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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러너 1권(상)

2015.02.05 조회 2,697 추천 34


 제1장 태양 폭풍
 
 
 
 
 
 점심을 먹은 민수는 근무하는 마트 옥상에 올라갔다.
 철조망 너머 세상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우뚝 서 있었다.
 화려하고 멋진 인생이 펼쳐진 곳.
 자신은 몰라도 후일 여동생만은 저곳의 일원으로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힘이 필요했다.
 민수는 빈 종이컵을 위로 던졌다.
 쓰레기통이 있는 방향이 아닌 허공에다.
 ‘멈춰!’
 그 순간,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던 종이컵이 압핀으로 허공에 고정한 듯 우뚝 멈추었다.
 마법 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종이컵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온 세상이 멈추어 버렸다.
 마트 옥상으로 올라오던 도시의 소음, 쇠를 긁어 대며 높이 날아가는 까마귀, 담뱃불을 끄는 사람들 역시.
 세상은 마치 비디오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른 듯했다.
 민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1, 2, 3…… 15…… 60!’
 땡.
 정지했던 모든 것들이 60초가 지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음이 올라오고 까마귀가 울어대며 빌딩 숲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던 애연가들이 하나둘씩 옥상을 떠난다.
 세상을 정지시킨 순간 민수는 이 세계의 왕이 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고작 60초! 1분이 한계다.
 사람들에게 1분이란 시간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민수에게 정지한 세상에서의 1분은 남다른 것이었다.
 ‘초능력이 실재하고, 그 능력자가 바로 나라는 걸 나연이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민수는 시간 정지 능력이 생긴 원인이라 추측되는 1년 전 그 당시를 회상했다.
 외국계 모 의약품 연구소에서 국내 임상 실험자를 모집하는 인터넷 광고를 보게 됐다.
 당시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던 반 백수였던 민수에게 일당 30만 원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일주일간의 임상 실험으로 그는 210만 원이란 큰돈을 벌었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판명을 받은 민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그는 극심한 두통에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임상 실험을 한 제약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처방을 받으려고 했지만, 당시엔 지금의 직장인 마트에 수습 직원으로 채용된 상태라 시간이 없었다.
 하루라도 빠지면 잘릴 것 같아서 그는 이를 악물며 두통을 참았다.
 끔찍했던 두통은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일에 매달렸던 민수는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밤 퇴근하다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다.
 그때 민수는 자신에게 초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
 ‘……혹시 그 실험 때문이 아닐까?’
 
 * * *
 
 “일어나라. 셋까지 센다.”
 민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돌돌 말고 웅크린 여동생 나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잃은 남매는 천애 고아였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넓은 천지에 오직 둘뿐이다.
 남매의 부모님 모두 고아였기에 이들에겐 그 흔한 일가친척도 없었다.
 한창 혈기 왕성하고 예민한 고 2의 여름.
 민수는 어린 여동생을 돌봐야 하는 비운의 소년 가장이 되었다.
 “제발 5분만! 딱, 5분만. 응, 오빠.”
 이불 번데기 속에서 들려오는 잠기 가득한 여동생의 애원.
 하지만 민수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부모 없는 것들’이란 세상의 차가운 눈초리와 평가 그리고 무시.
 자존심이 강한 민수에게 이보다 더 큰 치욕과 욕설은 없었다.
 때문에 그는 부모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은 물론 여동생 나연의 일상까지 스파르타식으로 밀어붙였다.
 “하나, 둘…….”
 “으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이불을 찢을 듯 튀어나오는 나연의 모습.
 머리는 소대급 까치가 둥지를 틀 만큼 엉망이었고, 눈은 밤새 무엇을 했는지 핏발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너는 누구냐?”
 늘 단정하고 과묵한 민수의 일과는 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하다. 그보다 세 살 어린 자유분방한 나연과 민수는 그래서 이것저것 부딪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남매 모두 인물과 몸매는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우월한 유전자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연을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태산고교 3대 여신 중 하나인 김나연.
 그녀를 흠모하는 남학생들이 지금의 이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여신으로 추앙할지 의문이 든다.
 ‘녀석들, 눈이 삐었지. 휴우.’
 예쁜 여동생을 둔 오빠에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더욱이 그 오빠가 가장인 경우 필요 이상의 제약을 가하게 된다.
 나연에게 민수가 바로 그런 오빠였다.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랬지. 남녀칠세부동석도 몰라!”
 “정신이 미성숙한 너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빨리 씻고 밥 먹어.”
 “그놈의 밥, 밥, 밥! 전생에 굶어 죽은 귀신이 씐 거야! 만날 밥 타령이야! 아침 안 먹는다고 안 죽어!”
 꿈틀.
 여동생의 반항이 민수의 심사를 건드렸다.
 일장 연설을 준비하는 오빠의 분위기에 놀라 후다닥 일어선 나연은 곧장 화장실로 내달렸다.
 아주 놀라운 속도로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은 민수.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연은 언제 짜증을 부렸느냐는 듯 헤실헤실 웃으며 애교 모드로 돌아섰다.
 “나 잠결인 거 알지? 사람이 잠에 취하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잖아, 헤헤.”
 “난 내 여동생을 부모님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그런 망나니로 가르친 기억이 없다.”
 “또, 또 그 표정!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오빠는 이제 스무 살이야. 누가 오빠를 보고 스무 살 꽃띠 청년으로 보겠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설교는 그만해! 나 주번이라서 늦으면 안 된단 말이야!”
 민수의 한쪽 입꼬리가 샐쭉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다.
 “급할 때면 주번을 찾는구나.”
 “지, 진짜야. 나 이번에 주번 맞아!”
 덥석.
 자신의 말이 안 통할 때 자주 이용하는 나연의 필살기!
 민수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늘어지는 귀여운 강아지 같은 여동생의 애교에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알았으니까 이거 놓고 가서 씻어. 두말하지 않게. 알았어?”
 아침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
 이때가 아니면 민수는 여동생의 얼굴을 볼 시간도 없었다.
 가난했던 부모님은 작은 연립주택 한 채와 약간의 돈만 남매에게 남겨 놓았다.
 먹고 살기 위해,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민수는 새벽마다 신문과 우유를 돌리고 학교를 끝마치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민수의 고교 시절 대부분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사였다.
 오빠가 한발 물러설 기미가 보이자 나연은 부리나케 화장실로 내뺐다.
 쾅!
 “아! 오빠, 휴지 떨어졌어. 휴지 갖다 줘!”
 화장실 문틈으로 나온 여동생의 손에 휴지를 올려놓은 민수의 잔소리가 나왔다.
 “화장실 휴지는 네 담당이야.”
 “깜빡했어. 미안해-!”
 탁.
 페인트칠이 벗겨진 초라한 화장실 문,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여동생의 낡은 운동화.
 한창 멋을 부리고 부모님께 애교 부릴 사춘기 여고생에게 이곳은 어떻게 비칠까? 이런 생각이 들자 오빠로서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이번 휴일에 애 운동화 한 켤레 사고, 문짝도 좀 손봐야겠군.’
 자신의 낡고 오래된 운동화보다 여동생의 운동화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오빠의 씁쓸한 마음이다.
 
 * * *
 
 “뭐야? 또 계란말이야?”
 민수네 식탁은 단골인 계란찜, 계란말이, 계란 프라이가 번갈아서 아침상을 차지했다.
 마트에서 근무하는 민수는 일반 고객들보다 저렴하게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계란 역시 식품 매장 아줌마와 친해진 덕분에 일대일 행사가로 사곤 했다.
 빠듯한 월급에서 생활비를 빼면 거의 모두 여동생의 대학 입학금을 위해 적금을 붓는 민수에게 있어 계란은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이를 매일 먹는 나연은 늘 불퉁한 얼굴로 위장에서 병아리들이 뛰어논다며 투덜거렸다.
 “반찬 투정은 유딩(유치원생)도 안 한다.”
 “유딩이 아니니깐 하지.”
 도도한 표정에 샐쭉거리는 모습 이면에 담겨 있는 여동생의 슬픔을 알고 있는 민수다.
 “너 알바 그만둬.”
 “싫어. 내 용돈은 내가 벌어서 쓸 거야. 그러니까 오빠나 신문 배달 그만둬. 젊은 사람이 말이야, 인생을 즐길 줄도 알아야지. 투잡이 뭐야, 투잡이!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해서 대학에나 가. 개나 소나 다 가는 대학이잖아. 안 나오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아. 오빠, 여친도 없잖아. 그게 다 오빠가 빡빡하게 살아서 그래. 사람이 좀 느슨한 맛도 있어야 여자가 붙지.”
 오빠의 미래를 걱정하는 여동생의 마음이 잔소리를 가장해 쏟아져 나왔다.
 “그런 거 필요 없다. 공부는 나중에 해도 돼.”
 “그 나중이 언제야? 지금이라도 일 하나는 줄여서 공부해.”
 “너나 잘해.”
 “여기서 어떻게 더 잘해? 나 전교 10등이야. 설렁설렁해도 말이지.”
 나연의 말에 민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운동신경이 탁월하다면 여동생은 공부 머리가 비상했다.
 그녀의 말처럼 설렁설렁해도 전교 10위권 밖으로 밀린 적이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밥만 퍼먹는 오빠를 본 나연은 낮게 한숨 쉬며 반찬을 내밀었다.
 “맨밥이 맛있어? 이것도 먹어.”
 “챙겨 주는 거냐, 이 오빠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민수의 얼굴엔 장난기가 다분했다.
 낡고 오래된 연립이지만 남매에게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럼, 못난 오빠 내가 챙기지 누가 챙겨!”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좀 보여 봐라. 내가 많은 걸 바라냐? 그냥 제시간에 재깍재깍 일어나라. 그게 날 챙기는 거야.”
 “이 미모를 지키려면 충분한 수면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야. 미녀는 잠꾸러기란 말도 몰라? 봐봐,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 보이지? 이게 다 오빠가 내 수면을 방해해서 생긴 거야.”
 여동생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가 싶어 민수는 그녀의 얼굴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진지한 오빠의 시선에 나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농담이야, 농담!”
 “나도 장난으로 본 거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알아먹음 되지. 그만 떠들고 밥 먹어. 학교 늦겠다. 그리고 내 누차 말하는데,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먼저 먹는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해. 알았어?”
 나름 근엄한 표정으로 내린 오빠의 훈계에 나연은 새 주둥이처럼 입술만 삐쭉거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먼저 총 맞는 세상이야. 사람이 요령이 있어야지, 요령이.”
 민수는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나연은 우쭐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참! 저번에 이상한 놈이 명함 준 거 버렸지?”
 나연이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책가방을 무의식적으로 흘끔거렸다.
 이런 일엔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민수였다.
 그는 곧장 일어나 여동생의 책가방을 뒤졌다.
 “뭐야! 왜 숙녀의 가방을 함부로 뒤지는 거야!”
 “나에겐 네가 숙녀 아니거든, 꼬맹이지.”
 “이건 개인 프라이버시라고!”
 나연의 표정은 불안감으로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긴장한 여동생의 표정을 슬쩍 쳐다본 민수는 인상을 확 구겼다.
 ‘이 녀석, 안 버린 거야?’
 얼마 전 여동생은 연예 기획사 매니저에게 픽업됐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세상일이 실력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뒤를 받쳐 주는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민수는 여동생에게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줄 수 없는 고졸 사회 초년생에 불과했다. 집에서나 가장이지 밖에 나가면 밑바닥 인생이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지금은 약하지만 이 초능력을 좀 더 키우면 녀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어!’
 스윽.
 민수의 손에 금테가 둘린 명함 한 장이 잡혀 나왔다.
 사나워진 오빠의 표정과 명함을 본 나연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목을 움츠렸다.
 “나연이 너!”
 “으아아아아아-! 학교 늦었다. 오빠, 나중에 봐!”
 후다다닥, 쾅!
 명함을 구겨 버린 민수는 그것을 버리려다 멈칫했다.
 ‘알바 하는 데 이 사람이 세 번이나 찾아왔다고 했지.’
 이대로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민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휴일은 바쁘겠군.”
 
