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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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마전 1권-1

2015.02.04 조회 1,741 추천 15


 서.
 
 
 선인(善人)이 성인(聖人)의 도를 얻지 못하면 대인(大人)이 될 수 없듯이, 악인(惡人) 또한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큰 악인이 될 수 없다.
 
 마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극마(極魔)를 넘어 탈마(脫魔)에 이르기 위해서는 만인(萬人)의 혈(血)이 필요하지만, 탈마를 넘어 현경(賢經)에 도달하면 대성인이 된다.
 
  서담무림서 서장에서 발췌.
 
 
 1장 반노환동
 
 
 꽝!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진다.
 생사현관은 물론 전신의 모든 세맥이 타동 된 게 이미 10년 전인데, 아직도 막혀 있는 혈도가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무림을 종횡하며 수십, 수백 번의 생사고비를 넘겼고, 온갖 참혹한 고통을 다 당해보았다고 자부했지만, 지금 머릿속을 헤집는 고통은 인간의 몸으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꽝!
 ‘음! 두 번째…….’
 충격은 계속되었다.
 꽝! 꽈광!
 머릿속에서 거대한 범종이 얼마나 많이 울렸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커다란 종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온 몸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다음은…….
 환희가 찾아왔다.
 
 아아!
 마침내 이루고야 말았다.
 천년마교의 숙원.
 역대 마종들의 피땀이 담긴 지상최강의 마공.
 천마심공(天魔心功)을 마침내 대성했다.
 이제 하늘 아래 나를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무림맹과 정파의 위선자들을 멸하고, 대마도의 하늘을 열 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의 출관과 함께 마도인들이 신강을 떠나 중원으로 진격할 것이다.
 ‘지금 당장 무림으로 나가, 절대마종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리라!’
 그때!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진다.
 몸이 끓어오르는 것 같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마공이 불같이 일어나 머리 꼭대기로 치솟는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이 천중과 인당을 지나, 백회혈로 모여든다.
 “이, 이런! 백회혈이 열려…….”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수십 년간 피눈물을 흘려가며 수련한 마공지기가 백회혈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채 반각도 걸리지 않아, 내 몸에서 마공은 깨끗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백 년의 공이 헛것이 되어버렸구나!’
 땅을 치고 통곡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이상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다지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다.
 마땅히 그렇게 되었어야 할 일이, 이제야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허허허, 차면 비워지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그래! 내가 욕심을 부렸구나.’
 갑자기 오래 전에 읽었던 장자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彼出於是 是亦因彼 是亦彼也 彼亦是也
 피출어시 시역인피 시역피야 피역시야
 ‘허허! 마공, 정공, 혹은 마도와 백도의 나눔이 헛것이로다!’
 불현 듯 찾아온 새로운 깨우침이었다.
 천마지존신공을 대성했다고 기뻐했던 스스로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세상에 대성이란, 그리고 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깨닫는 자의 한계는 있어도 깨달음 자체에는 한계가 없음이었다.
 
 마음을 비우자 갑자기 새로운 기운이 백회혈을 통해 다시 밀려든다. 내게서 빠져나갔던 바로 그 기운이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음울하고 핏빛 가득한 마공지기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다.
 우득! 우드득!
 갑자기 온 몸의 관절이 뒤틀리고, 피부가 벗겨져 나간다.
 ‘탈태환골이라면 이미 두 번이나 했는데, 어찌…….’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좀 다르다. 단순히 피부가 벗겨지고, 조금씩 어긋나 있던 뼈가 제 자리를 찾는, 그런 단순한 탈태환골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온 몸이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피부, 아니 살가죽이 통째로 벗겨져 나가고, 머리카락은 물론, 이빨까지 모조리 빠졌다.
 더더욱 놀라운 건, 그 모든 것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복구되었다는 사실이다.
 남겨진 잔재를 보니 마치 온 몸의 피부와 장부까지 통째로 벗겨낸 것 같다.
 이전과 전혀 새로운 뽀얀 살, 그리고 하얀 이빨과 검은 머리!
 나는 다시 태어났다.
 늙어버린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항상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온 몸에 활력이 솟아오른다.
 석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동경을 찾았다.
 “이, 이럴 수가! 내가…….”
 그렇다. 전설의 반로환동이었다.
 칼칼하던 목소리도 맑고 생생하게 변했다.
 깊은 깨달음이 전해준 신의 선물이 바로 이것이리라.
 당장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다.
 ‘그런데, 가만. 반로환동을 해서 젊음을 되찾았는데, 그걸 즐기지 않는다면 젊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내가 꿈꿨던 일을 한 번 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천하제일마. 무영마존. 혹은 마검일잔향이라 불리며 일세를 풍미했던 희대의 대마두, 천년마교 제 28대 교주 혁무린이 마침내 무림에 재 출두했다.
 
