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제 : 매미의 꿈
제1장 십억 번의 곡괭이질
버릇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째서?”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쓰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
벌써 한참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혀끝을 살짝 깨물어보았다.
비릿하지만 익숙한 피비린내.
그제야 꿈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그 느낌이 너무 어색한 것이 굉장히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만 같다.
“……여기는 어디지?”
어딘지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기억해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와 벽에는 걸린 그림들.
더없이 호화스럽고 넓었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생전 집을 가져보지도 못했지만, 이렇게 호화스러운 곳을 본 기억도 없었다.
멍하니 있는 그에게, 하녀들 셋을 동반한 집사인 듯한 자가 다가왔다.
“주인님, 일어나셨군요.”
집사의 말이었다.
사내는 당황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집사는 평소에도 그러했던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행정관님과 기사 분들이 주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셨습니다.”
사내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남자들 여럿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신기한 듯 사내의 얼굴과 몸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대공을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바르가스 백작님의 위대한 업적은 마법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때까지도 사내는 상체만 일으킨 채 침대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몸이 굳어서 움직일 생각도 않는 것이다.
그는 기사들과 집사의 말을 흘려들었다.
무관심하게, 무표정하게 사내는 앉아만 있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모든 것에 신기해하는 것처럼.
‘마법이라고? 위대한 업적?’
다행히 그들은 무관심해 보이는, 혹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듯 멍하게 보이는 그를 향해 몇 마디 말을 더 쏟아내고 방에서 나갔다.
“그럼 백작님, 편히 쉬십시오.”
“늘 그랬듯이 종을 치시면 바로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집사들과 하녀들까지 사라지고 나서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하녀들이 세숫물을 대야에 담아 가져다놨지만, 사내가 보기에는 마실 물 같았다.
사내는 물이 담긴 대야를 두 손으로 들었다.
묵직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 팔,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바르가스 백작……. 내가 백작이라고?’
사내는 따뜻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제온.
그의 이름이었다.
지금의 몸이 아니라, 그의 기억에 존재하는 자신의 이름.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가 처음 붙여준 이름이다.
제온은 가난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곱 형제 중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3살에 상인에게 은전 3개에 팔렸다.
그때 상인이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네 목숨 값은 은전 3개면 충분하겠구나.”
마치 거세된 남자처럼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운명을 결정지어준 한마디였으니 도저히 잊지 못한다.
은전 3개라면 4인 가족이 아껴서 여섯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상인이 데려간 곳은 어느 탄광이었다.
“여기서 열심히 일한다면 자유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가족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썽부리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해라.”
그 말을 믿었다.
그곳의 인부들이 하는 일은 갱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광석을 캐내는 일이었다.
제온은 그중에서도 특수임무조에 편성되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한다는 특수임무조.
그렇게 탄광 안으로 들어가게 된 그날 이후로는 세상구경을 하지 못했다.
달과 별, 풀벌레소리.
탄광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볼 소도, 들을 수도 없었다.
다른 자들은 흙과 돌을 밖으로 나르기 위해서 외부출입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운이 좋다면 밖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잠을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특수임무조는 그 모든 게 불가능했다.
잠은 물론이고 용변과 식사도 갱도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가축처럼 지내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땅속 깊은 곳에서 하루 종일 광석을 캐내야 했다.
그게 전부였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곡괭이질을 하고, 겨우 허기를 때울 만큼의 식량으로 근근이 버텨나가는 비참한 인생.
공기가 부족해 숨 막히는 나날이 이어졌다.
성실히 일하면 자유를 주겠다던 상인은 그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특수임무조에 속해 내려오는 사람은 있어도, 수십 년간 단 한 명도 세상에 나가지는 못했다.
한 번 내려오면 영영 세상과는 단절이었다.
“죽은 시체라도 이곳에서는 나갈 수 없다.”
누군가가 말했다.
제온은 그 사실을 광산에 들어온 이후로 알았다.
사람이 죽으면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굴 어딘가에 묻어야 했다.
하늘이 보고 싶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해가 떠 있는 환한 세상을 보고 싶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소한 것들이 살아가는 목적이 되었다.
몇 년간이나 곡괭이질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땅속이라 해가 뜨고 지는 걸 보지 못했기에 알 길이 없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였다.
하지만 가끔 한 끼만 줄 때도 있었다. 그것마저 거를 경우도 있어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최소한 20년.
제온이 버텨낸 시간이었다.
과도한 일과와 굶주림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사이에도 묵묵히 광석을 파냈다.
아무리 파도 끝이 없었다.
곡괭이질만 10억 번은 했으리라.
신참들이 들어와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고는 했다.
그들의 나약한 정신을 비웃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지옥 같은 삶을 빨리 끝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약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설움. 죽는다면 날개를 가진 새로 태어나서 자유로이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다고 했던 죠르쥬 할아버지. 그분은 원하시던 대로 새로 태어나셨을까?’
사내는 상념을 털어냈다.
추억을 되새기고 감상에 빠지는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현재에 적응하는 게 우선이었다.
사내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아다녔다.
오른발을 옮기고, 그 다음에는 왼발을…….
뒤뚱뒤뚱
몸이 바뀌어서 걷는 것이 살찐 오리처럼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러다가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본 경험도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거울이 무언지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곧 사물을 비추어주는 물건이란 걸 깨달았다.
자의식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사내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너무나도 어색해서 한참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정말로 나란 말인가?”
웃음이 절로 나왔다.
훤칠한 키에 근육이 적당히 붙어서 균형이 잘 잡힌 완벽한 몸매였다. 조각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몸이다.
얼굴은 또 어떤가.
단연코 세상에 몇 안 될 미남이었다.
또렷한 오관에 짙은 눈썹, 피부는 갓난아기처럼 곱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라고는 갈색 눈밖에 없었다.
물론 눈을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다.
제온이었던 시절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어서 자신의 눈 색깔을 알 수 있었다.
“후후.”
사내는 웃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바르가스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백작이라면 귀족 중에서도 고위 계급이다.
백작의 하인들만 해도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던가!
평민들과는 태생부터 다른 게 귀족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축복받은 인간이 귀족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바르가스 백작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래의 바르가스 백작이 나타나서 그의 자리를 위협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마법이라고 했나?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루었다라고 했지.’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저들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인해 제온은 바르가스 백작이 되었다.
사내는 기쁨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 제온이 백작이 되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본래 바르가스 백작에게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많을 터.
언제라도 자신이 바르가스 백작이 아니라 제온이라는 사실을 발각된다면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은 극히 위험했다.
마치 호랑이인 척하고 호랑이 굴에 들어온 셈이다.
백작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나 격식도 모르고, 눈치를 보아하니 바르가스 백작은 대단한 마법사였던 것 같은데 자신은 마법도 하나 모른다.
그럼에도 마음은 편안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동안 처절하고 비참한 삶을 견뎌왔다.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그에게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잡고 싶었던 기회가 지금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한줄기 희망이라도 있으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
사내는 웃었다.
웃으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깥세상의 공기가 너무도 맑았다.
사내는 머리맡에 놓인 종을 쳤다.
몇 초도 되지 않아 하녀들이 나타났다.
“네, 부르셨어요. 바르가스 백작님.”
“부르셨습니까, 바르가스 백작님.”
바르가스 백작님.
사내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녀들의 목소리도 무척이나 고왔다.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꽤나 괜찮은 미색을 지녔다. 하기야 백작가의 하녀이니 조금은 다를 것이다.
“배가 고프다.”
“예, 지금 바로 아침을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하녀들은 진수성찬을 차려왔다.
전부 처음 보는 대단한 음식들이다. 메인 요리만 해도 다섯 가지가 넘었고, 해산물들은 신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기에도 화려했지만 냄새는 더더욱 좋았다.
식탁에 앉은 사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흠, 별로 맛이 없어 보이는군.”
사내는 거만하게 말했다.
백작이라면 본래 이 정도 음식은 태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뱃속에서는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었다.
하녀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차린 게 겨우 이 정도냐?”
“송구스럽습니다. 치우고 다시 준비해 올릴까요?”
“아니다. 됐다. 기다리기도 귀찮은데 그냥 먹도록 하지.”
숟가락을 들어 입으로 옮기는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나도 맛있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음식에 달려들어 마구 해치우고 싶을 정도였다.
사내가 나름대로 품위 식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와구와구
하녀들은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럴 수가.’
‘어떻게…….’
‘인간이 아니야.’
맛없어 보인다고 핀잔을 주었던 그는 차려놓은 음식들을 싹 비우고도 모자라 몇 번을 추가 주문해서 음식을 해치웠다. 주방장이 너무 놀라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네년들이 미친 것 아니냐!”
백작을 위해 만든 음식을 하녀들이 따로 먹어치우는 줄 알고 의심을 한 것이다.
직접 요리를 들고 나온 주방장은 백작이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는 걸 확인하고 씩씩하게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음식이 정말 맛있긴 맛있나 보군! 오랜만에 깨어나신 백작님이라서 식욕이 좋으신가 봐. 더 분발해야겠어.’
사내는 꾸역꾸역 음식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배가 부르고 두 볼이 잔뜩 부풀었음에도 결코 그치지 않았다.
‘정말 맛있군.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이 있었다니…….’
육체적인 허기는 이미 면한 뒤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음식을 접해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끝없이 먹고 싶었다.
언제 그가 이토록 맛있고 고급스런 음식을 먹어보았겠는가.
‘맛있다. 맛있어. 빨리 먹어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꼭 음식은 씹어야만 하는가.
그냥 쓰레기통에 담듯이 쏟아 부을 수는 없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한참을 먹어대던 사내는 두 손을 식탁보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앞으로 매일 먹을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제온.”
물론 혼잣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힘겹게 일어났다.
웬일인지 처음보다도 더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배도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하녀들이 그를 보는 시선도 조금 이상했다.
하기야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미친 돼지처럼 음식을 쓸어 담았으니 정상으로 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떳떳했다.
‘이래서 귀족이 좋은 것이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라도 하녀들은 감히 이견을 달지 못하거든.’
과연 하녀들은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근한 소문은 퍼질 것이다. 백작의 식탐이 어마어마했다고.
허기를 채운 사내는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서재로 향했다.
제온은 딱히 다른 재주는 없었지만, 평민으로서는 흔치 않게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광산 안에서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다. 육체가 고될수록 뭔가 소일거리를 찾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황폐해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죠르쥬에게 글을 배웠다.
사내는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보다가 시선이 마법과 관련된 책들이 꽂혀 있는 곳에서 멈추었다.
보통 사람의 서재라면 이런 책들이 흔하지 않겠지만, 바르가스 백작은 마법사이다 보니 마법에 대한 책들이 많았다.
마법의 이해.
마나의 구성원리.
사내는 그 책들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우선은 마법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제온으로서는 접근조차 못해본 미지의 힘.
