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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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운다 1권-1

2015.02.06 조회 3,612 추천 32


 Prologue
 
 백만천겁 쌓은 죄업 한 생각에 탕진하니
 마른 풀을 불태우듯 소멸되게 하옵소서
 죄는 본래 자성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멸해지면 죄업 또한 없어지고
 죄와 마음 모두 멸해 두 가지 다 공해지면
 이와 같은 뉘우침을 진참회라 하나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화르르!
 조촐한 다비식이었지만 마른 장작에서 치솟는 불길은 진각사 전체를 밝힐 정도로 거셌다.
 똑똑똑똑……
 노승 대청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웠다.
 그가 하는 염불은 천수경의 한 구절로, 죄업을 참회하기 위한 진언이다.
 대청이 이처럼 참회진언을 되풀이하는 건,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제자 무진의 부탁 때문이다.
 하지만 대청은 잘 알고 있었다. 무진은 이미 자신이 지은 세상의 업보를 모두 씻을 정도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육신의 틀을 벗어버리고 열반의 경지에 이른 무진은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 힘든 위대한 선각자이었다.
 불길이 어느 정도 사그라질 무렵, 하늘에서 굵은 물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나기로 변했다.
 쏴아아!
 세상의 모든 것을 씻어낼 듯 쏟아져 내리는 소낙비.
 대청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무진(無盡)아. 재가 된 네 몸이 비와 함께 세상에 다시 내리는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청에게 승려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큰 스님. 무진의 법체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보십시오.”
 중년승이 가사의 소매를 펼쳤다. 그러자 작은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진주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지녔고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사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모습이다.
 중년승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사리는 정말 처음 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대청이 사리를 집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았는지 따뜻했다.
 “허!”
 대청은 탄성을 흘리더니 회한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남겨놓은 게 하나 밖에 없다 하더니, 또 하나가 더 있었구나…….”
 중년승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큰스님. 이건 법보(法寶)나 마찬가지입니다. 본사에 잘 모셔두면 많은 신도들이 이걸 보기 위해 몰려들…….”
 “갈!”
 대청의 사자후에 중년승이 자라목을 했다.
 “너는 아직도 멀었구나. 쯧쯧쯧.”
 “죄, 죄송합니다. 큰스님…….”
 대청은 중년승을 잠시 노려보더니 선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 물건은 이미 주인이 있느니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년승은 무진이 남겨놓은 신비로운 사리에 주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의아심을 감출 수 없었지만 감히 그 주인이 누구인지에 여쭐 수가 없었다.
 
 
 1. 세상으로 나가다
 
 나, 윤태성은 고아다.
 젖먹이 때 버려진 후 나는 은혜보육원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고아원이다.
 당연히 내게는 부모가 없고,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사실과 가족이 없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게는 가족이 있다. 그것도 대식구다.
 은혜보육원의 원장님이 어머니이고, 함께 생활하는 원생들 일곱 명이 내 형제, 자매들이다.
 고아원, 혹은 보육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춥고 배고프다는 사실을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올린다. 심지어 학대를 당하는 감옥 같은 시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부 그런 보육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원생들을 심하게 학대했다가 정부 감사에 들켜 문을 닫는 보육원들이 있고, 그곳에 있던 원생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우리 보육원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은혜보육원은 그런 곳과 전혀 다르다.
 원장 어머니는 천사처럼 자애로우신 분이시고, 그 분은 나를 비롯한 원생들을 자신의 친아들, 친딸처럼 헌신적으로 돌보아주셨다.
 덕분에 우리 보육원에서 자란 원생들 대부분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에 못지않게 크고 깊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우리는 원장 어머니의 품안에서 깊은 사랑과 유대감으로 뭉쳐 있다.
 학교 친구들 중에 가정이 부럽지 않으냐고 내게 물어보는 녀석들이 가끔 있다. 그 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나보다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들 가진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이다.
 원장 어머니가 보육원을 운영한 지는 30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동안 수많은 원생들이 은혜보육원을 거쳐 갔다.
 보육원의 수용인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항상 새로운 식구들을 맞아야 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보육원의 규정상 성인(만 18세)이 되면 그곳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가 친 형, 친 누나처럼 따르던 가족들이 보육원을 떠나 사회로 나가는 모습들을 많이도 보고 겪었다.
 그 때마다 나는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펑펑 울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나의 작은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지금 내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어린 동생들의 얼굴을 보면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그래, 이제 때가 되었다.
 내 삶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은혜보육원을 떠나 사회라는 거친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동생들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돈 많이 벌어서 돌아와 한 가족처럼 영원히 함께 살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보육원을 떠났던 형과 누나들 모두 그런 약속을 했지만, 지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울면서 결심했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나는 한쪽에 서서 눈물을 훔치며 훌쩍이는 원장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하얗게 변한 원장 어머니의 귀밑머리가 내 마음을 싸하게 울린다.
 나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 한 장을 꺼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배달을 해서 힘겹게 벌어놓은 피 같은 내 돈 200만원이 이 안에 들어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봉투를 꺼내 원장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어머니. 이거…, 받으세요.”
 원장 어머니는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원장 어머니의 손을 잡고 봉투를 꼭 쥐어드렸다.
 원장 어머니도 단호한 내 표정을 보시고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셨다.
 그러자 그녀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은혜보육원의 모든 식구들이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 동생들의 코 묻은 돈 몇 푼과 편지, 그리고 장갑이나 양말 같은 선물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나는 원장 어머니가 내민 상자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이제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원장 어머니가 그동안 내게 베풀어주셨던 사랑을 어찌 돈 따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눈물, 콧물을 훌쩍이는 어린 동생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 주었다.
 나보다 한두 살 작은 다 큰 녀석들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짜식들…, 다 큰 녀석들이 울기는!”
 나는 그들의 어깨를 한 번씩 툭 쳐주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만남은 길면 좋지만, 이별은 짧은 게 바람직하다.
 그 동안 수많은 형, 누나들을 떠나보내면서 내가 체득한 삶의 지혜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면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등 뒤에서 동생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형! 꼭 돌아와야 해!”
 “오빠! 편지 해! 잉잉잉!”
 나는 당장 그들에게 달려가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건 동생들에게 더 큰 이별의 상처를 줄 수 있다.
 어느새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쓰바! 눈에 뭐가 들어갔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목이 멨고, 입에서는 꺼억거리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나 윤태성은 20년 가까이 보금자리가 되어 준 정들었던 보육원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
 
 빵! 빠앙!
 와글와글.
 자동차 경적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북새통인 이 거리는 서울 강서구에 있는 어느 재래시장이다.
 길을 따라 줄지어 가판대가 설치되어 있고, 가판대에서는 온갖 과일과 채소, 그리고 생선 등 식재료들이 널려 있다.
 “배추 사세요! 한 단에 오천 원이에요.”
 “생선 팔아요! 잘 장만해 드립니다. 커다란 고등어 한 마리가 삼천 원!”
 가판대 뒤의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해 호객행위를 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시장은 더욱 시끌벅적했다.
 윤태성이 이 시장통 한가운데 나타난 것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작은 가방 하나를 둘러멘 채 상인들과 가판대 위의 물건들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성남에 있던 은혜보육원을 떠난 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윤태성이 보육원에서 살 때 주말이 되면 가끔 친구들과 서울에 놀러 가거나, 때로는 동생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은 그에게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처해진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가판대 위에 놓여 있던 온갖 물건들이 재미있고 신기하다고만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다듬고 장만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상인들의 얼굴과, 그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들이 보였다.
 ‘다들 정말 열심히 살고 있구나.’
 윤태성은 왠지 마음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
 윤태성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허름한 여관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원장 어머니가 준 상자를 어루만졌다.
 “뭐가 들었을까…….”
 상자를 열자 하얀 봉투 하나와 편지 몇 장, 그리고 양말 몇 켤레가 들어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선물일지 모르지만 마음과 정이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윤태성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편지들을 읽어보았다.
 어린 동생들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어놓은 글귀들이 윤태성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가만, 그런데 이 봉투는 뭐지?”
 윤태성이 하얀 봉투를 열자 오만 원짜리 지폐 한 뭉치와 편지가 나왔다.
 깜짝 놀란 윤태성은 급히 편지를 읽어보았다.
 원장 어머니가 손수 쓴 편지였다.
 
 태성이 보아라.
 젖먹이였던 너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때 넌 정말 예쁜 아기였단다. 보채지도 않고 잘 울지도 않았어. 정말 병치래 한 번 하지 않았단다. 그처럼 건강했던 네가 이렇게 장성해서 사회에 나가게 되다니, 이 엄마는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동안 너는 이 엄마에게 큰 힘이 되어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앞으로 세상에 나가더라도…….
 
 장문의 편지를 읽고 있던 윤태성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지더니 나중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편지 위에 뚝뚝 떨어졌다.
 
 …항상 이 엄마가 너를 위해 기도하마. 부디 건강하고 행복해라.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 엄마를 찾아오너라. 사랑 한다 태성아.
 
