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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카운터 1권-1

2015.01.14 조회 1,506 추천 9


 1장 수도 제일의 화류공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성벽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아이버크 후작 저택의 특별 연무장. 웃통을 벗은 검은 머리의 사내가 구석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내공을 운기하는지 그의 몸에서는 연신 금색의 신비한 안개가 구름처럼 흘러 나왔다.
 “휴우.”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사내의 몸이 가부좌 상태로 붕 떠올랐고 금색의 연무는 사내의 코와 전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쉬이이리릭.
 금색의 연무가 빨려가면서 주변에 마나의 소용돌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소용돌이는 무서운 기세로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세상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일 것만 같던 요동치던 소용돌이가 어느 순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검은 머리의 사내의 전신에서 금색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섭게 회오리치던 마나의 소용돌이마저 빨아들여 버린 사내였다.
 “아! 개운해, 이 맛에 한다니까.”
 검은 머리의 사내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연무장의 한쪽에 마련된 거치대에서 한 자루의 목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붕붕 휘두르다가 기수식의 자세를 취했다.
 “이얍!”
 요란한 기합성과 함께 목검을 휘두르는 사내. 무시무시한 힘에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비명처럼 계속 터져 나왔다.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모습은 무지막지함, 그 자체였다.
 붕. 붕.
 목검을 들고 넓은 연무장이 비좁은 듯 활개 치던 사내는 반대쪽 돌 벽이 자리한 곳까지 갔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십 명의 기사가 훈련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사내는 빠른 속도로 가로질렀다. 더구나 그의 무자비한 칼질(?)은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사내의 칼질에는 질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탄 아이버크 님의 필살기! 공중 3연속 치기!”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사내의 몸이 붕 떠올랐다. 성인 남자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높게 점프한 사내는 말 그대로 허공에서 세 번의 칼질을 했다. 무쇠라도 자를 듯, 사내의 검세가 펼쳐질 때마다 바람은 소리 높여 아우성을 쳤다. 그 순간, 무형의 강기가 사내의 검에서 발출되었다.
 “후우.”
 땅에 착지한 사내는 숨을 고르면서 만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치 자신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본 사람이 없는지 찾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사라진 가문의 비전검법이 없어도 훌륭하지.”
 말을 내뱉는 사내의 표정에는 스스로 만족한다는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정작 사내는 자신의 목검에서 분출된 무형의 강기가 성벽을 완전히 갈랐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채만 한 바위로 이루어진 성벽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위 성벽의 한구석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예리하게 절단된 틈이 있는 걸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워낙 예리하게 절단되어서 억지로 찾기 전에는 그 틈이 안 보일 뿐.
 “그런데 마지막에 그 느낌은 뭐지?”
 수련을 하다 보면 조금 전처럼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마치 몸 안의 마나가 팔을 타고 외부로 분출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사내는 기분 탓으로 돌리고 말았다.
 “오늘 수련은 이 정도로 끝내고 슬슬 나가보실까?”
 사내의 이름은 유탄 아이버크. 350년 전, 레스본 왕국의 건국 영웅 햄머 아이버크 후작의 후손으로, 현재 후작의 작위를 계승하고 있는 해먼 아이버크 후작의 차남이었다. 아이버크 가문은 과거 왕국 제일의 무장가문으로 대륙 최고의 검사를 쉼 없이 배출했던 가문이었다. 하지만 120년 전의 가주였던 레만 아이버크 후작이 서른의 나이로 대륙의 마지막 전장에서 전사하면서, 대륙 제일의 무가라는 지위를 잃어버린 가문이었다. 당시의 가주 레만 아이버크는 겨우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만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다. 때문에 가문의 비전검술은 그대로 유실되었고 지금은 토네이도라는 마나심법만이 가문의 직계에 비밀리에 전승되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가 물이 좋을까?”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유탄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요즘 수도에서 가장 물이 좋다는 아방가르라는 요정은 요 며칠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귀족만의 전용 멤버십 클럽인 포세이돈이 오늘은 가장 적격인 것 같았다.
 “출전에 앞서 전투복으로 갈아입어야지.”
 누가 들으면 전장의 출진에 앞서 갑옷을 차려입는다고 오해할 말이었다. 하지만 유탄이 새롭게 갈아입고 나온 옷은 온갖 귀금속과 장식이 화려하게 수놓인 고위귀족 전용의 의전용 튜닉이었다. 왼쪽 가슴에는 아이버크 가문을 상징하는 순백의 유니콘이 다이아몬드로 새겨져 있었다.
 “흠, 이만하면 준수하군.”
 유탄은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의 복도에 마련된 대형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얼굴은 같은 남자가 봐도 울고 갈 정도로 멋있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이래서 혈통이 중요한 거야.”
 말과 함께 고개를 올린 유탄의 시선에 벽에 부착된 대형액자가 들어왔다. 아이버크 가문을 일으킨 햄머 아이버크 후작과 그의 부인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햄머 아이버크 후작은 대륙인과는 조금 다른 얼굴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는 푸른색의 오러 소드가 돌풍처럼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의 부인으로 알려진 위대한 마법사 루이 낸시아가 몰려오는 적을 향해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가히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전설 속의 엘프족이 나타난다면 그녀의 모습과 유사할 것 같았다. 유탄은 바로 대륙의 가장 위대한 핏줄에만 나타난다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햄머 아이버크 후작에게 물려받았고, 뭇 여인의 가슴을 격동시키는 빼어난 외모는 루이 낸시아에게 물려받았다.
 “공자님, 오늘 밤도 나가십니까?”
 “오! 아돌프 집사, 안 그래도 내가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던 유탄에게 다가온 자는 후작가문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아돌프였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이버크 가문의 차남, 유탄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드린 돈은 벌써 다 쓰셨습니까?”
 “내가 큰일을 하다 보니 씀씀이가 그렇군.”
 “알겠습니다. 오늘은 어느 정도 드리면 되겠습니까?”
 “흠, 70골드면 될 것 같은데.”
 유탄은 대충 넉넉히 잡아 요구를 했다. 필요할 때마다 아돌프 집사를 만나 돈을 타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한 달 정도치의 돈을 요구한 것이다. 70골드면 일반 평민들이 사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이번에는 꽤 많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집사도 바쁠 텐데, 내가 번번이 찾아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귀찮을 것 아냐?”
 “그렇다면 이번에 받아 가신 돈으로 올해의 남은 기간 동안 쓰시면 되겠군요.”
 “허허, 그건 아니지.”
 “공자님, 70골드면 제 1년 소득을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입니다.”
 “집사, 오늘은 왜 그리 까칠하게 나와?”
 이제 6월로 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70골드로 남은 6개월을 살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풍류를 즐기지 말라는 사형선고였다. 하지만 집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유탄이었다. 아무리 후작가문이라지만 돈이 어디서 계속 펑펑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테인 형님과 아버지, 그리고 새어머니까지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돌프 집사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가주로 있을 당시 가문의 재정을 투입해 햄머 상단을 만들어냈다. 지금 후작의 작위만 있지, 관직이 없는 아이버크 가문의 수입원은 영지에서 걷는 세금과 햄머 상단의 소득이 다였다. 특히 햄머 상단의 수익이 없다면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와 그 후계자들은 지금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길 수 없었다.
 “좋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십시오.”
 “검술?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제가 훌륭한 검술 스승을 모셔오겠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네 시간만 스승에게 검을 배우십시오.”
 “대 아이버크 가문이 외부에서 검술 스승을 초빙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야.”
 “대륙 제일의 명문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120년 전, 레만 아이버크 후작의 전사로 가문의 비전검법을 유실한 아이버크 가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대로 비전검법만 유실한 것이 아니라,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중요 내용도 함께 유실되었다. 당시의 어린 아들은 심오한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구결을 외우고만 있었지,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아이버크 가문은 비밀리에 마나심법을 재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은 아이버크 가문의 힘이 검법의 뛰어남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버크 가문의 진정한 힘은 대륙의 그 누구도 모르는 마나심법에 기반 한 마나축적과 비전검법이 함께 어울렸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나보다는 형님이 해야 하지 않을까?”
 “공자님, 조부님의 유언을 생각하십시오.”
 집사는 5년 전 죽은 전대의 가주까지 들먹였다. 3대에 걸친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비밀을 거의 파헤친 유탄의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그 과정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레만 아이버크 후작의 전사 이후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들은 매번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바로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잘못된 수련을 하다가 생긴 비극이었다. 유탄의 할아버지도 잘못된 수련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젠장, 죽은 할아버지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공자님, 제발!”
 “빌어먹을.”
 유탄의 머릿속에 전대 가주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갖고 태어난 유탄을 할아버지는 유난히 예뻐했다. 햄머 아이버크 후작의 화신이라고 기뻐한 그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보다도 유탄을 더욱 아꼈다. 사실 유탄의 아버지는 검술이나 마나수련에 전혀 자질이 없었다. 반면 유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그 이상을 깨우칠 정도로 타고난 천재였다. 오죽하면 할아버지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유탄이 태어난 것이 기적이라고까지 했었다.
 “공자님이야말로 아이버크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집사, 그런 소리는 형님 앞에서 절대 하지 마.”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부님께서는 공자님이 있기에 눈을 감으면서도 행복해 하셨습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모든 비밀을 풀어 헤쳐 가던 전대의 가주는 자신의 깨우침을 전부 유탄에게 물려주었다. 겨우 15세에 불과한 유탄이었지만 햄머 아이버크 후작의 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탄의 어릴 적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게 유탄을 아끼던 그의 조부는 마지막 비밀을 푸는 과정에 마나의 역류로 죽어갔다. 하지만 죽어가는 와중에도 옆에 있던 유탄에게 자신의 마지막 심득을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유탄은 실로 120년 만에 나타난, 마나하트를 품고 있는 아이버크 가문의 진정한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
 “오! 공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집사, 그런데 나도 조건이 있어.”
 “뭡니까? 공자님께서 검술만 배우신다면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검술 수련은 나의 마나심법이 완성되면 하자고. 아마 내년이면 가능할 거야.”
 “안 됩니다, 공자님.”
 “할아버지께서도 우선 마나심법부터 완성하라고 한 사실을 잊은 거야?”
 일단 마나심법을 완성하면 평범한 검술도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 그의 조부였다. 때문에 죽기 직전 유탄에게 먼저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완성을 부탁했었다. 조부는 자신이 마지막에 시도한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유탄에게 다른 해석을 해주었다. 하지만 조부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가보지 못했기에 확신을 하지도 못했다.
 “공자님, 전대 가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토네이도 마나심법이 완성되면 금색의 신비한 안개가 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그야 그렇지.”
 “조금 전 공자님 전용 연무장에서 금색의 안개가 피어난 것을 봤습니다만.”
 “큭!”
 오직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수련, 계승하는 자만이 출입이 허용된 전용 연무장이었다. 이는 가문의 비전을 지키기 위한 아이버크 가문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그의 조부의 유언에 따라 예외가 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아돌프였다.
 “제가 처음 본 것이 올 초였는데 오늘 보니 더욱 진해지고 선명한 금색의 안개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아!”
 핑계를 대고 넘어가려고 했던 유탄이었다. 하지만 집사가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이상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신 공자님께 이번 한 달은 자유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집사,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대신 다음 달 부터는 5년 전의 공자님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어차피 훌륭한 검술 스승을 모셔오는데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 아돌프는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여 유탄의 반발을 사기보다는 적절한 틈을 줘서 그의 자발적인 노력을 요구했다. 햄머 상단이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아돌프의 이런 운용방식이 주효했었다.
 “당연하지, 그런데 돈은 안 줘?”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처음부터 돈을 가져왔는지 아돌프는 품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유탄은 주머니를 받자마자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보기에도 묵직한 것이 70골드는 훨씬 넘어 보였다.
 “이거 약속보다 많은 것 같은데?”
 “공자님의 마지막 풍류계 생활인데 화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큭, 눈물 나게 고맙군.”
 말과는 달리 유탄은 금화가 가득한 돈 주머니를 재빨리 품에 챙겨 사라졌다. 어느새 뒤돌아서 멀리 사라지는 유탄을 보며 아돌프는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웨슬리 후작님! 유탄 공자님께서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아돌프는 15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유탄은 가주였던 자신의 할아버지, 웨슬리 아이버크의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돌프는 유탄이 햄머 아이버크와 똑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웨슬리가 둘째손자인 그를 특별히 예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돌프의 생각과 달리 웨슬리가 유탄을 특별히 여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간 중에 마나와 그렇게 친밀한 인간은 아무도 없을 거야.’
 유탄이 태어날 때부터 기뻐했던 웨슬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린 손자의 전신의 주요 혈을 눌러주며 마나 마사지를 했다. 그때마다 유탄은 꺄르르 웃으며 할아버지의 손길을 즐거워했다. 이는 울고불고했던 첫째 손자인 테인이나 아들인 해먼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나도 깜짝 놀랐었지.’
 그날은 유탄이 마나심법의 구결을 처음으로 듣는 날이었다. 웨슬리는 어린 손자가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구결을 들려주고 운기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유탄은 그 자리에서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수련에 들어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수련에 따라 마나가 공명하며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웨슬리 후작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지였다. 하지만 다섯 살의 어린 유탄은 수련 첫날에 이미 웨슬리 후작의 경지를 따라잡았다. 그때부터 웨슬리는 유탄에게 많은 기대를 하며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오직 웨슬리 후작과 아돌프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제 유탄 님이 마음을 잡으신 이상, 반드시 아이버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할 것입니다!’
 수도 코린티아시의 최고 화류공자, 유탄 아이버크. 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외받은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과 형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특히 가문의 율법에 따라 가주의 지위를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마나심법의 복원에 모든 사활을 걸었던 아이버크 가문은 오직 마나심법의 계승자에게 가주의 지위를 넘겼다. 때문에 세 살 위인 형 테인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유탄을 미워했다. 특히 할아버지가 죽은 5년 전부터는 더욱 그랬다. 유탄은 아무도 몰래 형에게 토네이도 마나심법과 관련된 자료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테인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마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더욱 유탄을 미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
 
