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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더 1권-1

2015.01.14 조회 5,020 추천 50


 1. 내 처음 시작은 졸라 미비했고
 
 서울을 중심으로 평양과 대전을 80분 만에 주파하는 초고속 지하철, 통일 1호선.
 지금 지하철 안에는 출근하는 인파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목표 발견!’
 오늘의 사냥감을 찾던 수열의 눈에 양복을 입은 한 사내가 클로즈업되었다.
 객차 안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약 3분 후 구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어! 구로에서 내리나? 사냥감을 이렇게 놓칠 수는 없지.’
 공장과 기업체가 밀집한 구로역은 많은 승객이 내리는 역이었다. 수열은 승객에게 떠밀린 척하면서 목표로 삼은 감색양복의 사내에게 접근했다.
 ‘왼쪽 상의 주머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양복재킷에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불리는 거대그룹 KG의 로고가 새겨진 배지가 달려 있었다.
 ‘KG 다닐 정도면 현금이 두둑하겠지.’
 지하철은 어느새 구로역에 들어섰는지 플랫폼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감색 양복을 입은 사내는 밀리지 않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천장에 매달린 원형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때다!’
 사내의 오른손이 손잡이를 부여잡는 그 찰나의 시간, 수열의 손이 사내의 양복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오! 역시 KG야.’
 수열은 조금 전 손끝에 느껴졌던 빵빵한 감촉에 기쁨의 미소를 실실 흘렸다.
 ‘큭큭큭, 반대편 지하철을 타고나면 그야말로 완전 범죄!’
 드르륵-
 출입문이 열리면서 많은 승객이 내렸고, 인파에 휘말린 수열도 따라 내렸다.
 때마침 맞은편으로는 대전행 초고속 지하철이 당도했다.
 “이크!”
 재빨리 인파를 파헤친 수열은 출입문이 닫히기 직전 지하철에 오를 수 있었다.
 대전행 지하철은 이전 지하철에 비해 많이 한산한 편이었다.
 ‘얼마나 들었을까?’
 오른손을 들어 품안에 있는 빵빵한 지갑을 만져보던 수열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거렸다.
 그래도 명색이 초일류기업 KG의 직원이라면 이삼십만 원은 들어 있으리라…….
 ‘수철아, 기다려라! 오늘은 형님이 삼겹살 쏜다.’
 수철은 수열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동생으로, 올해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은 수열은 수철과 어렵게 살았다.
 그 바람에 수열은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고등학교만 마쳤으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다.
 덕분에 세계적인 비보이가 되고 싶었던 수열은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짜식, 미팅도 하려면 용돈이 많이 필요하겠지.’
 수원역에서 내린 수열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 위치 이동(?)시킨 두둑한 지갑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 냄새. 여긴 청소상태가 항상 불량이야.”
 화장실 특유의 지린내를 애써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간 수열은 누가 볼 새라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에 앉았다.
 “대기업 직원이라고 꼴에 지갑도 진짜 명품이네.”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지갑 표면에는 제조사를 상징하는 상표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수열은 명품 지갑이 탐나기는 했지만 이런 것은 가지고 있어봐야 증거물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미련을 버렸다.
 “돈이나 두둑이 들어 있어야 할 텐데.”
 지갑을 개봉한 수열은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너무 기뻐 만세를 지를 뻔했다.
 지갑 안에는 흰색 바탕에 통일기가 그려진 20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지폐가 차곡차곡 겹쳐져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얼마야?’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지갑 안에 들어 있던 돈은 20만 원짜리 지폐를 포함해서 총 456만 원이었다.
 ‘오! 이 정도면 몇 달은 놀고먹어도 되겠는데.’
 적당히 먹고 적당히 싼다가 수열의 평소 신념 내지는 직업관(?)이었다.
 더 벌려고 무리해서 욕심내다가 쇠고랑을 차기보다는 이렇게 적당히 만족하고 사는 것이 더 좋았다.
 “이건 뭐야?”
 돈을 챙긴 수열은 지갑 안쪽에 들어 있던 작은 쿠폰을 발견했다. 명함크기의 쿠폰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꽤나 신경 써서 만든 것 같았다.
 “글로벌월드 게임캡슐 교환권?”
 게임캡슐은 가상현실게임을 이용하는 장비다.
 수열도 게임캡슐이 뭐를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먹고 살기 바쁜 탓에 아직 이용해본 적은 없었다.
 “뭐야? 차라리 돈이면 더 좋을 텐데.”
 쿠폰째 지갑을 버리려고 했던 수열은 게임캡슐이 상당한 고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캡슐을 받은 다음에 중고로 팔면 그럭저럭 받을 수 있을 거야.’
 쿠폰을 챙긴 수열은 미련 없이 지갑을 버리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대박이다!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가자. 오늘부터 당분간은 판타지나 실컷 봐야지.’
 수열의 유일한 취미는 판타지 소설을 보는 것이었다.
 돈도 충분하겠다, 당분간 노동(?)의 필요성을 못 느낀 수열은 곧장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ψ ψ ψ
 
 “헉!”
 “야! 김수열.”
 초고속 지하철을 타고 환승을 위해 영등포역에서 내린 수열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너 이리 와봐.”
 “왜요?”
 “잔말 말고 빨리 안 와.”
 덩치의 정체는 지하철 특별수사대의 수사 대원으로 있는 현직 경찰로, 일명 불곰으로 불리는 자였다.
 “제가 지금 무지 바빠서요.”
 ‘괜히 잡혀서 소지품 조사를 당하면. 으아악!’
 “오늘은 그냥 와보라니까. 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아!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무조건 튀어야 해!’
 불곰은 이전부터 수열을 주시하고 몇 번이나 불심검문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업무 전(?)이라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해 입맛을 다시며 보내줘야 했다.
 그러나 두둑한 현금이 있는 오늘은 달랐다.
 “거기서 기다려. 잠깐이면 돼.”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요.”
 밑에 내려선 불곰은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섰고, 수열은 부리나케 튀기 시작했다.
 “야! 김수열, 오늘은 순수하게 물어보기만 한다니까~”
 “제가 그 말에 한두 번 속아요?”
 불곰이 쫓아오는 것을 확인한 수열은 역사를 빠져나오자마자 부리나케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수열은 상가가 밀집한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젠장, 하마터면 × 될 뻔했다.”
 불곰을 따돌리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어디 들어가서 시간 때우다 나와야겠어.”
 상가를 둘러보던 수열의 눈에 캡슐방의 간판이 들어왔다.
 2층에 자리한 캡슐방의 유리창에는 각종 가상현실게임을 선전하는 포스터나 그림이 붙어 있었다.
 “게임이나 한번 해볼까?”
 가상 현실게임이 상용화된 지는 어느덧 수십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어린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수열로서는 다른 나라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삐끄덕-
 “어서 오세요.”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젊은 여자의 인사소리가 들렸다.
 수열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방금 자신에게 인사했던 여자에게 다가갔다.
 “게임하려고 하는데요.”
 “뭐하시나요?”
 “예?”
 “무슨 게임하시냐고요?”
 “아!”
 “하시는 것 없어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과 함께 짜증기가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걸 그냥 꽉!’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욱하는 것이 치밀어 오른 수열이었다. 그러나 쪽팔리게 아르바이트생과 다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글로벌월드.”
 아는 게임은 하나도 없었지만 조금 전 얻은 캡슐교환 쿠폰 때문인지 무심코 나온 말이 글로벌월드였다.
 “글로벌월드요.”
 “아무 데나 빈자리에 들어가세요.”
 여자는 대답과 함께 칩이 내장된 카드와 함께 헤드셋을 건넸다.
 카드에는 글로벌월드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 전용 카드인 것 같았다.
 ‘이걸 쓰고 하나?’
 칩과 헤드셋을 받아든 수열은 눈치껏 빈방을 열고 들어갔다.
 비행기 조종석과 비슷하게 생긴 캡슐방 안에는 몇 개의 불이 깜빡이는 튜너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 헤드셋을 꽂는 구멍이 있었다.
 ‘여기에 꽂으라는 소리인가?’
 생전 처음 와보는 캡슐방이지만 부모 없이 모진 세상을 살며 눈치만 단련된 수열이었다.
 푹신한 의자 등받이를 조절하고 헤드셋을 착용한 수열은 주황색 불빛이 점멸하는 스타트 단추를 눌렀다.
 단추를 누른 순간, 방안의 전기가 나가며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이제 시작하나?’
 가장 먼저 수열의 감각에 포착된 것은 웅장한 음악이었다. 그리곤 음악이 끝날 쯤에 금발을 휘날리는 여인이 나타났다.
 ‘뭐야? 이 이기적인 몸매는……!’
 가상현실게임은 처음 해보는 수열이었기에 입체 아바타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저렇게 노출을 해도 되는 거야?’
 수열은 아무 말 않고 금발 여인을 똑바로 주시했다.
 몸매도 몸매지만 최소한의 부위만 가리고 배꼽이며 허리며 허벅지를 노출한 여자의 모습이 너무도 므흣했기 때문이다.
 -뭘 보시나요?
 -내가 보긴 뭘 봤다고.
 -지금도 보고 있잖아요?
 -그거야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여자는 수열의 뜨거운 눈길을 의식해서인지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는 다리를 꼬았다.
 ‘아! 쩝…….’
 너무 아까워서인지 수열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 때문인지 여자의 눈길이 매우 날카롭게 변했다.
 -저는 게임의 시작을 도와주는 빛의 요정입니다.
 -아! 어쩐지.
 -죄송하지만 그 음흉한 눈길을 어떻게 해줄 수 없나요?
 -아니, 내가 언제 음흉한 눈길을 했다고?
 -거울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아…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하지요. 게임을 처음 시작하시는 신규 유저인가요?
 -오늘 처음 하는 것이 맞소.
 -계정을 생성하시겠습니까?
 -그걸 해야만 게임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합시다.
 -홍채와 혈관을 인식할 테니 얌전히 있으세요.
 다리를 꼰 채 가슴을 가리고 있던 여자의 팔이 풀리며 정면으로 다가왔다.
 수열은 여자의 몸매가 다시 드러나자 절로 눈이 부릅떠졌다.
 -스캔 결과 신규 유저로 판명되었네요. 캐릭터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아! 쥑인다.
 -확인 결과, 기 등록된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 빵빵한 가슴!
 -죄송합니다. 심의상 그런 이름은 사용하실 수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스물두 해를 힘들게 살아오면서 여인의 노출을 처음 접한 수열이었기에 정신이 없었다.
 -누가 그게 이름이래? 내 이름은 수열이야.
 -수열, 그걸 이름으로 사용하시겠습니까?
 -그게 내 이름이라니까.
 -캐릭터의 이름은 수열입니다. 다음은 캐릭터를 생성합니다. 캐릭터의 성별은 바꿀 수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나도 여자 행세할 생각은 없어.
 수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의 요정은 사라지고 대신 수열과 똑같이 생긴 캐릭터가 나타났다.
 ‘쩝! 좋다말았네.’
 여자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수열은 또다시 입맛을 다셨다.
 -외모의 변화는 머리색과 눈동자색의 변화와 체격의 변화만 가능합니다.
 -지금 이대로.
 -종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황인종!
 -인간족을 선택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음으로 처음 시작하는 왕국과 마을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데나.
 -랜덤을 요청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O.K
 -글로벌월드에서 모험과 꿈을 찾으시길 바라며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한 싱크로율은 100%로 설정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죽어봐라, 이 변태 같은 놈아…….
 말과 함께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고 시력을 상실한 수열은 몸이 붕 뜬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분명 뭐라고 욕하는 것 같았는데.’
 주변이 변하기 전에 분명 여자가 뭐라고 악담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수열의 의문은 예상치 못한 사태로 계속될 수 없었다.
 