 추신 : 네 목걸이는 항상 소중히 간직하도록 해라. 다른 사람들이 보면 탐낼 수도 있는 물건이다. 그리고 하늘이 돌보신다면 언젠가 그 목걸이를 통해 부모님들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마침내 편지를 모두 읽은 윤태성은 편지를 꽉 거머쥐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흑! 어, 어머니…….”
 윤태성의 눈에서는 마치 봇물 터진 것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육원을 떠나면서 참고 있었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윤태성이 몸을 일으키더니 편지를 곱게 접어서 다시 편지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오만 원짜리 지폐들을 거머쥐었다.
 100만원은 은혜보육원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무척 큰돈이었다.
 윤태성은 이 돈을 다시 돌려드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받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돈이 아니라 원장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100배, 아니 1,000배로 불려서 돌려드리면 될 일이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생각나 꺼냈다.
 목걸이는 마름모 모양이었고, 그 한가운데 새끼손톱 크기의 둥글고 푸른색 돌이 박혀 있었다.
 윤태성이 세 살이 되던 해에 어느 이름 모를 노스님이 찾아와 그의 목에 걸어준 것이다.
 원장 어머니는 노스님에게 왜 그 목걸이를 어린 태성이에게 걸어주었느냐고 물었지만, 노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염불만 외우다가 떠났다고 한다.
 윤태성이 목욕할 때나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놓은 적이 거의 없었다.
 ‘나를 버린 부모가 남긴 물건일지도…….’
 윤태성이 냉소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때 친부모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는 자신을 버린 비정한 부모를 결코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설사 부모들이 자신을 직접 찾아온다고 해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룻밤을 여관에서 보낸 윤태성은 다음날 아침 짐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
 
 서울 강서구 외곽에 있는 폐기물 야적장.
 일명 고물상과 비슷한 곳이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산더미처럼 곳곳에 쌓여 있는 이 야적장 입구에 윤태성이 나타났다.
 윤태성은 녹슨 철문을 위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보고 눈빛을 빛냈다.
 ‘거성용역이라……. 제대로 찾아왔구나.’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윤태성의 머릿속 훤칠하고 잘 생긴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대호.
 윤태성과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세 살 많은 형이다.
 그리고 윤태성이 가장 좋아하고 따랐던 형이기도 했다.
 강대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지 모든 면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다. 공부는 항상 전교 5등 안에서 놀았고, 하지 못하는 운동이 없었으며, 싸움까지 짱이었다. 거기다가 인성도 좋고 리더십까지 갖춰, 그의 주위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따랐다.
 원장 어머니는 그런 강대호를 보며 은혜보육원의 자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강대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 18세가 되자 보육원을 떠나게 되었다.
 윤태성은 강대호가 보육원을 떠나던 날을 잊지 못했다.
 자신의 어깨를 꽉 거머쥐며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탁한다. 잘 돌봐드려.
 당시 보육원에는 윤태성보다 한두 살 많은 형과 누나들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강대호는 윤태성에게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
 윤태성은 강대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항상 강대호가 떠났던 길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윤태성이 이제 보육원을 떠날 차례가 되었다.
 그때, 갑자기 강대호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대호는 자신이 해결사가 되었고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윤태성에게 보육원을 나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온 곳이 바로 강서구에 있는 거성용역이라는 폐기물 집하장이었다.
 윤태성이 녹슨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이!
 철문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렸다.
 왈왈왈왈!
 으르르릉!
 윤태성은 깜작 놀라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목줄이 메여 있는 커다란 맹견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목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윤태성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기세다.
 윤태성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주춤거렸다.
 “누구여?”
 어디선가 나타난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윤태성에게 다가왔다.
 윤태성은 그의 흉측한 얼굴 때문에 한 번 더 놀랐다.
 애꾸에다가 귀 한쪽도 없었다.
 이마에서 시작해 왼쪽 눈을 지나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는 인상에 따라 실룩거리며,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한쪽 다리를 절었고, 오른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갈고리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불구도 이런 불구는 세상에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치 해적영화의 악당이 스크린을 뚫고 현실의 세상으로 빠져나온 것 같다.
 윤태성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대, 대호 형을 찾아 왔습니다.”
 “누구라고?”
 “강대호 형을…….”
 중년인이 이내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치를 찾아왔군.”
 “강치요?”
 “흐흐흐, 대호 녀석 별명이다. 한데, 넌 누구냐?”
 “동생입니다.”
 “강치 녀석 고아출신 아냐? 그런데 무슨 동생이 있어?”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동생입니다.”
 “그래? 고아원 동생이라……. 들어가 봐.”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윤태성은 떨리는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컹컹컹!
 으르르르르!
 “조용히 해!”
 사내가 개들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하지만 맹견들은 짖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 개새끼들이 정말…….”
 사내가 커다란 몽둥이를 주워들고는 맹견들을 향해 다가갔다.
 윤태성은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계속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퍽퍽!
 깽! 깨갱!
 “개새끼들! 죽어!”
 퍽퍽퍽!
 윤태성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폐기물들이 쌓인 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제법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공터 한쪽에 컨테이너 박스 몇 개와 허름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윤태성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쭈뼛거리자 컨테이너 안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 한 명이 나왔다.
 “누구야?”
 “실례합니다. 강대호 형을 찾아왔습니다.”
 “대호? 강치 말이냐?”
 “예…….”
 사내가 윤태성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훤칠한 청년 한 명이 양복을 입은 채 컨테이너에서 뛰어나왔다.
 윤태성의 눈이 커졌다.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반가운 사람이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혀, 형! 대호 형!”
 “태성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와락 껴안았다.
 한동안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이 마침내 떨어졌다.
 “녀석! 다 컸구나.”
 “형! 정말 보고 싶었어.”
 “원장 어머니는 잘 계시지? 동생들도.”
 “응. 다들 잘 있어. 여전하지 뭐.”
 “하하하, 그래야지.”
 그때, 근처에서 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산가족 상봉하냐?”
 고개를 돌려보니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양복을 입은 채 지나가고 있었다.
 강대호가 그를 향해 깎듯이 인사를 했다.
 “예, 형님.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 녀석, 똘똘하게 생겼군, 그래.”
 윤태성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녀석’이라 말하는 것을 듣고 기분이 나빴지만, 강대호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께 인사드려야지. 어서 들어가자.”
 “응.”
 윤태성은 강대호와 함께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들어가자 넓은 사무실이 있었다.
 그리고 양복을 입은 사내들 두 명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깔끔하게 생긴 오십대 중반의 중년인이 골프채로 퍼팅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거성용역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던 윤태성은, 마치 조폭 사무실을 연상시키는 광경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아 당황했다.
 강대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사장님. 대호입니다.”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던 사장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무슨 일이냐?”
 “동생이 왔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아, 그래?”
 그제야 사장이 고개를 돌려 강대호와 윤태성을 쳐다보았다.
 강대호가 윤태성의 옆구리를 찔렀고, 윤태성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윤태성이라고 합니다.”
 사장이 윤태성을 아래위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인물 하나는 훤하군. 잘 할 수 있겠어?”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윤태성은 흠칫 했지만 강대호가 다시 옆구리를 건드리자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잘 해봐.”
 “감사합니다.”
 강대호도 사장에게 감사하다고 외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윤태성을 데리고 그곳을 나왔다.
 “형. 어, 어떻게 된 거야?”
 “너에 대해 사장님께 미리 말씀드렸어.”
 “그럼 나 취직 된 거야?”
 “그래. 앞으로 이 형을 따라다니면서 일 잘 배워.”
 “아!”
 윤태성은 믿을 수 없었다. 취직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될 수 있으리라고 그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직원들에게 인사부터 하러 가자.”
 강대호가 그를 데리고 컨테이너로 갔다.
 컨테이너 안에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양복을 입은 채 신분을 보거나 카드를 하고 있었는데, 인상이 험악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강대호와 윤태성은 꽃미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윤태성은 컨테이너 몇 채를 돌며 안에 있던 사내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사내들은 윤태성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거나 시익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인사가 끝나자 강대호는 윤태성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들 중 한 대에 올랐다.
 윤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경만 해보았던 고급 대형승용차를 강대호가 마음대로 몰고 나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뭐 해? 어서 타.”
 “아, 알았어. 형.”
 윤태성은 조수석에 타고는 차량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히야! 차 좋다.”
 “녀석! 회사에 있는 차들 중에서 제일 안 좋은 거야. 경력이 좀 더 쌓이면 외제차도 탈 수 있어.”
 “그, 그래? 히야…….”
 부우웅!
 강대호는 윤태성을 싣고 거성용역을 떠나 인근에 있는 백화점으로 갔다.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급 백화점이었는데, 윤태성은 예전에 구경하러 둘러본 적은 있었지만 물건은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강대호는 윤태성을 데리고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남성복 매장으로 갔다.
 지배인이 강대호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오랜 만에 오셨네요, 강 대리님.”
 “아, 예. 동생 옷 한 벌 맞춰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지배인은 윤태성을 보더니 탄성을 흘렸다.
 “동생 분이 아주 잘 생기셨군요. 몸매도 좋고. 제대로 갖춰 입으면 꽤 멋질 것 같습니다. 하하하. 자, 이쪽으로…….”
 윤태성은 지배인의 칭찬에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고급 백화점의 남성복 매장에서 대우를 받아 가면 옷을 골라 입었다.
 그렇게 윤태성은 매장들을 돌면서 수트 한 벌을 쫙 빼입은 후, 거울 앞에 섰다.
 윤태성은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자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울 저편에 웬 연예인이 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모습이 멋져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윤태성은 얼굴이 다소 앳되어 보인다는 점만 빼면 수트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강대호가 흐뭇한 표정으로 윤태성의 아래위를 쳐다보더니 지배인에게 말했다.
 “같은 걸로 두 벌 더 준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계산은 여기…….”
 강대호가 지배인에게 카드를 넘겨주었다.
 윤태성은 카운터에 찍힌 가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억!’소리를 낼 뻔 했다.
 무려 800만원이라는 거금이 계산서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
 지배인이 강대호에게 카드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가자 태성아.”
 윤태성은 후덜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를 따라 백화점을 나왔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 탄 윤태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혀, 형!”
 “왜?”
 “이, 이래도 괜찮아?”
 “짜식! 괜찮아 임마.”
 “하, 하지만 이 양복 한 벌이 무려…….”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야. 이렇게 써줘야 나중에 우리 손에 다시 돌아온단 말야.”
 “하지만…….”
 “차차 적응하면 될 거다. 걱정 마라.”
 윤태성은 자신이 입고 있는 양복이 구겨질까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고급 대형승용차의 편안한 시트가 마치 바늘방석처럼 느껴졌다.
 