 @
 
 짹! 째잭!
 이름 모를 산새가 예쁘게 지저귀며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여주고 있다. 혹독한 감숙의 겨울을 이겨내고, 새싹을 피워내는 초목들이 싱그럽다.
 별로 넓지도 않은 관도.
 아직은 꽃샘추위가 가시지도 않은 이 산중에 흑색 무복을 입은 청년 한 명이 길을 가고 있다.
 무척 사내답고 호방하게 생긴 얼굴에 뽀얀 피부를 하고 있었다. 옷만 제대로 차려입으면, 어디 가서 귀공자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품세다.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길을 가는 이 청년이 바로, 천년마교의 당대 교주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 혁무린이다. 세수 일백 세를 넘긴 지 삼 년이 지났지만, 반노환동(返老還童)을 한 그의 지금 모습은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길을 가던 혁무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누가 보았다면 귀신이라고 소리치고도 남을 가공할 신법이었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세 명의 사내가 길 저편에서 나타났다.
 두 명의 중년인과 한 명의 노인이었는데, 노인의 모습이 무척 특이했다.
 매부리코에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다른 두 사람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형형했다. 게다가 손에는 길고 뾰족한 손톱이 자라나 있었는데, 검은 색으로 번들거려 그가 입고 있는 흑의와 잘 어울렸다.
 울던 아이도 이 흑의노인의 모습을 본다면 울음을 그칠 것이고, 노환으로 죽어가는 노인이 보았다면 저승사자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여길 행색이었다.
 흑의노인이 자신의 행색에 어울림 직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이 적당하겠군.”
 중년인들도 흑의노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이곳이 좋군요. 우리가 뒤를 막고, 어르신께서 앞을 막아선다면 놈들은 빠져나갈 구석조차 없을 것입니다.”
 흑의노인이 까마귀가 울부짖는 것 같은 목소리로 웃었다.
 “클클클, 천기수사(天機秀士) 제갈현! 기관지학(機關之學)의 천재라는 그놈만 잡는다면, 우리 련은 무림맹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댈 수 있을 것이야. 클클클.”
 흑의노인의 말에 중년인 한 명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철옹성이라는 무림맹의 기관에 대해 그보다 훤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일만 잘된다면 어르신께서는 련에 큰 공을 세우시는 겁니다. 련주께서 필히 치하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클클, 자, 산 주위에 아이들을 풀어 그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반의 준비나 하게.”
 “걱정 마십시오. 천라지망에 가까운 포위망이 곧 형성될 것입니다.”
 세 사람이 다시 주변 숲속으로 사라졌다.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며 이야기까지 모두 들은 혁무린은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 천기수사 제갈현이라면 나도 들어본 이름이야. 기관지학에 정통하다고 들었는데, 하필 ‘련’이라는 곳에 속한 자들에게 행보가 알려져 표적이 되고 말았군. 물론, ‘련’이라면 천사련(天邪聯)을 말하는 것이겠지.’
 천사련은 백도의 무림맹과 마도의 천년마교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고 있는 사파연합을 일컫는 것이다.
 당금 무림은 이 세 개의 세력들이 서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가 지속되고 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암투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기도 했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큰 충돌은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천년마교주 혁무린이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어차피 천기수사 제갈현이 속한 무림맹이나, 그를 암습하려는 천사련이나 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천년마교에 있어 정도무림은 위선의 탈을 쓴 이리들이고, 천사련은 이리의 탈을 쓴 승냥이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냥 내버려둘까? 음! 아니지. 천기수사 같은 인물이 천사련에 잡혀간다면 놈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걸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는 내심 천사련의 잔당들이 무림맹의 주요인물을 납치해 가도록 방관치 않으리라 결심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산 아래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모두 다섯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검을 허리에 찬 네 명의 검객들과 문사풍의 중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두 명의 검객이 앞섰고, 나머지 두 명은 문사풍의 중년인을 앞에 두고 그 뒤에서 따랐다.
 대충 보아도 네 명의 검객들이 문사풍의 중년인을 호위하고 있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이들 다섯 명은 제법 빠른 신법을 펼쳐 말 그대로 날듯이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무척 빨랐음에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모두들 대단한 실력자임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혁무린이 숨어 있던 곳 앞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표정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기척이라도 느낀 모습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그 흑의노인이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들 맞은편에 나타났다.
 “클클클! 무림맹의 잡견들이 마침내 나타났구나. 클클클!”
 앞서 있던 두 명의 검객들이 즉시 검을 뽑았다. 발검 자세부터 무척 절도가 있고 깨끗한 것이, 명문에서 검을 제대로 배운 검객이 분명했다.
 그때, 뒤쪽에서 예의 그 중년인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검과 도가 한 자루씩 들려 있었는데, 그 기세가 여간 매서워 보이지 않았다.
 문사풍의 중년인을 뒤쪽에서 호위하던 검객 둘도 즉시 검을 뽑아들고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문사풍의 중년인이 흑의노인을 살펴보다가 길게 자란 뾰족하고 검은 손톱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에서 신음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흑풍조(黑風爪) 마복!”
 흑의노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클클클, 노부를 알아보는구나. 그럼 조용히 나를 따라가자. 괜한 짓거리로 힘을 뺄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문사풍의 중년인, 천기수사 제갈현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자신이 아는 한 흑풍조 마복은 지금의 상황에서 충분히 그런 소리를 하고도 남을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상대의 말대로 ‘나 죽었소! ’하고 그를 따라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알 수 없지만,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흑풍조 마복이 속해 있는 정도무림의 공적인 천사련에 끌려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를 호위하고 있던 두 명의 검객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흑풍조 마복이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로군.”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더니 허공가득 검화가 피어났다.
 흑풍조 마복이 스스럼없이 두 손을 검화 속으로 찔러 넣었다.
 순간 검이 둔탁한 쇳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왔다.
 따다다당!
 놀랍게도 마복은 자신의 손톱만으로 검객들의 검초를 모두 막아냈다. 그러고도 그의 손톱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마복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비릿한 미소가 짙어지는 듯하더니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놀랍도록 빠른 신법이었다.
 천기수사 제갈현이 대경실색하더니 소리쳤다.
 “물러서게!”
 그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장을 쳐냈지만 단말마의 비명이 잇달아 울렸고, 두 검객이 모두 땅에 쓰러졌다.
 그들의 목에는 한결같이 짐승의 이빨에 잡아 뜯긴 듯한 상처가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천기수사 제갈현은 어느새 삼장 밖으로 물러나 자신의 장력을 피한 상대를 노려보았다.
 ‘나는 저자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아마, 나를 사로잡을 생각이 아니었다면, 내 장력을 맞받아친 후, 손목을 잡아 비틀어버렸을 것이다.’
 그때, 또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뒤쪽이었다.
 제갈현이 재빨리 돌아보자, 후미를 지키던 검객 둘이 가슴과 배에 검상을 입은 채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천기수사 제갈현의 얼굴에 처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수신호위 넷만 데리고 맹을 몰래 빠져나오지 않았을 텐데. 아! 저들의 죽음은 모두 내 탓이구나. 미안하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감숙에 사사로운 볼일이 있어, 번거롭지 않게 서둘러 다녀온다고 무림맹을 나온 게 화근이었다. 밤을 도와 움직인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며칠 안에 무사히 다녀올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천사련의 고수들이 나타나 길을 막았으니 말이다.
 천기수가 제갈현은 수신호위들을 따라 함께 죽을 생각으로 흑풍조 마복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풍조 마복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혈도를 제압하려 했다.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명색이 백도의 명숙이라는 제갈현이었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가장 처지는 게 그였다. 제갈세가 자체가 무공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이나 기관지학 등 잡다한 학문에 능통했고 그쪽으로만 매진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혈풍조 마복은 천사련 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상당한 고수급 인물이었다.
 제갈현이 죽을 각오를 하고 저항했지만, 가지고 놀듯 그를 상대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다행히 마복은 제갈현을 사로잡을 작정이었고, 덕분에 제갈현이 열 합이 넘도록 싸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승패는 벌써 결정이 났을 것이었다.
 “클클클! 그만 저항을 멈추고 얌전히 군다면 체면은 살려주는 한에서 데려가겠다. 하지만 계속 저항한다면 발가벗긴 후, 개처럼 목에 줄을 묶어서 끌고 갈 것이다.”
 제갈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의 머리를 쳐서 자결할 결심을 하고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흑풍조 마복을 향해 달려드는 척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해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죽는 것조차 스스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흑풍조 마복이 아니라 뒤에 있던 두 명의 중년인들이 어느새 다가와 그의 마혈을 제압해버렸던 것이다.
 제갈현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니…….’
 그는 절망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풍조 마복이 음흉한 웃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클클클, 끝까지 얌전히 굴지 않고 자결을 하려 하다니. 좋다. 네놈을 발가벗겨서 개처럼 끌고 가 주마.”
 그가 천기수사의 윗옷을 잡아 뜯으려는 순간,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복이 흠칫하더니 경각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냐?”
 숲속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복은 긴장했다. 조금 전에 그는 분명히 주위를 샅샅이 살폈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 버젓이 숨어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흑풍조 마복이 중년인 둘에게 턱짓을 했다.
 중년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검을 들고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뛰어들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왔다.
 사정없이 땅에 패대기쳐진 그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마혈을 제압당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도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흑풍조 마복은 상대가 예사롭지 않은 고수임을 알았다.
 그는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채 숲을 향해 소리쳤다.
 “어느 고인이시오? 천사련의 흑풍조 마복이 뵙기를 청하오!”
 숲속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암기가 하나 날아왔다.
 “감히!”
 흑풍조 마복이 일갈을 터뜨리더니 자신이 자랑하는 흑조(黑爪)를 휘둘렀다.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손톱이 부러질 듯 아팠던 것이다.
 그는 땅에 떨어진 암기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그건 암기라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부러진 나뭇가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마복의 안색이 굳었다. 상대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마복이 긴장된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타난 사람은 고인과는 거리가 먼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네놈은 누구냐?”
 숲속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천년마교주 혁무린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년마교의 구중심처에서 수십 년을 지내면서, 자신의 명 한 마디에 죽는 시늉까지 하는 수하들만 보고 살다가, 험한 말을 거침없이 하는 상대를 만나니 괘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신선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이게 바로 강호야. 내가 수십 년 동안 잊고 있었던. 후후후.’
 흑풍조 마복이 혁무린을 노려보더니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네놈이 방금 나뭇가지를 날렸느냐?”
 혁무린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다면 어쩔 건가?”
 “뭐라?”
 마복은 쉽게 믿기 어려웠다. 나뭇가지에 실려 있는 심후한 내공은 지금 눈앞에 나타난 청년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성취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해라, 이놈. 숲속에 누가 있느냐?”
 “후후,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더니, 내가 그랬다지 않나?”
 “이, 이놈이…….”
 그는 곧바로 청년을 공격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강호의 늙은 생강답게 상대의 반격이 매서울 경우를 대비해 퇴로를 미리 생각해둔 상태에서 물러설 여력까지 감추었던 것이다.
 청년이 곧바로 주먹을 뻗어 공격해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놀랍도록 빠른 신법이었다.
 흑풍조 마복은 눈앞에서 갑자기 상대가 사라지자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
 그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이리저리 보법을 밟으며 방어 자세를 취하는 사이, 혁무린은 어느새 쓰러진 천기수사 제갈현을 안아들고 있었다.
 “아차!”
 마복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혁무린을 공격했지만 그는 이미 숲속으로 신형을 날린 후였다.
 숲속에 뛰어든 혁무린은 제갈현은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 숨긴 후, 재빨리 그의 외투를 벗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전음을 날렸다.
 “반시진만 있으면 혈도는 저절로 풀릴 것이니, 그때 알아서 도망치시오.”
 제갈현의 두 눈이 혁무린의 얼굴을 향해 있었는데, 눈빛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척 고마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혁무린은 전광석화 같은 신법으로 그곳을 떠났다.
 곧이어 마복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놈! 어디 있느냐?”
 곧이어 파라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혁무린이 신형을 날리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의 품에서 두루마리가 펄럭였고, 그걸 본 마복은 상대가 천기수사를 안고 도망친다고 생각했다.
 “이놈!”
 흑풍조 마복의 신형이 혁무린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 누워 있던 천기수사 제갈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게 멈추지 못하겠느냐, 이놈!”
 흑풍조 마복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지만, 상대는 숲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신법 하나만 놓고 본다면 절정고수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상대는 사람 한 명까지 안고 있지 않은가.
 마복은 내심 혀를 내둘렀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천기수사 제갈현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다시 찾아오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벌어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끝난 곳은 숲속 작은 공터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청년이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등을 돌린 채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옳거니! 지쳤구나. 그래, 아무리 영약으로 내공을 키웠다고 해도 수십 년 동안 피눈물 나는 수련으로 쌓은 노부의 내공을 능가할 수는 없지.’
 그는 내심 상대를 어떻게 찢어죽일지 고민하면서 서서히 다가갔다. 음흉한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훌훌훌, 이놈! 오늘 네놈의 심장을 꺼내 세상 구경을 시켜주마. 훌훌훌.”
 그때, 혁무린이 신형을 빙글 돌렸다.
 내공에 의해 부풀어져 있던 두루마리가 힘없이 꺼지며 바람에 펄럭였다.
 흑풍조 마복의 두 눈이 커졌다.
 “네, 네놈이 감히…….”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던 욕지거리가 다시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상대의 무서운 기세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 이건……”
 그는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날린 나뭇가지에 실려 있던 내공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혁무린의 입에서 위엄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꺼져라!”
 흑풍조 마복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 년 동안 강호를 종횡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사고비를 넘겼고, 또 날고 긴다는 많은 고수들도 만나 보았지만, 맹세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청년과 같은 기도를 지닌 고수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려, 련주에 버금가는 기도라니…….’
 그는 갑자기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감히 대꾸를 한다든지, 싸워보겠다는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압도되고 말았다.
 “예…….”
 간신히 대답을 한 후, 마복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는 아름드리나무 뒤까지 물러나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심호흡을 해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자신을 공포에 떨게 한 청년고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긴 한숨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휴!”
 흑풍조 마복은 아직까지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두려움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공을 펼쳐 도망쳤다. 그의 머릿속에서 천기수사의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숲속 어딘가에서 흑풍조 마복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천년마교주 혁무린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흑풍조 마복을 왜 죽이지 않고 그냥 살려두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마복은 물론, 천기수사까지 모조리 도륙을 해 버리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설마 내게 호생지덕(好生之德)의 마음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알 수가 없구나!”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병장기소리가 그의 귀를 잡았다.
