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무림천추 [E]

무림천추 1권-1

2015.01.09 조회 800 추천 4


 서장(序章).
 
 1. 천년흥륭기(千年興隆期)
 
 동굴도 아니고 석실은 더 더욱 아니었다.
 벽은 돌로 이루어졌고, 돌의 표면은 의미 모를 붉은 글씨들로 가득하다는 것만이 겨우 보였다.
 위도 어둡고 아래도 어두웠다.
 상하(上下)와 사방(四方), 육방(六方)이 모두 어두웠다.
 돌로 이루어진 둥근 천장이 외부의 빛을 모두 차단해 어둠만이 존재하는 천외(天外)의 공간!
 굵디굵은 다섯 개의 기둥이 중앙의 제단을 옹위(擁衛)하듯 서 있었다.
 어둠은 둥근 천장의 선을 타고 기둥을 감돌아 제단을 향해 넘실대며 흘렀다.
 제단(祭壇) 위!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나마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은 금경(金鏡)이 발하는 금광(金光) 덕이었다.
 천상의 빛인 양, 보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는 기이한 광채!
 금경(金鏡) 하나로 인해 실내의 괴괴한 어둠이 귀기로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상서로워 보였다.
 거울이 놓인 제단의 앞!
 미미한 밝음이지만 자세히 본다면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리가 서서히 들리고 있음도.
 청아(淸雅)한 한 줄기 음성이 어둠을 갈랐다.
 “삼가 신조문의 팔 대 제자 제갈수(諸葛修)가 선조들의 덕을 빌고자 합니다.”
 말과 동시에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부적(符籍)!
 그리고 부적이 타오르며 발하는 신화(神火)!
 천지간에서 가장 순수(純粹)한 불인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의해 열여덟 장의 부적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빛이 일어나자 곧 실내의 정경이 확연히 드러났다.
 좌우에 각각 아홉 개씩의 부적을 들고 있는 사람!
 불타는 부적의 빛이 그가 음양(陰陽)의 문(紋)이 새겨진 도포(道袍)를 걸친 사십 가량의 중년인임을 알게 했다.
 그의 두 팔이 좌우로 엇갈리며 부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불타는 열여덟 개의 부적!
 열여덟 개의 광구(光球)는 살아 있는 생명인 양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떠가는 광구가 향하는 곳은 제단 주위에 늘어선 일곱 개의 신상들!
 빛이 그 신상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빙빙 돌기 시작했다.
 “윤광회명(輪光回命)!”
 중년인의 낭랑한 외침이 일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빙글!
 일곱 신상의 눈이 살아 있는 듯 열리며, 실내의 중앙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향해 몸을 돌렸던 것이다.
 동시에, 열네 개의 눈에서 눈을 멀게 할 듯한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번쩍!
 중년인은 양손을 들어 열네 줄기의 빛을 맞이했다.
 “신조문(神照門) 일천년의 도력(道力)을 모아 천조금경(天照金鏡)의 뜻을 묻고자 하니, 금경은 나의 물음에 부디 답을 내리시라!”
 모든 빛을 모은 양, 그의 두 눈에서 열네 줄기의 무한광휘(無限光輝)가 금경을 향해 뻗었다.
 웅-!
 금경은 빛을 받자 스스로 울기 시작했다.
 진동(振動)하는 것이다.
 중년인은 격동한 듯 금경을 보며 말했다.
 “이제 천년 만에 하늘의 옥추문(玉樞門)이 열리며 천상(天上)의 온갖 강한 기운들이 동시에 땅으로 내려온다.”
 금경에서 나오는 빛과 진동이 점점 증폭(增幅)되었다.
 우웅!
 “천년마다 찾아오는 천년 흥륭기(興隆期)! 천하 곳곳에 기재와 영웅들이 구름처럼 일어날 것이다.”
 이제 중년인의 눈에서 나가는 빛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금경은 더 이상 외부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듯, 스스로 빛을 더욱 강하게 발하며 소리질렀다.
 웅-우우웅!
 “어떤 기운이 먼저 내려올 것인가? 마기(魔氣)가 강하다면 천하는 도탄에 빠지고, 정기(正氣)가 강하다면 천하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맞으리라.”
 중년인은 초조한 빛으로 금경을 지켜보았다.
 금경의 색이 점점 변해 갔다. 천지의 기운(氣運)에 감응해 색을 바꾸는 것이다. 금경은 이제 금빛이 아니었다.
 은은한 혈광!
 중년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혈왕혈기(血王血氣)! 겁난(劫亂)이 재현된다는 말인가?”
 천조금경(天照金鏡)!
 때로는 신마경(神魔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도가(道家)의 무가지보(無價之寶)! 하늘에서 인세로 전해지는 기운에 감응(感應)해 스스로 반향(反響)한다는 보물이었다.
 그 보물이 지금 점점 강한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웅웅웅!
 “핏빛은 마기(魔氣)를 뜻하고, 소리의 세기는 마기의 강력함을 의미한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점괘에서는 정기(正氣)가 마기를 이기고 승(勝)함을 보았었는데...”
 신마경(神魔鏡)에서 나오는 혈광은 이제 마치 진짜처럼 선명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소리는 커질 대로 커져 돌로 사방을 막은 실내의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나갈 곳을 찾아 몸부림쳤다.
 왕! 왕! 광-!
 “혈기의 힘만 강해진다. 이럴 수가! 어찌 옥추문(玉樞門)을 통해 내려오는 기운이 마기(魔氣)뿐이란 말인가?”
 이제 신마경은 곧 터질 것 같았다.
 울림은 실내(室內)의 곳곳을 마구 흔들고 있어 그것이 작은 거울에서 나는 소리라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한데,
 “혈광(血光)만이 아니다!”
 중년인, 제갈수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보라!
 혈광의 중앙!
 두 줄기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푸르고 누런 두 줄기 빛!
 “청광(靑光)과 금광(金光)은 모두 정기(正氣)의 두 갈래이니, 혈광은 성하지 못하겠구나!”
 구앙! 구왕!
 신마경의 진동이 더 커지며 삼 색의 광채들이 서로 엉켜 돌기 시작했다.
 “삼태극(三太極)을 이루며 정립(鼎立)한다!”
 제갈수의 말은 정확했다.
 삼 색 광채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허공을 감도니 형상이 마치 세 개의 태극(太極)이라!
 회전이 점점 빨라졌다.
 종내는 세 가지의 색이 하나로 섞여 본디의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웃, 신마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제갈수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꽈꽝!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마경이 깨졌다.
 세 개로 갈라져 세 방향으로 날아가는 신마경 조각들!
 그 중 핏빛을 띤 하나가 제갈수를 스치며 그의 뺨에 핏줄기를 길게 그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사문(師門)의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망가졌건만, 아쉬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만 망연해져 중얼거릴 뿐!
 “삼정지세(三鼎之勢)! 가장 큰 난세(亂世)가 다가오는가?”
 벽에 박힌 세 개의 신마경 조각들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하지만 아직 미미하게 남은 거울들의 울림은 장차 다가올 난세를 비추고 있었다.
 세 개의 빛! 세 갈래의 기운!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여 년 전!
 천도봉(天道峰) 한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조문의 팔 대 문주 제갈수(諸葛修)가 겪었던 이 일을!
 
 
 2. 소주의 천추학림
 
 아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주를 구경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소주에서는 어느 곳이 가장 유명할까?’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급히 사람들 틈을 비집고 그곳으로 나아갔다.
 노인 하나가 손녀로 보이는 여아를 품에 안고서 그녀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결코 손녀와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손녀와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을 뿐!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강호인은 만설자(萬舌子)라 불렀다.
 지금 사람들은 그의 입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손녀가 물었다.
 “그럼, 천외성주께서 천추학림을 만들 것을 제안하셨군요?”
 할아버지의 대답이다.
 “그렇지! 옛날 천외성을 세우신 무적대제 사무적(獅無敵)께서는 혈왕교를 물리치신 후 다시는 강호에 겁난이 없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혈왕교란 말이 나오자 강호인이 아닌 자들까지도 모두 두 눈에 두려움의 빛을 띠었다.
 그만큼 혈왕교란 이름은 모두의 가슴속에 공포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여아는 그런 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천추학림(千秋學林)을 통해 강호의 힘이 길러졌나요?”
 “당연하지. 천추학림은 삼십 년마다 강호의 기재들을 모아서 교육시켰단다. 이미 네 번째 학림 수료자(修了者)들이 나왔지.”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도 있나요?”
 “당연히 모두 유명하지. 예를 들자면 신승(神僧) 초의(草衣) 선사(禪師)가 계시지. 너도 그분을 잘 알 게다.”
 “아! 저 그분 알아요. 금포승(金捕繩)을 무기로 사용하신다는 분이시죠?”
 여아(女兒)뿐 아니라 모인 군중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그만큼 초의 선사는 유명했다.
 
 아는 이름이 나오자 군중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앞 부분을 듣지 못한 아호도 이야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런데 만설자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자, 오늘은 그만 합시다. 더 듣고 싶으신 분은 내일 여기로 모이기 바라오.”
 “내일 또 오세요. 할아버지께서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실 거예요.”
 여아도 깜직하게 인사를 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아호(阿昊)는 이야기가 끝이 나서 섭섭하기는 했지만, 문득 여아(女兒)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여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는 깜짝 놀랐다.
 어린 소녀의 몸이 왜 이리 차고 딱딱한 것인가?
 만설자 노인이 그의 손을 제지하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가슴이 떨려 왔다.
 ‘젠장! 내 차림이 아무리 더러워도 머리 한번 쓰다듬지 못하나, 원!’
 멀어져 가는 만설자 노인과 손녀를 보며 아호는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좋다. 어쨌든 소주(蘇州)에서 무엇이 가장 유명한지는 알았다. 이제 돌아다니며 구경해야지.”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곳!
 
 다음날 시체 하나가 으슥한 동네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얼굴이 짓이겨져 관부에서도 신원을 밝혀 내지 못했다.
 
 
 3. 풍림(風林)의 변(變)!
 
 천추학림의 후원에 위치한 풍림(風林)의 풍취는 유명했다.
 하지만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가을이 깊어 단풍이 더욱 고운 가을밤!
 밤이 깊어 휘영청 달 밝고...
 그 달빛을 받고 있는 어느 누각에 지금 녹의(綠衣)의 청년이 홀로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친구를 기다렸다.
 이윽고 청의와 흑의를 입은 청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왔다.
 “월야(月夜)에 독작(獨酌)이라... 흥취가 남다르구먼. 할말이 있다더니, 무엇인가?”
 녹의가 고소(苦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별로 현실성이 없어 자네는 믿지 않을 걸세.”
 흑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어서 말해 보게.”
 녹의가 쓰게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을까?
 흑의(黑衣)는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대신 청의(靑衣)가 웃었다.
 “하하, 자네는 어쩌다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였는가?”
 “...지금 학림의 힘은 너무 팽창했네. 만일 불순한 기도(企圖)를 지닌 세력이 생겨난다면, 어쩌면...”
 그제서야 흑의청년이 약간의 웃음을 다시 찾고 말했다.
 “좋아, 어쨌든 추측일 뿐이로군... 자, 우리 술이나 마시세.”
 흑의가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이번엔 오히려 청의(靑衣)가 얼굴을 굳히며 녹의에게 물었다.
 “자문! 자네는 어쩔 건가? 만일 그러한 일이 실제로 생긴다면?”
 흑의가 마시던 술을 내뿜고는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자네...”
 외치던 흑의는 청의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입을 다물었다.
 녹의(綠衣)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음이 내 주관이네.”
 그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네.”
 그랬다. 엄청난 일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청의는 생각에 잠겼고 흑의는 초조하게 술만 마셨다.
 
