “뭘 째려봐. 죽을래!”
 용병의 아들 게릭. 아카데미 안에서 가장 공부를 못한다. 그리고 불량배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싸움은 가장 잘한다. 왜 저런 녀석이 마법을 공부한답시고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소드 아카데미에나 갈 것이지.
 “게릭, 여긴 뒷골목이 아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에게 영웅 심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배짱은 좋은 편이다. 뭐, 몇 대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이 녀석이!”
 “게릭이 또 사람 친다!”
 이미 밖에서 누군가 몇 대 치고 왔나 보군.
 “무슨 일인가? 게릭, 네 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생각이냐?”
 그때 아카데미 선생님이 들어왔다. 아마 게릭이 말썽을 부렸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일 테지.
 “크으, 아닙니다.”
 “그래, 좋아. 그래야 용병 휘센의 아들 게릭이지. 그럼 저기 밖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서 사과하고 와야지?”
 “크으, 네.”
 게릭이 마지못해 대답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역시 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니 바로 행동이 달라지는군.
 용병 휘센, 천여 명의 용병단을 거느리는 블랙아이의 단장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아들에겐 용병이 아니라 마법사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뭐, 집안 사정이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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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굽은 언덕, 그 끝으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좌우로 나무가 있는데, 간격이 일정하고 반듯하게 심어져 있다. 푸른 잎사귀가 떨어지며 바람과 춤을 춘다. 몇몇 잎사귀가 노랗고 빨간 것이 확실히 가을이 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슬쩍 유시를 바라봤다. 살며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햇빛에 반사되어 회색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보인다.
 이럴 땐 영락없이 은빛이란 말이야.
 “오늘 유적에서의 일이 차원이 벌어진 거라던데, 혹시 들어 봤어?”
 그녀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차원이 벌어져?”
 “응, 차원 안의 몬스터가 튀어나온 거라나 봐.”
 아카데미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유시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흐음, 그 차원엔 뭐가 있기에 몬스터가 튀어나왔지?”
 “이거 비밀인데, 유적지를 공개하기 전에 이미 차원이 열려 안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나온 거 같아.”
 “뭐? 여러 가지 것들?”
 뭐야, 그럼 몬스터만 나온 게 아니란 거잖아?
 “응, 집에 도착하면 자세히 알려 줄게.”
 말하는 유시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유시의 아버지가 의학계론 마법을 억지로 가르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을까? 때가 되면 알려 준다더니, 오늘 말해 주려나?
 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유시네 아버지 루살 레온은 매우 엄하신 분이다. 그리고 체면을 생명처럼 여기신다. 그래서일까? 백작임에도 자신보다 아랫사람에게 해를 주진 않는다. 오히려 잘 대해 준다. 자신에 대한 소문이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귀족이 어찌 평민과 어울릴 수 있겠냐고 하시지만, 평민이라 할지라도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그에겐 귀족에게 대하듯 하신다.
 “그래, 아직도 1서클을 이루지 못했다고 들었네. 맞는가?”
 “네.”
 나는 유시 아버지의 물음에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서야 내 딸의 체면이 서겠는가?”
 “아빠! 내 체면이 쉬라즈의 서클과 무슨 상관이야!”
 내가 말하기 전에 유시가 먼저 화를 냈다.
 “내 딸이 보잘것없는 평민과 어울리면 다른 귀족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업신여기지 않겠느냐.”
 “아빠는 그 귀족들의 생각과 딸의 행복 중 어느 것이 우선인데! 딸보다 귀족들이 우선인 거야?”
 “크흠, 그건 아니다. 하지만 네가 귀족들에게 무시받진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유시가 그녀의 아버지와 하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유시는 날 변호한다. 혹시, 그래서 서클을 억지로 만드는 책을 유시 몰래 건네준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중급 마나석 정도는 요구하면 기꺼이 건네주지 않을까?
 아냐, 아냐. 나도 남자 체면이 있지.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굽히진 않을 테다. 난 아토 마법사의 길을 걸을 거다. 1아토의 마나로 마법을 펼쳐 보이고 말 테다!
 “크흠, 어쨌든 오늘 용건은 해결해야지. 날 따라오거라.”
 “알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일어나 걷자 나와 유시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곧 서재 옆에 있는 장식장이 많은 방에 들어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단지 체면 때문이지, 널 싫어하는 게 아니야.”
 유시가 작게 속삭였다.
 이런, 내가 걱정할까 봐 말해 주는 거야? 걱정 마. 틀림없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남자가 될 테니까.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고마워.”
 난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이렇게 나를 배려해 주는 마음이야말로 그녀의 매력이다.
 응? 텔레포트 진?
 바닥에 있는 카펫을 들추자 아래에 마법진이 나왔다. 이런 곳에 마법진이라면 십중팔구 텔레포트 진이다.
 “익숙하겠지?”
 “네.”
 그녀의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텔레포트 경험이 없거나 적응하지 못한 자는 텔레포트 시 어지럼증을 느낀다. 심한 사람은 구토를 하기도 한다. 다행히 난 약간 어지러울 뿐 심하진 않다.
 텔레포트 진은 성인 6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휴리스 하우스.”
 유시의 아버지가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빛이 나더니 약속의 문장을 그려 나갔다.
 잠시 후 사방이 환해졌다. 순간 제자리에서 10바퀴 정도 돌았을 때 느껴지는 어지러움이 머리에서 느껴지고 온몸은 붕 뜬 느낌이었다.
 환한 시야가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방이 약간 어두웠는데, 어딘지는 모르지만 텔레포트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간 싸늘한데? 퀴퀴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오래된 동굴인가?
 인위적인 흔적이 많지만, 곳곳에 종유석이 있는 것으로 봐 자연 상태의 동굴을 발견해 다듬은 것 같았다.
 실내는 사람 백 명 정도는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었다.
 “휴리스 하우스라고 들어 봤는가?”
 “네? 아니요. 못 들어 봤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곳이 만들어진 지는 꽤 됐다네. 대략 2백 년 정도 되었지. 이리 와 보게.”
 “여기가 뭐 하는 곳입니까?”
 “인류의 희망이자 미래지.”
 “네?”
 유시의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함께 계속 걷기만 했다. 곧 동굴의 오른쪽에 도착했는데, 그곳엔 작은 입구가 있었다. 그 안쪽은 더 어두워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린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트.”
 유시의 아버지가 작게 시동어를 외치자 은은한 빛이 사방을 비췄다. 대낮처럼 환하진 않았지만 반대편에 있는 선반과 상자가 보이는 것으로 봐 사물을 분간하는 데는 충분한 것 같았다.
 매우 넓군. 이곳은 천 명 정도는 들어올 수 있겠어.
 “마나를 아껴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 이해하게.”
 응? 마나를 아끼다니, 왜? 마나석의 수명이 다한다 할지라도 다시 장착하면 될 텐데?
 의아했다. 마나석이 비싼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재장착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건가? 뭐, 나를 이리로 데려온 것으로 봐 차차 알려 주겠지.
 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녀의 아버지는 반대편의, 여러 상자가 있는 선반으로 걸어갔다.
 “이곳엔 약 10만 종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네. 물론 유지마법이 걸려 있지. 아마 적어도 만 년 이상은 종자가 썩지 않고 유지될 걸세.”
 “네에?”
 놀랐다. 10만 종이라니, 세상에 식물이 많다지만 그 정도나 될까? 그리고 그 많은 종자를 왜 이곳에 저장한 걸까?
 유시의 아버지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곧 다른 입구로 나가자 그곳엔 또 다른 동굴이 있었다.
 “라이트.”
 그녀의 아버지가 시동어를 외치자 또다시 은은한 빛이 어두운 실내를 비췄다.
 “이, 이건?”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동굴 안에는 무수히 많은 선반이 있었는데, 마치 대형 책꽂이에 가지런히 책을 정렬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선반엔 책 대신 동물이 있었는데, 모두 동작이 멈춰 있었다.
 박제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마법으로 얼린 것인가?
 “이곳엔 약 만 종의 동물이 네 쌍씩 있다네. 적어도 만 년 정도까지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네.”
 왜 이런 것이 있지? 식물과 동물을 이렇게 보관해서 뭘 한다는 거지?
 난 의아했지만 곧 설명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유시 아버지의 뒤를 계속 따랐다. 그때 옆에 있던 유시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유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내가 불안해 보였나? 그래서 날 진정시켜 준 것인가?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유시는 이런 여자다. 그래서 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내겐 과분한 상대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와 난 서로…….
 “이곳엔 책이 20만 권 정도 있다네. 지금도 더 많은 책을 구하는 중이니 좀 더 늘었을 수도 있지. 이곳엔 모든 분야의 책이 다 있다네. 만일 이곳의 모든 책을 숙지한다면 그자는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도 있을 걸세. 이곳의 책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답을 낸 것들의 총집합체니까. 물론 마법이나 검술 혹은 정령과 신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네. 하지만 이곳의 책을 모두 숙지한다는 것은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겠지.”
 퀴퀴한 냄새의 원인이 이거였나?
 그녀의 아버지는 계속 동굴을 돌았다. 그러면서 모든 방을 보여 줬는데, 운동을 하는 방, 식량 창고, 공부하는 곳, 각종 수련장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곳이 휴리스 하우스네.”
