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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더 샤도우 [E]

더 샤도우 1권-1

2015.02.05 조회 12,372 추천 97


 Prologue
 
 알폰소 폰 지욘프리드.
 그에게는 세 가지 별명이 있다.
 하늘의 기사. 그랜드 마스터, 그리고 검의 황제.
 그는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전무후무한 검신이다.
 황제는 그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렸고, 가장 부유하고 기름진 영지로 하사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공주를 아내로 주었으며, 전군에 대한 통수권까지 그에게 맡겼다.
 말이 공작이지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지녔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그의 휘하에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백성들 또한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보내 주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타고난 전사였다. 보다 강한 강자와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것, 그것 말고는 그에게 만족감을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삼 대륙 50여 개의 왕국을 돌아다녀도 그의 적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7써클의 대마법사도 그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고,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숲의 종족 엘프조차 그를 위대한 전사라 칭하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지욘프리드 공작은 답답했다.
 밥을 먹어도 맛있지 않았고, 아름다운 아내와 시간을 보내도 즐겁지 않았다.
 그는 싸워 이기는 행위를 통해서만 즐거움과 행복을 얻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내가 싸울 만한 상대가 더 이상 없단 말인가.’
 그는 외로웠다. 더 이상 적수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의 고독이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다. 나보다 더욱 강한 존재, 위대한 드래곤에게 도전하리라. 그리고 거기서 나의 최후를 맞으리라.’
 지욘프리드 공작은 세상에서 인간에게 유일하게 금지된 땅, 드래곤 산맥으로 향했다.
 드래곤 산맥의 몬스터와 괴수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금기의 땅을 지키는 파수꾼들답게 산맥의 몬스터는 강했다. 하지만 지욘프리드 공작에게는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나 다름이 없었다.
 파수꾼들을 가볍게 처리한 그는 마침내 위대한 고룡, 중간계의 절대자이며 반신적인 존재인 골드 드래곤 엘리시온의 레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욘프리드 공작은 그곳에서 심연의 깊이와 같은 눈빛을 지닌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금색으로 일렁이는 로브를 입었고, 온몸에서는 세상을 압도하는 듯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었던 지욘프리드 공작조차 그 노인의 앞에 서자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낄 정도였다.
 “당신이 위대한 고룡 엘리시온이오?”
 “그렇다. 너는 누구냐?”
 “나는 알폰소 폰 지욘프리드요.”
 “처음 듣는 이름이군.”
 지욘프리드 공작은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깊은 산맥에 은거하고 있는 드래곤이라지만 어찌 자신의 이름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당신에게 도전을 하러 왔소.”
 “뭐라? 도전? 크하하하하!”
 고룡 엘리시온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해 있던 지욘프리드 공작은 지체 없이 검을 뽑았다.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무려 10미터까지 자라났다.
 엘리시온이 웃음을 그치더니 안색을 굳혔다.
 “하찮은 미물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다니! 용기가 가상해 목숨만은 살려 주려 했으나 이젠 늦었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목소리가 엘리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로만 듣던 용언 마법이었다.
 어마어마한 마법 공격이 몰아쳤고, 지욘프리드 공작은 풍랑에 떠다니는 작은 돛단배가 되었다.
 지욘프리드 공작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화염을 가르고 빛의 화살을 막았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얼음 기둥을 박살 냈다.
 하지만 드래곤의 용언 마법이 지닌 힘은 차원이 달랐다.
 바깥세상에서는 절대자로 칭송받는 그였지만, 드래곤이 지닌 강대한 마법은 그의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결국 지욘프리드 공작은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여기까지가 한계였던가. 하지만 여한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와 싸워 보았으니.’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검을 뻗었다.
 10미터에 달하던 그의 오러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20미터까지 자라나더니 순간적으로 드래곤의 베리어를 꿰뚫었다.
 “큭!”
 짧은 비명이 베리어 안에서 들렸고, 다음 순간 지욘프리드 공작은 온몸을 강타하는 강력한 힘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화염이 걷히고 폭풍처럼 일어났던 먼지가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다.
 지욘프리드 공작은 땅에 쓰러진 채 연신 기침을 했다. 붉은 피가 그의 기침과 함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의 맞은편에는 골드 드래곤 엘리시온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로브 오른쪽 가슴 부위가 뚫렸고, 그의 발아래 작은 유리병 하나가 깨져 있었다.
 놀라운 건 깨어진 그 유리병에서 아주 작은 빛 덩어리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와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이럴 수가! 봉인의 베슬이 깨어지다니…….”
 엘리시온은 곧바로 마법을 발휘했다.
 허공에 금빛의 막이 생겨 주변을 가두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빛 덩어리들이 이미 사방으로 흩어진 후였다.
 엘리시온이 무서운 표정으로 지욘프리드를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쿨럭! 으으으……. 다, 당신은 정말 강하군. 내가 졌소.”
 “이, 이놈! 이건 단순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네놈 때문에 봉인의 베슬이 깨어졌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느냐?”
 “나, 나는 모르오.”
 “으으! 어리석은 놈……. 봉인의 베슬이 깨지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엘리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네게 그걸 설명해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봉인의 베슬에서 풀려나온 이 사악한 영혼들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엘리시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시온은 균형자다.
 수천 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세상의 균형을 파괴하는 존재들을 소멸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거두어 봉인시켰다. 덕분에 세상은 선과 악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지욘프리드 때문에 베슬이 깨어지고, 균형을 흔들 수 있는 존재들이 한꺼번에 대량으로 풀려나 버린 것이다.
 ‘으으, 그것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엘리시온은 베슬에서 풀려나간 존재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 해야 할 고생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했다.
 엘리시온의 매서운 눈빛이 지욘프리드를 향했다.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엘리시온의 강대한 마법이 지욘프리드를 강타했다.
 “크윽!”
 지욘프리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었다.
 엘리시온이 다시 용언 마법을 발휘했다.
 그러자 지욘프리드의 시신에서 작고 밝은 빛 덩어리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지욘프리드의 영혼이다.
 엘리시온은 지욘프리드의 영혼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에게 형벌을 내리겠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해 다른 차원으로 영혼을 보내 버릴 것이다. 마나가 가장 희박한 세상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면 두 번 다시 이 세상에서 얻은 것과 같은 힘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우우웅!
 은은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 검은색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엘리시온이 손을 휘젓자 지욘프리드의 영혼은 검은색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검은 소용돌이는 깨끗이 사라졌고,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1장 부활
 
 삑!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병실에서 울려 나왔다.
 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은 채, 깊은 수면에 빠진 환자 한 명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죽은 듯 누워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흑흑! 선욱아, 힘내야 한다. 너는 살아날 수 있어.”
 환자의 이름은 강선욱이다.
 그는 군대에서 막 제대한 후, 복학하기에 앞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새벽에 귀가하다가 폭주족의 오토바이에 사고를 당했고,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 온 게 벌써 일주일 전이다.
 - 이제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슬프더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충격적인 말에 어머니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의사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목숨이 붙어 있는 자식을 놓아 버릴 수 있겠는가.
 저녁이 되자 퇴근한 아버지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았다. 낮에는 의료기기 영업 사원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하고, 밤이 되면 의사나 병원 관계자들에게 접대를 하느라 술집과 카페에서 살다시피 한다.
 벌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접대하느라 돈을 다 써 버리고 난 후 집에 가져오는 것으론 세 아이 학비 대기도 빠듯하다.
 그런데 갑자기 장남이 사고가 나서 혼수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으니, 아버지도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선욱이는 어떻소?”
 “아직……. 흑흑.”
 아버지가 아내의 등을 다독인 후, 선욱의 손을 잡았다.
 “선욱아, 아버지다. 어서 일어나야지? 응?”
 강선욱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왔다.
 강선민과 강선영.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강선욱의 두 동생들이다.
 강선민은 고3 수험생이다.
 하지만 수험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대신 선민은 싸움을 잘했다. 아니, 단순히 잘한다는 수준을 넘어선 실력자였다. 공부 대신 싸움이라는 과목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다면 선민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도 남을 것이다.
 때문에 부모님들은 그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그동안 무던히도 속이 썩었다. 선민에게 맞은 학생들에게 물어 준 치료비만 합쳐도 집 한 채는 샀을 것이라고 부모님들이 말할 정도다.
 그리고 강선영은 고1이다.
 그녀 또한 공부와 담을 쌓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았다. 선영은 중학교에 다닐 때, 퀸카로 통할 만큼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그리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일찌감치 진로를 정했다. 가수나 연기자가 되는 게 그녀의 꿈이다.
 예비 조폭과 예비 연예인을 자식으로 둔 집안.
 어떻게 보면 콩가루 같지만 실제로는 화목한 편이었다. 부부 사이도 원만했고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았다. 게다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식들의 효심 또한 지극했다.
 강선민과 강선영은 혼수상태에 빠진 선욱을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선민은 주먹을 꽉 거머쥐었고, 선영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씨팔, 어서 일어나, 형. 그래서 내게 말해 줘. 형을 이렇게 만든 폭주족 새끼가 누군지 알아야 찾아가서 아작 낼 거 아냐! 어서 일어나라고!”
 “흑흑! 오빠…….”
 가족들은 한동안 선욱의 병실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 이만 나가 주십시오.”
 원래 중환자실은 가족에게조차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의사도 포기하다시피 한 환자라, 마지막 순간까지라도 함께 있도록 만들어 주려고 병원에서 배려를 해 주었던 것이다.
 선욱의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병실 밖으로 나가 환자 대기실로 가야 했다.
 간호사가 작은 플래시를 켜서 선욱의 눈을 살폈다.
 “동공 반응이 여전히 없네……. 휴! 어렵겠어.”
 간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방에 불을 끄고는 밖으로 나갔다.
 삑! 삑! 삑!
 규칙적인 바이틀 사인이 적막한 병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체처럼 누워 있던 선욱의 손가락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삑! 삐빅! 삐빅!
 바이틀 사인이 조금 빨라졌고, 가늘던 호흡이 다소 강해졌다.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돌던 의사가 선욱의 병실에 들렀다.
 그가 바이틀 사인을 체크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환자 식물인간 상태 아니었나?”
 뒤따르던 간호사가 차트를 살피고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데…….”
 “이상하군. 혈압이 조금 올라갔고, 박동도 빨라졌어.”
 의사는 플래시를 꺼내 선욱의 눈을 살폈다.
 선욱의 검은 동자가 순간적으로 작은 수축과 팽창을 보였다.
 의사의 눈이 커졌다.
 “이럴 수가……. 동공 반응이 돌아왔어. 바이틀 사인 다시 체크해! 조영제 투입하고 MRI촬영 준비도 하고! 어서!”
 간호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뇌사 직전 단계에 가 있던 환자가 아닌가.
 “뭘 해? 빨리하지 않고!”
 간호사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병실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우, 우리 선욱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도대체 왜 저러지?”
 때마침 간호사 한 명이 나왔다.
 “간호사, 무슨 일이에요? 우리 선욱이 괜찮은가요?”
 “환자 상태에 변화가 생겼어요. 확인 중이니 기다려 주세요.”
 간호사는 곧바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의사가 병실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의사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 선욱이가 어떻게 되었나요? 네?”
 “음. 잠시 따라오십시오.”
 의사는 자신의 방으로 어머니를 데려간 후, 조용히 말했다.
 “의사 생활 20년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네?”
 “환자의 의식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뇌파의 상태가 크게 호전되었습니다. 아직 건강한 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깊은 수면에 빠진 사람과 비슷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건 알파파가…….”
 의사가 몇 가지 전문적인 용어를 써서 설명했지만 선욱 어머니의 귀에 들어온 말은 호전되었다는 말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우리 선욱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건가요?”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어제보다는 분명히 호전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의사의 손을 잡았다.
 
