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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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빙 1권-1

2015.01.08 조회 1,926 추천 19


 사랑을 위하여.
 
 
 제1장 출관하는 날
 
 꼭 삼 년만의 외출이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폐관수련이 끝나고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사매와 즐거이 놀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나온 첫날, 임무를 부여받은 오도경은 입이 오리주둥이처럼 튀어나오고 말았다.
 “저더러 전령을 하란 말인가요, 지금?”
 “그래, 사정이 그렇게 되었다.
 “사부님, 저 오늘 출관했습니다!”
 “알고 있다. 겸사겸사 바깥바람이나 좀 쐬고 오려무나.”
 “아뇨, 좀 쉬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삼 년 동안 쉬었으면 충분하잖아.”
 “쉬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삼 년 동안 뼈 빠지게 수련했습니다.”
 “안 봤으니 아나.”
 어라, 사부란 사람이 한다는 소리 좀 보게. 다른 놈이 전령을 나가라 등 떠밀면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쌍지팡이를 들고 나서?
 ‘내 싸가지 없는 것은 일찌감치 알아보았다만, 그래도 인정머리는 조금 있을 줄 알았거늘. 에라이, 호랑말코 같은 인간아!’
 도경은 소 위에 걸터앉아 있는 사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눈 깔지 못하겠느냐?”
 사부인 우상진인이 대뜸 호통을 내질렀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아니, 말미잘 같은 놈!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렇지 어디 사부한테 눈을 부라려. 싹수가 노란 놈이란 것을 진즉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에잉, 돈깨나 있는 집안이라며 제자로 들이라는 저 각통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각통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보는 우상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달래듯 말했다.
 “달포 전에 대대적인 습격이 있었거든. 많은 고수가 꺾이고 부러져 밖으로 나갈 만한 사람이 없구나.”
 “사부를 보내세요, 사부! 우리 산채에서 최고수 아닙니까?”
 “이놈,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사부를 부려먹으려고 들어?”
 “피장파장이죠. 제자가 사지로 내몰리게 생겼으면 얼른 구해줘야지, 오히려 북 치고 장구 치면 되겠습니까?”
 “이 새끼가 어디서 고함을 질러?”
 놈에 이어 새끼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젠 ‘시’자 붙은 욕이 나올 차례다. 그 이후로는 안 봐도 뻔했다. 도경이 맞고함을 칠 것이고, 부아가 치민 우송이 손을 쓸 터.
 싸움은 도경의 갈비뼈가 두어 개 부러져야 끝이 날 텐데, 전령으로 밖에 나가야만 할 도경이 다치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각통은 더럭 의심이 들었다.
 가만, 도경이 저놈 혹시 밖에 안 나가려고 일부러 대드는 것 아냐?
 삼 년 전의 행실을 돌이켜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다. 일부러 사부를 자극해 부상을 입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원래 약삭빠른 아이였었지. 하나도 안 변했구나.’
 “도경아,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우리 산채 사정이 아주 안 좋다. 식량이 부족하단 말이다.”
 도경은 우상(牛上)이란 별호에 맞춰 커다란 황소를 끌고 다니는 사부한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식량이 부족하면 그 소를 잡으면 되겠네요.”
 순간 우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안 돼! 소는 내 상징 같은 존재야.”
 “그 소를 때려잡으면 서른 명쯤 배 두드리고 먹겠는데, 반대만 하지 말고 제 말 좀 들어요. 삼 년 동안 고기 근처, 아니 구경도 못해봤는데 이 참에 고기 맛 좀 봅시다.”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소. 이보시게, 각통. 이놈이 이렇게 흉악한 놈이라네.”
 각통은 소를 힐끗 보았다.
 그 역시 우상이 소를 끌고 다니는 것은 불만이었다. 원체 큰 놈이라 먹기도 많이 먹었고, 아무 데나 똥을 싸질러대는 통에 어딜 가나 파리가 들끓었고,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니다보니 기물 파손도 다반사였다.
 원래 그의 도호는 우상(雨桑)이다. 따라서 소를 끌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솔직히 우상(牛上)이란 별호가 뭐가 좋다고.
 자기를 잡아먹자는 소리를 알아들은 탓일까?
 황소가 뿔을 세우고 한 발 전진했다.
 워어.
 발을 구르고 고개를 휘휘 돌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돌진할 것만 같았다.
 잘 한다, 이 새끼! 덤벼라, 덤벼! 일장에 쳐 죽이리라.
 잔뜩 벼르며 내력을 끌어올리는데, 눈치를 챈 것인지 놈이 슬쩍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우상의 몸에다 머리를 비벼대는데, 흡사 주인한테 재롱을 떠는 강아지 같았다.
 음무어
 “오, 그래. 내 새끼, 진정해라.”
 다정한 손길로 소를 토닥거리는 사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도경은 천불이 났다.
 제자한텐 백날 가야 다정한 눈길 한번 안 주던 양반이, 소를 친자식처럼 끼고 돌아? 걸핏하면 돈 가져오라며 윽박지르던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이 떠올라 도경은 거센 콧김을 불어댔다.
 “어쨌든 전 죽어도 못 갑니다.”
 “오냐, 가지 마라. 여기서 그냥 내 손에 죽어라!”
 우상이 소매를 걷어붙이자 각통이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상, 자네 왜 이러나? 좀 참으시게. 그리고 도경아, 너도 사부한테 이러는 게 아니다.”
 각통의 양비론에 도경은 섭섭함을 느꼈다.
 “어디까지나 사부가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잖아요.”
 “뭐가 어쩌고 어째?”
 갑자기 우상의 신형이 탄환처럼 쏘아졌다.
 중간에 서 있는 각통마저 아랑곳하지 않은 무지막지한 기세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면충돌을 할 판이라 각통은 슬며시 왼발을 밖으로 뺐다. 그가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나자 우상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듯한 손동작에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뒤따랐다. 아마도 전신의 공력을 실은 것 같았다.
 이것 봐, 이것! 이게 어디 제자를 공격하는 본새야, 불구대천의 원수를 공격하는 본새지.
 내심 투덜거리며 도경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손에 실린 공력의 차이를 생각해 손을 두 번 세 번 움직여 부딪쳤다. 거듭된 부딪침으로 힘의 차이를 상쇄하려는 것이다.
 투다다다닥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은 손을 열두 번이나 부딪쳤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고 보니, 각통으로서도 열이 뻗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
 면피할 말을 뱉어낸 그는 곧장 주먹을 말아 쭉 뻗었다.
 구우우우웅
 공기를 진동시키며 무지막지한 권력이 밀려나갔다.
 느닷없이 측면에서 파고든 경력에, 우상과 도경은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쾅
 정통으로 얻어맞은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졌다.
 우상이 씨근덕거렸다.
 “각통, 방해하지 마라, 내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자식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고 말겠다.”
 사부의 심기가 심상찮아 보였다. 심기가 불편하기는 도경도 마찬가지였으나, 내색했다 두들겨 맞으면 자기만 손해였으므로 꾹 참았다.
 ‘두고 봅시다. 내가 사부 수준을 넘어서는 그 순간, 당신은…….’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치려는 찰나, 우상이 크게 한 발 내딛었다. 그 바람에 상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도경이 급히 말했다.
 “전서구를 날리면 될 것 아닙니까?”
 “전서구가 떨어졌다.”
 “날려 보낸 비둘기 중에서 돌아온 놈 없어요?”
 “중간에 놈들한테 모조리 잡힌 것인지, 매한테 잡아먹힌 것인지 우리 것은 물론 다른 산채 것도 오지 않고 있다.”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리면 안 될까요?”
 “역시 말로 해선 안 되겠다.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정말 가기 싫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우각채는 적의 세력권 안에 포함되어 있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살을 빼는 셈치고 적게 먹으면 안 될까요?”
 “식량문제만 걸린 게 아니다. 식량보다는 그 문제가 더 급하다.”
 “무슨 문젠데요?”
 도경은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우상의 눈엔 그 속셈이 뻔히 보였다.
 “어떻게 시간을 끌어 유야무야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그는 무림명숙의 체통에 걸맞지 않게 뒷골목 불량배처럼 손가락을 뚝뚝 꺾으며 위협을 가했다. 그때, 요란한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습격이다!”
 “따라와!”
 우상과 각통이 경공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 도경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필 내가 나오는 날 공격하고 지랄이야.”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사부를 좇아 부지런히 달렸다.
 잠시 후,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왜 목책이 성벽 안에 세워져 있는 겁니까?”
 도경은 한달음에 목책 위로 뛰어올라갔다.
 각통이 말했다.
 “이틀 전에 빼앗겼다.”
 40장(丈) 정도 아래에 위치한 성벽은 반쯤 허물어져 있는데, 불에 탄 듯 거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땅도 움푹움푹 파여 있었다.
 “화약! 설마 저 새끼들이 화포를?”
 각통은 침통하게 말했다.
 “맞아, 화포를 쏘아댔어.”
 도경은 기가 찼다.
 “아니, 어떤 시러배 잡놈들이 괴물들한테 화포를 만들어줬답…… 윽?”
 쾅
 화포가 불을 뿜자 도경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틀고 화포를 유심히 살폈다.
 “우리도 화포 만들었어요? 아니, 화포를 가지고 있는데도 성벽을 빼앗겼단 말입니까?”
 도경의 질책성 발언에 화포에 탄환을 장전하던 머리를 빡빡 깎은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도경의 친구 심방으로 그는 소림출신의 무승이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저놈들한테 빼앗은 거다.”
 도경은 화포의 매끄러운 포신을 만지며 감탄했다.
 “아니, 저 짐승 같은 놈들이 이걸 만들었다고?”
 “그런 것 같아. 관에서 만든 것보다 사거리도 길고 정확도도 높다. 게다가 견고하기까지 하지.”
 쾅
 심방은 능숙하게 쏘고 얼른 탄환을 장전했다. 본디 셋이 붙어서 해야 하는 일을 혼자 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내가 폐관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힘은 세지만 이건 나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는데.”
 도경이 자기 머리를 짚으며 말하는데, 여자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틀렸어요. 그들은 영리해요. 게다가 수뇌부는 더 영리하답니다.”
 노란 옷을 입어 개나리를 연상시키는 소녀가 반백 노인의 부축을 받으며 목책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여자의 목소리에 도경은 처한 상황도 잊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5척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키에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아가씨였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인지라 도경은 잽싸게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새까맣게 몰려오는 괴물들 수에 도경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맨앞에서 돌격해오는 것은 괴저(怪猪)라 불리는 괴물이었다. 키는 겨우 보통사람 가슴에나 닿을까 말까할 정도로 작았으나, 어깨는 장정의 한 배 반에 달할 만큼 떡 벌어졌다.
 긴 뻐드렁니가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고 코가 뒤집어져 콧구멍에서 삐져나온 털이 모조리 보였다. 그리고 듬성듬성한 머리털 사이로 귀가 비쭉이 솟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돼지를 연상시켰다.
 도경은 그 괴저를 볼 때마다 고사 상에 올려져 있는 돼지머리, 그것도 정상적으로 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밟혀 일그러진 돼지머리가 떠오르곤 했다.
 배가 고픈 탓인지 오늘은 수육 생각이 간절하게 떠올랐다.
 “아, 배고파.”
 괴저는 용감했다.
 함정에 빠져 죽창에 꿰이는 동료가 속출하고 옆에서 포탄에 찢겨 피를 쏟아내는데도 전혀 거리낌 없이 돌진해왔다. 개전 초기 어이없다 싶을 만큼 간단히 강북을 내준 데는 괴저의 힘이 장정 둘을 합쳐놓을 정도로 세다는 것 외에도, 저 호전성이 큰 효과를 발휘한 탓이었다.
 “어라, 괴상(怪象)도 많잖아.”
 괴상은 괴저보다 훨씬 위험했다.
 키도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는데, 어떤 놈은 거의 두 배만했다. 덩치만큼이나 힘도 좋아 사람을 맨손으로 찢어죽일 정도였다. 괴저 하나를 잡는 데는 잘 훈련된 정병 셋, 괴상은 스무 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도마뱀처럼 생긴 괴상은 털이 없는 머리가 햇빛에 반들거려 쉽게 눈에 띄었다.
 끊임없이 성벽을 넘어오는 놈들을 보고 도경은 질려버렸다.
 “도대체 몇 놈이나 온 거야?”
 심방이 말했다.
 “다섯 번의 공격…….”
 도경은 재빨리 말을 끊었다.
 “다섯 번?”
 “그래, 다섯 번이나 공격당했어. 그동안에 죽인 괴물만도 일천에 육박하는데 계속 충원을 하는지 수가 줄지를 않아.”
 “아주 작심하고 왔구나.”
 “그런 것 같다.”
 불현듯 괴물이 다섯 번이나 공격해왔고, 놈들을 일천 가까이 죽였다면 이쪽의 피해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클 것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젠장, 그래서 마을이 이렇게 조용한 거구나.”
 싸우는 자도 고작 오십에 불과했다.
 폐관에 들기 전만해도 오백이 넘었는데.
 “뭐해, 안 싸우고?”
 사부의 질책에 도경은 방관자적 자세에서 벗어났다.
 사부는 비도를 뿌리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괴저의 눈에 자루까지 틀어박혔다. 도경은 목책에 걸쳐진 활을 들고 전통에서 꺼낸 살로 시위를 당겼다.
 쐐애액
 시위를 떠난 화살이 괴저의 이마 깊숙이 박혔다.
 “좋았어.”
 “겨우 하나 잡고 좋아하기는.”
 도경은 사부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다시 시위를 당겼다.
 이번엔 괴상을 잡아야지.
 화살이 괴저들을 지휘하는 괴상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탁
 괴상이 사람 키만큼이나 큰 칼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어쭈, 제법인데.”
 화살이 연거푸 날아갔다.
 어찌나 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놓는지 손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끄억.”
 용케 첫 번째 화살은 쳐냈으나 두 번째 화살은 피하지 못한 괴상이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때, 세 번째 화살이 가슴에 박혔다.
 “봤죠?”
 잠시 손을 치켜들고 환호하던 도경이 이내 새 목표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사매는 어디 있어요?”
 순간,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비명소리는 그대로였으나 용기를 북돋아주는 함성이 사라진 괴이쩍은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다.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도경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심방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녀는 죽었네.”
 “거짓말! 사매가 왜 죽어?”
 심방은 말없이 마당 한구석을 가리켰다.
 거기 큰 봉분이 하나 있었다.
