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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불패혼 1권-1

2015.01.09 조회 973 추천 4


 1권 비정무정(非情無情) 편.
 
 서장
 
 하늘이 높다.
 그리고 땅은 깊은 곳이다.
 한 무리의 무사들은 칠흑처럼 검은 옷을 걸쳤으며, 다른 일단의 무리는 눈보다 새하얀 백의를 입었다.
 전혀 다른 흑백(黑白)의 두 옷은, 그러나 쉽사리 구분되지 않고 있었다.
 붉은 빛!
 흑백의 두 옷가지에 한결같이 낭자한 선혈들이 쉬지 않고 꽃을 피워 올린 까닭이다.
 지금 장내는 매우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오직 한 줄기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하지만 불과 조금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전혀 조용하지 못했었다.
 선연한 붉은 피의 무지개와 어울려 귀를 찌르는 비명소리와 아우성으로 덮여 가히 규환지옥을 방불케 하였었다.
 백의 무사 하나가 흑의 무사의 목젖을 검으로 찌르면, 그 순간 이미 또 다른 흑의 무사의 연월도가 백의 무사의 두개골을 잘라내어 버리곤 했었다.
 둔탁한 절단음!
 비릿한 내음과 함께 흘러내리는 회색의 유기물!
 끈적한 전율이 몸을 감싸오지만, 무사에겐 그러나 회심의 미소를 지을 여유조차 없었다.
 잘라낸 적의 뇌수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무수한 백의 무사들의 창날이 그의 몸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조용해졌다.
 스물 다섯의 백의 무사는 모두 죽었고, 역시 스물 다섯의 흑의 무사들 중 단지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유일한 한 줄기 숨소리의 주인이 바로 그 유일한 생존자였다.
 시관호(施觀昊)!
 그는 십여년 전 나이 열 셋에 검은 수염에 검은 머리, 검은 눈썹을 지니고 항상 검은 장포만을 상징처럼 걸치고 다니는 한 사람에 의해 거두어졌다.
 그 장년인은 이제 불혹(不惑 ; 나이 40)을 훨씬 넘겼다. 그렇지만 아직도 처음처럼 오직 검은 장포만을 즐겼다.
 검은 장포인은 항상 스스로를 흑제(黑帝)라고 칭한다.
 흑제는 시관호의 유일한 주군!!
 그의 명령이라면 목숨마저도, 심지어 그보다 더한 것마저도 바칠 수 있다는 것이 시관호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오늘의 싸움에게 그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 덕분이었을지도 몰랐다.
 백의 무사들은 흰 수염에 흰 머리칼, 흰 눈썹을 지닌 백색의 장포인, 백제(白帝)의 부하들이었다.
 그들과 싸우라는 건 흑제의 명령이었다.
 물론 백의 무사들은 그들의 주군인 백제의 명령을 받았을 터였다.
 흑과 백이 어울리지 못하듯, 흑제의 수하와 백제의 수하 역시 어울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싸우라! 그리고 이기라!!”
 각자가 모시는 주군들의 명령이 떨어지자 흑과 백 각각 스물다섯명씩의 오십명 무사들은 목숨을 내어건 전투를 개시했다.
 싸움은 처절했다.
 그 처절하기 그지 없는 싸움에서 시관호는 한쪽 팔을 잃으면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그것은 결론적으로 흑제의 병사들이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바로 그 이유로 시관호가 웃고 있는 것이다.
 동료들의 죽음이 뼈아프고, 잘려나간 팔뚝이 전해오는 고통은 영혼까지 저며낼 듯 시렸지만, 시관호는 웃을 수 있었다.
 무사에게 있어 승리란 비길 데 없는 영광!!
 그 영광을 자신의 주군에게 돌릴 수 있었기에 시관호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잠시 후, 흑제와 백제가 나타났다.
 그들은 어디에 가건 항상 맞이하는 수하가 있다.
 각각 흰 옷과 검은 옷을 걸친 무사들이 바로 그들의 수하였으며 누구보다 공손한 자세로 맞이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흑제와 백제를 맞이한 사람은 오직 한명이었다.
 바로 시관호였다.
 “너만 살아 남았는가?”
 흑제의 짧은 물음에 시관호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속하 영광되이 죽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오나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 기필코 이기기는 하였습니다.”
 흑제는 아무런 표정없이 고개를 조금 까닥였다.
 그는 백제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형님께서 사용하셨던 수련법은 몇번이었습니까?”
 백제가 대답했다.
 “우리가 정리해 두었던 구백칠십팔종의 수련 법 중 삼백칠십오번에 해당하는 것이었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는 듯 하군!!”
 “제가 사용했던 건 삼백칠십구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결과를 보니 제 생각에도 형님의 방법과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듯 보이는군요.”
 “그렇구만. 팔을 잃은 놈만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건 .... 아무래도 ..”
 백제는 품에서 흰 천으로 쌓인 책자 한 권을 꺼내들었다.
 그와 동시에 흑제 역시 검은 천으로 쌓인 책자 한 권을 꺼내든 뒤, 안을 펼쳤다.
 그들은 작은 글자들과 그림으로 빽빽히 채워진 그 책자를 휙휙 넘기더니 원하는 내용을 찾아, 붓으로 지워버렸다.
 “이 방법도 폐기시키겠습니다. 이제 대충 스무 가지 정도로 적절한 수련법이 정해지는 것도 같습니다만 ..”
 흑제의 말에 백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멀었네. 적어도 세 가지 이하로 줄일 수 있을때까지 계속 시험해 보도록 하세, 동생!!”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시관호는 잠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형이며 동생이라니!!
 게다가 저 다정스런 대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주 ... 주군!! 두분께서는 .. 적이 아니셨습니까?”
 물어보는 시관호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흑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적이라니!!? 나와 같은 부모를 두었으며 또한 함께 흑백교를 이끄는 우리 백제 형님께서 어찌 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더냐?”
 순간 시관호는 사방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렇다면 싸우란 명령은 무엇인가?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았고, 또한 그들과 함께 어울린 추억을 생각했다.
 자신들은 왜 싸웠을까?
 왜 피를 흩뿌리며 싸늘한 시체로 바닥에 누웠는가?
 아충! 아태! 아표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그 피와 그 전율과, 지금도 생생히 오른팔에서 전해지는 고통은 대체 어디를 향해 던져진 화살인가.
 참기 힘든 허탈과 굴욕, 그리고 분노가 한꺼번에 끌어올라 시관호는 끝내 참지 못하였다.
 “그랬다면 왜 우릴 싸우라 하시었소이까, 주고옹-!”
 하지만 흑제의 대답은 태연했다.
 “인간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는 수련법은 종류가 무척 다양하지. 하지만 어느게 최선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우린 그걸 알아내려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 너희가 아니면 누구에게 시험해 본단 말이냐?”
 “시 ... 시험?”
 시관호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흑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이럴때가 꽤 당혹스러워!! 단순한 시험대상인 너와 같은 놈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순간이면 나는 항상 ...”
 슈숙!
 흑제의 오른손끝이 빠르게 움직이고 한 줄기 검은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시관호의 미간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구멍에서는 붉은 핏물이 솟구쳤지만, 곧 검은 색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쿠웅!
 시관호의 육중한 몸집이 산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막 지풍을 쏘아낸 검지를 천천히 안으로 접어넣으면서, 쓰러진 시관호의 시체 위로 던진 흑제의 마지막 말은 짧았다.
 “ ... 기분이 나빠!!”
 
 
 *제1장. 소림의 기묘한 아이.
 
 1.
 두사량(杜査良)은 스물 여덟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물어보면, 두사량은 항상 광(光)과 정(庭)이라는 두 글자를 입에 담는다.
 두광정은 두사량의 조상뻘이 되는 사람으로서, 규염객전(虯髥客傳)이라는 전기(傳奇)를 쓴 사람이었다.
 두사량은 항시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도 언젠가는 협의에 찬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한 권의 책을 꼭 완성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은 여의치 않았다.
 의지는 마음에서 비롯되나 글은 하늘에서 온다하였든가.
 진정 뛰어난 문장은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고, 하늘의 서고에 담겨 있어 우연히 시인의 마음속에 낚여진다 하였다.
 두사량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모든 시간을 그 일만을 생각하고 모든 심력을 하나의 작업에 쏟았건만, 그가 쓴 문장을 읽어볼 사람들은 저마다 하품하며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두사량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이 그러하듯 두사량도 자신의 내부보다는 외부쪽으로 실패의 원인을 돌렸다.
 즉, 만족스런 소재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신선한 소재.
 누가 들어도 고개가 끄덕일만큼 신비롭고 기묘한 일을 경험한다면, 자신 역시 규염객전에 조금도 못지 않은 걸작은 창작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두사량은 마침내 그럴 듯한 소재를 발견했다.
 
 “그렇소. 정말 기이한 소년이었지.”
 오십줄에 가까워 보이는 중노(中老)의 어투는 처음부터 두사량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날이 무딘 칼날로 다듬었는지, 듬성 듬성 결이 빠진 수염을 턱밑에 매단 중노는 ‘기이한 소년’이란 단어를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방은 시끄러웠다.
 그도 당연한 노릇이, 이곳이야말로 인근 마을에서 가장 번화하며 가장 사람이 많이 찾고 가장 술맛이 향기롭다는 번창루(繁昌樓)이기 때문이다.
 두사량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으며 손뼉을 두 번 쳤다.
 다가온 점소이에게 세 접시의 안주와 두 병의 향기로운 술을 주문하는 걸 본 중노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헤헤. 본래 술이란 마음을 풀어지게 만들지요. 또한 기름진 안주는 입을 풀어지게 만드니, 마음이 풀어지고 입이 풀어진 사람이 털어놓지 않을 이야기란 세상에 아주 드물기 마련이오. 헤헤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간단한 진리를 몰라 고민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오.”
 다행히 두사량은 그러한 진리를 잘 알고 있다
 또한 물려받은 유산 덕분에 그 진리를 실천할 능력도 솔찬하게 갖추고 있었다.
 술이 나오기가 무섭게, 두사량은 중노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자아 어서 말해보시오. 노인장이 소림에서 보았다는 그 기이한 소년은 대체 무엇이 그리 기이하였는지를.”
 “헤헤. 너무 서둘지 마시구랴. 일단은 술이 몇 순배 돌아가야만 혓바닥에 기름칠이 잘 될 것 아니겠소.”
 술잔이 몇번 채워지고 비워짐을 반복했다.
 과연 효과가 있어, 중노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두사량은 마름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러한 얘기야말로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목달아하던 훌륭한 전기의 바람직한 소재가 아닌가.
 
