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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검전기 1권-1

2015.01.19 조회 3,632 추천 25


 마지막 황자, 무림으로 떨어지다
 
 
 1. 그렇게 제국은 멸망의 날을
 
 매캐한 냄새를 가득 실은 검은 연기가 성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거대하고 화려했던 성은 그저 그을리고 허물어진 폐허가 되어 어디에서도 옛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콰왕
 용케도 마지막까지 남아 대륙 최고의 철옹성의 웅자를 자랑하던 서북 벽의 망루가 시뻘건 파이어 볼을 맞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악!”
 “크아악!”
 은빛 갑옷을 입은 근위기사들이 망루의 파편과 함께 눈이 시리도록 떨어져 내리고, 희뿌연 돌가루들이 망루가 있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어디선가 괴성이 들려왔다.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오르는 회색 먼지 사이로 불쑥 나타난 커다란 암갈색 실루엣은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괴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날개 달린 거대한 괴물이 내성 위를 날아가는 순간 성벽 위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지금이다, 쏴라!”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명령을 신호로 흉벽 뒤에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장궁을 든 궁수들이 일제히 일어서서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촤촤촤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가는 괴물의 진로에 촘촘한 그물망을 그리며 쏘아져 나갔다.
 끼아악!
 커다란 바위를 연상시키는 암갈색의 괴물이 허공으로 솟구치려 날개를 퍼덕거렸으나 날던 가속을 완전히 이겨 낼 수는 없었다.
 퍼버벅
 미스릴 합금으로 특별히 제조된 촉이 달린 화살 수십 발이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괴물의 날개와 몸통을 파고들었다.
 “와이번이 맞았다!”
 “와아! 와!”
 장궁에 살을 메기던 궁수 중 하나가 소리치자 내성의 성벽 위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치에(다년생 치에나무의 뿌리에서 나오는 신경독의 일종) 독은 와이번에게 치명적이야!”
 누군가의 외침을 증명이라도 하듯 허공으로 크게 솟구쳤던 와이번의 육중한 몸이 곤두박질쳐 내리며 궁전의 측면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쿠콰콰쾅
 그 와중에 와이번의 등에 타고 있던 라이더가 허공으로 솟구쳐 공중제비를 돌더니 황성의 정원을 향해 뛰어내렸다. 도저히 인간의 동작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그것을 보고 대경실색한 금색 갑옷의 기사가 성내를 향해 외쳤다.
 “마검사다! 근위기사단은 황궁의 입구를 봉쇄하라!”
 그러나 근위기사 서넛이 이미 마검사의 화검에 당해 숯덩이가 되어 구르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다들 무엇하고 있는가? 근위기사들을 보호하지 않고!”
 그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근위기사를 연달아 토막 내버린 마검사는 창문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황궁 안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이런……!”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칠흑 같은 전황으로 인해 근위기사단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게다가 근위기사단장인 베르사초 공작이 전사하면서 지휘 체계마저 무너진 상태였다. 하지만 황성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근위기사들이 오합지졸처럼 우왕좌왕되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금색 갑옷의 기사는 그들에게서 제국의 운명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드를 빼어든 그가 성벽을 나는 듯이 내려서며 외쳤다.
 “필린 경, 지휘를 맡깁니다. 다른 와이번 라이더를 대비하시오.”
 그러나 그가 채 성벽을 내려오기도 전에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내성의 성벽을 휩쓸어 버렸다.
 콰아아앙
 “아아악!”
 굉음 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천지를 울렸고, 그 여파로 금색 갑옷의 기사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크윽! 이, 이건…… 드래곤 브레스?”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드래곤들이 왜? 비가 오듯이 떨어지는 시뻘건 화염 파편들을 피하며 재빨리 일어선 기사는 궁성을 향하여 달려 나갔다. 이번 전쟁에 드래곤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추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직접적으로 전투에 가담한 적은 없었다.
 한데, 방금 전 화염은 그 엄청난 규모로 보아 분명 드래곤 브레스였다. 그것도 웜급 이상의.
 “드래곤이다. 실드 마법…… 궁전에다 실드 마법을 펼쳐!”
 금색 기사는 앞으로 내달리며 충격적인 사태에 넋을 놓고 있는 황실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그의 독려와 흉흉한 기세에 놀랐음인지 황실마법단의 상징인 금빛 찬란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황급히 마법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대마법사!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는 어디 있나?”
 “황궁 안에서 황태자 전하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근위기사가 대답했을 때 그는 벌써 궁전 문의 그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챙챙챙
 펑
 화려한 궁전 곳곳에 불길이 일고 있었고, 죽어 넘어진 근위병들의 시체가 그의 급한 발길을 잡아채고 있었다.
 “제발!”
 계단의 절반이 불길로 휩싸여 있었으나 금색 기사는 그대로 달려들었다. 시뻘건 화염이 달려가는 그를 향해 덮치듯 와락 다가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올곧은 금발 머리카락이 누렇게 타들어 갔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커흑…….”
 호흡을 통해 화기가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호하는 데 힘을 쓸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 황태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대로 화염을 뚫고 이층으로 올라간 그의 눈에 복도 끝에 있는 황태자의 침전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와 섬광.
 마나를 사용해 십 미엘(1미엘은 대략 3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기사는 침전으로 들어서며 자신의 마나 전부를 이용해 강막을 벨 수 있는 쉐어 마법을 소드에 걸었다.
 마검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마법사를 향해 쉴 새 없이 파이어 볼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지옥으로 갈 시간이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란 마검사가 머리를 돌리는 순간, 기사의 푸른 검이 번쩍 빛을 발했다. 눈을 부릅뜬 마검사의 머리가 반쪽으로 쪼개지며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파바박
 뻘건 피 대신 검은 색 폐혈이 쪼개지는 마검사의 몸에서 터져 나오며 역한 냄새를 피워냈다.
 “이럴 줄 알았어. 일시에 생명력을 짜내어 쓰는 흑마법까지 사용하다니…….”
 소드에 묻은 시커먼 핏덩어리들이 강기에 타오르는 광경을 보던 그가 급기야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아…… 빌로엔 백작?”
 노마법사의 등 뒤 침상에 누워 있던 이가 그를 안타까이 불렀다. 일견하기에도 병약해 보이는 이십여 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황태자 전하! 괜찮습니다. 잠시만…… 쿠흑!”
 대답을 하던 빌로엔 백작이 가슴에서 치밀어 오른 화기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찬란했던 금색 갑옷은 화염에 그슬려 이미 시커멓게 변했고, 금색의 머리칼들도 올올이 타고 눌어붙어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십오 세 가량의 가냘픈 소년이 그의 곁으로 달려와서는 그를 부축했다.
 “감사합니다, 삼 황자 저하!”
 삼 황자라 불린 소년의 눈에는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후궁 태생으로 황후의 태생인 황태자와 두 황자의 그늘에 가려 황성에 있으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존재가 그였다. 항상 말이 없고 행동이 조용한 것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형제들로부터도 소외당한 영향이 클 터였다.
 황제가 삼 황자에게 카이젠 제국 개국의 일등공신인 두 사람의 이름을 따 세빌로이 쿠로발 이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황태자를 잘 보필하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막내가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살도록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 어쩌면 병약한 황태자로 인해 후일 황권 다툼이 생길 것을 염려한 황제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근심이 화근이었던지 황제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제국이 혼란에 휩싸인 건 정정하던 황제가 알사스 영지를 순행하는 와중에 갑자기 실종되면서부터였다.
 육백 년간 평화롭기만 하던 제국이 이렇게 순식간에 붕괴된다는 것을 제국기사단장 빌로엔 백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충성스럽던 영주들이 너나할 것 없이 황제가 실종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를 들고 일어서다니 말이다.
 황성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쟈이넨 영지의 히나스 공작도 발 빠른 제후들 중의 하나였다. 둘째 황자인 케인을 어떻게 구슬렸는지 그로 하여금 제국의 정통을 잇게 하겠다며 수도로 진격해 온 게 나흘 전이었다. 이 황자의 뒤에 있는 히나스 공작의 음모야 불을 보듯 뻔했지만 그래도 명분은 되었다.
 제국의 직영지를 관리하던 셋째 황자 루보는 반역을 일으킨 부장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외 대다수의 제후들도 자신들의 기사단을 이끌고 수도로 진격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욱 믿지 못할 일은 이런 혼란기에는 서로 견제를 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나가기에 급급할 제후들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기 위해서 연합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들 반역 연합군의 집중 공격으로 난공불락이라는 브론트 황성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세빌 황자의 부축을 받은 빌로엔 백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황태자 세릭이 암울한 목소리로 탄식을 토해냈다.
 “믿,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잖아도 병약한 황태자인데 이번 일로 얼마나 상심했는지 푸른빛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빌로엔 백작이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신이 변변치 못해서 제국이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어찌 빌로엔 경의 잘못이오? 대체…… 이유라도 알고 당한다면 덜 억울하지요. 제국에서 제후들에게 그렇게 많은 잘못을 했소?”
 “아닙니다, 전하! 이안 대제께서 건국하시고부터 줄곧 태평성대를 구가해온 카이젠 제국의 위대한 업적을 대륙의 제국민들은 날마다 칭송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제후들은 무조건적인 권한을 부여해 주겠다는 휴전안을 거부하고 저처럼 필사적으로 제국을 멸하려 하는 것이오?”
 빌로엔 백작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방금 내성으로 드래곤 브레스가 펼쳐졌습니다.”
 드래곤이라는 말에 황태자와 세빌 황자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주변을 경계하던 타키오우스 대마법사조차 넋을 놓고 물었다.
 “그, 그게 사실이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드래곤들이 이 반역의 배후에 있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됩니다. 황제 폐하를 수행하던 일천여 기사들과 수십 명의 고위 마법사들이 한꺼번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며, 갑자기 생겨난 마검사들, 게다가 드래곤 브레스라는 직접적인 공격까지도 말입니다. 사실 그 드래곤의 출현에서 무언가 미심쩍기는 합니다.”
 “미심쩍다니요?”
 “천 년도 더 전부터 드래곤들은 인간의 일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공격을 해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넬의 광룡 쿠레나라면 또 모를까.”
 타키오우스 대마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물었다.
 “광룡 쿠레나라면 육백 년간 잠만 자고 있다는 그 전설의 드래곤 말이오?”
 “광룡이 잠에서 깨는 날 제국의 불행이 닥친다는 전설은 대마법사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타키오우스 대마법사가 말했다.
 “이안 대제께서 그런 언급을 하셨다는 기록은 있소.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드래곤의 유희 정도이고 그에 대한 안배도 있다고 하셔서, 물론 그 안배의 내용은 비밀이오만, 어쨌든 제국에 큰 여파는 안 미친다는 게 정설이오.”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안정을 찾은 빌로엔 백작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광룡 쿠레나든 아니든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황실마법사들을 총동원시킨 마법진으로 궁성에 실드를 치긴 했지만 밖에 드래곤이 와 있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대마법사께선 두 분을 공간 이동시킬 준비를 서둘러주십시오.”
 그리곤 침상에 앉아 있는 황태자를 향해 눈물을 뿌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소신의 능력이 부족해 더 이상 황성을 지킬 수가 없나이다. 불충한 죄는 죽음으로서 받겠사오니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품에서 시퍼런 단검을 꺼낸 빌로엔 백작이 손바닥을 그어 피를 묻히고는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주군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 마땅히 심장의 피를 적셔 바쳐야 되오나 반역도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잠시 더 살고자 합니다. 이 허트 소드를 받으시고 죄인을 용서하소서.”
 화상으로 커다란 물집까지 생겨나 흉측해진 얼굴에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가득했다. 황태자가 가냘픈 손을 빌로엔 백작의 얼굴 가까이 가져가 흐르는 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경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이상 제국은 영원할 것이오. 세빌 황자, 이리 오너라!”
 황태자는 빌로엔 백작이 받쳐 든 허트 소드를 받지 않고 침전 한쪽에서 묵묵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세빌을 불렀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대마법사! 한 사람을 최대한으로 보낼 수 있는 거리가 어느 정도 되오?”
 “예? 전하! 대체……?”
 “시간이 없소이다. 대답하시오.”
 “대략 100키에미엘(1키에미엘은 약 3킬로미터)의 거리가 됩니다.”
 세릭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으음……. 그 정도 거리라도 지금으로선 다행이오. 세빌 황자는 허트 소드를 받아라!”
 어린 세빌 황자였지만 영특한 그인지라 그 말의 의미를 모를 턱이 없었다. 세빌이 눈물을 뿌리며 침대 아래 무릎을 꿇었다.
 “전하! 허트 소드는 오직 대륙의 주인만이 받을 수 있사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소서.”
 창백한 얼굴의 황태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다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헉!”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한 줄기 호흡으로 삼킨 황태자가 세빌을 보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대륙의 주인이다.”
 설마 했던 말이 황태자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놀란 것은 세빌만이 아니었다. 허트 소드를 받쳐 들고 있던 빌로엔 백작과 타키오우스 대마법사가 놀란 눈을 부릅뜨며 동시에 외쳤다.
 “전하!”
 “전하! 그 무슨 황송한 말씀이십니까?”
 “모두 조용하시오.”
 힘겹게 침대를 내려선 황태자가 세빌을 일으켰다.
 “세빌……, 내 모습을 잘 봐라. 제국의 부흥이라는 무거운 짐을 너는 제 한 몸조차 건사 못하는 이 형에게 맡기고 싶으냐?”
 “전, 전하! 어린 저이지만 몸이 가루가 되도록 옆에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태자이자 형인 세릭에 대한 굳은 충정과 깊은 우애가 담긴 세빌의 뜨거운 눈물은 부드러운 그의 목덜미를 흠뻑 적시고도 남아 옷깃을 물들이고 있었다.
 “세빌……. 안다, 네 마음을. 또한 네가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총명하다는 것도 안다. 게다가 학문을 익히길 좋아하고 인정 또한 많지. 나는 우리 네 형제 중에서 너야말로 제왕 감이라고 늘 생각해 왔단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만 쉬고 싶구나.”
 “전하! 마음을 독하게 다지십시오. 병마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일단 위험을 돌파하게 되면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폐하의 병을 고쳐 드리겠습니다. 하오니…….”
 “그만!”
 소리를 질러 세빌의 말을 끊은 세릭 황태자의 얼굴은 검게 변해 있었다.
 “이제 지쳤다고 하지 않느냐! 어린 너에게 감당하지 못할 짐을 떠안기는 못난 형이라서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거냐?”
 목이 터져라 외치는 세릭 황태자의 말에 세빌은 더욱 눈시울을 붉혔다.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빌로엔 백작과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두 분은 제국의 신임 황제께 대례를 취하시오.”
 “전, 전하!”
 “전……하! 흐읍…….”
 황태자를 부르던 노마법사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젊은 시절 그가 마법을 배울 때만 해도 아니,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일을 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차라리 마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아니, 마법을 더 열심히 익혀 두 황자를 동시에 안전지대까지 보낼 수 있는 능력만 되었더라면 이런 비극적인 장면은 보지 않아도 될 터였다.
 하지만 인간이 익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타키오우스의 능력은 대륙 최고였으니…….
 “시간이 없소. 당장 대례를 취하시오.”
 굳건한 황태자의 외침에 빌로엔 백작과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는 세빌 앞에 엎드렸다. 세빌의 발에 입맞춤을 한 두 사람이 눈물을 머금은 음성으로 외쳤다.
 “위대한 카이젠 제국은 영원할지어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황제 즉위식이었다.
 왕관이나 왕홀은 물론 황제의 상징인 붉은 망토조차도 걸치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는 대관식이었지만 세빌의 가슴 속에는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도 수만 배는 무거운 무형의 황관이 얹혀지고 있었다.
 카이젠 제국의 미래를 지켜낼 사람은 어린 황제인 그 자신뿐이었다.
 세릭 황태자가 천장으로 시선을 향한 채 말했다.
 “이제 제국기사단장의 허트 소드를 받아라.”
 눈물을 쏟으며 세빌이 피 묻은 허트 소드를 빌로엔 백작에게서 받았다.
 “그 허트 소드에 묻은 피는 오늘 황성을 지키다 죽어간 수천 기사의 것이다. 네가 돌아오는 날, 그들의 뼈를 네 손으로 수습해 란트 강물로 고이 씻고 이 피를 그들에게 돌려줘라.”
 “전……하!”
 “어서 약속해라!”
 병약한 황태자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굵고 강건한 목소리였다.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던 세빌이 절규하며 소리쳤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손을 내밀어라!”
 세릭이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진 검은색의 뭉툭한 반지를 빼내고는 세빌의 손가락에 끼웠다.
 “이안 대제께서 위대한 드래곤 라데니크에게서 이 반지를 받으시고 오우너가 되셨다. 그 후 황제의 문장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이니 한시도 몸에서 떼지 마라. 시간이 없다. 자, 대마법사는 속히 황제를 텔레포트 시키게.”
 말을 마친 세릭 황태자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병든 육신의 한계 때문에 어린 동생에게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만 참담한 심경과 더불어 제왕으로서의 길을 포기하는 인간적 고뇌를 보이기 싫어서인가.
 “전하! 저와 같이 가소서.”
 세빌이 간절히 외쳤으나 돌아선 황태자의 어깨는 견고하게 굳어 있었다.
 “어서 가라! 개국 공신이신 현학자 세빌로이 공의 후예가 레이풀 산맥에 있다고 들었다. 위기를 벗어나면 그곳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해라. 미안 하구나…….”
 세빌은 형의 마지막 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 험한 병마와의 기나긴 싸움에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울고 있었다.
 “형……!”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형’이란 소리가 세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황태자가 서출이라고 자신을 놀리던 두 황자를 크게 꾸짖어 혼내 줄 때부터였을까? 언제부터인가 그토록 불러보고 싶었건만 세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 한곳에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는 자기 통제의 울타리를 그로서는 쉽게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멸망이 목전에 보이는 이 순간, 이 마지막 순간에서야 세빌은 비로소 세릭을 형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굳건했던 황태자의 어깨가 떨렸다. 그리고 서서히 돌아선 황태자의 눈에는 그렁거리는 눈물이 가득 달려 있었다.
 “세빌, 이리 오너라!”
 마치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을 벌리고 있는 세릭에게 세빌은 달려들었다. 어린 세빌을 꼬옥 껴안은 황태자는 결국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토록 부르라고 했어도 안 부르더니……. 새어머니가 병든 나를 신경 쓰느라 어린 너를 소홀히 하다가 일찍 돌아가 버리셨으니 이 형으로서는 할 말이 없다. 더구나…… 험한 길로 너를 혼자 보내야 되니 더 면목이 없구나.”
 세빌이 형의 품에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형! 아니에요!”
 황태자는 눈물을 흩뿌리는 세빌을 떼어내고는 기사단장 빌로엔 백작을 향해 말했다.
 “빌로엔 경, 서두르시오!”
 “황제 폐하! 불경을 용서하소서.”
 말을 마친 빌로엔 백작이 어린 세빌을 번쩍 안아 들고는 마법진의 중앙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밖에서 날카로운 폭음이 들렸다.
 “실드가 깨어졌습니다. 대마법사는 속히 마법진을 발동하십시오.”
 “황제 폐하! 일단 텔레포트가 이루어지면 속히 그곳을 벗어나셔야 합니다. 드래곤들이라면 텔레포트의 흔적을 쫓아 쉽게 알게 될 겁니다. 목적지는 황성 남동쪽 100키에미엘 거리에 있는 얕은 개울입니다.”
 외치듯 주의를 준 타키오우스가 시약으로 그려진 마법진에다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이 층 복도에서는 큰 소란이 일고 있었다.
 “계속하십시오. 텔레포트가 끝날 때까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막겠습니다.”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를 독려한 빌로엔 백작이 바스타드 소드를 고쳐 잡고 복도로 튀어나갔다. 그 소란의 와중에도 눈을 감은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는 흔들림 없이 마법주문을 외웠고, 서서히 마법진은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파장을 일으키더니 뿌연 물의 막 같은 것이 세빌과 황태자의 사이에 생겨났다. 그것을 통해 걱정 가득한 황태자의 표정을 보던 세빌은 다시 눈물을 왈칵 흘렸다. 그 바람에 거무튀튀한 반지가 서광을 일으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뿌옇던 수막(水幕)이 세빌의 모습을 완전히 감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순간 황태자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으음……!”
 신음을 터뜨리는 그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런…….”
 검은색 로브를 둘러쓴 수도사 차림의 노인이 폐허로 변한 성 망루에서 불타는 황성을 느긋이 내려다보다 느닷없이 내지른 소리였다.
 “뭐야?”
 기사들의 시체더미에 앉아 붉은색 머리를 한 미남 청년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금발의 미인이 물었다.
 “쯔쯔! 어느 놈이 텔레포트로 탈출을 시도하는 모양이다. 드래곤 전쟁 때 쓸데없이 인간들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어서는……. 어떡할 거야?”
 수도사의 말에 이번엔 붉은 머리칼의 잘생긴 청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에이, 뭘 어떡해? 헬파이어 한 방 날려 버리면 될 걸 가지고 귀찮게 하네. 마법 주재자가 죽어 버리면 탈출을 하던 놈은 공간 미아가 되어 분해되어 버릴 텐데 뭔 걱정이야!”
 “헬파이어를? 그러면 다른 드래곤 일족들도 알아차릴 텐데. 더구나 분명 탈출하는 놈이 고룡 라데니크의 유물인 반지를 갖고 있을 지도 모르고 말이야.”
 붉은 머리칼의 청년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서 아까 브레스는 왜 날린 거야? 네가 먼저 인간들끼리의 내전같이 보이게 하자고 해 놓고선…….”
 로브를 둘러쓴 수도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야 이놈들이 인간인 주제에 내가 애써 만든 와이번 라이더들을 잡길래 화가 나서 그랬지.”
 “쓸데없는 소리! 그리고 라데니크의 유물이 완성된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 소멸된 고룡의 레어에 남겨진 몇 개의 흔적을 보았을 때에야 큰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납치한 황제를 심문 해본 결과 안심하게 되었지. 너도 들었잖아, 라데니크가 인간 황제에게 반지 하나만 딸랑 남겨 주었다는 말을. 설사 그게 완성됐다고 해도 인간이 그걸 익힐 가능성은 전혀 없어. 세상에 용언을 읽는 인간이라니, 꿈속에서 조차도 상상치 못할 일이야. 하하하!”
 청년이 크게 웃자 수도사가 입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하지만…… 그 반지에 정말 용언이 새겨져 있다면 어쩔 건데?”
 금발의 미녀는 인상부터 찡그렸다.
 “이봐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네가 그 반지를 가졌다고 치자. 그 순간 너는 다른 드래곤들의 적이 되는 거야! 드래곤 하트를 빼내는 마법을 용인해줄 순한 드래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아니, 오넬의 광룡 쿠레나가 알면 지금 우리가 했던 일들만으로도 찢어 죽이려 들 걸.”
 수도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호호호!”
 간드러지게 웃어 제친 금발의 미녀가 얄궂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레드 드래곤 일족의 고룡 라데니크가 저지른 실수를 남들 모르게 마무리 지어 다른 드래곤 일족들에게 미움을 사지 말자는 취지가 있는 것이니 만큼 아쉽지만 이만 끝내자.”
 붉은 머리의 청년이 망루 위로 가볍게 올라서며 외쳤다.
 “그래, 우리가 라데니크의 비어 있는 레어를 먼저 발견해서 천만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른 드래곤 일족들에게 우리 일족이 떼죽음을 당할 뻔한 일이야. 노망 난 일족의 고룡 덕분에 이 무슨 개고생이람! 본체 현신!”
 외침이 끝나자 그의 모습이 급격히 팽창하며 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불타는 듯한 짙은 붉은 색의 거대한 괴물로 바뀌었다.
 “으으…… 드래곤이다!”
 그 엄청난 광경을 본 반역 연합군의 기사 하나가 소드를 떨구며 외쳤고, 황궁 곳곳에서 싸움을 하던 기사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악 복도로 나와 짓쳐들어온 적들에게 소드를 내려치려던 빌로엔 백작도 창문을 통해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붉은 괴물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반역군 기사가 기회를 놓칠세라 육중한 검으로 빌로엔 백작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 순간 빌로엔 백작의 눈에 하늘을 가득 채운 강렬한 섬광이 화살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그것이 헬파이어인지 아니면 적의 검에 맞아서 생긴 빛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당장 텔레포트를 끝내!”
 뜨거운 통증 사이로 그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외침은 엄청나게 뜨거운 빛 무리와 함께 황태자의 침전으로 몰려 들어갔다. 타키오우스 대마법사는 백작의 외침 소리와 헬파이어의 열기를 한꺼번에 맞이해야만했다.
 “안 돼!”
 채 끝나지 못한 텔레포트의 물빛 막을 녹여낸 헬파이어는 곧장 절규를 토하는 황태자에게 달려들었다. 빛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그의 모습은 산산이 분해되었고, 절규 또한 사그라졌다. 헬파이어에는 그 어떤 존재조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무자비함이 숨어 있었다.
 육백 년 제국의 역사를 지탱해오던 궁성의 옹벽이 엿가락처럼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궁전은 물론 내성 일부까지 벌건 죽 덩어리로 만들어 버린 레드 드래곤이 하늘 높이 솟구치며 외쳤다.
 “이제 인간들은 저희들끼리 치고받으며 죽일 거야! 우린 그저 부채질해 주면서 구경이나 하자고.”
 그 뒤를 따라 다시 하나의 레드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호호호! 그 동안 음지에 숨어살던 몬스터들이 기어 나오면 더 볼만하겠네. 오랜만에 즐거운 유희가 될 것 같아!”
 두 마리의 레드 드래곤이 사라진 망루에는 검은 로브 차림에 수도사가 아쉬운 듯 벌건 죽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쩝, 아깝다!”
 자신이 만든 마검사들이 속절없이 죽어서 아까운 것은 아닐 터였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수도사의 눈에 붉은 광채가 쏟아졌다.
 “이 기운은……? 텔레포트가 계속 되고 있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높은 망루를 단숨에 뛰어 내린 수도사는 황성의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황성 밖에서 이 엄청난 광경을 입만 벌리고 지켜보던 수만의 병사들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헬파이어의 열기는 기류마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맑았던 하늘에 번개가 치더니 먹장구름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이내 제국의 멸망을 아쉬워하는 듯 세찬 소나기가 퍼부어졌다.
 벌건 용암의 죽 덩이 위로 빗물이 쏟아지자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식식 트림을 내뿜으며 허공으로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폐허로 변한 브론트 황성을 새벽안개처럼 감싸 버렸다.
 그날 하루 동안 수백 키에미엘 밖에서조차 그 하얀 운무를 볼 수 있었고, 그 하얀 구름을 보며 제국민들은 망연히 눈물을 흘렸다.
 오우너 이안 대제가 몬스터들이 활개 치던 대륙을 인간들의 세상으로 만든 지 오백구십 년이 되던 날의 일이었다.
 
