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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 1권-1

2015.01.08 조회 5,878 추천 80


 프롤로그
 
 
 엘란이 동전 열 개에 팔린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그 가을은 정말 지옥 같았다. 전년 겨울부터 시작된 가뭄이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었다. 농작물은 타들어 갔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별다른 수원이 없는 다르넨 영지는 특히 가뭄이 극심했다.
 보통 가을은 풍요롭기 마련이지만 이 해만은 예외였다. 본격적인 굶주림의 시작이었다. 도처에서 아사자와 병사자가 속출했고 자영농은 농노로 전락했으며 고아원은 버려진 아이들로 넘쳐났다.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엘란은 다르넨 영주한테 팔렸다.
 그는 대대로 화전을 일구며 살아온 가난한 집 자식으로, 얼굴도 기억 못할 정도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결혼한 누나 집에 얹혀살았다. 그게 불생의 시작이었다. 매형이 어찌나 그를 심하게 구박하던지, 그는 어려서부터 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해야 했다.
 그나마도 참고 견딜 만했는데, 원수 같은 가뭄이 들이닥치자 제 자식 먹여 살리기 바쁜 매형이 그를 영주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어서 빨리 빨리!”
 말 위에 앉은 뚱뚱한 사내가 몸이 불편한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톰이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삼십대 장한으로 하인들을 감독하는 관리인이라 했다. 그는 어찌나 뚱뚱하던지 엉덩이가 안장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였다. 비쩍 마른 말이 용케도 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말 뒤로 누더기를 걸친 아이 십여 명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못 먹어 부황 든 얼굴에 몸은 빼빼 말랐고 배만 올챙이처럼 툭 튀어나왔다.
 “서둘러!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으로 성에 도착해야 한다.”
 관리인 톰은 계속 다그쳤다.
 그러나 퀭한 눈을 들어 앞을 한 번 쳐다 볼 뿐 아이들은 전혀 서두르는 기미가 안 보였다. 그들은 지쳐 있었다. 대부분 바짝 메마른 눈빛으로 발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흙먼지가 날렸다.
 “어서 가자!”
 톰이 다시 악다구니를 써보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다른 꾀를 냈다.
 “성에만 도착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그렇게 한마디를 내지르고 자신의 배를 두어 차례 두들겼다. 이렇게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번 아이들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땀에 흠뻑 젖은 아이들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발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기한 듯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아이가 있었다. 바로 엘란이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냐?”
 옆에서 걷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아이들 중에서는 상당히 나이가 든 축에 속하는 그는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에 먼지를 잔뜩 이고 있었다.
 엘란은 잠시 신기한 듯 그를 올려보았다.
 팔려갈 팔자라면 먹는 게 신통치 않았을 게 뻔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웃자란 옥수수처럼 기골이 장대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총기가 살아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라서요.”
 엘란이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거 순 촌놈이군. 난 파보라고 한다.”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순박해보였다.
 “전 엘란이에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엘란이 물었다.
 “성까진 아직 많이 남았나요?”
 “족히 한 나절은 더 걸어야 할 걸. 이 속도로 가면 해질 때쯤이나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치고 허기져 말할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팍팍한 길이 이어졌다. 어쩌다 눈에 걸리는 풀들은 누렇게 떠 있고,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도 말라가고 있었다.
 “서둘러라!”
 톰이 입버릇처럼 재촉했지만 이동은 더뎠다. 아이들이 워낙 축 쳐져 자주 쉬어야 했다.
 드디어 빵 한 덩이가 주어졌다.
 잠시나마 아이들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모두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빵에 시커먼 손자국이 났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러운 손을 쪽쪽 빠는 아이까지 있었다.
 “출발!”
 입맛을 쩝쩝 다시는 아이들에게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다시 이동이 시작되었다.
 해가 질 때쯤 도시가 나타났다. 하지만 도시치고는 규모가 작아서 도시라기보다는 큰 마을 정도였다.
 병사 두 명이 창을 들고 관문을 지키고 있었다.
 “톰 아저씨, 웬 아이들입니까?”
 병사 하나가 말을 걸었다. 그는 하루 종일 관문을 지켰는지 지겨워 죽겠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었다.
 “뻔하지. 하인으로 부리려고 사온 애들이야.”
 톰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말을 타고 다녔지만 그도 어지간히 지친 상태였다. 특히 엉덩이가 배겨 죽을 맛이었다.
 “요새 부쩍 많이 사들이는군요.”
 “어딜 가나 널린 게 애들이지.”
 톰의 말에 짜증이 섞였다.
 “계속 수고하십시오.”
 병사가 얼른 길을 터 주었다.
 엘란 일행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떨어져 캄캄했다.
 어둠 속으로 드러난 다르넨 영주의 성은 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성벽은 높지도, 튼튼해 뵈지도 않았다. 차라리 마을과 성을 구별하는 담장 같았다. 해자도 없고 군데군데 허물어지거나 금이 갔다. 게다가 나무로 만든 성문은 밑 부분이 시커멓게 썩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엘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볼품없는 성의 모습에 비해 내부는 꽤나 넓었다. 다리품을 한참이나 팔고 나서야 그들은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는 커다란 창고였다. 창고를 개조해 숙소를 만든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엘란 일행의 숙소였다.
 “이곳이 너희들이 살아갈 곳이다. 내일부터 당장 일해야 될 테니 푹 쉬어 두어라.”
 톰은 그렇듯 간단히 말하고 돌아가 버렸다.
 “이것 창고 아냐?”
 “창고면 어때, 빨리 쉬기나 했으면 좋겠다.”
 “맞아.”
 “어서 들어가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휴우
 엘란은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눈도 뻑뻑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목도 칼칼했다. 엉덩이, 허벅지, 허리 할 것 없이 안 쑤신 데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속은 편했다. 팔려와 고생을 하던 뭘 하든 이곳이 자신이 살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일 당장 어찌되든 우선 아무 데나 눕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누군가 창고에 달린 문을 열어 젖혔다.
 끼이익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났다.
 창고 안쪽에 대략 이십 명 정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모두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두 무릎은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마치 벌을 서는 사람들처럼 경직된 자세였다.
 그들 옆으로 작은 서랍장이 딸린 빈 침대가 십여 개 눈에 잡혔다.
 우르르 안으로 들어선 아이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거만한 자세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엘란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빈 침대에 들어가 들어 눕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사내 쪽으로 연신 눈을 굴렸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사내였다. 작은 눈이 가늘게 찢어져 있었고 입술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얇았다. 전체적인 인상이 왠지 독이 오른 뱀을 연상시켰다.
 “여기 온 걸 환영한다. 난 너희들을 감독할 방장 존이다. 이곳에서는 내가 곧 법이다. 탈 없이 있고 싶다면 무조건 내 말에 복종해라. 토 다는 새끼는 절대 용서 안 한다. 알겠나?”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같은 하인 신분이지만 다른 하인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그에게 방장이라는 특별한 직책을 준 모양이었다.
 “이 새끼들, 왜 대답이 없어!”
 퍽
 엘란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갑자기 날아온 주먹에 배를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대번에 아이들 눈에 공포가 어렸다.
 “예, 알겠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악을 썼다.
 “좋았어.”
 흡족한 웃음을 띤 채 존은 일일이 침대를 지정해 주었다.
 엘란은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 침대를 배정 받았다. 문 쪽은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 겨울에 춥고 잠자기도 불편할 터였다. 다소 불만스럽지만 엘란은 군말 없이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 한 벌이 고작이었다.
 엘란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엘란은 금세 곯아 떨어졌다.
 다르넨 영지에서의 첫 날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1장 다르넨 영지
 
 화려한 방이었다.
 사치품으로 유명한 스트빌라이산 가구는 단순하면서도 고상한 멋을 풍겼다. 우려한 곡선을 그리는 탁자와 의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명장이 만든 것이 분명했다. 다만 일체의 장식품 없이 그대로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금으로 만든 촛대를 여기저기 세워두는 바람에 고아한 향취가 깨어졌다.
 바닥에 깔린 두꺼운 양탄자도 훈족의 아낙들과 아이들이 잠을 줄여가며 정성스레 만든 최고급품으로 화려한 맛을 풍겼지만, 아쉽게도 단순하고 간결한 가구들과 어우러지자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천박하게만 보였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도 조화를 깨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무식한 졸부가 돈 자랑 하려고 만든 방 같았다.
 수많은 촛대들 중 하나만이 불을 밝히고 있어 방은 전체적으로 음침했다. 무슨 음모라도 꾸민다면 딱 좋을 분위기였 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불길하게 어른거렸다.
 방에는 세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한 명은 파란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었고, 다른 두 명은 장년인과 청년이었는데 비슷하게 생긴 것이 부자지간으로 보였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셔서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년인은 황송하다는 어투로 말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허허,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게 생긴 노인에게서 장중한 기운이 흘러나와 은연 중 방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삼황자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우리 다르넨 가문은 삼황자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장년인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귀족 모습을 한 이 장년인이 영지의 주인 카르마고 다르넨이었다. 얼굴을 보기 좋게 살이 올랐고 수염은 단정하게 깎고 있었다. 노인의 신분이 상당한 듯, 그는 조심스러움을 넘어 비굴함이 느껴질 정도로 굽실거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삼황자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의 인자한 미소를 띠며 노인이 말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에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묘한 힘이 있었다.
 “저, 이건 시드님께 드리는 약소한 선물입니다.”
 마르카고 다르넨이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은은한 향이 풍기는 목재로 만들어진 상자의 테두리는 금박이 둘려져 있었다. 군데군데 박힌 진주와 정밀한 문양으로 봤을 때 보통 고급품이 아니었다. 상자의 가격만 해도 상당할 텐데 내용물까지 상자 수준에 맞췄다면 선물을 넘어서 뇌물에 가까웠다.
 “뭘 이런 걸 다 주십니까?”
 노인은 난처한 듯 웃으며 상자를 받았다. 얼른 열어봤더니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노인은 상자를 얼른 로브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이 이때까지의 인자하고 장중한 기도와는 다르게 다소 경망스러웠다.
 이 노인이 엘리오트 왕국의 삼황자인 미카엘 드 카미엘 엘리오트의 스승으로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정령사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십인 중의 한 명으로 꼽혔는데, 물의 상급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렸다. 왕국에서 유일한 상급 정령 익스퍼터로, 보통 물의 시드로 불렸다.
 상급 정령사는 시드 외에 스트빌라이에 한 명이 더 있었다. 화염의 길라드로 불의 정령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삼황자님게 꼭 그대 얘기를 하겠소.”
 시드는 흡족하게 웃었다.
 천 년 전 제국이 망한 이후, 황제나 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엄밀히 말한다면 틀린 말이었다. 부적절한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시트빌라이였다. 아부에 능한 대신이 황제라 칭한 이후 모든 대신들이 따라서 했고, 결국 다른 나라까지 번져서 힘이 강한 나라는 모두 황제라 칭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부의 전염성이 강한 탓이었다.
 결국 국명에는 왕국이 들어가고 왕은 황제라 칭하는 다소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졌다. 그 바람에 관련용어가 섞여서 사용됐는데 일반 백성들은 되는 데로 불렀다. 기분에 따라서 왕이라 하기도 하고 황제라 하기도 했다. 그것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왕궁에 있어야할 삼황자의 스승이 다르넨 영지에 와 있는 것은 어딘지 이상했다.
 “그럼, 내일 일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돈을 받고 볼일이 끝났다는 듯 노인이 일어서자 영주와 그의 아들 피터 다르넨도 얼른 따라서 일어섰다.
 그들은 문밖까지 따라 나가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편히 쉬십시오.”
 대기하고 있던 총관은 극히 조심스런 태도로 안내했다. 시드의 뒤에는 제자로 보이는 청년 둘이 따르고 있었다.
 카르마고는 시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이제 갔어요. 그만 일어나요.”
 카르마고의 아들 피터는 다소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쏙 빼 닮았는데 그보다 이마가 좁고 코가 뾰족해서 인물은 아버지보다 떨어졌다.
 아들의 뚱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펴는 카르마고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중앙에 끈을 대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실력자에게.
 카르마고는 어려서부터 꿈이 컸다. 이런 궁벽한 지방을 벗어나 중앙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지방귀족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시드가 나타난 것이다.
 지방을 벗어나 롬바르드에서 노닐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흐뭇한 마음에 웃음이 절로 났다.
 그는 알지 못했다. 시드가 이곳뿐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영지를 돌았다는 사실과 거기에서 받은 선물들의 가치도 그가 준 것 만큼이나 엄청나다는 사실을.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었다.
 카르마고가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피터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버지, 삼황자한테 붙은 게 잘한 일일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옆 영지의 파르발 백작이 이황자한테 붙었으니……. 가만히 있다가는 그 놈한테 영지를 뺏길지도 모르는 판이다.”
 “그럼 차라리 황태자한테 붙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아버지가 중앙에서 내려온 노인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피터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상했다.
 