 ψ ψ ψ
 
 처음에는 몸이 붕 떠오른 것이 비행기라도 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가속도가 붙은 지금은 총알보다 더 빠른 듯했다.
 얼마나 빨리 떨어지던지 귓가에 들리는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와 흡사했다.
 “으아아아악~~”
 육체가 끝도 없이 계속해서 떨어지자 수열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너무 겁이 나서 실신하기 직전이었던 수열은 마치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갑작스레 주변이 환해지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헉! 꼼짝없이 죽었구나.’
 수열의 시야에 밝은 빛과 함께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왔고 이어 지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섭게 낙하하던 속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아아아악~~~”
 쿵!
 긴 비명과 함께 수열의 몸이 지상과 충돌했다.
 그 충돌음과 진동이 어찌나 크던지 주변의 나무가 심하게 흔들렸다.
 “크윽! 무슨 놈의 게임이 이래.”
 개구리처럼 바닥에 패대기쳐진 수열은 온몸에서 전해지는 아픔과 고통에 신음과 함께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고통만 느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아! 니미럴, 사람들은 이런 게임을 뭐가 좋다고 하지?’
 수열이 고통을 떨어내며 이런 의문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자네는 어디서 온 사람인가?”
 “문래동에서 왔는데요?”
 “문래동? 거긴 처음 들어보는 왕국이군.”
 ‘아! 여긴 게임 안이지.’
 무심코 실제 살고 있는 동네를 댄 수열은 여기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게임속의 가상현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군.”
 “처음 시작할 때는 다 그렇지 않나요?”
 말을 건 사람이 40대 후반의 사내로 보였기에 수열은 자연스럽게 말을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방인이군.”
 이방인은 통상적으로 NPC가 유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모르는 수열은 방금 전의 사태가 자기에게만 일어난 극히 특별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 계집애가 분명 마지막에… 죽었어, 너!”
 “여기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인가?”
 “아저씨는 몰라도 돼요.”
 “흠, 그렇다면야 나도 할 말 없지.”
 수열은 씩씩거리며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펴봤다.
 울창한 푸른 나무가 있고 새들이 지저귀며, 때론 청량한 산들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것이 어디 교외라도 나온 것 같았다.
 “우와아아~~ 산도 있고, 건물도 있어!”
 처음 주변을 살피던 수열의 눈이 점차 먼 곳을 향했다.
 “세상에,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까지…….”
 가상현실게임이라 하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현실적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수열이었다.
 그가 넋을 놓고 주변을 한참 살피는 동안, 중년 사내는 말없이 수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보게 젊은이, 그만하고 내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난 이곳 하캄 마을의 촌장이라네.”
 “띠링- 띠링-”
 허공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려오며 수열의 눈앞에 뭔가가 나타났다.
 
 <첫발을 내딛는 자를 위한 촌장의 안내>
 퀘스트 : 촌장의 간단한 부탁을 들어주고 모험에 필요한 기초 지식과 물품을 받자.
 난이도 : 1
 보상 : 낡은 단검 1자루. 300리라.
 * 여행을 시작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튜토리얼 퀘스트다. 무조건 수락해서 모험에 필요한 기초 장비를 지급받자.
 
 “이게 뭐야?”
 수열이 받은 것은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는 튜토리얼 퀘스트였다.
 다른 게임과 달리 글로벌월드는 생성되는 캐릭터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의 퀘스트를 통해 지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수열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당황해서는 안내창을 건드렸고 그것은 이내 사라졌다.
 “내 부탁은 아주 간단하네. 젊은이라면 들어주겠지?”
 “싫은데요. 제가 지금은 바쁘거든요.”
 “아무리 바빠도 내 부탁은 꼭 들어줘야지.”
 “이 아저씨가 미쳤나? 날 언제 봤다고.”
 “허허허~ 글로벌월드를 시작하려면 절대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지. 거절하지 말게.”
 “됐거든요!”
 아무리 막돼먹은 자라도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촌장의 부탁을 들어주고 최소한의 장비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열은 아무것도 몰랐고, 또 게임을 계속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좋네, 내 자네에게는 특별히 400리라를 주지.”
 “아! 싫다는데 왜 자꾸 달라붙어요.”
 “그러지 말고 부탁을 들어주게?”
 “다른 사람한데나 물어봐요. 안 그래도 머리털 나고 게임은 처음이라 정신 사나워죽겠는데.”
 “이렇게 부탁하겠네.”
 “정말 끈질기네. 수고하세요.”
 수열은 귀찮은 나머지 우선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반면, 신규 유저에게 단검과 약간의 푼돈을 지급해야 하는 촌장은 끝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이봐, 젊은이. 잠깐만 멈추게!”
 “아! 저 아저씨, 보기보다 끈질기네.”
 수열은 계속해서 달렸고 어느 순간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수열의 뒤를 쫓아오던 촌장은 프로그래밍 된 지역까지 쫓아왔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ψ ψ ψ
 
 “후아아~ 뭔 아저씨가 저리도 잘 뛰어.”
 촌장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친 수열은 그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정말 실감난다.”
 중세풍을 배경으로 한 마을은 여러 개의 상점이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가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수열은 마을을 돌며 신기한 시선으로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 맛있는 냄새.”
 한참 마을을 구경하던 수열은 어디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발걸음이 절로 멈춰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부터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촌장을 따돌리기 위해 많이 뛰었던 탓에 현재 그의 공복도는 60을 넘어 7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빵 냄새인가?’
 배고픔 때문인지, 냄새가 워낙 구수해서인지 수열의 발걸음이 멈춰진 곳은 ‘뚱뚱이 아줌마의 빵집’이었다.
 ‘아! 엄청 맛있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맛도 좋을까?’
 구수한 냄새도 냄새지만 게임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지, 그리고 맛은 어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게 얼마나 할까?”
 습관적으로 바지주머니를 뒤지던 수열은 수중에 땡전 한 푼도 없음을 깨달았다.
 ‘돈이 없음 만들어야지.’
 촌장의 퀘스트를 수락했다면, 그 내용 중에 빵을 사오는 퀘스트가 있었기에 빵도 먹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수열은 사냥감을 찾기 시작했다.
 ‘옳지. 저놈이 딱이다!’
 수열이 사냥감으로 선택한 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거구의 중년 사내였다.
 그는 창고장을 맡고 있는 NPC였다.
 ‘자연스럽게 접근해야 해.’
 창고장 근처에 접근한 수열은 기회를 봐서 그의 품안을 뒤졌다.
 찰나의 순간에 창고장 품안에 있던 두둑한 돈주머니는 수열의 품안으로 옮겨왔다.
 “띠리링~”
 -스킬 스틸을 습득하셨습니다.
 -손재주가 4 올랐습니다.
 -본인 소유가 아닌 물건을 훔칠 수 있습니다.
 -창고장과 호감도가 -10 떨어지셨습니다.
 -전체 상인과 호감도가 -2 떨어지셨습니다.
 “헉!”
 계속되는 메시지에 수열은 정신이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빼돌린 돈주머니를 흘릴 뻔했다.
 그 바람에 창고장이 수열의 존재를 알아차리며 한마디 했다.
 “뭐냐!”
 “아… 아니에요.”
 ‘우선 여기부터 벗어나야 해.’
 소매치기에 있어 범행 후 이탈은 필수다.
 잰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난 수열은 조금 전 들려왔던 음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러나 게임의 문외한인 수열은 그 음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몇 번의 반복을 통한 확인이었다.
 ‘이번에는 누가 좋을까?’
 다른 사냥감을 물색하던 수열은 전사 무기 상인을 털었다.
 -스틸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스틸 스킬의 숙련도가 3% 올랐습니다.
 -손재주가 3올랐습니다.
 -무기 상인과 호감도가 -10 떨어졌습니다.
 -전체 상인과 호감도가 -2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중성에 가까운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수열은 아직도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몰랐다.
 “몇 번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
 아직 음성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수열은 이번에는 삐쩍 마른 여자를 노렸다.
 그녀는 치료약물과 마법물품을 파는 마법 상인이었다.
 ‘이 정도쯤이야!’
 수열이 여자 상인의 품에서 지갑을 꺼내는 순간,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스틸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스틸 스킬의 반복 사용으로 민첩이 2 오릅니다.
 “땡~”
 -특수 스탯 ‘집중’과 ‘정확’이 생겼습니다.
 -스틸 스킬의 숙련도가 3% 올랐습니다.
 -손재주가 3 올랐습니다.
 -마법 상인과 호감도가 -10 떨어졌습니다.
 -전체 상인과 호감도가 -2 떨어졌습니다.
 두 번의 스틸 성공으로 수열의 레벨이 올랐다.
 이는 글로벌월드가 전투 이외의 여러 가지 활동에도 경험치를 부여해 주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열은 이전과는 다른 멘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몇 번 더해봐야 이해를 하겠어.”
 게임을 할수록 레벨이 오르고 스탯이나 스킬의 능력치나 숙련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수열은 이전과 다른 멘트가 궁금해서 이번에는 닥치는 대로 털기 시작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스틸 스킬의 반복 사용으로 민첩이 2 오릅니다.
 -스틸 스킬의 반복 사용으로 특수 스탯 집중과 정확이 1 오릅니다.
 -잡화점 상인과 호감도가 -10 떨어졌습니다.
 -전체 상인과 호감도가 -2 떨어졌습니다.
 -글로벌월드 내 전체 상인과의 호감도가 -20 이상이 되셨습니다.
 -상인과의 거래에서 불이익은 받는 것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시적인 거래 거부를 당할 수도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엥?”
 무기 상인부터 시작해서 마을 내 모든 상인의 돈주머니를 닥치는 대로 훔친 수열이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잡화점 상인의 지갑을 훔친 순간, 이전과는 다른 멘트가 마지막에 추가되었다.
 “거래에서 불이익은 물론이고 거래 거부까지 당한다고? 야! 이것 현실보다 더하네.”
 돈을 훔친 이유는 오직 빵을 사먹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거래 거부를 당한다면 빵을 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호감도가 떨어지면서 발생한 일인 듯했다.
 ‘아무래도 그만 훔쳐야겠어.’
 본래 현실에서는 이렇게까지 싹쓸이를 하지 않는 비교적 양심과 상도의(?)를 지키는 수열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라 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멘트가 궁금해서 싹쓸이를 저지른 수열이었다.
 ‘마을 외곽에서 전리품을 확인해야겠어.’
 현실과는 달리, 고작해야 게임인데 걸리면 어쩌겠냐 싶은 생각에 아직 훔친 물건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난 곳은 마을 동쪽 끝의 담장 근처였다.
 “먼저 돈주머니의 내용물을 하나로 모으고.”
 상인들이라 그런지 다들 주머니는 빵빵했고, 안의 내용물도 금색과 은색, 청색의 세 가지 동전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얼마나 하지?”
 지금까지 수열이 훔친 금액은 42골드 84실버 75리라였다.
 100리라는 1실버였고 100실버는 1골드이며, 1골드는 현금 5천 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즉, 수열이 훔친 금액은 현금으로 21만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빵부터 사먹어 볼까?”
 
