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눈떠보니. 이곳은?
조타수 놈은 항상 변덕스럽다.
그 놈은 우연히 지나치는 갈매기를 향해 키를 돌려버린다.
때론 바다 위로 솟구친 돌고래를 한없이 따라가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끔은 멋대로 항구로 돌아가 버리기도 한다.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조타수를 윽박지르거나 타이르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조타수란 녀석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다.
혼란스런 항해.
예정된 항로, 기다리는 항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변덕스런 조타수의 운항으로
잦은 바람과 높은 파도에 휩쓸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도착하기 마련이다.
도착은 끝이 아니다.
또다시 변덕스런 조타수에게 키를 맡기고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곳에 도착하더라도.
다시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당신은 어떤 엉뚱한 곳을 향해 항해중인가?
장우성은 피시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피시방에 가득히 몰려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길드장님 오셨다.”
“우성이 형이다. 오늘도 이겼어!”
환호하는 사람들 뒤에서는 구경 온 사람들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저 사람이 장우성이구나. 그렇게 게임을 잘한다며.”
“아는 인맥도 무지 많대. 웬만한 고수들은 다 알고 지낸다더라.”
매주 수요일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게임상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성을 차지하고 있는 로안 길드. 총인원 300명의 거대 길드를 이끄는 장우성.
공성전이 벌어지는 수요일이면 40명의 정예들이 개포동의 피시방에 집결한다. 나머지는 구경을 온 어중이떠중이거나 길드의 후기지수들이다.
“우성이 형. 왜 이제 왔어. 공성전 1시간 뒤면 시작한다고. 지금 여기 모인 1군을 비롯해서 2군과 3군. 총인원 240명 집결했어.”
“그래. 알았다. 일단 접속부터 하고.”
장우성은 밀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피시방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중앙에는 특별석. 최고급 사양의 피씨와 모니터가 있었다.
이미 게임 프로그램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로그인했다. 그리고 캐릭터 창에 떠오른 검사 캐릭터를 선택한 다음 게임에 들어갔다.
장우성의 게임 화면은 따로 벽에 설치된 멀티스크린에 그대로 나타났다. 흥행성을 고려한 피시방 주인의 과감한 투자였다.
피시방 사장은 공성전이 벌어지는 날에는 아예 로안 길드에 피시방을 맡기고 휴가를 가버렸다.
“오오. 서버에 열 명도 안 된다는 지존 레벨이다.”
“아이템도 봐. 최고급들이야.”
멀티스크린을 본 사람들의 탄성이 잇따랐다. 관객들을 의식한 장우성은 평원으로 가서 오크를 상대로 스킬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평원에 있는 오크들은 갑옷도 무기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어 초보들이나 상대하는 몬스터들이다.
"취이이이익."
멋모르고 용감하게 달려오던 오크들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단발마의 비명을 남기며 쓰러져 갔다.
구경꾼들도 오크가 쓰러지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스크린에 나타난 데미지에 경악했다.
"9999다!"
"시스템이 구현하는 최고 데미지야."
방어력이 매우 약한 오크들을 상대로 나타난 데미지이긴 해도 9999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형. 그만 놀고 와요. 공성전 준비해야죠."
"알았다."
길드원들의 외침에 장우성은 성으로 귀환했다.
성에는 길드원들이 사열 횡대로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의 캐릭터는 익숙하게 그들의 중앙에 섰다.
"오늘은 누가 쳐들어오기로 했지? 도전장 확인해 봤냐?"
"돈암 길드랑 흑월 길드가 연합해서 온대요. 싱겁겠는데요."
돈암 길드와 흑월 길드. 그럭저럭 명성은 있지만 장우성의 길드에 비할 수 없이 약한 길드들이다.
"걔네들이 왜 죽으러 와?"
"몰라요. 어린 애들이 많다던데 겁을 상실한 거겠죠. 형. 그냥 밟아버리죠?"
"그래. 혹시 모르니 40명쯤만 후방에 남겨놓고, 나머지는 간만에 즐겨 보는 거야."
장우성과 길드원들은 음흉한 미소를 공유했다.
공성전. 전쟁이 활발한 게임에서 약한 자를 밟는 것은 강자의 당연한 권리이자 즐거움이다.
장우성은 공성전에 대한 부담감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길드원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어제, 그 여자 캐릭터 따라가서 뭐 했냐? 핸폰 번호라도 알려주든?"
"형도 참. 알고 보니 여장 남자였어요. 바로 죽여 버렸죠."
"쯧쯧. 악명 높이는 건 좋지 않다고 누누이 말했거늘. 그러다가 현상금 걸린다."
"헤헤. 감히 우리 로안 길드원한테 도전할 놈이 있을라고요."
시시껄렁한 농담들을 나누다 보니 곧 공성전 시간이 되었다.
로안 길드가 차지한 성 위로 두 개의 검이 교차해 떠올랐다. 공성전이 곧 시작된다는 조짐이었다.
까마귀가 세차게 우는 순간부터 공성전의 시작이다.
성 근처의 평원에는 돈암 길드와 흑월 길드가 잔뜩 모여 진을 치고 공성전의 시간이 되기만 기다렸다.
"꺄아아아아아악."
까마귀가 세찬 비명을 내질렀다. 언뜻 여성의 비명 소리를 연상케 하는 묘한 비명이다.
"나가자!"
장우성을 선두로 로안 길드의 200명이 성문을 열고 일제히 평원으로 돌진했다. 목표는 돈암 길드와 흑월 길드 연합군이다.
공성전. 성을 가지고 전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양상은 수비 측이 높은 위치와 성벽을 도움 삼아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약한 상대로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로안 길드는 역으로 평원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로. 로안 길드가 쳐들어온다!!!"
"마. 막아라."
돈암 길드와 흑월 길드는 자신들이 공성전을 신청한 것을 잊기라도 한 듯이 로안 길드의 대쉬에 당황했다.
허둥지둥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이, 로안 길드 마법사들의 마법이 두 길드가 모인 중앙에 작렬했다.
"블랙 화이어스톰."
"헬 파이어."
"메가 플레임."
검은 불꽃의 비가 내리고, 지옥의 불길이 강타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불꽃이 뒤덮었다.
"크아아아악."
유저들 중에 바닥에 드러눕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스 스톰."
"프리즈 랑스."
"아이스 포그."
화염의 데미지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에게 이번에는 빙계 공격이 가해졌다. 대량 학살의 시작이었다.
마법사들은 가진 모든 마나를 써볼 생각인지 전격 마법, 흑 마법, 정령 마법을 연달아 난사했다.
이미 두 길드 가까이 접근한 로안 길드원들은 둥글게 원을 치고 포위한 채 중앙에서 벌어지는 마법쇼를 관람했다.
무수한 마법이 한 지점에 집중해 떨어지며, 불과 얼음. 그리고 폭풍으로 분간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상뿐만 아니라 하늘도 바쁘다. 먹구름 사이에서 뇌전이 떨어지고, 삽시간에 맑게 개여 이글이글 타오르는 유성이 지면을 강타했다.
마나를 다 소모해버린 마법사들의 마법이 그치자, 살아남은 몇 명에게 검사들이 다가가 처리를 하는 것으로 싱겁게 전멸을 시켰다.
그 순간, 성 위의 교차된 두 개의 검이 사라졌다. 공성전의 종료였다. 공성전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벌어진 완벽한 승리였다.
"그놈들 참, 되게 싱겁네."
칼질 한 번 못해본 장우성은 로그 아웃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음료수 드실래요?"
옆에서 구경하던 길드원이 캔을 하나 내밀었다. 마침 갈증이 났던 장우성은 음료수를 받았다.
"고맙다."
"뭘 이런 걸 가지구요."
한 쪽 귀퉁이에 있는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드원들은 공성전 승리를 만끽하기 위함인지 메신저를 통해 무언가 활발히 이야기를 하고 있고, 구경 온 사람들은 로안 길드의 위용에 '명불허전'이라며 감탄했다.
‘후후.’
장우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벌써 몇 년째 해온 게임이다. 아직도 즐겁긴 하지만, 결국은 같은 일의 반복이란 생각에 지겨워져 갔다.
길드원, 다른 게이머들의 광적인 추앙도 이제는 부담스럽다.
‘슬슬 은퇴하고 이 생활 접을 때도 되었지.’
장우성은 쇼파에 앉아 캔을 따 마셨다. 갈증 해소 음료답게 부담감 없는 맛이 시원하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좋구나. 근데 왜 또 졸리지? 새벽 3시에 잤으니 그런대로 늦게 잔편은 아닌데, 아함. 공성전도 끝났으니 좀 자볼까?'
장우성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도 빼먹으며 피시방에 살았다. 그때부터 집에 있는 침대만큼이나 익숙해져 버린 소파였다. 눈을 감자 금방 잠이 밀려왔다.
"어라. 우성이 형 못 봤어?"
조금 전 음료수를 주었던 길드원이 화장실을 다녀와, 장우성이 보이지 않자 주위에 물었다.
"조금 전까지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소파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빈 음료수 캔만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뭐, 그럼 화장실 갔겠지."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인데?"
"근처 책방에 만화책이라도 빌리러 갔을 거야. 언제부터 형이 우리한테 보고하고 다녔냐?"
"하긴. 그렇긴 하다. 게임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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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섬.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풀 한 포기 없이 검은 돌로만 이루어진 이곳에서부터 거대한 빛의 기둥이 뻗어 나왔다.
찬란한 빛의 기둥이 하늘을 꿰뚫는 순간, 며칠 전부터 폭풍우로 거칠게 요동치던 바다는 잔잔해졌다. 그리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이 기적적인 일은, 마침 주변 바다를 항해하던 이들에게 무한한 경외심을 일으켰다. 뱃사람들은 빛의 기둥을 바라보며 경배를 올렸다.
“오오. 신이시여.”
전설을 믿는 뱃사람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섬에서는, 대륙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공입니까?”
회색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물었다.
“그래요. 성공했어요.”
푸석푸석해진 머릿결과 검버섯이 핀 손등을 보며 성녀는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그가 돌아오겠군요.”
“그럴 거예요. 하지만 지금 그를 돌아오게 만든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이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을 텐데요.”
“얽힌 매듭을 끊어줄 것입니다. 제가 아는 그라면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지 본래의 자신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잊을 수 없겠지요. 운명의 사슬로도 억제하지 못할 사람. 그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후후.”
성녀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살짝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아름답던 자태였지만 지금은 생명력이 사라진 노파의 모습이라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은 그를 믿는 모양이로군요. 과거에는 서로 적이었을 텐데.”
“적이었던 만큼, 그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발걸음은 누구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자신이 억제하지 않았다면 이미 대륙의 주인은 그였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혼란도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부디 그가 성공하기를. 더 지켜보고 싶지만 이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다음 대의 성녀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준 것 같군요.”
조용히 말을 마친 성녀는 눈을 감았다. 남자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희생은, 대륙의 모든 인간들이 모른다고 해도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성녀는 부드럽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미소가 한층 짙어지고 어느 한 순간. 성녀의 몸은 산산이 흩어져 하얀 재로 변했다.
남자는 재를 조심스럽게 긁어모아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기적이 이루어진 장소를 떠나며 조용히 읊조렸다.
“타일러 크라티. 내 필생의 적이자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 너의 검을 다시 볼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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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은 몸을 일으키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피로에 젖은 몸이 확 풀리는 것 같은 개운함이 있었다.
길드원들에게 자장면이나 시키라고 말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칠흑과도 같은 암흑의 공간이다.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기가 나갔더라도, 이렇게 어두울 리야.’
눈에 어둠이 익숙해지면 최소한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꿈인가?"
볼을 잡아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오랫동안 소통되지 않아 탁한 공기. 엉덩이에 닿아 있는 얼음처럼 차가운 바닥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장우성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곤란을 느끼면서도 청바지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자주 시키는 식당 번호가 적혀 있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라이터다.
치이익
라이터를 켜고 어딘지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눈앞에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해골이 들어왔다.
놀라움에 눈을 비볐다. 그러나 해골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보일 뿐이다.
“으악.”
놀란 장우성은 잽싸게 일어나 무작정 해골의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라이터 불빛은 춤을 추며 간신히 길을 비춰주었다.
울퉁불퉁. 평탄하지 않은 동굴 바닥 때문에 구르고 넘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지칠 때까지 달리고 나서야 장우성은 정신이 들었다. 달리던 걸음을 천천히 멈췄다.
"내려가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빙빙 돌면서 갈수록 밑으로 향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장우성은 암울한 눈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어두운 긴 통로가 놀리듯이 ‘내게 와야 해.’라며 손짓하는 것 같다.
"여기가 어딘진 모르지만 나가려면 위로 올라가야 되겠지? 여기가 지하든, 산속이든 출구는 위에 있을 테니. 휴우."
결국 라이터 불빛에 의지해 터벅터벅 해골이 있는 곳을 향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왔던 길들을, 자신이 넘어졌던 길들을 조심해서 돌아가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지며 조금씩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왜 이곳에 온 걸까? 난 분명 공성전을 마치고 소파에서 자고 있었는데, 혹시 그때로부터 몇 년쯤 시간이 지나고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이라도 온 다음 길을 잃은 것일까? 잘못 넘어져 공성전을 한 이후부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리고... 그럼 말이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장우성은 물끄러미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입었던 청바지에 반팔 티 그대로다.
청바지에는 바닥을 구르며 다친 모양인지 피가 조금 묻어 있는 것도 보인다.
장우성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야. 애들이 날 납치해서 외딴곳에 버리기라도 했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해골이 있는 곳에 다시 도착했다.
용기를 내서 자세히 살펴보니, 해골들은 다섯이었고, 모두 반대편 입구 쪽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만 유독 약간 넓은 공터였다.
"으음. 해골이다. 영화에서 많이 봤잖아? 이쯤은 아무렇지도 않다구."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되뇌던 장우성은 반대쪽 벽에 기대어 공터를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뭔가 빛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응?"
가늘게 눈을 뜬 채 해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저건... 검?"
해골들이 입고 있는, 이제는 거의 다 삭아 버린 옷들 사이로 검이 보였다. 검이 라이터 불빛을 반사시켜 눈을 부시게 만든 것이다.
“흐음.”
장우성은 나가는 것도 잊은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 호기심이 많은 성격상, 그리고 알 수 없는 상황이 그냥 내버려 두도록 만들지 않았다.
"설마, 시체들이 일어날 리는 없을 테니. 한 번 봐보자."
