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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왕 1권-1

2015.01.08 조회 2,457 추천 15


 경배하라, 불의 왕이 오신다!
 
 프롤로그
 
 현민
 
 아버지가 비에 젖어 들어섰다.
 현민은 축 처진 아버지의 어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보고 얼른 탁자 밑으로 숨었다. 그는 자신이 재빠르게 움직여 아버지가 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재빠르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탁자 옆에 무릎을 꿇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늘 좋아?”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일진을 묻는 것이다.
 현민이도 언제나처럼 웃어주었다.
 입가까지 번져가다 마는 어색한 미소였다. 그리고 대답도 늘 같았다.
 “좋았어요.”
 아버지가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술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축축한 날의 축축한 술 냄새!
 현민은 문득 섬쩍지근함을 느꼈다.
 아버지가 물었다.
 “숨바꼭질하고 싶니?”
 “아뇨, 바퀴벌레 잡으러 들어왔어요.”
 마침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벌레를 보며 현수는 안도했다. 핑계거리가 생겨서 너무나 좋았다. 바퀴벌레는 재빨랐다. 솜털이 달린 것처럼 보이는 그 징그러운 다리가 윗동네 뚱보 자가용 바퀴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짝짝짝
 아버지는 바퀴벌레를 노리고 연신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술에 취한 굼뜬 동작으로는 잡을 수가 없었다.
 “망할 놈의 바퀴벌레!”
 벌레는 벽의 벌어진 틈으로 기어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민호는 바닥을 때리느라 더러워진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아들을 보고 웃었다. 입을 열 때마다 풍겨 나오는 역한 술 냄새가 코끝을 진동시켰다. 그 냄새는 현민이 장성했을 때도, 곁에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맡아지곤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공기 중에 뒤섞여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민호가 말했다.
 “내일은 약을 쳐서 깡그리 잡아버리자.”
 그가 말하는 내일은 이미 오늘이었다. 조금 전 괘종시계가 열두 번 울렸던 것이다.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하얀 이 사이에서 끼인 고춧가루가 보였다. 그는 눈을 찡긋거리며 잠바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동산이 딸려 나왔다.
 “먹어라.”
 현민은 얼른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도록 고개를 숙인 채 반걸음쯤 다가섰다. 아버지는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준 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부엌과 맞붙은 작은 살림방으로 들어섰다.
 민호는 집으로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리는 아들을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빨간 잠바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그는 담배를 꺼낸 다음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에서 라이터를 발견하지 못한 그는 던져버린 잠바를 찾기 위해 더듬거렸다. 술김에 던져버린 것이라, 어디로 날아갔는지 얼른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구시렁거리며 일어선 그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또각
 스위치를 누르자 두어 번 깜빡거리던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바퀴벌레가 불빛에 놀라 기겁을 하고 흩어졌다.
 “시팔, 바퀴벌레 천지네.”
 힘이 좀 과했는지 잠바는 방구석까지 날아가 있었다.
 그는 잠바를 집으러가기 위해 모로 누워 잠들어 있는 아내를 타넘었다. 마침 아내가 가늘게 코를 골았다. 구석에 앉은 민호는 맛동산을 꺼낼 때처럼,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포라이터!
 은으로 도금한 지포라이터가 손에 잡히자 그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형편에 십만 원짜리 라이터는 분명 과분했고,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애지중지했다. 이 미제 라이터로 불을 붙일 때면 주변에서 놀라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때마다 우쭐해졌다.
 동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선뜻 빌려달라고 손을 내밀지도 못했다. 자신들이 감히 만져선 안 될 물건이란 것을 아는 것이다.
 틱틱
 라이터가 잘 켜지지 않았다.
 탁탁탁
 담배생각이 간절한 만큼 손가락의 움직임이 신경질적으로 빨라졌다. 그러나 끝내 푸른 불꽃은 올라오지 않았다. 기름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기름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포기하고 나중에는 성냥을 찾았다.
 어서 불을 붙이고 싶었다.
 망할 놈의 성냥마저 말썽을 부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자, 그는 벌떡 일어나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아내의 등을 걷어찼다.
 등에서 시작된 통증이 미라의 숨통을 콱 틀어막았다.
 “억!”
 꽉 막힌 비명을 지르며 아내가 몸을 웅크리자 민호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을러댔다.
 “성냥!”
 잠에서 깨어난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장차 다가올 일에 대해 공포를 또렷이 느꼈다. 남편이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성냥!”
 그녀는 성냥을 찾아 미친 듯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년이!”
 퍽!
 남편의 주먹이 배에 틀어박혔다.
 그 즉시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움켜쥔 머리채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자, 이번에는 엉덩이를 걷어찼다.
 “성냥 내놔! 이년아!”
 계속되는 폭행 속에서 그녀는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자신이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폭행이 일어날 때마다 겁에 질려 떠는 아들의 모습이 두들겨 맞는 고통보다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었다.
 봉투를 뜯는 현민의 손이 계속 떨렸다.
 술에 절어 가끔 떠는 아버지의 손길과 엇비슷했다. 엄마의 비명소리와 흐느낌 속에서도 그는 맛동산에만 집중했다. 망할 놈의 봉투가 잘 뜯기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빨로 물어뜯었다.
 거친 동작에 과자가 튀어나와 날아갔다.
 땅콩이 발린 갈색의 과자.
 달콤하고 바삭해서 좋아하던 그 과자를 주워 먹으려고 다가가던 손길이 떨리며 멈췄다. 가느다란 흐느낌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맛동산을 줍지 않고 손을 움츠렸다.
 잠시 과자를 노려보다 발을 뻗어 과자를 짓밟아버렸다.
 시선이 부옇게 흐려졌다.
 과자를 꺼내 먹으며 그는 봉투를 노려보았다.
 하나도 달지 않았다.
 
 
 세인
 
 한 평 반 남짓한 다락방은 세인의 왕국이었다.
 구멍가게에서 몰래 훔쳐온 라면박스로 쌓은 성 안에서 그는 무적의 왕자였고, 멋진 기사였다. 바닥에 깔린 신문지는 신밧드의 마술 양탄자보다 더 훌륭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탕
 벽장문이 거칠게 열렸다.
 낡을 대로 낡아 밟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엉성한 계단을 따라 오종종한 사내가 올라왔다. 그는 이 미터도 채 안 되는, 계단이라고 부르기에는 차마 부끄러운 곳을 올라오면서도 힘에 부치는지 마지막 단에 걸터앉아 한동안 씩씩거렸다.
 잠시 뒤 그가 소리쳤다.
 “애비가 왔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아!”
 술에 취해 몽롱한 그의 머릿속에는 자정이 넘었다는, 그래서 애들이 깨어 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란 생각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일어나, 이 새끼야!”
 두려움과 혐오감 속에서 세인은 엉거주춤 일어났으나, 자신의 성안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였다. 성 밖에는 악마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빵을 주니까 꼭 나오라고 꼬셔대던 이웃집 집사 아줌마가 매일 떠들어대던 그 악마였다.
 세인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탈을 쓰고 있지만 저자는 악마가 분명했다.
 술을 동력으로 삼아 자신을 괴롭히는 하느님의 대적자!
 그 악마가 계속 소리쳤다.
 “이 새끼가 그래도!”
 폭군의 무력 앞에 박스로 쌓아올린 왕국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
 삼양라면이라는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박스가 무력하게 벽에 패대기쳐졌다. 성벽이 무너진 곳에서 일국의 왕이요, 왕자요, 무적의 기사인 세인은 너무나 무력하게 떨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법의 양탄자를 움켜쥔 채.
 부욱
 악마는 그 양탄자를 찢어버렸다. 자신이 신밧드였다면 저것을 타고 날아서 도망쳤을 텐데.
 “악!”
 뺨에서 전해지는 화끈한 통증에 세인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슬픔과 고통, 두려움이 뒤섞인 끔찍한 비명소리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으악!”
 바짝 말라 갈비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세인의 옆구리에 아버지의 발이 틀어박혔다.
 아팠다. 너무나 아팠다.
 다락방 아래에서는 헝클어진 방 안에서 엄마가 흐느끼고 있었다. 두 귀를 틀어막은 그녀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끔찍스런 비명이 얇은 벽을 통과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시끄럽다고 욕설을 퍼부으며 벽을 쾅쾅 칠 뿐, 이웃의 그 누구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건
 
 우건의 어머니는 깁던 양말을 틀어쥐고 헐떡거렸다.
 짧으면 삼 일 길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들려오는 저 소리는 언제 들어도 소름끼쳤다.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집을 나서지 못했다.
 그녀를 가로막은 것은 남의 집 일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더러운 인습이 아니었다. 옆집으로 건너가 말리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세인 아빠의 주먹에 얻어맞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 남편까지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주먹을 휘두를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그녀는 모른 척했다.
 “엄마.”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이 자다 일어난 것이다.
 우건은 눈을 뜨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주먹을 꼭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달려나가 친구의 아버지 박덕수의 엉덩이를 갈겨주고 싶었다.
 “나쁜 새끼!”
 어머니가 엄하게 말했다.
 “자거라.”
 그 말 속에 담긴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아이의 다리를 잡았다.
 그가 달려 나가 덕배에게 달려들었다가는 어머니도 따라나올 것이고, 필시 폭행을 당할 것이다. 그는 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유난히 오늘의 폭행은 길었다.
 그는 어머니의 손길을 쌀쌀맞게 쳐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묻고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도 비명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했다.
 