 흑풍조의 마복의 수하들이 산 주위에 천라지망을 펼친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때문에 싸움이 난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혁무린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곧이어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산 어귀의 관도였다.
 그곳에서는 산적으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표행에 나선 표사들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혁무린이 살펴보니, 옷만 산적 차림을 했을 뿐, 그들의 무공은 예사롭지 않았다.
 ‘산을 포위하고 있던 천사련의 떨거지들이로구나. 운 없게도 표행이 걸려들어 곤욕을 치르고 있군.’
 상황을 보니 표사들이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표사 몇몇이 부상당해 쓰러졌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사망자까지 줄줄이 나올 판이었다.
 혁무린의 마음에 갈등이 떠올랐다.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은데, 마음속에서는 개입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년마교의 교주가 되기까지 자신을 지탱해주던 철혈(鐵血)의 마심(魔心)이 반노환동과 함께 많이 퇴색해버린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평소 경멸해 마지않던 백도인들의 호생지덕이었다.
 ‘강자존(强者存)만을 외치던 내가,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허허!’
 눈살을 찌푸리며 난감해하던 그의 두 눈에 우연히 표기(驃旗)가 들어왔다.
 섬서(陝西) 비룡표국(飛龍驃局)!
 혁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섬서성에 존재하는 수십, 수백 개의 표국들 중 하나에 불과할 비룡표국이라는 글자가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비룡표국이라……. 어디서 들어보았던가?’
 때마침, 표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표두가 상황이 어려워졌음을 알고 크게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저승에 간다면 섬전표 양 대협의 얼굴을 어찌 볼 것인가! 허!”
 혁무린의 얼굴에 ‘아!’ 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의 상념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혁무린이 강호에서 제법 실력도 갖추었고, 이름깨나 떨쳤다고 자부하던 이십 대 후반 무렵이었다. 그는 녹림의 산채를 하나 맡고 있었는데 한창 승승장구해서 녹림의 총표파자가 되어볼까, 하는 꿈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그래! 내가 산채를 맡아 산적질을 하다가 처음으로 된통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비룡표국의 섬전표라 불리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의 검술은 정말 무서웠지. 난다 긴다 하던 녹림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으니 말이야. 그때, 나도 용기 하나만 가지고 어설프게 설치다가 죽을 뻔했는데… 그가 살려주었지.’
 혁무린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왜 자신을 살려주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산적들을 향해서는 매서운 살수를 뿌려내던 그 사람이 자신과 몇 차례 검을 맞댄 후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기도 쉽지 않았을 터, 녹림에 몸을 담고 있다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섬전표 양천익은 그 후 잠시 고민하다가 혁무린을 죽이지 않고 검을 거두었다.
 혁무린이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기재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다. 그 기재가 자라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서 어떤 중요하고, 큰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건 분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법이다. 그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혁무린은, 장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를 마도의 영특한 기재들을 수없이 죽여 버렸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큰 죄였는지, 그리고 마도가 왜 백도를 누르지 못하고 신강의 오지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백도에서는 될 성싶은 싹을 발견하면 문파나 가문의 모든 이들이 다 달라붙어 제대로 키우려고 노력한다. 반면 마도에서는 그 싹을 자르기에 바쁘다. 후에 자신의 자리를 넘볼 위협이 된다는 게 이유다.
 ‘소위 백도의 명숙이라는 위선자들을 보이는 족족 다 잡아 죽였지만, 고개만 돌리면 또 그런 실력자들이 나타나 명숙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 베어도 베어도 끝도 없이 계속 나타나 자리를 메우는 백도의 저력은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혁무린은 당시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섬전표 양천익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때 그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가차 없이 쳐 죽였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내가 있었겠는가!’
 마침내 결심을 굳이 혁무린이 곁에 있던 소나무의 잎을 꺾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돋우어 날려 보냈다.
 순간, 혁무린의 손을 떠난 나뭇가지들은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허공을 날아가 목표물에 적중했다. 놀랍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막 표사 한 명의 팔을 베어내려던 산적이, 갑자기 발에 뭔가 걸리기라도 한 듯 고꾸라졌다.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표사가 얼떨결에 무기를 휘둘렀다.
 크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산적이 어깨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아 부상이 가볍지 않은 듯했다.
 산적이 주춤거리며 일어서더니 뒤로 물러섰다.
 표사는 자신이 산적의 어깨를 베었다는 게 믿기지 않은 듯 두 눈동자만 굴리다가, 산적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부주의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나, 발을 헛디뎠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세 명의 산적들 부상을 당했고 한 명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호랑이처럼 날뛰던 산적의 수뇌로 보이던 자는 순간적으로 왼쪽 다리에 힘인 쭉 빠지는 것을 느꼈고, 그 때문에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때마침 찔러 들어온 표사의 칼에 팔을 다쳤다.
 산적들의 수뇌는 그 자리에서 퍼뜩 일어나 바람처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이해할 수 없는 우연들이 계속 일어나, 상황이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그가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순간, 여기저기서 들리던 쇳소리와 비명이 뚝 그쳤다.
 산적들의 수뇌로 보이는 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연이 계속 겹치면 필연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아는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가 숲을 향해 소리쳤다.
 “어느 고인이시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표사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 어쩌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었다.
 숲속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신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나섰다. 바로 혁무린이었다.
 표사들은 다소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산적 수뇌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냐?”
 산적 수뇌의 물음에 청년이 뒤를 흘깃거리더니 대답했다.
 “당신들은 그만 물러가시오. 산주(山主)께서 더 이상의 싸움을 허락지 않는다고 하셨소.”
 산적 수뇌가 청년의 뒤에 펼쳐져 있는 숲을 응시했다.
 “이 산에 주인이 있는 줄은 몰랐소이다. 소란을 피워 죄송하게 되었으니, 직접 얼굴을 뵙고 인사라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시오.”
 숲속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혁무린이 다시 말했다.
 “이 산에 은거하고 있던 기인이시오. 자신은 모습을 드러내기 싫으니 내게 대신 나가서 말을 전하라 하셨소.”
 산적 수뇌는 뒤쪽 숲과 청년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무슨 수를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먼 숲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수하들의 움직임을 방해해 전황을 뒤집어버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은거고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때마침 멀리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렸다.
 산적들의 수뇌가 그 소리를 듣고는 흠칫하더니 숲을 향해 포권을 했다.
 “언젠가 다시 산을 찾아와 인사를 올리겠소이다.”
 포권을 마친 그가 수하들을 이끌고 산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산적들이 사라지자 표사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부상자들이 꽤나 있었고, 몸 한두 군데 칼자국을 새기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싸움은 흉흉했다.
 표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숲에서 걸어 나온 청년에게 다가가 포권을 했다.
 “은인에게 감사드리오. 비룡표국의 표두 고진호라 하오.”
 혁무린도 마주 포권을 했다.
 “은인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단지 은거고인의 말씀을 전했을 따름입니다.”
 “혹시 숲속에 계신 분을 뵈올 수 있을는지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미 숲을 떠나 은거지로 돌아가셨을 것이니 뵐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은인을 코앞에 두고도 뵙지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숲을 향해 깊이 포권의 예를 올리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표두 고진호가 혁무린에게 물었다.
 “은인과 어찌 되는 사이이십니까?”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우연히 이 산에 들어섰다가 산적들을 만나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그분이 나타나 저를 구해주셨지요. 그리고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곳곳에 숨어 있던 산적들을 모두 쫓아버리셨습니다.”
 “그런 일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산에 그토록 많은 산적들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말입니다.”
 “제가 우연히 듣기로는 꽤나 대단한 물건을 운반하는 표행이 있다고 합니다. 그걸 털기 위해 인근의 산적들이 다 모였다고 하더군요.”
 표두 고진호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쨌든 산주이신 은거고인 덕분에 우리 표행이 큰 화를 면했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하, 저야 그분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지요.”
 “헌데, 성함이…?”
 혁무린은 이미 생각해둔 바라도 있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전필삼이라고 합니다.”
 “전 소협이셨군요. 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금방 지어낸 이름을 두고 대명을 익히 들었다고 말하는 상대의 통속적인 인사말에 혁무린은 내심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백도인들의 강호예법이 그러하니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혁무린이, 아니 이제 전필삼이라고 스스로 밝힌 그도 상대의 예법에 존중해 대답했다.
 “강호 초출에 불과한 제게 대명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표두 고진호가 찬찬한 표정으로 전필삼을 살펴보았다.
 눈빛이 맑고 신태(身態)가 늠름했다. 옷차림이 조금 남루해서 그렇지 어디 가서 명문가의 후예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하지만 태양혈이 밋밋하고 무공의 고수다운 기세가 전혀 풍겨 나오지 않으니 아직 이류나 삼류에 불과한 초짜가 분명해 보였다.
 “실례지만 행선지가 어느 쪽이신지…?”
 “행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강호 경험이라도 쌓을까 해서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흠! 그러시다면 저희와 동행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저로서는 고마운 말씀이군요.”
 표두 고진호가 그에게 말을 한 필 내주었다.
 원래 있던 말 주인은 조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거적에 말린 채 수레에 실려 있었고, 덕분에 전필삼이 그 말을 대신 차지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혁무린, 아니 이제 전필삼이라 불릴 그가 비룡표국의 표사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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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진양.
 물 맑고 공기 좋은 고장이다.
 삼면이 산으로 막혀있지 않았다면 꽤 큰 도시가 들어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인근 백 리 이내에서는 가장 크고 번창한 마을이 바로 진양이다.
 한때 산서성에서 촉망받던 비룡표국도 바로 이 진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늦은 오후, 땅거미가 길게 늘어질 무렵, 표행 한 무리가 진양으로 들어왔다. 바로 전필삼이 포함된 비룡표국의 표행이었다.
 표물을 실었던 마차에는 거적에 만 시체와 부상자들도 몇 명 실려 있었는데, 그건 감숙으로 표행을 가다가 산적을 만난 때문이었다.
 표행의 선두에는 표두 고진호와 부표두 나병익이 말을 몰았고, 그들 바로 뒤에 반로환동을 한 천년마교의 교주 혁무린, 아니 이제 전필삼이라는 가명으로 불리는 청년이 따르고 있었다.
 전필삼은 마치 산골에서 갓 올라온 시골뜨기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본 표사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비웃었다.
 사실 전필삼이 천년마교의 교주가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즐기는 생활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녹림고수의 제자가 되어 무공에 입문한 후, 피와 눈물, 그리고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특히 마교에 들어가 천년마교의 교주라는 지위에 오르기까지 그가 겪었던 치열한 암투와 권모술수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살을 해도 몇 번이나 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마을에서 보이는 소소한 일상의 생활사도 그의 눈에는 특별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허! 내가 이렇게 살아봤던 게 얼마나 오래되었지? 이젠 아예 기억도 나지 않는군.’
 그가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표행은 큰 장원에 도착했다.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원이었는데, 대문위의 큼지막한 현판에는 ‘비룡표국(飛龍驃局)’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표국의 규모면으로 보자면 산서성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지만, 담벼락 여기저기 허물어진 곳도 보이고 또 넓은 장원의 마당 곳곳에 패인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수리조차 할 돈도 없는 모양이다.
 마당 한 쪽에는 제법 큰 수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 너무 오래되어 삭았다. 이제 표물을 실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마당 저 편에서는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들 십여 명이 기합성을 지르며 무술을 연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법 자세에 절도가 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약간이나마 무공을 배운 표사가 분명할 것이었다.
 장원의 모습을 대충 둘러본 전필삼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황을 보니 딱 망해가는 표국이 분명하군. 중양절이 멀지 않았으니 한창 바빠야 할 표사들이 저리 놀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야. 쯧쯧쯧.’
 그때, 정면에 보이는 본체 건물에서 사십대 청삼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제법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는데, 검미가 굵고 길게 쭉 뻗어있어 호방한 사내의 기질이 절로 풍겨 나오는 듯 했다.
 ‘그래도, 이 표국에서 제대로 된 건 저 사람밖에 없군. 아마 저자가 표국의 주인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표두 고진호와 부표두 등, 전필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국주님!”
 “고 표두. 그래, 표행을 잘 다녀왔는가?”
 “예, 국주님. 다행히 표물은 무사히 전달했습니다.”
 국주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고 표두의 대답 중에 ‘다행히’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가 곧바로 뒤쪽을 살폈다.
 수레에 실려 있는 거적 하나와, 다친 표사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죄, 죄송합니다. 산적을 만나는 바람에 그만…….”
 “죽은 사람은?”
 국주가 표사들을 하나하나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 표사가 보이지 않는군.”
 “산적들을 상대로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사람이 바로 오 표사였습니다, 국주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표행을 무사히 마친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조금씩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는 거적을 바라보는 국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오 표사의 슬퍼 할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때, 고 표두가 전필삼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국주님. 그나마 이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 해 보게.”
 고 표두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국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했으면 표행 전체가 몰살을 당하고도 남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 표두의 말이 이어졌다.
 “…해서, 제가 이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지켜보니 심성도 바르고, 기본 무공도 웬만큼 익힌 것 같아 표사 자리라도 하나 내주면 어떨까 해서 표국까지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국주는 내심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겉으로는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표사들에게 줄 월급이 모자라, 있는 표사들도 해고해야 하는 마당이거늘…, 고 표두는 눈치가 없구나. 하지만 은인을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은거고인의 말을 전했을 뿐이라지만, 그것으로도 도왔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야.’
 국주가 전필삼을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고 표두가 인정한 사람이라면 분명하지. 부디 열심히 일해주기 바라네.”
 전필삼이 밝은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예, 국주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국주가 새로운 눈빛으로 전필삼을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이목구비가 무척 뚜렷하고 수려한 것이, 상당한 미남일 뿐 아니라, 목소리도 무척 총기 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옷이 좀 남루해서 그렇지 제대로 입혀놓기만 하면, 어디 가서 무림세가의 공자라고 해도 충분히 통할 인물로 보였다.
 전필삼에게 호기심을 느낀 국주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신통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단지, 한때 잘 나가던 선비집안 출신으로 글 꽤나 읽었고, 우연히 무공서적을 입수해 그걸 익힌 후, 강호행에 나섰다는 게 전필삼의 대답이었다.
 국주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는 것을 느끼고, 고 표두에게 말했다.
 “전 표사는 자네가 잘 가르치도록 하게. 그리고 오 표사의 장례 준비도 서두르도록 하게. 가족에게는 내가 직접 알릴 테니.”
 “예, 국주님.”
 “그리고, 이번에 표행을 다녀온 표사들에게는 내일까지 푹 쉬도록 휴가를 주도록 하게. 모레부터는 좀 바빠질지도 모르니.”
 “모레부터 바빠진다는 말씀은……?”
 “잘하면 의뢰 하나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네.”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국주님.”
 표사들 모두 웃음 띤 얼굴을 지었다.
 표행 하나에 저런 표정들을 짓는 것을 보면 표국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전필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전필삼은 망할 날이 그리 머지않아 보이는 비룡표국의 표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앞날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전필삼은 내심 비룡표국이 그래도 먹고 살만 할 정도까지는 도와주리라 결심을 굳혔다.
 