 @@@
 
 짙은 감색 수트를 입은 윤태성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정도로 훤칠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윤태성의 눈앞에는 영화에서나 보았던 장면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윤태성이 있는 곳은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실이다. 그리고 지금 사장실은 엉망진창이다. 소파와 테이블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나뒹굴었고, 화분은 죄다 깨져서 쓰러져 있다.
 그리고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장이 꿇어 앉아 눈물을 흘렸고, 그 주위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 세 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윤태성도 그 세 명의 양복을 입은 사내들 중 한 명이었다.
 사장이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제, 제발 기다려주게. 이달 말이면 어떻게 해서든 이자까지 쳐서 원금을 모두 갚을 수 있네. 이제 겨우 일주일 남았네. 부탁하네.”
 윤태성이 사장 앞에 서 있던 강대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강대호가 사장의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아는 강대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대호는 변했다.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사장의 부탁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이거 봐, 양 사장. 현금을 왜 현금이라고 하는지 알아? 지금 당장 내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현금이라고 해. 기업을 운영해 봤으면 당신도 알잖아. 그런데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내일 당장 하늘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일주일을 기다려? 잔말 말고 당장 원금과 이자 모두 갚아.”
 “지, 지금은 도저히 갚을 수 없네. 그러니 제발 일주일만 기다려주게.”
 “쯧쯧쯧, 정말 답답한 사람이군. 어쩔 수 없지. 어음을 돌릴 수밖에.”
 사장이 얼굴이 샛노래져서는 강대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가, 강 대리. 제발 부탁이네. 지금 어음을 돌렸다간 회사가 넘어가. 그럼 나뿐만 아니라 오십 명이 넘는 직원 모두가 실직자가 되고 말 거네.”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고…, 한 마디만 대답하시오. 지금 갚을 거요 말 거요?”
 “지, 지금은 도저히…….”
 “그럼 할 수 없지. 수고하시오.”
 그는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사장을 매정하게 뿌리친 후, 밖으로 나갔다.
 윤태성이 머뭇거리자 눈을 부라리며 턱짓을 했다.
 윤태성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밖을 나갔다.
 바깥에는 회사 직원들이 절망에 찬 눈빛으로 강대호와 윤태성 등을 노려보았다.
 윤태성은 도저히 그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형! 정말 이대로 가서 어음 돌릴 거야?”
 “태성아. 조용히 입 다물고 따라와.”
 “하지만 형!”
 “태성아!”
 강대호아 윤태성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윤태성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퍽!’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꺄아아악!
 모두들 급히 고개를 돌렸다.
 회사 앞마당에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삼 층 사장실의 유리창이 깨졌고, 여직원이 그 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사장님!”
 “어서 119에 신고해! 빨리!”
 윤태성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두개골이 파열되어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는 처참한 사장의 몸뚱이가 눈앞에서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강대호가 윤태성의 팔을 잡았다.
 “그만 가자. 별 일 아니다.”
 윤태성이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사람이 죽었어! 그런데 별 일 아니라고? 형! 왜 이렇게 변했어?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강대호의 눈에 순간적으로 갈등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내 싸늘하게 변했다.
 “세상은 이런 거야. 먼저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먹힌다.”
 “형! 그걸 말이라고 해? 원장 어머니가 형의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 것 같아! 대답해 봐, 형!”
 강대호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상관없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테니까.”
 “혀, 형! 어떻게 그런 말을…….”
 “내가 지난 이 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 것 같아? 처음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만 하면 언젠가 나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 고아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여기서 당하고, 저기서 도둑으로 몰리고……. 난 두 번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러니 너도 내게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이다!”
 “형…….”
 윤태성이 참담한 표정으로 강대호를 쳐다보았다.
 그처럼 훌륭했던 형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강대호가 윤태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태성아.”
 윤태성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싫어. 형처럼 살지 않을 거야.”
 강대호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가 윤태성을 향해 내밀었던 손을 내렸다.
 “그럼 떠나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형!”
 “앞으로는…, 나를 형이라고 부를 일도 없을 거다.”
 그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윤태성은 강대호가 동료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대호 형 같은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삐뽀삐뽀!
 앰뷸런스가 달려오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윤태성은 마침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는 커다란 짐이라도 지고 있는 것처럼 축 처졌다.
 
 
 2. 인생의 목표
 
 윤태성은 어두운 여관방 안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잊고 싶지만 도저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유리창을 깨고 삼 층에서 떨어져 처참한 모습으로 숨진 중소기업 사장의 모습이 계속해서 윤태성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윤태성은 그 사장이 자살한 게 자신 때문인 것 같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자신이 가장 믿고 따랐던 형이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 내가 지난 이 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 것 같아? 처음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만 하면 언젠가 나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 고아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여기서 당하고, 저기서 도둑으로 몰리고……. 난 두 번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
 
 강대호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형도 그렇게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거야. 세상이 형을 그렇게 만든 거야.’
 어떻게 보면 자기 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실 윤태성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쳐야 했던 것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외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왔다.
 은혜원의 원장 어머니는 결코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성실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면 세상은 살만 한 곳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보육원 출신의 아이들이 자라서 올바르지 못한 길로 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건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은혜보육원 출신들은 외롭고 힘들지언정 올바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강대호의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이 뿌리 채 흔들리고 말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올바르게 살고 있어야 할 대호 형이 그렇게 변하다니……. 대호 형 같은 사람마저 변하게 만든 세상이라면 조만간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윤태성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매달려 있는 목걸이를 꼭 움켜쥐었다.
 한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윤태성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악문 모습으로 주먹을 거머쥐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나중에 은혜원에 돌아갔을 때 한 점 부끄럼 없이 어머니와 동생들의 얼굴을 볼 거다!’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나자 한결 편했다.
 윤태성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생각했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건 은혜원에 있는 동생들이었다. 그들도 조만간 성년이 될 것이고 사회라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게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들을 모두 돌보고, 또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큰 성공을 거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그들의 모범이 되고, 올바르게 세상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윤태성은 이번 일로 큰 교훈을 얻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지름길이 있다. 하지만 그 지름길로 가려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차근차근, 그리고 단계를 밟아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게 중요해. 그렇게 살면 언젠가 나도 세상이 살만 한 곳이라고 동생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 거야.’
 윤태성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먹구름은 물러갔고, 다시 밝은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
 