 [하늘기획사 과장 박태일]
 
 이를 두 눈에 아로새긴 민수의 눈이 참으로 매섭게 반짝거린다.
 
 * * *
 
 민수는 명함에 있는 하늘기획사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휴일을 이런 일에 써야 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여동생에게 닥칠 불행을 막는 일이다.
 연예 기획사를 사칭한 사기꾼들이 심심치 않게 뉴스에 나오곤 했다. 또한 연예인 성 접대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민수는 여동생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를 찾아오는 매니저를 만나서 더 이상 동생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경고할 생각이었다.
 버스의 라디오에선 우려할 수준의 태양 폭풍이 지구를 강타할 예정이니 조심하란 방송이 연신 나오고 있었다.
 민수를 비롯한 승객들 대부분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최근 세 달 사이 태양 폭풍이 일곱 차례나 불었다.
 그때마다 방송은 이를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피해 사례엔 일반인들이 동요할 수준의 것들이 없었다.
 목적지에 내린 민수는 주변 상인들에게 하늘기획사의 위치를 물어물어 겨우 찾아냈다.
 ‘엘리베이터도 없나?’
 기획사는 허름한 오피스 건물 4층 맨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민수는 오만상을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호수를 확인한 민수는 그 아래 작은 간판을 볼 수 있었다.
 “냄새가 나는군.”
 민수는 다짜고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무실엔 30대 초반의 여직원 하나가 전화통을 붙잡고 수다를 떨고 있다가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전화를 끊은 여자는 경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사무실을 이리저리 살피는 민수의 행동에 여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 책상 두 개가 붙어 있고, 밤색 소파와 책장이 보였다. 우측으로 사장실이 있고 그 옆 벽면엔 대문짝만 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TV에서 보았던 남녀 연예인들이다.
 저들이 이곳 소속 연예인이라면 사무실의 허름함은 설명되지 않는다.
 민수는 하늘기획사가 연예 기획사를 사칭하는 유령 회사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봐요, 학생. 무슨 일이냐고 물었잖아.”
 여직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그제야 몸을 돌린 민수는 송곳 같은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 연예 기획사 맞습니까?”
 “그건 왜 묻죠?”
 여직원은 뒤가 켕기는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하시죠.”
 “입구에 하늘기획사라는 간판 보지 못했나요?”
 민수는 여동생에게 압수한 명함을 여직원 앞에 내밀었다.
 던지고 싶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이 사람, 여기 근무하죠?”
 “박 과장님이 픽업했나요? 남자애를 픽업할 분이 아닌데.”
 여직원은 민수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만 픽업한다?’
 더욱더 의심이 갔다.
 “여기 있단 말이군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여동생에게 역겨운 마수를 뻗친다면 그가 누구건 다 박살 내 버리리라.
 민수의 두 눈빛이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학창 시절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던 민수의 눈빛을 감당하기에 여직원의 배짱은 그리 크지 못했다.
 움찔한 여직원의 눈길이 아래로 향할 때 사장실 푯말이 붙어 있는 문이 열리더니 야한 차림의 젊은 여자와 덩치가 곰만 한 배불뚝이 중년 남자가 걸어 나왔다.
 민수를 본 중년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스 리, 저 녀석 뭐야?”
 “사장님, 박 과장님의 명함을 갖고 온 사람이에요.”
 “박 과장이? 녀석이 왜 저딴 놈을……. 박 과장한테 연락해봐.”
 중년인은 자신의 말이 듣기에 따라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말을 바꾸었다.
 민수는 사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이 사장인 것 같은데, 이딴 유령 회사로 젊은 여자 꼬드기는 짓거리 좀 하지 마라.”
 “뭐, 뭐야? 이 어린놈의 새끼가!”
 중년의 사내가 민수의 멱살을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때 민수가 들어온 출입구에서 30대 중반의 남자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민수의 멱살을 잡으려던 사장은 그 두 사람을 보며 버럭 했다.
 “박 과장, 저놈은 누구야? 왜 저딴 자식이 사무실에 찾아오게 만든 거야!”
 “네? 형……. 흠! 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녀석이 누군데 그러십니까? 전 모르는 녀석인데요.”
 민수로 인해 사무실 분위기가 흉흉하게 돌아가자 사장실에서 나온 여자와 박태일을 따라온 소녀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도 최근 연예 기획사를 사칭한 유령 회사가 판을 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따라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기회를 놓칠까 싶어서였다.
 한데 민수로 인해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 기회가 아닌 사기꾼의 마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두 여자는 다소 우락부락한 사장과 박태일의 눈치를 살피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덩치가 큰 박태일이 입구를 막아서더니 재빨리 문을 잠갔다.
 여자들은 크게 겁을 집어먹곤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들의 얼굴은 어느새 사색이 되었다.
 “무, 문 열어 주세요!”
 “저 갈래요. 아까 한 얘기는 없던 걸로 해요.”
 여자들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저 문을 잠그지 않았을 것이다.
 민수는 입가에 조소를 띠며 두 사기꾼을 쏘아보았다.
 그의 태도에 박태일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어린놈의 자식이! 눈깔 안 깔아!”
 사실 하늘기획사는 사장 일환과 태일이 사기를 치기 위해 만든 유령 연예 기획사였다.
 이들 모두 뒷골목 출신으로, 연예인병에 걸린 여자들에게 돈을 뜯거나 그녀들을 겁탈한 뒤 이를 사진에 담아 신고를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가끔 신고하는 여자들이 생기면 깡패들을 동원해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을 협박하고 납치하는 위험한 짓도 서슴없이 자행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너희 같은 새끼한텐 깔 눈깔 없어.”
 연예인병에 걸려 무턱대고 사무실로 찾아온 두 여자는 겁에 질려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좁은 사무실에 갇혀 버린 여자들이 의지할 데라곤 이제 민수밖에 없었다.
 태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가을 단풍으로 물든 산처럼 변했다.
 “처맞아야 정신 차릴 새끼네.”
 태일이 어슬렁거리며 민수를 향해 걸어갔다.
 와이셔츠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린 그에게선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는 민수를 한주먹 거리라고 생각했다.
 휙!
 아무런 경고도 없이 태일의 주먹이 민수의 얼굴을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여자들이 연방 비명을 질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여자들은 민수가 태일에게 박살 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무실 사장과 여직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관객의 입장에서 태일과 민수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을 자주 접했다는 증거다.
 민수는 상체를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사무실이 좁아서 스텝을 크게 밟았다간 사무실 집기에 부딪쳐 중심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상대가 그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고 등치도 컸기에 붙잡혔다간 불리해질 게 뻔했다.
 태일의 주먹이 민수의 관자놀이 근처를 스치고 쭉 뻗어 나갔다.
 민수는 허리와 상체의 힘을 주먹에 실어 태일의 겨드랑이 아래를 냅다 후려쳤다.
 태일의 상체가 비틀거리자 민수는 손바닥으로 녀석의 귀를 때렸다.
 짜악!
 태일이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거리자 민수는 그의 뒤로 돌아가 발꿈치로 오금을 찍어버렸다.
 쿵.
 단단한 바닥에 무릎을 세게 찍은 태일의 얼굴은 고통으로 크게 일그러졌다.
 민수는 사내의 머리칼을 거침없이 움켜잡은 뒤 인정사정없이 놈의 뒤통수에 무릎을 박아 버렸다.
 실로 많이 해 본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커억!”
 묵직한 신음을 내지른 태일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
 털썩.
 건장한 체구의 태일을 순식간에 제압해버린 민수는 사나운 표정으로 사장을 노려보았다.
 사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 이 새끼. 너 누구야! 어디서 보냈어?”
 민수는 사장을 무시한 채 동질감에 딱 붙어 있는 두 여자를 힐끗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두 여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경찰에 신고해.”
 민수가 여자들에게 말하는 그 틈으로 노리고 사장이 달려들었다.
 매우 가까운 거리라 피할 시간이 없었다.
 놈과 한데 엉켜 넘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민수다.
 ‘멈춰!’
 공중에 몸을 띄운 상태로 사장의 몸이 딱 멈추었다. 아니, 세상이 정지했다.
 민수는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1년 전, 이 능력을 얻었을 땐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초능력자란 소설과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존재지 현실일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초능력이 그에게 생겼을 때 환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지만 당시 이 능력의 유지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유지 시간은 불과 1초!
 1년이 지난 지금은 꾸준한 반복 훈련 덕분인지 60초까지 세상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민수는 몸을 옆으로 세운 뒤 시간 정지를 풀었다.
 “억! 뭐, 어이쿠!”
 털썩.
 코앞에 있던 민수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사장은 크게 당황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민수를 붙잡으려 몸을 날렸던 사장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민수는 일어나려는 사장의 옆구리를 여러 차례 가격했다.
 퍽퍽퍽퍽!
 “그, 그…… 그만……. 허억, 허억.”
 사정없는 민수의 발길질에 사장은 눈물마저 글썽이며 애원했다.
 “신고 안 하고 뭐해!”
 숨결이 조금 거칠어진 민수는 멍하니 서 있는 두 여자에게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여자는 핸드폰을 꺼낸다며 부산을 떨었다.
 이를 본 사무실 여직원이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달아났다.
 ‘잡을까?’
 여직원을 따라간다면 못 잡을 건 없지만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오면 지갑을 두고 몸만 빠져나간 여직원을 잡는 것도 시간문제다.
 더 이상 그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여동생에게 접근했던 저놈이 다시 올 리는 없을 테니.
 “시, 신고했어요.”
 야한 차림새의 여자가 말하며 민수를 보았다.
 그녀는 좀 전 사장실에서 나왔던 여자다.
 민수는 두 여자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본 뒤 사무실에서 끈을 찾아내 기절한 태일과 옆구리를 움켜쥔 채 헐떡거리는 사장을 한데 묶었다.
 사장이 반항하긴 했지만 몇 번의 주먹질이 가해지자 얌전해졌다.
 “이만한 게 다행인 줄 알아. 내가 돌아버렸으면 너희들은 오늘 인생 끝장났어.”
 이놈들이 여동생 나연을 조금이라도 해코지했다면 결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박당한 사장으로선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 * *
 
 두 사기꾼을 경찰에 넘긴 민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차량 내 아날로그시계의 시침이 일곱 시 사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졸고 있는 회사원, 수다 떠는 여학생들, 노약자가 다가오자 잠자는 시늉을 하는 사람과 여자의 몸을 더듬는 변태 아저씨들까지.
 변태의 손길에 괴로워하는 젊은 여자가 그의 눈에 띄었다.
 이를 본 건 민수 말고도 여럿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와줄까?’
 3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지만 만원인 지하철에선 상당히 먼 거리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수에겐 이 모든 걸 뛰어넘을 힘이 있었다.
 ‘멈춰!’
 민수는 시간 정지 능력을 수시로 수련했다. 이것이 후일 자신과 여동생을 안락하게 해줄 삶의 밑천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범죄? 잡히면 죄인이고 안 잡히면 무죄다.
 그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멈추었다.
 사소한 행동을 하던 승객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내달리던 지하철도 멈추고, 방송 멘트도 멈춘다. 아날로그시계의 초침 역시.
 그 고요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느낌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민수의 시선이 변태의 머리 위쪽 허공에 고정됐다.
 그의 몸이 본래의 자리에서 사라지고 눈길이 고정된 허공에 나타났다.
 공간 도약 능력!
 민수는 자신이 멈춘 세상에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퍽퍽퍽퍽퍽.
 민수는 손바닥으로 변태의 얼굴을 다섯 차례 가격했다. 그러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태연하게 시커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이쿠!”
 그 순간, 변태가 얼굴을 부여잡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주위에 있던 승객들은 변태의 갑작스러운 발광에 광견병에 걸린 개 새끼를 피하듯 일제히 달아났다.
 협소한 공간에 갑작스러운 공간이 생겼다.
 변태의 발광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다들 황당함과 두려움을 드러냈다.
 몇 년 전, 지하철 방화범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끔찍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일을 기억한 승객 중 일부가 변태를 지하철 방화범으로 오인했다.
 혈기 넘치는 승객들이 변태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일부 승객들의 상상과 맞물린 다급한 목소리에 주변으로 공포가 확산됐다.
 여자들의 비명과 남자들의 욕설, 변태를 빨리 잡으라며 소리치는 악다구니.
 피식.
 누구도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하는 의협심을 발휘한 민수는 변태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는 남자 승객들을 일별한 뒤 눈을 내리감았다.
 그때였다.
 “꺄아아악!”
 “뭐, 뭐야?”
 차량을 밝히던 전등이 깜빡거리더니 어느 순간 일제히 꺼졌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콩나물시루 같던 만원 객실은 그 어둠에 억눌려 신음조차 지르지 못했다.
 폭발 직전의 짧고 묵직한 침묵!
 침묵이 지나가자 온갖 비명과 악다구니가 곳곳에서 터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비명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도 공포에 감염시키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이 괴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시간을 정지시킨 뒤 변태의 얼굴을 후려쳤던 민수는 안정적인 자세로 두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이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질주하는 지하철.
 어둠에 질린 사람들의 파랗게 질린 날카로운 비명!
 공포와 혼란이 창궐한 차량은 어둠 속에서 굉음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그리고…….
 파아아아앗!
 빛의 폭발!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 모두를 집어삼켰다.
 