 
 2. 광룡 쿠레나의 일생일대 실수
 
 차가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울창한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찬 숲 속에 흐릿한 구체가 생겨났다. 잠시 뒤, 일렁이던 구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대신 그 자리에는 슬픈 표정의 한 소년이 나타났다. 세빌 황자 바로 그였다. 부드러운 갈색머리칼을 한 소년의 눈에는 채 마르지 않은 눈물들이 묻어 있었다.
 텔레포트가 가져다 준 어지럼증이 가시자마자 세빌은 그 도중에 느꼈던 지독한 뜨거움을 생각해냈다. 세빌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아……, 분명 궁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으윽!”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세빌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아무리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지만 막상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힘에 겨웠다.
 차가운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고개 숙인 채 한참을 소리 없이 울던 세빌이 마침내 얼굴을 들었다.
 “이러고 있어선 안 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선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타키오우스 대마법사가 말했던 개울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하늘을 찌를 듯 빽빽이 들어차 있는 거대한 침엽수들이 위압적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텔레포트의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 뜨거움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로 짐작만 될 뿐이었다. 차가운 빗줄기 사이로 뿌옇게 보이는 높고 험준한 산들의 꼭대기는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정도의 식생(植生)을 보려면 황성에서 수천 키에미엘을 북쪽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설마 그 정도나 멀리 텔레포트가 되었단 말인가?”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황성을 습격한 드래곤이 텔레포트의 흔적을 찾아 뒤따라오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가파른 비탈로 이루어진 지형을 대략 살핀 세빌은 일단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인가가 나올 것이고,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여기가 어디인지는 바로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가까운 도시로 숨어든다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자신을 찾기는 쉽지가 않을 터였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황성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 그는 대륙의 지도가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만 알게 된다면 레이풀 산맥으로 가는 쉬운 길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어떻게 이 절벽에 가까운 비탈을 내려가느냐였다. 아무런 장비도 없는 어린 세빌에게 울창한 수풀의 산 속 비탈을 내려가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비가 오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차가운 비가 재닛 속을 적시며 들어오자 세빌은 한기를 느꼈다.
 “이대로는 몸이 굳어져서 더욱 위험하다.”
 세빌은 내리는 비에 젖어 이마까지 가린 갈색 머리카락들을 쓸어 넘겼다. 앞에 보이는 나무둥치를 목표로 한쪽 발을 먼저 내밀었다. 그리곤 다시 한쪽 발. 눕다시피 해서 몸의 중심을 낮추자 아쉬운 대로 조금씩 비탈을 내려갈 수가 있었다.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내려가느라 그의 여린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침엽수의 뾰족한 잎들이 헤진 세빌의 손을 후벼 팠고, 질퍽거리는 빗물은 상처를 짓이기며 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깟 손의 통증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아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심한 자책감을 그 고통으로나마 잠시 덜 수 있었으니.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세빌이 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목표로 정해 놓은 큰 전나무의 밑둥치로 막 발을 내딛으려던 순간, 그가 의지하고 있던 나뭇가지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아악!”
 조급한 마음에 너무 먼 거리의 나무둥치를 선택했던 탓이었다. 때문에 탄력이 다한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부러져 버렸던 것이다.
 중심을 잃은 세빌의 몸은 울퉁불퉁한 산비탈을 속절없이 굴러 내렸다.
 쿵
 다행히 여러 갈래로 줄기가 솟은 가문비나무에 걸려 멈추어 설 수는 있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과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으려 했던 오른쪽 손바닥은 길게 찢어져 있었고, 그 벌어진 상처 틈으로 빨간 선혈이 울컥 솟아났다.
 손을 쥐었다 펴 본 세빌은 지혈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뼈엔 이상이 없구나. 하지만 발목이…….”
 겹질렸는지 양쪽 발목으로부터 통증이 밀려오자 세빌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겨우 이십 미엘을 오고서 이 모양이라니.”
 이래 가지고는 이 산 속에서 굶어죽거나 얼어 죽기 딱 십상이었다.
 “세빌, 침착해라! 그리고 방법을 생각해봐!”
 주저앉으려는 자신에게 혼잣말을 외치자 흥분됐던 가슴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다른 곳에 부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산비탈을 굴렀음에도 그나마 상체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는 듯싶었다.
 반역군들이 쳐들어오기 직전 세릭 황태자의 명으로 입게 된 두터운 가죽 재닛 덕분임을 안 세빌은 다시 눈물이 솟구치려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이 허비(북쪽 지방에 사는 곰과의 동물) 가죽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거다. 웬만한 화살과 검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다.’
 어른용이라 조금 큰 듯한 재닛을 입고 있는 세빌을 보고 세릭 황태자는 씁쓸히 웃었다.
 ‘그것으로라도 네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만…….’
 세빌도 형 세릭 황태자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세릭 형!’
 황태자의 절절한 애정을 받고도 그때는 왜 표현을 못했던가? 좀더 일찍 형에게 애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속으로 형을 부르던 세빌의 머리에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
 “해보자!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세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입고 있던 두툼한 가죽 재닛을 벗기 시작했다.
 두툼한 허비 재닛을 둘러 쓴 세빌은 목을 최대한 구부려 숙이고 머리와 상반신에 온통 옷 꾸러미를 쑤셔 박았다. 그것도 모자라 주위에 널린 낙엽들을 끌어 모아 허비 재닛을 최대한 둥글게 만들고는 내복을 찢어 만든 끈으로 전신을 칭칭 감았다. 혼자서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일단 살겠다고 결심을 굳힌 세빌의 몸놀림은 의외로 능숙하게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국을 완전히 없애시려면 여기서 저를 죽이십시오. 여기서 저를 죽이지 못하면 앞으로는 제 뜻이 다해야 죽겠습니다.”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 세빌은 마침내 산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구부린 고개 때문에 자신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운명에 맡길 따름이었다.
 처음 닥쳐 온 충격은 그나마 견딜 만했다. 나무 둥치에 받혀 잠시 주춤거린 허비 재닛 공은 다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탄력을 받은 세빌의 허비 재닛 공은 엄청난 속력으로 미끄러져 내리며 그에게 심한 타격을 주었다.
 엄청난 가속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허비 재닛 공 앞을 쓰러져 있는 집 채 만한 나무줄기가 막아섰다. 세빌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멈추기엔 너무 늦었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나무줄기가 먼지를 피워 올리며 박살이 났고, 큰 충격을 받은 세빌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다행이라면 쓰러진지 오래되어 부식이 많이 된 나무줄기와 부딪쳤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서진 것은 나무가 아니라 세빌이 되었을 것이다.
 세빌이 의식을 잃든 말든 다시 미끄러지기 시작한 허비 재닛 공은 한참을 더 산 아래를 향해 우당탕거리며 내려갔다.
 잠시 후, 숲이 끝나고 비탈이 멈추는 곳에 도착한 재닛 공은 서서히 그 속도가 줄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비탈 끝에는 커다란 협곡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산세가 가파른 만큼 협곡의 깊이 또한 깊었다. 협곡의 아래에는 겨울눈이 녹아내리면서 일으킨 엄청난 격류가 하얀 포말을 휘날리며 흘렀고, 격류에 깎인 뾰족한 바위들이 야수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군데군데 솟아 있었다.
 비탈의 끝을 향해 서서히 구르는 재닛 공 안의 세빌은 이 위험을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어린 그가 참기엔 지금까지 일어난 일만으로도 너무 힘든 충격과 부상이 가해진 탓이었다.
 비탈의 끝으로 갈수록 점점 협곡 쪽으로 내리막이 깊어졌다. 재닛 공이 구르는 속도는 그에 맞춰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세빌이 의식을 차린다면 충분히 멈추어 세울 수 있는 속도였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완전히 꺼진 촛불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비탈 끝에 다다라 벼랑에 있는 돌 때문에 잠시 멈칫거린 세빌의 재닛 공이 빙그르 돌더니 돌과 함께 그대로 협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칠흑이라는 단어조차 부족할 정도로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절대 고요 때문에 더욱 어두워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 어둠의 심연은 태초의 성스런 암흑과는 전혀 다른 사이(邪異)함이 깃들어 있었다.
 번쩍
 어둠 가운데서 찬란한 두 개의 황금빛이 생겨남과 동시에 천둥이 한꺼번에 엉키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크르렁!”
 찬란한 금광(金光)이 일시에 어둠을 몰아냈다. 아니, 어둠이었던 존재 자체가 황금빛으로 변했다는 게 정확했다.
 뜨거운 브레스를 반들거리는 콧구멍을 통해 내쏟고 있는 황금빛의 정체는 한 마리의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었다. 몸체 여기저기 가득 있는 흉측한 상처들은 에이션트 골드 드래곤이 살아온 생애와 관록이 상당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카악! 도저히 못 참겠다! 이것들이 이 쿠레나 님을 뭐로 보고 내 지붕 위에서 설쳐대는 거야?”
 대륙 동북쪽 내륙에 위치한 오넬 산맥에 레어를 틀고 구천 오백 년을 살아온 에이션트급 골드 드래곤 아슈르 레이 쿠레나가 요동을 치는 바람에 협곡 절벽에서 거의 일백 미엘을 안으로 파고든 그의 견고한 레어까지도 흔들리는 듯했다.
 “크아! 한 십수 년은 더 뭉그적거리다 일어나려 했건만 이것들이 도움이 안 되네. 좋다, 그렇게 빨리 죽고 싶다는데 이 현룡께서 수수방관해서야 되겠어!”
 쿠레나가 혼잣말을 하는 와중에 용언 마법을 펼쳤는지 거대한 레어가 일시에 환해졌다.
 근 육백 년간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 잠 끝이 가져다주는 노곤함을 즐기느라 얼마 전부터 협곡 아래쪽에 겁 없는 인간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것도 가만 놔둔 그였다. 드래곤에게 얼마 전이라곤 해도 인간에게는 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었지만 말이다. 한데, 오늘 드디어 게으르고 늙은 광룡 쿠레나를 제대로 열 받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조금 전, 뒹굴 거리며 조용히 몽상을 즐기던 쿠레나는 불현듯 덮쳐온 불안감에 어리둥절해졌었다. 자신이 레어 위쪽에 펼쳐 놓은 결계 마법에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 순간, 잠기운이 싹 달아나 버렸다.
 ‘적인가?’
 그러나 긴장했던 쿠레나는 이내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침입자의 기운을 읽고 별 볼일 없는 마법사 인간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데, 이 마법사 인간이 드래곤 레어 영역에 들어왔으면 빨리 도망쳐 살아나갈 생각을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레어 쪽으로 접근해오는 것이 아닌가?
 ‘익? 이 자식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내가 소멸된 줄 알고 레어를 털러 온 게 분명해! 하…… 이거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자긴 했나봐. 저런 레어 스캐빈저가 다 올 정도니…….’
 생각할수록 열이 돋는지라 쿠레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번쩍 뜨고는 겁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리라 다짐했다.
 “우선 저 레어 스캐빈저 놈을 시식하고, 인간들 도시 몇 개를 날려 버려? 아! 그 놈이 방해만 안 했더라도 육백 년 전에 인간 놈들은 씨가 말랐을 것인데…….”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부은 쿠레나가 거대한 금빛 날개를 펴고는 빠르게 입구로 날아갔다.
 절벽의 입구로 나가려던 쿠레나의 눈에 검은 물체가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흥! 누구 마음대로…….”
 쿠레나가 입을 크게 벌리자 한참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둥근 형태의 물체가 솟구쳐 올랐다.
 “네놈이 내가 나오는 걸 눈치 채고 겁에 질려 자살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만 어림도 없다.”
 어느새 검은 물체는 쿠레나의 강력한 앞발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뭐야? 이거 꼬마 놈이잖아?”
 너덜거리는 가죽 사이로 피투성이인 어린애가 보이자 쿠레나의 금빛 얼굴이 더욱 흉측하게 변했다.
 “이 인간 놈들이 갈 데까지 간 모양이네. 이런 애새끼들까지 스캐빈저가 되었으니…….”
 혼잣말을 하던 쿠레나의 머리가 살짝 기울어졌다.
 “근데…… 이상하네? 이런 복장으로……. 게다가 이놈에게선 마법의 냄새가 전혀 안 나는데?”
 잠시 흥미를 보였던 쿠레나는 이내 광룡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어린애든 아니든 레어에 기어든 놈에겐 죽음뿐이다. 설사 그 놈이 드래곤이라 해도 말이다!”