 “휴! 어디가 좋을까. 일단 숙식제공이 기본으로 되는 곳에 취직을 해야겠는데…….”
 윤태성이 생활지를 뒤적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나름대로 목표를 세웠다. 공부를 해서 야간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좀 더 배워서 알면 그만큼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대학졸업장이 기본처럼 되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졸업장을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의 차이가 클 거야.’
 이렇게 1차 목표는 정했다. 2차, 3차 목표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최종목표는 확실했다. 은혜보육원의 동생들을 엇나가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많이 벌어야 할 테지만, 동생들이 보기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했다.
 그는 막연하고 어려운 목표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열심히 성취해 나가면 언젠가는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 첫 단추가 바로 취직이었다.
 당장 살 집이 없는 그에게 숙식은 가장 중요했다.
 월급이 박하더라도 숙식만 제공된다면 그곳에 취직할 생각이었다.
 윤태성은 숙식이 가능한 일자리들을 살펴보았다.
 가장 눈에 띠는 건 선원이었다.
 배를 타고 해외에 나가서 몇 달 고기를 잡아 오면 매달 300에서 400만 원가량의 월급이 보장되었다.
 돈만 따진다면 한 번에 목돈을 움켜쥘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윤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를 탄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겠어? 이건 아무래도 무리야.’
 윤태성은 다른 곳도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숙식제공을 하는 직장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근무 여건이나 환경이 어떠할지는 직접 가서 봐야 알 일이다. 전화통화만으로는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려웠다.
 윤태성이 생활지를 접어버렸다.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차라리 이 근처에서 구하자. 어차피 여긴 시장이니 일거리도 많이 있을 거야.”
 그는 곧바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밤이 되자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윤태성은 한산하게 변한 시장을 둘러보았다.
 그가 둘러보는 시장은 강북구에 있는 화평시장이라는 곳이었다.
 윤태성이 강북구에 있는 이 시장통을 찾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강서구의 거성용역을 무작정 떠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다보니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그는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식당과 주점이 줄지어 있는 골목을 발견했다.
 시장과 가까이 붙어 있는 골목이었는데, 그곳은 불야성을 방불할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족발집, 삼겹살집, 곰탕집, 통닭집, 맥주호프집 등등…….
 소위 말하는 ‘먹자골목’이다.
 이 골목은 다양한 음식점들의 백화점 같았다.
 윤태성은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다가 문득 전봇대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광고들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이 부동산 관련 광고였지만 구인광고도 있었다.
 그것들을 살펴보던 윤태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피자 배달원 모집.
 숙식제공. 근무환경 쾌적함.
 근무시간 : 정오부터 자정까지
 급 여 : 120만원/월
 조 건 : 신체 건강하고 성실한 만 18세 이상의 성인.
 원동기 면허증 필수.
 
 윤태성은 이 광고를 보자 ‘이거다!’싶었다.
 바쁠 때도 있겠지만 피자 배달이라는 게 쉴 사이 없이 계속 일해야 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틈틈이 자기시간을 쪼개서 공부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광고를 낸 업소를 찾아갔다.
 음식점 골목 끝자락에 피자가게가 있었다.
 간판에 ‘뽀빠이 피자’라고 적혀 있었고, 가게의 크기는 작았지만 무척 깔끔해 보였다. 그리고 가게 앞에는 오토바이 한 대가 대어져 있었는데, 뒤쪽에 커다랗고 붉은 박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박스 옆면에는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굵은 팔뚝을 들고 윙크를 하는 그림과 함께 ‘뽀빠이 피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윤태성이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세요.”
 밝은 표정과 목소리를 지닌 예쁜 아가씨 한 명이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채 윤태성을 맞았다.
 윤태성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피자 드릴까요?”
 “예? 아, 아닙니다. 광고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배달원을 구한다고 해서요.”
 “아! 그래요? 잠시 만요. 엄마, 잠깐 나와 봐!”
 그녀가 고함을 지르자 주방 안에서 사십대 중, 후반의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다.
 “무슨 일이야? 바쁜데.”
 “광고 보고 찾아왔데.”
 “그래?”
 그녀가 윤태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윤태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을 해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아, 예. 반가워요.”
 아주머니가 윤태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윤태성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도 제법 크다. 그리고 얼굴도 그런대로 괜찮게 생긴 편이다. 허우대 하나만큼은 멀쩡하다는 말이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19살입니다.”
 “그럼 고등학생?”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대신했습니다.”
 “그,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전 보육원 출신입니다. 오늘 막 나왔어요. 성인이 되면 떠나야 하거든요.”
 “보육원이라면…, 고아원 말인가요?”
 “예. 예전에는 고아원이라고 불렀죠.”
 “그럼 연고가 없겠네요?”
 “그렇긴 하지만…, 써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피자 배달일이라고 하지만 연고도 없는 고아 청년을 종업원으로 쓰려니 뭔가 찝찝했던 것이다.
 “일단 저기 앉아 있어요. 우리 아저씨가 오면 결정할 게요.”
 “예. 알겠습니다.”
 윤태성은 아주머니에게 머리를 꾸벅 숙인 후,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카운터의 딸과 수군거렸다.
 “얘! 고아라는데 괜찮을까?”
 “글쎄. 인상도 좋고 키도 훤칠해서 배달 일하기에는 괜찮을 것 같은데…….”
 “사람 속은 아무도 몰라. 일단 네 아빠가 오시면 결정하자. 그 양반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하니까.”
 “응, 엄마. 그런데, 고구마피자 다 만들어 가?”
 “이런!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급히 주방으로 뛰어갔다.
 딸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빨리 해! 지금 주문 막 밀려든단 말야!”
 “알았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후, 가게 유니폼을 입고 빨간 헬멧을 쓴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 가게 문을 열고 급히 들어왔다.
 “지영아! 또 주문 들어온 데 없냐?”
 “아빠 왔어? 주문은 있는데 아직 피자가 안 만들어졌어.”
 “그래? 영자야, 서둘러!”
 “알았어요.”
 주방에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의 아가씨가 부친에게 윤태성을 가리켰다.
 “아빠. 저기 저 학생이 구인광고보고 찾아왔데요.”
 “그래?”
 그가 급히 윤태성에게 다가갔다.
 윤태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윤태성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나이가 어떻게 되죠?”
 “열아홉입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올해 마쳤습니다. 그리고 보육원 출신입니다.”
 윤태성은 상대가 묻기에 앞서 미리 자신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중년인은 윤태성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말에도 인상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열아홉이라……. 그럼 말을 놓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알겠네. 그럼 군대는 어떻게 되나?”
 “이미 면제를 받았습니다. 13살 이전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럼 여기서 오래 일할 수 있겠어.”
 “내쫒지만 않으시면 여기다가 뿌리를 내리겠습니다.”
 “하하하, 말 한 번 시원시원하네.”
 “그리고 저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피자 만들다가 남은 식재료로 제가 만들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생활력 하나는 자신 있다, 그거로군.”
 “제가 생활력 하나 빼면 시쳅니다.”
 “혹시 인생의 좌우명 같은 것도 있나?”
 윤태성이 잠시 주저하더니 대답했다.
 “위대한 모든 업적은 작은 시작에서 비롯된다.”
 “호오! 아주 멋진 말인데?”
 “최근에 본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인데…, 마음에 들어서 제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가 잠시 윤태성을 쳐다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월급 120에 숙식 제공이야. 방은 가게 안쪽에 있는 내실을 사용하면 되고…, 배달원을 구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가게의 소소한 일도 거들어야 해.”
 “물론입니다. 바닥에 광이 나도록 청소하고 빨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방부터 일단 보고 와. 주방 옆으로 들어가면 돼.”
 윤태성은 주인아저씨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방을 보았다.
 작은 TV, 소형 냉장고에다가 컴퓨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소형 접이식 침대가 구석에 서 있었고, 장롱도 있다. 방이 좀 작다는 점만 제외하면 어지간한 모텔이나 원룸보다 나을 정도다.
 윤태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주인아저씨는 이미 배달을 나가고 없었다.
 “죄송해요. 지금 너무 바쁜 시간이라서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오실 거예요.”
 “예. 전 괜찮습니다.”
 잠시 후, 주인아저씨가 다시 들어왔다.
 하지만 주문은 계속 밀려들었고, 모두들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인아저씨가 윤태성에게 급히 물었다.
 “방 괜찮아?”
 “예. 마음에 듭니다.”
 “좋아. 그럼 내일 주민등록등본하고 통장사본 만들어서 12시까지 와.”
 “알겠습니다.”
 “아참! 원동기 면허증 있지?”
 “예,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신문배달을 해서 오토바이 타는 건 자신 있습니다.”
 “그럼 면허증 사본도 만들어 와.”
 윤태성은 인사를 꾸뻑 한 후, 가게를 나가 숙소로 돌아갔다.
 피자가게는 무척 바빴고 모두들 정신없이 일을 했다.
 마침내 자정이 되었다. 그러자 밀려들던 피자 주문도 뜸해졌다.
 주방에서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카운터에 있는 딸에게 말했다.
 “애고, 어깨야. 지영아. 그만 들어가서 자.”
 “괜찮아. 문 닫고 같이 들어가.”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긴. 수시 합격 전에는 세 시까지 공부하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학교도 갔는데, 뭘.”
 “녀석…….”
 그때, 배달 나갔던 주인아저씨가 돌아왔다.
 “아빠, 수고했어.”
 “휴! 지영아. 배달 더 없냐?”
 “응. 없어.”
 “아이구 팔, 다리야.”
 주인아저씨가 카운터 앞에 있는 의자에 퍼질러 앉았다.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보. 오늘 찾아왔던 그 청년, 정말 고용할거예요?”
 “그럴 생각이야. 그런데, 왜?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아니지만 걸리는 게 있어서요.”
 “고아라는 것 때문에 그래?”
 “예.”
 “고아라고 해서 무조건 안 된다는 건 편견이야. 내가 보기에 그 청년 꽤 건실해 보이더라.”
 “그래요?”
 “영자야. 이 오빠,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염려 붙들어 매라.”
 “훗! 알았어요.”
 주인아저씨가 시계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은 더 이상 주문 안 들어올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갈까?”
 “그럴까요?”
 “어차피 내일부터 일 할 녀석이 올 테니까 오늘만 고생하자. 자, 그럼 청소 시작!”
 아주머니는 주방을 정리하러 들어갔고, 주인아저씨와 그의 딸이 빗자루와 밀대걸레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마침내 청소와 뒷정리가 모두 끝나자 세 사람은 가게를 닫고 집으로 향했다.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아내에게 다가가더니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자야. 오랜만에 포장마차 가서 소주 한 잔 할까?”
 “소주요? 쩝! 그러고 보니 안주가 좀 당기기는 하는데…….”
 “이 오빠가 안주 맛있는 거 시켜줄게.”
 “정말요? 당신 좋아하는 소 간이나 천엽, 이런 거 시키기 없기예요.”
 “알았어.”
 “그럼 가요.”
 그녀가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을 본 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어휴! 엄마, 아빤 정말……. 언제까지 신혼부부 흉내야? 이제 좀 떨어질 때 안 됐어? 동네 창피해서 원…….”
 “떽!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이 아빠는 영자 없이는 못산다.”
 “쳇! 알았어.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 적당히들 마시고 들어오셔.”
 “오냐! 그럼, 영자야. 우린 저쪽으로 갈까?”
 “네.”
 어두운 골목 안으로 꼭 껴안고 걸어가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두 사람의 금슬 하나만큼은 재벌 부럽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집에 가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고 자야지.’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
 