 
 
 
 제2장 녹색 지옥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꺾이고 찢어지고 터져나간 폐허의 공터.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남녀노소가 죽은 듯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피 흘리는 자, 사지가 기이하게 꺾여 있는 자,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철판이 박힌 끔찍한 시체, 머리통을 잃어버리고 몸뚱이만 있는 고깃덩어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체까지.
 공터는 다양한 모습의 시체와 의식 없는 부상자로 가득했다.
 이들의 주변엔 온갖 파편들이 난무했다.
 숲을 강타한, 굉음을 동반한 거대하고 눈부신 섬광과 함께 나타난 사람들.
 놀란 숲의 생물들은 이미 멀찍이 달아나고 없었다. 그래서 주변엔 새 한 마리,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적막한 가운데 흘러나오는 고통에 젖은 신음이라 그런지 섬뜩한 느낌이다.
 “끄응.”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한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남자의 얼굴은 절반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피 묻은 소매로 핏물이 고인 눈을 닦았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이 행위를 하고 있는 남자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힘에 겨웠다.
 남자의 얼굴은 삽시간에 피투성이로 변했지만, 이 남자는 이를 느끼지 못하는 듯 반복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온 세상이 붉다는 것과 극심한 두통이 남자를 좌절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사, 사곤가?”
 딱딱하고 거친 표면이 등으로 느껴졌다.
 남자는 자신이 기댄 것이 나무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여러 번의 심호흡 후 남자는 나무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처럼 가벼운 움직임에도 금세 체력이 소진되자 남자는 휴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행동하기보단 정신을 차리는 게 급선무였다.
 남자의 감각기관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남자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객실의 전등이 갑자기 점멸하다 꺼진 후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어마어마한 속도감을 느꼈다.
 이후, 동공을 찌르는 강렬한 백광을 인식한 뒤 의식을 잃었다.
 여기까지가 이 남자의 기억 전부였다.
 이를 근거로 남자는 추측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이 철로를 탈선했거나 혹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량과 부딪친 게 아닐까? 전자든 후자든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의식을 차린 것과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지금의 이 움직임 자체가 하늘의 가호라고 생각했다. 아니, 여동생을 홀로 남기지 말라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절실한 당부처럼 느껴졌다.
 ‘바보같이 멍하니 있다가 다치다니. 능력을 발휘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실로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과연 자신의 능력을 제때 사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남자는 민수였다.
 ‘그런데…… 세상이 왜 이리 붉지?’
 민수는 자신의 피가 망막에 달라붙어 있음을 몰랐다.
 그는 ‘지하도에 붉은색 전등이 켜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민수의 귀에 사람들의 신음이 흐릿한 이명처럼 들렸다.
 시간이 좀 흐르자 소리는 보다 정확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힘이 쭉 빠진 가냘픈 목소리, 까마귀 천 마리가 귀 옆에서 일제히 괴성을 내지르는 듯한 크기의 비명까지.
 민수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육중한 무게를 가진 지하철은 광속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섭게 질주했었다. 그런 속도로 달리던 지하철이 추돌 사고를 냈다면 민수를 포함한 승객 전원이 현장에서 즉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로 볼 때 상당히 많은 생존자가 주변에 흩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팔다리가 부러진 게 아닐까? 그나저나 나연이가 알면 난리치겠군.’
 사람들이 도움을 호소했지만 민수는 제 한 몸 가누기도 버거웠다.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어차피 구조대가 올 것이다.
 시 외곽의 으슥한 곳도 아닌 도심을 가르는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 사고다. 늦장을 부렸다간 여론의 호된 질책을 맞게 될 테니 꽁지에 불붙은 소 떼처럼 구조대가 몰려올 터였다.
 ‘이런 사고를 당하면 보상금을 줄까? 제법 줄 거 같긴 한데, 흠.’
 붉고 흐릿한 세상을 보는 것이 피곤해진 민수는 뜨나 감으나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다.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이 나무임을 알았다면 과연 이러고 있을지 의문이다.
 ‘일단 어디가 부러졌는지 확인해야겠군.’
 민수는 좀 전에 자신이 몸을 일으켰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발가락과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부러졌다면 이러한 작은 움직임도 극심한 고통이 될 것이다. 이를 감안한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을 통해 고통의 크기를 줄이려 했다.
 한데 발가락과 손가락을 움직여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는 게 거짓말처럼 지금은 욱신거리기만 했다.
 몸에 기력이 없는 건 충격이 몸에 쌓여 방출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보상비 받기는 글렀나? 흠, 몸뚱이가 튼튼해도 이럴 땐 좀 그렇군.’
 늘 쫓기듯 살아온 빡빡한 인생이다. 한 번쯤 여유를 갖고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하철 사고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민수는 아쉬움을 느꼈다.
 “끄응. 도, 도와줘요.”
 “여기요, 여기……. 제발.”
 사람들의 신음은 도움을 호소하는 뚜렷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민수는 이들의 호소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와 여동생이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냉대와 질시, 사고 보상금을 뜯어먹으려는 간악한 자들만 주변에 수두룩했다. 그 바람에 부모님의 목숨값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일을 당했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피 맛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후, 민수는 사람을 믿거나 돕지 않았다.
 그에게 도시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뒤덮인 치열한 야생이었다.
 ‘언젠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지옥에 떨어뜨려 주마.’
 부모님의 목숨 값을 갖고 장난친 놈들.
 격분하여 그들을 찾아가 한바탕 뒤집었다가 합의금 명목으로 다시 돈을 뜯겼다.
 법은 교활한 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인간의 간악함을 알아 버린 민수에게 인간이란 동물은 경계와 견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자신이 인간임에도 말이다.
 ‘흠흠. 숲 냄새가 나네. 후각이 잘못됐나?’
 싱그럽고 편안하며 활력을 채워 주는 냄새가 사방에서 났다.
 지하도에 대규모 숲을 조성한 뉴스를 봤던가? 자신의 후각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민수를 향해 다가왔다.
 “학생, 괜찮아?”
 쉰 목소리였지만 분명 여자였다.
 민수가 이에 반응할 사이도 없이 여자는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여전히 시야는 붉고 흐릿했다.
 낯선 냄새를 맡은 이후 조급하고 두려운 마음이 그의 내면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민수는 쪼르륵거리는 물소리를 들었다.
 여자는 축축하게 젖은 천으로 그의 눈을 닦아 주었다.
 ‘숲?’
 눈앞에 펼쳐진 환경에 민수는 경악했다.
 바닥에 긴 고랑을 만들고 커다란 바위에 대가리를 처박은 지하철이 기이한 각도로 위로, 옆으로 꺾여 있었다.
 객실마다 양 옆구리가 폭탄을 맞은 듯 흉하게 터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쓰러진 것은 이곳이 사고 현장이니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문제는 그가보고 있는 이곳 환경이다.
 “여, 여긴 어디지?”
 격앙된 감정이 민수의 갈라진 음성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에 깜짝 놀란 여자는 뒤로 물러났다가 이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와 같은 반응을 여러 차례 겪은 듯했다.
 “정신이 들어? 내가 보이니?”
 “여긴 어디야?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오지랖 넓은 이 여자에게 소리칠 입장은 분명 아니다.
 그가 보는 게 현실이라면, 이 여자도 같은 처지였다.
 민수는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겠어. 깨어나 보니까 이 모양이네.”
 민수의 반응에 여자는 차분한 태도로 응대하며 그의 상태를 찬찬히 살폈다.
 친절을 베풀어 준 여자에게 화를 냈던 것이 생각난 민수는 미안해졌다.
 사람은 싫어하지만 은인과 원수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그는 막돼먹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습니다.”
 “아니, 괜찮아. 예의 바른 학생이네. 고등학생이니?”
 여자의 말에 민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회는 어려 보이면 무시당한다.
 동안이란 말이 누군가에겐 최상의 칭찬일지 모르나 민수에겐 욕이었다.
 “직장인입니다.”
 “아, 그래요? 죄송해요. 전 어려 보여서…….”
 말끝을 흐린 여자를 흘깃 쳐다본 민수는 입을 닫았다.
 요동치던 속내를 겨우 진정한 그는 울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눈앞의 것들은 모두 현실이다.
 이 느낌, 이 통증 그리고 눈앞의 여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수 냄새까지.
 ‘빌어먹을. 버스를 타고 갔어야 했는데.’
 여동생의 모습이 떠오른 민수가 인상을 와락 구기자 여자는 그가 아파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의약품도 없고, 도울 방법도 그녀에겐 없었다.
 민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부상자를 옮기고 돌보았다.
 죽은 자들은 일단 풀숲으로 옮겨서 모아 놓았다.
 삽이나 곡괭이 같은 도구가 없었기에 매장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거의 없다시피 한 의약품에 대한 걱정,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눌렀다.
 지인과 연인을 잃은 사람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그들의 크고 작은 울음만이 참사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민수는 그 소리에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있었다.
 부상자들을 돌보는 몇몇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 그를 욕하고 삿대질했다.
 어떤 남자는 주먹질까지 할 기세로 다가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안전핀이 제거된 폭탄 같은 상태였다.
 그때마다 민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젊은 여자가 나서서 흥분한 남자들을 만류했다.
 민수는 이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여동생 걱정뿐이었다.
 ‘나연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민수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여동생이었다.
 겉으로 꿋꿋하게 생활했지만 그것도 민수가 곁에 있었던 덕분이다.
 그 아이가 어려움에 처하면 누가 돕겠는가.
 그즈음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어둠이 몰려오자 생존자들의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모아 곳곳에 모닥불을 만들었다.
 야생동물이 공격할지 모른다는 어떤 남자의 말에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손에 쥐거나 옆에 놓아두는 자들도 있었다.
 중고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저희끼리 모여 속닥거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침울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있었기에 이들의 목소리는 집단에서 멀리 떨어진 민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들은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관을 이곳에 대입했다.
 기사, 마법사, 드래곤, 엘프, 드워프, 몬스터!
 공상의 산물을 마치 현실의 일처럼 떠드는 녀석들 중 두엇은 정신이 나갔는지 자신의 신체가 강화되었을 거라는 가정하에 무리하게 힘을 쓰다 허리를 삐끗했다.
 이계에선 고딩이 우대받고 존경받는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멍청한 놈들이다.
 민수는 자신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저놈들의 면상에 주먹을 쑤셔 박고 싶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터무니없는……! 가만, 만약 저 아이들의 말이 맞는다면? 마법이라……. 마법.’
 허구의 능력인 마법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힘을 빌려 지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은 이제 완전한 어둠이 깔렸다.
 지하철이 휘저은 너른 공터 곳곳에서 모닥불이 어둠과 싸웠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하늘 높이 올라간 흰 연기는 촘촘하게 박힌 별에 막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그러나 민수에게 이것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민수의 머릿속은 학생들이 주절대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생존과 귀환 문제로 복잡했다.
 낮에 친절을 베푼 여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그는 이를 듣질 못했다.