 쿠레나의 번쩍이는 이빨들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나자 레어 입구는 온통 살기로 얼어붙는 듯했다.
 가끔 심심할 때 고블린이나 와이번 같이 딱딱한 가죽을 가진 놈들을 씹는 맛도 괜찮았다는 것을 생각해낸 쿠레나는 재닛 공을 통째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쿠레나의 뇌리를 울리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하하하!
 “응?”
 놀란 쿠레나가 얼른 입을 닫았다.
 “이건…… 봉언마법!”
 일정한 물체에 마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봉인해 두었다가 조건이 충족되면 자연스레 펼쳐지게 하는 최고위급 마법, 그것이 바로 봉언마법이 아니던가. 그런 마법이 느닷없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아무리 광룡이지만 아니 놀랠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다, 광룡 아슈르 레이 쿠레나! 쯔쯧, 아직도냐? 근 일만 년을 살고도 어린 헤츨링 시절의 식습관을 고집하니 네놈이 광룡으로 불리는 게야.
 쿠레나의 날카로운 벼슬들이 쭈뼛 날이 섰다. 자신의 최대 치부를 건드리다니……. 드래곤들은 성룡이 되면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마나로 신진대사를 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하트가 완성되기 전인 헤츨링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들처럼 신진대사를 위해 먹어야만 했다. 마치 인간이 영아기에 젖을 먹고 살 듯이.
 “너, 넌…… 레드족 고룡 라데니크? 크아악! 이 모든 게 네놈의 장난이었더냐?”
 ―광룡인 네놈의 성질로야 길길이 날뛰고 있겠지만 이건 봉언마법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친구.
 “끄아아…… 친구? 네가 내 친구?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이 인간족 옹호자 놈이 내 친구? 흥! 웃기고 있네. 내 당장 네놈부터 찾아내서 쳐 죽이고 대륙의 인간들도 몰살시켜 줄 테다.”
 금빛을 더욱 선명히 하고 광분하는 쿠레나의 뇌리에 다시 봉언마법이 펼쳐졌다.
 ―아마 네 놈은 나를 욕하느라 봉언마법을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너는 들어야 돼. 왜냐고? 네가 나의 봉언마법을 듣고 있을 때면 나는 이미 소멸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 테니까.
 쿠레나의 금색 벼슬이 일순 빛을 잃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
 ―이제부터 집중해서 내 얘길 들어주게. 더 이상 네 더러운 성질을 기다려 줄만큼 나도 좋은 성질이 아니란 건 잘 알 테니까.
 “이 자식은 꼭 표현을 해도…….”
 속으로야 열이 받쳤지만, 라데니크가 봉언마법을 보낸 이유가 궁금해진 쿠레나는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우선, 나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자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 자네와 나는 드래곤 전쟁 이전부터 무지 싸웠었지. 그때마다 인간들이 쓰는 저속한 욕설까지 배워다가 서로를 모욕 주느라 참 많이도 애썼던 게 기억나네.
 “그랬었지. 욕 잘하면 좀더 살려두고 잘 못하는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꿀꺽…….”
 라데니크의 얘기로 오천 년 전 기억을 되살린 쿠레나였으나 이어지는 라데니크의 봉언마법을 듣기 위해 회상을 멈추어야 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지상 최고의 생명체라는 우리 드래곤들도 언젠가는 그 동안 빌려 쓰던 마나를 자연으로 되돌려주고 소멸되는 존재일세. 살아있을 때에야 신에 버금간다고 기고만장하지만 우리는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지. 거기서 문제는 발생하네. 왜 자네는 만 년을 굳이 살고 싶은가? 살아서 뭘 할 것인가? 어차피 소멸될 존재가.
 “이 자식이 왜 그래? 사는 자체가 좋은 거지, 유희도 즐기고. 하여간 웃기는 놈이야!”
 쿠레나는 라데니크의 현학적인 질문에 되레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계속되는 라데니크의 마지막 전언을 아니 들을 수는 없었다.
 ―분명 자네는 나를 우스꽝스럽게 보겠지. 하찮은 인간족들에게 왜 그리 애정을 쏟느냐며 빈정거리던 자네였으니까 말이야. 나를 굳이 이해해달라고는 하지 않겠네. 소멸되길 결심한 옛 앙숙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고 내 얘기를 들어주게나. 자네처럼 나도 참 오랫동안 살아왔고, 별의별 유희와 마법으로 드래곤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네. 오죽했으면 드래곤들끼리 전쟁까지 벌였겠나? 하여간 그 전쟁에 다른 종족들을 끼어들게 한 것부터가 잘못인지도 모르지. 특히 인간족을 전쟁에 끌어들여 그들에게 마법과 지혜를 가르친 것은 우리 드래곤 일족의 치명적인 실수였어.
 우리 드래곤들에 비해 인간들의 수명은 너무도 짧지. 그래서 특별히 위협적이지 않다 생각했는지도 몰라. 기껏 마법을 가르쳐 주어도 수명이 짧은 인간들이 어떻게 제대로 쓸 수가 있겠냐고.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우리와는 달리 대를 이어 전수하는 방법이 있었던 거야. 자신이 아니라 먼 후대의 자손이 그것을 익힐 때까지 배움을 이어주고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더란 말이지.
 그래봤자 미개한 인간족들이 얼마나 발전하겠냐고? 천만의 말씀. 인간들이 그런 전통을 고수한다는 자체 만으로야 나도 동감일세. 그런데 인간들에게도 우리 드래곤들 못지않은 다양한 감정과 욕망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 아니, 그 하찮은 수명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 드래곤들조차 넘보지 않았던 신의 세계에까지 도전하는 과욕이 있더란 말이다.
 인간들을 연구하면서 알게 된 이 사실에 나는 전율을 금치 못했네. 감히 신권에 도전을 하는 생명체라니……. 위대한 우리 드래곤 일족들도 꿈꾸지 못하는 일을.
 이미 더 이상 산다는 것에 흥미를 잃은 나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자못 결과가 기대되는 일이었지. 드래곤 하트를 인간이 가지게 된다면 그 인간은 과연 신에게 도전할까?
 “이 미친 드래곤이 대체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짓을 벌인 거야? 혹시……?”
 쿠레나의 커다란 금색 눈동자가 눈에 띄게 급격히 수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어차피 소멸되기 직전에 대지로 환원시켜 버리게 될 드래곤 하트를 나는 인간에게 줄 생각이야. 그래서 나로서는 상상도 못해 온 신들에게 도전을 하는 생명체를 만들 테다.
 “이 미친……. 그럴 바에야 나한테 넘겨!”
 ―자네가 내 얘길 듣고 있을 때면 이미 내 결심은 실행된 상태일 거야. 내 드래곤 하트를 가지게 된 인간에게 봉언마법을 펼친 반지를 줄 것이고, 그 후예 중 하나가 너를 만나고 있을 테니까.
 “라데니크, 네 놈이야말로 진짜 미친 용이다. 어떻게 인간에게 드래곤 하트를 줄 수 있어? 이 미친 드래곤아!”
 격분한 쿠레나가 허공을 향해 외치고는 손에 들린 재닛 공 안에 인간을 살폈다.
 “그럼…… 이 비쩍 마른 꼬마 놈이 그 후예?”
 ―자네가 깨어날 때쯤 반지를 가진 자가 텔레포트를 실행하게 되면 자네 레어 근처로 떨어지게 반지에다 마법을 걸어두었네. 인간만 보면 무조건 죽이는 자네 습성을 봉언마법의 필요조건으로 해 놓았으니 자네는 반드시 이 봉언마법을 듣게 될 테지, 안 그런가?
 “어이구, 그래 너 잘 났다.”
 자신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던 숙적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그가 그리워진 쿠레나였다.
 “그래, 잘난 네 놈이 내 부아를 돋우려고 이런 시시껄렁한 봉언마법을 펼쳐 놓은 거냐?”
 쿠레나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라데니크의 봉언이 쿠레나의 머릿속을 울렸다.
 ―자네를 화나게 할 생각으로 이 봉언마법을 남겨 놓는 것은 아닐세. 단지, 내가 소멸되고 나면 방해자가 없어져서 자네가 광룡이란 이름에 걸맞게 얼마나 인간들을 괴롭힐지가 사뭇 염려되더라구.
 “에잉?”
 ―놀랄 거 없어. 이 봉언마법 속에 내가 평생을 연구해온 심혼마법도 같이 펼쳐 놨네. 그럼, 잠시 후에 천계에서 만나세. 아, 세상에 너무 미련을 두진 말게. 일만 년을 살았으면 살만큼 살았고, 나 없는 세상에 무슨 재미로 살 텐가? 이 봉언마법을 너무 방심한 자네 잘못도 있고 말이야, 하하하! 게다가 자네가 남겨 준 드래곤 하트가 과연 무슨 일을 해낼지 어찌 알겠는가?
 쿠레나의 금빛 벼슬들이 다시 쭈뼛 솟았다.
 “이, 이게 무슨 말이야? 심혼마법? 아아아악! 맞아, 이놈이 그 동안 비밀리에 연구해 왔다는 마법이 심혼마법이었어. 근데, 대체 어떤 마법이지? 드래곤 하트를 빼내는 마법인 것 같은데…….”
 급히 탐색마법을 펼쳐 주변의 마나 움직임을 탐지한 쿠레나는 별다른 이상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이 미친 드래곤이 뭔 수작이야? 공격 마법이란 주체자가 마나를 운용하든지 용언을 펼치든지 해야 되는 거잖아. 한데, 뜬금없이 봉언마법 속에 또 다른 마법을 펼쳐서 공격하겠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쿠레나의 시선에 재닛 공 안의 인간 꼬마가 눈에 띄었다.
 “미친! 내가 왜 이런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인간에게 드래곤 하트를 주고 소멸해? 한입거리면 딱 좋겠구만.”
 입맛을 다시던 쿠레나의 눈에 재닛 공의 한쪽 면으로 삐죽이 나온 소년의 피 묻은 손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피 묻은 손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물체를 본 것이다.
 “어, 반지? 아하, 이게 라데니크가 남긴 그 반지로구나. 어디 보자.”
 거무튀튀한 색깔의 반지는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묵빛으로 반짝이는 것 빼고는 별달리 특이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세공에 재능 있는 드워프들이라면 발로 만들어도 그보단 모양새 있게 만들 정도로 투박한 반지를 보고는 쿠레나는 크게 실망했다.
 “기왕 봉언마법에 쓸 거면 좀 이쁘게나 만들든지. 근데, 이 문양은 뭐지?”
 워낙 특색이 없는 반지인지라 쿠레나는 그나마 툭 튀어나온 반지 알에 시선을 모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크와와왁! 거창하게 심혼마법이니 뭐니 해서 나를 잔뜩 긴장시키더니 이 치사한 라데니크! 반지에다 용언을 새겨 둬! 아아아악, 큰일이다. 그걸 모르고 무심결에 용언을 읽어 버렸으니…….”
 쿠레나의 거대한 몸통에서 일순간 금색 빛이 출렁거렸다. 라데니크의 공격 마법에 대비해 잔뜩 마나를 끌어 올렸던 그가 무심코 반지의 문양에 숨겨 새겨진 용언을 읽음으로써 자신 스스로 소멸마법을 펼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안 돼! 난 지금 소멸되긴 싫어! 앞으로 오천 년…… 아니, 단 천 년 만이라도 더 살 거란 말이다.”
 쿠레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는 현저하게 금색 빛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곤 결국 그 거대한 입 속에서 강렬한 화염덩어리가 솟구쳐 나왔다.
 찬란한 태양 아래 근 일만 년간 쿠레나를 유지시켜온 드래곤 하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안 돼! 돌아와!”
 쿠레나의 크나큰 외침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의 몸을 떠난 드래곤 하트는 한 번 크게 금색 빛을 발하더니 거무튀튀한 반지를 낀 인간의 손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라데니크의 반지를 통해 순식간에 새로운 보금자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얻어 쓰던 마나의 응축된 덩어리 드래곤 하트.
 드래곤들은 소멸하기 직전 그것을 뱉어 대지 속으로 돌려보내는 법이었다. 다른 드래곤이나 생명체들이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강해지는 것을 용납할 만큼 너그러운 드래곤은 이 세상에 없었다.
 자신의 입 속에서 튀어나온 화염 덩어리가 라데니크의 바람대로 인간족의 꼬마에게 흡수되는 것을 에이션트급 골드 드래곤 아슈르 레이 쿠레나는 공포에 물든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한번 금색 빛을 밝게 내비쳐 원 주인에게 작별을 고한 드래곤 하트는 어린 인간의 몸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마나를 잃은 골드 드래곤의 몸에선 황금빛 광채가 서서히 빛을 잃었고, 방금까지도 지상에 어떤 생물체도 감당하지 못할 힘을 가지고 있던 에이션트 드래곤은 발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 순간, 거대한 꼬리부터 분해되기 시작하더니 바닥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뒷발까지도 소멸되기 시작했다.
 쿠레나는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최후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천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살고 싶었다. 아직은 이 세상에 흥미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번 대지로 환원되거나 타 생명체에게 귀속된 드래곤 하트는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신이 이 세상을 유지하는 법칙이었고, 균형을 지키는 나름대로의 저울이었다.
 어느새 에이션트 골드 드래곤의 몸체는 흔적도 없이 레어에서 사라져버렸다. 구속에서 풀려난 재닛 공은 잠시 레어 입구에 서 있다가 쿠레나가 레어 안쪽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비탈을 만들어 놓은 바람에 서서히 협곡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을 얻은 재닛 공은 매끄러운 돌바닥을 미끄러져 마침내 천길 협곡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드래곤 전쟁을 주도했던 마지막 드래곤 쿠레나는 옛 앙숙이 만들어 놓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그렇게 어이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오넬 산맥의 대협곡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붉은 빛 무리가 생겨났다. 빛은 이내 거대한 드래곤의 형체를 갖춰 갔다.
 “이런! 왜 하필 광룡 쿠레나의 레어야?”
 온통 붉은 색인 드래곤이 붉은 눈을 희번득이며 대협곡을 바라보았다. 아쉬운 듯 입맛을 쩌억 다신 레드 드래곤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인간 마법사가 이 정도 멀리까지나 텔레포트를 시킬 수 있다니…….”
 레드 드래곤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 주재자가 녹아내린 상황에서 텔레포트가 계속 이뤄진 것도 그렇지만 인간 마법사가 거의 9싸이클에 육박하는 텔레포트 마법을 펼치다니 말이다.
 “이상해, 이상해. 나도 세 번의 텔레포트를 연속으로 펼쳐서야 간신히 도착한 건데…….”
 혼잣말을 되뇌던 레드 드래곤의 벼슬이 한순간 바짝 섰다.
 “혹시 이거…… 망령든 라데니크가 수를 써 놓은 거 아냐? 그렇다면…….”
 그러나 잠시 후 레드 드래곤은 머리를 가슴에 파묻으며 괴로워해야 했다.
 “이해가 안 돼! 라데니크와 광룡 쿠레나는 절대 숙적이잖아? 그런데 숙적에게 자신의 후견자를 보낸다?”
 레드 드래곤의 입에서 가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 광룡 쿠레나의 레어만 아니라도……. 라데니크의 마법만 얻을 수 있다면 쿠레나든 뭐든 두려울 게 없을 텐데. 게다가 드래곤 로드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쿠레나야?”
 이미 소멸돼 버린 라데니크에게 원망을 퍼부은 레드 드래곤은 붉은 눈을 한 번 더 희번덕여 협곡을 보았다.
 “절대 포기할 순 없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지를 찾고야 말 테다. 일단 돌아가서 다른 드래곤들이 눈치 못 채게 해 놓자. 그들이 내 행동에 의심을 가지게 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레드 드래곤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산등성이에 먼지가 확 피어올랐다. 육중한 레드 드래곤의 동체가 거짓말처럼 사뿐히 날아올랐고, 순식간에 하늘 높은 곳에 이르렀다.
 “어쨌든 쿠레나에게 잡혀 먹히지만 말아다오. 그러면…… 쿠하하하!”
 