 카르마고는 아들이 한심스러웠다. 누누이 말했건만 또 이렇게 뒷북이었다. 그는 한심스런 마음을 접고 되도록 자세히 설명했다. 어쨌거나 영지를 물려줄 하나뿐인 아들이 아닌가.
 “황태자는 몸이 약하다. 몇 년이나 가겠느냐? 게다가 애도 못 낳는다고 하니 속빈 강정 아니냐! 후사가 없으면 권력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듣자니 중앙의 모든 귀족들도 이황자나 삼황자한테 줄을 댄다고 하더라. 당연히 우리도 둘 중 하나를 골라야지. 파르발이 이황자를 골랐으니 우리는 삼황자한테 붙어야 하는 거다. 너도 앞으로 영지를 물려받아야 하니 이런 일은 잘 알아둬야 한다. 변두리에 있어도 눈과 귀는 항상 중앙으로 열어둬야 피해를 받지 않고 권세를 누릴 수 있다.”
 열변을 토하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 피터는 시종 심드렁했다.
 “피터! 명심해라. 내가 못하면 너희 대에서라도 중앙에 진출해야 한다. 꿈을 크게 가져라! 호랑이를 그리기 시작하면 실패해도 고양이라도 되지만 처음부터 고양이를 그리다간 기껏해야 쥐새끼밖에 그리지 못한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생각과는 전혀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솔직히 피터는 중앙에 진출할 뜻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왕처럼 지내는 게 백번 낫지 중앙에 가서 수많은 귀족들에게 굽실거릴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설교가 길어질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황자와 삼황자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내전을 피하기 어려울 게다. 그러니 이런 변경까지 시드님이 오신 것 아니냐.”
 “그런데, 아버님. 내일 부탁드린 게 뭡니까?”
 “내일 시드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피터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시드님이 비도 내리게 하십니까? 진즉에 부탁드렸으면 가뭄도 막을 수 있었겠네요?”
 카르마고는 혀를 찼다.
 “이런, 멍청한 놈! 정령사가 무슨 신이냐! 가뭄을 해결하게. 설사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런 변경까지 오시겠냐? 만약 온다고 쳐도 그렇다. 빈손으로 보낼 수 있냐? 뒤로 쥐어줄 돈을 생각하면 차라리 가뭄을 겪는 게 더 싸게 먹힌다.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아들을 꾸짖던 영주는 피터가 고개를 숙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시드님은 물의 상급 정령사니 비가 올 때를 대충 알 수 있다. 들으니 내일 비가 온다고 하더구나. 돈이야 이미 뇌물로 바쳤으니 뭐라도 건져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부탁을 드린 거다.”
 “그럼 내일 비가 오는데, 시드님이 비를 내린 것처럼 연극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래,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카르마고는 흐뭇하게 웃었지만 피터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런 연극은 뭣 때문에 하십니까?”
 “내가 수도에서 사람을 불러 가뭄을 해결했다고 하면 영지민들의 충성심이 높아질 것 아니냐?”
 그는 아들을 깨우쳐 주려고 차근차근 짚어 나갔다.
 “그런 천한 것들 충성은 뭐하시게요?”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내전이 벌어진다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에요?”
 “내전에 대비하려면 성벽도 새로 쌓고 병사도 늘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돈이 들고 영지민들을 쥐어짜야 하는데 명분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자, 봐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영지를 위해 세금을 많이 바쳐라’ 이런 명분 말이다. 또 주민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면 내전이 벌어졌을 때 징병을 하기도 쉬워지는 법.”
 그제야 피터는 무릎을 쳤다.
 “아, 그래서 하인이나 농노를 사들이는군요.”
 “그렇지, 전쟁 때 칼받이로 사용할 수도 있고, 가뭄덕분에 자영농한테 싸게 사들인 토지를 경작할 노동력도 필요하고.”
 피터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가뭄이 든 게 우리한테는 오히려 잘된 일이네요?”
 “그렇지! 아마도 우리 가문이 일어서려는 징조인가 보다. 내일 연극할 때 표정관리나 잘 하거라.”
 “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피터가 싱글거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저런 사연을 품고 영지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일어나!”
 누군가가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엘란은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못 먹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 걸은 탓인지 얼굴은 잔뜩 부어 있고, 입술은 부르텄다.
 눈을 비비고 둘러보니 모두 깨어 있었다.
 전날처럼 존이 나섰다.
 
 “어젠 늦어서 그냥 재웠다. 늦었지만 자기소개를 해봐라.”
 한 명씩 쭈뼛거리며 일어나 자기소개를 시작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오랜 가뭄과 굶주림으로 입 하나 더는 셈치고 팔아치운 아이가 대부분이었고, 이유도 모르고 잡혀온 고아나 부랑아들도 몇 있었다.
 파보는 평범한 농민의 자식이라고 했다. 삼 형제 중 장남인데 영주에게 가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며 부모가 내다 팔았다는 것이다.
 “모두 일어나!”
 소개가 대충 끝나자 존이 말했다. 규율을 잡는답시고 한바탕할 모양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은근히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존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자, 밥 먹으러 간다.”
 존이 앞장서고 그 뒤를 삼십여 명이 죽 뒤따랐는데 그 모양이 흡사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들 같았다.
 십분 정도 걸어 식당에 도착하니 숙소와 비슷한 창고 건물 앞에 식판을 옆구리에 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남루한 옷차림의 농노나 하인들이다.
 엘란은 다른 사람 하는 대로 식판을 하나 빼들고 쪼르르 파보 뒤쪽에 섰다. 전날 말 몇 마디 섞은 것도 인연이라고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식사는 형편없었다. 멀건 야채 스프에 빵 한 덩이가 전부였다. 식판까지 싹싹 핥아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주목!”
 엘란이 먹을 게 더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톰이 식탁 위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빨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멋을 낸다고 머릿기름을 잔뜩 발라 중간 가르마를 탄 것이 흡사 희극배우를 연상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한테 모이자 톰은 왼손으로 뒷짐을 지고 오른손으로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모두 마을 앞 광장에 모여라! 영주님께서 특별히 청해서 오신 왕실 정령사 시드님께서 비를 내리게 하실 것이다.”
 식당은 안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비를 오게 한다고, 정말일까?”
 엘란의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었다.
 “왕실 정령사 정도 되면 비를 오게 할 수도 있겠지.”
 질문을 던진 사람의 옆에 앉은 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앞에 있던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쳇, 비가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 왜 상관이 없냐? 오늘 오후는 일 안해도 되잖아?”
 옆에 있던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엘란은 왕실 정령사니 비를 내리게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령사가 뭐에요?”
 엘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보에게 물었다.
 “너 정말 촌놈이구나, 정령사도 모르고. 그것은 정령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야.”
 파보는 엘란의 질문에 대답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다예요?”
 “그렇지.”
 엘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정령은 뭐예요?”
 “뭐긴 뭐야, 정령이 정령이지.”
 엘란은 파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파보도 모르는군요?”
 “…….”
 파보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변했다.
 식사가 끝난 후 모두들 일터로 향했다.
 엘란과 파보는 마구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는 오십 마리 정도의 말이 있었는데, 성주와 가족 기사들이 탈 말이었다. 성 밖에도 별도의 목장이 있어 거기서도 말을 키운다고 했다.
 마구간 지기는 허리는 꼬부라지고 가는 귀까지 먹은 육십 넘은 노인이었는데, 고함을 지를 때마다 갈라져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났다. 이마는 거의 다 벗겨져 있고 하얗게 센 수염이 아래턱에 듬성듬성 나 있어서 누가 뜯어놓은 것 같았다.
 “게으름 피지 마라! 꾀부리는 놈은 위에다 일러바쳐 아주 혼꾸멍을 내줄 테다. 너희 두 녀석은 마사 안에 쌓인 똥을 치우고 새 짚을 깔아라.”
 엘란과 파보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똥을 치우고 새 짚을 깔았다.
 마구간에는 말을 닦는 사람도 있었고, 말의 고삐를 쥐고 운동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해가 머리 위에 왔을 때쯤 성에서 나온 사람이 이십 마리 정도의 말을 끌고 갔다. 파보와 엘란은 종일 허리 한 번 못 펴고 종종거렸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이구! 힘들어라.”
 파보가 앓는 소리를 했다.
 정오가 되자 종소리가 울렸다.
 “모두 일 그만두고 마을 광장으로 모여라!”
 엘란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
 ‘잠시 후면 정령이 뭔지 볼 수 있겠지.’
 
 다른 하인들과 함께 엘란이 마을광장에 도착했을 때, 영지민 모두가 동원된 듯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광장 한가운데에 높다란 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몇 명이 서성대고 있었는데 하급관리들이나 마을의 촌장들로 보였다.
 빰빠라밤~
 갑자기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광장으로 들어섰다. 맨 앞에 입장한 기수가 든 깃발에는 할베드 두 개가 교차한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다르넨 가문의 문장이라 했다.
 기수 뒤를 이어 창을 든 경비대원들이 들어섰고, 그 뒤를 말을 탄 기사들이 따랐다. 그들이 걸친 의전용 풀 플레이트 메일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멋지다!’
 엘란은 기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르넨 영주와 피터, 그리고 시드가 차례로 입장했다.
 “다르넨 영주님과 왕실 정령사 시드님이시다. 모두 예를 표하라!”
 총관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성의 관리들이 무릎을 꿇었다. 영지민들도 모두 엎드렸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코를 땅에 박은 엘란은 슬쩍 고개를 들어 단상에 오르는 사람들을 훔쳐봤다.
 갑옷을 입은 기사와 로브를 입은 노인, 그리고 정장을 갖춘 영주의 모습에 엘란은 넋을 잃었다.
 “모두 일어서라!”
 총관이 다시 외치자 모두 일어났다.
 “가뭄에 시달리는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영주님께서 특별히 왕실 정령사를 초빙하셨다. 모두 감사히 생각해라!”
 “다르넨 영주님 만세!”미리 입을 맞춘 누군가가 외치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소리쳤다.
 “영주님 만세!”
 “시드님 만세!”
 한동안 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소리가 가라앉자 파란 로브를 입은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엘란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뚫어져라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흥분으로 움켜진 손안에 땀이 고였다.
 그때였다.
 돌연 노인의 두 손에서 물방울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곧 그 물방울이 하나로 뭉쳤고 어느덧 성숙한 여인의 자태가 나타났다. 아주 투명하고 성결해 보였다.
 ‘엄마!’
 엘란이 상상하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성숙한 여인은 물의 상급 정령 운다인이었다. 그녀가 광장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았다.
 “오오!”
 “우와!”
 여지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동시에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종래에는 퍼붓듯이 쏟아졌다.
 꼬박 일 년 만에 내리는 단비였다.
 “만세!”
 사람들은 모두 손을 들어 비를 맞으며 열광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영주님 만세! 시드님 만세!”
 엘란도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영주님 만세!”
 “시드님 만세!”
 엄청난 함성이 광장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단 위에서 시드의 제자 카일은 시종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늙으니, 저러고도 대륙에서 최고라는 십존 중 하나라는 게 안 부끄럽나? 낫살이나 쳐 먹어 가지고 순진한 사람들 속이는 짓거리라니. 게다가 자기 입으로 은밀한 임무라고 떠들 때는 언제고 이 따위로 동네방네 소문을 낼 것은 또 뭐람. 지방 영주를 규합한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카일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너와 결별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카일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양피지를 꼭 쥐었다.
 
 다르넨 백작이 특별히 마련한 귀빈실 중앙에 위치한 흔들의자에 온몸을 맡긴 채 나른하게 앉아 있던 시드는 흰 수염이 가득한 입을 열었다.
 “누가 남겠느냐?”
 맥 빠진 음성이었다. 듣는 사람들까지 기운을 쪽 빠지게 만드는.
 “요새는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도통 힘이 없어서…….”
 지그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것이 정말 피곤해 보이긴 했다.
 지금은 혼란기였다. 왕실에서는 차기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영주의 관리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충성을 맹세한다는 입에 발린 그들의 말을 무조건 믿는 것은 금물.
 다르넨 영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곁에 제자 중 한 명을 감시자로 붙여두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많은 제자들을 대동할 때부터 다 그런 속셈이 깔려 있었다. 영지를 순회하며 제자들을 하나둘 떨어뜨리고 이제 남은 것은 둘. 다르넨 영지는 그들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타오는 슬쩍 시드와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궁벽한 영지에는 절대로 남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제가 남겠습니다.”
 카일이 나섰다.
 “그래, 몇 년 만 고생해라. 나중에 교대시켜주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시드는 제자에게 신경을 써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지 않는 한,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제자가 이곳에 남았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을 게 뻔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속마음과는 다르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다음날 시드는 대대적인 환영 속에 영지를 떠났다. 영주들의 충성 맹세와 수많은 선물들을 끌어안고.
 카일은 영주의 감시자로 남겨졌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원활한 연락과 영지에 도움을 준다는 이유였지만.
 
 
 ***
 
 엘란과 파보는 정신없이 바빴다.
 시드가 떠나자마자 성벽 축조 공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내전에 대비하자는 이유였다. 평소부터 쓰러져 가는 담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던 영주는 이때다 하고 공사를 서둘렀다.
 영지민들과 농노, 그리고 하인들만 죽어났다.
 영지민들은 과중한 세금 부담에 허리가 휘었고 농노들과 하인들은 아침 먹고 일하고 점심 먹고 일하고 저녁 먹고 일하다가 컴컴한 밤이 돼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뜨면 다시 새벽부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이었다.
 엘란과 파보도 새벽같이 일어나 정오까지 마구간을 쓸고 닦고, 오후부터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성벽을 쌓는 일을 했다.
 밤에는 방장인 존한테 당했다. 그는 심심하면 아이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여지없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위에 가 일러바쳤다. 그러면 한 끼 식사를 박탈당하는 단순하면서도 끔찍한 벌이 내려졌다. 과중한 노동과 반복되는 일상에서 먹는 것의 즐거움만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식사시간은 고된 삶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결국 한 끼를 굶어야 한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렇듯 다르넨 영주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망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영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줄 알았고, 존은 그것을 등에 업고 아이들을 휘어잡았다.
 