 휴리스 하우스?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훈련소 같기도 한데, 수만 종의 동식물을 보면 그런 것 같진 않고, 뭐 하는 곳이지?
 “이곳은 약 20여 명의 사람이 백 년은 족히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됐지. 그들이 25년마다 자녀를 5명 이상 낳을 것을 고려한 계산이네.”
 이곳에서 자녀를 낳아?
 “이곳은 대륙의 어느 깊은 동굴이네. 하지만 그 위치는 아무도 모르지. 약 3백 년 전 발견하고 연구실로 사용하던 곳을 입구를 막아 버리고 차원을 비틀어 위치를 왜곡시켰기 때문이지. 그래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텔레포트밖에 없다네. 하지만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바로 처음 들어온 동굴의 뒤에 문이 있는데, 그쪽으로 걸어서 나가면 되거든.”
 “도대체 휴리스 하우스라는 이곳이 뭐 하는 곳입니까?”
 훈련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도 아니고, 외부의 출입을 막아 놓았으니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한 것 같은데…… 나는 이곳의 쓰임이 가장 궁금했다.
 “인류의 희망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바로 인류가 멸망했을 때 마지막 구원의 처소지.”
 “네에? 인류의 멸망과 구원의 처소?”
 난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멸망과 구원의 처소라니, 감이 오지 않았다.
 “시소라고 들어 봤는가?”
 “못 들어 봤습니다.”
 “그렇겠지. 우리들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원래 이곳은 말 그대로 갑자기 인류가 멸망했을 때를 대비한 구원의 처소였네. 하지만 그 누구도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거네. 그래서 휴리스 하우스는 더디게 만들어졌지. 하지만 어느 날 서쪽의 대륙에서 한 권의 책이 발견됐네. 그 책은 자그마치 만 년 전의 것이었어.”
 “만 년!”
 현재 인류의 발전은 약 9천 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절엔 제대로 된 문명이 없어 글도 없었다. 고작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을 시기다. 그리고 처음 문자가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이었다. 그런데 만 년 전 책이라니?
 “여기에도 사본이 있네. 그것을 보여 주지.”
 유시의 아버지는 책을 모아 놓은 곳으로 가더니 거기서 한 권의 책을 가져왔다. 근래에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서의 느낌은 없었다.
 “라옴 유적지에 가 봤겠지? 그곳의 벽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가?”
 왜 여기서 라옴 유적지 얘기가 나오지?
 유적지는 아침에 차원의 틈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온 곳이며 어제 유시와 함께 구경한 곳일 뿐이다.
 “만일 인간이 드래곤을 만들었다면, 드래곤은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하하!”
 갑자기 유시의 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지. 이 책을 읽어 보게나.”
 “아빠, 나한텐 이런 책이 있다는 말 안 했잖아?”
 유시가 갑자기 말했다.
 “그럼 같이 읽어 보거라.”
 내가 책을 펼치자 옆으로 유시가 다가왔다.
 책은 알 수 없는 문자와 요즘 널리 쓰이는 공통어로 쓰여 있었는데, 알 수 없는 문자가 만 년 전에 쓰인 것이고 그것을 해석해 놓은 것이 공통어 같았다.
 
 [이 책이 무사히 먼 후손에게 건네질 것을 바라며 여기에 묻는다.]
 
 책의 첫 장을 넘기자 책의 주인이 어떤 목적으로 책을 숨겼는지가 잘 나와 있었다.
 
 [우리는 이미 만 년 전의 조상이 한 것처럼 했다. 그분들도 지금 우리처럼 책을 숨겨 먼 후손이 발견하고 대비책을 구해 놓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소가 행해지기 바로 직전에 발견되어 충분한 대비책을 간구하지 못했다. 겨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오백 권의 책을 드래곤들이 태우지 못하도록 차원의 광활한 공간에 버린 것이 전부였다. 역추적 유인 마법을 걸어 놓았기에 마나가 다하면 다시 차원을 넘어 원래 위치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성공 확률은 매우 낮아 5백 권 중 몇 권이나 돌아올지…… 그중 십분지 일인 오십 권만이라도 다시 대륙으로 돌아온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와 유시는 계속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만 년 전 아니, 그 이전인 2만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이 어떤 사연을 간직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시소란 무엇인가? 위아래로 움직인다는 뜻으로 서로 힘이 같아지면 수평을 이뤄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일까? 그건 바로 강해진 인간의 힘을 줄여 대륙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드래곤이 인간을 경계하고 큰 힘을 가지게 되면 그들을 멸망시키는데, 그 이유가 자신들을 멸망시킬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 년마다 한 번씩 시소를 행해서 인류가 드래곤들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라고 한다.
 책의 마지막엔 인류는 드래곤들의 힘을 넘어 그들을 멸망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한 번의 시소를 무사히 넘겨야 한다고 쓰여 있다. 필자의 때에 그러지 못했으니 다음에 있을 시소를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시도 마찬가지인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근 5백 년 사이에 급속도로 발전한 마법은?”
 “그렇지. 차원으로 보내진 오백 권의 책 중 극히 일부가 대륙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네. 그것을 발견한 마법사들에 의해 만 년 전 극도로 발전한 마법이 대륙에 퍼진 것이지. 아쉬운 것은 그런 책의 발견이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은 고작 일곱 권에 불과하다는 것이네. 그리고 그중 두 권이 검에 대한 것, 세 권이 마법에 대한 것 그리고 한 권이 마나에 대한 것이네.”
 “그럼 나머지 한 권은?”
 “드래곤의 정체.”
 “내용이 어떻게 됩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시소를 대비하는 나라 중 몇몇의 왕만이 그 책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드래곤은 인류가 만들었다는 것이네. 그런데 그 드래곤이 인류보다 더 큰 힘을 가졌고 결국 인류를 발아래 둔 것이지. 그 증거가 바로 만 년마다 있어 온 시소라네.”
 “그럼 시소는 몇 번 행해졌습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네. 하지만 적어도 세 번은 행해졌겠지.”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이 가장 하고 싶었다.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결국 이곳은 드래곤이 인류를 멸망시키는 행위 즉, 시소를 대피하기 위한 곳이라는 결론이잖아. 그리고 아까 20여 명이 이곳에서 백 년 동안 살아갈 수 있다고 했지. 즉, 시소가 끝난 후 백 년이 지나면 밖으로 나온다는 것 같은데…… 왜 내게 이런 사실을 이토록 자세히 알려 주는 것이지?
 왕족이나 혹은 공작, 후작, 9클래스 마법사, 검의 끝을 본 소드마스터, 세상의 진리를 깨쳤다는 대현자, 마법사들의 왕궁이라 불리는 마탑 등 나보다 존귀하고 뛰어난 자들이 넘치고 넘쳤는데?
 유시의 아버지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야 네가 이곳에 생존해야 할 남자이기 때문이라네.”
 “……왜 저입니까? 저보다 뛰어난 자들이…….”
 “자네가 말한 뛰어난 자들이 누구인지 잘 아네. 하지만 그 뛰어난 자들은 드래곤이 시소를 펼칠 때 그들과 싸워야 한다네. 만 년 전 시소 때 드래곤의 수는 약 백 마리였지. 하지만 인류와의 싸움에서 대부분 죽고 16마리로 줄어들었다네. 그 일을 우리도 해야 한다네. 드래곤들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하지. 만일…….”
 유시의 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유시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번 시소 땐 우리 인류가 드래곤을 이길지도 모른다네. 여러 정황상 그 어느 때보다 인류의 힘은 강하지. 이 책의 필자가 남긴 일곱 권의 서적 때문일 수도 있고, 인류가 다른 때보다 유능해서일 수도 있지. 어쨌든 현 시점에서 9클래스 마법사가 전 대륙에 약 4백 명 정도 있고 8서클은 약 5천 명이 있지. 이 수만 보더라도 약 백여 마리의 드래곤이라면 상대할 수도 있다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는 드래곤이 시소를 행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그때가 내일일지 아니면 1년 후일지 모르지만, 굳이 인간이 그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어. 오히려 선공을 취하는 것이 낫겠지.”
 “그렇다면, 이곳은?”
 “이곳은 드래곤의 침입을 허용해선 안 되는 곳. 휴리스 하우스가 발동되면 수천 년 동안 이곳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네.”
 “수천 년?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 약 백 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소에서 드래곤이 승리할 경우, 백 년 후면 인류가 어떤 상황일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러니 당연히 이곳에 들어온 인간도 동물들처럼 수천 년의 잠에 들 것이라네. 그 기간을 대략 5천 년으로 계산했지만, 오차로 인해 수백 년이 달라질 수도 있다네.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래, 나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네.”
 이 말을 하는 유시의 아버지는 갑자기 인상을 썼다.
 응? 갑자기 왜?
 유시의 아버지가 유시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설마, 설마?
 “설마, 유시도?”
 “이곳에 들어올 것이네. 내 딸은 이곳에 들어온 자들의 생명을 책임질 의사니까.”
 “아!”
 유시가 왜 자신이 의학계론 마법을 배워야 하는지 1년 전에 깨달았다고 했지. 그렇다면 1년 전에 이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구나. 그런데 왜……?
 “왜 난…….”