 ψ ψ ψ
 
 “당장 나가라.”
 “아줌마, 왜 그러세요?”
 “듣기 싫다. 네놈에게는 내 빵을 팔지 않겠다.”
 “아 좋아요. 두 배로 살 테니까 빵 몇 개만 파세요.”
 “어서 나가지 못하겠느냐?”
 뚱뚱이 아줌마의 빵집을 찾은 수열은 그야말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상인들의 지갑을 계속해서 털면서 상인들과의 호감도가 -20으로 떨어졌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요?”
 “아! 내가 빵을 사려고 하는데 저 아줌마가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고 멱살을 잡잖아요.”
 소란이 계속되자 신고를 받은 마을 경비병들이 다가왔다.
 가게 문 앞에는 경비병 말고도 주변의 상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난 절대 빵을 팔지 않겠다는데도 저 사람이 나가지 않고 행패를 부리고 있어요.”
 “아줌마,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죠.”
 “보세요. 지금도 이렇게 눈을 부라리고 있잖아요.”
 “제가 언제 눈을 부라렸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손님에게 이렇게 불친절해도 되는 거예요?”
 경비병들이 나타나자 수열은 더 큰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빵을 훔치려고 했던 것이 아닌 이상, 경비병들이 아줌마에게 한소리 해줄 줄 알았다.
 “이봐, 주인이 안 판다고 하면 나가야지.”
 “네?”
 “주인이 팔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소란을 피우는 거야.”
 “여기서 계속해서 난동을 부리면 잡아갈 테니, 어서 썩 꺼져라.”
 “아저씨, 제가 돈 주고 산다는데 아줌마가 팔지 않는 거라고요.”
 “어허! 매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직접적인 호감도가 떨어진 것은 상인들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수치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호감도 하락은 상인이외의 NPC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 재수 없어.”
 결국 빵을 사지 못한 수열은 가게 문을 나섰다.
 가게 앞에 모여 있던 많은 이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낄낄대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제 시작하는 초보자인데, 어떻게 NPC와 호감도가 나쁠 수 있지?”
 “캐릭터명이 수열이가 뭐야, 수열이가.”
 “저렇게 음식을 못 사면 굶어죽겠는데.”
 “그야말로 완전히 저주 캐릭이네.”
 “하하하~”
 사람들이 계속 수군대자 수열은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 거리를 빠져나왔다.
 “아! 뭐야? 재수가 없으니까 별 거지같은 놈들이…….”
 “이놈! 젊은 놈이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느냐?”
 “아! 또 뭐야?”
 마을 외곽의 한적한 거리를 지나던 수열은 갑자기 길을 막고 나선 영감과 마주했다.
 대략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영감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온 굵은 팔뚝이어서, 반백의 머리와 주름살 가득한 얼굴만 아니라면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놈! 아직 얘기 안 끝났다.”
 “무슨 놈의 게임이 이렇게 태클이 심해.”
 “고약한 놈, 당장 경비병에게 끌려가서 콩밥을 먹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아니, 이 영감이 뭘 잘못 처먹었나. 왜 시비를 걸고 지랄이야.”
 “싸가지 없는 놈.”
 “딱!”
 “아얏!”
 어느 틈엔가 영감의 왼손에는 드라이버 비슷한 연장이 들려있었고, 연장의 뭉툭한 손잡이에 얻어맞은 수열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머리를 문대기 시작했다.
 “왜 때려요?”
 “그걸 몰라서 묻냐?”
 “아! 진짜. 성질 같아서는 그냥 꽉!”
 만일 때린 사람이 60대 노인이 아니라 딱 스무 살만 젊었으면 수열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을지 모른다.
 “그냥 뭐? 이놈이 생긴 것과 달리 완전 호로자슥이네.”
 “뭐요! 호로자슥?”
 “어쭈! 이놈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말과 함께 영감의 왼손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한 번 당한 전력이 있던 수열은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영감의 손이 움직이자마자 고개를 흔들며 피했으나 허사였다.
 따딱-
 “아야! 아이 씨…….”
 “네놈은 가만 보니 머릿속까지 완전 썩은 놈이구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참견이야? 엥!”
 어느 틈에 빼간 것인지 영감의 오른손에는 자신이 작업한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당했으면 모르겠지만, 매를 피하기 위해서도 영감을 똑똑히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가 빼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어… 언제?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난 고수다!’
 수열은 눈앞의 영감이 자기보다 몇 배는 뛰어난 고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설마 게임 속에서도 구역이 있나?’
 소매치기도 구역이라는 것이 있고 상도의가 있어 다른 기술자(?)의 구역에서 작업하다가 걸리면 큰 화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수열은 조직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프리랜서였기에 따로 구역도 없었지만, 간혹 조직 소속의 기술자(소매치기를 뜻하는 은어)와 마주치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이놈아, 할 짓이 없어서 게임에서도 이런 짓거리를 해야겠느냐?”
 “그냥 재미로 해본 거예요.”
 “재미라니, 그게 말이냐? 껍딱이냐?”
 “보아하니 영감님도 동종 업계에서 이름깨나 날렸겠는데 너무하는 것 아니에요?”
 “닥쳐라, 이놈아! 난 그런 짓을 때려치운 지 이십 년도 넘었다.”
 “그럼, 그걸 왜 가져갔어요?”
 “NPC도 게임 내에서는 사람과 똑같다. 오늘 네놈이 훔친 것은 내가 돌려주겠다.”
 “아! 맘대로 해요. 이 따위 게임은 하라고 해도 안 할 생각이었으니까.”
 눈앞의 영감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가게 주인에게 멱살까지 잡히며 판매거부를 당한 이런 게임에는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었다.
 “게임 관두면? 현실에서 소매치기하게?”
 “그게 영감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놈이 제대로 일해서 돈 벌 생각을 해야지.”
 “누가 나 같은 놈을 써주기나 한대요? 또 써주는 데는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일해 봐야 푼돈이나 주는데, 그 돈 갖고 어떻게 먹고 살아요?”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게 해주면 그 짓을 그만둘 것이냐?”
 “영감님, 어디 교화사업소에서 나왔어요?”
 “닥치고 대답이나 해라.”
 “아! 됐어요. 또 뻔하지.”
 “게임을 열심히 하면 돈이 된다, 나를 따라와라, 나도 너만 할 때부터 그 짓을 하다가 감옥을 열 번도 넘게 들락거린 사람이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또 게임을 하면 돈이 된다니, 아주 웃겨.”
 이 따위 게임은 더 이상 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수열은 영감을 상대하다 말고 몸을 돌렸고, 그가 떠나가자 영감이 큰소리로 한마디 했다.
 “이놈아, 현실이든 게임이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돈 벌고 싶으면 도나우 왕국의 작센 시에 있는 만물고물상으로 찾아와라.”
 “흥! 만물고물상 좋아하시네.”
 
 
 2. 두 번째는 허벌 고통스러웠다
 
 “아! 졸라 재수 없어.”
 게임에서도 현실처럼 소매치기가 된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꼈던 것도 잠시였다.
 인상 좋게 생긴 뚱뚱한 빵집 아줌마가 멱살을 잡지 않나, 출동한 경비병은 부당한 판매거부를 한 아줌마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를 나무라지 않나, 어디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 영감탱이는 어디서 훈계를 하고 지랄이야.”
 결정적으로 자기를 측은한 눈빛으로 보던 그 영감이 제일 꼴 보기 싫었다.
 “그나저나 입구는 어디에 있는 거야?”
 게임에서 나가려면 접속 종료를 외치면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수열은 처음 탄생했던, 자기를 귀찮게 했던 마을 촌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게임을 끝낼 수 있는 줄 알았다.
 -경고! 현재 공복도가 95입니다. 공복도가 100이 되면 배고픔으로 아사하니 지금 즉시 음식물을 섭취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염병을 해라.”
 한번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자 모든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잔뜩 짜증난 수열은 계속해서 길을 헤매다가 맞은편에서 울며 다가오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열 살 전후로 보이는 어린 소녀는 앙증맞게도 머리를 두 갈래로 딴 귀여운 소녀였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꼬마야, 왜 우니?”
 “난 꼬마가 아니라 베티에요.”
 “그래, 베티야. 그런데 왜 울고 있어?”
 “산에 가신 아빠가 며칠째 안 돌아오고 계세요.”
 “산에는 왜 가셨는데?”
 “오빠는 바보에요? 당연히 사냥하러 갔지요.”
 “그럼, 곧 오시겠지?”
 “벌써 돌아오실 때가 지났단 말이에요. 저 산에는 위험한 몬스터가 많이 살고 있는데… 으아아앙~~”
 예쁘고 귀여운 소녀가 다시 울음을 터트리자 당황한 수열은 소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소녀의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너무 걱정 마. 오빠가 찾아봐 줄게.”
 “띠링- 띠링-”
 또다시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수열의 눈앞에 창 하나가 나타났다.
 
 <어린 베티를 도와서 아빠를 찾아주자!>
 퀘스트 : 사냥꾼인 베티의 아버지가 실종되었다. 슬픔과 실의에 빠진 베티를 위해 그의 아버지를 찾아보자.
 난이도 : 1
 기한 : 무기한
 종류 : 연계 퀘스트
 보상 : 맛있는 보리빵과 마을 주변 지도. 약간의 경험치.
 기타 : 성공 시 전체 NPC와 호감도 1 증가. 실패 시 페널티없음.
 
 -베티의 부탁을 수락하시겠습니까?(Y/N)
 
 ‘어린 소녀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비록 세상을 거칠게 살아온 수열이지만 슬프게 눈물을 흘리는 어린 소녀를 보자 동정심과 측은지심이 생겼다.
 그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생했던 자기와 동생의 모습을 그 소녀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수열은 Y가 Yes를 뜻한다고 여기며 그 부분을 눌렀다.
 “오빠, 고마워요.”
 “그래, 이 오빠만 믿어라.”
 “전 오빠만 믿고 집에 가 있을게요.”
 “그래, 울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오빠가 아빠를 찾아줄게.”
 “네.”
 베티라는 소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뻑 숙여 인사하고는 어딘가로 쪼르륵 달려갔다.
 수열은 소녀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길을 찾아 헤맸다.
 “도대체 무슨 골목길이 이렇게 꾸불꾸불해?”
 소녀가 말한 산은 눈에 훤히 보이건만 골목길의 끝은 보이지 않아 계속 길을 헤맨 수열은 또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아! 조낸 배고프다. 무슨 게임이 현실보다 더 배가 고픈 거야.”
 누군가의 보복으로 인해 싱크로율 100%로 설정된 수열은 다른 이들과 달리 심한 허기를 느꼈다.
 그가 주린 배를 움켜쥐며 막 골목을 벗어났을 때 마지막 경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경고! 공복도가 100입니다. 1분 이내에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사망합니다.
 “썩을. 먹을 것이나 주면서 처먹으라고 해라!”
 결국 수열은 1분 후 굶어죽었다.
 -당신은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로 인해 24시간은 글로벌월드에 접속하실 수 없습니다.
 “나도 안 해. 하라고 해도 내가 싫어.”
 사망한 수열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다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수열은 게임에 처음 접속했을 때 보았던 대기실로 다시 들어왔고, 처음 보았던 요정이라는 여자와 마주했다.
 “망할! 먹을 것도 안 주면서 자꾸 먹으라고만 해. 이런 게임은 절대 안 해.”
 -캐릭터를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 더러워서 다시는 안 한다.
 -캐릭터를 삭제하면 일주일간은 게임에 접속하실 수 없으며, 두 번 다시 똑같은 캐릭터 명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안 한다니까.
 -알겠습니다. 캐릭터를 삭제하겠습니다.
 -흥, 망할 놈들 잘 먹고 잘살아라!
 -꿈과 희망의 글로벌월드를 종료합니다. 캐릭터는 종료 후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5… 4… 3… 2… 1.
 카운트다운과 함께 순간적으로 주변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수열은 눈앞의 광경이 게임 시작 전에 자리했던 캡슐방 내부라는 것을 알고는 요금을 계산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학교를 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 수철이 있었다.
 “수철아, 학교 안 갔어?”
 “오늘은 오전 강의만 있어.”
 “그렇구나, 아! 너 용돈 떨어졌지?”
 “아직 필요 없어.”
 “필요 없기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여학생도 만나고 친구랑 밥도 사먹으려면 돈이 있어야지.”
 자신의 낡은 지갑을 꺼낸 수열은 10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수열이 지갑을 꺼내자 수철의 눈이 번뜩였다.
 “형,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말했잖아. 내가 그동안 노가다 한다고.”
 “노가다 하는 사람 옷이 그렇게 깨끗해?”
 “그거야, 현장에다가 작업복을 놓고 갈아입으니까 그렇지.”
 “그럼, 손이랑 머리는? 아무리 쉬운 노가다라고 해도 궂은 일하는 사람 손이 그렇게 부드러워?”
 “나… 난 기술자라 그렇지. 그리고 요즘은 그… 그렇게 힘들지도 않아. 오늘은 도… 돈 나오는 날이라 빨리 끝났고!”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수열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더듬기까지 했다.
 수철은 그런 형을 잠깐 보다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형, 나 정말 돈 필요 없거든.”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가 너 하나 정도는 대학 보내줄 수 있으니까 아무 부담 갖지 마.”
 “형, 나도 이제 아르바이트 같은 것 해서 학비를 모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마.”
 “무슨 소리. 요즘은 의무적으로 해외연수도 가고 그래야 한다면서.”
 “형, 제발!”
 “그… 그래, 오늘 고기 먹을까?”
 동생의 음성에서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기에 수열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아니, 그보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누굴 만날 사람이 있어서.”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
 “알았어.”
 수철은 대답과 함께 형이 준 돈을 슬쩍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문을 나서는 수철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ψ ψ ψ
 