전생의 그는 가난하고 약했기에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불현듯 치밀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제온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착오가 생겨서 기억이 바뀐 것일 수도……. 바르가스 백작, 그게 진짜 나이고 나머지는 착각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지 않은가.
마법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서 기억 자체가 이상하게 바뀐 것일 수도 있다. 제온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르가스 백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법을 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군. 뭐라고 써놓은 거야?”
책을 든 채 사내는 푸념했다.
몇 번을 읽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마법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나라는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을 익혔다면 마나 홀에 형성된 마나 서클이란 걸 느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벽에 걸린 검을 가져와 뽑아보았다.
스르릉
미끄러지듯이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복도에 있던 호위기사 한 명이 달려 들어왔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아무 일도 아니다.”
호위기사는 암살자라도 나타난 줄 알고 놀라서 달려온 모양이다. 하지만 검을 뽑은 사람이 사내인 걸 보고 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기사가 물러가고 난 뒤에, 사내는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천장을 향해 꼿꼿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호흡을 멈췄다.
‘내가 제온이라면…….’
쏴아악
검이 아래로 내리쳐졌다.
익숙하지 않은 몸.
하지만 익숙한 휘두름.
손에 든 물건은 달라도 동작 자체는 수 억 번 반복했던 곡괭이질과 흡사했다.
검이 매섭게 내려오다가 정점에서 힘을 폭발시키고 그대로 멈추었다.
광석을 캐는 일은 세밀한 힘의 조절을 필요로 했다. 지급되는 곡괭이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부러지면 손으로라도 파내야 했기 때문이다.
검을 한 차례 휘둘러본 걸로 충분했다. 몸은 몰라도 머릿속에서는 예전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무래도 제온이 틀림없는 거 같군.’
바르가스 백작령을 이끄는 네 명의 기사와 행정관이 한 자리에 모였다.
롤랑, 라비슈, 카슨, 렌달.
행정관의 이름은 슈웨인이었다.
그들은 활짝 웃으며 술잔을 나누었다.
그러다 롤랑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제 백작님께서 깨어나셨으니 우리 영지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군.”
“정말 대단한 일이야. 내가 기사라서 마법 쪽의 일은 잘 모르지만, 정말로 공전절후할 업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우리 백작님이 아니라면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일이지.”
렌달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암 그렇고 말고. 헌데 나는 그래도 반신반의했지 않았던가.”
“후후.”
“아마 직접 보지 못한 이상 그 이야기를 믿는다는 건 무리일걸세.”
“그래, 이제는 조금 믿을 수 있겠군. 정말 우리의 백작님은 놀라워. 나는 예전에 백작의 실험을 한 번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로…….”
롤랑의 말에 라비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어허, 그 얘기는 웬만하면 꺼내지 않는 게 좋겠네.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것이 좋지. 세간에 백작님께서 흑마법에 빠지셨다는 안 좋은 소문이 퍼져 있는 마당에 괜히 쓸데없는 오해를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실수했군. 다른 영지로 나쁜 소문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좋지 않겠지. 세상은 지독한 난세니까.”
파라하 제국과 크레젠 제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무려 50년간을 끌어오던 두 제국간의 대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그 결과 양대 제국은 몰락하고, 대륙을 유지하던 질서가 무너졌다.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야 할 시기.
하지만 각 국가들은 서로를 향해 어금니까지 드러내고 싸우고 있었다.
영지들끼리의 분쟁도 격화되었다.
이제 힘이 있는 자가 정의다.
전쟁의 시대, 영웅의 시대.
한 명의 절대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혼란은 수그러들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바르가스 백작령만큼은 평온했다.
인간 중에 최초로 8서클을 개척하고, 그 이론을 정립했다는 위대한 대마법사 바르가스가 머무르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제2장 사자는 울지 않는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것.
하지만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게 있었다.
바로 하늘이었다.
창밖으로 푸른 하늘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이다!”
사내는 어린아이처럼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결코 광산의 갱도에서는 느낄 수 없던 시원한 바람.
사내는 지상에 올라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해가 뜨고 구름이 유유히 흘러갔다.
하늘이 변하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아침이 되면 해가 떠오르고, 점심에는 강렬한 태양이 지상을 비춘다. 구름이 유영하듯 떠다닌다.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낙엽이 바람에 따라 춤을 추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내는 하늘을 보며 감동하고 말았다.
밤이 되면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으니 이보다 더 신기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마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르가스 성에서 인구 4만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마을 중앙의 분수대를 기준으로 바둑판처럼 쭉 이어진 집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마을 뒤편으로 끝없이 이어진 것만 같은 비옥한 농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백작인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땅이었다.
사내는 창밖으로 두 손을 뻗었다.
두 손 안에 성이 있고, 마을이 있고,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하늘이 있었다.
‘제온으로 보지 못했던 하늘. 그 하늘을 지금 바르가스 백작으로 보게 되었다.’
하녀들과 집사들은 창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바르가스 백작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백작님이 왜 저러시지?”
“몰라. 우리가 어떻게 백작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어?”
집사는 하녀들을 입단속 시켰다.
“쉿! 마법사들의 행동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실험체로 쓰이고 싶으냐?”
“아, 아니에요.”
마법사의 실험도구로 쓰이면 오크와 성관계를 가져야 하고, 가고일의 알을 낳는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이 일반인들 사이에는 꽤나 신빙성 있게 믿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백작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하여라. 아마도 하늘을 무너뜨리려는 어마어마한 마법을 창조하시려나 보다.”
집사는 확신을 가진 듯이 말했다.
조든 바르가스.
현재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50대의 장년인이며 동시에, 바르가스 백작령의 남방 여섯 개 마을을 다스리는 소주인이었다.
지금 그는 불신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데고른, 정말로 큰 아버님이 깨어나셨단 말이냐?”
“정말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조든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럴 수가!”
조든이 놀라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내인 헤레니아가 들어왔다.
“여보, 소식 들었어요?”
“들었다오.”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암, 그렇다 마다. 그 늙은 괴물이 잘난 척하는 꼴을 봐야 하다니 정말로 역겨운 일이구나.”
조든은 탄식했다.
그리고 그들 부부의 놀라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몰래 살피고 있는 데고른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조아렸다.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멍청한 자들! 내가 이들을 믿고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바르가스 백작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든의 책사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조든은 그릇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데고른은 그의 믿음을 사기 위해 20년이나 온갖 수고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그의 야망은 더욱 멀어진 듯했다.
“여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헤레니아의 물음에 조든이 답했다.
“그가 깨어난 게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탐탁치는 않으나 그 늙은 괴물을 만나러 가봐야겠군. 내가 인사를 가지 않는다면 안 될 말이긴 하지.”
“정말 그 늙은이는 죽지도 않는군요!”
“여보, 당신도 가겠소?”
“전 싫어요. 당신이나 가세요.”
“하지만 당신이 가지 않는다면 그 노물이 우리 집안에 어떤 제약을 가할지도 모르오.”
“흥, 하라면 하라지요!”
헤레니아는 그렇게는 말했지만 내심으로는 켕기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세 딸을 데리고 가세요. 엘르는 그가 많이 귀여워해주었으니까 꼭 데리고 가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가능한 빨리 돌아오세요. 전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책사 데고른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남편으로서의 조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조든 바르가스. 바르가스의 성이 필요한 거겠지. 그나마도 사라진다면 지금의 호화스런 삶도 꿈결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테니까.’
감격한 조든은 헤레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인사만 하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기왕이면 우리의 금제도 풀어달라고 요청해보세요.”
“그건…….”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정 안 되면 엘르를 그 성에 머물게 해서라도…….”
“한 번 말은 해보리다.”
며칠을 지내는 동안 사내는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라스틴 바르가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이었다.
세상에 위명이 자자한 마법사이며, 고위 귀족이다.
그럼에도 휘하 기사들이나, 병사들에 대한 장악력은 부족한 듯했다.
집사나 하녀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은 말로는 존경과 충성을 맹세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일례로 백작인 그가 산책을 나가는데도 기사들은 고개만 까딱할 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너의 기사이고 봉록을 받고 있으니 맡은 바 임무는 다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긴 마법사라는 자들이 워낙 독특한 면이 있어서 보통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법이지.’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과 너무 친밀한 사이라면 그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챌 수도 있었다.
지금 누리는 풍족함은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깨져버리고 만다.
‘나는 라스틴이다. 라스틴 바르가스 백작.’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도 부족했다.
문득 라스틴은 크게 소리쳤다.
“하녀!”
근처에 있던 하녀가 곧바로 뛰어와 그 앞에 시립했다.
“분부하세요, 백작님.”
라스틴은 짐짓 화난 척하며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메, 메르핀입니다, 백작님.”
백작이 하녀의 이름을 묻는 것은 벌을 주기 위함일 가능성이 컸다.
“네가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시험해보려는 것인데, 너는 내 가족관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느냐?”
“예! 물론이지요, 백작님.”
메르핀은 잔뜩 긴장해서 대답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꼭 네가 모르고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저 생트집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메르핀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보였기에 이러나 싶었다.
중요한 점은 백작이 그녀를 벌주기로 결정했다면 잘잘못을 가릴 것도 없이 무조건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메르핀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라스틴이 말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아라. 잘 알고 있다면 상을 주도록 하지.”
“예, 백작님께서는 혼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분도 없으시고……. 가족으로는 동생분이 계신데, 성함이 제크로 바르가스님이십니다. 하지만 제크로님은 5년 전에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라스틴은 약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생이라면 당연히 자신보다는 나이가 적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생이 노환으로 죽었다면 대체 자신은 나이가 몇이란 말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바르가스 백작의 나이이겠지만 어차피 스스로를 백작이라 생각하자고 했으니 별 차이는 없었다.
메르핀의 말이 이어졌다.
“제크로님의 자제분이 두 명 있지만 백작님과 그들과는 썩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한 분은 혼인하여 영지를 떠나셨고, 한 분은 영지의 남부 마을들을 몇 개……그러니까 다섯, 아니 여섯 개 다스리고 있습니다.”
메르핀은 너무 긴장한 탓에 말을 더듬었다. 이제 눈물까지 뚝뚝 흐를 지경이었다.
“현재 백작님에게 가장 가까운 분이라면 제크로님의 아드님이신 조든 바르가스님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남부의 벤슬 지방을 떠나지 못하는데, 흐흑…… 그래서 평소에는 자주 뵐 기회가 없습니다.”
“왜 평상시에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지?”
“백작님께서 영지 남부의 벤슬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라스틴은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지만, 하녀 메르핀에게는 어떻게 빌미를 잡아서 벌줄까를 연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더한 것은 공포심이었다.
순간 바르가스 백작에게 따라다니는 수많은 부정적인 소문들을 떠올리고는 메르핀은 죽을상을 지었다.
“그건 저도 잘……. 백작님께서는 조든님을 원래 싫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든님의 자제분이신 카를님은 현재 성에서 기사수업 중입니다.”