 
 제1부 어깨동무
 1장 삼총사
 
 1 두부촌 아이들
 
 현민은 아버지가 보기 싫어 아침을 거른 채 집을 나섰다.
 집 앞의 이차선 도로는 작년 가을에 포장을 했다. 그것을 두고 공무원 새끼들이 뇌물을 받아 처먹느라 도로가 닦였고, 그 바람에 월세만 올랐다고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투덜거렸다.
 그 빌어먹을 도로를 따라 그는 달렸다.
 지퍼를 열어놓은 얇은 잠바가 아침 바람에 날려 펄럭거렸다. 이십여 미터를 총알처럼 질주한 그는 집에서 튀어나온 아이와 합류했다. 우건은 현민을 보고 잇몸이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둘은 다섯 발짝쯤 움직이고 멈췄다.
 그리고 입을 모아 소리쳤다.
 “세인아, 놀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둘은 더욱 크게 외쳤다.
 “세인아, 놀자.”
 한참 만에 대답이 들려왔다.
 “안 논다, 가라.”
 가라는 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떠나지 않았다.
 둘은 한 번 더 합창했다.
 “세인아, 놀자!”
 더욱 우렁찼다.
 역시 똑같은 대답이 들렸다.
 “안 논다, 가라!”
 거기에 욕설까지 따라 나왔다.
 “애새끼들이 아침부터 악을 쓰고 지랄이야.”
 그리고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현민과 우건은 걱정스런 듯 눈길을 주고받았다.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두 쌍의 눈동자에 교차했다. 눈동자 깊숙한 곳, 너무 깊은 곳에 숨어 있어 그 자신들조차도 느낄 수 없는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덜컹
 문이 열리고 구르듯 세인이가 튀어나왔다.
 발이 꼬여 비틀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만 같았다.
 우건이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러다 그는 세인의 왼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세인이 얼른 고개를 숙였으나, 하얗게 질린 반대편 뺨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놔!”
 우건의 손을 뿌리친 세인은 길을 터덜터덜 걸어 올라갔다.
 한동안 셋은 말없이 조용히 걸었다.
 가끔씩 끄는 듯한 발소리와 이따금 지나가는 자전거의 딸랑거리는 소리만이 불편한 침묵 속으로 끼어들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걷던 세인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어디 갈래?”
 억지로 꾸민 티가 나는 밝은 목소리는 현민에게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우건이 말했다.
 “방천으로 가자.”
 “좋지. 늦게 오는 사람 바보!”
 세인은 고함을 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비쩍 마른 몸이 놀라운 속도로 바람을 갈랐다. 질세라 우건도 주먹을 가볍게 옆구리에 붙이고 빠르게 앞뒤로 저었다. 그는 세인을 바짝 쫓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는 세인을 제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둘의 거리는 두 걸음쯤 차이가 났다. 그 두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일등!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인은 기분 좋게 상기된 얼굴로 골인 지점을 통과한 것처럼 미루나무를 짚었다. 그리고 허리를 꺾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해서 도드라져보이던 왼쪽 뺨의 붉은 자국도 상기된 볼에 가려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쳇!”
 우건은 숨을 헐떡이며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짐짓 불만스럽게 입을 실룩거렸으나 친구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마음은 상쾌했다.
 세인이 말했다.
 “달리기는 언제나 내가 일등이야. 우건이 너도 달리기로는 날 못 이겨.”
 “언젠간 널 제칠 거야.”
 “하, 어느 세월에?”
 둘이 어깨로 밀며 투탁거릴 때 헐떡거리며 현민이 도착했다.
 “좀 천천히 가지.”
 현민은 우건의 옆에 쪼그려 앉아 한동안 헐떡거렸다.
 침을 뱉자 길게 늘어진 침이 땅바닥에 닿았다 올라왔다. 현민은 손가락을 뻗어 그 침을 끊어냈다. 손끝이 설탕을 만진 것처럼 찐득찐득했다.
 땅바닥에 손을 문질러 닦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셋이 둘러서서 손을 뻗어도 공간이 남을 정도의 아름드리 거목이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가자.”
 그들은 방천을 굽어보는 미루나무를 돌아 제방의 끄트머리로 갔다.
 흔히 방천이라 불리는 신천은 대구를 가로지른다. 예전에는 맑은 물이 굽이쳐 흘렀다고 하는데 가창 댐이 생긴 후로는 유량이 부족해 하천(河川)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물이 줄었다.
 여름철 집중호우 때문에 홍수가 날 때는 제방까지 물이 차올라 기세 좋게 흐르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의 호시절일 뿐, 그 시기가 지나면 물은 저 아래 제방도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줄었다.
 게다가 더럽기까지 했다. 혼탁하고 이끼가 잔뜩 낀 물은 점점 더 오염이 심해져 이제 아무도 그 물에서 멱을 감지 않았다. 재미삼이 고기를 잡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거기서 잡은 물고기는 절대 먹지 않았다. 생선가게에 내다 팔기는 하지만.
 돌과 시멘트로 축조된 제방 위에서 가슴을 펴고 잠시 심호흡을 하던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시멘트로 만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훗날 강변을 따라 도로가 들어서고 둔치에 시민을 위한 공원이 들어서지만, 그때까지는 도로도, 운동시설도 없었다.
 흙바닥에는 겨우내 말라버린 풀들 사이로 새로 돋아난 풀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어김없이 갈대가 흐드러질 것이다.
 아이들은 자갈과 돌을 쌓고 굵은 철사나 철망으로 얼기설기 얽어 놓은 아래 제방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넜다. 건너편 둔치에 시소가 몇 개 있고 모래사장도 만들어져 있어 놀기가 좋았다.
 두꺼비 집을 만든다고 한참 부산을 떨던 세인은 시소 옆으로 가더니 네모나게 선을 그었다.
 “땅따먹기 하자?”
 “좋아.”
 현민은 한쪽 모퉁이에 반원형 금을 그어 자신의 집을 만들었다. 말로 사용할 적당한 돌을 발견하고 손을 뻗는데, 갑자기 나타난 운동화가 돌을 짓밟았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운동화에는 붉은 색의 꼬부라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야, 발 치워!”
 그러자 신발의 주인이 말했다.
 “훗, 질투하는군.”
 “뭔 소리야?”
 짜증이 난 현민은 고개를 쳐들어 신발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같은 반 최준이다.
 “에이, 재수 없어!”
 우건이 말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더 이상 볼 일 없을 거라고 내심 기뻐했는데 재수 없게 5학년 때도 같은 반에 편성되고 말았다. 이로써 삼년 째 같은 반이다.
 뿔테 안경을 쓴 아이가 최준 옆에 서 있었다.
 그 아이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괜찮아. 내버려둬. 부러워서 저러는 거니까.”
 최준도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옆의 아이와 달리 그는 가는 금테 안경이었다.
 그가 상체를 젖히고 발을 들어올려 신발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의 찬사를 기다렸다.
 ‘부럽지, 요놈들아?’
 이야 신발 멋지다!
 그 말을 기대하는 같아 현민은 기가 찼다.
 ‘자식, 별 것도 아닌 걸로 재기는.’
 그 신발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최준이 발을 들어올리자 현민은 돌을 주워 집 안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누가 먼저 할래?”
 최준은 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이 힘들어 비틀거렸다.
 한참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다 결국 그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려 땅바닥을 짓밟았다.
 “무식한 놈들!”
 아이는 상표가 잘 보이도록 발을 돌렸다.
 “이게 뭔지 알아?”
 현민이 물었다.
 “뭔데?”
 “크게 인심 써서 말해준다.”
 최준은 고개를 젖히고 선언하듯 말했다.
 “나이키!”
 현민은 상표를 자세히 보았다.
 유성이 꼬리를 끌며 떨어지다 고개를 쳐든 것 같기도 하고, 납작한 사발의 한쪽 끝이 깨어져 날아간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현민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우건아, 저 문양 저거 고무신 눌러서 삐딱하게 세워놓은 것 같다, 그치?”
 “맞네, 딱 고무신 같네.”
 “뭐야!”
 최준은 어이가 없어서 고함을 질렀다.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고무신을 들먹거려.”
 뿔테 안경이 한심하다는 듯 손가락을 세운 채 흔들며 말했다.
 “나이키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
 “나이키?”
 우건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안상민 저 자식은 걸핏하면 무식하데, 지는 최준 똘마니 주제에.”
 우건이 다가가자 상민은 놀라 얼른 뒤로 물러섰다.
 겁이 난 것이다.
 최준이 말했다.
 “우만아!”
 그러자 뒤쪽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말없이 서 있던 김우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몸집이 크고 살집이 많아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처럼 보였다.
 그가 상민이 앞을 가로막자 우건이 말했다.
 “흥! 똘마니 이호가 나섰군.”
 말을 마치고 우건은 우만의 배를 쿡쿡 찔렀다.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배가 출렁거렸다.
 “어?”
 우만이 입을 벌리고 멍한 소리를 냈다. 상민처럼 겁에 질린 건 아니지만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본 최준이 뒤에서 그의 등을 찔렀다.
 ‘덩치가 아깝다!’
 한 방 먹이라는 종용에 우만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최준이 불러서 나서긴 했으나 싸우긴 싫었다. 그래서 그는 파마를 한 것처럼 곱슬곱슬한 우건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그가 우건보다 손가락 세 마디 정도 컸고, 몸무게도 십오 킬로그램 정도 더 나갔다. 외견상으로는 그가 한 대 갈기면 우건은 건너편 둔치까지 날아갈 것 같았다.
 “이 쪼그만 놈이!”
 우만은 꽉 쥔 주먹으로 우건의 어깨를 밀었다.
 세 걸음쯤 물러난 우건이 두 주먹을 그러쥐고 권투자세를 취했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
 “붙어! 반밖에 안 되잖아.”
 최준의 충동질에도 우만은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자꾸 작년의 그 일이 생각났다.
 4학년 최고 장군이라는 소리가 샘이 나 한판 붙었다 깨진 이후로 그와 싸우기가 꺼려졌다. 동작이 날렵해 한 대도 못 때리고 소나기펀치를 계속 허용했는데, 주먹이 어찌나 매운지 그때만 생각하면 진땀이 났다.
 우만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내가 한번 봐줬다. 앞으로 잘해.”
 우건도 웃으며 팔을 내렸다.
 “누가 봐준 건지 모르겠다.”
 최준은 뭐가 못마땅한지 땅따먹기 하려고 그어놓은 금을 나이키로 문대버렸다.
 현민은 말리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흥미를 잃어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최준이 자랑스러워하는 신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이키가 뭐야?”
 최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촌놈들이 이제야 나이키의 진가를 알아보는군.’
 “나이키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비싼 거야.”
 “에이, 너도 잘 모르는구나.”
 “내가 모르긴 뭘 몰라.”
 “그럼 말해봐. 나이키가 뭔데?”
 “외제야. 비싼 거고 물 건너온 거야.”
 “그러니까 나이키가 뭐냐니까?”
 “너 바보구나. 나이키는 상표야, 상표!”
 최준은 발목 쪽이 헤진 현민의 운동화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네 싸구려 말표 신발 같은 거다.”
 “그것을 누가 몰라? 뜻이 뭐냐니까?”
 “음.”
 최준은 불시에 기습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한심해진 우건이 콧방귀를 꼈다.
 “자기도 모르면서 누구보고 무식하데.”
 “뭐야? 내가 무식하다고!”
 최준은 곧 달려들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더니, 이내 풀어버리고 이죽거렸다.
 “교양 있는 내가 두부촌놈들하고 싸울 수야 없지.”
 현민은 두부촌이란 말을 종종 들었으나 그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늘 모멸감을 느꼈을 뿐이다.
 “자꾸 두부촌 두부촌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그것도 몰랐어? 예전에 너희 동네에 두부공장이 있었어. 너희들은 그 두부도 사먹을 돈이 없어서 비지나 얻어먹고 살았지. 거지처럼. 이제 알겠어? 이 가난뱅이 자식들아!”
 노골적인 멸시와 조롱에 현민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 이상 상대하기 싫었다.
 우건은 최준을 보호하듯 서 있는 상민의 뺨을 밀어 옆으로 비키게 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재수 없는 놈의 면상을 지그시 눌러버렸다.
 “으악!”
 최준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저러다 죽는 게 아닌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우건은 놀라서 얼른 멀찌감치 떨어졌다.
 최준이 코에서 손을 떼어내자 벌건 피가 묻어 나왔다.
 코피다!
 피를 본 최준은 우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사실 코피를 터뜨릴 생각은 없었다.
 우건은 미안해서 뒤로 물러섰다.
 “우리 그만 가자.”
 “그래.”
 현민은 지체 없이 등을 돌리고 징검다리로 향했다.
 그때 상민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가는 거야!”
 최준도 고함을 질렀다.
 “두부촌 가난뱅이들, 나중에 두고 보자.”
 징검다리에 발을 올려놓던 우건이 움찔했다.
 세인이 등을 밀었다.
 “상대할 것 없어. 그냥 가자.”
 