 “미안, 너무 많이 죽어서 일일이 무덤을 만들어줄 수가 없었어.”
 “으아아.”
 도경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심방한테 쇄도하자 작은 아가씨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
 심방을 한 대 칠 거란 그녀의 예상은 깨끗이 빗나갔다.
 도경은 심방을 지나쳐 한 팔로 대포 옆에 쌓인 포탄 세 개를 안고, 다른 팔엔 횃불을 들었다. 그녀가 심방 옆을 도는 그의 깔끔한 신법에 감탄할 때, 도경은 이미 목책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있었다.
 목책 밑에 있던 괴저 머리를 밟고 그는 다시 도약했다. 밟힌 괴저의 머리가 빠개지면서 목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즉사였다.
 횃불이 포탄의 심지를 스치듯 지나는 순간 심지에 불이 붙었다.
 “이거나 먹어라.”
 포탄 하나가 괴상의 가랑이 사이에 떨어졌다.
 콰앙
 강력한 폭발과 함께 괴상이 산산조각이 났다. 곧이어 나머지 두 개의 포탄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괴저 밀집지역에서 잇달아 폭발했다.
 지휘자로 보이는 괴상이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저놈 잡아 죽이라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구쳤는지 어느 날 갑자기 괴상야릇한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괴물들은 말을 못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은 물론, 문자까지 쓴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몇몇 학자들이 저들이 온 곳, 온 이유, 온 방법 등을 밝히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말과 글을 해독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저 새끼 뭐라는 거야?”
 자기가 모르는 말, 혹은 이해 못하는 말은 무조건 욕이라는 반듯한(?) 가치관을 소유한 도경은 무조건 지휘자로 보이는 놈을 찍었다.
 그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며 손을 긋는데, 앞을 막아서던 괴저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언제 꺼냈는지 그의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자식들, 목이 왜 이렇게 짧아.”
 상체를 갑주로 감싸고 있는데 목이 짧아 머리가 어깨에 바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틈으로 비수를 찔러 목을 그어버리자니 적잖게 신경이 쓰였다.
 검에 기를 집중시키면 갑주까지 베어버릴 수 있지만,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든 터라 힘을 아껴야만 했다. 두 놈의 목을 그어버리자 앞을 막아선 괴저들이 잔뜩 목을 움츠렸다. 그러자 비수를 꽂을 틈이 안 보였다.
 휘이잉
 가시가 박힌 철퇴가 머리통을 후려쳐왔다. 상체를 숙여 그것을 흘린 도경은 그 즉시 어깨로 가슴을 들이받았다.
 퍽
 갑주가 깨져나가면서 괴저가 나뒹굴었다.
 도경은 그놈 면상을 밟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놀라 입을 딱 벌리는 괴상의 표정을 본 도경은 흡족한 웃음을 빼물었다.
 너 이제 죽었어.
 그런데 어떻게 죽이면 잘 죽였다는 소문이 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도경은 발을 뻗었다.
 각통대사한테 배운 소림 연환각으로 차죽일 생각이었다. 이마를 발꿈치로 찍어버리려는 찰나, 놈들이 창이 내밀었다. 놈들이 처음 튀어나왔을 때만 해도 무기는 하잘 것 없었다.
 그러나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무기를 습득하고 적응해나갔다. 지금 내미는 저 창도 명나라 군사의 것을 빼앗은 것이리라.
 도경은 발바닥으로 창두를 밟았다.
 뾰족한 창날과 발이 부딪쳤는데 놀랍게도 창의 중동이 부러져나갔다. 아래로 내린 손이 원형을 그리는 순간, 다섯 개의 창이 잘려나갔다. 괴상의 면상은 여전히 사정권 안에 있었다. 다만 창을 상대하느라 거리와 각도가 틀어져 콧잔등에 만족해야 없었다.
 터억
 괴상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발끝으로 괴상의 팔뚝을 가볍게 찍고 그 반동으로 한 차례 공중제비를 돈 도경은 발등으로 놈의 하박을 힘껏 걷어찼다. 괴물의 팔이 부러져 나갔다.
 쾌애엑
 괴상이 괴성을 내지르며 팔을 늘어뜨렸다.
 그 바람에 턱이 훤히 드러났고, 도경의 발등이 꽂혔다.
 파바바박
 발등이 괴상의 면상 이곳저곳을 빠르게 걷어찼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소림 연환각이었다. 아무리 뼈대가 단단한 괴상이라도 그것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최후의 비명을 지르며 괴상이 넘어졌다.
 도경은 놈의 가슴팍을 밟고 서서 사자후를 터뜨렸다.
 몰려들던 괴저들이 놀라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치고 도경을 에워쌌다. 좁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도경은 눈부시게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 접근한, 전면의 괴저를 걷어차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낸 그는 오른쪽 괴저의 손목을 비틀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 즉시 옆에 있던 괴저의 목을 쳐 부러뜨리고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그 사체를 집어던졌다. 처음 다섯 놈을 때려잡을 때까지만 해도 힘이 넘쳤다. 그런데 열 명이 넘어가자 슬슬 팔다리가 무거워지고, 스물이 넘어가자 내력이 달렸다. 거기다 목과 갑주 사이에 끼인 비수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무기를 하나 더 갖고 다니는 건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출관하자마자 일이 터지는 바람에 무기를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긴 했다.
 ‘전령으로 나가라 어쩌라 귀찮게 굴지 말고 무기나 챙겨줬으면 좋았잖아.’
 괴저의 가슴팍에 도경의 손이 살짝 붙었다 떨어졌다. 그저 슬쩍 어루만진 것 같은데, 눈동자가 풀리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내가중수법으로 내부를 부숴버린 것이었다.
 지휘자를 죽인 복수를 하겠다는 것인지 괴저는 끊임없이 몰려왔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괴물들의 물결…… 사방에서 조여드는 압박감에 도경은 벽공장을 마구 내갈겼다.
 퍼억
 머리가 뭉개진 괴저가 나뒹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료가 나가떨어지자 공격이 잠시 주춤했다.
 그 사이 도경은 한숨 돌리며 빠르게 내기를 소주천했다. 한 달 전부터 식품 반입이 뚝 끊기는 바람에 벽곡단으로만 끼니를 때워서 출관하기 전부터 배가 고팠었다. 괴물과 싸우느라 좌충우돌 움직이다보니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왔다. 그 때문인지, 운기조식이 짧은 탓인지 영 힘이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공격이 시작되었군. 그래서 보급이 끊긴 거야. 빌어먹을, 연통이라도 넣어줬음 좋았잖아. 그럼 사매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는 사매의 죽음을 떠올리며 분노를 일으키려 했다. 그 분노의 힘으로 싸움을 이어가려했는데, 초기의 충격이 가신 탓인지 약발이 안 먹혔다.
 괴저가 못이 거꾸로 박힌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시 몰려왔다.
 도경은 상체를 비틀어 몽둥이를 흘리고 괴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목을 힘껏 조이자 괴저가 죽는다고 악을 썼다. 손목이 부러진 것이다.
 떨어지는 몽둥이를 낚아챈 도경은 강호의 일절로 불리는 소림곤을 발휘했다. 휘두르는 몽둥이에 걸린 괴저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한편, 목책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놈들의 대포 공격에 목책 안은 불바다로 변했고, 목책도 반쯤 무너져 있었다.
 각통대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목책을 넘어오는 괴저들을 선장으로 후려갈겼고, 우상진인은 닥치는 대로 검으로 벴다. 그밖에 오십여 무사들도 목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또 싸웠다.
 다들 바삐 움직이는데 한가한 사람이 둘 있었다.
 좀 전에 도경이 처음 만난 여자와 그녀를 부축하던 노인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저 사람, 오도경이라고 그랬죠? 대단하네요.”
 “그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꽤 쓸 만한 편이지.”
 그녀 곁에 다가온 괴저를 후려쳐 턱을 작살내버린 우상이 말했다.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실력은 좋아요.”
 전장의 소란 속에서도 그 말을 들은 듯 심방이 끼어들었다.
 “진인의 말은 믿지 마십시오. 겉으로 툴툴거려 그렇지 심성은 좋은 친굽니다.”
 “하나뿐인 친구라고 편들기는.”
 우상은 입을 삐쭉거리며 목책 아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릿발 같은 검기가 쏘아져 목책에 매달린 괴저의 팔을 무 자르듯 잘라버렸다. 이십대 청년처럼 팔팔한 그를 보며 아가씨가 말했다.
 “예순이 내일 모레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직 정정하시네요.”
 “언놈이 그 따위 모함을 해. 환갑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도경이 그놈이 그랬지?”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폐관했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렇군.”
 “심방대사님.”
 심방이 말했다.
 “대사란 호칭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심방이라 불러주십시오.”
 호칭문제로 왈가불가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실해 보이는 스님의 법명을 함부로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대사란 명칭을 고수했다.
 “대사님, 친구 분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는데요.”
 심방은 대포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도경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재빠른 동작과 손놀림으로 유명했는데, 많이 지쳤는지 동작이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그렇군요.”
 그는 대포의 방향을 돌렸다.
 아가씨가 말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심방은 도경을 조준했고, 곧 대포가 불을 뿜었다. 괴저를 밀어내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도경은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안력을 돋우자 날아오는 포탄과 그 너머 목책 위에서 손을 흔드는 심방이 또렷하게 보였다.
 “야, 이 자식아, 여기로 쏘면 어떡해?”
 핑핑
 꼿꼿이 세운 검지가 고개를 숙이며 잇달아 두 번 튕겨졌다.
 캬아악
 전면의 괴저가 눈을 부여잡고 괴성을 질렀다.
 도경은 눈을 감싼 채 허둥대는 괴저의 가슴팍을 힘차게 밀어 찼다. 뒤쪽 괴저까지 밀려 뒷걸음질 치는 순간, 몸을 숙인 채 괴저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때 포탄이 떨어졌다.
 콰콰콰콰쾅
 연속적인 폭발음과 함께 길이 뚫렸다. 그 길을 따라 달리며 몇 놈을 처리하고 목책에 도착한 도경은 혀를 빼물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전투는 그 후로도 반 시진 남짓 더 이어졌고, 이제 더 이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다고 포기하는 순간 끝이 났다. 아군의 인명피해가 삼십을 넘어서는 즈음이었다.
 급히 동료 시체를 수습해 물러가는 괴저들을 바라보며 도경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런 공격을 다섯 번이나 물리친 겁니까?”
 우상이 말했다.
 “다 내가 뛰어난 덕이다.”
 잘난 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사부가 아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도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한 후 기지개를 켰다.
 “먹을 것 좀 없어요.”
 우상이 말했다.
 “없다.”
 “하나도 없어요?”
 “내 말을 콧등으로 들은 거냐? 식량이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 전령으로 나가라고 한건데 싫다고 뻗대기나 하고.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렇게 어른 말을 안 듣냐?”
 “커서 뭐가 되긴 뭐가 되요? 이미 다 컸는데.”
 “장래 희망 같은 것도 없냐?”
 “없어요.”
 “쯧쯧쯧, 약관이 내일 모렌데 무위도식이나 하고.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도경이 사부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무위도식은 누가 무위도식했다고 그러세요? 밤을 낮 삼아 수련을 했고, 목숨 걸고 괴물하고 싸우기까지 했는데요. 장래희망도 그래요. 생존이 목적인 시대에 그런 것은 사치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입만 살아서 말은 잘하지.”
 “장래희망 같은 것을 왜 갖고 살아야 하죠? 솔직히 말해서 장래희망을 꼭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그건 개인의 자유라고요.”
 “넌 물에 빠지면 주둥이만 둥둥 뜰 거다.”
 “정말 먹을 거 없어요?”
 “없어.”
 도경의 시선이 불타고 무너져 내린 건물들 사이를 훑었다. 그의 눈에 어슬렁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니는 소가 들어왔다.
 전투가 벌어질 땐 어디 숨어 있다 끝나니까 기어 나오네. 거참 눈치 빠른 소 새낄세.
 그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옳지, 좋은 식량을 두고 괜히 엉뚱한 생각만 했네. 사부, 저 소 새끼 잡아먹읍시다.”
 “안 돼!”
 우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를 놔두면 뭐 합니까? 잡아먹읍시다.”
 “안 돼!”
 “왜요?”
 “내 상징이니까.”
 “아니, 하나뿐인 제자가 배가 고파 죽겠다는데 정말 이러깁니까?”
 “굶어 죽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돼.”
 “제가 중요합니까, 소가 중요합니까?”
 우상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
 배신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배신감을 곱씹으며 고픈 배를 움켜잡는데, 노한 음성이 귀청을 때렸다.
 “빌어먹을!”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며 도경은 주위를 둘려보았다.
 아침을 함께 하며 웃고 떠들던 동료가 저녁이 되기도 전에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시체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티격태격하는 괴팍한 사제(師弟)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싸울 힘이 조금만 남아 있었어도 멱살잡이를 했을 것이다.
 “험험.”
 따가운 눈총에 무안해진 도경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시장기는 변함이 없었다.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아는지 소는 길게 울음을 흘리며 건물 뒤로 숨었다.
 언젠간 꼭 먹고 말겠다.
 그는 굳게 결심했다.
 그때 심방이 다가와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과일을 말린 것이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 키 작은 아가씨와 같이 다니던 반백의 노인이 다가왔다. 눈썹은 아래로 축 쳐지고 입 꼬리는 위로 올라가서 왠지 불쌍해 보이는 노임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울상이라 할 만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허기져 보였다.
 도경이 머뭇머뭇 말린 과일을 내미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거 좀 드실래요?”
 거절하기를 바랐으나 노인은 염치도 없이 날름 그것을 받아 입에 넣어버렸다.
 “뉘십니까?”
 “그냥 이름 없는 종복이라네.”
 종복이라면 주인이 있을 터.
 도경은 주인으로 짐작되는 키 작은 소저를 쳐다보았다.
 “오도경이라 합니다. 무당의 우상진인을 사사했습니다.”
 “제갈미입니다.”
 배가 고픈 탓일까? 여드름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괜히 언짢게 느껴졌다. 누구는 굶어서 얼굴에 마른버짐이 가득하거늘, 저 여자는 잘 먹어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하구나.
 과일조각을 먹었더니 더 배가 고프다. 체면이나 예의 같은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닌지라 그는 가볍게 반례하고 목책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딴 곳으로 갈 줄 알았던 그녀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무당 문하인데 주로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는군요.”