 2.
 중노는 자신의 이름이 사달평(査達平)이라고 밝혔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했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가 늘상 그러하듯, 그가 철이 들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모마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아누워 버리고 말았다 한다.
 백방으로 의원을 구하고 좋다는 약재는 모두 써 보았지만 차도가 없자, 사달평은 부처님의 영험을 빌리고자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 소림사에 기부했다.
 하지만 부처님의 영험을 기대하기엔 너무 늦었던 걸까?
 부모님은 끝내 돌아가셨고, 사달평은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한다.
 “하지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소. 그 때, 재산을 기부했던 그 일을 말하는 거외다. 바로 그 인연 덕분에 내가 이후에 소림사에 들낙거릴 수 있었단 말이거든. 그 기묘하고도 신기한 소년을 본 것은 바로 오년 전 내가 소림사에 들어갔을 때였다오.”
 소림은 일반인에게는 신성한 불도량이며, 무림인들에게는 천하 만무의 종주(宗主)로 숭앙받는 장소이다.
 사달평은 전재산을 털어 바쳤건만 끝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말았다는 과거의 일을 들추어내며, 반 협박, 반 애원으로 소림에 출입하곤 했었다.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은 사달평과 같은 자에게, 소림의 객방은 따스한 잠자리와 맛있는 절밥은 공짜로 제공해 주는 최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사년전의 그날도 절밥을 푸짐히 먹고 나서 잠을 청했소. 한데 삼경은 넘어섰고 사경도 깊어갈 무렵, 저녁 먹었던 게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었지. 눈을 뜬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소. 뒷간의 위치를 알고 있기는 했으나 급한 처지에 그곳까지 달릴 수 있남!! 워낙에 멀어서 말이외다. 그래, 아무곳이나 으슥한 장소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녔지. 마침내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는 ... 흐흐흐. 알고 있지요? 그 쾌감 말이요.”
 뿌지지직!
 나무 그늘 아래에서 푸짐하게 회포를 푼 사달평은 문득 주변 경물이 이전과는 매우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급히 달려오느라 되돌아갈 길을 외워둘 생각같은 건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낯선 장소였다.
 보이는 길들 또한 생소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돌아다녀도 객방으로 통하는 낯익은 길목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 알았지만, 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주변에 펼쳐져 있던 기문진 하나를 통과해 들어간 거였소. 정말 우연이었지. 어쩌면 내가 뒷일을 볼 장소를 찾는데 열중해서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은 덕분인지도 모르겠소만. 하여간 그러한 우연이 아니었다면 난 결코 그 신기한 광경을 보지 못했을 꺼요. 헤헤 본래 세상의 일이란 게 그렇지 않소? 우연이라는 장난끼어린 여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신기한 일이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아무리 돌아다녀도 나갈 곳을 찾지 못한 사달평은 지쳐서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설명할 수 없이 기이한 음향이 스물거리며 귓전을 간지럽혀 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정말 신기한 소리였지. 웅얼거리는 것이 무슨 주문을 읊조리는 것 같았소. 내 귀를 간지럽히며 파고 들더니 심장까지 기어가서는 내 심장을 마구 뒤흔드는 듯 하였다오. 아아 절대로 불문의 경전을 외는 소리는 아니었소. 나도 전재산을 쳐박을만큼 뻔질나게 절간을 들락거렸는지라, 왠만한 건 귀동냥으로 알고 있거든. 맹세하건데 그건 틀림없이 주문을 외는 소리였소. 아주, 아주 아주 사이(邪異)한 주문소리였다오.”
 신성한 소림의 내부에 난데없이 떠도는 사이한 주문 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달평은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문이 들려오는 길을 더듬어 따라갔다.
 한참이 지난 후에 그가 도착한 곳은 파란 불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는 나무집 앞이었다.
 “주문은 바로 그 나무집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소. 하지만 난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지. 왜냐구? 생각해보시오! 깜깜한 밤에, 그것도 기분나쁜 웅얼거림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나무집! 게다가 그 집에서는 인광처럼 기분나쁜 시퍼런 빛이 넘실거리고 있으니 누군들 접근하고 싶어지겠소이까?!!”
 하지만 사달평은 그리 오래 참지 못했다.
 본래 호기심이란 어떤 종류의 두려움도 쉽사리 극복해 내는 마물이기 때문이다.
 사달평은 잠시 후, 마침내 나무집으로 다가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년을 보게 된 것이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소년!
 기묘한 푸른 빛은 바로 그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소년의 몸이 바닥에서 다섯자 정도 둥실 떠 있다는 점이었다.
 전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잘 발달된 근육은 어느 것 하나 넘침과 모자림이 없었으며, 굴강한 남성미와 세련된 여성미를 함께 풍겨내었다.
 오직 한 가지!
 왼쪽 이마에서 시작해 왼쪽 눈을 거쳐, 왼쪽 턱에 이르는 긴 검흔만이 그의 몸에 존재하는 유일한 흠이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이 사달평이 놀랍다는 말을 내뱉는 건 아니오. 놀랄 일은 이제부터 겨우 시작이니까.”
 그가 소년을 지켜 보고 있는 순간, 소년의 주변으로 네 명의 승려들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풍기는 기도로 보아 소림의 승려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소년의 몸뚱이를 바라보더니 .... 놀랍게도 몸에 걸친 가사를 훌훌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한결같이 굳은 표정으로 각자의 자리를 잡더니, 소년의 몸뚱아리 곳곳을 애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말이오.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니깐!! 젠장. 세상이 말세지. 아무리 소년의 몸뚱이가 잘빠졌다고 해도 같은 남자 아니겠소? 게다가 부처님을 모신다는 승려들이 그 몸뚱이를 탐하다니. 물론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소. 직접 본 나조차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라오.”
 한참이나 소년의 가슴과 허벅지와 살결을 더듬던 승려들은 지친 표정으로 사라졌다.
 꼼짝도 않고 굳어 있던 사달평은 승려들이 사라지고 나자, 문득 소년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졌다.
 잠든 듯 눈을 감은 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승려들이 혈도를 짚어 놓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쌍하다고 생각했지. 어린 나이에 승려들에게 잡혀와서 견디기힘든 치욕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오. 그래서 내가 조금 도움을 주고 싶었소.”
 그러한 이유로 사달평은 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소년의 가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사달평은 한 가지를 느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사실인데 그 소년은, 그 소년은 ....”
 음침한 어조로 차갑게 말하며 사달평은 자신의 말을 끝맺음 했다.
 “ ... 죽어 있었다오!”
 
 3.
 “정말이오. 내 이 두손을 똑똑히 느꼈소. 그의 심장은 조금도 뛰지 않았으며 호흡도 없었소. 믿어주시오.”
 손짓 발짓을 해 대며 호소하는 사달평을 바라보며, 두사량은 미간을 지푸렸다.
 소년의 몸에 흘렀다는 푸른 빛은 과연 유령의 빛이었을까?
 죽은 소년의 육체를 탐해 소림 승려들이 그를 가두어 둔 것일까?
 두사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육체를 탐하는 듯 보이던 소림 승려들의 행동은 실상 근육과 근골을 밀고 당겨 내공을 전수하는 불문 대법의 하나이리라.
 흔히 추나요법이라든지, 추궁과혈이라든지 하는 이름들로서 알려진 수법들 말이다.
 푸르스름한 그 빛은 그렇게 전수받은 내공에 의해 발생했음이 분명하다고 두사량은 결론내렸다.
 하지만 몇가지 의문이 남았다.
 왜 소림 승려들은 그 소년에게 극심한 내공의 소모를 요하는 대법을 시행한 것일까?
 그 소년은 누구일까?
 아니 모든 것은 차치하고라도 이미 심장이 멈추어 죽어 있는 소년에게 내공을 전수하는 일은 의미가 없지 않는가?
 두사량은 미간을 계속 찌푸린 채 사달평을 바라보았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니오?”
 “절대 아니지.”
 세차게 머리를 휘저으며 사달평이 큰소리쳤다.
 “나 또한 크게 놀라 몇번이고 확인까지 했으니까. 심장이 멈춘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어떤 시체를 죽었다 할 수 있단 말이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일은 ...”
 사달평은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앞으로 쭈욱 빼더니 두사량의 귀에대고 속삭였다
 “몇 년 후 그 소년이 살아났다는 사실이오.”
 두사량의 손끝이 흔들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사달평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빈궁한 옷차림이었다. 또한 이죽거리며 뱉아내는 말투 역시 그다지 예법에 올바르다 할 수 없었다.
 어디에서 과거 부유했던 집안 출신이라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두사량은 긴 한숨과 더불어 물었다.
 “내 묻겠는데 솔직히 대답해 주시오.”
 “무엇이든 묻기만 하오. 이 사달평이 무슨 대답이건 솔직히 한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까. 물론 술과 음식을 사준 사람에 한해서이오만 ..헤헤헤.”
 “대체 소림에 바쳤다는 당신의 전재산은 얼마나 되었소?”
 사달평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불에 오줌을 싼 게 언제냐는 질문을 받은 오줌싸게 아이처럼 쩔쩔매기 시작했다.
 “그, 그것은 ...”
 두사량의 눈에서 빛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협의도에 관한 전기를 쓰겠다는 사달평이 전혀 무공을 모를 리가 없다.
 두사량은 무공을 알고 있으며, 나름대로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린 두사량의 눈빛은 매서웠다.
 알 수 없는 위엄까지 줄줄히 베어나오자, 사달평의 이마에는 진땀이 흘러내렸다.
 “똑똑히 말하라. 나 역시 소림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만일 거짓을 말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소림에 연락을 해 보아 네가 말한 것에 거짓이 있을 시에는 소림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으로 간주할테니까!! 어서 말하라.”
 말투까지 달라진 두사량을 보자 사달평은 겁에 질려 벌벌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마 ..말하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 제가 바친 금액은 ...”
 “빨리 말하라니까.”
 “다, 다섯냥이었습니다요!!”
 “금자로 말이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럼 은자인가?”
 사달평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흔들더니 이윽고 푸욱 아래로 숙이고 말았다.
 “동전으로 말입니다요.”
 ‘망할!!’
 두사량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동전 다섯문을 낸 것으로 전 재산을 바쳤다는 허풍을 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당연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좋은 소재를 잡았다고 즐거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 이상, 즐거움은 사라지고 부아가 치미는 것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사량은 벌떡 일어섰다.
 품에서 은자 두 냥을 꺼낸 두사량은 거칠게 은자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쨍! 쨍그랑!
 경쾌한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은자!!
 사달평은 깜짝 놀란 듯 몸을 날려 그 은자를 주워들었다.
 “나, 나으리. 돈을 이렇게 버리시면 ...”
 은자를 들고서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사달평은 한동안 쏘아보던 두사량은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돈을 벌기 위해 한 짓이니 크게 탓하진 않겠소. 하지만 차후로 또다시 이런 거짓말을 하는 일이 눈에 뜨인다면 가만 두지 않겠소.”
 그는 마침내 사달평의 말이 거짓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몇가지의 사실은 그래도 믿으려 노력할 수 있었지만, 죽었다던 소년이 살아났다는 사실만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두사량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나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 빠르게 걸어나가, 번창루를 벗어나버렸다.
 덕분에 두사량은 사달평이 은자를 품에 집어 넣으며 중얼거린 마지막 몇 마디의 말을 듣지 못했다.
 물론 들었다 해도 별달리 달라질 일은 없었을 테지만.
 “씨이 .. 정말 사실인데. 정말로 그 소년은 살아났고, 놀랍고 두렵고도 기이한 일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제2장. 연소정
 
 1.
 연소정(燕小晶)은 점심을 먹기 바로 직전에 아주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번화한 시정에서 꽤 떨어진 숲가에 자리잡은 그녀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드물었지만, 이렇게 반가운 손님은 더욱 드물었다.
 손님은 남자였으며 그것도 젊은 남자였다.
 젋고 아리따운 여인이 젋고 준수한 청년을 반가워한다는 건 대개가 오가는 연정이 있는 탓이겠지만, 이들은 달랐다.
 적어도 연소정은 젊은 남자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두사량은 그녀에게 있어 좋은 동료일 뿐이다.
 글을 쓴다는 건 고독한 작업이다.
 작업에 대해 누군가 토론할 동료가 있다면, 그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것이다.
 “어서 와요!”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연소정이 두사량을 맞이했다.
 “점심은 어떻게 ....?”
 “아직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하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연소정은 얼른 한 벌의 수저를 더 가져와 두사량의 앞으로 놓았다.
 “찬이 없어요.”
 다각거리는 소리와 음식물 삼키는 소리가 아주 조용히 이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내어오며 연소정이 물었다.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네요.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두사량은 사달평의 이야기에 관해 말해주었다.
 모두 듣고 난 연소정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호 일단은 재밌는 얘기군요. 하지만 두 공자께서는 소림의 외문 출신이시니 기분 좋을 리는 없었겠어요.”
 “기분 나쁜 건 상관없습니다만 ... 죽었던 소년이 살아났다니, 믿을 수가 없어서 원.”
 두사량은 투덜거리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향기로운 액체가 목젖을 타고 넘자 기분이 좀 가라앉는 듯, 잠시 후 두사량은 다시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연 소저께서는 어떻게, 진전이 있으셨는지요?”
 “아주 약간요.”
 연소정은 수줍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서재쪽으로 달려가 들고오는 지편을 보는 순간, 두사량은 그것이 연소정이 적어 놓은 전기임을 알아보았다.
 “많이 적으셨군요!”
 “어머! 대단치 않아요.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연소정은 수줍은 듯 작은 소리로 자신의 글귀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2.
 사내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약혼녀를 미끼로 위협하는 원수의 눈가에는 교활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흐흐 조금만 움직여도 네 약혼녀는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약혼녀!
 사내를 위해 무엇이건 아끼지 않던 소중한 사람!
 사내는 자신의 약혼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영롱한 눈에 고인 두려움을 읽었다.
 “어서 검을 내려놓아라. 네 약혼녀를 살리고 싶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내는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도리어 검집으로부터 서서히 뽑아내기 시작했다.
 차갑게 빛나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음울하고도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깜짝 놀란 원수는 급히 사내의 약혼녀를 찔러 버리며 외쳤다.
 “가, 감히 네놈이 검을 뽑다니 ...”
 원수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검의 날카로운 궤적이 원수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허공으로 치솟는 핏물.
 사무치는 비명!
 원수의 목숨은 약혼녀의 피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내는 비정했다.
 누구의 목숨에 대해서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 돌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그의 전부였다.
 비정(非情)이야말로 사내의 혈관속을 달리는 피였다.
 그의 삶이었다.
 