 
 3. 드래곤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
 
 여긴 어딘가? 아련한 움직임이 느껴지자 세빌은 정신을 차렸다. 눅눅한 습기가 가득하고 침침한 어둠이 언제나 머물 것 같은 통나무 천장이 세빌의 눈에 비쳤다.
 자신이 분명 허비 재닛 속에서 정신을 잃었었다는 것을 깨달은 세빌은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곧 전신 마디에서 일어난 엄청난 통증에 신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으음…….”
 통나무 원탁에 앉아 있던 귀여운 인상의 흑발 소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외쳤다.
 “어? 깨어났네.”
 소녀의 손에는 두툼한 모피가 들려 있었다. 다급히 일어난 소녀가 세빌에게로 다가와 걱정스런 눈길로 보았다.
 세빌은 그녀의 눈매가 무척 부드럽다고 느꼈다. 황성에서 보아오던 어여쁜 시녀들이 보내던 것과는 다른 시선. 뭐랄까 진심이 깃들어 있다고나 할까.
 소녀의 입술이 열렸다.
 “얘! 많이 아프지? 그냥 누워 있어. 아버지 말씀으로는 당분간 거동이 힘들 거래.”
 부드러운 음색이라서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세빌은 생각했다. 그는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린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감당 못할 통증이 일어날 것 같았기에 다시 누울 수도 없었다. 또한 통증이 아니라도 이렇게 편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그였다.
 몇 번의 호흡으로 통증을 눅인 세빌이 겨우 입을 열었다.
 “후……. 여기가 어디지?”
 소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곤 되레 물었다.
 “여기가 어디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는 절대 사람이 들어가선 안 되는 드래곤의 협곡에서 떠내려 왔어.”
 세빌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좀더 들어서는 가까이 다가온 소녀를 찬찬히 살폈다.
 나이는 자신 또래쯤. 까만 흑발을 뒤로 단정히 묶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갸름하고 단아한 인상이었다. 머리 색깔에 어울리는 갈색 눈동자는 강한 궁금증을 담고 있었지만 세빌은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협곡?”
 세빌의 반문에 소녀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오넬 산맥의 드래곤 협곡 몰라? 에이션트급 광룡 쿠레나가 잠들고 있다는 전설의 협곡.”
 ‘여기가 오넬 산맥? 브론트 황성에서 수천 키에미엘 밖에 있는? 정말 어떻게 된 건가?’
 세빌이 인상을 찌푸리자 흑발 소녀는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니 설명해 줄게. 우선 누워.”
 그러나 세빌은 누울 수가 없었다. 만일 여기가 자신이 텔레포트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세빌은 간절한 표정으로 흑발 소녀를 보고 말했다.
 “난 세빌 키안이야.”
 세빌 키안은 어릴 적 그의 엄마가 부르던 이름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여기로 텔레포트되어 왔고, 머잖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추적자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을 거야.”
 소녀의 커다란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텔레포트? 그럼, 마법사?”
 “마법사는 아냐. 단지 마법사가 나를 보낸 거지.”
 소녀가 묘한 눈빛으로 세빌을 보며 말했다.
 “그럼, 그 비싼 허비 재닛하며 연약한 피부…… 너 혹시 귀족이니?”
 군데군데 터진 세빌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귀족? 순간적으로 정체를 밝혀서는 곤란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그가 통증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귀족은 아냐!”
 소녀의 묘한 눈빛이 풀렸다.
 “귀족이 아니라면 다행이야. 아빠는 귀족을 아주 싫어하거든. 네 차림새를 보고 건져낸 것을 후회하실 정도였으니까, 호홋!”
 세빌은 웃는 소녀의 가지런한 이가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흑발 소녀는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 앞에서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미안, 난 레르넨이야. 레르넨 뉴크. 너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알려줄게. 뭐부터 들을래?”
 소녀의 짓궂은 표정을 보자 세빌은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천진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표정. 브론트 황성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표정이 소녀에게는 있었다. 다급하기만 하던 세빌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레르넨, 좋은 소식 먼저.”
 세빌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레르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럼 좋은 소식부터. 이 일대는 제국법이 정한 인간 활동 금지구역이야. 특히, 마법사나 기사들이 출입해서는 안 돼! 에이션트급 광룡 쿠레나의 레어가 이 협곡 근처에 있대. 만일 그 드래곤이 깨어나는 날에는 상상치 못하는 재앙이 대륙에 올 거라는 전설이 있어.”
 세빌이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자 신이 난 레르넨은 얼굴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그런 이유로 여기는 쟈이넨 영지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아니지. 즉, 너를 추격해 올 기사나 마법사는 여기 올 수가 없다는 얘기야.”
 ‘그렇지만 추적자가 드래곤인 걸.’
 세빌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지자 레르넨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세빌 키안! 추적자가 없을 거라는데 왜 얼굴이 굳어지니?”
 민망한 얼굴로 레르넨이 묻자 세빌은 안색을 바꿨다. 걱정한다고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자신으로 인해 이 밝은 얼굴의 소녀가 울상을 짓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레르넨, 나쁜 소식은 뭐지?”
 세빌이 금세 밝은 얼굴로 돌아오자 레르넨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며 세빌은 다짐을 했다.
 ‘세릭 형, 타키오우스 대마법사, 빌로엔 경. 앞으로 저는 많이 웃을 거예요. 그렇지만 모두를 잊지는 않을 겁니다. 세 분의 희생을 본 저로서는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가 않아요.’
 레르넨이 더욱 짓궂은 표정을 한 채 세빌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게 깔아 굵고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세빌 키안! 너는 이제부터 한 달간 대륙의 무법자 골드 드래곤 쿠레나의 포로가 되었다.”
 자기 딴에는 무서운 목소리로 말한다고 한 것이 소녀 특유의 음색과 어울리자 찢어지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레르넨의 볼이 빨개졌다. 홍당무가 되어 가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보던 세빌이 드디어 웃고 말았다.
 “하하하하!”
 그러나 세빌은 더 이상 길게 웃을 수가 없었다. 만신창이로 다친 상태인 그는 웃음이 일으킨 진한 통증으로 인해 한동안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레르넨이 혀를 한번 삐죽 내밀고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숙녀의 실수를 보고 웃다니 벌을 받아 마땅해!”
 장난스럽게 말하던 레르넨이 눈을 크게 떴다. 세빌의 상태가 이상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다 못해 눈까지 진득하게 감고 있었다. 놀란 레르넨이 세빌 가까이 바짝 다가들어서는 물었다.
 “세빌 키안! 많이 아파?”
 그때 세빌이 지척으로 다가온 레르넨을 향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외쳤다.
 “내가 골드 드래곤 쿠레나다. 감히 나를 광룡이라 했겠다.”
 “꺄악!”
 레르넨이 깜짝 놀라서는 비명을 질렀다. 두 배로 커진 레르넨의 눈을 보며 세빌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바로 또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멈췄다. 레르넨은 그런 세빌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드래곤 협곡 한쪽 사면에서 외롭게 지내던 산골소녀와 멸망한 대제국의 황제가 그렇게 웃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있었다. 그 웃음의 소재가 된 에이션트급 골드 드래곤이 이미 소멸된 줄도 모른 채.
 
 건초 냄새가 나는 나무침대에 드러누운 세빌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사이 레르넨은 통나무 집 한쪽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조용히 노래를 읊조리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알사스의 대영웅은 드래곤의 후예,
 하드 소드에서 일어난 번개가 노난 산맥을 쪼개었네
 번쩍이는 창날들은 드래곤의 비늘,
 기사 카로발의 날카로운 소드는 미스릴을 벤다네
 지혜로운 세빌루이,
 앉아서 일만 키에미엘을 보았네
 대륙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네
 어두운 저녁이 오면
 그들은 백마 타고 알사스 평원을 가로 질러오리라.
 
 호메세이의 영웅가는 세빌도 잘 아는 노래였다. 카이젠 제국을 연 이안 대제와 두 공신의 업적과 일대기를 그린 이 노래는 대륙 곳곳에 퍼져 지금도 즐겨 애창되는 호쾌한 노래였다. 그러나 오늘 세빌에게는 그 노래가 너무도 슬프게 들렸다.
 잠시 후, 세빌은 그 생각을 지우고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레르넨의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레르넨은 사냥을 하는 아버지와 오빠하고 셋이 이곳에 산다고 했다. 드래곤 협곡은 오넬 산맥의 중간 지점인 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다는 것과 지금 통나무집이 있는 위치는 드래곤 협곡의 하류라는 것, 드래곤 레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맥 쪽으로 갈 수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바깥세상으로 나가려면 협곡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겨울에는 폭설과 강풍으로, 봄에는 격류 때문에 길이 끊어져서 일년에 5월부터 10월초까지 고작 대여섯 달 정도밖에 바깥과 연결이 안 되는 오지가 이곳이었다. 드래곤이 깨어나면 당장 위험해지겠지만 워낙 아버지가 바깥세상을 안 좋아하고, 사냥감도 많은지라 그녀의 가족들은 제국법을 어기고 여기 숨어산다고 했다.
 레르넨의 가족에게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만 스스로 얘기를 안 하는 이상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었다. 세빌 자신도 밝히고 싶지 않은 얘기가 많았으므로.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세빌은 레르넨의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세빌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 그 시간 쟈이넨 영지, 선딘 시의 공작 저택에서는 호화로운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상석에 마련된 커다란 탁자에는 콧수염을 한 화려한 기사무복 차림의 히나스 도블 그루차노 공작과 고급스런 복장의 케인 황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 뒤로는 히나스 공작 근위기사대 키에나 대장이 형형한 눈빛을 한 채로 서 있었다.
 저택 밖에서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일고 있었고, 간간이 아쉬운 찬탄과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승전을 축하하는 쟈이넨 기사들의 친선 비무가 행해지고 있었다.
 기사들이 온통 그 비무에 관심을 두어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일면으로 쓸쓸해진 연회장이 되고 말았다. 어색한 연회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히나스 공작이 붉은색 포도주가 가득 찬 유리잔을 들어올리며 케인 황자를 향해 건배를 요청했다.
 “으하하하! 황제 폐하와 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이 잔을 올립니다.”
 케인 황자는 이미 반쯤 비어 있는 유리잔을 들어 히나스 공작의 잔 위에다 두면서 대답했다.
 “황제는 무슨……. 정식 대관식까지는 아직 이르오. 하여간 모두가 경의 노고 덕이외다.”
 “하하하! 제가 한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병약하시니 당연 둘째 황자이신 케인 저하께서 황제가 되셔야 순서 아니겠습니까. 한데, 저 오만한 황궁의 간신들이 황제 폐하께서 실종되신 틈을 타 제국을 찬탈하려 음모를 꾸몄으니 제후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 와중에 황태자 전하와 넷째 황자께서 돌아가시는 비극이 벌어지다니 신은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히나스 공작이 안타까운 듯 말을 끝내자 케인 황자의 기쁨 가득했던 얼굴에도 숙연한 빛이 흘렀다.
 “휴…… 어쩌겠소. 간신들이 끝까지 저항을 했으니……. 그나저나 다른 제후들은 모두 어찌 되었소?”
 “그것이……. 힘을 모아 간신들을 치기는 했으나 제후들 중에도 황관에 욕심을 내는 자가 더러 있습니다. 해서 혹시 모를 불상사를 우려해 모두 각자의 영지로 돌려보냈습니다.”
 케인 황자가 눈을 부릅떴다.
 “무엇이라고요? 누가 감히…….”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일시적인 동요일 뿐입니다. 황자께서 등극하시고 황명을 내리시면 대부분은 진정될 것입니다. 다만 몇몇 제후들은 본보기로 처형을 하셔야 할 줄 아옵니다.”
 “하하, 경 같은 충신이 내 곁에 있어 참으로 든든하오.”
 히나스 공작이 미소를 짓고는 잔을 다시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제 잔을 받아 주십시오.”
 “하하하, 당연히 받아야지요. 그대는 카이젠 제국 재건국의 절대 공신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오.”
 잔을 받아든 케인 황자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키는 걸 본 히나스 공작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감사하오나 신은 그 영광을 사양하겠습니다.”
 케인 황자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히나스 공작의 얼굴 가득 떠오른 비웃음을 알아차린 케인 황자가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히나스 공작 뒤에 서있는 거구의 키에나 대장이 육중한 소드를 움켜쥐고 있었다. 케인 황자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을 보호해야할 친위기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연회의 와중에 일어난 친선 비무를 보기 위해 모두가 밖으로 나간 상황. 그때서야 히나스 공작이 수를 쓴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구원군은 멀리 있고 목을 치려는 적은 지척이었다.
 ‘연회라 검을 놓고 온 게 실수다.’
 일단 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 케인은 급히 불안한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히나스 공작의 공이라면 절대 공신으로는 부족하지요. 쟈이넨을 공국으로 영구 세습지화 해 드리지요.”
 “감사하오나 신은 모두 사양하겠습니다.”
 케인 황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왜……?”
 “말씀드리기 곤란하오니 더 묻지는 마소서. 또한 그 분을 거론해서는 저도 살아남기 힘드니 말입니다. 단지 신이 카이젠 제국을 이어서 새로운 제국을 만들 것만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케인 황자가 기겁을 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뒤에 버티고선 키에나의 날 선 검에 어깨를 눌리고 말았다.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폐하!”
 “나를…… 나를 죽이면 다른 제후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죽일 셈이냐?”
 “그런 점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아까 제가 드린 잔에는 소울 고스트라는 아주 희귀한 식물의 분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심령 마법과 어울리면 사람의 내재한 감성을 아주 솔직하게 해준다 하더이다. 아주 미치도록.”
 “커흑!”
 케인 황자가 황급히 구토를 하였으나 이미 위 속으로 들어간 술은 한 방울도 올라오지 않았다.
 