 이윽고 청의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녹의에게 조용히 물었다.
 “자네에게는 아들이 둘 있지 않나?”
 “맞네. 혼아(魂兒)와 평아(枰兒)가 있네. 평아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네.”
 청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흑의는 마구 술만 들이켰다.
 청의는 녹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 한잔하세.”
 녹의가 얼떨결에 술잔을 받자, 청의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 정말 큰일일세. 대책을 세워야겠네.”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누구에게 했는가?”
 녹의가 술을 마시고는 대답했다.
 “종수(鐘秀)에게... 그 외는 자네들이 처음이네.”
 또 다른 한 명은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서찰을 남겼으니, 말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청의가 한 잔을 더 따랐다.
 녹의는 술을 마시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흑의가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음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더불어 청의도 아직 한잔도 마시지 않았던 것을 주목했다.
 “자네들은 왜 마시지 않는가?”
 흑의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 술은 더 이상 마실 수가 없다네. 자문, 미안하이.”
 녹의가 술잔을 떨어뜨렸다.
 내부의 힘이 한 올도 남지 않고 사라져 갔다.
 “이, 이것은...?”
 청의는 미소 지었다.
 “맞아. 천하에서 가장 무거운 물이 자네 몸에 들어갔으니... 자넨 공력을 모두 상실했네.”
 “도, 도대체 이게 어찌 된...”
 녹의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그가 최후로 떠올린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녹의인 엽자문의 눈에는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만이 떠올랐다. 다만 그리움.
 ‘혼아! 평아!’
 녹의는 마침내 완전히 쓰러졌다.
 청의는 미소 지었고, 흑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또다시 마실 수 있게 변했다.
 
 * * *
 
 새로운 명문으로 발돋움하던 엽가의 가주(家主) 엽자문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은 강호를 뒤흔들었다.
 회풍무류검 엽자문!
 그가 주검으로 발견되다니!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의 죽음 자체보다도 그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였다.
 기루(妓樓)!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기녀의 배 위!
 엽자문은 복상사(腹上死)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천추학림은 발칵 뒤집혔다.
 기녀의 증언으로 엽자문이 강제로 겁탈하려 했음이 강호에 알려졌다. 아무리 기녀라고 하나 강제로 범하다니.
 그녀의 몸은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어 스스로의 말을 증명해 주었으며, 사인을 조사한 위원들도 그녀의 말이 옳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엽자문 혼자가 아니었다.
 당대 천추학림의 임주인 종사원의 독자(獨子) 종수도 함께 있었다.
 그들이 겁탈했던 기녀는 당대의 명기로 이름난 천상화(天上花)! 그녀의 증언은 엄청난 반응을 불러 왔다.
 
 임주(林主) 종사원(鐘思元)이 책임을 통감하며 물러났다.
 엽자문의 부인과 두 아들은 명예를 실추시킨 엽자문의 죄를 대신 지고 쫓겨났다. 기녀가 증언했던 또 한 명의 손님이었던 종수(鐘秀)는 실종되었다.
 임주가 바뀌고 종사원의 출신 문파인 장춘곡(長春谷)이 천추학림에서 물러나 봉문(封門)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십팔 년 전의 일이다.
 
 기억하라.
 세 가지의 일들을.
 무림의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니...
 봄에 씨 뿌린 곡식을 가을에 거두듯 강호에 뿌린 인연은 반드시 그 보답이 있다.
 하늘은 선과 악에 대한 보답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림천추(武林千秋)는 시작된다.
 
 
 제일장. 매화 사이로 푸른 안개 흐르다.
 
 1
 사방의 장식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다.
 방의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옥(玉)으로 조각된 용(龍) 한 마리가 비상(飛翔)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청록옥(靑綠玉)!
 은은한 물빛을 띠는 극상품(極上品)의 옥이었다.
 그 옥룡(玉龍)을 받치고 있는 것은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탁자였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옥룡뿐이 아니었다.
 푸른빛으로 장정(裝幀)된 서찰 하나도 탁자 위에 있었다.
 탁자 위의 옥룡을 향해 흰 손이 뻗쳐졌다.
 손은 실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희고 가늘면서도, 강인해 보여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느릿하게 다가온 손은 잠시 옥룡을 매만지더니 이윽고 서찰을 집어 들었다.
 손의 임자는 전신에 흰 옷을 걸친 중년인.
 하지만 백의가 너무 깨끗한 탓일까?
 그의 흰 옷은 이상하게도 푸르러 보였다.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들 다섯 명이 마지막으로 남은 적임자냐?”
 그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일단 그가 묻자 허공은 더 이상 허공이기를 거부했다.
 곧 뿌연 수증기가 일어나더니 그것이 한군데로 모이며 점점 하나의 형상(形象)을 갖춰 나갔다.
 순식간에 수증기의 밀도는 점점 짙어졌고 완전한 모양이 드러났다.
 전신을 푸른 옷으로 감싼 인영!
 사술(邪術)인가?
 
 푸른 수증기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궁주(宮主)!”
 그의,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맑아 듣기 좋았다.
 푸른 수증기는 여인이었다.
 중년인은 다시 서찰을 보았다.
 그곳에는 모두 다섯 명의 이름과 그에 따른 상세(詳細)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기일(其一).
 성명:쾌삼(快三).
 별호:섬전도(閃電刀).
 무공등급:을(乙).
 성격:극도의 다혈질(多血質).
 정의감:갑(甲).
 가족:부모 모두 생존.
 소속:무(無).
 
 기이(其二).
 성명:연옥천(燕玉天).
 별호:화검(花劍).
 무공등급:병(丙).
 성격:충후.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김!
 정의감:갑(甲).
 가족:부인과 아들 하나. 양친 사(死)!
 소속:현 취보(鷲堡)의 보주.>
 
 그 외에도 세 명의 이름과 신상이 적혀 있었지만 중년인의 눈은 연옥천의 신상 명세에 고정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인은 여인을 보며 말했다.
 “가족이 있음이 걸리긴 하지만 이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 벽하(碧霞)!”
 푸른 수증기, 아니, 푸른 안개라 불린 여인이 허리를 숙였다.
 “낙점(落點)하신 것입니까?”
 “그렇다. 나머지 셋은 무공 수위가 모두 갑(甲)에 해당하니 적당하지 않다.”
 벽하(碧霞)가 공손히 말했다.
 “궁주의 선택에 경의를! 벽수(碧水)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푸른 안개가 서서히 흩어졌다.
 이윽고 잠시 후 안개가 모조리 사라지면서 허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모습을 되찾았다.
 중년인은 다시 손을 뻗어 옥룡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옥룡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바람과 구름을 부를 듯했다.
 바람, 그리고 구름.
 풍운(風雲)을!
 
 * * *
 
 낙양!
 신년을 맞는 낙양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들어 인사를 나누며 담소했다.
 즐거운 기운이 거리에 넘쳐 흘렀다.
 
 따따닥!
 무슨 소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죽(爆竹)이 터지는 소리. 축제에서는 결코 폭죽이 빠지면 안 된다.
 새해가 밝았으니 사람들이 서로의 발재(發財)와 발복(發福)을 빌며 여기저기서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했다.
 빠질 수 없는 것은 또 있었다.
 사자무(獅子舞)!
 저마다 가문에서 전해지는 특이한 형태의 사자탈을 쓰고 악귀를 물리치는 춤을 춘다.
 덩실, 덩실.
 흥겨운 가락을 타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 돌아가는 춤사위!
 신년(新年)을 맞는 평민들의 즐거운 가락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무(群舞)가 한창인 거리의 오른쪽 끝에는 이층으로 솟은 객잔(客棧)이 있었다.
 일층(一層)은 주점이었고, 이층(二層)은 숙박을 위한 시설이었는데, 객잔 이층의 한 창가에서 신년 축제를 내려다보는 맑은 눈이 한 쌍 보였다.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눈의 주인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 담긴 것은 진한 그리움이었다.
 백의를 단정히 차려입은 청년!
 이 청년이 깨끗한 백의를 입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 년 전만 하여도 그는 폐의(弊衣)를 입었는지라 비록 낡은 삼베옷이나마 깨끗이 차려입은 것은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청년의 뒤에는 개방(丐幇) 특유의 오의(汚衣)를 걸친, 조금 어린 청년이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개방 제자가 고개를 들어 백의청년을 보았다.
 “진 공자님! 그분... 엽혼(葉魂)이란 분을 생각하십니까요?”
 백의청년, 진소백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수심(愁心)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다.
 “안복(雁福)! 어느새 자네가 내 마음까지 읽게 되었구먼.”
 안복이라 불린 개방의 백의개(白衣丐)가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다만 일 년 전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어서...”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그를 본 적이 없지?”
 “예. 하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진소백은 죽은 친우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는 비록 힘들고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참으로 의미있는 인생을 살다 갔다.
 평생 동생을 위해 살았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용감했다.
 엽혼은 단 한 오라기의 빚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남아(男兒)의 삶으로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진소백은 항상 생각했다.
 엽혼을 생각하던 진소백은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그의 동생은 그와 많이 닮았지. 많이 닮았어...”
 안복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엽혼이란 분에게 동생이 있었습니까요?”
 “있네. 내 사제(師弟)가 되지!”
 안복이 알았다는 듯 머리를 쳤다.
 “아, 그럼, 지금 공자님께서 기다리신다는 분이 바로...”
 진소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네.”
 “그분의 이름은 어찌 됩니까요?”
 진소백이 웃었다.
 “내 훌륭한 사제의 이름은 바로 엽평(葉枰)이지! 지난 일 년간의 연무(鍊武)를 마치고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네.”
 
 * * *
 
 아무리 흥겨운 잔치라도 끼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인간 세상엔 고민과 걱정이 항상 끊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신명나는 놀이판 옆에서 굳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에게는 고민(苦悶)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소년!
 채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였다.
 해맑은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영리해 보이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들고서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고, 소년은 실망한 얼굴로 돌아서곤 했다.
 사자무는 더욱 흥겹게 돌아가고 소년은 초조한 얼굴로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모르겠다.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소년은 누구를 찾는 걸까?
 
 * * *
 
 여인은 길을 서둘렀다.
 장옷을 둘러 얼굴을 가렸는데 키는 매우 커, 누구라도 한 번은 주목할 만한 여인이었다.
 주위는 축제가 벌어져 모두가 흥에 겨워 있었지만, 여인은 관심없다는 듯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사람들의 벽을 뚫고서 도착한 곳은 바로 진소백이 묵고 있는 객잔 앞!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던 여인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급해 보이던 여인이 멈춘 이유는 별다르지 않았다.
 소년!
 둥근 얼굴이 어린애답지 않게 준수했지만 어딘지 어둠이 서려 있는 소년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주위의 흥겨움에 어울리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어둠에 감싸여 있는 소년!
 어린 나이에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 걸까?
 여인은 소년을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도 저 소년처럼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들이 즐거울 때 그는 더욱더 고독했다.
 한창 또래와 어울릴 나이에 그러지 못하는 고독은 사람을 쉽게 기진(氣盡)시킨다.
 