 
 2장 비룡표국
 
 
 방도 배정받고, 표국의 가족들도 대부분 만나보았다.
 비룡표국에는 모두 스물 다섯 명의 표사와 세 명의 표두, 그리고 비상근직으로 일하는 쟁자수 다수가 있었다. 그리고 장원을 관리하는 노복과 부엌일, 빨래 등을 도맡아 하는 하녀들 몇 명이 있었다.
 비룡표국의 국주는 양명산이라고 하는데 상계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비룡표국을 처음 세운, 그의 조부인 섬전표 양천일의 무공을 조금이나마 이어받았고, 머리 또한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에게는 이남일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올해 열다섯 살로 산속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으며, 딸은 방년 열여덟 살의 창창한 나이로, 주변에 화중화라는 별호로 잘 알려진 미인이었다. 그리고 열 살짜리 막내아들이 있는데. 엄청난 게으름뱅이에다 골칫덩어리로 국주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안타깝게도 비룡표국에는 안주인이 없었다. 국주 양명산의 아내는 막내아들을 낳고 산고로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따금 양명산이 술을 거나하게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괜한 트집을 잡아 막내를 꾸짖었는데, 그건 산고로 잃은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도 한다.
 비룡표국에 취직한 다음날부터 본의 아니게 휴식을 취하게 된 전필삼은, 표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배를 깔고 누웠다.
 오래된 침상과 옷장 하나만 덜렁 남아있는 좁고 냄새나는 방이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퍼질러 누워 있으니, 전필삼은 세상이 다 제 것 같았다.
 “아함!”
 그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후,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이지?”
 전필삼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때, 천정에서 뭔가 새카맣고 작은 것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바로 남경충(바퀴벌레)이었다. 먼지 한 톨 없는 청결한 방에서 살다가 갑자기 남경충을 보게 되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슬쩍 손가락을 퉁겼다.
 날카로운 경력이 그의 손끝에서 뻗어나가 남경충에 정확히 적중했다.
 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남경충는 먼지로 화해 사라졌다.
 “후후후. 소싯적에 쓰던 마라지(魔羅指)는 아직 녹슬지 않았구나.”
 한동안 침상에 퍼질러 누워 자유로움을 만끽하던 전필삼이 기지개를 켜고는 일어났다. 너무 누워만 있으니 슬슬 지겨워져 왔던 것이다.
 문득, 천년마교에서 미주가효만 먹고 마시다가 서민들의 술이라 할 수 있는 독한 청주라도 맛보면, 그것도 새로운 경험일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럼, 어디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볼까?”
 전필삼이 곧장 방문을 나섰다.
 표국을 나가려 걸음을 옮기는데, 연무장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이는 또 뭔가?”
 전필삼이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꼬챙이로 땅을 헤집고 있었는데, 전필삼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바로 개미집이었다. 가느다란 나무꼬챙이가 개미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수많은 개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러면 소년은 나무꼬챙이를 탈탈 털어서 개미들을 떼어낸 후, 다시 개미집 안으로 꼬챙이를 집어넣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전필삼이 호기심을 느끼고는 소년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뭘 하느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전필삼이 보기에 소년은 제법 잘 생겼고 두 눈빛도 꽤나 총명한 것 같았다.
 소년이 눈을 껌벅이면서 전필삼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전필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딱!
 “아얏!”
 소년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는 울상을 지었다.
 “왜 때려요?”
 “인석아! 어른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아, 보면 몰라요? 개미놀이 하고 있잖아요!”
 “개미놀이? 세상에 그런 놀이도 있느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씩씩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전필삼이 물었다.
 “넌 누구냐?”
 소년이 고개를 들더니 전필삼의 아래위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아저씨는 누구예요?”
 “인석이… 어른이 물어보았으면 얘가 먼저 대답을 해야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도대체 네 애비가 누구기에 버릇이 그렇게 없느냐?”
 “우리 아빠요? 국준데요?”
 “국주?”
 “예.”
 “그러니까… 비룡표국의 표국주란 말이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필삼이 안색이 구겨지는가 싶더니 재빨리 웃는 낯으로 바꾸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
 “쳇! 아저씨는 누구예요?”
 “나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표사니라. 이름은 전필삼이라고 하지.”
 전필삼이 친절하게 자신의 이름까지 밝혔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전 표사 아저씨였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양진천이에요.”
 소년이 손을 척 내밀었다.
 “응? 아, 그래. 반갑구나.”
 전필삼이 ‘요 녀석 봐라’하는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왕싸가지의 표본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붙임성이 있고 귀여운 맛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전필삼이 헛기침을 몇 차례 한 후, 말했다.
 “험험. 앞으로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라.”
 “예. 알겠어요, 형!”
 전필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혀, 형?”
 “그렇게 부르라고 이야기하실 게 아니었어요?”
 “그, 그렇긴 하다만…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쉽게 알아차렸느냐?”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이래 뵈도 제가 눈치 하나는 척 하면 착이라구요.”
 “그래? 대단하구나!”
 “뭐, 다들 그래요. 엉뚱한 짓만 안 하면 괜찮은 녀석이라고 말이에요.”
 양진천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개미놀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전필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양진천을 쳐다보았다.
 ‘요 녀석, 꽤나 영악하구나. 소문에 듣자니 국주의 막내아들은 게으르기 이를 데 없는 골칫덩어리라고 하더니… 소문이 잘못 되었군.’
 잠시 양진천을 내려다보던 전필삼이 물었다.
 “개미놀이가 재밌느냐?”
 “뭐, 그냥 하는 거예요.”
 “나하고 더 재밌는 거 하러 가는 게 어떠냐?”
 양진천이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어떤 거요?”
 “술 마시는 거.”
 양진천의 안색이 일순 찌푸려졌다.
 “에이, 내가 무슨 술을 마셔요?”
 “사내대장부는 자로고 술부터 배워야 하는 법이니라.”
 “난 이제 열 살이라구요.”
 “이 형은 여덟 살 때부터 술을 마셨다. 그 뿐인 줄 아느냐? 사람을 처음 죽… 험험. 어쨌든 열 살이면 술을 배우기 아주 적당한 때라는 걸 알아야 하느니라.”
 양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다신 두 눈을 빛냈다.
 “정말요?”
 “그럼!”
 “좋아요. 그럼 가요.”
 “잘 생각했다. 오늘 내가 네 형이 된 기념으로 한잔 사도록 하마. 근데, 이 근처에 술 마시기 좋은 주점이 어디냐?”
 “제가 알아요. 표사 아저씨들이 자주 가는 집이 있거든요?”
 “그래? 그럼 그쪽으로 가자.”
 어린조카와 삼촌뻘 되어 보이는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비룡표국의 정문을 나섰다.
 