 
 “존재하는 모든 이유가 쾌락에 있음이니…… 영혼을 일깨워 즐겨라!”
 히나스 공작이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에서 광채가 흘렀다. 손에서 빠져 나온 광채는 케인의 머리를 감쌌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황성 전통의 검술을 연마해 웬만한 마법에는 대항할 마나를 가진 케인 황자는 황급히 마나를 머리로 올려 대항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해졌고,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나 키에나가 검집으로 머리를 강타하자 마법에 반항하던 그도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침내 심령마법을 완성한 히나스 공작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휴……. 저 어린놈이 벌써 마나를 운용하여 마법에 대항하는 3클래스급의 검사라니! 하여간 두려운 이안 황가의 맥은 이것으로 끝장이 났다. 물론 카이젠 제국도 말이다. 하하하하!”
 히나스 공작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을 때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공작 각하! 이제야 시작입니다.”
 “오, 키릴 경. 어서 오시오.”
 키릴 경이라 불린 사내는 말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그대를 얻은 것은 나의 복이오. 마치 이안 대제가 세빌로이를 만난 것과 같은. 하하하!”
 히나스 공작 뒤에 서 있던 키에나 기사대장의 안면이 옅게 일그러졌다.
 ‘굴러 온 돌 주제에…….’
 키릴이라 불린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태연히 말했다.
 “각하, 이제부터 허수아비 황제를 이용해 제국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지! 그래, 경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키릴이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도(帝都)가 이번 내전으로 완전히 폐허로 변했습니다. 또한 이안 황가의 적통으로는 케인 황자만이 남아 있고요.”
 히나스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이제 이곳 선딘 시를 제도로 공표하고 케인 황자의 즉위식을 거행하십시오. 물론 각 제후들에게 황명으로 즉위식에 참석하라 통보를 하시고요.”
 “그런다고 제후들이 올까?”
 “올 것입니다. 안 오는 제후들에게는 황명으로 작위를 폐(廢)하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작위를 폐한다는 것은 귀족의 지위를 뺏는다는 걸 뜻했다. 현재 전 대륙의 영주들에게 내려진 작위는 모두 카이젠 제국에서 내린 것이었다. 즉 황제의 명에 의해 작위가 사라진다면 영주들도 평민의 신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사태를 일으키는 문제였다. 영주의 작위가 사라진다면 바로 어느 기사라도 무력으로 그 영지를 뺏을 수 있다는 걸 뜻하므로. 그와 동시에 영주의 작위는 그 기사에게 승계되도록 제국 법은 정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대제국 카이젠이 지방 정부나 마찬가지인 영주들을 강력히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작위가 철폐된 영주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평 기사들의 수는 전 대륙에 걸쳐 수만에 달했다.
 평민이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기회! 황제의 명 하나만 내려지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귀족이 되기 위해 무리 지어 그리로 몰려가 죽도록 싸운다. 결국 아무리 군사력이 강한 영주라 해도 각개로 몰려든 수만의 기사들을 모두 상대할 수가 없었다. 즉 영주가 황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히나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근위기사대장 키에나가 소드를 불끈 쥐고는 말했다.
 “키릴 경, 이제는 명목뿐인 카이젠 제국이 뭐가 두렵다고 영주들이 호랑이 굴로 들어온단 말이오?”
 그리고는 히나스 공작을 향해 격한 어조로 말했다.
 “각하, 복잡하게 할 것 없이 허수아비 황제를 처형함과 동시에 새로운 제국을 선포하고 영주들을 치십시다. 저희 기사단의 힘이라면 대륙을 제압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히나스 공작은 격한 표정의 키에나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키에나 대장, 그건 아닐세. 당분간 케인 황자는 황제가 되어야 하네. 지난 육백 년간 카이젠 제국은 제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왔단 말이야. 황제의 명 하나라면 목숨을 불사할 열혈 기사들이 수만이야. 우리가 서둘러 황성을 친 이유도 결국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일을 마칠 심산이었어. 만일, 브론트 황성이 닷새만 더 버티었어도 멸망한 것은 도리어 우리 영주 연합군 측이었을 거야.”
 그런 사실을 생각하자 아찔해진 히나스 공작의 몸이 살짝 떨렸다.
 “다행히 우리를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이 와이번 라이더를 보내 주셔서 이런 승리의 자리가 있는 거라고. 내 말뜻을 알겠나? 허수아비 황제라지만 지금 우리들에겐 아주 강력한 원군이란 말이지. 즉, 황제를 모심으로써 우리는 제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받게 되는 거지. 후일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황제는 돌연사하고 말이야. 하하하하!”
 히나스 공작의 설명을 들은 키에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기가 꺾인 기사대장의 모습을 본 히나스 공작은 웃음을 거두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키에나 대장! 키릴 경이 나의 세빌로이 공이라면 자네는 나에게 위대한 용사 쿠로발과 같은 존재야.”
 이안 대제의 오른팔로 전설적인 영웅 쿠로발의 이름을 거론하자 키에나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상당히 감동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역력했다.
 “각, 각하!”
 “하하하! 키릴 경, 그리고 키에나 대장. 두 사람이 나를 도와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 주게.”
 키릴과 키에나가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흠, 좋아 좋아. 근데 키릴 경, 그래도 대관식에 나타나지 않는 영주들은 있을 거야. 대략 좀 뽑아 보게나.”
 키에나의 질문에 키릴이 미리 생각해 두었다는 듯 바로 얘기를 시작했다.
 “첫째 인물은 알사스 영주 카트 공작입니다. 자신의 영지에서 황제가 실종되는 바람에 제일 의심을 받고 있는 형편이지요. 아마도 이번 일로 공국을 선언하고 독립할 가능성이 큽니다.”
 “흐음, 워낙 영지도 크고 휘하 기사대 또한 만만치가 않지. 다음은?”
 “두 번째로는 루셀 영주 슈멜 후작입니다. 로스엘 강 서안의 비옥한 영지이고 대대로 세습 작위를 지켜온 명문이라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자도 야심이 만만치가 않지. 다음은?”
 “북쪽 평원의 야심가 키센스 백작은 아마 원거리를 핑계로 참석 안 할 가능성이 크며, 천험의 요새인 유키아 지방의 바이리 후작 또한 가능성이 큽니다.”
 제국 전체 105개 영지의 사정들을 철저히 분석한 키릴은 히나스 공작의 적이 될 소지가 큰 영주들을 차례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치밀한 분석과 간략한 설명을 들으며 히나스 공작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레이풀 산맥의 현학자에게서 수업 중인 아들의 소개로 키릴이란 청년을 수하로 맞았을 때만 해도 그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데, 한 달 전쯤 황제가 실종되는 사건이 터지면서부터 키릴은 자신의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예견한 대륙의 정세가 속속 맞아 들었고, 그가 내놓은 치밀하며 철저한 제국 건설 계획을 보는 순간 히나스 공작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흐흐흐! 이런 복덩이가 굴러들어 오다니…….’
 속으로 미소 짓던 히나스 공작의 눈에 연회장으로 다급히 들어서는 시녀가 보였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얼굴로 보아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안 히나스 공작은 황급히 키릴의 말을 끊고 시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시녀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그 분께서 공작 각하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히나스 공작의 눈이 금세 공포로 물들었지만 순식간에 일이라 아무도 눈치 채진 못했다.
 “어디 계시냐?”
 “각하의 집무실에 계십니다.”
 ‘모든 걸 나한테 맡긴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돌아 왔지? 혹시? 아냐!’
 세차게 머리를 흔든 히나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왜 두려워하는 건가? 나의 야망에 토양을 만들어 주신 분이다. 설사 내 영혼을 원한다 해도 줄 것이다.’
 시녀를 따라 연회석을 빠져나가던 공작이 키에나 기사대장을 향해 말했다.
 “황자를 깨워! 지금쯤이면 마법이 완전해졌을 거다. 일단은 멍한 상태로 한동안 정신없이 지낼 거야. 미인들과 술로 행복하게 해주라고.”
 
 “허억.”
 세빌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이 여전히 통나무집 침상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우…… 꿈이었군.’
 너무도 불길한 꿈. 브론트 황성 안이었다. 아버지 듀발 이안 황제를 비롯해 어머니, 케인 형, 세릭 형, 루보 형이 단란하게 모여 있었다. 너무도 반가워 세빌이 소리치며 뛰어가려 할 때 그 불길이 일었다. 땅 속 지옥에서 올라온 그 불길은 이내 황궁을 감쌌고, 브론트 황성 전체를 삼켰다. 그러나 그 불길은 그 걸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대륙 곳곳으로 번졌다.
 너무도 생생한 그 불길의 모습에 세빌이 비명을 지르고 깨어난 것이다.
 “괜찮아?”
 레르넨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리자 세빌은 고개를 들었다.
 원탁 중앙에는 짐승 기름으로 태우는 등잔불이 매캐한 냄새를 뿜으며 타고 있었다. 그 희미한 불빛 아래 레르넨의 아버지인 거구의 사내 톳트 뉴크가 식사를 멈추고 세빌을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아버지를 닮아 체형이 큰 청년 트레퍼 뉴크가 맞은편에 앉아 걱정 반, 호기심 반인 얼굴로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침상 가까이 다가선 레르넨이 멍한 표정의 세빌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나쁜 꿈을 꾼 거야?”
 세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레르넨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엔 아무도 올 수가 없다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안심해. 그리고 네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거든. 내가 제일 잘 만드는 양송이 수프를 끓였는데 좀 갖다 줄까?”
 어제 이후 아무 것도 못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빌의 배에서 맹렬한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푸훗, 어째 입으로 대답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다. 금방 갖다 줄게.”
 레르넨이 빙긋 미소를 짓고는 컴컴한 부엌 쪽으로 움직여가자 세빌의 눈에 레르넨의 몸집에 가려졌던 원탁이 보였다.
 수프와 감자, 구운 고기가 원탁에 놓여 있었다. 톳트는 더 이상 세빌에게 관심이 없는 듯 식사에 열중했고, 트레퍼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세빌을 흘낏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레르넨이 그릇에다 뜨거운 수프를 하나 가득 담고 돌아왔다. 수프를 휘저어 한 숟갈 뜬 레르넨은 호 하고 불고는 세빌의 입가로 내밀었다. 세빌이 눈만 말똥거리며 쳐다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위대한 광룡 쿠레나시여! 이 수프를 드시고 당신의 레어 그늘에 둥지를 튼 저희를 용서하소서!”
 “푸흡!”
 톳트가 기겁을 하고는 음식을 뱉어냈다. 레르넨의 오빠 트레퍼도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었다. 레르넨의 안색은 순식간에 빨개져 버렸다. 톳트가 눈을 부릅뜨곤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레르넨!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 그냥 장난이에요.”
 톳트는 인상을 확 구기며 버럭 소리 질렀다.
 “장난할게 따로 있지! 내가 절대 드래곤에 대해선 언급하지 말랬지?”
 안 그래도 스스로 무안해져 있던 레르넨은 아버지로부터 타박까지 받게 되자 더욱 민망해진 표정이었다.
 “아버지, 저는 그냥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그만 둬! 네 덕분에 기분이 풀리기는커녕 더 엉망이잖니? 이게 뭐냐? 하루 종일 산 속을 헤매다 온 나와 네 오빠가 저런 귀족 나부랭이 때문에 저녁식사를 망쳐서야 되겠어. 에이!”
 언짢은 표정으로 세빌을 쏘아보며 말한 톳트는 포크를 식탁에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르넨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이제는 완전히 홍당무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 그래도 식사는 마저 하셔야죠.”
 “됐다. 내가 저걸 먹다가는 체하고 말 거다. 그 잘 생긴 귀족 나리나 잘 챙겨 드려라!”
 아버지의 말에 레르넨의 얼굴은 울상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이토록 쌀쌀맞게 대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아, 아버지! 세빌은 귀족이 아니래요. 단지 사정이 있어서 도망을 다니는 중이라고요. 게다가 이렇게 부상이 심한데…… 흐윽!”
 드디어 감정이 북받친 레르넨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톳트는 딸이 울음까지 터뜨리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단란한 가족의 저녁시간을 망친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빌을 향해 톳트가 거친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귀족이 아니라 했느냐?”
 세빌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톳트의 부리부리한 눈에는 진득한 원망과 범접치 못할 위엄이 있었다. 어리지만 황성에서 황자로 지낸 세빌은 저런 눈을 평범한 사냥꾼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톳트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네가 귀족이 아니라면 이것을 설명해 보아라!”
 한쪽에서 서럽게 울던 레르넨도 잠시 울음을 멈추고 아버지가 꺼내 놓은 물건을 쳐다보았다.
 시퍼런 날이 등잔 불 아래서 더욱 시퍼렇게 비쳐 보였다. 빌로엔 백작의 피 묻은 허트 소드. 그것을 바라보는 세빌의 눈에 깊은 슬픔이 어렸다.
 ‘빌로엔 경!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 뵙는군요.’
 변화하는 세빌의 표정을 쏘아보는 톳트의 눈이 한껏 찌푸려지고 있었다.
 톳트의 강렬한 추궁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세빌은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멸망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는 것이 평화롭게 살아온 이들 가족에게는 불행이 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이 우직한 사냥꾼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행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을 돌보려 할지도 몰랐다. 그 반대의 경우? 톳트가 귀족에 대해 강렬한 반감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행동하는 양으로 보아 그럴 인물이 아니란 것은 알 수가 있었다.
 ‘평소 빌로엔 경이나 황성의 고위 기사들의 눈빛이 아마 저랬지?’
 
 세빌이 제국기사단장인 빌로엔 백작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기사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저렇게 밝은 거죠?’
 ‘황자 저하! 그들은 기사들입니다.’
 ‘기사들의 눈빛은 다 저런가요?’
 ‘기사가 아니더라도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습니다.’
 ‘명예를 안다? 그건 무슨 뜻이죠?’
 ‘황자 저하께선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실 겁니다. 다만 이렇게 알아두십시오. 명예를 지킬 줄 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고 말입니다.’
 ‘아, 그래서 기사들은 전쟁에서 용감한 것이군요.’
 ‘저하의 말씀이 틀리진 않습니다. 하하하!’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빌로엔 경의 웃음이 생각나자 세빌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더 이상 상념에 젖었다가는 눈물을 쏟을 것 같았기에 세빌은 눈에 힘을 주어 톳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를 구해 주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알지만 사정상 모든 사실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저는 귀족이랄 수도 없으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기는 중입니다. 저로 인해 은인의 가족 분들에게 해가 미칠 수도 있는지라 바로 떠나겠습니다.”
 역시 예상대로라는 듯 거친 톳트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쾌감이 드러났다.
 “귀족이라서 나 같은 평민에게는 사정을 얘기할 수 없다? 역시 귀족다운 자세야! 그래, 그 소드를 가지고 어서 떠나!”
 말을 하는 톳트의 얼굴에서 냉소가 잔뜩 흘렀다. 그때 레르넨이 퉁퉁 부은 눈을 들어 톳트를 보며 말했다.
 “어쩜 아버지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소리를 하세요? 세빌의 몸 상태를 아시면서 떠나라는 말이 입에서 나와요?”
 그러잖아도 어린 귀족 놈의 말에 심기가 상해 있던 톳트는 딸의 말에 화가 잔뜩 나고 말았다.
 “나에겐 귀족 따위에게 베풀 인정이라곤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산에 사는 오크들에게나 베풀겠다.”
 “왜 아버지는 귀족이라면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죠? 대체 귀족 얘기만 나와도 화를 내시는 진짜 이유가 뭐예요? 혹시 귀족에게 쫓겨나서 이렇게 드래곤의 그늘 아래서 숨어사시는 건가요?”
 짝
 손찌검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레르넨이 커다란 눈을 뜨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 톳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뺨은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흐윽…… 어쩜…… 으앙!”
 레르넨이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레르넨!”
 레르넨의 오빠 트레퍼가 황급히 그녀를 쫓아 나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고, 트레퍼가 레르넨을 부르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자 통나무 오두막 안에는 어색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한참을 망연히 서 있던 톳트가 원탁의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휴우, 나도 다 됐군. 제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고 딸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세빌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귀족에 대한 깊은 원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세빌이었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세빌이 이를 악물고 침상을 내려 왔다. 톳트가 그런 세빌을 쳐다보곤 말했다.
 “지금 무얼 하는 거냐?”
 갑자기 움직이느라 엄청난 통증이 일어난 세빌은 침상 모서리를 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톳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끔찍한 참을성이 필요했다.
 “모두가 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가 떠나야만 부녀간의 정이 깨지지 않겠지요.”
 톳트의 눈가가 다시 일그러졌다.
 ‘하여간 귀족 놈들이란……. 곧 죽어도 치레는 하겠단 말이지?’
 간신히 통증을 참아낸 세빌이 고개를 숙였다.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후일 반드시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은혜? 내가 무슨 은혜를 베풀었나? 난 물길에 흘러 들어온 가죽을 건진 일밖엔 없어!”
 톳트의 냉소 어린 소리가 세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묵묵히 원탁에 이른 세빌은 얼룩들 사이로 파란빛을 내뿜고 있는 허트 소드를 소중하게 손에 쥐고는 조심스레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한줄기 호흡으로 다시 통증을 누그러뜨리고 문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머리를 비우는 듯한 통증을 수반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은혜를 갚기는커녕 이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존재가 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통증이 심하다 해도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다진 그로서는 그 힘든 걸음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널빤지로 만든 문을 밀며 세빌은 자신을 이렇게 움직이게 해준 아이들의 수호신 세를리아 여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화악
 차가운 기운이 그의 얼굴로 몰려들었다.
 상쾌했다.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이 너무도 다정하다 느낀 그 순간 세빌은 가슴에서 일어난 엄청난 통증에 눈을 감고 말았다.
 모든 게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뜬 세빌은 온화한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침상 옆에서 걱정스런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레르넨의 부은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레르넨?”
 세빌을 안심시키려는 듯 레르넨이 미소를 지었다.
 “으응, 세빌. 걱정하지 마. 아버지도 당분간 네가 있어도 된 댔어. 그렇다고 바보같이 그 몸으로 집을 나갈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당분간은 꼼짝 마!”
 세빌은 레르넨의 우스개 소리에 마주 미소 지었다. 레르넨이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을 그 말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물길이 열릴 때까진 건강한 우리 아버지도 밖으로 못 나가. 그러니 딴 생각 마! 몸이 나아야 도망도 칠 수 있잖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세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제만큼 통증이 일지가 않았다.
 ‘아마 레르넨의 극진한 간호 덕분이겠지. 휴! 제발 드래곤이 내 흔적을 못 찾길…….’
 그때 원탁에서 활을 고쳐 메던 톳트가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지 비싼 허비 가죽에 대한 보상으로 해 주는 거야! 한 달 후, 물길이 열리면 네 몸이 낫든 안 낫든 여길 떠나야할 테니 스스로 알아서 몸조리를 잘 해!”
 말을 마친 톳트가 털모자를 눌러쓰며 일어섰다. 그리곤 밧줄과 여러 가지 덫을 등에 짊어진 트레퍼를 보며 말했다.
 “트레퍼! 창은 어디 있냐?”
 “예?”
 “오늘부터는 창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 예.”
 만면에 희색을 띤 트레퍼가 급히 대답을 하고는 선반에서 육중한 창을 집어 들었다.
 지난 저녁, 아버지에게서 창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은 트레퍼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항상 붙이고 다니던 창을 협곡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못 들게 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창을 준비하라니……. 손아귀에 가득한 창대의 매끄러움이 너무도 기분 좋은 트레퍼였다.
 “가자!”
 트레퍼가 창을 쓰다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톳트가 한마디 내뱉고는 문을 나섰다. 무엇이 좋은지 연신 벙글거리는 트레퍼가 레르넨에게 눈짓을 하고는, 덩달아 세빌에게까지 윙크를 하고 아버지 뒤를 따라 나갔다.
 레르넨이 세빌에게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훗! 오빠는 기분이 좋으면 마구 윙크를 하는 버릇이 있어.”
 세빌이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창을 가지고 나가는 게 왜 기분이 좋은 거야?”
 “오빠는 창을 무지 좋아하는데도 그간 아버지가 창을 못 쓰게 했었거든. 그런데 오늘부터 다시 쓰는 걸 허락했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은 거야.”
 말을 마친 레르넨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세빌은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열다섯 소년이지만 어렴풋이 이성에 대해 떨리는 마음을 가지는 나이. 그러니 레르넨의 강렬한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빌이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레르넨이 꽤 심각한 표정을 짓곤 말했다.
 “세빌,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해.”
 “부탁?”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빌이 되물었다.
 “그래, 부탁. 이제부터 한 달간 내 지시에 철저히 따라 주었으면 하는 게 내 부탁이야. 어때 들어주겠니?”
 세빌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르넨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너 웃긴다! 얘, 왜 놀래? 이건 부탁이 아니고 사실은 강제 집행이야! 너를 한 달 내에 완쾌시켜야 할 의사로서 해야 할 강제 집행! 너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무조건 내 지시에 따른다고 하면 돼. 우리 아버지는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네가 한 달 내로 건강을 회복하든 말든 물길만 열리면 아버진 여기서 너를 쫓아내고 말 거야. 그러니까 나로서는 어떡하든 너를 한 달 내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이제부터 특별 재활치료에 들어가는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그 첫 번째, 규칙적인 식사부터…….”
 그리곤 세빌이 고개를 끄덕거릴 틈도 주지 않고 한 솥이나 되는 수프를 들고 돌아온 레르넨이 밝게 웃었다.
 “자, 시작이야! 세빌!”
 드래곤 협곡에서의 세빌의 생활은 레르넨이 마련해준 따뜻한 수프로부터 시작되었다. 조금이라도 남기면 여기저기 간지럼을 당해야한다는 협박을 받기는 했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팠던 세빌로서는 레르넨이 떠 넣어 주는 한 솥의 수프를 몽땅 받아먹고도 입맛을 다셔야했다.
 