 소년도 여인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윽고 여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인사를 꾸벅 하지 않는가?
 “안녕하세요. 전 연충(燕忠)이라고 해요.”
 여인은 당황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다니.
 소년이 말을 이었다.
 “전 진소백이란 분을 찾고 있어요. 혹시 알고 계세요?”
 여인은 놀라 물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묻는 거지?”
 소년은 여인이 반문하자 풀이 죽어 대답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려 했지만 절 상대해 주는 어른이 별로 없어서... 게다가 대답하는 사람들 모두 모른다는 말만 해요. 하지만 전 진소백이란 분을 꼭 만나야 해요.”
 여인은 그제서야 소년이 특별한 의도 없이, 그저 자신이 계속 쳐다보니까 물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왜 진소백... 을 만나려는 게냐?”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런데 그분을 아세요?”
 여인은 한참 동안 소년 연충을 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넌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느냐?”
 “저희 집에 가끔씩 드나드시는 만설자(萬舌子)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그분이 하시는 강호 이야기 중에 진소백이란 분의 이름이 나왔어요.”
 연충은 기쁨에 들떠 말했다.
 “전 그분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여인은 연충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
 “그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게냐?”
 연충이 고개를 떨구더니 힘없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집을 떠나신 지 오래예요.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신 때가 이미 지나서... 전 아버지를 찾고자 해요.”
 키 큰 여인은 연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과 같은 나이에 가장 큰 슬픔은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밤 성(城)에서 오(五) 리(里) 떨어진 곳에 있는 관(關) 공(公)의 묘로 나오거라.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충은 기쁨에 겨워 수십 번 절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키 큰 여인이 빙긋 웃었다.
 “난 그냥 네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고 해두자꾸나.”
 다시 수번 절하고 뛰어가는 연충의 뒷모습을 보며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총명하고 근골도 좋다. 잘 다듬으면 좋은 재목이 될 아이로구나.”
 
 2
 진소백은 밖을 보았다.
 시끄럽게 쏘아지던 폭죽과 사자무의 행렬이 이제 조금씩 잠잠해졌다.
 소란스러움은 나름대로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지만, 소란 뒤의 고요 또한 사람의 마음에 까닭없는 슬픔을 일으킴을 진소백은 알았다.
 잔치 뒤의 공허라고나 할까?
 진소백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는 소리없이 흐르는 고요 속으로 침잠(沈潛)해 들어갔다.
 
 이때였다.
 진소백이 앉아 있는 곳 뒤쪽의 방문이 소리없이 열린 것은!
 여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키가 훤칠한 여인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소리없이 내젓자 장옷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손에는 기이한 모양의 검이 들려 있었다.
 믿기 힘든 것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한 점의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인이 날아올랐다.
 더불어 여인이 든 검도 날았다.
 일컬어 신검합일(身劍合一)!
 검과 정기신(精氣神)이 하나가 된다는 전설의 검공 조예가 키 큰 여인의 손에서 펼쳐졌다.
 검이 진소백의 뒤통수를 불과 한 치 남겨 둔 순간,
 휘류류-
 비로소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파공음(破空音)이 방을 채웠다.
 그만큼 검은 빨랐다.
 
 절명(絶命)의 위기!
 진소백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소리가 들리다니, 날 믿지 못하는 게로구나.”
 단지 한숨을 쉬었을 뿐이지만 검의 주인은 진소백의 몸이 어느새 옆으로 한 자 반을 미끄러져 나가 있음을 보았다.
 검끝을 적당하게 피할 수 있는 거리!
 검을 쥔 여인의 눈에 감탄이 떠올랐다.
 “과연!”
 그녀는 여인답지 않은 목소리로 외치며 손목을 기이하게 변화시켜 돌렸다. 순간,
 꿈틀!
 검의 끝이 고무인 양 쭉 늘어나더니 살아 있는 뱀의 머리처럼 방향을 트는 것이 아닌가?
 검끝은 여전히 진소백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전보다 놀라운 점은 변화가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소백 또한 감탄했다.
 “좋구나! 드디어 대성(大成)했구나.”
 그는 몸을 낮춰 의자를 따라 전신을 미끄러뜨렸다.
 주룩!
 이것은 임기응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매우 적절하여 여인의 검은 다시 허공만을 감았다.
 하지만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찻!”
 여인은 왼발을 축으로 하여 왼쪽으로 몸을 비틀며 뛰어올랐다.
 그러자 검로(劍路)는 그대로인데 검로를 시전하는 주체(主體)가 땅 대신 허공에 몸을 두는 형상이 되지 않는가?
 휘둘러 가던 검을 가진 손이 땅 대신 허공에 있다면 검의 방향도 바뀌는 것이 당연했다.
 처음 발출될 때 뒤통수를 노렸던 검은 지금 진소백의 얼굴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진소백은 당황했다.
 이런 변화는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 당한 적이 없는 빠른 것이었고, 일시지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 진소백의 머리를 찰거머리처럼 노렸다.
 이미 두 번에 걸친 섬전(閃電) 같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 기세(氣勢)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무서워졌다.
 검이 얼굴을 노리며 떨어지기 직전!
 진소백이 몸에 힘을 주고 뒤로 쓰러졌다.
 와그작!
 그의 등을 받치던 의자가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나무의 파편(破片)이 사방으로 비산(飛散)할 때 진소백은 검과의 거리를 약간 넓힐 수 있었다.
 보라!
 진소백의 손이 오므라들어서 양쪽으로 쭉 뻗어 감을.
 나무의 파편은 내공의 힘에 의해 매우 잘게 조각났고, 그 중 몇 개를 진소백이 손가락으로 튕겨 내며 쳐내었다.
 투투- 퉁!
 거의 동시에 튕겨진 나뭇조각은 좌삼우사(左三右四), 합(合)이 일곱 개였다.
 놀라운 점은 창졸간에 튕겨진 나뭇조각이 일정한 격식을 이루며 진소백의 얼굴을 향해 찔러 오는 검을 압박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검을 쥔 여인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오. 순식간에 칠성(七星)의 진(陣)을 형성하다니!”
 여인이 어지럽게 검을 휘둘러 일곱 개의 나뭇조각을 사방으로 쳐냈다.
 그가 모든 목편(木片)을 쳐내고 검을 거두었을 때는, 틈을 얻은 진소백이 이미 몸을 바로 세운 뒤였다.
 진소백은 조용히 말했다.
 “여인의 손속이 이리도 험악하니 시집가기 힘들겠구나!”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무림에는 많은 방파가 있다.
 소림, 무당 등의 구파 외에도 많은 문파들이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모두가 다 그렇지는 못했다.
 강호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작은 문파들도 강호 곳곳에 있었다.
 취보(鷲堡) 역시 그런 군소방파 중 하나였다.
 비록 무림에 속했지만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보주인 연옥천(燕玉天)은 사람됨이 너무 강직하여 친구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공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알려졌으며 장원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아담한 화원(花園)은 매우 잘 가꾸어져 있는 게 주인의 성품(性品)을 알게 했다.
 연옥천이 명성을 얻고 있는 유일한 분야가 바로 수목(樹木)을 기르고 가꾸는 일이었다.
 화원 한쪽에는 인상적인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나무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 수심(愁心)에 잠겨 있는 여인이 있었다.
 궁장하여 단정히 머리를 올린 여인은 한눈에 보아도 명문가 출신임이 확연했다.
 그녀가 바로 취보의 연(燕) 부인(婦人)이었다.
 
 “휴! 오랫동안 그이 소식이 없어 걱정인데, 이 아이는 또 어딜 가서 이리도 늦는단 말인가?”
 그녀의 한숨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천(西天)이 붉은빛으로 물들며, 광구(光球)는 마지막 햇살을 힘겹게 뿜어 냈다.
 지금 지고 있는 저 해는 새해의 첫 태양이었다.
 “동지(冬至)를 넘기시지 않으리라 하셨던 분이 새해가 되었건만 소식이 없으니... 휴!”
 그녀는 취보를 떠나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보주이자 그녀의 남편 연옥천을 걱정했다.
 연(燕) 부인(婦人)은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연옥천이 애지중지하며 매우 아꼈던 나무!
 나무를 만지자 조금 안도가 되는지,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이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으리라. 하지만...”
 연 부인은 다시 안색을 굳혔다.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다니, 아버지가 오래 집을 비우시니 애가 버릇이 없어졌구나. 내 오늘은 단단히 혼을 내리라.”
 연 부인은 말을 하며 다시 한 번 매화나무를 매만졌다.
 매화(梅花)!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나무는 연옥천이 무척이나 아끼던 것이다.
 매화의 그림자가 노을을 반사하며 연 부인을 덮었다.
 그 그림자는 노을에 물든 탓인지 무척이나 붉게 보였다.
 마치 핏빛과도 같았다.
 
 * * *
 
 객잔의 방에는 키 큰 여인과 진소백이 서 있었다.
 여인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형마저도 저를 놀리시니 앞으로는 이런 차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굵은 남자의 것이었다.
 행동이나 큰 키로 보아 여인은 당연히 여인이 아니었다.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잠시 농을 했다. 어쨌거나 네 무류검(舞流劍)은 이미 대성(大成)의 경지로구나, 평아(枰兒)!”
 ‘평아’라고 진소백이 부를 사람은 천하에 한 명뿐이다.
 그의 사제인 엽평(葉枰)!
 “하지만 사형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으니... 그간 편히 지내셨습니까?”
 엽평의 말에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딜 가나 항상 나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편하겠느냐?”
 엽평이 웃었다.
 “자초하신 일이죠. 천하가 주목할 만한 일을 하셨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진소백은 일 년 전, 비응방의 방주 금사진이 암살당하는 사건을 의뢰받고 비응방의 반도를 찾아 낸 적이 있었다.
 겉으로 간단하게 보였던 그 일은 의외로 복잡하여 난마(亂麻)처럼 음모들이 얽혀 있었지만 진소백은 그것을 훌륭히 해결했다.
 음마문(陰魔門)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사공두의 음모를 밝혀 낸 것도 진소백이었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의 후원을 받아 비응방의 장악을 획책(劃策)했던 심화절의 음모도 분쇄했다.
 강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 후로 수많은 곳에서 진소백에게 어려운 일을 부탁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진소백은 그것들을 모두 거절했다.
 비록 숨지는 않았지만 의뢰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화절의 배후 세력 때문이었다.
 진소백이 그러한 세력이 있음을 천하에 알리자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힘이 정말 대단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강호 활동을 중단했어도 진소백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 그들이 암수(暗手)를 펼칠지 모르므로.
 