 
 2 담임선생님
 
 단칸방 앞에 부엌 겸 거실이 딸려 있었다.
 너무 조잡해 싱크대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싱크대 옆에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뒤편의 문을 열고 나가면 곧바로 바깥이다. 현민은 가방에 국어책 산수책만 집어넣어 식탁 옆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아침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콩나물을 삶아서 건져낸 후 무치고 계셨다.
 엄마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현민은 식탁에 턱을 괴었다.
 “천천히 해도 돼요.”
 “신학기 첫 날인데 지각하면 안 되잖니? 담임선생님은 본 적 있니?”
 “누가 될지 몰라요.”
 “그래?”
 “하지만 여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왜?”
 “그냥요.”
 그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4학년 때 담임은 머리가 거의 벗겨진 자그마한 남자였는데, 깊게 패인 주름살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 선생은 귀찮다면서 조례는 거의 하지 않았고, 종례도 빼먹는 경우가 많았다. 반장이 교무실로 찾아가면 지루한 낯으로 들어와서는 집에 가라는 말만 하고 돌아서곤 했다.
 수업을 빼먹는 경우도 많았는데, 걸핏하면 자습을 시켰다. 음악시간에는 피아노 칠 줄 아는 아이를 불러내 한 시간 내내 풍금을 치게 했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한 시간 내내 노래만 불러야 했다. 그리고 미술시간에는 무조건 그림을 그리게 했다.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얘들을 때리지 않는다는 점이 좋긴 했지만, 거창한 철학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성가셔서 체벌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현민은 어쩐지 여선생이 담임이 되면 적어도 수업만큼은 열성적으로 해줄 것 같았다. 열성적인 담임을 원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생기 없이 늘어진, 대충 때우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시든 오이 같은 그런 음성을 매일 듣는다는 것은 너무나 재미없는 일인 것이다.
 “4년 내내 남자선생님한테만 배웠으니, 이제는 여자선생님한테도 배우고 싶어요.”
 “그러냐?”
 엄마는 반찬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현민은 웃을 때마다 입가에 잡히는 그 주름이 좋았다.
 현민은 마주보고 웃으며 수저를 놓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문턱에 걸쳐 앉았다.
 양말을 신던 그는 엄지가 양말 밖으로 나오자 대뜸 인상을 썼다.
 “구멍 났잖아!”
 아버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현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내려앉은 가슴이 등에 붙어 심장이 찌그러지는 것 같았다.
 현민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최대한 밝게 말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알았다.”
 그는 양말을 벗어던지며 일어섰다.
 엄마는 얼른 쫓아가 양말을 주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 때까지 엄마는 시녀처럼 옆에 서 있었다. 한 숟가락 밥을 뜬 그는 콩나물을 숟가락 위에 올리고 입에 넣었다. 두어 번 씹더니 도로 뱉어내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콩나물이 달아?”
 숟가락을 들던 현민은 움찔하며 얼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쨍그랑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장창
 약간의 사이를 두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아버지가 밥상을 엎어버린 것이다.
 쇠로 된 밥그릇이 두어 번 튕기며 배가 갈라진 물고기가 내장을 쏟아내는 것처럼 밥을 바닥에 쏟아냈다. 깨어진 접시에서 흘러나온 고춧가루 밴 국물이 바닥에 늘어진 콩나물을 타고 거친 시멘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마른버짐 사이로 일어난 두려움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엄마의 얼굴이 허옇게 질렀다.
 “미안해요. 소금대신 설탕을 쳤나 봐요.”
 엄마는 얼른 쭈그려 앉아 깨진 접시를 모았다.
 “에이 썅!”
 아버지는 신발을 꺾어 신고 밖으로 나가며 엄마를 걷어찼다.
 “콩나물도 제대로 못해.”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그 후로도 한동안 알루미늄새시가 진동을 계속했다.
 진동이 멈추자 세상도 멈췄다.
 현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부엌은 감당할 수 없는 횡포에 짓눌려 잔뜩 움츠려들었다. 아니, 집 전체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엄마는 부엌강아지처럼 주눅이 든 채 걷어차인 충격으로 그때까지 얼굴을 바닥에 박고 있었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엄마가 움직였다. 떨리는 손길로 깨어진 그릇을 모으고 밥을 도로 주워 담았다.
 반쯤 옆으로 돌린 엄마의 볼에 콩나물이 한 가닥이 묻어 있었다.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 나 학교 간다.”
 현민은 대답도 듣지 않고 총알처럼 뛰어나갔다.
 어떻게 문을 열도 닫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밖을 걷고 있었다. 가방까지 메고 신발주머니까지 든 채였다. 현민은 세인과 우건의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민호는 휘적휘적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내를 때리고 나면 늘 느끼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젠장!”
 기분이 엿 같았다.
 이제 그만 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었다. 아니, 최소한 아들이 보는 앞에서만은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줄 하나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난 이후, 정신을 차려보면 손발이 나간 후다. 그 이후는 자괴감 비슷한 감정이 일어 더욱 독하게 손을 쓰게 된다.
 아버지도 그랬었다.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어머니를 모지락스럽게 팼었다. 자신이 지금 그렇게 하듯이.
 그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원래 그런 거지. 원래 그렇잖아? 그냥 그렇게 사는 거잖아.”
 
 ***
 
 집을 나서 방천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곧장 가면 학교 정문이 나온다.
 하지만 아이들은 좁은 길로 이어진 동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좋아했다. 정문에는 선도부 얘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셋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미 좁은 골목길은 만원이다. 수로에 물이 흐르듯 우르르 물려가는 아이들.
 첫날이라 준비물도 없다. 그래서 늘 북적거리던 문방구도 오늘은 한산하다. 문방구 주인들은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어떤 사람은 건성으로, 어떤 사람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병아리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
 먹구름이 가득 낀 현민을 보며 세인이 물었다.
 “아니.”
 현민은 고개를 돌린 채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두 아이는 묵묵히 걸어 구관(舊館)으로 들어섰다. 작년에 기역자 모양으로 구관의 옆을 터 신관(新館)을 지을 때, 아이들은 건물이 완공되면 당연히 육 학년이 들어가 수업을 받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이제 곧 깨끗한 건물에서 공부할 수 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웬걸, 신관이 완공됐을 때 들어간 것은 놀랍게도 일 학년 신입생들이었다. 서열에 따라 당연히 육 학년 형들이 들어갈 줄 알았던 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작년에 학군이 조정되면서 아파트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라라 대신 대정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배정된 신입생 학부형들이, 우리 아이들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게 할 수 없다고 교육청에 진정을 넣고 시위를 하는 바람에 신관이 건립되었다는 걸 몰랐던 아이들은 많이 실망했다.
 선생님들은 신관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걸핏하면 걔들 덕에 새 건물이 생겼다고 좋아했으나 아이들은 달랐다.
 어차피 새 건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래서 그들은 일 학년 전체를 재수 없는 놈들이라 낙인찍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몇 대 쥐어박아버리고 싶지만, 괜히 그랬다가는 선생들한테 치도곤을 당하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아니다.
 더러워서 피한다.
 현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교실은 이미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너도 우리 반 이구나!
 반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 반대로,
 또냐?
 지겹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셋은 창쪽 앞자리에 앉았다.
 현민과 우건이 함께 앉고 우건 뒤쪽에 세인이 앉았다. 현민과 우건은 돌아 앉아 세인과 마주보았다. 현민이 물었다.
 “담임선생님 누군지 알아?”
 세인이 말했다.
 “몰라. 하지만 젊은 선생님이었음 좋겠다.”
 “난 여선생님.”
 우건이 옆구리를 간질였다.
 “너 여자 너무 밝히는 거 아냐?”
 “내가 뭘?”
 간지럼 태우는 우건의 손길을 피해 몸을 흔들며 현민이 키득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머리가 뒤로 돌아갔을 때, 문이 열리고 어른이 들어왔다.
 현민은 한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 옆에 잡힌 자글자글한 주름이 시선을 붙잡아맸다.
 담임선생님이다. 원하던 대로 여선생님이었는데 왠지 기쁘지 않았다. 눈빛 때문이었다. 키득거리는 것을 보고 장난꾸러기라고 오해를 한 탓일까?
 눈빛이 몹시 사나워 보였다.
 너 조심해, 두고 보겠어!
 그런 경고의 뜻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웃음이 쏙 기어들어갔다.
 담임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우건이 여전히 간지럼을 태우고 있지만, 하나도 간지럽지 않았다. 담임이 풍기는 깐깐한 기운에 현민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선생님 왔어.”
 그는 우건에게 속삭이고 바로 앉았다.
 탁
 담임이 문을 닫는 소리에 소란이 뚝 그쳤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담임은 꼬장꼬장한 걸음으로, 마치 무릎을 굽히지 않고 걷듯 뻣뻣하게 걸어 교탁으로 갔다. 그녀는 일지를 교탁에 힘차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적을 제압하려는 장수처럼 학생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학생들이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자, 만족한 듯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현민은 그 미소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사냥감을 굴복시킨 사냥꾼의 눈빛이 저렇지 않을까?’
 담임은 칠판에서 커다랗게 이름을 적었다.
 이경자.
 첫인상 탓일까.
 왠지 이름까지도 깐깐해 보였다.
 ‘몇 살일까?’
 틀어 올린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을 보면 최소한 마흔다섯은 넘긴 것 같았다.
 “여러분의 담임을 맡게 된 이경자 선생님입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길 바랍니다.”
 말투가 딱딱해 존댓말을 하는데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뒤이어 배려의 뜻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반강제적인 언사가 튀어나왔다.
 “전체 일어서!”
 그녀는 학생들이 일어나자 그들을 복도로 내몰았다. 그리고 남자 여자로 나눈 뒤 키순서대로 줄로 세웠다. 그녀는 지나가며 숫자를 세고 나서 말했다.
 “하나 모자란다.”
 장봐온 과일 하나가 비는 것을 지적하듯, 다소 놀라움이 가미된 무미건조한 어투였다.
 아마도 학생 한 명이 딴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그것은 학년이 바뀌는 첫날에 늘 일어나는 풍속도였다. 엉뚱한 반으로 간 학생이 나중에 제 반을 찾아다니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재밌다.
 어리둥절해 제 반이 어디죠? 하고 묻는 경우도 재밌고, 한참 수업을 하고 있는데 슬그머니 뒷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제 반이 여기라는 데요 하면서 뒤통수를 긁는 것도 재밌다.
 허겁지겁 복도를 뛰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다.
 ‘오준이다!’
 현민은 눈빛으로 우건에게 말했다.
 빠르게 복도를 내달리던 김오준은 복도에 줄 서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속도를 늦췄다.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다가오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뒤쪽에 슬그머니 끼어들려고 하는 것을 담임이 불러 세웠다.
 “이리 와.”
 오준은 어깨를 움츠리며 다가왔다.
 부르기 위해 들었던 손이 내려오며 오준의 귀를 쥐었다.
 그녀는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아아아!”
 오준이가 죽는 시늉을 했다. 엄살만은 아닌 듯,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것이 정말 아픈 것 같았다. 담임은 그의 귀를 당겨 남자 줄 일곱 번째에 밀어 넣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잘 기억해라.”
 그리고 지나가면서 아이들 어깨를 하나하나 짚으며 번호를 불러댔다.
 뭘 기억하라는 걸까?
 현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기 번호를 외우라는 것인지, 아니면 혼난 것을 잘 기억해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이번에도 세인은 1번이었다. 오준이 13번, 최준이 15번, 상민이 17번, 현민이 19번, 우건이 53번이었다. 반 학생수는 모두 쉰여덟 명인데 여학생이 둘 모자라 짝을 맞추고 보니 남학생이 둘 남았다.
 여학생은 56번이 끝번이고, 57번과 58번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원래는 58번이 여학생이어야 하는데 남학생 차지가 된 것이다.
 57, 58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싫다는 티가 풀풀 나서 누가 더 싫은지 시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58번이 중얼거렸다.
 “에이, 나만 맨 날 짝이 남자야.”
 다른 아이들 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최준은 고개를 돌렸다. 낯빛이 별로 좋지 않은데, 아마도 번호가 작년보다 당겨진 것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현민은 생각했다.
 작년엔 나보다 컸는데 올해는 나보다 작은 게 기분이 나쁜 거구나. 아니, 어쩌면 상민이보다 작아진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 진 걸 수도 있었다.
 ‘똘마니보다 작으면 권위가 서지 않겠지.’
 현민은 고개를 빼고 앞에서부터 뒤로 쭉 훑어보았다.
 우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현민은 한 번 더 훑어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반에 배정됐구나.’
 “1번부터 차례대로 들어와.”
 담임의 손짓에 따라 급우들이 하나둘 들어갔다. 그리고 키순으로 1분단부터 4분단까지 횡으로 이동하며 앉았다. 현민은 2분단 세 번째 줄에 앉게 되었다.
 ‘창가가 좋은데.’
 좀 아쉬웠다.
 자리를 찾아 앉느라 잠시 어수선했던 교실은, 착석이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낯선 짝과 바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담임 때문에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짝이 갑자기 손을 잡아오는 바람에 현민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왜 그래?”
 여자아이는 현민의 손을 잡아 올려 악수를 했다.
 “반가워, 나 김 민지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래, 친하게 지내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여자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화장실 벽에 누구누구와 연애한다고 적히는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임은 수첩을 펴들고 볼펜을 쥐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 손 들어봐.”
 생활실태조사를 하려는 구나.
 현민은 담임이 여러모로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껏 새 학년 첫날부터 그것을 조사하는 경우는 없었어.’
 다섯 명의 급우들이 손을 들었다.
 최준과 안상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담임은 그 아이들의 번호를 기록하고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현민은 그 질문들이 참 싫었다.
 양친이 모두 살아 있느냐, 아버지 직업이 뭐냐, 집에 텔레비전, 라디오, 전화, 세탁기, 냉장고가 있느냐…… 공개적으로 던져진 질문에 공개적으로 거수를 해야 하는 이 조사들이 급우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왜 이런 조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조사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쑥덕거린다.
 누구네 집은 텔레비전이 없고, 누구네 집은 아빠가 없고…… 그리고 그것은 놀림으로 이어진다. 가끔 분해서 우는 아이가 있고 더러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왜 한 명 한 명 불러 조용히 조사하지 않고, 밝히기 싫어하는 사실들을 반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까발리게 하는가?
 조사를 할 때 눈을 감게 하는 담임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실눈을 뜨고 누가 손을 드는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담임은 그것을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눈을 감게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들이 너무나 많았다.
 ‘학교는 다 이런 걸까?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월급이 얼마나 되지?”
 으레 포함되는 질문이 나오고 특이한 질문도 나왔다.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친척이 있는 사람? 경찰계통은? 없어. 형편없군.”
 한 번도 듣지 못한 낯선 질문들은 이건 아닌데 하는 감정을 갖게 했다. 특히, 이번 담임은 아이들의 신상을 꼼꼼히 조사했다.
 “기독교 믿는 사람 손들어봐. 이상하네, 왜 이렇게 적지?”
 담임은 탁 소리 나게 수첩을 접었다. 그리고 예수님 얘기를 시작했다. 교회에 가면 초코파이를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가서 참고 듣던 이야기들이었다.
 교회 사람들의 안 좋은 버릇 중 하나는 말이 많다는 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던 그 말씀, 말씀…… 그래서 가끔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다.
 묘하게도 엇비슷한 내용 같은데 이번 담임 이야기는 듣기가 거북했다. 담임에게는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강요하는 듯한 목소리 때문일까?
 간간이 휘두르는 팔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서일까?
 아니다.
 바로 아이들을 노려보는 거만한 눈빛 때문이었다. 지겹다는 티를 내며 아이들을 쳐다보는 선생님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학생들을 깔보고, 깔아뭉개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선생님은 본 적이 없다.
 ‘무슨 눈빛이 저래?’
 현민은 담임이 싫어졌다.
 앞으로 아무리 잘해줘도 싫을 것 같았다.
 한참 만에 담임은 말씀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다소 멋쩍은 듯 웃는데, 억지로 자제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제 임시반장을 뽑도록 하지. 누가 좋을까?”
 오준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담임은 1분단부터 세어보더니 번호를 불렀다.
 “그래, 13번.”
 오준은 급하게 일어서다 걸상을 배로 받고 도로 넘어지며 말했다.
 “장우건을 추천합니다.”
 “우건이 누구지?”
 우건이 손을 들자 담임은 수첩을 들어다보더니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현민은 담임이 우건을 싫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상민이 손을 들었다.
 안 봐도 누굴 추천할지 뻔했다.
 “최준을 추천합니다.”
 최준이 으스대며 손을 들자 담임은 수첩을 펴들고 그의 번호를 확인했다. 현민은 그 순간 담임의 눈에서 어떤 흔적을 읽어냈다. 그리고 입가에 자글자글한 미소가 잡히다마는 것을 보는 순간 뇌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최준이 반장이 되겠구나!
 수첩을 도로 덮으며 그녀가 말했다.
 “좋아, 최준이 우리 반 임시반장이다.”
 “어, 말도 안 돼!”
 오준이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반장은 학년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우건이 해야 마땅하다. 작년에 우만이 배를 맞고 주저앉은 후부터는 우건이 장군이었고, 장군은 장군대접을 해야 한다.
 우만이 나중에 그날은 밥을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났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분명 거짓말이다. 돼지처럼 밥을 먹어대는데도 그의 배는 단 한 번도 탈을 일으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배는 천하무적인 것이다. 한 번 더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내지 않은 것으로 봐도 모든 것은 분명했다.
 담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뭐가 말이 안 돼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듯 눈빛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오늘 본 눈빛 중 가장 날카로운 눈빛이다.
 그 시선을 그가 받고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현민은 걱정스럽게 오준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머리털이 곤두선 것이 뒤통수가 바짝 졸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을 잘못 찾은 것과, 담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오준을 확실하게 찍힌 것 같았다.
 앞으로 학창생활이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오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나다 다시 걸상을 배로 받았다.
 “어, 그러니까 반장을 뽑을 때는 민주적으로 투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당황해서 그런지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정식반장을 뽑을 때 투표할 거다. 이제 됐지?”
 또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분위기다. 그것을 파악 못한 오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가 그 즉시 뺨과 손바닥을 두들겨 맞는 장면이 상상되어 현민은 다리를 꽉 쥐었다.
 다행히 상상 속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준은 아주 낮은 소리로 예하고 대답하고 얌전하게 앉았다. 겉보기보단 눈치가 있었다.
 그 후 사흘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그 사이 담임은 가정방문계획을 짜서 일주일 내내 학부모들을 학교로 불러들이거나 집으로 직접 방문을 했다. 부모님이 가정방문을 극도로 꺼리는 탓에 현민은 이 기간이 가장 싫었다.
 일 학년 가정방문 때는 변변찮은 형편이나마 할 수 있는 한 정성스럽게 대접을 했는데, 그 결과가 아주 나빴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선생님은 무언가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계셨고, 부모님은 당황해하고 민망해했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은 가운데,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 기이한 분위기에 눌려 현민은 발가락만 내려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음판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쾌한 헛기침을 하며 선생님이 일어서는 것으로 침묵을 깨어졌다.
 그 이후는 악몽이었다. 아버지는 모지락스럽게 엄마를 팼고, 현민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렸다. 자연스럽게 현민은 가정방문이란 얘기를 엄마에게 하지 않게 되었고, 선생님에게는 두 분이 다 일 나가셔서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사 학년 때 담임이 또 생각났다. 그는 가르치는데 무성의했던 것만큼이나 가정방문도 무성의하게 지나쳤다. 거기다 학부형이 학교로 찾아오는 것도 극도로 꺼렸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선생이 전화하면 놀라서 허둥대는 학부형들이 많은데, 나도 학부형이 학교로 찾아오면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 놀란다. 그러니 웬만하면 찾아오지 말라고 말씀드려라.”
 그때는 담임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우습게도 그가 좋은 선생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흘 째 되던 날 담임이 불렀다.
 교실 뒤쪽에 있는 담임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현민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이현민, 아버지 직업이 정확하게 뭐지?”
 “노동하십니다.”
 “노동? 막일 말이냐?”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현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어머님은?”
 “식당에 나가십니다.”
 “직접 경영하시냐?”
 “아뇨, 그냥 설거지 같은 것을…….”
 목소리가 쥐구멍에 기어들어간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담임의 눈썹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리고 볼펜을 들어 수첩에 선을 두 개 쫙쫙 긋는데 기분이 묘했다. 자기 이마에 줄을 긋는 것처럼 느껴져 현민은 이마를 문질렀다.
 날은 쌀쌀한데 이마에는 땀이 솟아 있었다.
 그는 괴상한 상상을 했다.
 ‘문신을 새기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담임이 물었다.
 “집에 계신 날은?”
 “거의 매일 일하세요.”
 “주말에도?”
 “예.”
 “되도록 주말엔 쉬시라고 말씀드려라.”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현민은 공손히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 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선생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말대답하지 말고 무조건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이다.
 “흐음, 가정방문은 힘들 것 같으니까, 어느 때고 주중에 한번 시간을 내서 찾아오시라고 말씀 드려라. 알겠니?”
 “예.”
 “됐다, 들어가 봐라.”
 힘든 시험을 통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시름 놓은 듯한 홀가분한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3 떠든 아이
 