 양진천과 표국을 나선 전필삼은 약 일각정도를 걸어가자, 참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서 있는 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약 반각 정도를 더 걸어가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기예요.”
 “목로주점(木路酒店)이라…….”
 전필삼이 현판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와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목로주점은 2층으로 된 큰 건물이었고, 뒤쪽에는 꽤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 한쪽에는 큰 마구간도 보였다.
 짐수레나 마차 몇 대가 그 공터에 가지런히 서 있는 것만 보아도 이곳은 표사들이 자주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소이로 보이는 청년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어서옵쇼! 이쪽…….”
 점소이가 말을 하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필삼과 함께 온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혹시 일행이십니까?”
 전필삼이 점소이의 어깨를 툭 쳤다.
 “왜? 애는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그가 양진천의 손을 잡고는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점소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뛰어가 그를 안내했다.
 주점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양진천은 간단히 안주거리와 죽엽청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머뭇거리며 양진천과 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물었다.
 “아이가 먹을 건 따로 주문하지 않으실 겁니까, 손님?”
 “이 아이도 술을 마실 것이네. 그러니 잔도 두 개를 가져오게.”
 점소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주방으로 사라졌다.
 전필삼은 고개를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 구석에서 주독으로 빨개진 코를 탁자에 박고 잠들어 있는 주정꾼이 보였고, 세 무리의 사내들이 각각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식사를 하며 반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주점의 크기에 비하면 손님이 무척 적었지만, 아직 대낮임을 감안하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마도, 저녁이나 되어야 표사들로 붐빌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소채와 청주 한 병이 나왔다.
 전필삼은 양진천의 잔에다 술을 가득 부운 후,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형이 주는 술이니 마셔도 괜찮다.”
 약간은 꺼려하거나 사양할 줄 알았던 양진천이 의외로 잔을 들더니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맛보고 싶었어. 도대체 어른들이 술을 무슨 맛으로 먹나 하고 말야.”
 전필삼의 얼굴에 ‘이놈 봐라’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후후후, 한 번 맛을 보면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게 바로 술맛이지. 오늘 내가 네 형이 된 기념으로 마음껏 사줄 테니 실컷 먹어봐라.”
 “정말이야, 형?”
 “물론이다!”
 “좋아. 그럼, 건배!”
 쨍!
 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양진천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전필삼도 잔을 이에 물고 있었지만 아직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기이한 표정으로 양진천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양진천은 술을 입안에 흘려 넣자마자 오만상을 다 찌푸렸던 것이다.
 전필삼의 얼굴에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곧이어 그가 또다시 ‘이놈 봐라’하는 표정을 짓더니 종내에는 탄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양진천이 그 지독한 청주를 끝까지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후아! 후아!”
 양진천은 연신 손부채를 부치며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쥐어뜯기까지 했다. 마치 식도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던 것이다.
 전필삼이 득의의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떠냐? 그게 바로 술맛이오, 세상사는 맛이며, 또 인생의 쓴맛이니라. 너도 그걸 마셨으니 이제 사내대장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겠느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양진천이 급히 물을 한사발이나 들이키고는 마침내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아! 정말 독해요! 하지만 짜릿했어요.”
 “짜릿했다고? 정말이냐?”
 “그럼요. 어디 한잔 더 줘보세요.”
 전필사이 헛웃음을 웃더니 다시 한잔을 더 따라주었다.
 양진천이 잔에 살짝 입을 대더니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흐! 이번엔 조금씩 먹을래요.”
 “하하하, 그래라. 형도 취한 너를 업고 가고 싶지 않구나.”
 주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아주 가관이라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끔거렸지만 둘은 진짜 형제들처럼 우애 깊은 모습을 보이며 술과 안주를 먹었다.
 전필삼은 어느새 청주 한 병을 다 비웠고, 양진천도 두 잔을 마셨다. 처음 술을 먹는 아이가 두 잔을 마셨다면 벌써 취했을 테지만 의외로 멀쩡했다.
 전필삼도 그 모습을 신기해하면서 한편으로는 즐거워했다. 상대가 어린 꼬마이기는 하지만 무척 의젓했고, 이따금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재치가 대단했던 것이다.
 덕분에 전필삼은 아주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양진천이 꼬마가 아니라 자신의 술상대가 되어주는 벗이라 생각했다.
 전필삼이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를 무렵, 양진천에게 물었다.
 “네 형은 어디 있느냐?”
 “진석이 형 말야?”
 “그래.”
 “진석이 형은 산에 들어갔어. 가문의 무공을 잇겠대나, 어쨌대나. 아버지가 오래 전에 형을 산으로 들여보냈어. 선대의 진전을 모두 잇지 못하면 산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엄명까지 내리면서 말야.”
 “네 선대라면 누굴 뜻하는 것이냐?”
 “양, 천자 익자를 쓰시는 분인데, 우리 표국을 처음 세우셨어. 그리고 그분이 한창때에는 섬서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라고 하셨어.”
 전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들어는 보았다. 당시 섬전표 양천익 하면 모두들 엄지를 치켜세웠다고 말이다.”
 “에이, 그러면 뭘 해? 후손들이 모두 요 모양 요 꼬라진데.”
 “왜? 너와 네 가족들이 어때서 그러느냐?”
 “척 보면 몰라? 아버지가 아무리 힘들게 발버둥을 쳐도 표국을 다시 일으키기는 어려워. 지금 진양은 천마표국이 꽉 잡고 있다구.”
 “인석아. 사내대장부라면 도전정신이 있어야지! 열심히 무공을 익히고 공부를 해서 천마표국을 이길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무슨 약해 빠진 소리냐?”
 “천마표국을 무슨 수로 이겨?”
 “그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양진천이 술을 조금 마시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답이 나올 걸 가지고 고민해야지.”
 “답은 내기 나름 아니냐?”
 “허이구, 그러십니까? 그럼, 천마표국이 어떤 곳인지나 아십니까?”
 전필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양진천이 어른처럼 혀를 차더니 말했다.
 “에이, 알지도 못하면서. 천마표국 뒤에는 화산파가 있단 말야, 화산파가! 백도무림의 태산북두. 검의 조종. 구파일방의 하나. 형도 들어는 봤겠지?”
 “그, 그래.”
 “그런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전필삼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네 말이 틀리지는 않구나. 지금 비룡표국이 지닌 힘으로는 하늘이 무너져도 천마표국을 이길 수 없겠어.”
 “알면 됐어. 그러니까 형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구. 그래야 몸 편히 먹고 산단 말야.”
 전필삼은 양진천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문득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전필삼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요 꼬맹이가 상황판단을 아주 제대로 하고 있구나. 요 녀석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때, 갑자기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내 세 명이 들어왔다.
 바로 비룡표국의 부표두 나병익과 표사들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전필삼과 양진천이 나란히 앉아 대작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라! 너희들은…….”
 양진천이 발그레한 얼굴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들! 어서 와요. 한잔해요, 우리.”
 부표두와 표사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진천아! 도대체 네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헤헤, 보면 몰라요? 술 마시고 있잖아요, 아저씨.”
 부표두 나병익의 시선이 전필삼을 향했다.
 자신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는 전필삼의 모습에 나병익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보게 전 표사.”
 전필삼이 그제야 나병익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표두님. 뭘 하십니까?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 않고. 그리고 선배님들. 어서 앉으십시오. 오늘은 제가 크게 한잔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뭘 하고 있다니요? 보시면 모르십니까? 양 동생과 술을 마시고 있지 않습니까?”
 “양 동생? 이 사람이 정말…….”
 “에이, 사내 나이 열 살이면 알 것 다 알 나입니다. 그리고 양 동생과 저는 나이를 초월한 교분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양 동생?”
 양진천이 잔을 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론이죠, 형. 우리 한 잔 더 해요.”
 “오냐, 오냐. 하하하.”
 챙!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이 호기롭게 술을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전필삼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나병익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함을 치려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가…….”
 갑자기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주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내들을 향했다.
 나병익은 물론, 그와 함께 왔던 표사들의 얼굴도 일순 굳었다.
 나병익이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험험.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얌전히 전필삼의 주위에 앉았다.
 전필삼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지만, 너무도 빠른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기에 아무도 눈치를 채지는 못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소리치던 나병익이 뒤가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하는 태도를 보이자, 전필삼은 그 이유가 방금 들어온 사내들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필삼이 술을 마시는 척 하면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들 모두 가슴에 날아갈 듯한 날개 달린 말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에 장검까지 턱하니 찬 게 영락없는 무인의 모습이었다.
 ‘날개달린 말이라면… 천마표국이로구나.’
 전필삼이 그들의 정체를 짐작해 내고는 하나하나의 면모를 유심히 살폈다.
 걸음을 옮기는 자세나 진중을 표정을 살펴보건대, 아무리 못해도 비룡표국의 표사들보다는 한두 수 뛰어나 보였다. 특히 그들의 수뇌로 보이는 자는 태양혈이 제법 불룩 한 것이 이류고수 중에서도 중상위에 들 만한 실력을 지닌 듯 했다.
 ‘음. 저 정도면 비룡표국에서는 국주 말고는 당할 사람이 없겠어. 이거 생각보다 두 표국 간의 실력 차이가 크구나.’
 그때, 그들의 목소리가 전필삼의 귀에 들렸다.
 “장 표두님. 저쪽에 앉으시지요.”
 “음. 그러지.”
 그들이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본 전필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양진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들의 눈치를 힐끔거리며 보고 있는 부표두 나병익을 보며 생각했다.
 ‘저 아이의 판단이 백 번 옳겠다. 일개 표두의 무공이 저 정도이니 비룡표국으로서는 천 번, 만 번 노력해도 천마표국을 따라잡을 수 없겠어. 양진천이 벌써 포기를 하고 순리대로 살기로 작정한 게 이해가 되는군.’
 그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은인의 후손들이 먹고 살만 하게 뒤를 봐주고 떠나려 했는데, 상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천마표국과 비룡표국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어느 정도 싹수라도 보여야 한번 밀어 볼 거 아닌가! 이 상태에서 억지로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무리수가 따를 수밖에 없는데…. 게다가 화산파까지 연루되어 있으니…. 골치가 아프군. 어떻게 한다…?’
 그때, 저쪽 탁자에 앉았던 천마표국의 표사들 중 한 사람의 시선이 우연히 전필삼의 탁자로 향했다.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나병익이 흠칫 하더니 ‘뭐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마표국의 표사들이 자신들끼리 수군거리더니, 장 표두라는 자를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왔다.
 나병익이 전필삼의 잔을 빼앗듯 들고는 한잔을 쭉 들이켰다.
 “캬! 좋다. 아니, 천마표국의 변 표사와 강 표사가 아니오?”
 갑자기 만나 놀랐다는 표정을 짓던 나병익이 먼저 포권을 하더니 장 표두가 앉아 있는 탁자를 향해 머리까지 숙이는 것이었다.
 “아! 장 표두께서 왕림하신 줄 몰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평안 하셨습니까?”
 그가 깍듯이 인사를 했지만 장 표두라는 사람은 고개를 돌리지도, 코웃음조차 치지도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거만한 표정으로 비룡표국의 표사들을 내려다보던 천마표국의 표사들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여기 뭐 먹을 게 있다고 뻔질나게 드나드는지 모르겠군. 일전에 만났을 때,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우리가 말했던 것으로 아는데?”