조든 바르가스.
이제 50대에 접어든 장년의 야망 넘치는 사내였다.
현재는 바르가스 영지의 남부에 있는 여섯 개의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작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거의 유배해놓은 것처럼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동생 제크로가 죽은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는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카를이 성에서 기사수업을 받고 있었다.
라스틴이 점심을 먹고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 쿵쾅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 소음을 낸 당사자들이 나타났다.
아리따운 세 명의 아가씨와 눈매가 치켜 올라간 인상의 장년인이다.
‘아버지인가? 그리고 저들은 내 가족?’
라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가족이란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헐값에 상인에게 팔렸을 때에도 가족을 원망하진 않았다. 일가족이 전부 굶어죽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선택이었기에 자신이 부모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아버…….”
하지만 그의 말은 중간에서 끊겼다.
장년인이 증오와 질투,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던 탓이다.
심중의 큰 충격을 받은 듯한, 그리고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눈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바르가스 백작님. 쥬첼라예요.”
“힐리아가 백작님께 인사 올립니다.”
“엘르가 백작님께…….”
세 여인이 그를 향해 인사했다.
그들의 얼굴은 서로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마치 한 자매처럼.
‘누나인가? 아니면 여동생?’
그새 충격을 갈무리한 장년인이 정중하게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조든 바르가스가 위대하신 바르가스 백작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조든 바르가스!
하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조카이다.
백작령을 분할통치하고 있는 중요 인물이기도 한 바르가스 백작이 미워하는 대상.
하기야 그의 동생이 노환으로 죽었는데, 아버지가 아직까지 살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
실망감에 라스틴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왔느냐.”
그러자 조든은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큰아버님은 늘 저를 그런 식으로 보셨지요. 과연 오늘도 변함이 없으시군요. 제 딸들도 보고 있는데 너무하시네요. 그렇게나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별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미안, 아니…….”
라스틴은 사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과의 말이 나오는 순간 조든이 너무 크게 놀라서 그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마치 평생 사과의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바르가스 백작에게서 사과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리라.
라스틴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앉거라.”
“예, 그러지요.”
“너희들도 와서 앉아라.”
라스틴은 그들을 자리로 인도했다.
조든이 앉자 세 딸도 차례대로 자리를 잡았다.
조든은 일부러 눈짓을 해서 엘르를 상석에 자리한 라스틴의 가까이 앉도록 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큰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시죠? 못 뵌 사이 정말 많이 달라지셨군요.”
엘르가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 나도 그렇단다.”
라스틴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렇게나 곱고 아리따운 여자가 체향이 풍길 정도로 지척에 앉아서 말하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엘르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천사 같은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 인형처럼 아름다웠음에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때로 보여주는 눈빛에 담긴 호기심과 그녀가 풍기는 선한 느낌 때문이라고 라스틴은 생각했다.
반면에 쥬첼라와 힐리아는 어딘가 모르게 약삭빠르고 교활한 느낌을 주는 게 외모만큼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제온이었을 때는 다들 천사처럼 아름다워서 눈길을 떼지는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도 쥬첼라나 힐리아는 아름답게 보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하루 종일 그녀들의 얼굴만 구경해도 좋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전부터 제가 어깨를 주물러드리는 걸 좋아했는데, 오늘도 어깨를 주물러드릴게요.”
“그, 그래 주겠느냐?”
예전부터 좋아했던 일이라고 하니 거절도 할 수 없었다.
엘르는 그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꾹꾹 어루만져주었다.
시원한 느낌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 정도라면 한 번 해볼 만하지.’
조든은 라스틴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준비해둔 말을 꺼내기로 했다.
“큰아버님, 바르가스 성에는 별일 없지요?”
“물론이다.”
라스틴은 영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쥐뿔도 아는 게 없었지만, 아는 척해야 했다.
‘설마 별일이야 있었겠는가?’
어차피 지나가는 말이었으니 조든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바르가스 성도 그렇고, 우리의 영지도 그렇고 아주 평화롭습니다. 모두 백작님의 은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라스틴은 겸연쩍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가 한 것은 없었다. 바르가스 백작으로 깨어나서 실컷 먹고 자고 한 게 전부였으니까.
조든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가스 영지는 평화롭습니다. 정말로 이곳보다 평화로운 곳을 찾아보라면 대륙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정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발전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있고 백작님의 무관심 속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백작님이 하시는 건 마법 수련이 전부죠.”
처음에는 칭찬이었지만 이내 추궁하는 어조로 바뀌었다.
조든의 격앙된 음성이 이어졌다.
“우리의 아버님을 생각한다면 백작님께서 이러실 수는 없는 겁니다. 제크로 바르가스님! 그분은 훌륭한 통치자의 자질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통치에는 관심도 없는 백작님 때문에 영지를 물려받지 못하고 평생을 쓸쓸하게 지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식인 저는……! 휴우, 벤슨은 너무나도 답답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스틴은 껄끄럽기도 했지만, 자꾸 말을 돌리는 듯한 태도 때문에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흥, 모르는 척하실 셈입니까? 백작님, 이제 그만 우리의 금제를 풀어주시지요. 리하프 왕국령의 수도에서는 바르가스 백작령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수도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제가 다스린 여섯 마을에서 거두고 있는 세금은 계속 제 것으로 해두어야 할 테고 말입니다.”
“흠.”
라스틴은 갈등했다.
수도로 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면 그렇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가족이 아니겠는가.
여섯 마을에서 거두는 세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가족이 바라는 일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때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엘르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 그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요.”
“엘르,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는데 넌 끼어들지 마라.”
“석년에 아버지께서 백작님의 보물을 훔쳐다가 팔아버리지만 않으셨어도, 백작님께서는 결코 우리 가족에게 벤슨을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닥쳐라!”
조든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엘르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말을 중단시키고 싶었지만, 라스틴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들썩였다.
어쩌면 라스틴은 엘르가 일부러 이를 노리고 어깨를 주물러준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와 아버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번에 수도로 가시면 바르가스 백작령의 남부에 있는 여섯 마을에 대한 소유권을 팔아버리고 다른 곳의 귀족 작위를 사실 거라면서요?”
“네, 네년이! 백작님, 거짓말입니다. 저년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입니다!”
조든이 격앙되어 소리쳤지만, 오히려 그것은 엘르의 말이 사실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스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런 것도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귀족 세계의 추악한 면을 본 것만 같아서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엘르의 나긋나긋한 손이 위로라도 하듯이 그의 목과 어깨 사이의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었다.
잠시 후 눈을 뜬 라스틴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너는 벤슨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나오지 마라.”
“백작님!”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도록.”
조든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가 이내 곧 체념으로 바뀌었다.
“알겠습니다. 애초부터 큰 기대도 안 했지요. 백작님께서 언제 우리를 아껴주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야 말이죠. 건강한 모습을 보니 더 이상의 인사는 필요 없겠군요. 그럼 저희들은 가겠습니다.”
라스틴이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조든은 콧김을 씩씩거리면서 딸들을 데리고 나갔다.
복도에서, 조든은 그의 막내 딸 엘르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망할 년!”
“집에 돌아가면 앞으로 1년간 기꺼이 화장실 청소라도 할 테니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엘르가 애교를 부렸다.
막내딸인 그녀는 쉽게 다른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는 재능이 있었다.
조든은 홧김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때리지는 않았다. 대신에 조금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너는 벤슨으로 돌아갈 필요 없다.”
“네?”
“여기 바르가스 성에 남아라. 그래서 어떻게든 저 늙은 노물을 설득해서 우리의 금제를 풀도록 해라.”
“아버지 그것은…….”
“안다, 네가 내 일에 그렇게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이 일을 마치기 전에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만약 3년 내로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면 아버지와 자식의 연을 끊겠다.”
자신이 할 말을 마치고 조든은 돌아서버렸다.
“멍청한 년, 촌년이라 평생 이런 시골에서 썩고 싶은 거지?”
“넌 정말 바보짓을 한 거야.”
그녀의 두 언니 쥬첼라와 힐리아도 조금의 미련 없이 그녀들의 아버지를 따라 가버렸다.
혼자 남은 엘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라고 왜 조든의 뜻을 모르겠는가.
사나이로 태어나서 수도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행복해지기를 그녀도 물론 바란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이 좋지 않았다.
라스틴 바르가스 백작은 위대한 마법사다.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지위인 백작을 넘어섰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대마법사의 호칭을 가진 사람이다.
주변의 대국들이 리하프 왕국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바르가스 백작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 마당에 조든과 헤레니아가 수도로 간다?
좋은 먹이다.
권력에 굶주린 들개들에게 던져진 맛좋은 먹이.
영악한 귀족들은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들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조든은 스스로가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수도의 노회한 귀족들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온갖 속임수와 배신 속에서 몰락하고 말리라.
‘그래도 우리는 벤슨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잖아요. 조금만 욕심을 줄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것은 엘르의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이었다.
엘르가 온 이후로 성에는 활기가 넘쳤다.
식사를 할 때에도 라스틴은 혼자가 아니라 그녀와 같이하게 되었다. 종전처럼 폭식을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남들의 두세 배는 먹는 라스틴이었다.
엘르는 그가 먹는 걸 보면서 웃기도 했고,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서 먹기 편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의 눈빛은 부담스러웠다.
잔뜩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
때때로 그녀는 라스틴에게 부탁하고는 했다.
“큰할아버지, 제게 마법을 보여주시면 안 돼요?”
“글쎄다.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구나.”
라스틴은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을 외면했다.
뭐라도 펼칠 줄 알아야 마법을 보여주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라스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나는 제온이다. 바르가스 백작의 행세를 할 수는 있어도 결국 그가 되지는 못해. 백작과 나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그가 하늘이라면 난 땅이지. 평생 땅이나 파고 살던 제온.’
그러나 엘르는 활짝 웃었다.
“네, 그럼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마법으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요? 저는 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대마법사로 불리는 게 정말로 자랑스러워요.”
라스틴은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뜨끔했다.
조든이 엘르를 놔두고 갔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붙임성 좋은 그녀가 싫은 건 아니나 지금의 상황은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이렇게 존경심을 보여주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진짜 바르가스 백작을 향한 것이었다.
특히 마법을 보여 달라고 조를 때에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도 마법이 어떤 건지 궁금했다. 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진짜 바르가스 백작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병사들을 불러서 그를 잡도록 지시할 것이다. 바르가스 백작을 내놓으라고 울며 매달릴지도 모르지.
바르가스 백작으로 깨어난 이후 가슴을 가득 채웠던 희망!
그것은 서서히 사라지고, 압박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백작이라는 엄청난 직위가 점점 현실처럼 느껴지면서 자신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는 자괴감.
‘어차피 나는 가짜에 불과해.’
라스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사!”
“예, 백작님.”