 시간이 흘러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겨울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꽤 추웠다. 하지만 성벽 쌓는 일은 계속되었다. 결국 형편없는 식사, 추위, 거기에 누적된 피로까지 겹쳐 부상자가 속출했다.
 엘란과 파보는 마구간에서 일하는 동안 눈치껏 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은신처는 가득 쌓인 건초더미 안에 있었다. 늙은 마구간지기의 허술한 눈을 피하기에 그 만한 장소가 없었는데, 제법 따뜻하기까지 해서 땡땡이치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이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파보가 짚을 입에 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엘란이 아무런 반응도 안 보이자 파보가 말을 바꾸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또 정령 생각하는 거냐?”
 “예.”
 요즘 엘란은 정령을 자주 생각했다.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기억에 없는 엄마 대신 정령을 떠올렸다.
 “그런데 파보는 몇 살이에요?”
 엘란이 뜬금없이 물었다. 갑자기 그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파보가 무릎을 쳤다.
 “그러고 보니 서로 나이도 몰랐네. 난 열여섯 살이야, 넌?”
 “내일이면 열한 살이에요.”
 파보는 환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엘란, 생일 축하한다.”
 엘란도 마주보며 따라 웃었다. 따뜻한 파보의 마음이 전해지며 가슴이 훈훈해졌다.
 “축하는요, 뭐……. 그나저나 이제껏 어디서 살았어요?”
 “다보산 밑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살았지.”
 “에이, 나보고 촌놈이라더니 파보도 촌놈이군요.”
 엘란은 짐짓 속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억울하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다보산 산골에서 산 사람하고 마을에서 산 사람하고는 급수가 다르다. 찢어지게 가난하기는 했다만.”
 엘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야,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거야. 가난한 집은 가을이라고 해봐야, 추수하고 며칠 지나면 먹을 게 없어. 소작료 내고 빚 갚고 내년에 파종할 종자 남겨두면 남는 게 없지. 죽도록 일해 봐야 배곯기는 마찬가지야. 아무튼 우리 집 뒷산에는 감나무가 많이 있었지. 산지기한테 걸리면 경을 치겠지만 어쩌겠냐? 배고픈데 몰래 따먹어야지. 너 감에 대해서 아냐? 설사할 때 감 먹으면 즉효라는 거 말야. 먹은 건 없는데 감만 먹어댔으니, 똥이 나오냐? 심한 변비에 걸리게 되지. 한 열흘 똥 못 누면 아랫배가 돌처럼 딱딱해지면서 살살 아프기 시작하는데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똥 누러 변소 가서 힘주면 뭐가 나오냐? 잘 안 나오지. 열 번 가야 한 번 성공할까 말까다. 그것도 큰맘 먹고 있는 힘을 다 주면 아주 딱딱하고 굵은 게 나오는데 이게 나오면 그냥 나오냐? 나오면서 구멍을 쫙 찢어버리지. 똥구멍 째지도록 가난했단 말이 거기서 나온 거야.”
 엘란은 멍하니 파보를 보았다.
 “아프겠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파보는 엘란을 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넌,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
 엘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굳이 산에서 산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엘란은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똑같았지만, 마음은 그때보다 지금이 편했다.
 매형은 돈이 생기면 술을 마셔댔는데 술버릇이 고약했다. 취하기만 하면 잠든 엘란을 깨워서, 이유도 없이 두들겼다. 입에서 나는 역한 냄새를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뭐, 그냥 그랬어요.”
 파보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층민들의 삶은 비슷해서 누나네 집에 얹혀살면서 온갖 구박을 받았을 것이 뻔하다.
 파보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 안 해도 다 안다. 고생이 많았지……? 엘란, 앞으로는 날 형이라고 불러라.”
 엘란은 잠시 생각하다 밝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형!”
 둘은 서로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얼음도 녹일 듯 훈훈한 미소였다.
 “파보! 엘란! 이 녀석들이 어딜 간 거야? 이놈들은 틈만 나면 사라진단 말이야!”
 느닷없이 들려온 마구간지기의 째지는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엘란과 파보는 후다닥 뛰어나왔다.
 
 얼마 후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왔다.
 동물들보다 약한 것 같지만 의외로 인간들의 적응력은 뛰어난 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다들 혹한과 힘든 일에 잘 적응했다.
 하지만 엘란과 같이 들어온 아이들 중에서 셋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버렸다. 말은 안 했지만 부실한 식사와 계속된 중노동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죽은 아이들은 거적에 둘둘 말아 산에 버렸다. 흔치 않게 마음이 착한 일꾼이 묻어주는 일도 있지만, 대개 버려져 들짐승이나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서 파보의 가슴에도 봄이 찾아들었다. 일을 끝내고 하인들이 씻는 우물은 하녀들이 허드렛일에 필요한 물을 길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따뜻한 어느 봄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씻으러 가던 파보는 가자미처럼 눈을 힐끔거렸다.
 “저 여자 끝내주지?”
 파보는 노란 머리를 길게 길러서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를 가리켰다.
 그저 엉덩이만 컸지 예쁜 구석이 없었지만 엘란은 파보의 마음을 생각해 맞장구를 쳐주었다.
 “응, 아주 예쁜데.”
 “내일은 말을 걸어봐야지.”
 말을 마친 파보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왼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파보가 왠지 딴 사람처럼 보였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여자가 나타났다.
 엘란은 파보를 유심히 살폈다.
 파보는 두 손을 비비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기만 할뿐 말을 걸지 못했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도 있는데 내일은 꼭 말을 걸어 봐야지.”
 그러나 파보는 다음날도 우물쭈물하며 주변을 배회하기만 할뿐 말을 걸지 못했다.
 그 사이 훌쩍 일주일이 지났다.
 그쯤 되자 엘란은 파보 못지않게 속이 탔다. 이대로 가면 평생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엘란이 나섰다. 그는 꽃을 맴도는 꿀벌처럼 주위를 서성거리는 파보를 아가씨 쪽으로 은근슬쩍 밀쳤다.
 그리고 한마디.
 “형, 무거워 보이는데 좀 들어주지 그래.”
 아가씨는 물동이에 물을 담고 있다가 자기 앞으로 뛰어든 파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파보는 목덜미까지 붉히며 한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후!”
 이윽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 파보는 평생의 용기를 쥐어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파보는 온통 얼굴이 붉어진 채 쭈뼛거리며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파보가 물동이는 드는 데도 가만히 있었다.
 엘란은 일이 잘 풀려간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파보가 물동이를 들자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여자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얼굴을 한 파보가 물동이를 들고 여자를 따라갔다.
 잠시 후 돌아온 파보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레베카래.”
 “뭐가?”
 “그 아가씨 이름 말야, 이름도 예쁘지? 레베카, 레베카…….”
 파보는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엘란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다음날부터 파보는 물동이를 들어다 주기 시작했고, 하루종일 레베카를 입에 달고 다녔다. 엘란이 보기에도 둘이 꽤 친해진 것 같았다. 존이 비웃음을 띤 얼굴로 그 둘을 바라보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 밤.
 덜컹
 바로 문 옆에서 잠자던 엘란은 그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 덜 깬 그의 눈에 어둠 사이로 뚫고 살금살금 기어나가는 파보의 뒷모습이 잡혔다. 흥미를 느낀 엘란은 눈을 비비고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파보는 우물가로 향했다. 엘란은 얼른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인데 밤에 불러내고 그래?”
 레베카였다.
 파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파보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입이 타는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을 꺼냈다.
 “우리…… 크면…… 결혼하자!”
 파보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는 레베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엘란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푹 꺾고 있는 파보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레베카만큼은 비교적 똑똑히 보였다. 한데 상대를 깔보듯 팔짱을 끼고 눈을 척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게 아닌가.
 이윽고 레베카가 눈을 들어 정면으로 파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눈썹이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럴 생각 전혀 없어!”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 차갑고도 단호한 말투였다. 그 말에 파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엘란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
 파보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하인과 결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말이 좋아 하인이지 농노랑 다를 게 뭐가 있어? 내가 왜 구질구질하게 너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지? 불쌍해서 몇 번 만나줬더니……. 다시는 날 아는 척 하지도 마!”
 레베카는 속사포같이 퍼붓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휑하니 돌아섰다. 파보는 넋이라도 나간 듯 우물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몸에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형!’
 엘란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괜히 따라 나왔다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날 밤 파보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엘란은 그를 기다리다 슬그머니 잠이 들고 말았는데, 깨어 보니 언제 돌아왔는지 파보는 벽에 기대어 의미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밑이 검게 죽어 있는 것이 한숨도 못 잔 얼굴이 분명했다.
 엘란은 전날 밤 자신이 본 것을 모른 척했다. 하지만 파보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베카의 그 눈빛, 그리고 파보의 축 쳐진 어깨가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을 후볐다. 그가 그런데 파보의 심정이야 오죽하였을까.
 그 후 한동안 파보는 말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 겨우 입이 떨어지긴 했지만 전과 같은 쾌활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한테 주어진 일만 할 뿐 다른 일에 한눈을 팔거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동료들을 돕는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딴사람 같았다.
 엘란은 가끔씩 파보가 공허한 눈빛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때 마다 꼭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사고라도 칠까봐 엘란은 파보 옆에 바짝 붙어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란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자신 때문에 파보가 죽임을 당하리라고는,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평생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임을.
 
 ***
 
 어느덧 성벽을 쌓기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엘란은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벽돌들을 곧잘 날랐다. 처음에는 엄두도 못 내던 것이었지만 차츰 요령이 생겼다.
 그날도 평상시처럼 벽돌을 짊어졌다. 잘 나가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을 밟고 말았다.
 콰다당
 엘란은 균형을 잃고 벽돌과 함께 뒹굴었다. 어찌나 세게 넘어졌는지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고 눈앞이 노랗게 보였다.
 누워 끙끙대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존이 채찍을 휘둘렀다.
 촤악
 뱀의 혓바닥 같은 채찍이 엘란의 등에 작렬했다. 존이 다시 채찍을 들어올렸다.
 “아악!”
 대시 채찍이 등을 훑고 지나가자 극심한 통증이 뒤따랐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꾀를 부리고 있어. 일어나!”
 엘란의 엉덩이를 한 대 걷어찬 존이 다시 채찍을 치켜들고 내려치려는데 누가 팔목을 움켜잡았다.
 떡 벌어진 어깨, 팔뚝에 굵게 잡힌 근육을. 파보였다. 일 미터 팔십이 넘는 키에 어깨는 떡 벌어졌고 목은 웬만한 처녀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그만해! 꾀를 부리려는 게 아니라 넘어져서 그런 거잖아!”
 파보가 눈을 부라리자 순간적으로 존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곧 존은 주변을 둘러보며 악을 썼다.
 “무슨 구경났어? 어서 일해!”
 잠시 파보와 존 사이에서 일어난 실랑이에 눈을 주고 있던 아이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존은 파보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 지금 반항하는 거야! 이거 못 놔?”
 화가 치밀어 오른 존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파보의 팔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그 꼴이 부모에게 버릇없이 떼를 쓰는 아이 같아서 주변에서 구경을 하던 농노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존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을 써보았지만 파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쩔쩔맸다.
 “무슨 일이냐?”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을 떠나보내고 홀로 영지에 남겨진 정령사 카일과 십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린 영주의 아들 피터 다르넨이 특유의 거만한 얼굴로 존과 파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피터의 악명은 주변에 꽤 알려진 터라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봐 주변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피했다.
 “이 자식들이 일을 안 하고 꾀를 부려 훈계를 좀 했더니 반항을 해서…….”
 존은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주변 공기가 차갑게 변한 것을 감지한 파보는 존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풀려난 존의 팔목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요 근래 피터는 심기가 불편했다. 다 시드의 제자 카일 때문이었다. 평소부터 자신이 공부나 검술을 등한시하고 사냥이나 다니는 것에 불만이 많던 부친이 요즘 걸핏하면 성실하게 영지 일을 도와주는 카일을 빗대 훈계를 늘어놓았다.
 한바탕 아버지 훈계를 듣고 나면 늘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카일의 입을 찢어놓고 싶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카일을 상전처럼 떠받드는 것도 못 마땅했다.
 ‘젠장, 시드가 갈 때 같이 가버릴 일이지.’
 쓴 입맛을 다시며 피터는 파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파보를 보는 순간 이유 없이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런 버러지 같은 하인 놈 하나 때문에 그가 기분이 나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피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자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 주위에 있던 농노들과 하인들이 슬금슬금 피터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갑자기 피터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주변에 형성되었던 긴장감이 사르르 풀려갔다.
 ‘아! 그렇군. 이놈도 카일과 같은 갈색 눈에 갈색 머리로군.’
 원인은 이놈이 카일을 연상시킨다는 데 있었다. 사실 매끈하게 잘 생긴 카일과 약간 우락부락한 파보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단지 눈과 머리색깔이 카일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게 문제였다.
 피터는 파보에게 다가가며 씩 웃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긴장하고 있던 파보는 피터의 웃음에 긴장이 풀렸다. 파보는 피터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어라, 이놈 보게. 재수 없는 웃음도 똑같네!’
 피터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동시에 검을 뽑았다.
 쇄액
 노말 소드가 허공을 갈랐다.
 팟
 웃은 얼굴 그대로 파보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툭
 파보의 머리는 엘란 앞쪽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그의 발 앞에 멈췄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구르던 파보의 머리가 멈춤과 동시에 몸이 쓰러지고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따뜻한 피와 차가운 공기와 만나자 허옇게 김이 서렸다.
 엘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가끔씩 찾아오는 유랑극단의 연극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개를 들자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붉은 피와 파란 하늘이 강렬하게 대비되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흐어억!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가 엘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깊숙한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엘란에게 파보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엘란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가 마음을 연 최초의 인물이었다. 자상한 형이었고 다정한 친구였고 따뜻한 가족이었다.
 엘란은 정신없이 피터에게 달려들었다. 눈은 붉게 충혈 되고 코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퍽
 피터는 달려드는 엘란을 간단하게 걷어차 버렸다. 엘란은 포물선을 그리며 제법 멀리 날아가 나 뒹굴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피터는 카일을 보고 씩 웃었다.
 ‘이제 좀 개운하네.’
 
 
 2장 정령사 카일
 
 혼미한 정신으로 반쯤 뜬 눈에 얼룩덜룩한 천장이 잡혔다. 군데군데 푸른색 도료가 벗겨져 보기 흉한 천장이었다.
 엘란은 무슨 큰 사명이라도 받은 듯이 온 신경을 집중해 천장의 얼룩을 살폈다.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을 떠올리기가 무서운 그의 무의식적인 몸부림이었다. 얼마쯤 한 곳만 뚫어지게 쳐다보자 천장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의 눈꺼풀이 닫히자 익숙한 어둠이 밀려왔다.
 엘란은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깨어난 것은 이마에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마에는 차가운 물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컴컴한 방에는 등잔이 하나 놓여 있고, 앞에는 로브를 입은 이십대 청년이 앉아 있었다.
 카일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느냐?”
 “음!”
 배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련한 놈, 검사에게 빈손으로 달려들어 뭘 어쩌려고, 정녕 죽고 싶었던 거냐?”
 말의 내용은 질책이었지만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웠다. 방안을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엘란의 마음을 차분히 안정시켜 주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척이나 소박한 방이라 컴컴한 어둠 말고는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 방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카일, 수도에서 내려온 정령사다.”
 엘란은 카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제가 왜 여기…….”
 카일이 말을 끊었다.
 “내가 널 데려왔다. 내가 돈을 주고 널 샀으니, 이제부터는 영지에서 일할 필요 없다. 넌 이제부터 다르넨 영지 주민이 아니니까.”
 엘란은 의아스러웠다.
 “왜 저를……?”
 카일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글쎄, 피터에게 달려드는 게 맘에 들었다고나 할까?”
 엘란은 미소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 고생 많았으니 푹 쉬거라! 남은 얘기는 내일 하자.”
 카일은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웃어주고는 방을 나섰다.
 컴컴한 방안에서 엘란은 숨죽여 울었다.
 파보가 죽은 게 슬퍼서 울었고, 자신이 살아남은 게 기뻐서 울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싫어서 울었다.
 