 3.
 “휴우!”
 읽기를 끝마친 뒤 연소정은 힘이 부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연약하다 하나 글귀 몇줄을 읽었다고 숨이 찰 까닭은 없으리라.
 다만 마음속의 불안감이 그녀로 하여금 숨이 차게 만든 것 뿐이리라.
 자신의 글귀를 남에게 보여준다는 건 자신의 마음을 시험당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연소정은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깃든 표정으로 두사량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두사량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말씀드렸지만, 전기는 협의도를 밝히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악을 무찌르고 선을 숭앙하며 협과 의를 목숨을 걸고 지키는 사람이 마땅히 주인공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연 소저가 쓰신 글의 주인공은 어떻습니까? 그는 오히려 흉신악살에 가까운 모습 아닙니까!! 이러한 것은 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두사량의 어조는 단호했다.
 연소정은 맥이 빠지는 듯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여인의 입장에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와같이 비정한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껴요. 무엇도 돌보지 않는 비정. 남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에게마저 비정한 사내를 보면, 여인네들은 참기 힘든 모성애를 느끼기 마련이랍니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깜박이고 난 뒤, 이윽고 덧붙였다.
 “이건 말하자면 ... 그래요, 살수행을 떠나기 전 스스로 모든 것을 정리하는 형가의 모습이 그토록 찬란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형가(荊軻)!
 그는 현재의 하남성에 해당하는 위(衛) 출생으로 전국시대의 자객이었던 자다.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의 식객이 되어 은혜를 입다가 살다가, 후에 시황제가 된 진왕(秦王) 정(政)의 살해를 부탁받았다.
 진왕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갖고 가려 하니, 번오기는 껄껄 웃으며 한바탕 춤을 춘 뒤 기꺼이 자신의 목을 떼주었다 한다.
 이윽고 역수 근처에 이르러 자신의 심사를
 
 바람 소소하고 역수 또한 차가운데
 장사 한 번 가니 돌아올 줄 모른다.
 
 , 라는 시로 남겼거니와, 과연 그 시의 내용처럼 진에 들어가 진왕을 알현하고 살해를 도모했던 형가는, 운이 따르지 않아 실패한 뒤 잔혹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진왕 정을 살해하기 위해 형가는 모든 걸 버렸죠.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 도외시 했어요. 그것이야말로 비정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수의 시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이구요.”
 연소정의 말은 논리 정연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 맥점이 있음을 두사량을 놓지지 않았다.
 “큰것과 작은 것이 같지 않듯, 대의를 위한 비정과 개인의 영달을 위한 비정은 다르오. 복수가 개인의 것에 다다르면 편협해 지지만, 국가와 사직의 복수는 언제나 장엄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오. 한데 어찌 연 소저께서는 두 가지를 혼동하시는 겁니까.”
 “천만에요. 전 혼동하고 있지 않답니다.”
 연소정은 조금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저 또한 두 가지가 다름을 잘 알아요. 그러나 그런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이죠. 진실로 여인의 마음을 끄는 건 자신에게마저 비정한 사람의 그 차가움이란 말이예요. 모든 걸 초월하고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는 비정함이야말로 홀로 고고할 수 있는 영혼의 필요불가결한 요건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텐가요, 두 공자?”
 “ ..... ”
 두사량은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묘한 고집이 있어서, 옳다고 주장한 일에 대한 반박은 그 동기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자존심을 건들이는 결과에 이르기 쉽다.
 두사량은 그 점을 잘 알았다.
 때문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일말의 근심이 깃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정한 사람이란 일견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두렵기 그지 없는 존재요. 다정한 사람도 때때로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늘 하물며 비정한 사람이라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연 소저?!!’
 이러한 말이 수 십 번도 넘게 두사량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렇지만 두사량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와 연소정의 사이는 비록 매우 깊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일종의 동지애로 엮이어 있었기 때문에, 두사량은 몇 마디의 말을 실수함으로서 그 관계를 흐뜨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량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조용히 몇 마디를 덧붙였을 뿐이다.
 “연소저의 말씀에도 옳은 면이 많습니다. 나는 다만 연 소저가 다른 면에도 눈을 돌려 그 재능을 발휘해 주셨으면 하는 소망뿐입니다.”
 연소정은 맑은 눈을 두어번 깜박인 다음,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두사량은 쳐다보았다.
 돌연 그녀는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두 공자께서는 절 걱정하시는군요.”
 “ .....”
 물론 두사량은 연소정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그렇노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마음속에 담긴 지극한 감정은 내뱉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입을 다문채, 두사량이 가만히 앉아 있자 연소정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 않으셔도 좋아요. 저 또한 어린 계집 아이는 아니랍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사람을 만나, 제가 상처입게 된다 해도 그것으로 족하답니다. 여인을 모두가 그렇지요. 만일 정말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다면 설령 그 사람이 무정하고 또는 비정하다 해도 개의치 않아요. 모든 걸 다 주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해도 조금도 그 남자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여인이지요. 저 또한 예외는 아니랍니다.”
 연소정의 말은 차분했고, 조금도 듣는 이의 귓전을 찌를만한 여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연소정의 그 차분한 말을 든는 두사량의 마음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은 남성에게 즐거움을 준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생의 활력과 새로운 원기를 솟구치게 만들어주는 마력이 있다.
 연소정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본래 두사량의 마음에 기쁨이 샘솟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두사량은 마음이 아팠다.
 연소정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남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 수 있는 여인은 오직 두 종류의 여인뿐이다.
 남자의 가슴에 시퍼런 비수를 박을 수 있는 살수가 그 한종류이지만, 연소정은 당연히 살수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두사량의 가슴속에 들어와 버린 여인이었다.
 왜 아름다운 여인은 멀리 있을 때는 기쁨이다가도 가까이 다가올수록 고통으로 변한단 말인가.
 두사량은 마음속으로 수천번의 한숨을 머금었다.
 연소정과 같은 여인이 정말로 비정한 사내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비정한 존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존재라는 것이 두사량의 생각이었다. 또한 그 생각은 그다지 틀리지 않다.
 육신에 남은 상처는 쉽사리 아물기도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야말로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비정하고 냉혹한 얼음조각 같은 마음이야말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만드는 송곳이 아니던가.
 두사량은 탁자 아래로 내려져 있어, 시야에서 가리워진 자신의 두 주먹을 힘껏 움켜 잡았다.
 소림 외문의 계열을 이은 집안의 가전 무공을 어릴 때부터 수련해 온 덕분에, 한 쌍의 망치처럼 굳고 강한 힘이 주먹에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 힘으로, 또 이러한 마음으로 ...
 ‘연소저에게 그러한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 비정한 사내라는 건 불행을 일으키는 존재일뿐이다. 연소저가 그러한 불행을 당하도록 결코 두고 보지는 않을테다.’
 두사량은 연소정이 무공을 모른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만일 연소정이 강호인이었다면, 자신의 걱정은 단순한 걱정 수준에서 그치지 않을 지도 모르므로.
 
 4.
 사흘 후 두사량은 연소정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는 평소 연락하는 여인이 아니었는데, 먼저 연락을 해 왔다는 건 확실히 특별한 일이었다.
 “들으셨나요?”
 모든 일을 뒤로 젖혀두고서, 서둘러 달려간 두사량에게 연소정이 처음으로 던진 말은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무얼 말입니까?”
 두사량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연소정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웃었다.
 “호호, 제게 너무 흥분했군요. 두 공자께서는 혹시 대별산의 이상한 쇳소리에 대해 들으셨나요?”
 “대별산의 쇳소리, 라구요?”
 “예.”
 연소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탁자 위에 지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대별산은 넓어요. 어떤 곳은 조금 험하고 어떤곳은 매우 심하게 험하죠. 그 이상한 쇳소리가 들려온 장소는 바로 대별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하여 하늘을 나는 매조차 근심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는 응수곡(應愁谷) 근처라더군요.”
 
 처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약초를 캐러 심심산골을 다니지 않는 곳이 없는 약초꾼이라 하였다.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를 나직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 역시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이 일정하였다.
 그저 가까운 곳에 솜씨 좋은 장인이 경영하는 대장간이 있으려니 하고 지나치던 약초꾼은, 그날 밤을 꼬박 새워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는 망치소리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응수곡은 깊디 깊은 산속의 험하기 이를데 없는 계속이었다.
 한데 어떤 미친 대장장이가 산속에 대장간을 차려두고 망치질을 이어간단 말인가.
 또 설령 그렇게 미친 대장장이가 있다 치더라고 어떻게 인간의 능력으로 하루 밤을 꼬박 새우며 망치를 휘둘러 낸단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망치질 소리가 그치지 않자, 약초꾼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난 체력의 인간이라 해도 일정한 망치질을 나흘간 이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혹시 ... 귀신이 아닐까?’
 본래 두려움이란 지극히 강한 감정이지만, 호기심만은 이겨내지 못하는 법이다.
 일말의 불안감에 떨면서도 약초꾼은 조금씩 망치 소리를 더듬어 망치 소리의 근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앞에서 들려오던 망치 소리는, 약초꾼이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어느새 뒤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약초꾼은 두려움만을 간직한 채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 망치 소리를 귀신의 짓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때요? 흥미가 솟는 부분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쓰려는 전기의 훌륭한 소재 거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연소정이 명랑하게 말하자, 두사량 역시 기분이 절로 좋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약초꾼이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도 정확한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건, 일종의 진법이 설치되어 있음으로 보면 되겠군요.”
 “그래요. 최상승의 진법은 시야뿐 아니라 음파까지도 차단하죠. 하지만 이 진법은 소리는 유출시키며 시야만 막은 것으로 보아 그리 대단한 진법은 아니라고 봐요.”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법을 설치한 사람 - 아마 망치질 소리의 주인같습니다만 - 그 사람이 몇가지의 귀찮음을 피하려 진법을 설치했을 뿐, 실재로는 힘을 쓰는 일에 자신이 있다면 더욱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
 연소정은 감탄스러운 듯 두사량은 쳐다보았다.
 “일장일단(一長一短)!! 모든 일에 긴 것이 있으면 짧은 면이 있다는 말뜻과 통하는군요.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는 일이 도리어 더욱 크게 위험할 수도 있음을 저도 알고는 있었지만, 쉽게 실제의 상황에 적용하지는 못했어요. 오늘 두 공자의 분석을 듣고나니 제 견식이 넓어지는 느낌이예요.”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받는 칭찬은 못생긴 여인의 칭찬보다 훨씬 기분 좋은 법이다.
 “그저 말을 늘이려 해 본 분석일 뿐입니다. 너무 칭찬하시니 오히려 송구스럽군요. 하하.”
 기분이 좋아진 두사량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한데 쇠망치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흘 넘게 이어졌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한 번의 쇠망치 질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수십번, 나아가 수백번의 쇠망치질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또한 망치질의 간격을 마치 기계처럼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결코 간단할 수 없었다.
 하물며 나흘 넘게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망치질 소리의 주인은, 도대체 얼마나 숙련된 장인이며 얼마나 뛰어난 힘을 지닌 사람일까?
 그 생각을 하자 두사량과 연소정은 절로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소정이 곧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그보다 망치질 소리가 정말로 쇠를 다듬는 것이라면 그가 왜 깊은 산속에서 그 일을 시작했는지가 더 궁금해요.”
 “예. 그 점도 특이하군요. 보통의 대장장이라면 인가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해야 돈도 벌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봉목을 몇번 깜박이던 연소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혹 그에게 큰 원한이 있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힘이 부족하자 신검을 만들려고 산속에 들어간 거예요. 정과 열을 함께 쏟아 쉬지 않고 쇠를 단련시키는 거죠. 이윽고 만들어지는 신검을 자신의 피로 정련한 뒤, 죽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남기는 유서!!”
 “하하 재밌는 상상이십니다. 유서에 씌여지는 내용은 대략 ‘누구 누구에게 원한이 있으니 이 신검을 얻는 자는 부디 나의 원한을 갚아달라’ 정도가 되겠군요. 하하하.”
 “고마워요. 두 공자. 호호호.”
 연소정은 두사량과 함께 잠시 웃었지만, 곧 그것도 시들한 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연일지도 몰라요. 혹시 망치질 소리의 주인은 황궁 사람이 아닐까요? 황제의 명을 받들어 몰래 천하제일의 신검을 만들려 나온 거예요.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며 황제의 명에 충실해 쇠를 정련시켜요. 하지만 ...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영원히 신검을 만들지 못할 운명이예요.”
 “으음 이런 설정은 어떻습니까? 그 장인에겐 지극히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며 그 여인은 바로 황제의 딸인 공주인 겁니다.”
 “아아 좋아요. 아주 좋군요.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황제에 의해 갈라설 수 밖에 없어요. 황제는 신검을 만들어 오면 결혼을 허락하겠다면서 장인을 내어 보내지만, 장인에게 주어지는 철은 절대 신검의 재료가 될 수 없는 하품의 것일 뿐이예요.”
 “장인은 힘들게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은 항상 헛되이 끝날 뿐이죠. 그는 절망에 빠지지만 마음속에 담긴 사랑하는 여인의 그림자를 쫓아 쉬지 않고 쇠를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야위어 가는 겁니다. 남는 건 오로지 사랑에 대한 갈망. 그리고 광기(狂氣)뿐입니다.”
 일사천리로 말을 이어가던 두사량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연소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라면 결론을 어떻게 이어가야 좋겠습니까?”
 “글쎄요. 조금 상투적이긴 해도 자신의 피로 신검을 만드는 얘기를 또다시 쓰는 건 어때요?”
 “앞 얘기랑 조금은 비슷해지는군요. 결국 ... 생명과 바꾸는 신검, 이라는 겁니까?”
 “황제는 그 장인이 만들어 바친 신검의 뛰어남에 놀라, 마음을 바꾸죠. 황제의 품에서 풀려난 공주는 잠시도 잊지 못하고 애절하게 그려왔던 사랑을 만나러 쉬지 않고 달려가지만 아아! 그녀를 맞이하는 건 싸늘한 연인의 시체일 뿐이었답니다!”
 “ .... 불쌍하군요!!”
 “애절하죠!!”
 “가슴이 시립니다!!”
 “휴우, 그렇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 얘기예요.”
 연소정이 방긋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 우리는 한시라도 서둘러 대별산으로 가야 한다구요, 두 공자!!”
 
