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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왕진천하 1권-1

2015.02.05 조회 2,138 추천 23


 서(序)
 
 
 아아악!
 뜨겁다!
 너무 뜨거워 살이 통째로 익어버리는 것 같다.
 아버지를 도와 화로 옆에서 풀무질을 할 때도 뜨거웠지만 지금은 그보다 백배는 더 뜨거운 것 같다.
 아! 실수였다. 분화구에서 미끄러지다니.
 아래쪽에 뜨거운 용암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질 좋은 묵철(墨鐵)을 줍는 데 마음을 빼앗겼어.
 주르르르륵!
 미끄럼이라도 타듯 아래쪽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간다.
 분화구 안쪽은 바깥보다 훨씬 더 뜨겁다. 달걀이 썩는 듯한 지독한 유황냄새와 함께 밀려든 열기 때문에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엉엉! 결국 이렇게 죽고 말다니.
 난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대장장이 진가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내가 이렇게 죽는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하실까.
 때마침 분화구 위에서 목 놓아 울부짖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아부지! 날 좀 살려줘! 엉엉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귀여운 누이.
 이제 그리운 그 얼굴들은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겠지.
 그런데!
 나만의 착각일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내 몸이 그 바람에 이끌려 날아가는 것을 느낀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적 들었고, 용암의 누런 불빛 사이로 화강암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가 언뜻 보인다.
 네개의 글자였지만 앞의 두 글자는 알아볼 수 있다. 불과 철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신선처럼 모셔야 한다는 아버지가 그 글자를 항상 대문 앞에 부적처럼 써 붙여 놓으셨기 때문이다.
 축융(祝融).
 전설의 신선 축융께서 사는 곳이 바로 이 화산이었구나.
 설마 내가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건가?
 그럴 리야 없겠지.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이 다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로 신선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날 위해 빙긋이 웃는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그렇게 정신을 잃은 후…….
 
 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1장 염왕 진추영
 
 
 “검을 찾소.”
 하오문 운남성 곤명 지부의 책임자 이한이 의뢰자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피풍의를 입은 앳된 청년이었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고, 묵직해 보이는 가죽배낭을 메고 있었다. 심산유곡을 헤매는 약초꾼의 행색이 이러하리라.
 하지만 검을 찾는다는 것을 보면 어떤 형태로든 강호와 연관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산속에서 오랫동안 무공수련을 한 후 이제 갓 강호에 출도한 애송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한이 슬쩍 말을 낮추었다.
 “어떤 검 말인가?”
 “좋은 일에 쓰이진 않았을 것이오. 마가 씌워진 검이니 말이오.”
 “마검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런 이름으로 불릴 것이오.”
 “그래가지고는 찾기 어렵네.”
 “세상에 마검이 그렇게 많소?”
 이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의뢰자를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운남에만 최소한 다섯 자루가 있네. 풍마검(風魔劍), 금사마검(金蛇魔劍), 흡혈마검(吸血魔劍)…….”
 “검파(劍把)에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소.”
 이한이 흠칫 하더니 저도 모르게 이름 하나가 튀어 나왔다.
 “마검(魔劍) 용불악!”
 “그가 검의 주인이오?”
 이한은 의뢰자의 목적을 묻지 않는다는 하오문의 규칙을 잠시 잊고 말았다.
 “무슨 일로 그를 찾소?”
 슬그머니 말을 높였지만, 앳된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는 어디 있소?”
 이한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대답했다.
 “호남성 문산 백화곡…….”
 철렁!
 은자가 담긴 주머니 하나가 이한 앞에 떨어졌다.
 피풍의를 입은 앳된 청년이 무심한 표정으로 등을 돌려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한의 눈에 청년은 이미 죽은 시체로 보였다.
 마검 용불악의 독문무기는 한 자루의 검이다. 검파에 의뢰자 청년의 말처럼 승천하는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어 광룡승천검(狂龍昇天劍)이라 불린다. 그리고 강호백대신병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검이기도 하다.
 그런 검의 주인이 시시한 인물일 리가 없다.
 마검 용불악은 광룡승천검을 차지할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충분히 강했고, 또 잔혹했다.
 이한이 의뢰자 청년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쳐다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광룡승천검을 얻기 위해 마검 용불악을 찾아가는 청년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머리에 담아 둘 필요는 없으리라. 그 청년은 분명히 죽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가해진 객점 입구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졸던 이한은 갑자기 드리워진 그늘에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구…, 헉!”
 그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다.
 “도를 찾아주시오.”
 무뚝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로 보아 귀신은 분명히 아니었다.
 이한이 두 눈을 비비고는 다시 청년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마검 용불악을 찾아갔던 피풍의를 입은 앳된 청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앳된 청년이 다시 말했다.
 “그 도도 아마 협객의 손에 있지는 않을 것이오.”
 이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청년의 말에서 가볍지 않은 무게가 느껴졌던 것이다.
 이한의 머리가 재빨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광룡승천검에 비견될만한 도라면 많지 않을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몇 개의 도를 되새기고 있던 이한에게 앳된 청년이 덧붙였다.
 “백근이 넘고 도신이 기러기 날개처럼 휘어져 있소.”
 이한의 입에서 명호 하나가 금방 튀어 나왔다.
 “패도(覇刀)!”
 “어디 있소?”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객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이한이 잠시 후 나왔다.
 “하북성 기현에서 얼마 전에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소.”
 앳된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은자가 든 주머니를 건넸다. 그리고는 곧바로 등을 돌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한은 청년의 등에 길쭉한 물건이 누런 천으로 둘둘 말린 채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모양과 길이로 보아서는 검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설마 저게 광룡승천검…?’
 이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도 심한 비약을 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천천히 사라져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한이 갑자기 객점 안을 향해 소리쳤다.
 “광호야!”
 뱁새눈을 한 점소이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요?”
 “긴급 출장임무 발생이다! 위에 알아서 보고하도록 하고, 마검 용불악에 관한 소식 알아내서 전 지점에 공유하도록 해.”
 “무슨 일로…?”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한은 벌써 앳된 청년의 뒤를 쫒고 있었다. 게으른 객점의 주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이한은 얼마 가지 않아 청년의 뒤를 따라잡은 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로, 추적(追跡)과 은잠(隱潛)이다.
 곤명을 벗어난 앳된 청년은 행인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산길로 들어섰다. 청년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종내에는 말이 달리는 속도와 비슷해졌다.
 이한은 강호의 하오문도들 모두를 통틀어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신법의 고수, 아니 대가(大家)였다. 단순히 경신법만 따면 강호에서도 절정급에 들어갈 만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앳된 청년이 빠른 속도로 산길을 달렸지만, 그 정도는 이한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는 천리마를 따라잡을 실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청년은 북쪽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이한이 가르쳐준 패도의 거처를 찾아가는 것이리라.
 청년의 경신법도 보통이 아니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하루를 꼬박 달리고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내공은 놀랄 정도였다.
 이한은 청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 그의 앳된 모습과는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의 이런 생각이 옳다는 게 증명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마검 용천악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알아내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청년은 이틀을 꼬박 달린 끝에 어느 마을의 객점에 들렀다. 이한은 청년과 자신이 벌써 사천성의 북쪽 끝자락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마도 청년이 객점에 들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추격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쳤던 것이다.
 이한은 지친 몸을 추슬러 하오문의 지부를 찾았다. 중원 각지에 기루나 객점이 있을 만한 도시에는 어김없이 하오문의 손길이 뻗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어렵지 않게 하오문도를 만날 수 있었다.
 “마검 용천악. 그는 어떻게 되었소?”
 하오문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갑자기 들어온 소식을 잘도 찾는구료. 그는 무공이 전폐되었소.”
 이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 그럼 마검은…?”
 “행방불명이오. 아마 그를 폐인으로 만든 자가 가져갔겠지. 헌데 운남에 계셔야 할 분이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
 이한은 자잘한 설명을 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난생 처음 걸린 월척을 낚는데 어찌 남에게 도와 달라 하겠는가.
 “나는 현재 특급 추적 임무를 수행 중이니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소. 그럼, 다음에 뵙겠소.”
 이한은 곧바로 그곳을 벗어나 자신의 월척이 잠들어 있는 객점 근처에 자리 잡았다. 객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지붕이었는데, 그다지 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내공을 보충하기 위해 운기행공에 몰두했다.
 다음날 아침. 청년은 객점을 나서 다시 북상을 시작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은 이한은 곧바로 청년을 쫒아갔다.
 그렇게 또 다시 이틀간의 추적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하북성의 남쪽 끝자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나 강행군이었는지 이한은 몇 번이나 도중에 포기하려 했다. 이한의 체력이 바닥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 다행히도 청년은 산속 공터에 자리를 잡더니 모닥불까지 피웠다.
 이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후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쉰 끝에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이한이 고개를 들어 청년을 살펴보았다.
 모닥불 위에는 청년은 언제 잡았는지 모를 토끼 한 마리가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는데,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이한은 침이 꼴깍거리며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토기가 모두 구워졌을 무렵, 청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 숨어서 청년을 지켜보고 있던 이한은 내심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청년의 눈이 정확히 자신을 향했던 것이다.
 “와서 드시오.”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져 있던 긴장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말이었다.
 이한은 자신의 어깨가 절로 축 쳐지는 것을 느끼며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조금도 지친 것 같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에, 눈빛도 차분했다.
 이한을 알 수 있었다.
 청년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을 벌써 떨쳐버릴 수 있었음을.
 이한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토끼고기를 쭉 찢어서 마구 삼키기 시작했다. 청년이 내미는 작은 호리병을 받아 들이켰더니 향긋한 술이 쏟아졌다.
 벌컥 벌컥!
 술 한 병과 토끼 한 마리가 이한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데에는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배를 채운 이한은 염치도 없이 그 자리에 큰 대자로 뻗어 잠에 빠져들었다. 호랑이에 물려가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잠을 자고 싶었던 것이다.
 날이 밝았다.
 이한은 눈을 뜨는 순간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휴우!”
 청년이 맞은편 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확인했던 것이다.
 ‘무슨 배짱으로 저기서 운기행공을…?’
 이한은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청년이 정말 운기행공을 하는 중인지, 아니면 단순히 눈만 감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문득 모닥불 가에 놓여 있는 청년의 배낭과 하얀 천에 싸여 있는 길쭉한 물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한은 청년을 슬쩍 쳐다보았다가 천천히 그 물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천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천에 싸인 물건이 막 드러나기 직전, 갑자기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에 이한은 기겁을 했다.
 “일어났소?”
 “헉!”
 이한은 서둘러 청년의 물건에서 떨어졌다.
 “험험! 난 그냥…….”
 그는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하얀 천 사이로 삐죽 나온 부분에 눈이 머물렀다.
 이한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과, 광룡승천검!’
 용의 무늬가 양각된 검파를 그가 마침내 보고야 만 것이다.
 이한이 청년을 향해 시선들 돌렸다.
 청년은 풀린 검의 윗부분을 다시 하얀 천으로 싸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오.”