 “네? 제 동생이 휴학계를 냈다고요?”
 “예.”
 “아! 누구 맘대로 휴학을 시켜줘요?”
 “그야, 김수철 학생 본인 마음이지요.”
 “아! 미치겠네.”
 수열이 찾아온 곳은 동생이 다니고 있는 대학의 교무과였다.
 수철은 4일 전부터, 그러니까 친구를 만난다고 나간 그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동생이 계속해서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수열은 급한 마음에 전화를 했지만 그의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결국 수열은 동생을 찾아 그가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온 상태였고, 그곳에서 휴학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동생이 말도 않고 휴학을 했나요?”
 “네.”
 “같은 과 친구들은 만나봤나요?”
 “아직이요.”
 “먼저 친구들을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교무과 여직원의 도움으로 동생의 학과실을 찾은 수열은 그곳에서 수철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철이가 게임을 해서 돈을 벌겠다 했다고?”
 “저희도 말렸지만, 자기 때문에 형님이 고생한다며 워낙 막무가내라.”
 “아! 이 자식을 그냥.”
 “저희는 잘 모르지만 수철이가 무지 고민했어요.”
 “무슨 말이지?”
 “자기가 형님 신세를 망치고 있다고, 자기는 형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난다고.”
 ‘아! 설마.’
 친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수철은 스스로의 힘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한 것 같았다.
 수열은 뭔가 불안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저희도 수철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디 짐작 가는 데 없어?”
 “듣기로 작업장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작업장, 무슨 작업장?”
 “다크게이머들이 단체로 숙식하면서 게임하는데 있잖아요.”
 수열은 작업장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사실 게임으로 돈을 번다는 얘기도 믿지 못하는 그가 작업장이라는 은어를 알 턱이 없었다.
 “우리도 아는 거라곤 수철이가 글로벌월드를 한다는 것밖에.”
 “글로벌월드?”
 “네.”
 “그걸 하면 돈을 벌 수 있어?”
 “처음에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열심히 하면 벌 수 있어요.”
 “아!”
 동생의 친구들과 헤어진 수열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평생 해본 적이 없던 동생의 소지품을 뒤졌고, 그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혹시 여기에 그 작업장의 내용이 나와 있지 않을까?’
 동생의 일기장을 뒤지던 수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수… 수철아!”
 동생의 일기에는 형을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동안 수철은 형이 상처를 입을까 봐, 그리고 형이 그런 짓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차마 내색하지 못했던 고민이 담겨 있었다.
 “미… 미안하다, 형이 잘못했다.”
 동생이 게임을 시작한 이유를 들었을 때부터 내심 걱정했던 일이다.
 예상했던 대로 수철은 형이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어오는지 눈치 채고 있었고, 그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냐!”
 동생을 어서 찾아야 했고, 게임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은 동생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맞아! 게임캡슐 교환권이 있었지.”
 교환권을 떠올린 수열은 티켓에 나온 연락처로 전화를 해서 게임기를 신청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게임기가 설치 기사들과 함께 수열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띵동~ 띵똥~”
 “누구세요?”
 “여기가 김수열 씨 댁입니까?”
 “맞는데요, 누구세요?”
 “KG 게임사 설치 서비스팀입니다.”
 “아! 네.”
 “어디에다 설치해 드릴까요?”
 “여기 거실에 해주세요.”
 글로벌월드가 새겨진 진청색 작업복을 입은 세 명의 설치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캡슐을 설치했다.
 “여기 매뉴얼 책과 12개월 이용권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이용 방법은 아시지요?”
 “네, 해보면 알겠지요.”
 “설치는 끝났으니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혹시라도 이상이 있으시면 고객센터로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설치기사들이 돌아가자 수열은 곧장 게임캡슐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이 글로벌월드를 하는 이상, 글로벌월드에서 찾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모험과 꿈이 가득한 글로벌월드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용권을 스캔해 주십시오.
 “삐익~”
 -12개월 이용권이 확인되었습니다.
 -잠시 후 게임 내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안내메시지와 함께 그때의 웅장한 음악이 들려왔고, 음악이 끝날 쯤에 요정이라는, 금발을 휘날리는 반나의 여인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한 상태이기도 하고,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수열은 그때처럼 놀라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게임의 시작을 도와주는 빛의 요정입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신가요?
 -한 번 했는데, 수열이라는 캐릭터 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열이라는 캐릭터는 일주일전 삭제되었습니다. 게임을 즐기시려면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하셔야 합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캐릭터를 삭제하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캐릭터의 새로운 이름을 지금 정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수열은 강하게 살겠다는 뜻으로 강철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강철.
 -사용 가능한 이름입니다. 강철로 하시겠습니까?
 -네.
 -처음 시작하는 마을은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참고로 글로벌월드 내에는 캐릭터가 생성되는 초보 존이 10개 왕국에 180개가 있습니다.
 -이전에 했던 대로 해주세요.
 -싱크로율은 몇 %에 맞추겠습니까? 참고로 이전에는 100%로 즐기셨는데, 초보자의 경우는 2% 미만으로 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싱크로율은 뭡니까?
 -싱크로율은 게임을 하는데 있어…….
 설명이 길어지자 수열은 귀찮아서 그냥 이전과 마찬가지로 100%에 맞춰달라고 했다.
 그 뒤로도 몇 가지를 선택한 수열, 아니 강철은 드디어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다.
 
 ψ ψ ψ
 
  5… 4… 3… 2… 1. 츠파파팟-
 눈부신 빛과 함께 강철이 나타난 곳은 그때 그 마을이었고, 이번에도 그때의 촌장이 다가왔다.
 “자네는 어디서 온 사람인가?”
 “아니, 이 아저씨가 벌써 치매에 걸렸나?”
 -불손한 단어의 사용으로 촌장과의 호감도가 -2 되었습니다.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없겠는가?”
 “됐거든요.”
 “띠링- 띠링-”
 경쾌한 알람음이 들려왔고, 강철의 의지와 무관하게 퀘스트 안내창이 떴다.
 
 <첫발을 내딛는 자를 위한 촌장의 안내>
 퀘스트 : 촌장의 간단한 부탁을 들어주고 모험에 필요한 기초 지식과 물품을 받자.
 난이도 : 1
 보상 : 낡은 단검1 자루. 100실버.
 * 여행을 시작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튜토리얼 퀘스트다. 무조건 수락해서 모험에 필요한 기초 장비를 지급받자.
 
 “전 무지 바쁘거든요.”
 “아무리 바빠도 내 부탁은 들어주게.”
 “아! 됐다고요. 안 그래도 동생 때문에 심난한데.”
 “그러지 말고 어서 내 부탁을 들어주게.”
 “아! 짜증, 됐거든요.”
 결국 강철은 그날도 촌장을 피해 내달려야 했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마을 중심에 있는 상업구역이었다.
 “아! 그때 거기구나.”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장소다.
 강철은 감회어린 시선으로 상업구역을 돌아다녔고, 어느덧 고물상 영감과 만났던 장소까지 왔다.
 ‘돈을 벌려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었지?’
 게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게임 내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그가 유일했다.
 ‘쪽팔려도 한번 찾아가 봐?’
 동생도 찾아야 했지만 게임에서 돈도 벌어야 했다.
 그때 그 영감은 분명 돈을 벌고 싶으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었다.
 강철은 그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영감은 게임 내에서 꽤나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서비스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글로벌월드에서 그가 만든 조합 아이템은 레어급 이상의 성능과 옵션을 갖고 있었지만 가격은 매직급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때문에 저렴하면서도 우수한 아이템을 만드는 그는 중저렙 유저들에게는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아! 그때 베티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지.”
 영감을 떠올리자 강철의 기억은 곧장 베티에게로 이어졌다.
 그때는 길을 몰라 엄청 헤맸지만 덕분에 지금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이 근처 어디였는데?”
 기억을 더듬던 강철은 마침내 어린 소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갔다.
 “베티, 안녕?”
 “어! 오빠는 누구시기에 제 이름을 알고 있어요?”
 ‘아! 캐릭명이 바뀌어서 날 몰라보는구나.’
 강철의 모습은 일주일전과 이름만 바뀌었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외모 하나는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어서 고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이상한 업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던 그다.
 그래서 그런지 캐릭을 생성할 때 외모에 그 어떤 변화도 주지 않았던 그였다.
 “당연히 알지.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니?”
 “어! 그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럼, 아버지가 사냥 나가신 지 오래되어서 돌아오실 때가 넘었는데 아직 안 오셨지?”
 “그걸 어떻게?”
 “저 산으로 아버지가 가셨지? 저 산은 온갖 위험한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이미 한번 경험을 한 강철은 족집게처럼 소녀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아맞히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아!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니…….”
 “놀랬어? 놀랬다면 미안해. 대신 아빠는 오빠가 찾아올 테니까, 넌 울음을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
 “맞아! 오빠는 언젠가 할아버지가 말한 사람이 틀림없어.”
 “띠링- 띠링-”
 
 <대륙에 파란과 변화를 몰고 올 절대자를 깨워라!>
 대대로 카밀라 산에서 살아온 베티의 집안에는 남모르게 전해지는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카밀라 산 어딘가에 수백 년째 잠자고 있는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전설이었다.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 : 오랜 시간 카밀라 산에서 자고 있는 절대자를 깨워라. 그로 인해 대륙에는 새로운 모험이 도래할 것이다!
 난이도 : 12(스페셜 시크릿)
 퀘스트명 : 절대자를 깨워라.
 기한 : 무기한(단 퀘스트를 부여받은 이후 한 번이라도 사망하면 퀘스트는 자동 소멸한다.)
 보상 : ???
 * 조건 만족 퀘스트
 
 -베티의 부탁을 수락하시겠습니까?(Y/N)
 
 퀘스트를 부여하는 안내 메시지가 나타나자, 강철은 확인도 않고 예스를 뜻하는 Y를 선택했다.
 “오빠, 조심해야 돼요.”
 “걱정 마. 오빠만 믿어.”
 “이 지도를 보고 찾아가시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그… 그래, 고맙다.”
 ‘지도? 이상하다. 그때는 안 줬는데?”
 “오빠, 부디 성공하셔야 돼요.”
 “그래, 알았다.”
 베티가 사라진 후 강철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퀘스트 창을 열어봤다.
 퀘스트는 그가 이전에 받았던 소녀의 아빠를 찾는 퀘스트가 아니라 절대자를 깨우라는, 엉뚱한 퀘스트가 부여된 상태였다.
 “이상하다? 왜 그때와 다르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전과 다른 퀘스트를 받은 강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귀여운 베티의 부탁인 만큼 들어주기로 작정했다.
 “그때는 못 들어줬는데, 이번엔 들어줘야지.”
 베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작정한 강철은 소녀가 준 지도를 인벤에 띄웠다.
 그나마 게임기 설치기사가 주고 간 매뉴얼을 슬쩍 훑어봤기에 이런 간단한 명령은 알고 있었다.
 