 그러나 그 날 점심 무렵부터 시작된 특별 재활치료는 아귀도 견디기 힘든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자, 이번이 마지막이야. 눈 딱 감고 이것만 먹어!”
 한 손에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든 레르넨이 한 입 가득 음식을 물고 있는 세빌을 쏘아보며 외쳤다.
 “으버! 으버버버(그만! 배 터진다!)!”
 “글쎄, 빨리 먹고 몸이 나아야 한단 말야! 봐! 얼마나 몸이 축 났으면 뼈 밖에 안 남았겠니? 자, 아 해. 안 그럼 폭소마법을 걸 거야!”
 폭소마법이라는 말에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사색이 된 세빌은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으버! 으버버버……. 으버버버버(제발! 그것만은……. 난 원래 이렇게 말랐어).”
 통증으로 온몸이 죽을 맛인데 누가 웃긴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는 법이었다. 평소 같으면 유쾌하게 웃어버리면 될 일을, 그렇게 하면 온몸에 통증이 바늘로 찌르는 듯 일어나고, 웃지 않으려 숨을 꾹 참고 있으면 온몸의 뼈가 빠딱빠딱 일어서는 것 같아 더욱 통증이 심해지니 숫제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게다가 레르넨은 세빌을 웃기는 데 아주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 난들 이러고 싶겠니? 이게 다 네 몸을 위해서 그런 거니까 눈 딱 감고 입만 벌려! 그럼 내가 죽죽 찢어서 넣어 줄게.”
 할머니 목소리로 죽죽 찢는다는 말을 능청스럽게 해대는 레르넨을 보면서 세빌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어여쁜 소녀의 얼굴에는 절대 안 어울리는 묘한 목소리가 세빌의 웃음보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눈 딱 감고 입안에 있던 음식을 삼킨 세빌은 먹이를 물고 온 어미 새를 향해 입을 따악 벌린 새끼 새 노릇을 해야 했다. 그것도 대제국의 황제가.
 어미 새가 불경스럽게도 큼지막한 고기를 입안에 척 넣어 주고는 아주 다정하게 입까지 닫아 주며 말했다.
 “어이구, 내 새끼. 그래 꼭꼭 씹어야 한다. 자, 다음은 이거야.”
 레르넨이 내민 큼지막한 벌집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세빌이 원망어린 눈동자로 쏘아보며 외쳤다.
 “으버 으버버버버 으버버버(아까 마지막이라 그랬잖아?)?”
 “뭐라고? 아하! 세빌은 모르는 게 없구나. 벌집이 탈골과 타박상에 좋다는 걸 다 알고. 그래, 내가 뒤꼍에서 양봉을 하고 있어서 벌집은 많으니까 더 가져올게. 염려 말고 많이 먹어.”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는 레르넨을 보며 세빌의 눈알은 핑그르르 돌아가고 말았다.
 
 점심 때 곤욕을 치른 세빌에게 저녁 무렵에는 더욱 기겁할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그게 뭐야?”
 “이거? 자라야.”
 레르넨이 화덕에서 꼬챙이에 꿰인 시커먼 흉물들을 들어올려 살피곤 말했다.
 “아주 잘 익었네.”
 “혹시…… 그거 나 먹으라고?”
 경악한 세빌의 물음에 레르넨은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그러셨어. 이게 남자들의 기력에 그만이래. 게다가 봄에 나온 자라는 내장도 깨끗해서 통째로 먹어야 약이 된다더라.”
 브론트 황성에서 온갖 진귀한 요리를 먹어본 그였지만 이런 요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숯 검댕이 잔뜩 달라붙은 데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자라, 그것도 껍질이 홀랑 벗겨져 이상한 형태로 배배 꼬인 모양은 음식이라기보다는 거의 독극물처럼 보였다.
 치밀어 오르는 속을 겨우 진정시킨 세빌이 용감하게 외쳤다.
 “싫어! 아무리 그래도 난 절대 그걸 안 먹어! 세상에!”
 기겁을 한 세빌이 비명을 질렀고, 레르넨이 이에 질세라 꼬챙이를 내밀며 마주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싫어도 세빌은 이걸 먹어야 해!”
 세빌도 지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곤 계속 용감하게 고함을 쳤다.
 “죽어도 싫어! 이번엔 아무리 폭소마법을 펼쳐도 안 먹을 테야. 인간이 어떻게 그 징그러운 걸 먹을 수가 있어?”
 기세등등하던 레르넨은 세빌의 고함에 놀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큰 눈에서 큼지막한 눈물이 똑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적(?)의 강력한 공격에 대비해 다음 응수를 생각하고 있던 세빌은 바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징그럽다고? 난…… 오직 네가 빨리 낫기를 바라서 이걸 잡은 것뿐이야! 얼마나 징그럽고 무서웠는데…… 흐흑!”
 울음 섞인 레르넨의 목소리에 용감무쌍하던 세빌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세빌의 머릿속에 눈을 질끈 감고 징그러운 자라를 요리하는 그녀의 모습이 선했다. 누구를 위해 차디찬 강가를 헤맸는가? 어린 소녀가 자라를 잡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걸 어떻게…….’
 잠시 세빌을 주저하게 했던 마지막 저항도 레르넨의 오른쪽 손목에 생긴 자라에게 물린 자국을 보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세빌이 꼬챙이를 확 뺏듯이 받아들곤 소리쳤다.
 “레르넨, 정말 고마워! 사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가 이 자라 요리거든. 아까는 너를 곯려 주려는 것뿐이었어. 야, 정말 맛있겠다.”
 눈물을 떨구던 레르넨이 세빌을 쳐다보았다. 그렁한 눈물을 가득 채운 갈색 눈동자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정말이야! 잘 봐!”
 크게 소리를 친 세빌은 시커먼 자라를 한 입 쓰윽 베어 물었다.
 물컹
 입안을 가득 채우는 비린내와 역한 냄새에 절로 안면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저 기대 어린 소녀의 눈빛을 배반할 용기가 없는 세빌은 울고 싶은 맘을 달래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맛있다.”
 그 말 한 마디에 레르넨의 얼굴이 환해졌고,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또그르르 굴러 내렸다.
 “세빌…… 진짜 좋아하는구나. 다행이다! 삼십 마리나 잡아서 어떡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가 좋아한다니 버리지 말고 모두 요리해 줄게.”
 눈치 없는 레르넨의 그 말에 세빌의 머릿속은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듯 캄캄해지고 말았다.
 ‘으으으, 조금만 더 버틸 걸…….’
 세빌의 전의를 완전히 꺾은 레르넨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라를 손질하러 밖으로 나가자, 혼자 남겨진 세빌은 두 손을 하늘높이 쳐들었다가 머리부터 식탁에 처박고 말았다.
 
 광룡 쿠레나가 남겨준 드래곤 하트의 재생력은 세빌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엄중한 부상을 놀라운 속도로 치유시켜 가고 있었다. 또한 세빌이 잠을 자는 휴면의 시간에는 자신이 안주할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그의 몸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있었다.
 밤사이 그의 몸에서 가끔 황금빛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세빌 자신은 물론 오두막의 어느 누구도 그 기이한 현상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간, 세빌이 건강해지는 게 모두 자신의 특식 덕이라 믿게 된 레르넨의 재활치료 방법이 엽기를 넘어서 완전히 극악의 경지에 이른 것을 빼고는 조용한 날이 계속 이어졌다.
 레르넨의 아버지 톳트는 여전히 냉막한 얼굴로 세빌을 보았으나 그가 환자인 점을 감안해 더 이상 그의 신분을 추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트레퍼는 오랜만에 잡은 창을 가지고 틈만 나면 수련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삼 일이 지나자 세빌은 트레퍼가 만들어 준 목발을 짚고 혼자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부상에서 많이 회복해 있었다.
 그 날 점심 무렵, 오두막 마당에서 세빌은 레르넨이 마련한 거의 극독에 가까워 보이는 음식을 앞에 놓고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레르넨, 내가 아무리 에이션트급 드래곤이라 해도 이건 도저히 못 먹겠어.”
 울상을 지은 세빌이 간절한 표정으로 레르넨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무정한 명의(?) 레르넨은 피식 웃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먹게 될 걸 가지고 또 투정이야! 세빌, 이 치료 덕분에 네 몸이 얼마나 좋아졌는가를 생각해 봐. 오빠가 조금만 달라는 걸 안 주고 몽땅 가져왔는데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
 트레퍼는 중상을 입은 세빌이 레르넨의 특식을 먹고 급속히 기력을 회복하는 걸 보고 거의 날마다 자기도 나눠 달라고 동생을 졸랐다. 하지만 무정한 레르넨은 그때마다 가차 없이 거절했다. 저건 동생도 아니라는 트레퍼의 악담을 무시하고 장만해온 특식을 세빌이 거부하고 있으니 레르넨으로서도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레르네에엔! 이렇게 날마다 먹다가는 분명히 거식증에 걸리고 말 거야! 제발, 살려 줘…….”
 “그래, 알아. 세빌이 특별 재활치료를 받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한지.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소화가 잘 되는 배추벌레를 삶아온 거 아냐. 갓 돋은 싱싱한 푸성귀를 먹고 자란 배추벌레니까 얼마나 몸에 좋겠니? 이걸 먹고 힘내서 오늘은 뒤편 숲 속을 두 바퀴만 돌자.”
 경악을 금치 못한 세빌이 드디어는 그간 못내 궁금했던 것을 묻고야 말았다.
 “레르넨, 이런 요리들을 대체 누가 가르쳐 준 거야?”
 레르넨은 아침 햇살 같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훗! 세빌, 꼭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것보다 스스로 아는 게 훨씬 많은 법이잖니. 봄에는 나물이 먹고 싶은 게 당연하듯이 말이야.”
 말을 하던 레르넨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내가 부상당한 세빌이라고 생각하고 바깥을 둘러보니까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게 많더라니까.”
 레르넨의 얼굴이 홍조로 붉게 물들었다. 세빌의 가슴에 그런 레르넨의 모습이 잔잔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니……. 모정을 모르고 자란 세빌에게 레르넨이 보여 주는 하나하나의 행동들은 극성스럽긴 했지만 거의 감동에 겨운 것들이었다.
 레르넨에게는 늘 받기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세빌은 레르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무심코 잡은 것이었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세……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세빌의 눈에 노을처럼 붉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레르넨의 모습이 보였다. 레르넨이 황급히 손을 빼냈다. 그리곤 시선을 어디에 다 둘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세빌의 얼굴도 빨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창을 둘러멘 트레퍼가 오두막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다 어색한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관심을 보였다.
 “레르넨, 뭐 하고 있어? 어? 뭘 먹었길래 얼굴들이 그리 빨개?”
 레르넨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달려가 버리자 접시를 손에 든 세빌은 엉거주춤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트레퍼가 세빌을 향해 물었다.
 “세빌, 저 왈가닥이 왜 저러는 거야? 너희들 혹시…….”
 트레퍼가 말을 끊자 세빌은 잔뜩 긴장해서는 그를 쳐다보았다.
 “배추벌레 말고 또 다른 거 숨겨 놓고 먹은 거 아냐? 아버지가 아끼는 술 같은 거 말이다.”
 세빌은 황당한 그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트레퍼 형! 아까 이것 먹고 싶다고 그랬다며?”
 트레퍼의 시선이 세빌이 내민 접시로 쏠렸다. 아직도 배추벌레들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험! 누가 이런 거 먹고 싶대? 그저 맛이 어떤가 보려고 그랬지.”
 세빌이 과장된 손짓으로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보기보단 엄청 몸에 좋대요. 나는 매일 먹어서 그런지 오늘은 영 식욕이 당기지가 않네. 드시겠어요?”
 “아냐, 환자 것을 뺏어 먹어서야 되겠어? 얼른 먹고 빨리 완쾌되라고. 부상 중인 너를 아버지가 쫓아내면 레르넨은 아마 눈물을 다 빼고 말라죽을지도 몰라.”
 접시에서 시선을 돌린 트레퍼가 창을 모로 세우곤 기마 자세를 취했다. 매일 같이 틈만 나면 연습하던 창술을 오늘은 가상의 말 위에서 펼칠 모양이었다.
 세빌은 접시를 황급히 그의 앞에다 밀어 넣었다.
 “트레퍼 형! 그럼 맛만이라도 봐 주세요.”
 세빌이 트레퍼를 향해 가볍게 눈을 찡그렸다.
 기분이 좋을 때마다 눈을 찡긋거리는 버릇이 있는 트레퍼가 그 의미를 모를 턱이 없었다.
 “험, 그렇게 권한다면 조금만 맛보도록 할게.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네가 입맛이 없어 아까운 음식을 남길까봐 그러는 거다.”
 말을 마친 트레퍼가 냉큼 접시를 받아들었다.
 아버지의 허락으로 다시 창술을 연마하게 된 트레퍼는 그 동안 못했던 수련을 한꺼번에 하느라 밤이 새는 줄 모를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굳건한 그의 체력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한데 때마침 동생이 몸에 좋다는 보양식을 만드는 중이었으니 은근히 자신의 몫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정한 동생은 일고의 여지도 없이 몽땅 세빌에게 갖다 바치니 그로서도 심통이 이만저만 난 게 아니었다.
 “쩝쩝, 이렇게 조금 먹어서는 맛을 모르겠는걸.”
 한 움큼을 집어먹은 트레퍼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한 주먹을 집어먹었다. 딱 두 번의 손질에 벌써 접시는 반이나 비었으니 트레퍼의 굵은 손이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금세 접시는 바닥을 보였고 트레퍼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런! 벌써 바닥이네. 난 단지 맛만 보려고 한 건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세빌이 눈웃음을 짓곤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는 입맛이 없어서 못 먹을 거였어요. 사실 이런 음식은 땀 흘리며 창술 연마하는 트레퍼 형이 먹어야 하는데 그간 나만 혼자 먹느라 미안했어요.”
 트레퍼가 눈을 찡긋거렸다.
 “허, 세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역시…… 아버지가 혼잣말을 하신 게 틀린 것이 아니었어.”
 “예?”
 “아냐, 그냥 나 혼자 해본 소리야. 그나저나 이렇게 맛있는 걸 뺏어 먹었으니 보답은 해야겠는데…….”
 세빌은 바람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저었다.
 “보답이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어허,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게다가 레르넨이 내가 이걸 혼자 먹었다는 걸 알아봐. 그 날부터 삼 일은 굶어야 할 걸. 히히!”
 세빌도 능청스런 트레퍼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레르넨의 고집은 우리 뉴크 가의 전통 때문일 거야. 너도 겪어 봐서 알겠지만 아버지의 왕고집은 대륙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지경이라고. 아, 물론 내 고집도 만만치야 않지만 두 사람에 비하면 멀었지. 하하하!”
 세빌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 보답을 곱게 받으라는 소리로 들리네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이 말씀이죠?”
 “하하! 눈치도 빠르고 유머도 있는 친구군. 그러니 왈가닥 레르넨이 꼼짝 못하는 거겠지. 맞아! 네 입을 확실히 봉해야 내가 마녀에게서 살아남는다고. 그러니 군소리 없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세빌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한데, 그 전에 트레퍼 형에게 한 가지 조건을 요구하겠어요.”
 “으응?”
 심각하다 못해 죽을상을 지은 세빌이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귀여운 마녀에게서 저도 살려달라는 거죠. 날마다 이렇게 먹다가는 살찐 돼지가 되어 잡아먹히고 말 테니 제발 트레퍼 형이 저 엄청난 특식들을 같이 처리해 달라는 겁니다.”
 “하하하! 이거 완전히 우리 두 사람은 마녀의 마수에 걸려 있었군. 좋아, 우리 공동 전선을 펼쳐 저 귀여운 마녀에게서 살아남도록 하자고.”
 트레퍼의 호탕한 대답에 세빌도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두막 안, 창의 그늘 아래서는 톳트 뉴크가 즐거이 웃는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4. 늙은 기사의 가슴 속 슬픈 비밀
 