 “그, 그거 정말 광룡승천검이오?”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그 검이 정말 광룡승천검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검파에 양각된 용의 세밀함은 다른 검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한은 청년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청년은 자신의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조용히 따라다니면서 이 청년에 대해 알아보아야겠구나.’
 이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이한은 청년이 왜 자신의 미행을 허락했고, 나아가 동행까지 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을 동행한 끝에, 두 사람은 하북성 기현에 도착했다.
 기현은 작지 않은 마을이었고, 그곳에서 패도 철마령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객잔에 들렀고, 함께 식사를 하며 마주앉았다.
 이한이 슬쩍 물었다.
 “어떻게 찾을 거요?”
 “특이한 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니 어렵지 않을 거요.”
 “어딘가 숨어 있다면 어쩔 거요? 기현을 모조리 뒤질 생각이오?”
 “찾아보다가 안 되면…….”
 청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훗! 나를 데려온 이유가 그것이었소?”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한이 다시 물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자면 추가요금이 붙소.”
 청년이 두말 않고 은자를 꺼내려하자 이한이 손사래를 쳤다.
 “꼭 은자로 지불할 필요는 없소.”
 청년이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럼…?”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하는 거요. 어떻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한다면?”
 “곤란한 부분은 빼고 말하시오. 대신 거짓을 말하면 안 되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한은 곧바로 그에게 물었다.
 “별호와 이름이 무엇이오?”
 “두 가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소.”
 이한이 흠칫하는 표정을 짓더니 청년을 쳐다보았다.
 ‘제법 머리도 굴릴 줄 아는구나.’
 원래 별호와 이름은 같이 묻어가는 법이다. 따라서 두 가지 질문을 함께 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한이 순순히 수긍하더니 다시 물었다.
 “좋소. 그럼 별호를 가르쳐주시오.”
 무림에서는 아무래도 별호가 중요하기에 이한은 별호를 선택한 것이다.
 “없소.”
 청년의 대답에 이한은 잠시 황당해 하더니, 이내 ‘당했구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청년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패도는 어디 있소?”
 이한이 순순히 대답했다.
 “이곳에 용천방이라는 흑도 방파가 있소. 패도 철마령은 그곳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을 거요.”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일어났다.
 이한이 흠칫 하더니 물었다.
 “식사를 마치지도 않았지 않소?”
 “다녀와서 마저 먹겠소.”
 청년이 곧바로 객점을 나갔다.
 이한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도 재빨리 일어나 청년의 뒤를 따랐다.
 그가 객점을 뛰어나온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문을 열고 나갔던 청년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한은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이한은 용천방에 도착했다.
 용천방은 기현에서 가장 큰 흑도방파였고, 그 세력은 하북성 전체를 통틀어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패도 같은 강호의 고수가 식객으로 머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용천방 담 너머에서는 벌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한은 재빨리 신법을 펼쳐 용천방의 담을 넘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재빠르고 은밀하기 그지없는 신법이었지만, 그는 갑자기 헛바람을 집어삼키더니 담을 밟지도 못하고 퉁기듯 뒤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이처럼 몸을 뒤집어 반대편으로 튀어나가는 수법을 금리도천파(金鯉倒穿波)라 한다. 쉽지 않은 신법이었지만 가볍게 펼치는 것으로 보아 이한의 경신법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쪽에서 누군가가 풀쩍 뛰어올라오더니 이한이 넘으려 했던 담 위에 올라섰다. 이한이 담을 밟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날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버, 벌써…….”
 담을 밟고 올라선 건 바로 그 청년이었다.
 청년의 손에는 엄청난 크기의 대도가 들려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새의 날개처럼 휘어진 도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한이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혀, 혈인반월도(血人半月刀)…….”
 바로 패도 철마령의 독문병기였다.
 “도망치시오!”
 청년은 백근이나 나가는 거대한 도를 들고 가볍게 신형을 날렸다.
 이한은 청년의 발목 아래쪽에서 파르스름한 귀화가 순간적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잡아라!”
 그 순간, 용혈방의 고수들이 담장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한도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고, 그는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후아! 후아!
 이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등을 새우처럼 굽혔다.
 용천방의 고수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거의 반시진 가까이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친 끝에 그들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숨을 고른 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나무둥치에 앉아 누런 천으로 대도를 칭칭 감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지도, 이마에 땀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이한은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은 똥줄이 빠져라 도망쳤는데, 청년은 너무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도망치는 덴 아주 선수군.”
 청년이 고개를 들더니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냥 객점에 남아 있었다면 이처럼 뼈 빠지게 도망칠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구나 정보를 생명처럼 여기는 하오문의 문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청년이 도를 천으로 모두 싸더니 광룡승천검과 교차되도록 등에 맸다.
 그가 이한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창을 하나 찾아주시오.”
 이한이 시익 미소를 짓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질문을 교환하기로 했으니, 내가 먼저 묻겠소. 당신은 어떤 무공을 익혔소?”
 청년이 배운 무공만 알 수 있다면 정체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가 배운 건 강호인들이 흔히 말하는 무공이 아니오.”
 이안의 안색이 일순 굳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믿을 수 없소. 지금까지 당신이 펼친 신법은 무엇이며, 또 마검과 패도로부터 무기를 빼앗은 무공은 또 무엇이오?”
 “나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소.”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더 이상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소.”
 “내 말은 사실이오.”
 “그럼 당신이 보인 능력은 뭐란 말이오?”
 “나는 불을 다루는 법을 배웠소. 내가 보여준 능력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오.”
 이한은 순간, 청년이 신법을 펼칠 때 다리에서 파르스름한 기운이 일렁거렸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란 말인가?’
 그가 반신반의하는데 청년이 다시 말했다.
 “창을 찾아주시오.”
 이한이 잠시 청년의 눈을 쳐다보았다.
 강호의 오래 묶은 생강답게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런 그의 눈에 청년은 전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소. 일단 믿기로 하겠소. 휴! 창이라……. 물론 그 창도 좋은 사람이 들고 있진 않겠지요?”
 “아마 그럴 것이오.”
 이한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명호 하나를 입에 올렸다.
 “혈창 민무의!”
 “창의 모습은…….”
 “기창(旗槍) 아니오?”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다시 물었다.
 “창날 바로 아래에는 작은 깃발이 달려 있고, 거기에 아수라가 수놓아져 있지 않소?”
 청년이 흠칫 놀라며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이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생각난 대로 말했는데, 맞아 떨어졌을 뿐이오. 세상에 광룡승천검이나 혈인반월도와 비견될 만한 창을 꼽으라면 아수라번천창(阿修羅翻天槍)밖에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어디 있소?”
 이한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답했다.
 “섬서 삼문협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수적들의 수괴가 한 달 전에 바뀌었소. 혈창 민무의가 바로 새로 바뀐 수괴요.”
 이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섬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한은 또다시 시작된 지옥 같은 여행길을 생각하자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을 따라가지 않고 포기하자니 너무 아쉬웠다.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겠는가.
 “끄응!”
 이한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섬서 삼문협까지 사흘 만에 주파했다. 삼문협에 도착한 후 이한은 파김치가 되어 늘어졌지만, 청년은 곧바로 수적들을 찾아가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이한은 죽었다 깨어나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청년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나, 나도 데려가 주시오.”
 명색이 신법 하나로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자신이었기에 그런 부탁을 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다시없을 구경거리를 그냥 놓치기는 정말 싫었다.
 청년이 잠시 이한을 쳐다보더니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신형을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황하 양안의 절벽 위에서 하곡을 내려다보면 상류에서 밀려 내려오는 거대한 물줄기가 보인다. 그 물줄기는 동쪽으로 향하면서 더욱 급해져 삼문협(三門峽)에 들어서서는 하늘을 울릴 듯한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콰르르릉!
 마치 우레 같은 소리가 협곡 전체를 진동시키는 광경에 청년과 이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한의 경우 삼문협에 세 번을 와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 다시 찾았어도 놀라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삼문협의 급류가 잦아드는 아래쪽에 꽤 큰 나루터가 보였다. 나루터에는 몇 척의 쾌속선과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짐꾼들이 수레로부터 내린 짐을 화물선에 싣고 있었다.
 거친 삼문협의 급류를 저어가면 뾰족한 바위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데, 순간적인 판단으로 생사가 결정될 정도로 위험하다. 따라서 쾌속선과 화물선의 선원들은 노련하고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한이 나루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삼문협을 건너가자면 저 배를 타야 하오.”
 “수채가 있는 곳은 어디요?”
 “저쪽 건너편, 굽이치는 물줄기가 사방을 감싸고 있는 작은 섬이오. 새가 아닌 이상……. 헉!”
 그가 말을 하다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청년이 자신의 팔을 잡고 그 자리에서 하늘로 솟구쳤던 것이다.
 이한은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청년은 삼문협의 거친 물결 위를 새처럼 날아가 삼십 장 건너편에 있는 뾰족한 바위 위에 안착했다. 이한이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다시 몸을 날린 청년은 네 번의 바위를 거쳐 건너편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청년의 손에서 풀려난 이한이 그 자리에 엎드리더니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웩! 웩!”
 한바탕 뱃속에 든 것을 게워내고서야 이한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렀다.
 “헉!”
 그의 입에서 또다시 헛바람 집어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많은 수적들이 적의에 찬 모습을 자신과 청년을 포위한 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한은 청년이 곧바로 자신을 데리고 수채 한복판에 날아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가공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엄청난 신법이었지만 지금은 놀랄 틈도 없었다.
 수적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청년과 이한을 노려보면서도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청년의 신법에 크게 놀란 게 분명했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수뇌부로 보이는 수적 한 명이 물었지만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가장 안쪽에 있는 제법 큰 목옥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곳에 있군.”
 청년이 이한의 팔을 잡더니 다시 신형을 날렸다.
 이한이 몸이 한쪽으로 급격히 쏠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마치 아이의 손에서 마구 휘둘러지는 목각인형 같았다.
 청년이 이한을 한쪽 팔에 끼고 목옥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목옥의 문이 박살나 흩어지더니 섬광이 번뜩였다.
 청년의 신형이 더욱 빠른 속도로 뒤로 날아갔다.
 이한은 또다시 속에서 먹은 게 올라오려 했지만 악착같이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창영이 거대한 벽을 이룬 채 자신과 청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난창무적세(亂槍無敵勢)!
 상대를 창영속에 가두어 어육으로 다져버린다는 혈창 민무의의 필생절학이었다.
 창영속에 휩쓸리기 직전, 이한은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확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러섰다. 물론, 청년이 자신의 허리를 잡고 뒤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그 속도였다. 어찌나 빨랐는지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다행히 그렇게 뒤로 물러선 덕분에 창영속에 휩쓸리지 않았다. 대신 하늘로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목옥 지붕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화르르르르!
 이한은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를 그때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뻘건 불길이 옆에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지붕을 향해 날아가는 게 아닌가!
 펑! 와르르르!
 마치 폭약이 터진 것처럼 지붕이 폭발해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 사이로 청년이 이한을 붙잡고 뛰어들었다.