 ***
 
 선욱의 회복은 빨랐다.
 의사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늘이 보여 준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중에 의식이 돌아올 것 같습니다. 이제 일반 병실로 옮길 테니 곁에서 돌봐 주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욱의 가족들에게는 이보다 큰 희소식이 있을 수 없다.
 아버지는 월차휴가를 냈고, 두 동생들도 담임에게 사정 설명을 한 후 학교를 빠졌다.
 그렇게 해서 가족들 모두가 병실에 모여 선욱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일반 병실로 온 지 이틀째가 되던 날 마침내 선욱이 눈을 떴다.
 “선욱아! 엄마다!”
 “선욱아!”
 가족들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선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게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그때, 간호사가 뛰어 들어오더니 선욱의 상태를 살폈다.
 곧이어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선욱의 상태를 한동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어서 아직 정신이 없을 겁니다. 당분간 조용히 지켜보도록 하십시오. 절대로 환자에게 충격이나 혼란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가고 나자 가족들은 다시 선욱에게 매달렸다.
 “선욱아, 괜찮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모두들 선욱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침내 선욱의 입이 열리더니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내 가족이냐?”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말투는 전혀 다르다. 도저히 선욱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서, 선욱아! 엄마다.”
 “아버지다, 선욱아.”
 “형! 나야!”
 “오빠…….”
 가족들 모두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음. 힘들구나. 모두 물러가도록 해라.”
 선욱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서, 선욱아!”
 어머니가 선욱의 팔을 잡았다.
 그때, 선민이 어머니를 말렸다.
 “그만두세요. 환자에게 충격을 줘서는 안 된다고 의사가 말했잖아요. 일단 지켜봐요.”
 “응? 그, 그래.”
 가족들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선욱의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온갖 생각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선욱이 말을 할 정도로 회복되었고, 머지않아 병원을 걸어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기쁜 일이었다.
 
 ***
 
 ‘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강선욱은 엄밀히 말해서 이전의 그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선욱의 영혼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대신 다른 사람의 영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폰소 폰 지욘프리드.
 검의 신이며 절대자였지만 더 이상 적수가 없음에 절망해, 마지막으로 위대한 고룡에게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강선욱이라는 대한민국의 22살 청년의 몸을 빌려 지금의 세상에 부활했다.
 그는 강선욱의 머릿속에 남겨져 있던 기억을 모두 가져왔다. 강선욱의 기억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한 마디로 요지경이다. 검과 마법이 아니라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마나가 희박해 마법이나 오러 같은 건 영화라는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했다.
 지욘프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나의 농도가 너무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는 수십 년을 수련해도 과거의 능력 중 10%조차 되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군. 그나마 몸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어 다행이군. 으으! 엘리시온 이 나쁜 놈! 나를 이따위 세상에 보내다니…….’
 지욘프리드, 아니 이제는 강선욱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일단 몸부터 회복시켜야겠다.’
 그는 다시 집중력을 발휘해 마나 수련을 시작했다.
 
 ***
 
 “자! 천천히 걸어.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근육의 기억을 끌어내야 해.”
 강선욱은 자신의 팔을 잡고 이끄는 재활치료사의 말에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육신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육신은 걷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강선욱은 재활치료사의 팔에 기대어 걸음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내가 걸음마 따위를 배워야 하다니…….’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선욱아! 천천히 해! 이 엄마가 맛있는 게장을 해 왔다.”
 재활치료실 밖에서 손을 흔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친아들로 생각하고 있는 그녀다. 그리고 그녀 외에도 아버지와 두 동생들이 있다.
 귀찮기 짝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몸을 회복시킨 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련에 매진하고 싶었다.
 다행히 걸음마는 하루 만에 배웠다.
 다음 날 아침, 재활치료사는 믿기 어려운 선욱의 회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빨리 재활하는 환자는 처음이야. 선욱아, 너 정말 대단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인간들의 얼굴이 낯설기는 하지만, 활짝 웃는 재활치료사의 표정이 제법 귀엽게 느껴진다.
 기껏해야 20대 후반 정도?
 단발머리에 큰 눈이 유달리 예뻐 보이는 얼굴이다.
 “다음 단계는 무엇이냐?”
 재활치료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나에게 하는 말버릇 하고는……. 휴우! 어쩔 수 없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유증이라고 하니……. 자, 따라와.”
 그녀는 선욱을 이끌고 워킹머신에 올라갔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걸어 봐. 그리고 속도를 조금씩 높여 볼 테니까, 힘들다 싶으면 이 빨간 단추를 눌러. 알았지?”
 “알겠으니, 빨리 시작해라!”
 콩!
 재활치료사가 선욱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윽!”
 선욱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재활치료사를 노려보았다.
 “쥐방울만 한 게 누나에게……. 너, 죽을래?”
 오히려 눈을 부릅뜨는 그녀다.
 선욱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결국 고개를 돌렸다.
 ‘젠장! 황제 폐하조차 내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거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부활했으니 거기에 적응할 수밖에.
 마침내 워킹머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욱은 천천히 움직이는 발판에 맞추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기계문명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전기라는 동력으로 기계를 움직이고,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다 작동시키니 말이다.
 ‘후후후, 마법사가 이걸 봤으면 입에 거품을 물겠군. 그리고 전기라는 게 마법사의 마나보다 훨씬 효율적이야. 마나처럼 인간이 몸속에 직접 담아 두었다가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워킹머신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고, 선욱은 가벼운 조깅을 하는 속도로 뛰어야 했다.
 10분가량이 지났을 무렵, 선욱은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저질 체력이라니!’
 선욱은 악착같이 뛰었다.
 눈앞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붉은 단추를 누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생의 지욘프리드에게 ‘적당히’라는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헉헉헉헉!”
 미친 듯이 숨을 몰아쉬었고,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결국 선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꽝!
 선욱은 앞쪽 계기판에 이마를 강하게 찧은 후, 빠르게 움직이는 발판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팔 하나가 옆으로 꺾였다.
 우당탕!
 다른 환자들을 돌보고 있던 재활치료사가 깜짝 놀라 선욱에게 뛰어왔다.
 선욱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넘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천천히 일어났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서, 선욱아!”
 재활치료사는 급히 수건으로 선욱의 이마를 감쌌다.
 “음. 그 손 치워라.”
 “뭐? 지금 이마가 찢어져서…….”
 “내 손을 밟고 있지 않느냐?”
 “응? 아, 미안!”
 재활치료사가 재빨리 발을 치웠다.
 선욱은 굳은 표정으로 왼팔을 들어 올렸다. 팔꿈치 아래가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 덜렁거렸다.
 재활치료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뼈, 뼈가…….”
 “조용히 해라! 관절이 빠졌을 뿐이다.”
 “뭐……뭐?”
 선욱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잡더니 힘껏 잡아당겼다.
 그의 손이 길게 늘어나는가 싶더니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줄어들었다.
 선욱이 왼팔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 팔이 빠지다니……. 정말 저주받은 육신이로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선욱의 모습을 본 재활치료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관절이 빠지면 무지하게 아프다. 특히 빠진 관절을 다시 맞추는 과정은 기절할 정도다. 그런데 고작 20대 초반의 이 청년은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안색을 조금 찌푸렸을 뿐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않았다.
 재활치료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선욱은 피가 쏟아지는 이마의 상처를 손으로 만졌다.
 피부가 깊게 패여서 허연 뼈가 보인다.
 선욱이 손가락을 상처 안쪽까지 집어넣어 이리저리 돌렸다.
 안쪽에 들어간 손가락 때문에 이마의 피부가 불룩 튀어나왔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음! 이물질은 없군.”
 선욱이 손가락을 빼내더니 피범벅이 된 얼굴로 천천히 재활치료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늘과 실을 가져오너라.”
 재활치료사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
 