슬금슬금 해골에게 다가갔다. 처음 봤을 때는 느닷없이 눈에 들어와 공포에 질렸지만, 쭉 보고 있자니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죽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호기심이 든 달까?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해골의 숫자가 정확히 다섯 개임을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섯 해골은 모두 하나씩 검을 쥐고 있었다.
진작 제대로 봤으면 눈에 들어왔을 것인데, 처음에는 해골에 놀라 경황이 없어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완전히 침착성을 되찾은 장우성은 해골의 손가락을 풀고 검을 들었다.
"무겁다."
굵은 쇠막대기를 든 것 같았다. 체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장우성의 탓도 있지만 검 자체가 제법 묵직했다.
손으로 대충이나마 검집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 내었다. 알 수 없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 색 검집은 먼지를 털어내자 오랜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임에도 은은한 빛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검을 뽑자 스르릉하며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이야."
검에서는 알 수 없는 빛이 났다. 투명하게 빛나는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광채로 동굴을 은은하게 밝혔다.
"대단한 걸?"
서릿한 예기가 흐르는 검은 베고 찌르는 용도로 쓰이는 살상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 그 자체였다. 오래전 강대했던 제국의 유물처럼, 기품과 위엄을 가지고 있다.
드르륵.
장우성은 해골 쪽에서 뭔가 들리는 듯한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눈 부분이 퀭하니 비어 있는 해골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건드렸나?"
장우성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왼손에 든 검집을 해골에 가져다 댔다. 왠지 기분이 나빠 다른 곳으로 돌려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검집이 해골에 닿는 순간, 정확히 말하면 해골과 검집과 장우성이 하나로 연결된 순간, 장우성은 그대로 멈춰서 몸을 부르르르 떨었다.
검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흰 자만 보이고, 머리는 공허하게 텅 비었다. 그리고 해골로부터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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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이 있었다.
고아로 어렵게 자란 소년. 간간이 이웃집의 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연명하던 소년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기사의 눈에 발견되어 제자가 되는 것부터 시작되는 기억이었다.
소년을 데리고 간 기사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전 대륙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강한 기사이며 그 시대에 이미 전설이 된 인물이었다.
기사는 소년을 자신이 소속된 제국의 황궁으로 데려와 기사로 훈련시켰다. 소년의 기억에 그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소년은 가르침을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기사에게 한 수의 가르침이라도 받으려는 사람들을 줄 세운다면 거의 전 대륙의 인간들이 설 만큼 선망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가끔 기사가 검을 쓸 때면 휘황한 광채가 검에서 내뿜어졌는데, 소년의 눈에는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였지만, 폭풍을 가르고, 대지를 둘로 쪼개는 가공할 힘이었다.
소년은 기사의 제자로 충실하게 검을 익혔다. 기사가 직접 거두어들일 만큼 뛰어난 신체조건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진전도 매우 빨랐다.
주변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기사는 제국 기사단을 통솔하여 전장에 나섰다. 그때면 소년도 따라나서 기사의 검과 갑옷을 책임지며 무운을 빌어주었다.
기사는 승승장구. 나가는 전투마다 대승을 거두었다. 검을 휘둘러 해일을 산산조각 내는 기사의 신력 앞에 상대할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의 군대는 기사가 직접 출진한다는 소문에도 저절로 무너졌다.
소년이 제자가 되었을 때는 이미 제국은 대륙의 패자를 자처하던 시기라 끝까지 반항하던 두 개의 왕국을 몰아냈을 때에는 더 이상 적이 없었다.
전쟁의 시대는 끝나고 대륙은 제국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어 모두가 태평성대를 노래할 그 시기에, 기사는 황제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신의 유물. 제국의 패자임을 증명하는 신의 유물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기사는 제자인 소년과 대륙의 유명한 기사 친구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전 대륙을 헤매어 결국 성물이 묻힌 곳을 알아냈다.
그들은 거의 전 대륙을 휘젓다시피 하며 찾아 헤맸는데, 이 부분은 너무 많은 지형들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 고생이 엄청났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기사들은 성물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성물이 묻혀 있는 곳에는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각종 함정들이 있었는데, 기사들은 지혜와 힘으로 이를 격파해 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함정.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공간의 함정이었다.
태양도, 행성도 없는 광활하지만 텅 비어버린 우주 공간. 끝없이 펼쳐진 공간에서 소년과 기사들은 처음으로 좌절을 겪었다.
검도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허공에 떠 있는 기사들이 검을 떨쳐봐야 빈 공간을 휘젓고 사라질 뿐이었다.
신이 직접 안배해 놓은 공간에서 기사들은 무력해졌다.
가져온 음식이 바닥이 나고, 가장 허약한 소년이 먼저 굶어 죽었다. 기사가 손가락을 뜯어 피를 주었지만 소년이 한 달 이상을 버틴 것만도 기적이었다.
남은 기사들은 최후의 방책을 마련했다. 다섯 명이 가진 모든 마나를 폭발시켜 공간 자체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공간이 파괴될 때의 충격이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인 만큼 가진 마나를 전부 폭발시킨 기사들이 멀쩡하기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기사들은 무모한 시도임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겼다.
다섯 기사의 혼신의 마나가 담긴 검은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공간을 관통했다.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공간이 파괴되며 가공할 후폭풍이 밀려왔다.
후폭풍은 다섯 기사의 몸을 강타했다. 기사들의 마나가 파괴되며, 몸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비록, 공간의 함정이 사라지고 본래 있던 동굴로 다시 나타났다고는 하나, 기사들의 앞길에 놓인 것은 죽음뿐이었다. 기사들은 동굴 벽에 기대어 서서히 죽어갔다.
그렇게 기억은 끝이 났다.
"흐음."
장우성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해골을 봤다. 해골로부터 기억을 전해 받는 신비한 체험을 할 때는 섬뜩한 공포가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은근히 느껴지는 정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베슈린. 그러니까 그 소년이었나."
기사의 제자 이름이 베슈린이었다. 신의 공간에서 죽어 공간이 파괴될 당시 시체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누가 확실하게 말해주진 않았지만, 장우성은 왠지 자신이 베슈린이었던 것만 같았다.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년의 스승이었던 위대한 기사, 타일러 크라티나, 동료 기사들이었으면 폼도 나고 좋겠지만, 느낌상 자신은 딱 소년이었다.
어려서 죽어라 고생하고, 좋은 스승 만나 좀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허무하게 굶어 죽어버린 소년.
"정말 그런 것인지 좀 제대로 알려줄 것이지. 이게 뭐야."
장우성이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렸지만 해골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해골이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이 기억들이 사실이라면, 지금 새로운 세상. 아마도 전생에 살았던 세상에 왔다는 것인데. 거참."
장우성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죽은 해골이 기억을 보내준 것이 가능한 일인지,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인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보다는 당장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방금 받은 기억으로 미루어보아 이곳은 모험이 있는 세상이다. 기사와 마법사,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드래곤이 있는 멋진 세상이다.
하지만 원래 살던 곳만큼 좋은 곳도 없다. 살기에 익숙할뿐더러,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어딘지도 모르는 동굴에 덜렁 떨어진 것도 문제였지만, 당장 돈 한 푼 없으니, 인간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의식주 해결이 문제였다. 그리고...
"잘못하면 길가다 오크한테 맞아 골로 가는 거 아냐? 이건 정말 큰일인데?"
결정적으로 힘도 없었다.
게임에서는 용과 일대일 전투를 벌이다가 이젠 오크 같은 몬스터만 보면 피해 다녀야 할 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검을 수련하는 방법과, 이곳에서 쓰는 언어를 얼추 기억으로 전해 받은 점이라고 할까.
장우성은 자신이 깨어났던 장소로 가서 드러누웠다. 잘 때의 포즈 그대로 잡고 눈을 감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흘러도 아무 변화가 없다.
장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긁었다.
“역시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진 않는군. 의문은 많지만, 머리 싸맨다고 해서 해결 될 일도 아니고... 어떻게 된 것인지는 천천히 풀어봐야 할 문제다.”
혼자 말하고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과 과학의 잣대로는 현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운명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운명.
전생에 죽었던 곳. 해골로부터 기억을 받은 것. 도저히 우연으로 볼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고약한 운명의 장난. 혹은 숨겨진 진실이 존재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장우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뭐, 수련부터 하고 강해지면, 그 다음부터 세상에도 나가 보자.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문제지만, 어떻게 왔으면 돌아가는 길도 있겠지."
장우성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자신이 쉽게 말은 하면서도 불안감은 제법 들었지만, 심각한 얼굴로 해골 보며 고민한다고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맞부딪치다 보면 다 길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거기에는 대륙 최고의 기사로 손꼽히던 해골의 마나 수련법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부지런히 수련 좀 하면 어디서 맞아 죽진 않겠지'라는 최소한의 기대치와 하기에 따라서는 강한 사람이 되어 대륙을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게임을 통해 캐릭터를 키워 만족을 느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제 힘을 키워 대륙을 여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라고 고대하던 일이다.
장우성은 검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스승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해골들을 향해 절을 했다. 전생이었지만 소년에게 잘 대해준 해골들, 그리고 위대한 기사에 대한 예의였다.
"솔직히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애매하지만, 아무튼 전생에 저한테 잘 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바라시던 대로 유품은 제자리에 가져다 드리지요."
해골이 전해주었던 마지막 영상은, 자신들의 마지막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을 고향에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용의가 있었다. 내친김에 해골들을 묻어도 주고 싶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것은 원치 않는 듯했다.
절을 하고 일어나 해골들에게서 검을 하나씩 챙겼다. 모두 다섯 개의 검이었다. 검을 두 팔에 안아 들자 그 무게에 몸이 휘청거렸다.
"더럽게 무겁네."
장우성은 낑낑대면서 검을 안고 해골 옆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동굴 길은 이리저리 구불구불 이어지며 폭이 좁아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했는데, 그래도 빙글빙글 돌며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지상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심이었다.
땅과 벽에는 이전 기사들이 해체한 것으로 보이는 함정의 잔해들이 가끔 보였다.
중간에 라이터의 수명이 다해, 빛이 나는 검을 뽑아 길을 비추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유물이 있었지."
20분쯤 걸어 올라가다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렸다.
기사들이 온 목적은 신의 유물을 찾아오라는 임무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함정을 모두 해체했으니 누군가 먼저 다녀가지 않았다면 밑에는 신물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맨 처음 한참 내려가다 올라온 길을 다시 가야 한다는 점이 꺼림칙했지만, 신의 유물이 정말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버려두고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보자."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되돌아가는 길이 미세하나마 내리막이어서 그런지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는 훨씬 힘이 덜 들었다.
해골이 있는 곳을 다시 지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듯한 천연 동굴을 통과해, 2시간가량 밑으로. 밑으로 나아갔다. 검을 안고 있는 팔은 천근을 든 듯 무거워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설마 누가 벌써 다녀가진 않았겠지."
희미한 불안을 가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의 유물. 그것도 대륙의 패자를 증명하는 신물이라니까 좀 내려가는 수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뭔가 대단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기대됐다.
"다 왔나?"
앞으로, 순백색으로 곧게 뻗은 길이 보였다. 그동안 화가 솟구칠 정도로 지루하게 빙글빙글 돌던 길과는 전혀 다른 반듯한 길이다.
지금까지 온 길이 울퉁불퉁하고 험난한 길이었다면 정확히 한 걸음 앞에서부터는 매끄럽고 다듬어진 길이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길의 색깔부터 달랐으니, 한껏 기대를 품었다.
"이제 다 왔구나."
장우성은 없던 힘이 생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발걸음도 빠르게 흰색 통로를 걸었다.
통로의 끝이 점점 다가왔다. 긴 통로의 끝에는 빛이 존재했다. 밝은 것이 외부에 있어 빛나는 것이 아니라, 통로의 끝 자체가 문처럼 밝게 빛나는 것이다.
장우성은 크게 빛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파앗.
사방에서 따사로운 빛의 샤워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친 몸을 달래주듯 포근하고 안락한 기분이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장우성은 시간이 지나며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거대한 공동, 빛의 한가운데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대륙의 패자를 증명하는 신물은 바로 검이었다.
"드디어."
심장이 쿵쿵대며 빠르게 뛰었다.
이곳에 와서 한 고생이라고 해봐야 오르락내리락하며 좀 걸은 것뿐이지만, 전생의 자신과 기억 속의 기사들. 그들의 생명을 바쳐 구한 것이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장우성은 경건한 마음으로 검을 향해 걸어갔다. 평소 신을 믿거나 하진 않았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이 있다고 해도 아무 이상함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절로 신성한 마음이 든 장우성은 들고 있던 검들을 모두 내려놓고, 더러운 손도 옷에 슥슥 문질러 깨끗하게 닦은 다음에 조심스럽게 검자루를 잡았다.
우우우웅.
손 안에서 검이 가늘게 떨리며 기분 좋은 검명을 흘렸다. 검자루를 잡고 들어 올리자 땅에 꽂혀 있던 검은 아무 마찰도 느껴지지 않고 부드럽게 딸려 올라왔다.
"과연 뭔가 있어 보이는데?"
기사들의 검이 예기와 기품을 가져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면, 신검은 겸손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투박했다.
검날은 처음부터 갈려져 있지 않은 듯, 전혀 날카롭지 않았고, 예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신성한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의 전체적인 밸런스는 기사들의 검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휘두르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전혀 없으니 외견만 놓고 본다면 대장간에서 만들다 포기한 불량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은 신검이었다. 당연히 보통의 좋은 검들과는 차원이 틀린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시선을 옮기자 손잡이 부근에 세 개의 동그란 구슬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뭔가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장우성은 큰 기대를 품고 구슬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뜻이 전해졌다. 한국어도 아니고, 기억이 전해준 언어도 아니었으나 전하고자 마음 자체가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 용자여, 이 검의 이름은 루아사. 대륙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명칭이다.
무딘 검신은 대륙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며, 세 개의 구슬은 대륙을 둘러싼 세 개의 섬을 상징한다.
나의 시험을 용기와 지혜, 무력으로 이겨내고 도착한 용자여,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명예뿐일 것이니.
용자는 헛된 집착을 버리고 대륙의 수많은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힘을 쏟아다오.
장우성은 침묵을 지켰다. 검의 구체적인 기능을 설명하는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도 고대했던 말이 나타나지 않자, 다른 구슬을 눌러보았다. 반응이 없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검을 휘둘러보았다. 묵직한 검이 휘둘러지며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을 잃고 한 바퀴 돌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엉덩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장우성은 팍 미간을 찌푸렸다.