 “손에 들린 무기가 없어서…… 전 이것저것 상황에 맞춰서 무공을 마구 쓰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권장은 소림이 났지요.”
 휴식을 취하던 각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면에 우상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권장도 무당이 최고야. 십단금은 물론 면장만으로도 대적할 자가 없지.”
 혼잣말이지만 소리가 커서 모두에게 들렸다.
 하지만 다들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울상의 노인이 물었다.
 “타파의 무공도 열심히 익힌 모양이지?”
 “그럭저럭.”
 괴물의 중원침공으로 강북에 기반을 둔 문파의 상당수가 멸문에 가까운 참화를 겪었다. 도경의 말대로 생존이 최우선시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구파에서는 그간의 알력관계나 이해관계를 넘어서 인연이 닿을 경우 다른 파 제자들한테까지 진산절학을 베풀었다. 물론 밑천을 모조리 털어주지는 않았다.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그 범위 내에서만 무공을 전수했다. 아무튼 괴물이 그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든 셈이었다.
 도경은 옆에 앉는 심방에게 말했다.
 “전황은 어때?”
 “여전히 장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야.”
 “모양이라니? 정확한 건 아냐?”
 “완전히 포위당했어. 소식이 끊긴 지 오래 됐어.”
 노인이 말했다.
 “내가 좀 아는데, 심방스님의 말대로 지루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있네.”
 “사천은요?”
 “아미, 청성, 사천당문 등이 그럭저럭 잘 막아내고 있다네.”
 도경은 각통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사태가 이 지경이라면 전령을 보낼 게 아니라 다른 산채로 탈출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참에 아예 강남으로 넘어가는 건 어떨까요?”
 강북이 괴물들 수중에 떨어지고 다들 남부여대해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갈 때, 강호인 일부는 강북에 남았다. 문파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원한을 뼈에 새긴 그들은 군데군데 산채를 만들고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본산을 잊지 못한 자들은 강호의 의기를 내세우며 잿더미로 변한 본산에 둥지를 틀고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고, 일부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괴물들을 습격했다.
 우상과 각통에서 한 글자를 따서 지은 우각채는 그런 산채 중의 하나였다. 둘이 무당과 소림의 명숙이었던 만큼, 산채 중에선 세력이 강해 화산이나 숭산 같은 각파의 본거지를 제외하면 세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러나 공들여 만든 산채가 완전히 몰락한 지금, 우상은 애상에 잠겼다.
 “우각채도 끝이구나.”
 도경은 사부가 애상에 잠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제 말 안 들려요? 탈출합시다.”
 우상은 역정이 났다.
 “내가 네놈 때문에 감정이 메말라간다, 감정이.”
 “사춘기 계집애도 아니고 감정타령은.”
 우상이 화를 터뜨리려 하자 각통이 끼어들었다.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이 숫자로는 둘로 나눌 수가 없을 것 같아.”
 심방이 말했다.
 “사부님, 그래도 둘로 나눠야 합니다.”
 심각한 분위기에 우상이 초를 쳤다.
 “봤지? 임마, 모름지기 사부에게는 저렇게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 거야. 친구 좀 보고 배워라, 배워.”
 “사부님도 각통대사님처럼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친다면 전 일 년 내내 업고 다니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제갈미가 한마디 했다.
 “조용하세요.”
 나직한 음성이었지만, 사람들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도경은 분위기에 눌려 입을 닫았고, 우상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은 둘로 나눕니다. 오늘밤 산채를 버립니다.”
 도경은 사부가 반드시 토를 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부는 침묵을 지켰다. 우각채에 대한 애정을 감안할 때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여자 뭐야?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굴잖아.’
 그러고 보면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 낯이 설었다.
 폐관하는 사이 새로 들어온 사람인가?
 도경이 머리를 굴릴 때 울상의 노인이 위로의 말을 했다.
 “진인의 활약 덕에 강남이 편안할 수 있었으니 너무 애석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웬일로 사부가 겸양의 말을 다할까?
 도경은 여러모로 오늘은 놀라운 날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사매를 떠올리고는 침울해졌다.
 눈을 감는데 눈꺼풀 안쪽이 축축했다.
 울상의 노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소림, 무당, 화산, 종남, 개방 같은 명문정파들이 적들을 막아선 덕분에 괴물이 강남을 침범할 수 없었던 겁니다.”
 사실이었다. 원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주원장이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꺾고 대륙을 장악해나가는 순간, 괴물이 대도(북경)를 밀고 내려왔다. 결국 원을 끝장낸 것은 괴물이었고, 여세를 몰아 남으로 내려오는 그들을 저지한 것은 강호의 힘이었다.
 막아내는 데는 끝내 실패했지만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주원장은 군사를 물려 장강에 진을 칠 수 있었고, 강남의 제문파와 세가들도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다들 상념에 젖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경이 물었다.
 “어느 산채로 갈 겁니까?”
 “화산으로 간다.”
 
 
 제2장 화산으로 가는 길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제갈미는 합동무덤 앞에서 지전을 태우고 있는 도경을 재촉했다. 그래도 떠날 생각을 않자 달래듯 다시 물었다.
 “친한 사이였나 보군요. 혹시 정인인가요?”
 “정인이라……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짝사랑하셨나 보군요?”
 “그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단지 철이 들면서 사매가 제 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정돕니다. 우리 산채에 제 나이 또래의 여자애는 정말 드물었거든요. 사실 사매뿐이었어요.”
 도경은 마지막으로 명복을 빌어주고 보따리를 손에 들었다.
 “갑시다.”
 그들은 뒷산까지 함께 이동하다 갈림길이 나오는 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우상진인이 말했다.
 “아무래도 젊은 너희들이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니? 이쪽이 덜 위험할 것 같으니 너희들이 가거라.”
 “그러죠.”
 도경은 얼른 대답하고 발을 들었다.
 “못된 놈, 사부가 위험을 자처하면, 빈말일지언정 우리가 위험한 길로 가겠습니다. 해야 마땅하지. 냉큼 걸음을 옮겨. 넌 그래서 안 돼.”
 제자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날리며 우상이 소리쳤다.
 도경은 잽싸게 피하며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빈말을 왜 합니까, 빈 말을? 그리고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구만. 무림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젊은 우리가 살아야죠.”
 울상의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젊은 사람이 살아야지.”
 “저것 봐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혼자만 저러지.”
 도경은 울상의 노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노인장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냥 제노인이라 불러주게.”
 일행은 두 무리로 갈라섰다.
 각통이 심방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조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달빛아래서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은은한 눈빛이 오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이었다.
 도경은 감동을 느끼며 말했다.
 “사부, 우리도 할까요?”
 “일 없다, 자식아, 가다가 넘어져 코나 깨져버려라.”
 “사부가 돼 가지고 한다는 말 좀 보게. 소나 내놔요.”
 도경은 헤어지는 마당까지 사부의 소를 넘봤다.
 소가 알아듣는 것처럼 투레질을 했다.
 우상이 말했다.
 “안 돼.”
 작별인사를 마치고 헤어진 그들은 어둠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동안 묵묵히 걷기만 하던 도경이 불쑥 말했다.
 “심방아, 그 여자도 이쪽으로 오라고 할 걸 그랬지.”
 “왜 마음에 드냐?”
 “에이, 무슨 소리, 나 눈 높아.”
 “그래도 이 부근에서는 유일한 인간 여자일 텐데.”
 “찾아보면 꽤 있을 거야. 화산엔 여자가 좀 많았으면 좋겠군.”
 그것으로 다시 대화가 끊겼다.
 심방이 검지로 왼쪽을 가리킨 후, 자신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도경은 그의 지시대로 왼쪽으로 걸어 나갔다.
 “젠장.”
 절로 욕설이 나왔다.
 괴저 부대가 길목을 막고 진을 치고 있었다. 답답해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목덜미로 역한 입 냄새가 쏟아졌다. 처음 보는 사십대 장한이 그의 고개 너머로 진지를 보더니, 이를 사려 물었다.
 도경은 그를 밀치고 일어나 심방 쪽으로 갔다.
 “돌아가자. 빨리 움직이면 일행과 합류할 수 있을 거야.”
 이쪽 길은 틀렸으니 빨리 사부와 합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심방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뒤를 다르던 일행들이 고개를 넘어 진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면 돌파를 하려는 것 같았다.
 “안 돼, 돌아와.”
 도경은 목소리를 돋우었다.
 천막의 숫자를 보건대, 최소한 이백 명 넘게 주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작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저들을 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멍텅구리 같은 것들.”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우리는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심방이 빨랐다.
 그는 고개를 넘어가며 말했다.
 “우리도 가자.”
 “가다니, 어딜?”
 “그럼 동료를 버리란 말이야?”
 심방의 반문에 도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버리고 우리끼리 도망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입 밖에 낼 순 없었다. 친구의 태도가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갈 태세군.
 친구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수는 없었다. 도경은 발등에 떨어져 발이 깨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가 없는 삼 년 동안 저 친구들과 깊은 정이 든 게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나설 이유가 없었다.
 도경은 가장 늦게 출발했으나 곧 선두로 나섰다. 쥐도 새도 모르게 불침번을 잠재우고 길을 열면 들통 나지 않고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갖춰 무기도 많았다. 허리에 연검을 둘렀고, 소매 속에 비수가 두 개, 각반 속에도 두 개가 더 들어 있다. 슬며시 손에 검을 쥔 순간, 그의 신형이 스미듯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화톳불이 불티를 날리며 사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불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불침번 뒤로 돌아가며 도경은 내심 혀를 찼다.
 불 옆에서 졸고 있다니.
 나 잡아잡수 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하얀 손이 괴저의 입을 틀어막았고 다른 손의 비수가 목을 그었다. 괴저가 끽소리도 못하고 죽어 넘어질 때, 도경의 신형은 어느새 옆으로 돌고 있었다. 두 번째 불침번을 처리하고 돌아올 때까지도 첫 번째 불침번은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넘어지는 놈을 받쳐 소음을 없앤 다음 도경은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런 식으로 두어 번만 더 처리하면 진지를 돌파할 수 있으리라.
 그때, 바보 같은 놈이 넘어지고 말았다.
 입 냄새를 풀풀 풍기던 바로 그놈이다.
 쩡
 무기까지 앞세운 터라 쇳소리가 났다.
 제발 아무도 듣지 않았으면…….
 도경은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웅성거림이 들리고 천막이 걷혔다. 그리고 찢어지는 괴성! 아마도 적의 침범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조용히 돌파하긴 이미 글러버린 것이다.
 도경은 온갖 비난의 염을 담아 넘어진 놈을 쏘아보고는 제일 큰 천막 안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이왕 들통 난 것 지휘자부터 처리해야 일이 수월한 터였다.
 천막 안에는 괴상이 누워 있었다.
 도경이 뛰어드는 순간 놈이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어리둥절한 빛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이내 흉악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덩치가 무색하다 싶게 기민한 반응이었다.
 머리맡에 놓인 거대한 검을 집어든 놈이 누운 자세에서 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져 재빨리 납작 엎드렸다. 머리 위로 검이 지나치는 순간 발끝으로 바닥을 밀었다.
 누운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나간 그는 놈의 옆구리를 향해 비수를 박았다. 순간, 빛이 어른거렸다.
 푹
 비수가 갑주를 입지 않은 괴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동시에 검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날이 닿지 않는 곳을 헤집었다. 내장이 토막 난 괴상이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치켜세운 검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도경의 머리를 쪼개버리려 했다.
 도경은 황급히 바닥을 굴러 피한 다음 천막을 빠져나왔다.
 워낙 튼튼한 종족이라 내장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도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곧 죽을 것이 뻔한 놈을 맞상대하느라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괴저와 어울리는 와중에 쿵 하는 소리가 천막 안에서 들렸다.
 ‘이제야 죽었군.’
 몸 하나는 정말 튼튼한 종족이었다.
 처음엔 기습이 주효해 우세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적들이 갑옷을 갖춰 입고 나서자, 전세가 금세 역전되었다. 갑주로 보호되지 않는 곳을 집중적으로 노릴 만큼 노련한 고수가 몇 되지 않은 탓이다.
 미운 털이 박힌 중년인이 손바닥으로 괴저의 가슴을 후려쳤다.
 별다른 타격음도 없이 괴저가 나뒹굴었다.
 도경은 죽은 것으로 보이는 그 괴저의 갑주를 벗겨보았다. 피부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내부만 파괴했다.’
 기를 침투시켜 내부를 파괴하는 내가중수법은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시전할 수 없다. 결국 중년인은 상당한 고수란 말이었다.
 도경은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저런 고수가 적진에서 실수로 넘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나?
 무공은 높으나 실전경험이 전무한 초보라면 아주 드물게나마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컨대, 저 중년인은 이미 최소 여섯 번의 전투를 치렀다. 그 정도면 백전노장이란 소리는 못 듣겠지만, 적어도 초보 티를 낼 단계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왜지?
 기분 탓이었을까.
 내지르는 비수에 과도한 기가 들어갔다.
 갑주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며 생살이 베어졌고, 분수처럼 피가 뿜어졌다. 그것을 피해 보법을 밟으며 도경은 생각했다.
 긴 싸움일 될 텐데 여기서 힘을 낭비하면 안 돼.
 그는 갑주를 피해 집중적으로 맨살만 공략했다.
 절대 흥분하지 말자. 추궁은 싸움이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종횡무진 활약하는 도경과, 심방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탓이었을까. 신호탄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펑
 신호탄이 폭발하며 빛을 뿜어냈다. 빛줄기가 명멸하며 전장에 빛을 뿌리자 대지에 고인 흥건한 피가 드러났다.
 저 신호탄을 보고 개떼처럼 몰려들겠지.
 도경은 진로를 가로막은 괴저의 얼굴을 향해 장풍을 난사하며 외쳤다.
 “날 따르라!”
 우렁찬 음성이 길게 꼬리를 끌며 어둠을 찢었다.
 아무리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다 해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단신으로 적진을 돌파하던 도경은 곧 돌아섰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아 더 이상 돌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봐, 뭐하는 거야?”
 도경이 소리쳤다.
 “우린 도주가 목적이지, 적을 몰살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야.”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은 싸움에만 전념했다.
 오늘 죽은 동료들 때문에 악에 받친 탓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미친 듯이 날뛸 이유가 없었다.
 도경은 친구 곁으로 다가갔다.
 심방의 가사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다행히 그의 피는 아니었다.
 “가자!”
 심방은 도경의 권유를 무시했다.