 어두운 밤.
 윤태성은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불 꺼진 방에 홀로 누워 있는 건 아직도 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항상 시끌벅적한 은혜보육원의 식구들과 함께 있었고, 그건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어린 동생들과 방을 같이 사용했는데, 그들은 장난꾸러기였고, 원장 어머니가 화를 내기 전까지는 잠자리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후후후, 녀석들…….’
 윤태성은 동생들을 생각하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 띤 얼굴은 이내 처연하게 변했다.
 당분간 그들의 얼굴을 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원장 어머니…….’
 그의 머리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원장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윤태성이 손을 가슴에 넣어 목걸이를 거머쥐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그가 이런 버릇을 가지게 된 건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 보육원의 어린 동생 한 명이 감기에 걸렸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앓아누웠다. 의사도 포기할 정도로 심한 폐렴이었다.
 윤태성은 병든 동생이 생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도록 급한 김에 자신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빼서 동생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건 소원을 들어주는 부적이라고 말했다.
 동생은 목걸이를 꼭 잡고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음날 병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윤태성은 동생의 병이 나은 게 목걸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동생이 그 목걸이를 통해 믿음과 힘을 얻어서 병마와 싸워 이긴 것이라 생각했다.
 그 날 이후 윤태성은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우울해질 때마다 목걸이를 꼭 쥐고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부디 우리 원장 어머니와 동생들 모두 곧 다가올 겨울을 건강하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윤태성은 보육원의 식구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깊이 잠든 윤태성의 가슴 한가운데서 푸른빛이 은은하게 번져 나왔다.
 하지만 꿈나라로 떠난 윤태성은 결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
 
 날이 밝았다.
 윤태성은 시간에 맞춰 피자가게에 가기위해 짐을 모두 챙긴 후, 방을 나섰다.
 그는 나가기 전에 카운터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아저씨.”
 여전히 졸린 표정의 주인아저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예.”
 “저…, 어제 이틀 치 방 값을 어제 계산했는데, 오늘 나가야 해서요. 하루치는 환불해 주셔야겠는데요.”
 윤태성은 원래 이틀 치 숙박료를 미리 지급하고 여관으로 들어왔다. 최소한 이틀은 머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의외로 직장을 빨리 구했으니 더 이상 여관에 머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관주인이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계산한 건데…, 그쪽 사정으로 환불해 달라고 하면 곤란하죠.”
 “죄송합니다. 급한 사정이 생겨서요.”
 “쩝! 그럼 오천 원 제하고 이만 원 돌려드릴게.”
 윤태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돈이 걸린 문제만큼은 앞으로 절대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에이, 아저씨. 그건 아니죠.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도 일주일 안에 반품하면 전액 환불해주는 세상인데 그럼 안 되죠.”
 “하지만 이틀 묵고 가겠다고 먼저 계산한 건 그쪽이잖아요.”
 “아니, 손님이 사정이 있어서 하루 일찍 나갈 수도 있죠. 그래서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다 돌려주세요.”
 “거 참 젊은 양반이 되게 깐깐하네. 아, 그래서 오천 원만 제한다고 했잖어!”
 “아저씨! 오천 원이면 시장통에서 밥을 한 끼 사먹고 자판기 커피 뽑아 마셔도 남는 돈이에요. 그리고 한 달만 꼬박 모아도 십오만 원이구요, 일 년을 모으면 백팔십만 원이나 된다구요! 그렇게 큰돈을 그냥 앉아서 벌겠다는 거예요? 예? 전 절대로 그렇게 못해요. 다 돌려받아야겠어요. 어서 주세요! 빨리 달라구요!”
 “어휴!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알았어! 주면 되잖아!”
 여관주인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돈을 창밖으로 홱 던졌다.
 윤태성이 떨어지는 오천 원 권 지폐를 잽싸게 낚아채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그가 여관주인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여관주인은 ‘탁!’하고 소리가 나도록 카운터의 창문을 닫아버렸다.
 카운터 안에서 구시렁거리는 여관주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윤태성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여관을 나갔다.
 어차피 돈을 모두 돌려받았으니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등본을 떼고, 은행에 가서 통장 하나를 만든 후 뽀빠이 피자로 향했다.
 잠시 후 뽀빠이 피자에 도착한 윤태성은 가게의 셔터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라! 아직 문을 안 열었네.”
 윤태성이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까지 10분이 남아 있었다.
 그가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다가 정확히 12시가 되는 순간 사장이 아주머니와 손을 꼭 잡은 채 골목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중년부부가 손을 잡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윤태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훗! 두 분 사이가 아주 좋은 모양이네.’
 잠시 후, 두 사람이 가게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왔어? 어서 들어가자.”
 사장이 셔터를 올린 후,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로 들어간 후, 윤태성은 사장과 테이블을 앞두고 마주 앉았다.
 윤태성이 품에서 주민등록등본과 통장 사본을 꺼냈다.
 그걸 잠시 살펴본 후, 사장이 말했다.
 “오늘이 20일이니까 월급은 매달 19일에 통장에 꽂아주마. 그리고 업체가 워낙 영세하다보니 보험 같은 건 안 돼. 알지?”
 “예. 괜찮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쉰다. 첫째, 셋째 주 월요일이다.”
 “그것도 좋습니다.”
 “사고치거나 하면 안 돼.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알았지?”
 “예, 사장님. 걱정 마세요.”
 “짐은 그 가방 하나가 전부야?”
 “예. 이것뿐입니다.”
 “후후후, 정말 인생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 같네. 앞으로 잘 해보자.”
 그가 윤태성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일단 우리 가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주방과 배달이다. 주방은 영자가…, 험험. 안사람이 맡고 있지만 필요할 때는 뭐든 도와야 된다.”
 “알겠습니다.”
 “장을 보는 것도 배워. 우리 가게는 재료를 본사에서 받아서 만들어 팔기만 하는 체인점이 아냐. 그러니까 식재료를 모두 장만해서 만들어 팔아. 물론 장을 보는 건 내가 주로 하겠지만, 갑자기 주문이 몰려들면 중간에 식재료가 떨어지는 일이 있어. 그땐 네가 장을 봐야 할지도 몰라.”
 윤태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말했다.
 “동네 지리도 익혀둬. 어차피 동네 장사니까 근처만 익히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나하고 장부터 보러 나가자. 영자야! 이 오빠 장보러 간다.”
 “네. 다녀오세요.”
 윤태성이 ‘훗!’하고 웃자 사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왜 웃어?”
 “사모님의 이름을 부르시니까 좀…….”
 “왜? 그게 뭐 어때서?”
 “하하, 아닙니다. 정겨워서 듣기 좋습니다.”
 “짜식! 부러우면 너도 장가 가, 임마!”
 사장이 씩 웃더니 윤태성의 어깨를 툭 쳤다.
 “자, 가자!”
 “예, 사장님.”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게를 나섰다.
 윤태성은 가슴이 살짝 설레는 것을 느꼈다.
 사장은 좋은 사람 같았고, 이제 제대로 된 사회인이 된 느낌이었다.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지. 태성아. 파이팅!’
 그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3. 피자 배달원
 