 두사량은 연소정의 짐을 나누어 들고, 길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그가 제일 처음 본 것은 전과는 달리 낮게 가라앉아 으르렁거리는 어두운 하늘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몰린 그 하늘은 금새라도 입을 벌려 비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두사량은 문득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별산까지 연소정과 동행한다는 기대에 잔뜩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우울해졌고,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마저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문을 알 길 없는 불안감이었다.
 사흘 후 대별산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불안감은 잠시도 두사량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제3장. 대별객잔.
 
 1.
 두사량과 연소정이 대별산에 마침내 도착한 것은 사흘째 되는 날의 저녁이었다.
 하지만 응수곡까지는 남은 거리가 꽤 되었기에, 두 사람은 가까운 객잔을 찾았다.
 마침 한적한 곳에 객잔이 하나 있었다.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전원의 객청 외에도, 다섯 개의 방이 딸린 후원의 객실을 갖춘 그다지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객잔이었다.
 <大別客棧>
 ‘대별객잔’이란 이름을 다시 한 번 쳐다 본 후, 연소정은 밝게 웃었다.
 “이 이름은 마음에 드는군요, 두 공자! 전 우리가 대별산의 응수곡에서 틀림없이 좋은 소재거리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해요.”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식사를 위해 다시 만났다.
 지난 사흘 간의 힘든 여행도 연소정의 호기심과 탐구욕을 멈출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왔다.
 갓 구운 오리와 튀긴 야채는 향기로운 내음을 쉬지 않고 피워올리며 지친 나그네의 위장을 유혹했다.
 그러나 연소정은 젓가락을 몇 번 들지도 않은 채, 두사량에게 말했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요. 해가 뜨기 전에 산을 오른다면 사방이 조용할거예요. 당연히 망치 소리를 평소보다 훨씬 잘 들을 수 있을 게 아니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두사량은 오리고기를 잡아가던 젓가락을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소정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사흘 간 두사량의 안색은 계속 좋지 못했음이 생각났던 것이다.
 “아프세요, 두 공자?”
 “예!!? 아닙니다. 아픈 곳은 없습니다만 ...”
 “그럼 왜 식사를 안하시는 거죠? 오리고기는 구수하고 야채는 향긋해요. 게다가 이 우육탕의 국물은 정말이지 몸을 훈훈하게 만들어 주잖아요.”
 두사량은 쓰게 웃으며 연소정 앞에 놓인 접시를 가리켰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연 소저께서도 별로 식사를 많이 하지는 못하시잖습니까?”
 “어머 전 달라요.”
 연소정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웃었다.
 “호호 전 다만 긴장해서 음식이 잘 먹히지 않는 것 뿐인걸요. 어서 시간이 흘러 내일이 오면 좋겠군요. 예감이 좋답니다. 분명 내일은 아주 큰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호호 아시죠? 제 예감은 때때로 아주 잘 맞는다는 것을요.”
 여인의 직감은 남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정확한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두사량은 이미 들어보았었다.
 아마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였으리라.
 
 당시 다섯 살 정도였던 두사량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는 창에 휘장을 내려 방안을 어둡게 해놓은 채 앉아계셨다.
 무섭다며 창을 열려 하자 할아버지가 얼른 말리셨다.
 “그냥 놓아두거라!!”
 두사량은 할아버지의 외침에 놀라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두사량은 번쩍 안아주었을 때, 두사량은 비로소 할아버지의 뺨과 이마에 붉은 상처가 만들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어린 두사량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인근에서 이름난 고수이며 함부로 할아버지를 때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두사량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상처는 왠거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처음엔 넘어졌다고 얼버리무셨으나, 두사량이 계속하여 묻자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러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다.
 “휴우. 여자의 직감은 때론 너무나 정확해서 남자들을 당황시키지. 그건 아마도 남자가 알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것일게다, 사량아. 휴우우우-”
 
 지나간 일을 생각하자 두사량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당연히, 당시 할아버지의 뺨에 생겼던 상처의 정체를 알고 있다.
 할머니의 뾰족한 손톱만이 그런 상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두 분은 이제 세상에 없다.
 남은 건 오직 그리움과 두 분이 남겨 주신 교훈들 뿐이다.
 연소정이 맑은 눈을 깜박이며 두사량을 쳐다보았다.
 “두 공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정말 아프신 곳이 없으신거 맞아요?”
 “아!”
 두사량은 급히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옛날 생각을 잠깐 ... 그보다 식사를 마치셨습니까?”
 “예에. 전 이제 그만하고 싶군요.”
 식탁 위에는 아직도 음식이 많았다.
 하지만 두사량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점소이를 불러 모두 치우도록 시켰다.
 점소이는 익숙한 솜씨로 그릇을 포개고 접시를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식탁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식사대는 동전 열다섯 문이었다.
 하지만 두사량은 가치가 그보다 열배는 족히 나가는 은덩이 하나를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은덩이를 본 점소이의 안색이 변했다.
 “저희 가게는 잔돈이 부족한뎁쇼. 이렇게 큰돈을 내어놓으시면 곤랍합니다, 손님!!”
 “잔돈을 가져올 필요없네!”
 두사량이 잘라 말하자, 점소이의 안색은 더욱 변했다.
 “그, 그러시다면 ...”
 “몇 가지의 대답만 잘해준다면 은자는 몽땅 자네 것이 될 수도 있어.”
 점소이의 눈이 빛을 발했다.
 돈이란 귀신도 부리는 물건이니, 일개 객잔이 점소이를 부리는 일이란 간단한 것이다.
 연소정은 그제서야 두사량의 의도를 깨달은 듯, 몸을 두사량쪽으로 숙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응수곡의 일에 대해 물으시려는 거군요?”
 두사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적게 아는 것보다는 역시 무엇이든 많이 알고 가는 편이 훨씬 이로울 테니까요.”
 눈동자를 좌우로 빠르게 굴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점소이는 얼른 은덩이를 잡아 소매속으로 숨겼다.
 “무엇이건 물어보십시오, 손님. 이래뵈도 제가 근처에서는 마당발로 통한답니다. 아아 물론 발이 크다는 얘기가 아니구요 그만큼 식견이 많고 주워듣는 일이 풍부하단 뜻이지요. 아마 제가 모르는 이야기라면 아무리 주변 사람을 잡고 물어도 알아내실 게 없으실 겁니다요, 손님. 헤헤헤.”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을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을 두사량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내고 싶은 일이 있을 때라면 말많은 사람이 무척 유용하다는 사실 또한 두사량은 알고 있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바로 응수곡 근처에서 일어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라네!”
 “ .... 응수곡 ... 이요?”
 점소이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사량과 연소정을 한 번 살피더니, 곧 다시 원래의 흐릿한 점소이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변화는 매우 빨리 일어나, 무공이 없는 연소정으로서는 알아채기 힘들었다.
 하지만 두사량은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만일 점소이가 응수곡의 일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이러한 변하를 보일 리 없을 것이다.
 알아도 꽤 많이 알고 있어야만, 순간적으로 안색이 변하리라.
 “자네는 알고 있군!!”
 두사량의 말에, 점소이는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두사량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사량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말문을 열려하는 순간, 점소이는 소매속으로부터 거칠게 은자덩이를 꺼내들었다.
 “젠장! 첨부터 넣지를 말 것을! 옛소. 내가 이런 곳에서 일을 해도 모르는 일을 대답해주고서 대가를 받을 만큼 썩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다시 돌려주겠습니다.”
 은덩이를 식탁에 올려놓고서 점소이는 등을 돌려 가 버렸다.
 두사량은 그의 앞을 막고 다시 묻고 싶었다.
 점소이를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대답하지 않을까? 무엇때문에 은덩이를 돌려주면서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때, 두사량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객잔 안을 오가는 몇 명의 점소이들!
 그들은 대부분 많은 양의 음식 그릇과 접시를 탑처럼 쌓아 한 손에 든 채 운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점소이들의 발자욱 소리는 들렸다.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인 양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탑처럼 쌓인 그릇과 그릇들이 부딪혀 만들어 내야만 하는 달그락 소리만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나르고 있는 그릇들이 솜뭉치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불가능했다.
 그릇을 옮기는 사람의 발걸음이 매우 가벼워, 마치 구름속을 걷듯 움직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점소이들은 무공을 알고 있다. 게다가 경공술, 그것도 꽤 뛰어난 경공술을 익혔다. 한데도 왜 발자욱 소리는 들리는 걸까? 본래 그릇을 흔들지 않을 정도의 경신술이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발소리는 의도적으로 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신의 무공을 감추기 위해서겠지!! 도대체 이런 산골의 평범한 객잔에서 왜 한결같이 무공을 익힌 고수들을 점소이로 써야만 할까? 또 점소이가 이러하다면 주인장의 무공은 대체 어떠할까?’
 두사량은 곁눈질로 힐끗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살집 좋게 생긴 주인장쪽을 바라보았다.
 주인장은 얘기중이었다.
 점소이, 바로 두사량이 은자덩이를 주며 대별산 응수곡의 일을 물었던 그 점소이와 말하고 있었다.
 착각일까?
 아니면 정확히 본 것일까?
 두사량은 주인장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며, 자신쪽을 훑고 지나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응수곡의 일에 대해 물었던 것은 혹 실수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 틀림없는 실수였을 것이다.
 두사량은 문득 자신이 여태껏 느껴왔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연소정에게 말했다.
 “식사도 끝났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연 소저!!”
 후원으로 통하는 복도를 걸어가느라, 서로의 몸이 꽤 가까워졌을 때, 두사량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연소정에게 말했다.
 “내일 일찍 일어나자고 하셨지요? 오늘밤은 가능하면 빨리 눈을 붙이십시오. 내일은 매우 일찍, 아마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2.
 연소정은 그날 밤 정말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빨리 잠을 청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숙면을 방해한다는 사실은 어찌본다면 퍽이나 우습지 않는가.
 어쨌거나 거의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든 연소정은 누군가 흔드는 느낌을 받고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누, 누구 ... ? ”
 “쉿!!”
 두사량이 검지로 입술 중간을 막으며 조용하라는 시늉을 보내왔다.
 그녀를 깨운 사람은 바로 두사량이었던 것이다.
 “몇시죠? 날이 밝으려면 아직 꽤 이른 것 같은데 ...”
 두사량의 신호를 본 연소정이 소리를 죽여 묻자, 두사량은 오히려 그녀보다 더욱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사경(四更)말이니,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 시진도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셔야만 합니다, 연 소저!!”
 연소저의 낯빛이 변했다.
 그녀는 두사량이 비록 전설속의 영웅호한은 못되더라도, 소림의 속가제자이며 또한 그에 준하는 침착함과 신중함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두사량이 이토록 조심스러워한다는 건 분명 큰 위험이 주변에 닥쳐왔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지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두 공자?”
 연소정의 질문에, 두사량은 얼른 주변의 움직임을 귀로 살피더니 낮은 어조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산이란 본래 험하며, 깊고, 길을 찾기가 어려워 세상을 떠나고 싶은 은자들이나 수련을 업으로 삼아 도를 구하는 도인들의 은둔지처가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때론 세상에서 살 수 없는 흉인과 악인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여왔습니다.”
 “그래요. 그러한 악인들은 스스로를 산중지왕이라 칭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결국은 흉악한 도적떼이며 산을 거처로 삼아 생활하기에, 흔히 산적(山賊)이라고도 부르지 않나요?!”
 연소정의 말은 글을 쓰는 버릇때문인지 몰라도 필요없이 길게 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점은 두사량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말은 그칠 줄을 몰랐다.
 “연소저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봇짐에 마지막 남은 짐을 싼 두사량은, 그 봇짐을 등에 울러매면서 말을 이어갔다.
 “본래 이 근처 대별산에서 가장 세력이 큰 산채는 오호채(五虎寨)라 불리우는 곳이었죠. 그곳은 스스로를 오호라 칭하는 다섯마리의 독한 호랑이와 같은 두목들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연소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아! 저도 들은 바가 있어요. 그 세력이 막강하여 관군들조차 토벌할 엄두를 쉽사리 내지 못했다더군요. 게다가 대별산 너머 백여리에 그 세력권을 갖고 있었다죠?”
 “맞습니다. 맞긴 맞습니다만 ....”
 두사량은 말꼬리를 흐리며 공력을 두 귀에 집중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마저 조금씩 그의 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연소정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우선 나갑시다. 나가서 서둘러 걸어가며 다음 얘기를 나눠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새벽공기는 쌀쌀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춥다는 느낌이 강할 정도였다.
 “꽤 ... 날이 추워졌군요!!”
 연소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놀렸다.
 그들이 몰래 달아나는 사람들처럼 빠져 나왔던 대별객잔이 등뒤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연소정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어 두사량을 쳐다보았다.
 “관계가 있나요?”
 “예?”
 “우리가 이렇게 서둘러 달아나듯 나온 일이 그 오호채라는 산적들의 이야기와 무슨 관계라도 있냐는 물음이예요!!”
 “아!”
 대별객잔이 꽤 멀어지자,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린 두사량은 연소정의 손목을 놓으며 웃었다.
 “물론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다구요?”
 연소정이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뜨며 다시 물었다.
 “우린 객잔에 묵었을 뿐이예요. 게다가 오호채라는 산적들은 깊은 산중에 있을 터인데, 어떻게 서로 관계 있다는 건가요?”
 “오호채와 관계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오호채과 관련이 있을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오호채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사량의 말은 연소정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연소정은 비정한 사내의 이야기를 즐기는만큼이나 흉악한 산적들의 이야기를 듣기 또한 즐겨했기 때문이다.
 “오호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니요? 그럼 그들이 관군에 의해 토벌되었나요?”
 “아닙니다.”
 “어머. 그럼 설마하니 스스로 해산하기라도 했다는 것은 ..”
 “그것도 물론 아닙니다.”
 연소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까닭으로 그토록 세력을 떨치던 오호채가 사라졌다는 말인가?
 연소정의 궁금증이 커지는 걸 느꼈던지, 두사량은 지체없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호랑이는 산중의 왕으로 당해낼 짐승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호채의 다섯 마리 호랑이를 없애버린 것은 한 마리의 검은 늑대였습니다.”
 검든 희든, 아니 칠색 찬연한 무지개 색으로 칠을 한 늑대라 해도 혼자서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오직 한 가지, 즉 호랑이니 늑대니 하는 호칭이 진짜 짐승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여진 별호일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연소정은 단번에 한 마리의 검은 늑대라는 호칭이 누군가를 뜻함을 알아차렸다.
 “흑랑(黑狼)!! 두 공자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건 바로 흑랑이라는 두 마디의 단어가 아니신가요?”
 두사량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대별객잔이 멀어지자 여유도 꽤 찾아, 웃음과 더불어 천천히 말을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슷합니다. 사실은 흑랑채(黑狼寨)라는 세 마디의 말을 하고 싶었지요.”
 “흑랑채!!?”
 연소정이 확인하듯 한 번 더 입속으로 그 이름을 외우자, 두사량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흑랑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설명은 요약하자면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흑랑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한떼의 산적 무리들이 어느날 갑자기 대별산중에 나타나, 오호채의 옆에 자리를 잡았을때, 오호채의 삼백 예순 다섯 명의 흉악한 도적들은 저마다 바닥을 뒤지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도 나도 배를 잡고 웃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배꼽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호채의 도적떼들이 웃고 또 다시 웃고를 반복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흑랑채는 겨우 24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스로를 검은 늑대 ‘흑랑’이라 칭하는 갸날프기 그지 없는 30초반의 청년 채주까지 포함시키더라도 겨우 25명에 불과한 인원이었다.
 도대체가 그러한 인원으로 인근 대별산에서 가장 위엄을 떨치는 오호채의 옆에 떡하니 자리를 정한다는 것 부터가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호채에게 ‘당장 대별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주십사’ 는 정중한 권고의 서한까지 보내오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짜 다섯 마리의 맹호에게 한 마리의 철모르는 새까만 늑대가 도전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정중한 권고의 서한’을 오호채의 다섯 두목 중에서도 가장 막형 격인 대호(大虎) 곽자고(郭自高)가 찢어버린 후,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부터 사흘 후의 저녁부터 오호채의 삼백 예순 다섯 명에 이르는 도적떼들은 더 이상 배꼽을 찾으려 바닥을 뒤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배꼽은 바닥에 모두 떨어졌지만, 도적들은 절대로 바닥을 뒤질 수가 없게 되고 만 것이다.
 목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로 심장이 꺼내어져 핏물을 토해내는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의 직업이 흉악한 산적이라해도, 바닥을 뒤지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전멸당한 오호채의 산적들의 시체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모두 여섯명이었다.
 그 여섯명은 바로 흑랑채에서 나온 자들이었다.
 