 담임이 교무회의에 가시자 교실은 떠들썩해졌다.
 조용하라는 임시반장의 소리에도 신경 쓰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결국 부아가 치민 최준이 강력한 무기를 휘둘렀다.
 “이름 적는다!”
 반 전체에 울리도록 소리를 지른 그는 칠판 오른쪽 귀퉁이에 ‘떠든 아이’라고 쓴 다음, 마치 총이라도 손에 쥔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분필을 잡은 손을 교탁 위에 올렸다.
 찔끔한 아이들이 입을 닫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이 일방적으로 정한 임시반장 따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시위 같았다. 꼴 보기 싫은 최준이 반장이라 더욱 그랬다. 세인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름이 적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공책을 찢어 쪽지를 만들었다.
 현민을 향해 던지려고 하는데 최준과 눈이 마주쳤다. 반장의 얼굴에 마침 잘 걸렸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던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인은 잠시 갈등했다.
 그가 쪽지를 던지는 순간, 옳다구나 하고 반장이 칠판에 이름을 적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이는데, 최준이 놀리듯 혀를 쏙 내밀었다.
 요놈아, 어디 던져봐. 못 던지겠지?
 꼭 그러는 것 같다.
 세인은 보란 듯이 쪽지를 던졌다.
 현민이 쪽지를 줍는 순간, 반장이 이름을 적었다.
 박세인.
 쪽지를 펴보지도 않고 현민이 말했다.
 “반장, 왜 세인이 이름을 적고 그래?”
 “쪽지를 던졌잖아.”
 현민은 칠판을 가리켰다.
 “떠든 아이를 적어야지. 왜 ‘떠든 아이’라고 적어놓고 쪽지를 던진 아이를 적는데? 쪽지를 던진 것과 떠든 것은 다르지 않아?”
 “쪽지 던지는 것도 포함돼.”
 우건이 말했다.
 “억지 부리지 마.”
 상민이 끼어들었다.
 “지금 반장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세인이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반장한테 존댓말이라도 하라는 얘기냐?”
 “존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학급의 반장으로 존중하라는 거야.”
 “난 쟤를 반장으로 뽑은 적 없어!”
 세인의 말에 오준이 신이 나 외쳤다.
 “맞아! 선거도 없이 뽑힌 반장은 무효야.”
 그는 임시반장과 맞서는 우건이 패거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신학기 첫날 괜히 선거를 하자고 제안했다가 혼쭐이 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때문에 최준이 미워졌고 처음부터 그들의 주장에 협조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준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심각한 소리를 냈다.
 “이건…… 음, 그러니까…….”
 중요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단어는 떠오를 듯 떠오를 듯 하면서 계속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민, 민, 민…….”
 답답한 듯 상민이 거들었다.
 “민주주의?”
 “그래, 민주주의!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돼. 당연히 화랑어린이회의 정신에도 어긋나지.”
 최준은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임시건, 담임이 임명한 낙하산이건 반장은 반장이다.
 그런데 내 말을 감히 거역해?
 화가 치민 그는 칠판에 죽 이름을 적어나갔다.
 이현민, 장우건, 김오준.
 현민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내 이름은 왜 적어?”
 “떠들었잖아.”
 “내가 언제?”
 오준이 말했다.
 “제멋대로네.”
 교실은 반장이 나서기 전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아이들은 반장이 너무했다, 대든 아이들이 너무한 것이다, 말들이 많았다. 급기야 두 패로 갈려 말싸움을 시작하자 교실은 시장판처럼 시끄러워졌다.
 그 바람에 뒷문이 열린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용히 못해!”
 냉랭한 목소리에 교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급히 뒤돌아보던 아이들은 담임을 발견하고 그 즉시 고개를 되돌리고 입을 닫았다. 그러자 들려오는 것이라곤 담임이 교탁으로 걸어가며 만들어내는 끄는 듯한 슬리퍼 소리뿐이었다.
 담임은 응원하는 것처럼 최준의 어깨를 짚어 옆으로 비키게 하고 교탁에 양손을 펼쳐 얹었다. 그리고 상체를 조금 숙이고 최대한 낮게 말했다.
 “선생님이 없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상민이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조용히 앉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지?”
 그녀는 칠판에 적힌 떠든 아이를 하나하나 호명했다.
 “박세인, 이현민, 장우건, 김오준.”
 잔뜩 긴장한 아이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담임이 자를 꺼내드는 순간 오준은 처박듯 고개를 숙였다.
 “이리 나와!”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들은 잔뜩 위축이 되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친구들을 둘러본 우건은 씩씩하게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머지 셋이 머뭇거리며 뒤따랐다.
 현민은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모조리 떠안은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이것은 아니라고 자초지종 설명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주간의 학교생활을 떠올려볼 때, 역효과가 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담임이 자를 까딱거리자 우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딱딱딱
 담임은 우건의 얼굴을 슬쩍 한 번 보고 절도 있게 자를 세 번 휘둘렀다. 우건은 손바닥을 한 번도 오므리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맞았다. 아프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맞는 것쯤은 매일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우와!”
 “멋지다!”
 우건의 꿋꿋한 모습에 급우들은 탄성을 질렀다.
 담임의 눈매가 사납게 올라가 매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변했다. 아이들의 탄성이 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 다음 차례인 현민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심기가 상한 선생님이 우건이보다 더 세게 때릴 게 뻔했다.
 아프게 때린다는 쪽에 딱지 열 장 건다!
 먼저 맞는 건데 하는 후회를 하면서 현민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담임이 갑자기 자를 세웠다. 현민은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건 명백히 반칙이다! 자를 세우는 법이 어디에 있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딱딱
 고통은 예상을 상회했다.
 우건이처럼 의연하게 맞고 싶은데 너무 아파 현민은 손을 말며 입가에 대고 호호 불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마구 비비다 허벅지 사이에 끼웠다.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자로 때릴 때는 옆면으로 살이 많은 손바닥 부위를 때린다. 훈계용은 그것이다. 그런데 자를 세워 손가락을, 그것도 가장 아픈 관절부위를 때린 것이다. 이것은 화풀이용이다.
 중지 첫 번째 관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현민은 허벅지에다 대고 손바닥을 마구 문질렀다.
 “엄살 피우지 말고 어서 대!”
 현민은 사정하는 눈빛으로 담임을 보았다.
 그러나 담임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 대도 감해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억지로 내미는 손바닥이 절로 움찔움찔했다.
 딱
 새로운 불길이 다시 관절을 지졌다.
 현민은 손가락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겅중겅중 뛰며 물러섰다.
 우건이 말없이 어깨를 짚어왔다. 잘 참았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 순간 현민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다음 차례는 오준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현민이 맞는 것을 본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준은 손바닥을 비비며 빌었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손바닥 펴!”
 담임의 말은 가차 없었다.
 “엉엉엉.”
 오준은 눈물콧물을 흘리며 싹싹 빌었다. 그러다 그는 콧물이 입을 다다르자 혓바닥을 내 빨아먹고 다시 빌었다.
 탁
 담임이 질책하듯 자로 교탁을 내리치는 순간 오준은 울면서 얼른 손을 내밀었다. 어깨부터 시작된 떨림이 팔을 거쳐 손바닥까지 전해졌다. 손바닥이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렸다.
 ‘저러다 잘못 맞으면 더 아플 텐데, 다칠지도 몰라.’
 현민은 손바닥을 비비며 생각했다.
 ‘대신 맞는다고 하면 선생님이 화내실까?’
 그때 자가 옆으로 누웠다.
 현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내밀었다. 옆으로 누운 자가 살이 가장 많은 부위에 살짝 붙었다가 떨어졌다.
 오준은 울다 말고 히죽이 웃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울었다는 것을 말끔히 잊은 듯 으쓱거리며 우건이 옆으로 가서 섰다.
 우건이 말했다.
 “울다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
 놀리거나 말거나 오준은 기뻤다. 무척 아플 거라고 지레 겁을 먹었는데 예상보다 강도가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자 괜히 울고불고 한 것이 멋쩍고 부끄러웠다.
 다음은 세인이 차례.
 그는 불안한 얼굴로 담임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탐색하듯 조심스런 손길이었다.
 ‘난 어떻게 때릴까?’
 일단 자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세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결과까지도 만족스러웠다. 오준처럼 아프지 않게 끝이 난 것이다.
 우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왜 너만 세게 때렸을까?”
 “몰라.”
 현민도 그것이 알고 싶었다.
 미운 털이 박힌 것은 그가 아니라 오준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세게 맞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아니라 마땅히 오준이어야 했다. 물론 그가 세게 맞기를 바랐다는 뜻은 아니다.
 벌벌 떠는 것이 불쌍해 잠시 대신 맞아줄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그가 살살 맞은 것을 기뻐해야 옳았다.
 그런데 현민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들어가.”
 담임은 다른 아이들은 들어가게 하고 현민이만 창가로 불러 세웠다.
 “편한 시간에 한 번 나오시라고 했는데, 아직도 오지 않는구나.”
 무슨 소리지?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담임이 말했다.
 “부모님 말이다.”
 그제야 현민은 이해를 했다.
 “요새 바쁘셨어요.”
 “아무리 바빠도 학부형의 도리는 해야지. 자식을 맡겨놓았으면 최소한 한 번쯤은 인사를 해야 되지 않겠니? 이건 기본적인 예의에 관한 거다.”
 담임은 현민의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아프냐?”
 “예.”
 “오늘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꼭 말씀드려라.”
 순간 현민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의문이 풀렸다.
 ‘가정방문 때문이었구나! 부모님이 찾아오지 않아 나만 세게 맞은 거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자기 손을 감싼 담임이 손이 비틀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교실까지 뒤틀렸다.
 “알았어?”
 차가운 소리에 세상이 급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예.”
 현민은 자리로 돌아가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 일을 부모님한테 말하라는 것은 협박이었다.
 찾아오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협박!
 ‘내가 얘기하나 봐라.’
 그는 오늘 일은 입도 뻥끗하지 않겠노라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했다.
 담임이 말했다.
 “다음 주에 환경미화심사가 있다. 열심히 참가하는 학생들에게는 상을 주는 게 좋겠지. 무슨 상이 좋을까?”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데, 오준이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매를 면제시켜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지?”
 “상 받을 일을 할 때마다 봐주기 1회권, 봐주기 2회권…… 이렇듯 차표처럼 나누어주었다가 매 맞을 일이 생겼을 때 내면 한 번 눈감아주는 겁니다.”
 이런 좋은 생각을 해내다니, 내 머리도 꽤 쓸 만하다니까.
 오준은 칭찬을 기대하며 턱을 내밀었다.
 담임이 뭐라고 대답할지 현민으로서도 매우 궁금했다. 그런데 담임이 자의 양끝을 쥐고 부러뜨릴 것처럼 구부렸다. 자를 잡은 손톱 끝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래도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자가 부러질 것처럼 휘어지자, 첫 줄에 앉은 아이들은 파편이 튈까봐 상체를 뒤로 젖혔다. 네 번째 줄에 앉은 현민도 조마조마하긴 마찬가지였다.
 담임이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면서 휘어졌던 자가 곧게 펴졌다. 현민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 귀를 기울였으나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담임은 평정을 되찾았다.
 더 이상 오준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눅이 들어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날벼락만 피하면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담임이 말했다.
 “상으로 청소를 면제시켜주겠어. 반대로 못된 짓을 한 아이한테는 그 벌로 청소를 시키겠다. 바로 오늘부터!”
 선언하듯 말한 그녀는 칠판에 적힌 떠든 아이들을 가리켰다.
 “오늘 청소당번은 저 네 명이다, 이상.”
 최준이 신이 나 구령을 크게 붙였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현민은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담임이 교실을 빠져나가자마자 교탁 밑에 앉아 있는 아이한테 다가갔다.
 “선생님 뭐라 중얼거리더냐?”
 “몰라. 아버지가 하늘에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참 안됐다!
 현민은, 담임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최준은 적극적으로 임시반장의 권력을 행사했다. 떠든 아이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늘 조심했다. 하지만 오 학년 학생들이 학교에서 조용히 지내기는 개구리가 날아다닐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반장 눈치를 살피는 급우들이 하나둘 늘어만 갔고, 괜히 친한 척하는 급우들도 적지 않았다. 그 바람에 청소는 줄기차게 반장에 대든 세 친구들이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4 반장선거
 