 “큭큭큭! 진짜야, 형? 바늘과 실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우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 어린놈의 동생은 배꼽이 빠져라 웃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고, 여동생의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다.
 “서, 선욱아. 정말 괜찮으니?”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욱의 이마를 만졌다.
 반창고가 붙어 있는 이마는 퉁퉁 부어서 한쪽 눈까지 반쯤 감겨 있는 상태였다.
 “괜찮다.”
 “이 녀석! 조심 좀 하지…….”
 선욱이 선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시끄러운 녀석을 데리고 나가라. 혼자 있고 싶다.”
 “휴! 도대체 너는…….”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이상하게 바뀐 말투. 그리고 빠진 관절을 스스로 맞추고 이마가 찢어지자 바늘과 실을 가져오라고 한 건 결코 정상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이 아니다.
 선욱의 아버지가 눈짓을 했다.
 “그만 나갑시다. 의사의 말로는 차차 회복될 거라고 하니 말이오.”
 “그래도…….”
 “죽을 줄 알았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게 어디요? 난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오.”
 “알았어요.”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선민이 형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형! 짱이야! 하하하!”
 선민의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더니 마침내 그쳤다.
 병실에 남은 선욱은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했다.
 마나 수련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다시 들려온 인기척에 눈을 떠야 했다.
 “형!”
 선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큭큭큭, 형 말투 정말 끝내준다. 누가 들으면 사극 찍는 줄 알겠다. 큭큭큭.”
 “무슨 일이냐?”
 “이제 말해 봐.”
 “뭘 말이냐?”
 선민이 으스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을 그렇게 만든 폭주족 새끼.”
 선욱이 흠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강선욱의 기억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강선욱을 치고 달아난 폭주족의 얼굴과, 측면에 해골을 그려 넣은 커다란 오토바이를 말이다.
 선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놈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면 내가 한다.”
 “뭐?”
 선민이 눈을 크게 떴다.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으로 형을 쳐다보던 선민이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폈다.
 “형이 그런 말을 다 하다니……. 그거 알아? 너무 멋있어진 거. 옛날의 그 찌질이 형은 어디 갔어?”
 “뭐? 찌, 찌질이?”
 “큭큭큭, 기억 안 나? 내가 만날 놀렸잖아. 형은 찌질거리는 것만 빼면 괜찮은 남자가 될 거라고.”
 선욱은 찌질이라는 말의 뜻이 명확하지 않아 잠시 생각했다. 선욱의 삶을 돌이켜 보자 그는 이내 알 수 있었다.
 ‘으! 정말 그렇군. 이놈은 무지 소심했어.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은근히 무시를 당하며 살았군. 허!’
 선민이 형의 어깨를 툭 쳤다.
 “형. 괜히 멋있는 척하지 말고, 복수하고 싶으면 언제든 내게 말해. 형을 그렇게 만든 새끼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순간적으로 새파란 독기를 내뿜는 선민이다.
 그 모습을 본 선욱은 동생의 성격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휴. 동생이라는 놈이 형보다 백배는 낫구나. 남자라면 자고로 저런 면이 있어야지.’
 선민이 손을 흔들었다.
 “형. 그럼 나, 간다. 몸조리 잘 해.”
 문을 닫고 나가는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욱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을 쳐다보던 동생의 눈빛, 그리고 행동이나 말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이 감정이 뭐지?’
 이전의 삶에서 절대자의 경지에 이른 지욘프리드였지만, 오직 강해지겠다는 일념으로 한 길만 걸어온 삶이다. 고아로 자라나 부모형제의 정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했다. 훗날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가정을 꾸리기는 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의무만 다했을 뿐 참된 애정을 주고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가족과 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온 힘과 정성을 다 바쳐 뒷바라지를 하는 어머니도 때로는 시녀나 하녀 정도로 여겨질 따름이었다. 그 외, 다른 가족들의 존재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생겼다.
 방금 보고 들었던 선민의 행동과 말 때문이다.
 선욱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회복에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잡생각에 몰두할 틈이 없어.’
 선욱은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선욱은 병원에서 별종으로 취급받았다.
 재활치료실에서의 일이 병원에 쫙 퍼졌던 것이다.
 선욱이 지나가는 모습만 보면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의사들도 선욱을 쳐다보는 눈빛이 다르다.
 하지만 선욱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팔꿈치 관절이 빠지거나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난 일 따위는 어디 가서 말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적어도 배가 갈라져 내장이 삐져나오거나 몸에 바람구멍이 두세 개 정도 뚫려야지 좀 다쳤네, 하고 치유마법사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지욘프리드였다.
 선욱은 모든 걸 무시하고 마나 수련을 통해 회복에만 몰두했다.
 어두운 밤.
 선욱은 여전히 병실 침상 위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주변의 마나는 미약했지만, 그거라도 받아들여 아랫배에 마나홀을 만들 기반을 다져야 했다.
 마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그의 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병실 밖에서 선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였다.
 “이걸로 되겠소?”
 “좀 부족하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선욱이 건강 되찾는 게 중요하지.”
 “막내 학원은 어떻게 하오?”
 “한 달 쉬라고 하죠, 뭐.”
 “연기 학원이라는 게……그렇게 쉬어도 되는 거요?”
 “어쩌겠어요, 부탁을 해 봐야지.”
 “음.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밤에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학원비를 마련할 테니.”
 “여보, 그러다가 건강 상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할 수 있소? 선욱이 퇴원할 때까지는 버텨야지.”
 “차라리 지금 퇴원시킬까요?”
 “의사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육체적으로는 많이 회복되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소. 그런데 선욱이의 정신은 언제 돌아온다고 했소?”
 “그게…….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가족은 다 알아보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례는 처음이라고 학계에 보고까지 하겠다네요.”
 “뭐요? 이 사람이 우리 장남을 모르모트로 만들려고 하나…….”
 “사실, 이해하기 힘든 건 사실이잖아요.”
 “음. 어쨌든 선욱이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조금 더 버텨 봅시다.”
 “네, 알았어요.”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침내 끝났다.
 선욱이 안색을 굳혔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것이다.
 평생 남에게 폐 한 번 끼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그였다. 그런데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둥둥둥둥!
 선욱이 미간을 찌푸리며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놈의 심장은 왜 이렇게 자주 뛰지? 체력이 너무 약해서 그런가?’
 선욱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심장의 불수의근에 속해 있지만, 과거 지욘프리드는 어느 정도까지 심장의 박동은 물론 내장의 움직임도 제어할 수 있었다.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기는 요원하지만 몸을 심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는 건 드문 일이다.
 특히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그런 일이 잦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이한 감정이 일어나거나 가슴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선욱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부모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 병원을 나가야겠어.’
 다음 날 아침.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병실을 찾았다.
 선욱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의사가 질문을 했다.
 “요즘 구역질을 느끼거나 어지럽지는 않아?”
 “그런 일 없습니다.”
 의사가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욱이 깨어난 후,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의사는 선욱을 진료하는 게 정말 싫었다. 자신의 나이 반밖에 되지 않는 어린놈이 괴상한 어투로 반말지거리를 찍찍 해 대는데,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환자이고 정상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그래, 밥은 잘 먹고?”
 “잘 먹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의사는 선욱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고, 선욱은 꼬박꼬박 존댓말로 대답했다.
 의사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제 퇴원을 해도 되겠다고 말하며 병실을 나가려 했다.
 그때, 선욱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잡았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봐.”
 “심장이 뜁니다.”
 의사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거다.”
 “그 말이 아니고, 가끔 심장이 빨리 뜁니다.”
 “빨리 뛴다고?”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빈맥은 없었는데……. 잠시 상의를 벗어 봐라.”
 선욱이 상의를 벗었다.
 의사가 청진기를 선욱의 가슴에 댔다.
 잠시 선욱의 심장박동을 들어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심장은 정상이다. 부정맥의 징후는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마 정신이 혼란스러워 일시적으로 맥박이 증가한 것일 게다.”
 선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음. 이상하네. 그런데 왜 가족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뛰는 건지…….”
 “뭐? 가족?”
 “예. 어제 부모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 치료비를 대느라 아버지가 밤에 일을 하겠다더군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뛰었고 통증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기이한 감정까지 들었습니다.”
 “너 설마……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내게 묻는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모른다고? 정말이냐?”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선욱을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설마 사이코패스……? 아니지! 사이코패스라면 그런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혹시……지금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았니?”
 “아닙니다. 함께 살았습니다.”
 “그럼 혹시 학대받고 자란 건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가족 간에 느끼는 당연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예? 가족 간의 당연한 감정?”
 “내가 너라면 그 말을 듣고 통곡이라도 했을 거다. 널 위해 그렇게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넌 느끼는 것도 없냐?”
 “그럼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다.”
 “…….”
 사랑.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단어 앞에서는 마음이 뭉클해진다. 하지만 지욘프리드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아니, 그도 인간이니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전사에게 필요한 건 아니었다. 강해지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래서 지욘프리드는 그런 감정에 무덤덤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중년이 넘어가자 거의 목석같은 사람이 되었다.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고 황제가 어여쁜 공주를 아내로 주었으나 지욘프리드는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다만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는 그게 두려워 새로운 적수를 찾아 집을 떠났다.
 그의 삶이 이렇다 보니 사랑이나 가족 간의 정이라는 감정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학계에 보고된 일인데, 심장을 비롯한 몸의 장기들이 기억에 관여한다고 한다.”
 “내장이 기억을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런 사례들이 많기는 했지. 담배를 피우던 사람의 장기를 금연자의 몸에 이식했더니 담배를 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는 그런 사례 말이다. 지금까지는 거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미국의 한 저명한 내과의가 그 사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보고했지.”
 “그 해답이 무엇입니까?”
 “그는 장기 중에서 심장에 주목을 했다. 사람들은 심장이 그냥 근육 덩어리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틀렸다. 심장의 절반은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도 뇌의 해마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세포로 말이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아니?”
 “모릅니다.”
 “심장도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정과 관련된 기억에는 심장이 깊이 관여한다는 말이지. 사람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가슴이 뛰거나 아픈 것도 그 때문이다.”
 선욱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의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족을 대할 때 심장이 뛰는 이유가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정신과 영혼은 나 지욘프리드의 것이지만 육신은 강선욱이라는 아이의 것이었으니 심장이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의사가 선욱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런 상황에서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픈 건 정상이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아프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몸조리 잘 해라.”
 의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병실을 떠났다.
 의사가 나가고 나자 어머니가 병실로 들어왔다.
 “내일 퇴원하겠……습니다.”
 “으응……뭐?”
 “퇴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선욱의 말에 어머니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바, 방금 뭐라고 했니, 선욱아.”
 선욱이 어머니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퇴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선욱을 쳐다보던 어머니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흐흐흑! 선욱아! 마침내 네 정신이 바로 돌아왔구나. 선욱아!”
 자신을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선욱은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가족이라……. 그래,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부활했으니 이 세상에 맞춰서 살아야겠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선욱이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어머니의 등을 감쌌다.
 