 쉬쉿!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뼈를 에일 듯 날카로운 경기가 몰려들었다.
 이한은 죽었구나 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화르르르!
 크흑!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쥐어짜는 듯한 신음성이 들렸고, 몸이 다시 한쪽으로 쏠린다 싶은 순간 눈앞이 밝아졌다. 어느새 지붕을 뚫고 올라와 허공을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청년은 이한을 붙잡은 채, 지붕을 뚫고 들어가 순식간에 혈창 민무의를 제압하고 그의 창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지붕위로 뚫고 나온 후, 처음 수채에 날아왔던 것처럼 삼문협을 건너갔다.
 휙! 타닷!
 청년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이한은 그 자리에 고꾸라져서 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웩!”
 한동안 뱃속의 것을 게워내고 나자 하늘이 노랗게 변해서 빙빙 돌았다. 그는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숨을 헐떡였다.
 후아! 후아!
 그렇게 잠시 쉬고 나자 간신히 정신이 들었고, 이한은 옆에서 창을 천으로 둘둘 말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았다.
 이한은 갑자기 청년이 두려워졌다. 자신이 경험한 건 분명히 무공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과 손에서 불덩어리를 뿜어내는 무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한은 청년이 괴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맑고 차분해 보이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광기가 언제 갑자기 깨어나 자신을 불로 구워버릴지 두려웠다.
 창을 천으로 모두 만 청년이 검과 도가 교차한 곳 중간에다 찔러 넣었다. 덕분에 청년은 도검의 손잡이가 양쪽 어깨위로 솟았고, 창두가 머리 위쪽으로 삐죽 솟아오르는 기괴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어두운 밤에 누군가 그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마왕이 나타났다고 비명을 지르고 말 것이었다.
 이한은 더 이상 청년을 쫒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청년에게 붙잡혀 다니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제 혼자 가시오.”
 청년이 이한의 초췌한 행색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이 말했다.
 “찾는 물건이 더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아는 대로 모두 말해주리다.”
 “륜(輪) 한 쌍과 편(鞭) 하나, 그리고 비도(飛刀) 한 자루요.”
 “특징들을 말해 보시오.”
 “륜 한 쌍에는 각각 해와 달이 새겨져 있소. 그리고 편은 검은 색인데 콩알 같은 돌기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소. 마지막으로 비도는 어른 손바닥 길이 정도인데 도신이 검붉은 색이요. 아무리 강한 호신강기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도 그 비도는 막기 어려울 거요.”
 이한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천상일월륜(天上日月輪), 풍운무적편(風雲無敵鞭), 그리고 혈왕인(血王刃)이 분명할 것이오.”
 “그것들은 어디 있소?”
 “약속대로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한다면 알려주겠소.”
 “말하시오.”
 “신병들을 모으는 이유가 무엇이오?”
 “강호에 혈풍을 일으킬 물건들이라 회수하는 것이오.”
 “회수? 그렇다면 원래 당신의 것이었단 말이오?”
 “두 번째 질문으로 생각해도 되겠소?”
 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이 대답했다.
 “사부께서 만든 것이요.”
 이한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낙 오래 전에 출현한 병기들이라 언제 누가 만들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만든 사람이 청년 사부라니, 이한으로서는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청년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한이 다시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요. 당신의 사부는 누구요?”
 청년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비밀을 지켜주겠다면 말해주겠소.”
 “나는 하오문도요. 하오문은 정보를 공유하오.”
 “그럼 곤란하오.”
 “음! 좋소. 그럼 문주님께만 보고 한 후, 비밀을 지키겠소.”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음을 펼치는 게 분명했다.
 청년의 전음을 들은 이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미, 믿을 수 없소.”
 “믿건 말건 당신의 자유요. 하지만 나는 사실을 말했으니 당신도 그 세 가지 물건의 행방을 말해주시오.”
 이한은 극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의 사부가 정말 그 사람이라면, 나타난 지 최소한 이백년 이상 된 신병들의 제작자라는 점과, 청년이 보여준 불가사의한 능력 또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그의 제자라면 불덩어리를 뿜어내고, 하늘을 휙휙 날아다닐 수도 있겠지.’
 이한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청년의 사부가 살았던 시대와 현재 사이에 있는 시간적 괴리를 극복하기 어려웠지만, 그것 말고는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이한이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천상일월륜은…….”
 그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청년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한에게 말했다.
 “고맙소. 그럼 인연이 닿는다면 또 봅시다.”
 청년이 머리를 살짝 숙여 보인 후, 등을 돌렸다.
 이한은 청년이 신법을 펼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소리쳤다.
 “당신의 이름은…….”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년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이한이 한숨을 내쉬더니 까마득히 멀어져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때, 멀리서 바람을 타고 청년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추영……. 진추영이요…….”
 이한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진추영이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이한이 기운찬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한바탕 장소성을 토해냈다.
 “우우…….”
 내공이 실린 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2장 진가철장
 
 
 푸욱 푸욱!
 깡! 깡! 깡! 깡!
 풀무질, 망치질소리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곳은 바로 대장간이다.
 진가철장.
 이름 그대로 진씨 성을 지닌 대장장이가 오대 째 운남성 온양현에서 운영하고 있는 유일한 대장간이 바로 이곳이다.
 진가철장에서 만드는 농기구나 철물들은 상당히 질이 좋아서 마을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 이웃 마을들에서도 찾아와 농기구를 사 가거나 수리를 맡길 정도니 말이다.
 사실 진가철장의 철물들이 꽤 좋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처럼 이웃마을에서 찾아올 정도의 물건을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작년 겨울, 팔년 전에 묵철을 주우러 갔다가 화산에 떨어져 죽었다고 알려졌던 진가철장의 장남 진추영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후부터 진가철장의 명성은 일취월장 했다.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나타났느냐는 동네 어르신들의 물음에 진추영은 그저 빙그레 웃는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동네 꼬마들에게는 신선 할아버지를 만나서 함께 살다가 돌아왔다고 대답해 주었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진추영은 돌아왔고, 그의 부모와 누이는 크게 기뻐했으며 진가철장이 예전의 활력을 되찾았다. 더구나 진추영이 철을 다루는 솜씨는 그의 부친, 진자양보다 훨씬 뛰어났다.
 원래 대장간 일이라는 게 힘과 기술, 그리고 세월이 가져다주는 경험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야만 완숙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뛰어난 철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진추영은 잃어버린 지난 팔년의 세월동안 어디서 무얼 하다가 왔는지 모르지만, 평생을 대장간에서 보낸 부친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자양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수없이 물어보았지만, 진추영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화산 아래에서 스승을 만나, 불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왔다는 것이다.
 진자양 부부는 아들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지난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모르지만 운 좋게 화산에서 벗어난 후 대장장이 노인을 만났고, 그에게 팔년 동안 잡혀서 죽도록 일을 하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와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 대장장이 노인을 잡아다가 물고를 내고 싶었지만, 아들이 한사코 그를 감싸는데다가 더욱 건강해진 모습으로, 그것도 뛰어난 대장장이까지 되어 나타났으니 그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깡! 깡! 깡!
 웃통을 벗어 잘 발달된 상체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채, 망치질에 열중하고 있던 훤칠한 청년 진추영의 모습을, 한쪽 구석에서 그의 부친인 진자양이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진자양은 아들의 망치질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는데, 마치 흥겨운 음악을 듣고 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허허허. 추영이 이 녀석의 망치질 소리는 어찌 이리 흥겨울꼬. 소리도 경쾌하고 박자도 딱딱 맞아 떨어지니, 원! 허허허.’
 진자양은 즐겁기 한량이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대장장이를 업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다. 망치질 소리만 들어도 그 대장장이의 실력과 철의 품질, 그리고 거짓말을 좀 보태면 뭘 만드는지도 알아차리는 노련한 대장장이란 뜻이다. 그런 그도, 지금 아들이 내는 망치질 소리를 아직 낼 수 없었다.
 오래 전에 그의 부친이 임종을 앞둔 어느 날, 뭔가에 홀린 것처럼 미친 듯이 망치질을 해댄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소리가 지금 아들의 망치질 소리와 묘하게 닮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평생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장인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이른 경지에 아들이 벌써 다다랐다는 건 정말 기쁘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진추영이 만들어 내는 철물은, 그가 내는 망치질 소리만큼이나 뛰어났다. 그가 만들어내는 농기구들이 그러했다. 어지간히 험한 일을 해도 잘 부러지지 않으며,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녹이 피거나 날이 무뎌지는 일이 드물었던 것이다.
 낫, 호미, 괭이 같은 농기구야 은자 한 냥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물건들이지만, 실제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농사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구들이다.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들에게 매년 그것들을 구입하거나 수리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진추영이 만든 농기구들 덕분에 이제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농사꾼들로서는 크게 반가워할 일이었지만, 반대로 진가철정은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적당히 쓰다가 부러지거나 날이 무뎌져야 다시 대장간을 찾아 새로 구입하거나 수리하느라 돈을 쓸 것인데, 이제 그럴 일이 줄어들었으니 당연히 대장간의 수입도 곤두박질 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장간의 살림이 어려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훨씬 풍족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뛰어난 대장장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부잣집의 호두(虎頭), 용두(龍頭) 모양의 대문고리나 십이지신이 조각된 장식품 같은 것들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해 왔던 것이다. 다행이 진추영은 그들의 안목을 충분히 만족시켜줄만한 물건들을 만들어 주었고, 거기에 따른 금전적 재미도 꽤나 쏠쏠했다.
 덕분에 진추영의 모친 염방은 요즘 입이 귀에 걸렸다. 일 년 동안 알뜰살뜰 절약하며 살아야 모을 수 있을 돈을 요 몇 달 사이에 다 벌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벌면 아들 장가 밑천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호호호!”
 진추영의 모친이 요즘 입만 열었다 하면 떠들고 다니는 말이 이것이었다.
 진추영의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누이 진아영도 신이 났다.
 방년 십삼세의 이 예비 소저(小姐)는 이제 한참 몸치장과 미모에 눈을 뜰 시기였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해도, 낮에 시장에서 보았던 예쁜 귀걸이나 반지, 그리고 포목점에 걸려 있던 비단치마가 눈앞에서 아른거릴 나이라는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오라비인 진추영이 만들어준 장신구들은 정말 예뻤다. 오죽하면, 그녀가 걸고 다니는 장신구를 본 잡화점의 주인이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그걸 어디서 구입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원래 장신구나 귀물(貴物)들을 만들어 파는 곳은 대장간이 아니라 공방이었다. 공방에서 옥이나 보석, 그리고 금, 은과 같은 귀물들을 세공해 귀중품이나 사치품들을 만들어 파는 게 일반적이다. 그에 반해, 대장간은 주로 크고 무거운 철물을 주조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진추영은 어디서 그런 재주를 배워왔는지 투박한 쇠로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그리고 반지 같은 걸 만들어 누이동생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장신구의 수준은 어지간한 공방의 장인이 보고 울고 갈 정도였다.