 “어이, 유탄!”
 “오! 친구, 잘 있었는가?”
 “나야 늘 그대로지. 그런데 자네는 오늘 출전이 조금 늦었군.”
 “내 앞길에 자꾸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어 조금 늦었네.”
 “아니, 왕국 제일의 유탄 공자에게 태클을 거는 자가 누구인가?”
 “신경 쓰지 말게. 그보다 오늘 수질 상태는 어떤가?”
 “말도 말게. 왕국 제일의 포세이돈도 이제 한물갔네.”
 유탄은 귀빈전용의 대형 룸에서 8개의 영상수정구를 들여다봤다. 영상수정구는 홀과 스테이지 곳곳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마법 아이템으로 포세이돈의 대표적인 명물이었다. 영상수정구의 등장으로 귀족들은 번잡한 홀이나 스테이지가 아닌 자신들만을 위한 룸에서 편안하게 레이디를 찍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과거, 전쟁의 통신용이나 경비용으로 사용된 마법수정구를 상업적으로 이용한 포세이돈의 아이디어는 말 그대로 대박을 가져다주었다. 귀족들은 비싼 술과 안주를 의무적으로 시켜야 함에도 룸을 차지하기 위해 웃돈을 주고 미리 예약을 했다.
 “이보게, 유탄. 저기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은 레이디는 어떤가?”
 “흠, 웃는 모습이 상당히 깜찍하군.”
 “몸매도 착해 보이는군.”
 “오늘 밤 나의 작업 대상은 이 레이디로 하겠네.”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으니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려울 것 같군.”
 유탄은 평소 어울리던 다른 3명의 고위귀족가 자제들과 열심히 수정구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아돌프 집사와 한 약속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표정은 작업을 위해 눈을 번들거리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시무룩한 상태였다.
 “유탄,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게 되었네.”
 “아니, 지금처럼 풍요로운 황금시대에 무슨 검술을 수련한다는 말인가?”
 120년 전의 전쟁의 승리는 레스본 왕국과 대륙에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당시 왕국을 괴롭혔던 남부의 헤르만 제국은 전쟁에서 패전하고 6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4개의 민족과 3개의 종교로 복잡하게 분열된 제국은 갈라진 후에도 계속 반목을 했다. 때문에 레스본 왕국을 위협할 만한 주변 국가는 전무한 상태였다. 나아가 레스본 왕국의 서쪽에 자리한 대륙 중부의 포르투 왕국은 레스본 왕국과 피를 같이 한 우방이었다. 레스본 왕국은 1백여 년 전 북부의 야만족이 포르투 왕국을 침입할 때 구원군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그 후로 레스본 왕국과 포르투 왕국은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게. 검술보다는 차라리 마법을 배우게.”
 “암! 평시에도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한 마법이 그나마 좋을 것 같네.”
 “훌륭한 기사와 마법사를 두면 될 일을 고위귀족이 직접 하다니 당치않네.”
 “하긴, 마법도 뛰어난 위력의 공격마법이 많이 유실되어 과거만 못하니,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인가도 모르겠네.”
 호전적인 헤르만 제국의 몰락은 대륙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오랜 평화는 검술과 마법의 퇴보를 가져왔다. 특히 잠정적인 적대국마저 사라진 레스본 왕국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적이라고 해봐야 몬스터나 변방의 소규모 해적, 또는 북부의 떠돌이 야만족이 고작이었다. 그 때문에 고위귀족들은 검술과 마법 대신 신학과 예술에 심취했다.
 “휴, 그게 여의치 않네.”
 “하긴 자네 가문은 뛰어난 무장의 가문이니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겠네.”
 “자네가 가문의 비전검법을 계승해야 가주가 되지 않겠는가?”
 “나는 가주 자리에 욕심이 없네. 자네들과 이렇게 즐길 수만 있다면 가주 자리는 형님에게 양보하겠네.”
 “언젠가는 테인 님도 자네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네.”
 아이버크 가문의 특별한 가주 승계방식은 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유탄이 형님과의 불편해진 관계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미안하군.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군.”
 “하하. 지금부터는 모든 것을 잊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세.”
 “고맙네, 이 자리는 내가 쏘겠네.”
 “유탄, 자네가 이 자리를 해결한다니 2차는 내가 책임지겠네.”
 다들 왕국에서 한자리씩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라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잠시 어두워졌던 분위기는 금세 바뀌고 술과 음식이 빠르게 세팅되기 시작했다. 수도의 사람들은 이들을 ‘코린티아의 화류 4공자’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들 4공자가 단순히 화류를 즐기기 위해 모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평생우정을 약속한 친구들이었다. 지금의 방탕한 생활도 유탄을 위해 기꺼이 같이 따라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봐! 저길 보게.”
 “아니, 세상에!”
 해리슨 공작가의 후계자로 내정된 리버스의 놀란 음성에 일행은 영상수정구를 바라봤다. 8개의 수정구 중 가장 오른쪽 밑에 있는 수정구에 한 개의 좌석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4명의 레이디가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오! 저렇게 아름다운 레이디가 코린티아시에 있었다니.”
 “정말 죽이는군.”
 “4명 모두 아름답지만 중앙에 있는 은발의 레이디가 가장 착한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군.”
 “오늘 나는 저 은발의 레이디에게 올인 하겠네.”
 “미안하네. 저 레이디는 내가 가장 먼저 찍었네.”
 “친구, 오늘 술은 내가 사기로 했는데 내게 양보를 하면 안 되겠는가?”
 “저만한 레이디를 겨우 술 한 잔에 가져가려 하다니 자네답지 않군.”
 VIP룸에서 자신을 놓고 흥정이 벌어진 줄도 모르는 4명의 레이디는 시끄러운 음악을 피해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 여기가 요즘 코린티아에서 가장 물이 좋다는 곳입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는 잘 모르겠는데.”
 “공주님도 조금 이따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런데 자주 와봤어?”
 “자주는 못 오지만 가급적 기회가 생기면 오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동안 공주님 몰래 저희들끼리 다니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래요. 앞으로는 공주님도 저희들이랑 같이 다녀요.”
 “글쎄, 많은 경호 기사와 시녀장 때문에 개인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몰라.”
 “에이, 설마 유학까지 오셔서 공부만 하시다 갈 생각이세요?”
 “신전학원의 기숙사 규율이 엄격한 것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잖니.”
 4명의 레이디는 얼마 전 유학을 온 크메르 왕국의 레이첼 공주와 그녀를 담당하는 시녀들이었다. 헤르만 제국이 분열되어 생긴 6개의 왕국 중 크메르 왕국과 키르스탄 왕국은 레스본 왕국과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왕국도 헤르만 제국의 재건을 은연중에 두려워했기에 두 왕국에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레이첼 공주는 신학공부를 위해 두 달 전 이곳 코린티아로 왔었다. 때문에 유탄을 비롯한 그 누구도 레이첼 공주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귀청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현란한 조명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공주였다. 그녀는 포세이돈의 종업원이 자신을 보며 말을 걸자 무슨 일이냐고 반문을 했다.
 “부킹 신청이 들어왔는데 잠시 자리를 같이 하겠습니까?”
 “부킹이 뭐지?”
 “어머! 어디서요?”
 “상대가 누구예요?”
 부킹이라는 말을 모르는 공주가 반문하는 동안, 시녀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재빨리 물어댔다. 하얀 드레스셔츠에 붉은색의 나비넥타이를 멘 종업원은 레이디들 모르게 손가락으로 OK사인을 해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영상수정구를 통해 룸에도 보였다.
 “오! 얘기가 잘 되었군.”
 “악단을 부를 준비도 해야겠군.”
 “다들 전투 준비에 들어가게.”
 유탄 일행이 작업을 위한 마지막 점검을 하는 동안, 공주 일행은 종업원을 따라오고 있었다. 공주는 딱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경험 삼아 한번 가보자는 시녀들의 말에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대신 가서 마음에 안 들거나 무례하게 굴면 바로 나오자는 다짐을 받아놓았다.
 