“네 이름이 뭐지?”
“프레호입니다.”
프레호의 눈에 의혹이 가득 찼다.
평소에 대하던 태도와는 좀 달랐다.
이전에는 거의 이런 식으로 그를 부른 적이 없었다. 이름을 물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일체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백작이었다.
혹자들은 바르가스 백작의 유일한 취미는 마법 연구이고, 유일한 친구는 마법이라고도 했다.
집사!
프레호를 부르는 명칭은 그걸로 족했다.
이제라도 이름을 물어보니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섭섭해야 할지 프레호는 알 수 없었다.
라스틴이 명령했다.
“프레호, 식사를 차려와라.”
“옛? 방금 전에 드셨는데요.”
“나도 안다. 내가 먹었지 않느냐?”
“…….”
“다시 차려와라. 더 먹고 싶다.”
프레호는 입을 떡 벌렸다.
‘대체 배에 아귀라도 들어 있단 말인가?’
백작가의 주방장 정도 된다면 하루에 만드는 음식의 양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시간은 재료의 상태를 점검하고, 다른 요리사들을 가르친다.
백작과 그의 일가족이 먹을 음식만 만들면 되니 최대한 미각을 돋우는 음식들로 모든 정성을 쏟았다.
바르가스 백작은 다른 일가족도 없으니 더더욱 지금까지 할 일은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방장이 앓아누울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십인 분.
웬만한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양의 음식을 먹어대더니 또 음식을 주문했다.
프레호는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라스틴은 마음껏 음식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세상에 나온 이상 그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늘을 보고 싶다는 일생일대의 소원.
비에 흠뻑 젖어보고 싶고, 마음껏 먹어보고 싶은 음식들도 많았다.
제온에게는 무척 많은 인생의 목표들.
눈을 떠보니 그것들은 이루어진 후였다.
다음의 목표가 없었다.
여자?
제온이 어릴 때부터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던 여자애보다도 아름다운 여인들을 손만 뻗으면 얼마든 취할 수 있다.
돈?
평생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가짜임이 발각되기 전까지 마음껏 먹고 마실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가슴에 품었던 포부는 하나하나 잊어갔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들도 지금 와서는 쓸데없는 일로만 여겨졌다.
하늘을 뭣 하러 본단 말인가?
그가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하늘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다.
새가 날아간다. 또 다른 새가 날갯짓을 한다. 새들이 홰를 치면서 떼를 지어 이동한다.
하나도 신기하지 않았다.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마음이 죽으니 열의도 죽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나, 전부 할 수 있게 되니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하하하하! 가득 따라라.”
라스틴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렇게도 달짝지근한 맛이 있었단 말인가?
음식만 맛있는 게 아니었다.
목구멍으로 화끈하게 타고 들어가서 전신을 나른하게 만드는 술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내로서 한 번 빠져볼 만한 것이었다.
실컷 마시고 취하고…….
적어도 광산에서 지낼 때 꼭 바라던 일을 한 가지는 이루었다.
술독에 빠져 죽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연병장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이 훈련을 할 때다.
절도 있는 움직임과 패기 넘치는 병사들의 모습들.
그들은 검을 들고 라스틴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백작님께 충성을!”
“백작님을 뵙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혈기가 치밀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울렸다.
“좀 더 빨리 달려!”
“창을 들 때는 무게 중심을 낮추고, 사람이 아닌 말부터 노려라. 말에서 떨어진 기병은 무섭지 않아!”
기사들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라스틴도 힘껏 고함을 질러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는 병사들.
그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격려해주고 싶었다.
스스로가 진짜 바르가스 백작이 된 듯한 기분이라고 할까.
‘내 주제에…….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광부 제온일 뿐이다. 아서라. 네가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지.’
가슴이 뜨거워질 때마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더욱 열심히 술을 찾게 되었다.
“하하하!”
라스틴은 웃었다.
그러나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술을 마시다보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눈물을 흘릴 때가 있었다.
그의 뜨거운 가슴을 식혀주기 위해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
‘안 돼, 제온아. 너는 발각되고 말 거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결국 너란 놈은 이렇게 먹고 마시다가 죽는 수밖에 없어. 네 주제에 백작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라스틴은 힘껏 고개를 저었다.
‘백작이란 자리는 한없이 높은 자리. 내게는 꿈도 꾸지 못할 자리다. 그들과 나는 태생부터 달라. 그저 마지막 죽기 전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마음껏 놀고 마시고…… 그러다가 죽는 거다. 잘 먹고 죽어야 때깔도 좋은 법이지.’
생을 향한 강렬한 의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라스틴은 오랜만에 정원을 걷고 싶었다.
나비가 나풀거리고 꽃향기가 풍기는 정원.
술에 취해서 충혈 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정말 오랜만에 저녁이 아닌 낮에 일어났다.
밤새 술을 마시고 쓰러져서 자던 게 한동안의 일상이었는데, 몸이 제온이었던 시절은 물론이고, 얼마 전에 깨어났을 때와도 달랐다.
군살이 찌고, 팔과 다리의 근육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술독에 빠져 기름진 음식만을 찾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후.”
스스로가 살이 쪘음을 인식하며 라스틴은 정원을 거닐었다.
오늘도 햇빛이 쏟아지고, 공기는 맑았다.
갱도에서는 도저히 접할 수 없는 풍경.
하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큰할아버지, 나오셨어요?”
그가 자주 다니던 길목에서 엘르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동물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엘르구나.”
“산책하기에는 정말 좋은 날씨네요.”
“내 생각도 그렇다. 그런데 안고 있는 녀석이 참 예쁘구나.”
캬앙!
라스틴은 고양이인 줄 알고 손을 뻗어 만져보려다가 깜짝 놀랐다. 날카로운 이빨과 눈의 광채가 살아 있었다.
엘르가 안고 있는 것은 바로 사자였던 것이다.
아직 어린 새끼 사자.
“이런…… 지온. 못써! 이분은 바르가스 백작님이란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야.”
“지온이라니……. 그 사자의 이름이더냐?”
“네, 예쁜 이름이죠?”
엘르의 말에 라스틴은 기분이 묘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지온과 제온, 비슷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사자는 어디서 났지?”
“숲에 정찰을 나간 병사들이 가져다주었어요. 혼자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걸 구해왔데요. 지금은 상처가 거의 다 나아서……. 봐요, 멀쩡하지요?”
엘르는 새끼 사자의 몸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상처가 있었던 자리로 보이는 곳에서 짧은 털이 돋아나고 있었다.
새끼 사자는 엘르가 만져주는 줄 알고 팔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렇구나. 그런데 사자라고 해도 어린 사자라서 그런지 귀엽군. 좀 통통한 걸 빼면 고양이와 별로 차이도 없겠어. 그래도 커서는 용맹해지겠지?”
“지금도 충분히 용맹해요.”
“후후, 네 품에 안겨 있는 걸 보니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라스틴과 엘르는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때마침 엘르의 눈에 염소들이 우리 안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엘르가 제안했다.
“이 새끼 사자를 염소들과 싸움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염소가 이기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당연하지 않느냐. 사자라고는 해도 아직은 어리다. 몸집도 작고 이빨도 다 나지 않았을 시기. 그에 비하면 염소들은 다 커서 발로 밟기만 해도 네 귀여운 사자는 죽어버릴 거다.”
“과연 그럴까요?”
엘르는 살짝 웃더니 새끼 사자를 염소 우리 안에 넣었다. 라스틴이 미처 제지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크하앙
새끼 사자는 포효했다. 그러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오던 염소들은 제 풀에 놀라 펄쩍 뛰었다.
사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위협하자, 염소들이 도망치기 위해 날뛰며 발광했다.
그 광경에 라스틴은 감탄했다.
“어려도 사자는 사자라는 말인가. 하지만 발톱은 없을 텐데.”
“맹수는, 특히 사자는 날카로운 발톱이 없으면 무는 힘이 더 강해져요. 발톱이 없다고 얕보다가는 큰코다칠걸요.”
“그러면 이빨마저 뽑아버리면? 그러면 더 이상 공격할 무기가 없으니 사자가 지겠구나.”
“몸으로라도 들이받겠죠. 뾰족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본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과연 그럴까?”
고집스럽게 의문을 표시하는 라스틴에게 엘르는 조용히 웃으며 우리 안을 가리켰다.
“지금 그 결과를 보고 계시잖아요.”
“이런 그렇구나!”
“사자가 날카로운 발톱이나 뾰족한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백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정말 강한 건 그들의 혼이지요. 사자는 늙고 병들어서 자신의 심장이 멈출 때에도 절대로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랍니다.”
“그래도 인간이 길들이면 유순해지지 않느냐. 네가 저 지온이라는 녀석을 길들인 것처럼.”
“거친 숲으로 돌아갈 때까지 힘을 비축해두는 것뿐이죠. 사자의 야성만큼은 죽지 않을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보고 위세나 떨 뿐이지.”
“풍족한 음식과 적이 없다고 자기 자신이 사자라는 걸 잊는다면…… 그럼 저 녀석은 사자가 아니라 돼지나 염소겠죠.”
라스틴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엘르는 말을 이었다.
“숲이 있어요. 그 숲에 사자 한 마리가 들어오면 모든 게 변하죠. 이전까지 왕처럼 군림하던 늑대도 조용해지고, 여우나 사슴 같은 약한 동물은 말할 것도 없어요. 사자는 그 존재 자체로 모든 것을 뒤흔들어놓죠.”
“너는 사자가 좋으냐?”
“네.”
라스틴은 눈을 감았다. 짙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염소들을 겁주는 새끼 사자가 보고 싶지 않아졌다.
풀을 뜯다가 조금만 강해 보이는 자가 나타나면 움츠러드는 염소가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았다.
“네가 나를 존경하는 이유를 묻고 싶구나.”
“백작님은 사자예요. 스스로 포효성을 터뜨려서 수많은 사람들의 혼을 빼놓을 수 있는 그런 분. 저는 그런 분을 큰할아버지로 두어서 자랑스러워요.”
또다시 라스틴의 가슴이 아려온다.
자기 자신이 진짜 바르가스 백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라스틴은 감았던 눈을 뜨며 엘르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 가득 그녀를 담았다.
스스로를 향한 노여움과 분노, 질시.
“나는 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못할지도 모르는…….”
“사자는 자신이 평생 사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 거예요. 그렇지만 사자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 비유는 옳은 것 같지 않구나.”
“맞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백작님은 사자잖아요.”
말로는 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고백.
‘나는 사자가 아니라니까.’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사자로 살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그렇겠지. 나도 그렇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거든.’
“사자로 산다는 건 정말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사자로 산다면,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후회하지 않겠지.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인간은 배부른 돼지가 되느냐, 아니면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가 되느냐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죠.”
‘나는 선택한 적이 없어.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어.’