 “분명 어딘가에서 천하를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진소백의 말에 엽평은 걱정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사형이 일부러 그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십니다.”
 “후후, 하지만 계속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나라도 먼저 밝은 곳으로 나와 그들을 유인해야지.”
 “그들은 비응방의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써 사형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너무 행적을 드러내는 것은...”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중인들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엽평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진소백이 다시 말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을 숨기려 하니 나를 노려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모험(冒險)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라고 엽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사형 혼자서 밝은 곳에 노출이 되어 있으니 전 항상 죄송합니다.”
 “그럴 것 없다. 숨어서 일을 해 나가는 너의 입장도 쉽지 않음을 안다. 게다가 내가 의뢰를 받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자 함이니 안심하거라.”
 진소백이 화제를 돌렸다.
 “어쨌거나... 유사부님의 전갈은 무엇이냐?”
 엽평이 감탄했다.
 “제가 유사부님의 전갈을 가져 왔음을 어찌 아셨습니까?”
 진소백이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하하, 여인의 변장을 하고서야 겨우 나를 만날 수 있는데 특별한 전갈이 없다면 어찌 네가 이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나를 찾았겠느냐?”
 엽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를 낮췄다.
 “사형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전음이었다.
 “용선풍(龍旋風)을 시작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진소백은 침묵했다.
 용선풍(龍旋風)!
 무슨 뜻인가?
 
 
 3
 엽평이 침묵을 깼다.
 “이제 사형께서는 더욱 위험해지게 되었습니다.”
 진소백은 웃었다.
 “아니, 지금까지는 풍림서(風林誓)의 견제를 피하느라 조용히 숨어 살았었는데, 오히려 잘되었다. 이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그건 그렇고...”
 진소백이 토를 달았다.
 “어서 물어 보거라.”
 엽평이 반문했다.
 “무얼 말입니까?”
 “하하, 만일 그 전갈뿐이라면 왜 네가 직접 왔겠느냐? 나에게 개인적으로 물을 것이 있지 않느냐?”
 “사형을 속이는 것보다 귀신을 속이는 게 쉽다는 말이 맞군요. 사실은...”
 엽평이 말하지 않아도 진소백은 이미 그가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엽평의 아버지 얘기. 또 그 속에 얽혔던 전대의 비사(秘事)를 알고자 함을.
 진소백은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노란색의 봉투는 오래된 것인 듯, 색이 조금 바래 있었다.
 “나는 네 형과 약속을 했었다. 네가 스스로를 지킬 충분한 힘을 얻은 뒤 이것을 보여 주겠노라고.”
 엽평은 말없이 봉투를 받았다.
 진소백이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스스로 힘을 얻었다고 자부(自負)하느냐?”
 엽평은 말없이 진소백을 보았다.
 진소백이 엄숙히 말했다.
 “약속하거라. 네가 대사부(大師父)님의 보리천승공(菩提天憴功)을 모두 익히는 날까지는 절대로 열어 보지 않겠다고.”
 엽평은 서찰이 든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형, 엽혼(葉魂)이 남긴 것!
 그는 자신의 형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형은 오직 동생인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엽평에게는 형의 뜻을 거역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사형!”
 엽평은 봉투를 품에 갈무리했다.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참, 그런데...”
 포권하며 나가려던 엽평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사형께서는 다시 강호 활동을 시작하실 거죠?”
 “물론이다. 이제 용선풍(龍旋風)이 불게 되었으니 내가 조금이라도 더 풍림서(風林誓)의 주의를 끌어야 네 활동이 편해지지 않겠느냐?”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실 것인지 정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진소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다. 뭐, 의뢰가 들어오면 아무거나 맡지. 되도록 큰일로 말야. 혹시 일러줄 말이라도 있느냐?”
 엽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은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 * *
 
 연(燕) 부인(婦人)은 나뭇가지를 통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푸른 비단옷을 온몸에 두르고 있어 마치 물의 요정처럼 보였다. 언제 나타난 걸까?
 연 부인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건너편에 서 있었다.
 게다가 자세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 계속 서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연 부인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인가?
 마지막 노을은 푸른 옷의 여인을 비췄다.
 붉은 노을에 섞인 푸른 옷은 마치 피를 묻힌 것 같다고 연 부인은 생각했다.
 
 “연 부인께서는 부군(夫君)이 많이 걱정되시나요?”
 푸른 옷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부군이란 당연히 취보의 보주인 연옥천을 말함이다.
 그녀가 어찌 연옥천의 일을 아는가?
 “당신은 누군가요?”
 연 부인은 강호인이 아니었다. 한 초식의 무공도 익혔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은 매우 담담하여 격동(激動)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경험이 많은 강호인으로서도 별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푸른 옷의 여인은 감탄했다. 물론 속으로만.
 “전 벽하(碧霞)라고 해요. 부군(夫君)에 관해 부인께 여쭤 볼 말이 있어 왔어요.”
 연 부인은 긴장했다.
 실종된 연옥천의 일을 물어 보려고 왔다니?
 연옥천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그럼, 이 벽하란 여인은 남편의 실종(失踪)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그분의 실종과 당신이 관계가 있나요?”
 벽하는 한숨을 쉬었다. 이 여인은 왜 이처럼 눈치가 빠른 걸까?
 “휴, 그에게 책을 날라 줄 것을 부탁한 사람이 바로 저예요. 본래 이 일은 처음부터 잘 계획된 것이라 빗나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어요.”
 “빗나가다니...? 그렇다면 그이의 신변(身邊)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직까지는요. 저희는 그의 무공이 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이용하려 했어요. 그런데...”
 “무공이 약하다는 사실을 이용한다구요? 무슨... 설마 일을 부탁한 뒤 그분을...!”
 어떤 일이든 능력이 없는 자보다 능력있는 자에게 부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을 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을 끝낸 후 그 사람을 제거해야만 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연 부인의 짐작이 맞았는가?
 벽하의 어조는 모질어졌다.
 “그가 우리의 살수(殺手)를 피해 달아난 것이 벌써 십 일 이상이에요. 우리의 분석에 의한 그의 무공은 병(丙)에 불과했으니, 무언가 다른 비밀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연 부인은 충격을 받았다.
 살수라니? 이들은 왜 연옥천을 죽이려 하는 것인가?
 게다가 벽하는 왜 연 부인 앞에 나타났는가?
 연 부인은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들은 왜 그분을 음해(陰害)하려는 거죠? 그분은 살아 오면서 남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어요.”
 벽하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아무 죄가 없으나 운이 나빴어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았으니...”
 연 부인은 생각했다.
 비밀이라! 연옥천이 어떻게 상대의 비밀을 알았다는 말인가?
 “당신이 부탁한 것인가요? 그 일로 인해 비밀을 알게 된 건가요?”
 벽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께서는 매우 총명하시군요.”
 연 부인의 어조가 높아졌다. 분노한 것이다.
 “부탁을 해놓고서, 그 부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서.”
 벽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미 수십이 넘는 살수들을 풀어 연옥천을 쫓고 있으니 그는 이제 살 수 없어요.”
 부탁한 일에 관한 비밀을 지키려고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이들은 얼마나 악독한 집단인가?
 연 부인은 냉소(冷笑)했다.
 “흥! 어디 당신들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요?”
 벽하가 눈을 빛냈다. 연 부인의 자신만만한 태도.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부인께서는 전혀 겁을 내지 않는군요. 믿는 구석이 있으신가요?”
 연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서야 벽하가 무엇 때문에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벽하(碧霞)는 보다 자세히 물었다.
 “연옥천 보주는 벌써 열흘 이상을 도망다니고 있어요. 우리 편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한데, 중요한 것은 평소의 연(燕) 보주(堡主)의 능력으로는 이런 일이 전혀 불가능(不可能)하다는 점이에요.”
 벽하는 눈을 빛내며 연 부인을 보았다.
 “자, 말해 주세요. 연 보주에게 어떤 비밀이 있나요? 그의 진정한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죠?”
 연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타는 듯한 눈으로 벽하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벽하는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의 눈에 이처럼 강한 의지가 나타날 수 있음을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평소 많은 사람을 다루고 겪어 보았다.
 그리고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의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음도 알았다.
 벽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항상 침착한 손길로 옥룡(玉龍)을 쓰다듬는 중년인!
 그녀의 궁주(宮主)를.
 
 -이처럼 중요한 일에 실수(失手)가 있다니... 한 올의 증거도 남기지 말고 인멸(湮滅)하라.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인멸하라!’는 말의 뜻을 벽하가 모를 리 없었다.
 원래 취보(鷲堡)의 식구들은 연옥천의 제거가 끝나는 즉시 살인멸구(殺人滅口)될 예정이었다.
 어떤 비밀 때문인지는 모르나 연옥천의 능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바람에 취보가 여태까지 무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서가 뒤바뀌면 또 어떠랴?
 어차피 연옥천은 제거될 것이다.
 벽하는 궁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한 올의 실수라도 있다면 너 또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벽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궁주가 비록 자신을 총애하고 있으나 그는 한번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벽하는 고개를 들어 연 부인을 보았다.
 총명한 여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으로 결코 쉽지 않은 기개(氣槪)를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아 용기 또한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당신들의 운이 나빴음을 탓하시오.’
 벽하의 몸이 흔들렸다.
 스스스-
 기이한 독문(獨門)의 신법이 펼쳐지며 벽하의 몸이 안개인 양 흐릿해졌다.
 푸른 안개!
 벽하의 몸이 서서히 흩어지며 흘렀다.
 흐르는 방향은 매화나무를 넘어 연 부인이 있는 곳!
 연 부인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벽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
 그녀는 손을 뻗어 남편이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매화나무를 꼭 잡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안개는 연 부인을 노리며 흘렀고 연 부인은 이것을 피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공을 몰랐다. 전혀 몰랐다.
 화끈한 통증!
 멀어지는 그녀의 의식 아득히 좀 전에 보았던 노을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붉게 보였던 노을!
 그 핏빛은 이 일을 예고하는 색이었을까?
 연충이 일찍 돌아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리며 연 부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충아! 내 아들. 어미는 널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제이장. 신(神)이 추천한 사람.
 
 1
 신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라도 밤이 되어 어두워지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신조차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는가?
 사방이 어둠에 잠기자 멀리서 들짐승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와 공포를 자아냈다.
 왜 사람은 어둠을 무서워하는가?
 혹자가 말하기로는 어둠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일까?
 관제묘(關帝廟)도 밤이 되니 무서웠다.
 복마대제(伏魔大帝) 관운장이 귀졸을 물리치니, 잡귀(雜鬼)가 얼씬거리지도 못할 장소이건만, 어두워지자 무서워짐은 어쩔 수 없었다.
 마(魔)를 물리친다는 신상(神像)들이 오히려 더 무서워 보이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속에 죄의 근원이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관제묘 구석에 앉아 있는 소년은 무척 용감하다 할 수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소년!
 연충(燕忠)이었다.
 어린 소년이 밤중에 관제묘에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키가 크고 장옷을 입은 여인의 말! 진소백을 만나려면...
 연충은 그 말은 믿고 관제묘로 온 것이다.
 그는 진소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휘잉!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이제 겨우 정월인 것이다.
 덜컹, 덜컹!
 추위보다도 더 매서운 것은 이런 소리들이었다.
 누군가가 금세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듯한 소리.
 바람은 계속 문을 두드렸고, 연충은 몸을 더욱 움츠렸다.
 추위에 무서움이 더해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끼익-!
 누군가 문을 여는 듯한 소리! 연충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환청이었을까?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바람만 무심히 불어댔다.
 관제묘 안은 더욱 어두워졌다.
 점점 무서움이 더해 가서 소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소년 연충은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덜컹! 덜컹!
 문과 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는 달랐다.
 분명히 아주 가까운 데서 들리는 소리! 나무와 나무가 흔들리며 마주치는 소리였다.
 연충(燕忠)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가 나는 곳을 찾다가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끼익! 덜컹, 덜컹!
 보라! 관운장을 모셔 놓은 신상이 흔들리는 것을.
 신상은 귀신이라도 들린 듯 마구 흔들렸다.
 연충은 비로소 지금이 자시(子時) 무렵임을 알았다.
 언젠가 옆집의 할멈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밤이 깊으면 신들이 모두 신상(神像)에 내려와서 우리들이 차려 드린 음식을 드신답니다.
 