 ψ ψ ψ
 
 “헉! 이런 일이.”
 “박 대리, 왜 그래?”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그래?”
 “다음 패치의 주요 내용인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가 엉뚱한 유저에게 부여되었어.”
 “다음 패치라면 드래곤?”
 “맞아.”
 “그건 게임 내 영웅으로 설정된 NPC가 해야 하는 것 아냐?”
 “맞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갑작스런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의 발동으로 글로벌월드의 개발실은 비상 상황이 되었다.
 본래 절대자를 깨우라는 퀘스트는 베티가 모든 것을 알고 찾아온 영웅 NPC에게 부여하는 퀘스트로, 유저에게 전달된 내용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강철이 재미삼아 이전의 기억을 토대로 모든 것을 아는 체하면서 영웅 NPC에게 부여된 조건과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벌어진 우연한 사고였다.
 “예정에 없던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가 발동되었다니,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부장님.”
 갑작스런 보고에 개발실을 이끄는 부장이 들어왔다.
 그는 이번의 퀘스트를 직접 기획하고 개발한 책임자로, 부하 직원의 간략한 보고를 듣고는 퀘스트의 내용과 현재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현재 유저의 레벨은 몇인가?”
 “아직,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어서 확인해봐.”
 잠시 후 개발실 중앙에 있는 대형 모니터에 강철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지금 1레벨입니다.”
 “1레벨?”
 “네, 얼마 전에 캐릭을 생성한 유저입니다.”
 “휴우~ 다행이군.”
 “부장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뭘 어떡해? 그냥 무시해.”
 “네?”
 “이봐, 레벨 1짜리가 그 많은 몬스터를 뚫고 드래곤의 레어에 당도할 수 있겠어?”
 “불가능하겠지요.”
 “그럼 끝나지, 무슨 걱정이야?”
 “아! 퀘스트를 받고 나서 한 번이라도 죽게 되면 퀘스트가 자동으로 소멸되는 퀘스트였지요?”
 “그래, 만일을 대비해서 내가 그런 안전장치를 만들었지.”
 “하지만 레벨을 올린 후에 시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퀘스트를 깨려면 저 친구가 최소한 레벨 350은 넘어야 가능할 텐데, 그때쯤이면 게임 스토리대로 흘러가고 있을 걸.”
 “아!”
 게임의 스토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는 만일을 대비해 이중삼중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 퀘스트를 직접 기획하고 개발한 부장은 스스로의 안전장치에 만족해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개발실이 정상적인 분위기로 돌아갔고, 강철은 누군가가 자신을 모니터링 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도는 어떻게 보는 거야?’
 베티가 준 지도에는 자고 있다는 절대자의 위치가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게임을 처음 해본 강철이로서는 지도만 갖고 찾아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거 뭐야? 매뉴얼에는 방위표시만 참조하면 지도가 길을 찾는데 좋은 이정표가 될 거라고 하더니, 순 엉터리 아냐.”
 투덜거리면서도 강철은 마을 밖으로 나갔다.
 마을 밖은 여느 초보자 마을처럼 사슴과 토끼 같은 사냥하기 편한 초식 동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토끼랑 사슴이 뛰놀다니, 참으로 아름답다!”
 숲 여기저기에는 토끼나 사슴이 한가롭게 뛰놀고 있었고, 간간이 고슴도치와 두더지도 귀여운 눈망울을 굴리며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 공기도 좋고 산들바람에 새소리까지, 어디 깊은 숲속이라도 온 것 같아.”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깊은 산속을 온 것 같은 기분에 만족감을 느낀 강철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을 만끽했다.
 “이럴 때가 아냐. 베티의 부탁을 들어줘야지.”
 강철은 걸음을 재촉하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늑장부리면 이전처럼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헉! 멧돼지에 회색 곰까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멧돼지와 회색 곰이 나타났다.
 “흐미, 깊은 산속은 맹수들 천지네.”
 멧돼지는 물론이고 회색 곰 역시 저렙용 몹에 불과했지만, 이제 1레벨에 무기도 없는 강철은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멧돼지와 회색 곰을 피하며 이동하던 강철은 점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나오는 거야?”
 나름 많이 온 것 같았지만 지도상에 나온 붉은 점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그 말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음을 의미하기에 강철은 성질부터 부렸다.
 “오냐! 좋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가서 깨워준다.”
 약해진 마음을 억지로 추스른 강철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숲속을 누비던 강철은 어느 순간, 잿빛 늑대에 의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멀리서 희끗희끗 보이기에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던 그놈들은 알고 봤더니 흉악하게도 자신을 완벽하게 포위한 상태였다.
 “저리가, 이놈들아!”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주워든 강철은 다가오는 늑대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게 역효과만 가져와 이제까지 눈치만 보며 어슬렁거리던 녀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크, 아! 염병할~~~”
 으르렁대는 녀석들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걸린다면 온 몸이 갈가리 찢어발겨질 것 같았다.
 강철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누구 없나요~~ 사람 살려~~~”
 어느 틈에 바짝 뒤에 따라붙은 늑대 한 마리가 점프하며 강철의 목덜미를 노렸다.
 강철은 뭔가가 뛰어올랐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크아앙~”
 간발의 차이로 강철을 지나친 늑대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날카롭게 포효하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녀석의 눈은 붉다 못해 이글거리기까지 했다.
 “이 망할 놈들아, 저리 안 꺼져.”
 늑대가 사람 말을 들을 리 없다.
 강철은 그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팔과 다리, 옆구리를 물렸다.
 특히, 옆구리를 물렸을 때는 놈이 어찌나 영악하던지, 몸을 비틀며 흔들어대는 통에 거의 주먹만 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싱크로율이 100%에 맞춰진 강철은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여기 있다가는 진짜 죽는다! 무조건 도망쳐야 해!’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강철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간혹 뉴스에서 나오던 게임을 하다 죽었다는 기사였다.
 ‘이래서 죽는구나!’
 그때는 가만히 앉아 게임을 하던 사람이 왜 죽는지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위로 가야 해.’
 늑대의 무리에 포위된 강철의 시야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위암벽이 보였다.
 바위 암벽은 얼마나 높은지 구름에 가려 그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저길 웬만큼 올라가면 늑대로부터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ψ ψ ψ
 
 “으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과 함께 강철의 신형이 폭사되었다.
 그러나 빨라봐야 인간이 늑대보다 더 빠를 수는 없었다.
 “커헉~ 제발 비켜라!”
 앞만 보고 달리다가 두어 군데를 더 물린 강철의 몸이 바위 암벽 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껑충 뛰어올랐다.
 간발의 차이로 몇 마리 늑대가 그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르긴 해도 2미터 가깝게 뛰어오른 듯했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점프력과 속도였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에 처하다 보니 일종의 초능력이 발휘된 것 같았다.
 퍽!
 하지만 워낙 빨리 뛰어서일까?
 강철은 점프한 힘과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단단한 바위 암벽과 정면충돌하며 수십 개의 별을 봤다.
 그러나 아프다고 마냥 머뭇거릴 순 없었다.
 “크아앙~”
 팍!
 “아아악!”
 그가 막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엉덩이 부위에서 뭔가가 조여지는 느낌이 왔고, 이어서 어마어마한 고통과 충격이 전달되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새끼.”
 엉덩이에서 빠르게 전달되는 화끈거림에 강철은 반사적으로 몸을 급격히 비틀었다.
 그 바람에 강철의 엉덩이를 물어뜯었던 늑대는 달려오던 가속도와 합쳐지면서 암벽에 강하게 부딪쳤다.
 “깨깨깽-”
 늑대의 애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강철의 엉덩이를 깨물었던 늑대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강철은 초인적인 힘으로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곳을 물리고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점차 힘이 빠지며 눈앞이 가물거렸다.
 현재 강철의 피(HP)는 거의 바닥이었고, 출혈 때문에 피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띠리링~”
 그때 어디선가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의식이 가물거리는 강철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스킬 클라이밍을 습득하셨습니다.
 -손재주가 4 올랐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나무나 암벽 또는 벽이나 지붕을 오를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벽에 부딪히고 그 충격으로 바닥에 떨어진 늑대가 소멸되면서 강철의 레벨이 올랐다.
 아울러 레벨이 오르면서 최악으로 치닫던 캐릭의 상태가 초기화되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늑대로부터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던 강철은 열심히 암벽을 오를 뿐이었다.
 -클라이밍 스킬의 사용으로 손재주가 3 오릅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특수 스탯 의지가 생성되었습니다.
 “이놈들아, 제발 저리 가라.”
 정신없이 암벽을 올랐던 강철은 이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하릴없이 밑만 바라봤다.
 암벽 밑에는 어느새 수십 마리로 불어난 늑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야! 잡놈들아, 제발 사라지라고.”
 암벽의 작은 돌덩이를 주워서 던져봤지만 잿빛 늑대들은 전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포효성을 토해내며 강철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아! 미치겠네.”
 계속해서 암벽을 오르자니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이고 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죽음이었다.
 “쉬쉭-”
 “무슨 소리지?”
 “쉬이익-”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강철의 귓가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던 강철은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아! 저건 또 뭐야? 나보고 어쩌라고~~~”
 소리의 정체는 흉측하게 생긴 암벽 스네이크였다.
 놈들은 수열을 발견하고는 꿈틀대며 빠르게 다가왔다.
 “내가 미쳐.”
 늑대를 피했더니 이번에는 뱀이었다.
 그것도 매번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씩 떼거리로 덤벼대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오냐! 내가 이놈의 암벽, 오르고 만다.”
 “퉷-”
 손바닥에 침을 뱉은 강철은 다시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90도 경사로 깎아지른 암벽을 오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밑으로 떨어지기 십상이었고, 한 손만 잘못 놀리면 여지없이 추락이었다.
 -클라이밍 스킬의 숙련도가 7% 오릅니다.
 -클라이밍 스킬의 계속적인 사용으로 손재주가 4 오릅니다.
 -클라이밍 스킬의 사용으로 민첩이 2 오릅니다.
 -계속적인 암벽 등반으로 집중이 2 오릅니다.
 -등반 불가능한 암벽 등반으로 의지가 3 오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철에게 있어 스킬과 스탯이 오르고 생기는 것은 여전히 관심 밖이었다.
 지금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오로지 암벽을 등반하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게임하다 죽으면 쪽팔리게도 뉴스에 나오겠지.’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승리였다.
 강철은 등반이 불가능한 암벽을 계속 올랐고, 오르다 미끄러지면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끊임없이 스킬 숙련도와 스탯이 오르기 시작했다.
 
 
 3. 절대자를 깨우다
 
 “휴우~”
 얼마나 올라왔을까?
 방석 크기 정도의 납작한 바위가 튀어나온 것을 발견한 강철은 거기에 엉덩이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아!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까?”
 이제는 주변에 자욱하게 낀 구름 때문에 암벽 밑도 그리고 정상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경고! 공복도가 90입니다. 공복도가 100이 되면 배고픔으로 아사하니, 지금 즉시 음식물을 섭취하시기 바랍니다.
 “아! 배고파. 이번에도 꼼짝없이 굶어죽겠군.”
 여지없이 들려오는 경고 메시지에 강철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작은 나무와, 거기에 매달려 있는 오톨도톨한 돌기가 가시처럼 튀어나와 있는 붉은색 열매가 보였다.
 “저걸 먹어도 될까?”
 원래 사람이란 것이 극한 상황에 달하면 별짓을 다하는 법이다.
 강철은 살기 위해 열매 한 알을 따서는 무작정 입안에 담고 씹어 먹기 시작했다.
 “으윽~~”
 처음 혀끝에서 느껴지는 미각은 참을 만한 정도의 신맛이었다.
 그러나 거칠고 질긴 껍질이 깨지고 그 속에 든 과육을 씹는 순간, 쓰디쓴 맛이 입안을 온통 뒤덮었다.
 “에이~ 퉷퉷퉷~”
 강철은 한약처럼 쓰디쓴 맛에 너무 놀라 빨리 내뱉는다고 뱉었지만, 과즙은 이미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신의 눈물이라는 이콰리스 열매를 복용했습니다.
 -공복도가 0이 됩니다.
 -30분간 이동속도가 30% 오릅니다.
 -10분간 몬스터로부터 철저히 보호됩니다.
 “엥? 무슨 열매?”
 분명 신이 어쩌고저쩌고 했고, 뭐가 올라간다는 메시지가 들려왔었다.
 “이상하다? 다른 걸 먹어볼까.”
 열매 하나를 다시 딴 강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씹어 먹었다.
 -여신의 눈물이라는 이콰리스 열매를 복용했습니다.
 -30분간 이동속도가 30% 오릅니다.
 -10분간 몬스터로부터 철저히 보호됩니다.
 이번에도 안내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때서야 강철은 자기가 먹은 열매가 무슨 특수한 아이템인 것을 깨닫고 확인에 들어갔다.
 “확인.”
 