 “넌 대륙 유일한 아토 마법 연구가이니까. 만일 이번 시소 때 인류가 드래곤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린 가능성을 아토 마법에 걸었다네. 마법의 힘은 9서클이 한계란 건 자네도 잘 알 것이네. 즉, 최대치가 정해진 것이지. 이건 드래곤도 마찬가지네. 하지만 드래곤은 포용할 수 있는 마나 양이 인간과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매우 많네. 그러나 다행히 네가 연구하는 아토 마법은 효율성을 적어도 10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지. 네가 살아남아 약 5천 년 후 후손들에게 전해 줄 네 마법은 그런 가치를 지닌 것이라네. 난 확신하네. 적어도 다음번 시소 땐 인류가 반드시 승리를 한다. 그리고 인류는 만 년의 역사 순환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대륙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그 중심에 네가 필요해.”
 “내, 내가……?”
 “그렇다. 바로 너다!”
 두근두근!
 순간 내 몸에 있는 피가 맹렬히 도는 것 같다. 그러자 온몸이 뜨거워진다.
 내가 이번 프로젝트의 중심이라고? 이 내가? 하지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며? 내 가족은, 친구들은? 이곳에 있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순간 냉수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진다. 그러자 머리도 차갑게 식어 간다.
 이거 뭐야, 보통 일이 아니잖아. 아니, 그 전에 만 년 전의 책이 진짜일까? 시소라니, 드래곤이 인류가 만든 것이라니? 그것이 사실일까? 정말로 인류는 이미 시소를 세 번 이상 경험했을까? 그렇다면 왜 만 년 전 유적은 발굴되지 않지? 너무 오래 전이라 남아나질 못하는 것일까? 이곳에서 잠든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냥 하룻밤 자고 일어나는 기분일까? 만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죽는 것인가?
 혼란스럽다.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다. 무엇이 답인지 알 수가 없다.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 몸도 떨린다. 눈앞이 아찔한 것이 눈동자도 떨리는 것 같다. 점점 다리 힘이 풀린다. 몸이 쓰러질 것 같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때였다. 갑자기 포근한 몸이 내 얼굴을 감싼다.
 유시? 이런, 다리의 힘이 풀려 쓰려지려고 했구나. 넘어지려는 나를 그녀가 받은 거야.
 이 따스함은, 마법인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마법인가? 역시 루살 가문의 유시야.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 아니, 루살 가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반려자, 나와 함께할 유시이기 때문이야.
 “고마워.”
 “뭘, 이게 내 일인걸. 그리고 넌 나와 함께할 거잖아. 영원…….”
 그녀의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난 ‘영원히’라고 알아들었다.
 영원히…… 이 말은 끝이 없는 기간을 말한다. 하지만 육체는 죽는걸, 소멸하는걸. 그렇군. 육체를 벗어나 영원의 상태가 되어 함께하는 거야.
 끝이 없는 기간 동안…… 바로 영원히지.
 
 
 3. 단지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따각, 따가락. 쩝쩝.
 조용한 가운데 식사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앞에는 아버지가, 왼쪽에는 어머니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이 앉아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아침 식사시간이다.
 난 잠시 이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느긋하게 식사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따로 준비한 음식이 있는지 갑자기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 어머니,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데 정신없는 동생.
 어쩌지? 시소가 행해진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지? 그렇군, 죽는 거야. 아니, 어제 들은 말로는 선제공격을 한다고 했으니 의외로 도시는 안전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전쟁에서 진다면 역시 죽겠지?
 나 혼자만 살아남는다. 아니, 20여 명의 새로운 동료가 생겨나지. 그들과 잘해 나갈 수 있을까?
 “밥 안 먹고 뭐 하는 거냐?”
 갑자기 아버지가 나를 보며 묻는다.
 “아, 아닙니다. 밥맛이 없어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라. 나 어렸을 땐 너무 가난해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단다.”
 “네, 아버지.”
 나는 수저를 들어 감자를 으깨고 우유와 빵을 넣어 만든 음식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실감이 나지 않아. 평소처럼 아버지는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 다른 음식을 가지고 나오시잖아? 동생은 뭐가 그리 맛있는지 허겁지겁 새로 가져온 오리조림을 먹고 있잖아?
 “아버지.”
 “식사할 땐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아버지. 소문에 북쪽 바란센에서부터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살 백작님이 사병을 모르려 한다더군요. 이곳 소딘은 비교적 안전할 것이라니까 멀리 나가지 마세요.”
 바란센은 북쪽의 국경지에 있는 도시 이름이고 소딘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흐음, 루살 백작님에게 들은 것이냐?”
 “네.”
 아버지는 내가 루살 백작의 딸 유시와 사귀는 것을 아신다. 그러니 내 말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다.
 “되도록이면 안전한 곳에 계세요. 어디 숨어 있을 곳이 있다면 그곳에 계세요.”
 난 그 말을 하고 바로 식탁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쉬라즈!”
 “쉬라즈, 어딜 가느냐!”
 등 뒤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다.
 “형!”
 동생의 목소리도 들린다.
 제길, 이게 뭐야!
 나는 어제 휴리스 하우스에서 돌아온 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시소나 드래곤에 대해 전혀 실감 나진 않지만 마음 어디선가 느껴지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밖에 나오니 제법 쌀쌀하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가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나는 다짜고짜 유적지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내 옷차림을 보고 뭐라 쑥덕거리는 것 같다.
 이런, 맨발이잖아? 몰라, 상관없어.
 작은 돌을 밟았는지 발바닥이 아팠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유적에 도착한 후 출입 금지란 팻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외벽만 남아 있기에 안에 들어가 봤자 별거 없다.
 유적 발굴을 위해 주변에 파헤쳐진 흙이 보였다. 대략 지하 1층 정도의 깊이다.
 나는 벽화가 남겨진 곳으로 다가가 유심히 바라봤다.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드래곤이 인간을 공격하는 그림이다. 설마 이 그림은 시소의 장면인가? 이 유적이 5만 년 전의 것이라더니, 사실일까?
 하늘에서 브레스를 쏘는 모습, 그 아래 수만 명의 인간이라 짐작되는 작은 점들 그리고 옆에 그려진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의 표정…….
 응? 뭐지?
 그때였다. 그림의 점들 중 몇 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나는 손을 내밀어 검지로 움직인 점 하나를 만졌다.
 “헉!”
 순간 난 깜짝 놀랐다. 콩보다 작은 점에 손가락이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아프지 않은 것으로 봐 잘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뺐다. 역시 손가락은 무사했다.
 설마, 차원의 틈?
 나는 가까이 다가가 점을 유심히 살펴봤다. 사람의 머리를 그린 여러 점들과 다르지 않았다.
 난 이번에 다른 점을 만져 봤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아까 손가락을 삼킨 점을 만져 봤다. 그랬더니 역시 손가락이 들어갔다.
 이거 뭐야, 유적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며 손을 좀 더 넣어 봤다. 그랬더니 팔목까지 들어갔다. 공간의 외곡 현상이 일어나 손목이 뾰족하게 변해 있다.
 “하악!”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내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뭐, 뭐야! 안 돼!”
 나는 왼손으로 벽화의 다른 부분을 잡고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당기는 힘이 너무 세서 뺄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이러다 내 몸이 안으로 들어가겠어! 설마, 죽는 거 아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크흡!”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손을 잡아당겼다.
 “크으윽! 비, 빌어먹을!”
 팔목이 아프다. 어깨도 빠질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잡아당기기에 이렇게 강할까!
 난 더 큰 힘을 내기 위해 왼발을 들어 벽에 댔다. 그런 다음 고통을 참으며 더 강하게 당겼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힘을 빼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도, 도와줘, 누구든 아무나 좀 도와줘!”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유적이 접근 금지 구역이지만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도와줘!”
 다시 한 번 외쳤다.
 제길, 당기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점점 팔이 안으로 들어간다. 팔목을 지나 곧 어깨까지 들어갔다. 고개가 벽에 닿아 꺾였다.
 저기로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거 아냐? 젠장, 차라리 시소를 대비해 휴리스 하우스에 들어가고 만다!
 “누가 좀 도와줘!”
 나는 계속 큰 소리로 외쳤다. 어깨 부위가 공간에 왜곡돼 작은 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뭐 해?”
 “뭐?”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난 갑자기 강한 힘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아니, 나를 잡아끌던 힘이 갑자기 없어지자 뒤로 당기던 내 힘에 내가 날아간 것이다.
 스틸반?
 내게 말을 건 자는 학교 친구 스틸반이었다. 유적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그도 아침부터 이곳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가 내 외침을 들었나 보다. 하지만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콰당!
 “아악, 크으으으.”
 난 뒤로 넘어져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잠깐의 고통인 것이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손!
 순간 손에 이상이 없는지 어깨부터 손끝까지 살펴봤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쉬라즈, 왜 혼자 뒤로 넘어지고 그러냐. 무슨 일 있냐?”
 “방금 내 손이 저 벽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 걸 못 봤어?”
 “뭐? 무슨 소리야? 아까 두 손으로 벽을 짚고 있더니, 빨려 들어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있었다고?”
 난 의아했다. 틀림없이 벽화의 작은 점 속으로 어깨까지 들어갔다. 지금도 손목과 팔꿈치, 어깨가 아프다. 그러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틸반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있었다 하니……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보인 건가?
 “아, 알았어.”
 난 급히 일어나 유적지를 나갔다.
 “뭐야, 저 녀석?”
 등 뒤로 스틸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지만 난 대답하지 않고 그곳을 나왔다.
 뭔가 있어. 저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야.