 “이봐요.”
 연이은 그녀의 부름에 민수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민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모든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인 그에게 이곳은 치열한 전쟁터로 비쳤다.
 민수와 달리 저 평범한 사람들과 이 여자의 운명은 희망보다 절망이 더 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저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초능력을 무기로 살아남아야 한다!’
 괜한 영웅심과 알량한 동정심은 발목을 잡는 족쇄일 뿐이다.
 ‘강한 놈만 살아남는다!’
 이러한 생각이 혼란한 그의 머릿속에 깊게 박혔다.
 여자는 민수가 굉장히 과묵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거 먹어 봐요.”
 반쯤 남은 과자 봉지를 내미는 여자였다.
 그녀의 친절이 민수는 몹시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론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관심이 괜히 신경 쓰였다.
 “……내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죠?”
 생존에 중점을 두기로 결심한 민수는 지금의 혼잡한 기분을 완전히 몰아냈다.
 침착한 그의 태도를 본 여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다고 하면 화낼 건가요?”
 농담조와 달리 여자의 목소리는 더덕더덕 달라붙은 불안감 때문에 아닌 척해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수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이상한 여자군요, 당신.”
 “난 당신이 더 이상한데요. 그러지 말고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흠, 말이 없네요. 원래 성격인가요?”
 민수는 나무에 머리를 기대며 입안에 맴도는 말을 그냥 툭 던졌다.
 “수다스럽군요.”
 “제가요?”
 “…….”
 침묵은 긍정이다.
 여자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불친절한 남자의 태도에도 여자는 발끈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 그래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다들 어두운 얘기만 하잖아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제겐 필요해요. 저 지금 정말 무섭거든요.”
 민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흘끔거렸다.
 자신의 어디가 밝고 긍정적인가? 대체 이 여자는 자신의 무엇을 보았기에 저런 말을 할까?
 궁금증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가 기댄 나무에 머리를 붙였다.
 “제가 밝은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뇨.”
 “장난해요?”
 민수는 그녀의 말장난에 놀아난 듯한 기분이 잠시 들었으나 표정을 보니 그럴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곁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숨결, 동시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체취를 맡게 된 민수는 이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그렇다고 나쁘거나 싫은 느낌은 아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미묘한 감흥이었다.
 당혹감을 느낀 민수에게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천만에요.”
 “……?”
 “어둠도 여러 개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어둠은 동트기 전의 것 같아요. 무척 어둡지만 반대로 곧 빛을 머금을 것 같은……. 제가 이상하죠?”
 민수는 모호한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조금은 퉁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이해하지 마세요.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 제 눈엔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서 주절대는 거니까. 내 이름은 소연이에요, 유소연. 당신은?”
 여자가 먼저 통성명을 해 온 경우가 처음이라 민수는 잠시 어색함을 느꼈다.
 “민수, 김민수입니다.”
 우아한 자태로 귀밑머리를 걷어 귀에 건 그녀가 피식거렸다.
 민수는 그녀의 미소가 몹시 아름답게 보였다.
 두근!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펌프질했다.
 ‘뭐하자는 거냐, 김민수. 정신 차려!’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소연을 밀어내기에는 그녀가 전해주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너무 달콤했다.
 그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길로 그녀를 눈에 담았다.
 TV 속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였다.
 남자라면 한번쯤 사귀고 싶은 청순가련형 미인.
 누군가 ‘당신의 이상형이 어찌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민수는 서슴없이 ‘이 여자요!’라고 말할 것 같았다.
 “민수 씨는 몇 살인가요?”
 “……스물.”
 대화를 이끌어 내는 묘한 힘을 가진 여자.
 민수는 그녀의 기이한 분위기에 빠르게 빨려 드는 자신의 모습에 내심 쓰게 웃었다.
 ‘이게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나 볼 수 있다는 운명적인 사랑이 아닐까?’라는 망상이 살짝 들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리네요. 난 스물두 살인데. 그런데 스무 살치곤 너무 어려 보이네요. 그보다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민수는 소연의 태도에 말없이 그녀가 준 과자를 먹었다.
 와삭. 와삭. 꿀꺽.
 그의 태도에 소연은 피식 웃었다.
 “목마르지 않아? 여기 물.”
 물병을 받아 든 민수는 자연스러운 그녀의 반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예쁜 여자가 저리 말하니 그리 싫지는 않았다. 사내새끼가 나이 많다고 ‘형님이라고 불러’ 따위로 말했다면 당장 주먹을 내질렀을 테지만.
 “기분 나쁘니?”
 “좋을 건 없죠.”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소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민수의 어감에서 그가 승낙했음을 느낀 소연이다.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 묻었네. 아이처럼 먹는구나.”
 “남자에게 그런 말 하는 거 실례일 텐데요.”
 “그런가? 그럼 미안.”
 사과의 의미인지 그녀는 민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민수는 여자의 손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하얗고 긴 그녀의 손을 바라보는 민수의 눈동자는 그래서 흔들렸다.
 “팔 떨어지겠다.”
 그녀의 귀여운 어조에 민수는 정신을 차렸다.
 이런 모습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속으로 외쳤지만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부상의 여파인가 싶기도 했다.
 벌컥벌컥.
 민수는 그녀가 준 생수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소연은 팔을 거두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곁에서 들리는 여인의 숨소리와, 풍기는 달콤한 향기는 민수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아까부터 남녀를 뚫어지게 주시하던 한 남자가 이들을 향해 걸어왔다.
 “소연 씨, 그 자식은 왜 챙겨 줍니까? 멀쩡한데도 사람의 도리조차 안 하는 놈이잖아요.”
 이 남자는 민수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던 남자들 중 하나였다.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보였다.
 남자는 꾸준히 운동을 했는지 몸이 상당히 좋았다.
 생존자 무리는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는 건장한 남자들과 몇몇 중년 남자들이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장내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을 터였다.
 민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독기로 똘똘 뭉친 살쾡이처럼 섬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철 씨, 말이 심하시네요. 몸에 난 상처보다 마음에 난 상처가 때론 더 견디기 힘든 법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다그치지 마세요.”
 “저놈만 힘든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들도 부상당한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유딩보다 못한 새끼를 왜 감싸는 겁니까?”
 스윽.
 고개를 위로 올린 민수의 눈빛에 불쾌감이 가득 차올랐다. 이를 본 유철이 벌컥 화를 냈다.
 “뭘 봐! 덤빌 생각 있으면 덤벼 보든가. 왜?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겁나냐? 앙!”
 “유철 씨, 그만 가세요. 가뜩이나 힘든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민수는 소연의 얼굴을 생각해서 유철에 대한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유철은 자신을 외면하는 민수의 태도에 더욱더 기분이 상했다.
 “소연 씨, 정말 이상하군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저 녀석의 행동이 잘못되었으니 연장자로서 따끔하게 훈계하는 것뿐입니다. 제 말이 심한 건 인정하겠습니다. 이 상황이 짜증 나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 녀석의 태도가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고 있지 않습니까!”
 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이쪽을 보았다.
 그중 몇몇 남자들이 다가왔다. 구호 활동을 통해 유철과 친해진 남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2명은 유철의 회사 동기와 후배였다.
 “저 꼴통이 뭐라고 했어요, 선배?”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저런 놈은 뭐 하러 신경 써. 신경 꺼라, 유철아.”
 발언권이 높은 자들이 민수를 꼴통으로 매도하자 이러한 분위기가 전체로 퍼졌다.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이제는 민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낯선 얼굴들에 박힌 혐오의 시선들.
 이를 받아내는 민수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그의 태도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멀어져 갔다.
 그때 모두를 긴장시키는 짐승의 울음이 장내에 날아들었다.
 아우우우우우! 컹컹!
 ‘동물의 왕국’에서나 들을 법한 생생한 늑대 소리에 사람들은 이곳이 위험한 숲이란 것을 새삼 자각했다.
 긴장한 남자들은 저마다 옆에 있던 무기를 움켜잡았다.
 무기는 하나같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소연도 짐승 소리엔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모닥불 쪽으로 가자, 민수야.”
 늑대나 다른 맹수가 나타나면 외곽에 있는 민수가 놈들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될 게 뻔했다.
 지금은 생존자들끼리 뭉쳐 있는 게 보다 안전하다.
 대형 참사임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은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다들 자잘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의 중상자는 20명에 불과했다.
 지하철의 몰골을 보면 이러한 생존율은 가히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수는 자신을 끝까지 챙기려는 소연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답답해진 소연의 재촉이 이어졌다.
 “불가에 있으면 짐승도 쉽게 덤비진 못할 거야.”
 나무에 올라가면 좋겠지만 이곳의 나무는 지나치게 굵고 또 너무 곧게 자라 있어 손과 발을 이용해서는 오르기 힘든 구조였다.
 지상에서 5미터를 한 번에 도약한다면 모르겠으나 이건 인간의 육체 능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자신은 제가 지켜요.”
 민수의 대답은 담담했다. 그의 표정 역시 잔잔한 호수의 수면을 연상시켰다.
 차분한 그의 모습에 소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재촉했다.
 “고집 피우지 마. 사람들이 많은 곳이 여기보다 안전해.”
 늑대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연의 얼굴은 점점 더 파리해졌다.
 민수는 그녀와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
 저 군중 틈에 끼어 있다간 도리어 압사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여자 하나면 지켜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민수는 소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움직일 때마다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진 지하철을 보면 로또를 한 100번 맞은 행운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고 보면 저 앞에 살아 있는 자들도 지독하게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러나 저들에게 없는 특별함이 민수에게는 있었다.
 1분의 시간 정시, 5분의 쿨타임.
 쿨타임 동안은 그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를 이용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다’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행동하기로 민수는 결정했다.
 문제는 눈앞의 소연이란 여자였다.
 그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소연의 걱정과 불안은 서서히 노여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모두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돼!”
 늑대 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해졌다.
 “제 자신은 제가 돌볼 테니 걱정 마세요.”
 민수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소연의 손에 힘이 풀렸다.
 “너…….”
 민수는 자신을 잡고 있는 소연의 손을 풀었다.
 소연은 사람들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사람들 틈에 섞이자 민수의 표정은 단단한 바위의 표면처럼 변했다.
 ‘멈춰!’
 세상의 모든 흐름이 그의 명령을 받고 정지됐다.
 민수는 그림처럼 존재하는 생존자 무리를 돌아본 후 높은 나뭇가지로 이동했다.
 