 “여기선 우리가 제일고수야”
 도경은 심방의 그 말을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고수는 고수로서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해. 우리는 가장 늦게 전장을 이탈한다.”
 “아이쿠, 지랄을 한다. 성인군자 나셨네.”
 툴툴거리면서도 그는 심방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입으로만 온갖 야박한 타박을 해댈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에 심방은 잇몸이 드러나도록 크게 웃었다.
 도경이 말했다.
 “웃지 마라, 이놈아, 정든다.”
 갑옷과 맞부딪친 비수에서 불똥이 튀었다.
 모조리 이가 나가버린 비수를 버리고 도경은 연검을 뽑아들었다.
 적의 구원군이 몰려올 즈음에서야 심방은 도주로로 접어들었다. 일행이 모두 죽어, 고수는 가장 늦게 탈출해야 한다는 고수 책임론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둘은 젖 먹던 힘을 다해 탈출구를 뚫었다. 말 그대로 혈로였다. 앞장서 걷던 심방이 허리를 숙였다 일어서는데 손에 시체가 들려 있었다.
 도경이 옆에 바짝 붙으며 소리쳤다.
 “시체는 왜?”
 “아직 숨이 붙어 있어.”
 내가중수법을 쓰던 그 중년인이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래서 도경은 다짜고짜 그 중년인을 빼앗아 들었다. 속도 모르고 심방은 친구가 갈수록 착해진다며 흐뭇해했다.
 “이쪽으로 가야 해.”
 도경은 삼 년 동안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어제 나왔다. 자연히 바깥사정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으므로 무조건 심방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들은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관도로 나갔다. 길을 따라 반 시진쯤 달리자 괴물의 습격으로 황폐해진 마을이 나왔다. 그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반쯤 무너진 집 마당에 잡풀이 무성했고, 급하게 피난가면서 미처 챙기지 못한 세간들이 볼썽사납게 나뒹굴고 있었다.
 거미줄이 모서리마다 진을 치고 먼지가 첩첩이 쌓인 방으로 들어선 도경은, 먼지구덩이나 다름없는 침상 위에 짐짝처럼 사내를 내려놓았다.
 먼지가 풀썩 날렸다.
 도경은 사내의 가슴에 손을 붙이고 기를 불어넣었다. 사내의 입술을 타고 고통에 찌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도경은 겨우 실눈을 뜬 그를 강하게 윽박질렀다.
 “너 뭐하는 놈이냐?”
 “몰라서 묻나?”
 “난 너 몰라. 처음 보는 놈이잖아. 사승의 내력이 어떻게 되지?”
 치료할 생각은 않고 심문을 하자 심방은 적이 당황했다.
 “이러지 마.”
 “넌 빠져. 어서 말해!”
 침을 삼키는 것마저 힘이 드는지 느릿느릿 침을 삼킨 중년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광동 만서당 출신이다.”
 “광동? 광동사람이 여기 왜 있어?”
 “괴물과 싸우는 일에 광동사람이면 어떻고 귀주사람이면 어떻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완전히 납득한 것도 아니다. 무림인이 비록 다른 사람보다 많이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는 주활동 영역이 있고 대체로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산동 고수는 늘 산동에서 놀고, 사천 고수는 늘 사천에서 놀기 마련이었다.
 “너 왜 넘어졌어?”
 “무슨 질문이 그 따위요? 분명히 말해두는데, 당신이 나한테 이럴 권리는 없소.”
 “이 자식이! 일부러 넘어져 괴저를 깨운 이유가 뭐냔 말이야?”
 “이유 없소.”
 도경은 한순간 사내의 눈길이 심방에게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다.
 심방은 아는구나!
 불쾌감이 일어나 머릿속에 찐득찐득한 것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말해!”
 사내의 멱살을 꽉 움켜쥐는 순간, 사내의 눈이 까무룩해지더니 고개가 가슴팍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망할.”
 도경은 그를 놔주고 심방한테 따지듯 물었다.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가자, 가면서 얘기하자.”
 심방은 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섰고, 도경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엔 대놓고 따질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묻기가 겁이 났다. 하나뿐인 친구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참 만에 심방이 입을 열었다.
 “난 말해주고 싶었는데, 사부와 진인께서 신신당부해서 어쩔 수 없었어.”
 “사부가?”
 그럼 그렇지. 그 양반이 나를 속이라고 강요한 것이 틀림없어. 그래, 성실한 심방이 날 속일 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그 양반이 어쨌는데?”
 “우린 미끼야.”
 “미끼?”
 “그래, 그들이 편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소란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은 거야.”
 도경은 분해서 발을 굴렀다.
 “비싼 요리 먹다 돌을 씹어 이가 부러질 노인네 같으니. 뭐 젊은 사람이 살아야 된다고 안전한 길로 가라고? 어쩌면 하나뿐인 제자를 사지로 몰면서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까? 그것을 받아들인 넌 뭐냐?”
 그는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제자 된 입장에서 스승을 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너나 당연하지. 나한텐 진실을 얘기해줬어야지. 가만, 낮에 전령 운운한 것도…….”
 “맞아. 널 전령으로 보내 관심을 돌린 후 탈출할 생각이었어.”
 “사부는 그렇다 치고 각통대사님까지! 이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말세다, 말세!”
 “그런 괴물이 나다니는 세상이니 말세긴 말세지.”
 “넌 화나지도 않아?”
 “안 나.”
 “사부가 널 버린 셈이잖아.”
 “아니, 사부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거야. 난 다 이해해.”
 “살고 싶다는 욕망?”
 도경이 빈정거리자 심방은 도경의 눈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점의 사심도 없어 보이는 심방의 맑고 투명한 눈은 때때로 도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도경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심방이 말했다.
 “너 오해하고 있구나.”
 “뭘?”
 “사부는 자신들이 살려고 우릴 앞세운 것이 아니라 제갈소저를 살리려고 한 거였어.”
 “제갈미? 여기서 왜 그 여자가 나오는데?”
 도경은 잠시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그렇게 중요한 여자야? 각통대사가 너를 사지로 밀어넣을 만큼?”
 “제갈가의 마지막 혈손이라더군.”
 “귀신도 울고 간다는 그 제갈세가?”
 심방이 고개를 끄덕였고, 도경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의왼데. 제갈미라는 이름을 듣고도 전혀 그쪽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어.”
 “왜?”
 “거 왜 있잖아? 명문세가 여식한테 가지는 선입관 같은 거. 보통 제갈세가나 남궁세가 여식은 창백하다 싶을 만큼 흰 얼굴에 호수같이 맑은 눈 그리고 가녀린 목선과 늘씬한 몸매, 뭐 그런 것들을 두루 소유했다고 생각하기 싶잖아. 쳇, 그렇게 볼품없는 여자가 제갈가의 여식이라니.”
 “명문세가 여식이 꼭 예쁠 이유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생각이 그렇잖아. 보통 있는 집안 남자는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지 않나? 그럼 십중팔구 예쁜 애가 나오기 마련이잖아. 걔 부모는 외모 같은 거 안 보고 정략결혼을 한 걸까?”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 나니 섭섭한 마음이 좀 가셨다.
 그러나 꼬인 심사가 다 풀린 건 아니었다.
 “우리 사부는 제갈가 마지막 혈손이 어쩌고 하는 소리만으로 위험을 무릅쓸 위인이 아니야. 산채에 우글거리던 그 낯선 사내들도 의심스럽고. 그녀를 보호하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아마도 그럴 거야.”
 “그럴 거야? 너도 모른단 말이냐?”
 “그래.”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돼. 그냥 사부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심방은 도경이 영 미심쩍어하자 얼른 덧붙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르는 노인이 산채를 거닐고 있더라. 제노인 말이다. 사부께 물어봤더니 야밤에 들어왔다더라. 아마 그 노인이 영향을 미쳤을 거야.”
 “정말?”
 “정확한 건 아냐. 그냥 내 짐작일 뿐이야.”
 이미 벌어진 일 가지고 왈가왈부해봐야 힘만 빠지고 속만 상한다.
 도경은 화제를 돌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길 따라가는 거야.”
 “앞에 또 괴물들이 있겠지?”
 “당연하지.”
 “이 길이 화산으로 통하는 건 확실하냐?”
 “확실해.”
 “사부들은 어디로 가는데?”
 “무당.”
 
 꼬박 삼일 밤낮이었다.
 괴물들한테 쫓기고 간간이 반격하는 동안 삼 일이 훌쩍 흘러갔다. 그간 도경과 심방은 괴물들과 총 열두 번 싸웠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은 둘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반증이었다.
 도경은 계곡 안 응달진 곳으로 들어가 드러누웠다. 삭신이 쑤시고 뼈골 깊은 곳까지 저렸다.
 “더 이상 못하겠다.”
 심방이 옆에 앉으며 맞장구쳤다.
 “나도 못한다. 그나저나 이쯤 교란했으면 됐겠지?”
 도경은 살이 부쩍 빠진 친구를 바라보았다.
 “제법 잘 싸우더라.”
 심방이 멋쩍게 웃었다.
 “너야말로.”
 도경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심방은 사려가 깊고 진중해서 웃어른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가르침도 많이 받았다. 강력한 후진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대두되었던 육 년 전, 심방이 먼저 삼 년간의 폐관에 든 것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심성을 높이 산 탓이었다.
 그러나 무공은 분명 그가 한 수 위였다. 심방이 출관하던 삼 년 전, 잠시 그가 앞서나간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 후 삼 년간 도경은 뼈를 깎는 수련을 했다. 해서 자신의 실력이 월등히 앞섰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큰 차이가 없었다.
 “너 많이 늘었다. 어떻게 된 거냐?”
 “글쎄.”
 심방이 멋쩍게 웃으며 빡빡 깎아 푸르스름한 기가 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과 다름없이 수련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늘더라. 놀라 사부에게 여쭤봤더니…….”
 도경은 강한 흥미를 느꼈다. 심방이 회상하듯 뜸을 들이자 그가 물었다.
 “그래서?”
 “그냥 불법이 깊어지면서 무공도 깊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
 “불법? 그게 무슨 상관인데?”
 “소림의 무공은 수행의 방편으로 만들어진 거야. 당연히 관계가 깊어.”
 “헛소리, 도가의 무공도 선도의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무공 닦아 신선됐다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난 스승님 말을 믿어.”
 “쓸 데 없는 믿음이야. 난 불경이라곤 두어 번 읽어본 것이 전부인데도 너만큼 소림무공을 사용할 수 있어.”
 “정말?”
 유년시절에나 쓰던 도발적인 언사에 도경은 흥이 일었다.
 “한번 붙어볼래?”
 도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 앉더니 손바닥을 지그시 밀어갔다. 대력금강장이었다. 내력을 실어내지는 않았지만 기세는 사뭇 날카로웠다.
 심방은 거기에 맞서 검지를 꼿꼿이 세우고 찔러갔다. 금강일지선이었다. 도경처럼 내력을 실어 쳐내진 않았는데, 기세는 제법 흉흉했다. 금방이라도 장심이 꿰뚫릴 것만 같았다.
 도경은 손바닥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고, 그 주먹을 구십 도 각도로 비틀면서 손가락을 무찔러갔다. 나한십팔수의 사초를 변형한 것이었다. 그 순간, 심방의 검지에 중지가 더해지더니, 도경의 손등을 노리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둘은 한동안 권장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한 번도 손이 서로 맞부딪친 적은 없었다. 부딪칠 만하면 쏟아지는 소림무공의 절초들이 천변만화의 변화를 일으킨 탓이다.
 어느새 도경의 이마에 콩알만한 땀방울이 맺혔다. 거의 내력을 동원하지 않은 탓에 내력소모는 미미했으나, 심력의 소모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출관 이후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싸움과 이동을 반복한 탓에 지쳐 있던 그는 이제 거의 파김치가 되어버렸다.
 그만하자고 손을 들려고 하는데 심방이 먼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졌다! 그만하자.”
 “아니, 내가졌어.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
 “아냐, 난 소림의 무공을 집중적으로 수련했지만, 너는 소림, 무당, 화산, 개방까지…… 이것저것 다 정성을 쏟았잖아. 그런데 소림무공만 사용한 대련에서 비겼으니 네가 이긴 거야.”
 “무당의 무공을 썼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화산과 개방의 무공은 겉핥기식으로 배웠고.”
 그 말속엔 소림 무공을 익히는데 무당의 무공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공을 들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방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무당공과 소림공 수준이 서로 비슷하단 말이냐? 넌 무당 제자잖아. 당연히 무당의 무공에 치중했어야 하는 거 아냐?”
 “치중하려고 한 적이 있긴 있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늘 사부와 티격태격했잖아. 의문이 드는 무리가 있으면 사부보다 각통대사에게 먼저 갔을 정도니 말 다했지.”
 “스승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 걱정하셨는데, 걱정이 맞았군.”
 “뭐가?”
 “네가 무공을 너무 잡다하게 익힌다고 걱정하셨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워선 안 된다, 한 우물을 파야 한다. 뭐 그런 말이었냐?”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다르게 생각했어.”
 이번엔 심방이 강한 흥미를 느꼈다.
 “어떻게?”
 도경은 대답 대신 도리어 반문을 했다.
 “넌 우리 사부들, 혹은 간간이 방문해 무공을 전수해준 타문파 중진들 수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고수들이지. 각 문파를 대표하는.”
 “하지만 최고수는 아니지. 최고수는 안전한, 뭐 안전하다고 하기엔 좀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강남에 있잖아.”
 “당연하잖아. 각 문파 장문인과 최고수가 강북에 남아 괴물들 마수에 노출돼선 안 되지. 문파의 미래와 무공의 보존을 위해서도 그래선 안 돼.”
 “바로 그거야. 우리가 강북에 머물러 있는 한 배울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사부가 우리에게 나눠줄 수 있는 심득엔 한계가 있다 그 말이지.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지만, 그게 어디 쉬워. 내가 한 우물을 파서, 그러니까 사부가 익힌 무공에 치중해 그것을 익히면 과연 사부의 한계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다양하게 익혔다? 하지만 그 바람에 사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건 아닐까? 그 수준까지 가는 것도 지난한 일이고 그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고수가 될 수 있을…… 어, 넌 어려서부터 사부의 수준을 뛰어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구나. 이야, 이거 다시 봤는데. 너 아주 광오하구나.”
 “어렸을 때부터 좀 건방지긴 했지. 너한테만 하는 말이지만, 사실 사부가 우습게 보였어. 내가 뛰어넘을 생각을 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거야.”