 [여신의 눈물-이콰리스 열매]
 인간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축복의 여신이, 인간을 위해 흘린 눈물로 대지의 정기와 결합되며 만들어진 축복의 열매이다.
 제한 : 10레벨 이하만 복용 가능
  인간 종족에게만 축복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옵션 : 30분간 이동속도 30% 상승
  10분간 몬스터로부터 공격받지 않는다.
 
 “오! 아무튼 좋은 거네.”
 단순한 열매가 아니라 아이템인 것을 확인한 강철은 남은 3개의 열매를 전부 따서 인벤에 담았다.
 “아! 그나저나 자고 있다는 놈은 어디 있는 거야?”
 배고픔과 죽음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강철은 상태창에 지도를 띄웠다.
 “어! 많이 가까워졌네?”
 암벽을 탄 뒤로 지도를 확인한 적이 없던 강철은 부쩍 거리가 좁혀진 붉은 점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설마 이 길이 지름길이었던 겨?’
 답은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게 목표에 많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힘이 난 강철은 다시 암벽을 탔다.
 이동속도 30% 상승의 효과는 암벽을 오를 때도 적용되는 것인지 이전보다 더 빨라진 듯했다.
 그렇게 암벽을 탄 강철이 드디어 정상에 오른 것은, 그 후로도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 다 왔다.”
 정상에 올라선 강철은 구름에 뒤덮인 절벽(밑에서는 암벽이었지만)을 내려다보며 악을 썼다.
 “이놈들아~~ 난 마침내 올라왔다~~~”
 들어줄 사람도 없건만 악을 바락바락 쓴 강철은 상태창에 지도를 다시 소환했다.
 정상에 올라와서 그런지, 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이제는 지근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자고 있는 놈이 이 근처에 있다 이거지?”
 목표가 근접했다는 생각에 용기백배해진 강철은 울창한 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은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원시림이었다.
 “인간,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났느냐?”
 “당장 죽여도 시원찮겠지만 자비를 베풀 테니 돌아가라.”
 “엥?”
 바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던 강철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봤다.
 거기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3마리의 몹이 자리하고 있었다.
 “울트라 오거에 미노타우루스 로드?”
 거의 4미터에 육박하는 덩치에 금속과 비슷한 은색 몸집을 하고 있는 오거는 신기하게도 머리가 3개였다.
 그 앞에 버티고 선 미노타우루스 로드는 황소 머리에 금색이 찬란한 두 개의 뿔을 갖고 있었고,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는 3미터의 덩치였다.
 “우리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진정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구나.”
 “다섯을 세겠다. 그 사이에 사라져라!”
 녀석에게서 풍겨지는 기운과 위압감은 감히 늑대 무리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철에게는 여신의 축복이라는 이콰리스 열매가 있었다.
 “그냥 가면 정말 모른 척 해주냐?”
 “그… 그렇다.”
 “그… 그럴걸.”
 세 마리 몬스터가 순간적으로 무지 헷갈려 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몬스터들이 기대하는 답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녀석들의 답을 들은 강철은 돌아가는 척하며 걸음을 옮기다가 적당한 곳에서 쓰디쓴 이콰리스 열매를 씹었다.
 -여신의 눈물이라는 이콰리스 열매를 복용했습니다.
 -공복도가 0이 됩니다.
 -30분간 이동속도가 30% 오릅니다.
 -10분간 몬스터로부터 철저히 보호됩니다.
 쓰디쓴 과즙이 식도로 넘어가자 다시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복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다시 0이 되었다.
 ‘정말 보호받을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간 강철은 조금 전의 괴물 같은 몬스터를 봤다.
 놈들은 자기가 옆으로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멀뚱멀뚱 지켜만 보고 있었다.
 “오! 정말이네.”
 몬스터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강철은 행여나 놈들이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부지런히 뛰었다.
 
 ψ ψ ψ
 
 “휴유~ 천만다행이다.”
 이동속도 30% 상승 옵션 때문에 날듯이 달려온 강철은 마침내 붉은 점이 눈앞에서 번쩍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바위암벽만이 덩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우리나라는 다 좋은데 마지막 끝마무리가 항상 엉성하다니까.”
 주변을 둘러봐도 건물이나 다른 입구가 없음을 확인한 강철은 지도에 무슨 오류가 있다고 여겼다.
 그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바위암벽에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야?”
 주먹만 하던 구멍이 점차 커지더니 곧 축구골대처럼 커졌고, 나중에는 그 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나왔다.
 구멍을 통해 나온 이는 서양여자처럼 키가 크고 창백한 피부의 늘씬한 금발 여인이었다.
 그녀는 강철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누… 누구세요?”
 “벌써 약속한 시간이 되었나요?”
 “무슨 말인지?”
 “저를 따라오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정중히 인사하며 따라오라고 했기에, 강철은 그녀를 따라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자고 있다는 절대자가 저 여자인가?’
 그 사이 구멍은 다시 메워졌고, 어디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강철이 신기해하고 있을 때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계속 멍하게 있을 건가요?”
 “가… 갑시다.”
 여자를 따라 들어간 동굴 안은 천정과 벽에 달린 보석 같은 물체에서 빛이 나고 있었기에 대낮처럼 밝았다.
 신비한 여인은 가끔 뒤돌아서서 강철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만 할 뿐 말없이 앞장섰다.
 ‘정말 웅장하다 못해 엄청나구나.’
 아직 왕궁 같은 곳은 현실은 물론이고 게임에서도 가본 적이 없는 강철이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현실이건 게임속이건 여기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이 세상에 없을 듯했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어디이기에?”
 “카르자힐라 에말린 포히란시우스 님이 주무시고 계시는 곳입니다.”
 “아!”
 강철은 서양 여자의 말을 듣고서야 자기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알았다.
 ‘아까 우리나라 어쩌고저쩌고 한 것은 취소다!’
 “그분께서는 지금까지 주무시고 계십니다.”
 “나 혼자 들어가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저 안은 혼자서만 들어가셔야 합니다.”
 현재 강철이 자리한 곳은 화려한 양탄자가 바닥을 장식하고 있고, 돔형 천장과 양옆에는 세밀하고 정밀한 조각이 새겨져있는 회랑 끝이었다.
 다만 문이 워낙 거대하고 처음 보는 양식이라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몰랐다.
 “이 문은 밀고 들어가나요?”
 “절로 열릴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강철이 다가가자 굳게 닫혔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띠링-”
 -대륙에 파란과 변화를 몰고 올 절대자를 만나게 됩니다.
 알람음과 함께 이전에 베티에게 받았던 퀘스트 창이 절로 나타났다.
 강철은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자기가 들어선 공간이 여인의 침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절대자가 여인?’
 확인 차 주변을 다시 둘러본 강철은 향긋한 향기와 여자들의 방에나 있음직한 여러 가지 물품을 보고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자고 있다고 했으니까 저 침대에 있겠지?’
 방 한가운데에는 색색의 천이 살살 나풀거렸고, 그 가운데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장식이 부착되어 있는 침대가 있었다.
 “헉!”
 조심스레 침대로 다가가던 강철의 입에서 외마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세… 세상에…….”
 침대에 누워 있는 이는 예상대로 여자였다.
 그러나 그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곱게 새겨 넣은 것 같은 단아한 눈썹과 굳게 잠겨 있지만 뜨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빛을 일순간 사라지게 할 것 같은 크고 동글한 눈.
 그 밑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깎아지른 오뚝한 콧날과 도톰하면서도 앙증맞은 입술까지.
 ‘꿀꺽…….’
 강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온갖 대중매체의 발달로 수많은 미인을 손쉽게 접하며 봐왔지만 눈앞의 여인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여인에게서는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과 함께,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엄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때문에 강철은 여인의 얼굴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차마 앞으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잠자고 있는 절대자를 깨우십시오.
 “아!”
 메시지 창이 아니었다면 아마 강제 종료되는 순간까지 강철은 이러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게 틀림없다.
 ‘어떻게 깨우지.’
 강철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녀와 더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요동쳤다.
 -경고! 호흡이 심하게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경고! 맥박이 기준치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경고! 혈압이 지나치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1분 이상 지속되면 강제 종료됨을 알려 드립니다.
 갑작스럽게 차가운 음성의 경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강철은 경고 메시지를 듣고서야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휴우~ 정신 차리자! 아무리 예뻐도 게임 속에서 만든 가상이미지에 불과해.”
 경고 메시지 덕분에 정신을 차린 강철은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깨우지.”
 여전히 눈을 감고 자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강철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만 깨울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때 또다시 메시지가 들려왔다.
 -절대자의 볼에 뽀뽀를 하십시오.
 “풋.”
 ‘이거 개발자가 너무 동화를 좋아하는 것 아냐?’
 잠자는 미녀를 깨우기 위해 볼에다 뽀뽀하는 것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에서 자주 나오는, 조금 유치한 스토리였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고맙지.’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뽀뽀하다가 죽어도 좋았다.
 강철은 뽀뽀를 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여인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아! 정말 아름답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강철이 다시 감탄하는 사이, 그녀는 인기척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면서 덮고 있던 이불이 반쯤 흘러내렸고, 백옥 같은 그녀의 속살이 드러났다.
 ‘개발자, 나이스!’
 그 순간 왜 개발자가 그리도 고마운지 몰랐다.
 그러나 브래지어만 걸치고 있는 그녀의 상반신을 본 순간, 또다시 경고 메시지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경고! 호흡이 심하게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경고! 맥박이 기준치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경고! 혈압이 지나치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1분 이상 지속되면 강제 종료됨을 알려 드립니다.
 -경고! 쌍코피가 터졌습니다. 지속적인 출혈은 생명력을 떨어트리는 만큼 즉시 치료하시기 바랍니다.
 