 “대정국민학교 5학년 1반 제2회 화랑어린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국민의례를 마친 후 반장은 지난주에 결정된 사항들이 어떻게 이행되었는지 짤막하게 결과보고를 했다. 그 결과보고는 미흡한 점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다.
 “잘 알다시피 이번 주엔 환경미화심사가 있어요. 그래서 환경미화를 주제로 토의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상민이 벌떡 일어났다.
 회의는 상민이 계속 의견을 내고 반장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현민, 우건, 세인은 둘이 눈꼴시어서 학급회의를 할 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건의사항으로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오준이 손을 번쩍 들었다.
 “김오준.”
 “떠든 아이에게 청소를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부당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른 최준은 실수를 깨닫고 얼른 소리를 낮췄다.
 “오준 군의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칠판에 오준의 건의사항이 적혔다.
 그것으로 대충 넘어가려는데 이번에는 현민이 손을 들었다.
 ‘저 자식은 왜 또 손을 드는 거야?’
 지목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못마땅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현민을 호명했다.
 “오준의 건의를 기타 토의사항으로 넘겨 토의했으면 좋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우건과 세인이 합창으로 동조했다.
 반장은 그 의견을 묵살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시간관계상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합시다!”
 “반장 하자!”
 여기저기서 현민의 의견에 동의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대부분 한 번씩 걸려 청소를 한 적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최준은 난처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회의를 진행시켰다.
 “끝으로 선생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교실 뒤편 알림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담임이 교단을 향해 걸었다. 떠들던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담임선생님은 교탁 옆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의 방법은 교육상 바람직한 것 같지 않군요. 의견을 받아들여서 부정적인 청소방법을 긍정적인 청소방법으로 바꾸기로 하겠어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장이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바뀌는데요?”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바꾸기로 하겠어요.”
 더욱 이해가 안 갔다.
 “포…… 뭐요?”
 현민이 물었다.
 버릇없는 말투라고 단정한 담임은 현민은 쏘아보았다.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현민은 고개를 돌렸다. 꼭 전설의 고향을 보는 것 같았다.
 담임이 말했다.
 “벌로 청소를 시키는 방향에서 벗어나 상으로 청소를 면제시키는 방향으로 바꿀까 해요.”
 그럴싸하게 들렸다.
 오준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니까 떠든 아이에게 청소를 시키지 않는단 말이죠?”
 “그런 면도 있지.”
 오준은 만족했다.
 이제 더 이상 청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현민은 턱을 바짝 당겨 앉았다.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청소는 누가 하지?’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담임이 말했다.
 “청소는 전처럼 1분단부터 한 주씩 맡아서 하는 것으로 하겠어요.”
 상민이 손을 들었다.
 “안상민.”
 상민은 목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선생님, 상은 어떤 건가요?”
 “공책을 한 권 사서 표지에 착한 생활부라고 쓰세요. 착한 일을 할 때마다 거기다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줄 겁니다. 잘했어요 도장 두 개, 참 잘했어요 도장 한 개 당 한 주씩 청소를 면제시켜줄 겁니다.”
 착한 생활부는 또 뭐지?
 현민은 그 소리가 유치하게 들려 혀를 입천장에 대고 뚱한 소리를 냈다. 물론 담임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오준이 다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매는요?”
 “좋아요. 원한다면 도장 하나당 한 대씩 감해주죠. 그리고 이틀 후에 반장을 뽑을 겁니다.”
 담임이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자 반장이 말했다.
 “내일은 폐품수집일입니다. 아침에 등교할 때 잊지 말고 꼭 챙겨오세요. 이상으로 제2회 화랑어린이회의를 마치겠습니다.”
 