 “흑랑채와 오호채가 맞붙어서 365명의 오호채 산적들은 전멸했지만 흑랑채는 25명에서 6명이 살아남은 것인가요? 그렇다면 흑랑채는 불과 19명의 희생으로 365명의 적을 무찌른 셈이군요. 참으로 대단해요.”
 두사량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소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25명에서 19명을 뺀다면 여섯명이 남는 것이니, 연소정의 이러한 계산은 일견 매우 정확해 보였다.
 하지만 두사량은 단번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틀렸습니다.”
 “틀리다니요? 분명히 계산하자면 ...”
 “흑랑채의 희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흑랑채에서는 애초부터 여섯 명밖에 나서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아!”
 연소정은 짧은 감탄의 말을 내뱉을 뿐,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입에 담지 못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또는 감탄이건, 그 감정이 너무 크고 너무 격해진다면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두사량은 그러한 연소정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본래 흑랑채는 네 개의 소대(小隊)로 이루어져 있다 전하더군요. 각각 여섯 명씩으로 이루어진 그 소대 하나 하나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날 오호채를 전멸시킨 소대는 네 개의 소대 중에서도 가장 날렵하고 가장 잔인한 구성원으로만 이루어졌다는 흑혼대(黑魂隊)였다 하였습니다!”
 “아!”
 또다시 감탄성을 내뱉은 연소정의 두 눈이 불현듯 아주 커졌다.
 그녀는 막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별객잔을 서둘러 빠져나온 일은 바로 그 흑랑채와 관련되어 있군요.”
 “그렇습니다. 겨우 여섯명의 인원으로, 게다가 아무도 상하지 않고서 제법 세력이 커다랗던 녹림채 하나를 박살내어 버린 흑랑채의 힘으로 미루어, 그들은 단순한 산적 무리가 아닌 무림과 연관된 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시각이지요. 그리고 그 적은 인원으로 인근에 세력을 떨치기 위해서 곳곳에 그들에게 협력하는 자들을 깔아놓았을 거라는 생각 또한 일반적입니다.”
 연소정은 눈을 쉬지 않고 깜박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걷다가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그녀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외쳤다.
 “바로 대별객잔이군요!!”
 “맞습니다.”
 두사량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적들이 자신들의 전초기지로서 산 기슭의 객잔을 이용한다는 소문은 연소저께서도 들으신 바가 있으실 겝니다.”
 “예. 저도 들어보았어요. 듣자하니 그들은 손님을 죽여, 그 사람의 인육으로서 만두를 빚어 팔기도 한다더군요. 무서운, 참으로 무서운 일이예요.”
 연소정이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자, 두사량은 짐짓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하하하 물론 그런 일도 있을 수는 있겠으나, 소문이란 사실보다 과장되기 마련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보다는 산을 지나는 표물이나 귀한 물건들의 염탐, 또는 관가에서 나온 토벌대의 행적을 탐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초기지라는 표현이 더욱 옳을 것이라 여깁니다.”
 “예에-”
 연소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두 공자께서는 대별객잔이 바로 그 흑랑채의 전초기지라고 생각하시나요?”
 “맞습니다.”
 두사량은 조금 내려가는 봇짐을 위로 올리기 위해 어깨를 두어번 위로 흔든 후에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탁자를 닦고 차와 술을 나르는 일이 전부인 점소이가 그토록 뛰어난 신법을 지니고 있겠습니까? 대별객잔은 틀림없이 흑랑채의 한 끝입니다.”
 두사량의 어조는 단호했다.
 연소정도 그의 판단에 동의한다는 듯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이 흑랑채의 한 끝자락이고, 흑랑채가 그토록 무서운 집단이라면, 우리가 지금처럼 쉽사리 대별객잔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요?”
 순간 두사량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미미하지만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소리를 뒤쪽에서 들었던 것이다.
 돌연 연소정의 눈이 커질대로 커지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뾰족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아아아아악!”
 두사량은 몸을 뒤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연소정의 맑은 눈동자 속에 똑똑히 비치는 한 사람의 모습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면이 넓고 무서워보이는 도를 천지양단의 자세로 겨누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한 청년!
 두사량의 등을 노리며 허공에서 떨어져내리고 있는 그는 분명 간밤에 객잔에서 자신이 응수곡에 대해 물었었던 그 점소이가 틀림없었다.
 그대로 도가 떨어진다면 두사량의 뒤통수는 반으로 갈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쏴아아아앙-!
 
 3.
 점소이!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이 관이(關二)라고 부르는 청년은 자신의 일도가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관이는 그다지 길지는 않은 자신의 평생동안 두 가지의 무공만을 수련했다.
 그 중 하나가 날렵하게 움직이면서도 족흔을 남기지 않으며 소리 또한 거의 발생시키지 않는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신법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방금 두사량의 뒤통수를 향해 내려친 천지락(天池洛)의 도법이었다.
 하늘의 연못이 뒤집어져 거대한 물줄기가 마구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단숨에 내리긋는 극쾌(極快)와 극강(極强)의 조화가 바로 천지락의 일초에는 담겨 있었다.
 관이는 천지락의 도법을 배운 뒤, 하루도 수련을 쌓기를 멈추지 않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도합 일백번의 연습을 계속 이어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 관이의 천지락 도법은 그 도법을 전수했던 관이의 큰형마저 감탄스러워 할 만한 무엇인가를 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관이가 자신의 일초를 확신한 배경이었다.
 두사량의 뒤통수는 갈라질 것이며,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피보라가 자신의 얼굴을 덮치게 되리라.
 그러한 피분수가 던져오는 충격과 비릿한 맛이야말로 관이가 가장 좋아하는 감각 중의 하나였다.
 관이는 천지락을 익힌 이후, 도합 열 세 명의 사람을 죽여보았고, 그때마다 자신의 직위는 조금씩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위대한 흑랑채에 정보를 제공하는 대별객잔에서도 두 번째의 신분을 차지하게 되지 않았는가?
 물론 아직까지 흑랑채를 이루는 스물 네 명의 호한에 포함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만일 흑랑채에 결원이 생긴다면, 그리하여 새로운 인원을 보충시켜야만 한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자신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관이였다.
 
 ‘베었다!!’
 관이의 마음속으로 짜릿한 외침이 지나가는 순간, 놀랍게도 관이가 도가 가르고 지나갔던 두사량의 뒷통수가 흐릿해졌다.
 너무 빨리 움직인 대상물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각막에 잔상으로 잠시동안 머물게 된다.
 관이는 그러한 사실에 대해 들어보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자신의 눈에 잔상을 만들 정도로 빨리 움직이는 인물을 만난 적은 없었다.
 상대방은 어떠한 보법을 사용한 것일까?
 대체 얼마나 뛰어난 절기를 시전하였기에, 도가 가르고 지나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단 말인가?
 
 -어떤 무공에 약점이 없겠느냐? 강한 일면이 있다면 당연히 약한 일면도 존재하는 법!! 천지락의 도법에도 물론 약점은 있다. 바로 너무 빠르고 너무 강한 것이 약점이니, 네가 정말로 천지락의 도법을 완성하고 싶다면 뿌리고 거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를 보고 나서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하나 그건 지금의 네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 때문에 넌 항상 조심해야 한다. 네가 가장 조심하여야할 상대는 ....
 