“저는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인간의 가장 큰 힘은 자신 안에 있거든요. 의지 말이에요.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에 강한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라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했지만…… 그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충분히 엘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말하려는 것도 알아들었다.
조금 전 사자가 염소들을 위협하고 있을 때부터 쿵쾅대며 울리던 심장이었다.
그 심장은 자신이 염소의 심장이 되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사자의 심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라스틴은 굳게 다물어진 입을 열었다.
스스로에게 말하는 건지, 엘르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건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의지였다.
지하 세계에서 하늘을 보고 싶다는 열망을 안고 살아가던 제온의 의지.
“너는 곧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강한 사자를 보게 될 거다.”
제3장 꿈을 꾸듯,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맛있는 음식과 향긋한 술.
그것들을 끊는 것은 쉽지 않았다.
“프레호.”
“네, 백작님.”
“앞으로 음식은 빨리 먹을 수 있는 간단한 것들로만 가져와라. 더불어 앞으로 나는 마법을 수련할 테니 번거로운 일은 최대한 줄이도록.”
“알겠습니다.”
라스틴은 마법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백작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마법.
선택받은 자들만 익힐 수 있다는 마법에 도전하기로 했다.
제온이었을 때는 돈도 없었지만, 결국은 힘이 없었기에 세상에 휘둘릴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절대적인 힘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열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힘을 갖고 싶었다.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길 소망했다. 나는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반드시 마법을 익힐 것이다.
목숨을 건 각오가 대단했다.
‘더 이상 후회하며 살지 않겠다.’
라스틴은 마법에 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우선은 쉬운 책들부터 점진적으로 독파해나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마법이 멀게만 느껴졌다.
글을 배웠으니 읽을 수는 있었지만 고차원적인 학문인 마법을 쉬이 이해하기란 힘들었다.
글자는 읽고 있지만 무슨 뜻인지 거의 모른다고 해야 옳으리라.
잠시 후에 라스틴은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바르가스 백작은 성의 지하에 광대한 개인 수련장을 만들어놓았다.
몇 겹에 걸친 마법진으로 충격을 흡수하게 되어 있어서 5서클 마법까지는 안심하고 펼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마법을 익히는 데에는 최고의 장소야.’
모든 게 갖춰진 환경.
문득 이런 환경에 대한 부러움이 들었다. 하지만 곧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쓸 곳이다. 내가 쓸 곳을 부러워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물론 말도 안 되는 일.
터벅터벅 걸어가서 중앙에 앉았다.
솔직히 말해서 제온이었던 시절에는 검을 배우고 싶었다.
전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사야말로 신분을 상승시키기에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또한 곡괭이질이라는 게 도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검과 비슷했다. 그렇게 많이 휘둘러보았으니 어느 정도는 유리하지 않겠는가.
무언가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다.
곡괭이질을 했듯이 매일 3천 번 이상 검을 휘두른다면 의외로 쉽게 익힐 수 있을 듯도 하다.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선 선택한 것은 마법이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이유였다.
엘르가 그를 마법사로 알고 있으니, 그녀 앞에서 마법을 펼쳐 보이고 싶다.
사람들이 그를 바르가스 알았으니 마법을 전혀 펼칠 수 없다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간 지독하게 마나를 느끼는 데에만 집중했다.
사람이 바위가 아닌데, 한 번 자리에 앉으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이 오면 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그 외에 나머지 시간에는 오로지 마나를 느끼기 위해 애썼다.
‘마나, 너를 내 힘으로 모아서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겠다. 나는 사자가 될 것이다.’
수련을 하는 동안에도 제온이었던 시절이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잊어버려도 되는 쓸모없는 과거는 아니었다.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온 시간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인내력이 강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때를 돌이켜보면 천국과도 같았다.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숨 한 모금조차도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란 걸 배웠다.
라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힘을 갖기 위해 참는 것이다. 다시는 힘이 없어 참고 살지는 않겠다.’
그러려면 마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마나라는 것은 일주일간에 걸친 명상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를 느껴야 서클을 만들고, 마법들을 익힐 텐데 말이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라스틴이 다시금 마법서적들을 뒤적였다.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3서클까지는 익힐 수 있다. 단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뿐이다.
마법의 진정한 위력을 보이려면 4서클은 되어야 했고, 그 이후부터는 마법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평범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영역.
라스틴은 4서클 이후의 마법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지만 설마 마나를 깨닫는 첫 단계에서부터 막힐 줄은 몰랐다.
아무리 열심히 마법을 익히려고 해도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하니 헛수고였다.
마나가 무언지 알아야 마법을 배우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첫 단추부터 꿰어지지 않으니 마법을 익히는 일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그 뒤로 다시 십오일이 흘렀다. 먹고 자는 일도 최소화하고 오로지 마나를 느끼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는 정말로 암담했다.
‘정말 나는 재능이 없나? 평생 곡괭이질이나 하며 살아야 할 운명이란 말이냐.’
라스틴의 눈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무능한 자기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바르가스 백작으로 깨어나고 난 이후 좀 바뀌었을 거라 기대했는데, 세상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마나라는 것.
마법이라는 게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세상에 떳떳해질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길은 멀기만 했다.
‘구차하게 가짜 바르가스 백작이라는 게 들통 나기 전에 차라리 목숨을 끊자.’
오죽하면 자살할 결심까지 해봤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빗물에 흠뻑 젖을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만 배는 좋은 상황이지 않은가.
아직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는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붙잡았다.
엘르가 보여주었던 그 새끼 사자는 몸집이 작다고 해서 겁을 먹거나 포기할 줄을 몰랐다.
‘인간이 동물보다 못해서는 안 될 일이지.’
라스틴은 다시 명상을 통해 마나를 느끼려고 애썼다.
‘세상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운. 만물의 근원. 가장 파괴적이고 끈질긴 기운. 제기랄, 대체 그런 게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이냐?’
절로 욕설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포기할 줄을 모르는 라스틴이다.
‘딱 백일. 백일 동안 노력해도 안 된다면 마법을 익히는 걸 포기하고 검을 배우겠다.’
그러던 와중에 살포시 잠이 들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마나 하나를 익히기 위해 잠을 자지 않은 게 벌써 며칠 째였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고개를 끄떡이다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옛 광산 시절의 꿈을 꾸었다.
처음 몇 년간은 세상 모든 걸 증오했다.
광산의 실체, 특수임무조가 어떤 곳이란 걸 알았을 때는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다.
매일 내려오는 식사는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조금만 움직이면 허기에 허덕였다.
사실 그의 죽음을 호시탐탐 기다리는 자들이 없었더라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몰랐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은 처음 한 명의 자살자가 나왔을 때였다.
제온과 함께 팔렸던 아이가 열흘 만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사방이 콱 막힌 답답함과 갱도 내의 먼지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든 고통.
굶주림과 고된 일을 견디지 못했다.
그의 시신은 제온과 몇 명이 함께 구덩이를 파고 묻어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뒤 착잡한 마음에 제온은 그가 묻힌 곳으로 다시 가보았다. 헌데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희붐한 어둠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몇몇의 인영.
그들은 무언가를 손에 든 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들의 두 눈은 그 어둠 속에서 미치광이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구덩이는 심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
순간 제온은 할 말을 잃었다.
여기저기 뜯겨 널려 있는 살점들.
연체동물처럼 흐트러진 내장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킥킥킥!”
그들 중 한 명이 괴소를 터뜨렸다. 먹을 것을 눈앞에 두어서 그런지 반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랬다.
허기에 지친 그들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아이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구역질이 일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눈물이 흘렀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허나 그들은 너무도 태연했다.
“이런 또 사람이 늘었군.”
“우리가 먹을 것도 부족한데…….”
“크큭. 제온, 너도 먹을 테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온은 안간힘을 다해 겨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그가 함께 먹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실컷 배를 채운 후, 그들은 그 자리를 떴다. 남아 있는 것은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뼈뿐이었다.
“우웨웩!”
그것을 본 제온은 구역질을 해댔다. 쓴물이 올라올 때까지 전부 토해냈다.
순간 갱에 내려와서 처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죽은 시체라도 이곳에서는 나갈 수 없다.”
사실이었다.
비정하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죽은 시체라도 여길 나갈 수 없을 뿐더러, 죽은 후에는 동료들의 피와 살이 되고 말았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친 제온은 탄식했다.
“이, 이곳에서는 시신마저 제대로 묻히지 못하는구나.”
뼈밖에 남지 않은 친구의 시신을 다시 묻어주었다.
깊게, 아주 깊게.
하루를 꼬박 걸려 땅을 파고 깊이 묻었다. 다른 사람이 파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덕분에 일을 하지 못해 하루치 양식을 받을 수 없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날 이후로는 제온은 자살조차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게걸스럽게 자신의 육신을 탐할 자들을 떠올리니 죽음조차도 끔찍했다.
그렇게 살았다.
세상을 향한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제발 이 지옥에서 구해주기만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애원도 해봤다.
허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희망 없는 광산에서 광석을 캐내야 했다.
그러다 서서히 모든 걸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기하고 나니 신기하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힘들고 괴롭기만 하던 곡괭이질이 조금은 편하게도 느껴졌다.
그때부터 제온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 햇빛도 들지 않는 땅속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누구는 더 잘 입고 더 잘 먹는, 그런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한 명씩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후 서로를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가난해서 팔린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끔찍한 범죄자나, 몰락한 귀족, 감언이설에 속아서 내려온 자들도 제법 되었다.
온갖 분류의 사람들이 갱 안으로 내려왔다.
글을 가르쳐준 죠르쥬 할아버지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는 처음부터 나이가 제법 먹은 상태였다.
젊어서는 제법 잘 나가는 상인이었다고 하는데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전 재산을 잃었다.
그 후로는 산에서 약초를 내다팔며 소일이나 하다가 귀족에게 찍혀 이곳까지 끌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죠르쥬 할아버지는 제온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스승이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제온은 가장 오랫동안 탄광에서 지낸 사람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봐야 별것은 없지만 그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고, 쉴 때를 정했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특히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인육을 먹은 자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름 모를 반점들이 몸에 돋아나서 곧 죽었다.
곡괭이질을 하면 할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힘이 달린다. 병에 걸리기도 쉬워진다.
의약품은커녕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이곳에서는 작은 병도 몸을 해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그러고 보면 제온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체격이 체력 등 남들보다 뛰어난 게 하나도 없었음에도 더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사실 제온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정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을 때쯤에는 캐낸 광석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상처들도 훨씬 빨리 낫고, 피로도 빨리 회복되었다.
라스틴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또 잠이 들었구나.’
고개를 휘저으며,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아직 마나도 느끼지 못하면서 어쩌려고 잠을 잔 것이냐? 이러다가는 정말 죽음을 면치 못하겠군. 내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를 이렇게 헛되이 날려버릴 셈이냐, 제온? 아니, 라스틴?”