 ***
 
 “아차, 폐품!”
 학급문고 옆에 모여 있는 폐지와 병을 보고서야 세인은 이마를 쳤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니들은 가져왔냐?”
 세인의 물음에 현민은 병 두 개를 내보였다.
 “나 까먹고 안 가져왔는데 하나만 주면 안 돼?”
 “그래, 가져 가.”
 둘은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가졌다.
 상민이 말했다.
 “갖고 온 폐품은 가지고 있지 말고 빨리 내.”
 현민과 세인은 나란히 하나씩 냈다.
 상민은 병을 가지런히 놓으며 공책에 표시를 했다.
 현민이 물었다.
 “뭘 이런 것까지 적고 그래?”
 “선생님께서 적으랬어.”
 세인은 공책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많이들 냈냐?”
 “니들처럼 병 하나씩만 낸 얌체도 몇 있지.”
 “우리가 왜 얌체야?”
 세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조금 낼 수도 있는 거지.”
 상민은 공책을 내려놓으며 핀잔을 준다.
 “폐품 모아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데 많이 내면 좋지.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너희들은 시민정신이 없어, 시민정신이.”
 우건이 다가와 물었다.
 “시민정신이 뭔데?”
 “그건, 그것은 말이지.”
 상민이 떠듬거렸다.
 “그러니까 좋은 거야.”
 “너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버릇 좀 고치면 안 되겠냐?”
 “누가 모른다고 그래. 어서 폐품이나 내.”
 우건은 가방에서 꺼낸 신문뭉치를 내밀었다.
 “몇 장이냐?”
 “몰라. 궁금하거든 네가 세어보든지.”
 농담처럼 한 말인데, 상민은 정말 세기 시작했다.
 “에게, 겨우 다섯 장이야.”
 최준이 정정했다.
 “신문은 장이라고 세지 않고 부라고 세는 거야.”
 “아, 그렇지!”
 상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책에 적힌 내용을 일일이 수정해나갔다. 다른 학생이 지적했다면 나도 안다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우건은 어리둥절했다.
 “왜 일일이 그것을 세고 그러냐?”
 내지 않은 아이들만 체크하고 마는 게 보통인데, 낸 폐품들의 종류와 수량까지 일일이 적는 것이 이상했다.
 “귀찮지도 않아?”
 우건의 거듭된 물음에 상민이 짧게 한마디 했다.
 “선생님이 시켰어.”
 “담임이 왜?”
 대답에 신경 쓰느라 숫자를 잘못 기재한 듯 상민이 화를 냈다.
 “모른다고 했잖아! 자꾸 말시키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
 “네가 언제 모른다고 그랬냐?”
 “야!”
 “알았다 들어간다, 들어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셋이 자리로 돌아가 앉고 얼마 후, 담임이 들어왔다.
 학생들을 쭉 훑어보며 그녀가 말했다.
 “지각이나 결석한 사람 있니?”
 “없습니다.”
 “반장, 폐품목록 적은 것 가져와봐.”
 무엇 때문에 목록을 적으라고 했을까?
 현민은 무척 궁금했다.
 담임은 목록을 훑어보더니, 처음 보는 손가방을 꺼내 그 속에서 고무인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말했다.
 “모두들 착한 생활부는 만들어왔겠죠?”
 만들어오라고 숙제를 내준 것도 아니고 지나가듯 말한 것뿐인데, 그것을 만들어왔을 턱이 없잖아!
 현민은 만들어온 학생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다섯 명이나 손을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이거 숙제였어? 하는 소곤거림이 낮게 퍼져나갔다.
 오준이 물었다.
 “선생님, 오늘 만들어 와야 되는 거였어요?”
 그는 담임이 그렇다고 하면 다른 공책, 예컨대 수학처럼 지겨운 과목의 공책을 지워 착한 생활부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니, 만들고 싶은 사람만 만들면 돼.”
 “숙제는 아니었네. 다행이다. 어라, 그런데 아파트에 사는 애들만 만들어왔잖아?”
 오준은 천성이 가벼워서 될 소리 안 될 소리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는 경향이 있었다. 워낙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더러 날카로운 말도 섞여 나오곤 했는데 이번 경우가 그랬다.
 현민은 생각했다.
 ‘쟤네들에게는 꼭 만들라고 따로 지시한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왠지 따돌림 당한 기분이었다.
 “지금 호명한 학생들은 착한 생활부를 가지고 나오세요.”
 담임은 상민이 작성한 공책을 들고 번호를 불렀다.
 하나같이 많이 낸 아이들이었다.
 ‘저렇게 하려고 기록하게 했구나.’
 열 명 정도가 호명되었는데 그 중 다섯 명만 착한 생활부를 준비했다. 당연히 그들만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는데, 그 중에 셋은 참 잘했어요였다.
 점심시간에 부부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줌마가 와서 커튼을 달고 갔다.
 상민은 최준이 엄마가 돈을 냈다고 떠벌였다. 최준은 참 잘했어요 도장을 다섯 개나 받았다.
 
 다음날 몇몇 아이들이 환경미화를 한답시고 화분을 들고 왔다. 그림을 그려 액자에 넣어온 아이도 있고, 보따리에 책을 싸온 아이도 있었다. 그 덕에 무늬만 학급문고였던 텅 빈 책장이 가득 찼다.
 담임은 그 아이들 착한 생활부에 잘했어요와 참 잘했어요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청소를 면제받았다.
 현민, 우건, 세인은 줄기차게 청소를 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
 