 어라? 언제 손에 이런 물건이 들려 있었지?
 구멍 속으로 들어갔던 오른손엔 작은 구슬이 하나 쥐여 있었다.
 차원의 틈 안에서 잡은 건가?
 달걀보다 작은 구슬은 푸른색의 보석 같았다.
 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리 몇몇 사람이 보였으나 날 신경 쓰는 자는 없었다.
 난 보석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푸른색 구슬 속에 작은 구가 하나 더 있었다.
 설마, 눈동자?
 구의 모양이 마치 사람의 눈 같았다. 물론, 눈을 빼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동공 같은 점도 있고, 가는 실선으로 이어진 도형 같은 것도 있어서 그렇게 느껴졌다.
 저건 뭐지, 글자인가?
 너무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글자가 틀림없다. 하지만 처음 보는 것이어서 알아볼 순 없었다.
 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구슬을 오른쪽 눈에 가까이 갖다 댔다. 그때였다. 갑자기 푸른색 구슬이 사라졌다.
 어, 뭐야?
 “크아아악!”
 뭐, 뭐야! 이 고통은!
 “내, 내 눈! 크으으, 아아아악!”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마치 수저로 눈알을 도려내는 것 같다. 극력한 고통에 오른쪽 뇌까지 아파 온다. 갑자기 몸 전체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 특히 땅에 닿는 등과 엉덩이가 아파 온다.
 바람이 분다. 그런데 몸에 구멍이 뚫렸는지 몸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힘차게 돌고 있는 피와 섞여 온몸을 휘젓고 다닌다. 그러자 이번엔 온몸을 난도질하는 고통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하악.”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통이 수그러든 것 같다. 너무 아파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는지 가슴이 크게 들썩거린다.
 천천히 눈을 떴다. 몇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괜찮은가?”
 누군가 내게 물어 오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이곳을 벗어났다.
 젠장, 아직도 오른쪽 눈이 아리다. 다행히 몸에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푸른 구슬은 뭐지? 설마 내 눈에 들어온 것인가?
 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거울을 찾아 눈을 살펴봤다. 하지만 평상시와 똑같았다.
 “휴우, 다행이다. 근데 정말 그 구슬은 뭐였지?”
 한쪽 눈이 푸른색 구슬로 변해 있었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어쨌든 구슬이 사라진 것과 눈이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늦었으니 아카데미로 가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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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윽!”
 “죽어!”
 “야, 게릭 좀 말려!”
 “크악!”
 뭐야, 게릭이 또 말썽인가?
 게릭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자와 싸우고 있다. 주변에서 구경하다가 도가 지나치자 말리려 4명의 남자가 달려들었다.
 게릭은 왜 저렇게 난폭하고 쉽게 화를 낼까? 1년 전만 해도 좀 거칠긴 했지만 지금처럼 난폭하진 않았는데.
 아!
 순간 갑자기 어지러웠다. 몸속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욱신!
 오른쪽 눈에 또다시 고통이 느껴졌다.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느려졌다. 게릭과 그를 말리는 자들의 행동이 마치 슬로우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였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바람 비슷한 것이 보였다.
 크윽!
 갑자기 오른쪽 뇌가 아파 온다.
 난 제자리에 앉아 양손으로 눈과 머리를 감싸 눌렀다. 다행히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봐, 괜찮아?”
 “으, 응.”
 나는 서둘러 아카데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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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음, 아무렇지 않은데? 몸속의 마나가 평소와 다르게 불안정하고 양이 약간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이상은 없어. 하지만 며칠 일한 것처럼 피곤하니 푹 쉬어야 할 것 같아.”
 “그래? 다행이다.”
 나는 유시에게 아침에 있었던 유적과 푸른 보석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짜고짜 내 몸을 관찰하고 만지며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집에는 혼자 갈 수 있겠어?”
 “응, 네 말대로 피곤한 것 말곤 이상 없는 것 같아.”
 “그래, 그러면 내일 우리 집으로 오는 것 잊지 말고.”
 “응.”
 원래 유시네 집으로 가서 시소와 휴리스 하우스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계획이었으나 아침의 일 때문에 집에 가기로 했다.
 “잘 가.”
 유시가 웃으며 인사한다.
 “너도 잘 가.”
 나도 웃으며 인사했다.
 다행이군. 만일 휴리스 하우스에 가게 되더라도 유시는 나와 함께할 테니까.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나의 고향과 내 주변의 모든 친구들,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뀌겠지? 나는 과연 모든 것을 버리고 휴리스 하우스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내 결단에 달려 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이곳에 남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주변의 모든 것들과 계속 함께할 수 있겠지만 대가로 시소라는 전쟁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고, 유시도 잃어버리게 된다. 반대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생존과 유시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다.
 난 어찌해야 될까?
 
 집으로 돌아온 난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주방으로 갔다.
 어머니는 테이블 위에 여러 가지 과일과, 고기를 통째로 구워 잘 썬 다음 소스를 뿌린 스테이크를 준비하고 계셨다.
 “어머니, 도와 드릴게요.”
 “뭔 일이냐, 늘 방에 들어가면 마법 책이나 읽던 네가.”
 그야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러죠.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으, 춥다.”
 그때 동생이 들어왔다. 가을의 시작이라 저녁이 되면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맞아. 이루야, 잠깐만.”
 “왜?”
 난 의아하게 바라보는 동생의 표정을 뒤로하고 2층의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법 나침판을 들고 내려왔다.
 “가져.”
 “이건, 와! 정말 주는 거야?”
 “물론!”
 “형이 웬일이야? 이거 무지 아끼는 거였잖아!”
 그랬지. 내가 한참 여행을 좋아했던 5년 전에 세 달 치 용돈을 모아 구입한 것이었으니까.
 나를 닮았는지 동생도 여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마법 나침판을 가지고 싶어 1년 전부터 내게 무지 졸라 댔다. 하지만 비싼 것이라 난 주지 않았다.
 “가끔 형 노릇도 해야지. 하하하.”
 비록 웃지만 기분은 씁쓸했다.
 동생이 나침반의 뚜껑을 열자 마름모꼴의 빛이 나타나 한 방향을 가리킨다. 곧 빛이 실처럼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지더니 북쪽으로 뻗다가 부엌의 벽에 부딪쳐 더 이상 가지 못했다.
 “와! 형, 고마워!”
 녀석, 그렇게 좋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줄 걸 그랬네. 앞으로는 동생이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텐데…….
 “아!”
 순간 난, 이미 휴리스 하우스에 들어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왜 그래 형?”
 “왜 그러느냐?”
 어머니와 동생이 동시에 물었다.
 “밥을 빨리 먹고 싶어서요.”
 “좀 더 기다리거라. 곧 아버지 오실 시간이니까.”
 “네.”
 씁쓸한 기분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응?
 그때 집 밖에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마나를 느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마나 감각이 좋았던가?
 그때 오른쪽 눈에 고통이 밀려온다. 뭐지?
 덥다. 이상하게 주변이 덥다. 아직 초가을이라지만 저녁이면 좀 쌀쌀한데, 그럼에도 덥다.
 “좀 덥지 않아?”
 “아니.”
 내 말에 동생이 마법 나침판을 보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나 좀 옷 벗고 올게.”
 상의로 두 벌을 입고 있어 한 벌을 벗으려고 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집 밖이 갑자기 붉은빛으로 환해졌다.
 “뭐야?”
 난 의아해하며 문으로 다가가 옆에 있는 창으로 밖을 바라봤다.
 화아아악!
 갑자기 강한 빛이 사방을 에워쌌다.
 “으윽!”
 순간 난 거대한 힘이 내 몸을 뒤로 밀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설마, 마나 폭풍?
 난 조심스럽게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러자 사방이 온통 붉었다.
 난 급히 뒤를 돌아봤다. 순간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해 고개를 돌리는 내 동작도 더뎠다. 난 최대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의아하게 내 쪽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동생이 보였다. 등 뒤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점점 이리로 다가오고 있다.
 천둥소리 같은 것이 사방을 울리고 있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와 동생이 일어나 놀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들어 밖을 가리키는데 그 또한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마나 폭풍은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마법이 발동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던데, 직접 느껴 보긴 처음이다.
 사방을 가득 메운 붉은빛의 정체는 뭘까? 마나 폭풍을 일으킨 범인이겠지?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어머니와 동생은 이제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매우 느렸다.
 등 뒤에 뜨거운 기운이 닿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지나 어머니와 동생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운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이군.
 붉은 기운은 불덩이였어. 어디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주변을 가득 메우는 불덩이가 나타난 거야. 그리고 그게 마나 폭풍의 주범이야.
 순간 난 내가 이렇게 죽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아니, 사방의 모든 것이 다 불타 버리겠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덕분에 불덩이를 피했을까, 아니면 우리보다 먼저 당했을까? 그렇군, 어차피 다 죽을 거 상관없잖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법 나침판을 동생에게 줘서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생각보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다행이다. 어머니와 동생도 나처럼 고통 없이 죽겠지. 만족한 삶을 살지 못해 약간 서운하군.
 유시,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백작 집안이니 불덩이에 대한 방어 마법으로 무사히 살아났을 거야. 그나저나 왜 갑자기 이렇게 거대한 불덩이가 나타난 것일까. 설마 시소의 시작? 그럼 드래곤의 공격일까?