라스틴은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금 마나를 느끼기 위해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여전히 머릿속이 무언가로 콱 막힌 듯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뿌연 안개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마나에 대해 생각할수록 잡념이 끼어들었다.
이상하게도 광석을 끌어안은 채 온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 광석들로부터 신비한 힘이 나와서 그의 몸을 치유해주었었다.
‘마나가 만물의 근원이라니, 설마…….’
라스틴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그의 손길에 따라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아니겠지. 이건 아닐 거야. 이게 마나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시험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라스틴은 눈을 감고 느껴지는 기운을 마나홀로 인도했다.
처음에는 저항하려던 기운들이, 곧 라스틴의 의지에 따라 마나홀로 움직였다. 그에게 결코 낯선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괴롭고 힘들 때 의지했던 기운이지 않던가.
피곤할 때는 피로를 씻어주었고, 몸이 아플 때는 치유에 도움을 주었다.
그 힘과 한 몸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듯, 라스틴은 그 기운들이 공기처럼 느껴졌다.
늘 함께 숨을 쉬어온 기운.
‘정말 이건 아니겠지만…….’
라스틴은 그 기운으로 원을 그렸다. 마법학의 이론대로 서클을 만든 것이다.
천천히 형성되는 마나의 고리.
1서클에서는 가장 작은 하나의 원만을 만들면 된다.
주변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마나홀에 서클을 만드는 작업은 약 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마나를 느끼기 위해 수고했던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작업이었다.
라스틴은 허탈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정말 마나였단 말인가?”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거의 한 달간 이미 알고 있던 마나를 느끼려고 고생하면서 절망감에 몸부림을 쳐왔다.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도 해봤다.
헌데 이게 설마 마나일 줄이야.
더 억울한 것은 광산 안에서는 이 마나를 알고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게 마나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고 마법을 배울 수만 있었다면 그 지옥에서 그 오랜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서 그가 캤던 광석들에 대한 정체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마나석이었구나.’
상급의 마나석은 같은 질량의 보석보다도 훨씬 비싸게 거래가 되었다. 극상의 품질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모르긴 해도 제온은 은전 3개의 몸값에 수십만 배가 넘는 일을 해주었을 터였다. 열심히 일하면 혹시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소처럼 일만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마나석 광산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절대 세상에 풀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캐고 있는 게 마나석인 줄 알았더라면 일말의 희망조차 갖지 않았으리라.
“으으으.”
라스틴은 과거의 기억들로 괴로워하면서도 손으로는 마법서적을 뒤적였다. 복잡한 수식과 수인도 지난 한 달간 마나를 느끼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이 이미 다 외워버렸다.
알고 있는 게 맞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잠시 후, 라스틴은 1서클의 마법을 발동시켰다. 요란스럽게 손짓을 하고, 마나 홀에서 마나를 인도했다.
“파이어 볼!”
순간 뜨거운 마나가 순식간에 몸을 한 바퀴 휘젓더니 손끝으로 발출되었다.
푸슈슝
작은 불의 구체 하나가 정면으로 쏘아져나가 벽에 부딪쳤다.
크기는 조금 큰 돌멩이 하나만 했으며 삽시간에 사그라진 온기는 손이나 쬐일 수 있을 정도였다.
마법이라고 하기에도 창피할 지경이다.
1서클의 마나를 형성했다고는 해도 아직 받아들인 마나의 양은 적었다. 처음 마법을 펼쳐낸 것인 만큼 미숙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라스틴은 손을 내민 채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감격스러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바, 방금 내가 한 게 마법이…… 정말 마법이 맞는 거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마나가 빠져나가서 일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잠시 쉬고 나서 다시 한 번 파이어 볼 마법을 구현해보았다. 이번에는 익숙해져서 조금이나마 마법다운 마법이 펼쳐졌다.
불의 구체가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쭉 뻗어나갔다.
파이어 볼은 벽에 부딪치고 나서 마법진의 상쇄효과로 곧 충격 없이 사라졌지만 마법을 쓴 것만큼은 환상이 아니었다.
“내, 내가 마법을 펼쳤다!”
얼마나 위력이 강한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나.
부족한 점은 조금씩 보완해나가면 된다.
“으하하하!”
라스틴은 기쁨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서는 눈물을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그렇게 마음껏 기쁨에 빠져들었다.
바르가스 백작으로 깨어난 것보다도 더 기뻤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낸 일이었기 때문이다.
개미처럼 일하던 제온이었던 시절의 고생과 지난 한 달간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마나를 느끼고 인도해서 마법사들이나 쓴다는 마법을 사용해냈다.
위력이야 보잘 것 없어도 성공적으로 마법이 이루어졌다는 게 중요했다.
곡괭이질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며 자괴감에 빠졌던 그가 마법을 성공해냈다.
바닥까지 내려가 있던 자존심이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찾게 되었다.
“마법이…… 마법이 성공했다!”
라스틴은 감격에 찬 환호를 질렀다.
집사 프레호와 하녀들은 음식을 들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요즘 들어 바르가스 백작이 제대로 음식을 챙겨먹지 않아서 직접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물론 수련 중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 앞에 그냥 놔두고 가려고 했지만, 라스틴이 실수로 문을 열어놔 안에서 지르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들이 와서 들은 것은 라스틴이 기쁨에 겨워 외치는 소리였다.
“으하하하. 내 마법이 성공했다!”
“…….”
“드디어 내가 해냈어!”
집사와 하녀들은 침묵에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이란 말인가!
세상에서는 대마법사라고 부르면서 존중할 정도로 위대한 마법사 바르가스 백작임을 감안하면 지금 들리는 환호성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아아, 얼마나 대단한 마법이기에…….’
‘요즘 두문불출하시더니 정말 엄청난 마법을 개발하신 게로구나.’
‘드디어 하늘을 무너뜨리는 마법을 만드신 게 틀림없어.’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었다.
문에 가려 수련장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기뻐하는 걸로 봐서는 보통의 마법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백작님, 도전자가 찾아왔습니다.”
수련장 밖에서 프레호가 외쳤다.
그 소리가 라스틴에게는 모기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법 수련을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집사 프레호가 서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예, 실은 백작님께 도전하려는 자가 있어서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 도전자라…….”
프레호는 고개를 숙이느라 보지 못했지만, 도전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라스틴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었다.
요즘 들어 마법 수련이 빠른 진전을 보이고는 있다고는 하나, 이제 겨우 1서클을 마스터하고 2서클을 익히는 중이다.
그런데 도전자가 나타나다니…….
한참 동안 라스틴이 아무 말도 않자, 집사 프레호는 그의 뜻을 오해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별것도 아닌 일로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어서……. 귀찮으시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흐흠.”
라스틴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라스틴은 개인 수련장의 문을 열고, 서두르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그런 일은 굳이 내게 찾아오지 말고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대충 다 쫓아버리고 마법 수련을 해야 하니 당분간 도전 같은 건 받지 않는다고 하면 될 거야.”
“예, 알겠습니다.”
프레호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다. 괜히 새로 완성된 마법을 보고 싶어서 백작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도전자는 계속 찾아왔다.
제4장 바르가스 백작의 악명
리하프 왕성.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국왕인 게일 슈라이더 리하프 3세가 아침부터 회의를 개최한다면서 신하들을 대전으로 불러 모았다.
리하프 3세는 세간에 은둔의 왕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왕국 내에서 그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둔의 왕, 동시에 그림자의 왕이라고 했다.
리하프 3세는 대전에 모인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수도에 머무르는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숫자가 백을 훨씬 넘었다.
“마도의 길을 걷는 한 사람으로서 국왕 폐하께 더 높은 경지를 위하여 청원이 있습니다.”
대전 중앙의 마법사가 부복하며 말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양팔 소매는 덜렁거리고 있었다.
리하프 3세가 답했다.
“말하라.”
“감사합니다, 폐하. 라스틴 바르가스! 저는 귀국의 라스틴 바르가스 백작에게 도전하는 바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이를 윤허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전장의 늑대, 케이나인.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보았다.
케이나인은 대륙 5대 마법사 중의 일인이었다.
6서클의 마스터이며 전투가 벌어지는 곳만 찾아다니는 특이한 마법사.
사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높은 마법 실력의 탓도 있겠지만 그의 특이한 경력 때문이었다.
큰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면 그 어디든 어김없이 그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전투와 실전 승부에서 모조리 이기고 살아남았다.
귀족들에게는 가장 탐이 나는 자였고, 그만큼 자주 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 자가 자국의 바르가스 백작에게 도전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웅성웅성
귀족들은 일제히 놀라움을 표시하며, 주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이나인이라니……. 이름은 익히 들었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오.”
“그런데 바르가스 백작에게 도전하겠단 말이지.”
“왕이 승낙하리라 보시오?”
“나는 부정적이오. 자국의 대마법사에게 향하는 위험한 도전을 허락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적당히 핑계를 대어 거부하리라 보오.”
“역시 그렇겠지. 구태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으니. 이겨도 얻는 것 하나 없는 싸움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거지.”
그때 리하프 3세가 입을 열었다.
“케이나인 경.”
“예, 폐하.”
“마법사들 간의 대결이란 무척 위험하다고 들었다.”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저는 승부에서 싸워 이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더 높은 마학을 배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귀국의 대마법사 바르가스 백작에게 패해서 목숨을 잃더라도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평생 마도의 길을 걸어온 그대의 염원을 내가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구나.”
리하프 3세는 케이나인의 청원을 무거운 음성으로 승낙했다.
“왕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구려.”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의 평상시 행동을 보면 무언가 심상치 않소.”
“내 보기에도 그러하오.”
페이도 백작과 몰간 백작은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일이 달갑지 않았다. 왕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현재는 귀족들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왕권마저 넘보고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페이도 백작이 혀를 끌끌 찼다.
“왕의 뜻은 도전이 끝나보면 알겠지. 지금 우리가 개입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몰간 백작도 이에 동의했다.
“솔직히 왕의 뜻을 모르는 마당에 대결 자체를 무산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오. 케이나인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어쩌면 왕은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지.”
“우리 귀족들과 케이나인이 적이 된다? 그건 솔직히 꺼림칙한 일이긴 하오.”
“그럼 일단 두고 봅시다.”
라스틴은 개인 수련장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밥도 수련장에서 먹고, 잠도 그곳에서 잤다. 시간은 전부 마법을 배우고 익히는 데 할애했다.
푹신한 침대가 그리울 정도로 백작의 자리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단단한 바닥이 더욱 편했다.
라스틴은 마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남과 다른 비범한 점이었다.
그에게는 최소한 십오 년 이상 마나를 그 자체로 느끼기만 하면서 지냈던 경험이 있다. 수없이 곡괭이질을 하며, 마나를 호흡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힘 한 점 남아 있지 않을 때, 마나를 받아들여 몸을 회복시켰다. 마나는 그의 피를 돌게 하고 숨을 쉬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생각지 못한 기연을 얻었다. 마나를 서클화하면서 몸에 맞게 바꿀 필요 없이 순수한 마나를 그대로 체내에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마법이라도 서로 충돌을 일이키거나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낮아졌다. 마법 발동까지 걸리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무엇보다도 라스틴의 장점은 집요함이었다.