 * * *
 
 새까만 털을 가진 황소만 한 맹수가 사람들을 포위했다.
 크고 노란 짐승의 눈동자와 마주친 사람들은 심리적인 압박감에 옴짝달싹도 못했다.
 이들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전부였다.
 민수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늑대처럼 울던 짐승의 생김새와 덩치에 흠칫했다.
 ‘괴수가 따로 없구나!’
 숨어서 지켜보는 자신이 이리 떨리고 무서운데 놈들을 정면에서 마주 봐야 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더욱더 참담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의 눈길은 소연을 찾아 급히 움직였다.
 잔뜩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얼굴은 가련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민수를 대할 때의 차분함과 여유가 실종된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당신만은 죽게 하지 않겠어.’
 여럿은 몰라도 한두 명쯤은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복잡한 상념을 뒤로한 채 민수는 착잡한 눈길로 괴수 늑대 무리를 살폈다.
 짐승에게 잡아먹힐 사람들이 곧 나올 것 같았다.
 양심은 저들 괴수를 막아 주라고 했지만 한두 마리도 아닌 놈들을 다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놈들의 코앞에서 능력이 풀려 버린다면?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사람들을 사정없이 덮칠 것 같던 괴수 늑대들은 신중한 태도로 탐색을 먼저 했다.
 ‘나연아, 오빤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서 너를 꼭 지켜줄 거야. 그때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어!’
 홀로 남은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양심 따윈 백번이고 천번이고 팔아 치울 수 있었다.
 짐승의 눈길을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늑대보다 이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지만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는 이들로서는 이 상황이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생존자의 3분의 2가 여자와 아이들이다.
 건장한 청장년층은 불과 200명 남짓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등학생 남자애들이 90명이었다.
 몸은 한데 뭉쳐 있지만 저 결집은 마른 모래를 운 좋게 뭉쳐 놓은 것에 불과했다.
 짐승이 마음먹고 한 번 공격하는 것으로도 저들은 금세 흩어질 터였다.
 “불을 더 키워!”
 사람들이 서둘러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밀어 넣었다.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모닥불이 유일했다.
 그때 늑대 한 마리가 시체들을 모아 둔 곳을 발견했다.
 그놈이 소리 내자 늑대들이 놈 곁으로 모여들었다.
 늑대들은 보다 손쉬운 먹이인 시체를 먼저 선택했다.
 생존자들에겐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시체의 수만 해도 600구에 이른다. 쉰 마리의 늑대들이 포식하고도 넉넉하게 남을 숫자였다.
 그 밤, 사람들은 시체를 찢고 뜯어 먹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늑대들이 시체를 물고 사라질 때까지 밤새 지켜보아야만 했다.
 죽을 수 있다. 그것도 잔인한 수단에 의해서!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생존 본능이 양심을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민수가 예상한 이러한 행동은 바로 다음 날 일어났다.
 
 “부상자를 데리고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피로감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생존자 구호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청년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돌변해 있었다.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 이유가 있을까?
 없다.
 청년의 이러한 생각은 대다수의 남자들도 공감하고 있었다. 단지, 이전까지 이를 먼저 부각시키려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한데 지금 그 벽을 이 청년이 깨 버렸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분열의 기운이 빠르게 확산됐다.
 “맞아요. 어제 봤잖아요. 끔찍하게 생긴 늑대가 또 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애들 말이 맞을지 모릅니다. 이곳이 진짜 판타지 세계라면 모, 몬스터란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일은 빙산의 일각이란 생각 안 듭니까?”
 젊은 청년들은 청소년들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부상자들과 아이들을 버리자는 거요?”
 양심을 지키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 다 같이 죽자는 말입니까? 난 그럴 수 없어요!”
 부상자와 아이들의 문제를 두고 격렬한 설전이 오갔다.
 부상자들은 자신들의 생사 문제를 결정하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슬프게도 이들에겐 발언권이 없었다.
 고아가 된 아이들은 어른들의 흉흉한 분위기에 짓눌려 끝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가족이 있는 아이들은 그 가족에게 매달려 벌벌 떨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너무하지 않나요?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버림받는다는 것을 당신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원망하지 않을 수 있나요? 왜 서로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건가요. 모두 힘을 합쳐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생각을 왜 안 해요!”
 한 중년 여자가 절규했다.
 그녀에겐 네댓 살 먹은 어린 남매 둘이 붙어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집단에서 약자였다.
 비겁한 남자들의 말대로 상황이 결정지어진다면 그녀의 자식들은 버려져야 한다.
 지금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약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지지했다.
 장내는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씨발, 양심이고 나발이고 내 알 바 아니야. 어제 본 그 개새끼들한테 잡아먹힐 생각은 없어. 이봐, 우리 솔직해지자고. 모두 살고 싶잖아. 도움이 될 사람들끼리 뭉쳐 다니면 그만큼 생존율도 높아져. 내 생각을 욕할 사람 있으면 해봐! 내가 왜 남을 위해서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난 그렇게 못 해! 난 살고 싶어! 살고 싶단 말이야!”
 한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두 눈을 부라렸다.
 눈치를 보던 남자들 중 일부가 이 청년 말에 동조하며 집단에서 이탈했다.
 부상자를 돌보며 함께 이동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 입장에선 손해였다.
 금전적인 손실이라면 감수할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선택이 목숨과 직결되는 위기 상황이다.
 보호받지 않고서는 이 숲에서 견딜 수 없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 부상자들의 표정에 절망감이 가득 차올랐다.
 어떤 이는 자기들만 살겠다는 그들을 향해 욕하고 저주하기도 했다.
 “난 떠나겠어!”
 사람들의 이기심에 물꼬를 터 준 청년이 소리 질렀다. 그러자 이 청년의 생각에 동조하는 남자들이 패거리를 지었다.
 이 청년을 따르겠다는 남자는 무려 30명이다.
 무리의 리더가 된 청년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젊고 건강한 여자들 중에 우릴 따라올 사람은 따라와. 하지만 많이는 못 받아 줘.”
 인간의 3대 욕망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 아닐까? 청년은 짧은 순간 여자들을 대동했을 때의 장점을 계산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여자들을 맹수의 먹이로 던지고 달아나는 것도 염두에 뒀다.
 잔인하고 비열한 생각이지만 무리에 사내들만 있다면 언젠가는 불협화음이 생길 터였다.
 그 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유흥거리가 필요하다.
 현실을 인식한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소란과 분열이 발생했다.
 보호받지 못하면 죽는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자신에게 보다 유리할까? 고민을 거듭하고, 일어났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그때 민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남자들 중 가장 거친 반응을 보였던 김유철이 나섰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유철을 향했다.
 그마저 무리를 짓고 나간다면 집단의 혼란과 분열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단 하루 만에 유철은 꽤나 많은 남자들과 친해진 상태였다.
 유철은 말없이 앉아 있는 소연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숲에 늑대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리고 당장 식량도 문젭니다. 우리에겐 과자와 음료수밖에 없어요. 그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삽니까? 농사를 지을까요? 아니면 채집이나 사냥? 저 숲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누가 압니까? 어제 본 늑대는 이 숲에 사는 맹수 중 가장 약한 놈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애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이 판타지 세상이라면 몬스터라는 것도 있을 겁니다. 지금처럼 큰 무리로 움직였다간 오히려 놈들의 집중 공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저 사람의 말에 화가 나지만 지금은 상황을 직시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의 도리를 따질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내용은 나도 살고 싶다는 뜻이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까무잡잡한 얼굴의 중년인이 역정을 냈다.
 “유철이 너도 무리에서 이탈하겠다는 거냐?”
 “기식이 아저씨, 아저씨도 생각해 보세요. 이 상태로 움직이면 모두 다 죽어요. 맹수에게 죽든 굶어 죽든 말입니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서 이동해야 해요.”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당연히 객실마다 만원이다.
 지하철은 여덟 량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한 량마다 많게는 200명에서 적게는 150명이 타고 있었다. 이 중 상당수가 즉사했다. 그럼에도 생존자는 현재 770명이나 된다.
 나이와 성별을 분류하면 청장년층은 200명 정도로, 무리 중 두 번째로 수가 많았다. 그리고 남자 청소년들이 150명인데 이 중 고등학생이 90명, 중학생이 60명이다.
 중학생은 몰라도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킬 충분한 체력과 힘을 갖고 있었다.
 어른들이 이렇게 분열하자 그 영향은 남자아이들에게도 미쳤다. 아니, 사실 어제부터 저희들끼리 모여 쑥덕거렸었다.
 유철이 무리에서 떨어져 공터에 섰다. 남자들이 눈치를 살피며 그와 합류했다.
 유철도 패거리를 지은 청년 대철처럼 여자들을 끌어 모으려 했다. 특히 소연을 집중 공략했다.
 망설이던 젊은 여자들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내엔 욕설과 원망의 악다구니가 폭발했다.
 “소연 씨, 우리와 같이 갑시다.”
 소연은 집단의 분열을 촉진시킨 유철과 대철을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이들의 행동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위기에 처하면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고 했던가. 비열하고 비겁한 논리로 자신을 포장한 저들은 소연이 보기엔 무리에 불필요한 존재가 생기면 주저 않고 버릴 위인들이었다.
 ‘저런 사람들은 절대 믿을 수 없어.’
 소연은 잔류를 선택했다.
 아이를 둔 여자들과 자력으로 움직이기 불편한 부상자들은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민수는 나뭇가지로 만든 침상에 누워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결한 희생정신이란 없어. 다 자기 위안인 거지. 이탈자들은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한 거야.’
 그는 근방에서 찾은 열매를 깨물었다. 새큼한 과즙이 입안을 채웠다.
 높은 나무에 달려 있는 과일이다. 도구가 없이는 평범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렇다고 식용 열매가 모두 높은 나무에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채집에 열을 올린다면 처음엔 오류를 범하겠지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의 그 공포감에 사람들은 이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짐승에게 뜯어 먹히는 죽음처럼 끔찍한 건 없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민수는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주시했다.
 우적우적.
 박대철이 주도하여 꾸린 일행이 먼저 떠났다.
 김유철은 소연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듭 노력했으나 그녀가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자 그도 이내 포기하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고등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내아이들도 패거리를 만들었다. 녀석들도 앞서 대철과 유철 같은 행동을 모방했다.
 상당수의 여자아이들이 이 무리에 합류하여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450명 남짓이다. 그것도 어린아이와 나이 든 여자, 부상자가 대거 포함된 무리다.
 민수는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소연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녀가 자신을 찾기 위해 저러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한 부정을 해보았으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길.’
 혼자라면 이동속도는 물론이거니와 생존율까지 높아진다. 반대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 늘면 오히려 부담이 된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답이 없다. 민수는 소연이란 존재로 인해 자신이 세운 계획의 일부분을 수정했다.
 극히 일부만…….
 