 “뭐라고?”
 “처음 입문할 때 사부 수준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웬일로 강호엔 무수한 고수가 있고 자신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어울리지 않게 겸손을 떨더라 이거지. 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어. 아, 이 사람 정말 별 볼일 없구나.”
 심방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렸을 때부터 맹랑한 구석이 있었구나.”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온 거야. 지금에 와서 한 우물을 파기엔 그간 파놓은 구덩이가 너무 아깝잖아.”
 그는 삼 년의 폐관수련 동안 고민을 많이 했다.
 지금이라도 한 우물을 파봐?
 그 고민은 머릿속 깊은 곳을 간질거리는 어떤 것, 안개에 쌓인 듯 모호해서 실체를 좀체 드러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직감과도 같은 그 무엇 때문에 무시되고 말았다.
 도경은 머리에 맴도는 그것이 확고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돌파구가 생길 것이라 굳게 믿었다.
 “잘되겠지 뭐.”
 “넌 아주 염세적인 것 같은데 어떤 땐 정말 대책 없이 낙관적이더라.”
 “나의 훌륭하신 장점이지.”
 도경은 자화자찬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심방이 그의 장심을 찔러가던 금강일지선이었다. 좀 전에 대련할 때와 달리 내기가 얹어져 부드러운 파공음이 일었다. 지풍은 물을 마시러 나온 토끼한테 격중되었다.
 “오랜만에 고기 맛 좀 보겠구나.”
 고기를 익힌 도경은 소금을 뿌려 심방한테 주었다. 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심방 역시 고기를 마다하진 않았다. 허기가 반찬이라고 살짝 소금간만 했는데도 꿀맛이었다.
 도경이 말했다.
 “어제 오늘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게 뭔지 알아?”
 “뭔데?”
 “괴저들 말이다. 왜 생긴 것이 꼭 칠층 누각에서 떨어뜨린 다음 지그시 밟아놓은 돼지머리 같잖아?”
 “비슷하긴 하지. 그래서 이름도 괴저라고 붙였다고 하잖아.”
 “배는 고픈데 돼지처럼 생긴 게 얼쩡거리니 먹고 싶더라. 먹고는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심방은 도경의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정확한 심중을 알고 싶어 물었다.
 “왜? 넌 원래 가리는 게 없잖아.”
 “그놈들 말이다. 알아듣진 못하지만 말을 하잖아. 들리는 풍문엔 글도 쓸 줄 안다던데…… 도구도 쓰고. 거기다 대포까지 만들었잖아. 학자가 아니라 유식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큼은 인간들 특성하고 똑같잖아. 실제로 어떤 때는 정말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그래서 먹을 수가 없었어. 꼭 식인을 하는 것 같잖아.”
 심방도 종종 느끼던 감정이었다.
 그의 안색이 흐려지자 도경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넌 나보다 더 갈등하고 있었구나. 난 최소한 죽이는 덴 주저하지 않았는데, 너는…….”
 도경은 심방이 불제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소림은 도량인 동시에 무림 문파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의를 위해서라면 살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소림이고, 방장이 괴물에 대한 살계를 허용한 이상 소림문하가 주저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괴물이 때때로 사람처럼 여겨진다면 살생하지 말라는 것을 오계의 하나로 삼는 불가에 몸을 담고 있는 심방으로선 괴로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괴로우면 괴롭다고 내색을 좀 하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냐?”
 “짜식 딴소리는, 누가 고리타분한 스님 아니랄까봐서.”
 
 
 제3장 색목인 여자
 
 괴저나 괴상은 사람보다 냄새를 잘 맡는다.
 그런 점에서 추적하는 데 이점이 많았다. 그러나 무림의 고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틀 후, 둘은 괴물들을 완전히 따돌렸다.
 도경이 말했다.
 “우리도 무당으로 바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화산에 먼저 꼭 들러야 해.”
 “적의 관심을 돌리는 것만이 임무는 아니었구나.”
 “그래, 전달할 게 있다.”
 “전서구를 날리면 되잖아?”
 “전서구가 떨어졌어.”
 심방은 공중을 향해 활을 쏘는 시늉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몇 달 전부터 감시가 심해져 전서구를 날려도 잘 전해지지가 않아.”
 “화산에 들렀다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네.”
 “빨리 가야지.”
 “강을 따라가는 건 어떨까?”
 이때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괴물은 물에 약했다. 그들이 장강을 넘지 못하는 것도 수공에 형편없다는 점이 큰 몫을 차지했다.
 “황하를 따라…… 좋아, 가보자!”
 그들은 빠르게 남하했다.
 오랜 전란으로 농토는 황폐해졌고 가옥은 폐가로 전락했다.
 도경은 애잔한 마음이 들어 두보의 시를 중얼거렸다.
 그때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나 날 법한 생활의 소음이 길 너머에게 들려왔다.
 “사람이 사나?”
 전란이 휩쓸고 지나가면, 그때의 광풍만 무사히 넘기면 백성들 삶은 예전과 다름없이 이어진다. 권세를 쥔 자들만 바뀔 뿐, 생업에 종사하고 세금을 내는 민초들의 삶은 늘 한결 같은 셈이다.
 그러나 괴물들의 난은 달랐다.
 그들은 사람 씨를 말려버리려고 작정한 듯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숨을 쉬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땅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라도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생활의 소음이 들려온 것이다.
 “설마!”
 심방은 경공을 전개해 달려나갔다.
 산허리를 돌아나가던 그가 우뚝 멈췄다.
 “도경, 저길 좀 봐.”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본 도경은 입을 딱 벌렸다.
 “저, 저거, 마을 맞지?”
 강변을 따라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의 마을이 아니라 괴저들의 마을이었다. 괴저 자식들로 보이는 작달막한 꼬마들이 돼지를 몰아가고 있고, 엉덩이가 넓고 펑퍼짐한 것이 암컷으로 추정되는 괴저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도경은 어마어마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괴물이 쳐들어온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가끔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알려줄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그러려니 했다.
 어느 날인가 저들이 왜 쳐들어온 것 같냐고 심방이 물었을 때, 그는 괴물이니까 하고 단순명료하게 대답했다. 지금 다시 물어도 그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으니까.
 그랬다. 괴물이니까 쳐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인 것이다.
 그래서 저 괴물들이 언젠가 물러갈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마적이 쳐들어와 약탈을 하고 떠나듯이, 괴물도 약탈이 끝나면 떠날 거라고 믿었다.
 북쪽 이민족이 늘 노략질을 일삼지만, 세월이 지나면 물러가고 이민족이 세운 왕조도 결국은 몰락하지 않았는가.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는 순간 아찔했다.
 “살 땅을 원했던 것 같아.”
 괴물이 빼앗은 땅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모두 죽였군. 자기들이 눌러 살려고.”
 심방이 말을 받았다.
 “한때의 폭풍이 아니었어. 어쩌면 수백 수천 년을 이어가며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몰라.”
 “만약 밀리면?”
 “멸망하겠지.”
 “이러다 들키겠다. 그만 가자.”
 “그래, 어서 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지.”
 “알릴 필요가 있을까? 그들도 눈과 귀가 있는데 이미 알고 있지 않겠어? 분명해. 우물 안 개구리인 우리만 여태 모르고 있었을 거야.”
 강변을 벗어난 그들은 화산을 향해 나아갔다.
 괴물들 마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군사들로 보이는 무리가 이동하는 것이 종종 눈에 띄었다. 다행히 먼저 발견한 덕에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영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화산에 가까워질수록 괴물의 출현빈도수가 잦아지더니, 연화봉 인근에는 아예 대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도경은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뒤따라 오르는 심방을 향해 근심어린 말을 건넸다.
 “우각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촘촘한 포위망이야. 저것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심방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둘만으로 물샐 틈 없는 저 포위망을 뚫고 화산에 잠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화산이 둥지를 틀고 있는 연화봉은 길이 험했다. 그나마 편히 들어갈 있는 유일한 통로가 괴물들한테 가로막혀 있었다. 그것도 이중삼중으로.
 심방이 민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듬이 떨어져 어깨에 허옇게 쌓였다.
 “더럽게, 저리 가서 긁어.”
 도경의 핀잔에 심방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곤란한데.”
 “곤란할 거 뭐 있어? 그냥 가자.”
 “안 돼! 화산권왕을 모셔가야만 해.”
 화산권왕 종리궁은 당대 화산의 최고고수로 강북을 통틀어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였다.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여러 문파가 괴물들한테 본산을 내주는 치욕을 겪었지만, 화산만은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길이라 할 만한 것이 하나뿐인 데다, 그마저 꼬불꼬불 구절양장처럼 험해 일당백이 가능하다는 지형적 이점 때문이다. 그러나 화산권왕이 없었더라면, 지형적 이점도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중인들의 평가였다.
 그는 검으로 유명한 화산에서 권장으로 입신한 것 때문에 특히 유명했다.
 “그게 임무야?”
 “응.”
 도경도 난감해 머리를 박박 긁었다.
 “혹시 전서구 같은 거 없어?”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거냐?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답답해서 그런다.”
 “딴 길로 가보자.”
 나무에서 내려온 둘은 괴물들 포위망을 크게 우회해 북쪽으로 돌아갔다. 칼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가파르고 험한 길이 연화봉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도 이미 괴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바위 위로 고개를 내밀던 도경이 갑자기 일어서버리자 심방은 놀라 그의 허리춤을 당겨내렸다.
 “왜 이래? 들킬 뻔했잖아.”
 “저기, 사람이 있어.”
 “사람? 인질이냐?”
 심방은 고개를 옆으로 빼 전방을 주시했다.
 “어디?”
 도경은 그의 머리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기 남동쪽.”
 “어, 색목인이네.”
 게다가 여자였다. 단풍이 든 것처럼 빨간 머리카락을 소유한 그 여자는 괴상한테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괴물들 하고 대화를 하잖아. 그 소문이 사실일까?”
 도경이 물었다.
 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이후, 잠깐 그 배후에 서역의 사약한 법사들이 있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원에 결탁한 색목인 라마들과 천산파 색목인 고수들이 무림고수들을 해친 적이 왕왕 있어, 그런 소문이 돈 것 같았다.
 그 소문은 원이 괴물한테 멸망하자 수그러들었었다.
 “글쎄.”
 심방은 애매하게 말했다. 어찌 보면 소문을 긍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보고를 해야겠어.”
 도경은 고개를 들고 빨간 머리의 색목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괴물들한테 뭔가 지시하는 것도 같았다.
 “지휘자 같다. 최소한 저 괴물들보다는 직급이 높은 것 같아.”
 괴물 배후에 사람이 있다니!
 큰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피부가 오싹해지면서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치가 떨렸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하얀 얼굴과 또렷하게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
 도경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의 모습은 그의 눈을 거쳐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두개골 안에 찍힌 낙인처럼 생생했다. 여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도경은 얼른 바위 뒤로 몸을 감췄다.
 “젠장!”
 “왜?”
 “예쁘다.”
 “뭐라고?”
 “귀가 먹었냐? 더럽게 예쁘다고.”
 “너 저런 형을 좋아하냐?”
 “몰라. 여자를 접해봤어야 이쪽이 좋다, 저쪽이 좋다 할 거 아냐. 사매 말고는 거의 여자라곤 본 적이 없는데 어떤 형을 좋아하는지 알게 뭐냐? 아,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제갈미는 절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
 심방은 고개를 빼고 그녀를 관찰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말했다.
 “네 말대로 예쁘긴 하다만.”
 “하다만?”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해 난 별로다.”
 도경이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중이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아야, 이거 놓고 얘기해.”
 “근데 저 여자 어디서 온 거지?”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그녀의 정체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두런거리는데 갑자기 전방이 소란스러워졌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두꺼운 발이 땅을 때리는 소리도 들렸다.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든 그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공격하려나 봐.”
 도경의 말에 심방은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저들 뒤를 따라가자.”
 “공격하는 틈을 타 화산으로 잠입하자?”
 “그래, 뭐 다른 계획 있어?”
 있을 턱이 없었다.
 “좋아, 따라가자.”
 워낙에 생김새와 크기가 달라 따라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괴상의 키와 몸집은 사람의 두 배에 달하는 반면에, 괴저의 키는 사람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람의 길이와 넓이 모두 괴상과 괴저와는 너무 달라 같이 걸어가면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저 미녀처럼.
 “고개 좀 숙여.”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심방의 음성이 다급했다.
 “어, 미안!”
 고개를 빼고 여자의 뒤태를 구경하던 도경은 얼른 고개를 움츠렸다. 이어 축골공으로 몸을 줄인 상태에서 상체, 특히 어깨와 가슴 근육을 최대한 부풀렸다. 여전히 괴저보다 컸지만, 최소한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둘은 맨뒤에 쳐진 괴저를 희생물로 점찍었다. 금속갑옷에 투구까지 갖춰 입은 괴저는 많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두 갖춰 입고 있었다.
 둘은 은밀히 다가가 찍소리도 못 내게 일격에 뒷골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갑옷과 옷을 벗긴 다음 투구까지 뒤집어썼다. 통은 넓고 길이는 짧아 아주 불편했다. 하지만 억지로 몸을 우겨넣었다.
 자세히 보면 걸음걸이가 상당히 다르고 갑옷도 남의 것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뒤돌아보는 놈은 없었다. 길이 워낙 험해서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도경과 심방은 누가 볼세라 고개를 푹 숙이고 앞서가는 괴저의 발꿈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걸음을 뗐다. 옷에 베인 괴저 특유의 큼큼한 체취가 코를 찔렀다. 그것을 참으며 얼마쯤 가자 행렬이 멈췄다.
 곧 발꿈치가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밀렸다. 공격대형을 짜느라 거리를 벌리는 것 같았다. 둘은 얼른 물러서 힐끔힐끔 전방을 살폈다. 가파른 길 한복판에, 너무 좁아서 목책이라기보다는 쪽문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서 있었다.
 그 위에 반백의 도사가 걸터앉아 있었다. 가뜩이나 긴 얼굴이 쪽을 져 틀어 올리는 바람에 더욱 길어 보였는데, 대추처럼 붉은 볼이 심술 사납게 보였다.
 도경은 심방의 옆구리를 찌르며 전음을 보냈다.
 ―누구냐?
 ―몰라.
 심방도 우각채에만 살아서 유명한 사람의 이름은 들어봤어도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괴물의 무리 앞에서도 유유자적하던 도사가 갑자기 일어섰다.
 도경은 그가 노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들이 통을 메고 올라와 한 곳에 쌓고 있었다.