 무수한 생각과 더불어, 언젠가 큰형이 해주었던 충고가 관이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사람의 생각이란 얼마나 빠른 것일까?
 파칭!
 불꽃 튀기는 소리를 불러 일으키며, 헛되이 허공을 갈랐던 관이의 도가 바닥을 치는 그 짧은 순간동안 관이의 머리속에는 이토록 무수한 생각이 맴돌았던 것이다.
 ‘어디 갔을까?’
 사라진 두사량의 신형은 어디로 간 것일까?
 놀란 관이가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관이의 왼쪽편으로부터 성난 유령처럼 짓쳐들어오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두사량은 어느새 관이의 왼편으로 돌아가 세차게 오른 팔꿈치를 휘둘러 관이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도를 들어올려, 다시 휘두르며 두사량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 근의 힘으로 휘둘렀던 도를 반대 방향으로 당길려면 대충 열 근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하물며 전력을 다한 천지락의 도결로 내려쳤던 관이의 도에는 천근의 힘이 담겨 있었으니 어찌 다시 들어올릴 수 있겠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했던 공격은 오히려 그 주인이 위험을 피하는 데 있어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빠캉!
 무수한 불꽃이 눈 속으로 가득 피어오른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그 속에서 자신의 머리를 가격한 두사량의 모습이 가장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것일까?
 들어올리다 놓쳐버린 자신의 애도가 허공으로 높다랗게 날아오르는 모습도 관이의 시선속에 잡혔다.
 두개골로부터 퍼져오는 이 상쾌한 느낌은, 머리가 깨어진 탓에 느껴지는 것이라고 관이는 판단했다.
 세상이 아득히 멀어졌다.
 모든 소리와 모든 감각이 자신의 것이 아닌양 급속히 관이의 지각으로부터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아득한 마지막 순간, 번갯불처럼 시야를 덮쳐오는 것은 검은 땅바닥의 모습이었다.
 털썩!
 눈을 부릅뜬 채, 깨어져나간 반쪽의 두개골로부터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진 관이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영혼은 이미 반 이상 몸을 떠나 버렸지만, 최후의 아주 짧은 순간에 관이는 바닥에 새겨져 있는 두 개의 족흔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천지락 일초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인 두사량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었다.
 두사량이 보여준 움직임은 놀랍게도 특별한 신법이나 보법이 아니었다. 왼발을 뒤로 빼고 다시 오른발을 옆으로 움직이는 극히 단순한 열칠성(逆七星)의 수법에 불과했다.
 보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동작의 하나이며, 무공의 기초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시전할 수 있는 움직임!
 하지만 두사량은 그런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관이가 평생 수련한 천지락의 일초를 파해해 버렸던 것이다.
 원통했다.
 자신의 죽음도 원통했지만, 자신의 평생 수련이 상대방의 간단한 일초에 허물어져 버렸다는 사실이 관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원통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차이일까?
 어떤 차이가 자신을 죽게 만들고 두사량을 살게 만든 것일까?
 영혼이 모두 육신을 떠나갈 무렵!
 자신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질 무렵에야 관이는 비로소 자신의 큰형인 관대대(關大大)가 말하였던 충고의 마지막 몇 구절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 다시 말하지만 네가 조심하여야할 상대는 바로 유(柔)의 도리를 익힌 사람이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으로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이 도리는 말하기는 쉬우나 익히기는 매우 어렵다.
 때문에 이 도리를 익힌 사람을 네가 만나게 된다면 너로서는 무조건 달아나야하며 절대 싸우려 마음 먹어서는 아니된다.
 싸우게된다면 너는 반드시 ... 반드시 ..
 죽게 되리라.
 
 관대대의 예언은 틀림없었다.
 오늘 관이는 두사량을 만났고, 그에게 공격을 시도했으며, 결국 죽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관이는 관대대의 충고를 떠올렸지만, 그 충고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너무 늦었던 것이다.
 죽은 다음에는 어떠한 충고나 깨달음도 소용이 없다.
 관이의 죽음에는 확실히 애통한 바가 많았다.
 그는 큰형인 관대대의 충고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었고, 그랬다면 조금 더 신중해져서 오늘 죽지 않아도 좋았을런지 몰랐다.
 어쨌건 관이는 죽었다.
 흘러간 과거가 변할 수 없듯, 죽음 또한 한 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의 죽음은 두사량과 연소정으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잠시 내쉴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이윽고 관이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도가 비로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쨍그랑!
 죽음으로 조성되었던 침묵을 깨는 그 쇳소리는, 맑으면서도 어딘지 모를 섬뜩함이 함께 느껴졌다.
 
 “개, 객잔에서 보았던 바로 그 점소이예요!!”
 끄덕!
 연소정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겨우 내뱉은 외침에 대하여, 두사량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주었을 뿐이었다.
 “두 공자의 말씀이 옳았어요. 과연 이 점소이는 무공을 지녔군요. 게다가 흉험한 기세로 우릴 노린 것으로 미루어 우리에게 살의(殺意)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어요.”
 이번에도 역시 두사량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조차 까닥여주지도 않았다.
 연소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마디 하려다가, 곧 그만두고 말았다.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별객잔의 점소이는 지금 머리가 깨어져 바닥에 죽어 있는 이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연소정은 생각해낼 수가 있었다.
 ‘분명 두 명이 더 있었어!’
 청각과 시각을 극대화시켜 주변을 감시한다는 것은 팽팽한 신경의 긴장감을 요구한다.
 때문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일을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혼잣말을 지껄이는 것조차 집중력을 저하시키기 쉬웠다.
 공격이 한 번에서 끝날 리 없었다.
 만일 한 번에서 끝날 공격이었다면, 애초부터 살기를 지닌 공격이 전개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 점은, 두사량 역시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연소정은 판단했다.
 과연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두사량은 내공의 일부를 집중시킨 귓전으로부터, 두 갈래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두 명이 움직인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 더 있다! 아주 미약하여 거의 없는 듯 느껴지지만 틀림없이 존재한다. 또한 가장 위험한 존재야말로 바로 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움직여 가는 건 다른 두 명의 점소이가 틀림없었다.
 발자욱 소리를 숨기고는 있었지만, 천이통(天耳通)에서 유래된 천리지청(千里地聽)의 수법을 익히고 있는 두사량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움직임은 전혀 달랐다.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 존재는 뒤에 있는 듯 느껴지다가도 어느새 앞에 있었고, 그런가하면 왼쪽에서 나타나곤 하였다.
 두사량은 손바닥에 땀이 절로 고임을 느꼈다.
 자꾸만 힘이 들어가려 하는 주먹으로부터 쓸데 없는 긴장감을 빼내려고 애를 썼다.
 ‘이 하나의 움직임은 누구인가? 절대 함부로 무공을 익힌 삼류 무사는 아니다!’
 문득 객잔의 계산대 앞에 조용히 앉아 있던 주인장의 사람좋아 보이던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틀림없을 것이다.
 귓전에 명확히 느껴지는 움직임은 다른 두 명의 점소이가 틀림없을 터이고!
 ‘이자들은 즉시 공격해 올까? 아니면 조금 더 시간을 끌까? 우리에게 있어 적의 공격이 즉시 일어나는 것과 시간을 더욱 끄는 일은 어느쪽이 더 유리할까?’
 두사량은 힐끗 곁눈질로 연소정을 주시했다.
 그녀는 무공을 알지 못한다.
 무공을 보는 눈은 있으되 익히지는 않았다.
 만일 산적들의 공격이 시작된다면 두사량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연소정을 보호해야만 했다.
 적의 공격이 짜임새가 있다면 자신의 처지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반면 그들의 공격에 짜임새가 없다면 없는 그만큼 두사량으로서는 유리하리라.
 숨어 있는 적!
 명백히 느껴지는 두 명과 희미한 흔적일 따름인 한 명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씩 자리를 바꾸며 움직이는 이유는 공격에 유리한 대형을 갖추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만일 이대로 시간이 흘러, 세 명의 적이 완벽한 삼재의 진형을 갖추어 자신들을 공격해 온다면!
 ‘그럼 나와 연소저를 함께 보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 놈들의 공격 개시가 빠르면 빠를수록 내게는 유리하다!’
 생각을 마친 두사량은 연소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연소저께서는 짐작하시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
 난데 없는 질문을 받은 연소정의 눈이 커졌다.
 본래 커다란 그녀의 눈망울은 놀라거나 의아해 할 때마다 더욱 둥글어져서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곤 하였다.
 연소정이 느끼는 당황스러움을 알고 있는 두사량은 얼른 질문을 바꾸었다.
 “놈들이 왜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지 아시겠냐는 질문입니다. 대별객잔에는 우릴 제외시켜도 아직 많은 손님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이자들이 객잔에 오는 손님을 모두 노렸다면, 또한 죽였다면 벌써 소문이 나도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문은 나지 않았죠. 그렇다면 놈들은 사람을 가려 노리며, 또한 가려서 죽인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연소정은 그제서야 두사량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지금과 같은 때에 즉, 암중의 살수가 노리고 있어 생명이 백척간두에 달해 있는 듯 느껴지는 지금처럼 위급한 때에 왜 이러한 질문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금 전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 두사량의 행동에 이유가 있었듯, 지금 물어보는 두사량의 질문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였다.
 때문에 연소정은 즉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들과 자신들이 구분되는 일!
 쉽게 말하여 다른 손님들은 하지 않았으되, 자신들은 하였던 일에 대해 생각하자, 연소정은 즉시 결론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응수곡이군요!!”
 연소정의 말에, 두사량은 즉시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습니다. 바로 응! 수! 곡! 입니다.”
 ‘응수곡’을 말하는 두사량의 어조에는 힘이 실려 있어,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을 끊어 외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주변 공기 속에 은밀히 맴돌던 살기가 끈적한 아교풀처럼 변하여 두사량의 심령을 찔러왔다.
 사람의 살기란 마음에서 일어난다.
 숨어 있는 세 명의 마음속에 깃든 살기는 본래 두사량이 응수곡에 관한 일을 물어봄으로 인해 비롯되었으니, 지금 또다시 두사량이 ‘응수곡’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다면, 살기는 당연히 더욱 거세게 일어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두사량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네놈은 두 번 다시 응수곡의 일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맹렬한 외침과 더불어 두 군데의 수풀이 흔들렸다.
 수풀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속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이 몸을 날려, 각각 한 개씩의 도를 휘두르며 두사량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으니 흔들리는 것뿐이었다.
 수법은 조금 전 관이가 보여줬던 천지락과 꼭같은 형태!
 그러나 도에서 내뿜어지는 위세는 오히려 관이의 것보다 확연하게 약했다.
 그들의 공격에 놀란 연소정이 또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조심해요, 두 공자!!”
 그녀에게는 당연히 비명을 지를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위력이 약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무디어 보이는 칼끝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머리를 베고 살을 자르고 뼈를 가르는 일쯤은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두사량의 머리통도 그점에 있어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두 점소이의 공격을 맞는다면 바닥을 구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사량은 두 갈래의 공격을 애써 무시했다.
 ‘내 말에 반응하여 즉시 움직였다. 이들은 하수다! 마음의 수양또한 천박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이 두 명이 아니라 숨어 있는 나머지 한 사람이다! 그는 어디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할 것인가? 숨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드러나기만 하면 나는 그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데 ...’
 두 개의 도가 두사량의 머리 바로 한치 앞까지 짓쳐온 순간, 두사량의 양발이 역칠성과 순칠성의 보법을 연이어 밟으며 좌우로 흔들렸다.
 슈칵!
 슈카카칵!
 도는 두사량의 옷자락을 일부 베어냈지만, 피부까지 건들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두사량의 신형 역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두사량이 두번째의 도를 피하며 그 몸이 약간 뒤로 쏠리는 순간, 즉 연소정으로부터의 거리가 약간 멀어지는 순간!
 아름들이 나무 한 그루가 반쪽으로 갈라져나가며, 그 속으로부터 섬광같은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파천섬(破天閃)!!”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베어낼 것만 같은 위력으로 파천섬을 전개하는 것은 날이 시퍼런 한 자루의 청강장검!
 그 청강장검의 주인은 바로 대별객잔의 계산대를 지키던 주인장이었다!!
 항상 사람좋던 웃음이 떠나지 않던 둥근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이 머물지 않았다.
 살기!
 오직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뿐이었다.
 그가 죽이려는 대상은 두사량이 아니었다.
 적을 칠 때, 적의 약한 곳을 먼저 치라는 격언은 군사 대 군사끼리 대결하는 대규모의 전쟁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지금 주인장이 두사량을 두고 연소정을 먼저 노린 것은 바로 그러한 가르침에 충실한 자세인 것이다.
 이 방법은 비겁하긴 했지만 효과는 컸다.
 두사량의 안색은 크게 변하고 말았다.
 그의 몸은 약간 뒤로 젖혀져 있어, 연소정쪽으로 움직여가는데 평소보다는 찰나의 시간이 더 걸렸다.
 짧은 시간!
 하지만 그러한 미묘한 시간의 어긋남만으로도 연소정의 생사는 충분히 다른 쪽으로 가늠될 수 있는 것이다.
 ‘망할!!’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두사량은 뒤로 눕혀지는 몸을 더욱 빠르게 눕혀버렸다.
 그가 몸을 눕히는 옆쪽으로는 시체로 변해버린 관이가 누워있었고, 일도가 실패하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두 명의 점소이가 서 있었다.
 그들 두 명의 점소이는 나름대로 동작을 취하고 있었지만, 두사량의 동작이 너무나 빨라 그와 비교하자 마치 움직이지 않는 두 개의 석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두사량은 빨리 움직이는 상체의 반동을 하체로 내려보냈다.
 활대가 휘어지듯 한껏 굽혀진 허리의 힘을 이용하며, 두사량은 바닥에 꽂혀 있던 관이의 도를 힘껏 차버렸다.
 팡!
 쐐애애앵-!
 도가 허공을 갈랐다.
 파천섬의 일검으로 연소정을 노리던 주인장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그대로 초식을 전개한다면 연소정의 가슴은 찌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도! 두사량이 방금 차낸 도의 날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대단하다!!”
 찔러가던 검의 기세를 바꾸어 옆으로 휘두르는 주인장의 임기응변은 재빨랐다.
 창! 피우우우웅!
 주인장의 검에 다섯 차례나 재빠르게 두들겨 맞은 도는 날아가던 기세를 모두 잃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떠오른 도를 잡아가는 신형이 있었다.
 “차핫!!”
 허공중의 도의 손잡이를 굳게 잡아버린 손아귀의 주인은 바로 두사량이었다.
 두사량은 허공중에서 몸을 서너차례 회전시켜 도에 실린 힘을 완화시킨 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바로 연소정의 옆이었다.
 “이것으로 ....”
 두사량은 도를 천천히 앞으로 들어 중단의 자세로 주인장을 향해 겨누며 말을 이어갔다.
 “ ... 너희는 모두 드러났다. 드러난 이상 난 너희들에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주인장의 미간이 땀방울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두사량의 말이 절대 호언장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두사량이 전개하는 초식들로 미루어 그는 소림의 속가제자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무림이 변화무쌍하고, 무수한 문파가 사라지고 만들어짐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대한 힘줄기들은 분명히 실존했다.
 바로 구파일방이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천년의 역사가 있고, 천년의 전통이 있었다.
 편벽과 궤이는 순간적으로는 정통으로부터 승리를 거둘 수 있을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무림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관대대는 암습으로는 두사량을 죽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암습이 아닌 정당한 대결이라면, 자신들 세 사람은 절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정통으로 익힌 무공에는 그러한 힘과 위엄이 있는 것이다.
 주인장은 그렇게 판단했고, 그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나는 ... 관대대(關大大)라고 하오!!”
 주인장이 돌연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하자, 두사량도 조금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두사량이오!!”
 관대대는 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두사량을 쳐다보았다.
 두사량이 들고 있는 도의 끝으로부터는 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압력이 피어올랐다.
 ‘소림의 절정도법(切情刀法)이 틀림없다. 과연 소림 무공에 대한 소문은 거짓이 아니구나!! 그렇지만 ....’
 관대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 필승의 자신이 없다면 나서지 마라. 무조건 달아나라. 죽음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난다면 무조건 피해다니는 것! 그것만이 험난한 강호에서 목숨을 오래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말은 평소 관대대가 수하들에게 즐겨썼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 관대대는 이러한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관대대는 자신의 뒤에 선 두 명의 점소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두사량에게로 돌렸다.
 “내 뒤에는 지금 두 명이 있소. 하지만 이들은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함 또한 알고 있다. 나는 당신과 싸우면 반드시 죽게 되겠지. 사실 처음의 암습에 실패했으니, 죽음을 피하고 싶다면 나는 마땅히 도망가야 하오.”
 두사량은 침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하지만 난 도망가지 않겠소. 우선 응수곡에 관한 일을 물어보는 자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윗선의 명령이 있어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요.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내 마음을 더욱 괴롭히는 건 당신의 손에 먼저 죽어간 내 동생 관이의 죽음이오. 난 그의 시체를 두고 차마 도망갈 수가 없소.”
 “ .....”
 두사량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소! 그렇게 도망간다 해도 평생 당신의 마음은 편치 않을테니까. 나는 지금 당신의 선택이 옳다 생각하오.”
 관대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그의 손목에는 팽팽한 힘줄들이 앞다투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죽겠지만 적어도 서너군데의 큰 상처를 당신의 몸에 남길 수는 있을 게요. 그리되면 죽어 동생을 만난다 해도 해줄 말이 생기는 셈이지.”
 이번에 두사량은 긴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 ..... 그말 또한 .... 옳소!!”
 “그렇다면 어서 시작하도록 합시다아--”
 돌연 맹렬한 외침을 터뜨리며 관대대의 신형이 떠올랐다.
 더불어 관대대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점소이들도 도를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두사량은 도의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그의 손목에서는 관대대처럼 힘줄이 곤두서지 않았지만, 도첨에서는 오히려 관대대의 것보다 배 이상 강한 기세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통 무공의 위력이다.
 관대대는 어쨌거나 암흑속의 사람이 아닌가.
 그가 아무리 열심히 수련했다치더라도, 익힌 것은 주로 잠행과 암습에 관한 기술이며 또한 뒤에서 하는 살인이었다.
 드러난 싸움에서라면 관대대는 당연히 소림의 진전을 이은 두사량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동쪽 산정(山頂)이 이윽고 수천 갈래의 빛살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새로운 햇살 아래에서, 피를 토하고 고함을 외쳐대는 처절한 싸움 또한 막 시작되는 중이었다.
 