 *****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영상수정구를 통해 4명의 레이디가 룸으로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유탄과 그 일행은 그 짧은 순간에 머리와 옷을 매만지며 마지막 점검을 끝냈다.
 “무슨 일이요?”
 짜고 치는 포커나 다름없었다. 종업원은 자연스럽게 룸의 문을 열고 4명의 레이디를 밀어 넣었다. 순간 당황한 레이첼은 자신을 밀고 들어오는 시녀들에 밀려 룸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레이디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아름다우신분들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종업원은 레이디들 몰래 한쪽 눈을 찡긋했다. 특별한 보너스를 달라는 뜻이었다. 리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디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척하며 종업원의 손에 은밀히 1골드짜리 동전을 건넸다. 워낙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레이첼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수많은 실전경험으로 자연스럽게 터득한 그들만의 노하우였다.
 “제 잔을 한 잔 받으시지요.”
 “술을 잘 못 마시니 조금만 주세요.”
 “향기만 진할 뿐, 그다지 독하지 않은 술입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한 작전을 세운 유탄 일행 앞에 앉은 레이첼과 시녀들은 순진한 양에 불과했다. 좌석은 어느덧 1남1녀가 나란히 하는 자리가 되었다. 유탄의 옆에는 유일하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레이첼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에요.”
 공주는 고개를 들어 룸 안에 있는 남자들을 쳐다봤다. 입고 있는 복장으로 보아 명문귀족가의 자제들 같았다. 처음 들어와 보는 VIP룸의 화려한 실내 인테리어와 남자들을 찬찬히 살피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예, 주세요.”
 원래는 술을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 왠지 거절하고픈 마음이 사라졌다. 유탄은 레이디의 자리 앞에 세팅된 작은 유리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40년을 숙성시킨 몰트의 진한 향이 피어오르며 코끝을 간질였다.
 “제 이름은 유탄 아이버크라고 합니다.”
 “아이버크? 아! 아이버크 후작가문…….”
 “그렇습니다.”
 비록 120년 전 레만 아이버크 후작의 전사로 가문의 비전검법을 유실하기는 했지만 아이버크 가문의 명성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레스본 왕국의 개국공신으로, 나아가 왕국을 대륙 제일로 성장시킨 가문이 바로 아이버크가였다. 그들의 가문에서 배출된 당대 대륙 최고의 기사는 레스본 왕국민에게는 영웅이요, 희망이었고 상대국에는 죽음의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레이첼 필립스라고 해요.”
 “아! 필립스 가문이시군요.”
 레이첼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때문에 왕가의 상징인 미들네임, ‘필’에 아무렇게나 갖다 붙여 ‘필립스’라는, 처음 듣는 가문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반면 시녀들은 그간 많은 경험이 있었는지 그럴싸한 이름을 대고 있었다. 공주는 그들이 사용한 성이 크메르 왕국의 중소귀족 가문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아! 그렇다면 크메르 왕국에서 관광을 오신 것입니까?”
 “그렇지요.”
 “지금 어느 호텔에 묵고 계시나요?”
 “인근 지방에 잘 알고 있는 가문이 있어, 그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리버스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벌써 호구조사를 어느 정도 끝마친 상태였다. 몇 차례의 경험이 있는 시녀들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완벽한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었기에 그녀들 역시 각자의 옆에 앉은 남자들의 물음에 척척 대답 중이었다. 공주는 놀라면서도 그녀들이 만든 시나리오에 자신도 편입시켰다.
 “레이첼 양도 크메르 왕국에서 오셨습니까?”
 “맞아요. 넷 모두 크메르 왕국에서 왔어요.”
 “그럼 우리 왕국의 수도 코린티아시는 잘 모르시겠네요?”
 “그렇지요. 거의 다녀본 적이 없답니다.”
 “그렇다면 제게 안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애프터신청이었다. 공주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주시했다. 시원한 눈썹과 우뚝 선 콧날에 반듯한 입술,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턱 선까지. 미남의 조건은 두루 갖춘 사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만이 갖고 태어난다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신비하게까지 보였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사내였다.
 “그리 해주신다면 제가 고맙지요.”
 “그런 영광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때 룸 손님들만을 위해 준비된 소형악단이 들어왔다. 4인조로 구성된 그들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성 확대 마법이 걸려 웅웅거리는 외부 스테이지와는 달리 그들의 연주는 듣기에 좋을 정도의 음량만 내고 있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좋아요.”
 4쌍의 남녀는 자연스럽게 룸 한쪽에 마련된 스테이지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레이첼 공주는 마치 작은 파티에 참가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들었다. 사실 이런 VIP룸은 아직 정식 작위가 없어 잦은 파티를 하지 못하는 귀족가의 자제들을 타깃으로 삼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즐기고 싶고 놀고 싶어 하는 젊은이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한 이곳 포세이돈 사장의 귀족 마케팅의 모든 것이 결집된 곳이 바로 이 VIP룸이었다.
 “춤을 잘 추시는군요.”
 “저희 왕국에 있을 때 파티에 제법 가봤답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유탄의 리드에 레이첼은 잘 호응을 하며 따라왔다. 사실 명문귀족가의 레이디라 해도 타고난 몸치는 부지기수였다. 반면 레이첼의 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우아했다. 힘 있고 화려한 유탄의 리드에 적절히 녹아들어간 그녀의 율동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와! 대단한걸.”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다.”
 “어머! 최고예요.”
 “세상에, 너무 멋져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는지 악단은 몇 곡의 가벼운 무곡을 연주하다가 이내 ‘촬라’라는 끈끈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통상 파티의 최고조에 연주하는 촬라는 남녀 간의 잦은 신체접촉과 밀착을 기본으로 하는 무곡이었다. 때문에 여느 파티에서는 보통 서로의 파트너가 결정되어가는 마지막 시점에 연주되는 곡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파티장이 아니라 특정한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왕국 제일의 멤버십 클럽이었다.
 “계속 가시죠.”
 “좋아요.”
 이미 다른 3쌍은 촬라 음악에 맞춰 서로의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공주는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깨지면 안 된다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하고는 음악에 몸을 실었다.
 “아아!”
 “오!”
 간혹 부비부비하는 과정에서 신체접촉이 일어나면 묘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조명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어두워져 바로 옆 파트너의 얼굴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흡.”
 쪽.
 누가 키스를 하는지 모르지만 분명 뭔가를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그 소리가 순간적으로 서로의 열망을 자극했다. 공주는 지금의 분위기가 어색하지만 눈앞의 유탄이라는 사내가 싫지 않았다.
 “하아!”
 순간적으로 유탄의 두 팔이 그녀의 가슴을 살짝 건드렸다. 부비부비를 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주는 낮은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유탄의 탄탄한 가슴을 두 손으로 훑어 내렸다.
 “그대가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아! 어떻게……?”
 어둠 속에서 유탄의 얼굴이 레이첼 공주의 목에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첼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다음을 기다렸다. 주위의 조명이 어두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지만 유탄은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대의 신분이 설령 공주라고 해도 나는 그대를 포기하지 않겠소.”
 “아아.”
 계속되는 유탄의 말에 레이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유탄의 말은 일종의 고백이었다. 그녀는 유탄이 남다른 눈썰미와 자신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품과 교양으로 자신의 정체를 추정했다고 생각했다.
 “레이첼!”
 “유탄 님!”
 둘의 입술이 포개지면서 몸도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 유탄의 친구들은 그가 마침내 작업에 성공했다고 여겼다. 또한 시녀들은 자신이 유탄의 품에 안기지 못한 사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도 넘어갔군.’
 ‘하여간 유탄은 대단해.’
 ‘역시 수도 제일의 화류공자야.’
 ‘아! 부럽다.’
 ‘내가 저분의 품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사실 유탄은 레이첼의 신분을 몰랐다. 다만 그녀가 하고 있는 복장과 액세서리를 봤을 때 고위귀족가의 여식이라는 확신은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기로 크메르 왕국의 고위귀족에 필립스라는 가문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 레이첼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을 위한 정석에 가까운 작업 멘트를 날렸던 것이다.
 
 *****
 
 똑똑!
 “무슨 일이요?”
 누군가가 갑작스런 노크소리에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대꾸를 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들어오는 외부인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노크소리의 주인공은 클럽의 종업원이었다. 그는 아직 룸에 들어오지 않고 큰소리로 상황을 알렸다. 룸 안의 손님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였다. 간혹 경험이 없거나 머리 회전이 떨어지는 종업원은 성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종업원은 밖에서 얼마간 기다린 뒤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로 그러는 것인가?”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다급한 일이 벌어졌기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보라.”
 “유탄 님의 가문에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 가문에?”
 유탄은 한 손으로는 레이첼의 손을 꽉 쥐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있었다. 탄력 있는 레이첼의 허벅지를 도화지삼아 그림 그리듯 손을 놀리면서 머릿속으로 다음 코스(?)를 생각하고 있던 유탄은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지금 아이버크가에서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도 거기까지는 잘…… 다만 매우 다급한 것 같았습니다.”
 “흠, 알겠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가문에서 자신의 포세이돈 출입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돌프 집사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한 달을 마음껏 즐기라며 더 많은 돈까지 집어주었다. 그런 그가 억지로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부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분명 가문에 일이 생겼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일은 없지만 일단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레이첼, 아무래도 가봐야겠소.”
 “유탄 님.”
 “하늘이 우리 둘을 시기하는 것 같소.”
 “아!”
 “하지만 그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겠소.”
 마지막까지 작업용 멘트를 날린 후 유탄은 룸을 빠져 나갔다. 이미 다 잡은 대어를 놓아준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차피 자신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자신의 친구와 관계가 있는 이상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클럽의 입구에 있는 대기석에는 잘 알고 있는 가문의 시종이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룸에서 나오는 유탄의 모습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이 쉬지 않고 이 일대를 누비며 자신을 찾아다닌 것 같았다.
 “후작님께서…….”
 “아버지가 왜?”
 “공자님, 흑…….”
 “도대체 무슨 일이냐?”
 시종의 표정과 갑작스러운 울음으로 보아 뭔가 아주 큰일이 일어난 듯싶었다. 유탄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발아래에서 오열하는 시종의 어깨를 잡고 무슨 일인지 되물었다.
 “후작님께서 조금 전 숨을 거두셨습니다.”
 “뭐라, 아버지께서?”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았다. 서두르자꾸나.”
 이제 겨우 50을 넘은 자신의 아버지는 아직도 젊은이다운 체력과 정력을 자랑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고 8년 전 새롭게 얻은 젊은 아내와 알콩달콩 살아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에 다급히 클럽을 빠져나간 유탄은 시종이 끌고 온 마차를 직접 몰고 저택으로 향했다.
 “작은 공자님이시다. 어서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이럇!”
 저택의 입구에 설치된 대형철문이 재빨리 열렸다. 이미 가문의 모든 이는 후작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탄은 마차를 멈추지 않고 계속 몰았다.
 “아버지, 이렇게 돌아가실 수는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는 벽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벽은 가문에 내려온 비극과 연관이 있었다. 전대 가주였던 자신의 할아버지는 재능이 없는 당신의 아들에게 실망을 하고 분노를 했었다. 그리고 그 실망과 분노는 둘째손자였던 유탄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바뀌었다. 한 번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어보지 못한 유탄의 아버지는 평생 한을 품고 살았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의 설움이자 울분이었다.
 “작은 공자님.”
 “후작님은 2층의 침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저택에 들어선 유탄을 향해 하인들이 다가와 빈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돌프 집사는 후작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검은색 상복을 차려입은 하인들의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났다. 유탄은 슬퍼하는 하인들의 모습을 보며 멍하니 그들이 건네준 검은색 상복을 받았다.
 ‘아버지, 최소한 제게는 한 말씀 하고 가셨어야지요.’
 할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와 칭찬은 부족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질타로 항상 끝을 맺었다. 어린 자식 앞에서 항상 비교당하며 수모를 당한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멀리했었다. 그리고 당신처럼 재능이 떨어진 큰아들을 편애했다. 할아버지가 마나의 역류로 최후를 맞이할 때도 그 옆에는 아버지가 아닌 유탄이 자리했다. 마나심법에 대한 최후의 심득을 전해받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유탄을 아들이 아닌 경쟁자로 여기는 것 같았다. 유탄은 자신이 마나심법의 부활을 성공시켰을 때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그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마지막까지 경쟁에 뒤진 자신의 무능을 한탄했었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진정한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가 아니라며 자신을 질타했던 아버지였다.
 “도련님, 2층으로 올라가 보십시오.”
 “알았다.”
 저벅저벅.
 검은색 상복으로 갈아입은 유탄은 아버지의 빈소가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새어머니와 형, 그리고 어린 이복동생은 빈소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꼭 그리 하셔야 합니다.”
 “유탄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까?”
 빈소 안에서는 새어머니와 형 테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탄은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대성하면서 비약적으로 상승한 그의 감각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님과 제가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일 안 믿으면?”
 “어머니는 유탄이 우리를 예전처럼 대해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나는 무서운걸.”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하면 제 놈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빈소의 문을 열려고 했던 유탄은 멈칫하고 말았다. 지금 형과 새어머니가 나누는 대화가 자신과 관계된 말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자신 모르게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형…….’
 유탄은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비록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하나 피를 나눈 형제였다. 단 한 번도 자신의 형과 다른 가족을 내칠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완벽하게 부활시켰음을 아버지 외의 그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었다. 이는 형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주기 위한 유탄의 배려였다.
 