 만약 진추영이 금이나 은, 그리고 보석같은 귀물들로 장신구를 만든다면 공방의 제품보다 훨씬 뛰어날 게 분명했다.
 이처럼 진가철장의 명성도 높아졌고, 대부분의 대장간 일들을 아들인 진추영이 알아서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진자양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질 리가 없었다.
 한참 망치질 하고 있던 진추영에게 진자양이 소리쳤다.
 “추영아! 그만 좀 쉬었다 하거라.”
 훤칠한 키에,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사내다운 얼굴을 한 진추영이 싱긋 웃으며 망치를 놓았다.
 햇살이 따가운 유월 중순의 더위에 화로의 열까지 더해져, 후끈한 열기가 감도는 대장간 안에서 한참동안 망치질을 한 진추영이었지만,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조차 솟아나지 않았다.
 원래, 화로의 쇳물을 다루느라 온 몸에 크고 작은 화상 흉터를 훈장처럼 지니고 사는 게 대장장이들이다. 그러나 진추영의 피부는 그들과는 달리 매끄럽기만 했다.
 진자양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아들의 등을 이리저리 닦아주었다.
 “아버지. 전 괜찮아요.”
 “어떻게 그처럼 일을 하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너 혹시 이 아비 몰래 산삼(山蔘)이라도 삶아 먹은 것 아니냐?”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 부친에게 진추영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삶아 먹을 산삼이 있었다면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께 먼저 상납 했을 겁니다.”
 “음. 정말이냐?”
 “제가 아버지께 거짓말 한 적 있습니까?”
 “험험. 뭐 사실이면 할 말 없고……. 헌데, 왜 어제 진부자집에서 서궤(書櫃)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는 거절했느냐? 그걸 맡았으면 꽤나 짭짤했을 것 같은데.”
 “말이 서궤지 실제로는 다른 거였어요. 자물쇠까지 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세상에 누가 서책을 무거운 철궤에 넣고 자물쇠까지 채운답니까? 그건 분명히 금고(金庫)예요.”
 “금고라고?”
 “예,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부잣집 금고를 만들어 줬다가 훗날 도둑에게 털리기라도 하면, 그 죄를 누가 다 뒤집어쓰겠어요?”
 “흠. 그렇긴 하지. 쩝!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구나.”
 그가 입맛을 다시며 아들의 등을 한번 쓸어주었다. 물기라고는 전혀 없이 매끈한 감촉에 진자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자양은 처음 아들이 땀을 거의 흘리지 않는 것을 보고 혹 몸 어딘가 병이 나서 그럴까 하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겨우내 고뿔 한번 들지 않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이제 그런 걱정들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아들은 소처럼 힘이 셌고, 또 건강했던 것이다.
 “계시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진자양 부자(夫子)가 고개를 돌렸다.
 작은 키였지만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상체를 지닌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진자양은 그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자신과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 듬성듬성 나 있는 작은 점과 같은 자국들은 불똥이 튀어 입은 화상자국이 분명했고, 그와 같은 흉터는 진자양 자신의 몸에도 가득했던 것이다.
 그의 뒤를 따라 나지막한 유생건을 쓴 중년인 한 명이 또 들어왔다. 전형적으로 문서나 금전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사람이 분명했다.
 진자양이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무지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고,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들을 대하는 진자양의 어투에는 다소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장인으로 보이는 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매향공방(梅香工房)의 북서부지점에서 온 점두(店頭) 고봉팔이요. 그리고 이쪽은 점장(店長) 운계상이오.”
 진자양의 안색이 일순 굳었다.
 매향공방이라면 운남성 일대를 거의 잡고 있는 거대 공방으로 곳곳에 지점까지 두고 있다. 주로 무림인들의 병장기나, 여인들을 위한 장신구, 혹은 부자들을 위한 귀물을 만들어 파는 곳이 바로 공방이라면 매향공방은 그런 공방들의 거대한 연합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진자양의 진가철장도 오래 전부터 매향공방의 산하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대장장이를 가업으로 삼아 살아온 진자양으로서는 조상이 물려준 진가철장을 팔아넘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자양은 그런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매향공방에 전달했고, 매향공방에서도 진가철장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진가철장이 영향을 미치는 상권은 매향공방의 관심을 받기에 너무도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십여 년 전인데, 갑자기 점장과 점두라는 우두머리들이 한꺼번에 방문을 했으니 진자양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향공방에서 무슨 일로 우리 철장을 찾은 것이오? 더 이상 그쪽 사람들의 얼굴을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오.”
 고봉팔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사내가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대장간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대장간 안에는 투박한 농기구들만 잔뜩 걸려 있을 뿐, 특별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
 고봉팔는 손을 뻗어 벽면에 쭉 걸려 있는 낫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낫의 날을 만져보고 무게를 이리저리 가늠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물건이구료.”
 고봉팔은 상당히 뛰어난 대장장이였다. 칭찬에 인색하고 장인 특유의 옹고집이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거 이 정도로 말했다는 건 사실 큰 칭찬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겨운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던 점장 운계상이 흠칫 놀라더니 진자양과 진추영을 관심어린 눈길로 쳐다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고봉팔이 품을 뒤적이더니 작은 귀걸이 한 쌍을 내밀었다.
 뒤쪽에 서 있던 진추영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자신이 누이에게 선물로 준 귀걸이였기 때문이다.
 진추영이 굳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고봉팔이 순순히 귀걸이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진추영은 목걸이를 한 번 더 확인하더니 대장간 안채를 향해 소리쳤다.
 “아영아! 아영아!”
 안채에서 소녀의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왜?”
 “잠시 나와 봐!”
 곧이어 십삼사세 정도의 예쁘장한 소녀가 나오더니 낯선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바로 진추영의 여동생 진아영이었다.
 진추영이 다소 굳은 얼굴로 누이에게 물었다.
 “아영아. 혹시 오빠가 만들어준 이 귀걸이를 다른 사람에게 준 적이 있어?”
 진아영은 오라비의 손에 들린 귀걸이를 확인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준 건 아니구…….”
 “그럼 어떻게 된 거야?”
 꾸짖는 듯한 진추영의 목소리에 진아영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 잡화점 아저씨가 하도 팔라구 해서…….”
 “너, 그걸 팔았단 말이야?”
 “미, 미안해 오빠. 과일이랑 과자가 하두 먹고 싶어서 그만…….”
 진아영의 아비인 진자양이 그녀를 꾸짖었다.
 “그게 먹고 싶었으면 이 아비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왜 오빠가 만들어준 선물을 팔았느냐?”
 “죄, 죄송해요, 아빠.”
 “쯧쯧쯧!”
 진추영은 철없는 누이동생을 보고 내심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갓난아기였을 때 진추영이 업어서 키웠고, 화산에서 진추영이 실종된 후 진자양 부부는 그녀를 금이야 옥이야 길렀다. 진추영에게 잘해주지 못한 걸 보상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덕분에 진아영은 예비소저의 나이가 되었어도, 아직 철없는 소녀나 다름이 없었다.
 진아영이 혼나는 모습을 본 고봉팔이 보다 못해 나섰다.
 “따님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이거, 괜한 분란을 일으킨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진추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잡화점에 팔았다는 이 물건이 어떻게 매향공방의 손에 들어갔습니까?”
 “우연히 얻게 된 것이네. 잡화점의 주인이 이런 물건을 만들어 줄 수 없겠냐고 우리 공방에 의뢰를 보내왔을 따름이네.”
 진추영으로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매향공방의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귀걸이의 우수함을 알아보고 그걸 만든 사람을 직접 찾아온 것이리라.
 고봉팔이 진추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네가 만든 귀걸이인 모양이군. 그렇지 않은가?”
 진추영이 순순히 시인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대단하군.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듯 한데…….”
 진자양이 아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내 아들이 그 귀걸이를 만든 것과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오?”
 “음. 훌륭한 아드님을 둬서 기쁘겠소이다.”
 자식 칭찬을 하는 데 기분 나쁠 부모는 없는 법이었다.
 “험험! 뭐, 우리 아들의 실력이 좀 뛰어나긴 하오. 헌데, 무슨 일로 이곳을 찾은 것이오?”
 고봉팔이 고개를 돌리더니 함께 온 점장 운계상에게 눈짓을 했다.
 운계상이 나서더니 캬랑캬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진가철장과 우리 공방의 인연은 작다고 할 수 없지요. 오래 전에도 우리 매향공방과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의를…….”
 운계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자양이 나섰다.
 “그 이야기라면 더 할 말이 없소. 그만 나가주시오.”
 “진장주님의 의견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의 생각은 다를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진자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거라.”
 진추영이 대답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만, 제 대답은 아버님께서 오래 전에 하셨네요. 죄송합니다.”
 진자양이 보란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
 “들었소? 아들의 뜻도 나와 다르지 않으니 앞으로 매향공방의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운계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봉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한 일로 헛걸음 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고봉팔은 여전히 미련을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진추영에게 사정하듯이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없겠나? 자네의 실력이라면 우리 매향공방에서도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네. 한 달에 은자 열 냥은 너끈히 받을 수 있지.”
 고봉팔의 말에 곁에 있던 운계상이 눈을 크게 뜨더니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은자 열 냥이라니?”
 “오늘 일은 내게 맡겨 두기로 하지 않았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그러니 점장은 가만히 계시다가 계약서 작성이나 제대로 하시오.”
 “이, 이런…….”
 운계상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좋다. 어디 두고 보자.’
 고봉팔이 운계상을 가리키며 진추영에게 말했다.
 “여기 이 사람은 우리 매향공방의 운남 북서부지점장의 지위에 있는 사람일세. 그건 지점의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이란 뜻이네. 그런 사람이 동석한 자리이니 결코 내가 헛된 말로 자네를 현혹한다고 생각지는 말게. 자, 어떤가?”
 진자양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자신의 아들과 고봉팔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한 달에 은자 열 냥이라면 일 년에 일백이십 냥이라는 거금이다.
 실제로 진가철장에서 일 년간 뼈 빠지게 일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은자 오십 냥에 불과하니, 고봉팔의 제의는 진자양으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추영 곁에 있던 누이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오라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세상에! 한 달에 은자가 열 냥이래!”
 하지만 진추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조상님들의 피땀이 배여 있는 이 대장간에서 평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고봉팔이 짧게 말했다.
 “이십 냥.”
 고봉팔과 진추영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죄송합니다.”
 “삼십 냥!”
 순간, 운계상의 입에서 ‘억!’하는 소리가 나왔다. 삼십 냥이라는 월봉은 지점의 수석 장인인 고봉팔이 받는 액수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은자가 문제가 아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참다운 장인이시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게 아닙니까?”
 고봉팔이 무거운 눈길로 진추영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낫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놈은 우리 지점에 없다. 이 녀석이라면 내가 지닌 모든 기술을 다 전수해줘도 아깝지 않을 텐데……. 아쉽구나. 인연이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고봉팔이 아무 말 없이 낫을 내려놓더니 손을 내밀었다.
 진추영이 들고 있던 귀걸이를 그에게 전해주었다.