 4.
 비추이는 햇살의 각이 꽤 높아졌다.
 밤새 피부를 찔러오던 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연소정과 두사량은 나무 그늘을 찾아 앉아 있었지만, 태양이 움직이자 그러한 그늘조차 양지로 변하고 말았다.
 두사량이 미간을 찌푸리며 오른 손바닥을 눈썹 위로 붙였다.
 “움직이지 마세요!!”
 뒤편에서 놀란 듯 뾰족한 연소정의 외침이 들려왔다.
 연소정은 두사량의 오른쪽 어깨에 난 커다란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이자 붕대가 그만 풀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
 미안스러운 듯, 두사량의 안색이 붉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연 소저! 그 .. 관대대란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생각하느라고 그만 ...”
 “ .....”
 연소정도 순간 관대대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응수곡에는!! 그곳에는 ...’
 분명 관대대는 응수곡의 일에 대해 말하려 하였었다.
 
 두사량과 관대대의 싸움을 흉험했다.
 또한 피를 튀기고 뼈를 깍아내는 참혹한 것이기도 했다.
 반시진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명의 점소이는 이미 바닥에는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숨은 벌써부터 끊어진 상태였다.
 두사량은 오른쪽 어깨와 왼쪽 옆구리, 그리고 왼쪽 허벅지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특히 왼쪽 옆구리의 상처는 심하여서, 쉴 새 없이 핏물이 흘러내렸다.
 반면 관대대의 상처는 흉부에 생긴 강남콩만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관대대의 얼굴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그의 흉부에 생긴 조그마한 상처에서는 핏물은 흘러내리지 않았으나, 그 상처로 들어간 두사량의 경력은 이미 관대대의 내장을 산산조각내어버렸기 때문이다.
 “나 ...나는 죽는다! 하, 하지만 당신 또한 처음 내가 말했던 것처럼 무사하진 ... 못하였다.”
 관대대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더듬자, 두사량은 한숨과 더불어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그렇소!!”
 “네, 네놈들이 .... 응수곡을 찾아감을 알고 ..있다. 너, 너희는 백웅당(白熊堂)에서 나, 나왔느냐?”
 관대대의 느닷없는 말에, 두사량의 얼굴에는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백웅당?!!”
 “너, 너는 백웅당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
 두사량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연소정 또한 그 이름을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다.
 두사량의 표정으로, 상황을 짐작한 듯 관대대는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아 이, 이럴 수가!! 그, 그렇다면 나는 오해하여 너흴 공격했단 말인가? 그 ... 그렇다면 나의 죽음은 ... 내 아우와 내 수하들의 죽음은 ....허어허어어.”
 관대대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내장이 산산조각난 상태에서 여지껏 두 발로 버티고 서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의 강한 의지는 증명된 셈이었다.
 관대대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며, 눈의 빛이 꺼지면 마음의 빛도 꺼진다.
 마음의 빛이 꺼지면 당연히 영혼이 사라지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법이다.
 “나 .. 나는 죽는다. 복수는 ..할 수 없겠지. 하, 하지만 너희 역시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왜, 왜냐하면 ... 너희가 가려는 응수곡에는 .... 응수곡에는 ... 그, 그곳에는 ....”
 관대대의 고개가 옆으로 떨구어졌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린 사람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법이지 않는가.
 
 “관대대는 응수곡의 일에 대해 어떠한 것을 말하려 하였던 걸까요?”
 연소정이 두사량에게 물었다.
 물론 그녀 역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관대대는 이미 죽었으니 대답할 수 없고, 두사량은 관대대가 아니니 그 마음을 알 길 또한 없기 때문에.
 다만 스스로 마음속으로 짐작하는 바를 정리하기 위해 물었던 것일 뿐이다.
 두사량 또한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응수곡에는 분명히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온다는 망치질 소리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흑랑채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웅당이라는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요.”
 “백웅당이 어떤 집단인지는 현재 아무리 우리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쪽 생각은 우선 접어두는 편이 났겠군요, 두 공자!”
 “연 소저의 말씀이 옳습니다.”
 두사량은 고개를 끄덕인 뒤, 연소정을 보며 다시 물었다.
 “관대대의 마지막 말을 듣고 연 소저께서 느끼신 감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아! 저는 ... 제 느낌을 말하자면 ...”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연소정은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두려움! 맞아요, 바로 두려움이었어요.”
 “응수곡에는!! 바로 그곳에는 ..., 하는 관대대의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응수곡에 아주 두려운 뭔가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러한 말은 우릴 두렵게 만들어 우리가 응수곡에 가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요.”
 “아! 이제 알겠어요. 관대대는 절대 외인을 응수곡에 접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꺼예요. 때문에 죽어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려 한 거군요.”
 연소정이 환하게 웃으며 결론짓듯 말했다.
 하지만 두사량은 웃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단호히 고개를 흔들기까지 했다.
 “틀렸습니다.”
 “틀리 .. 다니요?”
 연소정이 의아한 낯빛으로 묻자, 두사량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관대대는 확실히 응수곡의 비밀을 엄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백웅당에게 제한된 명령이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관대대가 그렇게 말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 그, 그렇다면 나, 나는 오해하여 너흴 공격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의 죽음은 ...내 아우의 죽음은 ...
 
 허탈하게 웃으며 관대대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연소정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사량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관대대는 왜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려 한 것이죠?”
 “아마 다른 목적일 겁니다.”
 두사량은 허리의 상처가 아픈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미지의 것과 만나게 될 때, 두려움과 함께 찾아오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은 두려움이 커지면 커질 수록 오히려 고조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지요. 뭔지 아시겠습니까?”
 “호기심!!”
 연소정이 단번에 대답해내자, 두사량은 빙그레 웃었다.
 “맞습니다. 바로 호기심이지요. 관대대가 노린 것은 바로 그 호기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일리가 있다는 듯 연소정이 손뼉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관대대는 우리가 백웅당과 관계 없다는 걸 알자 마자, 우리가 단지 호기심때문에 응수곡을 찾아 간다고 판단했을 꺼예요. 그는 응수곡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말하려는 듯 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죠. 때문에 우리의 호기심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겠지요.”
 “옳습니다.”
 “응수곡에는 분명 뭔가 있기는 할 꺼예요. 어쩌면 그건 아주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지요. 때문에 ... 때문에 그는 ...”
 “ ......”
 “아! 이제 알겠어요.”
 연소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복수! 복수로군요!! 그는 두 공자에게 자신이 죽어감을 원통스러워하며 복수를 하려 했어요. 응수곡에는 아주 두려운 무언가가 있어, 우리가 그곳에 가기만 하면 자신의 복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역시 ... 옳습니다.”
 두사량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앞쪽으로 보이는 첩첩한 산들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 어딘가에 응수곡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응수곡에는 자신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비밀이 숨어 있을런지도 모른다.
 관대대가 마지막 남긴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만큼 두렵기도 하였다.
 하지만 두려움과 비례하여 커져만 가는 호기심을 억누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간밤에 있었던 싸움에서 모두 네 명이 죽었다.
 그 싸움을 무척 불길한 것이었으며, 두사량과 연소정의 목숨 또한 약간은 위태로웠었다.
 대별산으로 떠나오며 두사량은 쉴새 없이 마음을 괴롭히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였었다.
 그 불안스럽던 예감의 정체는 간밤의 일전(一戰)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야!’
 두사량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다.
 절대 그 정도의 위험때문에 곤두서버릴 두사량의 신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한 위험! 더한 흉험함이 응수곡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은 가지 말아야 한다.
 가지 않는 편이 옳다고 두사량은 생각했다.
 그러나 두사량은 자신들은 반드시 가고야 말 것임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괴벽이 있기 마련이고, 두사량과 연소정의 경우에는 누르기 힘든 호기심이 바로 그 괴벽이었다.
 두사량은 연소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도 두사량과 서로 갈등하며 싸우고 있는 두려움과 호기심의 잔재가 엿보였다.
 “ ..... ”
 “ .....”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걸음을 옳겨 앞으로 갔다.
 방향은 말할 것도 없이 응수곡쪽이었다.
 땅! 따아앙!
 작은 쇳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망치질 소리!
 쉬지 않고 응수곡을 울린다던 바로 그 망치질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음속에 깃든 공포라는 포악한 한 마리의 용을 깨우는 듯도 하였고 잠재우는 듯도 하였다.
 연소정과 두사량은 또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더욱 빨라졌다.
 