 할멈은 늙어서 주름투성이인 입을 몹시도 빨리 놀리며 말했었다.
 
 -신들은 자신이 내려오는 모습을 본 인간이 있으면 결코 살려 두시질 않지요.
 
 할멈은 그렇게 말하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연충은 할멈 얼굴의 주름이 이상한 모양으로 접히는 것을 보며 웃었다. 낮에는 무서움이 아니라 웃음이 어린 연충을 쉽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연충은 웃지 못했다.
 행여 자신이 소리를 지를까 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밤에 신상으로 내려오는 신들! 결코 들켜서는 안 된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 인간은 살려 두지 않는다.
 
 끼이잉!
 신(神)이 완전히 깃들였는가?
 신상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주위를 둘러보는 듯했다.
 더불어 허공을 울리는 음성!
 “인간의 냄새가 나다니! 누가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했는가?”
 소리는 어디에서도 났고,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발원지가 어딘지를 알 수 없는 소리! 공간(空間) 곳곳을 울리는 소리가 연충의 몸을 진동시키며 들려 왔다.
 신은 배로 말을 한다던데, 정말 그런 걸까?
 연충은 가슴을 졸이며 몸을 수그렸다.
 
 -들키면 살려 두질 않습니다요.
 
 할멈의 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울렸다.
 신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연충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상하군! 내가 냄새를 잘못 맡았는가?”
 신상이 중얼거리며 회전(回轉)을 멈추자 연충을 속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표시!
 한데,
 
 삐꺽!
 긴장이 풀린 탓일까?
 연충이 기대어 있던 낡은 나무벽이 우는 소리를 냈다.
 소년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낡은 모양이다.
 그다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위가 조용한 밤이었다. 게다가 긴장된 상태!
 연충의 귀에는 천둥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신상은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몸 전체가 빙그르르 돌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누가 감히 숨어 있느냐?”
 우렁찬 소리가 울리며 거대한 신상이 허공을 날아오는 모습을 연충은 똑똑히 보았다.
 거대한 나무 덩어리가 날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앞의 소년은 얼마나 놀라겠는가!
 쿠웅!
 신상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앞에 내려앉자 연충은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신상은 몸을 좌우로 약간 흔들었다. 연충의 존재를 알아본 것이다.
 “어린애가 아니냐? 감히 어린것이 숨어서 나를 지켜보다니.”
 음성이 사당 안을 온통 흔들며 울렸다.
 불을 뿜는 듯 붉은 신상의 두 눈을 보자 연충은 입을 열기조차 어려웠다.
 기절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린아이로서 대단한 용기라 할 것이다.
 
 “저, 전 연충이라고 해요.”
 시간이 지나 가까스로 입을 연 것만 해도 연충이 충분히 용기있는 소년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상은 노했다.
 아니, 노했나 보다. 어조가 높아졌으며 좌우로 흔들리는 몸의 움직임도 격렬해진 것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감히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훔쳐보다니, 네가 살기가 싫은 게로구나!”
 연충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전 다만 누군가를 기다리느라고...”
 “밤중에 사람을 기다린다니? 거짓말하지 말거라.”
 “정말이에요, 복마대제(伏魔大帝)님! 전 실종되신 아버지를 찾아 주실 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지를...?”
 신상의 음성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
 “자세히 말해 보아라.”
 연충은 신상의 어조가 누그러지자 조금 안심하며 얼른 설명을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나가셨어요. 책 몇 권만 전해 주면 된다시며, 지난 동지(冬至)까지는 돌아오시겠다고 했었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어머니께서 무척 걱정하고 계세요.”
 연충의 말을 들은 신상은 묵묵히 소년의 미간(眉間)을 바라보았다. 아니, 얼굴이 연충을 향했다.
 미미하게 어린 검은 기운!
 ‘현무살(玄武殺)이다. 가까운 친족(親族)에게 곧 위해(危害)가 가해지겠구나.’
 그는 연충의 자질이 뛰어남과 더불어 미간에 살기가 끼여 가까운 일가가 해를 입을 상(相)임을 알아보았다.
 관상(觀相)을 보는 신상! 정말 신이 하강한 것일까?
 
 “네 가족은 모두 몇이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뿐이에요.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늙은 할멈 하나는 옆 동네에 살아요.”
 연충은 이제 떨지 않았다.
 신상의 어조에서 노했던 기색이 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까닭이다.
 신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사이 생각에 잠겼었나 보다.
 “넌 아버지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고 있느냐?”
 연충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대제님, 도와 주세요!”
 그는 신상이 진짜 복마대제라 믿고 있었다.
 
 복마대제가 연충에게 말했다. 그의 어조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어딘가 성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연충은 느꼈다.
 “좋다. 악(惡)을 제거(除去)하고, 선(善)을 권장(勸獎)하며, 어려운 처지의 약자를 도움이 신의 본분(本分)이니, 내 너를 도울 사람을 내려보내마.”
 말을 마친 복마대제의 신상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무게가 없는 양!
 허공을 날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면서, 복마대제가 사당 안을 울리며 말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거라, 아이야! 너를 도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음성은 지극히 장중하여 흡사 진짜 복마대제가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음성의 주인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진짜 복마대제는 들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감히 신상에 손대어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 진짜 신은 화를 낼까?
 아닐 것이다. 신은 인간의 자질구레한 일들 곳곳에 스며 있기는 하되, 참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마음만 스스로 움직이며 천도(天道)에 따른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끼잉!
 관제묘의 문이 소리를 지르며 열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별빛만이 가득했다.
 초하루의 밤이니 하늘에는 달도 없어 별빛은 더욱 밝아 보였다. 어두울수록 별빛은 밝아지나 보다.
 바람은 차게 불어대는데...
 연충은 한 청년이 바닥에 앉아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별을 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청년은 백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매우 얇아 보였으나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연충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은 지 얼마 후, 청년은 고개를 돌려 연충을 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연충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네가 연충이냐?”
 연충은 그때서야 이 사람이 바로 복마대제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달려가 꾸벅 절했다.
 “예, 전 연충이라고 해요. 그런데 대협의 성함(姓銜)은 어찌 되시나요?”
 청년은 껄껄 웃었다. 연충이 존칭을 쓰는 모습이 어린애답지 않아서 어색했던 것이다.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 나는 진소백이라고 한다. 너는 나를 진(鎭) 숙부(叔父)라고 부르거라. 하하하!”
 청년은 진소백이었다.
 일람무의(一覽無疑) 진소백!
 
 
 2
 “저곳이에요.”
 연충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취보(鷲堡)였다.
 시각은 이미 사경에 접어들었고 밤의 한기(寒氣)는 절정(絶頂)에 달했다.
 무척 추울 터인데도 연충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치고 무척 성숙(成熟)한 태도였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아이일 것이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이가 나온다. 연충을 교육시킨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연 부인을 보자 진소백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우 현숙(賢淑)하여 연충에 대한 집안 교육을 훌륭하게 시켰을 것이다.
 연충과 진소백이 취보로 들어가자 내실(內室)에서 나온 그녀는 무척 놀란 듯했다.
 진소백이 같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진소백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된다면 사과드립니다.”
 진소백이 포권할 때, 연충은 옆에서 설명했다.
 “복마대제께서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돕도록 보내 주신 분이세요. 전 진 숙부라 부르기로 했어요.”
 연 부인은 무척 놀라워했다. 놀라는 태도를 숨기려 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진소백은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보다.
 연 부인은 복마대제가 보낸 사람이란 말은 물론 믿지 않고 흘려 들었다.
 하지만 진소백이라는 이름은 흘려 듣지 않았다.
 “높으신 이름 많이 들었습니다. 행여 충아(忠兒)가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는지요?”
 “아닙니다, 전혀. 아주 똑똑한 아이더군요.”
 연 부인은 연충을 힐끔 보더니 진소백을 안으로 안내했다.
 “밤바람이 찹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대청(大廳)의 장식은 소박하면서도 단아(端雅)하여 장식한 사람의 성품(性品)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었다.
 특히 이름 모를 꽃들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활짝 피어 있어 특이했다.
 방에는 화초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단지 한 개의 등잔만 피워 놓아 조금 어두웠다.
 진소백은 제철이 아닌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불빛을 조절해 주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화초를 기르시는 데 특별한 조예가 있으시군요?”
 진소백의 말에 연 부인은 미소했다.
 “바깥분께서 그런 방면에 재주가 뛰어나시답니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연 보주께서는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그건...”
 연 부인이 잠시 망설일 때, 연충이 끼여들었다.
 “매화예요. 바깥에 있는 매화나무를 아버지는 가장 아끼셔요.”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옥천은 꽃을 좋아하니 심성이 매우 온유(溫柔)할 것이다. 또 그 중에서 매화를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굳센 의지의 소유자이리라.
 온유하면서도 굳센 사람!
 진소백은 굳이 보지 않아도 연옥천의 사람됨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그만 주무시지요. 내일부터 일을 시작하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연 부인은 진소백에게 잠자리를 권했다. 자신의 일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손님 대접(待接)에는 충분히 신경을 쓴다는 마음가짐인가?
 “충아! 어서 손님을 침실로 안내해 드리거라.”
 그녀의 말이 옳다고 진소백은 생각했다.
 지금은 매우 늦었으니, 자고 일어나서 새로운 날부터 시작함이 좋을 것이다.
 진소백은 대청에서 물러나와 연충을 따라 침실로 향했다.
 그를 안내하는 연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휴! 진 숙부가 계셔서 살았어요. 만일 저 혼자 이렇게 늦게 들어왔다면 단단히 혼이 났을 거예요.”
 연충은 혀를 내밀며 말하다가 배를 움켜쥐었다.
 꾸루룩!
 배에서 나는 소리는 연충의 속이 비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런, 너 아직도 밥을 먹지 못했느냐?”
 진소백이 묻자 연충이 헤헤거리며 대답했다.
 “예, 관제묘에서 저녁나절부터 기다렸거든요. 사실 오늘은 밥을 세끼 모두 꼬박 굶었어요.”
 밥까지 굶으며 무서움을 참고 관제묘에서 진소백을 기다렸던 이유는 아버지를 찾겠다는 일념(一念)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소백은 귀신장난을 쳤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는 연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소년은 영리할 뿐 아니라 아주 착했다. 또한 효성도 지극했다.
 왜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때로는 견디기 힘든 불행을 내리는 것일까? 왜 이처럼 착한 소년의 친족이 불행한 일을 당해야만 하는 걸까?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당하다니... 불쌍한 녀석!’
 진소백은 연충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나랑 약속을 하자. 부엌에 가서 밥을 먹고 자기로. 알겠느냐? 어머니는 피곤하실 것이니 깨우지 않도록 해라.”
 연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 밥을 찾아 먹을 생각이었어요. 늦게 들어와 밥까지 차려 달라고 할 염치는 없어요.”
 진소백은 미소했다. 어쩌면 억지로 짓는 웃음처럼 어색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항상 웃음을 잃지 말고.”
 연충은 왜 진소백이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 숙부!”
 