 ***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아침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인 탓이었다.
 엘란은 일어났다가 도로 누웠다. 영지에서 일할 필요가 없다는 카일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카일은 어디서 잔걸까?’
 한참을 누워서 이리저리 뒹구는 데 카일이 들어왔다.
 전날은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카일은 대단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가 어깨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고 갈색 눈은 밝게 빛났다. 눈썹은 짙고, 얼굴은 갸름했다. 코가 오뚝하고 입술은 도톰한 편인데 거기에 늘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미묘하게 가식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잘 잤니?”
 카일이 상대방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쾌활한 음성으로 물었다.
 “예.”
 엘란은 짧게 대답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카일이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자, 받아라.”
 엘란은 얼른 받지 않고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게 뭡니까?”
 “직접 읽어 봐라?”
 그러나 산에서 흙 파먹고 살던 그가 글을 알 턱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곳에서는 글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엘란은 종이를 받아들긴 했지만 펼쳐볼 생각도 않고 머뭇거렸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저,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긴, 그렇겠군. 그것은 네 매매문서다.”
 엘란이 반문했다.
 “매매 문서요?”
 “그래, 네가 팔려오면서 작성된 문서야. 현재 기간이 삼십 년이구나.”
 엘란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삼십 년이요! 전 십 년으로 알고 있는데요.”
 카일이 혀를 찼다.
 “쯧쯧, 글을 모르니 속이는 것도 쉬웠겠지. 삼십 년 뼈 빠지게 일하다 보면 쉬 늙어 그때쯤 되면 꼬부랑 노인이 될 거고, 그럼 더 이상 필요가 없겠지.”
 분기가 치밀어 오른 엘란이 울컥했다.
 “이런 나쁜 놈들!”
 치가 떨렸다. 죽도록 일만 하다가 버려질 운명이라니. 아마 같이 팔려온 아이들도 이 사실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일 터. 파보 역시 죽는 그 순간까지 십 년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분기를 참지 못하고 한참동안 씩씩대던 엘란이 의아한 얼굴로 카일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이걸 저한테…….”
 “어제 말하지 않더냐. 내가 널 샀다고, 이제부터는 내가 네 주인이다. 이런,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삼십 년 동안 부려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말을 마친 카일은 서류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금세 타버리고 시커먼 재만 남았다.
 “앞으로 내 시중이나 들거라. 원한다면 글도 가르쳐 주마.”
 “왜 저한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카일은 빙긋 웃었다.
 “어제도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잠시 말을 끊은 카일은 엘란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그날부터 엘란은 카일의 시중을 들었다. 시중이라고 해봤자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식사와 빨래 청소는 성의 하녀들이 모두 도맡아 했고, 엘란은 그저 카일의 심부름을 하거나 바쁜 때 식사를 가져다주는 정도였다.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가하고 편안하기는 처음이었다. 차츰 바짝 마른 엘란의 몸에 적당이 살이 붙었고, 마른 버짐 가득하던 얼굴에는 기름기가 돌았다.
 너무 편안한 생활에 가끔은 겁이 날 정도였다. 아침으로는 글을 배웠고, 틈이 나면 산을 올랐다. 산에 올라 열심히 수풀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산을 쑤시고 다닌 지도 거지반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전날 내린 비로 숲은 더욱 푸르게 보였다. 산새들 지저귐마저 잘 씻은 듯 맑게 들렸다.
 엘란은 수풀 사이를 뒤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가 막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바스락.
 갑자기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어이쿠!”
 엘란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토끼였다. 커다란 눈을 디룩거리며 노려보는 것이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때,
 취익.
 섬뜩한 소리가 그의 뇌리에 박혔다.
 “으악!”
 엘란은 두 다리로 맹렬히 밀면서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줌을 다 지릴 뻔했다. 자신이 넘어진 자리 바로 옆에 푸른 뱀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엘란은 서둘러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치익.
 뱀이 허리를 굽히더니 몸을 날렸다. 황급히 옆으로 피한 엘란은 나뭇가지로 떨어져 내리는 뱀의 목을 꾹 눌렀다.
 칙.
 목이 눌린 뱀은 온몸을 배배꼬며 몸부림쳤다.
 “후, 큰일 날 뻔했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숨을 돌린 엘란은 가져온 나무통에 뱀의 입을 대고, 힘껏 눌렀다. 뱀의 입에서 노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독을 짜낸 후 뱀은 놓아주었다. 순식간에 뱀은 무성한 숲 사이로 꼬리를 감췄다.
 산에서 살 때 그는 숱하게 뱀을 잡으러 다녔다. 위험했지만 매형의 강요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잡은 뱀은 약재상이 사갔는데, 칼이나 화살에 맞아 살이 찢겼을 때 뱀독을 바르면 신경이 마비되어서 통증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외과적인 수술에 마취제로도 사용되는데 수술이 끝난 후 뱀의 쓸개즙을 바르면 마비가 풀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방치할 경우 살이 썩어 들어간다는 말도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엘란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카일에게 글을 배운 후 예전의 숙소로 갔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엘란은 주변을 살피며 존의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존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하나둘 들어섰다.
 잠이 들기 전 으레 존의 구타가 따랐다.
 모두 침대에 눕고 얼마 있다 엘란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모두들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엘란은 살며시 다가가 존의 오른쪽 발가락 끝마디에 독을 조심스레 발랐다. 다음날 아침, 존은 발가락이 이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젠슨! 요새 재미가 좋은가 보지.”
 존이 잠자리에 들려는 젠슨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젠슨은 존이 다정하게 말하자 오히려 불안해졌다.
 ‘이놈이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낮에 톰과 무슨 얘길 했지?”“별 얘기 없었습니다.”
 젠슨은 깜짝 놀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상시의 어조로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을 떠난 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톰에게 내 흉을 본 것은 아니겠지?”
 존이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물었다. 그럴수록 젠슨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
 “예, 그런 적은 절대 없습니다.”
 퍽!
 느닷없이 존의 주먹이 젠슨의 주걱턱에 작렬했다.
 “아이구!”
 턱을 움켜쥔 젠슨은 죽는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그런 젠슨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존이 움켜쥐었다.
 “이 새꺄! 들은 사람이 있는데 어디서 오리발이야! 내가 매일 동료들을 두들겨 팬다고 네가 고자질했잖아.”
 젠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떤 죽일 놈이 밀고한 거야.’
 젠슨은 잡아떼야 할지 엎드려 빌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그게 존의 심사를 자극한 모양이다.
 “이 자식이!”
 젠슨의 머리를 놓아주고 벌떡 일어선 존은 오른발로 젠슨의 얼굴을 세게 걷어찼다.
 “아이쿠!”
 “악!”
 괴상하게도 두 군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존의 발에 정통으로 걷어차인 젠슨의 입은 피투성이가 되어 괴성을 내질렀고, 존도 걷어찬 발을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불안한 얼굴로 둘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렸다.
 “퉤!”
 젠슨은 입안에 있는 딱딱한 이물질을 뱉어냈다. 누런 이가 네 개나 바닥을 굴렀다.
 “아악!”
 그때까지 존은 바닥을 뒹굴며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놀란 누군가가 잽싸게 톰을 데리고 왔다.
 “이봐, 왜 이래?”“발, 발이…….”
 존은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거렸다.
 톰은 서둘러 존의 신발을 벗겼다.
 “악!”
 신발이 벗겨지며 발을 건드렸는지 다시 비명이 터졌다.
 “이런!”
 존의 발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존의 발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하인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줄 리가 없었다.
 결국 존은 오른쪽 발을 잃었다. 의족을 대고 뒤뚱거리며 걷게 되자 방장의 지위는 박탈되었다. 아무도 존을 도와주지 않았다.
 존의 후임으로는 젠슨이 임명되었다.
 “흐흐.”
 젠슨은 의족을 끼고 뒤뚱거리는 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앞니가 네 개나 빠진 채.
 