만약 평생 기사가 되길 꿈꾼 두 팔이 없는 사내에게 드디어 검을 쥘 수 있는 팔이 생긴다면 그는 어떤 마음으로 살게 될까.
신에 감사하고, 검을 휘두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살고 싶었던 이유이니까.
2서클의 마법들을 하나씩 익혀나갈 때, 엘르가 찾아왔다.
“어서오너라.”
라스틴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바르가스 백작으로 깨어난 이후에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그녀였다.
다른 가족들, 특히 조든은 벤슨으로 돌아가고 난 이후로도 수없이 편지를 보내 귀찮게 했다.
더스틴 백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던 게르발크는 아직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엘르가 곱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큰할아버님을 뵈어요.”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큰할아버지라고 하니 어색하구나.”
“네,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할게요.”
“그래, 성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더냐?”
“아주 편해요. 그런데 할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보거라.”
“성을 다스리는 데에 조금 더 신경을 쓰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다 큰 처녀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기껏해야 장신구를 사달라거나 혹은 보석을 가져다달라고 할 줄 알았다.
헌데 전혀 엉뚱한 말이 나오자 라스틴은 정색하며 물었다.
“성에 신경을 쓰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아무리 잘 통치되는 나라라도 그곳의 국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신하들의 마음에 간교함이 생긴다고 했어요.”
“설마 반역을 꿈꾸거나, 성의 재산을 밖으로 빼돌리는 자가 있단 말이냐?”
엘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이 자신의 것을 돌보지 않는다면 신하들이 어찌 자신의 능력을 다할 수 있겠어요?”
엘르는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나섰다면 대충 성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만했다.
라스틴은 본격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다.
바르가스 영지의 일 년 세수입은 금 2천이다.
제온이었을 당시야 감히 상상도 못해볼 어마어마한 금액이지만 백작의 영지치고는 조금 적은 편에 속했다. 다른 백작의 영지들이 연 4천 이상의 수입을 거두는 걸 감안하면 가난한 편이었다.
허나 처음부터 이렇게 궁핍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낙후된 영지 사정은 효율적인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르가스 백작 본인 때문이었다.
해마다 마법연구를 한다면서 금 천오백씩을 가져다가 써버리니 나머지 돈으로는 근근이 영지를 유지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금, 철, 은, 동, 미스릴, 마나석 등 개발된 광산도 하나 없다. 오로지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고 약간 남는 건 수출하는 게 전부였다.
무슨 일을 해보려고 해도 다른 영지에서 모든 물품을 수입해야 했으니 매해 적자를 면치 못했다.
당연히 재정적으로 궁핍하니 군사력도 강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의 숫자는 적고 기사들도 그리 수준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바르가스 영지의 4대 기사는 저마다 특성이 있었다.
젊고 강한 롤랑, 지혜롭고 차분한 라비슈,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카슨, 그에 비하면 온화한 아저씨 같은 인상의 렌달.
그중에 바르가스 영지 출신인 렌달 한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고 임시로 몸을 의탁한 고용관계였기 때문이다.
‘병사나 기사들의 신뢰가 없으니 다른 부분은 보나 마나로군.’
라스틴은 그 절로 한숨이 나올 만한 상황에 고개를 내저었다.
바르가스 성의 백작 집무실.
슈웨인은 사람들이 모인 걸 확인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럼 오실 분은 다 오신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도 바르가스 백작님의 훌륭한 치세를 통해 영지의 안전과 무궁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어 나 행정관 슈웨인은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현명하신 바르가스 백작님께서는…….”
“얼른 끝내주시오. 배가 고프니 회의를 마치는 대로 밥을 먹어야겠소.”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려는 그의 말을 끊은 것은 기사 롤랑이었다. 뛰어난 검술 실력과 화통함으로 젊은 기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자였다.
라비슈나 카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의 뜻을 나타냈다.
“우리가 들어봐야 뭐 알겠소. 대충대충 합시다.”
“크흠!”
슈웨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서두부터 자르고 들어오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성의 행정을 돌보는 다른 서기관들도 기사들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어딘가 맥이 빠져 있었다.
“그럼 각설하고, 회의의 빠른 진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안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성에서 사용 가능한 재원은 금 3백입니다. 작년 백작님의 마법연구를 위한 재료들을 구입하느라, 큰 지출을 한 이후로 아직 재정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가을 추수가 완료되면 자금의 여유가 조금은 생길 듯하고, 거기에 그동안 축적된 자금을 보태 서부 야산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그곳은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환경이라 가축을 대량 방목할 예정으로…….”
슈웨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사들은 일제히 찬성의 뜻을 밝혔다.
“찬성.”
“행정관이 알아서 하시오.”
“슈웨인 경이 잘 알아서 하겠지.”
슈웨인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농사를 지으면 빼돌릴 수 있는 금액이 많지 않다. 허나, 가축을 키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선 가축의 구입비를 높게 부풀려서 제법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을 테고, 털과 가죽을 벗기고 달걀을 판 금액은 전부 자신의 소유로 남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그럼 추수 시에 예상되는 곡식 확보량과 타 지역으로 판매 가능한 수치, 예상 판매가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영지 내에 있는 소와 말, 양 등 가축 숫자의 변동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바쁜 사람이니 대충 넘어가시오.”
“가격이야 지금도 변동되는 것인데 알아봐야 귀찮기만 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우리의 봉급을 좀 늘리는 문제인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의는 열기를 띠었다. 중구난방으로 한 명씩 떠드는 것이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한 2할 정도 늘리면 되나?”
“작년에는 1할밖에 늘리지 못했으니 이번엔 3할로 합시다.”
“우리가 바르가스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내 렌스가 녹이 슨 거 같아서…….”
“당연히 새로 하나 구입해야지!”
“렌스 구입비도 추가하시오. 살지 안 살지는 두고 봐야 알 테지만.”
“하하하.”
가장 높은 수준에서 절충점을 찾아 봉급은 3할의 상승으로 결정이 났다. 허나 그 외에도 특별수당이니 장려금 등의 형태로 실질적으로는 4할 이상의 상승효과가 있었다.
기사들과 서기관들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웅성웅성
그때였다.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러더니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
슈웨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중요한 회의 중이다. 용무가 있다면 나가서 기다려……. 앗! 백작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을 보는 순간, 슈웨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작님께서 오셨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라.”
졸고 있던 기사들과 서기관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입가로 침이 흘러내린 자국을 닦아내고 흐트러진 의복을 단정하게 고쳤다.
실내에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도대체 무슨 일로…….’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던 분인데.’
‘왠지 불길하다.’
라스틴은 비어 있는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늦었다.”
“아, 아닙니다, 백작님. 그럼 회의를 재개하겠습니다.”
하품을 하고, 공공연히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누던 이들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라스틴이 참석하고 안 하고에 따라서 분위기가 정반대로 달라진 것이다.
라스틴 바르가스.
바르가스 백작의 위엄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도 이유였지만, 뒤가 구린 자들이다 보니 찔리는 곳들이 많았다.
라스틴은 한차례 실내를 쭈욱 훑어보았다.
서릿발 같은 위엄이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가 좀 늦었으니 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결정된 바를 간략히 말해주게.”
슈웨인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에…… 올가을 추수로 생기는 자금으로 서부 야산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좋은 일이군. 그래, 어떤 식으로 개발할 계획인가?”
“그곳에는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환경이라 가축을 대량 방목할 예정입니다. 양과 소, 염소를 기르려고 합니다. 닭도 대량으로 길러볼 계획입니다.”
백작이 캐물으니 불안하긴 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자신이 따로 챙길 주머니에 어떤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슈웨인은 그렇게 믿었다. 허나 그 믿음이 깨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라스틴은 곰곰이 생각하다 불쑥 말했다.
“글쎄, 난 그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군.”
“네?”
“닭의 경우에는 달걀을 낳을 터인데, 그건 부화시켜서 기르는 닭의 숫자를 늘릴 계획인가? 아니면 내다 팔 생각인가?”
“그건…… 일단 내다 팔 생각을 하고는 있사온데…….”
“달걀의 경우에는 무더운 날씨에 한 달 이상 방치하면 상할 염려가 있어. 바르가스 영지 주변에는 대도시나 큰 마을이 없어서 판로가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길이 험한 편이라 운송하는 게 쉽지 않아. 달걀이 무슨 고가의 귀금속도 아닌데 어지간해서는 운송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겠나?”
“…….”
“그런데도 달걀을 팔겠다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군. 양의 경우에도 잘 알아봐야 해. 리하프 왕국은 날씨가 무더운 편이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가죽과 털은 잘 팔리지 않을 테지. 그렇다고 고기만 팔기에는 양은 그리 효율적인 동물은 아니야. 내 생각에 소가 우유와 가죽, 고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좋겠군. 노동력도 제공해줄 테니 말이야.”
“하지만 우유도 마찬가지로 팔기는 힘든데요.”
“달걀은 쓸데없이 가격이 비싸지만 우유는 그렇지 않지. 팔지 않고 영지의 아이들에게 주더라도 다들 좋아할 거야.”
슈웨인과 백작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설마 백작이 이 정도로 가축을 기르는 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사실 제온이었을 때 탄광에 팔리기 전까지 축사에서 돼지와 닭 등을 길렀던 경험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한몫 단단히 챙기려던 슈웨인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슈웨인, 뭘 하고 있나? 어서 다음 결정된 사안들을 말해주게.”
“예? 에…… 예, 가축을 기르는 문제는 백작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 문제는 백작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슈웨인은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았다. 자신의 부수입이 철저히 날아간 셈이었다.
“그럼 다음으로 결정된 사안으로는…… 추수 시 예상되는 곡식 확보량과 타 지역으로 판매 가능한 수치, 판매가격을 보고했고……. 예, 여기까지 회의를 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백작님.”
봉급을 3할이나 올린 일은 차마 입에서 꺼낼 수도 없었다. 오늘 결심하고 나온 듯한 백작의 기세가 사뭇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순간 서기관들과 기사들의 얼굴에 불만이 어렸다.
‘안 되더라도 말은 해보지.’
‘이러면 봉급 인상은 없던 일로 되는 건가?’
‘하는 수 없지. 다음에 백작이 참석하지 않을 때…… 다시 봉급 인상을 밀어붙여야지.’
‘영지 전체를 자기 집처럼 다루던 행정관 슈웨인도 바르가스 백작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생쥐로군.’
라스틴은 좌중을 한차례 쏘아보았다.
“아직 결정해야 할 사안이 더 남아 있나?”