 윤태성이 뽀빠이 피자에 취직한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사장과 아주머니가 적당히 하고 좀 쉬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피자가게의 일은 물론 단골들까지 모두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통에서 자신의 얼굴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장 사람들과 안면도 텄다.
 한 달 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가 시장에서 제법 유명인물이 된 건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바로 인사성이다.
 윤태성은 시장통을 지날 때마다 무조건 인사를 하고 다녔다. 상대가 바빠서 자신의 인사를 받든 말든, 그리고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치 않고 사람을 보면 일단 허리부터 숙이고 봤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항상 같은 유니폼을 입은 채 피자집 배달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다니는 윤태성을 상인들은 조금씩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자 이제 뽀빠이 피자의 로고가 새겨진 오토바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상인들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부다다다다!
 오늘도 윤태성은 오토바이를 몰고 조심스럽게 시장통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와글와글! 시끌벅적!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장통을 윤태성은 사고 한 번 없이 잘도 오토바이를 몰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요즘 날씨가 추워졌죠?”
 끊임없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윤태성에게 상인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까 인사하고 또 하네?”
 “호호호, 우리 태성 총각만 보면 왠지 힘이 난다니까.”
 “태성 총각. 나중에 어묵 먹으러 와. 부산에서 방금 올라왔어.”
 윤태성은 상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시장통을 지나 인근에 있는 아파트단지로 들어갔다.
 시장통 인근에는 커다란 아파트단지 두 곳이 있었다. 뽀빠이 피자의 고객들은 대부분 이 아파트단지에 집중되어 있었고, 윤태성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곳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이 아파트단지 두 곳은 큰 차이가 있었다. 한 곳은 오래 된 낡은 아파트였고, 또 한 곳은 최근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였다.
 당연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빈부의 차이가 컸고, 피자를 자주 주문하는 쪽도 고급 아파트의 입주민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급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팁을 주는 경우도 잦았다. 이, 삼천 원 정도의 거스름돈은 아예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윤태성은 돈을 벌어서 좋기는 했지만 마음은 왠지 씁쓸했다.
 누구는 뼈 빠지게 하루 몇 만원을 벌려고 고생하는데, 부자들에게는 한 끼 간식 값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위화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반면 낡은 아파트단지의 사람들은 동전 하나까지 정확히 계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서 팁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윤태성은 오히려 그런 점이 좋았다. 인간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늦게 피자를 주문해서 배달을 가면 늦은 밤에 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뭘 하나 빠뜨리고 와도 다음에 올 때 가져오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지금 윤태성이 배달을 가는 집도 단골이었다.
 고급아파트단지에서 평수가 가장 작은 집에 혼자 사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밥을 거의 해먹지 않는 듯했다. 배달을 가보면 항상 빈 그릇들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윤태성을 유달리 귀여워(?)했다.
 띵동! 띵동!
 벨을 몇 번이나 눌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윤태성은 전혀 조급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 집에 배달을 올 때마다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대략 5분가량 벨을 누르자, 마침내 잠이 덜 깬 여성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 으음! 누구세요?
 “피자배달 왔습니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부스스한 머리에 잠옷을 입은 젊은 아가씨가 나왔다. 그런데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피부가 하얀 게 여간 예쁜 얼굴이 아니다. 화장을 하고 옷만 제대로 입으면 어디 가더라도 연예인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태성이 왔구나. 오래 기다렸어? 미안.”
 윤태성은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집에 배달을 올 때마다 보아왔던 모습이지만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늘도 주무시고 계셨어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어휴! 어젯밤에 진상 한 놈을……. 험험! 일이 좀 힘들어서 그래.”
 “예……. 여기 피자요.”
 “응. 고마워.”
 “만오천 원입니다.”
 “잠깐 들어올래? 지갑을 안 가져왔네.”
 “아,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리죠.”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 내가 맛있게 타줄게.”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피크 타임이에요. 빨리 가봐야 해요.”
 “어휴! 다른 놈들은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인데……. 귀여운 것!”
 그녀가 윤태성의 뺨을 꼬집으려고 했다.
 당황한 윤태성은 얼굴이 빨갛게 변한 채 고개를 돌렸다.
 “누, 누님. 그러지 마세요.”
 “훗! 얼굴이 빨갛게 변하니까 더 귀엽네? 잠깐만 기다려봐.”
 그녀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돈을 가져 왔다.
 오만 원짜리다.
 윤태성이 거스름돈을 꺼내려 하자 그녀가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문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팁이야. 가져!”
 “누, 누님. 매번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제발 거스름돈 좀 받으세요!”
 “일 없다. 나 빨리 피자먹고 출근준비 해야 해. 그럼 안녕!”
 “누님! 누님!”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윤태성이 오만 원짜리 지폐를 들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끔 가다가 생기는 부수입이라면 즐겁겠지만 이 집에만 오면 매번 그러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윤태성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내려갔다.
 ‘나중에 선물이라도 해드려야겠다. 내가 전부 갖기에는 너무 큰 액수야.’
 그가 입맛을 다셨다.
 가게로 돌아온 윤태성이 문을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다녀왔습니다. 배달 없어요?”
 카운터에서 사장의 딸이 인사를 했다.
 “안녕!”
 “아, 지영이 왔구나. 오늘은 좀 빨리 왔네? 사장님은?”
 김지영은 뽀빠이 피자 사장의 딸이다.
 윤태성과 동갑이라 말을 터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아빤 엄마와 함께 주방에 계셔. 잘 나가는 걸로 미리 만들어 두려고. 한데, 어때? 요즘 힘들지?”
 “힘들긴! 일이 많아야 돈을 많이 벌지.”
 “호호호, 요즘 매출이 많이 늘었다고 아빠와 엄마가 아주 좋아하셔. 그게 전부 태성이 네 덕분이야.”
 “아냐. 내가 뭘……. 사모님이 피자를 워낙 맛있게 만들고 또 가격까지 저렴하니까 그렇지. 그건 그렇고 주문 들어온 거 없어?”
 “아직은 없……. 이런 전화 울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아, 네. 콤비네이션 피자 두 판요? 알겠습니다. 엄마! 콤비네이션 피자 두 판!”
 주방 안에서 주인아저씨가 ‘오케이!’라고 소리쳤다.
 김지영이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험험!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네. 배달 준비해.”
 “알았어.”
 곧이어 피자가 나왔고, 윤태성은 한꺼번에 네 판을 들고 배달을 나갔다.
 