 “그 책 재미있냐?”
 카일이 맞은편에 앉아서 자상하게 물었다.
 요즘 독서에 재미가 붙은 엘란은 카일이 가지고 있는 책을 거의 다 읽다시피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제국의 역사』였다.
 “아주 재밌습니다.”
 이 책은 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씩은 읽어보는 책이었다. 제국은 대륙 최초의 통일국가이자 마지막 통일국가였다. 발칸대제사후 누구도 대륙을 통일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과 구별해 제국이라 불렀다.
 조그만 공국에서 태어난 발칸대제는 약관의 나이 스물에 왕위에 올라 삼십 년 동안의 정복전쟁으로 대륙을 통일했다. 그는 놀랍게도, 신과도 맞서 싸웠다고 전해지는 드래곤을 부렸다.
 초기의 정복전쟁에는 많은 난관이 따랐고 목숨이 위태로운 적도 많았으나, 드래곤을 부리게 되자 감히 적대할 자가 없었다. 광룡 카나이폴런은 공포 그 자체였다.
 대제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는 부와 권력을 주었고 자신을 반대 하는 자에게는 고통과 죽음을 선사했다. 문자와 언어,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많은 저수지와 제방을 쌓았다.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이용되는 도로를 닦은 것도 대제였다. 현재의 모든 문화며 신분제도 경제제도는 그때의 것을 기반으로 한 것이 많았다.
 대제는 오십 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고 백 살에 사망했다. 그런데 대제의 무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보물을 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리고 대제 사후 제국은 이 년 만에 멸망해 버렸다.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역사상 그토록 강대한 나라가 불과 이 년 만에 망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요?”
 책에는 단시 ‘대제사후 이년 만에 제국이 망했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현자들이 연구했지만, 누구나 납득할만한 학설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신들의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드래곤의 개입이 있었다는 설이 한때 유행하기는 했었지. 그건 그렇고, 이렇게 화창한 날에 골방에 틀어박혀 있어서야 쓰겠니? 바람이나 쐬고 오자!”
 카일이 일어나자 엘란도 따라서 일어섰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비치고 있었고, 시원한 바람은 옷자락은 흔들었다.
 엘란과 카일은 성 밖으로 나섰다.
 성벽 축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선 엘란은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느껴졌다. 세금이 점점 과중해지고 있었던 탓이다. 시드가 비를 내리 이후 잠깐의 칭송이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길을 따라 걷던 엘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보았다. 사냥을 갔다 오는지 등에는 활과 화살을 메었고 안장에는 여우가 매달려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거만하게 웃고 있는 피터 다르넨의 얼굴이 보였다. 파보가 죽은 후 첫 대면이었다. 엘란의 뇌리에 굴러가던 파보의 머리가 떠올랐다. 참을 수 없는 격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후끈한 열기가 전신을 달궜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데 카일이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무시무시한 괴력이었다. 엘란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피터 일행은 엘란을 스치듯 지나서 멀리 사라졌다.
 카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너라.”
 그들은 한참을 걸어서 마을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카일을 따라가던 엘란은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적한 곳에 이르러 카일이 바위 위에 앉았다. 주눅이 든 엘란은 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섰다.
 “힘도 없는 놈이 복수를 하려는 것은 만용에 불과하다. 힘이 없으면 힘을 기르던가 머리를 써야지, 그때 존을 상대하던 것처럼.”
 순간 엘란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카일이 알고 있었구나!’
 섬뜩한 기운에 전신이 떨려왔다.
 “맨주먹에 달려들어서 어쩌려고? 그렇게 죽고 싶거든 손목을 긋던가 목이라도 매지 그러냐?”
 엘란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카일의 말은 모두 옳았다. 더구나 카일이 존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얼어붙어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넌 성을 나와야겠다. 다시 피터를 보고 달려들었다가는 나까지 곤란해질 테니. 산 속에 집을 한 채 얻어줄 테니 거기서 살아라! 나는 스승님의 명 때문에 성을 벗어날 수 없다.”
 더 이상의 책망이 없자 다소 안심한 엘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집을 얻으면 너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주마.”
 엘란이 놀라서 되물었다.
 “예?”
 “왜 싫으냐?”
 엘란은 카일의 얼굴을 조심스러 살피며 말했다.
 “왜 저 같은 놈에게.”
 “내가 쓸 데가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라.”
 카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엘란은 뛸 듯이 기뻤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엘란은 허벅지를 피멍이 들도록 힘껏 꼬집었다.
 “악!”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다음날.
 엘란은 집을 얻어 성을 나섰다.
 사냥꾼들이 비를 피할 수 있게 산중에 임시로 만든 숙소였는데 간단한 아궁이와 방 하나가 전부였다.
 볼품은 없지만 성에서 살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피터와 떨어져 산다는 게,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다.
 카일은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정령술을 배우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날부터 엘란은 정령술을 배웠다.
 “세상은 인간계, 신계, 정령계, 마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계의 모든 사연현상은 신계, 정령계, 마계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이렇게 구분 짓는 게 일반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신계는 인간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고 정령계와 마계도 정령과 여러 마물들을 소환해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그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없다. 솔직히 세계의 구성에 대해서는 나 역시 잘 아는 바가 없고, 안다고 해도 정령술과 별 상관이 없으니 더 이상 설명하지는 않겠다.
 정령술이란 간단히 말해 정령을 불러내서 부리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마법을 행하는 것을 신성마법이라 하고, 마신의 힘을 빌리는 것을 흑마법, 자연계의 마나를 조종함으로써 행하는 마법은 백마법이라 한다. 그리고 마계의 마물을 소환하는 것은 소환마법이라 칭한다.
 그러니 정령술은 정령을 소환해서 부리는 마법의 한 종류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보통 흑마법사는 소환마법도 같이 배운다. 백마법사가 정령술을 익히기도 하고. 그러나 높은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하나만 파고드는 게 유리하다. 한 평생 노력해도 하나를 대성하기 힘든데 이것저것 익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내 스승 시드도 오직 정령술 하나에만 매달렸고 나도 정령술만 익혔다. 재미삼아 마법 한두 가지 익혀보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되도록 마법은 익히지 마라. 다만 라이트 마법 같은 것은 생활에 상당히 유용하니 나중에 한번 익혀보고.”
 카일은 기초적인 상황부터 설명해 나갔다.
 엘란은 눈을 빛내며 열중하는 가운데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신은 정말 있나요?”
 카일은 신에 대한 질문을 받자 약간 곤혹스러웠다. 성직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어서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평상시 신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신성마법을 할 수 있으니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대충 얼버무리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데 또 엘란의 질문 공세가 펼쳐졌다.
 “신과 마신은 어떻게 다릅니까?”
 “음,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종교의 이해란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해주마. 너도 알다시피 세상은 양면성이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탄생이 있으면 소멸이 있다. 신들도 마찬가지여서 밝은 쪽을 담당하는 신이 있고, 어두운 쪽을 담당하는 신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당연히 밝은 쪽을 섬기고 어두운 쪽을 멀리한다. 그래서 어두운 속성의 신을 따로 마신이라 구분하는 것이지 사실 둘 다 똑같은 신이라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주장하기로는 인간세상은 신들이 관장하고 마계는 마신들이 담당한다고 하는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다. 간혹 마신을 세상에 강림시키려는 흑마법사들이 있다는데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강림하던 말든 나하고 상관도 없으니, 굳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너도 성직자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종교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마라. 신전에 돈이나 뜯기지 평생에 도움될 건 하나도 없다.”
 카일은 상당히 시니컬한 어조로 설명했고, 엘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잠시 뜸을 들인 카일은 정령술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정령술을 비롯한 모든 마법은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검술마저도 상승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마나는 느끼고 익혀야 한다. 마나는 자연을 구성하는 근본요소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엘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정령술을 배우면 저도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나요?”카일은 빙그레 웃었다.
 “시드가 비를 내리는 걸 보고 하는 말이구나?”
 “예.”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시드가 저번에 비를 내리게 한 것도 다 연극에 불과하다.”
 엘란은 놀라서 물었다.
 “연극이라니요?”
 “뛰어난 정령사는 좁은 지역에 짧은 시간동안 비를 뿌릴 수는 있다. 그러나 장시간 넓은 지역에 비를 뿌리는 것은 정령왕을 부린다 해도 불가능하다. 정령을 부리려면 계속 마나를 대줘야 하는데 그런 막대한 마나를 동원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에이션트 드래곤이 정령왕을 부린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엘란은 의문이 생겼다.
 “그럼 시드님은 어떻게 비를 내렸습니까?”
 “시드는 물의 상급정령 익스퍼터다. 당연히 비가 올 때를 알 수 있지. 비가 내릴 때를 맞춘 것뿐이다.”
 엘란은 카일의 설명을 듣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연극을 한 겁니까?”
 “영지민을 더 쥐어짜기 위해서. 너희들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니 너희들도 나에게 충성을 바쳐라! 이런 뜻이지. 실제로 영지민 보호를 명분으로 성벽 축조에 나섰고 세금도 두 배로 올리지 않았느냐?”
 엘란은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도 시드가 비를 내릴 때 감격해서 목이 터져라 영주님 만세를 외치지 않았던가?
 “나쁜 놈들!”
 카일은 엘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 믿을 놈 하나 없다.”
 카일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항상 웃는 얼굴의 카일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엘란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설명을 계속하마. 정령사는 하급, 중급, 상급 정령사로 크게 나누는데 각각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거리가 멀고 실력 차이도 뚜렷하다. 정령술은 익히기가 까다로워서 정령사들 중 열에 아홉은 평생 하급의 벽을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급수는 부리는 정령의 등급에 따라 나눈 것인데 하급 정령을 부리면 하급 정령사, 중급 정령을 부리면 중급 정령사로 불린다. 같은 급이라도 수준 차이가 큰데, 처음 정령을 불러 계약을 하고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되면 비기너라고 부르고 능숙하게 정령을 부리면 익스퍼터, 정령을 완전히 지배하는 단계를 마스터라 한다. 그러니까 정령사의 수준은 아홉 단계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하급 정령 비기너부터 상급 정령 마스터까지.”
 엘란이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한 단계가 생략된 것 같았다.
 “아까 정령왕을 부린다고 하셨는데 그런 단계는 없는 건가요?”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 있다면 정령왕 마스터라는 단계가 생겼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때까지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인간은 없다. 역사적으로 드래곤들이 정령왕들을 부리긴 했지. 그리고 엘프 중에도 부리던 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요새는 드래곤들이 드래곤의 섬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엘프들도 엘프의 숲에서 나오지 않아서 정령왕을 본 사람조차도 없다. 인간에게는 퍽이나 다행한 일이지만 말이다.”
 잠시 숨을 고른 카일은 말을 이었다.
 “정령술을 익히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정령과의 친화력도 있어야 하고 거기다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평생을 노력해도 하급 정령 비기너에 머무는 자도 많다. 시드 정도 되는 정령사는 대륙에도 둘밖에 없다.”
 엘란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친화력이 없으면 어쩌죠?”
 “그럼 정령술은 익힐 수 없다.”
 카일은 단호히 말했다.
 “우선 마나를 느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나를 느낄 수 없어도 정령술은 못 배운다. 이리와 내 앞에 앉거라.”
 엘란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두 다리를 쭉 폈다.
 “아니, 그렇게 앉지 말고 이렇게 앉아야 한다.”
 카일은 시범을 보여주었다.
 “먼저 오른쪽 발바닥을 왼쪽 허벅지에 대고,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놓아라.”
 엘란은 잘 되지 않았다. 다리가 당기고 잘 접히지 않았다. 한동안 낑낑거리는 모양을 보고 있던 카일이 엘란의 다리를 잡아서 강제로 꼬아 버렸다.
 “악!”
 엘란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지금은 고통스러워도 나중에는 편안해 질 거다.”
 엘란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허리를 쭉 펴라, 그래 그렇게. 그리고 턱은 당기고 눈은 자연스럽게 감아라. 지금은 감지 말고 내 자세를 보고 따라해야지. 두 손은 자연스럽게 다리 위에 올리는데 약지와 중지는 말아서 엄지와 맞대고 검지와 새끼손가락은 전방을 향해 뻗어라.”
 시키는 대로 따라 하려니 어색하고 힘들었다. 엘란의 자세가 겨우 잡히자 카일이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았다. 갑자기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뭔가요?”
 질문을 하자 아랫배에 들어온 기운이 흩어졌다.
 “이게 마나다. 너는 앞으로 이걸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마나 수련 중에는 입을 열어 말을 하면 마나가 흩어지니 입은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 마법사나 정령사가 되려면 마나를 느끼고 저장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흘려줄 테니 가만히 느껴 보거라.”
 카일이 다시 마나를 주입하자 마나가 몸 안을 이리 저리 떠다니다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가 돌아다닐 때는 온몸에서 청량감이 느껴졌고, 마나가 흩어지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마나는 한 곳에 비정상적으로 모이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어서 곧잘 흩어진다. 앞으로 매일 아침에 이 자세로 명상을 하면서 마나를 느껴 보아라. 명심해라. 네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나로서도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사실을.”
 카일은 이 말을 끝으로 산을 내려갔다.
 엘란은 힘들게 다리를 풀었다. 자세를 잡기도 힘들었지만 풀 때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고!”
 신음이 절로 났다. 다리는 쥐가 나서 뻣뻣하게 굳었다. 엘란은 이리저리 버둥거리면서 다리를 주물렀다. 그날부터 엘란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다리 꼬기조차 힘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세는 익숙해졌는데 마나는 아무리 해도 느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마나는 대기 중에 널리 퍼져 있지만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듯 공기와 구별해서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자꾸 지나가자 엘란은 점점 초조했다.
 카일은 이틀에 한 번씩 와서 엘란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때마다 카일은 엘란 뒤에서 서서 명상에 들어 있는 걸 지켜보았다. 시간이 헛되이 흘러가자 엘란은 카일이 가끔씩 들르는 게 부담스러웠다. 카일이 뒤에 서 있으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괜히 헛수고하는 거 아닌가 몰라.’
 카일 역시 서서히 회의를 느꼈다.
 피터에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기세를 보고 나중에 활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애초에 촌무지렁이한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엘란은 다음날도 새벽같이 바위 위에 올라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아직 별들이 빛을 뽐내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 당겼다.
 휘이잉
 바람이 전신을 휘감고 스러진다.
 엘란의 정신도 바람을 따라 흘렀다.
 ‘어! 이게 뭐지?’
 갑자기 주위를 도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어떻게 느껴지는 줄도 모르게 자연스러웠다.
 “마나구나!”
 엘란은 너무 기뻐서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렇게 고생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느꼈다! 느꼈어!”
 엘란은 미친놈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나무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까만 눈을 빛내며 엘란을 내려다보았다.
 
 
 3장 수련
 
 다음날 아침 일찍 카일이 올라왔다.
 “마나를 느꼈어요!”
 엘란은 자랑스런 표정으로 소리쳤다. 착한 일을 하고 부모의 칭찬을 기대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카일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뿌듯한 감정이 일었다.
 ‘깡통은 아니었군.’
 카일도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넌 이제 겨우 첫 발을 디딘 것뿐이야.”
 엘란이 자만할까 염려가 된 카일은 엄포를 놓았다.
 다음 단계로 배운 것은 마나를 몸속에 저장하는 방법이었다. 정령을 부리거나 마법을 시전 하는 것은 몸속의 마나와 외부의 마나를 공명시켜 행하는 일. 당연히 몸속에 마나를 많이 저장할수록 수준 높은 마법을 부리거나 고위의 정령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나는 자연에 비정상적으로 모여 있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몸속에 저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쌓았다 싶으면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마나를 몸속에 저장하는 것을 마나 축적이라고 한다. 저장된 마나가 많을수록 강대한 마법을 시전하거나 높은 수준의 정령을 부릴 수 있으니 중요한 수련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어서 깨달음이나 숙련도도 아주 중요하니 너무 마나 축적에만 매달리지는 마라. 어쨌든 마나 축적의 방법은 호흡과 명상으로 한다. 주변의 마나를 들이마셔서 몸속에 저장하는 것이다. 정령사나 마법사에 따라 저장하는 장소가 다르기도 하나 보통 마나홀이나 심장에 저장한다.
 네가 배울 호흡법은 마나홀에 마나를 쌓는 방법이다. 숨을 깊고 길게 들이마시고 짧고 가볍게 내뱉어라. 그러면서 마나를 마나홀에 저장한다고 생각해라. 이때 마나가 쌓인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굳게 믿는다면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쌓는 즉시 빠져나갈 거야. 그렇다고 멈추지 마라. 꾸준히 노력해서 일정 단계가 지나면 몸속에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테니.”
 카일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들려서 배운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것을 가르쳤다.
 엘란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마나 축적을 시도했다. 마나를 느끼고 뛸 듯이 기뻐한 것이 엊그제인데 만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정령술은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고 까다로웠다.
 ‘후, 마나를 느끼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마나 쌓는 게 더 어렵군.’
 엘란은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런 성취도 없이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겨우내 수련을 했지만 마나는 눈곱만큼도 모이지 않았다. 모으면 흩어지고 모으면 흩어지고 해서 시시때때로 포기해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마다 엘란은 죽은 파보와 자기를 정성껏 가르치는 카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더욱 마나 축적에 박차를 가했다.
 추위가 한풀 꺾인 어느 따뜻한 오후였다.
 엘란은 바위 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이상하게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기분이 울적했다. 가끔은 눈물까지 났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웠고, 자신을 구박하던 매형을 편들던 누나까지 보고 싶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 같던 파보가 레베카에게 멸시당하던 장면과 피를 뿌리며 구르던 얼굴이 떠오르지 가슴이 답답해지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눈 옆으로 흐르는 눈물은 귀를 지나 바위 위에 떨어졌다.
 갑자기 세상에 자신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몰려왔다.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과 대화하고 정을 나누고 싶었다. 벌떡 일어서던 엘란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자신이 세상으로 나간다고 반겨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철저히 혼자라는 생각에 엘란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곧 어깨를 쫙 폈다.
 “그래! 카일이 있어. 난 혼자가 아니야.”
 