 ‘포탄이다!’
 화포로 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집어던질 수 있도록 개량된 듯 심지가 길었다.
 ―저것들 점점 똑똑해지는 것 같지?
 ―응.
 괴상이 뭐라 고함을 지르자 괴저가 불을 붙여 던졌는데 신력이 정말 대단했다. 포탄은 목책까지 거의 직선으로 날아갔다. 도사가 투명한 공을 가지고 놀 듯 손을 뻗어 휘젓는 순간 바람이 일어나며 포탄을 당겨 올렸다.
 튕겨진 포탄은 반쯤 날아가다 폭발했다.
 괴저 여럿이 포탄을 하나씩 들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도사도 긴장이 되는지 검을 뽑았다. 목책 위에 버티고 서서 검을 겨누는 모양새가 멋졌다. 엄정한 기운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고 서릿발 같은 기운이 검을 타고 흘렀다.
 “타핫!”
 시원한 기합성이 산을 흔들고 공기를 갈랐다.
 하늘을 벨 것처럼 치켜 올려진 검이 앞으로 뉘어지며 손을 떠났다.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날아가 포탄을 던지기 위해 젖혀진 팔뚝을 벴다.
 툭
 팔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여전히 포탄을 들고 있었다. 도사의 노림수인 듯 잘려진 팔이 나뒹구는 곳은 포탄을 쌓아둔 곳이었다.
 콰콰콰쾅
 포탄이 폭발하며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휘말린 괴물들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폭발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괴물도 속출했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대열을 유지시키려는 지휘자들의 외침이 들렸다. 목청이 어찌나 크고 갈라지는지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도사가 목책을 차고 날아올랐다.
 팔을 자르기 전에 던져진 포탄 십여 발이 목책에 부딪쳤다. 폭음이 터지고 화염이 솟구쳤다. 매캐한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마치 위로 솟구친 도사를 따라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추락하는 도사를 향해 괴저 몇몇이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사뭇 흉포하다. 악이 받친 듯한 기운이 맨끝에 있는 도경한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도사의 몸이 추락했다.
 천근추를 시전했는지 아주 빨랐다.
 타악
 불타오르는 목책의 잔해에 발을 디디자 불티가 사방으로 날렸다. 그 불티를 가르며 돌진하는 도사의 눈에 진한 살기가 번뜩였다.
 퍼엉
 폭음이 터지며 괴저의 가슴팍이 빠개졌다.
 때리고 후려치고 부러뜨리고 벼랑으로 집어던지는 동작이 깔끔해서 도리어 으스스했다. 시각적 효과를 염두에 두고 독하게 손을 쓰는 것 같았다.
 증오가 공포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괴물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꿔어 꾸르다니 다오!”
 괴저들 뒤쪽에서 돌격을 강요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음성이 들려왔다.
 도경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돌격하고 싶거든 앞장서지. 왜 뒤에서 소리만 지르고 지랄이야.”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지휘자들이 괴저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길고 폭이 넓어 웬만한 사람은 들기도 힘들 것 같은 대형 도끼를 앞세우고 나아갔다.
 심방이 말했다.
 “솔선수범하는군.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야.”
 괴상이 나서자 좁은 산길이 꽉 메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괴상의 거대한 몸집은 그 자체로 이미 상당한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도사가 코웃음을 쳤다.
 “와라! 오는 대로 죽여주마.”
 도경이 말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좀 더 있다. 지금 나가면 들킬 수도 있어.”
 대열이 길어서 목책까지 헤쳐가려면 한참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혼자 막아낼 수 있을까?”
 “안 돼. 중과부적이야. 오합지졸의 부대라면 겁을 먹고 도주할 텐데, 이들은…….”
 “훈련된 정병이지. 군기가 엄정한.”
 “그래, 원이나 주원장의 군대보다 백배 나아.”
 괴상이 무공을 배운 것처럼 일도단악의 기세로 도끼를 내려찍었다.
 하지만 도사는 슬쩍 물러서며 그 도끼를 피했다. 피한 거리가 얄밉게 느껴질 정도로 괴상의 공격권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팍
 도끼가 바닥에 깊숙이 박히며 돌과 흑이 튀었다.
 웬만한 사람은 뽑아내지 못할 텐데, 괴상은 아주 수월하게 뽑아버렸다. 도끼가 무릎 높이 정도 올라왔을 때 도사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도끼날을 살짝 밟고 건너가 자루를 걷어찼다.
 도끼는 밑으로 떨어지고 도사의 오른발은 위로 솟았다. 도끼와 괴상의 턱 사이, 그 좁은 공간에서 도사의 몸이 회전하며 괴상의 턱을 걷어찼다.
 빠각
 통렬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사람 같으면 턱이 부서져 다신 뭔가를 씹지 못할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는데, 괴상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이빨 몇 개가 부러진 것 같기는 한데 턱은 말짱했다.
 도경이 말했다.
 “역시 웬만한 타격으론 안 되는군.”
 “저게 웬만한 거냐? 내가 저렇게 맞았다간 이빨이 몽땅 나갔을 거다.”
 “달리 괴물이겠냐.”
 도사는 물러서는 괴상의 턱 밑으로 바짝 붙었다. 턱을 노리고 올라가는 것 같던 손이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쭉 뻗었다. 손바닥이 괴상의 배에 잠깐 붙었다가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괴상이 무릎을 꿇었다. 내가중수법이 내부를 완전히 부숴버린 것이다.
 도경은 대전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렇겐 오래 못가.”
 심방도 동감이었다.
 “그렇지.”
 내가중수법은 내력의 소모가 상당히 심하다. 게다가 괴저와 괴상을 죽이는데 드는 내력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들었다.
 “우리도 가자!”
 둘은 은밀하게 괴저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도경은 도사한테 집중된 관심이 끝까지 유지되기를 바랐다. 중간에 들켜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퍽
 두 번째 괴상이 도사에게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지휘자들의 희생에 감동을 받은 것일까. 괴저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 도끼를 휘두르고 창을 찔러갔다. 사기가 충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공포에 질린 것 같지도 않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돼지 멱따는 듯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어지간히 질린 듯 대추처럼 붉던 도사의 얼굴이 차츰 핏기를 잃어갔다.
 휘이익
 그가 갑자기 휘파람을 불자 나무 혹은 바위가 벌어지면서 매복한 무사들이 튀어나왔다.
 도경은 이마를 쳤다.
 ―매복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어.
 ―나도 못 느꼈어.
 ―삼 년 동안 폐관수련까지 했는데 이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헛 수련했구나.
 ―괴상과 괴저들 기운이 워낙 강해서 느끼기가 힘들었을 거야. 거기다 정신이 온통 저 도사한테 쏠렸었잖아. 초기에 터진 포탄도 감각을 흔들었고, 괴물들 눈과 귀를 피해 숨느라고 조심한 탓도 영향을 미쳤겠지.
 ―그런가?
 도경은 튀어나온 화산문하 다섯의 몸놀림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과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최소한 일류 이상 되는 솜씨였다.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가 아냐. 아주 훌륭해.
 싸움이 격렬해지자 뚫고 나가기가 더 힘들었다. 괴저들이 둘을 마구 떠밀며 지나갔다. 개중에는 짜증스럽게 욕설인 듯한 괴성을 질러대는 놈도 있었다.
 심방이 두어 걸음 앞섰다가 도경이 멈춰선 것을 깨닫고 도로 돌아왔다.
 ―왜 그래?
 ―저기.
 도경이 가리키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나무의 중동에서 뻗어나간 굵은 가지에 걸터앉아 있는데,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 흩날렸다. 사뭇 고혹적이었다. 그녀 뒤로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 그 벼랑을 간질이는 듯한 머리카락의 물결.
 그리고 파란 하늘과 똑같아 보이는 파란 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흘러와 코끝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귀가 먹먹해졌다. 침이 마르고 팔다리가 안으로 오그라드는 아찔한 기분이었다.
 심방은 멍한 도경의 표정을 보고 큰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정신 차려, 이 자식아! 마녀에게 미혹되면 안 돼.
 그 고함소리가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심장 박동은 정상을 되찾았지만, 밑으로 내려앉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다. 그래서 괴로웠다.
 ―그래, 가자.
 발을 떼는데 중요한 걸 남겨두고 가는 것처럼 속이 허전했다.
 그때 중년의 도사가 고함을 질렀다.
 “저 여자를 잡아라!”
 도경은 멈춰 서서 소리친 도사를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을 잡으라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속이 뜨끔했다. 도사는 그녀 쪽으로 향하다 괴저한테 발목이 잡혀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그한테 괜히 반감이 일어났다.
 “실력도 안 되는 게 설치기는.”
 괴저는 많았고, 방어하는 자들은 기껏 여섯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한 발 두 발 뒷걸음치다 결국엔 목책까지 물러났다. 목책은 부서지고 불에 타 이미 방어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여자를 잡기는커녕 제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워 보였다.
 “크윽.”
 턱수염을 길게 기른 사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가슴이 깊게 패였는데, 뼈까지 상한 것 같았다. 피가 뿜어져 나와 손을 흠뻑 적셨다. 수염까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었다.
 “상춘!”
 여자를 잡으라고 소리친 도사가 그를 부축했다.
 심방이 말했다.
 “도와줘야겠어.”
 도경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우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냥 가자.”
 심방은 네 마음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잇몸이 반쯤 드러나는 웃음이 자꾸 맘에 걸렸다. 은근히 신경도 거슬리고.
 심방의 몸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상체가 쭉 펴지면서 민머리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 왜 그래?”
 그는 도경의 물음을 무시하고 갑옷을 묶은 끈을 풀어 그것을 벗은 후, 오른손에 단단히 움켜쥐었다. 몸을 갑옷에 억지로 우겨넣은 터라 그대로 싸우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쾅쾅
 갑옷을 좌우로 후려치자 얻어맞은 괴저들이 고꾸라지며 길이 트였다.
 그가 일으킨 소란 때문에 도경까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꾸에에엑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보고 괴저가 괴성을 발했다.
 적이다!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같이 가!”
 도경은 심방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내달렸다. 가면서 투구를 벗어, 막 도끼를 집어던지려던 놈의 면상을 맞추고 열심히 갑옷을 벗었다. 그때 옆구리로 몽둥이가 날아왔다. 쇠못 같은 것을 거꾸로 박아 넣어 얻어맞았다가는 온몸에 바람구멍이 숭숭 뚫릴 판이다.
 “아이쿠, 내 팔자야.”
 도경은 신세한탄을 하며 심방처럼 갑옷을 벗어 손에 들었다.
 한순간 손을 떨치자 갑옷이 몽둥이를 쳐 올렸다.
 그는 몸을 반쯤 돌리고 반대편으로 갑옷을 휘두르는 한편, 떨어져 내리는 몽둥이를 왼팔로 받아 휘둘렀다. 팔이 찍힌 괴저가 비명을 지르며 껑충껑충 뛰었다. 갑옷에 얼굴을 얻어맞은 놈은 볼을 감싸 쥐고 나뒹굴었다.
 철이 들 때부터 지금까지, 폐관에 들었던 삼 년을 제외하고 그는 늘 괴물과 싸우며 시간을 보냈다. 싸움이라면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엉켜 돌아가는 동안 심방이 멀어졌다. 심방이 낸 길이 끊기면서 도경은 괴저들한테 둘러싸이고 말았다. 괴상 두엇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은은한 폭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잦아들 때쯤 새로운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메아리가 끝없이 치는 것 같았다.
 도경은 생각했다.
 다른 쪽에서도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문 쪽이겠지.
 오늘 괴물들이 작심하고 나선 것 같았다.
 ‘우리 산채에도 맹공격을 가하더니 여기도 그렇군. 강북을 완전히 청소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배후에 적을 두고 싸우는 건 여러모로 성가신 일이다. 아마 괴물들은 배후를 말끔히 하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필 이런 날 도착할 게 뭐람. 재수 더럽게 없네.’
 폐관을 깨고 나온 날부터 계속 재수가 없었다. 저 여자를 만난 것만 빼면.
 “우아아아!”
 도경의 사자후와도 같은 함성을 질러냈다.
 그는 괴저들이 귀를 막는 그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 얼른 몸을 뽑아 올렸다. 한바퀴 짧은 공중제비를 돌고는 괴저의 어깨를 밟았다.
 “타앗!”
 괴저의 어깨를 박찬 도경은 일 장 정도 떨어진 괴저의 머리를 밟고 떠올랐다.
 그는 그런 식으로 괴저의 어깨를 징검다리 삼아 심방과 접근했다.
 심방의 손에 들린 갑옷은 얼마나 많이 후려쳤는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 먼저 간다.”
 도경의 외침에 심방이 다급하게 말을 받았다.
 “저 여자를 잡아.”
 “싫어.”
 “인질을 잡으라고. 아니면 우린 다 죽어.”
 도경은 고개를 돌려 전장을 한 눈에 훑었다.
 화산 문하 둘이 길게 누워 있었고 한 명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괴상한테 붙잡힌 것 같았다.
 여자를 인질로 잡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못들은 척하려는데 심방의 목덜미가 핏물에 배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젠장.”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반전되었다.
 괴저의 어깨를 걷어차서 몸을 띄운 그는 공중에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살짝 비튼 허리 아래로 무지막지한 기세로 도끼가 지나갔다. 일순, 그의 허리가 탄력 있게 튕겨졌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움직여 그는 도끼를 휘두른 괴상의 어깨를 밟고 섰다.
 손이 올라와 종아리를 할퀴려고 할 때, 그의 발이 어깨를 찼다. 괴상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바닥에 처박을 때 그의 몸은 쏜살같이 날아갔다.
 아이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란 원숭이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수법으로 상대를 날려버리면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그녀는 허둥거리며 나무에 매달렸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힐끔 뒤돌아보니 어느새 노란 원숭이가 지척까지 접근해 있다.
 그녀는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손에 익은 무기가 아니라 생각만큼 날카롭지도 힘이 실리지도 않았다. 문득 자신의 메폰틸이 그리워졌다.
 도경은 그녀가 휘두른 검날을 피해 손을 내밀었다. 검지와 중지가 검면을 때리자 지잉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이 그녀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계속 나아간 도경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치고 올라가 팔꿈치를 건드리고 어깨를 짚었다.
 아이린은 시큰한 감각이 들더니 팔에서 힘이 쭉 빠지자 거의 기절초풍할 것처럼 놀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마법인가?’