 아침에 빵이 돌고 우유가 돌았다.
 상민은 빵을 나눠주며 준이가 사주는 거라고 일일이 강조하고 다녔다. 생색을 내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필요 없어, 안 먹어! 하고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제과점 크림빵은 밀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현민은 유혹에 굴복했다.
 “잘 먹을게.”
 먹을 때는 몰랐는데 다 먹고 나자, 문득 의문이 생겼다.
 왜 저러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사람 좋게 웃으며 맛있게 먹으라고 권하는 최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이유가 떠올랐다.
 ‘맞다! 오늘이 반장선거일이구나!’
 현민은 입 모양으로 우건에게 말했다.
 ―오늘 반장선거일인데, 너 출마할래?
 우건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그게 출마선언인지, 불출마선언인지 헷갈렸다.
 현민은 그를 추천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추천할게. 한 번 해볼래?
 우건은 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담임이 들어왔다.
 그녀는 칠판에 반장선거라고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민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임시반장으로 반을 잘 이끈 최준 군을 반장으로 추천합니다.”
 최준이 별 것도 아닌데 뭘, 하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그 순간 현민과 세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인이 입술을 벙긋거리며 물었다.
 ―네가 할래?
 ―그래, 내가 추천할게.
 현민은 손을 번쩍 들었다.
 “반장으로 장우건을 추천합니다.”
 우건의 이름이 최준 밑에 적혔다.
 담임이 말했다.
 “추천할 사람 더 없어?”
 그때 김은주가 손을 들었다.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눈이 큼지막한 여학생이다.
 “이은영을 추천합니다.”
 큼지막한 눈동자만큼이나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오준이 투덜거렸다.
 “쳇, 구색은 다 맞추는군.”
 여자가 출마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듯했다.
 은주의 눈 꼬리가 위로 홱 올라갔다.
 “너 여자라고 무시하지 마.”
 오준은 손을 내밀며 뻗댔다.
 “내가 뭘? 괜히 그러셔.”
 “저것을 그냥 콱!”
 은주는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그만!”
 담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둘 모두 찔끔했다.
 조용해지자 담임은 은영의 이름을 적었다.
 “최준부터 나와 정견발표하세요.”
 최준은 의젓하게 교단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교탁에 팔을 가지런히 얹고 턱을 약간 들어올렸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연설을 시작했다.
 “임시반장을 했던 최준입니다. 만약 제가 반장이 된다면, 우리 반을 오 학년 전체에서 가장 깨끗한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현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잘했어요, 도장 한 번도 못 받은 애들 모아다 매일 청소시켜서?’
 “그리고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정다운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선생님만 들어오면 찬바람이 부는 데 어떻게?’
 “학생들이 모두 친하게 어울리는 반을 만들어 외톨이로 지내는 학생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파트 사는 얘들끼리 따로국밥처럼 노는 주제에 무슨…… 다른 학생들을 무시하지나 마라!’
 “그리고 전교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공책도 안 보여주려고 하면서?’
 “아니, 전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멋진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통 크게 노네.’
 최준은 양손을 번쩍 들고 시선을 모은 뒤, 한 손을 내리고 다른 손을 비스듬히 치켜세웠다.
 “제가 임시반장 역할을 잘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우리 반을 전국 최고로 만들고 싶은 분들은 저를 믿고 찍어주십시오.”
 절도 있게 손을 내린 그는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동작이 기계적인지, 웅변학원 다닌 티가 났다.
 현민은 생각했다.
 ‘며칠 연습한 모양이네.’
 “우와, 박수!”
 상민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는 꼴이 국회의원 선거에 동원된, 아주 극성스러운 아줌마 같았다. 아이들이 열렬히 박수를 치자 최준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 인사를 했다.
 현민은 우건을 보며 말했다.
 “잘해.”
 우건은 얌전하게 서서 인사를 꾸뻑했다.
 “전 깨끗한 반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매일 청소하는 게 힘들거든요,”
 학생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이 넘치는 반이나 정겨운 반으로 만들 능력도 없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저로서는 전국 최고의 공부 잘하는 반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반평균이나 안 낮추면 다행이겠죠.”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이것 하나만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반장이 되면 기분 내키는 대로 떠든 아이를 적어대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우건이 고개를 숙이자, 현민은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박수를 쳐댔다.
 ‘잘했어!’
 같은 웅변학원에 다녔는지 은영의 발표는 최준과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마지막에 여학생들 투표를 호소하는 것 정도였다.
 투표가 시작되었다.
 현민은 당연히 우건을 찍었다. 용지를 접어 손에 움켜쥔 현민은 고개를 빼 짝의 용지를 넘겨다보았다.
 민지는 얼른 손으로 가리고 눈을 흘겼다.
 “보면 안 돼.”
 “누구 찍었는데?”
 “비밀이야.”
 “가르쳐주면 안 돼?”
 “안 돼!”
 현민은 우회해 물었다.
 “누가 반장될 것 같아?”
 “뭘 그렇게 뻔한 걸 묻고 그래.”
 “뻔하다니? 넌 누가 뽑힐지 안단 말이야?”
 “당연하지. 은영이가 될 거야.”
 “엥?”
 현민이 얼른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도 없는데?”
 민지는 쌀쌀맞게 손을 쳐냈다.
 “우리 반의 반(半)은 여자야.”
 “그래서?”
 “남자는 둘이 출마했고, 여자는 한 명이 출마했잖아. 그러니 당연히 은영이가 유리하지.”
 “너 은영이 찍었구나?”
 민지의 눈이 동그라졌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다.
 “은영이가 될 것 같다면서? 그래서 안 거지.”
 “그랬구나.”
 “그런데 정말 은영이가 될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남자는 남자를 찍을 거고 여자는 여자를 찍을 거잖아?”
 “아닌데, 남자는 남자를 찍어도 여자는 여자 안 찍는데. 그래서 보통 반장은 남자가 하는데.”
 “너 자꾸 여자를 무시하는 발언할 거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4년 내내 그랬는데.”
 “이상하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안 그랬는데.”
 “어디서 다녔는데?”
 “대전. 학급회의도 화랑어린이회의라고 하고 하여튼 대구는 이상해.”
 제일 뒤에 앉은 학생이 앞으로 나오면서 투표지를 걷었다.
 누가 될까?
 현민은 박빙의 승부를 예상했다.
 우선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최준을 찍을 게 확실했다. 그나 세인이 우건을 찍을 게 확실한 것처럼. 남학생들은 우건에게 표를 줄 것이다. 최준을 재수 없어 하는 아이들이 은근히 많았다.
 그 반면 여학생들은 최준을 더 선호했다.
 멋있다는 여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다.
 물론 현민으로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빤드르르한 옷차림이 마음에 든다는 것일까?
 ‘저 태깔스런 자식이 어디가 좋다고, 참 눈이 삐었어!’
 결국 은영이 최준에게 갈 여자 표를 얼마나 잠식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것이다.
 ‘결국 승부의 열쇠는 은영이 쥐고 있는 셈이군.’
 그가 말했다.
 “은영이 때문에 승부가 아슬아슬해질 것 같아.”
 민지가 반색을 한다.
 “은영이가 될 것 같니?”
 “아니, 은영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돼! 내 말은 은영이한테 가는 표의 성격에 따라 반장이 결정될 거란 말이야.”
 “쳇, 하여간에 이상한 애들이야. 여자가 나오면 당연히 여자를 찍어야지 왜 남자를 찍니?”
 민지는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참 한심한 애들이야.”
 담임의 감독 아래 개표가 시작되었다.
 “장우건, 장우건, 최준, 이은영, 최준, 최준, 장우건…….”
 승부는 예상대로 아슬아슬했다.
 장우건과 최준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경쟁을 벌였고, 상당한 표 차이로 은영이 뒤따르는 형국이었다.
 최준 22표, 장우건 22표, 이은영 13표.
 동점인 상황에서 표가 하나 남았다.
 현민은 담임 눈치를 살폈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우건이 반장으로 당선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는 담임이 물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더욱 우건을 응원했다.
 “마지막 한 표는…….”
 긴장한 듯 종이를 펴는 상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 음.”
 그는 종이를 펴들고 가만히 있었다.
 현민이 외쳤다.
 “어서 불러.”
 상민은 난처한 듯 담임 눈치만 살폈다.
 담임이 표를 받아들고 검표했다.
 반갑지 않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건이 반장이 된다고? 이건 재앙이야.’
 저런 아이를 반장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이번 표는 무효에요.”
 “무효라고?”
 현민은 얼떨결에 물었다.
 “너 선생님한테 무슨 말버릇이 그래?”
 담임이 고함을 질렀다.
 현민은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매를 들거나 설교를 했을 텐데, 이번엔 그냥 넘어갔다. 그게 이상했다.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화를 낸 것 같았다.
 ‘무슨 속셈이지?’
 현민은 마지막 투표용지를 보자고 요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소리를 했다가는 호되게 당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우건을 반장삼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까지 하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담임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싫었다.
 담임이 말했다.
 “이 투표용지에는 장우겅이라고 써 있어요. 그래서 무횹니다.”
 장우겅이라고!
 우건을 쓰려다 잘못 쓴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잖아.’
 현민은 화가 나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담임이 말했다.
 “선거는 정확해야 합니다. 동점자 두 사람을 두고 결선투표를 하겠어요.”
 칠판에서 이은영이란 이름이 지워지고 상민은 공책을 잘라 새 투표용지를 만들었다.
 개표하는 내내 여자가 어떻고 남자는 어떻고 떠들어대던 민지는 은영의 낙선이 확정되고 결선투표가 시작되자, 더 이상 그 화제로 쫑알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화제로 시끄러웠다.
 “현민아, 누가 될 것 같니?”
 현민은 보나마나라고 생각했다.
 “준이 표를 잠식하던 은영이가 사라졌으니 준이가 당선될 거야.”
 “그래? 에이 그럼 재미없는데…… 좋아, 삼총사인 너를 봐서 난 우건이를 찍을게.”
 “고마워.”
 그간 제대로 말대꾸도 해주지 않았는데, 친구를 찍어준다니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현민은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자진을 반성했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큰 눈이 예뻐 보였다.
 ‘앞으로 잘 해줄게.’
 친절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는데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그런데 삼총사가 뭐야?”
 “세상에! 너 그 책도 읽어보지 않았어?”
 “무슨 책?”
 “삼총사!”“삼총사?”
 “너 되게 무식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집에는 책이 없어.”
 “그럼 학교도서실이라도 이용해야지.”
 “학교에 그런 게 있었냐?”
 “너 매일 놀기만 하지?”
 “응.”
 민지는 현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이 누나가 빌려줄게.”
 “까분다.”
 손을 쳐내기는 했지만 밉지 않았다.
 현민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진짜 삼총사가 뭐야?”
 “막상 말하려니까 되게 어렵다. 죽음까지 함께하는 친한 세 친구를 의미한다고 보면 돼. 책 읽어보면 느낌이 올 거야.”
 ‘삼총사라.’
 어감이 참 좋았다.
 “멋지다!”
 “너희 셋도 멋져!”
 현민은 쑥스러워져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세인의 모습이 잡혔다.
 그는 현민 쪽을 보면서 얄궂게 웃고 있었다. 입도 뻥긋거리고 있는데, 입술모양을 자세히 보니 사귀냐? 하고 묻는 것 같았다.
 현민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잠시 둘이 눈싸움을 하는 사이, 개표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였다.
 최준 33표, 장우건 25표.
 현민은 1차 투표 때 그 한 표가 자꾸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아까웠다.
 이제 부반장을 뽑을 차례였다. 반장선거 차점자를 부반장으로 추대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 선거를 해서 뽑는 경우도 있다. 현민이 이때까지 겪은 네 번의 선거에서는 반반이었다.
 이, 사 학년 때는 차점자가 자동으로 부반장이 되었고 일, 삼 학년 때는 새로 선거를 했다.
 ‘담임이 우리 삼총사를 싫어하니까 다시 선거를 하겠구나.’
 우리 삼총사?
 입에 올려 봤는데 느낌이 아주 좋았다.
 ‘좋아, 이제부터 우리는 삼총사다.’
 담임이 말했다.
 “장우건, 부반장에 입후보할 생각이니? 반장에서 떨어졌는데 부반장 하고 싶어?”
 꼭 출마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려서 우건은 기분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부반장이 되면 최준 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던 차에, 저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부반장 선거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우건의 불출마선언에 현민은 적잖게 실망했다.
 반장선거 차점자라면 선거는 해보나마나였다. 반장선거에서 찍은 아이들은 당연히 찍어주고, 안 찍은 아이도 미안해서 찍어주기 때문이다.
 ‘출마하지.’
 아무래도 담임의 의도에 말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짝이 팔꿈치를 찔렀다.
 “너 출마해볼래?”
 “싫어, 안 해!”
 공부나 운동이나 어느 것도 못하는 데다 성격까지 내성적이라 존재감이 약했다. 급우들에게 그는 그저 우건과 친한 아이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기껏 우건과 세인 그리고 오준 정도와만 말을 트고 지내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일 뿐이었다.
 그는 수시로 신경을 긁어대는 최준 패거리들한테 가끔 응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인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손을 드는 민지를 보고 현민은 경기를 일으켰다.
 “야, 제발 이러지 마!”
 뽑힐 가능성도 없지만 뽑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 앞에 나서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났다. 손에 땀이 맺혔다.
 그러나 민지는 현민을 무시했다.
 “현민을 부반장으로 추천합니다.”
 “풋!”
 상민이 반쯤 웃음을 터뜨리다 말았다.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성(姓)을 적은 다음, 이름을 적기 전에 한번 돌아보는데 마치 너 정말 나올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상민은 생각했다.
 ‘짜식, 주제파악도 못하고.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짝에게 추천해달라고 부탁 했을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영광은커녕 망신만 당할 텐데.’
 하긴 그 꼴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최준 짝이 안상민을 추천했다. 그렇게 하기로 사전에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부반장은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 이렇게 둘을 뽑는다.
 은주가 은영을 다시 추천하고 지연이란 아이가 박혜림을 추천했다. 남자 둘에 여자 둘이 출마했으니 얼추 모양새가 갖춰진 셈이었다. 은영이 먼저 나가 반장선거 때 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보다 열의가 떨어져 목소리는 낮고, 동작도 눈에 띄게 작았다. 반장선거에 떨어져 김이 샌 것 같았다. 그녀가 꾸벅 인사를 꾸벅하고 내려오자 혜림이가 나갔다.
 그 다음이 자신의 차례였다.
 현민은 목이 바짝바짝 말라 자꾸 침을 삼켰다. 잘못을 저질러 매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마치 뇌가 머리에서 기어 나와 놀이동산 같은 곳으로 소풍이라도 간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었다.
 혜림이가 한 시간쯤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다음은 이현민.”
 그 소리가 운동장 반대편에서 뱉어진 것처럼 아스라이 들렸다.
 올 것이 왔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벌떡 일어서는데 몸이 떨렸다.
 그때 손을 잡아오는 것이 있었다.
 따뜻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헛헛한 감각이 사라지고, 단단한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몸은 여전히 떨렸으나 전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현민은 손을 잡아준 짝꿍에게 웃어주었다.
 ‘고마워.’
 고마운 마음이 드는 순간, 자신이 이런 궁지에 빠진 것은 순전히 짝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심정이 운동장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원망스런 마음이 똬리를 틀었다.
 “이현민, 뭐해?”
 그가 굼뜨게 움직이자 담임이 다시 불렸다.
 현민은 최대한 천천히 걸어 나가며 뭐라고 발표할지 머리를 굴렸다. 여전히 머리가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교탁까지 가는 거리가 시내까지 가는 길만큼만 멀었으면.
 교단에 서서 뽑아달라는 연설을 하느니, 차라리 한 달 간 청소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가슴이 떨려 교단에 오르지 못한 그는 교탁 옆에 서서 탁자에 몸을 기울이고 심호흡을 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눈동자들이 무서웠다.
 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뻣뻣한 손가락이 이마를 긁어 뻘건 줄이 생겼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가 허둥거리자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그는 더욱 허둥거렸다.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몇몇 아이들의 야비한 웃음소리에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너무 떨려서 그것을 표현할 정신도 없었다.
 어서 이 자리를 모면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꾸뻑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현민입니다.”
 그리고 쫓기듯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짝이 말했다.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숫기가 없어?”
 이게 누구 때문인데!
 현민은 화가 나 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민지는 싱글벙글이었다.
 거기다 대고 화를 내자니, 자신이 너무 못나 보였다. 그래서 혀 차는 소리만 내고 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건이 작게 말했다.
 “잘했다!”
 현민은 입을 방긋거렸다.
 ‘나 찍지 마!’
 우건도 입술로 말했다.
 ‘정말?’
 ‘그래, 나 찍으면 화낼 거야.’
 ‘알았어!’
 어차피 찍어도 당선될 확률은 전무했다.
 우건은 찍지 않기로 결심했다.
 현민은 내친 김에 세인에게도 확실히 못을 박았다.
 ‘나 찍으면 절대 안 돼!’
 미사어구로 넘쳐나는 상민의 화려한 연설이 끝나고 투표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두 장의 용지를 받아 남자와 여자 각각 한 명씩 이름을 적어 넣었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남자 부반장 쪽 집계는 싱거웠다. 상민이 독주하는 가운데, 현민은 아직까지 한 표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반면 여자 쪽은 치열했다. 은영이 압도적일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처음부터 승부는 팽팽했고, 그 때문에 선거는 재밌어졌다.
 현재 스코어 29대 28.
 은영이 한 표차로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반장 선거가 아니어서 그런지 은영의 표정이 뚱했다. 이기든 지든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였다.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도 했다.
 드디어 마지막 한 표.
 은영이 그 표를 가져가면 그것으로 선거는 끝이 나고 혜림이 가져가면 재투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은근히 혜림을 응원했다. 그래야 투표를 한 번 더할 것이고, 그만큼 지겨운 수업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상민이 표를 펴들고 읽었다.
 “이현민!”
 한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일시에 풀리며 폭소가 터졌다.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가 섞였다.
 담임이 결과를 발표했다.
 “안상민 57표, 이은영 29표, 박혜림 28표. 그리고…….”
 담임이 말을 끌었다.
 “이현민 1표.”
 상민이 덧붙여 말했다.
 “야, 네 이름 네가 썼냐? 그렇게 부반장이 하고 싶었어?”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현민이 외쳤다.
 “아냐, 난 안 찍었다.”
 최준이 당선소감을 말하기 위해 나가면서 이죽거렸다.
 “그래, 그렇겠지. 설마 뻔뻔스럽게 자기가 자기 이름을 적었겠어.”
 아이들은 키득거렸다.
 선거에서 제 이름을 적는 것은 속보이는 짓으로 급우들의 놀림을 사기에 딱 좋은 행동이다. 그래서 반장이 되고 싶어 출마한 것이 분명한 아이들도 가끔은 딴 아이 이름을 적기도 했다. 물론 자기 이름을 적어내도 비밀선거의 속성상 그것이 밝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한 표가 나오면 꼴이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자기 이름을 적어낸다는 오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한 표도 나오지 않는 것이 훨씬 나았다.
 현민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도대체 누가 날찍은 거야?
 당선소감을 말하는 사이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하나둘 몰려와 놀리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 적는 사람 처음 봤다!”
 “반장 선거도 나오지 그랬냐?”
 “어떻게 한 표가 나오냐, 한 표가?”
 “시끄러!”
 우건이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찔끔한 아이들이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흩어졌다.
 세인이 말했다.
 “누가 찍었을까?”
 현민은 우건과 세인이 자기를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민이 말했다.
 “몰라.”
 세인이 민지를 가리켰다.
 “혹시 너 아냐?”
 아, 그렇구나!
 출마하라고 부추긴 민지가 찍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현민은 민지를 쏘아보았다.
 “왜 그랬어?”
 민지는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냐. 난 안 찍었어.”
 민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그냥 좋아서 찍은 것뿐, 일이 이처럼 엉망으로 꼬일 줄은 미처 몰랐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현민은 방향을 돌렸다.
 “오준, 네가 찍었냐?”
 우건과 세인을 빼고 나면 남는 건 오준뿐이다.
 오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한 표가 모자란다.”
 “뭐가?”
 “두 명씩 찍으니까 표는 모두 116표가 나와야 되잖아. 남자 58표, 여자 58표. 그런데 여자는 전부 합해서 57표야. 누가 여자 투표하는 걸 잊어먹은 모양이야.”
 “그렇구나.”
 현민이 뚱하게 대답했다.
 누가 한 표를 빠뜨린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가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누가 멍청하게 표를 한 장 빠뜨렸을까를 두고 한동안 재잘재잘 입방아를 찧었다.
 민지는 추궁의 화살이 딴 곳으로 돌아가자, 남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최준 패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 이름을 칠판에 적어대면서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다. 그저 으스대고 다니며 줄이 삐뚤다, 휴지통을 안 비웠다, 유리창이 더럽다, 잔소리를 해댈 뿐이다.
 현민은 그 아이들과 가끔 충돌했다. 평소엔 얌전한 샌님이 걔네들하고만 붙으면 사납게 굴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딴 남자아이들은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짝의 몸이 넘어오면 쌀쌀맞게 쳐냈다. 더러는 지우개나 연필 같은 것이 넘어가면 제 것이라며 돌려주지 않는 등 온갖 유치한 짓거리를 일삼았다.
 현민은 그런 행동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당기지도 않았고, 짓궂게 놀리지도 않았다. 일부러 책상을 넘어 팔꿈치로 부딪칠라치면 화들짝 놀라 팔을 치웠다.
 책과 공책을 마구 늘어놓아도 별 말이 없다. 아니, 오히려 제 책을 옆으로 치워 자리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좋아서 부반장으로 추천했고 한 표 찍어주었다.
 그런데 그 바람에 아이들 놀림감이 되고 말다니!
 ‘현민아, 미안해.’
 