 
 2장 생활의 발견
 
 퇴원 수속을 마치고 선욱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탔다.
 택시 차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선욱에게는 너무 낯설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강선욱의 기억을 모두 흡수했기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습을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는 있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또 달랐다.
 ‘정말 신기하구나. 말도 없이 저절로 움직이는 마차라니……그런데 저 여자들은 정말 수치심도 없군.’
 하의실종 패션이 유행하는 현대에서, 그의 눈에 비친 여자들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선욱아, 퇴원을 하니 좋니?”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선욱에게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어머니는 연신 선욱의 얼굴과 손을 쓰다듬었다. 간신히 되살아난 아들이 다시 어디론가 떠나 버릴까 두려워 한 손으로는 선욱의 옷깃을 꼭 붙잡고 있었다.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를 달린 끝에 택시는 일산에 있는 선욱의 집에 도착했다.
 선욱은 택시에서 내린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 이런 곳에 정말 사람이 살다니…….’
 선욱이 내심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로 차와 사람이 지나다니는 아파트촌이다. 보행로를 따라 가로수가 규칙적으로 심어져 있고, 조경이 잘 되어 있기는 했지만 억지로 꾸민 티가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선욱이 보기에는 황량하게만 느껴진다. 지욘프리드가 전생에서 살았던 대저택에 비하면 마구간에 불과한 수준이다.
 하지만 선욱의 가족에게는 오랫동안 한 푼, 두 푼 모아서 힘겹게 마련한 소중한 보금자리이며, 인근에서는 제법 값이 나가는 아파트이기도 하다.
 선욱은 어머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올라갔다. ‘지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몸이 가볍게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신기하구나. 사람을 들어 올리는 상자라니……. 허허허.’
 마침내 선욱은 집에 들어갔다.
 세 개의 방을 지닌 27평형 아파트다.
 선욱은 기억을 더듬으며 집 안을 살폈다.
 ‘여기가 집이로구나.’
 벽걸이 TV와 냉장고, 그리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들이 선욱의 눈을 사로잡았다.
 선욱은 거실 좌측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좁다. 그리고 답답하다.
 2층으로 된 침대가 창가에 놓여 있고, 벽에는 두 개의 책상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리고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대부분이 선욱이 읽던 소설책이나 대학 교재들이다.
 이곳이 바로 동생 선민과 함께 쓰는 선욱의 방이었다.
 곧이어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왔다.
 “이것 좀 먹으렴.”
 “거기 두십시오.”
 “그래.”
 어머니는 선욱의 책상 위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은 후, 아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방을 나갔다.
 “휴!”
 선욱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좁은 곳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던 선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전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되찾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안정적이지 못했다.
 동생이 함께 방을 사용하기에 마음 놓고 마나 수련을 할 수도 없다. 몸을 움직일 공간은 아예 포기한 수준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또 다른 아파트 건물이었고, 주변의 마나 농도는 한심할 정도로 희박했다.
 ‘아무래도 산과 숲이 있는 곳에 마나 분포가 짙을 텐데…….’
 그는 강선욱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아파트 뒷산이 떠올랐다.
 ‘일단 그곳으로 가 봐야겠군.’
 선욱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려다가 어머니가 깎아 놓은 과일을 발견했다.
 ‘그냥 나가면 또 그녀가 울겠지?’
 선욱이 과일을 집어먹었다.
 제법 달콤하기는 했지만 전생에 먹었던 것들에 비하면 훨씬 못하다. 그리고 몸에 그다지 좋지 않은 기운도 느껴졌다.
 ‘왜 과일에서 이런 기운이……. 음. 아마도 농약이란 걸 쳐서 그런 모양이군.’
 선욱은 대충 과일을 씹어 먹은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나를 수련하는 방법은 호흡을 통해 대기의 기운을 축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나 물을 통해 마나를 얻기도 한다. 거기서 얻은 마나는 검술에 쓰이지는 않는 대신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마나홀이 아랫배에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음식에 포함되어 있는 마나는 극히 미약했고, 오히려 나쁜 기운까지 들어 있으니 마나홀을 만들려는 선욱의 목표는 요원하기만 했다.
 ‘걱정이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나홀을 만든단 말인가.’
 한숨을 내쉬던 선욱이 방을 나갔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선욱아, 아픈 몸으로 어딜 간다는 게냐?”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답답해서요.”
 “엄마와 같이 나가자.”
 “아닙니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힘들 텐데…….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멀리 가진 말고.”
 “예.”
 선욱은 걱정스런 표정의 어머니를 뒤로하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몇몇 아주머니들이 아파트 앞을 지나가다가 선욱에게 아는 척을 했다.
 “어머, 선욱아. 이제 다 나았니?”
 “세상에. 큰일 날 뻔했다면서?”
 선욱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아주머니들이 귀찮기만 했다. 대충 괜찮다고 대답한 후, 선욱은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등 뒤에서 ‘좀 변한 것 같다’, ‘이상하다’는 말들이 들려왔지만 선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좁은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 마침내 산이 나왔다. 선욱이 사는 아파트 인근에 있는 유일한 산으로, 동네 어르신들이 약수를 뜨거나 운동하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선욱은 좁은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올라갔다.
 10분가량 걸었을까.
 선욱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헉헉헉헉! 미, 미치겠군. 체력이 이렇게 약해서야…….”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 선욱은 근처 풀밭에 대자로 뻗었다.
 머리가 핑 돌았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마나홀이고 뭐고 몸부터 만들어야겠군.”
 선욱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산을 올랐다.
 “쯧쯧쯧, 젊은 친구가 체력이 상당히 약하구먼.”
 동네 영감님 한 분이 약수를 떠갈 커다란 통을 들고 선욱을 쉽게 지나쳐 올라갔다.
 선욱의 코가 실룩거렸다.
 ‘저, 저 영감탱이가……. 젠장! 저런 영감에게 추월까지 당하다니……. 좀 움직여라, 이 저주받을 육신아!’
 선욱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미친 듯이 올라갔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생수통을 든 영감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더…….’
 선욱은 악착같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생수통을 든 영감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영감이 코끼리처럼 숨을 내쉬는 선욱의 호흡 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험!”
 영감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수터를 찾으며 다져진 체력이다. 나이가 들어 좀 느려지기는 했지만, 저질 체력의 3, 40대 중년보다 오히려 낫다고 자부한다.
 영감과 선욱 사이의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킁! 그럼 그렇지. 제깟 놈이 그래 봐야…….’
 영감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약간 속도를 늦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거친 호흡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이놈이…….’
 영감이 다시 피치를 올렸다.
 그렇게 영감과 선욱은 경쟁이라도 하듯 산을 올랐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헉헉헉헉!”
 “헥헥헥!”
 두 사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상의 약수터를 코앞에 두고 있다.
 영감은 상당히 지친 듯 생수통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고, 선욱은 아예 인간의 몰골이 아닐 정도다.
 약수터가 점차 다가온다.
 10미터, 9미터, 8미터…….
 ‘으으으! 질 수 없다!’
 영감은 노익장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고, 선욱은 노인보다 저질 체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살고 싶지 않았다.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두 사람.
 어느 순간 선욱이 조금 앞으로 치고 나왔다.
 “크으으!”
 영감이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다시 역전시켰다.
 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선욱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선욱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욱은 시뻘건 선지피를 한 모금 뱉어 내더니 다시 영감을 추월했다.
 3미터, 2미터, 1미터, 마침내……. 골인!
 “헉헉헉헉!”
 “헥헥헥헥!”
 선욱과 영감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 뻗었다.
 약수터에서 물을 뜨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분 지호 할아버지 아냐?”
 “그러게. 왜 저러시지?”
 “어머! 옆에 있는 청년 좀 봐. 입에서 피를 흘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시추에이션 아냐?”
 한 아주머니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가 전화를 걸기 일보 직전에 선욱이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회복은 빠른 모양이다.
 선욱이 노인을 내려다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영감님, 내가 이겼군요. 하아! 하아!”
 영감이 눈을 부릅떴다.
 호로자식, 사가지 없는 놈, 아래위도 없냐는 등등의 말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영감은 숨을 쉬기에도 벅찼다.
 선욱이 소매로 입을 쓱 닦더니 약수터로 걸어갔다.
 줄을 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분분히 길을 터 주었고, 선욱은 그 사이를 지나갔다.
 벌컥벌컥!
 약수를 마음껏 마시자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다.
 선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널찍한 공간이 있었고, 사람들이 베트민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곳에는 헬스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사람들의 눈이 많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몸을 단련하는 건 사람들이 봐도 상관없을 테니.’
 선욱은 곧바로 헬스 기구들이 설치된 곳으로 갔다. 엉성하기는 하지만 아령이나 벤치프레스 등 기본적인 몸을 만들기 위한 기구들은 다 준비되어 있었다.
 몇몇 중년 아저씨들이 그곳에서 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하는 것 같았지만, 선욱이 보기에는 대충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고개를 돌려 보니 조금 전에 빨리 산에 오르는 경쟁을 펼쳤던 노인이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너는 아래위도 없느냐?”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른에게 양보를 해야지! 끝까지 이겨야겠더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요.”
 “크흠! 고얀 녀석! 한데……너는 누구냐?”
 “강선욱이라고 합니다. 효명 아파트에 삽니다.”
 “효명 아파트라고? 흠. 나와 같은 아파트군. 그래, 여기서 운동을 하려고?”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있다가 나와서 몸이 많이 허약합니다.”
 “저런! 젊은 나이에 왜 병원에……?”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사고라고?”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 그럼 네가 109동에 사는 강씨 집안의 자식이냐?”
 “예. 109동에 삽니다.”
 “허! 크게 다쳐서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소문이 돌던데, 그래도 다행이구나.”
 선욱은 아파트 단지의 소문이 무섭다고 내심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그래. 뺑소니범은 잡았느냐?”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하긴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쯧쯧쯧,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은 꼭 잡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할 텐데……. 그럼 열심히 운동해라. 빨리 건강을 회복해야지. 크험!”
 노인은 뒷짐을 지고 걸어갔다.
 선욱은 다시 헬스 기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비어 있는 벤치프레스가 보여 그곳으로 갔다.
 선욱은 벤치프레스에 누워 역기를 들어 보았다. 가장 가벼운 것이라 그런지 지금 선욱이 지닌 힘으로도 쉽게 들렸다.
 선욱은 역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 처음 수련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이런 헬스 기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조건 뛰고 또 뛰어서 하체 근력을 기르고 심폐기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무거운 물건들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면서 근력을 높였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서서 담력과 평행 감각을 키웠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는 다양한 운동기구들이 발달되어 있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근육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구들이었다.
 선욱은 팔이 끊어질 듯 아플 때까지 역기를 반복해서 든 후, 벤치프레스에서 일어났다.
 “휴우!”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온몸이 물먹은 솜마냥 나른했다.
 “다시 뛰어야겠군.”
 원래 몸이 탈진할 정도로 힘이 빠진 상태에서 한 번 더 움직이는 것만큼 운동 효과가 확실한 것은 없다.
 문제는 정신력이다. 강한 정신력으로 신체를 끊임없이 한계로 몰고 간다면, 강한 근육과 튼튼한 몸은 짧은 시간에 키워 낼 수 있다.