검의 기능. 특히 구슬마다의 쓰임새가 나오면 암기하기 위해 신경 쓰지 않았던 말들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해석되었다.
'그러니까 이 검은, 대륙을 상징하는. 그것도 신이 자기 혼자 마음대로 상징해버린 그런 검이고. 그래서 대륙의 패자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와전되어 전해 내려온... 기사들을 죽게 만든 함정은 헛된 집착으로 달려드는 머리 나쁘고 힘센 바보들을 처리하기 위한 것? 결국에 검은 그냥 명예를 안겨주는 무식한 쇳덩어리에 불과할 뿐?'
"어디 이런 거지 같은 신이 다 있어? 똥개 초복이만도 못하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속에서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던 신의 존재는 밥 달라고 주인 허벅지를 물어뜯던 뒷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로 격하되었다. 그것도 복날 몸보신용으로 기르던...
"크아아아아아악."
장우성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강'하고 검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공동 안에 크게 울렸다.
"야이 거지 같은 신아! 그럼 내 전생은! 위에 누워 있는 기사들은!!!"
가슴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 좋은 스승 만나 조금만 지나면 활짝 피었을 인생이었는데 하찮은 검 하나 때문에 일찍 죽어버린 전생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 분노로 변했다.
"이딴 검. 이딴 검 하나 때문에!!!"
전생의 자신과 대륙에서 최강으로 손꼽히던 기사들 다섯이 아무도 모르는 동굴에서 쓸쓸히 죽어 버렸다. 그 아까운 인생은 누가 배상한단 말인가?
실컷 농락당한 느낌이었다.
장우성은 힘껏 검자루를 걷어찼다. 검이 핑글핑글 돌아 불똥을 튀기며 바닥에 부딪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와아아아악. 빌어먹을 신아! 있으면 이리 나와 봐!"
외침은 공허하게 빈 공동을 울릴 뿐이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욕을 내뱉던 장우성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고개를 떨어뜨렸다. 거칠게 들썩이던 어깨가 점차 가라앉았다.
"후후."
장우성은 힘없이 웃었다.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전생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하찮은 검 하나 때문에 날개도 한 번 펴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억지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어차피 뭘 기대한 것도 아니잖아. 억울하지만,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만 나가자. 별로 기대한 것도 아니었잖아."
체념하며 돌아섰다.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했다.
"내가 애쓴 것도 없으니까. 전생의 일은, 전생의 일일 뿐이지."
애써 합리화하며 도로 기사들의 검을 주웠다. 좁은 동굴 안을 오래 걸어서 힘이 빠진데다가 기대가 무참히 무너져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힘겹게 검들을 안고 동굴로 들어서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이름뿐인 신검. 루아사가 땅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도 설마... 신이 만든 검인데, 뭔가 특별한 것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몬스터들이 공격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그래. 신이 아닌데 좀스럽게 일일이 기능설명을 할 리도 없고... 무슨 능력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돌아와 루아사를 주웠다. 그리 큰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정 별 거 없으면 손잡이에 있는 구슬이라도 떼어 팔아먹을 생각이었다.
장우성은 무거운 검들을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가 걸어감에 따라 검들이 '철컹철컹'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요란했던 공동은 지난 수만 년간 그랬듯이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오래된 풍경화처럼 변화가 없었던 이 장소에는 검 한 자루가 사라졌을 뿐이다.
허전함이 감돌던 공동은 곧 검이 사라진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검이 있던 자리에서는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챕터 : 회색 살육자.
놈은 무시무시하다.
거대한 앞발은 나 몸보다 큰 것 같고,
묵빛으로 번뜩이는 발톱은 강철이라도 찢어발길 것 같다.
‘크어어어어.’
놈이 포효하면 숲 속의 모든 동물이 공포에 잠긴다.
놈은 숲 속의 제왕이다.
집채만 한 몸집, 큰 몸집에 걸맞지 않는 재빠른 스피드,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 영악한 머리.
놈은 이곳의 지배자다.
피하고 싶다.
놈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러나 살기 위해 그놈을 쓰러뜨려야 한다.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
놈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 수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그놈의 뱃속에 들어갈지 어찌 안단 말인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강해지기로 하자.
@
"드디어 밖이 보인다."
장우성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울퉁불퉁한 천연 동굴 바닥은 위로 올라가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바뀌었다.
끝도 없이 하늘까지 이어진 듯한 계단을 삼천 개까지 세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세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결국은 끝이 보였다.
장우성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마음은 벌써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기진맥진한 몸에는 힘이 없었다.
기사들이 남긴 다섯 개의 검, 그리고 신검 루아사. 총 여섯 개의 검은 허리와 팔, 다리를 아프게 하는 무거운 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근만근 같은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굵은 땀방울이 계단 위로 떨어졌다.
"후욱. 후욱."
계단을 올라갈수록, 맑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시원하게 말려주었다. 장우성은 마침내 계단 위로 올라섰다.
"하아."
장우성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이 전해주었던 영상에도 잠깐 나와 있었지만, 역시 실제로 보니 장관이었다.
숲에는 키가 수십 미터나 될 듯한 나무들이 높게 뻗어 있었다. 가지들은 하늘을 모두 뒤덮을 것처럼 햇빛을 가리고, 가끔 보이는 거목들은 자연의 위대함을 알려주기라도 할 듯이 두터운 몸집을 자랑했다.
땅에는 각종 꽃들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조명처럼 이곳저곳을 번갈아 비추었다.
"정말 아릅답구나. 멋진 곳이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굴 속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아니라 깨끗하고 맑은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기도를 통해 유입되며 몸에 활력을 주었다.
"후아."
장우성은 검을 모두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검이 풀을 납작하게 눌렀다.
꼬르르르륵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힘을 쥐어 짜내주던 몸이 굶주림을 호소했다.
일단 허기부터 해결할 생각에 주위를 돌아다니며 나무 밑을 살폈다. 여러 열매들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가 워낙 높은 탓에 바닥의 열매들은 깨져 있었지만, 두꺼운 껍질이 깨지고 난 속 알맹이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일단은, 야자수 비슷한 건가?"
완전히 뭉그러진 과일이라도 곰팡이만 피지 않았다면 감사히 먹을 자신이 있었는데, 신선한 열매. 그것도 두꺼운 껍질이 깨져 먹기 좋게 벌어져 있자 감사히 열매의 안쪽을 손으로 긁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알맹이가 손 가득 퍼졌다.
조심스럽게 혀끝을 대보고는 아무 이상도 없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향기와는 다르게 맛은 텁텁했지만, 혀로 자꾸 굴리니 단맛이 조금은 느껴졌다.
"아직 덜 익은 건가 보군."
나름대로 평을 내리며 몇 개의 열매를 더 주워 먹었다. 열매를 다섯 개쯤 주워 먹자 굶주린 배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후.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한다."
검이 있는 풀밭으로 돌아와 드러누웠다. 울창하게 자란 풀들이 쿠션처럼 푹신하게 몸을 받쳐주었다.
"세상 구경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내가 너무 약하니 지금 돌아다니면 검을 뺏기고 객사하기 십상이야. 우선은 이곳을 떠나지 말고 수련이나 해볼까? 다행히 먹는 것은 그럭저럭 해결 될 듯하니..."
장우성은 주위의 나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른 곳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열매 나무가 참 많았다.
우선은 식사를 해결할 수 있으니 세상으로 나가기 전 수련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좋아. 그럼 이곳을 임시 보금자리로 삼자."
결론을 내린 장우성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기사의 유물인 검을 들고 두꺼운 거목에 다가갔다.
"자연을 훼손해서 미안하지만, 사람이 살려니까 어쩔 수가 없네. 이해해주길."
검을 뽑아 거목 깊숙이 꽂았다. 검날의 날카로움도 상상 이상이었지만, 자체로 예기를 품고 있는 검은 아무 저항도 없이 거목에 박혔다.
밀고 당기고, 검을 톱처럼 쓰며 거목의 중앙 부분을 삼각형으로 사람이 드나들 만큼 잘라내었다. 마치, 수박을 맛보기 위해 잘라낸 것처럼 거목에 패인 자국이 생겨났다.
잘라낸 나무토막을 옆에 기대 놓고, 거목 안을 깎아 내었다. 검을 대기만 해도 나무가 슥슥 잘려져 나가 오래되지 않아 거목 안을 크게 파낼 수 있었다.
조악하지만, 거목 안에 한 칸의 방이 만들어졌다. 이제 조금 전에 잘라놓은 나무토막을 껍질만 남겨놓고 손질을 했다. 문을 만드는 것이다.
"완성이다."
장우성은 거목 안으로 들어가 봤다. 어차피 자기만 할 것이기 때문에 싱글 침대 하나 정도로만 넓혀놓은 거목 속은 아늑했다. 거기에 나무껍질로 입구를 막으니 깜쪽같았다.
"약간 나무 냄새가 심하긴 하지만, 이쯤이야 뭐."
장우성은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보금자리를 만들어내느라 긁어낸 나뭇조각들을 풀 속에 잘 숨겨 놓고 거목 속으로 들어갔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온 몸이 피곤했으니 우선 쉬고 볼 생각이었다.
장우성은 입구를 껍질로 잘 막고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지친 몸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푹 쉬고 일어난 장우성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거목 안에 숨어 있었다.
무심코 나무껍질을 뜯고 나가려는 순간, 멀리 나무 사이로 회색의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장우성은 소리 나지 않게 나무껍질을 닫고 밑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밖을 살폈다.
둥그런 회색 덩어리는 한참 동안 ‘쩝쩝’소리를 내며 흐느끼듯이 들썩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1미터. 2미터. 3미터... 회색의 무엇인가가 끝없이 커지는 것에 경악했다.
'곰이다.'
회색 곰. 그리즐리 베어였다.
지구에서도 알래스카나 로키 산맥 등에 살긴 하지만, 그 크기는 1.5-2.5m가량 되는 것으로 사람보다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회색 곰은 키가 무려 8미터가량 되는 놈이었다. 높이도 높이지만, 굵기도 상당한 정도라서 2층집 한 채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회색 곰은 방금 식사를 마친 듯, 앞발톱과 입가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장우성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긴장하며 회색 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만약 회색 곰이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죽은 척하면 살려줄까?'
어릴 적 동화책에서 곰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지만, 실험양이 되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조용히 숨어 있었다.
"구워어어어."
회색 곰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더니 숨어 있는 거목을 향해 달려왔다.
장우성은 재빨리 나무껍질 문을 닫고 몸을 날려 아무 검이나 하나 움켜쥐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이면 검날도 없는 신검 루아사였다.
'끝장이다.'
몸을 낮게 웅크리고 검을 문 쪽으로 세웠다. 잘하면 한 방을 먹이고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쿵쿵쿵쿵.
육중한 회색 곰이 달려오며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나무껍질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그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온다.'
장우성의 손이 떨림에 따라 신검 루아사도 마구 흔들렸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을 꼭 쥐었다.
울림이 가까워져 옴에 따라 심장도 쿵쾅쿵쾅 미친 듯 날뛰었다.
'10미터. 7미터. 4미터. 지금이다.'
어림짐작으로 거리를 잰 울림이 바로 앞에서 시작된 것처럼 느껴지자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마지막 울림은 유난히 크고 강했다. 이제 곧 뛰쳐들어올 것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용기를 내 나무껍질 문을 쳐다보았다.
의식이 한 점으로 흐르고, 그 순간, 심장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뛰었다.
떨리는 검 끝의 흔들림으로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조함도, 긴장도 사라지고 회색 곰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회색 곰은 나무껍질을 뚫고 들어오지 않았다. 불과 영점 몇 초의 사이였지만 달려들던 속도로 봐서 나무껍질을 부수고 나타나야 하는데, 나타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때, 거목이 진동했다. 덧붙여 이상한 소리도 들렸다. 무언가가 나무를 긁어대는 것 같은 소리는 약간 위부터 시작되어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설마.’
장우성은 겁도 없이 나무껍질을 뜯어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회색 곰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회색 곰. 회색 곰이 엉덩이를 내보이며 거목을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장우성이 보는 사이에도 회색 곰은 몇 개의 가지를 지나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두터운 나뭇가지를 밟고 옆으로 달렸다.
사람의 몸보다도 훨씬 굵은 나뭇가지였지만, 회색 곰의 육중한 몸에 비하면 나무젓가락처럼 연약해 보였다.
회색 곰이 앞으로 달려갈수록 거목의 나뭇가지는 점차 얇아졌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휘어졌다.
'끊어진다.'
장우성이 생각하고 있던 마지노선을 약간 넘어, 회색 곰은 점프했다. 거의 십 미터를 치솟은 회색 곰은 반대편 거목의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점프력이었다.
회색 곰이 내려앉은 나뭇가지는 크게 밑으로 휘었지만 부러지진 않았다. 그리고 반동으로 다시 튀어 오르고... 회색 곰은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거의 동시에 위에서 나무 열매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덜 익은 열매들은 나뭇가지를 타고 달리는 회색 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휴우."
장우성은 나무껍질 문을 닫고 거목 안에 주저앉았다.
엄청난 재난을 몰고 다니는 폭풍이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장우성은 자신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무의식중에 얼마나 검을 움켜쥔 것인지 핏기가 사라진 손에는 검자루 모양의 네모난 자국이 나 있었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이곳도 안전하진 않아. 하지만, 지금 더 안전한 곳을 찾으러 다니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회색 곰 이상의 더 무서운 것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수련을 하자. 적어도 저 곰 따위는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처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검을 얼마쯤 수련해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유유자적 여행이나 다닌다는 맹랑한 생각은 접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내가 과연 지금부터 수련을 한다 해도 저 곰을 해치울 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가득 들었다.
거대한 곰의 민첩한 움직임에 완전히 기가 질릴 정도였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수련. 수련을 하자.'
장우성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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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은 주위를 살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열매들을 넉넉히 들고 아지트인 거목 속으로 들어갔다.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이상, 바깥출입은 최소화하고 수련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열매를 보기 좋게 한쪽 구석에 쌓아놓고 가만히 앉아 마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기사. 타일러 크라티가 소년을 가르치던 기억이었다.
타일러 크라티는 소년 앞에서 멋진 검무를 한 차례 보여준 뒤, 강연을 시작했다.
"마나는 형체가 없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도 있기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
소년은 의아해 물었다.
"있는데도 몰라요?"
"그래."
타일러 크라티가 소년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년은 뭘 하려나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다 설명해 줄 것이다.