 @@@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주문이 뜸해질 시점이었지만, 최근에는 단골이 늘어서인지 여전히 주문이 많았다.
 윤태성은 어두운 밤길을 달리며 부지런히 피자를 날랐고, 그렇게 한 시간이 더 흐르자 마침내 주문이 뜸해졌다.
 윤태성은 쌀쌀한 날씨에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가게로 돌아왔다.
 “휴우! 또 주문 없어요?”
 “응. 한 군데서 더 들어왔는데, 아빠가 배달하러 가셨어.”
 “사장님이? 좀 쉬시라고 하지. 주방에서 힘드셨을 텐데.”
 “훗! 힘들기야 배달 다니는 네가 더 힘들지. 한데, 오늘은 어땠어? 짭짤했어?”
 “그냥 그렇지 뭐…….”
 김지영의 물음에 윤태성이 말끝을 흐렸다.
 김지영도 윤태성이 종업원으로 들어오기 전에 배달을 꽤 다녔었다. 그래서 팁 같은 부수입이 조금씩 들어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사장이 돌아왔다.
 “수고했어, 아빠.”
 “태성이가 쉬는 걸 보니 주문 들어온 거 더 없나 보구나.”
 “응. 이제 없어.”
 “그럼, 어디 보자……. 오늘 매상이 얼마나 올랐지?”
 김지영은 카운터로 들어오는 부친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보면 깜짝 놀랄 걸?”
 “그래?”
 그는 카운터 아래에 있는 금고를 열고 매상을 확인했다.
 “험험! 뭐 평상시하고 비슷하네.”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좋아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실제로 윤태성이 들어오고부터 매상이 두 배로 뛰었다. 물론 윤태성이 친절하고 열심히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역 상권이 막 커가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인근에 지하철역과 고급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부터 유동인구와 거주자가 부쩍 많아졌다. 덕분에 이 지역은 현재 황금상권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그만 마치자. 영자야! 주방 정리해라!”
 주방에서 ‘네!’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우리도 청소 해볼까?”
 “제가 하겠습니다, 사장님.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들어가세요.”
 윤태성이 빗자루를 집어드려는 사장을 말렸다.
 “무슨 소리! 같이 고생했는데 마무리도 함께 해야지. 넌 밀대나 들어. 그리고 지영이는 주방에 가서 엄마 도와드려.”
 “응, 아빠.”
 모두들 힘을 합쳐 가게를 정리하니 금방 끝났다.
 깨끗해진 가게를 둘러본 후, 사장과 가족들은 가게를 나섰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지영이도 잘 가.”
 “그래. 수고했다.”
 “수고했어요.”
 “내일봐!”
 사장 가족들이 윤태성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는 순간, 어디선가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부다다다!
 거리 저편에서 형형색색으로 칠하고 번쩍이는 LED등을 단 오토바이 대여섯 대가 한꺼번에 나타나더니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은 채 질주했다.
 쿵짝쿵짝쿵짝!
 그렇게 넓지도 않은 거리를 곡예라도 하듯 달리는 오토바이 무리를 보고 사장이 고함을 질렀다.
 “이 좁은 거리에서 무슨 짓들이야!”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자들은 모두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장을 힐끗 보더니 순식간에 가게 앞을 지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 김지영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부친의 등 뒤로 숨었다가 오토바이 무리가 모두 지나가자 고개를 내밀었다.
 “휴우! 무서워서 혼났네. 쟤들 도대체 누구야?”
 “글쎄다. 중국집과 가스 배달하는 애들 서너 명이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어울리는 건 몇 번 봤지만 저 녀석들은 처음이구나. 어디 다른 동네에서 건너온 모양이다. 어서 가자.”
 사장과 가족들은 곧바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윤태성은 배달 오토바이 두 대를 가게 안으로 들여놓은 후, 셔터를 내렸다.
 이제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났다.
 윤태성은 방으로 들어가 기지개를 켰다.
 “에고고, 팔다리야.”
 그는 아픈 팔다리를 잠시 주무른 후,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있으니 하루의 피로가 모두 녹는 듯했다.
 윤태성이 느긋한 표정으로 샤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윤태성은 급히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후 추리닝 바지만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럴 수가…….”
 윤태성이 경악한 표정으로 깨진 가게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붉은 벽돌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걸 유리창을 향해 집어던진 모양이었다.
 유리창에는 창살 형태의 셔터가 내려와 있었지만, 벽돌은 창살 틈으로 날아 들어와 유리창을 박살 낸 것이다.
 윤태성은 곧바로 셔터를 올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멀리 불빛이 번쩍이면서 오토바이 몇 대가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놈들은 아까 지나간 그 양아치들 같은데…….”
 거리가 너무 멀고 어두워 제대로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윤태성은 확신했다.
 “나쁜 놈들!”
 그는 곧바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태성입니다.”
 - 음. 그래. 무슨 일이야?
 “어떤 놈들이 벽돌을 던져서 가게 유리창이 박살났습니다.”
 - 뭐? 다치진 않았냐?
 “예. 샤워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에요.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봤어?
 “멀리 오토바이 몇 대가 사라지는 걸 보긴 했는데…….”
 - 그럼 아까 본 그 양아치 녀석들 아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보진 못했어요. 지금 신고라도 할까요?”
 - 오토바이 타고 도망친 놈들 신고한다고 잡을 수 있겠냐?
 “그야 경찰들이 알아서…….”
 - 일단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곧 가마.
 “아닙니다. 경찰에 신고할 거 아니면 내일 아침에 오세요. 제가 깨끗이 치울게요. 어차피 유리를 새로 갈아 넣으려고 해도 날이 밝아야 하잖아요.”
 -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너무 걱정 마세요.”
 - 음! 알겠다. 그럼 그냥 내버려두고 내일 아침에 같이 치우자. 어두울 때 유리 치우는 건 위험하다.
 “예. 제가 알아서 할 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푹 자.
 윤태성은 전화를 끊은 후, 가게 안으로 들어가 옷을 제대로 입고 다시 나왔다.
 “에휴! 대충이라도 치워놔야겠다.”
 그는 빗자루를 들고 깨진 유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뽀빠이 피자 사장과 부인이 아침 일찍 가게로 나왔다.
 윤태성은 밤새 유리를 치우고 다시 청소를 한 후 새벽에 잠들었다가 그들이 셔터를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깼다.
 “세상에! 완전히 박살이 났구나.”
 사장과 부인은 커다란 유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게 뚫려 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윤태성이 눈을 부비며 방에서 나왔다.
 “오셨어요?”
 “그런데 가게가 왜 이렇게 깨끗해? 다 치우고 잔거야?”
 “예. 제가 치웠어요.”
 “위험하니 하지 말라니까.”
 “아침에 행인들도 지나다닐 텐데 유리가 깨진 채로 있으면 너무 보기가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녀석!”
 사장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윤태성을 쳐다보았다.
 “빨리 갈아 넣어야 할 것 같은데요.”
 “오면서 유리 집에 이야기했다. 나중에 저녁이나 되어야 갈아 넣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요? 그럼 장사 어떻게 하죠?”
 “어차피 배달이 주업이니 별 상관은 없어. 하던 대로 하자.”
 “예, 사장님.”
 윤태성은 사장과 함께 가게를 열고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
 사장의 말대로 유리집에서 커다란 유리를 트럭에 싣고 와서 새로 끼워 넣었다. 비용이 무려 50만원이었다.
 하루 매상 절반 가까이가 돌팔매질 한 번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나쁜 놈들! 잡히기만 해봐라…….”
 사장이 새로 단 유리를 쳐다보며 이빨을 바득바득 갈았다.
 “사장님. 신고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사고치는 놈들 잡기 어려워. 설사 눈앞에 나타났다고 해도 어떻게 잡을 거야? 도망치면 그뿐인데.”
 “하긴, 번호판도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네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차라리 셔터를 다른 걸로 바꿔야겠다.”
 “돈이 많이 들 텐데요.”
 “어쩔 수 없지. 자, 배달 준비하자. 슬슬 주문이 들어오는 것 같다.”
 “예, 사장님.”
 피크 타임이 곧 시작되었고, 윤태성은 부지런히 피자 배달을 시작했다.
 다시 밤이 되었다.
 사장은 가족들과 집으로 돌아갔고, 윤태성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코까지 골면서 깊은 단잠에 빠져 있던 윤태성은 갑자기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다시 잡을 깼다.
 와장창!
 “뭐, 뭐야?”
 윤태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후 가게로 나갔다.
 그의 눈이 커졌다.
 “이럴 수가…….”
 어제 저녁에 새로 해 넣은 유리가 박살이 났고, 바닥에는 붉은 벽돌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이, 이…….”
 윤태성은 곧바로 셔터를 올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리 저편에서 오토바이 몇 대가 사라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저, 저놈들이 정말…….”
 윤태성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깨진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배달용 오토바이를 가게 안에 들여놓지만 않았다면 당장 그걸 타고 쫓아갔을 것이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윤태성은 사장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지금 전화를 하나 아침에 하나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쉰 후 깨진 유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왔다.
 윤태성은 방으로 들어가 간이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아침 8시가 되었다.
 윤태성은 이틀 밤을 설치고 나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태성의 전화를 받은 사장은 유리가 또 박살났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곧바로 가게로 달려왔다.
 “이럴 수가…….”
 윤태성은 자신이 저지른 짓도 아닌데, 괜히 사장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네가 왜 죄송해? 유리창을 깬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안 되겠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 그리고 배달 오토바이 타고 쫓아갈 생각은 아예 하질 마라!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난다.”
 윤태성은 내심 뜨끔했다. 오토바이라면 자신이 있었기에 정말 그렇게라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사장은 유리 집에 전화를 건 후, 곧바로 근처에 있는 지구대로 찾아갔다.
 한 시간 가량 흐른 후, 사장은 경찰차를 타고 가게로 왔다.
 경찰들이 가게를 둘러보더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장에게 말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양아치 놈들은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꼭 좀 잡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일단 이곳으로 순찰을 자주 돌겠습니다.”
 “잠복 같은 걸 하시면 안 될까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저희가 살펴야 할 곳이 워낙 넓어서…….”
 “하지만 이건 엄연한 범죄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고…, 정식 수사가 들어가기는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은 계속해서 경찰에게 적극적인 수사를 부탁했지만, 경찰관들은 어렵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휴! 그럼 우리나라 경찰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시민의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이런 놈들부터 먼저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CCTV라도 다시죠. 그럼 도움이 될 겁니다.”
 “번호판도 없고, 헬멧을 써서 얼굴도 안 보이는 놈들을 찍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순찰이라도 자주 돌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경찰관들은 거수경례를 한 후 경찰차를 타고 사라졌다.
 사장은 그런 경찰들이 미덥지 못한지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 윤태성이 보기에도 경찰관들에게는 수사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가게는 스스로 지켜야 했다.
 “사장님. CCTV라도 다는 게 어떻습니까?”
 “소용없어. 찍어봐야 잡지도 못해.”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일단 유리부터 갈아 넣고 생각해보자.”
 “예…….”
 윤태성은 한숨을 내쉬며 휑한 바람이 드나드는 가게를 쳐다보았다.
 