 선욱은 헬스 기구들을 이용해 운동을 하다가 주변을 걷거나 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2시간가량이 지나자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선욱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헬스 기구장 한구석에 대자로 뻗었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선욱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선욱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도대체 인간이기는 한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막말로 목숨 걸고 운동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선욱은 그야말로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약수터의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선욱의 뒤에서 수군거렸다.
 “저 청년은 도대체 누구야?”
 “아까 지호 할아버지가 그러던데 109동에 사는 강씨 집안의 아들이래. 얼마 전에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가 나서 다 죽어 간다고 하던 그 학생이야.”
 “세상에! 그래도 회복했나 보네? 다행이야.”
 선욱은 그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갔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선욱아. 어딜 갔다……. 헉! 서, 선욱아! 도대체 뭘 하고 왔기에 옷이 그래? 그리고 입술은 왜 부어 있어?”
 “조금 넘어졌습니다.”
 “세상에! 그러게 조심을 하지……. 어서 병원에 가자.”
 아들이 사경을 헤맸던 사실이 아직도 마음에 남았는지, 선욱이 조금 다쳤어도 어머니는 병원 이야기부터 꺼낸다.
 “괜찮습니다.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선욱아…….”
 어머니가 선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프기 전과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항상 ‘네네’하며 말 잘 듣던 귀여운 아들은 어디 가고,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의 선욱이 왠지 듬직하고 믿음이 갔다.
 “그래. 알았다. 일단 쉬어라.”
 선욱은 방으로 들어가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이른 새벽.
 선욱은 눈을 떴다. 온몸이 찌뿌듯하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마치 근육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창밖을 보니 동이 트기 직전인 듯 어슴푸레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0월 중순의 가을이다. 운동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문득 침대 이 층을 보니 비어 있다. 동생이 들어와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서 나간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 녀석은 아침 일찍 나간 모양이군.’
 선욱은 곧바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아파트를 나섰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휴우! 그래도 아침 공기는 나쁘지 않군.”
 원래 새벽에는 정기가 가장 맑고 강하다. 그래서 도인들도 새벽 수련을 중히 여긴다.
 선욱은 어제 갔던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아줌마, 아저씨들 몇몇이 물통을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온몸이 삐걱거렸다.
 뭉친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심장은 터질 듯 벌렁거린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거무스름한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다.
 선욱은 황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등산객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선욱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선욱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산에 올랐다.
 헉헉헉!
 ‘그래도 어제보단 조금 낫군. 부지런히 수련한다면 차차 나아지겠지.’
 선욱은 숨을 가라앉힌 후, 약수를 마셨다.
 그때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아래에 샌드백이 걸려 있다. 그리고 지금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주먹이나 다리로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선욱의 동생 선민이었다.
 공부에 별 취미가 없는 녀석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웬일로 학교에 갔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산에 올라와 운동을 하고 있다.
 퍽! 퍼억!
 샌드백을 치는 소리가 제법 둔중하다.
 선욱은 그 소리만 듣고도 선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한심하군.’
 사실 선민은 형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선민은 어려서부터 운동신경이 남달리 좋았고, 해 보지 않은 운동이 없다.
 검도, 합기도, 태권도 등……. 그가 지닌 단증의 단수를 합치면 10단이 넘어간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이종격투기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에는 사범이 프로로 전향해도 되겠다며 대회에 나가라고 권유까지 할 정도다.
 고2가 되어서는 3학년 선배 주먹들을 모두 제압했고, 인근 세 개의 고등학교 주먹들까지 평정했다. 이른바 일산 일대의 통이 된 것이다.
 선민이 그렇게 되기까지 부모님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부모님들은 학교 교장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선민이 일으킨 문제를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고3이 되어서는 좀 변했다. 이미 일산을 평정한 그에게 덤비는 학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소나무’라는 불량 음성 서클의 장 자리까지 맡고 있으니 그가 직접 주먹을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선욱이 잠시 선민을 쳐다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저 녀석은 남자다운 데라도 있으니…….’
 선욱은 동생에게 다가갔다.
 “어라! 형!”
 “언제 왔느냐?”
 “조금 전에 왔어. 그런데 형 진짜 여기서 운동하는구나. 어제 엄마가 그러던데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다고.”
 “빨리 회복하려면 별수 있어?”
 “하하하, 운동이라고는 거의 담을 쌓고 살더니……. 그래도 다행이야. 형이 회복해서 이렇게 운동도 하니 말이야.”
 “녀석. 그건 그렇고 지금 뭐 하는 거냐?”
 “뭐 하긴? 보면 몰라? 샌드백 치잖아.”
 “다시 한 번 쳐 봐라.”
 “뭐?”
 “주먹 쓰는 법이 틀렸다.”
 선민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이 지금 내게 주먹 쓰는 법에 대해 말하는 거야?”
 선욱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선민은 한동안 선욱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하! 우리 형님께서 언제부터 주먹을 아셨대? 우하하하.”
 “그만해라.”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기이하게 위엄이 느껴진다.
 선민이 흠칫하더니 형을 쳐다보았다.
 많이 달라졌다. 병원에서 보았을 때 느낀 거지만 지금의 형은 과거의 그가 절대 아니다.
 “그러니까……형이 지금 내게 주먹 쓰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선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 지금 장난치는 거지?”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선민은 선욱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좋아…….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보자구.”
 선민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라이트 훅을 샌드백에 꽂아 넣었다.
 퍽!
 샌드백이 옆으로 휘어지듯 튀어 나가더니 한동안 휘청거렸다.
 선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형을 쳐다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형 때문이다.
 “틀렸다. 그런 주먹으로는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한다.”
 “뭐? 파, 파리?”
 “잘 봐라.”
 선욱이 샌드백 앞에 서서는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선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형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으로 말이다.
 선욱은 주먹을 자연스럽게 말아 쥐더니 몸을 살짝 좌측으로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먹이 샌드백의 옆구리에 적중했다.
 빵!
 마치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가 샌드백에서 울려 퍼졌다.
 오른쪽 발가락에서 시작된 힘이 무릎과 허리, 그리고 어깨, 손목을 거치며 몇 배로 증폭되어 폭발한 것이다.
 선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샌드백이라면 좀 친다는 그다. 아니, 좀 치는 정도가 아니라 프로 격투기 선수급과 비교해도 거의 떨어지지 않는 실력이다.
 하지만 그런 선민이라도 방금 울린 것과 같은 소리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거기에는 힘이 아니라 완벽한 기술이 녹아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 저런 소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프로 격투기 선수들밖에 없는데……어떻게 형이……?’
 그는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는다고 했다. 보통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주먹을 휘둘렀는데, 때마침 완벽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뜻밖의 강펀치를 구사할 때가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펀치를 마음먹은 대로 발휘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할 수 있어?”
 “믿지 못하는구나. 좋아. 너니까 특별히 한 번 더 보여 주지. 주먹보다는 내 몸을 살펴라. 특히 발목과 허리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선민은 조금 떨어져서 눈을 크게 뜨고는 선욱을 노려보았다.
 선욱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빠앙!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위력의 주먹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샌드백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선민은 입을 딱 벌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완벽한 자세! 퍼펙트한 회전……. 이럴 수가…….”
 선민이 선욱의 얼굴 앞에 코를 디밀었다.
 “잘 봤어?”
 “워낙 순간적이라…….”
 “발끝에서 시작된 힘이 근육과 관절을 타고 올라오면서 위력이 증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마나가……. 음. 그건 그만두지. 어쨌든 중요한 건 회전에서 얻어지는 힘이다. 그것만 명심해.”
 사범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물론 선민도 그런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알고 있어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완벽한 방법과 기술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선민이 굳은 표정으로 선욱에게 물었다.
 “도대체 언제 그런 걸 배웠어? 하루 이틀 연습한 수준이 아닌데?”
 “선민아, 이 형도 알고 보면 주먹 좀 썼다.”
 “뭐? 형이 주먹을 썼다고?”
 “몰래 연습도 많이 했어. 그냥 그렇게 알아.”
 선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선욱이 직접 샌드백 치는 모습을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아는 형은 주먹의 ‘주’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어. 오죽하면 중학생 때 초등학생에게 맞고 와서…….”
 “조용히 해라!”
 선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다. 선욱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을 정도로 수치를 느꼈다.
 ‘으으! 한심한 그놈 때문에 내 꼴이 말이 아니군.’
 선민이 피식 웃더니 다시 말했다.
 “그랬던 사람이 병원에 다녀와서는 프로 격투가들이나 날릴 법한 주먹을 쓴다? 형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어?”
 선욱은 선민이 자꾸 자신을 이상하게 보자 괜한 짓을 했나 싶었다.
 선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선욱에게 물었다.
 “형, 한 가지 물어보자. 내가 일곱 살 때 장난감 자동차 타고 많이 놀았지. 그런데 동네 형이 그 자동차를 망가뜨리지 않았어? 그 형 이름이 뭔지 알아?”
 선욱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자 선민이 말한 내용이 기억났다.
 “장철진!”
 “어! 정말 아네?”
 “네가 그 녀석과 심하게 싸우다가 머리가 터지기까지 했는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어?”
 “난 형이……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마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쓸데없는 생각은 마라. 나는 강선욱이고 네 형이다.”
 “그건 인정하지. 휴! 어쨌든 다행이다. 그리고 형이 이렇게 변한 거 마음에 들어. 사실 지금 생각으로는 형을 그렇게 만든 폭주족 새끼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야.”
 순간, 선욱의 머리에 폭주족이 떠올랐다.
 - 병신 새끼!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 규철아! 뭐 해? 튀어!
 머리를 심하게 다쳐 길바닥에 쓰러진 강선욱의 귀에 들린 마지막 소리가 이것이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강선욱의 기억을 자꾸 떠올리고 또 그의 삶에 깊이 들어가자 좀 변한 모양이다.
 ‘규철이라…….’
 선욱은 폭주족의 이름과 얼굴뿐만 아니라 오토바이의 모양까지 알고 있다. 마음먹고 찾는다면 찾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단 몸을 만든 후에 처리해야겠군.’
 한 번 당했던 상대에게 되갚아 주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적어도 지욘프리드는 전생에서 그렇게 살았다.
 선민이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주먹 괜찮아?”
 “물론 괜찮…….”
 선욱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다가 말을 흐렸다. 오른쪽 손목이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다.
 선욱의 몸 상태는 지욘프리드의 완벽한 기술이 들어간 주먹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약했다.
 선욱이 서둘러 손목을 손으로 가렸다.
 “뭐야? 부었잖아!”
 “괜찮아. 조금 삔 모양이다.”
 “조금 삐긴! 어서 손 줘 봐.”
 선민은 억지로 선욱의 손을 잡고 살폈다.
 “이런. 손목에 충격이 많이 갔나 보네. 빨리 찜질을 해야 해.”
 선민은 자신이 가져온 수건을 약수에 적셔 왔다. 그러고는 선욱의 부운 손목을 감쌌다.
 “괜찮다니까!”
 “안 괜찮다니까!”
 “이 녀석이…….”
 “왜? 고마워서 뽀뽀라도 해 주려고?”
 선욱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동생의 눈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헛기침을 하면서 어색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선민이 피식 웃었다.
 한동안 선욱의 손을 잡고 찜질을 하고 있던 선민이 벌떡 일어났다.
 “어! 벌써 왔네.”
 선민이 갑자기 소리치더니 약수터로 걸어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눈에 번쩍 띌 만한 예쁜 여자가 추리닝 차림으로 나타났다. 얼굴이 앳된 것으로 보아 여고생이 분명하다.
 선민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민경아!”
 선민이 전에 없이 밝은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3장 두 동생들
 