“아닙니다, 백작님. 오늘 회의의 안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어서 백작이 가기만을 바라는 참석자들은 회의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마당이었다.
“그래, 그럼 오늘의 회의는 끝이로군. 우리 바르가스의 영지민들이 어찌 사는지 보고 싶구나. 무얼 먹고 무얼 입으며 살고 있는지.”
“…….”
“롤랑!”
“예, 말씀하십시오.”
“영지 시찰에 나가겠다. 준비하라.”
“그러도록 하지요.”
봉급 인상이 좌절된 것은 물론이고 느닷없는 영지시찰이라니.
평소답지 않은 백작의 모습에 기사들은 멍한 얼굴을 했다.
라스틴은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영지 시찰에 나섰다. 어릴 때 말을 돌보면서 필요에 의해 몇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때의 감각이 아직 살아 있었다.
푸르릉
처음에는 말이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목덜미를 몇 번 쓸어주고 안장 위에 오르니 고삐를 끄는 대로 움직였다.
큰 눈동자에 털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막 자란 말만 몰아본 라스틴이다. 훨씬 유순한 성격에 힘도 넘쳤다.
“좋은 놈이구나. 잘 부탁한다.”
히힝
말은 화답이라도 하듯 또각또각 기분 좋게 걸었다.
말을 다루는 것이 대 귀족답게 기품 있는 자세는 아니었지만 제법 능숙했다.
렌달은 고개를 갸웃했다.
‘백작님이 말을 탈 줄 아셨던가?’
그가 아는 한 바르가스 백작은 말을 탈 줄 몰랐다.
적어도 한 번도 말을 타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하기야 백작님이 말을 타실 일이 없었지. 매일 마법연구만 하느라 두문불출하셨으니. 나이가 많으신 분이니 내가 본 모습이 전부는 아닐 거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을 몰아보셨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라스틴은 4대 기사들을 포함해서 기사들만 이끌고 단출하게 영지를 돌았다.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고 깨끗했다.
쓰레기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길가의 잡초들마저 뽑아놓은 상태였다.
라스틴은 대로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롤랑, 내가 시찰을 나가니 병사들이나 영지민들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청소를 시킨 것 아닌가?”
“설마요. 백작님께서 시찰을 나오기로 통보하신 게 불과 한 시간 전이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무슨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찌된 일이지?”
“평상시 모습일 뿐입니다.”
시찰단을 보고 영지민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러다 어떤 꼬마 여자아이가 호기심을 못 이기고 고개를 들었다.
라스틴의 눈과 여자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얘, 얘야…….”
아이의 어머니는 기겁하면서 꼬마 아이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으아앙!”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면서 피가 흘렀던 것이다.
주변에 있던 영지민들은 그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이제 큰일났군.”
“영주님께서 헬렌의 아이를 잡아갈 거야.”
“마물의 먹이로 쓰이겠지.”
“산 채로 잡아다가 가죽을 벗기고, 몸뚱어리는 실험체로 쓰실 거야.”
“아이만 잡아가라는 법이 있겠는가? 헬렌은 좋은 여자인데…… 혼자 남을 남편인 나무꾼 한스씨만 안 되었군.”
라스틴에게는 영지민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남들보다 발달된 청각 덕분이었다. 새로운 몸은 외관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
“렌달.”
“예, 백작님.”
“평소에 내가 영지민들을 잡아다가 실험체로 쓰고 그랬었나?”
“아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악독한 영주였나? 영지민들의 피와 기름까지 철저히 쥐어짜내는 그런 욕심 많은 영주 말이야.”
“아닙니다. 백작님은 영지의 일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하셨을 뿐이지 그렇게 나쁜 영주님은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겁을 먹고 있지?”
“아마도 백작님의 악명 때문이겠죠.”
“내 악명이라…….”
라스틴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렇습니다. 좀 전에 거리에 쓰레기가 없고 깨끗한 걸 보셨지요? 바르가스 백작령은 완벽한 치안 상태를 자랑합니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헌데 저희들이 뛰어나서 치안이 좋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범죄 자체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작님을 두려워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를 두려워합니다. 특히 백작님께서는 세간에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흑마법사라…….”
“예, 실제로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 특히 백작님의 경우에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시지 않는 편이라 나쁜 소문들이 더욱 많습니다.”
렌달은 힐끗 라스틴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잘 적응되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 늙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더 어려지는 일이 있을 수 있나?
‘백작님이 흑마법사라는 게 단지 소문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렌달은 뒷말은 삼키고 말았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잡아가시더라도 부디 제 아이만은…….”
헬렌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서 싹싹 빌었다.
땅바닥에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흘러나왔지만 정신없이 비느라 알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라스틴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니.’
그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그가 멋모르고 거리에서 뛰어놀 때 귀족이 탄 마차의 길을 막은 적이 있었다.
덕분에 대신 그의 어머니가 벌을 받아 채찍을 맞았다.
등이 터지고 찢어지면서도 그를 감싸주었던 어머니.
비슷한 상황이 닥치자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내게 빌지 않아도 되니 일어나라.”
라스틴의 말에 오한이라도 든 듯 헬렌은 몸을 떨었다.
“괜찮다. 너희 모자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니 일어나라.”
하지만 헬렌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병사 두 명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라스틴은 말에서 내려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헬런의 눈동자에 진한 공포가 어렸다. 귀족에 대한 두려움, 백작의 실험체로 사용될 것이라는 상상이 만드는 떨림.
실제로 기사나 병사들, 혹은 성의 하녀들처럼 라스틴을 자주 본 사람들은 그게 단지 소문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편의에 의해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지 않았다.
특히 입이 가벼운 하녀들은 없는 말까지 지어내 바르가스 백작을 악인으로 만드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스르릉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주변을 철통처럼 지켰다.
라스틴이 그녀의 몇 발자국 앞에서 멈췄다.
“기사들은 검을 거두어라.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렌달!”
“예, 명령하십시오.”
“모녀에게 은전 여섯 개를 내려라.”
“은전 여섯 개를 말씀이십니까?”
렌달이 놀라 되물었다.
보통 금 하나는 은 열 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은 다섯 개라면 4인 가족이 일 년간 풍족하게 살고도 남을 금액인 것이다. 과거 제온의 몸값이 은전 세 개였다.
“그래, 이것은 아이를 놀라게 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와 치료비, 그리고 어머니의 모성에 감탄해 내가 주는 포상금이다. 즉시 시행하도록 해라.”
“백작님의 명이시라면…….”
“그리고 이 자리에는 이들의 동상을 세우도록 해라. 귀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사람을 업신여길 수 없도록,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다.”
라스틴은 여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말을 타고 떠났다.
“받으시오.”
“이, 이걸 정말로 주시는 겁니까요, 기사님?”
“백작님의 명령이다.”
렌달이 은전 여섯 개를 헬렌의 손에 쥐어주었다.
기사들이 우르르 라스틴과 함께 떠나자 그제야 영지민들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그들은 헬렌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 이게 정말로 은인가?”
“어서 이빨로 깨물어봐!”
“바보자식. 그건 금에나 하는 짓이고.”
“언제 우리가 금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가짜는 아닐 테지?”
“기사님이 준 건 데 아무렴 가짜이기야 하려고.”
“백작님이 은을 주시다니 헬렌네 집안에는 큰 행운이 들어왔구나!”
“거기다 동상까지 세워준다니 놀랍기만 해.”
소동이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마을의 촌장까지 급히 달려왔다.
“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허허, 이거 큰일이구나.”
하얗게 센 머리와 검버섯이 돋아난 촌장의 이목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자네들은 아직도 그 음험한 술수를 모르겠는가?”
“촌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요?”
“음험한 술수라니요?”
“어허, 이렇게 답답해서야. 잘 들어보게. 바르가스 백작님이 왜 은전 여섯 개라는 거금을 주었겠는가?”
사람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야 헬렌의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감탄해서…….”
“이런 멍청한 사람 같으니! 그게 아니야. 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나?”
“촌장님께서 무언가 아시는 듯한데 어서 알려주시지요.”
“저희들의 아둔한 머리를 깨우쳐주십시오.”
촌장은 헬렌을 보며 딱하다는 듯 설명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다네. 귀족들이 평민을 다룰 때 잘 쓰는 수법이야. 일단은 부담이 갈 정도로 많은 돈을 주어서 고맙게 생각하게 만들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간도 쓸개도 다 빼주게 만드는 거야. 그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일을 시키는데 도저히 그땐 거절하지 못하게 되지. 참으로 고명한 수법이야.”
“하지만 백작님이 굳이 우리에게 그런 방법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어차피 백작님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 하는데요.”
“누가 바르가스 백작님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까?”
“흠흠! 이 사람들이 아직도 잘 모르는군.”
촌장은 무안함에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낮게 말을 이었다.
“물론 바르가스 백작님이 내리는 명령을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할 입장이긴 하지. 그러니까 은전을 내린 건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야.”
“죄책감을 던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일을 시키실 테니 백작님도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나? 그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은전을 내린 걸세.”
“설마…….”
“아마도 자네들이 상상하는 게 옳을 것이네. 오늘 저녁쯤 병사들이 헬렌의 집으로 들이닥치겠지. 그녀를 끌고 가기 위해서 말이야. 그땐 어린 딸까지 데려갈지도 모르겠어.”
헬렌 모녀를 보고 부러워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측은함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촌장의 말을 들은 헬렌은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었다. 쥐고 있던 은전이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줍지 않았다. 마치 저주 걸린 물건을 보는 듯했다.
그때 누군가가 또 물었다.
“그런데 동상은 또 왜 세워주는 거지요?”
“이 사람아, 그게 바로 백작님의 냉혹한 점이야! 무서운 심기의 결정판이라고 할까? 헬렌 모녀가 당한 일을 이 자리에 동상을 세워둔 다음 우리에게 두고두고 보라는 것일세. 자네들처럼 머리 나쁜 사람들은 오늘의 일을 금방 잊어버릴지도 모르지 않나. 바르가스 백작님을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어찌 되는지를 동상을 보고 기억하라는 뜻이라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한기가 들었다.
약간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공감이 되었다.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작님의 눈이 붉어지는 걸 보았어?”
“너도 봤구나?”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그렇게 격앙되셨을까?”
“더 말해서 뭐해. 헬렌만 불쌍하지.”
사람들은 혀를 찼다. 잠시나마 백작에 대해 기대를 가진 자신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역시 바르가스 백작님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지. 어디 백작님이 보통 분이시던가.’
‘차라리 마법 연구만 하실 때가 좋았지. 지금 영지 시찰을 하시는 걸 보니 실험체가 더 많이 필요한 모양이군.’
‘그래도 너무하시지. 단지 고개를 들었다는 죄로 헬렌 모녀를 잡아가려고 하시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시무시한 바르가스 백작이 트집을 잡기 전에 열심히 일을 하고, 길을 치워야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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