 위기감이 몰려들면서 관자놀이 쪽이 욱신거렸다.
 도경은 그녀의 팔을 꺾어 뒤로 돌아갔다.
 ‘아아.’
 코끝을 간질이는 그녀의 머리칼에서 숨 막히는 향기가 났다.
 피와 고통에 절어 있는 산길에서 도경은 욕정을 느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욕정이었다. 아랫도리가 반응을 해서 그녀의 엉덩이를 찔렀다.
 “음.”
 그녀가 움찔했다.
 ‘개새끼! 짐승 같은 놈!’
 감히 내 몸에다 불결하기 짝이 없는 물건을 들이대?
 옷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만, 직접 살갗이 맞닿는 듯해서 느낌이 아주 불쾌했다. 할 수만 있다면 상대의 머리 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었다.
 “멈춰라!”
 심방이 내지른 소리에 도경은 정신을 차렸다. 고통스러울 만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신체가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도경은 심방의 뜻을 읽고 잘 보이도록 그녀를 나무 위로 끌어올렸다. 그것을 본 괴상 둘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더니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도경은 아래로 뛰어내려 심방과 합류했다. 괴저들은 무기를 겨누긴 했지만, 공격하지는 않았고 길도 비켜주었다.
 도경은 화산의 문하와 합류했다.
 대춧빛 낯의 도사가 물었다.
 “누구냐?”
 “우각채의 오도경입니다. 무당의 우상진인을 사사했고, 소림의 각통대사께도 잠깐 배웠습니다.”
 심방도 출신과 사승내력을 밝혔다.
 도사의 낯이 밝아졌다.
 “난 화산의 화우자라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심방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화우자는 화산파 장문인 화송자의 사제다. 다른 도사는 옥허와 옥령이라 했다. 화우자의 제자였다.
 결단을 내린 듯 괴상이 고함을 질렀다. 괴저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공격신호인 것 같았다.
 심방은 난감한 얼굴로 민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영 인질 효과가 없는 걸.”
 도경이 말했다.
 “산 밑에서 봤을 땐 아주 중요한 인물 같았는데.”
 “희생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야. 독한 놈들이군.”
 옥허가 소리쳤다.
 “짐승들이 동료를 생각할 리 없지. 이년! 넌 뭐하는 년이냐? 어째서 괴물들과 한편이 되어 사람들을 공격하느냐? 어서 말해!”
 옥허가 다짜고짜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손이 피에 절어 있었던 터라 그녀의 뺨에 손모양으로 핏자국이 찍혔다.
 그의 눈은 분노와 살기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야만인의 진한 살기를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다. 오금이 저려오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서역에서 왔느냐? 아니면 서장? 어디냐, 말해라. 너희들이 괴물을 불러내 조종하는 거지?”
 그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며 목을 꺾어버릴 작정이었다.
 도경은 기겁했다. 겁에 질리지는 않았지만, 놀란 것으로 따지면 그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당겨 옥허의 손에서 빼냈다.
 “옥허도장, 진정하십시오.”
 “가치도 없는 인질, 잡아두어서 뭐 하겠소? 깨끗이 죽여 버립시다.”
 오늘 사형제들이 셋이나 죽었다. 그 전에 다섯이 죽었으며 이후로도 계속 죽어나갈 것이다. 사실 저년의 뼈를 갈아 마셔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도경은 찬성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를 죽이라고? 절대 안 돼!’
 그는 여자를 점혈한 후 등 뒤에 숨겼다.
 “안 됩니다.”
 “안 되다니.”
 옥허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거렸다.
 “요녀를 비호하는가?”
 옥허가 도경을 지그시 노려보며 소리쳤다.
 도경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서 찬바람이 몰아쳤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기세가 점증했다. 급기야 옥허의 도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긴장이 증폭되어 머리칼이 곤두서고 얼굴이 근질거렸다.
 옥령이 옥허 옆에 바짝 붙어 여차하면 돕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순간, 도경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땀은 이마를 타고 내려와 눈썹을 적셨다.
 한 방울 두 방울…… 땀이 모여 눈썹을 내리눌렀다.
 흠뻑 젖은 눈썹은 땀을 더 이상 저지하지 못했다. 제방에 구멍이 난 것처럼 한줄기 땀이 눈썹을 가로질러 속눈썹 쪽으로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땀이 당장 눈 속으로 들어올 것 같았지만, 눈을 깜빡거릴 수가 없었다. 그 찰나의 틈, 눈을 깜빡거리는 그 틈을 노려 그들이 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도경은 누가 말려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심방과 화우자는 돌진하는 괴물들을 막아내느라 바빴다.
 ‘우리끼리 투탁거릴 여유가 없는데.’
 아이린은 수염 기른 노란 놈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매서운 살기가 피부를 저며 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례한 저 야만인이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도 알았다.
 고맙다는 생각이 잠깐 솟구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이놈이 자신을 잡았기 때문에 욕을 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흑심을 품기까지 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이 순간에도 이물감이 느껴지던 엉덩이 쪽이 자꾸 근질거렸다. 빡빡 문질러 씻고 싶었다.
 도경은 눈을 감으며 발바닥으로 바닥을 밀었다. 상체가 젖혀지며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가 눈을 감는 즉시 옥허가 출수했다. 코 위로 지나가는 강맹한 기운이 느껴졌다.
 ‘쌍놈 새끼, 진짜 공격을 하잖아.’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다.
 도경의 눈꺼풀이 절도 있게 젖혀지며 땀을 튕겨 올렸다.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밀려나던 발이 멈췄다. 발꿈치가 대지를 디디고 서서 기운의 출발점이 되었다.
 무릎이 살짝 굽혀지고 허리가 탄력 있게 움직였다. 어깨가 꿈틀거린다 싶은 순간, 오른 주먹이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그는 허공을 짧게 두 번 끊어졌다. 매서운 권기가 두 도사의 면전으로 날아갔다.
 도경의 권력은 두 도사의 예상치를 상회하고 있었다. 둘은 강맹하기 짝이 없는 권기에 훌쩍 뛰어 물러났다. 권장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한 그들은 그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는 동안, 군데군데 이가 나가고 피와 기름에 절어 검 자체의 예리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검을 타고 흐르는 기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후퇴한다!”
 일촉즉발의 위기는 화우자의 명령으로 해소되었다. 괴물을 막아내지 못하고 밀리고 만 것이다. 도경은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움직였다. 옥허와 옥령은 더 이상 덤비지 않았다.
 둘은 동문의 시체를 수습한 다음 경공을 전개했다. 산산이 조각난 막내사제는 도저히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남겨두었다.
 산짐승의 먹이가 되리라.
 아니, 어쩌면 괴물들이 먹어치울지도 몰랐다.
 이십 장쯤 올라가자 두 번째 목책이 나타났다.
 이번 것은 제법 튼튼해보였다. 장년인 둘이 옥허와 옥령의 품에 안긴 시체를 보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도경은 그들에게서 피로를 감지했다. 피로가 그들의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동문의 시체가 불러일으켜야 할 분노를 갉아먹고 있었다. 시체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 더 이상 분노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야.’
 도경은 이차 목책이 괴물들을 저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길은 넓어지다 좁아져 한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소로로 변했다.
 모퉁이를 돌자 전각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아래부터 봉우리 끝까지 좁은 공간을 비집고 전각이 들어서 있었는데 어떤 것은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은 주변 경치와 동화되어 산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잠잘 곳과 연무장,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 그리고 목책이 전부였던 무미건조한 우각채와는 완전히 달랐다.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우아함이 건물들에 있었다.
 화우자가 전음을 보내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자 옥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허가 말했다.
 “따라오시오.”
 한차례 부딪친 것 때문인지 말투가 곱지 않았다.
 옥허는 그들을 깎아지른 벼랑 위에 얹어진 건물에 밀어 넣고 문을 탁 닫았다. 빗장 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도경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감금당하는 것 같잖아.”
 방은 지면의 경사 때문에 살짝 경사가 져 있었다. 바닥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중간에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뒷면에는 돌 침상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보료가 깔려 있었다.
 도경은 그녀를 보료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린은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뭘 하려는 거지? 날 덮치려는 걸까?’
 과도한 긴장 때문에 뒷목이 뻣뻣해졌다.
 도경은 그녀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고 물러섰다.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지자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당분간은 몸을 더럽힐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 탓에 배가 아팠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도경은 심방과 마주 앉아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엿 같네.”
 “뭐가?”
 “아까 그녀를 잡았을 때 욕정이 일었어. 마치 짐승이 된 것 같았어.”
 심방이 피식거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가 젊은이의 미숙함을 보고 짓는 웃음 같아 도경은 떨떠름해졌다.
 “무슨 웃음이 그 따위냐?”
 “귀여워서.”
 “우웩, 토하겠다, 그만해라.”
 심방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목을 돌렸다.
 “쓸데없는 고민하지 마.”
 “이게 어떻게 쓸데없는 고민이냐?”
 “네 나이를 생각해. 그때는 누구나 다 그래.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욕망덩어리지.”
 “참나, 그때 상황을 한번 떠올려봐.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곳에서 욕정을 느낀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돼. 원래 죽음이 난무하는 곳에 욕정이 난무하기 마련이야. 본능이지. 씨를 남기려는 본능.”
 심방은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넌 여자를 거의 보지 못했잖아. 사매와 늙은 아줌마들이 다였고, 지금은 특히 심해서 삼 년 동안 여자라고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잖아. 그러다 젊고 예쁜 여자를 봤으니 혹하는 게 당연하지.”
 도경은 그의 하품이 맘에 들지 않았다.
 ‘대화가 유치하다 이거야 뭐야? 게다가 말하면서 하품은 왜 해?’
 도경이 반격했다.
 “너도 나와 비슷한 처진데 넌 안 그러잖아?”
 “나?”
 심방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빙그레 웃었다.
 “야, 임마! 난 중이야, 중! 넌 가끔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잊는 것 같더라.”
 그래, 중이었지.
 도경은 손을 들었다.
 “그래, 넌 중이다. 너 잘났다.”
 그는 일어나서 문을 밀어보았다.
 단단히 빗장이 질려 있었다.
 “우리는 왜 가둔 걸까?”
 “지금은 전쟁 중이야. 함부로 외인을 들일 수는 없지.”
 “우리가 외인이야? 괴물과 싸우는 모든 사람이 한편이야.”
 심방은 빨간 머리 여자를 가리켰다.
 “사람이 괴물 뒤에 있잖아. 괴물을 지휘하는 그녀를 비호했으니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
 “비호는 무슨?”
 
 
 제4장 화산권왕
 
 산에선 해가 일찍 진다.
 도경은 벽에 걸린 유등에 불을 붙여 탁자 위에 놓았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아이린은 벽을 향한 채 누워 있었다.
 일렁이는 그림자가 꼭 자신의 운명처럼 다가왔다.
 ‘난 어떻게 될까?’
 불이 꺼지면 없어질 그림자처럼, 그녀의 목숨도 흔들리다 꺼질 것 같았다. 그녀는 삶에 대해, 곧 죽을 비참한 운명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에 담아 놓은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야만인들 손에 목숨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살고 싶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도경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배를 문질렀다.
 “배고프다. 잠도 오고.”
 심방은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얘들은 사람을 데려다놓고 들여다보지도 않네. 손님대접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쓴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되는 거 아냐?”
 도경은 비 맞은 중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심방이 가부좌를 풀며 눈을 흘겼다. 소란스러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공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도경은 손을 흔들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신경을 긁어대는데 연공이 되냐?”
 “네 집중력이 약해서 그래. 굿판에 갖다놔도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한다잖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심방은 여자 쪽으로 가서 상체를 숙였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잠이 든 것 같았다.
 “점혈은 언제 풀리지?”
 “이미 풀렸을 거야.”
 “그렇게 약하게 짚은 거야?”
 “점혈하고 오래 두면 몸에 해로워.”
 “그래도 그렇지. 되게 반했나 보구나.”
 심방은 혀를 찼다.
 “딴마음 먹지 마라.”
 “딴마음이라니?”
 “알면서 의뭉 떨지 마. 이 아가씨와 연결되면 끝이 안 좋을 거야.”
 그는 도경이 여자한테 마음을 줬다 상처를 입을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끝이 안 좋다니? 어째서?”
 “괴물들 손에 죽은 사람이 몇이냐? 악에 받친 사람들이 그냥 둘 리 없잖아.”
 도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를 지켜주고 싶었다.
 “도와주자.”
 “안 돼.”
 “너 불제자 아냐? 하해와 같은 자비심은 어디로 다 간 거냐?”
 “이건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럼 누가 처리하는데?”
 심방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나 끝내 말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도경은 재차 물으려다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입을 닫았다.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나고 옥허가 들어섰다.
 “따라오시오.”
 도경은 그를 따라가다 말고 도로 방으로 돌아와 보료 위쪽에 놓여 있던 얇은 이불에 그녀를 돌돌 싸 어깨에 멨다.
 옥허가 말했다.
 “여자는 놔두시오.”
 “싫소.”
 도경은 쏘아붙이듯 한마디 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건물을 나서면 들어가 여자를 딴 곳으로 옮기려는 속셈이 뻔했다.
 옥허의 볼이 실룩거렸다. 억지로 참는 티가 역력했다. 발걸음도 아주 신경질적이었다.
 이각 정도 걸어가자 제법 큰 전각이 나왔다.
 마루가 깔려 있었고, 여섯 개의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그 중앙에 화우자와 낯이 검은 속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 허연 수염이 명치까지 내려온 노도장 둘이 대추를 오물거리며 앉아 있었다.
 도경이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여자를 내려놓을 때 심방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소림의 심방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무당의 오도경입니다.”
 화우자가 말했다.
 “이쪽은 내 사형 그리고 이분들은 장로님들이시네.”
 흰 수염의 노인은 송악, 송순이라 했다.
 화우자의 사형이면 화산권왕 종리궁이겠군. 그리고 송자 배분이면 화우자의 사부뻘이고.
 심방은 태도를 더욱 경건히 했다.
 “화산의 진인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종리궁이 웃었다.
 “난 진인이 아니네.”
 종리궁은 도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아예, 그렇군요.”
 심방은 특유의 동작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민망할 때 주로 하는 버릇이었다.
 “퇫.”
 송악이 돌연 대추씨를 뱉었다.
 씨는 마루를 뚫고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 급랭했다.
 “여자를 잡았다면서?”
 올 것이 왔구나.
 도경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예.”
 송악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놔.”
 도경도 단도직입적으로 응수했다.