 선욱은 민경이라 불린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몸매도 잘 빠졌고, 키도 클 뿐 아니라 얼굴도 무척 예쁘다. 어디 가더라도 당장 퀸카로 불릴 만하다.
 하지만 민경이라 불린 여학생은 선민의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으응……. 왔어?”
 그녀는 억지로 인사를 한 후, 팔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선민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그녀는 대충 대답을 하면서 체조에 열중했다. 선민과 대화를 나누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선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선민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은 민경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꽤 큰 모양이다.
 선욱이 그런 동생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쯧, 힘만 생기면 여자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텐데…….”
 지욘프리드는 젊어서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무뚝뚝한 성격에 검이라는 한 길만 파는 외골수였던 그가 무슨 매력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가 엑스퍼트를 거쳐 대륙에서 몇 명 안 된다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자 여자들이 뒤에 줄을 섰다. 아니, 여자들뿐만 아니다.
 평민 출신의 기사라 하여 평소 그를 하찮게 여기던 귀족들조차 서로 모셔 가려고 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결국 황제의 딸과 가정을 꾸리기는 했지만, 지욘프리드는 여자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싫어했다. 여자는 돈과 권력에 울고 웃는 지극히 속물적인 동물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선민이 선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 이쪽으로 와 봐.”
 선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짓을…….’
 동생이 좋아하는 여학생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선욱은 마지못해 동생에게 다가갔다.
 “형, 내 친구 민경이야. 민경아, 우리 형이다. 인사해.”
 그녀가 선욱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하민경입니다.”
 선욱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법 예의를 갖추는 것을 보니 버르장머리가 없는 계집아이는 아니군.’
 선욱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선욱이다.”
 “예? 아, 예…….”
 의외로 차가운 목소리에 민경은 다소 놀란 듯했다.
 “형, 여기 더 있다 갈 거야?”
 “그래.”
 “그럼, 나 먼저 내려갈게.”
 선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등을 돌려 헬스 기구장으로 걸어갔다.
 민경이 그런 선욱의 등을 쳐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으로부터, 특히 젊은 나이대의 남자들로부터 이처럼 무시당한 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 사람……정말 네 형이니?”
 “그래. 사실, 얼마 전에 머리를 심하게 다쳤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았는데, 그 후에는 성격이 좀 쿨하게 변했어.”
 “뭐? 쿨해?”
 민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선민은 민경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몰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민경이 새치름한 표정을 짓더니 등을 홱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경아!”
 민경의 뒤를 쫓아가는 선민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선욱이 혀를 찼다.
 “쯧쯧쯧, 애는 애로구나.”
 그렇다.
 선민이 아무리 일산을 평정한 고교 주먹 짱이라지만 아직 애는 애였다.
 선욱이 벤치프레스로 걸어갔다.
 선욱은 이날도 한계에 이를 때까지 몸을 단련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에서는 주로 방에 앉아 마나 수련을 했다. 마나 수련을 할 때에는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방문을 꼭 잠갔다.
 선욱은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나가 몸을 단련하고, 집에서는 마나 수련을 했다. 마나 수련은 거의 효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몸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보름 만에, 사고를 당하기 전의 상태까지 돌아온 것이다.
 그동안 선욱은 선민과 함께 산에 올랐다.
 선민이 약수터에 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민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선욱은 선민에게 틈틈이 주먹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선민보다 훨씬 허약한 그가 가르친다는 사실이 좀 우스웠지만 선민은 그의 말을 잘 따랐고, 덕분에 요즘 그의 주먹은 예전에 비해 훨씬 강하고 빨라졌다.
 오늘도 새벽부터 약수터에 나온 두 사람은 샌드백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빵! 빵!
 선민이 두드리는 샌드백에서 맑고 경쾌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때, 형?”
 선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선욱을 쳐다보았다.
 선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멀었다.”
 “쳇!”
 “하체의 힘이 상체로 전달되는 과정이 약해. 그래 가지고는…….”
 “파리 한 마리 잡기 힘들다?”
 “잘 아네.”
 “귀에 못이 박혔으니까. 그런데…….”
 선민이 약수터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선욱이 말했다.
 “오늘은 좀 늦군.”
 “응? 으응! 그러게.”
 “그 애가 그렇게 좋아?”
 “애라니! 제수씨가 될 사람에게…….”
 “정말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물론이지. 민경이는 내 여자가 될 거야.”
 “훗! 고등학교 졸업도 못 한 녀석이……. 정말 그 애를 얻고 싶으면 힘을 가져.”
 “뭐?”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선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가 어떻게 그렇게 변했지? 그건 쿨한 것과 거리가 좀 먼데…….”
 “여자라는 동물은 원래 그렇다. 힘과 권력에 약하지.”
 “그건 여자뿐만이 아닐 텐데?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럴걸?”
 “여자들이 특히 더하다.”
 “큭큭큭! 이럴 때 보면 오히려 옛날의 형이 그립기도 하고……. 아! 저기 오는군. 한데…….”
 “꼬리가 달렸군.”
 민경이 달고 온 꼬리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키도 크고 몸매가 늘씬할 뿐 아니라 얼굴도 상당히 예뻤다. 민경이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다면 그녀는 만개한 꽃이었다.
 선민이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민경아! 왔니?”
 민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래.”
 “한데, 누구……시니?”
 “몰라도…….”
 민경의 말이 끝나기 전에 꼬리가 말했다.
 “안녕? 난 민경이 이모야. 네가 바로 강선민이라는 학생이구나?”
 “아! 안녕하세요, 이모?”
 “호호호, 벌써 이모래. 붙임성이 좋네?”
 “그런데 어떻게 저에 대해서 아시죠?”
 “민경이가 가끔…….”
 “이모!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어머! 얘는? 왜 갑자기 소릴 지르고 난리야?”
 “쓸데없는 소릴 하려니까 그렇지. 빨리 물 떠서 내려가.”
 “오랜만에 공기 좋은 곳에 왔는데 좀 쉬다 가자. 아! 좋다!”
 이모가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때, 선민이 선욱을 향해 뛰어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기회가 왔어!”
 “무슨 기회?”
 “그거 몰라? 여자를 얻으려면 가족을 공략하라! 연애 수칙 삼 위가 바로 그거야.”
 “그래서?”
 “이모라잖아! 형이 좀 도와줘. 분위기 잘 좀 만들어 달란 말이야.”
 “쓸데없는 짓을…….”
 “형! 동생이 하는 부탁인데 정말 그렇게 나올 거야?”
 선욱이 쓴 입맛을 다시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어떻게 해 줄까?”
 “너무 쿨하게 나가지 말고, 제발 정중하게 대해 줘.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말이야.”
 “좋아. 그 정도는 해 주지.”
 “고마워, 형.”
 선민이 형을 이끌고 민경과 이모에게 다가갔다.
 선욱이 다가오자 민경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욱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학생은 누구지?”
 선민이 대답했다.
 “제 형입니다. 대학생이에요. 형, 민경이 이모야. 인사드려.”
 선욱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강선욱입니다.”
 “어머 반가워요. 난 민경의 이모 신수지라고 해요.”
 그녀가 선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선욱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허리를 숙여 손등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모두들 벙찐 표정으로 선욱을 쳐다보았다.
 “혀, 형! 그게 도대체…….”
 “세상에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을 다 합쳐도 당신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대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고, 목소리는 깊은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보다 그윽하군요.”
 민경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였고, 선민은 ‘망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정작 이모의 표정은 달랐다. 마치 꿈꾸는 소녀라도 된 것처럼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이다.
 “이, 이모. 괜찮아?”
 “응? 아……. 민경아, 내 어릴 적 소원이 뭐였는지 아니?”
 “뭐였는데?”
 “멋진 기사가 내게 다가와 영화에서처럼 사랑을 고백하는 거.”
 “이모, 그래서 지금 기분이 괜찮다는 뜻?”
 “당근이쥐! 호호호. 세상에! 잠시이긴 했지만 정말 내가 과거의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고마워요. 강선욱이라고 했나요?”
 “예.”
 “혹시……연극영화과 다니거나 아니면 연기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아닙…….”
 선욱이 대답하려는 순간 선민이 재빨리 나섰다.
 “정확히 맞히셨습니다. 형은 연기자 되는 게 꿈이에요. 그래서 요즘 항상 사극 대본 연습을 하시죠.”
 “아! 그렇구나. 한데, 나이가…….”
 “스물둘이에요. 저보다 세 살 많아요.”
 “그래? 나하고 크게 차이는 안 나네?”
 민경이 흠칫하더니 ‘무슨 소리를?’이라는 표정으로 이모를 쳐다보았다.
 이모가 그런 민경에게 강한 눈짓을 한 번 주었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민경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전 이만.”
 선욱의 인사에 민경과 이모가 동시에 말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어머! 벌써 가려고 그래요?”
 “운동을 좀 해야 해서요.”
 민경의 이모 신수지가 물었다.
 “매일 아침마다 여기서 운동하시나 봐요?”
 “그렇습니다.”
 “그럼 어서 가 보세요.”
 “그럼, 다음에 뵙죠.”
 선욱은 곧바로 헬스 기구장으로 가더니 벤치프레스를 하기 시작했다.
 “이모, 우리도 그만 내려가.”
 “응? 벌써?”
 “이모 출근해야 하잖아.”
 “아차! 출근! 어서 내려가자!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선민이 재빨리 나서서 이모가 들고 있는 물통을 빼앗듯 들었다. 그러고는 약수를 가득 담았다.
 “가시죠.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머. 형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주 바른 집안의 형제들이네?”
 “하하하, 저희 집 가훈이 그겁니다. 예의 바르게 살자. 하하하.”
 “호호호, 그러니?”
 “네,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선민이 재빨리 앞장서서 내려갔다.
 그의 뒤를 따라 민경과 이모가 걸음을 옮겼다.
 민경이 이모에게 입을 삐죽였다.
 “쳇! 이모는 어디다 정신을 빼앗겨서…….”
 “내가 무슨 정신을 빼앗겼다고 그래?”
 “아까 선민이 형이라는 사람에게 말이야.”
 “내가 언제!”
 “다 봤어.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너! 내 나이 말하면 죽을 줄 알아!”
 “어머! 무서워 죽겠네? 사랑을 위해 조카도 때려죽이시겠다! 뭐, 그런 시추에이션이야?”
 “사랑은 무슨. 그냥 귀여워서 그렇지. 그런데 넌 왜 그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는 말투니?”
 “응? 내, 내가 언제?”
 “얘는! 가만, 너 혹시…….”
 “혹시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거 알아?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거.”
 “말도 안 돼!”
 이모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괜히 형제 사이에 분란 일으키지 말고 일찌감치 마음 정해.”
 “이모!”
 “내가 보기엔 선민이라는 쟤도 괜찮아 보이는데? 자고로 여자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에게 가는 게 제일 팔자 좋은 거야.”
 “고3 조카에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긴 어딜 가?”
 “호호호, 귀여운 것들. 너희들 보면 이 이모 학창 시절이 생각나서 좋다. 호호호.”
 “이모는 참!”
 “자! 씩씩하고 힘차게 하루를 시작해 보자구! 으쌰!”
 이모가 유쾌한 표정으로 만세를 부르더니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
 