 귀걸이를 다시 한 번 살피던 고봉팔이 한숨을 내쉬더니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운계상이 혼자 남아 잠시 머쓱해 하더니 그를 따라 대장간을 떠났다.
 매향공방에서 찾아온 두 손님이 떠났음에도 대장간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진자양과 진아영은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추영이 빙긋 미소를 짓더니 누이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요녀석! 또 오빠가 만들어준 선물을 팔아먹기만 해봐라. 혼구멍을 내 줄 테다.”
 진아영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왜 거절했어, 오빠? 한 달에 삼십 냥을 준다잖아? 세상에! 은자가 삼십 냥이야, 삼십 냥! 그것도 한 달에!”
 이번에는 진자양이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요 녀석! 뭘 잘했다고 나서는 것이냐? 오빠가 이 대장간을 떠나고 나면, 이 애비에게 또다시 예전의 그 뼈 빠지게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란 말이냐?”
 진아영이 눈을 흘겼다.
 “아빤! 아빠가 대장간 일을 왜 해? 오빠가 벌어다 주는 은자를 쓰기도 바쁠 텐데.”
 따지고 보면 그녀의 말이 틀린 구석이 없었다. 아들이 한 달에 은자 열 냥을 벌어다주고, 대장간의 수입까지 합치면 그럴 듯한 집을 사서 하인까지 부려가며 어르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진자양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봐! 아빠도 솔깃하지?”
 “험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넌 들어가, 어머니에게 저녁 준비나 서두르라고 말하거라.”
 “피! 아빤…….”
 진아영이 입을 삐죽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진자양이 아들에게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추영아.”
 “예, 아버지.”
 “후회하지 않겠느냐?”
 “아버지라면 어떻게 대답하셨겠습니까?”
 “허허, 솔직히 마음이 솔깃한 제안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이 대장간을 버릴 순 없을 것 같구나.”
 “저도 그래렇습니다.”
 “허허허, 녀석!”
 진자양이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자네 진심이었나?”
 진가철장을 나선 점장 운계상이 앞서가던 점두 고봉팔을 따라잡아 따지듯 물었다.
 고봉팔의 두 눈에 갈등의 빛이 스쳐갔다.
 만약 자신이 진심이었다고 말한다면, 진추영이라는 그 청년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갈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매향공방은 훗날 강력한 경쟁자가 될 지도 모를 뛰어난 장인과 한 하늘아래서 공존을 허락할 만큼 자비로운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매향공방은 분명히 사람을 다시 보내,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진추영을 기필코 끌어들이고 말 것이며, 그게 여의치 않는다면 더 이상 대장장이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릴 게 분명했다.
 아무리 매향공방의 밥을 먹는 고봉팔이었지만, 장인의 한 사람으로서 미래에 뛰어난 장인이 될 소질이 다분한 청년의 꿈이 무참히 꺾이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갈등의 시간은 짧았다. 고봉팔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은자 삼십 냥이 어떤 돈인데 그 큰돈을 약속한단 말인가? 그냥 떠봤을 뿐이네.”
 “음. 역시 그랬군. 이 사람……. 놀라서 간 떨어질 뻔 했네. 그가 덜컥 계약을 하겠다고 했으면 어떡할 뻔 했나?”
 “월봉 열 냥에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라면 삼십 냥을 불러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네. 그게 장인일세.”
 “휴! 장인들이란……. 어쨌든, 그가 우리 둘이 직접 나설 만한 실력은 지니고 있던가?”
 “기본이 잘 닦여 있었네. 제대로 가르치면 훗날 내 지위도 물려받을 수 있을 만한 녀석이었어. 하지만 저런 대장간에서 농기구나 만들며 지낸다면 평생 그 꼴을 벗어나진 못할 것일세.”
 “음. 이거 괜한 시간 낭비만 했군. 에이! 어서 돌아가세!”
 역정을 내며 앞서 걸어가는 운계상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고봉팔이 내심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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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교한 달빛이 내려쬐는 진가철장의 후원이었다.
 후원이라고 해봐야 소나무 몇 그루에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자라나 있고, 큼직한 바위 세 개가 듬성듬성 놓여 있는 볼품없는 장소이지만, 한밤중에 식구들 몰래 진추영이 자주 찾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 밤도 그 바위들 중 하나에 진추영이 가부좌를 한 채 앉아 달빛을 받고 있었다.
 “흐읍!”
 숨을 배로 깊숙이 빨아들인 다음, 그는 한식경이 지나도록 내뱉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숨이 멈추지나 않았을까 하고 의심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휴!”
 마침내 그의 입에서 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물고 있는 진추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진인(眞人)이 도를 닦는 것과 흡사했다.
 그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은은하게 어린다 싶더니, 온 몸에서 갑자기 붉은 불길이 확 일어났다. 덕분에 주위가 훤해졌지만, 그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붉은 불길은 언제 꺼졌느냔 듯 사라졌고 대신 파르스름한 색깔이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그의 전신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건, 근처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조금도 옮아 붙지 않았고, 진추영이 입고 있는 옷 또한 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타지 않는 불길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기사(奇事) 중에서도 기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진추영이 두 눈을 떴다.
 순간, 밝은 섬광이 뇌전처럼 그의 눈에서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진추영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수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파르스름한 기운이 꿈틀거리며 뿜어져 나오더니 허공에서 일정한 형태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건 분명히 용(龍)의 형상이었다.
 진추영의 손길에 따라 입으로 불을 뿜어낸다는 화룡(火龍) 한 마리가 나타나 허공에서 화려한 용무(龍舞)를 한바탕 추기 시작한 것이다.
 화룡진무(火龍眞舞)!
 진추영이 사부로부터 배운 모든 것의 정화가 바로 여기에 담겨있었다. 그건 무공(武功)이나 선법(仙法), 혹은 사술(邪術)이라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추영이 지닌 모든 능력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진추영의 손길을 따라 허공을 희롱하고 놀던 화룡은, 어느 순간 다시 그의 몸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진추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신광이 어려 있던 그의 두 눈은 제 빛을 찾았고, 파르스름하게 타오르던 불길도 깨끗이 사라졌다.
 진추영은 크게 기지개를 한번 켜더니 빗자루를 들고 후원을 쓸며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을 맞았다.
 
 “추영아. 이것 좀 들어다오.”
 “예, 어머니.”
 진추영은 자신의 모친이자 진가철장의 안주인 염방과 함께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길을 나섰다. 보자기는 제법 무거웠는데, 반은 곡식이 들어 있었고 나머지 반은 온갖 먹을거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 모자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간 곳은 마을 어귀 산비탈에 살고 있는 나무꾼 장씨네 집이었다.
 나무꾼 장씨는 말이 없고 무척 무뚝뚝한 사내로 평소 마을 사람들과 내왕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살림이 변변한 것도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조차 바쁜 실정이니, 그런 그가 좋다고 시집이라도 올 처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경원시하는 그였지만, 진부인은 결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진추영이 화산에서 실종된 후, 그녀는 거의 정신을 놓아버리고 살았는데, 밤마다 아들을 찾는답시고 주변 산을 쏘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이 없게도 독사에 물리게 되었는데 때마침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죽어가는 그녀를 구한 게 바로 나무꾼 장씨였던 것이다.
 진추영이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정신을 차린 그녀는 틈만 나면 혼자 사는 불쌍한 나무꾼 장씨에게 정성껏 음식을 해서 가져갔던 것이다.
 허름한 모옥의 쪽문을 열고 들어가자 몸져 누워있는 나무꾼 장씨의 모습이 두 모자의 눈에 들어왔다.
 나무꾼 장씨가 힘겨워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진부인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사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누? 쯧쯧, 평소 소처럼 건강하기만 하더니……. 그래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가?”
 나무꾼 장씨가 고개를 숙이며 우물거렸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진추영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진부인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자넨 그냥 누워 있게. 내 음식을 좀 만들어 줄 테니.”
 그녀는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불을 피우고 물을 데우고, 보자기에서 꺼낸 장닭을 잡아 털을 벗기기 시작했다.
 진추영은 나무꾼 장씨가 어머니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아저씨. 왜 갑자기 몸이 아프신 겁니까?”
 진추영이 아는 나무꾼 장시는 타고난 신력을 지녔고, 홀 옷을 입고 다녀도 겨우내 고뿔 한번 드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거 갑자기 몸져누웠으니 의아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요즘 좀 힘이 들어서…….”
 애초에 그로부터 제대로 된 대답을 듣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진추영은 곧바로 그의 방에 들어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진추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펄펄 끓는다고까지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무꾼 장씨의 손목을 잡았다.
 갑자기 진추영이 자신의 손목을 잡자 깜짝 놀란 장씨가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마치 강철집게에 잡히기라도 한 듯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몸이 아프다고는 하지만 마을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하는 신력을 지닌 그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진추영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이대로 계세요. 제가 진맥하는 법을 좀 알거든요?”
 “지, 진맥을? 어, 어디서 배웠어…?”
 “집을 떠나 있었을 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많을 것들을 보고 배웠어요.”
 나무꾼 장씨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진추영은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화기를 조금 일으켜 그의 맥문 안으로 주입했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란 장씨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진추영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잠시 가만히 계세요.”
 “그, 그래.”
 맥문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온 기운은 한동안 온 몸을 헤집고 난 후에야 사라졌다.
 그의 맥문을 놓은 진추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꾼 장시의 혈맥에 불순물이 너무도 많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근육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불순물이 많았는데, 그건 평소 근육을 너무 혹사시키고 제대로 쉬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진추영은 도대체 왜 나무꾼 장씨가 갑자기 몸을 이렇게 혹사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보통사람보다 두세 배의 일을 더 해도 거뜬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혹시 요즘 힘든 일이라도 하고 계십니까?”
 “내 일이 원래…….”
 “그래도 요즘 특히 심하게 일하지 않으셨습니까?”
 “좀 피곤하긴 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셨어요? 혹시 어디 집이라도 혼자 짓고 계신가요?”
 “아니. 그냥…….”
 진추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진추영이 다시 그의 맥문을 잡으며 말했다.
 “잠시 고통스러울 겁니다. 참을 수 있죠?”
 나무꾼 장씨가 눈을 크게 뜨고는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빨을 악물며 어떤 고통이라도 참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진추영이 내심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맥문을 통해 화기를 집어넣었다. 이번에 그가 발휘한 화기는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서 나무꾼 장씨는 식은땀까지 줄줄 흘려가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추영과의 약속 때문인지 신음성은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혈맥 안에 있던 불순물을 깨끗이 태워버린 후, 진추영은 화기를 거두었다.
 “휴!”
 나무꾼 장씨가 긴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안색을 밝히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 몸이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지금은 날아갈 듯 멀쩡해졌기 때문이다.
 “고, 고맙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마세요.”
 나무꾼 장씨가 흠칫 하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추영은 그런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실 되어 보였다. 아마도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오늘의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무꾼 장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하자 진추영이 말렸다.
 “오늘은 그냥 쉬세요.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이나 맛있게 드시고 말이에요. 아무리 나아졌다고 하지만 갑자기 몸을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요.”