 *****
 
 “아! 어쩌면 좋지?”
 “어머니,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어린 동생의 장래를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나중에라도 유탄이 이 사실을 안다면 가만 안 있을 텐데.”
 “만일 유탄이 알고 문제를 일으키면 그때는 죽이면 될 일입니다.”
 “헉……!”
 “저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숨죽이고 못 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주의 자리는 반드시 제가 계승할 것입니다.”
 “아!”
 “어서 결정을 내리십시오. 저와 손잡고 안락한 노후를 보장 받으시든지, 아니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어린 동생과 비참한 삶을 영위하시든지요.”
 “내게 영지의 절반을 준다는 말이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대신 어머니께서는 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새어머니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유탄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형! 그렇게 내가 미웠던 거야? 죽이고 싶을 만큼?’
 새어머니의 가문은 지방의 하위귀족이었다. 그녀는 스무 살 차이라는 큰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아이버크 후작가문의 명예와 부를 바라고 혼인을 했다. 그리고는 아낌없는 사치로 아돌프 집사를 당황케 만들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사치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테인의 협박에 흔들리고 있었다.
 “좋아, 나도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린 하워드도 훗날 어머니의 결정에 감사할 것입니다.”
 “테인, 내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지?”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로서 제 말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호호호! 가주의 약속이니 믿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둘은 밖에서 유탄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 앞에는 숨을 거둔 후작의 시신이 아직 관 뚜껑도 덮이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유탄은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 모른 척하자. 그 길만이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탄은 형과 계모의 계책에 속아주기로 했다. 자신만 가슴에 묻고 넘어가면 최소한 가족의 틀은 지켜질 것 같았다. 안에 있는 형과 계모가 놀라지 않도록 잠시 뜸을 들인 유탄은 크게 아버지를 부르며 빈소로 들어갔다.
 “아버지.”
 “이놈,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다니다 이제야 나타난 거냐?”
 “아이고, 여보. 둘째아들이 돌아왔어요.”
 유탄은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크게 부릅떠서 튀어나올 것 같은 눈, 고통을 참지 못해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움켜쥔 손, 마나의 역류로 내장이 타면서 같이 타들어 간 목젖.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죽어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버지, 제 도움을 받는 것이 그리 힘드셨습니까?’
 유탄은 아버지의 시신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대 가주였던 할아버지의 죽음처럼 아버지도 마나심법을 연구하다 마나가 역류하며 돌아가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모른 척 올려놓은 마나심법 수련법을 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마나심법을 부활할 생각에 자신이 준 자료를 참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이여, 이번에는 아버지까지 빼앗아 가셔야 했습니까?’
 유탄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모든 비밀을 풀어버린 그였다. 유탄도 처음에는 자신이 마나심법을 완벽히 부활시킨 것을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형과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얘기를 하지 못하고 숨기는 동안 5년의 세월이 흘렀고, 할아버지가 죽었다. 당시 할아버지의 시신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는 유탄의 심정은 아무도 몰랐다.
 “크흐흐흑, 아버지.”
 유탄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혼자의 힘으로 마나심법을 부활하고 싶어 했던 것은 유탄도 알고 있었다. 그 길만이 자신을 철저히 조롱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올 봄에 자신이 마나심법을 부활했음을 알리자 더욱 초조해하며 수련에 매달린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 어머니와 내게 유언을 남기셨다.”
 “그래. 아버지는 가주의 자리를 테인에게 넘기라고 하셨다.”
 테인과 계모가 서로 눈을 빛냈다. 조심히 말을 꺼내는 계모의 입술은 거짓말을 한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연신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잘 되었네. 아버지도 평소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
 유탄은 형과 계모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쉽게 수긍했다. 나아가 두 사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형인 테인을 끔찍이 챙긴 것은 가주 자리를 물려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부탁? 무슨 부탁?”
 “가문의 성지를 네가 관리하면서 유실된 가문의 비전검법을 찾으라고 하셨다.”
 “그 얘기는 네 아버지가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내게도 하신 말씀이었어.”
 “아버지는 한계에 부딪힌 마나심법의 연구보다는 유실된 검법의 계승이 가문의 영광을 재현할 방법이라고 생각하셨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이는 자기가 죽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였어. 아! 여보.”
 “어머니.”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는 유탄이 가문의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완벽히 부활시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버크 가문의 창시자인 햄머 아이버크 후작이 말년에 은거했다고 알려진 동부해변의 성지는 아무것도 없는 그저 왕국의 버려진 땅에 불과했다. 지금 형과 계모는 자신을 가문에서 축출하기 위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탄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탄이 알고도 속아주는 줄 모르는 계모는 거짓 울음을 계속했고, 테인은 그런 계모를 달래주는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형.”
 “왜?”
 “아버지의 장례는 치르고 떠날게.”
 “으응…….”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순순히 수긍을 해서 그런지 테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어머니.”
 “왜 그러니?”
 “가문과 형님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말아라.”
 “아버님을 갑자기 잃고 힘드실 텐데, 어려운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다.”
 
 유탄의 아버지, 해먼 아이버크 후작의 장례식은 7일간 계속되었다. 수도의 많은 이들은 비명에 죽은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를 위해 진정 어린 추모와 묵념을 해주었다. 아이버크 가문의 계속되는 비극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아이버크 가문이 유실된 힘을 살리기 위해 뭔가 비밀수련을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고 생각했다. 왕실에서는 거듭되는 아이버크 가문의 비극에 조의를 표했다. 국왕은 염려의 뜻이 담긴 특별한 메시지까지 보내왔다. 아이버크 가문의 힘을 복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해먼 후작은 가문의 율법에 따라 수도 동쪽의 가문묘지에 안장되었다.
 “공자님, 진정 떠나시는 것입니까?”
 “집사, 제발 모른척해 줘.”
 “공자님은 마나심법을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성까지 하신 분입니다.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선포만 하신다면 가주 자리를 승계하실 수 있습니다.”
 “아돌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하지만 1백 년 넘게 이어온 가문의 전통입니다. 돌아가신 웨슬리 후작님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닥쳐라, 아돌프! 정녕 그대가 우리 가족을 해체하겠다고 하면 내가 용서치 않겠다.”
 유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아돌프도 순간 흠칫했다. 이미 테인과 후작부인이 거짓 유언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눈앞의 유탄을 보고 차마 자신의 주장을 계속 고집할 수는 없었다. 아돌프도 유탄이 무엇 때문에 거짓 유언을 그대로 따르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유탄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마침내 졌다는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검술 수련은 계속하셔야 합니다.”
 “설마 동부의 시골해변으로 검술 선생을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유탄은 아돌프 집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가문에서 유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는 아돌프가 유일했다. 그는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유탄을 마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양보하지만 검술 수련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유탄은 무엇 때문에 그가 이토록 검술을 배울 것을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난 가주가 아니잖아.”
 “그럼 지금이라도 마나심법을 완벽히 부활시킨 사실을 알릴까요?”
 “도대체 집사는 무엇 때문에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는 겨우 형식적인 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그 시골구석에서 검술 수련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미쳐버리겠군.”
 “조부님께서는 입버릇처럼 공자님에 의해 아이버크 가문의 힘이 완벽히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어. 대신 내가 마나심법을 부활했음을 두 번 다시 언급하지 마라.”
 “공자님께서 검술 수련만 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비밀을 지키는 조건으로 유탄은 검술 수련을 하기로 승낙을 했다. 하지만 이제 가주도 아닌 자신에게 그토록 검술 수련을 강요하는 아돌프의 속셈은 끝까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가족이다. 내가 없더라도 형과 어머니를 부탁하겠다.”
 “걱정 마십시오.”
 유탄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말에 올라탔다. 햄머 상단의 지분은 50%가 아돌프의 소유였다. 지금이라도 그가 아이버크 가문에서 손을 뗀다면 햄머 상단은 최고 상단의 지위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얼마 못 가 햄머 상단 자체가 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었다. 그 말은 자신의 형과 계모가 이전 같은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유탄을 그것을 걱정했지만 걱정 말라는 아돌프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떠났다
 
 
 2장 베베토 해안지방
 
 수도 코린티아시의 동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포카서스산에서 뒤를 돌아보는 사내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의 사내는 다름 아닌 유탄이었다.
 ‘아! 수도의 많은 레이디여, 안녕! 꺼질 줄 모르던 수도의 요정과 클럽들이여, 이제는 안녕!’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산을 넘는 유탄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사실 가주 자리는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만 수도를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수도의 화려한 밤은 자신과 딱 맞았다. 자신의 간택(?)을 간절히 바라는 여인들의 반짝이는 시선을 마주할 때면 희열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가문의 일은 잊을 수 있었다. 도도하게 굴던 여인을 정복할 때면 마나를 수련할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유탄은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화류계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형과 새어머니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거짓 유언을 만들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자신을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일 수 있었다.
 ‘아버지, 편히 쉬십시오. 탕아 생활도 이젠 끝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탕아생활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더욱 멀어지는 아버지와 형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시작한 탕아생활이었다. 자신이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수록 그들 두 사람은 자신을 멀리 했다.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가주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탕아생활이었다. 마지막으로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것을 끝으로, 유탄은 몸을 돌려 산을 다시 넘기 시작했다.
 “작은 공자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이냐?”
 유탄에게 말을 거는 사내는 그의 하인으로 새로 배정된 다이얼이었다. 나이는 유탄보다 열 살 많은 서른으로, 조금 왜소한 체격에 머리가 살짝 벗겨진 자였다. 햄머 상단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그는 붙임성이 좋고 농담도 잘 하며 성격도 서글서글했다. 하인보다는 말벗으로 제격인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예리한 모습은 그가 의외로 머리 회전도 빠르고 겉보기와는 다르게 치밀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유탄은 아돌프가 다이얼을 자신에게 붙여줄 때부터 그가 단순한 하인의 역할만이 아니라 감시자의 역할도 할 것이라고 예감했었다.
 “아돌프 집사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시는 것이 공자님의 검술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련하겠냐.”
 아돌프의 생각은 뻔했다. 가문의 성지는 궁벽한 시골의 해안마을에 인접한 곳이었다. 때문에 수도와 달리 유흥시설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곳이라면 유탄이 할 일이 없어서라도 검술 수련에 매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가자.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무슨 수가 있겠지.”
 “공자님, 설마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가서 집사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할 생각이냐?”
 “공자님, 가문의 오랜 숙원이 걸린 일입니다.”
 “됐다. 그 얘기라면 이제 신물이 난다.”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가문의 숙원을 푸는 과정에 돌아가셨다. 후손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120년 전 일어난 일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유탄은 억울했다. 더구나 지금은 오랜 평화로 신학이나 예술이 더욱 대접을 받는 시기였다.
 “서둘러라!”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넘는다.”
 그래도 명색이 후작가의 차남인지라 테인과 계모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유탄만 달랑 보내지는 못하고 50명의 병사와 2명의 기사를 배정해주었다.
 “도련님, 가문의 성지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글쎄, 가문의 역사서에서 본 것이 전부다.”
 “제가 그럴 줄 알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뭘 준비했다는 것이냐?”
 “먼저 이것을 보십시오.”
 “이게 뭣이냐?”
 “보시면 압니다.”
 다이얼이 건네준 것은 가문의 성지가 자리한 베베토 해안지방에 대한 보고서였다. 사실 유탄도 가문의 성지가 베베토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 알지,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보고서에 눈을 돌린 유탄은 보고서를 읽다가 실망만 하고 말았다. 땅의 크기는 어지간한 중간 규모의 영지와 비슷하지만 그야말로 개발이 안 된 오지 중의 오지였기 때문이다.
 “그럼 거기는 근처에 영주성도 없는 완벽한 깡촌이 아니냐?”
 “그렇지요. 왕국에서 햄머 아이버크 님에게 내주고 신경을 쓰지 않는 지역입니다.”
 왕국의 건국왕이었던 사자왕 레스본은 자신의 대업을 도와준 햄머 아이버크가 떠나가자 그 지역을 햄머 아이이버크의 소유라고 선언해버렸다. 물론 수도에 남아 있던 그의 아들이 차지한 지금의 영지도 그대로 인정을 해줬다. 하지만 햄머 아이버크의 소유라고 했기에 베베토는 그 이후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버크 가문도 햄머 아이버크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확실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도 베베토 해안지방은 확실한 영주가 없는, 국유지도 아니고 영지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다.
 “갈수록 가관이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안지방의 북쪽 끝은 대초원지역과 연결되어 있구나.”
 “북동부해안이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초원지역에는 여러 야만민족이 산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레스본 왕국을 비롯한 대륙에서 쫓겨난 몬스터들의 천국이었다. 때문에 대 왕국을 몇 개나 만들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초원은 계속 야만족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과거 포르투 왕국을 침범한 야만족을 완전 소탕하지 못한 이유도 그들이 몬스터의 천국이라는 대초원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야만족의 침입을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공자님께서 가문의 검법만 계승한다면야 그들 야만족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앓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
 “공자님 말씀대로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무슨 수가 있겠지요.”
 “햄머 아이버크 님은 은거하시려면 수도 근처에서나 하시지, 하필 자리를 잡아도 그런 곳에 자리를 잡아서 나까지 고생시키는구나.”
 “그때야 거기도 왕국의 다른 지역과 별 차이 없었겠죠.”
 “그런데 섬이 많은가 보구나.”
 “네. 오죽 섬이 많으면 지명도 섬으로 간다는 뜻의 베베토겠습니까?”
 “에고고, 머리가 아프구나. 좀 쉬어야겠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다. 차라리 베베토 해안지방의 실상을 몰랐으면 최소한 가는 동안이라도 마음고생은 안 했을 것 같았다. 괜히 보고서를 보는 바람에 유탄의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아무리 변방의 해안지방이라지만 그 정도로 낙후된 지역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유탄은 심란한 마음에 마차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다이얼은 유탄이 자리를 깔고 눕자 한쪽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었다.
 