 “잘 보라고.”
 트레퍼가 창날을 세빌에게 향하고는 말했다. 세빌이 뾰족한 창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순간 트레퍼가 짧게 소리를 질렀다.
 “하앗!”
 뾰족했던 창날이 갑자기 둥근 막대 모양으로 보이며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커다란 막이 눈앞에서 생기고 홀연히 꺼지자 세빌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황성의 근위기사들 중에서도 훌륭한 창술을 발휘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이런 신기는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보았나? 그게 회전수법이야. 혹자는 소드야말로 진정한 무기라 주장하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 각 무기에는 나름의 묘용이 숨어 있는 법, 접근 전에서야 중후한 소드가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기사가 말을 탔을 때 제일 유용한 무기는 창이 되는 법이지.”
 트레퍼가 빙긋이 웃고는 한쪽 구석에 있는 나무줄기를 향해 창대를 밀어 넣었다.
 “퍼벅!”
 톱밥이 튀면서 창날이 반쯤이나 나무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놀라는 세빌을 보고 트레퍼가 눈을 찡긋거렸다.
 “특히 제 위력을 발휘하는 창은 이렇게 적의 갑옷을 가볍게 파 버리지.”
 세빌이 나무에 박힌 창을 자세히 살피며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대단하군요. 한데, 이 창대에 새겨진 문양은 뭡니까? 마치 고기비늘 같은 잔무늬가 있군요.”
 “호! 예리한 관찰력이군. 보통은 창날의 날카로움에 이목을 뺏기기 마련인데 평범해 보이는 창대를 주목하다니…….”
 과한 칭찬에 세빌은 낯을 붉혔다.
 “뭘 그것 갖고 그러세요. 단지 그게 제 눈에 띄어서 그런 것뿐인데.”
 “아니야. 내가 처음 창을 잡았을 때만 해도 그런 문양이 있는 줄도 몰랐어. 뭐, 그 덕분에 아버지한테 된통 혼이 났지만. 워낙 미세한 문양이라 그런 게 눈에 보이지도 않더라고. 어차피 창술을 배우려면 알아 둘 필요가 있을 테니 설명을 해 주겠다. 자, 받아.”
 트레퍼가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빼서는 세빌에게 주었다.
 “자, 그걸로 창대를 베어라.”
 세빌은 목발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두툼한 바스타드 소드를 힘겹게 들어올려서 힘껏 내려쳤다.
 쩌정
 쇳소리와 함께 손을 울리는 반탄력에 놀란 세빌이 소드를 놓치고 말았다.
 “하하하! 내가 미처 환자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군. 아직은 무리일 게다. 하지만 예리한 너니까 분명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을 것이다.”
 세빌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엔 워낙 반탄력에 놀란 터라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으나 트레퍼가 지적을 해주자 무엇인가 가물거리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트레퍼 형, 한 번만 더 해 보면 안 될까요?”
 간절한 세빌의 눈빛에 트레퍼가 손을 내저었다.
 “허, 두 번 했다가 네 팔목이 부으면 마녀에게 난 진짜로 죽어. 그럴 필요 없이 그 창대를 잡아 봐.”
 세빌이 얼른 창대를 잡자 트레퍼가 가볍게 기합을 넣었다.
 “아앗!”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세빌은 얼른 창대를 놓고 말았다. 갑자기 회전한 창대 탓에 손아귀가 따끔해지며 강렬한 통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트레퍼는 은근한 눈빛으로 세빌을 보곤 말했다.
 “자, 이제 알겠지?”
 세빌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방어를 위해서 문양이 새겨진 것이란 말이군요.”
 “역시! 대단해.”
 트레퍼는 이채로운 눈빛으로 세빌을 보며 말하곤 땅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바스타드 소드를 집어 들었다.
 “장병(長兵)인 창은 단병(短兵)을 상대로 공격과 수비에 아주 효용이 높은 무기이지. 그러나 만물에는 장점이 있으면 그만한 단점이 있기 마련이니 창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 자, 그럼 여기서 창의 단점이 무엇일까?”
 세빌이 트레퍼의 양손에 세워진 두 무기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게가 문제이군요.”
 “그렇지. 내가 어릴 적부터 해온 수련 덕택에 힘이 세다고는 하나 분명 들 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 때문에 창의 길이가 길수록 창대의 두께는 가늘어질 수밖에 없지. 강도가 뛰어난 미스릴로 만든다 해도 무게 때문에 창대의 두께가 얇아져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이 바스타드 소드와 창의 무게는 거의 비슷하지만 길이와 반비례해서 그 두께는 이렇게 차이가 확연하지. 만일 이 두 무기가 같은 힘으로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어떻게 되겠냐?”
 “창대의 두께가 얇은 창이 손해를 보겠지요. 휘든지 아니면 부러지든지.”
 세빌의 대답에 트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바로 그것이 이 문양이 창대에 새겨진 이유야. 물고기의 비늘은 정면으로 부딪힌 타격을 뒤로 흘리는 역할을 하지.”
 “그래서 아까 소드와 창이 부딪쳤을 때 끌리는 소리가 들린 거로군요. 게다가 창대가 상대의 손에 잡혔을 경우에는 그 문양으로 공격을 할 수가 있고.”
 “뿐만 아니라. 공격 시 파괴력을 증강시키는 역할도 한다. 우리 뉴크 가에서 통상 쓰이는 할버트(창끝에 도끼가 달린 창)나 사이드(낫 모양의 갈고리가 달린 창) 대신 단순한 창을 고집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무게를 줄여 창의 단점을 최대한 보완하기 위해서이지.”
 세빌의 눈에 아까하고는 다른 경탄의 눈빛이 흘렀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좀더 파괴력이 강한 무기만을 고집하는 바람에 엄청난 무게와 길이를 자랑하는 중형 검들이 주류를 이루는 이 시대에 창의 효율성을 인정하고 오직 그 단점을 보완하는 쪽으로 노력해온 뉴크 가의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이런 가문이 어째서 알려지지 않았을까?’
 세빌이 속으로 경탄을 하는 동안 트레퍼는 전반적인 창의 종류와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무예가 전혀 없고 힘이 없는 소년도 창만 어느 정도 다루면 웬만한 위험에서 보호책은 된다는 말은 세빌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느새 트레퍼의 설명을 듣는 그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배추벌레 요리에 대한 보답으로 우연찮게 시작된 세빌의 창술 수련은 두 사람 모두의 필요에 의해서 틈만 나면 이루어졌다.
 
 이틀이 더 지나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세빌은 오두막에서 300미엘 거리에 있는 강가로 나왔다.
 호호탕탕 흐르는 격류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협곡을 깎아 내리고 있었다. 그 포말들 사이로 검은빛을 흘리고 있는 바위들은 날카롭기가 잘 다듬은 칼날 같았다.
 세빌은 자신이 그 격류 속에서 살아났다는 게 기적같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몸도 완전치 않은데 길까지 막혔으니…….”
 암울해진 세빌이 자신이 떠내려 왔을 강 상류 쪽을 쳐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로 치솟은 절벽들이 강 양안을 따라 이어져 있었고, 격류가 일으킨 안개들은 절벽의 허리를 감싸 마치 공중에 붕 떠있는 모습이었다.
 그 절벽의 끝으로 만년설을 머리에 인 고봉들이 빼곡하니 고개를 내민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으나 세빌에게는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암울한 미래로 보였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추적자가 없었다. 혹시 나의 탈출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아냐, 빌로엔 경의 말대로 드래곤이 배후에 있었다면 절대 방심해선 안 돼!’
 “헛험!”
 갑자기 들려 온 헛기침 소리에 세빌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체구의 톳트가 뭉툭하고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오셨습니까?”
 세빌이 담담한 어조로 인사를 하자 톳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신이 내보인 살기를 느꼈을 텐데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소년의 모습 때문이었다.
 세빌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강가로 한 발 나섰다. 그리곤 잠시 격류를 보다가 느닷없이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를 힘껏 내던졌다.
 “흐얏!”
 기합성과 함께 날아간 커다란 나뭇가지는 격류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세빌이 가만히 격류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뭇가지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상당한 힘이시군요.”
 “잘 보아라.”
 톳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힌 두꺼운 나뭇가지는 와드득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귀족들이 싫다. 특히 떠돌이 귀족 놈이 내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더욱 싫단 말이다.”
 톳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빌을 쏘아보았다.
 “너를 여기 있게 한 것은 어리고 상처 입어서일 뿐, 내 동정심은 거기까지가 한계다. 레르넨은 너 같은 귀족 놈들의 발길에 채여 아파해서는 안 돼!”
 말을 마친 톳트가 그대로 발길을 돌려서는 오두막으로 걸어가 버렸다. 톳트가 가고도 한참 동안 세빌은 거세게 흐르는 격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까보다 더욱 진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대체 무엇이 저리도 그를 아프게 한 것일까?’
 황성에서 들은 얘기로는 제국민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각 지방의 영주들 또한 주민들을 보살피고 아낀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드래곤이 깨어나면 바로 죽음인 이런 곳으로 저들은 제국에서 도망쳐 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레르넨의 얘기로는 제국 법을 피해 도망 나와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수는 엄청나다고 했다. 그렇다면 황성이라는 두터운 장막에 싸여 자신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주민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할 제국이 드래곤보다 무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니……. 형, 어떡해야 돼? 나의 힘이 되어 줄 제국민들이 이렇게 제국을 미워하고 있었어요.’
 세빌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뚝 떨어져서는 격동하는 강물에 섞여 들었다. 요동치는 강물은 그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세빌과 함께 창술을 연마하게 된 트레퍼로서는 혼자서만 하던 수련보다 나약하긴 하지만 움직이는 상대와 같이 하게 된 것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세빌을 가르치는 선생인 자신을 레르넨이 괄시하지 않게 되었고, 영양가 풍부한 특별식도 몽땅 자신의 독차지가 되었으니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뭐야? 왜 오빠가 그걸 먹어?”
 바삭한 전갈구이를 행복한 표정으로 먹고 있던 트레퍼 앞에 마녀의 현신 같은 표정의 레르넨이 나타난 것은 정확히 이틀 뒤의 저녁이었다. 레르넨이 부엌으로 움직일 때마다 세빌의 접시에서 음식을 덜어낸 그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혼자서 오두막을 나섰고, 으슥한 이곳으로 와서 별미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읍? 레……르넨.”
 “어서 대답해. 왜 그걸 오빠가 먹냐고?”
 “그, 그게 말이다. 너는 어떻게 알고 왔니?”
 다급한 와중에도 레르넨이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가 궁금해진 트레퍼였다. 동생의 까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걸로 보아선 마구 내달려 온 게 분명했다.
 “아까 저녁시간에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날 부엌 심부름시킨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어? 이틀 전부터 세빌이 특식에 대해서 전혀 투정을 안 하기에 이상하다 했었다구. 게다가 오늘은 음식을 하나도 안 남긴 게 너무 이상했어.”
 아차! 트레퍼가 속으로 내지른 비명이었다. 세빌의 어설픈 연극 때문에 모든 게 들통 난 것이다.
 “레르넨, 이건……. 그래! 수업료 같은 거야. 내가 세빌한테 창술을 가르치잖니. 극구 싫다는 걸 세빌이 억지로 주는 바람에……. 하여간 세빌은 참 사리가 밝아. 누가 부인이 될지 몰라도 참 행복할 거야.”
 “흥!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야, 그런 말에 넘어 가게? 하여간 앞으로 열흘간 오빠 식사는 없어!”
 레르넨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홱 돌아서자 기겁을 한 트레퍼가 전갈구이를 와르르 쏟으며 벌떡 일어섰다.
 “레르넨! 그건 절대 안 돼.”
 저만치 달려가던 레르넨이 우뚝 멈추어 서자 트레퍼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열흘은 심하다고. 그냥 딱 잘라 닷새만 하자. 응?”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레르넨이 오두막을 향해 달려가 버리자 트레퍼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신이시여! 마녀로부터 세빌을 구해 주소서.”
 
 “아아, 레르넨,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 하여간 내 특별치료 덕에 몸이 나은 거니까 원래대로 해놓고 말 거야!”
 “으아, 제발 레르넨. 내가 잘못했어. 그 몽둥이는 놓고 얘기하자.”
 그러나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몽둥이의 궤적을 보고 세빌은 원탁 아래로 몸을 날려야 했다.
 와장창
 채 치워지지 않은 그릇들이 몽둥이세례를 받고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흥분했던 레르넨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꺄아아! 이를 어째?”
 박살난 그릇들을 보며 레르넨이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가 아끼고 아끼던 유리그릇들이 대부분 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협곡에 숨어사는 형편이 아니더라도 일반 백성들에게 유리그릇은 상당히 고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해서 일반 민가에서는 대부분의 그릇들이 초벌구이 한 토기를 사용하는 지경이었다.
 레르넨의 놀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의 비명에 놀란 세빌이 고개를 들었을 땐 벌써 눈물은 그녀의 턱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빌, 큰일 났어! 아버지가 아끼는 그릇들이 몽땅…….”
 난장판이 된 식탁을 쳐다본 세빌도 난감해졌다.
 “레르넨, 미안해. 나 때문에 또 혼나게 생겼으니……. 내가 피하지만 않았던들 그릇이 깨지진 않았을 텐데…….”
 눈물 그득한 레르넨의 눈은 하나 가득 원망스러운 빛을 띠고 세빌을 보고 있었다.
 “어쩜, 너는 내 성의를 그렇게 무시하니? 내가 그런 징그러운 요리를 하는 게 즐거워서인 줄 알아? 그리고…… 그리고 나한테 요즘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구는 거냔 말야?”
 레르넨의 울먹거리는 소리에 세빌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레르넨이 어찌 알겠는가. 아버지인 톳트가 두 사람이 친해지는 걸 원치 않고 있다는 걸. 아니, 도망자인 세빌 자신도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레르넨, 그건…….”
 세빌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레르넨은 눈물을 똑똑 흘리고 말았다.
 “왜 대답을 피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싫어?”
 “레르넨, 그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산골에 사는 촌뜨기라 싫은 거지? 도시의 어여쁜 숙녀들과 비교하면 난, 난…… 으앙!”
 레르넨으로서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흥분을 하자 쏟아져 나왔다. 귀공자인 세빌에 비해서 한없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레르넨은 항상 조마조마해 왔던 것이다.
 그녀의 자격지심이 세빌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아냐! 레르넨! 너는 눈부시게 예뻐!”
 “거짓말하지 마! 이 누더기 같은 옷에 거친 손, 게다가 덜렁거리는 말썽쟁이가 뭐가 예뻐?”
 레르넨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 것을 본 세빌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레르넨의 손을 움켜쥐었다.
 “레르넨, 내게 있어서 네 손은 여신의 손길보다 부드럽고 따뜻해. 다시는 그런 소리 마. 잠시 너에게 쌀쌀히 대했던 것은 내가 떠나게 되면 네가 아파할까 봐서 그랬던 거야.”
 레르넨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세빌을 보았다.
 “정……말?”
 세빌이 고개를 끄덕이자 언제 울었냐는 듯 레르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어두워진 얼굴이 된 레르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빌,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우리랑 같이 지내면 안 돼?”
 세빌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도 그러고 싶었다. 단 며칠이었지만 레르넨의 가족들과 지낸 시간은 그가 처음으로 느껴 본 가족적인 행복이었다.
 브론트 황성에서 부황인 황제와 형제들이 간혹 만찬을 같이 하는 경우에도 절제된 예절과 형식을 갖춰야 했다. 평범한 가족들의 생활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어린 세빌에게 그런 자리는 더욱 어렵고 두렵기만 한 자리였다. 차라리 혼자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나는 가야만 해!’
 황태자와의 굳은 약속, 빌로엔 백작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들의 죽음.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짐 지워져 있었다. 제국의 부흥이라는 험한 숙제와 함께.
 “레르넨, 난 떠나야 해. 내가 여기 있게 되면 너희 가족도 위험해져.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위험? 세빌 걱정 마. 우리 아버진 엄청 힘이 세. 게다가 여긴 광룡의 협곡이라 너를 해치려고 들어올 사람은 없어.”
 세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를 쫓는 이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들이야. 제국의 기사대도 못 막을…….”
 세빌은 차마 드래곤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레르넨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제국의 기사대도 못 막을 정도나 되는 자들이 쫓아온다고? 네가 황태자라도 되니?”
 세빌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레르넨은 자신의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다.
 “미안, 난 세빌이 너무 겁에 질려 있기에 농담으로…….”
 “괜찮아, 레르넨.”
 세빌이 싱긋 웃자 레르넨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세빌, 그럼 나도 따라가서 네 일을 도우면 안 될까? 뭐든지 같이 하면 쉬운 법이잖아.”
 세빌의 고개가 이번에도 좌우로 흔들렸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대신…….”
 “대신?”
 “일이 끝나는 대로 너를 만나러 올게.”
 레르넨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약속한 거지? 반드시 돌아온다고!”
 “그래, 반드시 돌아올 거야.”
 기뻐하는 레르넨을 보며 세빌도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야호!”
 환호성을 터뜨리던 레르넨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문제인 걸.”
 식탁 위엔 여전히 깨어진 그릇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레르넨의 눈가가 다시 질척해졌다.
 “으아앙! 저번에 실수로 하나 깨뜨렸다가 얼마나 혼났는데……. 아버지가 이걸 보면 아마 난…… 아앙!”
 “울지 마, 레르넨. 운다고 상황을 돌이킬 순 없잖아. 내가 나중에 유리그릇을 많이 사줄게.”
 “으앙! 나중에 아무리 많이 있으면 뭘 해? 당장, 이 꼴인데.”
 세빌이 걱정스런 얼굴로 집밖을 쳐다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덫을 돌아보러 갔던 톳트가 이미 텃밭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텃밭에 짐승들의 흔적은 없나 살피느라 느린 걸음이었지만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거구의 그에게 집까지 거리는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레르넨, 안 되겠어. 일단 눈물을 닦아.”
 자신의 소매로 레르넨의 눈물을 닦은 세빌은 그녀의 가여운 눈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비명을 질러. 아버지가 물으시면 전갈 독 때문이라고 해.”
 엉뚱한 세빌의 말에 레르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몽둥이를 말아 쥔 세빌이 느닷없이 식탁 위를 후려치자 그녀는 비명을 아니 지를 수가 없었다.
 와장창
 “꺄아악!”
 적막을 깨뜨리는 비명은 골짜기를 울렸고, 딸의 다급한 비명을 들은 톳트가 텃밭의 채소들을 짓밟으며 달려왔다.
 쾅
 “레르넨?”
 문이 부서져라 밀어 제치고 뛰어 들어온 톳트는 몽둥이를 들고 딸을 위협하고 있는 갈색 머리의 불한당을 보았다.
 “나쁜 놈! 멈춰!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
 톳트의 거구가 바람처럼 세빌에게 달려들었다. 떠돌이 귀족 놈이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딸을 집적거린 게 분명했다. 은혜도 모르는 자식!
 “이놈! 죽어!”
 분기로 충만한 톳트의 거대한 주먹이 날아오자 세빌은 다급히 몽둥이로 막았다. 그러나 분노한 그가 내지른 주먹에는 그의 온 힘이 들어 있었다. 주먹은 쾅, 소리와 함께 몽둥이를 박살내며 세빌의 얼굴로 박혀 들었다.
 퍼억
 곰도 한 방 맞으면 뻗어 버리는 살인적인 아버지의 주먹이 여린 세빌의 얼굴에 박히는 것을 본 레르넨은 더욱 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안 돼!”
 그러나 이미 세빌의 가냘픈 몸은 공중으로 붕 떠서 1미엘 가량을 날아가고 있었다. 뒤늦게 집안으로 달려온 트레퍼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콰앙
 ‘아, 결국…….’
 아버지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이상 세빌은 가망이 없었다.
 “세빌! 세빌!”
 혼이 나간 레르넨이 애타게 세빌을 부르며 벽에 처박힌 그에게 달려갔다.
 “아빠, 미워! 어떻게 불쌍한 세빌을 쳐 죽일 수가 있어!”
 축 늘어진 세빌을 안으며 레르넨이 악을 썼다.
 분기로 이성을 잃었던 톳트는 그때서야 자신이 어린애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멍한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때 상황은 분명 미친 세빌이 레르넨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지 않았던가? 식탁에 널려 있는 유리 파편들이 그 상황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놈이 너를 덮치려고 하니까 그랬지.”
 “그게 아니에요. 아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으앙, 세빌! 정신 차려, 세빌! 흐흑…….”
 레르넨이 구슬픈 울음을 터뜨리자 톳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생명을 거두었던 주먹이지만 열다섯 살짜리 어린애를 죽인 적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파괴적인 주먹을 맞은 세빌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던 그는 딸의 통곡을 들으며 차마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었다.
 “세에빌!”
 애절한 레르넨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트레퍼도 고개를 돌렸다. 한데, 막 고개를 돌리던 트레퍼의 눈에 세빌의 손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어?’
 자세히 쳐다보았으나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아버지의 주먹을 맞고도 살아날 수야 없지.’
 트레퍼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을 때 레르넨은 기적을 보고 있었다.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세빌의 입이 조그맣게 벌어지는 게 보였다. 게다가 그 입에서 나온 조그마한 소리는 분명 전갈 독이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세빌 살아 있었구나.”
 톳트와 트레퍼의 얼굴이 바로 레르넨에게 향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혹 레르넨이 실성한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레르넨이 외쳤다.
 “대체, 뭐 하고 있어요? 오빠는 얼른 세빌을 침대로 옮기는 걸 도와주고, 아버지는 나가서 생사초(충격을 받거나 큰 외상을 입은 사람이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효능이 있는 각성초의 일종)를 뜯어 오세요. 세빌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 버릴래!”
 레르넨의 협박에 두 사람은 서둘러 지시대로 움직였다.
 부산을 떠는 오두막을 나선 톳트는 텃밭을 다시 가로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내 주먹이 녹슬었나?”
 텃밭을 지나 숲으로 들어선 그는 앞을 막아선 팔뚝만한 굵기의 나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슈욱 쾅
 나무는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간신히 몇 가닥 줄기만을 아래 둥치에 연결한 채 뒤로 누워 버렸다.
 “위력은 그대로인데? 허, 참!”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톳트가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딸한테 타박당할 것을 염려하곤 서둘러 생사초를 뜯으러 숲으로 달려갔다.
 