 산 밑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일이 올라오고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엘란은 늘 수련하던 바위에 가지 않고 마당에 앉아 마나 축적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마나를 들이마시고 아랫배로 유도해 마나홀에 가둔다고 생각하고 숨을 쉬었다.
 ‘마시고 축적하고 내뱉고, 마시고 축적하고 내뱉고.’
 엘란은 마나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몸속의 탁기를 내뱉었다. 마나는 들이마셔 가두었다 싶으면 흩어졌다.
 엘란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마시고 가둔다. 마시고 가둔다. 마시고 가둔다…….’
 순간 자기를 잊고 몸을 주변에 맡겼다. 그러자 마나가 마나홀로 모여들더니 흩어지지 않았다.
 엘란은 계속 호흡법을 수련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을 때 마나홀에 마나가 충만하게 쌓여 있었다.
 “해냈다!”
 엘란은 뛸 듯이 기뻤다.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저 잠깐 마나 축적을 한 것 같은데 벌써 하루가 지난 것이다.
 엘란은 다음날도 계속 마나 축적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으로는 마나가 모이지 않았다. 그 이상의 마나는 쌓이는 즉시 흩어졌다.
 하지만 엘란은 포기하지 않고 명상을 계속했다.
 삼일 후 카일이 다시 왔다.
 “축하한다. 마나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정령사가 된 거나 다름없다. 아직 한 가지 관문이 남아 있기는 하다만.”
 엘란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쉬운 일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겁낼 것 없다. 그저 정령과의 친화력에 대해 알아보는 것뿐이다. 이건 수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만약 친화력이 전무하다면 마법사로 진로를 수정해야겠지만 보통 조금의 친화력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어떤 정령에 대해서는 친화력이 전무할 수도 있지만.”
 카일의 자상한 위로의 말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친화력은 어떻게 검사하죠?”“별다른 검사법은 없다. 불러내서 무리 없이 나오면 친화력이 있는 것이고 아예 반응이 없거나 특히 힘이 많이 들면 친화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친화력만 있다면 정령을 불러낼 수 있나요?”
 엘란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래, 한 번 불러 보거라. 어떤 정령을 불러내고 싶으냐?”
 그때 무슨 예시라도 하는 것처럼 강한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요!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고 싶어요.”
 엘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서 몸 안의 마나와 주변의 마나를 공명시켜라! 그리고 전에 가르쳐준 주문을 외워라.”
 엘란은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바람을 느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바람의 정령이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 한 줄기 바람이 휑하니 불더니 엘란의 앞에 투명한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등에 작은 날개를 달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성결해 보였다.
 엘란은 자기가 불러낸 정령이 신기한지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계약을 맺어야지.”
 카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엘란은 실프를 유심히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실프여! 나와 계약을 해다오.”
 실프가 다가와 엘란의 손에 입을 맞추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엘란은 계약이 맺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벅찬 기쁨이 솟아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실프!”
 엘란이 조용히 속삭이자 바로 앞의 공기가 일렁거리더니 바람의 정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엘란은 자신이 불러낸 실프가 신기했던지 손 위에 올려놓고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카일이 지켜보는 것도,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었다.
 그런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카일은 엘란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직 배울 게 많으니, 이제 그만 실프는 보내주거라.”
 엘란은 실프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아쉬운 마음으로 그를 돌려보냈다.
 “겨우 실프 하나 불러낸 것 가지고 너무 좋아하지 마라. 아직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넌 이제 하급 정령 하나를 겨우 불러낸 것에 불과하니, 그렇게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러. 자 이제 다른 것을 가르쳐 줄 테니, 이리와 앉거라.”
 카일이 냉정하게 말하자 긴장한 엘란은 조심스럽게 카일의 앞에 앉았다. 엘란이 마주보며 앉자 등 뒤로 돌아가서 등에다 손을 대고 처음 마나에 대해 배울 때처럼 엘란의 몸에 마나를 넣었다.
 “지금 가르치는 것은 마나 운용법으로 마나를 몸 안에서 돌리는 기술이다. 이것은 마나 축적만큼이나 중요해서 상위 정령사로 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마나를 운용하면 몸에 생명력이 충만해지고 정신이 맑아질 뿐 아니라 힘도 세지고 쉽게 지치지도 않으며 피로도 쉽게 풀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령을 쉽게 부릴 수 있게 만들고 마나 소비도 줄인다는 것이다. 마나 축적과 마나 운용을 합쳐서 마나 수련이라고 부른다. 호흡 명상 축적 운용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면 상위의 정령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나 수련 중에는 위험하니 말은 하지 말거라.”
 카일은 엘란의 몸에 넣은 마나를 마나홀에 밀어 넣었다. 이질적인 마나가 들어오자 이미 마나홀에 있던 마나들이 그것을 거칠게 밀어냈다. 마나홀에 들어온 카일의 마나는 곧 앞쪽으로 흘러나와 배꼽을 지나 가슴에 이르더니 더 이상 나가지 못한 채 다시 마나홀로 돌아왔다.
 잠시 후, 이번에는 뒤로 흘러서 등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 쪽으로 방향을 잡은 마나는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게 나가다가 곧 벽에 부딪쳐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카일은 자신의 마나를 도로 뽑아내고 일어났다.
 “기억했느냐?”
 “예.”
 남의 몸에 마나를 넣어서 움직이는 것은 무척 힘들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라 카일의 얼굴은 납덩어리처럼 창백했다. 잘못되면 상대가 죽을 수도 있었다.
 “매일 운용해라! 물론 길은 이게 다가 아니어서 마나를 앞에서 뒤로 완전히 관통해서 돌릴 수 있게 되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정령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길은 어떻게 됩니까?”
 앨란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이 책에는 나머지 길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걸 보고 수련해라.”
 “예.”
 앨란은 카일이 주는 책을 공손히 받았다.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되었다.”
 카일의 느닷없는 말에 깜짝 놀란 엘란은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헤어지다니, 어디 가십니까?”
 “교대할 후배가 와서 난 롬바르드시로 간다.”
 롬바르드는 엘리오트 왕국의 수도이다. 엘란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슬픈 얼굴로 카일을 보았다.
 “섭섭해 할 것 없다. 어차피 헤어져야 할 인연인 것을……. 지금 수준에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익혀라! 땅, 물, 흙의 정령도 불러내서 계약해 보고 바람의 정령도 더 많은 수와 계약을 해라. 당장은 안 되겠지만 나중에 능력이 된다면 상위 정령도 불러내서 계약을 해보고.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너무 성급하게 하지 말고 차분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나 수련은 대단히 위험해서 잘못되면 폭주가 일어나서 심하면 죽고 가벼워도 폐인이 되는 수가 있다. 불러낼 수 없거나 부리기가 힘든 정령이 있다면 그건 너와 맞지 않는 정령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고 그 부분은 포기해라. 물과 불같은 상반되는 정령은 높은 수준까지 같이 익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하나를 주로 익히고 다른 건 아예 익히지 않거나 하급 정령 정도만 부리는 게 좋을 거다.
 책에 수련법과 정령술이 자세히 적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해 익히고,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거든 거기서 중단하고 더 이상 수련하지 마라. 혼자서 정령술을 익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니까. 알겠지?”
 “예.”
 “책에 간단한 마법도 약간 적혀 있으니 관심이 있거든 익혀보도록 하고.”
 “마법도 쓸 수 있습니까?”
 “마나를 느끼고 저장하고 공명시킬 수 있으면 마법도 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약간 맛만 보는 수준이지, 같이 수련할 생각은 마라.
 수련의 길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마무리 천재라도 두 개를 동시에 마스터하기는 불가능하다. 둘 다 익히려들다가는 자칫 죽도 밥도 되지 않기 십상이야. 검사와는 길이 전혀 다르니 검을 익힐 생각은 아예 말고.”
 카일은 그 외에도 많은 주의사항을 밤늦도록 가르쳤다.
 시간이 없다보니 간단히 설명하는데도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정령을 좀 부린다고 복수할 생각 마라. 아무리 시골 영주라고 해도 휘하에 수많은 기사와 병력이 있다. 설령 피터를 죽인다 해도 문제다. 평민이 귀족을 죽인 것이 알려지면 나라에서 널 죽이려고 많은 사라들이 파견될 거야. 아마 모르긴 몰라도 높은 현상금이 붙어서 현상금 사냥꾼이 평생 너를 따라붙을 거야. 내 입장까지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알겠습니다.”
 엘란은 공손한 얼굴로 순순히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피터는 꼭 내 손으로 죽일 겁니다.’
 엘란의 속을 모르는 카일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가르쳤는데 가르치고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아무튼 다행이다. 정령을 다룰 수 있으니 나중에 긴히 써먹을 수 있겠어.’
 “이제 그만 자거라.”
 엘란은 카일과 마지막 밤이다 보니 대화하고 싶어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카일의 엄한 얼굴에 한마디도 못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못 다한 이야기는 내일 일어나서 하지 뭐.’
 엘란은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정령을 불러냈을 때의 감동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누웠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을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자 살짝 눈을 떠 카일을 보았다.
 의자에 앉은 카일은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엘란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원래 엘란은 장난과는 거리가 먼 부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난을 치고 싶어도 칠 형편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매형의 갖은 구박을 받으며 눈치를 살폈고, 열 살에 팔려와 거의 노예 비슷한 생활을 했다. 유일한 친구이자 형인 파보는 자신을 보호하려다 죽었고, 카일은 그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여서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장난칠 생각이 들지도 않았으리라.
 살그머니 일어난 엘란은 카일이 보면 양피지를 확 뺏어 들었다. 카일은 양피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카일님, 이게 뭐에요?”
 엘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양피지를 흔들었다.
 퍽!
 카일의 주먹이 엘란의 얼굴을 후려쳤다.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엘란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카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양피지를 주워들고 엘란을 노려보았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고 숨은 거칠었다.
 엘란은 평생을 통틀어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처음이었다. 항상 사람 좋게 웃고 다니던 카일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등에 소름이 오싹 끼쳤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카일은 하급 정령 익스퍼터다. 그가 살기를 일으키자 기세에 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다. 카일의 얼굴이 무섭기도 했지만 무슨 큰 잘못을 한 게 아닌지 겁이 덜컥 났다.
 “무슨 장난이냐! 어서 가 자거라.”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의외로 차분한 음성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있는 카일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엘란은 침대로 가 누웠다.
 이미 잠은 백 킬로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카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왜 카일은 노예와 다름없던 자신을 구해주고 여러 가지를 가르쳤을까? 무슨 목적으로? 한번 든 의문은 꼬리를 이었다.
 엘란은 예전에 카일이 자신을 가르치면서 했던 말, 쓸데가 있어서 가르친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를 이용하려는 건가? 그러나 자신을 어디다 이용한다는 말인가?
 한참 머리를 굴리던 엘란은 카일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갈색 머리와 미소를 머금은 입. 미소를 떠올리자 카일을 의심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어쨌든 카일은 은인이었다. 자신을 구해주고 정령술도 가르쳐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직도 영주의 노예로 죽도록 일만하고 있을 터였다.
 엘란은 의심을 지웠다. 자신이 쓸데가 있다면 시키는 대로하면 되는 것이다. 목숨을 구해주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준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했다.
 엘란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마음에 벽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카일은 가고 없었다. 그가 가고 없는 걸 알게 되자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평상시같이 편한 얼굴로 카일을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책상위에는 메모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제는 내가 신경이 날카로워서 실수를 했나 보구나. 미안하다.
 여기서 수련하고 있거라! 나중에 자리가 잡히거든 데리러 오마.
 그럼 나중에 보자.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거라. 카일.>
 
 엘란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종이의 옆에는 갈색 가죽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가 하나 놓여 있었다. 주머니를 풀어보니 5실버가 나왔다. 딱히 갈 곳도 없는 엘란은 카일의 말대로 여기서 계속 수련하기로 마음먹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늘 수련하던 바위 위에 앉았다. 어젯밤의 일을 머리에서 떨쳐버리려는 듯 수련에 매달렸다. 마나 축적을 두 시간하고 카일의 몸속에서 마나는 움직이던 일을 떠올리며 운용에 들어갔다.
 마나홀에서 마나를 뽑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잘 안되네. 다시 한 번.’
 그러나 저녁때까지 용을 썼지만 보람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수련하는 것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카일이 준 책을 펼쳤다.
 앞에는 주의사항들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 이미 들어 잘 아는 내용이었다.
 몇 장 넘기자 인체에 마나길이 자세히 그려진 그림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몸과 비교해 가면서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 뒷장으로 넘겼다.
 뒤에는 정령을 이용한 공격과 방어를 정령별로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고, 마지막에는 간단한 마법주문과 해설이 있었다.
 그날 이후 엘란의 일과는 언제나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오전 내내 마나 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정령을 불러내어서 계약을 시도하거나 정령 부리는 것을 연습했다.
 정령을 소환해서 부리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혼자 사는 외로움도 달래 주었다. 그 반면에 마나 수련은 지루하고 힘이 들었다. 수련의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고 성과가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점점 발전한다고 굳게 믿고 수련에 임했다. 밤에는 책을 보거나 정령을 불러서 같이 놀았다.
 엘란은 정령과 놀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혼자 살자니 외롭고 무서웠다. 그때마다 정령들은 큰 힘이 되었다. 그에게 하늘아래 친구라고는 정령뿐이었다. 가끔씩 우울한 기분에 젖어서 하루 종일 멍하니 누워 있을 때면 파보가 생각나고,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럴 때마다 정령과 침대에서 뒹굴다 잠이 들었다.
 엘란은 몰랐지만 정령과의 놀이가 친화력을 높여서 빠른 성취를 가능케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엄격한 사승 관계로 정령을 진지하게 대했으며 같이 논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아무래도 친화력이 떨어졌다.
 엘란은 다섯 달을 노력한 후에야 겨우 마나길을 뚫을 수 있었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엘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따라 어쩐지 예감도 좋았고, 마나홀의 마나도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나가 점점 활발해지는 것이 느껴지며 앞쪽으로 움직였다. 미약한 거리였지만 분명히 나아갔다.
 엘란은 너무 기뻐서 고함을 쳤다.
 “됐다! 됐어!”
 흥분해서 외치자 마나가 돌아가 버렸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마나를 운용했다. 조금씩 유동하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자신감이 생긴 엘란은 오후에는 딴 정령과의 계약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가서는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몸속의 마나를 돌린다고 생각하면서 주위의 마나와 공명시켰다. 그리고는 조용히 주문을 영창 했다.
 “물의 정령이여! 나 엘란은 그대와 벗하고자 하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해볼까.’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령과의 친화력이란 이것을 말하는구나. 자신과 맞지 않으면 익히기가 힘들다더니.’
 실망스럽게도 물의 정령과는 친화력이 낮아서 밤늦게까지 운디네를 불러 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안 되자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은 불을 피워 놓고 불의 정령을 불러 보았다. 주문을 외우고 불을 노려보자 조그만 도마뱀같이 생긴 것이 기어 나왔다. 몸 주위에서 불꽃이 넘실거리는 것이 상당히 신기했고,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 게 아주 귀여워 보였다.
 엘란이 불의 정령인 샐라멘더를 뚫어져다 쳐다보자 그도 엘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말을 하라는 것 같았다.
 “샐라멘더여! 나와 계약을 해다오!”
 샐라멘더는 조용히 앞으로 오더니 입에서 작은 불꽃을 토해내고 사라졌다. 샐라멘더는 계약의 표시도 무척 귀여웠다.
 “샐라멘더!”
 두 손을 들어 크게 외치자 불꽃의 정령이 다시 나타났다. 엘란은 정령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엉겁결에 자기 머리 위에 띄웠다가 뜨거운 열기에 기겁을 했다.
 “아이구!”
 엘란은 깜짝 놀랐다.
 “대머리가 될 뻔했네.”
 아닌게 아니라 머리 중앙의 머리카락이 반쯤 타들어 가서 대머리처럼 보였다.
 불을 다룰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샐라멘더와의 거리를 좀 벌린 후, 크기를 조정해 보았다. 엘란이 명령을 내리자 샐라멘더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마나가 급속하게 빨려 나갔다.
 마나를 더욱 끌어올리자 정령의 주위가 불꽃으로 넘실거렸다. 일순간 정령의 배가 아주 뚱뚱해졌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펑
 마나가 끊기자 샐라멘더는 터지듯이 폭발하며 돌아가 버렸다.
 엘란은 지쳐서 잠시 주저앉았다. 처음 부려보는 불의 정령이라 그런지 힘이 많이 들었다. 마나 수련을 다시 한 후 이번에는 흙의 정령을 불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엘란은 주위의 흙을 쥐고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훍의 정령을 불렀다.
 하지만 흙의 하급 정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의 정령을 부르던 때와 달리 한 시간 정도 애타게 불러도 오지 않자, 그는 깨끗이 포기했다.
 엘란은 바람의 정령과 가장 친화력이 뛰어났고, 그 다음으로 불의 정령과 친화력이 높았다. 불의 정령은 바람의 정령보다는 마나 소모도 심하고 제어도 잘되지 않았다. 물의 정령과는 친화력이 약했고, 흙의 정령과는 친화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산 속에 틀어박힌 엘란은 오직 수련에만 열중했다.
 다른 할 일도 없었고 주변에는 사람도 없었다. 외롭고 슬픈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했다. 엘란이 미친 듯이 정령술에 매달리는 것은 출세 같은 세속적 욕망이나 정령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학술적 이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간혹 피터에 대한 들끓는 복수심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보다는 정령과 노는 것이 즐거웠다. 정령은 기억에도 없는 부모와 파보를 대신한 가족이자 친구였고, 생활의 동반자였다.
 
