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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2022.02.04 조회 274 추천 1


 #001.
 
 
 
 
 
 프롤로그
 
 
 
 검은 연기가 긴 꼬리를 물고 피어올라 달빛을 검게 물들인다.
 화마(火魔)의 손길이 스쳐지나간 자리는 생기를 잃은 죽음의 잿빛만이 남겨졌다. 광란하는 불길과 함께 요란하게 울리던 창과 검, 갑주들이 부딪히는 소리도 점차 가라앉는 듯했다.
 열화와 같던 함성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무너진 벽의 틈새, 구석진 모퉁이 안쪽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광기에 찬 외침과 비명 섞인 단말마만이 이곳이 전장이었음을 일깨워 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하나의 전쟁, 아니 살육제(殺戮祭)라고 해야 옳을 광란의 축제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크아악!”
 꿈틀거리며 신음을 토하는 병사의 목에 푸른 갑옷의 기사가 차가운 칼날을 쑤셔 박았다.
 오늘밤 그가 몇이나 되는 인간을 도륙했는지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었다. 몇 겹이나 덧칠해져 움직일 때마다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검붉은 핏자국, 무뎌진 검의 감촉만이 그의 손에 사라져간 희생자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
 막 새로운 피로 칼날을 채색한 기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긴장을 풀었다.
 다가선 상대. 마치 사신(死神)을 형상화시켜 놓은 듯한 기사였다. 음산한 윤기로 번들거리는 검은 갑옷 뒤로 칠흑 같은 망토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기괴한 형태로 펄럭인다.
 “전황(戰況)은?”
 흑기사가 물었다.
 “내성의 제압도 끝났습니다. 아쉽게도 초기포획에 실패해 리베이드 국왕이 생존한 왕족과 몇몇 근위기사를 이끌고 본성 최상층에서 농성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제가 직접 처리할 테니 1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이 수고할 필요까지는 없겠군.”
 흑기사의 시선이 무수한 시신의 파편 너머로 향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본성에서 몇몇 무관의 손에 흐트러진 백발을 우악스럽게 틀어 잡힌 노인이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다.
 하지만 흑기사의 기억 속에 존재했던 노인은 비참한 지금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왕좌에 앉아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느끼게 했었다.
 노인의 이름은 리베이드 크로나드. 곧 과거의 이름이 될 크로나드 왕국의 마지막 군주다.
 비록 패국(敗國)의 군주라고는 하지만 일개 무관이 개처럼 끌고나오는 모습에 흑기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국(一國)의 군주다. 합당한 예를 갖추도록.”
 “알량한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
 의외라고 해야 할까,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걸치고 있던 황금빛 갑옷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나가고 드러난 피부 위로는 잿가루와 뒤엉킨 흉한 피딱지가 엉겨 붙은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동정이 아니오. 비록 패국이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국왕이었던 자에 대한 예우요.”
 “예우? 네놈이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는가!”
 “물론이오. 난 승자니까.”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비열한 승리에서 자부심을 느끼는가!”
 “자부심 따위는 필요 없소. 내게 필요한 것은 승리뿐.”
 “오물보다 못한 더러운 승리라도 말인가?”
 “그 이하의 것이라도.”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군. 개와 대화하는 재주는 익히지 못했으니까.”
 리베이드 국왕은 모멸감을 드러내며 침을 뱉었다. 흑기사의 갑옷에 묻은 타액이 굴곡을 따라 흘러내린다.
 흑기사는 한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채 비웃음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당당하고 오만한······. 그야말로 일국의 국왕다운 태도요. 그런 자의 최후의 저항치고는 실망스럽지만.”
 “사령관님!”
 그때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을 가르며 한 기사가 흑기사에게 다가왔다.
 “말씀하신 대로 성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자들을 붙잡아 왔습니다.”
 ‘설마······!’
 순간 리베이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했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병사들 사이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세 남녀가 무력하게 끌려나왔다. 최후의 희망을 걸고 비밀통로로 탈출시켰던 두 아들과 막내딸이었다.
 “아버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힘없는 왕자의 목소리와 울먹이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공주의 모습에 리베이드는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건만 눈앞의 상황은 그를 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는 자신만이 아니라 크로나드의 운명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흑기사가 리베이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크로나드에는 왕자가 셋이 있다고 들었소.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나머지 하나가 보이지 않는군. 그대라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로아!’
 리베이드의 몸이 일순 경직되었다.
 그렇다. 아직 모든 왕자가 붙잡힌 것은 아니다. 막내왕자가 살아 있다. 새삼 상기하자 몸속 깊은 곳에서 새로운 희망이 불타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껴진다.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흑기사는 조롱하듯 중얼거린다.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스트라이덤!”
 “넷!”
 “산시아로 왕자의 목을 쳐라.”
 “머, 멈춰라!”
 리베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내리쳐지는 할버드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번쩍이는 할버드가 소리 없이 허공을 갈랐고,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고통으로 얼룩진 첫째왕자의 목이 바닥을 뒹굴었다.
 리베이드의 부릅떠진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다.
 “이, 이것이 명예를 목숨보다 숭상한다던 하베른의 방식인가? 그렇다면 시궁창의 쓰레기를 파먹는 쥐새끼조차 네놈들보다는 명예를 더 잘 알 것이다.”
 “어리석은 군주여, 전국(戰國)시대에 필요한 것은 그런 허울 좋은 명분보다는 승리요. 승리하고 살아남은 자만이 정의와 명예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난 완벽한 승리를 원하오.”
 “스스로를 기사라 칭하는 자가 그따위 말을 내뱉다니! 귀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군. 차라리 날 죽여라!”
 “미안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요. 그대는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흑기사의 손이 치켜져 올라가자 또 한 번 할버드가 내리쳐졌다. 둘째왕자의 머리통이 바닥을 구르며 기괴한 피의 궤적을 그려냈다.
 리베이드는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부르짖었다.
 ‘신이시여······! 정녕 이것이 당신이 안배한 운명이란 말입니까?’
 두 왕자의 피를 흠뻑 빨아들인 할버드의 창날이 새로운 희생자를 찾아 허공으로 치켜져 올라가는 것을 보며 그는 무력한 스스로를, 가혹한 운명의 신을 저주했다.
 제1화 트로이의 목마
 