 “싫은데요.”
 “고이얀!”
 송악이 앉은 채 발을 굴렀다.
 쾅
 대전이 들썩거리며 들보 위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절대 넘길 수 없었으므로 도경은 강하게 뻗댔다.
 “제가 잡았습니다.”
 “네가 잡았으니 네 거다?”
 비꼬는 투였다.
 “예, 아주 잘 아시네요.”
 도경도 은근슬쩍 이죽거렸다.
 “네 사부도 내 앞에서는 함부로 말대꾸를 못한다.”
 “제 사부를 아십니까?”
 “우상한테 사사받았다면서? 그 사부에 그 제자라더니,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것은 똑같구나.”
 그때 송순이 벌떡 일어섰다. 마치 칼이 일어나는 것처럼 예리한 기세를 풍겼다.
 “사형! 미간에 깃든 저 고집을 보세요. 말로 해선 듣지 않을 아입니다.”
 사형한테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기실은 도경에게 한 말이었다. 사손뻘 되는 아이를 기습했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 미리 경고한 것이다. 곧 공격하겠다는 경고!
 심방은 난감했다. 분란을 일으키고자 화산에 온 게 아니었다.
 그래서 물었다.
 “화산의 종리대협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진행되는 화제와 동떨어진 뜬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소란은 일단 가라앉았다.
 강남으로 건너간 장문인을 대신해 본산을 지키고 있는 종리궁한테 던진 이 질문은, 이 자리의 주재자가 누구인지, 누가 결정권자인지 밝히라는 요구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은근히 나는 소림의 대리인으로 이 자리에 와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소림과 무당을 등에 업고 찾아온 전령을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자칫 개인의 다툼을 넘어 문파간의 분쟁으로 확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귀파의 장문인도 잘 계시는가?”
 종리궁이 물었다.
 자신이 이곳 책임자임을 확실히한 것이다.
 심방은 어려서 각통 밑으로 들어간 후 줄곧 우각채에서만 살았다. 딱 한 번 본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 장문인은 이미 강남으로 떠난 뒤였다. 그래서 장문인을 아직 만나본 일이 없었으나, 일단 잘 지내신다고 대답했다.
 종리궁이 물었다.
 “어쩐 일로 방문했는가?”
 “남궁세가주 천검장주 등이 연판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왜? 무슨 일이 있는가?”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릅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했습니다. 전 무림의 중지를 모을 일이 있다고.”
 화우자가 끼어들었다.
 “무림 대회합을 열겠다는 건가?”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강남에 있는 각파의 장문인들께서도 참가할 겁니다.”
 “그런데 왜 네가 왔느냐?”
 장문 사형이 참가키로 결정했다면 화산 문하가 와야 마땅하다. 게다가 남궁세가에서 추진하는 일이라잖은가. 소림과 무당 제자가 전령으로 올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심방은 그의 의문을 알아듣고 찬찬히 대답했다.
 “강남의 화산문하는 다른 일에 동원되었고, 시간도 촉박한지라 가까이 있는 저희들이 왔습니다. 어쩌면 지금 화산에서도 연락을 취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괴물들의 공격이 거세 연락할 마땅한 방법이 없거든요. 해서 산채를 해산하는 참에 겸사겸사 우리가 연락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종리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강남의 장문인과 전서구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사 개월 전부터 전서구가 하나 둘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젠 씨가 말라 번거롭지만 인편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엔 적한테 둘러싸인 데다 공세가 격화되어 그나마도 쉽지가 않았다.
 종리궁이 말했다.
 “산채를 비웠다고?”
 “예, 괴물들 공격이 너무 거세져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산채도 처지가 비슷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산채가 해산하는 중이고, 거대방파의 본거지도 하나둘 철수를 하는 분위기입니다. 화산도…….”
 심방은 뒷말을 삼켰다. 화산권왕 면전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우니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화우자가 말했다.
 “잠시 나가있게.”
 “예.”
 둘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도경은 나가다 돌아와 전처럼 여자를 들러 멨다.
 “깜빡했습니다.”
 그 모습이 밉살스러워 송순은 입에 힘을 모았다.
 둥글게 말린 입에서 바람소리가 흘러나왔다.
 휘리릭
 도경은 왼쪽으로 돌면서 송순이 뱉어낸 대추씨를 흘렸다. 왼발이 오른발 뒤로 돌아가면서 마루를 밀고 동시에 상체가 숙여졌다. 대추씨 또 하나가 스치듯 지나가 기둥에 박혔다. 입 안에 씨가 떨어지자 송순은 대추를 한 움큼 집어넣었다.
 도경은 얼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종리궁이 말했다.
 “장로님.”
 송순은 머쓱해져 우물거리던 입을 멈췄다.
 도경은 눈치를 살피며 잽싸게 문 쪽으로 이동했고,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이 닫히자 화우자가 말했다.
 “사형, 어쩌실 겁니까?”
 “강남의 거대방파가 추진하는 일이고, 장문사형이 재가한 일이네. 당연히 가야지.”
 “믿을 수 있을까요? 협잡꾼일 수도 있잖습니까?”
 “몸놀림을 보게. 제대로 배운 무공이야. 협잡꾼은 절대 아닐세. 그건 그렇게 결정하기로 하고, 다른 문제를 논의하세.”
 “다른 문제라면?”
 “다른 산채가 하나둘 비워지고 있다는 말 말일세. 우리도 거의 한계에 봉착했네. 슬슬 떠날 준비를 서둘러야지.”
 송악이 말했다.
 “본산을 비우고 떠나자는 말이냐? 안 된다! 화산은 한 번도 본산을 더럽혀진 적이 없거늘, 우리 대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조사들이 지하에서 통곡하실 것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
 순간 화산권왕은 흙을 들어 그의 눈에 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본산이 무슨 대수라고.’
 사람만 무사하면 건물은 언제든 다시 세우면 된다. 괴물들이 연화봉을 잘라 없애버릴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괴물들 때문에 보급도 여의치 않고, 공격도 거세져 죽어가는 제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더 큰 희생이 생기기 전에 강남으로 가야 합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본산에 연연해하다 희생된 제자가 얼마던가.
 화산이 다른 문파보다 더 쇠약해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
 화우자가 말했다.
 “사형, 본산을 지키고 있다는 점 때문에 화산의 명성이 드높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셔야 할 줄 압니다.”
 “허허.”
 종리궁은 헛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고리타분한 장로들이야 원래가 그렇다 쳐도 자신보다도 어린 사제가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지.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었다.
 “이 문제는 제가 회합에 참석해 장문인께 여쭤보겠습니다. 장문인께서 허락하시면 두 분 장로님들도 따라주십시오.”
 “끄응.”
 장문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송악과 송순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장문인이 끝까지 본산을 지키도록 엄명을 내리길 빌고 또 빌었다.
 화우자가 말했다.
 “인질은 어찌하실 겁니까?”
 “그 여자는 도경이 잡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내놓으라고 말할 명분이 없잖나.”
 “우리를 공격하던 여잡니다. 반드시 심문을 해야 합니다.”
 송악이 말했다.
 “화우자 말이 옳다. 괴물들 동조자를 그냥 놔둘 순 없지.”
 종리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잡았습니다. 게다가 사제는 그들한테 도움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전령으로 온 후배를 핍박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고개를 들고 다니기가 어렵습니다.”
 송순은 화우자한테 눈길을 주었다. 눈빛으로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냐고 묻고 있었다.
 화우자가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구명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괴물들한테서 몸을 빼는 것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한 일. 목책을 사수했다면 모르지만 괴물들한테 빼앗기지 않았는가.
 따라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없었다.
 송악이 말했다.
 “한 번 더 권유해보지.”
 
 그 시각 도경은 전각에서 멀찍이 떨어진 길가에서 돌멩이를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여자를 어깨에 짊어진 채.
 “너 왜 거짓말 했어?”
 “내가 뭘?”
 “화산에 들렀다 무당으로 갈 거라며.”
 “그런데?”
 “자꾸 이럴래. 강남의 장문인들까지 모이는데 위험하게 무당에서 회합을 가질 리 없잖아. 그리고 대회합이 있을 거란 얘기는 왜 안 했냐? 어디서 모이는 거지?”
 “동정호.”
 심방은 방어적으로 말을 이었다.
 “사부의 명이라 어쩔 수 없었다. 워낙 중요한 얘기거든. 네가 잡혀서 심문을 받으면 다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셨어.”
 “쳇, 너는 괜찮고?”
 “응, 난 의지가 굳잖아. 난 자결을 했으면 했지 절대 비밀을 누설하진 않아.”
 대놓고 하는 강한 자기긍정이 도경의 귀에 몹시 뻔뻔하게 들렸다.
 “너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다.”
 “아니, 난 그대로야. 상황이 이래서 입을 다문 것뿐이야.”
 “너 내가 심문을 당하면 다 불거라고 생각해? 각통대사야 그렇다 쳐도 너까지 그럼 안 되지.”
 “그럼 너 끝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어?”
 도경이 잠시 생각하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목숨을 위협받으면 다 불 거야.”
 그까짓 비밀이 뭐라고 죽음으로 지키는가.
 도경은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비밀은 없다고 생각했다.
 “각통 대사는 날 너무 잘 알아.”
 잠시 투덜거리던 그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지금 심문이라고 했냐? 괴물들이 우릴 심문한다는 거야? 그런 일 없었잖아. 이때까지는 모조리 죽였는데, 말도 안 통하고.”
 “우리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더라. 심문은 바로 그들이 하는 거고.”
 “괴물이?”
 “아니, 오늘 네가 사로잡은 그 여자와 같은 사람. 물론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어.”
 “젠장, 하나가 아니었구나.”
 “하나는 아니지만 많지도 않아.”
 그때 문이 열리며 화우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송순이 말했다.
 “여자를 심문하기로 했네. 자네의 참관을 허락할 테니 여자를 내놓게.”
 도경이 강하게 반발하려는데, 심방이 그의 허벅지를 툭 쳤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가만히 있어.
 심방이 말했다.
 “할 수 없을 겁니다.”
 “거부하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심문하려면 의사소통이 기본일 텐데, 이 여자는 우리말을 못합니다.”
 “우리말을 못한다고?”
 “그렇습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송순은 심방이 여자의 연극에 속은 거라고 단정 지었다.
 “제갈소저께서 직접 확인한 일입니다. 괴물 쪽에 가담한 색목인들은 거의 우리말을 못합니다. 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제갈소저?”
 “제갈가의 마지막 혈손 제갈미 소저 말입니다.”
 “아, 그녀가 괴물을 연구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지?”
 도경은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많이 놀랐다.
 ‘내가 모르는 일을 많이 알고 있네.’
 심방이 말했다.
 “일단 괴물들 말과 글을 익혔습니다.”
 도경은 정말 놀랐다. 몇몇 학자들이 그들의 말을 배우려 했지만, 어렵고 복잡한 데다 정보가 부족해 끝내 배우지 못했다.
 도경이 말했다.
 “그래서 강북을 돌아다니고 있었군. 그런데 너 혹시 색목인들 정체도 알고 있냐?”
 “정확히는 몰라. 소저의 말론 아라사나 서역사람들 같지는 않다는 거야. 정체불명이지.”
 송악이 말했다.
 “심문할 수 없으면 죽여야지.”
 심방이 말했다.
 “제갈소저라면 능히 심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 말을 아니까요. 압송해 소저가 심문하면 됩니다.”
 “우리도 참관한다.”
 “원하신다면.”
 이로써 모든 게 깨끗이 매듭지어졌다.
 잠시 뜸을 들이다 나오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종리궁이 말했다.
 “정문 쪽에서 공격하던 무리에 색목인 둘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정체를 정말로 모르는가?”
 심방이 대답하기 전에 도경이 나섰다.
 “걔들도 예뻐요?”
 순간,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이 상황에서 예쁘냐고 묻다니!
 화우자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남자다.”
 남자라는 말에 도경은 적이 실망했다.
 “에이,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종리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는 여자한테 관심이 많나보이.”
 다정한 그 말에 다소 긴장이 풀렸다.
 “많다기보다 호기심이 좀 있어서.”
 종리궁은 심방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답해주게.”
 “정말 모릅니다. 제갈소저가 그리 말했습니다.”
 “그렇군.”
 화우자가 나섰다.
 “소저는 왜 괴물들 말을 배운 건가?”
 “우린 그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강북을 빼앗겼는데도 짐승들이라 무시하면서 조만간 땅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저는 그들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했고, 이기자면 그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심방은 한숨을 돌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학문적 관심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종리궁가 말했다.
 “맞아. 우리는 현실을 무시하고 그들까지 무시했어. 아주 어려운 상대인데도 말이지.”
 “흥, 괴물은 괴물이야,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네.”
 송악이 콧방귀를 꼈다.
 도경은 그녀의 말이 백 번 천 번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송악의 콧방귀가 고깝게 여겨졌다.
 ‘포위를 당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큰소리는! 일찍이 손자께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강조를 하셨거늘 제가 뭐라고 거기다 토를 달아.’
 미운 털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종리궁가 말했다.
 “그래, 소저께선 뭘 좀 알아내셨는가?”
 “여러 가지 소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꽤 놀라운 사실까지 알아냈고요.”
 흥미를 느낀 화우자가 물었다.
 “그게 뭔가?”
 “괴물 진영에 있는 색목인들, 그들이 우리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 중 일부는 우리말과 글을 압니다. 이건 그냥 짐작이지만 괴물들 중에서도 아는 자가 있을 수도…….”
 화우자는 벌떡 일어섰다.
 “어찌 그런 일이! 괴물이 우리를 연구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심방의 대답에 송순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색목인들이 우릴 연구하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솔직히 중원을 잘 아는 색목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제갈소저는 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색목인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괴물과 같은 데서 온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종리궁이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연구한다는 것은?”
 “예, 싸움이 한층 더 어려워질 겁니다. 아울러 그들이 뭔가 찾는 것 같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작별을 고하고 건물을 나섰다.
 도경이 투덜거렸다.
 “너 기분 나빠. 나한테 숨긴 게 너무 많아.”
 “이제 다 알았잖아. 나도 사실 제갈소저에게 들은 거야. 들은 지 얼마 안 됐어.”
 도경은 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넌 나의 유일무이한 친구야.”
 “나도 그래.”
 “한 가지만 약속해라. 다신 날 속이지 않겠다고.”
 심방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약속하지. 앞으로 절대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됐냐?”
 “됐어.”
 둘은 마주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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