 ***
 
 마나 축적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어느 정도 상승하자 아무리 해도 그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지겹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으나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수련을 계속했다.
 한 단계를 넘어서면 될 것도 같은데 그 한 단계 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이 년쯤 지나자 엘란은 실프 다섯을 부릴 수 있게 되었고, 샐라멘더 둘과도 계약을 맺었다. 반면 물의 정령과는 한 달 동안 씨름한 결과 겨우 하나와 계약을 맺긴 했지만 여전히 제어는 서툴렀다. 흙의 정령은 겨우 불러낼 수는 있었으나 계약에는 실패했다. 엘란은 흙의 정령은 완전히 단념했다. 물의 정령도 더 이상 계약은 시도하지 않고 마나의 운용에만 몰두했다.
  마나 운용은 진전이 있어서 가슴까지 마나가 움직였다. 그에 반해 뒤쪽으로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마나를 뒤로 보내는 게 배는 힘들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그는 책에 적힌 마법을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다.
 간단한 마법이지만 익혀두면 쓸모가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마법은 단 두 가지만 익혔다. 주위를 환하게 하는 라이트 마법과 슬립 마법.
 비가 숲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봄을 재촉하는 봄비였다. 엘란은 빗속에서 실프를 부렸다. 빗속을 날아다니는 실프는 봄의 여신 같았다. 실프를 강렬하게 움직이자 엘란의 주위에는 온통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탁!
 탁!
 실프가 빗속을 뚫고 날아가서 나무를 후려갈겼다.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흔들렸다. 실프가 쉴 새 없이 나무를 가격하자 나무는 곧 쓰러질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지끈!
 나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엘란은 나무가 쓰러지자 실프 셋으로 주위에 베리어를 쳤다. 그리고 실프 둘로 바위를 들어 올려서는 자기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윙
 바위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엘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바위와 실프가 충돌했다. 바위는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휴!”
 엘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베리어의 강도를 실험해 본 것이다. 엘란은 더 큰 바위를 들어 올려서는 머리 위에 띄운 후 마음을 굳게 먹고 바위를 놓았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바위가 튕겨져 나갔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실프도 돌아가 버렸다.
 울컥!
 엘란은 피를 토해냈다.
 바위와 실프가 충돌했을 때 힘을 베리어가 견디지 못하고 몸속까지 충격이 전해진 탓이었다. 미련한 수련 방법으로 부상을 입은 엘란은 연습을 그만두었다.
 몸이 회복되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는 실프가 얼마나 타격을 가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실프!”
 엘란은 부릴 수 있는 실프 다섯을 모두 불러서, 저번에 머리 위에 떨어뜨렸던 바위를 실프로 쳤다.
 쾅!
 돌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윽!”
 튀어나온 돌 하나가 정통으로 배를 가격했다.
 엄청난 통증을 견디지 못한 엘란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마나가 끊겨서 실프는 돌아가 버렸다. 한참을 엎드려 있자 통증이 조금씩 가셨다.
 엘란은 좋은 교훈 하나를 얻었다. 무조건 공격을 해서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앞으로는 자기 몸 주위를 지키는 정령을 두고, 공격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정령을 불러 하나는 자기 몸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바위를 때렸다.
 쾅! 쾅!
 돌들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몸을 둘러싼 실프에 막혀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계속해서 때리자 큰 바위가 두 개로 갈라졌다.
 엘란은 완전히 기진맥진해 버렸다.
 그는 외로움을 수련으로 달랬다. 가혹할 정도로 몸을 움직였고, 산도 열심히 탔다. 하루에 몇 개의 산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마을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태양이 뜨겁게 이글거리는 어느 날.
 엘란은 샐라멘더를 소환했다. 태양이 내뿜는 열기에 샐라멘더가 가세하자 주위는 찜통을 방불케 했다.
 “앗 뜨거!”
 별 생각 없이 샐라멘더를 몸 주위에 둘렀다가 옷에 불이 붙어버렸다. 당황한 엘란이 이리저리 마구 뒹굴었지만 불을 쉽게 꺼지지 않았다.
 엘란은 퍼뜩 운디네 생각이 났다.
 “운디네!”
 물의 정령이 나타나자 다짜고짜 그녀를 껴안았다.
 치이익!
 흰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꺼졌다.
 그러나 옷은 꺼멓게 그을리고 곳곳에 구멍이 생겨서 더 이상 입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걸 어쩌지?”
 엘란은 울상이 되었다. 가뜩이나 낡은 옷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려서 입던 옷은 작아서 모두 버렸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근처 마을에서 몰래 가져온 옷이었다. 밤에 내려가서 옷을 가져오고는 1실버를 놓고 온 것이다. 엘란은 웃옷을 벗고 샐라멘더와 자기의 거리를 재 보았다.
 “가만……, 책에는 샐라멘더를 정령사가 만진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왜 뜨겁지?”
 갑자기 의문이 생긴 엘란은 가만히 샐라멘더에 손을 가져갔다.
 “앗 뜨거!”
 엘란은 얼굴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음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그는 항상 뜨거운 샐라멘더를 상상하고 있었다.
 엘란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나한테는 뜨겁지 않다. 나한테는 뜨겁지 않다. 전혀 뜨겁지 않다’
 그는 조심스럽게 정령에게 손을 쭉 뻗었다. 신기하게도 뜨겁지 않았다. 두 손에 올려놓기까지 했는데도 불꽃이 이글거리는 정령이 전혀 뜨겁지 않았다. 풀밭에 올려놓았는데도 불이 붙지 않았다.
 “타올라라.”엘란이 신이 나서 외치자 샐라멘더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샐라멘더가 풀 위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화르륵
 건조한 날씨에 풀밭은 금방 불이 붙었다.
 “이런.”
 운디네를 불러낸 엘란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마터면 건조한 여름날에 대형 산불이 날 뻔했다. 불을 잡느라고 뛰어다닌 결과 옷은 아예 누더기가 되어 있었고 얼굴은 검댕이 투성이었다. 씻으러 냇가에 갔다가 자기 꼴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후로도 혼자 하는 수련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엘란은 어떻게 하면 정령을 효율적으로 부릴까 매일 생각에 잠겼다. 스승이 닦아놓은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다른 정령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령과의 놀이와 끝없는 사색과 노력 덕분에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샐라멘더!”
 샐라멘더로 베리어를 치고 거기에 실프를 충돌시켰다.
 펑!
 두 정령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터져 올랐고, 바람은 주위를 미친 듯이 휘돌았다.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해보았다.
 펑!
 확실히 샐라멘더가 실프에게 밀렸다. 실프의 조정이 더욱 능숙한 탓이다. 나중에는 실프와 샐라멘더끼리 편을 갈라 싸움을 붙여 보기도 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엘란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어른으로 자라고 있었다.
 열일곱 번째 생일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는 왠지 울적했다. 수련을 쉬고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다.
 카일이 그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카일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4장 첫 번째 모험
 
 “엘란 잘 있었니?”
 카일은 이마에 생긴 한줄기 주름을 제외하면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엘란은 환한 미소로 카일을 반겼다. 한참을 말없이 보던 카일이 엘란을 안았다.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고 포옹을 푼 그는 호기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 정도 수련했니?”
 엘란은 대답 없이 정령을 불렀다.
 “실프!”
 휭
 투명한 막이 일렁거리더니 실프 다섯이 나타나 허공을 수놓았다.
 엘란은 실프를 자유자재로 부렸다. 정령이 사방을 누비자 강렬한 바람이 두 사람의 주변을 휩싸고 돌았다.
 순간 카일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카일에게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고 싶었던 엘란은 정령 부리는 일에 열중해 있어서 그 눈빛을 볼 수 없었다.
 “대단하구나! 하급 정령 익스퍼터의 단계를 훌쩍 넘어선 것 같구나.”
 엘란은 정령을 돌려보내고 환하게 웃었다.
 “카일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카일이 물끄러미 엘란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랑 같이 산을 내려가자!”
 “롬바르드로 가는 겁니까?”
 “아니다. 먼저 들를 데가 있다.”
 엘란은 카일을 따라서 산을 내려갔다. 짐이라고는 남루한 옷 한 벌이 전부였다.
 