 
 
 1
 
 푸르스름한 달빛이 느릅나무와 삼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저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뒤틀린 신비로움과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숲이었다.
 믿어지지 않지만 숲이라고 부르기조차 꺼림칙한 이런 공간에도 생명은 존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둠의 틈새에 숨어 있는 수많은 까마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숲을 걷다가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까마귀다.
 그러나 까마귀조차 이 숲의 불길함을 조금도 희석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흉조(凶鳥)인 까마귀는 숲을 더욱 괴이하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쨌든 숲의 불길함이 놈들을 불러들인 것인지, 놈들이 불길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숲은 다른 짐승들은 보이지 않고 오직 수천수만 마리나 되는 까마귀의 은신처가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붙은 이름이 까마귀 언덕.
 사람들은 밤은커녕 낮에도 까마귀 언덕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왕성에서 불과 20여 분 거리에 아직까지 이런 숲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늦은 저녁, 까마귀 언덕의 좁은 길을 따라 오르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순백의 말을 탄 자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채 뽀얀 피부를 가진 16세 가량의 소년, 옆에서 밤색 말을 몰고 있는 다른 한 명은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우람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소년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누운 자세로 팔다리를 말의 움직임에 따라 덜렁거리며 흥얼거렸다. 자세도 불량, 노랫말도 불량했다.
 “별이 총총, 별이 총총, 꼴 뵈기 싫게 빛나는 밤∼! 미움 받는 착한 막내는 파티에도 가지 못하고 기분 나쁜 숲길을 따라 심부름이나 가야 하는 밤∼! 너무한다, 젠장∼! 삐뚤어진 어른이 돼 버릴 테다, 젠장∼!”
 “악의로 똘똘 뭉친 노래를 부르시는 걸로 이미 충분히 삐뚤어진 것 같은데요.”
 “젠장, 젠장, 젠장! 농담이 아니라고. 이 몸께서 어째서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까마귀 할멈의 끔찍한 얼굴을 보러 가야 하느냔 말이야.”
 “어라? 벌써 잊으신 겁니까? 산시아로 왕자님의 약혼식에 쓰일 신비한 가루를 받으러 가는 거 아닙니까.”
 “내가 너처럼 단세포생물인 줄 알아?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왜 하필이면 나냔 말이야.”
 “그야 카산드라님이 크로나드 왕족이 아닌 분은 상대조차 안 하시니······.”
 “네 귀는 틀림없이 머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해.”
 “네? 귀요?”
 청년이 귓구멍을 후비적거리자 소년이 딱하다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말을 들으면 생각 좀 하고 대답하란 말이야. 까마귀 할멈의 괴팍한 취향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왕족이 나뿐이냐? 아버님과 큰형이야 그렇다 치고, 누아 형과 바네샤도 있잖아. 어차피 둘 다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왜 하필이면 날 콕 찍어서 보내냐고. 내가 가면 틀림없이 까마귀 할멈이 붙잡아 놓고 또 몇 시간이나 시시껄렁한 소릴 해댈 걸 뻔히 알면서.”
 소년은 상상만으로도 괴롭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백금발이 탐스럽게 출렁였다. 머릿결만큼이나 윤기가 흐르는 뽀얀 피부에 도드라진 빨간 입술은 여자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다.
 미소년의 이름은 로아드리체 펠콘 크로나드, 로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크로나드 왕가의 셋째왕자였다.
 왕자답게 허리에는 보통의 장검보다 약간 짧은 세이버(Saber)를 차고 있었지만, 이 또한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어 한눈에 실전용이 아닌 장식용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뒤따르는 청년은 검은머리에 약간 그을린 듯한 구릿빛 피부, 굵직굵직한 이목구비를 가진 호남형의 사내였다. 인상에 어울리게 몸집도 남달리 컸다.
 키가 2미터는 충분히 되었다. 살도 없이 길쭉한 몸매가 아니다. 큰 만큼 절묘한 균형이 잡혀 있다. 두껍고 단단하게 단련된 육체는 묵직한 바위 같은 느낌을 풍긴다. 허리에는 평범한 장검을 차고 있었는데, 왕자의 장식용 세이버와 달리 손잡이의 가죽이 닳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아사드 솔 시란, 왕자의 호위무사다.
 로스트킹덤
 
 지은이 : 유성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602-6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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