 * * *
 
 “배고파, 엄마.”
 한 여자아이가 칭얼거렸다.
 이 아이의 엄마는 좀 전 대철과 유철 일행에 합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아이 때문에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사람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분노와 원망을 쏟아 낼 만만한 상대로 그녀를 점찍었다.
 집단의 히스테리를 감당하는 일은 개인이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이다.
 “휴, 미안해. 혜미야, 미안해, 흑흑.”
 아이를 안고 우는 여자의 처연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욕할 수 없었다. 여기에 남은 자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약자이기에.
 그나마 다행한 일은 200명의 청장년 중 100명이 약간 넘는 자들이 남아 주었다는 것이다.
 “자, 자! 일단 이곳을 떠납시다.”
 목수인 박기식은 기가 죽어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을 격려했다.
 그는 남자들을 모아 필요한 것들을 거두었다. 그러곤 주위에서 덩굴과 나무를 가져와 들것을 만들어 걷지 못하는 중상자들을 실었다.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은 여자들에게 말해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지금은 간밤에 들이닥친 늑대가 이미 알고 있는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박기식의 선택은 현명했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였다.
 “기식이 아저씨, 어디로 가죠?”
 남자들의 대표가 목수 박기식이라면 여자들의 대표는 당당하게 잔류를 선택한 소연이 맡게 됐다. 두 사람의 합의가 집단의 미래를 결정짓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큰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 저 녀석은 어제 그 꼴통이잖아? 이탈자들이 받아주지 않았나 보군. 한심한 녀석.”
 중상자를 들것에 싣던 한 청년이 무리를 향해 다가오는 민수를 가리키며 불쾌감을 내비쳤다.
 연거푸 발생한 이탈자로 인해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기식과 이야기를 하던 소연이 갑자기 몸을 돌려세웠다.
 민수를 향한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당신이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일 뿐이야. 그러니 그렇게 보지 마.’
 초능력이란 신비로운 무기를 가진 민수였다. 위험이 닥친다면 언제든 소연만 데리고 내뺄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신의 능력을 저들 모두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달리는 사람들을 버리는 것은 사실 그로서도 괴로운 노릇이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능력을 꼭꼭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처럼 그렇게만 생각해줘.’
 사람들의 비난과 싸늘한 눈총이 오히려 반가운 민수였다.
 민수를 향해 소연이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있어 보이나요?”
 “……없어 보이네. 다행이야. 무사해서.”
 여자의 저 눈빛과 저 태도가 손해 보는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미쳤음을 그는 깨달았다.
 민수는 호주머니에서 과일을 꺼냈다.
 그는 배고프다고 칭얼거린 여자아이의 엄마에게 이를 건네주었다.
 알량한 동정심이 아니다. 먹을 만한 과일이 있음을 저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시큼한 오렌지 맛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제가 먹어 봤는데 괜찮았습니다.”
 “초, 총각…….”
 민수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꼬맹이의 눈을 피해 소연을 향해 걸어갔다.
 소연은 민수를 매혹시킨 바로 그 미소를 그에게 보냈다.
 “의외로 심성이 맑고 착하네?”
 “과연 그럴까요?”
 모호한 민수의 대답에 소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민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이제 보니 민수는 숫기가 없구나, 호호.”
 “그런 얘기는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할 게 못 된다고 생각되네요.”
 소연이 민수를 친절하게 대하자 남자들의 눈빛에 노골적인 불쾌감이 드러났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녀의 친절은 너무 과해보였다.
 “너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도 곧 풀릴 거야. 앞으로 잘 부탁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민수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어깨를 으쓱인 소연은 흐린 얼굴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소연은 민수의 눈빛에서 그가 무척이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살펴본 사람들 중 유일하게 민수만이 초지일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그러한 모습에 의지하고 싶어 했고, 남자는 여자를 지켜주고 싶다는 보호 본능이 발동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 * *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나갈 만한 길이 원시림에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일행엔 들것에 실린 중상자만 20명이다. 나머지 부상자들은 약간의 도움을 받아 자력으로 걷긴 걸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더뎠다.
 이 상태로 움직였다간 하루 2킬로미터도 이동하기 힘들어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수와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멈춰!’
 민수는 시간을 정지한 뒤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몸이 그가 바라본 허공에 나타났다.
 허공에 뜬 그의 몸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그에게 무리의 이동속도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민수의 눈빛에 기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호수가 있군. 흠, 직선코스로는 이동이 불가능하겠어. 그럼 저리로 돌아가야 하나? 지금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면……. 오늘 내로 도달하기엔 어림도 없겠군. 그보단 엉뚱한 데로 빠질 수도! 어쩐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민수는 시간을 움직였다.
 능력 사용 후에 발생하는 쿨타임 5분.
 이때가 그에게 제일 위험한 시기였다. 위험이 닥치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민수는 소연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소연 누나.”
 그사이 소연에 대한 민수의 호칭은 ‘씨’가 빠지고 ‘누나’가 붙었다.
 처음엔 누나란 호칭이 나오지 않아 자주 말끝을 흐렸지만 한두 번 부르다 보니 그러한 어색함은 사라졌다.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연상에겐 절대 누나라고 부르면 안 됨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응?”
 민수와 소연은 약자들이 무리 지은 중간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전방과 후방은 조악하지만 무기를 든 남자들이 맡았다.
 무리의 전방엔 다수의 건강한 남자들이 원시림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의 노고가 가장 컸다.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목수 박기식으로, 그는 이 무리의 리더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호감과 지지를 받는 박기식.
 이런 그와 반대로 민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바닥이었다.
 소연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민수의 태도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무조건 믿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먼저 약속해요.”
 단호한 민수의 태도가 황당한 소연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정색하는 것일까? 이유를 물으려다가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의심하지 마세요.”
 “알았어.”
 “여기서 대략 20킬로미터 전방에 큰 호수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직선코스로 가면 작은 벼랑이 나와서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거예요.”
 민수의 이야기는 그녀에겐 정말이지 뜬금없고 황당한 소리였다.
 소연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민수는 차분한 눈길로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민수야, 이건 널 이상하게 여겨서 그런 게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 줘.”
 “오해 따위는 안 해요. 제 말이 이상하게 들렸을 테니까요.”
 “휴, 정상으로 보이는구나.”
 정상이라? 그녀가 말하는 정상과 민수가 생각하는 정상은 의미가 다르다. 그의 정상적인 상태는 당장 이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이를 그녀가 안다면 저 얼굴에 경멸의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다.
 ‘휴, 나도 나를 모르겠구나. 왜 저 여자에게 약해지는 건지.’
 사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줄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알려주는 것은 오직 눈앞의 이 여자가 좀 더 편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이성을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판단은 누나가 알아서 하세요. 그리로 가든 안 가든 전 상관없으니까요.”
 자신이 먹을 식량과 식수를 구하는 것은 민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전한 잠자리를 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한참을 심사숙고한 소연이 결정을 내렸다.
 “일단 말은 해볼게.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
 주저하던 소연은 용기를 내어 무리의 선두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믿어 준다는 건가? 보면 볼수록 이상한 여자군.’
 여동생이 아닌 타인, 그것도 젊은 여자가 그를 믿어 주자 기분이 묘해지는 민수였다.
 이런 그를 향해 누군가 접근했다.
 “저기, 혹시 태산고등학교 나오시지 않았어요?”
 민수는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졸업한 학교를 정확하게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넌 누구지?”
 “민수 선배시죠!”
 민수의 출신교와 이름을 정확하게 아는 미모의 소녀.
 생활이 빠듯한 관계로 바쁘게 지냈지만 이 정도의 미소녀라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기억나야 한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여자애는 기억에 없었다.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혹시나 했는데 맞네요.”
 반가운 표정을 얼굴 가득 드러낸 소녀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민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소녀와 대화하는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저 오빠 후배예요. 중학교, 고등학교.”
 “그래……. 그렇군.”
 민수는 자신을 아는 후배가 있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다혜는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울먹거렸다.
 소녀는 친구들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고를 당했다.
 처참한 친구들의 주검을 보는 것은 몸서리쳐지도록 끔찍한 경험이었다.
 의지할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로해줄 친구도 이곳엔 없었다. 지독하게 외로웠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자살도 생각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런 소녀의 눈에 띈 민수는 그녀에겐 한 줄기 빛이자 등불이었다. 그녀를 대하는 남자의 눈에 귀찮은 기색이 보였지만 이 남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보고 아는 이 남자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과의 인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그를 아는 것만 해도 꽉 막혔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총각, 교대 시간이야.”
 들것을 들고 있던 여자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민수에게 말했다.
 교대 시간은 아직 되지 않았다.
 이 여자는 황당하다 못해 끔찍한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억눌린 감정을 토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민수에게 이를 쏟으려 시비를 붙이고 있었다.
 민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움찔하던 여자는 주변의 호응을 얻어 민수를 압박했다. 남자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여자들이지만 따돌림을 받는 민수의 눈치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인의 호구랄까? 무리에서 차지하는 민수의 현주소다.
 말다툼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진 민수는 여자와 교대하려고 했다.
 그때 다혜가 나서서 여자에게 따졌다.
 “아줌마, 민수 선배와 좀 전에 교대하셨잖아요.”
 민수를 발견한 내내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소녀였다.
 여자는 당황한 얼굴로 역정을 냈다.
 “이 조그만 계집애가! 네가 봤어! 봤냐고!”
 “제가 아줌마보다 더 크거든요. 그리고 봤으니까 나선 거죠.”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계집애가 다 있어!”
 민수는 자신을 위해 나서 준 소녀가 참으로 이상했다.
 ‘얘는 뭐지?’
 말싸움이 점점 확대되려 하자 민수는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눈길이 마주친 여자는 분이 안 풀린 얼굴로 씩씩거렸다.
 “제가 알기에도 분명 교대 시간이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서 교대하자는 말이라면 모를까.”
 여기서 말을 딱 끊은 그는 무심한 눈초리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여자는 더 크게 반발했다.
 “뭐, 뭐! 어린 연놈들이 어른 알기를 개밥의 도토리로 아네.”
 “개념을 물 말아 먹었군요!”
 슬슬 짜증이 치민 민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라고! 어따 대고 욕이야!”
 “나잇값도 못 하는 사람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까?”
 민수가 강하게 나오자 여자는 겁을 먹었다.
 혹시라도 그가 해코지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
 여자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여기저기서 이 여자를 호응하며 민수를 욕하는 소리가 나왔다.
 집단의 적대적인 태도에 민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저들에게 특별히 피해를 준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남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저러는 거라면 콧방귀를 날려 주고 싶었다.
 떽떽거리는 여자들의 포격.
 민수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몇몇 남자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여자들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며 이 남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공격하는 대상이 민수라는 것을 알자 이를 못 본 척 해버렸다.
 한쪽으로 물러선 이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사태를 관전했다.
 그러자 여자들의 기세가 크게 살아났다.
 다혜는 자신으로 인해 일이 확산된 듯하자 민수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죄송해요, 선배.”
 “뭐가?”
 “제가 나서는 바람에 선배만 곤란해지셨잖아요.”
 민수를 씹던 여자들은 다혜도 덤으로 험담했다.
 성난 표정으로 이들을 노려보던 민수는 곧 관심을 끊었다.
 그는 소녀를 돌아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곤란할 건 없어.”
 “하지만…….”
 “하지만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 미운털 박힌 날 알은척 해봐야 너만 손해야. 그러니 네 자리로 가라.”
 “저……. 선배 옆에 있을래요.”
 수줍은 얼굴에 간절함을 담고 소녀는 말했다.
 지켜보고만 있던 남자들은 소녀의 이러한 태도에 불만 섞인 음성으로 낮게 투덜거렸다.
 소연의 관심을 받는 데다 아름다운 소녀까지 가세하여 민수를 봐주자 남자들은 질투를 느꼈다.
 남자들은 민수를 씹어 대는 여자들을 충동질했다.
 민수가 날뛰면 개입해서 그를 흠씬 패줄 눈빛들이다.
 민수는 냉랭한 태도로 사람들을 쓸어 보았다.
 다혜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런 민수를 보았다.
 ‘민수 선배의 싸움 실력을 보면 다들 저렇게 나오지 못할 텐데.’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의 일화들.
 이를 듣고 직접 보기까지 한 소녀였다.
 다혜에게 민수는 크고 튼튼한 울타리 같은 남자였다.
 소녀는 전체의 따돌림을 받더라도 이 남자를 선택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앞서 여러 무리가 집단에서 이탈했다.
 집단에 남은 남자들은 여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떤 이들은 젊은 여자들을 은밀하게 찝쩍이며 그녀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남자들에게 당해도 여자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앞으로 보다 빈번해지고 노골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를 감지한 다혜는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일찍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증된 남자.
 소녀에게 민수는 그런 남자였다.
 ‘민수 선배라면 믿을 수 있어.’
 주변이 소란스러웠지만 다혜는 이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태산고등학교 3대 퀸카, 정다혜.
 그녀의 선택을 받은 남자, 김민수.
 무리의 히스테릭한 눈총에도 둘은 꿈쩍도 않았다.
 “교대할 테니 그만하시죠.”
 여자들은 민수의 말을 자신들에 대한 항복 선언으로 해석했다.
 의기양양해진 그들의 모습.
 민수는 그들에게 정나미가 뚝뚝 떨어졌다.
 ‘어차피 당신들과 나는 별개다. 각자 사는 거지.’
 냉담한 그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
 이런 그를 바라보던 다혜는 눈을 반짝였다.
 다른 이들에게 없는 여유가 민수에겐 있었다.
 ‘선배 옆이 가장 안전해. 가장…….’
 소녀의 마음에 민수는 ‘미친 존재감’으로 더 깊게 안착하고 있었다.
 