 ψ ψ ψ
 
 박동치는 심장과 콸콸 쏟아지는 쌍코피를 겨우 진정시킨 강철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는 것인지 더욱 심하게 뒤척였고, 이번에는 상아처럼 늘씬한 다리를 이불 밖으로 드러냈다.
 “오! 못 참아. 퀘스트를 실패해도 좋아.”
 이성이 마비된 강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뽀뽀가 아닌 진한 키스를 했다.
 가장 먼저 물컹한 입술이 살짝 씹히는 감촉이 느껴졌고, 이어 달콤한 향기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뒤덮기 시작했다.
 -키스가 아닌 뽀뽀를 하십시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
 -키스가 아니라 뽀뽀를 하십시오.
 ‘싫어!’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금 당장 키스를 중지하고 뽀뽀를 하십시오. 뽀뽀를 하지 않으면 퀘스트가 실패합니다.
 “아!”
 달콤하고도 황홀했던 도둑키스를 어쩔 수 없이 끝낸 강철은 다시 고개를 들어 여인을 봤다.
 이번에는 정말 그녀를 깨워야만 했다.
 ‘아! 아깝다.’
 미련 때문일까?
 고개를 숙여 볼에 뽀뽀하던 강철은 어느 틈에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다시 헤집기 시작했다.
 “흡!”
 강철은 어느 순간 뜨겁고 말랑말랑한 것이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어 가녀리면서도 포근하고, 또 보드라운 뭔가가 목을 감싸는가 싶더니 적극적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걸 느꼈다.
 “아!”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몸짓이고 유혹이었다.
 그렇게 여인의 품안으로 쓰러진 강철은 그녀를 으스러져라 안으며 기나긴 키스를 계속했다.
 “하아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달콤하고 황홀한 키스가 끝났다.
 그 시각, 개발사의 특수상황실은 난리가 났다.
 “노 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그게 저도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특수상황실 안에는 5명의 핵심개발자 말고도 급히 달려온 운영팀장과 부사장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드래곤을 깨우는 일은 영웅으로 설정된 발칸왕국의 왕세자가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야 그렇지만…….”
 “게임의 중요 스토리를 이어가는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를 어떻게 유저가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저 유저가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를 받았을 때는 워낙 저 레벨이었기에 그만…….”
 “그래도 유저가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를 받았다면 바로 보고해서 대책을 강구했어야 할 것 아니오.”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기에 그냥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라도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해야 할 것 아니오?”
 “죄…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개발사가 뒤집어진 그 순간, 강철은 잠에서 깨어난 여인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잠든 나를 깨운 게 너인가?”
 “워낙 편안하게 자고 있기에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해한다. 그런데 운명이 안배한 내정자가 아니라 이방인이구나.”
 “무슨 말인지?”
 “아! 이것 또한 운명. 신경 쓰지 마라.”
 고백하건데 강철은 조금 전의 키스가 첫 키스였다.
 연예인 뺨칠 만큼의 외모를 갖고 있는 그였기에 학창시절 그의 인기는 꽤 좋았다.
 그러나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가장에게 연애는 사치에 불과했고, 강철도 그런데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무튼 생애 처음 키스를 한 강철은 지금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앞의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움 때문인지 두 볼에는 홍조가 돌았고, 여인과 시선을 마주칠 때면 흠칫 놀랐다.
 “안배대로 한 가지 소원과 두 가지 선물을 주지.”
 “갑자기 소원이라니요?”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라.”
 “아무거나 뭐든지요?”
 “그렇다. 나는 신으로부터 불가능을 극복하게 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절대자다.”
 ‘키스를 한 번 더?’
 소원을 말하라는 여인의 말에 강철은 황홀했던 조금 전의 키스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아주 잠시지만 여인의 두 볼에도 수줍게 붉은 빛이 돌다가 사라졌다.
 ‘아! 동생을 찾는 게 급해.’
 낯 뜨거움에 고개를 숙였던 강철의 뇌리에 갑자기 가출을 한 동생의 일이 떠올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게임을 시작한 이유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시각, 개발사의 특수상황실에 있던 모든 이는 숨을 죽이며 강철과 여인을 주시했다.
  “노 부장, 저자가 왕세자를 대신해서 제국이라도 세워달라고 말하면 우린 끝장이야.”
 “설마 유저가 그런 것을 소원으로 말하겠습니까?”
 “그래도 게임 내 절대 지존으로 만들어 달라거나 신급 아이템으로 도배해 달라고 하면 어쩔 텐가?”
 “그거야…….”
 부사장의 추궁에 이번 퀘스트를 기획하고 개발한 노 부장은 전전긍긍하며 모니터 안 강철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는 스페셜 시크릿 퀘스트를 해결한 강철이 그리 무리하지 않은 소원을 말하기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때 강철의 소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소원은 동생을 찾는 것인데요?”
 “정말 그게 소원인가?”
 “네, 난 동생을 찾고 싶어요.”
 “좋다! 동생의 이름이 뭐냐?”
 “수철, 김수철이요.”
 동생을 찾겠다는 말에 여인의 눈가에 희미한 그늘이 생겼다.
 여인이 재차 물었고, 강철의 의사가 워낙 확고함을 알고 대답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묘한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피어났다.
 “아!”
 “찾았나요?”
 “미안하다! 글로벌월드 어디에도 김수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캐릭터 명으로 찾기 불가능하면 저와 비슷한 얼굴 또는 주민번호나 본명으로는 못 찾나요?”
 “미안하다.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아!”
 “그 소원 말고 다른 소원을 말하라.”
 재차 소원을 묻는 여인의 표정에는 그 어디에도 미안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어떤 안도감과 기뻐하는 표정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ψ ψ ψ
 
 “저 사람, 정말 바보 아냐?”
 “그러게 말이야. 생각이 있는 놈인지, 없는 놈인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소원이라는 게 동생을 찾는 것이라니.”
 “그래서 불만이라는 거야, 뭐야?”
 “부사장님, 게임밸런스를 깨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원이라는 것이 고작 동생을 찾다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소원으로 게임에서 동생을 찾는다는 말에 너무도 어이없는 나머지 노 부장과 운영팀장이 지금의 처지도 잊고 한마디 했다.
 그때 강철의 말이 이어졌고, 특수상황실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거창하게 소원이라고 말하면 이상한데, 이런 것도 가능할까요?”
 “뭐냐?”
 “난 다른 사람의 품을 뒤지는 소매치기였어요.”
 “소매치기?”
 “네, 돈이나 귀중품을 터는 것이 내 직업이지요.”
 “그런데?”
 강철의 갑작스런 고백에 여인은 의아해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특수상황실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소매치기라는 직업도 있었나?”
 “개발 초창기부터 직업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니까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
 “현상금 사냥꾼이나 탐정도 있는데 소매치기라고 없겠습니까?”
 “조용 좀 하게. 시끄러우니까 무슨 소리인지 안 들리네.”
 “네…….”
 개발사 직원들은 강철의 고백을 게임 내의 직업으로 오해했다.
 특수상황실이 잠시 소란에 빠진 사이, 수열과 여자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동생은 그런 나를 걱정했죠.”
 “정확히 무엇을 요구한다는 말이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남의 귀중품을 얻는 방법이 없을까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소원이었다.
 그러나 갖고 있는 기술이라고는 소매치기 재주밖에 없는 강철로서는 찰나지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게임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이, 게임 내 아이템이나 돈을 팔아서 버는 것 같았고, 그로서는 동생 때문이라도 더 이상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훔치고 싶지 않았다.
 피해를 주지 않고 훔친다면 동생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거라면 카피라는 스킬이 적당하겠군.”
 “카피(Copy)라면 복사하는 것을 말하나요?”
 “비슷하다.”
 “좀 더 설명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채지 마라. 카피란 다른 사람의 아이템을 그대로 카피해서 가져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그걸 소원으로 할 테냐?”
 “해줄 수만 있다면요.”
 “좋다. 들어주지.”
 별처럼 빛나는 여인의 두 눈이 다시 감겼고, 잠시 후 그녀의 주위에서는 오로라와 같은 신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강철은 화려한 빛이 자신의 몸을 감싼다고 여긴 순간, 알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띠리링~”
 -스킬 카피를 습득하셨습니다.
 “스킬이 생겨났을 것이다.”
 “아! 네.”
 “어서 확인해봐라.”
 “확인.”
 
 [스킬 : 카피]
 고대시대 거인족이 신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카피라는 무시무시한 스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한 거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도 카피 스킬을 봉인한 일이었다.
 특성 : 강력한 의지로 아이템을 카피할 수 있다.
 제한 : 아이템을 카피 창에 올려야 카피가 가능하다.
  레전드급 이상의 아이템은 1아이템 당 오직 1회만 카피가 가능하다.
  유니크급부터 그 이하의 아이템은 1아이템당 3회의 카피가 가능하다.
 기타 : 1회 시전 시 마나소모 50
 상태 : 숙련도(100%)
 
 “어때, 마음에 드나?”
 강철은 스킬의 설명도 보지 않고 카피가 된다는 문구만 보고, 뭐든지 무조건 가능한 줄 알고 크게 기뻐했다.
 “오! 내가 원하던 게 이거예요.”
 “말하지 않았느냐? 내게 불가능은 없다고.”
 기뻐하는 강철과 달리 특수상황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처음 동생을 찾아달라는 소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기들 처지는 생각 않고 강철을 딱하게 여겼던 개발자들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카피 스킬을 준다고 하는 순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눈치 빠른 몇몇은 카피 스킬이 버그가 아닌지 확인했고, 부사장도 제일 먼저 그 부분을 물어왔다.
 “이봐, 카피라면 버그 아냐?”
 “그게 분명 개발기술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버그를 정식 스킬에 포함시킨 거야?”
 “사장님이 재미있겠다며 저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포함시켰는데요.”
 “그래도 그렇지, 끝까지 반대했어야지.”
 “그래서 카피 창에 올려야만 카피가 되게 했고, 레전드급 이상부터 한 번 카피한 아이템은 두 번 카피하지 못하게 제한을 걸었습니다.”
 “흠, 그런 제한이 있어?”
 “예.”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카피가 사장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개발사가 개발한 정식 스킬이고, 또 스킬에 그런 제한이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막말로 게임의 밸런스에 문제를 주는 레전드급 아이템은 너무나 희귀했고, 그보다 좋은 신급 아이템은 상용화 2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강철이라는 유저가 카피 스킬을 갖고 있어도 제한 조건이 있는 이상, 게임밸런스에 영향을 끼치는 최상급 아이템을 카피하려면, 직접 아이템을 얻어야 했기에 그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때 중앙모니터의 대형화면이 흔들리며 어디선가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특정 유저를 모니터링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30분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제니스,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잖아?”
 제니스는 글로벌월드를 운영하는 제8세대 슈퍼컴퓨터의 이름으로, 게임에서는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아울러 앞으로 깨어나서 활동하게 될, 몇 마리의 드래곤은 제니스의 슈퍼컴퓨터보다는 못하지만 또 다른 슈퍼컴퓨터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제니스를 도와 글로벌월드를 운영하고 유지할 조력자였다.
 -강철이라는 유저는 어떠한 불법이나 버그를 사용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카트리나를 깨웠습니다.
 카트리나는 강철이 깨운 레드드래곤의 애칭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저가 아니라 NPC가 하게 되어 있었다고.”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이 그를 이끌었던 것. 더 이상 그를 모니터링 하는 것은 제가 용납지 않겠습니다.
 “잠깐만.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먼저 강철이라는 유저에 대한 모니터링부터 중지시키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 후에 하겠습니다.
 “이번 일로 잠자고 있던 다른 드래곤들도 깨어나는가?”
 -카트리나가 깨어나면 다른 드래곤도 깨어나기로 된 것은 태초부터 정해진 안배입니다.
 “그럼, 다음 패치를 예정보다 앞당겨야겠군.”
 -그 부분은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제니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ψ ψ ψ
 