 그런데 난 언제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몸이 불에 타 죽어도 생각은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새로운 발견이군. 하지만 이미 죽어 버렸으니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 들려고 했다.
 유시, 미안하다. 같이하지 못하겠다.
 “쉬라즈,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나를 봐 봐. 정신 차려, 쉬라즈!”
 죽었는데 어떻게 정신 차려…… 뭐, 뭐?
 “뭐, 뭐야!”
 순간 난 벌떡 일어났다.
 “유시!”
 눈앞에 유시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난 급히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하늘이 무너졌는데 살아난 느낌이다.
 “꿈이었다니 정말 다행이야.”
 그래,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끔찍한 꿈이라니,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 시소, 확실히 없어져야 할 전쟁이야! 만일 시소가 사실이라면 난 내 평생을 걸고 그 일을 멈추고 말 테야!
 “꿈이 아니야. 그리고 억지로 텔레포트시켜서 미안해.”
 “뭐, 뭐라고?”
 “이곳은 휴리스 하우스야.”
 그녀가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약지 손가락에 반년 전 내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다.
 “내가 너와 교환한 반지, 소환 마법을 위한 매개체야.”
 “뭐라고? 무슨 말이야 도대체?”
 지금 내 목에는 그녀가 준 반지가 걸려 있다.
 “정말 미안해. 드래곤들이 우리의 계획을 알고 선공을 취했어. 우리가 있던 도시를 비롯해 50군데의 도시가 일시에 드래곤의 공격을 당했어. 그들은 생각보다 영리하고 행동이 빨랐어. 이번 시소는 인간이 질 거야. 이미 9서클 마법사를 비롯해 각 분야의 최고 정점에 선 자들 40명 정도가 죽었대…….”
 말을 하면서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시소를 준비하던 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강제 텔레포트됐어. 이번 건 시간 싸움이었어. 누가 먼저 준비해서 공격해 이익을 취하느냐가 이번 시소의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문제였지. 드래곤은 인간이 시소를 대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더 빠르게 행동한 거야. 그런 거야.”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덕분에 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응, 이미 우리의 고향은 대륙에서 사라졌어. 흐, 흐윽, 흐흐흐흑.”
 “저, 정말?”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대략 20여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이곳은 휴리스 하우스, 이전에 봤던 곳이다.
 “너희 아버지는, 아버지는? 백작이잖아. 어디 계셔?”
 “흐흑, 아버지도 돌아가셨을 거야. 강제 텔레포트를 준비하느라 미처 드래곤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 내 어머니와 동생, 아버지는? 옆집의 뚱뚱한 부부와 학교의 마법 선생들은?”
 “흐으윽, 흑흑. 마법 선생들 중 몇 명은 살아남았을 거야. 아무리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공격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마법 실력을 갖춘 분들은 계시니까.”
 “그만 징징거리지. 우린 할 일이 있으니까.”
 “누굽니까!”
 유시의 등 뒤로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여기 있는 모든 자들은 휴리스 하우스에 선택받았다. 그리고 모두 입장이 똑같다. 모두 가족과 친구를 잃고 고향을 잃었지.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흔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봐라.”
 중년 남자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모두 결연한 표정이다.
 “우린 행복한 거다. 살아남아 복수하면 되니까. 그리고 톱니바퀴처럼 돌고 도는 역사를 마치고 인류는 신처럼 높은 곳까지 비상할 것이다. 그 밑거름이 바로 우리들이지.”
 “하, 하지만…… 난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어린 애가 스무 번째 서바이버라니 실망이군. 네 덕분에 이런 별 볼일 없는 녀석이 휴리스 하우스에 들어왔구나.”
 중년 남자가 유시를 보며 말했다.
 “뭐라고!”
 난 화가 나 남자에게 소리쳤다.
 “휴리스 하우스에 들어오려고 했던 자가 자그마치 천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주변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인재들이지. 넌 루살 가문 덕분에 그들과는 상관없이 마지막 스무 번째 자리에 들어온 거다. 아토 마법 연구가라고 했던가? 보나 마나 별 볼일 없겠군.”
 “크으, 제, 제길!”
 슬프다. 그리고 화난다.
 꿈이 아닐까? 지금쯤 벌떡 일어나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내 방이 보이진 않을까? 그래, 일어나 보자. 어서 일어나 보자고!
 “이게 뭐야, 난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싫다, 왜 이런 상황이냐고! 이틀 전만 해도 똑같은 일상이었단 말이야!
 “괜찮아, 지금은 아프고 괴롭지만, 괜찮아. 다 잊을 거야. 지금 순간을 받아들여.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유시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붉어진 눈동자에 힘이 보인다. 강한 의지 그리고 포근함…… 역시 그녀는 강하다.
 “제길, 으아아아악!”
 모든 것을 잃어 슬퍼해야 할까? 하지만 화가 난다. 그럼 화내야 할까? 눈앞의 유시도 화내지 않는다. 그럼 그녀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자들처럼 결연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아니,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걸.
 그럼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난 지금 이 순간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나타났고 휴리스 하우스를 벗어나면 고향은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방금 뜨거운 마법이 드래곤의 공격이었다고? 난 그때 텔레포트된 것이라고? 조작 아니야? 나를 속이기 위해 여러 사람이 벌인 조작 아니냐고!
 “날 밖으로 내보내 줘. 내 두 눈으로 직접 멸망한 도시를 봐야겠어! 그래야 답을 내릴 수 있을 거 같아. 보여 줘!”
 “형편없는 놈, 휴리스 하우스는 벌써 발동했다. 이곳으론 아무도 못 들어오고 또 여기서 나가면 드래곤들에게 발각돼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흥, 그 말로 날 속이려고? 절대 안 넘어가!”
 그때였다. 유시의 뒤에서 한 남자가 인상을 쓰며 내게 다가왔다.
 “병신. 넌 불합격자다.”
 퍽!
 “크으윽! 게, 게릭?”
 아카데미의 말썽꾸러기 게릭도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나도 원치 않지만, 너처럼 추하진 않다.”
 게릭은 나를 내려다보다가 뒤로 걸어가 사라졌다.
 “크으읍!”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진다. 게릭에게 맞은 배 속에서 창자가 꼬인 것 같다.
 “괜찮아, 괜찮아.”
 유시가 나를 감싸며 마나를 일으켰다. 그녀 자신을 포함해 이곳에 남겨진 20명의 의사 노릇을 할 그녀. 역시 천여 명의 경쟁자를 뚫고 들어왔겠지? 그런데 난, 나는?
 포근한 마음이 나를 감싼다. 깊이 잠들게 하는 기운이 머릿속으로 들어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이런, 잠들기 싫은데……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겠지.
 난 그녀의 뜻에 따라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정신은 깊은 곳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암흑이 다가온다. 아니, 내가 그곳에 떨어지고 있구나.
 풍덩, 크읍!
 코와 귀로 암흑의 물질이 들어온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흐읍, 흡!
 어떻게든 숨을 쉬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면 암흑의 물질이 몸 안으로 들어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점점 숨이 막힌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시간이 점점 지난다. 온몸이 괴로워진다.
 이때 누군가 내 눈에 손을 댄다. 손이 차갑다.
 살았다. 갑자기 숨이 쉬어진다. 하아, 하아.
 유시?
 눈을 뜨자 눈앞에 유시가 내 눈을 살펴보고 있다.
 “깨어났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는걸.”
 아, 그러고 보니 난 마법으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지.
 “깨어났으면 어서 일어나라. 우린 너를 돌볼 여유가 없다. 죽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해라. 단, 우린 지금 깊은 숙면에 취해야 하니 깨어난 다음에 네 맘대로 하도록.”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온 중년인이 내게 말한 후 다른 곳으로 갔다.
 “일어나, 천 년의 잠을 준비해야지.”
 “저 남자는 누구야?”
 “이터너티 슬립을 펼칠 마법사야.”
 “이터너티 슬립?”
 “응, 무한의 잠에 드는 마법. 듣기로는 드래곤이 수면을 취할 때 펼치는 마법이래. 하지만 우리는 5천 년의 잠에 들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동굴로 향했다.
 곳곳에 라이트 마법이 걸린 마나석이 빛을 발하고 있다. 환하진 않지만 사물을 분별하는 데는 충분했다.
 마법진인가? 이터너티 슬립을 펼칠 방에 들어가자 사방에 거미줄처럼 마법진이 가득했다.
 “우린 약 5천 년간 절대온도 이하에서 얼어 있을 거야. 그 전에 우리의 생명은 이 작은 용기에 들어가 있게 되지. 리치가 생명력을 용기에 담는 것과 비슷한 이치야.”
 그녀가 말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그 뒤로 여러 선과 연결된 모래시계같이 생긴 용기가 있었다.
 “육체의 노화를 막기 위해 몸을 얼리고, 생명력 보존을 위해 용기에 넣어 두는 거야. 거기에 보존 마법진이 이중으로 육체를 보호하지. 뿐만 아니라 관에 그려진 마법진은 마나를 모으는 성질도 있어 우리가 깨어나면 몸속에 마나가 많이 쌓여 있을 거야.”
 “모두 준비를 마쳤다. 서두르지?”
 “알았습니다.”
 머리 긴 중년 마법사의 말에 유시가 대답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난 것과 같을 거야. 이터너티 슬립이 5천 년 동안 깨어나지 않게 할 테니까.”