 * * *
 
 “소연 양, 무슨 말이지? 앞에 벼랑이 나올지 모른다고?”
 머뭇거리다 간신히 민수의 말을 그대로 전한 소연은 얼굴을 붉혔다.
 막상 기식을 만나 민수의 얘기를 전하고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아마도…….”
 “소연 양이 깜빡 졸았나 보군. 하긴, 부상자를 돌보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기식은 소연의 말을 잠꼬대로 치부하며 가여워했다.
 소연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제가 성가시게 해 드렸죠.”
 길을 만드느라 기식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냄새가 좀, 아니 심하게 났지만 이는 일행을 위해서 노력한 산물이었다.
 아버지의 땀을 보고 역겨워하는 가족이 있을까? 후레자식이 아닌 한 없을 것이다.
 소연은 기식의 모습에서 가장의 느낌을 받았다.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듬직한 가장.
 ‘아빠가 많이 걱정하실 텐데.’
 어머니를 일찍 잃은 소연에게 혈육은 아버지와 얼마 전 뇌종양에 걸린 남동생밖에 없었다.
 소연은 민수에게서 평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남동생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고 챙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를 보면 안정감이 들었다.
 황당한 생각이지만.
 툭툭.
 “힘내, 소연 양.”
 “고마워요, 아저씨.”
 기식은 듬직하고 푸근한 미소를 지어 준 뒤 길을 내는 일을 다시 거들었다.
 퍽퍽.
 “벼랑이라고? 흠, 많이 피곤했나 보군.”
 기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길을 만드는 작업에 매달렸다.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던 일행이 멈추었다. 민수가 소연에게 경고한 대로 벼랑이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기식은 사람을 보내 소연을 불렀다.
 벼랑이 등장한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전방의 남자들밖에 없었다.
 다들 신기한 눈으로 소연을 보았다.
 “찾으셨어요.”
 “소연 양, 어떻게 벼랑이 있는 걸 알았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기식이 소연에게 물었다.
 소연은 민수의 경고가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자 기식보다 더 놀랐다.
 “정말 있었어요?”
 “음, 보여주지.”
 기식은 소연을 데리고 가 벼랑을 보여주었다.
 벼랑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바닥이 훤히 보인다.
 대충 10~15미터쯤. 건장한 남자들이라면 나무뿌리를 잡고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부상자들이 많은 일행은 이곳을 내려갈 수 없었다.
 “세상에! 저, 정말 있었군요!”
 “무슨 말인가? 이건 소연 양이 말해줬잖아.”
 소연은 민수의 이름을 거론할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그가 벼랑의 유무를 알아낸 것은 차후에 알아봐도 될 일이다.
 일단은 이 일을 계기로 민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로 했다.
 “민수가 해준 이야기예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식은 그녀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모나게 행동하는 청년.
 민수에 대한 기식의 평가였다.
 기식이 말하기 전에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뭐? 그 녀석이?”
 “꼴통이?”
 “그 녀석이 어떻게 안 거지?”
 남자들의 반응에 소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부탁할 게 있어요. 민수는 자존심이 굉장히 강해요. 그러니 꼴통이란 말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소연 씨, 내내 궁금했는데 그 꼴통을 왜 그리 감싸는 거죠?”
 한 남자가 불쾌감을 내비치며 물었다.
 그건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보기에 소연이 민수를 챙겨 줄 의무는 없었다.
 소연은 ‘민수에게서 받은 느낌을 말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주변의 눈초리가 하도 사나워서 이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간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겠다 싶어서 그녀는 사실과 과장을 섞어서 말을 지어냈다.
 “남동생이 생각나서요. 그 아이도 늘 외톨이였거든요. 몸이 아파서 그랬지만…….”
 씁쓸한 태도로 말끝을 흐린 그녀의 연기에 남자들은 동정의 빛을 내비쳤다.
 “그래서였군요.”
 남자들이 공감을 해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기식이 진지한 얼굴로 소연에게 부탁했다.
 “소연 양, 민수 좀 이리 보내 줘. 물어볼 게 많으니까.”
 “네.”
 
 * * *
 
 민수는 소연과 함께 무리의 지도자 역을 맡고 있는 기식을 만났다.
 노동으로 단련된 기식의 몸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눈빛도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기식에 대한 민수의 첫인상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남자의 지도력에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소연 양에게 들었네. 어떻게 이곳에 벼랑이 있는지 알고 있었나?”
 민수는 자신을 빙 둘러싼 남자들을 보았다. 다들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민수의 말투는 상당히 무뚝뚝했다.
 기식이 언짢은 표정을 짓자 소연은 이 모습에 조마조마했다.
 무리의 리더인 기식이 민수를 배척한다면 무리 전체가 그에게 동조하여 움직일 터였다.
 소연의 이런 마음을 안 것일까? 기식은 안심하란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 준 뒤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중요하다고 보네.”
 문제는 주변에 있는 남자로 인해 발생했다.
 “꼴통 녀석, 어른 알기를 개똥으로 아네.”
 한 청년이 민수의 말투와 태도를 지적하며 화를 냈다.
 기식은 주변의 소란을 진정시키며 민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낯선 환경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상식이 무너져 버렸다.
 목수인 기식이 볼 때 이곳의 나무는 지구가 키워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계!
 앞서 집단에서 이탈한 학생들의 의견이 그의 머릿속에서 확신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이런 그에게 민수의 예언은 예사로 보기 힘든 부분이었다.
 “저쪽으로 가겠나?”
 사람들의 눈총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기식은 민수와 소연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식은 진지한 얼굴로 민수에게 질문했다.
 “다시 묻겠네. 어떻게 이곳에 벼랑이 있는지 알았는가?”
 소연 역시 궁금했던 참이라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자네가 그리 나온다면 더는 묻지 않겠네. 그럼 호수 얘기도 사실인가?”
 소연을 잠시 쳐다보던 민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이 무리를 따라온 이유는 오로지 소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은 할 필요가 없다.
 소연이 자신을 따라가겠다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민수였다. 아직은 그녀의 태도 때문에 질문을 유보한 상태였지만.
 “놀랍군, 정말 놀라워. 그런데 자네는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건가? 자네가 나서기 힘들다면 내가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겠네.”
 민수에게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다고 느낀 기식은 그와의 유대감을 높이기 위해 호의를 내비쳤다.
 “아뇨, 그렇게 하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가 편합니다.”
 “젊은 애들 표현을 빌려 말하면 우리가 자네에게 왕따를 당하는 느낌이군. 그런 건가?”
 기식은 민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우리를 귀찮아하는 건가?’
 민수의 표정에서 기식은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배타적이군, 자넨.”
 “그렇다고 해 두죠. 할 이야기 끝났으면 전 돌아가겠습니다.”
 기식은 민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속내를 낱낱이 파헤칠 수 없으니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기식의 마음에 민수란 존재가 크게 부각되어 자리 잡았다.
 “알겠네. 그리고 고맙네.”
 민수가 멀어지자 기식은 소연을 돌아보았다.
 “소연 양, 저 친구를 곁에서 지켜보고 좀 더 보살펴 주게. 마음에 뭔가 앙금이 단단히 쌓인 것 같아.”
 “그럴게요.”
 민수를 따라가는 소연을 본 기식은 울창한 수풀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힘들겠지.’
 
 
 
 
 제3장 주머니 속 송곳
 
 
 
 
 
 울창한 숲은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맹수와 야행성 동물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이 시간은 인간의 공포심을 크게 끌어 올린다.
 일행은 속도를 높였지만 민수가 보았던 호수에 도착하지 못했다.
 기식은 사람들을 동원해 덩굴을 이용한 울타리를 급조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한 조잡한 울타리였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총인원 445명. 이 중 운신이 불가능한 중상자는 20명이다.
 몇 시간 전 중상자 중 30대 초반의 남자가 사고로 사망했다.
 들것을 옮기던 여자가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들것에 실린 남자가 떨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상처가 있는 가슴에 지표면을 뚫고 나온 뾰족한 나무뿌리가 박혀 버렸다.
 자신의 실수로 한 남자가 죽자 여자는 몹시 괴로워했다.
 소연과 몇몇 여자들이 이 여자를 달래느라 곁에 붙어 있었다.
 “떨어져라.”
 민수는 다혜가 자꾸 달라붙자 인상을 구기며 무뚝뚝하게 쏘아붙였다. 그렇다고 그녀를 밀쳐 내지는 않았다.
 다혜는 선배라는 호칭을 버렸다. 대신 오빠라는 호칭으로 살갑게 굴었다.
 “오빠, 배고프지 않아? 나 숨겨 둔 사탕 있는데.”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소녀는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그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민수는 다혜의 태도와 행동에서 여동생 나연이 문득문득 스쳐 보였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학교는 제대로 다니는지, 자신을 찾아 무작정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나쁜 놈들이 괴롭히는 건 아닌지.
 여동생에 대한 걱정에 마음이 몹시 아픈 민수였다.
 다혜가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눈에 보이면 적어도 이처럼 가슴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내 곁에 있어 봐야 네게 득 될 게 없다.”
 민수는 끊임없이 소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소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절박했다.
 “상관없어.”
 “너 내가 무섭지 않냐? 나에 대한 소문 한두 개는 들어 봤을 텐데.”
 “괴물 늑대보단 오빠가 나아.”
 시무룩한 소녀의 대답에 민수는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몹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수는 소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녀를 돌봐 주면 나연이도 누군가 돌봐 주지 않을까?’
 지금으로서는 여동생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처지였다.
 민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소녀를 돌봐 주기로 결심했다.
 마음과 달리 민수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냐?”
 “응!”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대답하는 다혜로 인해 민수는 맥이 풀렸다.
 뭐, 상관은 없었다. 소녀를 지켜주기로 결심을 한 상태기에.
 “이상한 녀석.”
 소녀는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진 것을 느꼈다. 속으로 조바심을 냈던 그녀는 그제야 안도했다.
 “나 전에 오빠 싸우는 거 봤어.”
 대체 어떤 싸움을 보았기에 모두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자신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걸까?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일일이 기억할 순 없었다.
 기억을 더듬는 그의 귀에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때의 오빠는 마치 레오 같았어.”
 “레오? 그건 뭐지?”
 “오빠, ‘철권’ 안 해봤어?”
 “캐릭터 이름을 외울 만큼 관심 가진 게임은 없다.”
 “그런가? 그럼 모르겠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싼 다혜가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속으로 움찔한 민수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외로움, 슬픔, 그리움이 작고 하얀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나연아, 너도 이러고 있니…….’
 
