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트로츠키와 우리 조선 빨갛게 빨갛게

프롤로그(2022/02/04일자 수정본)

2021.12.20 조회 18,477 추천 515


 깊은 밤, 오래 뒤척이던 남자는 얕은 잠을 드나들며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 원산에 또아리 튼 이적(夷狄)들과의 회담을 마치고 막 한양에 돌아오던 참이었다.
 
 주상 전하께 회담의 내용을 전하고 나니 어느새 낮은 지나가고 저물녘의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근무시간이 끝나 퇴청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바보 같은 아랫것들이 마당에 바글바글 모여서 웬 소란이다.
 
 “나으리, 나으리. 원산에 사는 저 야만족들은 무쇠도 씹어 먹는다는데 한양으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모두 죽이고 활활 타는 화로에 집어넣어 뼈도 안 남기고 땔감으로 쓸 거라는 거이 사실입니까요?”
 “예끼, 이 어리석은 것아! 그럴 일이 있겠느냐? 내가 가보았는데 원산에 저 야만족들 또한 사람이기는 매한가지다.
 또 보아라! 원산은 저 멀리 함길도에 있고 한양은 경기의 한가운데 박혀 있으니 그 사이에는 첩첩이 쌓인 산줄기로 가로막혀 있거늘 어찌 저 야만적인 것들이 왕도(王都)를 감히 범할 수 있겠느냐!”
 
 ···라고 남자가 소리쳐 훈계하는데, 건방지게도 아랫것들이 남자의 말은 들은 체 만 체하며 그저 남자가 가리킨 곳과 반대방향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남자는 그 꼴이 하도 우습기도 하고, 대체 무얼 보고 도망하는가 싶기도 하여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믿지 못해 꿈뻑거렸다.
 
 갑자기 한양을 둘러싼 산맥 전체가 출렁거리더니, 모래로 쌓은 산처럼 우르르 녹아내리고 있다.
 그리고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 있던 산들 또한 마치 누가 커다란 포탄이라도 떨어뜨린 것처럼 우르르 쪼개지며 무너져 내린다.
 
 원산 방향의 산들이다.
 
 남자는 그 사실을 문득 깨닫고 경악에 차서 비명을 지른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리며, 곧 하늘에 매달려 있던 태양마저 스러지고 있다.
 붉은 빛으로, 피처럼, 원산의 저 야만족들이 휘날리던 깃발의 빛깔처럼.
 
 남자는 여전히 비명을 지른다. 목에서 피가 철철 흘러 넘치고 기도와 성대가 모두 찢어져도 오로지 비명소리 그 자체만이 남은 것처럼 남자는 끊임없이 비명을 지른다.
 
 곧 저 멀리 원산의 풍경이 보이고, 그곳으로부터 강철로 만든 길이 곧게 뻗어져 나와 한양으로 연결되고 있다. 아니, 길이 아니다. 강철이 물결치고 있다. 굽이치고, 마치 바다처럼 파도 치면서 한양 따위는 쇠로 덮어버릴 것처럼 강철의 물결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증기선이 넘실대며 다가온다.
 한양으로, 남자에게로.
 
 남자는 여전히 비명 지른다. 목이 닳아 없어지고 몸도 뜨거운 쇳물로 녹아 사라져 모가지만 남았는데도 비명 지른다.
 
 증기선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강철의 물결이 경복궁을, 종묘를, 사직을, 그리고 남자 자신과 그 저택을 덮어온다.
 
 그리고 가까워진 증기선 위에 선 야만족 남성과 눈이 마주친다.
 
 트로츠키다. 트로츠키가 우리 모두를 죽이러 온다. 세상을 뒤집고 모두 헤집어 놓으러 온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던 흔적마저 지워버리러 온다.
 그렇게 종말이 왔다.
 
 ///
 
 남자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꿈에서 깨어난다.
 
 저도 모르게 문을 부수듯이 열고서 나온 남자는 다시 원산 방향을 향해, 소련 방향을 향해 고개를 튼다.
 
 여전히 소련과 조선 사이는 산맥들로 막혀 있고, 증기선이 육지를 타고 넘어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날 성싶지 않다.
 
 “사우당!! 자네 무슨 일인가? 괜찮은가!”
 
 혼비백산하여 나오다 보니 뒤늦게 눈치 챘는데, 그의 친구 권람이 찾아온 상태다.
 남자, 한명회는 급히 의관을 정제한 뒤 민망함에 헛기침을 킨다.
 
 “크흠,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소련에 다녀온 뒤로 통 잠이 오지 않아 그러네. 그 트로츠키라는 작자의 얼굴이 계속 눈에 어른거려서는! ···자네도 마찬가지일 듯하여 왔네.”
 “···그랬군.”
 
 그러나 한명회는 어느새 다시 혼을 놓고 원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권람의 말소리 따위는 다시 귀에서 멀어진다.
 
 변함없이 떠있는 달, 안온한 밤하늘, 가만히 누워있는 산.
 
 오히려 지금의 이 장면이 꿈만 같다.
 
 한명회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
 언젠가 저 달과 해가 부수어지고 붉은 하늘이 열리리라. 저 산맥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강철의 바다에 잠기리라.
 그리고 조선과 그 종사(宗社)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위에, 오로지 소련과 그 붉은 깃발만이 남아있으리라.
 
 식은 땀이 한명회의 척추 줄기를 훑고 간다. 밤공기가 차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간다왼쪽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프롤로그 변경을 건의해주신 전자석 님께 감사의 말씀 남깁니다!

+2월 4일자 이전까지 게시되어 있던 원래의 프롤로그는 공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60)

마귀(魔鬼)    
제목 어그로 미쳤네
2021.12.30 18:17
소벌    
조선을 빨갛게 한다고 했으니 아무튼 국보법 위반은 아닙니다!
2022.01.05 23:24
아름다름    
재미있을 거 같아요
2022.01.06 03:19
카르카손    
ㅋㅋㅋㅋ 표지 제목 어그로 무엇;
2022.01.06 12:48
KJune    
표지 제목 작가명의 삼위일체...
2022.01.06 14:08
용가리튀김    
진짜 빨간맛
2022.01.07 01:03
응우옌꾸억    
켄터키 할부지
2022.01.07 01:23
나래로    
표지 트로츠키 제목 빨간맛 작가 좌파 삼위일체 공산당이다
2022.01.07 15:24
사회쥬지자    
홀리 쉿.... 혁명만세 조반유리 소설이 둘이나 연재되다니... 흑흑 마르크스 선생님 보고계십니까
2022.01.07 16:31
he******    
빨간 색! 빨간 색!
2022.01.07 17:03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