 
 5 망태영감
 
 수업이 끝났다.
 지시사항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종례도 끝났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교실을 빠져나갔다. 청소당번만 남겨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청소도구함을 열어 빗자루를 꺼내던 세인은 그것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담임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언제까지 청소를 해야 하는 거지?”
 이러다 일 년 내내 청소당번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불만이 목까지 가득 차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세스러운 꼴을 겪은 현민의 불만이 가장 컸다.
 그는 책상을 뒤로 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날 것도 같았다.
 책걸상을 모조리 뒤편에 밀어붙인 아이들은 과격하게 빗자루를 놀렸다. 빗자루를 날릴 때마다 부연 먼지가 일어났다. 책상을 도로 앞으로 밀어놓고 쓰레기를 쓸어 담아 통에 버린 현민은 빗자루를 던져놓고 본격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청소당번들이 책상을 맞출 때 현민이 손가락을 튕겼다.
 “좋은 생각이 났다!”
 “뭔데?”
 세인이 물었다.
 “나중에 대답해줄게.”
 “나한테도!”
 오준이 끼어들었다.
 청소검사를 받은 후 아이들은 문을 잠그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오준은 집으로 가지 않고 우건의 패거리들과 동행했다.
 그가 물었다.
 “좋은 생각이 뭐야?”
 현민이 말했다.
 “간단해. 청소를 하지 않으려면 잘했어요, 도장을 받으면 돼.”
 “피, 그것을 누가 모르냐?”
 “알면 뭐해, 받아야지.”
 “어떻게?”
 “방법이 있어.”
 “커튼을 해올 수 있어?”
 “아니.”
 “그럼 그림을 사올 수 있어?”
 현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할 수 있는 게 뭐야?”
 “있어.”
 현민이 단호히 말했다.
 “걔들도 커튼을 매일 해오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폐품을 많이 내는 것쯤은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다음 폐품 수집일은 멀었잖아.”
 우건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책을 내면 되겠군. 학급문고에 책을 내면 도장을 찍어주잖아?”
 세인이 말했다.
 “너희 집에 책 있어?”
 “없어! 누구 있는 사람 없어?”
 오준은 의기양양해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나, 나! 우리 집에 선데이서울이 있어. 아주 많아.”
 세인은 너무 부러워 앓는 소리를 냈다.
 “에이, 넌 좋겠다. 우리 집엔 딱 만화책 두 권밖에 없어.”
 “야, 만화책은 안 돼! 그런 해로운 책을 내면 선생님이 화낼 거야.”
 “만화책이 왜 해롭냐?”
 “그러게. 어른들은 왜 만화책을 못 보게 하는지 몰라. 얼마나 재미있는데.”
 세상엔 모를 일투성이다.
 다들 힘없이 정문을 빠져나와 방천을 향해 걸어갔다.
 세인이 은근하게 물었다.
 “나한테 몇 권 갖다주면 안 돼?”
 오준은 잔뜩 뻐기며 턱을 올렸다.
 “글쎄, 생각해보고.”
 현민이 말했다.
 “오준이는 됐고, 우리가 문젠데…… 아, 화분!”
 우건이 물었다.
 “뭐라고?”
 “화분을 내면 돼.”
 “화분?”
 “그래, 화분.”
 “비쌀 텐데. 우리가 무슨 돈이 있냐?”
 현민이 갑자기 미루나무를 향해 힘차게 달음박질을 쳤다.
 “만들면 돼.”
 역시 달리기는 세인을 이길 수 없다.
 현민은 어느새 따라잡혔다.
 세인이 물었다.
 “어떻게?”
 “못쓰는 그릇 하나쯤 없는 집 없잖아?”
 “그건 그렇지.”
 “방천에서 꽃 한 송이 뽑아다 그 그릇에 심는 거야. 그리고 화분으로 내면 돼.”
 “야, 좋은 생각이다.”
 우건이 따라오며 말했다.
 “머리 좋은데, 역시 부반장 자격이 있어.”
 현민이 그의 어깨를 쳤다.
 “놀리지 마!”
 
 아이들은 통과의례처럼 미루나무에 터치하고 둔치로 내려갔다.
 활짝 피어 있는 꽃은 보이지 않았다. 봄이라지만 이제 막 푸릇푸릇한 풀들이 올라오고 나무에 생기가 도는 정도였다.
 우건이 말했다.
 “아무거나 한 송이씩 뽑아가자.”
 “그래도 꽃 비슷한 것을 뽑아야지.”
 “맞다. 잡초를 가져가면 망신당할 거야.”
 세인이 말했다.
 “밑으로 내려가보자.”
 그들은 강가까지 내려갔다.
 “저기 있다.”
 세인은 물가로 가서 봉오리가 두툼하게 맺혀 있는 꽃을 가리켰다.
 길이가 삼십 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 정도면 그릇에다 옮겨심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다.
 “괜찮겠지?”
 현민이 물었다.
 “아주 좋은데…… 근데 무슨 꽃이야?”
 “몰라.”
 “알지도 못하는 꽃을 낼 수는 없잖아.”
 “무슨 상관이야. 꽃이면 되지.”
 오준이 꽃을 매만지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알아. 이것은 수선화야.”
 단호하게 말하긴 하는데, 어째 믿음이 가지 않았다.
 “정말이야?”
 “진짜다.”
 재차 확인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전에 본 적 있어?”
 자꾸 묻자 오준은 짜증이 났다.
 “에이, 내가 책에서 봤다니까. 어떤 정신병자가 강물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해서 매일 쳐다보다 죽었는데, 죽어서 저 꽃이 됐데. 그 사진이랑 똑같아.”
 오준의 호언장담에 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꽃이 되었다는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방천에 꽃 같은 것이라곤 이것 하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꽃 이름이 무슨 대수겠어. 틀리면 좀 어때?’
 세인이 흙을 파헤치며 말했다.
 “수선화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그냥 뽑아가자.”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땅을 파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흙과 함께 꽃을 뽑아냈다. 책과 그 화분까지 내면 더 많은 도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오준도 한 뿌리 뽑았다.
 “이제 가자.”
 “으악!”
 막 돌아서던 세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담이 크기로 유명한 우건마저 겁을 집어먹고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망태할배!”
 현민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소리쳤다.
 둔치로 이어지는 작은 제방에 집게를 든 노인이 서 있었는데, 때가 시커멓게 낀 망태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는 혼이 반쯤 나간 듯 흐리멍덩해 보였는데, 비스듬히 걸친 야구모자 밑으로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백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마찬가지로 희게 변한 덥수룩한 수염이 코 아래를 완전히 뒤덮고 있는데, 자글자글한 주름이 수염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이백 살은 족히 되어 보였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는 너무 검어서 꿈에 나타날까 무서웠다.
 “히히히.”
 망태영감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성한 이가 별로 없어 듬성듬성한 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하마 이빨을 연상시켰다.
 탁탁탁
 집게를 든 영감이 허공에서 몇 번 부딪쳤다.
 “으아아!”
 오준이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바지가 젖는 것도 모르고 첨벙거리며 징검다리를 향해 달려갔다.
 “같이 가자.”
 현민과 세인이 동시에 달려가자 우건도 서둘러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건너편으로 갈 경우 다리가 있는 곳까지 크게 위회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망태영감 옆을 지나가느니, 삼십 분쯤 더 걷는 쪽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로 위로 올라선 다음에야 아이들은 숨을 돌렸다.
 쪼그려 앉은 아이들은 망태영감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덩치가 아주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무서웠다.
 세인이 말했다.
 “겨울에는 보이지 않았잖아.”
 현민이 말했다.
 “따뜻한 곳, 그러니까 제주도 같은 곳으로 갔다 온 게 아닐까?”
 “거지하고 다를 바 없는데 무슨 돈이 있어 제주도를 가냐?”
 “딴 곳에 가지 않았을 거야. 움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 봤거든.”
 “움집?”
 “저기.”
 우건은 저 멀리 중동교 밑, 나무에 가려진 시커먼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무척 검어서 마치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
 오준이 물었다.
 “본 적 있어?”
 “겨울방학 때 먼발치에서 움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가까이 가봤어?”
 “아니,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갔어.”
 “와, 우건이 너한테도 무서운 게 있어?”
 우건은 말없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현민이 목이 잘릴 뻔한 위기를 겨우 벗어난 사람처럼 목을 만지며 말했다.
 “큰 일 날 뻔했다.”
 세인이 말을 받았다.
 “맞아, 망태영감은 중학생까지도 잡아먹는대.”
 오준이 맞장구쳤다.
 “나도 들었어. 저 망태기 안에 푹 삶은 사람 머리를 넣고 다니다 배가 고프면 꺼내 뜯어먹는대. 우리 사촌 형은 그러는데 눈알을 파먹은 것을 직접 봤대.”
 현민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나도 그런 얘기 들었어. 작년 여름에 육 학년 형이 실종됐는데, 아무리 수색해도 발견되지 않았대. 그런데 나중에 방천에서 다리 한 쪽을 발견한 거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준이 말했다.
 “어른들은 왜 저런 살인자를 그냥 둘까?”
 “몰라,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지 뭐.”
 “그만 가자.”
 우건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들은 한 줄로 서서 도로변에 난 작은 인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건이 말했다.
 “저 영감을 그냥 두는 건, 어른들도 무섭기 때문일 거야.”
 현민이 물었다.
 “경찰아저씨들도?”
 “경찰들도 무서워한대. 옛날에 새로 발령받아온 신출내기 순경이 멋도 모르고 붙잡으려고 하다 손목이 잘렸다는 거야.”
 “우와! 그래서? 경찰들은 가만히 있었대?”
 “아니, 그럴 수 없지. 아무리 무서워도 후배 손이 잘렸는데, 그냥 두면 경찰 체면이 뭐가 되냐?”
 “그런데?”
 “총까지 들고 여섯 명이나 달려들었는데 글쎄…….”
 우건이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배에 총을 맞고도 망태기를 흔들며 달려들더래, 혼비백산한 경찰들이 오줌까지 지리며 도망쳤고, 그 후로는 아무도 못 건드린대. 아무튼 늙어죽을 때까지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다나 뭐라나.”
 세인이 말했다.
 “몇 살이지?”
 오준이 말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아버지가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때도 저 망태 영감이 다리 밑에서 살고 있었대. 그리고 그때도 저렇게 작대기를 흔들고 다녔대.”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백 살도 넘은 것 같지?”
 현민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더 먹었어. 난 사실 저 영감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불사신이지.”
 우건이 경고했다.
 “니들 앞으로 방천에서 놀 때 늘 조심해. 곁에 오면 무조건 도망쳐. 잡히면 죽는다, 알겠지?”
 “몰래 다가오면 어떻게 하지?”
 “냄새! 저 영감은 평생 목욕을 안 하고 옷도 십 년에 한 번씩 갈아입는다는 거야. 그래서 냄새가 지독해. 냄새가 나면 뒤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달려.”
 오준은 꼭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망태영감 쪽을 힐끗 바라보고 소리를 낮춰 물었다.
 “망태영감하고 문둥이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소문에 의하면 둘 모두 아이를 잡아먹는 데는 전문가다. 차이점이 있다면 망태영감은 머리를 통째 뜯어먹는 걸 선호하고, 문둥이는 간을 파먹는 걸 선호한다는 것 정도.
 현민은 방천에서 둘이 결투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갑자기 소름끼쳤다.
 그가 말했다.
 “망태영감이 이기지 않을까?”오준이 반문했다.
 “왜?”
 “문둥이가 아이를 먹는다는 소문은 의심스러워.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면 망태영감이 사람 먹는 것도 본 적이 없잖아?”
 “문둥이 자체를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정말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
 “있어! 밤 12시가 넘으면 물 속에서 기어 나온데. 우리 사촌 형이 봤대.”
 “에이, 사람이 어떻게 물 속에서 사냐? 개구리도 아니고.”
 “정말이라니까. 정 의심스러우면 오늘밤에 확인해볼까?”
 자정에 방천으로 나온다고?
 현민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그 말이 옳다고 인정해버리는 것이 백 번 나았다.
 “그래, 물 속에 산다고 치자.”
 오준도 그냥 해본 소리일 뿐, 밤에 와서 확인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방천에는 망태영감이 살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대악당 망태영감이.
 아이들은 다리를 건너 집을 향해 달려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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