 
 *제4장. 시불패(施不敗)!!
 
 1.
 쩡!
 쩌엉!!
 쩌어어엉!!!
 망치질 소리는 멀리 퍼져나가면 퍼져나갈수록 나무와 나무, 수풀과 바위 사이를 흔들리며 그 울림을 더해나갔다.
 응수곡(鷹愁谷)!
 하늘을 날으는 새들조차 근심스러워 한다는 계곡은 지금 그 망치질 소리의 울림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작은 집 한 채!
 사방의 문이란 문은 다 열려 있었기에, 내부의 사정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 집 안으로 시퍼런 혀를 낼름거리며 타오르는 화로가 하나 보였다.
 불은 살아 있었다.
 모든 존재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숨기지 못한 채, 사물을 삼키려 그 푸르면서도 붉은 아가리를 벌려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불길은 밖으로 번지지 못했다.
 그 불길을 조정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이었다.
 구리빛으로 빛나는 등에 일어서 있는 한올 한올의 근육들이 건장하다 못해 아름다운 느낌마저 전해주는 청년이었다.
 전신에 걸친 옷이라곤 하반신의 중요 부분만을 겨우 가린 짧은 가죽 바지 뿐이었다.
 대개 건장한 남자의 몸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늘씬한 여인의 몸매에서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기 마련아닌가.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 청년은 몸은 그 두가지의 느낌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쩡! 쩌어엉!
 건장한 팔뚝에는 힘줄이 꼿꼿히 일어서 강해보이면서도 일면 섬세함을 갖춘 손이 달렸고, 그 손에 굳게 쥐어진 것은 거대한 망치였다.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칠흑처럼 검게 빛나는 망치의 머리부분이 쉬지 않고 아래위로 움직인다.
 그 때마다 그 망치에 두들겨 맞는 쇳조각이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계속 응수곡을 울려대던 망치 소리의 정체였다.
 청년의 뒤쪽으로는 검, 도, 부, 창, 추 등의 병장기가 이미 완성품인 상태로 쌓여 있었다.
 청년은 병장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금 열심히 내려치고 있는 쇳덩이도 이미 한 자루의 도의 형태를 갖춰가는 중이었다.
 면이 넓고 뭉툭해서 무거워 보이는 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둔해 보이는 도일수록 그걸 다룰 수 있는 힘만 갖춘다면, 싸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법이다.
 도는 이제 거의 완성되어 있어 손잡이 부분에 상어 가죽이나, 오목으로 만든 손잡이를 끼우기만 하면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출 것이다.
 
 “어떤 사연일까요?”
 숨어 망치질 하는 청년을 지켜보던 연소정이 귓속말로 두사량에게 물었다.
 하지만 두사량으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연소정이 모른다면, 그 자신 또한 알 방법이 없는 건 마찬가지잖는가.
 “ .....”
 두사량이 뒷머리만 긁을 뿐 대답을 못하고 있자, 연소정이 다시 말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병장기의 숫자를 세어봤어요. 정확히 스물 네 자루더군요. 그리고 지금 만들고 있는 도까지 합한다면 25라는 수가 나오게 되지요. 이 숫자가 갖는 의미를 아시겠죠, 두 공자!”
 두사량은 물론 알고 있었다.
 25란 흑랑채 전 인원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이곳 응수곡의 일이 흑랑채와 연관이 있으니, 관대대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을 막았던 것 아닌가.
 처음부터 두사량 역시 병장기의 수를 세었고, 그 숫자 덕분에 반나의 청년이 지금 만들고 있는 병장기가 흑랑채에 전해질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흑랑채의 병기를 조달하는 장소인 모양입니다. 신병이기가 아닌 이상, 병장기란 닳기 마련이죠. 아마 저 청년은 대장장이로서 흑랑채에 협력하는 자인 듯 합니다.”
 두사량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소정이 얼른 덧붙였다.
 “그 ... 백웅당이란 곳은 틀림없이 흑랑채와 적대하는 곳일 꺼예요. 때문에 백웅당의 무리가 이곳으로 접근하는 걸 흑랑채에서는 좌시할 수 없는 것이구요. 호호. 하지만 안심이네요.”
 “안심 ...이라고 하셨습니까?”
 의아해진 두사량이 연소정을 쳐다보았다.
 연소정은 더욱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리 말했어요, 두 공자!! 저는 본래 응수곡으로 들어오면서 매우 큰 흉험함을 당할 각오까지 마음에 새겼었거든요. 우리로서 감당하지 못할 아주 무서운 존재가 이곳 응수곡에 있으리라 짐작했지요. 한데 지금 보니 한 명의 대장장이 청년 뿐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안심할 수 밖에요.”
 “ ........”
 두사량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연소정의 말에 승복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던, 가령 매우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해도 죽어가는 순간에는 어느 정도 머리가 좋아지는 법이다.
 하물며 관대대는 처음부터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었다.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두사량과 연소정을 응수곡으로 유인한 것이라면, 반드시 응수곡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본래 위험이란 한 눈에 드러나는 것보다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 더욱 심장을 옭죄어오는 법이다.
 두사량은 강한 예감을 느꼈다.
 ‘위험이 있다. 반드시 아주 큰 위험이 닥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을 계속 떠돌던 막연한 불안감의 정체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불안감의 정체는 이곳에 있다.
 응수곡에 있는 것이다.
 멀리 보이는 대장간 속의 청년!!
 근육에 힘이 넘치고 건장한 몸을 갖추고는 있으나, 내공이 강해보이지는 않는다.
 두사량처럼 내가기공을 익힌 무인은 외공을 익힌 사람을 절대로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한 올의 근육 섬유만으로도 여러덩이의 근육 덩어리가 만들어 내는 힘을 초월하는 비법이 내가기공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 대장장이 청년이 내가 느끼는 불안감의 근원(根源)인가?’
 두사량은 곧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닐 것이다. 그는 단순히 열심히 병장기를 만들고 있는 청년에 지나지 않는다. 가만 ... 병장기!! 병장기라고!!?’
 한 갈래의 생각이 두사량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는 창백해진 낯빛으로 연소정을 보며 말했다.
 “병장기는 모두 24에다가 마지막 한 자루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연 소저!!”
 “예, 맞아요. 저 또한 보았잖아요?!!”
 연소정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들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두사량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두사량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병장기를 이곳에 쌓아 놓기 위해 만드는 건 아닐 겁니다. 모두 완성된다면 반드시 그걸 가지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장담하건데 흑랑채 출신일 것이구요.”
 그 말을 듣자 연소정의 안색도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두사량이 관대대와 관이, 그리고 두 명의 점소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절대 두사량의 무공이 막강해서가 아니었다.
 관대대와 관이 등은 비록 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승의 무공을 수련한 고수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두사량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흑랑채의 진짜 고수가 온다면 상황은 어찌될까?
 단 여섯명으로 삼백 예순 다섯 명에 달하는 오호채 산적떼를 몰살시킨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소대 단위로 움직인다 하였다.
 오지 않으면 모르되, 온다면 최소한 여섯명은 올 것이니 절대 두사량의 힘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병장기는 거의 완성되었다.
 당연히 그 병장기를 가지러 오는 흑랑채의 구성원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무섭다는 그들, 오호채를 몰살시켰다는 흑혼대(黑魂隊)가 올 가능성도 있지 않는가.
 두사량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압박해오던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확신했다.
 “일어서십시오, 연 소저!! 그렇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진짜 흑랑채의 흉적들이 나타난다면 우리의 생명조차 장담할 수 ...”
 연소정의 눈빛 또한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연소정은 일어서지 않았다.
 앉은 채로 두사량을 올려다 보며, 그녀는 한 자 한 자 아주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전 가지 않겠어요!!”
 
 2.
 본래 연소정과 두사량은 남다른 사람들의 남다른 사정을 알아보고자 대별산으로 왔다.
 특이한 일은 특이한 재미를 불러 일으키므로, 새로운 소재를 찾아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전기에 응용하기 위함이었다.
 오면서 그들은 몇가지의 일을 겪었다.
 심지어 네 사람이 목숨을 세상으로부터 놓아보내기도 하였다.
 살인이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는 하품하고 물을 긷는 일상과도 비슷한 경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살인이란 아주 특별하고 두려운 경험이기 마련이었다.
 물론 두사량은 무림인이니 도적 네 명의 목숨에 대해 별다른 안타까움이나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소정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전기를 쓰고자 하는 목적에서는 두사량과 같은 마음이었지만, 강호인이 아니었기에 살인에 대해 보는 시각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많이 틀렸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피와 뇌수를 토해내며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는 건 연소정으로서는 두번 회상하기조차 싫은 기억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대별산이었다.
 어렵다면 많이 어렵다 말해도 좋을 정도의 일을 겪으면서 마침내 찾아온 응수곡이었다.
 쉴 새 없이 울려퍼지는 쇳소리의 정체가 젊은 청년 대장장이가 만들어 내는 망치 소리라는 건 밝혀졌다.
 하지만 그것만을 알아내어 돌아가는 것으로, 연소정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반드시 조금 더 알아내야겠어요.”
 그녀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두사량은 쉽사리 짐작해 내었다.
 깊은 산중에 사는 사람에게는 사연이 많은 법이다.
 번잡한 시정에 사는 사람에게도 물론 사연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산이 깊을 수록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연 또한 깊어지기 마련이었다.
 산에 숨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에게도 사연은 있다.
 오지의 밀림을 뒤지며 맹수를 쫓아다니는 사냥꾼에게도 남에게 말못할 비밀은 많은 법이다.
 하물며 깊디 깊은 계곡에서 쉬지 않고 망치질 소리를 울려내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에게 사연이 없다면 누가 믿겠는가.
 연소정이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사연이었다.
 두사량은 끝내 한숨을 참지 못했다.
 “휴우! 연 소저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무슨 수로 알아낸단 말입니까? 저 청년에게 있는 사연은 당연히 깊고 특별할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깊고 특별한 사연일수록 남에게 말하지 않는 법이지요. 제가 장담하건데 저 청년은 절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연소정도 동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꽤 관상을 잘 보는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가끔씩 보이는 청년의 오른쪽 옆 얼굴만 보아도 청년이 말수가 적고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두사량이 연소정의 손목을 잡더니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연 소저! 지금은 이럴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짜로 흑랑채의 산도적들이 온다면 저 또한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두사량은 영웅호걸이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이기적인 행동을 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지만, 연소정만은 절대 남겨두고 갈 수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가장 아끼는 존재가 있는 법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아끼기도 하는 존재 말이다.
 그리고 두사량에게 있어 그런 존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연소정이었다.
 두사량은 손목 힘은 강했다.
 무공이 없는 연소정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연소정이 돌연 뾰족한 외침을 터뜨렸다.
 “앗! 저걸 봐요!!”
 두사량은 얼른 시선을 돌려 연소정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마치 인주처럼 붉디 붉은 몸뚱이를 한 채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는 한 마리의 뱀이 보였다.
 “호, 홍린사(紅燐蛇)로군요!!”
 두사량이 놀라 한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극독을 지니고 있는 홍린사는 물리게 되면 일곱 걸음을 옮기기 전에 죽게 된다하여 칠보절명사(七步絶命蛇)로도 불리우는 독물이었다.
 본래 남자보다는 여자가 뱀을 더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홍린사가 나타나자 두사량은 놀라 한 걸음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연소정은 오히려 빙그레 밝은 미소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거야말로 하늘은 스스로 원하는 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격언의 참뜻이군요. 호호호.”
 연소정은 두사량을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홍린사가 아무리 두렵다해도 이만큼 떨어져 있으니 물릴 염려는 없잖아요? 게다가 조심만한다면 두 공자의 무공으로 능히 제압시킬 수 있을 꺼예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두사량이 한 걸음 물러났던 것은 단지 조심하기 위해서일 뿐, 실상 무공을 익힌 그가 홍린사에게 물릴 위험은 희박하였다.
 “물론 조심한다면 제압할 수는 있습니다만 ...”
 “호호 되었어요!!”
 연소정의 웃음이 더욱 밝아졌다.
 그녀의 표정은 통쾌한 말썽거리 하나를 막 궁리해 낸 개구장이와 매우 흡사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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