 선영은 오늘도 수업을 마친 후 학교에서 나왔다. 원래는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자습을 해야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부모님의 부탁으로 특별히 야쟈에서 제외되었다.
 선영이 찾아간 곳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대성 매니지먼트라는 연기 학원이었다.
 연기 학원에서 5시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노래와 연기 연습을 한 후, 그녀가 학원을 나오는 건 밤 10시에 가까웠다.
 근처에 버스와 지하철이 있어 밤길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선영처럼 눈에 확 띄는 외모를 한 여학생에게 안전한 곳은 드물었다.
 그녀가 연기 학원에서 나오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영아, 수고했다.”
 “응, 엄마.”
 선영이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는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165센티미터에 달하는 선영의 키는 어머니보다 조금 컸고, 몸매가 예뻐 뒤에서 보면 다 큰 아가씨로 보였다.
 두 사람은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선영이 혼자 밤길 다니는 게 위험하다며 항상 그녀가 학원을 마칠 시간이면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선영아, 힘드니?”
 “응? 아냐…….”
 “너 연기 학원에 다니는 거 정말 좋아했잖아. 그런데 요즘은 왜 힘이 없어?”
 “내, 내가 그래 보여?”
 “그래. 이 엄마는 척 보기만 하면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다 안단다.”
 “피!”
 “무슨 힘든 일 있니?”
 “아냐. 없어…….”
 “그런데 요즘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
 “그냥 좀 힘들어서 그래. 특히 연기 연습이 그래. 세 시간 동안 감정을 끌어 올려 연기를 하고 나면 완전히 파김치가 된다구.”
 “그래?”
 “응. 그리고 춤도 힘들어.”
 “흐이구! 불쌍한 내 새끼. 힘들어서 어쩌누.”
 어머니가 선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학원비 대기 힘들지?”
 “힘들긴. 이 엄마가 선영이 학원비 정도 못 대 줄까?”
 “그래도 비싸잖아. 한 달에 이백만 원이나 되니…….”
 “아빠가 열심히 일하시지 않니.”
 “응.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
 “사실 돈 들어갈 곳이라고는 별로 없어. 네 큰오빠는 스스로 등록금 벌어서 내지, 둘째 오빠는 공부와 담을 쌓았으니 학원비 들어갈 일도 없지…….”
 “그래도 미안해…….”
 “자꾸 그런 소리 할래? 유명한 가수에 연기자가 돼서 엄마 아빠 호강시켜 주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엄마, 나 약속 지킬게. 반드시 성공해서 엄마 아빠 호강시켜 줄 거야.”
 “선영아, 엄마 아빠는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그냥 네가 잘돼서 행복하게만 살면 돼.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건 그거밖에 없어.”
 “엄마…….”
 선영이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머니는 그런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집으로 돌아온 선영은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고는 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아!”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선영아, 거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 돼. 등을 바로 세우고 손은 이렇게…….
 선영이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처음 학원에서 연기 수업을 받을 때에는 알지 못했다.
 선영을 담당하는 권명찬이라는 매니저 겸 연기 강사는 너무 자상하고 친절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던 것이다.
 뒤에서 허리를 두 손으로 받치거나 손을 만지는 건 예사고, 호흡을 가르쳐 주겠다면 배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 그의 손길은 은근슬쩍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연기를 가르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영은 권 매니저에게 사심이 있다고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때문이다.
 선영은 미칠 것 같았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집에 이야기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고, 더 이상 연기 학원에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경찰에 갈 수도 없다.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선영의 고민은 깊어 갈 수밖에 없었다.
 