타일러 크라티는 한참을 기다려 말했다.
"내 손의 감촉이 느껴지느냐?"
"예."
"다시 물어보겠다. 그럼 내 손이 정확하게 어떤 모양인지, 어떻게 네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지 알겠느냐?"
"아니요. 그냥 손이 닿아있다는 느낌이 날 뿐인데요."
타일러 크라티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닿아 있다는 느낌은 나지만, 정확한 모양 같은 것은 알 수 없다. 사람의 감각은 그렇게 예민하고 지속적이지 않다.
"어떻게 느낌이 나지?"
"무겁고, 따뜻하고. 뭐라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닿아 있다는 느낌이 나요."
타일러 크라티는 손을 떼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어깨에 댔다.
"지금은?"
소년은 어깨로 눈을 돌렸다. 타일러 크라티의 손가락이 닿아 있음을 보면서도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막 닿을 때는 느껴지는데, 조금 지나니 사라져서 거의 모르겠어요. 제가 둔한 건가요?"
"정상이다. 만약 내 손이 태어날 때부터 네 어깨에 놓여있었다면, 넌 지금 내 손이 어깨 위에 올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겠느냐?"
"아."
소년은 뭔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느껴온 감각은 저절로 익숙하게 여겨 의식하지 않게 된다. 타일러 크라티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였다.
타일러 크라티는 소년의 어깨에서 손을 치우고 말을 이었다.
"마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마나를 항상 느끼고 있다. 하지만, 마나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아주 미세하고, 또 익숙하게 받아 들여온 것들이라 마나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서는 마나를 다시 새롭게 느껴야 하고, 볼 줄 알아야 한다."
"조금 전에도 스승님께서 사용하시는 마나를 봤는데요."
"실체를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마나를 이용한 오러를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내 힘으로 실체화시킨 것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마나 그 자체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마나의 흐름, 마나의 색깔, 마나의 기질. 이런 것을 꿰뚫어 봐야 진정 마나를 안다는 단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아직 네게는 무리이니 오늘은 마나를 느껴보도록 하자."
타일러 크라티는 소년을 자리에 편히 앉게 한 뒤 등 뒤에 두 손바닥을 붙이고 마나를 넣어주었다. 마나는 소년의 몸을 여러 바퀴 돌며 자신의 감각을 소년에게 인지시켰다.
"으음."
덮어 놓고 지낼 때는 몰랐으나, 일부러 떠올리자 마나와 관련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자신이 소년이었던 것처럼, 혹은 사부였던 타일러 크라티처럼.
당시에 느꼈던 마나 감각을 완전히 인지했다. 감각 신호가 초기화된 것처럼, 장우성의 몸은 생생하게 마나를 느꼈다.
'이것이 마나로구나.'
장우성은 느껴지는 기운에 경탄했다. 느끼지 못했을 때는 모르되, 일단 자각을 시작하자 세상에 존재하는 마나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먹기 위해 쌓아둔 나무 열매, 아지트로 삼고 있는 거목에도 마나는 있었다.
마나는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에 존재하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근원이 된다.
장우성은 조용히, 깊은 호흡을 들이쉰 다음 느껴지는 마나에 신경을 집중했다.
마나를 다루는 것 중에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마나는 단순히 감지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자재로 쓰는 것은 아니다.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마나는, 자신의 몸에 있는 마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나 축적은 매우 중요했다.
장우성은 마나를 몸으로 이끌었다. 마나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준 것을 반가워하면서도 쉽게 몸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흡사 '네 빈약한 몸뚱이는 나를 담기에는 너무 부족해.'라며 비웃는 듯이 주변을 빙빙 돌며 관찰할 뿐이었다.
조바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히 가졌다. 처음 마나를 깨닫는 것이 어려울 뿐, 일단 존재를 인지하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의 문제였다.
힘이 비슷한 두 사람이 줄다리기를 하듯이 팽팽하게 맞서던 신경전은 슬그머니 마나가 몸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예견된 승리였다. 기억 속에서, 이미 한 번 축기를 해 본 경험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손쉽게 가능했다.
장우성은 체내에 마나를 받아들이며, 받아들인 마나를 가지고 체내에서 순환시켰다. 몸에 완전히 익숙하게 만들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련은 허기를 때우기 위해 주워온 나무 열매들에 곰팡이가 필 때까지 몇 날 며칠간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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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장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식량이 되는 나무 열매들을 주워 거목 안으로 넣어놓고, 신검 루아사를 꺼내 공터에 섰다.
그동안 지내며 이 숲의 생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육식 동물들은 새벽에 사냥을 한다. 요란스런 새벽이 지난 아침은 가장 한적한 시간이다.
숲에는 멧돼지와 비슷한 저돌적인 동물들이 많았는데, 장우성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보통의 동물들은 상대를 파악할 때 첫 번째로 몸 크기를 본다. 자신보다 큰 동물에게는 여간해선 잘 달려들지 않는다. 독을 품고 있는 녀석이라면 이야기는 틀리지만.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의 크기는 사람보다 크거나 비슷했다. 그러나, 동물들은 처음 보는 인간인 장우성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자리를 지킬 뿐이다.
가끔 덤벼드는 동물들은 검을 뽑으면 모두 도망쳤다. 동물들이 검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검에 담긴 예기에 본능적으로 물러가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동물들은 검을 뽑는 것으로만도 해결할 수 있었던 장우성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되었다.
다만, 회색 곰.
엄청난 박력과 몸집 앞에 검의 예기를 시험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대한 회색 곰에 비한다면 이쑤시개에 불과한 검이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달려들면 어쩐단 말인가.
날카로운 예기도 오히려 회색 곰에게 호승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다행히도 회색 곰의 덩치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멀리서 접근할 때부터 미리 땅의 울림이나 포효를 듣고 피할 수 있다.
덕분에 마음 놓고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후우우우.”
장우성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들이쉬며 검을 뽑아들었다.
“타앗.”
짧게 끊는 기합소리. 동시에 정면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자신의 힘의 60%를 발휘한 일격.
검이 정점을 지나 아래로 내려갈 때, 속도가 급격히 늦춰지더니 부드럽게 방향을 바꿔 옆으로 향했다. 장우성의 몸도 검을 따라 빙글 회전했다.
한 바퀴 돌아 나온 검이 다시 전면을 향할 때, 손은 검을 놓았다.
놓친 것인가? 아니었다.
어느새 반대편 손으로 단단히 검을 잡은 장우성은 성큼 한 걸음 전진했다. 그리고 검을 놓아버린 오른손으로 팔꿈치 일격.
파앙
응축된 힘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앞에 있었다면 성치 못했으리라.
원래는 상대방이 힘이 실리지 않은 검을 막았을 때, 검을 놓아버리고 빈틈을 노리는 기술이었지만, 막는 사람이 없어 검이 숲으로 날아갈 판이니 다른 손으로 바꿔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섯 기사들 가운데에는 체술에도 능한 론의 기술이었다.
론이라는 이름의 근육질 기사는 검뿐 아니라, 팔꿈치와 손목, 무릎, 어깨등 모든 것이 살인 무기였다.
기술도 다양하고 예측불허라서 미리 예상하지 못하면 당하기 쉽다.
특히 검을 마주치다가 불시에 터져 나오는 팔꿈치나 어깨 일격. 철판갑옷을 뭉그러뜨리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강력한 진각을 밟아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회전력이 허리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 어깨에서 폭발하는 것이다.
인간흉기 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예 멀리서 창을 찌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대충 그 위력이 짐작된다.
해골로부터 전해 받은 기억 속에는 론의 가르침도 들어있기에 주력을 검으로 하면서도 가끔 그의 기술도 연마했다.
검술을 응용한 체술 몇 가지로 가볍게 몸을 푼 장우성은 바로 검을 들고 팔자베기를 시작했다.
팔자베기. 모든 검의 기본이 되는 자세였다.
해골이 전해준 기억에 있는 검술만도 수백 가지지만, 장우성은 따로 검술을 따로 수련하진 않았다.
검술이 수백이라고 해서 전혀 다른 수백 개의 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을 가지고 저마다의 특성을 가진 검술이 완성되었을 뿐.
타일러 크라티도 직접 소년에게 검술을 지도하진 않았다. 검의 성격과 형식에 따른 장단점을 비교 설명해주고 대처방법을 스스로 찾게 했을 뿐이다.
그때의 깨달음은 기억 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 검술을 수련할 필요는 없다. 몸에 검을 익숙하게 만들 뿐.
검이 몸에서 자유자재로 놀게 될 때,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검술들이 현란하게 펼쳐질 것이다.
“타앗. 타앗. 타...”
장우성의 이마 위로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셔츠는 이미 땀에 젖어 무거워진 상태였다.
숲 속의 평화로운 새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검이 날카롭게 바람을 끊는 파공음이 이어졌다.
검이 허공에 그리는 궤적은 썩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해 수련의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헉. 헉. 힘들다.”
목표로 했던 천 번의 베기를 마치고 장우성은 두꺼운 잎을 따서 땀을 닦았다.
가쁜 호흡. 쿵쾅대며 산소를 내보내는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쉬고 싶지만, 아직 수련은 끝이 아니다. 다음 과정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
장우성은 땅에 손바닥을 문질러 미끄럽지 않게 했다. 그리고 커다란 거목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인근 숲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였다. 얼추 보이는 높이만도 백 미터는 넘는 듯싶다.
처음에는 방법을 몰라 간신히 3미터쯤 올라갔지만, 이제 거목을 타는 것은 익숙해졌다.
장우성은 나무껍질을 붙잡고 조금씩 거목을 타고 올라갔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전진하던 속도는 위로 갈수록 점차 느려졌다.
일부러 느려진 것이 아니었다. 힘이 부족했다.
나무 타기라지만 각도나 높이로 보아 난이도는 암벽등반과 비교해도 차이가 없다. 오히려 더 어렵다.
오돌토돌하게 튀어나온 돌출부들을 손끝으로 잡고 온몸을 지탱해야 한다. 불과 2-3센티 정도 튀어나온 돌출부를 잡고 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암벽 등반에서는 중간마다 쉴 곳이라도 있지만 거목에 달라붙어 쉴 수는 없는 일이다.
손가락 힘으로 체중을 견뎌내야 한다. 까딱 실수라도 한다면 아래로 추락해 다치거나 죽게 된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힘든 거목 타기인데 지치도록 한 검술 훈련에 이어 하는 것이기에 몸에는 한 줌의 힘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한 번의 내딛음. 그리고 숨을 한 번 내쉴 정도의 짧은 휴식. 그 사이에 회복된 힘으로 다시 한 번의 전진.
훈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모한 방법이다. 그러나 장우성이 선택한 수련 방법이었다.
물론, 안전한 거목 안에 앉아 마나 수련만 하더라도 제법 강해진다. 마나가 모이고 모인다면 언젠간 회색 곰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몸의 편함을 추구하자면,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마나를 수련하는 것은 스스로 나태해지기 쉽다. 또한, 마나에 걸맞는 육체를 가다듬지 않으면 제 실력을 백퍼센트 발휘하지 못한다.
완전하지 못한 몸 상태. 그리고 무기력한 정신. 언젠가는 반드시 깨어진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사지에 몰아넣고 전진하면 육체는 한계를 넘어 성장한다. 강인한 의지와 함께.
“후욱. 후욱. 여긴가.”
나무껍질이 뜯겨나간 부분에 다다랐다. 저번 시도에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표시였다.
장우성은 힐끗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땅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인다. 떨어지면 볼 것도 없이 죽을 것이다. 익숙하게 보던 광경이지만 언제 봐도 섬뜩한 높이였다.
“오늘이야말로 정상까지 오른다.”
혼신의 힘을 다한 힘겨운 전진이 다시 이어졌다.
한 치 올라갈 때마다 위태위태했다. 힘이 빠진 손은 덜덜 떨리고,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미끄럽다. 아차 하는 순간, 밑으로 떨어진다.
팔 힘으로 몸을 끌어올릴 수가 없어, 한 치씩 높여 잡으며 느리게 올라갔다.
손힘이 성하다면야 돌출부를 잡고 적당히 몸을 끌어올려 더 위를 잡아가며 오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다.
두 손을 번갈아 약간씩 높은 곳을 잡아가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지만, 대신 계속 힘을 쏟아내야 하니 최소한의 힘이 회복될 시간도 사라져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다.
‘조금만 더.’
장우성은 보다 높은 곳을 잡았다.
머릿속에서는 조금 더 위로 올라간다는 생각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깨 근육의 힘이 쥐어짜지면서 맹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한 번의 전진은 전신의 고통을 동반했다.
‘크윽. 해내고 만다.’
앙다문 입술이 터져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이미 위로 뻗은 손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려 전신이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땀 반. 피 반이다.
30여 분간에 걸친 사투.
장우성은 기존의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며, 한계라는 것은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절한 고통과 몇 번의 죽을 위험을 넘기고 난 다음이지만.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가 손에 걸렸다. 이 근방에서 가장 높고 굵은 거목이었기에 이제야 나뭇가지 근처까지 도착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오르던 장우성은 손에 걸린 나뭇가지를 발견하고 옆으로 돌아서 계속 올랐다.
나뭇가지 위에서 잠시 쉰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고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중에, 한가로운 휴식 따위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뭇가지들이 많아지면서 옆으로 도는 일이 많아졌다. 정상이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이쯤이면 이전에 올랐던 것에 비해 훨씬 많은 성과이다. 내려가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에는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 이 정도만 한 것도 대단하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리라.
달콤한 유혹이 스쳐 지나갔다.
그만둘까?
‘아니. 아직 모자라.’
장우성은 갈증을 느꼈다.
저번의 시도에 비해서 충분히 높게 올라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 1센티라도 더 오를 수 있다면 오른다. 아직 오를 힘이 남아 있다.
포기할 수 없다.
누구와도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마비된 어깨와 팔의 근육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한계를 넘게 혹사당한 미세 혈관은 툭툭 터져 피부 속이 붉어졌다. 내출혈이다.
‘한 번만 더.’
온몸에 힘이란 힘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극악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에게 소리쳤다.
한 번만 더 올라가자. 저곳까지만 올라가서 쉬자고.
장우성은 안간힘을 다해 다시 손을 뻗어 보다 높은 곳을 잡았다. 이제 다시 욕심이 생긴다.
‘이번 한 번만 더.’
다시 더 높은 곳을 잡고 올라갔다. 약간 더 전진이다.
‘난 할 수 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위로 손을 뻗어 갔다.