 “그러니까 전갈 독을 잘못 먹고 세빌이 잠시 환각을 일으켰다 이거지?”
 “그래요. 그런데 아버지는 상황 파악도 없이 그 살인적인 주먹을 날려 세빌을 죽이려 했던 거예요.”
 팩 쏘아붙이는 레르넨의 독한 눈빛을 받으며 톳트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던 트레퍼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히 상황을 아는 그로서는 레르넨의 전갈 독 얘기가 뻔한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흠, 그건 내 실수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게 있구나. 어째 세빌이 내 주먹을 맞고도 무사한 거지? 당시 나는 흥분한 상태라 분명 주먹에 온 힘을 다 실었거든.”
 트레퍼 또한 묘한 표정으로 레르넨을 주시했다. 상황이 정리된 이상 그것이 제일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흥!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전갈 독에 그런 방어 효능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간 내가 해준 특식으로 신체가 좋아져서 일수도 있겠죠.”
 레르넨의 대답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동안 온갖 징그러운 건 다 잡아다 먹이는 걸 보고 내색은 안 했지만 심히 속이 좋지 않은 톳트였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귀여운 딸이 온갖 흉물을 잡아다 요리하고 있는 꼴을 보고 기분 좋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쫓겨 다니는 귀족 떨거지를 위해서.
 한데, 그 특식의 효능이 정말로 그 정도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입맛을 다신 톳트와 트레퍼가 간절한 눈빛으로 레르넨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기적의 당사자인 세빌이 더욱 황당해 하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잠든 척하고 있던 세빌은 뉴크 가족의 얘기를 모두 들으며 자신의 몸에 일어난 기적을 더욱 못미더워 하고 있었다.
 거대한 주먹이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날아올 때만 해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강렬한 충격의 순간,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의 통증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중을 붕 떠서 날아가는 그 순간에도 별 다른 통증이 없자, 세빌은 자신이 이미 죽어서 통증을 못 느끼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벽에 내동댕이쳐지던 그 순간에 잃어버렸던 감각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뒤통수에 강렬한 통증이 일자 세빌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긴 거지? 그런 묘한 느낌이라니!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 충격을 받아내는 것 같았거든.’
 세빌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그의 훤칠한 이마가 다 드러났다.
 ‘혹시, 그게 유체이탈이라는 게 아닐까? 아주 잠시 자신의 몸에서 영혼을 빼내는 마법이 존재한다더니……. 휴우, 이렇게 살아났으니 다행이지 세릭 형의 유언을 지키지도 못하고 엉뚱한 일로 죽을 뻔했잖아. 하여간 레르넨은 귀여운 마녀라니까. 후후!’
 “뭐야? 남들은 죽을 맛인데 웃고 있어?”
 톳트의 굵직한 음성에 세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천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왜 중상을 입고 생사를 헤매는 환자에게 시비예요?”
 “중상을 입은 환자가 웃어? 허허! 네 말 대로라면 실드 마법에 준하는 신체를 가졌다는 건데 그 정도 타격은 아마 벌레가 무는 정도밖에 안될 거야.”
 “아버지가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를 죽일 뻔한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허허, 그게 다 너를 구하려다 그런 거지. 알았다, 알았어. 원 저렇게 째려볼 때면 꼭 지 엄마라니까.”
 “아버지, 엄마 얘기는 거기서 왜 꺼내세요?”
 무의식중에 꺼낸 말에 레르넨의 얼굴이 굳어지자 톳트는 어색해졌는지 얼른 자리를 피했다. 트레퍼도 아버지를 따라 오두막을 나가 버리자 레르넨은 크게 한숨을 쉬고 세빌을 쳐다보았다.
 누워서 잠든 세빌의 얼굴에서 밝은 금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기품이 넘치면서 어딘가 슬픈 여운이 남겨진 얼굴. 그 묘한 슬픔 때문에 그렇게 이끌렸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엄마의 배신에 대한 반감이 세빌에게 묘한 모성애로 나타나는 건지도.
 그때 세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빌, 진짜 괜찮은 거야?”
 “응! 뒷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멀쩡해. 사실 벌떡 일어서기가 뭐해서 계속 자는 척했는데, 아까 아저씨가 눈치 채셨을 때는 정말 놀랬다구.”
 환한 미소를 가득 담은 레르넨의 눈에 다시 맑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레르넨, 다시 울 거면 나 또 기절해 버린다.”
 “흣, 아냐 안 울게. 네가 안 다쳐서 정말 기쁜데 울긴 왜 울어.”
 “헤헤, 그래야지. 예쁜 레르넨이 울면 난 정말 슬퍼.”
 “핏, 말로만 그러면 뭣해? 애써 만들어준 음식은 입에도 안 대면서.”
 “미안해, 앞으론 절대 안 그럴 거야.”
 “좋아! 아까 한 약속만 지킨다면 용서해 줄게.”
 세빌이 의아한 표정으로 레르넨을 쳐다보았다.
 “나중에 유리그릇을 왕창 사준다는 약속 말이야!”
 “아, 그래. 꼭 약속해! 이 다음에 내가 이 집 가득 아니, 산만큼 유리그릇을 사줄게.”
 “정말? 그럼 아이들의 수호 여신 세를리아 님에게 맹세해.”
 세빌이 미소를 짓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단정히 무릎을 꿇은 세빌이 두 손을 모으곤 말했다.
 “세를리아 여신님께 이 맹세를 바칩니다. 세빌 키안은 어여쁜 레르넨에게 아름다운 유리그릇을 산만큼 많이 사주겠다고 맹세하오니 이를 지켜 보아주소서. 이 맹세를 못 지키는 순간, 여신께서 지금껏 저에게 내려주셨던 모든 은혜를 거두셔도 좋습니다.”
 기쁜 눈빛으로 세빌을 바라보던 레르넨도 두 손을 모아 쥐고 무릎을 꿇었다.
 “저 레르넨도 여신님께 맹세합니다. 저 레르넨 뉴크는 세빌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 맹세가 깨지는 순간, 대륙의 모든 유리그릇이 깨어져 제 앞길에 놓이는 형벌을 주소서.”
 기도와 함께 엄숙한 맹세를 한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직은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 어린 그들이었지만 막연히 서로의 외로움과 상처를 보듬어 줄 상대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의 솔직한 눈을 바라보곤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감정에 충실한 이 순간만큼은 다른 어떤 시간보다 기뻤으니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년 소녀의 웃음소리가 어둠에 잠기는 드래곤 협곡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빌은 다시 강가에 나와 있었다. 격류는 여전한 듯했으나 강심(江心)에 바위들이 군데군데 더 드러난 걸로 보아 강물의 양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아마, 이삼 일 정도만 지나면 배를 띄울 정도는 될 거다.”
 소리 없이 다가온 톳트의 말에 세빌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그의 손에는 커다란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읏차!”
 톳트가 강을 향해 다시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세빌과 톳트는 말없이 나뭇가지의 흐름을 쳐다보았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뭇가지가 어김없이 바위에 부딪혀 부서졌으나 예전보다는 덜 한 듯했다.
 톳트가 이끼 낀 바위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물살이 꽤 약해졌군.”
 세빌이 그를 쳐다보았으나 톳트는 여전히 강물만을 보고 있었다.
 “예전에 기사가 되길 꿈꾸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밤낮없이 수련을 했고, 드디어 지방 영주의 수습기사로 발탁이 되었다.”
 마치 혼잣말을 하듯 톳트가 조용하게 말을 하자 세빌은 흠칫 놀랐다.
 “그는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어여쁜 신부를 만나 결혼도 하고 영주로부터 신임도 받게 되었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지. 아들도 낳고, 공도 많이 세워 작위기사가 되는 날도 머잖아 꿈에 부풀어 있었지.”
 세빌은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담담한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 덧씌워진 표정 아래에는 무수한 고뇌와 아픔이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청년 기사가 영주의 명으로 멀리 원정을 가게 되자 부부는 잠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출정에서 청년은 이해할 수 없는 동료 기사들의 행동으로 홀로 몬스터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말하진 않았지만 세빌은 그 청년이 톳트 자신임을 알아챘다.
 “구사일생으로 청년이 탈출을 해서 진지로 돌아왔을 때, 이미 동료기사들은 영지로 돌아가고 없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혼자 움직일 수 없었던 청년 기사는 산골 마을에 잠시 의탁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지. 그리곤 보았다. 자신의 아내가 아기를 안고 영주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세빌의 눈에 아픔이 어렸다.
 “그날 밤 청년은 검을 들고 그녀의 침실로 찾아갔다. 눈물을 뿌리며 살려 달라는 그녀를 통해 그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어. 청년이 큰 공을 세워나가자 작위기사를 안 내릴 수가 없게 된 영주는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기사작위는 황제가 내리는 것이지만 그의 봉록과 영지는 그를 거두었던 영주가 제공해야 하니까 그게 아까웠던 거지. 그녀와 영주는 오래 전부터 부정한 관계였고 그녀가 영주의 아이를 가져 버리자 두 사람은 청년을 몬스터 토벌 중에 계획적으로 죽이려 한 것이었다. 청년은 차마 아내를 죽일 수 없었다. 대신 그녀와 영주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지. 영주를 죽이려다 실패한 청년은 제국의 어디서도 살 수 없었고, 결국 드래곤 레어의 귀퉁이에 숨어사는 신세가 되었다.”
 “왜 청년은 억울함을 황성에 알리지 않았나요?”
 세빌의 물음에 톳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성이라고? 황제는 황성 안에서 그저 영주들이 보내온 공물과 보고서만을 듣지. 황성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마다 영주들의 친위기사대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어떻게 그 정도로?”
 세빌이 놀란 눈빛으로 의문을 표하자 톳트가 냉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황제는 자신의 명 한마디면 영주들이 벌벌 떤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천만에! 한 지방을 장악한 영주들에게 너무도 강력한 권한을 준 것이 문제야. 그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말 그대로 신이야. 황제께 충성을 해야 할 기사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영주의 손발이 되어야 하지. 장기간의 평화가 만들어낸 아이러니야. 근 백 년 간 주민들에게 죄를 짓고 작위가 철폐된 영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지금 영주들 대부분은 작위가 철폐되고도 남을 중죄를 짓고 있어. 공을 세우길 원하는 기사들은 많은데 전장은 없다. 몬스터들도 대부분 대륙에서 숨어들어 이제 기사들이 공을 세우려면 드래곤들을 상대로 싸워야 할 지경이야.”
 제국이 멸망했다는 것을 모르는 톳트는 아직도 제국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세빌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만일…… 제국이 멸망한다면요?”
 톳트가 벌떡 일어났다.
 “감히 웬 망발이냐? 카이젠 제국이 멸망하다니?”
 “아저씨께선 방금 제국을 비난하셨지 않습니까?”
 “이놈! 난 힘을 가지고도 제대로 못 쓴 황제의 무능함을 비난한 것이지 위대한 제국을 비난한 것이 아니다.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던 대륙을 온전히 인간 세상으로 만든 카이젠 제국이다. 위대한 오우너 이안 대제께서 제국민을 위해 만든 제국이 네놈 같은 귀족, 영주를 위한 제국이 되었음을 안타까워한 것이란 말이다.”
 “제 말은 가정을 말한 것입니다. 만일…….”
 “만일이든 뭐든 그런 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제국이 없어지면 욕심 많은 영주들에 의해 대륙은 온통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리 되면 죄 없는 무수한 주민들이 죽을 것이고, 숨어들었던 몬스터들이 나타나 종래에는 인간들이 숨어사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안 대제 같은 오우너가 나타나지 않는 한은.”
 격한 톳트의 음성을 들으며 세빌은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았다. 아직까진 희망이 있었다.
 “숨어산다고 기사의 명예도 버린 줄 아느냐? 네 놈이 처음 내 화를 돋운 것도 내 명예를 떨어뜨리는 말을 한 것 때문이었다. 한데 이제는 제국의 멸망 운운하며 나를 화나게 하는구나.”
 무슨 말인가? 세빌이 처음 톳트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저로 인해 은인의 가족 분들에게 해가 미칠 수도 있는지라 바로 떠나겠습니다.’
 워낙 추적자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세빌이 그저 자기 입장에서 말을 하고 만 것이었다.
 부상당한 어린애를 내쫓았다는 불명예가 톳트의 가슴에 남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다급히 쫓기는 중이어서 예의에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세빌이 고개 숙여 사과를 하자 톳트는 시선을 바로 강물로 돌려 버렸다.
 “됐다, 그 놈의 예의는.”
 그리곤 감정을 다스리는지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두 사람은 강물만 응시하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톳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너를 때린 것은 미안하다.”
 “아닙니다.”
 톳트가 고개를 돌려 세빌을 보았다.
 “전갈 독에 그런 환각이 일어난다는 건 거짓말이야.”
 “알고 계셨습니까?”
 “레르넨도 사실을 얘기하더구나. 네가 누명을 쓰려고 그랬다고.”
 “어르신을 속인 점 사과드립니다.”
 톳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나는 그때 정말 화가 나 있었고 너는 죽을 수도 있었다.”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제 불찰로 생긴 일이라 그래야만 했으니까요.”
 “너란 아이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구나. 처음 너를 건져냈을 때만 해도 구덩이를 팔 일만 남았구나란 생각을 했다. 비싼 허비 가죽을 받은 대신 장사는 지내 주리라고.”
 톳트가 다시 강물을 응시하자 둘 사이엔 다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세빌이었다.
 “제 내력을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은 알지만 외람되게도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톳트의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사실 자신의 내력을 먼저 얘기함으로써 범상치 않은 소년의 신분을 알고 싶었던 그였다. 내심을 들킨 톳트가 가만히 세빌을 응시했다.
 세빌이 묵묵히 자신의 강렬한 시선을 받아내자 그는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산짐승들도 내 시선을 받으면 눈을 돌리건만……!’
 톳트가 놀라는 눈빛을 보이자 결국 세빌이 시선을 돌렸다.
 ‘허…… 내가 불편해 할까 봐서 먼저 눈을 피한다!’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 톳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네 신분을 알고자만 얘기한 것은 아니다. 네 예상대로 레르넨이 그 아이다. 처음에는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데리고 왔다만 친딸 이상으로 정이 들었다. 아니, 지금에 와서는 그 애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내 입장에서이지 레르넨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기까지 말을 한 톳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지어미에게서 떼어놓은 죄인이 아무리 잘해 준들 무엇 하겠는가?”
 세빌이 묵묵히 그를 쳐다보았다. 일시적인 복수심에서 한 일로 그는 평생을 자책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내가 너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한 이유를? 레르넨은…… 레르넨은 말이야! 절대로 더 이상 불행해져서는 안 돼!”
 그렇게 소리치는 톳트의 마음이 울고 있다는 걸 세빌은 느낄 수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톳트는 세빌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네 성품으로 약속은 지키리라 믿는다. 잠시 괴롭겠지만 레르넨도 잘 이겨 낼 테지.”
 자리를 털고 일어난 톳트가 오두막을 향해 돌아섰다.
 “아까 들은 얘기는 우리 둘 만의 비밀로 해주게.”
 세빌의 눈에 뚜벅뚜벅 걸어가는 톳트 뉴크의 널따란 등판이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별반 좋은 감정도 아닌 자신에게 와서 아무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을 얘기한 이유는 오로지 레르넨을 위해서일 터. 지금 톳트를 지탱하는 힘은 오직 레르넨의 행복뿐임을 세빌은 알 수 있었다.
 저만큼 걸어갔던 톳트가 다시 세빌을 향해 돌아섰다.
 “아, 그리고 트레퍼 말이야. 창술을 조금만 더 단련하면 웬만한 기사보다 나을 거야. 자네라면 훌륭한 주군이 될 것 같으니 필요하면 거두어 주게.”
 그리고는 세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세빌은 다시 한 번 강물을 쳐다보았다.
 포말을 일으키는 강물 속에 밝은 미소를 짓는 세릭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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