 ***
 
 “선욱아, 오늘은 네가 선영이를 좀 데려오겠니? 엄마는 오늘 저녁에 동창회에 좀 다녀와야 하는데 늦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점심시간에 어머니가 말했다.
 선욱은 마나 수련을 해야 했지만, 모처럼 하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녀오죠.”
 “그래. 부탁한다.”
 선욱은 식사 후, 다시 산으로 올라가 몸을 단련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이미 동창회에 가고 없었다.
 동생 선민은 뭘 하는지 저녁 늦게 들어왔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선욱은 집 안에서 조용히 마나 수련을 한 후, 시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갔다.
 
 ***
 
 대성 매니지먼트.
 선영은 오늘따라 집요하게 자신의 몸을 만지는 권 매니저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니까! 양팔을 부드럽게 올리고 가슴을 살짝 내밀면서 대사를 치란 말이야. 그래야 여성적인 매력과 우아함이 확 올라간다고.”
 “예…….”
 선영은 원래 자신감이 많은 아이였다. 항상 당당했고, 목소리나 연기에 힘이 있었다. 하지만 권 매니저의 느끼한 손길을 느낀 이후부터는 많이 위축되었다. 때문에 목소리도, 연기도 계속 기어 들어가는 형편이다.
 이번에도 손을 올리며 가슴을 펴라는 매니저의 요구에도 쉽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어휴, 선영아. 왜 그래? 좀 더 과감해지란 말이야. 예전에는 그렇지 않던데 요즘 왜 그래?”
 그게 다 당신 때문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켰다.
 “안 되겠다. 오늘 나하고 어딜 좀 가자.”
 “네? 이 시간에 어딜요?”
 “넌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어. 그러니 나하고 클럽에 가서 춤을 추자. 사람들 틈에서 음악에 온몸을 맡기고 그냥 즐겨 보란 말이야.”
 “전 아직 고1인데요?”
 “조금만 꾸미면 누가 널 고등학생으로 보겠어?”
 “하지만…….”
 “선영아, 너 연기하기 싫니?”
 “아뇨…….”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래야 큰다.”
 “네…….”
 선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해?”
 “예? 마치고 가지 않나요?”
 “그땐 너무 늦어. 지금 나가야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갈 거 아냐?”
 “하, 하지만 엄마가 오시기로 했는데…….”
 “오늘은 그냥 들어가시라고 해. 내가 집까지 태워 줄 테니.”
 선영이 주먹을 지그시 거머쥐었다.
 이 느끼한 매니저와 함께 클럽에 가서 춤을 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바퀴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뭐 해? 빨리 준비하지 않고?”
 선영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딴 게 뭐가 중요해? 원래 연예인이 되려면 모든 걸 버리라는 말도 있는데. 내가 나중에 성공하려면 이 정도의 어려움은 이겨 내야 해.’
 선영은 아직 어리다. 그러니 단순하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이 결심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스스로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좋아요. 지금 준비할게요.”
 선영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권 매니저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술 한 잔 먹이면 정신 차리지 못하겠지? 그때 가서……. 흐흐흐.”
 마침내 선영이 나왔다. 자신이 준비해 둔 의상들 중 가장 섹시해 보이는 옷이었다. 깜찍하고 예쁜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렸다. 게다가 화장도 살짝 했다. 앳된 모습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디 가서 대학생이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권 매니저는 그런 선영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고것 참! 정말 예쁘단 말이야. 내가 맡은 애들 중에서 최고야. 잘 길들였다가 나중에 연예계로 보내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겠군. 흐흐흐.’
 권 매니저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선영이나 그녀의 가족이 들었다면 기절하고도 남을 끔찍한 계획이었다.
 선영은 권 매니저와 함께 곧바로 학원을 나섰다.
 
 ***
 
 선욱이 학원에 도착한 건 9시 50분이었다.
 하지만 10시가 지나도 동생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군. 거의 시간을 맞춰 나온다고 들었는데…….’
 선욱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마나를 수련하면 감각이 발달한다. 특히 사람들이 말하는 육감이라는 능력이 생기는데, 과거 지욘프리드도 상당히 뛰어난 육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욱의 육체를 차지한 지금의 그도 미약하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육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육감이 불안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뭔가 문제가 생겼어.’
 선욱은 곧바로 학원으로 들어갔다.
 몇몇 학생들이 대본을 외우며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고,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방 안에서 노래 연습에 열중인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죠?”
 매니저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선욱에게 물었다.
 “동생을 데리러 왔습니다.”
 “동생의 이름이……?”
 “강선영입니다.”
 “아! 선영이 오빠 되시는군요. 그런데 선영이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리쳤다.
 “선영이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있어?”
 모두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어라! 아무도 모르네? 그런데 얘가 어디 갔지?”
 선욱은 불안감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끼고 예리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선영이 또래의 여학생 한 명이 한참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선욱을 쳐다보았다.
 선욱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학생, 선영이 알지?”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여학생이 우물거렸다.
 “그, 그게…….”
 “선영이 친군가?”
 “네…….”
 “선영이는 어디 갔지?”
 그녀가 잠시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잠시 나오세요.”
 그녀는 선욱을 데리고 복도로 나가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여기서 선영이랑 가장 친한 이현서라고 해요. 오빠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래? 반갑다. 그런데 우리 선영이는 어디 갔어?”
 “선영이는 매니저님이랑 조금 전에 나갔어요.”
 “나갔다고? 어디로?”
 “매니저님이 현장 경험을 시킨다고 클럽으로…….”
 “뭐? 클럽이라고?”
 “네.”
 “고1짜리 여학생을 데리고 클럽이라니…….”
 “…….”
 “어느 클럽이냐?”
 “선영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서 말해라.”
 “실은, 뉴에이지 클럽이라고…….”
 “위치는?”
 선욱은 그녀에게 클럽의 위치를 듣자마자 곧바로 학원을 뛰어나갔다.
 그런 선욱의 모습을 보며 현서가 중얼거렸다.
 “선영이에게 별일은 없겠지? 그래야 할 텐데…….”
 
 ***
 
 쿵작쿵작!
 빰빠라빠빠빠!
 요란한 음악 소리가 가득하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공간, 현란한 사이키 조명과 어우러져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있다.
 일산에서 가장 유명하고 물 좋다는 뉴에이지 클럽이다.
 선영과 권 매니저가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신나게 춤을 추며 즐겼다.
 선영이 이런 클럽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맥주는 자신이나 친구 생일날 몰래 마셔 보기는 했지만, 이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자유롭게 병째 들이키기는 처음이다.
 선영은 신이 났다.
 그동안 했던 모든 걱정과 시름들이 모조리 날아가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이런 즐거움도 모르고 산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지금 선영의 머리에 들어 있는 생각은 이게 전부다.
 선영은 전문적으로 춤을 배웠다. 몸매도 뛰어나고 얼굴도 아름답다. 게다가 오늘은 작정을 하고 섹시한 옷을 입고 나왔기에, 그녀의 모습은 클럽에서 단연 튀었다.
 몇몇 젊은 사내들이 선영에게 슬금슬금 다가왔지만, 권 매니저가 바짝 붙어서 눈치를 주자 말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다.
 선영은 뉴에이지 클럽의 무대를 완전히 압도하며 신나는 춤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춤추고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
 선영은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피곤해서 눈이 절로 감긴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권 매니저가 그런 선영의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선영아! 왜 그래?”
 “매, 매니저님. 저 어지러워요.”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자, 작은 걸로 두 병밖에 안 마셨는데……. 저 그 정도로 취하고 그러지 않거든요?”
 “그래도 많이 취했잖아. 내가 집에 데려다 줄까?”
 “어, 엄마. 엄마가 오기로 했는데…….”
 “어머니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자, 나가자.”
 선영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쓰러졌다.
 “아! 내가 왜 이러지? 매니저님. 저 도저히……. 으음!”
 선영이 자리에 축 늘어졌다.
 “선영아! 왜 그래? 정신 차려.”
 “으음…….”
 권 매니저는 선영이 완전히 뻗어 버린 것을 알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드디어 약 기운이 돌았구나. 그럼 이제 데려가서 비디오만 찍어 놓으면 넌 내 거다. 흐흐흐.’
 권 매니저가 선영을 들쳐 업다시피 부축했다. 그러고는 클럽을 나갔다.
 주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묘한 표정으로 권 매니저와 선영을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 어딜 가서 뭘 할지 다 안다는 듯이 말이다.
 권 매니저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가 자신의 승용차 뒷좌석에 선영을 실은 후 그곳을 떠났다.
 부르릉!
 엔진 소리와 함께 권 매니저의 차량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텔에 도착했다.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운 권 매니저는 우선 트렁크에서 가방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뒷좌석의 선영을 향해 다가갔다.
 “후후후, 귀여운 녀석. 넌 오늘로서 내 거다.”
 권 매니저의 사악한 눈빛이 선영의 얼굴에 쏟아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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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잼있네~
2015.09.08 17:30
술마루    
재밌다고? 지욘프리드의 영혼만 들어와서 선욱을 도와주던가 해야지, 설정 실패다.
2018.01.21 12:23
네발개발    
마지막으로 힘을 냈는데 그게 통했다? 말이 되는 소리야지. 그게 또 이상한 유리병을 깨? 진짜,...유리병들고 싸우냐. 그냥 넘어갈래도 작가님 위해 한마디 합니다. 처음부터 이런거 보면 더이 상 보기 힘들어요. 좀 말좀 되는 얘기 합시다. 쫌. 설정 놀음이라도 설정 안에서는 먼가 합리적인 설명이 되야지.
2018.01.24 15:35
니기리    
형제를 두고 근친연애사도 아니고, 조카 이모가 한남자를 두고서 ,, 자동차면 그냥 차지 뭔 차에에 한국 남자에 로망인지 노망인지 참 지이랄스럽고 보는 나 자시니 쪽 팔려서 접습니다 ㅡ
2018.07.03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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