비명을 질러대는 몸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팔도, 의식하지 않았다.
힘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대신에 투지와 자신감이 몸을 가득 채웠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반드시 해낸다!
설혹 손에 힘이 풀려 이대로 떨어지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파삭.
그때 잡고 있던 돌출부가 부서졌다. 벌레가 숨어 있던 곳. 새가 부리로 쪼아 약해진 곳이었다.
올라가기 위해, 순간 체중을 옮겼던 장우성은 급격히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찔함. 그보다 앞선 것은 위급함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는.
반사적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거목에 붙였다. 몇 미터 밑으로 내려가던 장우성의 손이 몇 개의 돌출부를 그냥 지나쳤다. 힘이 빠진 손은 체중을 이겨낼 수 없었다.
“으아아아.”
마찰로 인해 손바닥이 불붙는 듯 뜨거웠다.
‘죽고 싶지 않다! 여기서 죽는 것은 개죽음이다! 안돼!’
절박한 상황에서 갈구하는 마음은 최후로 남아 있던 힘을 이끌어냈다. 남은 힘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온 힘을 다 끌어 썼다고 생각 했는데 아직도 어딘가 숨어 있었나 보다.
장우성은 몇 개의 돌출부를 부수며 가까스로 추락을 멈출 수 있었다.
“휴우.”
겨우 한 숨 돌리고 위를 쳐다보았다. 손에서 나온 피로 거목에 긴 선이 그려져 있었다.
‘내려갈까?’
다시 유혹이 찾아왔다. 자칫하다가 죽을 뻔한 상황이었던 만큼 유혹은 더욱 컸다. 그러나...
장우성은 피식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장우성은 자신의 피로 미끄러운 그곳을 피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혹은 온몸의 힘이 일깨워진 상태여서인지는 모르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명경지수. 청명. 이런 단어들이 어울릴까?
거목을 오르는 데 급급해 조금 전만 해도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이제 바로 근처에서 우는 새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바람 소리, 나뭇잎의 흔들림, 등을 타고 내려가는 땀방울의 시원함.
감각이 완전히 새롭게 일깨워진 것만 같다.
힘이란 힘은 다 썼으니 더 이상 힘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힘도 넘쳤다.
아니. 넘친다는 말은 적절하지 못하다.
여전히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돌출부를 잡고 올라갈 수는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가능했다.
가장 적절한 힘. 더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힘이 작용했다. 얼굴을 찌푸리며 안간힘을 쥐어짜 내지 않아도,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힘의 원천은 어디인가? 마나? 미약하게 단전에 모여 간신히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는 마나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이, 장우성은 육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힘의 순간적인 집중과, 조절. 숱한 수련을 거친 무도인이 몸의 것이 일반인과 다른 것처럼. 근육의 팽창과 수축이 최적화되어 이루어졌다. 힘의 소모도 거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억지로 힘을 끌어내, 힘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하며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이걸 더 세게 잡아야 해.’
이런 생각은 불필요한 힘의 낭비를 초래한다. 그리고 오히려 적은 힘밖에 이끌어 내지 못한다.
힘을 주지 않으면서 힘을 이끌어 내는 기(마음)의 힘을 장우성은 터득하게 되었다.
고대 무예에서 간혹 발현되었다고 하는 그런 경지였다.
전신에 힘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기에, 쓰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오로지 마음으로 오르고자 할 뿐이다. 마음은 숨겨져 있던 힘을 이끌어냈다.
미리 알고 배우려 한다면 도저히 익힐 수 없는, 천운과 노력, 의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찾아온 행운이었다.
만약, 첫 번째 유혹에서 포기하고 내려갔더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였고, 방금 전의 유혹에서 포기했더라도 이룰 수 없었다.
잠시 가만히 쉬어서, 체력이 회복되는 사이에 기적처럼 일깨워진 육체에 대한 감각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직할 정도로 위로 오르려고 하는 의지로, 육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장우성은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한결 오르기가 수월해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보다 안정적이고 편하고 빠르다.
육체의 모든 것. 손끝과 발끝에도 힘이 작용해 모든 것이 장우성의 의지 아래 놓인 것 같다. 자신의 몸을 완벽히 지배한다는 것.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상황이다.
장우성은 위로 오르면서 점점 직접 몸에 부딪치는 바람을 느꼈다.
거목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바람막이 역할을 해서 바람을 직접 맞을 수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주변의 거목들보다도 장우성이 높게 있다는 것을 뜻했다.
실제로 다른 거목들은 이미 발 아래에 있었다. 유별나게 높은 거목을 택해 올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래에 집을 짓고 살만큼 든든하던 거목도 이제는 바람에 약간씩이나마 흔들린다.
장우성은 한 뼘, 한 뼘씩 계속 위로 올라갔고, 곧 위로 손을 뻗어본 결과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장우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아.”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정상에는 탁 트인 수림이 있었다.
나무들로 이루어진 바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태양은 신선한 햇빛을 가득 뿌린다. 그리고 나무들은 우렁차게 자라 푸르른 물결을 이루었다.
대자연.
장우성도 그중 한 점이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한 점이 아니라, 정복자. 지배자였다.
죽을 것만 같은 위기와 고통을 뚫고 기적처럼 정상에 올랐다. 이곳에 장우성이 아닌 그 누가 올라왔겠는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정상에 선 그는 위대한 승리자였다.
장우성의 가슴이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드디어 해냈다!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모든 걸 이룰 수 있다! 내가 왕이다! 으하하하.”
장우성은 실컷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큰소리라도 지르지 않는다면 가슴 속의 무언가가 분출되지 못해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강해지기 위한 수련? 좋다. 그런데 해서 뭣하나?
누구보다 강해져야 하고, 누굴 아래로 무릎 꿇려야 하나.
다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위대한 자연.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
해낼 것이라 굳게 다짐하면서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줄곧 의심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은 이루어내었다. 이때의 만족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늘도 땅도 모두 발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마약과도 같은 희열이 찾아오고 장우성은 위대한 감동에 벅차올랐다.
이젠 마나를 수련하는 것도. 검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세월에 타일러 크라티만큼 강해질지, 혹은 세상에 나가서 덧없이 죽어버리진 않을지. 나는 왜 이곳으로 온 것인지.
의문과 걱정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뭐든 해낼 수 있다.’
자신감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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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숲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빌딩들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은 진정 나무의 숲이었다. 다만, 빌딩만큼 높고 굵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이고 모여, 바다를 이루듯이 나무들이 모이고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치듯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굵고 큰 나무들이 떠받치고 있는 잎새들로 거대한 수림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도 한구석이 움푹 파인 것처럼 푸른 물결이 뜸한 곳이 있었다.
바로 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숲에 비가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그런데 때로는 한 달 넘게 빗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고 가물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며 숲의 나무들에게 수분을 공급하는 호수였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바람막이가 되어 엽록색 호수는 잔잔했다. 그러나 갑자기 호수에 자잘한 파문들이 생겨났다. 파문은 점점 커지더니 불쑥 사람이 튀어나왔다.
"푸하."
장우성이 호숫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군살 한 점 보이지 않는 탄탄한 상체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검을 수련 하면서 그렇잖아도 군데군데 찢겨졌던 티셔츠가 걸레에 가깝게 변해버려 아예 벗어버린 것이다.
파드득.
손에 잡혀 있는 물고기가 몸부림을 쳤다. 어린아이만큼 큰 물고기는 몸을 튕기며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요놈아. 가만있어.”
이미 물고기 잡는 데는 선수가 다 되어버린 그에게 이 정도의 몸부림은 무용지물이었다.
물고기를 들고 호숫가를 나와 넓고 큰 바위들이 있는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리 식탁처럼 다듬어 놓은 바위에는 큼지막한 구덩이가 나 있었고, 그 안에는 마른 나무들이 채워져 있었다.
츠르르츠르르
물고기를 옆구리에 끼고 신검 루아사를 뽑아 바위에 비볐다. 검신이 바위와 마찰하며 불똥이 튀어 밑에 깔린 나뭇잎에 불이 붙었다. 불은 금세 나무에 옮겨 붙었다.
장우성은 루아사를 거두지 않고 물고기의 입으로 푹 찔러 넣었다. 입으로 들어간 검은 꼬리 부근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만만한 초식 동물을 검신으로 후려쳐 잡거나 부싯돌, 꼬치의 역할밖에는 못하는 신검의 신세가 처량했다.
장우성은 입맛을 다시며 루아사를 빙글빙글 돌렸다. 지글지글거리며 물고기는 보기 좋게 익었다.
“다 익었나. 그럼 양념을 넣어볼까.”
바위 밑에서 붉은빛이 도는 나무 열매를 하나 꺼냈다. 성분은 알 수 없지만 짭짤한 맛이 나는 열매였다. 나무 열매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짜낸 즙을 물고기에 충분히 적셨다.
장우성은 물고기를 들고 한 입 베어 먹었다. 짜고 쓴 것이 생각만큼 맛있진 않다. 하지만 이제 익숙한 맛이었다.
보통 물고기를 구워 먹을 때는 내장은 미리 손질해서 빼낸다. 왜냐면 무척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거롭게 그렇게 하느니 통째로 먹는 걸 택했다. 이유는 괴이하게도 쓰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은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믿으니 정말 몸에 좋은 것처럼 여겨졌다.
장우성은 입을 크게 벌리고 물고기를 뜯어 먹었다.
일주일씩 날짜를 나눠 육 일을 꼬박 마나 수련에 정진하고, 하루는 사냥을 해서 영양 보충을 위한 식사를 준비한다.
나무 열매를 먹는 것으로 허기는 충분히 때울 수가 있었지만, 가끔은 고기도 먹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몸통을 한참 뜯어 먹자 곧 배가 불렀다. 수련하는 입장에서 정신을 해이하게 만드는 과식은 금물이었다.
장우성은 자리에서 일어서 호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에 꿰인 물고기는 원심력에 의해 검에서 빠져나가 호수 위로 '풍덩'하고 떨어졌다. 남은 고기는 새들이 뜯어 먹거나 같은 물고기가 해치울 것이다.
"돌아갈까."
모래를 덮어 모닥불을 끄고 집으로 쓰고 있는 거목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목, 나무 밑에는 숫자와 기호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방향을 잡기 어려운 곳이라 가끔 밖을 나갈 때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무마다 표시를 해둔 것이다.
목욕과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지직
그런데,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잠시 멈칫했던 장우성은 태연한 척 계속 걸었다. 아직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숲은 조용하지 않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귀고,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에 자연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소음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는 흔히 들리는 것이 아니다.
장우성은 귀에 신경을 집중하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발걸음 소리가 거의 사라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익힌 보법이었다.
'놈. 어디에 있지?'
뻐근한 듯 목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우성을 보자마자 몸을 돌려 부지런히 도망쳤을 초식 동물들이 잠복하고 있을 리는 없다. 숲에서 사냥을 위해 잠복하는 것은 육식 동물들 뿐이다.
하지만, 지난 5개월간에 걸친 수련 끝에 검 끝에 어설프나마 검에 마나를 부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후로 육식 동물들 또한 초식 동물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보이는 족족 잡아 먹어버리니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것이다.
유일하게 도망치지 않고 달려드는 놈은 하나뿐이다. 수련에 매진하도록 만들어준 회색 곰.
장우성이 직접 붙여준 별명은 회색 살육자. 이름만큼이나 포악하고 강한 녀석이었다.
조심스럽게 숲을 탐색해 본 결과, 그 녀석이야말로 근방 숲의 왕이었다.
어느 날. 해가 저물기 전쯤 식량을 구하러 나와 우연히 회색 곰과 늑대 떼가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석양의 아스라이 져 가는 노을빛에 물든 수백의 늑대들과 회색 곰 한 마리의 전투는 퍽이나 운치가 있었다.
눈에 띄면 죽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에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으니.
대장으로 보이는 흰 털의 늑대가 달려드는 것을 필두로 수백의 늑대 떼들이 덮쳤지만 회색 곰이 휘저어대는 앞발에 무참히 깨져 나갔다.
결국 수십 개의 시체만 남겨 놓고 늑대 떼는 도망쳤고, 회색 곰은 끝까지 추격하며 늑대들의 씨를 말렸다.
그때 회색 곰도 몸이 성하지는 않았는데, 집중 공격을 받은 다리에서 허연 뼈가 보이고 피도 줄줄 흘러내렸다.
기회를 틈타 공격해 볼까 생각했으나,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회색 곰의 상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 갔다.
경악한 장우성은 재빨리 몸을 피하고, 며칠 뒤에 회색 곰을 먼발치에서 다시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완전히 상처가 나아 있었다.
가공할 회복력이었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언제부턴가 회색 곰은 장우성의 존재를 눈치 채고 공격하려 들었다.
독불장군처럼 소란스레 날뛰던 회색 곰이라서 예전에는 미리 위치를 알고 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영악하게 조용히 숨어 기다리는 회색 곰 때문에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한동안 행동반경이 극도로 좁아졌다.
일주일에 목욕과 사냥을 겸해 한 번씩 다니던 호수도, 두 달간 찾지 않았다.
정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거목 근처에서 기다리다 근처를 지나는 동물을 사냥했다.
고기는 처음 왔던 동굴의 계단까지 내려가 구워 먹고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다시 호수를 찾은 것이 겨우 두 번째였는데, 그 새 알아채고 회색 곰이 노리는 것이다.
'어서 나와라.'
루아사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정면 승부란 무모했기에 한 방을 날리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회색 곰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어째서? 없나?'
과민 반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고 해서 회색 곰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조용해진 숲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숲은 결코 이유 없이 조용해지지 않는다.
살기. 살기를 느낀 풀벌레들과 새들이 침묵하는 것이었다.
피이이잉
나뭇가지가 튕기는 소리가 났다. 순간, 장우성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여전히 회색 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자.
해를 등지고 선 장우성의 앞에 수많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뚫고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앞에는 회색 곰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그보다 빠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위다.'
장우성은 그대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장우성의 몸이 비켜난 곳에 아슬아슬하게 회색 곰의 뒷발이 틀어박혔다. 피하지 못했다면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회색 곰의 발은 낙엽을 뚫고 팔목까지 땅 속에 틀어박혔다.
"우어어어어."
회색 곰은 발을 꺼내며 울부짖었다. 장우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쿠어어."