 *****
 
 수도를 떠난 지 20여 일 만에 유탄 일행은 베베토 해안지방에 도착했다. 왕국으로부터 버려진 이 지역은 포구를 따라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된, 전형적인 해안지방이었다. 마을은 촌장이라 칭해지는 대표자를 뽑아 자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50명의 병사와 기사를 보고 불안해하면서도 신기해하며 다가왔다.
 “저,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테인 아이버크 후작님의 동생께서 가문의 성지를 찾아왔다.”
 가주의 자리를 계승한 테인은 자연스럽게 후작의 작위까지 물려받았다. 아울러 동생인 유탄에게는 후작이 내릴 수 있는 최고위 작위인 남작의 작위를 주었다. 이는 유탄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주 자리를 탄탄히 하고 지금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계산에서였다.
 “아이버크…… 후작님이요?”
 “그렇다. 앞으로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니 거처를 마련하라.”
 “지금은 쓸 만한 빈 집이 없는데…….”
 “네 이놈! 감히 아이버크 후작가를 어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마을사람들의 궁금증을 대표해서 찾아온 반노의 촌장은 기사의 호통에 흠칫 놀랐다. 평생을 이곳에 살면서 귀족들의 전횡이나 횡포는 겪어보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이웃영지를 드나들면서 귀족들이 어떻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지금 유탄 아이버크 남작님께서는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한 상태다. 서둘러라.”
 “아, 알겠습니다.”
 유탄은 한여름의 바다 내음과 햇살에 이끌려 마차를 나왔다. 한동안 마차 안에만 있었더니 몸이 근질거린 것도 이유였다.
 “정말 깡촌이군.”
 “뭐, 해안가 마을이 다 그렇지요.”
 유탄을 따라 마차에서 내린 다이얼이 바짝 따라붙어 섰다. 잠시 기지개를 켜며 바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유탄은 눈앞에 펼쳐진 마을들을 바라봤다. 다른 지역에 비해 지붕이 낮고 작은 집들은 처음 보는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집집마다 돌로 담을 높이 쌓았고 지붕에도 돌을 올려놓았다는 점이었다.
 “바람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지요.”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지만 다이얼이 어느새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유탄은 마을을 향해 서둘러 가는 반노의 늙은이를 발견했다. 거친 바닷바람과 강렬한 햇살 때문에 노인의 피부는 구릿빛에 가까운 검은 얼굴이었고, 주름이 많았다.
 “이보게, 영감.”
 “예! 나리.”
 촌장은 유탄이 마차에서 나온 점과 복장으로 봐서 그가 귀족일 거라 생각하고 굽실거렸다. 행여 자신이 조금 전에 주제넘게 말대꾸를 한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처신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마을은 어디냐?”
 “이 일대에서는 우리 히멘 포구가 가장 큽니다.”
 “아니, 가장 큰 포구를 말하는 게 아니고, 가장 번성한 곳이 어디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히멘 포구가 가장 큽니다.”
 “이런 답답한 영감을 봤나.”
 촌장은 눈앞의 젊은 귀족이 화를 내자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은 분명 있는 사실대로 말했건만 눈앞의 귀족이 화를 내자 조금 전의 일 때문에 그러는가 싶었다.
 “나리, 늙고 비천한 것이 경우에 어두워 그랬으니 용서해주십시오.”
 별일도 아닌데 촌장이 무릎을 꿇고 두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두 손을 싹싹 빌자 어이가 없어지는 것은 유탄이었다. 아마 자신의 말을 오해해서 그런다고 생각한 유탄은 이번에 웃음 띤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가장 번성한 마을이 어디인가? 이를테면 상점이 몰려 있는 마을은 없느냐?”
 “히멘 포구가 가장 크고 상점도 두 곳이나 됩니다.”
 대답을 하는 촌노의 음성은 처음과는 달리 작아져 있었다. 하지만 유탄은 이제야 촌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주성도 없고 도시도 없는 이곳은 말 그대로 자연부락만 존재하는 깡촌 중의 깡촌인 것이다. 설마 설마 했는데, 실낱같던 마지막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처음 보는 병사와 기사가 나타났다는 말에 급히 소집된 마을의 치안대가 달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며 작살부터 괭이에 쇠스랑 같은 농기구가 들려 있었다.
 “엥! 저것들은 또 뭐야?”
 “그러게 말입니다. 보아하니 병사들은 아닌 것 같은데.”
 “마을의 치안대입니다.”
 늙은 촌장은 행여나 병사들이 치안대를 공격할까봐 그들의 정체를 알렸다. 사실 기사들은 갑작스런 치안대의 출현에 병사들에게 무기를 겨누고 전투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촌장의 말에 병사들이 잠시 주춤하는 동안 그는 달려오는 치안대 앞으로 나갔다.
 “괜찮습니까? 촌장님.”
 “인사들 올리게. 수도에서 오신 귀족님이시네.”
 “네, 귀족이라고요?”
 “귀족이 이런 곳에 무슨 일로?”
 단 한 번도 귀족이 찾아온 적이 없었다. 달려온 10여 명의 청년들은 포구에서 어구를 손질하다가 촌장이 낯선 병사들에게 갔다는 말을 듣고 무조건 달려온 것이었다.
 “이놈들. 감히 아이버크 가문의 유탄 남작님을 뵙고도 예를 올리지 않다니.”
 “하나같이 예의를 모르는 무례한 놈들이구나.”
 “병사들은 뭐 하느냐? 저들을 당장 포박해라!”
 유탄을 수행하고 따라온 기사들은 초반에 확실히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공격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자신들이 편히 살려면 귀족의 권위를 내세워 이들을 벌해야 했다.
 “아이고, 나리! 무지렁이들이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해주십시오.”
 당황하는 마을의 청년보다 촌장의 행동이 더 빨랐다. 촌장은 그 자리에 무릎을 털썩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그는 오랜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용서를 빌고 자비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들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무기를 앞세우고 막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멈춰라!”
 “남작님.”
 “앨버트 경, 병사들을 물려라.”
 “남작님, 이들은 남작님을 뵙고도 무례를 저지른 자들입니다.”
 2명의 기사 중 앨버트가 선임자였다. 때문에 유탄은 그를 향해 병사들을 물리라 했다. 유탄이 백성을 사랑하거나 자비심이 많은 귀족이어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별일도 아닌 일로 피를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깡촌에 치안대가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특히 해변을 향하는 마을의 초입에 성벽처럼 쌓아놓은 방벽이 평화로운 마을의 전경과 어울리지 않아 더욱 그랬다.
 “앨버트 경의 마음은 알지만 저 노인의 말대로 무지렁이들이 모르고 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이놈들! 유탄 남작님의 자비에 감사드려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영감.”
 “예, 나리.”
 촌장은 더욱 허리를 굽실거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눈앞의 젊은 청년은 귀족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자신을 비롯해서 치안대는 물론이고 마을사람들의 생사까지 결정될 것이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촌장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이런 촌구석에 왜 치안대가 있지?”
 “그것은…….”
 “그리고 해안을 따라 쌓아올린 저 돌담은 뭣인가?”
 “그게 사실은…….”
 촌장은 즉각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유탄과 촌장을 지켜보던 기사 앨버트는 그 모습에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네 이놈! 남작님께서 묻는데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아이고,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말을 해봐라.”
 “실은 해적들의 침입을 대비해서입니다.”
 “해적?”
 전쟁이 없는 왕국은 남아도는 군사력을 몬스터 퇴치와 산적들의 토벌에 집중시켰다. 이는 해적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지금 레스본 왕국의 치안상태는 여자도 돈만 있으면 여행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그렇습니다. 해적의 침입에 대비해 방벽을 쌓고 치안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해적들이 이곳에 나타나는가?”
 “요 근래 그런 편입니다.”
 “그렇다면 인근 영지에 보고를 해서 도움을 받을 것이지.”
 유탄의 말의 요지는 왜 너희들이 직접 막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촌장을 비롯해서 베베토 해안지방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요 근래 해적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여러 마을이 약탈을 당했다. 영주가 없는 이곳은 당연히 영지군이 없었다. 하지만 국법에 의해 인근 영지에 도움을 청하면 군대가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군대가 주둔한 이후를 걱정했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비록 낙후되었다고는 하나 세금을 걷는 영주가 없었기에 다른 영지의 백성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베베토였다. 때문에 그들은 군대의 주둔이 영주의 부임으로 이어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흠, 해적들에게 입는 피해가 생각보다는 경미한가 보구나.”
 유탄은 스스로 답을 내렸다. 이제 막 도착한 그가 이곳 해안지방 백성들의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리고 유배되듯 떠밀려온 마당에 이곳 백성들의 속사정을 알고 보듬어줄 생각도 없었다. 때문에 별 피해가 없어서 그럴 거라 여기고 만 것이다.
 “공자님, 햇볕이 뜨겁습니다.”
 “그렇구나. 어서 앞장서라.”
 “알겠습니다.”
 