 나병익이 작은 표국에 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부표두의 신분이고, 상대는 천마표국의 그냥 표사들이었다. 당연히 한솥밥을 먹고 있는 처지라면 어느 정도 존중을 해 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하지만 천마표국의 표사들에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모양이다.
 나병익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표사들은 고개마저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전필삼은 비룡표국에서 은인의 후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때, 만약 열 살짜리 소년 양진천이 독한 청주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탁’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탁자에 내려놓지 않았다면, 전필삼은 모든 걸 양 씨 일가의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리고는 깨끗이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양진천을 향했다.
 양진천이 ‘캬’하는 소리와 함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입가에 묻은 청주를 닦았다.
 “형. 오늘 따라 술맛이 너무 좋은 것 같아. 한 잔 더 줘.”
 “뭐? 아, 그래.”
 전필삼이 퍼뜩 병을 들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양진천은 새롭게 잔을 받고는 곁에 앉아 있던 표사들에게 말했다.
 “아저씨. 뭘 하고 계세요? 술 마시러 왔으면 한잔 하셔야죠! 왜 그렇게 앉아만 계세요?”
 표사들이 당황해했다.
 “아, 아니다. 우리는 그냥…….”
 그때, 천마표국의 표사 한 명이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꼬맹아. 이 아저씨들 말 못 들었냐? 응?”
 양진천이 고개를 빳빳이 들더니 그에게 따지듯 말했다.
 “나 꼬맹이 아니거든요?”
 “요 녀석 보게? 그럼 네 녀석은 뭣 하는 물건이냐?”
 “흥! 나는 물건도 아니라구요. 성은 양 씨요, 진천이라는 이름도 있다구요!”
 “양진천? 가만. 그렇다면 네 녀석이 바로 양 국주의 막내 아들놈이로구나.”
 비룡표국의 국주를 옆집 강아지 부르듯 하는 그의 어투에는 약간의 존경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쌍욕을 섞어 양 국주를 부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해야 할 정도였다.
 자신들의 국주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데도 나병익을 비롯한 비룡표국의 표사들은 여전히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양진천만이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보고 나가라는 거예요? 이 주점을 천마표국에서 전세내기라도 했어요?”
 “어라! 이 녀석 말 하는 것 좀 보게. 어린 것이 당돌하게도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크게 한번 혼이 나 볼 테냐?”
 “흥! 당신이 뭔데 나를 혼내겠다고 하는 거야? 떨거지 표사주제에!”
 천마표국의 표사가 안색을 굳혔다.
 양진천을 도와야 할 나병익이 오히려 그를 꾸짖고 나섰다.
 “진천아! 어른에게 그 무슨 버릇없는 말이냐? 어서 사죄드리지 못하겠느냐?”
 그가 이번에는 천마표국의 표사에게 굽신거렸다.
 “강 표사. 자네가 참게. 아직 어린 아이라 천지를 모른다네. 대신 자네들이 먹는 술은 오늘 내가 다 사겠네.”
 “내가 당신에게 왜 술을 얻어먹어? 그리고 뭐? 표사 나부랭이? 내 오늘 저 꼬맹이 놈의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서려 하자 나병익이 다시 저자세로 말렸다.
 잠시 그 일로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장 표두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한 소란은 피우지 말고 이쪽으로 오게. 그만큼 했으니 알아서들 나가겠지.”
 천마표국의 표사들이 즉시 장 표두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양진천을 향해 눈을 부라려보였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꼬맹아. 다음에 이 어르신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을 테니, 그리 알고!”
 그가 한껏 으름장을 놓더니 저쪽으로 가버렸다.
 나병익이 장 표두를 향해 연신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양진천을 끄집다시피 주점 밖으로 데려나왔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전필삼도 자신의 잔을 마저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주점을 나가려는데 장 표두라는 자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잡았다.
 “잠깐!”
 전필삼이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필삼이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장 표두를 쳐다보자, 그와 함께 있던 표사들이 안색을 굳혔다.
 장 표두가 전필삼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전필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요?’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 표두가 일순 안색을 굳히며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필삼이 그 자리에 서서 소리쳤다.
 “무슨 일이지?”
 장 표두 곁에 있던 표사 둘이 다시 일어났다.
 그들이 전필삼에게 다가오더니 위협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장 표두님께서 부르시는데, 감히 그따위로 대답하다니!”
 “장 표두가 누군지 내 알 바 없어.”
 “이놈이…….”
 조금 전, 양천익에게 험악한 말을 했던 강 표사라는 자가 다짜고짜 전필삼의 멱살을 틀어쥐려고 덤볐다.
 전필삼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가볍게 허리를 뒤로 젖혀 그의 손을 피했다.
 “이런…….”
 헛손질을 한 강 표사가 안색을 굳히더니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금나수법을 동원한 듯, 전필삼을 향해 나아가는 손의 궤적이 변화를 일으켰다.
 전필삼의 두 눈이 차갑게 굳었다.
 “고작 이따위 무공을 믿고 겁 없이 날뛰는가?”
 전필삼이 그 자리에 서서 왼손을 마주 뻗었다.
 그의 왼손이 교묘하게 강 표사의 안쪽을 파고들더니 팔꿈치 부근을 툭 쳤다.
 강 표사의 손이 다시 허공을 움켜쥐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콧김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씩씩거리던 그가 검 자루를 잡았다.
 그때, 저쪽에서 장 표두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게!”
 강 표사가 순간 멈칫하더니 장 표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표두님! 이자가…….”
 “대낮에 주점에서 피를 보려는가!”
 준엄한 호통에 강 표사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가 전필삼을 노려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운 좋은 줄 알아!”
 전필삼이 무표정한 얼굴로 등을 돌리려는데 장 표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 듯한데, 누군가?”
 전필삼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도 더 이상의 소란은 일으키기 싫은지 순순히 대답했다.
 “보면 모르나? 비룡표국의 표사!”
 천마표국의 강 표사가 두 눈을 부라리고는 뭐라고 호통치려는 순간, 장 표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비룡표국의 표사라…. 흠, 곧 망할 표국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찾아갔는지 모르겠군. 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특별히 충고를 하겠는데, 일찌감치 보따리 사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게 좋을 걸세.”
 “충고는 고맙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상관하지 마시지.”
 “당연히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네만, 우리 천마표국에 때마침 표사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군.”
 전필삼의 두 눈에서 순간적으로 기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 한 후 말했다.
 “더 할 말 있나?”
 “없네.”
 장 표두의 대답이 소리와 함께 전필삼이 등을 돌려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강 표사는 전필삼의 뒤통수를 씩씩거리며 노려보다가 장 표두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그대로 둘 거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 표두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본 강 표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는 시늉을 하며 장 표두에게 말했다.
 “장 표두님. 저놈을 왜 그냥 보내신 겁니까? 거기다 우리 천마표국에 표사 자리가 비었다니요? 설마 저자를 끌어들이시기라도 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제가 가서 뼈가 녹신녹신 하도록 저놈을 팬 후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 표두가 말했다.
 “자네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그를 팰 수 없을 것이네.”
 “예? 장 표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혈도에 대해 아나?”
 “혀, 혈도요? 물론, 알기는… 하죠. 헌데, 그건 왜……?”
 “아까 그 자가 자네의 팔꿈치를 치지 않았나? 그때 팔이 저릿하지 않던가?”
 “순간적으로 그렇긴 했습니다만…….”
 “그자가 정확히 자네의 팔꿈치 안쪽에 있는 곡지혈이라는 혈도를 친 걸세.”
 강 표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요? 우연이었겠지요.”
 “우연히 혈도를 쳐서 상대를 물리칠 확률은 만에 하나도 되지 않네. 그러니 그 자가 알고 쳤다고 보는 게 옳아.”
 “그, 그럼 그자가 삼류를 벗어났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네. 혈도를 제대로 알고 공격했다면 이류무사란 말일세.”
 “세상에, 이류무사가 뭐 아쉽다고 비룡표국에서 표사노릇을 한답니까?”
 “그래서 내가 그 자를 우리 표국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나?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선임표사 자리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일세.”
 강 표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표사들의 선임이라면 자신보다 윗자리에 올라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큰일이네. 그 자가 우리 표국에 들어와서 내가 속한 조의 선임이라도 되면 엿 되는 거 아냐?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점잖게 말하는 건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강 표사가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가 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갑자기 잔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땡그랑!
 강 표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팔꿈치가 저릿하더니 술잔을 들 힘조차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안마를 한답시고 오른팔을 주무르는 강 표사의 모습을 보며 장 표두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목로주점을 나온 전필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병익과 표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저만치서 양진천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전필삼이 양진천에게 다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걷던 중, 전필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양진천을 불렀다.
 “진천아!”
 양진천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걸려 있는 두 눈. 전필삼은 그런 그의 두 눈이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울고 싶으냐?”
 양진천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필삼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내대장부라면 눈물을 함부로 보여선 안 되는 법이다.”
 “울긴 왜 울어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요, 뭐.”
 “녀석! 후후후. 그래, 천마표국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버리고 싶지 않느냐?”
 양진천이 피식 웃었다.
 “어라! 이 녀석이… 왜 웃느냐?”
 “가능한 말을 해야 말이죠! 절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라면 괜찮다니까요. 똥개에게 물렸다 생각하고 잊어버리면 돼요.”
 “그럼, 앞으로도 계속 똥개에게 물리고 다닐 거냐?”
 “…….”
 “이 형이 도와주랴?”
 “형이요? 푸훗! 말이라도 고마워요.”
 “삼 년 안에 널 삼류무사로 만들어주마. 다시 이 년 후에는 이류무사, 그리고 스무 살 이전까지 일류고수가 되도록 해준다면 어떠냐?”
 양진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전필삼을 쳐다보았다.
 “스무 살에 일류고수로 만든다고요? 저를요?”
 “그렇다!”
 “하하하. 형! 일류고수가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으면 세상천지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게요?”
 “이 녀석이… 나는 네 나이 때 삼류무사였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일류고수가 되었단 말이다!”
 “그럼 지금은 절정고수겠네요?”
 “이르다 뿐이냐?”
 “형!”
 “왜?”
 “제 정신이세요?”
 “당연하지.”
 “제 눈에는 살짝 맛이 간걸로 보이는데요?”
 “이 녀석이 정말… 이 형이 실력을 한번 보여주랴?”
 “어디 한번 봐요.”
 전필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근처에 있던 소나무 숲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양진천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소나무 숲을 쳐다보았다.
 뭔가 주위의 기류가 약간 변했고 미풍이 불었다는 건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도 소나무 숲에는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양진천이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전필삼을 쳐다보았다.
 “저게 다예요?”
 “물론이다. 저 소나무 그루터기의 수맥을 모조리 분질러 놓았으니, 차차 말라죽고 말 거다.”
 그 말을 들은 양진천이 갑자기 ‘얍!’하는 소리와 함께 전필삼을 향해 장력을 쏘는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말했다.
 “제가 형님의 심맥을 흔들어 놓았으니, 백 년 내에는 분명히 돌아가시고 말 거예요.”
 이 말을 끝으로 양진천은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전필삼이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묘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양진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겉으로는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허허, 그래. 사내대장부라면 응당 그런 마음이 있어야지.’
 묘한 눈빛이 그의 두 눈에 머물러 있었다.
 