 ***
 
 눈이 내렸다.
 온 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새기는 것은 꽤나 운치가 있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순백의 눈은 엘란의 마음을 차분하게 정화시켜 주었다.
 걸어서 마을로 들어간 엘란과 카일은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하자마자 바로 길을 떠났다. 영지를 벗어나는 엘란의 마음은 담담했다. 미래의 불안이나 걱정도 없었고, 흥분된 감정도 없었다. 피터를 두고 떠나는 것이 섭섭할 뿐이었다.
 영지를 떠난 일행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차가운 겨울은 여행을 떠나기 적합한 시기는 아니어서 매서운 칼바람이 귀를 아리게 만들었다.
 엘란은 추위를 몰아내려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나가 한 바퀴 돌자 차가운 한기가 몸에서 떠나갔으나,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다시 몸이 굳어갔다. 그들은 추위를 움직임으로 몰아내려는 듯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두 줄기 발자국이 설원 위에 길게 찍혔다.
 “목적지는 어디죠?”
 입에서 나온 숨은 차가운 공기와 만나 하얀 김으로 바뀌었다.
 “엄리처 지방으로 간다.”
 엄리처는 엘리오트 왕국과 피요르드 왕국 사이에 있는 접경 지방이었다.
 “멀군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다문 엘란은 묵묵히 걸었다. 왜 그 먼 지방까지 가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낙조가 하얀 설원 위에 드리우자 마치 붉은 카펫이 깔리는 것 같았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발을 멈춘 둘은 모닥불을 피운 후 저녁을 들었다. 빵은 금세 얼어붙어 돌멩이처럼 딱딱했다. 딱딱한 빵을 넣고 우물거리자 칼바람이 전신을 어루만졌다. 물을 끓여서 한 잔 마시자 온몸에 훈기가 도는 것이 살 것 같았다.
 카일은 말없이 엘란에게 담요를 하나 내주었다. 스트빌라이산 양모로 만든 두꺼운 담요였다. 엘란은 망토를 여미고 담요로 몸을 둘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엘란이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는 카일에게 물었다.
 타닥
 카일이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시선으로 모닥불을 헤집자 굵은 불똥이 튀었다.
 “그냥 저냥 지냈다.”
 카일은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다르넨 지방에 내려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었는데, 삶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지낸 육 년간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령술은 전혀 진전이 없어서 여전히 하급 정령 익스퍼터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에 비해 나이가 반밖에 되지 않는 엘란이 그 단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속에서 질투가 들끓는 것을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시드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요즘에는 비위를 맞추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게다가 시드의 망나니 자식들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학을 뗄 지경이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시드가 저술해 놓은 정령술 책도 몰래 훔쳤다. 들키는 날에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일이었다.
 ‘꼭 찾아야 한다.’
 카일은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했다. 성공만 한다면 정령술은 때려치우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살 작정이었다.
 카일이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가 아니자 엘란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한 겨울의 노숙에 뼈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모닥불은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엘란은 샐라멘더로 다시 불을 붙이고 나뭇가지를 넣었다. 금세 불길이 솟았다. 삼십 분 정도 불을 쬐자 몸에 박힌 한기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는 몸이 어느 정도 녹자 좌정한 후 마나 수련에 들어갔다. 마나홀을 중심으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며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수련을 끝내고 눈을 뜨자 두 손을 비비며 모닥불을 쬐고 있는 카일이 보였다.
 카일은 눈을 냄비에 담아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물이 끓어오르자 말없이 아침을 먹고 바로 일어섰다. 갈 길이 멀었다.
 다르넨은 엘리오트 왕국의 서쪽 변경이고 엄리처는 동쪽 변경이어서, 엄리처까지 가려면 왕국을 완전히 가로질러야 했다.
 엘란과 카일은 쉬지 않고 걸었다. 나흘을 더 움직인 후에 보르노스시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한겨울의 첫 여행이 엘란에게는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필요한 물품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보르노스시는 발칸대제가 남부지방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건설한 계획 도시였다. 발칸대제의 제국은 허망하게 멸망했지만 이 도시는 살아남아서 여전히 지방중심 도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엘란에게 이렇게 큰 도시는 처음이었다. 시장을 지날 때는 붐비는 사람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시장을 지나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제야 겨우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여행 중이신 모양이죠? 안락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준비된 여관을 알고 있는데 제가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더벅머리 소년이 카일의 소매를 붙들며 말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었는데 전체적으로 꽤나 익살맞게 생겼다. 옷은 남루했지만 깨끗이 세탁되어 있었다.
 “앞장서라.”
 엘란과 카일은 소년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중심부는 계획에 의한 건축이라 모양도 반듯하고 유서 깊은 건물도 많았지만, 주변부는 나중에 무계획적으로 들어선 것이라 어수선하고 복잡했다. 소년의 안내를 받은 그들은 양의 창자같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고 돌아 아담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관은 아담한 이층 목조건물이다. 나무로 된 간판에 ‘여행자의 친구’란 글자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낡았지만 안팎으로 깨끗한 건물이었다.
 “여행자 두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소년이 큰소리로 외치자 카운터 안에서 뚱뚱한 여자가 나왔다.
 앞치마로 손을 닦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겹게 보였다.
 “어서 오세요, 손님.”
 아줌마가 친절하게 반겼다.
 “하루만 자고 갈 거요.”카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카일은 숙박부를 쓰고 열쇠를 받아 들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식사는 이 층으로 가져다주시오.”
 아줌마가 소년에게 동전 두 개를 건네자 소년은 동전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넣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소중한 돈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엘란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침대는 너무 푹신해서 불편한 감마저 없지 않았다. 산에서 쓰던 침대는 나무침대라 상당히 딱딱했었다.
 잠시 후 식사가 들어왔다. 스프는 그저 그랬지만 빵과 닭고기는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식사를 하고 대충 씻은 후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한참을 자던 엘란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는 조심조심 일어나 가부좌를 틀었다. 전신에 기운이 충만해지는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온 도시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유난히 검은 밤은 농노의 앞날만큼이나 캄캄해 보였고,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엘란은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는 그 위에 앉아 명상에 들었다. 마나를 들이마시자 마나홀이 충만해졌다. 뿌듯한 느낌에 터질 것 같았다. 수련 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터질 것 같은 충만감에 당황한 엘란은 수련을 멈추었다.
 가부좌를 풀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여름날의 소나기 같은 청량감이 심신을 휘감았다.
 장시간 그런 감각을 즐기던 엘란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따뜻한 햇살이 얼굴에 비추고 있었다. 겨울이 된 후로 처음 느끼는 눈부신 햇살이었다.
 마나 수련을 하고 있던 카일은 십분 정도 지나자 눈을 떴다.
 “내려가 아침 먹자.”
 씻고 내려가자 벌써 음식이 나오고 있었다.
 야채 스프와 계란프라이, 빵, 베이컨이 나왔다. 건물은 낡았지만 소년의 말대로 맛 하나는 좋았다.
 “아무래도 걸어가기는 무리일 것 같고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가자.”
 “저, 말을 못 타는데요!”
 엘란이 당황해서 말했다.
 “가면서 배우면 된다. 이런 겨울에 걸어서 엄리처까지 가는 건 무리야.”
 식사가 끝나고 짐을 챙겨는 일행은 숙박비를 지불하고 여관을 나섰다. 그들은 말을 사려고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돌았다.
 물어물어 도착한 마시장은 시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마시장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크기도 천차만별이고, 색깔도 다양해서 검은 말부터 갈색 말,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까지 없는 게 없었다.
 “헤헤, 말을 사러 오셨습니까?”
 말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사내가 다가왔다. 옅은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왕가 사람들과 같은 머리 색깔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듯 버릇처럼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다.
 “어떤 말이든 말만 하십시오 전설의 명마부터 짐말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사내는 침을 튀겨가며 너스레를 떨고 다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순한 말로 두 마리 골라주게. 전설의 명마는 필요 없고 먼 여행을 할 수 있는 튼튼한 말이면 되네.”
 밀고 당시는 약간의 실랑이 끝에 5골덴에 말을 샀다.
 엘란이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고삐를 당기자 말이 순순히 따라왔다. 말들을 끌고 공터로 가서는 말타기를 배웠다.
 “겁먹지 마라! 왼발을 겸자에 끼우고, 안장을 꼭 잡은 후 단숨에 올라라.”
 긴장한 엘란이 말을 타다 실수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히히힝!”
 깜짝 놀란 말이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고, 그 바람에 엘란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한 번 구르고 나자 오기도 생기고 긴장도 풀렸다. 말과 한참을 씨름한 끝에 어느 정도 말타기가 익숙해지자 공터를 벗어나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엘란의 침낭과 두터운 솜옷을 산 일행은 그곳을 떠났다. 시를 벗어나자 엘란과 카일은 말에 올랐다. 집중적인 연습에도 불구하고 엘란의 자세는 상당히 어색했다. 고삐를 잡은 손에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고, 말의 몸통을 감싼 다리에도 힘을 너무 많이 주었다. 그 덕에 말과 엘란 둘 다 불편했다. 그에 비해 카일은 말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둘은 동부대로를 따라 달렸다. 동부대로는 많은 다른 것들이 그렇듯 발칸대제의 유산으로 피요르드 접경까지 뻗어있는 엘리오트 왕국 교통의 한 축이었다.
 “와우, 천 년 전에 만든 도로 같지 않군요.”
 엘란은 감탄사를 발했다.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도로야, 코끼리 다리만큼이나 튼튼하지.”
 “드래곤이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던 데 사실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대제는 드래곤도 부렸으니까.”
 “왜 드래곤 같이 강대한 존재가 발칸대제의 명령에 따랐을까요?”
 “글쎄…… 친구로 사귀었다는 말도 있고 힘으로 굴복시켰다는 말도 있지. 신의 선의에 힘입었다는 말도 있고.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맹약의 검에 드래곤이 복종한다는 것밖에 알려진 건 없으니까. 하나 확실한 것은 광룡 카나이폴런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륙의 통일도, 오십 년간의 통치와 무수한 업적도 불가능했을 거라는 점이야.”
 카일은 열띤 어조로 대답했다. 아침만 해도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더니, 오늘따라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드래곤을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없다. 요새는 드래곤의 섬에서 나오는 드래곤이 거의 없었으니까. 기록에 의하면 삼백 년 전에 블루 드래곤 한 마리가 스트빌라이에서 행패를 부린 이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카나이폴런은 살아 있을까요?”
 “살아 있겠지. 드래곤은 수명이 기니까. 왜 보고 싶으냐?”
 엘란의 눈이 반짝였다.
 “예,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어요.”
 “평생 안 보는 게 좋을 거다. 보는 순간 황천길 가기 십상이니.”
 그들은 하루 종일 동부대로를 달렸고, 한밤이 되어서야 야영에 들어갔다.
 엘란은 허리 엉덩이 허벅지 할 것 없이 모두 쑤시고 아파서 멀쩡한 곳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계속 타다보면 익숙해 질 거야.”
 카일은 힘들어하는 엘란에게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들은 샐라멘더를 소환해 모닥불을 피운 후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침낭에 들어가서 담요로 몸을 두르자 곧 훈훈해졌다.
 엘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자신의 몸을 뽐내듯 반짝거렸다. 엘란은 별을 헤아리다 잠이 들었다.
 여행은 상당히 지루했다. 계속 말을 달리다 말이 지치면 내려서 걷거나 휴식을 취했고, 밤이 되면 적당한 곳에서 노숙을 했다. 가끔씩 식량을 조달하러 마을에 들르는 것 이외에는 사람이 사는 곳을 피했다.
 카일은 점점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가끔씩 흥분해서 주먹을 쥐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는 것이 엘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보기에 대단히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엘란이 물으면 그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엘란은 길을 가는 도중에 수련하면서 느꼈던 의문을 물었다.
 카일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낯을 붉혔다. 이미 엘란은 그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 사실은 카일의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보험을 드는 기분으로 가르쳤던 무지렁이 녀석이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자 질투가 불타올랐다. 그는 엘란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몰랐다. 그저 재능을 타고 났다고만 생각했다.
 그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엘란은 질문을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둘 사이에서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엘란은 카일의 불편한 심사를 눈치채자 같이 여행하기가 곤혹스러웠다. 대화는 점점 줄어들어서, 말 한마디 안 하는 날도 있었다. 침묵 속에서 계속된 여행은 엘란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노숙에는 점차 익숙해졌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갈수록 더했다.
 엘란은 여행이 어서 끝나기를 빌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달성되면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엘란은 일이 잘 풀리기를 진심으로 빌었고 자신이 도움이 되기를 소망했다. 이렇게라도 신세를 갚으면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도 강행군이었다.
 엘란은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아침마다 틈틈이 수련을 계속했다. 마나 축적을 하고 운용을 하면 피곤이 풀리고 힘이 솟았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오랜 여정으로 말도 능숙하게 탈 수 있게 되었다.
 엄리처 지방에 도착한 것은 말을 달린 지 두 달 반만의 일이었다.
 엄리처는 엘리오트와 피요르드의 접경지역으로 피레넨 산맥이 자연스럽게 국경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지방이었다.
 동부대로는 피레넨 산맥에서 끝이 났다.
 도시로 들어가 말을 팔아 식량과 물품을 구입한 그들은 곧장 피레넨 산맥으로 들어섰다. 눈치를 보아하니 카일의 목표가 그 산맥 어디인 모양이었다.
 피레넨 산맥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산 위에 산이 있고 골 아래 골이 있었다. 중첩된 산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하늘까지 닿을 듯했고, 들어오는 빛은 나무들이 모두 먹어치웠다. 그나마 희미한 빛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낮은 턱없이 짧았다. 봄이 지척까지 다가왔지만 깊은 산중의 해는 뜨기가 무섭게 떨어졌다.
 페레넨 산맥 안은 낮이고 밤이고 늘 어두웠다. 신의 힘에 맞선 용들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라는 피레넨 산맥. 용신전쟁 때 드래곤들이 몰살된 지역이라는 전설이 무색하지가 않았다.
 전설은 당시 삼일 밤낮을 벌겋게 물들였다고 노래했다. 가장 높은 주봉 카르자나는 신에 대항한 드래곤로드 카르자나의 시체라고 전해지며, 그 주변을 싸고도는 험준한 산들도 모두 드래곤들의 시체라 했다.
 또 카르자나가 그 거대한 몸을 바닥에 뉘었을 때 하늘에서는 별이 떨어져 내렸고 삼 일 동안 핏빛 비가 내렸다고 했다.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드래곤들의 고통에 찬 비명은 지옥의 유부까지 들렸다고 했다. 용의 살이 썩어 몬스터가 되었다는 전설은 음유시인들이 즐겨 노래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 전설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보았다. 드래곤들이 강대하다고 하나 감히 신들에게 대항할 만큼의 힘이 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엘란은 피레넨 산맥의 위용에 압도당했다. 위대한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고생하며 달려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산맥은 아름다웠다.
 산맥을 따라 여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엘란은 잠을 자기 전에 계속 마나 수련을 했다. 페레넨 산맥은 특히 공기가 맑고 마나가 많았다. 정말 드래곤들의 마지막 숨결이 닿아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엘란은 차분한 마음으로 호흡했다. 깊고 길게 마나를 마시고 가늘고 짧게 탁한 기운을 내뱉었다. 마나홀이 뜨거워지며 충만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다시 뿌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보르노스시 이후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감각이었다.
 이번에는 호흡을 끊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어느 순간 감각이 몸 밖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 느껴지고 몸을 살랑이는 바람과 나무의 숨소리가 들렸다.
 카일의 고른 호흡도 들렸고,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노랫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엘란은 흐르는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 그의 정신은 드높은 창공을 누볐다. 바람의 정령들이 손짓을 했다. 정령과 함께 엘란은 날아다녔다. 정령들은 엘란을 간질이기도 하고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 수련을 한 엘란은 몸을 점검하다 깜짝 놀랐다.
 마나홀이 거의 두 배 이상 커져 있고 마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루 만에 마나양이 무려 네 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엘란이 다시 한 번 마나 축적을 시도했다. 주변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면서 그의 몸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엘란의 몸 밖으로 분수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급격한 마나 요동 때문에 카일이 깨어났고, 엘란은 마나 축적을 멈추었다. 이미 마나는 어제에 비해 크게 늘어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 단계를 훌쩍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
 카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엘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복잡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아니, 어떻게 벌써…….’
 엘란은 이미 카일이 늘 열망해오던 경지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질투와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엘란은 그런 카일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그는 카일을 믿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카일은 현재 자신의 곁에 남은 유일한 친인이었다.
 엘란은 계속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으로 운용했다.
 마나가 성난 망아지처럼 개척된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렇게 내달리던 마나가 가슴 부근에서 탁 막혔다. 이어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어느 순간이었다. 막힌 둑이 터지듯 가슴속으로 길이 뻥 뚫렸다. 엘란은 벅찬 희열감에 사로잡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마나는 인중에 이르러 힘이 다했다.
 마나를 회수한 엘란은 그것을 뒤로 돌려보았다. 다시 힘을 얻은 마나가 날뛰기 시작했다. 뒤통수까지 마나의 길이 뚫렸다. 그러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어찌해도 뚫리지 않았다. 어질어질한 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거기에서 운용을 멈추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령들을 불러내서 실프 다섯, 샐라멘더 셋과 계약을 했다. 내친 김에 땅의 정령과도 계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볼일보고 뒤를 안 닦은 것 같은 묘한 표정으로 카일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자.”
 카일이 냉랭하게 말했다.
 엘란은 서둘러 잠자리를 정리하고 카일을 따랐다. 그가 정신없이 수련에 몰두한 사이 하루가 더 지나 있었다.
 “서둘러!”
 카일이 다시 재촉했다. 그는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자 넓은 빈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었다.
 카일은 빈터를 가로질러 어느 바위 앞에 멈추었다. 바위는 카일의 키보다 약간 더 컸다 그는 품에서 양피지 조각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바위를 군데군데 만졌다.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카일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엘란의 눈이 반짝였다.
 ‘저, 양피지는 우리가 헤어지던 밤에 몰래 보던 그 양피지로군.’
 엘란은 그날 밤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 낡아서 하늘거리는 양피지는 그때의 양피지가 분명했다.
 그그그긍.
 별안간 바위가 옆으로 밀려났다.
 엘란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지?’
 자세히 살폈지만 갈색의 바위는 흔히 산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으로 특별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기긱.
 얼마쯤 움직이던 바위가 멈추었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틈이 생겼다.
 ‘열리다 만 거야, 원래 이만큼만 열리는 거야?’
 엘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카일은 망설임 없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엘란도 얼른 그를 따라 들어갔다.
 안은 캄캄했다.
 “라이트!”
 카일이 마법을 시전하자 밝은 빛 덩어리가 앞을 비추었다.
 곧 장방형 모양의 석실이 드러났다. 석실의 안쪽에는 아치형의 입구가 보였는데 위에는 어린애가 휘갈긴 낙서처럼 삐뚤빼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들어오면 죽는다.>
 
 
 다음에 계속...

댓글(4)

Soco0oL    
1빠
2016.03.05 17:00
캬리    
내가 중학교때 처음 본 판소...
2017.02.24 18:27
코즈    
다시 읽어보는 대하소설 명작 엘란
2019.04.28 11:16
13572468    
멋진글이 이제올라왔네요 정구작가님 뭐하신데요 요즘글쓴것못봤네요 좀쓰시지?
2019.11.16 19:50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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