회색 곰은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지면을 울리며 쫓아왔다. 울부짖는 말은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이 ‘잡히면 죽는다.’라는 말로 압축될 것이다.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해서 성장하는 것은 자신 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겁에 질려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부딪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회색 곰은 강하고, 장우성은 지금 그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솔직한 사실로, 수련을 통해 더욱 강해져 힘을 증명할 것이다.
장우성은 앞으로 달리며 거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장우성은 스치듯이 지나갈 수 있지만, 회색 곰은 한참 돌아가야 했다.
달려드는 늑대를 쳐낼 만큼 영활한 앞발에 비해 뒷발은 체중 때문에 민첩성이 부족했다.
이미 회색 곰의 약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무섭게 달려오던 회색 곰은 장우성이 미꾸라지처럼 거목을 이용해 이리저리 빠져나가자 거목에 자꾸 몸을 부딪쳤다.
"카아아아아아."
회색 곰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괴성을 질렀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장애물인 거목 때문에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포효였다.
그러나, 포효를 터트릴 때마다 서로 간에 간격은 벌어져 갔다.
장우성은 냅다 달려 나가다 미리 표시해둔 나무가 보이자 뒤로 돌아서 신검 루아사를 회색 곰에게 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마나를 머금은 검은 일직선으로 회색 곰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우어어어."
회색 곰은 앞발로 검을 쳐냈다. 검은 회색 곰의 앞발에 상처를 약간 남기고 핑글핑글 돌아 숲으로 떨어졌다.
장우성은 다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검을 날려 버리자 달리기가 한결 편해졌다.
약간 거리가 처지긴 했지만, 회색 곰도 포기하지 않고 쫓아왔다. 잡히기만 하면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라는 듯 씩씩대며.
마라톤이 벌어진다면 언젠가는 잡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십자 표시가 된 두 개의 거목이 먼저 보였다.
'도착했다.'
마나를 몸에 퍼트렸다. 지금까지 달려오던 것에 비해 가속도가 붙었다. 회색 곰 또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껏 달려왔다.
그가 두 개의 거목 사이에 보이는 풀밭을 가볍게 밟자 탄탄한 땅이 아니라 살짝 흙이 덮여 있는 나무판자의 느낌이 났다.
장우성은 풀밭을 넘어 달리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곰이 풀밭을 밟기 직전이었다.
"잘 가라. 곰탱아."
우지끈 콰아아앙
"끄아아아아아."
풀밭이 일시에 무너지며 회색 곰은 땅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함정이었다.
여유를 만끽할 시간도 없이 장우성은 옆에 보이는 거목의 나무껍질 문을 뜯고 안에 숨었다. 그리고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둔 진액을 바르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나무껍질 문아래 틈을 통해 밖이 얇게 보였다.
"우어어어어."
회색 곰이 괴성을 지르며 함정에서 뛰어올라 땅에 내려섰다. 숨어 있는 나무껍질 문이 들썩 일만큼 큰 진동이 일었다.
장우성이 보는 틈 사이로는 회색 곰의 무릎 언저리밖에 보이지 않자 얼굴을 틈에 가까이 댔다. 점차 시야가 커지며 회색 곰의 몸통과 머리 부분이 보였다.
회색 곰의 머리와 몸통에는 날카로운 것에 뚫린 상처가 많이 있었다. 함정에 빠지면서 칼날처럼 날카롭게 깎아 놓은 나뭇가지가 상처를 입힌 것이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발도 성치는 않을 것이다.
장우성은 여러 곳에 함정을 마련하며 유인할 각도까지 계산해 함정을 팠지만 그마저도 회색 곰을 쓰러뜨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쯤은 이미 예상한 것이다.
함정으로 사냥하고 싶진 않다. 강해져서, 회색 곰을 이겨내 힘을 증명하고 말리라.
"크와아아아아아."
분노의 괴성을 터트린 회색 곰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곧 장우성이 도망쳐가던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회색 곰이 뛰어가며 피의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난폭한 회색 곰이 사라졌지만, 장우성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숨어 있었다. 곰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미련하지 않다. 영악하고 재빠르며 인내심이 뛰어난 동물이었다.
심심풀이로 봤던 사냥 책에는 미국에서는 곰을 악마의 화신으로 여길 만큼 두려운 존재로 나타나 있었다.
두세 시간쯤 지나자 낮지만 분명한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회색 곰이 나타났다. 이미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되었고, 회색 털에 몇 줄기 변색된 피가 굳어 있었다.
회색 곰은 주위를 둘러보고 냄새도 맡아보더니 이상 없는 걸 확인하고 자신이 빠졌던 구덩이를 관찰했다.
엎드린 채 구덩이에 발을 넣어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꺼내 보던 회색 곰은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다시 함정에 원래대로 집어넣었다.
“크워어어."
회색 곰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를 타고 멀리 떠나갔다. 그때서야 장우성은 숨어 있던 은신처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이 함정도 두 번 다시 쓰기 힘들겠군. 벌써 역이용을 하려 들다니..."
장우성은 십자가 표시가 되어 있던 거목에 'X'자 표시를 덧씌웠다. 그리고 원래 오던 길을 돌아가 신검 루아사를 찾았다.
루아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풀숲 깊숙하게 손잡이만 남기고 박혀 있었다.
"후. 아직은 수련이 더 많이 필요하군."
장우성은 나무 열매를 주워들고 아지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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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내리기 시작하면 대부분이 폭우였다.
아직은 괜찮지만 내일쯤 되면 호수가 위태로울 정도로 물이 불어나 숲에도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물이 찰 것이다.
비는 거목을 가볍게 마사지하듯이 두들겼다. 거목 안에 앉아 있던 장우성은 축축한 습기에 이마를 찌푸렸다.
“비가 그치면 이사해야겠군.”
비가 내리면 거목 안에 만들어 놓은 보금자리는 더 쓸 수 없었다. 거목 안에 수막처럼 차오른 습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숲 속이기에 햇빛은 약하게 밖에 비추지 않았다. 그러니 보금자리 안으로 들어온 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악취를 내뿜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요란한 빗소리가 마음의 평정을 방해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마나 수련에도 지장이 많았다.
“검 수련이나 해볼까.”
장우성은 신검 루아사를 들고 나무껍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비 내리는 날은 젖어도 별로 신경 쓸 것이 없는 신검이 수련하기 적당했다. 사실, 기사들의 검은 부담스러울 만큼 좋아서 사용하기가 꺼려진다.
명검은 그만큼의 관리를 필요로 하는데, 날도 없는 루아사는 관리랄 것도 없이 그저 편하게 쓰면 된다.
숲에서는 하늘에서 물총이라도 쏘는 것처럼 물 뭉치가 여기저기서 떨어졌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우산처럼 덮어 씌워진 나무들에 가로막혀 굵게 변해 떨어지는 것이다. 정면으로 맞으면 약간 아플 정도였다.
“하앗.”
낮게 자란 풀밭 위에서, 장우성은 낮은 기합을 발하며 검을 허공에 곧추세웠다.
여유롭게만 보이던 기도는 검을 세우는 순간 일변했다. 날카로움과 팽팽한 긴장감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
후두둑
귓가에 미약한 소리가 잡혔다. 장우성은 부드럽게 몸을 돌리며 횡베기를 했다.
자연스러움. 이전에 가누는 데도 힘들었던 검이 손의 연장선처럼 자유자재로 다루어졌다. 발과 허리의 뒤틀림은 손으로 이어졌고, 검은 허공에 유연한 궤적을 그렸다.
우연인지 떨어지던 물 뭉치가 검신에 부딪쳐 산산이 비산했다.
"확실히 무게 중심이나 손맛은 이 검이 좋은데..."
장우성이 날이 서 있지 않은 검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사들의 검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명검답게 베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냥을 하기에는 부적절했다.
예기가 너무 뛰어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동물들은 모두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었다.
반면, 신검 루아사는 무덤덤함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장우성만 조심하면 사냥하기에는 편했다. 그래서 신검 루아사를 자주 애용하다 보니 이제 손에 익숙하게 다루어졌다.
길이나 무게, 전체 밸런스 등 어디에도 흠 잡을 만한 곳이 없다. 다만 문제라면 검날이었다. 검날이 없으니 정작 전투에는 쓸모가 없다.
작은 동물들을 때려잡듯이,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시 세상에 나가 갑옷을 입은 기사라도 상대한다면 피곤함 그 자체일 것이다.
갑옷을 무식하게 때려 부수거나, 일일이 마나를 넣어 상대해야 하니 바위를 무 자르듯 하는 기사들의 검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굳이 기사들의 검에 비하면, 이것은 무게가 나가는 쇠파이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익숙하게 사용해와서인지 점차 애착이 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장우성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루아사를 들었다.
“자 그럼 한바탕 해 볼까!”
강하게 땅을 내려 밟으며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쳤다. 맹렬한 기세. 비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검이 때마침 떨어지던 물 뭉치를 두 개로 갈랐다.
일 검이 끝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검날이 기울며 회전하고, 유려한 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말끔한 선이 장우성의 주변으로 펼쳐졌다.
몸은 검을 따라 자연스레 움직이고 방향전환도 매끄럽다. 발이 움직여 방향을 정하면 손이 따라오고 검이 날아온다. 모든 동작이 검에 녹아있었다.
검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발과 몸은 그에 충실히 따랐다. 무게중심은 검에 있지도 않고 몸에도 있지 않다. 손과 발이 움직임에 따라 중심이 뒤바뀌며 검이 사방을 날아다닌다.
검무. 검으로 추는 춤이었다.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팔자베기로 익힌 검이 이제는 마음을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여 주었다.
검무는 타일러 크라티의 특기였는데, 밤마다 달빛 아래서 그날 하루의 감정이 녹아 있는 검으로 허공에 일기를 썼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검무지만, 전장에 나간 날은 사나워 다가설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장우성의 검무는 진중하면서도 검의 매력을 물씬 담고 있었다. 손으로는 닿지 못하는 것을 포용하는 검의 매력에 대해 깨달은 자의 진지한 검이었다.
검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고, 천공을 향해 우뚝 선 채로 멈췄다. 장우성의 몸도 검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섰다.
물이 튀는 소리, 낙엽 위로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 많은 소리가 들렸지만,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온 것 같았다.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는 몸을 비가 후줄근하게 적셨다.
눈빛이 깊어졌다고 생각될 무렵, 검을 느리게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자유자재로 다루던 검의 무게가 갑자기 천근으로 불어난 듯, 힘겨워하며 검을 밀어냈다.
검 끝의 움직임은 지루할 만큼 느렸다. 애태우듯 조금씩, 조금씩 검은 앞으로 전진했다.
눈빛이 점차 강렬하게 빛나고 위압감이 흘렀다. 검에서는 주위의 소란을 잠재워버릴 것만 같은 서릿한 기운이 서렸다.
“이얍!”
기합소리. 그리고 환상처럼 검에 환한 광채가 서렸다. 거친 비바람 속에서 광채는 고고한 기운을 사방에 퍼트렸다. 검의 정점에 이른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오러. 바로 오러였다.
싸아아아.
바람과, 바람이 머금고 있는 물방울들이 기세에 밀려 비켜나갔다. 주변에 풀들이 오러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드러누웠다.
오러는 갈수록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광채가 정점에 달해 눈이 부실 정도가 되자 미련 없이 검을 내리 그었다.
“타핫.”
하얗게 빛나며 검에 덧씌워졌던 오러가 정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오러는 얇은 종이가 살을 베듯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나무에 적중했다. 비바람 속에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후우우우.”
장우성은 조심스럽게 검을 거두고 숨을 골랐다. 아무 이상도 없어 보이던 나무는 비바람이 치자 그때서야 조금씩 기울어지더니 굉음을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제법 의자로 쓰기에 괜찮겠군.”
한 점 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끈하게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자 새삼 수련의 보람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후. 오러를 마음껏 쓸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마나의 소모가 극심하니...”
장우성은 체내의 마나가 빠져나가 허전함이 들자 안타까운 듯 말했다.
마나의 양이 부족해서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기에는 무리였다. 물론, 발출을 하지 않는다면 훨씬 오래 사용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오러를 무한정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굳이 검을 가릴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장우성은 잠깐 쉴 생각에 비를 맞으며 그루터기에 드러누웠다. 거목 안으로 들어갈까도 생각해봤지만, 비에 흠뻑 젖어 들어가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거목 안에서 눅눅한 습기에 젖느니 비를 맞는 편이 한결 산뜻하다.
하늘을 보며 드러누워 시원한 비가 얼굴과 몸을 적시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공기는 맑고, 빗물 또한 깨끗하다. 장우성은 입을 크게 벌려 빗물을 받아마셨다.
눈을 감고 편히 누워 빗물을 받아먹고 있던 그의 감각에 위험신호가 잡힌 것이 그때였다.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일 년간 지내다 보니, 본능이 눈을 떴다. 이제는 본능적으로 위험한지 예감할 정도였다. 옆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촉각이 곤두섰다.
‘벌써 왔나?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시선을 모아 코끝에 매달린 한 방울의 빗방울이 진동하는 것을 봤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울림이 있었다.
‘녀석, 자기가 얼마나 무거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발걸음 소리 죽이고 다가오긴.’
장우성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소리를 죽이고 슬금슬금 기어오던 회색 곰이 보였다.
빤히 쳐다보자 회색 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둑질을 들킨 아이처럼.
“이리 온.”
기르던 강아지를 부르듯이 손짓하며 말했다.
“크워워워워워!”
회색 곰은 말뜻은 이해하지 못해도 놀리는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는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말 잘 듣진 않아도 되는데. 넌 띠꺼운 게 매력이라니까.”
회색 곰이 다가오자 몸을 뒤로 굴리며 양 손바닥으로 그루터기를 세게 밀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듯이, 15미터가량 높이 솟구쳤다. 회색 곰도 땅을 박차고 점프해 앞발로 후려쳐 왔다.
그러나, 장우성은 공중에서 반 바퀴 회전하며 회색 곰의 앞발을 딛고 다시 한 번 도약했다. 거의 거목의 나뭇가지에 닿을 만큼 높이 떠올랐다.
재차 도약할 힘이 없던 회색 곰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 있던 그루터기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 조금의 충격도 없었다.
그는 그루터기에 놓여 있던 신검 루아사를 발끝으로 올려 차 잡았다.
“이제 그만 우리의 악연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장우성은 검을 세우며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회색 곰은 직감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낀 듯, 바로 달려들지 않고 신중하게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유자적하게 장우성은 회색 곰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거목에 숨어 있다 들킨 줄 알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던 기억, 회색 곰의 압도적인 힘을 엿보고 존경심마저 품었던 초기, 그리고 호수에서 매복한 회색 곰을 만나 도망치던 기억. 그 후에도 회색 곰과의 만남은 많았다.