 * * *
 
 아우우우우! 아우-!
 야영장을 휩쓰는 늑대의 울음소리.
 침울한 표정으로 움츠려 있던 사람들의 얼굴마다 선명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떠올랐다.
 기식이 여자, 아이와 부상자들을 중앙으로 모이게 했다.
 남자들은 모두 작대기와 쇠파이프를 들었다.
 이들의 몸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이계의 맹수는 하나같이 돌연변이였다.
 그 크기와 흉포함에 비하면 초원의 사자, 산중의 호랑이가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너도 중앙으로 가 있어.”
 민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혜에게 말했다.
 겁에 질린 다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소녀의 손은 구명줄을 잡은 사람처럼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그때 두 사람을 본 소연이 다가와서 낮게 속삭였다.
 “안전한 곳으로 가자.”
 민수는 소연을 돌아보며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다혜만 데려가세요.”
 “넌?”
 “여자들과 아이들 틈에 끼기엔 나이가 많잖아요.”
 그의 말에 소연은 민수를 데려가는 걸 포기했다. 그가 보호받는 무리에 끼게 되면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여전히 냉랭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리하지 마.”
 민수의 체형은 마른 편이다.
 눈빛을 제외하면 외견상 듬직하고 믿음직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혜는 소연이 자신의 손을 잡아끌자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나도 민수 오빠랑 있을래요, 언니.”
 다혜는 민수 곁을 고집했다.
 민수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며 매달리는 소녀의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승낙을 받은 다혜의 얼굴이 밝아졌다.
 소연이 한마디 한다.
 “다혜야, 중앙에 있어야 안전해. 그리고 여기 있다간 남자들이 싸우는 데 방해만 돼.”
 무리에 팽배한 불안감은 사람들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접촉에도 격렬한 반응이 나오곤 했다.
 기계화 문명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원시림은 그 자체가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몇몇 남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거친 말과 행동을 여과 없이 했다.
 이들이 조장하는 공포감은 여자와 아이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소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남자들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지금 거치적거린다는 느낌을 저들에게 주었다간 후환을 살 게 뻔했다. 다혜를 데려가려는 소연의 태도는 여기서 기인했다.
 “아니에요, 언니. 민수 오빠 곁이 훨씬 안전해요.”
 소연은 민수에 대한 다혜의 집착과 의존하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의 완강한 고집에 소연은 포기했다.
 “휴, 할 수 없지. 민수야, 다혜를 부탁해.”
 민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들은 두 겹의 방어진을 형성했다.
 앞줄은 힘과 체격이 좋은 남자들이 섰고, 뒤에는 좀 약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더욱더 가깝게 들리자 사람들은 한마디도 안 했다.
 어린아이들이 칭얼거렸지만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아이들의 입을 막았다.
 아이를 어르고 달랠 시간이 그녀들에겐 없었다. 그리고 남자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바스락.
 작은 기척에 놀란 한 남자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마에 붉은 점이 있는 검은 표범이 있었다.
 놈을 딱히 표범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놈의 가죽엔 뱀의 비늘이 있었다.
 남자와 표범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표범은 은신했던 장소에서 몸을 날렸다.
 덩굴 울타리는 놈의 체중과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으헉!”
 “피, 피해!”
 표범의 직접 공격을 받게 된 남자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주변의 남자들이 소리쳤다.
 이들은 표범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위험성에 접근할 생각조차 못했다.
 용기는 사라지고, 두려움이 남자들을 지배했다.
 군중은 놀란 메뚜기 떼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후방에 있는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수는 이대로 방치했다간 후방에 있는 소연이 집단의 발작에 휩쓸려 다칠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그의 팔을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다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소연.
 민수의 눈엔 오직 이 두 사람만 보일 뿐이었다.
 ‘멈춰!’
 허공에 몸을 날린 자세 그대로 멈춘 돌연변이 흑표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끊어진 덩굴의 움직임,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 역시 제각각의 모습으로 정지했다.
 1분이란 무적의 시간이 민수에게 주어졌다.
 싸움을 많이 해 본 민수였지만 생물을 죽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긴장한 민수는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을 다독이며 괴수 표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뾰족한 나무창을 가진 남자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든 민수는 괴수 표범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가죽이 너무 단단해.’
 나무창으론 도저히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치명적인 일격을 놈에게 남기지 못한 채 능력이 풀려 버린다면 도리어 당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눈에 괴수 표범의 커다란 노란 눈이 들어왔다.
 민수는 놈의 몸통 대신 눈을 노렸다.
 푹! 푹!
 안구를 꿰뚫고 들어간 나무창이 놈의 두개골에 부딪치며 전진을 멈추었다. 괴상하게 생겨 먹은 야수지만 이 정도의 상처면 치명적일 게 분명했다.
 ‘시간이?’
 정지한 시간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기미가 엿보이자 민수는 급히 본래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가 괴수 표범을 죽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특별하게 보일수록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민수는 생존자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 짓고 있었다.
 오직 그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무리에서 2명뿐이다.
 소연과 다혜.
 그 이상은 부담이며 족쇄일 뿐이었다.
 정지되었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자 민수가 공격했던 놈의 몸에 상처가 나타났다.
 푸화화화확!
 깨-애앵!
 괴수 표범은 안구와 뇌가 박살 나고,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남자와 표범의 사체가 함께 뒹굴었다.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 댔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황급히 남자의 몸에서 표범의 사체를 들어서 옆으로 옮겼다.
 얼이 빠진 남자는 오줌을 지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거지? 저 맹수가 왜 갑자기 죽은 거야!”
 “그,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사람들이 모두 단체로 꿈꿀 리 없잖아.”
 “그럼 이건 무슨 현상이야?”
 “우리 중에 초능력자라도 있나?”
 한 청년이 농담조로 말했다.
 머리에 떠오른 말을 툭 내뱉었던 이 청년은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물러섰다.
 아우-! 아우우우!
 괴상하게 생긴 표범이란 복병을 해치웠지만 아직 늑대가 남았다.
 놈들은 무리 지어 행동한다. 가장 큰 위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쿨타임이군.’
 모든 사람들이 한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민수만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각심을 높였다. 그러자 그들의 집중력이 놀랍도록 높아졌다.
 시각과 청각이 예민해졌다.
 민수는 사람들의 눈빛이 마치 어둠 속에 웅크린 고양이의 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도의 긴장감을 파고드는 위험한 짐승의 소리.
 크르르릉!
 어제 본 것과 똑같이 생긴 늑대들이 일행을 포위했다.
 한 줄의 덩굴 울타리쯤은 놈들의 덩치로 한 번 밀어버리면 끊어질 것이다.
 여자들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한 덩어리로 붙어 있었다.
 스스로를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로 규정한 이들에게 용기를 바랄 순 없다.
 이들은 강렬한 생존 욕구를 오직 남자들에게 기대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탓할 수 없다. 이건 여자들의 본능이다. 반대로 남자들은 내면에 뚜렷한 정복욕과 투쟁심을 갖고 있다.
 문제는 모든 남자들이 달라붙어도 거대한 덩치의 늑대 한 마리조차 해치울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민수는 소연과 다혜를 번갈아 살폈다.
 어제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의 눈엔 소연뿐이었다. 그녀만 지켜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은 1명이 추가됐다.
 수렁에 빠져든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에 본 늑대는 쉰 마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른 마리만 보였다.
 참사 현장엔 시체만 해도 수백 구다. 이놈들이 몇 날 며칠을 먹어도 남을 양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쫓아온 것을 보면 놈들의 탐욕이 인간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한꺼번에 뛰어들면 끝장이다.
 “모두 조심해. 모닥불을 최대한 이용해!”
 기식이 목소리를 높였다.
 야생에서는 목소리가 커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힘과 자신감을 표현하는 일종의 보호색이었다.
 나를 죽이려면 너도 피해를 각오하라는 일종의 경고인 것이다.
 야생은 약육강식의 법칙만 철저히 적용된다.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상처를 입으면 한순간에 초라한 사냥물로 전락한다. 신중하고 영악하게 움직여야 좀 더 오래 살 수 있다.
 생존의 법칙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머리를 쳐야 한다.’
 민수는 생각했다.
 남자들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능력자는 민수 하나뿐이다.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 민수는 늑대 무리의 대장을 찾았다.
 ‘저놈이다!’
 늑대 대장은 거만한 모습으로 무리의 뒤에서 적절한 공격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놈이 여유를 부리는 사이 민수의 쿨타임이 끝났다.
 늑대 대장을 죽여도 놈들이 후퇴할지 아니면 더 흥분하여 공격할지 점칠 수 없었다.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이 그를 괴롭혔다.
 소연과 다혜만 챙겨서 빠져나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의 목숨을 그가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고, 자신은 자신이다.
 이러한 생각을 했지만 주저되는 것은 양심이 내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제길!’
 솔직히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내 행동이 지구에 있는 여동생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였다.
 인과응보!
 어떤 놈이 만든 단어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겁나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민수에게는 그랬다.
 ‘멈춰!’
 자신의 덕이 혼자 남은 여동생에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지 모를 일이다. 짐승의 위장에서.
 그의 손엔 다시 나무창이 들려 있었다.
 앞서 표범을 죽였듯이 그는 우두머리의 두 눈을 찔렀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듯해서 우두머리 양옆을 지키던 두 놈도 함께 죽여버렸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웠다.
 ‘시간이 벌써!’
 민수는 본래의 자리로 급히 이동했다.
 그는 소연의 위치를 재차 머릿속에 담아 두는 한편 다혜의 손을 꽉 잡았다. 여차하면 그녀들을 데리고 튀어야 하니까.
 한 번 호흡하자마자 정지한 시간이 흘렀다.
 켕-!
 커엉!
 컹!
 세 마리의 늑대가 안구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쓰러졌다.
 표범에 이어 늑대까지 이처럼 쓰러져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은 대경했다.
 그러나 사람들보다 더 놀란 것은 늑대들이었다.
 일시에 우두머리를 잃은 놈들이 우왕좌왕했다.
 민수가 늑대 대장 옆에 있던 놈들을 죽인 것은 최상의 결정이었다. 만약 두 놈을 그가 죽이지 않았다면 대장의 지위는 그놈들이 차지했을 터였다. 그것은 인간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그 순간 늑대들이 꼬리를 말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극도의 긴장감에서 해방된 탓도 있었지만, 연거푸 발생한 맹수들의 황당한 죽음이 여기에 크게 기여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누군가 우릴 지켜주고 있는 거 아냐?”
 웅성웅성.
 강력한 힘을 가진 미지의 존재가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 준다는 가정! 아니, 이것은 거듭된 현실이다.
 “하나님!”
 “부처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각자의 신을 찾으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불안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연거푸 발생한 기적 앞에 크게 누그러졌다.
 자신들은 힘없는 외톨이가 아니다. 누군가 곁에서 지켜봐 주고 보호해준다.
 홀로 떠돌다 가정으로 돌아온 아이가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듯이 사람들은 지금 미지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한결 편안함을 느꼈다.
 꾸욱.
 다혜가 민수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소녀와 반대로 민수는 맥이 풀렸다. 긴장감이 빠져나간 민수의 몸이 약간 휘청거렸다.
 하지만 소녀는 이를 느끼지 못했다.
 “오, 오빠. 이게 무슨 일일까?”
 “낸들 알겠어? 그리고 그만 엉겨 붙어라.”
 모래를 한 움큼 입에 물고 있는 듯 텁텁하고 답답한 느낌을 퉁명한 대꾸로 모조리 토해 내는 민수였다.
 잠시라도 좋으니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싶었다.
 두근두근.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구한 민수.
 영웅심도, 정의감도 아니며 모험심은 더더욱 아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현재를 인식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민수의 귀로 흘러들었다.
 ‘내 힘은 저들에게 기적처럼 보이는 건가? 하나님과 부처님이라…….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저들에게 난 신과 동급이겠군.’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능력자들이 영웅 행각을 하는 건 아마 이러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봉사란 있을 수 없다. 능력자도 사람인 이상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만족감일지라도.
 그런 의미에서 영웅은 사람들의 추앙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니깐.
 ‘이 정도면 된 거야. 더 이상은 위험해. 정신 차리자, 김민수! 딱 여기까지인 거야. 넌 영웅이 아니야.’
 그의 선택이 훌륭한 결과를 만들었지만, 기쁨보단 자책감이 먼저 찾아드는 민수였다.
 목숨을 건 도박!
 이건 민수가 바라는 행동이 아니었다.

댓글(5)

tonic    
아무도 안돕는다고 하면서 지하철에서 여자는 왜 도와줌?
2017.06.27 17:21
국민의짐    
중 후반까지 결재한 돈 아까워 앞으로 괜찮겠지 하는 기대로 계속 결재하다 지침..별 다섯개 중 두개 정도 줄만함
2017.11.01 15:42
멸단    
아.. 이제 막 읽기시작하는대.. 거부감이 굉장한대다가 댓글까지.. 하.. 일단 무료편보다가 진짜 병신이면 욕겁나게 쓰고 하차해야지..
2018.10.03 05:45
멸단    
언행불일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중 하나인대.. 지금 딱 주인공이 초반부터 하고 있으니..
2018.10.03 05:46
n3************    
작가분이 츤데레 주인공을 원하는거 같아요 ㅋㅋ 계~~~~속 난 냉정하다. 저들을 돕지 않을거다. 죽여야겠다라고 글을 쓰면서 막상 전부 반대로 행동하는데, 그것도 한두번 적당히 해야죠.. 계속 저러니깐 질려요
2019.11.18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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