 나무꾼 장씨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다시 자리에 누웠다.
 진추영이 미소를 짓더니 방을 나왔다.
 부엌에서는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국이 한창 끓어오르고 있었고, 그 외에도 구수한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다.
 진추영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꾼 장씨의 세간 살림이라고 해야 정말 보잘 것이 없었다.
 단지 특이한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큰 나무지게와 도끼 한 자루였다.
 진추영이 다가가 도끼를 들어올렸다.
 꽤나 무거워 어지간한 장사가 아니면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도끼를 살펴보던 진추영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이, 이건…….”
 그는 나무꾼 장씨가 왜 몸살이 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도끼 때문이었다. 날이 거의 다 닳아 더 이상 도끼라 부르기도 민망한 쇠몽둥이에 불과해 보였던 것이다.
 “세상에! 지금까지 이걸로…….”
 이런 도끼로 나무를 한다면 초패왕 항우가 온다고 해도 몸살이 나 쓰러지고 말 것이었다.
 진추영이 잠시 주위를 들러보더니 도끼와 자루를 가볍게 분리시켰다. 곧이어 그가 화기를 일으키자 놀랍게도 도끼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진추영은 엄지와 검지로 도끼의 날을 잡아 아래로 쭉 훑어 내렸다. 그러자 없던 날이 그의 손길에 따라 생겨나기 시작했다. 날이 모두 닳아 쇠몽둥이에 불과하던 도끼가 다시 제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진추영은 도끼를 자루에 가볍게 끼우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당분간은 그런 대로 도끼의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이만하면 며칠 정도는 너끈히 쓰실 수 있겠지. 그동안 새로운 도끼를 하나 만들어드려야겠다.”
 진추영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도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며칠이나 걸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도끼가 보통 도끼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으리라.
 진추영은 지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아주 특별한 도끼 한 자루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진추영이 홀로 나무꾼 장씨의 집을 찾았다. 때마침 산더미 같은 땔감을 나무지게에 지고 돌아온 장씨와 만날 수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나무꾼 장씨는 진추영을 보고 그냥 환하게 웃기만 했다. 더없이 순박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밥 먹자!”
 “아니에요. 이거 전해드리려고 왔어요.”
 진추영이 하얀 천으로 둘둘 말린 길쭉한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풀어 보세요, 아저씨.”
 그가 천을 풀어내자 도끼 한 자루가 나타났다.
 시커먼 자루가 있었고, 원래 그가 쓰던 도끼날보다 조금 더 큰 날을 지닌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여느 도끼와 별 차이가 없었다.
 나무꾼 장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도끼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것이었다.
 위잉! 윙!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곧이어 나무꾼 장씨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이, 이거 정말 최고다.”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보여주지 마세요.”
 나무꾼 장씨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도끼의 자루는 흑목이라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단단하기가 강철과 같은 반면 탄력까지 있어서 구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며, 도끼 또한 진추영의 놀라운 능력이 발휘되어 신병이기에 못지않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무림인이 이 도끼의 진가를 알아차린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차지하려 들 게 분명했다.
 진추영이 그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도, 돈은?”
 “은자 닷 푼이에요. 다음에 생기면 주세요.”
 “고, 고맙다.”
 “뭘요? 안녕히 계세요.”
 “바, 밥 먹고 가지?”
 “괜찮아요!”
 진추영이 긴 그림자를 남기며 그의 집을 떠났다.
 나무꾼 장씨는 한동안 도끼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가볍게 찍어보았다.
 푹!
 가벼운 소리와 함께 도끼가 나무속으로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그건 그가 아무리 힘을 써서 강하게 내리찍어도 불가능할 정도의 깊이였다.
 나무꾼 장씨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3장 천봉 강소연
 
 
 “계시는가?”
 이른 아침, 대장간의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찾아와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촌로였는데, 그의 손에는 자루가 부러진 괭이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화로에 불을 피우고 대장간의 여러 기구들을 점검하고 있던 진추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누구…, 아! 안녕하셨어요?”
 “추영이로구나. 내가 너무 일찍 온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아니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촌로가 진추영을 따라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지?”
 “예. 아직 식전이시라……. 어라! 그거 괭이 아니에요?”
 “그래. 날이 무뎌지고 자루가 부러져 버렸기에 가져 왔다.”
 “새로운 괭이를 사 가신 게 며칠 전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된 거죠?”
 “밭을 갈다가 그만…….”
 진추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루가 부러진 거야 그렇다 쳐도 괭이의 날이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갈밭을 매기라도 한 듯 보였다.
 “좀 고쳐줄 수 있겠느냐?”
 원래 이처럼 심하게 망가진 농기구의 경우는 수리가 어렵다. 그리고 고쳐준다고 하더라도 대금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진추영이 아는 눈앞의 이 촌로는 그럴 정도로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진추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끔히 고쳐서 가져다 드릴 테니 집에 돌아가 계세요.”
 “고맙구나. 헌데, 언제쯤이면 되겠느냐?”
 “급하십니까?”
 “그야 좀…….”
 “음. 그럼 오전 내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겠구나.”
 “그럼, 안녕히 가세요.”
 촌로가 대장간을 떠나자 진추영은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풀무질을 해 화로의 불을 올리고 괭이의 날을 집게에 집어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잠시 후, 붉게 달아오른 괭이를 다시 꺼내 망치로 두들겨 담금질을 한 후, 날을 갈았다.
 진추영이 한참 작업에 몰두해 있는데, 진장양이 나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는 게냐?”
 “민씨네 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 괭이를 손봐 달라고 말이에요.”
 “응? 민노인이? 그 양반 새 괭이 사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슨 사정이 있으시겠죠.”
 “그래, 돈은 받았느냐?”
 “…….”
 “에휴! 뭐 어쩔 수 없지. 민노인네 집안 사정이야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
 진자양이 혀를 차더니 다시 말했다.
 “오늘 작업 할 건 얼마나 되느냐?”
 “이웃 마을에서 어제 저녁에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호미와 낫을 좀 더 만들고 쟁기도 두 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음. 만만치 않은 작업이구나. 우선 호미와 낫은 내가 만들 테니 너는 쟁기를 만들도록 해라.”
 “예, 아버지. 우선 이것부터 끝내 놓고 시작하죠.”
 곧이어 대장간은 요란한 망치질과 풀무질 소리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진추영은 서둘러 괭이를 손본 후, 튼튼한 자루를 새로 붙인 다음 쟁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쟁기는 크기도 클뿐더러 땅을 가는데 사용되니 강도 또한 세야 했다. 따라서 손이 많이 가고 노력 또한 갑절로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게 쟁기였다.
 진추영이 오전 내내 힘들여 작업한 끝에 쟁기 하나를 완성시켰고,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곧바로 괭이를 들고 민노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민노인은 마을 인근에 화전을 일구고 살았는데, 그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어 생산성이 무척 낮았다. 당연히 민노인의 집안은 무척 가난했고, 민노인은 그걸 천형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
 진추영은 민노인의 초옥 뒤쪽에서 그와 가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가족이라고 해봐야 아내와 아들 하나가 전부였는데, 아들은 도박에 빠져 도박장에 처박혀 살다시피 했고, 결국 민노인이 노구를 이끌고 힘들게 밭을 매며 살 수밖에 없었다.
 민씨 노부부는 뒤쪽 텃밭을 매고 있었는데, 땅이 마구 파헤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민노인이 최근에 경작을 시작한 땅인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크고 작은 돌을 가려내고 있던 민씨 노부부를 진추영이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 추영이로구나. 그래 잘 지냈느냐?”
 “예, 할머니. 할머니도 건강하시죠?”
 “나야 뭐 여전하지.”
 민노인이 진추영의 손에 들린 괭이를 보고 말했다.
 “벌써 다 고쳤느냐?”
 “아! 여기…….”
 진추영이 내민 괭이를 받아든 민노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맡겼던 괭이가 새것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헌데, 왜 이렇게 힘든 불모지를 경작하시려는 겁니까?”
 “에휴!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려면 별 수 있겠느냐?”
 깊은 한숨소리가 민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아내도 낙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추영은 뭔가 사정이 있음을 직감했지만, 남의 가정사에 대해 캐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거친 땅을 경작하시려면 힘도 많이 들뿐더러 괭이가 남아나질 못해요. 얼마 안 가서 또 못 쓰게 될 텐데…….”
 “그야 그때 가서 또 해결해야지.”
 진추영이 잠시 두 노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말했다.
 “제가 특별히 괭이 하나를 만들어 드릴 테니, 그걸 사용하세요.”
 “새 괭이를? 하지만 우리가 그걸 살 돈이 있을지…….”
 “괭이 값은 형편이 나아지시면 천천히 갚으시면 됩니다. 대신 아무리 거친 밭을 갈아도 끄떡없는 단단한 괭이를 만들어드릴 테니 그걸로 밭을 가세요.”
 “정말 그래 주겠느냐?”
 “물론이에요. 며칠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어이구! 이거 고마워서 어떡하누…….”
 “두 분이 오래 건강하게 사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럼 전 이만……. 안녕히 계세요.”
 진추영은 노부부에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진추영은 새로운 괭이를 한 자루 만들었다. 부친 몰래 틈틈이 작업을 해야 했기에 시간이 다소 오래 걸렸지만, 그가 새롭게 만든 괭이는 얼마 전, 나무꾼 장씨에게 만들어준 도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진추영은 곧바로 민노인의 집에 찾아가 괭이 한 자루를 내밀었다.
 “앞으로 이걸 사용해 보세요.”
 민노인이 괭이를 받아들고는 휘두르는 시늉을 해보았다. 오랫동안 사용한 괭이인양 손에 딱 붙었고, 무게중심도 훌륭했다.
 “정말 좋은 괭이야. 내 손에 딱 맞는구나.”
 “마음에 드신다는 다행이에요. 전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 그냥 가면 어쩌누? 밥이라도 먹고 가지?”
 “이미 먹고 왔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진추영은 곧바로 민노인 부부의 집을 떠났다. 어차피 제대로 먹을 것도 없을 것인데, 자신이 그곳에 오래 남아 있을수록 민노인 부부가 불편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추영이 가고난 후, 민노인은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
 그의 눈앞에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땅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불모지였고, 경작이 가능한 곳은 무척 좁았다. 그동안 아무리 경작지를 넓혀보려고 했지만 땅이 워낙 거칠어 거의 진전이 없었다.
 민노인은 두 손바닥에 번갈아가며 침을 뱉더니 괭이를 내리찍었다.
 푹!
 “엉?”
 그가 괭이를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자갈과 바위투성이의 땅이 푹 파여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민노인은 뭔가에 홀리지 않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는 다시 괭이와 괭이가 파놓은 땅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괭이에는 흠집하나 나지 않았고, 땅만 움푹 파였던 것이다.
 “허허허허!”
 그의 입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새롭게 만든 괭이를 민노인에게 전해준 진추영은 흐뭇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무꾼 장씨와 민노인에게 전해준 도끼와 괭이는 처음 강호에 나가 회수한 병기들을 녹여서 만든 것이었다. 그 병기들은 오래전 진추영의 사부가 만든 많은 병기들 중 일부로, 사부가 마음을 올바르게 닦지 않고 만든 것이라 마기와 사기가 침범한 것들이었다.