 
 3장 무공을 전수하다
 
 
 원래 세상사라는 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으면 나쁜 놈들도 있는 법이다.
 그 나쁜 놈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족속들의 대명사가 바로 사파다. 특히 천하 사파인들의 하늘이자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천사련은, 무림맹을 비롯한 백도무림, 천년마교를 비롯한 마도무림과 더불어 중원을 삼분하는 있는 거대 세력의 하나다.
 당연히 천사련에도 련주가 있고, 그의 사공은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어, 말만 들어도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절진에 둘러싸인 채, 보호받고 있는 천사련의 본산인 천사궁 깊숙한 집무실에서 천하 사파무림의 하늘이자, 만인을 공포로 굴복시킨다는 천사련주, 사황 염백천이 태사의에 앉아 위엄어린 얼굴로 수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수하들 모두 이름만 들어도 중원무림이 벌벌 떨, 사파의 거두들이었지만, 한때 혈성무적(血星無敵)이라 불리며 천하무림을 질타했던 사황 염백천의 위엄 앞에서는 꽁지내린 강아지에 불과했다.
 사황 염백천의 곁에는 피부가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을 한 중년인이 한 명 서 있었는데, 너무 차가워서 섬뜩하게 보이는 두 눈만 제외한다면 한림원의 노학사라 해도 믿을 정도로 기풍이 넘쳐흘렀다.
 대석학과도 같은 풍모를 지닌 이 중년인이 바로, 천사련의 두뇌이며 모든 전략과 전술이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알려진 군사, 사뇌(邪腦) 제사영이다.
 염백천 앞에 앉아 있던 수뇌들이 순서대로 업무보고를 했고, 사뇌 제사영이 새로운 지시를 내리는 등 회의를 진행했다.
 꽤나 중요한 안건들이 계속해서 토의 되었지만, 사황 염백천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아, 무료해 하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약 한 시간에 걸친 수뇌부 회의가 모두 끝나자, 사뇌 제사영만 제외하고 모두들 집무실을 나갔다.
 사황 염백천이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인 것은 그때였다.
 “지겹군.”
 사뇌 제사영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지금으로선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무림맹과 천년마교가 버티고 있는 한, 먼저 움직이는 쪽이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맞을 때 맞더라도 붙어봐야 할 게 아니냐? 천하를 삼킬 힘을 지니고서도 써먹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사황 님의 말씀대로 천하를 아우르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지요. 정보에 의하면 지금 천년마교의 교주가 연공실에 틀어박힌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가 대공을 이루든 실패하던, 변화의 불꽃은 거기서부터 폭발할 것입니다.”
 “대공을 이룬다면 큰일이 아니냐? 연공에 들어가기 전의 실력만 해도 단연 최강이라 알려진 그였으니 말이다.”
 “그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세상 전체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는 천년마교와 함께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화려하게 산화하는 것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흠.”
 사황 염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한 인간의 진정한 강함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조직이 아무리 크고 대단해도, 결국은 정점의 절대자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일 뿐이야.’
 사황이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첫째는 요즘 뭘 하기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일 공자님께서는 밀사경(密邪經)에 파묻혀 계십니다.”
 “밀사경? 흠. 녀석이 흥미 있어 할 내용이 꽤 담겨 있는 책이지. 그래, 녀석이 어디에 관심을 보이더냐?”
 “사황 님께서도 한때 관심 있어 하시던 부분입니다.”
 “그래? 후후, 역시 그렇겠지. 잘 만들면 꽤 유용한 장난감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유용하지만 위험하기도 하지요. 잘못하면 천하무림의 공분을 살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건 상관없다. 녀석이 시도하고자 하면 적극 지원해주도록 해라.”
 “예?”
 사뇌 제사영이 눈을 크게 떴다.
 사황이 다시 말했다.
 “요즘 무림은 너무 조용했어. 한바탕 분탕질을 쳐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느냐?”
 “하, 하지만 그건 너무도 무모한 일이라…….”
 “혹시 아느냐? 녀석이 성공을 거둔다면, 우리 천사련은 날개를 얻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어찌 지금 와서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 한바탕 분탕질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느냐? 그 정도의 분탕질은 적절한 선에서 수습하면 되니 상황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황 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듯 하더니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천사련의 사황 집무실의 문을 이렇게 무례하게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황 자신밖에 없을 것이었다.
 갑자기 집무실로 난입한 자의 얼굴을 확인한 사황이 한숨을 내쉬더니 엄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뭔가 골칫덩어리를 만난 듯한 모습이다.
 사황 집무실에 난입한 사내는 뜻밖에도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는데, 하얀 영웅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맨 헌원장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사황에게 다가갔다.
 집무실 곳곳에는 사황의 비밀호위들이 숨어 있었는데, 그들의 실력이 얼마나 가공한지 설사 신선이라도 그들을 뚫고 사황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청년이 사황에게 다가가는 동안 주위에서는 그 어떤 공격도 없었다.
 사황의 태사의 바로 앞까지 걸어간 그가 갑자기 침중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사황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이 녀석아! 아버지가 뭐냐? 공식 석상에서는 사황 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자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하늘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며…….”
 사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의 말을 끊었다.
 “그만 되었다. 잡설은 관두고 여기 온 용건이나 말해라. 만약 이번에도 엉뚱한 짓거리를 저지를 생각이라면 내 네 녀석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고 말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주청 드렸던 무림영생평화방안(武林永生平和方案)에 대해 왜 가타부타는 말이 없는 것입니까? 소자 오늘 그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뼈를 묻고야 말 것입니다.”
 사황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청년을 후려칠 기세였다.
 하지만 청년은 두 눈을 똑바로 든 채 사황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꽉 다문 그의 입가에는 세상 다시없을 고집 주머니가 몇 개식 매달려 있는 듯 했다.
 사황이 잠시,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마침내 긴 한숨과 함께 손을 내렸다.
 “이 녀석아. 도대체 말이 되는 주청이어야 답을 할 것이 아니냐? 무림영생평화방안이라니? 무림이 평화로워지면 도대체 우리는 뭘 먹고 살라고 그따위 방안을 올렸단 말이냐?”
 “뭘 먹고 살다니요? 원래 권력과 이윤이라는 건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없는 자를 위해 베풀고, 힘 있는 자는 약자를 위해 돕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소자가 꿈꾸고 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세상이옵니다.”
 “네놈이 말한 그런 것은 소위 백도라는 위선자들이 말하는 협도를 일컬음이다. 천사련주의 둘째아들이 그런 협도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난다면, 세상천지에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느냐?”
 “아버지. 그렇지 않습니다. 백도에도 협의의 도가 있듯, 우리 사도에도 협의의 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소자는 그 협의의 사도를 실현시켜 보일 것입니다.”
 “협의의 사도? 허허허. 그래. 네 마음대로 한번 해 보아라. 대신 네놈이 추구하는 그 협의의 사도 때문에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나는 결코 돕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제가 언제 아버지보고 도와달라고 했습니까? 대신 더 이상 소자의 발길을 막지 마십시오.”
 “저, 저런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이…….”
 “원래 효라는 것도 협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지요. 협의의 사도를 거부하시는 아버지가 어찌 소자에게서 효를 기대하신단 말씀입니까?”
 “이, 이 녀석이 말꼬리를…….”
 사황은 일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황의 둘째 아들이자, 어릴 때부터 문무양재(文武兩才)로 이름 높았던 청년 염기운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황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소자, 이만 천사궁을 떠나 천하를 주유하겠습니다. 다시 뵈올 때가지 옥체강령하시기 바랍니다.”
 염기운은 그대로 등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사황의 긴 한숨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염기운이 밖으로 나가자 사황은 또다시 검지와 엄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사황 님. 둘째 공자님을 저대로 보내실 것이옵니까?”
 “그냥 내버려둬라. 강호에 나가 보면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니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하오나, 신변에 위험이라도 생긴다면…….”
 “다 지 복이겠지. 나는 녀석을 약하게 키우지 않았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참으로 아쉽구나. 한 배에서 난 자식 둘의 성격이 어찌 저렇게도 다르단 말인가. 첫째 녀석은 악랄하고 못된 짓에만 관심이 있고, 저 녀석은 백도의 협사 저리가라고 할 정도의 성격이니 말이다. 만약 저 녀석이 첫째의 반만 닮았어도 차기 사황 자리는 따 논 당상이거늘…. 쯧쯧.”
 사황의 혀 차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천사련의 둘째공자가 마침내 무림에 출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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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룡표국의 담장을 따라가다 보면, 담에 바짝 붙어 표국 안팎에 서있는 나무들 때문에 꽤나 은밀한 지역이 나온다. 멀리서 보면 나뭇가지와 그림자 때문에 사람이 서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청춘남녀로 보이는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소저! 어찌 제 마음을 그다지도 몰라주시는 겁니까?”
 “갑자기 길을 막고 나서시다니, 이 무슨 경우입니까?”
 “소저를 향한 뜨거운 내 마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실례를 하게 되었소. 허니, 너무 탓하지 마시고 제 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더 들을 말도, 볼 일도 없습니다. 어서 길을 비켜 주십시오.”
 “그러지 말고 제 눈이라도 한번 쳐다봐 주십시오. 소저를 향한 제 진실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싫다는 데 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표독한 여인의 말에 사내가 신음성을 흘렸다.
 깨끗한 얼굴에 시원한 청삼을 입은 청년은, 어떤 여인이 보아도 한 눈에 반하고 말 정도로 잘 생겼다. 하지만 눈매가 날카로워 다소 오만해 보이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진양 최고라는 천마표국주의 외아들이자, 구대문파의 하나인 화산파의 속가제자이기도 한 청년 조진호는 졸지에 치한으로 몰리는 수모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지만, 비룡표국주의 장녀 양진향의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만 보면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자신의 마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실력에 있어서도 진양 지역 최고의 후기지수로 통하는 쾌잔수 조진호는,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이 빠르고 맵기로 소문이 난 검객이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좋은 집안의 예쁜 처녀들이 줄을 설 것이지만, 그래도 눈앞의 이 미녀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쾌잔수 조진호가 경쟁 표국이라 할 수 있는 비룡표국의 장녀를 연모하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양진향이 자신을 바라보며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진호에게 타이르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조 소협. 전 비룡표국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소협은 장차 천마표국을 이어받을 후계자시구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오. 불가능한 건 없다고 생각하오, 소저.”
 “지금이야 그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상황은 언제든 변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제 스스로가 소협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우리 표국 주위에서 서성거리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그, 그럴 수는 없소. 내 마음 속에는 오직 소저밖에 없소. 제발 알아주시오.”
 “휴!”
 양진향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꽤나 훤칠하고 헌원장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스무 살도 되지 못한 조진호는 그녀의 눈에 떼를 쓰는 아이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소저!”
 조진호가 갑자기 다가들었다.
 양진향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소, 소저. 제발 내 마음을…….”
 조진호는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양진향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더 이상 다가들면 소리를 지를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몰려 올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은 어떤 창피를 당하게 될지 아시겠지요?”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거기 뭐하는 건가?”
 마치 된서리라도 맞은 듯, 양진향과 조진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진호가 급히 물러서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 가슴에 ‘비룡’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진 옷을 입은 흑의청년 한 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쳇! 비룡표국의 표사 나부랭이였군.’
 흑의청년은 아무 거리낌 없이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양진향과 조진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양진향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룡표국의 표사들 중,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청년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꽤 먼 곳에서 두 남녀가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다가온 표사 전필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벌건 대낮에 남의 집 담벼락 밑에서 무슨 연애질이란 말인가? 썩 물러들 가시오!”
 양진향이 ‘뭐 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조진호는 순간 발끈하려다가 양진향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헛기침을 하며 점잖게 말했다.
 “험험! 양 소저와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잠시 만났을 뿐이오. 오해는 하지 마시오.”
 “오해고 육해고 간에, 당신은 누구이기에 남의 표국 담벼락 밑에서 여자를 울리고 있는 거지?”
 순간 양진향이 발끈했다.
 “울리긴 누가 누굴 울리고 있단 거예욧?”
 “이 아가씨가… 얼굴은 꽤 곱상한데 성질머리는 어지간히 앙칼지구먼! 아, 상황이 그렇다는 거 아닌가? 대낮에 남녀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둘만 있으면, 뭐 다 그렇고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게 당연하지 않소?”
 “다, 당신 정말…. 그, 그렇고 그런 상황이라니? 그, 그게 말이 돼, 돼요?”
 눈물까지 글썽이는 양진향의 모습에 전필삼도 미안한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내가 언제 꼭 그랬다고 했소? 거참,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눈물까지 보이니 더 예쁘군. 미안하게 되었군.”
 그때, 조진호가 옆에서 으르렁거렸다.
 “감히 나의 진향을 울리다니…….”
 조진호가 새파란 눈을 하고 무섭게 전필삼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피식 웃었다.