 *****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큰 집이었던 촌장의 집을 비롯해서 총 3채의 집이 징발되었다. 병사들에게까지 전부 집을 내줄 수 없어 병사들은 막사를 설치해야 했다. 주민들은 수도에서 왔다는 귀족을 위해 생선 외에도 기르고 있던 닭과 양을 잡아 요리를 했다.
 “공자님, 딱히 마음에 드신 곳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따라온 하녀가 없었기에 다이얼은 유탄의 손발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유탄이 묵는 촌장의 집에 다이얼도 함께 들어갔다.
 “아돌프 집사께서 적당한 곳을 잡으시면 저택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저택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외진 곳이라 공자님이 계시기에는 불편할 거라면서 말입니다.”
 “아주 나를 이런 깡촌에 틀어박히게 할 생각이구만.”
 “하지만 이곳에 얼마 동안 계실 줄도 모르는데 저택은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이곳은 가문의 성지라고는 하지만 유실된 가문의 검법과 관련이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왕국을 건립한 햄머 아이버크가 말년에 자연을 벗 삼아 살겠다며 은거한 지역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가문의 검법을 찾아보라는 테인의 말은 더 이상 아이버크가와 인연을 갖지 말라는 단절선언에 불과했다.
 “공자님, 어디 가십니까?”
 “적당한 터가 있는지 찾으러 다녀야 할 것 아니냐?”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말도 탈 줄 모르는 놈이 어딜 따라온다는 것이냐?”
 유탄의 손발 노릇뿐 아니라 착실한 감시자의 역할도 부여받은 다이얼이었다. 때문에 그는 유탄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타고 가겠다는 말에 그는 더 이상 따라나서지 못했다. 말은 몇 대의 사두마차와 중장 기병을 끌고 왔기에 충분했다.
 “남작님, 어디를 가십니까?”
 “해변을 돌아볼 생각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 앨버트는 병사들의 막사를 배치하고 각자의 임무를 부여하고 있었기에 지금은 기사 핵터가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겠다는 유탄을 따라 나섰다. 핵터는 가는 도중 만일을 위해서라며 10여 명의 병사마저 끌어들였다. 혹 다른 마을에서도 치안대와 조우할 수 있기에 유탄은 말리지 않았다.
 “이럇! 가자.”
 “남작님, 목적지로 정한 곳은 있습니까?”
 “우선 해변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볼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유탄과 일행은 무작정 해변을 따라 올라갔다. 어차피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름의 태양은 늦은 오후가 되면서 붉은 노을을 그리고 있었다. 중간 중간 작은 마을이 몇 개 나왔지만 유탄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늙은 촌장의 말대로 히멘 포구보다 더욱 왜소하고 초라한 마을들이었다.
 ‘췟! 이런 궁벽한 곳에서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답답하군.’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베베토가 아니었다. 쫓기듯 내려왔기에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운 유탄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탄의 체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함성소리에 비명소리가 섞여 들려왔기 때문이다.
 “남작님, 저쪽을 보십시오.”
 “연기가 아니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로 봐서 전투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외진 곳에서 누가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지?”
 “아무래도 가서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이라 근처에 와서야 발견한 연기였다. 유탄을 필두로 총 17필의 말은 모래해변을 가로질러갔다. 해안가의 특성상 산을 따라 돌아가기보다는 해변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빨랐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비명소리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는 더욱 확실히 들려오고 있었다.
 “남작님,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해적들 같습니다.”
 해안을 따라 굽이쳐 도는 해변을 꺾어간 일행들 앞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의 여러 채의 집이 불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전투는 해변 근처와 마을의 초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작님,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 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는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알아봐라.”
 유탄의 안전이 최우선이었기에 기사 핵터는 무작정 돌격하기보다 정찰병을 먼저 보냈다. 일단 마을의 상황을 알아보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라면 후퇴할 요량이었다. 정찰을 보낸 병사는 경험 많고 날랜 병사였다. 얼마 후 정찰을 나간 병사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안을 거슬러왔다.
 “어찌 된 상황이냐?”
 “마을주민과 해적 간에 전투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해적의 규모는 어찌 되더냐?”
 “대략 30명 내외인 것 같았습니다.”
 “놈들의 배는 어디에 정박하고 있더냐?”
 “저기 해안에 정박한 배가 그들의 배 같았습니다.”
 병사가 가리킨 곳에 선수를 먼 바다로 향하고 있는 한 척의 배가 닻을 내리고 있었다. 바다와 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유탄이 보기에도 일반 어민들의 어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큰 배였다. 해적들은 통상적으로 작은 포구에서는 보트를 내려서 노략질을 했다. 자신들의 배가 커서 접안하기 힘든 사정도 있지만 만일에 대비한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마을은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했다.
 “핵터 경, 서둘러라.”
 “남작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해적 30명이면 우리 전력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유탄을 제외하고도 핵터와 말을 탄 중장기병 15명이면 싸워볼 만한 전력이었다. 해적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바다가 아닌 육지였고 자신들은 정규훈련을 받은 병사에다가 기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핵터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아이버크 후작가에서 떨어져 나온 바에야 이번 기회에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옆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마십시오.”
 “걱정 마라. 나 역시 어릴 적부터 검술 수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결정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을 한 이후에는 신속했다. 핵터는 후미에서 기습공격을 함으로써 해적들의 사기를 꺾을 생각이었다.
 “전원 돌격한다.”
 “이럇!”
 “가자!”
 유탄을 중앙에 두고 핵터와 병사들은 말에 채찍을 가했다. 잘 다듬어진 병장기가 석양을 받아 번쩍거렸다. 갑작스런 말발굽소리와 투레질소리에 해적은 물론이고 마을주민들도 놀랐다. 이곳 베베토 지방은 기병은커녕 변변한 영지군도 전무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해적들은 갑옷까지 차려입은 병사들을 보자 처음부터 전의를 잃고 도망갈 생각을 했다. 마을사람들의 저항만 생각했지, 정식 병사들이 출현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컥!”
 “모조리 주살하라.”
 “죽어라, 이놈!”
 병사들의 돌격에 해적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병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버려진 해안마을이기에 안심하고 노략질을 해왔던 그들에게 유탄과 기병의 출현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해적들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감히 저항할 생각도 않고 몸부터 빼기 시작했다.
 “병사들이다!”
 “도망가라.”
 “놈들을 추격해라.”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모두 주살하라!”
 약탈한 식량이나 금품은 물론, 무기마저 버린 해적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보트에 오르기 위해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선택은 참담한 최후를 가져왔다. 가속도가 붙은 중장기병의 돌격에 등판에 구멍이 뚫려 쓰러지고 만 것이다.
 “카악!”
 “컥!”
 “모두 죽이지 말고 생포해라.”
 “해적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생포를 하라.”
 “생포하라!”
 유탄은 일방적인 도살의 형식으로 전황이 흐르자 생포를 명령했다. 하지만 학살에 취한 병사들의 창검은 벌써 대부분의 해적을 도륙한 상태였다. 한편, 갑작스런 병사의 출현에 주민들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중무장한 기병은 처음 보는 일이기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핵터 경, 생포한 해적들을 포박하라.”
 “알겠습니다. 포로를 포박하라.”
 “포로를 포박하라!”
 핵터의 지시에 따라 운 좋게 목숨을 구한 4명의 해적이 포박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죽은 해적들의 시체를 한데 끌어 모았다. 유탄은 자신의 검에 묻은 해적들의 피를 한 번 털어내고는 검집에 담았다. 그야말로 처음 치르는 전투였기에 유탄은 모든 힘을 실어 일격을 날렸고, 적중당한 해적은 어깨부터 사타구니까지 완벽하게 두 쪽이 나고 말았다.
 “기분 더럽군.”
 살과 근육이 순간적으로 갈라지고 여러 개의 뼈가 우수수 잘려지는 감촉이 검을 따라 두 손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순간의 미묘한 기분이 등골을 따라 머리에까지 전달되었다.
 “남작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허! 이 정도야.”
 “아닙니다. 과연 아이버크가의 혈통다운 솜씨였습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핵터의 칭찬에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 실전에 나서는 자가 상대의 몸통을 깨끗이 양단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인간의 몸은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오밀조밀해서 외부에서 뭔가가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움츠려들며 밀착한다. 때문에 상대의 몸을 사선으로 양단하는 것은 상당한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와! 저기 하얀 말을 타신 분이 대장인가 봐.”
 “우와, 저렇게 화려한 옷은 처음 봐.”
 “저기 번쩍이는 것 좀 봐. 저게 전부 보석은 아니겠지?”
 “근데 저 깃발에 새겨진 것은 뭐지?”
 “바보야, 저건 유니콘이야. 귀족은 자기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했어.”
 “우와! 너는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럼.”
 병사들이 해적들의 시체를 끌어 모으고 포로를 포박하는 사이, 아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해적들을 피해 마을 옆 산으로 피한 그들은 산에 난 길을 따라 마을이 아닌 해변의 모래사장 쪽으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중장기병의 모습과 유탄의 화려한 갑옷은 공포심을 능가하여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 때문인지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 지역에 군대가 주둔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기에 아직까지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다.
 “해적이었느냐?”
 “그, 그렇습니다.”
 “포로를 싣고 갈 수레를 가져와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유탄은 자신들이 죽인 자들이 해적인 것을 확인했다. 명색이 자신의 첫 출전이고 첫 살인인데 나중에 얘기하기라도 좋게 해적이기를 바랐다. 사실 해적이냐고 물어본 이유도 마을주민과 해적들의 복장에서 큰 차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해적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지 않았다면 마을주민과 구별하지 못해 무차별적인 살육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저, 그런데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여기 계신 유탄 남작님은 테인 아이버크 후작님의 동생 되시는 분이시다.”
 “아이버크? 아, 아이버크!”
 촌장은 유탄과 병사들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묻자 그 대답을 핵터가 했다. 마치 그는 그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작은 해안포구의 촌장은 귀족의 이름 같은 건 몰랐지만 무조건 아는 체하며 크게 감사하는 척하려 했다. 하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당황하다가 이곳 버려진 땅의 원인 제공자인 햄머 아이버크의 이름을 떠올렸다.
 “남작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촌장과 마을사람들은 아이버크 가문의 출현에 놀라면서도 재빨리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핵터는 그 모습을 만족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님께서는 히멘 포구에 머무시고 계신다.”
 “아!”
 “드디어!”
 마을사람들은 핵터의 말을 장기주둔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들이 듣고 자란 말 중에 이곳의 주인은 햄머 아이버크 후작이라는 말이 많았다. 때문에 아이버크 가문에서 나왔다면 이곳 베베토 해안지방을 영지로 편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핵터 경.”
 “옛! 남작님.”
 “포로들을 압송해서 돌아간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마을로 뛰어갔던 몇 명의 남자들이 때마침 수레를 끌고 왔다. 사로잡힌 해적들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짐짝 신세가 되어 수레에 실렸다. 마을주민들은 포로만 싣고 돌아가는 병사들을 향해 처음으로 박수를 쳤다. 우려했던 약탈이나 폭정이 없었기에 절로 나온 행동이었다.
 “남작님, 간단한 심문 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노예라?”
 “병사들 외에 별도의 하인을 데려오지 않아 여러모로 불편한 상태입니다.”
 대륙의 각국은 1백 년 전부터 노예매매를 엄히 금했다. 하지만 산적이나 해적 또는 중죄를 지은 범죄자에 한해서는 노예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핵터는 그 점을 상기하고 처음부터 일부 해적을 생포하게 한 것이었다.
 “좋다. 심문 후 노예로 사용해라.”
 “감사합니다, 남작님.”
 병사들이 순번을 짜가며 모든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몇 명이라도 노예를 붙여 지원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유탄은 핵터의 의견에 쾌히 동의를 했다.
 “촌장님, 드디어 우리 베베토도 영주님을 모시게 되는 걸까요?”
 “영주님이 생기면 우리도 세금을 내야겠지요?”
 “글쎄,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내려왔는지도 모르지.”
 “소문에는 귀족들이 해적보다 더 무섭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별로인데요.”
 “이 사람아! 옛말에도 귀족 무서운 것은 세금을 내봐야 안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젊은 귀족나리 인상을 보니 그리 포악하지는 않을 것 같던데요.”
 “그나저나 갈수록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니 큰일입니다.”
 바람을 타고 어민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유탄은 그들의 대화를 무시하려 했지만 자신과 관계되어 있기에 그러지를 못했다. 처음 들렀던 히멘 포구에서도 느꼈지만 이곳 백성들은 귀족들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출현을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도 이런 깡촌은 싫다고.’
 이런 궁벽한 어촌에서 세금을 걷어봐야 몇 푼이나 나오겠는가? 자신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장 떠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유탄이었다.
 ‘휴우, 지금쯤 다른 친구들은 코린티아의 밤을 즐기고 있겠지.’
 수도의 생활을 떠올리다 보니 언제부터 항상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마지막 작업의 대상이었던 레이첼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곧장 떠나왔기에 그날 이후로 만나지 못한 그녀였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전의 레이디들과는 다르게 무척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못 먹는 감이 커 보인다고 했지.’
 유탄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말의 속도를 내었다. 사실 질펀하게 놀았던 수도의 생활이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수도를 가지 못하는, 아니 가서는 안 되는 현실이 싫었다. 지금 유탄이 수도를 그리워하는 것은 밤의 향락을 못 잊어서가 아니었다. 형과 새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은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지 못하는 슬픈 현실에 대한 반발이었다.
 “핵터 경, 한번 달려보자.”
 “알겠습니다. 나는 남작님과 먼저 가겠으니 포로를 차질 없이 압송하라.”
 “옙!”
 이미 한 번 지나쳐온 길이었다. 핵터는 병사들에게 포로의 압송을 지시하고는 덩달아 박차를 가했다. 젊은 남작은 벌써 달빛이 일그러지는 해변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
 