 유시는 말을 마치고 그녀가 누울 곳으로 갔다.
 이곳에 누우란 건가?
 나는 아직도 상황과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진 관에 누웠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 주변의 친구들…… 멸망당했을까? 모두 죽었을까? 시소, 정말일까? 내가 속은 것이라면?
 난 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누운 상태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렸다.
 내 손이 보인다. 5개의 손가락 사이로 작게 빛나는 마나석이 보인다.
 후읍, 하아아아.
 깊이 호흡을 하자 차가운 공기가 폐 속에 가득 퍼진다.
 관 안이 편안한 게 의외로 마음이 안정되잖아? 오랫동안 누워 있을 곳이기에 인체에 맞게 설계됐나 보군. 그런데 마법이 실패하면 모두 죽는 건가?
 두근두근!
 순간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생각하지 못했는데, 휴리스 하우스 자체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럼 난 죽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는 것이다.
 그때였다. 관 안에 흰색 안개가 차기 시작했다.
 뭐야, 차가워!
 순간 얼음물에 빠진 것같이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힘이 내 몸을 누르고 있어 그러질 못했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유리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차가워. 뭐야, 이거! 설마 실패하는 거 아냐? 죽는다, 모두 죽는다! 안 돼, 안 돼!
 온몸에 공포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암흑의 물질이 온몸을 조이는 것 같다.
 난 손을 내밀어 유리 같은 것을 쳤다.
 쿵! 쿵!
 날 꺼내 줘, 여기서 꺼내 줘!
 온몸의 감각이 점점 없어진다. 차가운 기운에 몸이 얼어 가는 것이다.
 싫어, 난 싫다고!
 그때 머리 긴 중년 마법사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날 꺼내 줘!”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쏴아아!
 순간 온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암흑뿐이다.
 고오오오오.
 암흑 속에서 울림이 전해지자 마치 깊고 넓은 동굴에 와있는 것 같다.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른다. 드넓은 대해 깊은 곳에 빠진 것 같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진다.
 빛인가, 빛이다!
 난 빛을 향해 손을 내밀어 헤엄치듯 몸을 움직였다.
 툭!
 손에 뭔가가 걸렸다. 난 강한 힘으로 밀었다.
 챙그랑!
 “하아아아압, 하아하아, 하아.”
 난 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가쁘게 숨을 쉬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하아, 하아압, 하아.”
 주변을 둘러봤다. 유리 파편이 나뒹굴고 먼지가 사방에 가득한 것이 1분 전과는 다르게 동굴 안이 오랫동안 버려진 것 같았다.
 “시, 실패인가? 하아, 하아.”
 직감적으로 휴리스 하우스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살아났군. 하아, 휴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숨 쉬기가 편해졌다.
 유시, 유시는? 다른 동료들은?
 난 서둘러 관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관을 바라봤다.
 “뭐야, 없잖아!”
 옆 관에는 사람이 없었다. 관을 덮은 유리가 열려 있는 상태였는데 속에 먼지가 쌓인 것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있지 않았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난 그 옆에 있는 관을 바라봤다. 역시 사람은 없었다.
 난 걷기 위해 관에서 나왔다.
 “으악!”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며 넘어졌다. 다행이라면 관에 머리를 찧지 않았다.
 장치의 후유증인가?
 몸을 얼린다고 했다. 그러니 몸이 정상이 아닐 것이다.
 난 관을 버팀목 삼아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러자 조금씩 힘이 돌아왔다. 곧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직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았지만 난 관을 모두 둘러보기 위해 움직였다.
 유시는, 유시의 관은 어디였지?
 내가 누웠던 관을 제외한 19개의 관을 모두 둘러봤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먼지의 양을 보니 사라진 지 꽤 된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시체 혹은 해골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지금 이곳에 없지만 살아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명이 약하군. 라이트 마법의 수명이 다해 가는 것인가?
 잠들기 전보다 훨씬 어두웠다.
 정리해 보자. 주변을 보면 마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그럼 휴리스 하우스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가? 그렇다면 내가 며칠이나 잠들었을까. 한 달? 아니면 1년?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갔을까?
 주변을 관찰하는 사이에 몸이 많이 회복됐다. 그래서 이제는 똑바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난 이곳을 벗어나 다른 동굴로 갔다.
 뭐야, 이곳엔 동물이 있었을 텐데, 왜 하나도 없지?
 난 바로 몸을 움직여 식량이 있는 동굴로 갔다.
 “텅텅 비었잖아!”
 식량 동굴도 먼지만 쌓여 있었다.
 난 서둘러 다른 동굴로 향했다. 역시 텅텅 비었다. 처음 이곳에서 봤던 대부분의 것들이 없어진 후였다. 그나마 책을 모아 놓은 곳은 약 반절 분량의 책이 남아 있었다.
 난 책장으로 향했다. 분류가 잘돼 있어 원하는 책을 찾기 쉬워 보였다.
 난 무의식중에 마법 서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쭉 훑어봤다.
 “뭐야, 다 쓸모없는 것만 있잖아?”
 마법 서적은 대부분이 사라지고 몇 권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 귀중하다고 생각된 것은 다 가지고 간 것 같았다.
 “동료들은 일찍 깨어나 동굴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나간 것 같아. 그럼 왜 날 깨우지 않았지?”
 모를 일이다. 잠들게 했다면 깨울 수도 있을 텐데…….
 “그나저나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야? 잠깐만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잖아!”
 어둡고 넓은 동굴에 혼자만 있으니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일단 먹을 것 좀 찾아보자.”
 얼마 동안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동안 육체가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나는 다시 식량을 모아 놓은 동굴로 향했다.
 “지혜로운 유시라면 절대 그냥 가진 않았을 거야. 깨우지 못한 것은 의문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동료들이 전부 동굴을 나가니 결국 따라 나갔겠지. 하지만 분명 나를 위해 뭔가 남겨 뒀을 거야.”
 난 확신을 가지고 일단 식량 동굴을 샅샅이 뒤졌다.
 “빙고!”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먼지가 쌓여 식량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 보존 마법이 걸린 고깃덩이였다.
 난 급히 고깃덩이를 들고 입으로 먼지를 불었다. 그리고 손으로 고기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고깃덩이가 모래처럼 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 뭐야!”
 두 손 사이로 흩어져 땅으로 떨어지자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을 텐데, 왜?”
 썩진 않았다. 그런데 이런 형상이 나타나다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 책에서 본 내용 중 보존 마법을 걸었어도 무한한 시간 동안 사물이 보존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설마?
 난 주변을 좀 더 뒤져 다른 식량을 찾았다. 그리고 바로 들어 올린 다음 강하게 흔들었다. 그랬더니 마찬가지로 모래처럼 흩어져 버렸다.
 “뭐야, 이게 뭐야!”
 난 이번엔 책을 모아 놓은 동굴로 향해 아무 책이나 들었다. 다행히 책은 모래처럼 흩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말해 주듯 쉽게 뜯어졌고 손으로 강하게 쥐면 부서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잠깐 잠을 잔 것뿐인데…….”
 상황을 보면 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하지만 약 1시간 전에 동생에게 마법으로 만든 나침반을 줬고, 방금 관에 눕기 전 유시와 대화를 했다. 장치가 실패할까 봐 유리를 두드리며 꺼내 달라고 외쳤던 것이 방금 전이었다.
 이렇게 기억이 생생한데, 설마 수천 년이 지난 것이란 말인가?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난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좀 더 동굴을 뒤졌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동굴 안엔 먼지와 손으로 쥐면 부서지는 것들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게…… 이게 뭐냐고!”
 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동굴 안에 메아리치며 내게 화답한다.
 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하하, 하하하.”
 웃었다. 기뻐서가 아니라 황당하고 허탈해서 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야…….”
 천천히 일어났다. 저린 다리를 끌고 주변을 돌다가 관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밖에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 하지만 안에선 나갈 수 있다고 했지? 그럼 밖으로 나가 보자.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뭔가가 나오겠지. 아니, 이미 동료들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을 테니, 나도 그렇게 하자!”
 난 저린 다리를 이끌고 입구로 향했다. 동굴이 제법 커서 찾는 데 힘들었다.
 “이곳인가?”
 아래엔 마법진이 있다. 그 너머로 문이 하나 있는데, 굳게 닫혀 있었다.
 이곳이 차원의 비틀린 곳에 있어서 밖에서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했지? 그럼 나가면 다신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난 문을 향해 다가가다가 잠시 멈췄다.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하자.
 난 다시 동굴을 뒤지기 시작했다. 만일 밖이 숲이라면 먹을 것 걱정은 없겠지만 맹수나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만일 밖이 허공이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 설마 바다 속? 그럴 일도 없을 거야. 도심이라면 어쩌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말은 통할까? 휴리스 하우스의 목적대로 시소가 끝난 후 5천 년이 지났다면 인간이 많이 있겠지?
 난 동굴을 뒤진 결과 고기를 자르는 칼과 지팡이 대용으로 쓸 만한 철 막대기 하나를 찾았다. 다행히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칼과 막대기는 멀쩡했다.
 옷이 한 벌 더 있으면 좋으련만 옷은 없구나. 음식은 나가서 구해야 될 것 같고, 서고에 가 보자. 어쩌면 좋은 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칼과 지팡이를 들고 서고로 향했다.