 * * *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내달리는 자신의 다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누구에게 유리할까?
 당연히 쫓기는 자에게 유리할 것이다.
 어둠은 종적(踪跡)을 숨겨 줄 것이므로.
 그러나, 지금 쫓기고 있는 연옥천(燕玉天)의 사정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 어둠은 조금도 유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불리하기조차 했다.
 어둠을 뚫고 들려 오는 늑대의 울부짖음!
 하지만 늑대는 아니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원래의 야수성(野獸性)을 되찾은 개의 울음 소리.
 암흑견(暗黑犬)이 짖고 있었다.
 전신을 칠흑같이 검은 털로 뒤덮은 개들은 쉬지 않고 그의 행적을 추적해 오고 있었다.
 개는 냄새를 잘 맡는다. 그리고 암흑견들의 후각(嗅覺)은 특히 발달(發達)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어둠 속에 가둔 채로 창으로 그들을 찌른다.
 개들이 자라면서 공격의 강도를 점차 높여 가면 후각과 청각이 더욱 발달하게 된다.
 감각만으로 창을 피하지 못하는 개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이윽고 다 자랄 때까지 어둠에 익숙해진 개들은 태양빛을 싫어해, 낮에는 활동하지 못하는 약점이 생긴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는 다르다.
 암흑견은 밤이 되면 어린 시절부터 받았던 교육으로 인해 극도로 발달된 후각과 청각을 이용해 빠르게 반응한다.
 컹! 컹!
 개의 울음은 늑대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하지만 암흑견의 능력은 늑대보다 뛰어났다.
 적어도 밤에는.
 
 연옥천은 암흑견이 또다시 자신의 종적을 찾았음을 깨달았다.
 쫓기기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낮에는 복면인들에게 쫓기고, 밤만 되면 어디선가 암흑견이 풀려나 또다시 개들에게 쫓겼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는 한계는 며칠일까?
 연옥천은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현숙한 부인과 영리한 아들 충아를 생각했다.
 ‘살아야 한다.’
 연옥천이 두 발에 다시 힘을 주입하며 산길을 질주해 갔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를 따라왔다.
 몇 명이나 될지 모르는 사람들.
 추격과 도주는 또다시 계속되며 열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 * *
 
 누구라도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탓일 게다.
 하지만 진소백에게 이 말은 예외인 듯했다.
 드르렁, 쿨!
 머리가 침상에 닿자마자 진소백은 곯아떨어졌으며 몸조차 한 번 뒤척이지 않았다.
 
 그의 코고는 소리가 한창 높아질 때, 방문 앞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십니까? 진 공자, 주무십니까?”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연 부인이었다.
 손에는 소반(小盤)을 들었고, 소반 위에는 물과 술, 그리고 약간의 음식이 놓여 있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연 부인은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주무시나!”
 소리없이 방문이 열리며 연 부인이 들어왔다.
 남자가 자고 있는 방에 여자가 혼자 들어가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연 부인은 소반을 침실 왼편에 놓인 탁자 위에 놓았다.
 그때까지도 진소백은 계속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쿨! 드릉!
 연 부인은 잠든 진소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술병과 잔을 잡았다.
 쪼르륵!
 술병을 잡아 기울이자 술잔에 하늘을 닮은 푸른 술이 가득 찼다. 반쯤 따른 연 부인은 손을 멈추었다.
 
 연 부인은 차츰 진소백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술로 가득 찬 술잔이 하나 들려 있었다.
 맑은 술은 아무런 빛깔이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은은한 푸르름이 감돈다고 할까?
 거의 물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연 부인은 천천히 진소백의 입에 잔을 갖다 대었다.
 잠자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는 것인가?
 진소백의 붉은 입술로 다가가는 잔에 담긴 술은 가을 하늘을 보는 듯한 푸른빛이었다.
 술잔의 푸른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빛은 진소백의 입술과 묘하게 대조가 되었다.
 입 앞까지 바싹 다가간 술잔의 술이 진소백이 내뿜는 콧김에 의해 흔들리며 물결을 일으켰다.
 
 * * *
 
 연충(燕忠)은 소리를 죽여 부엌으로 갔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 저녁부터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제 진 숙부가 도와 주기로 했으니 연충은 아버지를 곧 찾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만설자(萬舌子) 노인에게서도 들었고, 복마대제께서도 보장하셨으니 진 숙부는 꼭 아버지를 찾아 주실 것이다.
 “정말 잘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배는 더욱 고팠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을 연충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신 몸을 또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조심!’
 혼자 중얼거리던 연충은 급히 몸을 숙였다.
 
 어머니가 소반을 들고서 어디론가 급히 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소반 위에 놓인 것이 술병 하나와 물병임을 알아보는 것은 그로서도 가능했다.
 “이상하네.”
 연충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아 평소 취보에는 술이 없었다.
 그런데 이 밤에 술이 어디서 났는가? 또 어머니는 술을 들고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연충은 궁금했지만 따라가는 것은 일단 보류했다.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자.’
 연충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나직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어머니는 부엌에 없으므로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부엌에는 음식이 많았다.
 연충이 가장 좋아하는 완자전도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식긴 했지만 틀림없이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거라고 연충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너무 늦어 어머니께서 무척 화가 나셨나 보다.’
 
 
 3
 술잔은 마침내 입술에 닿았다.
 술잔을 든 연 부인의 얼굴에는 표독한 표정이 어렸다.
 ‘흥! 이것을 마신다면 천하에 다시없는 자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소백, 아무리 너라도 말이다.’
 그녀의 내면(內面)을 읽어 본 사람은 놀라고 말리라.
 현숙한 연 부인이 어찌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술잔이 닿았던 입술이 번쩍 열렸다.
 하지만 술을 마시기 위함은 아니었다.
 “에취!”
 진소백이 심한 재채기를 하며 눈을 번쩍 떴다.
 바람에 밀린 술이 술잔에서 빠져 나와 연 부인을 덮쳤다.
 ‘앗!’
 놀란 연 부인, 아니, 가짜 연 부인은 속으로만 다급성을 지르며 급히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연 부인은 무공을 몰랐지만 가짜는 무공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재채기로 떠올라 자신을 덮치는 술을 한 방울도 맞지 않고 피할 수 있을까?
 스륵!
 그녀의 몸이 옆으로 세 자 가량 미끄러져 술을 피했고, 술 방울은 헛되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진소백이 눈을 번쩍 떴다.
 “부인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비록 일어났다고는 하나 눈에는 잠기운이 완연했다.
 몸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신도 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 부인은 몸을 돌려 급히 술잔을 감추었다.
 “밤에 목이 마르실까 봐 물이랑 술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배고프시다면 약간의 다과(茶菓)도 있으니 드십시오.”
 “술이란 말입니까?”
 진소백의 눈에서 졸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는 벌떡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어서 오시지요. 마침 한잔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연 부인은 당황했다. 외간남자가 술좌석을 권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같이 앉을 수 있습니까?”
 “자, 괜찮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세상에 혼자 술 마시는 것보다 적적한 것이 없습니다.”
 
 병 두 개, 잔도 두 개, 마주앉은 사람도 둘이었다.
 병 하나에는 술이 들었고 나머지 하나에는 물이 들어 있었다.
 “하하, 주전자에 담지 않고 이처럼 병에 담으니 특이합니다.”
 진소백이 웃으며 술과 물을 동시에 따랐다.
 잔 또한 모양이 같았다.
 흘러내리는 술의 빛깔과 물의 빛깔마저 같으니 어느것이 물이고 어느것이 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가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이 물잔이라는 것만을 기억했다. 자신이 가져 온 물은 먹을 수 있지만 술은 먹을 수 없는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양이 워낙 비슷하니 착각할지도 모른다. 술과 물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가짜는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툭!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연 부인의 손톱이 잡은 잔 가장자리가 작게 떨어져 나갔다.
 흙을 수천 도의 불속에 구워서 만들어지는 잔이었다.
 결코 힘없는 여인의 손톱에 떨어져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됐다. 표시를 했으니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가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표시를 했으니 되었다.
 그녀는 비로소 안심하고 진소백을 마주보며 웃을 수 있었다.
 “어서 드시지요. 전 술을 못 하니 물만 마시겠습니다.”
 진소백도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잔의 술은 술이 아니었다. 마실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마셔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진소백의 손이 술잔을 잡아 입술에 걸었다.
 ‘어서 마셔라. 어서!’
 가짜는 손에 땀이 뱀을 느꼈다. 긴장된 순간!
 애초의 목표를 진소백 스스로 이루어 주려는 순간이었다.
 
 이때였다. 방의 문이 왈칵 열렸다.
 들어온 아이는 연충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의혹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머니, 주무시지 않으셨어요?”
 그는 부엌에서 속을 채우고 돌아오다 진소백이 묵고 있는 손님방에서 대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연 부인은 당황했다.
 진소백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은 마시지 못하게 되었음을 한탄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는 반색하며 연충을 맞았다.
 “아, 어서 오너라. 너도 잠이 오지 않는 게냐?”
 진소백이 연충에게 말을 하느라 술잔을 내려놓자 연 부인은 초조했다.
 ‘이런 성공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저놈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하여튼 그녀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연충을 노려보았다면 아마 연충의 등짝에 구멍이 났으리라.
 
 진소백은 연충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자, 앉거라, 충아! 넌 술을 마시지 못하니 물을 마시도록 하려무나.”
 진소백은 연충에게 물을 따랐다.
 이로써 잔은 모두 셋이 되었다. 모양이 같고 내용물도 같아 보이는 세 개의 잔!
 하지만 그 중 하나의 내용물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가짜 연 부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톱에 의해 이가 빠진 잔을 주시(注視)했다.
 물이 담긴 자신의 잔! 손톱으로 한 귀퉁이를 떼어 내 표시(表示)해 둔 자신의 잔을.
 