 “남작님, 일어나셨습니까?”
 “무슨 일이냐?”
 며칠간의 무미건조한 시간이 흘렀다. 간밤에도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 뒤척이던 유탄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이루었다. 따사로운 해변의 태양은 촌장집의 턱 낮은 방문에도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들어와라.”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안 그래도 일어날 생각이었다.”
 늦잠을 깨운 이는 기사 앨버트였다. 그는 지난 며칠간 포로로 잡은 해적들을 심문하고 있었다. 한적한 이곳 해안지방에서 특별히 보고할 일은 해적과 관련된 일뿐이었다.
 “해적들의 진술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생각보다 해적의 규모가 방대한 것 같습니다.”
 “그래봐야 해적 아니냐? 그리고 해적이 창궐한다면 인근 영지에 알리면 될 일을.”
 “그러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해적이나 소탕하자고 이 먼 해안지방까지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때야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고 전력상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한 일이었다. 또 너무나도 궁벽한 이곳에 도착한 것에 대한 화풀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날 유탄과 조우한 해적들은 재수 더럽게 꼬인 경우였다.
 “앨버트 경.”
 “네, 남작님.”
 “나 때문에 궁벽한 이곳까지 내려오게 한 일은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는 남작님이 아이버크가의 화려한 영광을 재현하실 것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게 이런 벽지에 온다고 절로 이루어질 일이냐?”
 앨버트는 아이버크 가문에서도 손꼽히는 기사였다. 그런 그가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테인의 곁을 떠나온 이유는 아돌프 집사의 충고를 들어서였다. 아돌프는 유탄이 반드시 아이버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 했다. 평소 허튼소리 않는 아돌프의 성격을 알고 있는 앨버트였기에 어찌 보면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따라나선 것이었다.
 “남작님의 뛰어난 자질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됐다. 그보다 해적들이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말해봐라.”
 유탄은 대충 세월이나 축내다가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다가 앨버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사실 유탄은 소일거리가 없는 앨버트가 별일도 아닌 일을 키우기 위해 해적들의 일을 과장되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앨버트의 눈빛에서 진실이 느껴지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뒤늦게 해적의 일을 물어봤다.
 “잡힌 해적들은 얼마 전까지 섬에 사는 평범한 어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쯤에 용병단 출신 산적들이 쫓겨 섬에 흘러 들어왔다고 합니다.”
 “산적들이?”
 “그렇습니다.”
 1백 년 넘게 지속된 대륙의 평화는 군사와 마법분야의 침체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남아도는 군사력이 치안강화에 투입되면서 그간 그 역할을 담당했던 용병단의 자연스런 퇴출도 함께 이루어졌다. 각 지역마다 몬스터와 산적들이 토벌되면서 자연스럽게 용병의 일은 축소되었다. 더구나 전쟁도 벌어지지 않으니 전쟁용병의 수요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용병단과 용병이 해산되고 없어졌다. 하지만 용병일 외에 할 일이 없던 용병들은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중에는 범죄를 일으키고 아예 산적이 된 전직 용병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이 섬에서도 산적질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고, 처음 소수에 불과했던 그들이 어느덧 이 일대의 섬을 전부 장악했다고 합니다.”
 “아니, 산적들이 얼마나 흘러왔기에 일대의 섬을 다 장악한다는 말이냐?”
 “모르긴 몰라도 1천은 될 것이라 합니다.”
 “1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도 믿기지 않았지만 잡힌 4명 모두 일관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산적이 많아도 그렇지, 어떻게 1천이 넘는 해적이 있다는 것인지 믿을 수 없다.”
 “산적들은 처음부터 이 일대의 해안을 장악할 생각으로 계획적으로 잠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뭐라?”
 “이곳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몬스터와 야만족의 땅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쪽 해안은 섬도 많지만 그만큼 암초도 많아, 모르는 이들은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해안이라 합니다.”
 그랬다. 대륙의 동북부 해안은 수많은 섬들이 점점이 뿌려진 지역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과거 대륙이 생길 때 대지의 신이 힘껏 대륙을 밀어 올렸는데, 그 가장 끝에 있던 부스러기 같은 땅이 떨어져 생긴 것이 이 일대의 섬이라고 했다. 섬이 오죽 많으면 이곳 해안지방의 이름도 섬으로 간다는 뜻의 베베토 이겠는가?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지?”
 “쉽게 접근해오기 어려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최악의 경우는 바다를 통해 북부 대초원으로 도망갈 수 있는 천혜의 요새가 바로 이 일대의 섬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산적들이 여기서 아예 눌러 앉을 생각으로 넘어왔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섬 주민을 뱃사람으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같은 해적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군사훈련까지 시키고 있답니다.”
 “도대체 너무 어마어마해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저도 감당하기 어려워 이렇게 보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잡힌 해적들에 의하면 일대의 섬을 장악한 산적 출신 해적들이 섬을 요새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했다. 섬의 주민들은 요새화 작업과 대형선박 건조에 투입되고 있고, 일부 건장한 남자들은 같은 해적으로 편입시키는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했다. 그리고 소규모의 해적이 주변 포구를 노략하는 것은 노동에 투입되면서 부족해진 식량과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훈련의 일환이기도 하다고 했다.
 “흠, 좀 더 알아보는 방법이 없겠는가?”
 “그렇다면 섬에 잠입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젠장, 하필 내가 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예? 뭐라 하셨습니까?”
 “아니다.”
 혼자서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을 앨버트가 들은 모양이었다. 이런 궁벽한 어촌에서 뼈를 묻을 생각은 없었다. 살아오면서 딱히 뭘 이루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있었다. 반드시 가문의 힘을 되찾아 옛날의 그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발전하고 성장할수록 아버지와 형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수련을 했었지, 그들로부터 미움과 배척을 받기 위해 그리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발전이 가문에 행복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 밤, 유탄은 철저히 자신의 꿈을 버리고 숨겼다.
 “나가보겠습니다.”
 “앨버트 경, 좀 더 정황을 파악한 후 다시 보고를 하라.”
 “알겠습니다.”
 앨버트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유탄도 나왔다. 한 번 잠이 깨버린 후라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늘 그러던 것처럼 집 안의 우물에서 간단한 세면을 마친 유탄은 마을 앞 해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린 아이들 몇 명이 모여 놀고 있었다.
 “멈춰라, 해적.”
 “살려주세요, 남작님.”
 “감히 해적질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럼 잡아간 주민과 재물을 내놔라.”
 “여기 있습니다.”
 아이들이 유탄을 영웅으로 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 해적을 잡은 것이 알려지면서 아이들은 부쩍 전쟁놀이를 즐겨 했다. 그리고 그 놀이 속의 영웅은 항상 유탄, 자신이었다.
 “저기 남작님이 오신다.”
 “어디? 정말이다.”
 누군가가 유탄을 발견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일반인의 감각보다 몇 배는 뛰어난 유탄의 청각에는 아이들의 말이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다.
 “오늘은 해적을 잡으러 안 가시나?”
 “바보야, 해적이 나타나야 잡지.”
 “그런데 남작님은 정말 불을 뿜고 번개를 토해낼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해적을 잡지.”
 “우리 가서 물어볼까?”
 “안 돼, 어른들 말씀 안 들었어?”
 “그래도 나는 저렇게 멋진 남작님이 우리를 잡아간다는 말은 믿을 수 없어.”
 “맞아, 나도.”
 “그래도 안 돼.”
 아이들의 대화에서 이곳 주민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탄은 알 수 있었다. 해적을 잡아주는 영웅이면서도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귀족의 모습…… 그 혼란에 노출된 아이들은 자신을 놀이의 영웅으로 삼으면서도 무서워하며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님. 일어나셨습니까?”
 “아니, 네가 이곳은 웬일이냐?”
 “싱싱한 생선을 잡아볼까 해서 나왔습니다.”
 해변의 한쪽에 있는 갯바위 지대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이는 하인 다이얼이었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와 망태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망태기가 텅 빈 것이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맨손이냐?”
 “고기들이 다 어딜 가버린 것 같습니다.”
 “싱거운 녀석.”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라.”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해풍은 좋았다. 비좁은 방 안에서 마나심법을 수련하기보다는 이렇게 탁 트인 해변의 한쪽에서 수련을 마치면 더욱 가뿐하고 상쾌했다. 때문에 유탄은 일어나고 나면 항상 이곳 해변을 찾았다.
 “곧 식사를 차릴 테니 너무 늦게 오지 마십시오.”
 “오냐,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다이얼은 마을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의 손끝에 유난히 반짝이는 작은 물체가 있었지만, 등을 돌린 유탄은 미처 보지 못했다.
 