회색 곰이 아예 작정을 하고 노리는 탓에 은신처를 발각당해 생명의 위기도 몇 번 넘겼고, 수련도 적지 않은 지장을 받았다.
석 달 전에서야 비로소 미숙한 오러를 내뿜어 회색 곰의 어깨에서 배에 오는 큰 상처를 남겨 놓은 이후로는 쉽게 덤벼들지 않았다.
대신 회색 곰은 영악하게 굴었다. 노골적으로 괴성을 지르며 지켜보거나, 근처를 쿵쾅대며 뛰어 지나가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던지는 것이었다.
짐승의 도발행위에 넘어가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그때마다 꾹 눌러 참았다.
성가시고 피곤했지만 회색 곰은 더했다. 숲의 지배자였던 자신을 위협할 만한 인간이 있다는 것 때문인지 어울리지 않게 조금씩 말라가는 것이 보였다.
결국 우기가 다 지나기 전에 한 번 끝장을 보겠구나 싶었는데, 힘을 뺀 사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장우성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노리는 적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수련에 모든 힘을 소모할 리가 없었다.
우드드득
느긋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회색 곰이 정면 승부는 아무래도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쓰러진 나무를 앞발을 이용해 잡고 들어 올렸다.
“우아아아아.”
회색 곰은 힘껏 나무를 휘둘렀다. 장우성은 납작하게 엎드려 나무를 피해냈다. 엄청난 풍압이 길게 자란 머리를 휘날리게 만들었다.
“마지막까지 귀찮게 구는군. 하긴, 지금까지 날 골탕 먹였으니 이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맛이 나지. 하지만...”
땅을 박차고 회색 곰을 향해 달려들었다.
회색 곰은 익숙지 못한 나무를 내던지고 앞발을 들었다. 무쇠보다도 튼튼한 발톱들이 장우성을 향해 내려찍어졌다. 늑대들을 한 방에 죽게 만들었던 그 앞발이다.
“이것으로 끝장이다!”
발톱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검. 검에 모든 마나를 모았다.
검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사방을 환히 밝히는 광채가 되었다. 검이라기보다는 찬란한 빛이었다.
“간다아앗!”
장우성의 손에 들려 있는 빛무리가 휘둘러졌다. 그 순간,
파앗.
대기를 둘로 자르는 섬광이 피어났다. 모든 상황을 정지화면처럼 만드는 섬광이었다.
장우성과 회색 곰은 찰나의 순간 서로 스쳐 지나갔다. 떨어지던 회색 곰의 앞발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빗나갔다. 앞발보다 장우성이 빨라 먼저 지나갔던 것이다.
숨을 한 번 들이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회색 곰의 뒤에 나타난 장우성은 땅에 착지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회색 곰 또한 거구의 육중한 몸을 바닥에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쿠르르릉
앞에 있던 나무들이 옆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무너져 내렸다.
빛무리는 대기를 가르고, 회색 곰을 두 동강 내고 그 뒤의 나무마저 자른 것이었다.
“휴우.”
장우성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엔 모든 힘을 쥐어짜 내서 쓴 오러이기에 서 있을 힘조차 부족했다.
“죽었겠지?”
장우성은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봤다. 육중한 회색 곰이 쓰러져 있다. 오러가 회색 곰을 가르는 것을 보았으니 굳이 결과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회색 곰의 회복력이 대단히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신체는 불멸이 아니다. 허리에서부터 위아래로 나누어진 몸이 회복된다면 그건 회복이 아니라 부활수준이었다. 그땐 회색 곰이 아니라 회색 좀비로 불러야 한다.
곧 육중한 회색 곰의 몸 아래에 피가 흘러나와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죽었음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자 장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색 곰에게 다가갔다. 오러가 휩쓸고 지나갔던 허리 부근이 약간 그을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죽긴 죽었구나.”
바로 위에서 보고 있자니 회색 곰이 눈에 가득 찼다. 이 큰 놈을 자신이 잡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의 몸보다도 앞발이 훨씬 더 큰 것이다.
“비 오는 날의 사투라. 영화에서 주로 쓰이는 소재지. 언젠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그렇게도 귀찮게 굴던 곰을 처치했으니 기뻐야 하는데 시원섭섭하구나. 그래도 회색 곰이 있어서 열심히 수련도 했고, 심심하지도 않았는데.”
발을 적시던 회색 곰의 피가 빗물에 씻겨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 세계에 와서 최초로 조우했던 살아있던 생명.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만들어준 녀석. 생존에 위협이 되었지만, 역으로 수련에 도움을 주기도 한 존재. 그리고 이제는 그의 강함을 증명하고 쓸쓸하게 사라져갈 운명...
“이 비가 그치기 전에...”
가만히 회색 곰을 내려 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죽은 회색 곰의 시체를 이렇게 비속에 처박혀 있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일단 가죽부터 벗겨내자. 나중에 팔면 다 돈일 거야. 여기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금방 상하니까. 고기도 가죽에 싸서 그늘진 곳에 보관해야지. 그래도 상할지 모르니 귀찮아도 보험용으로 동굴에도 갖다놔야겠어. 곰고기는 아주 귀하고 맛있다던데, 몸보신에도 그만이겠지. 쓸개와 발바닥은 별도로 챙겨놓을까? 곰 요리법이라도 미리 배워두었으면 좋았을 걸. 귀한 재료들이니 잘 먹어야 할 텐데.”
입맛을 다시며 아지트인 거목으로 가서 기사의 검을 들고 나왔다. 가죽을 벗겨내기에는 신검 루아사는 불편했기 때문이다.
회색 곰을 향한 특별한 감정들은 고기와 가죽 앞에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장우성은 낙천적인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회색 곰은 수 시간의 해체 작업 끝에 막 발굴된 공룡처럼 앙상한 뼈다귀만 남겨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장우성은 마지막 고기를 동굴로 옮기며 뼈를 힐끗 보고 말했다.
“저건 푹 고아 먹어야지.”
회색 곰의 마지막이, 몽땅 장우성의 배 속으로 사라질 것을 예고하는 말이었다.
챕터 : 세계를 향한 첫걸음.
여행자가 길을 떠난다.
이유는 제각각.
세상이 나를 부른다.라는 거창한 이유에서부터
구구절절하고, 절박한 것도 많다.
그러나 때로는, 지금의 일상이 지겨워서,
무작정 밖으로 나가보고 싶을 때도 있다.
왜, 누구나 한 번쯤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여행자의 발걸음이 어디로 미치느냐에 따라
미래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거.
쉽진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그간 많이도 바뀌었다.
도무지 기억이라고는 도움이 안 되니.
그래도 여행은 참 즐거울 것 같다.
일단은 한 걸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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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한번 좋다.”
장우성은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봤다. 나뭇가지 사이로 점점이 보이는 푸른 하늘에는 구름 몇 조각이 느리게 흘러갔다.
“이곳에 온 지도 이제 2년이 지나가는구나.”
장우성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아직 오게 된 이유도, 어떻게 온 지도 의문이었지만 이곳만큼은 참 마음에 들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경치. 자연은 참 매력적이었다. 낮이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조금만 신경을 접으면 모두 아름다운 소리들이다.
장우성은 회색 곰을 처치한 이후로 숲을 자유롭게 여행했다. 아침이면 붉은 해가 뜨는 곳을 향해서.
숲이 깊어지고, 멀리서 고개를 치켜들어야 키를 가늠할 수 있는 나무는 점점 더 커져 갔다.
일주일쯤 걸었을까. 몇 개의 호수와 산을 지났다. 그러나 가도 가도 숲의 끝이 보이지 않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수련에 전념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논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했다.
마나와 검을 수련하는 것도 참 좋았다. 꿈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움직임을 직접 구현해 내는 것은 멋진 일이다.
실제로, 캐릭터를 키워 대리만족을 하는 온라인 게임과는 다르게 자신이 직접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족감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도를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 끝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
마나와 검의 궁극을 보고 싶었기에 수련을 하는 것은 조금도 지겹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딘가 한구석이 허전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화로워 권태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더 이상 장우성을 긴장하게 만들 존재란 없었다.
숲의 동물들은 사냥감에 불과하고, 호수에서 자유로이 수영하는 것도 예전 같은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변화 없이 수련만 계속되는 세상. 좀이 쑤셨다.
장우성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더 이상,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다. 세상에 나가보자!”
결의에 찬 외침 소리가 갑자기 숲 속에 울려 퍼지고,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비상했다. 새들은 선두 새의 움직임에 따라 여유롭게 주변을 몇 바퀴 돌더니 다시 원래의 나무들에 내려앉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 나온 김에 지금 나가자.”
장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거목으로 갔다.
거목의 문을 여니 기사들의 검 다섯 자루와 신검 루아나, 그리고 회색 곰의 가죽으로 만든 간단한 옷과 배낭이 있었다. 배낭에는 검을 매달고 다닐 수 있도록 걸이를 다섯 개 만들어 놓은 것이 특이했다.
마치 떠날 것을 미리 짜맞춰놓기라도 한 것처럼, 짐은 단출하게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어쩌면 단지 나가기 위한 마지막 결단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장우성은 누더기가 다 된 청바지를 벗고 회색 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회색 곰 가죽은 옷을 만들고도 한참이나 남아 배낭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마을로 가면 가죽을 팔고 옷을 사 입을 작정이었다.
장우성은 배낭에 기사들의 검을 하나씩 꽂고 등에 멨다. 신검 루아사는 허리에 찼는데 주위의 이목을 자극할 만한 기사들의 검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을 참이었다.
장우성은 지난 시간 동안 보금자리가 되었던 거목과 숲을 둘러보았다.
수련과 사냥으로 여러 추억들이 있는 장소였으나 이제는 떠나야 했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결정이 내려지자 망설이지 않았다.
장우성은 루아사에 마나를 넣어 약한 빛무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목 옆에 있는 큼지막한 바위에 대고 한글로 이름을 새겼다.
-장우성. 다녀가다.-
“안녕.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장우성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점점 나무들이 작아지는 곳. 해가 뜨는 곳의 반대편.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기사들과 소년은 동쪽으로 왔으니, 서쪽을 향해 가면 될 것이다.
“가자.”
장우성은 배낭의 끈을 질끈 동여매고 출발했다. 때마침, 이글거리며 대기를 달구던 태양이 조금씩 서쪽 하늘로 내려가고 있었다.
태양이 완전히 서쪽 숲으로 넘어갈 때, 조금 더 인간 세상과 가까워질 것이다.
@
서쪽을 향한 지 일주일 째.
“정말 어색한 걸.”
높이가 십 미터쯤 되어 보이는, 그래서 너무나도 정상적인 크기의 나무를 보며 장우성은 고개를 저었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거인의 나라에 다녀온 듯이, 큰 나무들이 있는 숲에서 지내다 정상적인 곳에 나오니 어색하게 보였다. 점점 인간 세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장우성은 풀숲을 헤치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젠 숲에 사는 동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탁.
풀숲을 지나다 발에 뭔가가 걸리자 나뭇가지로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주변에 나무가 보이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체를 굽혀 무엇인가 확인했다. 활이었다. 옆에는 화살통도 보였다.
“혹시 여기 누구 있습니까?”
장우성은 이곳의 언어를 떠올려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웅웅거리며 고함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면 활의 주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누군가 온다면 이 세상에 도착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장우성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활을 들고 이리저리 훑어봤다. 무슨 나무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묵직한 활은 무쇠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시험 삼아 잡고 구부려보자 탄력 있게 휘어졌다.
“괜찮은걸.”
전장에서 궁수들이 쓰는 급조한 활과는 격이 틀리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게 다루어온 물건 같았다.
그런데, 화살을 대는 부분은 쇠 같은 것을 덧대지 않고 그저 약간 파여만 있었다. 그렇다면 화살이 쏘아져 나갈 때의 마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금씩 닳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활은 생리는 잘 모르지만, 뭔가 다른 걸 대지 않으면 오래 쓰진 못할 텐데.”
손가락으로 패인 부분을 만져보았다. 뜻밖에도 아무런 흠집도 없었다.
갓 만들어진 활은 분명히 아니었다. 만들어진지 오래되어 저절로 변한 고풍스런 색이 있었다. 그런데도 활이 새것처럼 깨끗한 것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참 이것저것 만져보고는 나무의 강도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마찰 따위에는 전혀 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도. 이젠 활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 정말 나무인지조차 의심이 되었다.
“누군가 오면 뭘로 만들었는지 물어보면 되겠지.”
시선은 이제 시위로 향했다. 시위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보통 활시위는 동물의 힘줄 같은 것을 가지고 만든다고 알고 있었는데, 은빛의 특이한 실이 이리저리 꼬여 시위를 이루고 있었다.
“이거 당겨지긴 하는 건가?”
시험 삼아 화살을 대지 않고 시위를 당겨보았다. 처음엔 꿈쩍도 하지 않던 시위는 묵직한 힘을 가하니 그제야 늘어났다. 활과 시위는 팽팽하게 휘어졌다.
당기고 있던 시위를 가볍게 놓자, 시위가 앞으로 쫙 펴졌다. 무척 빠른 속도. 활은 흔들리지 않고, 시위도 반동이 거의 없었다.
“멋진 활이다.”
장우성은 감탄했다. 활이 보통 물건이 아니니 만진 걸 알면 주인이 와서 불쾌해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활을 옆에 내려놓고 기다렸다. 그러나 해가 저물도록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배낭에서 말린 육포를 꺼내 먹은 장우성은 날도 늦었으니 하루 머물고 가기로 했다.
근처에 보이는 나무로 올라가 배낭을 옆에 걸어놓고 눈을 감았다. 오랜 숲 생활에 익숙해진 몸은 불편한 잠자리에도 쉽게 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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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누군가 나타날지도 모르기에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해 자고 난 다음에도 몸이 찌뿌듯하다.
“결국 아무도 안 왔군.”
장우성은 활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멋진 활, 주인은 안 보인다. 오지도 않는다. 더 생각할 것 있나? 답이 나왔다. 날쌘 동물들을 죽ᅟᅠᆯ어라 쫓아가 때려잡으면서 얼마나 활 같은 무기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가.
“버렸나 보지. 뭐. 잃어버렸거나. 어쨌거나 이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으니 챙기자.”