 만약 그 재료들로 무기를 만든다면,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신병이기가 되고도 남을 것이지만, 진추영은 그처럼 귀한 재료를 가지고 사람이나 죽이는 흉기 따위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진추영은 몇 가지 당부와 함께, 널리 백성들이 이롭도록 도와주라는 스승의 마지막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사부님…….”
 허연 수염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던 사부의 얼굴이 진추영의 눈앞에 떠올랐다. 용암 속으로 곤두박질치던 진추영을 축융별부(祝融別府)로 이끌어 살려내고는, 팔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 사람이 바로 그의 사부였다.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그의 사부는 영원히 진추영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진추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을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 금속성과 고함소리가 그의 심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싸움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한낮에 대로 한복판에서 도검을 빼들고 싸우는 사람이라면 강호 무림인들이리라.
 진추영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길을 가다가는 분명히 그들과 마주칠 것이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의 일에는 가능하면 끼어들지 말아라. 그들은 탐욕스럽기가 승냥이 무리들과 같으니라. 만약 어쩔 수 없이 무림의 일에 휘말리게 된다면, 네가 이 사부의 제자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의 스승은 오래 전, 천하를 홀로 아우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스승의 제자임을 잊지 않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진추영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때, 찢어질 듯한 여인의 고함소리가 진추영의 발을 잡았다. 목소리로 들어보아 젊은 소저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누이인 진아영과 비슷한 또래일지도 몰랐다.
 “휴!”
 진추영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누이동생을 둔 오빠로서, 또래의 소녀가 위험에 빠진다면 누구라도 좌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진추영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싸움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탓!
 가볍게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진추영이 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화르르!
 달려가던 진추영의 두 다리에 불이 붙었다.
 붉고 노란 색의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귀영처럼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화염이었다. 진추영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고, 그의 신형은 강호의 절정고수가 무색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누가 보았다면 신선이 푸른색의 구름을 타고 날아간다고 했을 정도였다.
 잠시 후, 진추영은 싸움이 거의 막바지에 도달한 무림인들간의 격전지에 도착했다. 그는 근처에 있던 큰 바위 뒤에 재빨리 몸을 숨기고는 전황을 살폈다.
 이미 땅에는 몇 예닐곱 명의 무인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중상이거나 죽어 있었다.
 챙! 채쟁!
 “크악!”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또 한 사람의 허리가 끊어져 쓰러졌고, 그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진추영은 참혹한 싸움터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숲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르고 은밀했는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숲속으로 들어간 진추영은 나무들 사이를 거침없이 빠져 나가더니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앞쪽에 음흉하게 생긴 중년인이 시뻘건 선혈이 묻은 검을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진추영은 그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니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진추영의 신형이 삼장 좌측에 있는 나무 뒤쪽으로 스며들듯 움직였다. 그곳에는 황의 경장을 입은 여인이 죽은 듯 쓰러져 있었는데, 땅이 축축해질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숨결도 무척 가늘어서 곧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진추영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그녀의 등은 길게 베어져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끊임없이 선혈이 흘러내렸다.
 우수에 단단히 잡고 있는 검자루를 잡아 빼 땅바닥에 내려놓은 후, 진추영의 신형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진추영이 여인을 안고 사라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 음흉하게 생긴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런!”
 그는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아 있는 건 핏자국과 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신경질적으로 차버린 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 어떻게 내 이목을 속인 채 도망을 쳤단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혹시 누군가가…?”
 그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정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느 고인께서 왕림하셨소? 모습을 드러내시오.”
 내공이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였지만 들려오는 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뿐이었다.
 “나는 운남삼웅(雲南三雄)의 일인이자 삼혈검(三血劍) 중 막내 혈살검(血殺劍) 천태세요. 우리 흑수당은 귀하와 원한을 맺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소.”
 온양현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흑도문파인 흑수당의 실질적 주인은 삼태상(三太上)이라 불리는 삼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운남삼흉(雲南三凶)이라는 악명을 얻고 있었지만, 스스로에게는 흉(凶)대신 웅(雄)이라는 낯간지러운 별호를 사용했다.
 혈살검 천태세는 그들 삼태상 중 일인으로, 온양현에서 가장 큰 정도문파인 비검장의 문인들이 모종의 임무를 띠고 운남 정도맹으로 향하던 것을 가로막아 혈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비검장주의 둘째딸이자 운남제일미로 알려진 천봉(天鳳) 강소연을 그만 코앞에서 놓쳐버렸으니, 한껏 달아오른 색심(色心)을 삭일 길이 사라진 것은 물론 탈취해야 할 중요한 물건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니 꼭지가 돌 정도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베어 넘기는 것으로 화풀이를 한 후,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어느 이름 모를 야산의 숲속에, 진추영이 선혈이 낭자한 여인을 안고 나타났다.
 진추영의 안색은 더없이 굳어 있었고, 여인을 내려다보는 두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둘러 그녀를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진추영이 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작은 모옥이 나타났다. 얼마 전 그가 모친과 함께 찾아왔던 나무꾼 장씨의 집이 바로 그곳이었다.
 나무꾼 장씨는 나무를 하러 갔는지 집에 없었고, 진추영은 거침없이 모옥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침상위에 엎드려 눕혔다.
 곧바로 가부좌를 하고 앉은 진추영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두 손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불꽃은 이내 파르스름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으로 바뀌었다.
 진추영이 손을 부드럽게 움직이자 파르스름한 기운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뻗어나가 그녀의 등에 가서 닿았다.
 순간, 선혈로 얼룩진 여인의 옷이 재가 되어 사라졌는데 백옥처럼 하얀 그녀의 살결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진추영은 굳은 표정으로 훤히 드러난 그녀의 검상을 살폈다.
 살이 깊이 갈라져 뼈까지 들여다보일 정도의 중상이었다.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척추가 끊어지고 말았으리라.
 진추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파르스름한 기운이 그녀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가 곧바로 그치더니 벌어진 상처가 붙어버리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추영이 뿜어낸 기운은 그녀의 혈맥속으로 스며들어 탁기와 찌꺼기들을 모두 태워버린 후, 빠져나왔다.
 진추영의 입에서 긴 한숨소리가 새어나오더니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일렁이던 파란 기운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진추영은 방안을 둘러보다가 벽에 걸린 나무꾼 장씨의 옷을 찢어서 붕대처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감아주었다.
 다 큰 처녀의 몸을 붕대로 감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응급처치를 끝낸 진추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상처를 붙여놓기는 했지만, 그간 자신이 지닌 불의 힘으로 살을 녹여 붙인 것일 뿐, 아물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처럼 큰 검상을 순식간에 아물게 할 능력은 화타나 편작같은 전설적인 의원에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일단 상처가 덧나지 않게 했고, 경맥 속의 불순물을 제거했으니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추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진추영은 문득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데 놀랐다. 그가 살아오면서 보았던 그 어떤 여자들도 눈앞의 이 미녀에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추영의 안색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이런! 환자를 앞두고 무슨 생각을……. 그나저나 도대체 어쩌다 이처럼 예쁜 처녀가 그런 험한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구나. 검을 쥐고 있던 것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이 여인도 무림인이겠지.’
 진추영은 숲속에서 검을 빼들고 흉험한 살기를 내뿜으며 그녀를 찾던 음흉한 인상의 중년인을 상기했다.
 ‘흑수당의 천태세라고 했던가?’
 자세한 건 알지 못했지만 흑수당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았다. 아니, 귀에 꽤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영업비 명목으로 대장간에 찾아와 매달 은자 열 냥을 꼬박꼬박 챙겨가는 건달들의 뒤를 봐주는 곳이 바로 흑수당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흑수당이 나쁜 놈들의 조직이라는 건 진추영도 자연히 알 수 있었고, 그런 그들과 싸운 여인은 적어도 흑수당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었다. 진추영이 그녀의 정체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만약 진추영이 온양현의 무림세계, 아니 정세에 대해 조금만 밝았더라면,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흑수당의 세상이 된 온양현에서, 그들과 대놓고 칼부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세력은 한 곳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바로 비검장(飛劍莊)이었다.
 원래 온양현 일대를 주름잡고 있던 곳은 흑수당이 아니라 비검장이라는 정도문파였다.
 하지만 삼년 전, 운남삼흉으로 알려진 천씨 형제들이 갑자기 흑수당에 가입하면서부터 흑수당의 세력이 급격히 늘어나 전세가 역전되어버렸다. 비검장이 차지하고 있던 수익사업들은 고스란히 흑수당으로 넘어갔고, 비검장은 속 빈 강정이 되어 세력을 급격히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나마 비검장주 강기천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 간신히 비검장의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도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형세라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비검장주는 슬하에 일남이녀의 자식들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 중 둘째 딸인 강소연은 천봉(天鳳), 혹은 운남제일미로 불리는 미인으로 지금 진추영의 눈앞에 누워 있는 바로 그 여인이었다.
 잠시 침상의 여인을 내려다보던 진추영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방을 나갔다.
 커다란 지게에 땔감을 가득 싣고 모옥에 들어서는 나무꾼 장씨 아저씨의 모습이 진추영의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추, 추영이 왔네. 밥은 먹었어?”
 지게를 땅에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는 나무꾼 장씨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잠시 들어오세요.”
 진추영의 손에 이끌려 모옥 안으로 들어가 나무꾼 장씨는 웬 여인이 붕대를 감은 채 자신의 침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누, 누구…? 네 색시?”
 “아니에요. 그냥 길가다 쓰러져 있던 사람이에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일단 이곳으로 데려와 치료를 해주었어요.”
 “잘했다.”
 나무꾼 장씨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앳된 여인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예, 예쁜 아가씨가 어쩌다 이렇게 다쳤지?”
 “꽤 심하게 다쳤어요. 잠시 돌봐주실 수 있죠?”
 “내, 내가? 어떻게…?”
 “그냥 지켜봐주시기만 하면 돼요. 제가 다시 올게요.”
 “어, 어딜 가려고…?”
 “약을 좀 구해와야겠어요. 그리고 간호할 사람도 데려 오겠어요..”
 서둘러 방을 나서는 진추영의 등에다 대고 나무꾼 장씨가 소리쳤다.
 “바, 밥이라도 먹고 가지…?”
 진추영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더니 어느새 모옥을 나섰다.
 나무꾼 장씨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방안을 서성이다가 침대 앞에 그냥 퍼질러 앉았다.
 “지, 지켜보면 된다고 했으니…….”
 진추영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무꾼 장씨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대장간으로 돌아온 진추영이 한참 망치질을 하고 있던 부친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안채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어머니!”
 빨래를 널고 있던 진부인과 진아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인석아! 웬 호들갑이냐?”
 “잠시만 들어와 보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영이 너도.”
 진추영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한 것을 본 진부인이 진아영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식구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진추영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무공을 발휘한 부분은 제외하고 말이다.