 “이제 제가 할 일은 끝났나요?”
 “아! 미안하다.”
 “띠링- 띠링-”
 -절대자를 깨워라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명성이 2,000 올라갑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경험치가 지급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최상급 업그레이드 코어 10개가 지급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대지의 숨결 목걸이가 지급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뒤늦게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람과 함께 레벨이 오른다는 메시지가 여러 번 들려왔다.
 강철은 스탯창을 열어 12로 올라간 레벨을 확인했다.
 “이름이 강철이라 했던가?”
 “네.”
 “난 카트리나라고 한다.”
 “아까 듣기로는 그보다는 무지 긴 이름인 것 같았는데.”
 “그냥 카트리나로 불러라.”
 말은 안 했지만, 자기는 꼬박꼬박 말을 올리는데 반해 상대는 처음부터 말을 까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강철이었다.
 하지만 뭘 준다고 했기에 여태까지 꾹 참았던 그는 이제 받을 것은 다 받았다는 생각에 조금 용감해지기로 결심했다.
 “정말… 이요?”
 “그래, 그렇게 해라.”
 “그런데 왜 말을 까죠? 난 처음부터 올리는데 카트리나는 반말이고. 보아하니 그리 나이 차이도 안 날 것 같은데…….”
 “그게 불만이냐?”
 “불만은 아니지만 경우가 그게 아니죠.”
 “그렇게 경우를 밝히는 놈이 뽀뽀하라고 했는데 키스를 했냐?”
 “그… 그것은, 남자는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뽀뽀만 하면 그게 고자지, 남자예요?”
 “도둑 키스한 주제에 뭘 잘했다고?”
 “흥! 처음에는 그렇다 쳐도, 나중에 날 끌어안은 사람이 누구인데요? 거기다가 난 입술만 빨았는데, 그 안에 혀를 들이민 사람이 누구고요?”
 “끙… 그건 그렇고, 넌 사내라는 놈이 뭔 키스가 그리 서투르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처음? 그럼, 그게 첫 키스라는 소리인데, 넌 이제 보니 완전 숙맥이구나.”
 “그게 아니라…….”
 “깔깔깔~~ 좋다! 친구하자.”
 강철은 괜히 쪽팔려서 뭔가 변명하려고 했다.
 그때 친구를 하자는 카트리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그래, 하지만 나는 여기를 곧 떠나야 해.”
 “어디로 가나요?”
 “친구 먹자며?”
 “어디 가는데?”
 “아직도 자고 있는 동생과 사촌을 깨워야 해.”
 “동생과 사촌도 있어?”
 “여러 명 있지. 그 중에 사고뭉치가 있어서 말려야 하거든.”
 “사고라니?”
 “그 녀석, 한번 사고를 쳐도 대형 사고를 치거든.”
 “대형 사고라면?”
 “최소한 도시 하나는 날리려고 할 걸.”
 “헉!”
 강철도 바보는 아니다.
 그는 자신이 키스했던 여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걸 이미 예감하고 있었고, 이콰리스 열매 때문에 어쩌면 여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분명 여신이 맞을 거라고 여겼다.
 ‘혹시 드래곤?’
 강철은 그때 처음으로 카트리나가 여신이 아닌 드래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틈틈이 읽었던 판타지에서 드래곤은 수면기라 해서 수백 년간 잠을 잔다는 대목이 생각났다.
 아울러 드래곤은 워낙 흉포해서 한 번 수틀리면 브레스인가 뭔가로 도시 하나는 가볍게 날린다는 기억도 떠올랐다.
 ‘아! 내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사실 카트리나에게 대들었던 것은 욱한 김에 한번 해본 소리였지 친구까지 먹을 생각은 절대 아니었다.
 또한 여신이라면 자비롭고 인자해서 한번 개기는 걸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맹세코 그녀가 드래곤인 것을 알았으면 절대로 키스는 안 했을 것이며, 말투로 시비 거는 그런 몰상식한 만행은 엄두도 안 냈을 게 분명했다.
 ‘정말 드래곤일까?’
 강철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사념에 젖어있을 때, 그녀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뭔 생각해?”
 “아… 아냐.”
 “넌 이제 어디로 가지?”
 “난 여길 나가면 작센 시로 가려고.”
 “작센 시라면 도나우 왕국의 수도?”
 “잘 모르지만 도나우 왕국에 있는 것은 맞을 걸.”
 강철은 베티의 부탁을 들어준 이상, 그때 만났던 영감을 찾아 만물고물상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가서 정말 게임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지, 있다면 자기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사정해볼 참이었다.
 “좋아, 거기는 내가 보내주지.”
 “어떻게?”
 “그냥 눈을 감았다가 뜨면 작센 시에 있을 거야.”
 “아!”
 아마도 무슨 특별한 마법으로 자신을 보내준다는 얘기 같았다.
 강철은 그녀와 곧 헤어진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어렵게 질문을 했다.
 “저, 카트리나.”
 “왜?”
 “카트리나는 여신이야? 드래곤이야?”
 “나?”
 “응.”
 “너랑 뜨거운 첫 키스를 했던 여자지.”
 “아! 또 놀리는 거야?”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강철의 얼굴이 붉어졌고, 카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철아,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뭔데?”
 “우리가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때도 지금처럼 편하게 대해주라?”
 “그거야 뭐 어렵진 않지만,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
 일개 유저에, 그것도 이제 12레벨에 불과한 자신이 게임 내에서는 절대자의 위치를 차지할 카트리나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인연이 있다면 또 보겠지.”
 “좋아,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니까.”
 “후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하지. 그럼 안녕…….”
 작별의 인사를 하는 카트리나의 얼굴에 얼핏 붉은 홍조가 나타났고, 그녀의 손은 자기의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터져 나온 눈부신 빛에 휩싸인 강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우린 다시 보게 될 거다. 그리고 나도 그게 첫 키스였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철의 모습은 눈부신 빛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혼자 남아 강철이 사라진 공간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카트리나도 얼마 후 어딘가로 사라졌다.
 
 
 4. 만물고물상 깡패 영감!
 
 츠파파팟-
 공간이 일그러지며 빛이 터져 나왔고, 잠시 후 강철의 모습이 낯선 도시의 광장에 나타났다.
 그의 요란스런 등장에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비싼 스크롤을 찢고 여기까지 오다니.”
 “돈이 남아도나 보지.”
 “장비는 완전 생초보용인데.”
 “어떤 고렙이 심심풀이로 만든 부캐인가 보지.”
 소지하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찢으면 저장된 위치로 텔레포트 시켜주는 편리한 아이템이,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가격이 고정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세 배는 비싼 3골드로, 고렙들이나 사용하는 아이템이었다.
 때문에 근처에 있던 유저들은 빛과 함께 광장에 나타난 강철이가 스크롤을 통해 이동해온 고렙의 부캐라고 여겼다.
 ‘여기가 작센 시?’
 생전 처음 텔레포트를 해본 강철은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탄 것 같은 울렁증에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만물고물상이랬지.”
 강철이 영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 도시에서 만물고물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주변에 있는 유저에게 고물상의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 다가가려는 사이 누군가가 소리쳤다.
 “와아~ 아이버크다.”
 “랭킹 8위 아이버크가 여기에 왔다.”
 “절대 십인 중 한 명이 왔다.”
 “어디, 어디?”
 “와! 정말 아이버크다.”
 “저쪽으로 간다.”
 “아이버크님, 잠깐만요.”
 “사인 좀 해주세요.”
 누군가의 외침은 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광장에 있던 모든 유저는 빠르게 달려가는 사내를 따라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갔다.
 ‘아이버크? 유명한 사람인가?’
 이제 게임을 막 시작한 강철은 랭킹 시스템을 모르고 있었다.
 통일 한국에서만 천만 명이 즐기는 글로벌월드는 랭커라 불리는 각 나라별 순위를 매주 5천 등까지 발표했다.
 그중 순위 500위까지는 탑 랭커라 해서 일반 유저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아이버크는 탑 랭커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절대 10인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자기의 랭킹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비공개로 설정하면 공개되지 않지만 대부분의 랭커들은 자랑삼아 자기의 랭킹을 공개했다.
 “더럽게 할 일 없는 사람들이네.”
 현실에서도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들을 빠순이라며 좋아하지 않았던 강철은, 같은 유저를 쫓아 몰려가는 다른 유저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버크라는 놈, 그래도 폼은 나네.”
 캐릭을 생성하면 지급되는 쫄쫄이 스타일의 티와 반바지를 여전히 입고 있는 강철은, 번쩍이는 은빛 갑옷에 금빛 망토를 펄럭이는 아이버크의 모습을 슬쩍 바라봤다.
 “그나저나 만물고물상은 어디 있는 거야?”
 고물상을 찾아 무턱대고 도시를 돌아다니던 강철은 해맨 지 두 시간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게임 상의 가상도시라지만 작센 시는 현실의 도시 못지않게 거대했기 때문이다.
 “저, 말 좀 물어볼게요.”
 “뭔데요?”
 “만물고물상이 어디 있나요?”
 “이쪽으로 쭉 가다 큰 사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해서 다시 쭉 가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네,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길을 물어본 강철은 마침내 도시 외곽에서 만물고물상의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아무리 고물상이라지만 너무한 것 아냐?”
 만물고물상을 처음 보는 강철은 솔직히 자기가 이곳을 찾아온 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 의심되었다.
 담장이랍시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양철 패널을 대충 얼기설기 세워놓은 고물상은 현실의 고물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만나는 봐야지.”
 실망감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옮긴 강철은 대문으로 보이는 양철 패널 두 개를 조심히 밀며 사람을 불렀다.
 “계세요?”
 “…….”
 “아무도 없어요?”
 “…….”
 이번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강철은 그냥 갈까 하다가 여태 이곳을 찾고 해맨 것이 아까워서 얼마동안만 기다리기로 했다.
 그 시각, 고물상 안쪽에서는 그때의 영감과 아이버크라는 플레이어가 언성을 높이며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난 네놈들과 손을 잡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영감, 이런 썩어문드러진 고물상에서 냄새나는 잡동사니와 어울려 사는 것이 좋소?”
 “네놈들에게는 볼품없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내게는 2년 5개월의 땀이 배어 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그렇게 2년 5개월간 고생해서 돈이나 벌었소?”
 “돈이라면 먹고살 만큼은 있다.”
 “그래? 그럼, 더 잘되었네! 영감이야 먹고 살만큼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니거든. 글로벌월드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는데 왜 그렇게 비협조적이야?”
 “듣기 싫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지금의 일을 계속할 것이다.”
 “영감, 생각 잘해. 영감도 푼돈 받고 별 잡동사니 같은 아이템을 개조하는 것보다는 우리 밑에서 유니크급 아이템도 고쳐보고 그래야지.”
 “내가 네놈들의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아느냐.”
 “왜 그래? 돈은 먹고 살만큼 있다면서?”
 아이버크라는 사내는 게임의 랭커들이 수두룩한 아다마스 길드의 행동 대장이었다.
 그는 영감에게 이곳 고물상을 정리하고 자기 길드와 자신들의 동맹 길드만을 위해 아이템을 개조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후크, 일명 드크(드워프+후크)로 불리는 눈앞의 노인은 게임 내에서는 유일하게 개조사라는 직업을 가진 자였다.
 개조사는 인챈트 시스템에 특화된 히든클레스로, 그의 손을 거친 아이템은 더욱 뛰어난 성능과 옵션을 자랑했다.
 “이놈들아! 그래도 최소한의 매너라는 것이 있다.”
 “매너? 엿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놈들이 내가 개조한 아이템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그게 어때서? 영감도 같이 벌면 되잖아?”
 “흥, 네놈들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내게 이런 무례한 행동은 안 했을 것이다.”
 “무례? 아주 지랄 옆차기하고 있네. 영감이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까 그런 소리하지.”
 “꼴 보기 싫다. 어서 나가라!”
 “오늘은 그냥 가지. 그러나 다음에 올 때는 각오하라고.”
 아이버크는 그 말을 끝으로 고물상 한쪽에 있는 작은 사무실을 나갔다.
 
 
 다음에 계속...

댓글(8)

호장    
흠......... 이걸 돈주고계속봐야할까요?
2017.06.08 22:32
gamebox    
주인공 은 전혀모르는사람한태 돈456만원과캡슐이용권을훔쳤습니다 말이필요한가요?
2017.06.10 14:48
소설가인생    
뭐가? 위에 영어님 소설에서 ㅈㄴ 진지빠네 ㅋㅋㅋ
2017.06.11 13:35
Telkem    
소설이여도 주인공 인성및 지능이 최하급이라면 욕할수는 있죠
2017.06.11 19:44
Telkem    
진정한 고구마 소설을 뵙습니다
2017.06.11 19:45
Telkem    
솔직히 말합니다 제가 소설보면서 왠만하선 최대한 좋게 봐주고 복잡하게 생각안하고 편들어주고 하는데 이건 도저히 답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멍청한거 싫어하시는 분... 아니 그냥 주인공이 곤충지능인거 싫어하시는 분은 읽지마세요
2017.06.11 20:07
혈중카페인    
ㅋㅋ 주인공 노답
2017.06.18 12:17
WithU    
무료인데도 읽기가 싫다.
2017.06.20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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