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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2022.01.26 조회 176 추천 0


 #001.
 
 
 
 
 
 Prologue
 
 
 
 5월의 햇살은 따스하고 감미로웠다.
 바야흐로 계절은 봄. 산에서 들에서 겨우내 잠들어 있던 모든 것들이 깨어나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는 계절이다.
 봄의 손길이 닿은 넓은 들판에는 만발한 봄꽃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강렬한 색상을 뽐내고, 산에도 조금씩 작년의 녹음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변화는 남에서 북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어느 한 곳 빠뜨리는 법이 없다. 이렇게 용의주도한 봄님께서는 작년처럼 따스하고 감미로운 군대를 동원해 이실리오 대륙 전역을 소리 없이 점령해가고 있었다.
 봄님의 명령을 받은 정복열에 들뜬 병사들은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여 드디어 이실리오 대륙 서부에 위치한 크로월 제국의 문까지 두들겼다. 강제퇴거 명령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겨울의 삭막한 풍경은 며칠 전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봄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그리고 그 봄의 한복판에 선 한 청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그렇게 갑자기 시작되려 하고 있다.
 “젠장, 뭐가 봄이냐.”
 청년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을 엉덩이로 깔아뭉개며 중얼거렸다.
 물결치듯 부드러운 굴곡의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전형적인 호남형이다. 인상에 걸맞게 허리에는 제법 그럴듯한 검까지 차고 있지만 결코 뽑아본 적도, 그럴 마음을 먹어본 적도 없다. 검은 그가 입고 있는 최고급 실크 옷처럼 그저 장식품에 불과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가 지금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일종의 장사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청년은 얼마 전까지 크로월 왕국의 수도 아스란에서 그 장사 도구를 이용해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사람과 함께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의 사업은 연일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세상물정 모르는 귀부인이나 욕심 많은 중년귀족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사기행각을 벌이고 다닌 것이다.
 어쨌든 그 사업은 상당한 고수익이면서도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일이어서 둘은 적잖은 재산을 모았다.
 “그때 곧바로 작업장을 옮겼어야 하는데······.”
 청년은 한숨을 불어냈다.
 옛말이 그른 게 하나 없다. 꼬리가 길면 밟히고, 큰 빵을 삼키면 체하는 법이다.
 스승과 제자가 아스란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 해보자며 굳게 손을 잡았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게다가 그들이 노렸던 사냥감이 두 눈에 의심과 불신을 박아 넣고, 금력과 권력을 양손에 불끈 움켜쥔 괴수 그라함 아스타테 공작이란 게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의심이 많다니······. 그래서야 행복한 노년을 보내긴 힘들걸?”
 청년은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기꾼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의심병 말기 환자인 그라함 공작에게 위조공문서를 들킨 청년과 스승은 권력자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절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그라함 공작으로서도 체면을 생각하여 대놓고 사기를 당했다고 광고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청년은 어찌어찌 살아서 아스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무작정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도주하는 사이 헤어져버린 스승의 생사도 불확실한 상태다.
 “뭐, 그 양반이라면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양반은 아니지만서도······.”
 확실히 스승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구렁이와 너구리, 거기에 두더지까지 합성해놓은 듯한 스승이다. 게다가 사기꾼을 친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죽었다가도 사신을 상대로 사기를 쳐 되살아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제는 스승이 아니라 청년 자신이었다.
 “이제 어쩌지?”
 청년은 막막했다.
 “역시······ 혼자 할 수밖에 없겠지?”
 아직 경력도 짧고 혼자서 일을 해본 적도 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구걸과 사기뿐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문제가 생겨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더라도 다시 빈민굴 속에서 뒹굴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떻게든 해야 해. 아직 혼자서 큰일을 하는 것은 무리지만 나도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어. 욕심 부리지 않고 위험 부담이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면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스승님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다시 예전처럼 큰일도 할 수 있을 거야.”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켜 기분을 전환했다.
 “배워야 할 것은 많지만 핵심은 불과 몇 가지에 불과하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능숙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노련함! 무궁무진한 거짓말을 짜낼 수 있는 창의적인 발상! 설령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외모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성실함!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용기다!”
 청년은 사기꾼인 주제에 노련하고 창의적이며 성실하기까지 했던 스승의 말을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한껏 오므라들었던 위장이 일시에 펴지며 거북한 소리를 냈다.
 꼬르르르륵
 “이런, 그러고 보니 벌써 3일이나 굶었군. 아무리 굶는 것에 익숙하다지만 이 정도쯤 되면 위험한데······.”
 혹시나 해서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흔한 구리동전 하나 나오지 않았다. 아스란에서 도망쳐 나올 당시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은 돈은 이미 오래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지. 좋지 않은 일이 있은 뒤라 가능하면 며칠간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지금부터 바로 영업을 재개해야겠군. 제대로 된 목표물만 발견하면 끼니 정도 해결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청년은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시원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어쩌면 이것은 독립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 나의 화려한 시절은 이제부터다. 파이팅!”
 힘차게 소리친 청년은 스스로의 재능에 자신감을 가졌고, 한 번의 실패로 절망하기엔 너무 젊었다.
 청년의 이름은 바이엔. 나이 17세, 사기꾼 경력 6개월의 진취적인 젊은 사기꾼이다.
 바이엔은 한껏 숨을 들이켜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때는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5월, 장소는 크로월 왕국의 수도 아스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이델 시의 야외공원이었다.
 ACT Ⅰ사업재개
 