 “이야, 반절 정도를 가지고 나갔다지만, 이 많은 책을 어떻게 훑어보지?”
 책장 하나당 2백 권의 책이 있다고 할 경우 책장이 대략 2백여 개 정도 보였다. 그러니 적어도 4만 권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별의별 책을 다 모아 놓은 것이라 진짜 중요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배 속이 허하니 오래 있지 못할 거야. 그러니 칼 다루는 기술이나 마법 서적을 찾아보자.”
 고기 자르는 칼은 제법 커서 무기로 써도 좋을 것 같았다. 막대기 역시 끝을 갈면 검처럼 사용할 수 있을 듯했다.
 난 서고를 뒤지며 운동하는 법과 체술을 다룬 책 한 권과 검술서 한 권을 찾았다. 험하게 다루면 책이 부서질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거면 최소한 몸이 허약해 병들거나 몬스터에게 당하진 않겠지. 그럼 생활 마법 같은 것을 담은 책은 없나?”
 아쉽게 난 아직 1서클을 이루지 못해 아는 마법이 별로 없다. 그러니 서클은 낮아도 되니 3서클 이내로 이루어진 생활 마법서가 필요했다.
 “오, 있다! 다행히 낮은 서클이라 가져가지 않았나 보군.”
 이미 깨어나 동굴을 나간 일행들이 놓고 간 책, 하지만 내겐 매우 유용한 책이었다.
 책은 2서클까지 다룬 내용이었는데, 제목은 ‘부여 마법 총론’이었다.
 “여러 권으로 이뤄진 것 같은데 이거밖에 없군. 뭐, 어차피 내게 필요한 것은 초보적인 거니까.”
 난 원하는 책을 찾았으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창조의 서, 마법 생물?”
 난 조심스럽게 책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봤다.
 “이런 내용을 다룬 마법이 있던가?”
 마법 생물을 만드는 방법을 담은 책인데, 마법학계에서 다루지 않는 새로운 부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했다. 다른 책들은 조금만 강하게 쥐면 부서졌는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재료가 뭐지? 다른 책처럼 나무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가죽도 아니고, 금속 같으면서도 옷감처럼 부드러운 것이……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다른 책과는 다르게 튼튼하다는 것이다.
 “좋아, 심심할 때마다 읽어 보자.”
 난 총 네 권의 책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입고 있는 옷이 멀쩡해 다행이야.”
 아마 관 속에 있던 마법진에 육체를 보존하는 효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덩달아 옷도 잘 보존된 것 같다.
 난 칼과 지팡이를 허리에 찼다. 그런 다음 책 네 권은 품속에 넣었다.
 네 권은 무린가?
 옆구리 부위가 볼록하게 나와 걷기에 거치적거렸다. 난 다시 동굴을 뒤져 책을 담을 만한 것을 찾았다.
 “뭐, 그냥 가자.”
 칼과 지팡이로 사용할 막대기는 허리에, 책은 품속에 넣은 상태로 동굴 입구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밖은 어떨까? 살 만할까, 아니면 지옥 같을까? 혹시 가족들이 있진 않을까? 알고 봤더니 내가 속은 건 아닐까? 시소도, 휴리스 하우스도 모두 거짓이고, 잠시 일주일 정도 잠에 든 것인데, 사람들이 날 속이기 위해 동굴 안을 오래된 것처럼 조작한 것은 아닐까?
 그래, 화내지 않을 테니 조작한 것이었다면 좋겠다. 내 가족, 내 고향, 내 친구들과 유시…… 잃고 싶지 않아. 차라리 모두 속아 줄 테니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면 좋겠다.
 난 작은 소망을 담고 손으로 입구를 밀었다.
 “끄으으, 이거 힘드네.”
 강한 힘으로 문을 밀자 조금 밀렸다. 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문을 밀었다.
 그그그으.
 문이 뒤로 밀리며 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더!
 약 1미터 정도를 밀었다. 그러자 처음보다 수월하게 문이 밀렸다.
 그런데 이 문은 내가 나가면 다시 원상 복구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미 나간 동료들에 의해 문이 열려 있어야 할 텐데…….
 난 의아해하면서도 계속 문을 밀었다.
 “됐다!”
 문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생각보다 환한 빛은 아니었지만 동굴보단 밝았다.
 밖은 곧 밤이 되려는 걸까?
 난 마지막 남은 힘을 내며 문을 밀었다. 그때였다. 문틈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뭐야, 이거! 설마, 물?”
 갑자기 문틈으로 물어 들어오더니 곧 반대로 밀리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문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 으악!”
 펑, 쏴아아아아아!
 갑자기 문이 나가떨어지더니 물이 급속도로 밀려들어 왔다.
 “으아아아악!”
 난 물살에 휩쓸리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살짝 뜬 두 눈엔 천장이 재빠르게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푸, 하압, 푸웁!”
 물이 입으로 들어오자 크게 호흡을 하고 다물었다. 물은 급속도로 동굴 안에 차기 시작했다.
 난 물속으로 들어갔다. 다행이라면, 잘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수영을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쿵!
 “크읍!”
 물살에 휩쓸리다가 몸이 동굴 벽에 부딪쳤다. 입을 벌려 소리치고 싶었으나 물속이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물이 가득 찼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숨이 막힌다. 다행히 물은 천장에 가득 차지 않았다. 동굴 안의 공기가 물의 유입을 막은 것 같다.
 난 겨우 입만 내밀어 숨을 쉬었다.
 “이크!”
 공기가 어딘가로 빠져나가는지 물은 조금씩 차올랐다. 난 다시 숨을 크게 모은 다음 잠수했다. 물속에서 눈을 뜨니 눈이 아프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라 참고 견디며 입구로 헤엄쳤다.
 다행이다. 입구가 막히거나 하진 않았구나!
 난 빛이 들어오는 밖으로 나갔다.
 환하다. 햇살이 들어와 물속을 비춘다. 다행히 낮이었다.
 나는 동굴을 나와 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푸하아! 하아, 하아. 살았다, 살았어!”
 주변을 살펴봤다. 제법 넓은 호수였다. 차원이 비틀린 곳에 동굴 입구가 있다더니, 하필이면 물속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바다 속이 아니니 다행이다.
 “역시, 시소는 사실이었나?”
 내심 휴리스 하우스가 거짓이기를 바랐었다. 입구를 나가면 유시가 날 반겨 줄 것이란 희망도 있었다.
 아냐, 아직 몰라. 휴리스 하우스에 들어갈 때도 텔레포트로 이동했으니 당연히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오겠지. 아직 몰라. 휴리스 하우스도, 시소도 모두 거짓일 가능성은 있어. 아니, 거짓이어야만 해.
 “아차!”
 난 급히 허리를 만졌다. 다행히 칼과 지팡이는 있었다.
 이번엔 품을 뒤졌다. 책이 만져졌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이런, 젠장!”
 물에 닿은 책이 완전히 젖어 버려 손으로 쥐자 뭉개져 버리고 일부분은 떨어졌다.
 난 일단 헤엄을 쳐서 육지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가까웠는데 막상 헤엄쳐 가려고 하니 꽤 멀었다.
 중간에 쉬면서 겨우 육지로 올라왔다.
 “하아, 하아, 젠장!”
 책은 거의 원상 복구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 말리기 시작했다.
 “이 책은 멀쩡하군. 역시 재료가 좋아.”
 ‘창조의 서, 마법 생물’이란 책은 물에 닿았어도 멀쩡했다. 그리고 비록 기초서라지만 ‘부여 마법 총론’도 제법 멀쩡했다.
 “이 두 권은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어.”
 운동 관련 책과 검을 다루기 위해 가져온 책은 아무래도 버려야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검술서를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음, 검을 찌를 땐 수직으로, 힘을 분산…… 그다음은 알아보기가 어렵군. 이건, 운동 방법인가?”
 그나마 몇몇 그림에서 몇 가지 동작을 이해할 순 있었다.
 “이건 검술의 기본자세인가?”
 한 손은 검을 들고 다른 손은 허리로 가져간다. 그런데 오른손에 둥근 막이 그려져 있다.
 “음, 설명 글이 없어서 이해하기가 힘들군. 아깝지만 버리자.”
 운동과 검술서 두 권은 버리기로 했다.
 “내가 마법사여서 그런가, 하늘은 내게 마법서만 남겨 줬군.”
 난 잘 말리고 있는 부여 마법서와 마법 생물서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옆에 칼과 지팡이를 내려놓고 앉았다.
 물속에 입구라……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물이 가득 들어가 동굴 속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닫히면 밖에선 입구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입구는 감쪽같이 없어졌을 것이다. 설사 땅속을 판다 할지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차원이란 같은 공간에 위치하지만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잊자, 잊어. 미련은 빨리 버려야지.
 난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누웠다.
 다행히 하늘은 푸르군. 그런데 싸늘한걸? 가을인가?
 태양을 보니 오후 같았다. 물에 젖은 몸과 옷이 마르며 냉기가 스며들었다.
 “제길!”
 옷이 없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일단 젖은 옷을 벗었다. 바람이 불어와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하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군.”
 아쉽게도 아직은 라이트 마법밖에 할 줄 모른다.
 난 말리고 있는 부여 마법 총론을 바라봤다.
 “제발,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마법이 있기를…….”
 물론 그런 마법이 있더라도 당장 사용할 순 없다. 난 아직 1서클도 이루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익혀야 할 형편이다.