 
  3장 풍요의 바다
 
 한 여름의 7월은 태풍의 계절이었다. 수도 코린티아에서도 여름이면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변에서 겪는 태풍은 수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포구에 묶어놓은 선박 중에는 파손된 선박도 나왔고, 산에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했다. 거의 일주일 넘게 계속되었던 태풍이 지나가자 바다는 더욱 푸른빛을 드러냈다. 이제 두 달간 바다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지면서 살이 오른 물고기들을 토해낸다고 했다. 그야말로 풍요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남작님, 계십니까?”
 “무슨 일이냐?”
 “수도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수도에서?”
 수도에서 누가 왔다는 말에 유탄은 재빨리 일어섰다. 수도에서 왔다고 하니 행여 자신의 형이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마워요.”
 “고맙소.”
 유탄의 뒤를 핵터와 앨버트가 함께 따랐다. 좁은 거실에 여러 사람이 들어서자 금세 꽉 차버렸다. 수도에서 왔다는 사람은 5명의 기사와 1명의 여자였다. 기사 중 3명은 아이버크 가문의 기사였고, 2명은 처음 보는 자였다.
 “남작님을 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유탄은 검사 차림을 한 여자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허리춤에 한 자루의 롱 소드를 차고 있는 여자는 어찌 보면 용병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기사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여자의 얼굴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은 한없이 깊어 보였고 살색의 피부는 누르면 금방이라도 튕겨 나올 듯 탄력 있어 보였다. 그리고 적당히 기른 금발의 머리는 큰 눈과 오뚝한 코와 어울리면서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헤츠 경과 마인 경, 그리고 워드 경?”
 “그간 잘 계셨습니까?”
 “가문은 어찌하고 이곳에…… 그리고 이분들은 누구인가?”
 “저희들은 남작님을 받들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두 분도 저희들과 뜻이 같습니다.”
 헤츠 경은 유탄에게 2명의 기사를 소개시켜주었다. 비교적 젊은 두 기사는 에반과 숄더라는 자로, 기사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버크 가문을 흠모해서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테인 후작님이 아니라 나를 따르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녹봉을 지급할 처지도 못 되고, 변변한 영지도 없는 실정이다.”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그대들은 내 처지를 알면서 어찌 여기까지 젊은 기사들을 데려왔는가?”
 그때까지도 유탄은 가문에서 온 3명의 기사가 안내를 위해 일시적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명의 기사 역시 테인 후작에게 이별을 고하고 유탄의 기사가 되기 위해 왔다는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참! 남작님, 인사하시지요.”
 “유탄 아이버크 남작이오.”
 의문의 여자를 가리키며 헤츠가 인사를 하라고 하자 유탄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아까부터 가장 궁금히 여겼던 인물이었다. 검을 차고 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아무래도 기사나 용병이라기보다는 수도의 클럽에서나 어울릴 법한 용모였다. 그러고 보니 은근히 친숙한 용모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다.
 “반가워요. 아돌프 님의 부탁을 받고 온 에바 낸시아라고 해요.”
 “바, 반갑소.”
 귀족가의 여식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인사할 때 손을 내밀 것이라 여겨 미리 손을 뻗었던 유탄은 민망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그의 답례는 순간적으로 타이밍이 늦고 말았다.
 “전 앞으로 남작님에게 검술을 가르칠 겁니다.”
 “검술 스승?”
 그때서야 검술 스승을 이곳으로 보내겠다는 아돌프의 말이 떠올랐다. 그간 잊은 적은 없지만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칠 스승이 미모의 젊은 여인일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유탄은 훌륭한 스승을 초빙하는 데 실패한 아돌프가 여러 명의 기사를 대신해서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굳이 젊은 여자를 스승으로 보낼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한 아돌프의 저의가 무엇인지 고민스러웠다.
 ‘시녀를 검술 스승으로 보낼 리는 없고. 알 수 없군.’
 유탄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에바라는 미모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검술 스승이라고 표현을 하더군요.”
 “정말 나를 가르칠 검술 스승이라는 것이요?”
 “그래요.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왔죠.”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그녀의 대답에 유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에바를 살폈다. 여자치고는 조금 건장한 체격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자와 비교했을 때의 얘기였다. 오히려 남자와 비슷한 키 때문에 건강미까지 엿보이는 그녀였다. 적당히 솟아오른 히프와 봉긋한 가슴이 검술 스승보다는 클럽의 전속무희에 딱 어울릴 것 같았다.
 “허, 참!”
 에바의 면전이라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는 없었지만 유탄은 너무 어이없다는 생각에 새롭게 도착한 5명의 기사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남작님, 그리고 다른 보고사항도 있습니다.”
 “또 뭔가?”
 “병사 1백 명 외에 대략 2백 명의 민간인도 이번에 같이 왔습니다.”
 “병사 1백 명에 2백 명의 민간인?”
 “그렇습니다. 각종 기술자와 그의 가족들입니다.”
 “아니,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그리고 병사 1백 명은 뭐 하려고 보냈다는 말이냐?”
 “병사들 또한 유탄 님을 위한 병사입니다.”
 “나 참, 여기다 무슨 영지라도 만들 생각인가?”
 “그리고 각종 건축자재와 충분한 자금도 보내왔습니다.”
 ‘나보고 아예 이곳에 뼈를 묻으라는 소리군.’
 계속되는 보고를 들으며 유탄은 생각했다. 안 그래도 지금 50명의 병사도 간이막사를 지어 생활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여름이라 상관없지만, 겨울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견뎌내려면 집다운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데 새롭게 수백 명의 사람을 보내다니, 아돌프는 아예 이곳을 영지로 여기는 것 같았다.
 “또 보고할 내용이 있느냐?”
 “우선 임시막사를 설치하겠지만 조만간 적당한 부지를 선정해 남작님의 관저를 비롯하여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앨버트 경이 알아서 결정해라.”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앨버트와 핵터를 비롯해서 새롭게 당도한 기사들이 모두 나가자 거실에는 유탄과 에바만 남았다. 에바는 유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바 양, 무슨 할 말이라도 있소?”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완벽히 부활시켰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그건 어떻게 알았소?”
 “말을 들어보니 사실인 것 같군요.”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존재는 아이버크 가문의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의 입에서 쉽게 나올 내용이 아니었다. 지난 120년간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부활시키기 위해 비명에 간 아이버크 가문의 가주만 4명이었다.
 “누구에게 들었소?”
 “아돌프 님이 그러더군요. 만일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절대 오지 않았을걸요.”
 “가문의 사람도 아닌 당신에게 아돌프가 정말 그런 말을 했소?”
 “그것보다 지금 토네이도 마나심법 수련하는 것을 보여줄래요?”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하시오.”
 “아돌프 님이 아니면 내가 어찌 알겠어요? 그보다 남작님의 수련상태를 알고 싶은데, 마나심법을 운용해볼래요?”
 에바라는 여인의 태도는 당당하고도 자연스러웠다. 유탄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1백 년 넘게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부활에만 매달렸던 아이버크 가문이었다. 감히 처음 보는 나이 어린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란 말이다. 자신이 이런 깡촌에 오게 된 것도, 아버지와 형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도 결국 마나심법의 부활 때문이었다. 유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을 붉히며 노기를 드러내었다.
 “닥치시오. 검술 스승이면 검술 가르치는 데만 신경을 쓰시오.”
 “듣던 것보다 더 까칠하네요?”
 “뭐요?”
 “당신에게 걸맞는 수련법을 찾기 위해 그런 것인데 뭘 그리 튕겨요?”
 “아니,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
 “난 당신의 검술 스승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아무리 검술 스승이라고 해도 요구할 수 있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소. 아돌프 집사에게 사정을 들었다면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니오?”
 “내가 토네이도 마나심법의 구결과 내용을 알려 달라 했나요? 그저 한번 운용해보라는데 그게 어쨌다고 이런 소란을 피우나요?”
 “토네이도 마나심법은 외부인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우리 가문의 모든 것이오.”
 “알 만하군요. 모든 구결을 알고 있음에도 왜 1백 년이 넘게 걸렸는지.”
 마침내 유탄의 인내심의 한계가 바닥을 드러냈다. 지금 에바의 말은 마나심법의 부활을 위해 애쓰다가 쓰러져간 자신의 조상들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 유탄의 몸은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당신이 여자인 것을 다행으로 아시오.”
 “왜요, 남자면 결투라도 신청할 생각이었나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스타일의 여자였다. 수도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쟁쟁한 레이디들도 자신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며 다소곳했다. 이렇게 끝까지 잘 했다고 대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정말 여자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렸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바라는 여자는 여전히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했다.
 “가문의 기사들도 있는데 검술 스승으로 온 것으로 보아 에바 양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겠소. 그리고 내가 화를 낸 것도 인정하오. 하지만 아이버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분에게 검술을 배울 생각은 없소.”
 유탄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했다. 기분 같아서는 막말을 해대고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분노한 와중에도 그녀의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지적해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아마 아돌프가 제시한 큰 액수 때문에 이런 깡촌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수긍한다면 유탄은 통 큰 사내답게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줄 생각이었다.
 “잘 되었네요. 나도 당신처럼 싹수없는 사람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뭐라, 싹수?”
 “토네이도 마나심법을 부활시켰다기에 행여나 싶어 왔는데, 그야말로 당신 조부의 눈물 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어림없었을 것 같네요.”
 “커억!”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아돌프 집사는 어디에서 이런 기본도 없는 왈가닥을 구해왔는지, 옆에 있으면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유탄이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그녀는 정말 돌아갈 작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돌프 님에게 전하세요.”
 “뭘 말이오?”
 “아이버크 가문의 부활은 아무래도 요원한 일 같다고.”
 겨우 추스른 마음이 다시 요동쳤다. 이번에는 머리에서 김이 풀풀 날 것만 같았다. 가문을 능멸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까지 모욕하자 유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기에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오?”
 “왜요, 한번 겨뤄볼 용기나 있나요?”
 “좋소. 본격적인 검술 수련은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당신의 검 정도는 봉쇄할 자신이 있소.”
 “좋아요, 만일 내 몸을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생각을 다시 해보지요.”
 “그건 내가 거절하겠소.”
 
 *****
 
 벽에 걸린 자신의 검을 꺼내든 유탄은 먼저 해변으로 향했다. 마나심법을 부활했을 때 가문의 검법을 찾아 익히기 위해서 심오한 고급검술을 익힌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술 수련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검법이 유실되었을 뿐이지, 기본적인 훈련법이 유실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때문에 검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베기와 찌르기는 수없이 연습했었다. 나아가 마나심법을 완성시킨 후 비약적으로 상승한 신체의 능력 덕에 유탄은 자신만의 비기인 공중 3연속 치기를 익힐 수 있었다. 자신만의 눈짐작이었지만 가문의 기사 중 그의 비기를 감당할 만한 기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비되었나요?”
 “그렇소.”
 유탄과 에바가 검을 꺼내들고 해변으로 향하자 다이얼과 병사들이 따라왔다. 하지만 새롭게 합류한 기사들은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오랜만의 눈요기에 좋다고 따라 나선 그들은 볼멘소리를 하며 돌아갔다. 어촌의 주민들은 기사들이 돌아가자 자신들도 알아서 서둘러 돌아갔다. 유탄은 기사들의 그런 모습이 의아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럼 들어와요.”
 “먼저 들어오시오.”
 “내가 들어가면 단 한 번도 기회를 얻지 못할 텐데요?”
 “그리 호락호락 당할 내가 아니오.”
 철저히 자신을 무시하는 에바였다. 어디서 검술 좀 배웠는지 갖은 폼을 잡는 모습에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남자 체면에 먼저 달려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그나마 이만큼 참아주는 것도 상대가 여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아요.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볼까요?”
 휘릭.
 말이 끝나자마자 에바의 몸이 움직였다. 마나하트라는 새로운 심장을 배꼽 밑에 만들고 나서부터 유탄의 감각은 몇 배나 예민해져 있었다. 유탄은 그녀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 몸을 재빨리 틀었다. 어느새 오른쪽 옆으로 다가온 에바의 검이 사선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채챙!
 두 개의 검이 맞붙으며 맑은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소.”
 “아주 형편없지는 않군요.”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이제 시작인데요?”
 가깝게 붙은 두 사람이 다시 떨어지기 무섭게 에바의 검이 밑에서 올라왔다. 반동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공격이었다.
 “흥.”
 다른 사람에게는 의외의 공격일지 모르겠지만 유탄에게는 아니었다. 유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역공으로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자신의 근력을 이용해 강한 타격으로 상대의 중심을 흩트리기 위해서였다.
 씨익!
 강력한 공격임에도 에바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그녀의 미소에는 귀엽다, 내지는 제법인데, 하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격을 날린 유탄이 그 미소의 뜻을 알아차렸다는 것이었다.
 “야야압!”
 여자에게 처음으로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유탄은 기합을 지르며 검에 더욱 힘을 실었다.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유탄의 검이 에바의 롱 소드를 쳐내기 직전이었다.
 “마나를 검에 실을 줄 모르는군요.”
 “컥!”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한 자루의 검이 유탄의 가슴을 가볍게 찌르고 있었다. 유탄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검 끝을 놓쳤다고 생각했다. 분노한 나머지 미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먼저 들어와요.”
 “이야얍!”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에바의 실력은 만만치가 않았다. 스스로에게 침착하자며 마음을 다잡은 유탄은 자신의 전매특허인 숨 돌릴 틈 없는 연속 베기를 했다. 다른 이에 비해 훨씬 호흡이 긴 그만이 할 수 있는 공격으로, 일격 일격에 실린 힘도 대단했다.
 채챙. 챙챙챙!
 “완전 막무가내군요.”
 ‘조금만 더!’
 어찌 보면 마구 휘두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유탄의 공격은 쉴 틈 없이 이어졌고, 빠르고 힘이 넘쳤다. 하지만 에바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그녀의 몸은 뒤로 밀리고 있었고, 둘의 간격은 처음보다 벌어진 상태였다. 유탄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어렸다.
 ‘오냐! 지금이다.’
 오직 지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런 무지막지한 베기를 연속적으로 시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겨우 한두 걸음 뗄 정도의 간격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도약할 수 있었다.
 “이얍!”
 힘찬 기합성과 함께 유탄의 몸이 날아올랐다. 겨우 두 걸음을 움직였을 뿐이었지만 그의 도약은 대단히 높았다. 에바는 동물이나 가능할 정도의 뛰어난 점프력과 순발력을 보이는 유탄의 몸놀림에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챙.
 채챙.
 챙.
 유탄의 비기인 ‘공중 3연속 치기’는 허망하게도 전부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도약력을 잃은 그의 몸은 바닥에 힘없이 착지했다. 에바의 날 선 검날과 함께.
 “재미있군요! 마나를 부분적으로 신체에 분산시킬 수는 있는가 보죠?”
 에바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유탄은 자신의 턱 끝에 걸린 그녀의 검날과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록 상승의 고급검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자신 있었던 자신만의 비기였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막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또 다른 것은 없나요?”
 “어, 없소.”
 “그런데 마나하트에 모여 있는 마나는 언제 쓰는 거죠?”
 “무슨 소리요?”
 “마나를 신체에 모았으면 사용해야지, 왜 쓰지 않죠? 설마 방금 전처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죠?”
 “…….”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마나를 신체에 모으는 것은 오러 소드를 뽑기 위한 사전단계라고만 생각했다. 유실된 가문의 비전검법은 모인 마나를 이용해 오러 소드를 분출하는 특별한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에바의 말은 검법이 아닌 심법에 그 비밀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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