 ♤
 Scene ⅰ
 
 
 5월 들어 가장 좋은 날씨였다.
 게다가 마침 휴일이어서 공원에는 오랜만의 광합성 작용을 위해 몰려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바이엔은 일단 주변에 널려 있는 꽃 몇 송이를 꺾어 소매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공원을 거닐며 사냥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대상은 여자로 결정했다. 접근하는 것도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돈이 없는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쓸 만한 상품(얼굴)을 활용하기에 더 없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쭉 뻗은 긴 다리를 교차시키며 공원을 가로지르자 많은 여성들이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바이엔은 절세의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보기 드문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뿐이 아니다. 몸에 걸친 옷은 아스란에서도 최고로 치는 명품이요, 스승의 스파르타식 교육의 성과로 완전히 몸에 배어버린 행동거지는 마치 교양과 품위의 교본과도 같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바이엔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면밀히 그녀들을 관찰했다.
 ‘흠······. 이제 겨우 열두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나의 미모를 알아보다니 제법 남자보는 눈이 있나 보군. 훌륭해! 하지만 코흘리개의 군것질 돈을 탐낼 수는 없지. 패스. 헉! 뭐야, 저 할머니는? 손자뻘 되는 남자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다니. 말세다. 아무리 밥만 얻어먹으면 된다지만 프라이드가 있지. 할머니는 무조건 패스. 어? 저 여자는 좀 괜찮아 보이는데······ 척 보니 평민이군. 자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평민처녀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지.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고, 패스.’
 그렇게 거르고 거르길 20여 명, 바이엔은 드디어 모든 조건에 딱 들어맞는 여자를 찾아냈다.
 대략 30세 전후로 보이는 중년부인이었다. 화려한 복장과 하인까지 거느리고 산책을 나선 것으로 보아 꽤 부유한 집안의 귀부인인 모양이다.
 바이엔은 침착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귀부인에게 다가서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디,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뭡니까? 부인께서는······.”
 대답한 것은 큰 덩치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험악한 인상의 하인이었다. 그러나 귀부인은 하인을 제지하며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당연한 반응이다. 지금의 미소는 입 끝을 치켜 올려 유난히 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고 볼을 긴장시켜 보조개를 강조하는 가장 자신 있는 미소다.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성에 관심이 없거나 남장여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슨 용건이지요?”
 귀부인이 눈을 살짝 치켜뜨며 물어왔다. 약간 살집이 있지만 충분히 ‘예쁘다’는 말을 들을 만한 미모였다.
 “먼저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스란의 나이트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수행을 위해 크로월 각지를 여행 중인 로나이크 조나단이라고 합니다.”
 “아, 명망 있는 조나단 가문의 젊은 기사 분이셨군요. 처음 뵙겠어요, 로나이크 경.”
 바이엔의 인사에 귀부인이 살짝 앉았다 일어나며 답례했다.
 “명망이라니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레이디. 그리고 아직 기사작위를 받지 않았으니 경이라는 칭호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로나이크라고 불러주십시오.”
 살짝 볼을 붉히는 바이엔은 물론 로나이크 가문의 명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달달 외운 수천 개의 귀족 이름 중에서 하이델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름을 댄 것뿐이다.
 당연히 그 가문이 명성을 휘날리는지 악명을 휘날리는지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이엔 자신이 귀족이라는 점을 알리는 것이고, 예상대로 귀부인의 눈빛이 호기심에서 호감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험악한 인상의 하인이 주눅 든 표정으로 물러난 것은 덤이다. 귀족간의 대화다. 아무리 한 인상 먹어주는 하인이라 해도 감히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그래요. 그럼 로나이크님은 저에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먼저 이것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바이엔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귀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바라보았다. 빈손이다. 그러나 바이엔이 살짝 손을 흔들자 어느새 아까 꺽은 들꽃이 손에 들려 있었다.
 소매 속에 숨겨놓은 꽃을 재빨리 꺼내는 간단한 마술이지만, 귀부인은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발했다.
 “어머! 꽃이? 어떻게 갑자기 손에서 나타난 거죠?”
 라이어
 
 지은이 : 유성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602-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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