장우성은 활을 배낭에 매 걸었다. 미리 배낭을 만들 때부터 이것저것 걸 것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편리했다. 큰 여행용 배낭에 활과 검들이 걸려 있으니 무기 상인이라도 된 것 같다.
“가볼까.”
장우성은 서쪽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발걸음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매우 빨랐다. 아마 그 이유는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장우성은 숲을 빠져나왔다.
광활한 벌판. 햇볕이 얼굴을 따갑게 비추고 짧게 자란 풀이 대지를 넓게 덮고 있었다.
시야를 막고 서 있는 나무들밖에 보지 못하다가 넓게 탁 트인 곳에 나오니 마음도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장우성은 크게 발걸음을 떼었다.
“...이. 잠...만...”
“음?”
장우성은 어딘가에서 들리는 사람의 소리에 주위를 둘러봤다.
평온해 보이는 벌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숲을 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멀리 깨알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숲에 가까이 붙어 있어 바로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장우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검게 굳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옷은 2년간 입었던 청바지만큼이나 해어져 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보이는 흔적들과, 손에 들고 있는 피 묻은 검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도적인가.’
장우성은 시작부터 운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며 루아사를 오른손에 들었다.
‘적당히 두들겨 패서 쫓아내면 되겠지.’
사내들은 보는 사람마저 호흡이 곤란할 만큼, 숨 가쁘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내들이 가까워짐에 따라 루아사를 쥔 손에 가볍게 힘을 더했다. 사내들은 멈출 의사가 없는 것처럼 장우성을 향해 돌진했다.
막 루아사를 휘둘러 그들을 치려고 할 때, 사내들은 달려오던 그대로 바닥에 몸을 던지며 간절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외쳤다.
“머. 먹을 것 좀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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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구와구, 쩝쩝.
“그러니까, 지금 전장에서 돌아오시는 것이로군요.”
장우성은 아귀처럼 미친 듯이 고기를 뜯고 있는 고든에게 말했다. 고든은 먹고 있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러네. 고향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중앙 평원을 질러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빙 돌아가는 걸 알면서도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지.”
빠르게 대답을 마친 고든은 다시 고기로 달려들었다. 다른 두 사내가 그 사이 많은 고기를 해치운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흐음.”
장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세 명의 부랑자들을 바라보았다. 숲에서 나오기 직전 잡았던 동물을 구워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 사람은 대륙의 남서쪽에 위치한 페이덴 왕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지내던 나라는 좋게 말해서 규모가 좀 작은 나라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주변 강국들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명맥만 이어나가는 존재였다.
해마다 주변국에 돈과 식량을 바치며 지내오던 차에 올해에는 북쪽에 있는 기란 제국이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바로 군사동맹을 맺자는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강대한 기란 제국에, 동쪽으로는 아덴 왕국에 시달리던 페이덴 국왕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군사 동맹을 맺게 되면 기란 제국이 대놓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덴 왕국도 감히 자신들의 왕국을 무시하지 못할 생각에 덥석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동맹을 맺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기란 제국은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고튼 삼국 연합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페이덴 왕국에는 동맹국으로서 군사를 원조해달라는 압박을 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대놓고 거절할 수 없었던 페이덴 국왕은 원하는 대로 병력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거절한다면 바로 전쟁이므로.
페이덴 국왕은 체면치레를 위해 자신의 중앙군 약간을 내놓고 나머지 병력은 각 귀족들에게 할당을 시켰다. 각 귀족들도 자신들의 사병은 쓰기가 싫어 영지민들 가운데 검을 쓸 줄 아는 남자나 용병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징집해 보냈다.
검을 다룬 경험이 없는 남자는 즉석에서 검을 한 번 쥐어보도록 한 뒤에 징집했으니 얼마나 엉터리로 벌어진 일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그래서 전직 용병 대장 출신으로 은퇴해 집에서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내던 고든과 동네청년 데안, 고든과 함께 용병을 잠깐 했던 용병 출신의...?
“참. 그쪽 분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마지막 한 명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던 장우성은 곱상한 얼굴의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기에트론. 존댓말 듣는 건 어색하니 편하게 대해.”
“아참. 긴트였지.”
“기에트론이라니까!”
“긴트. 헛소리 말고 고기나 먹게나.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긴트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고든의 핀잔에 다시 고기에 고개를 처박았다. 긴트는 고든과 함께 용병일을 할 때, 방문하는 마을마다 여자들을 건드렸다고 하는 천생이 바람둥이인 남자였다.
평민인 이상, 성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름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짧고 단순한 자신의 이름을 나름대로 멋지게 지어놓고 부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든의 말에 따르면 기에트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곱상한 외모에 반한 철없는 여자들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아. 그런데 군대에서는 어떻게 돌아오시는 겁니까? 전쟁이 끝난 건가요?”
세 사람이 고기를 다 먹은 듯이 보이자 장우성이 물었다.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든이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마저 쪽 빨아먹고 답했다.
“전쟁? 지금도 한창이지. 제국이 크다고 해도 적들이 많아 힘을 집중시킬 수가 없고, 삼국 연합도 만만치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영했다네.”
장우성은 감탄했다. 돌아다니는 부랑자들, 혹은 굶은 거지 떼로밖에 안 보이던 시각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포로로 탈출하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하신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으음. 잘 먹었으니 그쯤이야 대답해주어야 하는데, 이것 참.”
고든은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기름이 묻은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긴트가 잽싸게 말을 받았다.
“전적으로 내 덕이지.”
“호오?”
“세 번째 전투였던가? 제국 놈들이 전투 때마다 우릴 화살 받이로 내세워서 화살 맞고 죽느니 포로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제국이 패전할 때 따라 도망치지 않고 투항했는데, 우리 말고도 포로가 많아서 수용소가 가득 찬 거야. 시궁창 냄새나는 사내들로 죽을 맛이었지.”
“그땐 그냥 우릴 다 죽여 버릴 줄 알았지. 전쟁터에는 관리하기 어려운 포로들을 없애는 건 흔한 일이니까.”
고든이 중간에 한마디 거들었다. 긴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길게 말을 이었다.
“우린 운이 좋았어. 삼국 연합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장군이 좋은 녀석이라 포로들을 모두 영주가 살던 본성에 가둔 거야. 영주의 성 높은 곳에 포로들을 밀어 넣고 내려오는 계단을 막아버린 거지. 성에 병사들이 가득해서 탈출은 꿈도 못 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밥은 잘 줘서 다행이랄까? 다 전장에서 삼국연합이 밀리지 않는 덕분일 건데. 아무튼 그래서 잘 먹고 잘 지내다가 내 솜씨를 발휘했지.”
“어떤?”
“사랑!”
긴트는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장우성은 황당한 대답에 반문했다.
“사랑?”
“그래. 사랑! 사랑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가치지. 우리에게 밥을 주던 하녀는 오랫동안 그 성에서 일하던 여자애였는데, 이름이...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그 애의 도움을 받아 집사들이 오가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 빠져나온 다음에는 제국이나 연합 쪽으로 갈 수 없으니 엘프의 숲으로 바싹 붙어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고. 그러다 보니 걔가 식량을 좀 챙겨주긴 했지만 중간에 다 먹어버려서..”
장우성은 적당히 걸러 들었다. 그럭저럭 여자를 꼬드기는 능력이 뛰어난 긴트가 하녀를 유혹해 일행이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다는 말이었다.
중간과정에는 ‘반드시 돌아와 널 데려가겠다. 부디 그날을 기다려줘.‘, ’네. 그럴게요. 믿어요. 빨리 오세요.‘라는 유치한 사랑의 밀약이라던가, 혹은 그와 관련된 육체 행위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하녀를 상대로... 그러니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고든이 설명하기 곤란해 할만도 했다.
“그런데 왜 굶은 겁니까? 바로 옆에 숲이 있는데 사냥하면 될 것을 가지고.”
장우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먼 곳을 쳐다보며 딴전을 피우고 있던 고든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긴트도 두 눈을 부릅떴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숲이 있으니 사냥을 하면...”
“너 머리라도 잘못 된 거 아냐? 아니 잠깐, 너 그 옷... 호. 혹시. 우리들이 먹은 고기도?”
“저 숲에서 잡은 거냐고 묻는다면 맞다고 대답해 드리죠.”
장우성의 말에 고든과 긴트, 데안들은 얼굴이 누렇게 떠서 엉덩이를 땅에 질질 끌며 뒷걸음질 쳤다.
“왜 그래요?”
“드래곤이십니까? 미천한 인간들이 몰라 뵙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고든이 자리에 일어서더니 넙죽 절을 했다. 눈치를 살피던 긴트와 데안도 땅에 그대로 엎어졌다.
장우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장난하는 건지 몰라도 재미없으니 그만 일어나세요. 드래곤은 누가 드래곤이라는 겁니까.”
“정말 아니십니까?”
고든이 슬쩍 고개를 들고 물어왔다. 불현듯 장난기가 돈 장우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들!”
“헉. 위대한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죄. 죽여주십시오!”
당장 고든이 땅에 이마를 처박았다. 혀를 한 번 찬 장우성은 고든을 붙잡고 일으켰다.
다른 두 사람이야 별로 나이 차이가 안 나는 것 같아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언뜻 봐도 사십이 넘은 아저씨가 엎드리고 있는 것은 거북했다.
“농담이니 일어나요.”
“정말인가?”
고든이 미심쩍다는 듯, 혹은 더는 속지 않겠다는 듯 물었다.
“네. 정말 아니라니까요. 그보다도 왜 절 드래곤으로 생각한 것인지나 알려주시죠.”
“으음.”
고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두 사람도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군. 드래곤은 거짓말을 안 한다고 알려졌으니 정말 드래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된 것인지 참.”
고든이 낮게 중얼거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숲에서 엘프들을 못 봤나?”
장우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해골에게 받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기사들의 기억에도 숲에서 엘프를 본 적은 없었다.
“본 적 없는데요.”
“한 번도? 흐음. 운이 좋았나.”
“글쎄요. 운이 좋다라고 하기에는 좀 오래 산 편입니다만, 엘프들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상하군. 이 숲은 엘프들이 선포한 금역인데...”
“저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으니 설명을 해주세요.”
고든이 뭔가 아는 듯한 눈치를 보이자 장우성은 설명을 해달라고 졸랐다.
장우성이 알고 있던 기억 속 세상은 제국이 대륙을 통일시켰던 것인데, 고든의 말을 듣다 보니 세상은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는 난세였다. 엘프의 금역이라는 것 또한 지금 처음 들어본 사실이다.
“음. 그럴까? 300년 전쯤 대륙에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알고 있겠지?”
“아니요.”
“허. 이 친구 완전 세상 물정엔 어둡군. 자네는 그동안 대체 어디서 살았나?”
고든이 혀를 차며 물었다. 장우성은 잠깐 생각해보고는 대충 둘러댔다.
“그냥 이 근처에서 사냥하며 혼자 지냈습니다.”
“흠. 사냥꾼의 아들인가? 그럼 모를 수도 있겠군. 300년 전 대륙을 하나로 통일했던 제국과 엘프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네.”
“전쟁이요? 왜요?”
“묻지 말게. 나도 용병 생활하며 주워들은 것들이라 상세한 건 잘 몰라. 아무튼 정령술과 마법을 다루는 엘프들과 제국의 전쟁은 호각이었는데, 드래곤들이 개입하면서 제국이 패배하고 지도부는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건너갔다고 하네. 기존의 제국은 분할되어 여러 왕국들로 나누어지고, 전쟁에 승리한 엘프들은 숲으로 돌아가 버렸고. 뭐 대충 그렇게 결말이 지어졌지. 문제는 엘프들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간들이 그들이 사는 숲에 들어온다면 죽음뿐이라고 했는데 이 숲이 바로 그 숲이네. 그 후에는 드래곤들만이 숲을 찾을 수 있다고 알려졌지.”
“그랬군요.”
장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기사들이 살아 있던 시대와는 최소한 300년 이상 차이가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엘프들은 전혀 안 보이던데요? 뭐, 제가 숲을 전부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음. 이 숲이 제국보다 넓다고 하니 자네는 운이 좋았나 보군. 사람들 중에는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살아 돌아온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그래서 우리도 배를 굶으면서도 감히 숲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고. 드래곤이 아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도 저 숲에 들어가지 못할 걸세. 자네도 이제부터는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것이야.”
“저기요.”
장우성과 고든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내 침묵을 지키던 데안이 조심스럽게 고든을 보며 말을 걸었다.
“데안. 무슨 일이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 좀. 이제 남쪽으로는 많이 내려왔으니, 그만 서쪽으로 가야 할 텐데요.”
“커험. 글쎄. 지금까지야 숲에 붙어서 왔으니 사람들을 안 만났지만, 서쪽으로 가면 도시에 들어가게 될 텐데 우리 옷차림으로야 어디...”
고든이 흙먼지와 굳은 피로 누더기가 된 옷을 들어 보이며 길게 헛기침을 했다. 장우성은 일부러 보여주는 듯한 행동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와 같이 가죠. 여러분들의 차림으로는, 뭐 사실 저도 썩 괜찮은 차림새는 아니지만, 아무튼 마을로 들어가면 환영받지 못할 것 같으니 제가 옷 정도는 사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고든이 덥석 손을 잡으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피와 흙먼지. 그리고 기름기가 뒤섞인 더러운 손이었다. 장우성은 슬그머니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뭐, 이 정도쯤이야. 저도 어차피 가려는 곳이 있는데, 가시는 곳까지 길 안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딘가? 내 용병일을 하면서 여기저기 다녀 본 곳이 꽤 되는 데.”
“저도 설명으로만 전해들은 곳이라 지금의 지명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여기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나올 겁니다.”
“음? 그래? 사연이 있나 보군. 그 검들과 관련된 것인가?”
고든이 배낭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검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날카롭게 물어왔다.
용병들 가운데에도 험하게 구르는 사람들은 한 개쯤 여벌의 검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지만, 장우성처럼 많은 검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다.
“맞습니다. 일종의 유물입니다.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놓아야 하거든요.”
장우성은 ‘과연 나이를 헛먹은 아저씨는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군. 알겠네. 그런데 자네의 이름은 뭔가?”
고든이 뒤늦게 이름을 물어왔다. 고기를 먹으며 대충대충 묻는 말에 대답만 하다가 이제야 장우성에게 관심이 간 것이었다.
“장우성. 이름이 좀 특이하죠? 그냥 장이라고 불러주세요.”
장우성은 자신의 본래 이름을 말했다. 전생의 자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베슈린이라는 소년의 이름은 불길해서 쓰기 싫어서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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