 “훗! 나의 진향? 지금 시라도 쓰려는 건가?”
 조진호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백 배 사죄하지 않으면 네놈에게 저승구경을 시켜주마!”
 “백 배 사죄라니? 내가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백 배 사죄식이나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가만히 듣자 하니 말이 점점 짧아지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넌 연장자에 대한 예의범절도 못 배웠느냐? 어디서 반말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새파랗게 젊은 놈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진호가 검을 뽑았다.
 챙!
 서슬 푸른 장검이 짙은 살기를 머금은 채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조진호가 속가제자이긴 하나 화산파라는 명문대파의 제자다. 그의 사문에서는 검을 뽑기 전에 열 번을 더 생각해야 하지만, 일단 뽑고 난 후에는 적을 상대함에 있어 추호의 사정도 봐주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조진후는 검을 뽑기 전의 신중함보다는, 뽑고 난 후에 적을 상대할 때 가져야 할 마음에 대해 관심이 더욱 컸다. 그에게 쾌잔수라는 별호가 붙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단 검을 뽑아들었으니 피를 보게 될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전필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묘한 표정으로 조진호를 쳐다보았다.
 ‘허! 감히 나를 향해 검을 뽑아드는 놈을 만나 본 게 얼마만이더라? 아마 10년 전에 교를 통째로 집어삼키겠다고 설치던 천지혈마라는 놈을 육시랄 낸 이래 처음인 것 같구나. 허허허!’
 전필삼이 저도 모르게 천녀마교주일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자 세상천지를 뒤덮을 듯한 엄청난 위엄과 기세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전필삼이 무림맹의 천기수사를 납치하려는 천사련의 음모를 분쇄할 때, 흑풍조 마복이라는 고수를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만들었던 가공할 무형지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진호는 여전히 살기어린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들고 서 있었고, 양진향은 그런 조진호를 말린답시고 ‘소협’과 ‘그만 두세요’를 연발하고 있었다.
 전필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무형지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마침내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후후, 이 녀석들이 내 무형지기를 눈치 채기에는 성취가 너무 미약해서 그런 모양이군. 어쨌든 앞으로는 옛날생각 하는 것도 조심해야겠다.’
 전필삼의 상념이 끝날 무렵, 양진향이 조진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조진호가 전필삼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 검을 다시 집어넣는 걸 보면 말이다.
 “앞으로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오늘은 양 소저의 얼굴을 보아서 내가 참는다.”
 순간 전필삼은 ‘양 소저’와 ‘나의 진향’이라는 두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더니 재빨리 합성되었다.
 ‘응? 그러면 ‘나의 양진향 소저’가 되는데…. 양진향이라면 우리 비룡표국의…….’
 전필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양진향에게 물었다.
 “혹시 국주님의 따님이신 양진향 아가씨요?”
 양진향이 전필삼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소리쳤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욧?”
 “이런!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 진작 그렇다고 말씀을 하실 것이지…….”
 “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내 입으로 이야기해욧? 알아서 파악했어야죠!”
 “거듭…,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백 보 밖에서도 척 알아 뵙고 와서 인사드리도록 하지요.”
 “됐어욧!”
 “그건 그렇고…….”
 전필삼이 조진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감히 백주대낮에 우리 표국의 보배이자, 꽃이라 할 수 있는 양진향 아가씨께 치근거리는 네놈은 누구냐?”
 검집 속으로 사라졌던 시퍼런 장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신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짓눌렀다.
 “오늘 네놈에게 화산의 검을 맛보여주마!”
 “화산의 검? 오호라! 화산파의 속가제자라면 천마표국의 사람이 분명하겠구나.”
 양진향이 다시 나서서 조진호를 말리려는데, 나지막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아가씨는 나서지 마십시오.”
 양진향이 가벼운 신음성을 흘리며 전필삼을 쳐다보았다.
 경박하고 앞뒤 못 가리는 답답한 벽창호로 생각했던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전필삼이 양진향의 입을 막아놓고는 조진호를 향해 말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는 건가? 좋아!”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얼굴로 자세를 취하는 전필삼의 모습에 조진호는 순간 긴장했다. 적수공권으로 검을 들고 있는 자신 앞에 겁도 없이 나선다는 건, 그만한 실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놈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가? 설마 무슨 대단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겉보기에는 전혀 아닌데.’
 전필삼이 취하는 자세를 주의 깊게 살피던 조진호의 긴장된 표정이 한순간에 풀렸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놈이 취하는 자세는 혹시……?”
 “무공의 기본도 배우지 못했느냐? 이건 당연히 육합권의 기수식이다.”
 “지, 지금 육합권으로 날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네 녀석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이, 이런 미친 새끼…….”
 조진호는 너무 화가 나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 무공에 입문하기 위해 배우는 기본공이 바로 육합권이다. 무공 입문자는 그걸 다 배운 후 거기서 파생되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초식을 고되게 수련해 몸에 익히는 순간 강호에서 삼류무사로 첫 발을 내디디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무공 초식을 배우는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고작 육합권 따위로 대화산파의 속가제자인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이건 나와 아버지, 나아가서는 화산파에 대한 모독이다.’
 조진호의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모두 읽은 전필삼이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흥! 천하의 모든 무공초식들이 육합권의 움직임을 근본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지? 그 말은 즉, 아무리 대단한 절초라도 육합권의 움직임 안에 다 포함된다는 말이다. 네놈이 배운 화산의 검술이라고 별 수 있을 줄 아느냐?”
 조진호가 흠칫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필삼의 말에는 만류귀종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었고, 화산파의 유명한 선배 고수로부터 검술강론을 배울 때에도 비슷한 내용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무학의 모든 원리를 손짓 하나로 녹여낸다는 대종사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지금 코앞에 있는 표사 떨거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었다.
 갑자기 전필삼의 말 중에서, ‘화산의 검술이라고 별 수 있을 줄 아느냐?’라는 문장이 조진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화산파라고 별 수…, 화산파라고…….’
 조진호의 가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가, 감히 화산파를 모욕하다니!”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조진호가 검을 휘둘렀다.
 슈악!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전필삼을 베어갔다.
 명색이 구대문파의 속가제자, 그것도 검의 조종이라는 화산파의 제자가 휘두르는 검이다. 양진향의 일천한 무공으로도 그 위력이 어떻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양진향이 ‘악!’하는 비명과 함께 두 눈을 가렸다.
 덕분에 그녀는 전필삼의 몸이 파도치듯 교묘하게 움직이며 그 검을 피해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헛! 이놈이…….”
 조진호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노에 차 황급히 휘두른 검이라 특별한 초식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삼류무사 나부랭이가 피할 수 있는 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필삼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그 정도의 검이라면 용신(龍身)만으로 충분히 상대해줄 수 있겠다. 어디 한 번 더 펼쳐봐라!”
 용신이라면 육합권의 여섯 기본공 중 하나로 신법과 보법이 포함된 몸의 움직임 전체를 총괄하는 것이다.
 조진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전필삼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의 위력적인 일검을 피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초식을 발휘해 검을 휘둘러왔다.
 검광이 번뜩이며 살기어린 검이 피를 찾아 허공을 누볐다.
 전필삼은 더욱 교묘한 몸놀림으로 그 검을 살짝살짝 피해냈다. 마치 그물의 틈새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같았다.
 조진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용을 써도 상대가 반치 차이로 검을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진향이 옆에서 보기에 상황은 극도로 위험했다. 흉흉한 살기를 흘리는 장검이 푸른 검광을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고, 그 가운데 있는 전필삼은 금방이라도 피를 뿌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던 것이다.
 ‘이, 이대로 가다가는 목숨이 위험해!’
 그녀가 위험을 무릎서고 조진호를 말리려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의 미꾸라지 신공에 화가 잔뜩 난 조진호는 뭔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별 생각 없이 검을 휘둘렀다.
 양진향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갑자기 조진호가 자신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도 약간의 무공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조진호의 일검을 피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조진호의 검이 양진향의 목을 잘라버리려던 순간,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팔이 살짝 밀려났다. 덕분에 양진향의 목을 베어가던 검이 위로 치솟아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양진향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진호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손을 멈추었다.
 “야, 양 소저…….”
 그는 사문으로부터 죽기 전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과 함께 하사받은 검을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고는 양진향을 부축하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전필삼이 양진향 곁에 나타나 그녀의 팔을 부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양진향은 너무도 놀라 오금이 저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전필삼이 두 팔로 양진향을 번쩍 안아들었다.
 조진호는 두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 했다.
 “네, 네놈이…….”
 “감히 우리 아가씨를 해치려 하다니!”
 전필삼의 말에 조진호는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라…….”
 전필삼의 준엄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앞으로 우리 아가씨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하면, 그 날이 네놈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썩 꺼지지 않고 뭘 하느냐?”
 전필삼이 양진향을 안고 다가오자 조진호는 저도 모르게 비켜섰다. 조진호로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볍게 코웃음을 날려준 전필삼이, 비룡표국 꽃 중의 꽃이요, 진양 최고의 미인이라는 양진향을 가슴에 안고 여유롭게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진호의 입에서 비명도, 신음성도 아닌 기괴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전필삼은 비룡표국 담장 옆의 으쓱한 곳을 나와 대로를 활보한 후, 표국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을 지나던 노인 한 명이 혀를 차며, ‘요즘 젊은 것들은…’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문을 지키던 호위무사 두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전필삼이 양진향을 번쩍 안아든 채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필삼의 모습이 표국 안으로 사라지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자신들이 본 게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큰 실연이라도 당한 듯이 말이다.
 표국으로 들어온 전필삼이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마당에서 개미놀이를 하고 있던 양진천이었다.
 양진천은 누나가 전필삼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혀, 형! 누나!”
 그 순간 양진향이 정신을 차렸다.
 “꺄악!”
 비명소리와 함께 ‘짝’하는 소리가 표국을 울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는 눈을 크게 떴다. 모두들 세상에 다시없을 희한한 것을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전필삼이 양진향을 땅에 내려놓더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천년마교의 절대지존이자 대마종인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손찌검을 당했다는 사실은, 납득은커녕 인식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맞아본 게 언제더라…?’
 그가 멍하니 서있자, 양진향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에게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상대는 조진호를 쫓아내고, 반쯤 정신이 나간 자신을 집으로 데려온 죄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형! 어떻게 된 거야?”
 양진천이 그의 바지춤을 잡아당기자, 전필삼은 마침내 정신을 찾았다.
 “어, 어떻게 되긴? 뭐가 말이냐?”
 “우리 누나, 어떻게 꼬셨냐고?”
 “이 녀석이! 꼬시긴 누가 누굴 꼬셨단 말이냐?”
 “방금 사랑싸움 한 거 아냐?”
 “떽! 어린 것이 못 하는 말이 없다! 그런 일이 아니니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말거라! 험험!”
 전필삼이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호기심어린 눈길이 반, 질시어린 시선이 반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 걸은 전필삼이 천정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년 십팔 세의 처녀로부터 뺨을 얻어맞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세상에! 천년마교의 지존인 나 천하제일마 혁무린이 뺨을 맞다니! 허허허!’
 너무나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되면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의 전필삼도 그런 심정이었다.
 어쨌든, 그렇지 않아도 표국에 군식구가 늘었다는 소문 때문에 표사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던 전필삼에게 미운털이 확실히 틀어박힌 것이 바로 그날이었다.
 다음날부터 전필삼은 방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뭇 표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사실 양진향은 표국의 꽃으로 젊은 표사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비록 그녀에게 구혼을 하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간 큰 표사는 없었지만, 표국에서 그녀의 존재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성역처럼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인지도 모르는 젊은 놈이 그녀를 턱하니 안고 표국을 활보했으니, 표사들은 자신들의 마누라가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덕분에 그날 오후에 떠나는 대대적인 표행에 전필삼은 참가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표사들이 그를 따돌린 탓이었다.
 표행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건 특별수당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필삼은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가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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