 진추영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식구들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흑수당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진자양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분명히 흑수당이라고 했느냐?”
 “예, 아버지. 숲속에서 그녀를 찾던 자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음. 흑수당과 관련된 일에 휘말려서 좋을 게 없는데…….”
 “그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겠어요?”
 “그래. 그렇긴 하다만…….”
 “의원에게 데려가려다, 흑수당에서 찾는 사람이라면 그곳부터 뒤질 것 같아 그냥 나무꾼 장씨 아저씨 집에 숨겨 두었어요.”
 “잘했다.”
 “서둘러 외상약이라도 구해야 해요. 그리고 그녀를 간호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다 큰 소저라 저와 장씨 아저씨로는 어떻게 하지 못하겠어요.”
 진부인이 나섰다.
 “일단 내가 아영이와 함께 장씨네 집으로 가도록 하마. 대신 너는 외상약을 좀 구해오도록 해라. 적당히 둘러대면 구할 수 있을 게야.”
 “알겠어요, 어머니.”
 “아영이 너는 당장 차비를 하거라.”
 “응, 엄마.”
 모녀는 곧바로 나무꾼 장씨의 집으로 떠날 차비를 하기 시작했다.
 진추영이 직접 약을 구하러 가려하자 진자양이 나섰다.
 “내가 가마!”
 “아버지!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대장간 일을 하다보면 다치는 일도 비일비재하지. 이번에도 망치질을 하다가 다쳤다고 하면 아무 일 없이 약을 구해올 수 있을 게다.”
 진추영은 다소 불안했지만, 부친의 말처럼 별다른 위험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진자양이 의원에 가서 약을 구하기로 했고, 진추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대장간 일을 계속했다.
 잠시 후, 진자양이 돌아왔는데, 그의 안색이 상기된 것이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괜찮으셨어요, 아버지?”
 “휴! 간신히 구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말도 마라. 의원 앞은 물론 근처 약재상까지 장한들이 흉흉한 모습으로 진을 치고 있더구나.”
 “그래서요?”
 “망치질을 하다가 다쳤다고 해서 약을 사오기는 했다만 정말 간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잘 하셨어요.”
 “어머니와 동생은?”
 “장씨네 아저씨 댁으로 이미 떠나셨어요.”
 “그러냐? 그럼 이 외상약은 내가 가져가랴?”
 “제가 가져갈게요. 아버진 이곳에 계세요.”
 “그래. 알겠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예, 아버지.”
 진추영은 그길로 대장간을 나섰다.
 
 “휴! 이제 다 됐다.”
 진부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큰 처녀의 몸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아 내고, 살이 눌어붙어 더욱 끔찍해 보이는 상처에 외상약을 발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은 후, 옷까지 모두 갈아입히는 일은 진아영의 도움이 없었으면 하지 못했을 정도로 힘들었다.
 진아영은 침상에 엎드려 있는 강소연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 언니 정말 예쁘다! 그치, 엄마?”
 “그래. 뉘댁 처잔지 모르겠다만 이 어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예쁜 소저는 처음 보는구나.”
 “이 언니 오빠 색시 했으면 좋겠다. 헤!”
 “말도 안 되는 소리! 함부로 그런 말 말거라. 그녀의 몸을 보아하니 오랫동안 단련한 무가의 여식이 분명해. 우리처럼 쇳밥 먹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거라.”
 “핏! 아무리 그래도 같은 사람 아닌가? 오빠가 어때서? 키 크지, 인물 좋지, 힘세지, 재주 좋지. 어디 내 놔도 일등 신랑감 아냐?”
 진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어디 내놔도 한 군데 빠질 것 없는 청년이 바로 진추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방문 밖에서 진추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나셨어요?”
 “그래.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더니 진추영과 나무꾼 장씨가 함께 들어왔다.
 진추영이 강소연을 살펴보았다. 눈매가 조금 일그러진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적지 않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아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큰 상처가 어떻게 붙어 있는지 신기하더구나. 마치 상처를 인두로 지져서 붙여놓은 것 같았어.”
 진추영은 내심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 응급처치를 해두었던 모양이에요.”
 “정말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이 처자는 벌써 죽었을 게다. 그런데 몸이 나아도 흉터는 없어지지 않을 테니 그게 좀 걱정이구나.”
 검상보다는 화상에 입은 상처의 흉터가 더욱 크고 보기에 흉하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을 젊은 여인의 등에 그처럼 끔찍한 흉터를 만들어 놓았으니, 아무리 그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진추영의 마음은 무거웠다.
 진부인이 나무꾼 장씨에게 말했다.
 “당분간 이 방은 우리가 써야 할 것 같으니 자네가 좀 양해해 주게.”
 나무꾼 장씨가 어눌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나는 괜찮아요, 진부인. 허, 헛간이 펴, 편해요.”
 “고맙네, 장씨. 대신 내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들을 해 주겠네.”
 “고, 고맙습니다.”
 “원, 사람도…….”
 순박한 웃음을 짓는 나무꾼 장씨를 쳐다보는 진부인의 얼굴에 따스함이 묻어났다. 나무꾼 장씨는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었고,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진부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날부터 진부인과 진아영은 모옥에 머물며 강소연을 간호했다.
 진추영은 대장간과 모옥을 오갔고, 나무꾼 장씨는 헛간에서 지내며 나무를 해다가 마을에 파는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마침내 그녀가 깨어났다.
 “으음!”
 가느다란 신음소리에 침대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진아영이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 엄마! 엄마! 언니가 깨어났어!”
 부엌에서 한참 아침밥을 하고 있던 진부인이 뛰어 들어왔다.
 “정말이냐? 어디?”
 그녀는 강소연에게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봐요. 아가씨!”
 “으음. 여, 여긴…….”
 “정신이 드세요? 눈을 떠 보세요.”
 “아아! 드, 등이…….”
 강소연은 무척 고통스러운지 계속해서 신음성을 흘렸다.
 “아가씨가 등을 심하게 다쳐서 그래요. 우리 아들이 아가씨를 업어서 데려왔다우.”
 “사, 사형! 사형들은……. 아!”
 그녀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눈물을 줄줄 흘렸다.
 때마침 모옥을 찾아 아침을 먹으러 온 진추영이 그 소리를 듣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추영아. 잘 왔다. 어서 이리로 오거라.”
 진추영이 강소연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사, 사형들은……. 도, 도대체 어떻게 된…? 아아!”
 진추영은 그녀가 찾는 사형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관도에서 죽음을 당하던 그 사내들이리라.
 뭐라 말을 하면서도 신음성을 흘리는 그녀와 더 이상 대화를 하기는 불가능했다.
 진추영이 그녀를 살피는 척 하면서 슬쩍 수혈을 건드렸다. 그러자 강소연은 또다시 스르르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오후에 다시 깨어났다.
 다행히 나무꾼 장씨를 제외한 모두가 방안에서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소 또렷한 정신으로 그녀가 물었다.
 “여, 여긴 어디죠?”
 진부인이 뭐라 말하려고 하자, 진추영이 먼저 나섰다.
 “여긴 온양현 인근에 있는 산 속입니다. 원래는 장씨 성을 쓰시는 아저씨의 모옥이었는데, 제가 아가씨를 데려와 이곳에서 치료를 했습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엎드렸다.
 “드, 등이……. 무척 아프군요.”
 “살아난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의 상처였습니다.”
 “잠시 저를 내버려두시겠어요?”
 진추영은 그녀가 운기행공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추영이 진부인과 진아영을 쳐다보며 검지를 세워 입을 가리는 것이었다.
 진부인과 진아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다물었다.
 강소연은 우선 마음을 가다듬었다. 운기행공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엎드려 누운 자세라 불편하고 또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작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몸 상태를 점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집중조차 되지 않았지만, 고통을 참고 계속 노력하자 마침내 진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미약한 진기였지만 차츰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경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소주천은 의외로 쉽게 끝났다. 아니, 강소연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다치기 전보다 오히려 진기가 더욱 빨리, 그리고 거침없이 경맥을 돌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상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니. 게다가 예전보다 경맥이 넓어지고 걸리는 게 없어. 이건 마치 누군가가 개정대법이라도 해 준 느낌이야.
 이름 난 무가의 자식들 치고 개정대법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몇 차례의 개정대법을 거쳐 경맥의 불순물을 제거해주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강소연 또한 그런 개정대법을 부친으로부터 두어 차례 받았고, 따라서 그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개정대법을 베풀어줄 수 있을 만한 고수가 있는지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들 중 누가…….’
 아무리 생각해도 진추영이라는 사내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공을 익힌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사 익혔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또래의 청년이 개정대법을 펼칠 능력이 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소연이 한결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진추영을 향해 물었다.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해주세요.”
 “그러기 전에 스스로의 이름 정도는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진추영의 말에 강소연이 흠칫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동안 자신을 간호하기 위해 고생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 강소연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어요.”
 진추영을 비롯한 방 안이 사람들 모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아영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천봉 강소연!”
 최근 들어, 온양현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검장주의 둘째 딸이며 운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진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검장주님의 아기씨인 줄은 몰랐어요. 진작 알았으면…….”
 진부인이 그녀에게 머리라도 숙이려고 하자 그녀가 말렸다.
 “그러지 마세요. 제 생명의 은인들이신데요.”
 “비검장주님께서 평소 얼마나 인의로운 일을 많이 하셨는지 제가 잘 알고 있지요. 그런 분의 따님이신데 제가 어떻게 편히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가씨.”
 “아니에요. 그냥 편히 대하셔도 돼요.”
 그때, 진아영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언니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에요.”
 순간, 진부인이 눈을 부라렸다.
 “이것아! 아가씨께 언니라니?”
 진아영이 입을 삐쭉이자 강소연이 손을 내밀었다.
 진아영이 어머니에게 혀를 내보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냥 언니라고 부르렴.”
 “헤! 들었죠, 엄마?”
 진부인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강소연은 모녀의 정감어린 모습을 대하자 가슴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추영은 강소연이 하는 말과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때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진추영을 향했다.
 “그쪽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못했군요. 죄송해요.”
 진추영이 머리를 살짝 끄덕여 보인 후 말을 이었다.
 “관도를 지나다가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진추영은 당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단지 자신은 멀리 숨어서 지켜보았을 뿐이고, 우연히 숲속에서 강소연을 발견해 모옥까지 데려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진추영의 말을 차분한 표정으로 모두 들은 강소연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 사형들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추영으로서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진부인이 나서서 그녀를 위로하자, 강소연은 진부인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진부인이 진추영에게 눈짓을 하지 진추영은 누이와 함께 방을 나왔다. 강소연이 슬픔을 삭일 동안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서였다.
 진아영이 오빠에게 말했다.
 “소연언니의 사형들이 정말 모두 죽었어?”
 “그래.”
 “오빠가 좀 도와주지…….”
 “인석아!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쳇! 오빠도 무공이라는 걸 배웠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그 자식들 다 때려눕히고 언니의 사형들도 모두 구해줬을 거 아냐?”
 누이의 철없는 말에 진추영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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