 진소백은 웃으며 연충을 보았다.
 “충아! 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손이 무엇인지 혹시 들어 보았느냐?”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연충은 고개를 저었다.
 진소백은 고개를 돌려 연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께서는 혹시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연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연충을 보며 말했다.
 “석년에 뇌문(雷門)의 일맥에서 분뢰수(奔雷手)란 절학이 출현하여 그 빠르기가 천하에 당할 자가 없던 시절이 있었지.”
 연충이 호기심이 이는 듯 눈을 빛냈다.
 “뇌전을 쪼갠다는 뜻이니 굉장히 빨랐겠군요.”
 “그렇지. 분뢰수를 처음 창시했던 분은 뇌공(雷公)이란 분이셨지. 그분께서 어느 날 음마문(陰魔門)이란 마도 문파의 괴수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진소백은 목이 타는 듯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요? 어서 얘기해 주세요.”
 연충의 재촉에 마시지도 못하고 술잔을 다시 내려놓은 진소백은 말을 이었다.
 “그때 강호인들은 분뢰수의 위력을 처음 보았지. 음마문의 마마좌검식(魔魔左劍式) 역시 굉장한 쾌검식이었는데... 뇌공은 분뢰수를 시전하여 적이 사 초의 검식을 휘두르는 동안 무려 십이 초를 연이어 공격해 내었단다.”
 연충은 흥분했다.
 “음마문이라면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진 숙부가 일 년 전 상대하셨던 사공두란 자가 음마문의 후손이라면서요?”
 진소백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맞다. 뇌공에 의해 후손이 끊겼던 음마문을 부활시키려 했던 자였지!”
 “그런 자도 진 숙부를 당하지 못했으니 진 숙부의 무공은 정말 굉장하겠군요?”
 진소백은 담담히 웃으며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강호인 중에서는 뇌공께서 창안하신 분뢰수의 가공할 속도 앞에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단다. 분뢰수는 그 위력 또한 매우 뛰어났지.”
 옆에서 얘기를 듣던 연 부인이 끼여들었다.
 “그럼, 분뢰수가 가장 빠른 무공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연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세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니...”
 진소백이 소리내어 웃었다.
 “분뢰수의 속도에 조금도 못지않은 무학이 그 후로 하나 더 강호에 출현했답니다.”
 연충은 강호 이야기를 듣자 신이 났다.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뭐죠? 어서 말해 주세요, 진 숙부!”
 연충의 말에는 어리광이 섞여 있었는지라 진소백은 미소 짓는 한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공문(空空門)이란 문파에 관해 들어 보았느냐?”
 연 부인이 끼여들었다.
 “혹시 신투(神偸)들의 문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부인께서도 아시는군요.”
 “하지만 그들이 분뢰수에 버금가는 무학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좀... 믿기가 어렵군요.”
 진소백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들의 공공신수(空空神手)는 비단 빠르기가 분뢰수에 조금도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분뢰수를 능가하는 이점도 있습니다.”
 연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떤 점이 분뢰수보다 좋은가요, 진 숙부?”
 “제어(制御) 능력이지. 분뢰수는 빠른 데다가 가공할 속도가 덧붙여져 마음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단다. 하지만 공공신수는 달랐다. 엄청난 속도에다가 힘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
 연충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진소백은 미소했다.
 그는 젓가락 한 쌍을 들어 연충에게 주었다.
 “이것을 잡거라.”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를 빼내 공중으로 날렸다.
 머리카락은 허공 중에서 흔들리며 내려왔다.
 “자, 이제 젓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보거라.”
 “좋아요. 뭐, 쉬울 것 같은데요.”
 연충은 젓가락을 놀려 머리카락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짐작만큼 쉽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은 너무 가벼운 탓에 젓가락이 일으키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반응하며 젓가락의 공격을 피했다.
 진소백이 연충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쉽지 않지? 이유를 알겠느냐?”
 연충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젓가락을 가져 갈 때마다 움직이는 머리카락을 보니 아마 젓가락이 일으킨 바람에 날리는 탓이 아닐까요?”
 “정확이 맞추었다. 다시 말하자면 네 힘이 머리카락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연충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힘의 세기가 아니군요. 빠르면서도 적당한 힘의 사용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렇다. 정말 가르칠 만한 아이구나. 자, 다시 한 번 해보겠느냐?”
 연충은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이 내려오길 기다려 젓가락을 오히려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잘했다.”
 “헤헤, 진 숙부의 가르침대로 했을 뿐인데요, 뭘!”
 진소백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헤헤거리는 연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혈왕교(血王敎)의 난이 있었을 때 분뢰수는 그다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혈왕교에는 혈왕표(血王飄)란 경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공은 몸을 극단적으로 가볍게 하여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따라 떠다니는 신법(身法)이었다. 분뢰수는 혈왕교의 일반 고수들에게는 먹혔지만 혈왕표를 극성으로 익힌 자들에게는 타격을 줄 수 없었지.”
 연충이 눈을 빛냈다.
 “알겠어요. 분뢰수의 힘이 너무 강했군요. 그들은 좀 전에 머리카락이 제 젓가락을 피한 것과 같은 원리로 분뢰수를 피했구요.”
 “그렇다. 분뢰수가 날아올 때마다 혈왕교의 고수들은 저절로 피할 수가 있었지. 너무 강한 것도 때때로 약함만 못한 경우가 있는 법이다.”
 
 다시 연 부인이 물었다.
 “그럼, 공공신수는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이 없나요?”
 진소백은 그녀를 깊은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속도와 힘의 배분(配分)을 절묘(絶妙)하게 조화시킨 무공이죠.”
 연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무공이라면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소백이 빙긋이 웃었다.
 “너는 볼 수 있단다.”
 
 
 제삼장. 주검 위에 매화 피니, 태원(太元)으로 돌아가는구나.
 
 1
 사방에 가득한 것은 개 짖는 소리와 날카로운 호각 소리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어둠 또한 어디를 가더라도 깔려 있었다.
 호각 소리의 고음(高音)이 쫓기는 자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드는지는 도망자의 입장이 되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연옥천 또한 예전에는 그러한 느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조금의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어찌 당할 것인가?
 그리하여 비로소 지금에 이르러서야 호각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초조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좋지 않은 곳으로 들어왔다.’
 사방을 훑어보던 연옥천은 신음했다.
 지세(地勢)가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필히 천험의 절벽(絶壁)과 만나게 되리라.
 쫓기는 자가 무슨 여가(餘暇)가 있어 원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마는, 절벽에 면(面)한다면 더 이상 추적자들을 피할 도리가 없지 않는가?
 ‘다른 도주로는 없을까?’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고, 잠시 망설인 사이에 뒤에서 쫓아오는 암흑견(暗黑犬)의 짖는 소리만 가까워졌을 뿐이다.
 연옥천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도리가 없다.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그가 몸을 날리고 얼마 되지 않아,
 컹! 컹! 컹!
 암흑견 세 마리가 어둠을 가르며 달려왔다.
 어둠 속에서 암흑견의 후각을 피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천라지망을 뚫고 열흘 이상이나 암흑견을 따돌릴 수 있는 자는 더 더욱 드물었다.
 취보의 보주 연옥천!
 강호에 알려진 그의 능력은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숨겨진 연옥천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연옥천은 땅을 박찼다. 멀지 않은 곳까지 암흑견과 추적자들이 쫓아왔음을 아는 그는 매우 초조했다.
 그 와중에도 발에 밟히는 땅의 감촉이 뭔가 다름을 느낀 것은 행운이었다.
 연옥천은 몸을 돌려 세웠다.
 아마 겨울 동안 굶어 죽은 족제비의 시체인 모양이었다.
 주위의 풀은 겨울 동안 마를 대로 말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엔 유난히 눈이 적었다.’
 연옥천은 지체없이 족제비의 마른 시체와 풀부스러기를 품에 담았다.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그가 몸을 날려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암흑견이 나타났다.
 이제 추적자들은 지척(咫尺)으로 다가왔다.
 
 숲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절벽이 나타났다.
 연옥천은 몸을 멈추었다.
 절벽 멀리로 낙양(洛陽)의 모습이 보였다.
 열흘간이나 쫓기는 와중에 악착같이 달려서 겨우 취보(鷲堡)가 있는 곳까지 돌아왔는데 여기서 잡힌다는 말인가?
 그는 몸을 돌렸다.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니 더 갈 곳이 없었다.
 뒤에는 숲! 지금 그 숲속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서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착같이 추격해 오던 추적자들이 이처럼 여유를 부리는 것은 오직 하나를 의미했다.
 연옥천이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것!
 컹컹 짖어대는 암흑견 세 마리는 앞에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추적자들이 십여 명 있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사람과 개들이 만든 벽의 틈이 갈라지며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청의를 걸친 여인! 걷는 모습이 흡사 안개가 흐르는 듯 유유롭다.
 벽하(碧霞)!
 
 연옥천은 그녀를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서책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사내!
 그 사내 곁에 서 있던 여인이 이 여자임을 연옥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벽하!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은 나를 쫓는 자들의 배후가 역시 그라는 뜻이로군.”
 벽하는 절벽 너머를 바라보더니 나직이 한숨쉬었다.
 “낙양이 저기 보이건만 잡히게 되다니... 하지만 취보에 남은 식구들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연옥천의 눈이 흔들렸다.
 벽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곧 만나게 되다니? 자신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설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너희는...”
 벽하가 그의 말을 잘랐다.
 “연 부인을 이미 만났어요. 무척이나 현숙한 분이더군요.”
 연옥천은 노갈했다. 부탁을 들어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이다.
 그런 여인이 취보에서 아내를 만났으니... 결과가 어떠한지는 뻔하지 않은가!
 “네가... 감히 그녀를 어떻게 하였다면 난... 결코 용서 않겠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
 벽하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은 잘못이 없는 사람인데... 하지만 궁(宮)의 명은 지엄(至嚴)하니, 당신은 운이 없다고 여기세요.”
 연옥천의 몸은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전신이 피투성이라 서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 그의 입에서 큰 외침이 나오는 것은 순전히 의지의 힘이었다.
 “대답해라. 그녀를 어찌한 것이냐?”
 벽하는 낮은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은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연옥천은 몸을 비틀거렸다. 또다시 이런 말이라니.
 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분노와 허탈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충아(忠兒)에게도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 아이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휴! 제가 아끼는 수하 하나를 남겨 두고 왔으니 아마 지금쯤은...”
 벽하의 말투는 진심으로 미안한 것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자신의 일처리를 은근히 자랑하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매우 무섭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 배후에 있는 ‘그’는 더욱 무서울 것이다.
 
 연옥천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적들의 잔인함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무공을 모르는 연충이 어찌 당해 내겠는가?
 지금 시각은 묘시!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늘이 밝아 오리라.
 하지만 연옥천의 마음은 영원히 밝아지지 못할 것이다.
 
 * * *
 
 연충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아버지, 어머니에게 닥친 변(變)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난(苦難)도 조금 짐작만 할 뿐, 지금 당장 연충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진소백이 말했던 공공신수(空空神手)였다.
 “제가 어떻게 공공신수를 볼 수 있나요?”
 진소백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보여 주기 때문이지.”
 “정말 진 숙부께서 공공신수를 익혔나요?”
 “공공문의 진전(眞專)은 세월이 흐르면서 개방의 태상장로였던 철혈개(鐵血丐)란 분에게 들어갔단다. 난 운이 좋아 그분에게 공공신수를 배울 수 있었단다.”
 연 부인이 감탄하여 말했다.
 “그렇더라도 공공신수가 그토록 빠른 무공이라면 익히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운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제 손은 무척 빨라졌죠.”
 