 어떤 마법이 있는지 알아야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익힐 수 있기에 책을 쭉 잃어 내려갔다.
 “히트 마법이 있군. 좋아!”
 1서클 마법 중엔 공격 마법이 없다. 그러나 생활에 유용한 마법은 많이 있다. 그중 히트 마법은 대상의 온도를 올려 주는데, 추운 지방에서 난방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다.
 나는 계속 책을 훑어봤다.
 “부여 마법 총론이라더니, 전부 부여 마법뿐이군. 하지만 제법 유용한 것이 있어.”
 몸의 힘을 증가시키거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부터 검의 날카로움이나 돌의 단단함을 상승시켜 주는 것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오, 수중 호흡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도 있네? 하지만 3서클이군. 2서클 책인 줄 알았는데.”
 난 눈앞에 있는 넓은 호수를 바라봤다.
 저곳엔 물고기가 많을 테니 수중 호흡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거야. 3서클이라…….
 유시의 아버지로부터 알게 된, 강제로 서클을 올리는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난 곧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
 난 두 손을 쭉 뻗으며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내 자신을 다스렸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일단은 의식주가 먼저야. 식량이야 호수와 숲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만, 날씨가 좀 싸늘하니 집을 먼저 구해야 해. 옷은…… 당분간은 그냥 이걸 계속 입어야지. 그리고 맹수나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니, 호수 곁을 떠나선 안 되겠어.
 위험하면 물속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물고기를 식량으로 삼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주변을 둘러보자.”
 난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호수는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사방엔 나무와 풀이 많았다. 그런데 나무의 배치가 이상하다.
 “마치 8각형의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무는 호수의 8각형 지점에 있었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가 너무 멀어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호수 주변을 크게 돌면서 나무의 위치를 기억했다.
 호수는 달걀 모양이었고, 역시 커다란 나무가 8각형의 모서리에 심겨 있었다.
 “인위적인 냄새가 나. 주변에 마법사라도 살고 있는 것일까?”
 8각형은 주로 마법진에서 쓰인다. 그래서 나는 마법사를 떠올렸다.
 “어?”
 그때 난 이곳이 내가 살아온 곳과 다른 것을 느꼈다.
 “마나가 쉽게 느껴져!”
 그렇다. 강하게 집중해야 느껴졌던 마나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 마나 고갈에 대한 연구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그렇다면, 이곳은 마나가 풍부하다는 것인가?
 내가 아토 마법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미래엔 마나가 점점 고갈되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걸음마 단계지만…… 그나저나 마나가 많다면 내겐 다행이다. 어쩌면 며칠 이내에 1서클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라.
 맞아, 그러고 보니 내 몸을 얼렸던 관에 마나를 모이게 하는 마법진도 있다고 했어. 그래서 5천 년 동안 잠들다 깨어난다면 몸속에 마나가 제법 쌓여 있을 것이라 했었지!
 내가 1서클에 오르지 못한 것은 몸속에 1펨토의 마나를 쌓지 못해서다. 재능이 없는지, 마법에 대한 이론적인 것은 남들보다 쉽게 이해하지만 직접 몸으로 하는 것은 더디다. 특히 마나 쌓기는 더욱더 그랬다.
 나는 당장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거나 식량을 구하는 것보다 주변과 몸속의 마나 양을 확인하는 것이 더 급했다.
 내가 포용할 수 있는 마나 양은 약 0.6펨토, 하지만 마나가 풍부하다면 1펨토를 넘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1서클의 마나를 모아 심장에 서클을 만들 수 있어 몸속의 마나는 서클을 만들면 사용할 수 있을 테고.
 서클은 마나를 원형태로 변형시킨 다음 심장의 둘레에 걸친 것이다. 그래서 1서클을 이루기 위해선 마나를 포용할 수 있는 양이 1펨토가 돼야만 가능하다.
 일단 1서클만 이루면 마법사로서 얻는 것이 매우 많다. 서클이 주변의 마나와 공명해 주변의 마나를 쉽게 느끼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양이 매우 커지게 되는 것이다. 즉 포용할 수 있는 마나 양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클에 약속의 언어를 새겨 주문으로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도 5분 이상 걸리는 라이트 마법을 단 몇 초 만에 펼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서클이 없어 1펨토 미만의 마나로 1서클을 돌릴 수 있을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가능해진다.
 난 주변의 마나를 느끼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집중했다.
 바람이 불어온다. 고작 나뭇잎 하나를 움직일 정도로 약한 바람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마나가 숨어 있다. 나는 그 마나를 쉽게 느꼈다.
 역시 마나가 풍부해. 그럼 마나를 안아 볼까?
 나는 바람처럼 느껴지는 마나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내게로 와라, 내 품에 안겨 봐. 너희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줄 테니 내게 안겨 봐.
 마나를 부른다. 그러면 마나는 내 의지, 내 생각에 반응해 내게 안긴다. 이런 과정 때문에 마나를 감당할 수 있는 양을 안을 수 있는 양, 혹은 포용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 정도면 1펨토가 아냐, 대략 2펨토는 되겠어. 역시 내가 있던 곳보다 훨씬 마나가 풍부해.
 나는 바로 내게 안긴 마나를 심장으로 인도했다.
 심장의 모양은 원의 모양, 그곳을 너희의 안식처로 내줄 테니 그곳에 안식해. 앞으로 나가지 말고 그곳에서 살아. 기한은 내가 죽을 때까지야.
 나는 의지와 생각으로 마나를 심장으로 이끌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마나는 왜 심장을 좋아할까?
 아직 학계에서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여러 마법사가 심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서클을 이루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성공했다 할지라도 마나의 효율이 떨어졌고 마법의 성공률도 매우 낮았다. 그리고 마나의 실패는 시전자에게 타격을 준다. 심하면 영원히 의식을 잃어 죽는다.
 마나가 내 심장을 감싼다.
 그래, 그곳이 바로 너희들이 있을 곳이야.
 심장이 힘차게 뛰는 것이 마나에게 신고식을 하는 것 같다. 이에 마나는 알았다는 듯 심장 속으로 들어갔다가 안에서 맹렬히 돈다.
 그때 몸속에 쌓인 마나와 심장 속으로 들어간 마나가 공명하자 심장 속에 마나가 쌓이기 시작했다.
 1서클을 이루면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것이다. 서클을 이루는 과정에서 마나가 심장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서클일수록 더 크게 나타난다. 그래서 심장에 모인 마나만으로도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1서클을 이루면 1펨토 마법을 대략 열 번 정도는 구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1펨토는 마법을 시전하는 데 가장 적은 마나 양, 그래서 1서클 마법 중엔 3펨토까지 마나를 소모하는 마법도 여럿 있다.
 마법을 사용해 심장의 마나를 소진하면 서클은 또다시 주변의 마나를 끌어 온다. 그래서 서클을 이루어야 비로소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다.
 윽!
 갑자기 심장이 아파 온다. 마치 누군가 손으로 심장을 강하게 누르는 것 같다. 하지만 서클을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배우기론, 1서클 땐 그리 많이 아프지 않다고 했다. 아마 몸속에 쌓인 마나가 심장 속에 들어가 응축됐기 때문에 더 아픈 것 같다.
 고서클일수록 이때 겪는 고통이 커진다더니, 만일 9서클을 이루면 심장이 터져 죽는 거 아냐?
 실제로 죽은 마법사가 있다. 그래서 고서클을 이룰수록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심장을 압박하는 힘이 서서히 옅어지며 이에 고통도 줄어들었다.
 휴우, 그럼 서클을 이룬 것인가?
 심장 둘레에 압축된 마나로 이루어진 서클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속에 마나가 쌓여 있다. 마나는 서클에 막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일단 난 심장 속에 쌓인 마나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가져 보는 많은 양이어서 어느 정도가 쌓여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통 1서클을 이루었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마나가 모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몸속에 아직도 마나가 남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1서클이기 때문에 몸속의 마나를 모두 흡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서클은 의지와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마법 주문을 외면 내 의지를 마법의 주체인 피지플래시에게 전달해 준다.
 “빛이여, 세상에 나타나 어둠을 밀어내거라. 라이트!”
 나는 내가 진짜로 1서클 마법사가 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라이트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심장에 있는 마나가 서클을 돌며 내 의지와 생각을 담아 약속의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이 문장이 피지플래시와 약속된 언어였다.
 나는 혹여나 잘못 될까 봐 서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서클에 문장을 새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해 봐서일까?
 “윽!”
 갑자기 심장이 죄어 왔다.
 실패다. 다행이라면 1서클은 실패해도 몸에는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해 보자!”
 누구나 처음부터 1서클을 이루었다고 바로 마법을 성공하는 건 아니다. 나 또한 그렇다. 난 천재가 아니니까.
 “빛이여, 세상에 나타나 어둠을 밀어내거라. 라이트!”
 난 또다시 마법 주문을 외웠고 집중하며 서클의 움직임을 제어했다.
 “윽!”
 그러나 또 실패했다.
 아무리 1서클 마법은 실패해도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지만, 계속 그러면 무리가 간다. 그래서 보통 다섯 번 정도 실패하면 하루를 쉰다. 하지만 난 약 10여 번을 실패해도 계속했다. 약간 무리하더라도 하루빨리 1서클 마법을 부리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열다섯 번째 도전.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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