 연충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지 채근했다.
 “어서 보여 주세요. 어서요.”
 “그래, 잘 보거라.”
 진소백은 자신의 잔과 연충의 잔을 잡더니, 손을 빨리 움직여 두 잔을 서로 섞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처음엔 천천히 섞어서 손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휘웅!
 조금 지나자 두 잔을 잡고 있는 손이 허공 중에서 띠로 변한 듯 뿌연 그림자로 화(化)했다.
 “와, 어느것이 어느건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어요.”
 연충은 진심으로 감탄했고, 가짜 연 부인도 어느 정도 감탄했다.
 그녀도 넋을 잃고 진소백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띠로 변했던 진소백의 두 손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 보니 당연히 두 개의 떨어진 손인데 어떻게 좀 전에는 하나의 막(幕)으로 보였는지 신기했다.
 “자, 어느것이 네 잔인지 알겠느냐?”
 구별이 안 되도록 섞었던 잔들이니 구별이 될 리가 없었다.
 원래 모양조차 같았던 잔들이었고, 들어 있는 내용물도 보기에는 똑같아 보였다. 연충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나를 골랐다.
 “이거 같아요!”
 진소백을 위해 따른 술은 물과 똑같은 형태이니 내용물로 구별이 될 리도 없었다.
 그는 그냥 아무거나 손 닿는 대로 골랐던 것이다.
 진소백이 껄껄 웃었다.
 “하하, 마셔 보면 알겠지. 만일 잘못 골랐다면 술을 고른 것이니, 벌주(罰酒)를 마시는 셈이 되겠구나.”
 연충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곧 명랑하게 웃었다.
 “하하, 이것은 물이에요. 제가 맞게 골랐군요.”
 
 연 부인은, 아니, 가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녀로서는 누가 술을 마시건 상관이 없었으나 기왕이면 진소백이 마셨으면 했다.
 진소백이 술을 섞을 때 쏟지 않을까 염려도 했으나 그토록 빨리 술잔을 섞고서도 한 방울도 쏟지 않고 잔을 다시 내려놓자 그녀는 감탄했다.
 공공신수가 천하제일쾌란 이름을 듣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도 느꼈다.
 게다가 연충이 운 좋게도 물이 든 잔을 골라 마시자, 그녀는 더욱 안심했다.
 이제 진소백에게 술을 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 공자께서 졌군요. 그 벌주는 진 공자께서 마셔야 하겠어요.”
 진소백은 쓰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잔을 아직 오른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혼자서 술 마시는 건 취미없는데. 연 부인께서 같이 마셔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전 술을...”
 “그럼, 앞에 놓인 것이라도 함께 드시지요.”
 물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짜는 이빨이 빠진 자신의 잔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좋아요. 그럼!”
 
 “자, 한번에 마시는 겁니다.”
 진소백이 호기있게 말했다. 가짜 연 부인도 잔을 들었다.
 그녀는 진소백이 술잔을 비우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내심으로 매우 통쾌해 하면서.
 그녀는 이 진소백이란 청년이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자라고 들었는데, 오늘 자신이 이처럼 쉽게 제압하는 것이다.
 연충이 진소백에게 술병을 들고 와서 물었다.
 “한잔 더 하시겠어요, 진 숙부?”
 진소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그만 되었다. 옆의 병에 든 물이나 한잔 다오.”
 “왜요? 지금도 술을 마셨잖아요?”
 “아니, 아니란다. 내가 마신 건 그냥...”
 
 진소백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연충의 수혈을 짚었다.
 연충이 잠에 빠지자 그는 가짜 연 부인을 돌아보았다.
 가짜 연 부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진소백이 담담하게 한 가지를 물어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벌써 쓰러질 때가 되었거늘 왜 아직 멀쩡한 게요?”
 그녀가 자신이 마신 것이 물이 아니고 술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 게다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었다.
 중수(重水)를 섞은 술!
 마신 자는 그 누구라도 오장육부가 성하지 못하는 술이었다.
 그녀는 강한 불신(不信)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이 내려놓은 잔을 한번 더 확인했다.
 이가 빠진, 자신의 술잔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진소백이 나직이 한숨쉬었다.
 “누군가에게 움직임이 보인다면 공공신수를 천하제일쾌(天下第一快)의 반열에 올린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목을 비웃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잡고 있던 잔에서 오른손을 떼었다.
 가짜가 표시한 것과 똑같은 위치에서 이가 빠져 있는 잔의 가장자리가 드러났다.
 가짜 연 부인은 피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연충의 술잔과 섞을 때도 대단한 속도라 생각했었는데 언제 자신의 술잔과도 교환했다는 말인가?
 온몸의 힘이 사라짐을 느끼면서 그녀는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정신은 있는데 내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공공신수!
 빠른 손은 빠른 눈에서 나온다.
 진소백의 눈은 가짜가 손톱으로 잔에 표시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연충의 잔과 자신의 잔을 섞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잔과 가짜 연 부인의 잔을 바꿨던 것이다.
 당연히 손톱으로 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충은 아직도 그녀가 가짜임을 몰랐다.
 힘없이 어머니가 쓰러진다면 연충은 달려들리라.
 진소백이 연충을 잠재운 것은 그런 이유였다. 원래 진소백은 혼자서 그녀를 제압하려 했으나 연충이 오는 바람에 일이 늦어졌다.
 연충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가짜 또한 눈치를 못 채도록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처럼 복잡한 일을 행했던 것이다.
 
 진소백은 가짜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문질렀다.
 역용(易容)이 지워지면서 눈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간 표독해 보이는 여인의 본모습이 나타났다.
 “밤늦게 아들이 돌아왔는데도 걱정도 않고 집안에 있었고, 저녁을 먹었는지조차 물어 보지 않았다. 남편이 가장 좋아한 화초(花草)조차 모르는 데다가 손으로 술잔을 잡아뜯는 무공마저 지니고 있다니... 네 주인은 어떻게 해서 너처럼 멍청한 수하를 뒤에 남겨 둔 것이냐?”
 여인이 고함을 질렀다.
 “네놈에게 당하다니... 흥, 하지만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인이 고함을 질러 가며 위협했으나 진소백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난 그저 연 부인에게 아무런 일도 없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넌 지상에서 지옥이 뭔지를 알게 되리라.”
 여인은 진소백의 눈빛을 보았다.
 투명하여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
 어쩌면 이것이 그의 진짜 눈인지도 모른다.
 서서히 그녀의 전신으로 공포가 스며들었다.
 
 
 2
 조금만 있으면 날이 밝을 것이다.
 연옥천은 새로운 태양을 볼 수 있을까?
 그는 새해의 태양조차 보지 못했다.
 숲속에 숨어 도망 다니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곳으로 달려온 까닭은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벽하(碧霞)란 여인은 말한다.
 이제 무엇을 위해서 더 살 것인가?
 연옥천은 자신을 추적해 온 벽하 일행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이 서리서리 피어올랐다.
 어떻게 그냥 죽을 수 있을까?
 만일 앞으로 자신이 살아 간다면 그건 복수심 때문일 것이라고 연옥천은 생각했다.
 문득 그는 사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매화나무 아래!
 항상 온화한 얼굴로 화초를 가꾸셨던 자신의 사부!
 
 연옥천이 어릴 때, 어느 날 사부가 난초의 뿌리를 보여 주셨다.
 둥근 원구 모양의 물체!
 어떻게 저런 뿌리에서 난초의 우아한 자태가 발현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사부는 웃으며 말했었다.
 “난초의 잎은 부드럽기 그지없지만 이 뿌리는 굳세며 튼튼하다. 만일 난초가 뿌리의 형태로 겨울의 고난을 이겨 내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의 난초들이 살아남겠느냐? 넌 왜 난초의 뿌리가, 아니, 세상 모든 식물의 씨앗이 그토록 튼튼할 수 있는지 아느냐?”
 연옥천은 그때 어렸으니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한참 생각한 후 그는 겨우 대답했었다.
 “스스로에게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부이신 매화노인(梅花老人)이 껄껄 웃었다.
 “허허, 비슷하구나. 항상 스스로의 내면을 보는 자만이 더할 나위 없는 강함을 얻을 것이다. 허허허!”
 그렇게 사부는 웃으셨다.
 
 컹! 컹!
 연옥천의 회상은 암흑견이 짖는 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오너라, 이놈들!”
 처음 연옥천을 추격할 때, 암흑견은 열 마리였다.
 연옥천은 지난 열흘간 쫓기면서 일곱 마리의 암흑견을 죽였다.
 동료를 죽인 것을 아는지 남은 세 마리가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릉 댔다.
 하지만 공격은 연옥천이 먼저 했다.
 그는 허리에 맨 검을 빼내어 개를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너무 지친 탓인가?
 속도는 있었지만 힘이 전혀 없었다.
 
 “흥,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공격하다니.”
 주위의 청의인들이 냉혹히 외치며 공격을 위해 날아올랐다.
 하지만 공격당한, 개를 잡고 있던 세 명은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옥천의 검끝에서 피어난 세 송이의 검화(劍花)가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으므로.
 어쨌든 이 정도면 열흘간의 모진 추격을 당한 사람의 대항이라고는 믿기 힘든 위세(威勢)였다.
 하지만, 연옥천의 이 공격은 그 자신에게 전혀 이롭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암흑견을 쥐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으니 개들이 어찌 되겠는가?
 손을 놓자 개들은 풀려났다. 풀려난 암흑견들은 맹렬히 짖으며 연옥천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흔히 인간은 개를 가까이 두고 기르는 탓에 개의 무서움을 간과(看過)하기 쉽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개는 맹수(猛獸)에 들어간다.
 같은 몸집이라면 개를 당할 수 있는 짐승은 그리 많지 않다.
 작은 아이만한 몸집의 개가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무사할 수 있는 성인(成人)이 그리 많지 않음이 진실이었다.
 두세 마리의 늑대조차도 한 마리의 훈련받은 사냥개를 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지금 연옥천에게 달려드는 것은 개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분분히 뛰어오른 청의괴한들도 그에게 검과 도를 휘둘러 오고 있었다.
 연옥천은 물러났다.
 지쳤음에도 물러나는 속도만은 매우 빨라 적들의 공격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 절벽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불행(不幸)이었다.
 툭!
 그가 절벽 끝에서 가까스로 멈추면서 굴린 돌멩이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달려들던 적들도 멈추었다. 섣불리 연옥천에게 덤볐다가 같이 절벽아래로 동반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개들에게는 이런 지능이 없었다.
 컹!
 절벽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는 암흑견 세 마리는 어둠을 가르며 뛰어왔다.
 개의 뒤쪽으로 무기를 든 청의인들이 대기했고, 연옥천은 절벽에 가로막혀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급히 검을 던져 내었다.
 휘류류-!
 검은 허공을 선회(旋回)하며 날아갔지만 암흑견을 맞추지는 못했다. 대신,
 챙! 채챙!
 뒤쪽의 청의인들을 잠시 주춤거리도록 하는 일은 겨우 성공했다. 연옥천의 원래 의도는 이것이었나?
 암흑견은 다시 도약(跳躍)했다. 단숨에 연옥천의 목을 노릴 수 있는 거리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연옥천의 수중에는 이제 검이 없었다. 대항할 무기를 던져 버린 연옥천은 급히 품을 더듬었다.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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