 @@@
 
 어두운 밤.
 시장통 뒤편에 있는 놀이터 앞에 오토바이 여섯 대와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어둠속에 서 있었다.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는데, 머리카락 색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양아치들이었다.
 그리고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있었는데, 그는 품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양아치들 중 한 명에게 건넸다.
 “자, 여기 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한다.”
 봉투를 건네받은 양아치가 봉투를 슬쩍 열어서 금액을 살펴보더니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는 좀 더 줘요.”
 “아니, 왜?”
 “두 번이나 일을 당했으니 그쪽도 대비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 위험하다구요.”
 “음! 얼마나 더?”
 “세 장만 더 줘요.”
 “세, 세장? 그건 너무 많은데……. 두 장으로 하자.”
 “아, 쓰바! 존나게 짜네! 그냥 세 장 줘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중년인은 꾹 참았다.
 “알았다. 세 장 줄 테니까, 일만 확실히 해 줘. 알았지?”
 “걱정 마요. 우리 이런 일 잘해요. 안 그러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험험. 그럼 부탁한다.”
 중년인이 막 가려는데 양아치가 불렀다.
 “아저씨! 큰 거 한 장만 주면 완전히 해결해 드릴게요. 어때요?”
 “완전히 해결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쫀쫀하게 유리창이나 깬다고 그 가게가 망하겠어요? 존나 짜증만 나지.”
 “그, 그럼?”
 “불이라도 확 지르면 되잖아요.”
 “불을 질러! 얘가 미쳤나……. 그러다 사람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다치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가게만 망하면 됐지.”
 “그, 그건 생각은 하지도 마라. 이것만 해도 가슴이 떨려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다.”
 “에이, 간이 그렇게 존만 해서 얻다 써요? 우리가 간 좀 키워 드릴까요?”
 “아, 아니다. 됐다. 난 그만 갈란다. 그냥 내가 시킨 일만 해.
 중년인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양아치들이 그런 중년인을 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쯧, 저리니 꼰대 소릴 듣지. 야! 우리 심심한데 불장난이나 할까?”
 양아치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야호! 불장난 좋지!”
 “모조리 태워버리고 튀자! 큭큭큭!”
 “오늘 신나겠는데?”
 “빨리 화염병 제조해!”
 그들 중 한 명이 곧바로 주위에 널려 있던 빈 소주병을 주웠다. 그리고는 오토바이에서 휘발유를 빼내 소주병에 채웠다.
 헝겊으로 구멍을 막고 심지까지 만드는 모습이 꽤나 능숙하다.
 잠시 후,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놀이터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부릉! 부르릉!
 “모두 출발!”
 “이야호!”
 양아치 폭주족들이 폭탄을 짊어진 채 거리로 나섰다.
 
 
 4. 위기일발
 
 윤태성은 침대위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틀 동안 잠을 설치는 바람에 몸은 피곤했지만, 눈만 감으면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에이!”
 윤태성이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피곤할지언정 밖에 나가서 가게를 지키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가게 홀 안으로 들여놓은 배달 오토바이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쩝! 놈들이 나타나면 저걸 타고 쫓아가?’
 윤태성은 신문배달을 하면서 오토바이를 꾸준히 몰았기에 누구보다 잘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오토바이 추격전을 벌인다는 건 위험하기도 하지만 양아치 폭주족들의 오토바이 배기량이 훨씬 컸다. 따라서 배달용 오토바이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잠시 생각하던 윤태성은 창고로 가서 각목 하나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셔터를 조금 올려서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놈들 나타나기만 해봐라.’
 윤태성은 각오를 단단히 한 채 각목을 움켜쥐고 홀 입구에서 기다렸다.
 시간은 흘렀고 밤은 점차 깊어갔다.
 새벽 3시 경이 되었을까.
 윤태성은 순찰차가 경광등을 번뜩이며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2, 30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윤태성은 천근만근 감기는 눈꺼풀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더니 이내 천둥처럼 크게 변했다.
 선잠이 들었던 윤태성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놈들이다!”
 그는 각목을 움켜쥐고 재빨리 가게를 나왔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오토바이 대여섯 대가 줄지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윤태성의 눈빛이 빛났다. 이틀 전에 가게 앞을 지났던 양아치들이 분명했다.
 “야 이놈들아!”
 윤태성이 각목을 허공에다 대고 마구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가게를 향해 곧장 달려오던 오토바이들은 윤태성이 가게 앞에서 각목을 마구 휘두르며 날뛰자 맞은편 길가로 떨어져서 지나갔다.
 부다다다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엔진소리와 함께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가게 앞을 지나갔다.
 마지막 오토바이가 막 가게를 지나갈 무렵, 윤태성은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은 녀석이 횃불 같은 걸 들고 빙빙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윤태성이 ‘어어어!’하는 소리를 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 녀석이 가게를 향해 횃불을 휙 던졌다.
 윤태성은 그게 횃불이 아니라 화염병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화염병은 허공을 가로질러 한참동안 날아가더니 가게 입구에 떨어졌다.
 퍽!
 화르르르르!
 치솟는 불길!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윤태성은 경악성을 발할 시간도 없이 가게 안으로 번져 들어가는 불길을 향해 반사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 불길을 잡기 위해 풀쩍풀쩍 뛰었다.
 하지만 휘발유에 붙은 불이 쉽게 꺼질 리가 없다.
 윤태성은 자신의 바지에 불길이 옮겨 붙은 사실도 알지 못했다. ‘불이야!’라고 외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빨리 불을 끄지 않으면 가게는 물론, 가게가 속한 3층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윤태성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테이블 위에 깔려 있는 식탁보를 발견하고는 그걸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불을 덮었다.
 그때, ‘퍼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정에서 소나기 같은 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화재감지기가 불을 감지하고 스프링클러를 작동시킨 것이다.
 따르르르르!
 요란한 경보음도 함께 들렸다.
 다행히 불길은 홀 안으로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스프링클러가 제때 작동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윤태성이 불을 잡으려고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뛰어나왔지만 그들은 윤태성처럼 불을 끄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윤태성은 혼자 불길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누군가 자신을 덮치는 바람에 옆으로 쓰러졌다.
 우당탕!
 윤태성을 쓰러뜨린 사람은 점파를 크게 펼쳐 그의 온 몸을 감싸고는 꼭 끌어안았다.
 “가만히 있어!”
 윤태성은 발버둥을 치려다가 그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곧이어 자신을 덮쳐서 누르고 있던 사람이 일어섰다.
 윤태성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사십대 중년인이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장씨 아저씨임을 알아보았다.
 “아저씨.”
 “괜찮아? 어서 병원에 가봐야겠어.”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가게가…….”
 윤태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계속 쏟아졌고, 불길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생선가게 아저씨가 윤태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나가. 여긴 위험해.”
 “빨리 불부터 꺼야 해요.”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어서 나가.”
 생선가게 아저씨는 윤태성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고는 밖으로 나왔다.
 가게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윤태성도 아는 시장통 사람들이었다.
 “태성 총각. 괜찮아?”
 “어떻게 해. 바지가 다 탔어…….”
 윤태성은 그제야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멓게 탄 바지가 다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갑자기 저릿하고 화끈한 느낌이 다리에서 일어났다.
 삐뽀삐뽀!
 왜애앵!
 경찰차와 앰뷸런스, 그리고 소방차들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고, 소방관들이 방화복을 입은 채 곧바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응급대원이 간이침대를 들고 윤태성의 곁으로 뛰어왔다.
 “이봐, 학생.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
 응급대원은 그의 몸을 살피더니 안색을 찌푸렸다.
 “상체는 괜찮은 것 같은데 다리가 문제야. 빨리 여기 누워!”
 윤태성은 간의침대에 천천히 누웠다.
 그러자 응급대원이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청진기와 혈압측정기를 갖다 댔다.
 윤태성은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산소마스크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태성아!”
 갑자기 피자가게 사장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사장이 부인과 딸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그와 가족들이 간이침대 위에 누워 있는 윤태성에게 급히 다가왔다.
 “태성아!”
 “태성아! 괜찮아?”
 모두들 가게보다는 윤태성에게만 신경을 썼다.
 윤태성이 급히 자신은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가게를 가리켰다.
 “이 녀석아! 지금 가게가 문제냐?”
 그때, 응급대원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서 물러나세요. 병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혹시 보호자 되십니까?”
 사장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호자 한 분만 동행하십시오.”
 사장이 윤태성과 함께 앰뷸런스에 올랐고, 앰뷸런스는 사이렌을 울리며 그곳을 떠났다.
 사장의 부인과 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멀어져가는 앰뷸런스를 쳐다보았다.
 
 @@@
 
 삑!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오는 병실.
 침대위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윤태성이 눈을 떴다.
 “음! 여긴…….”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서 사장과 그의 가족들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윤태성은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 전체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윤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릿한 느낌이 다리에서 올라왔다.
 아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분 나쁜 고통이 느껴졌다.
 윤태성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양쪽 팔에 링거 바늘 두 개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사장님…….”
 윤태성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사장을 불렀다.
 졸고 있던 사장들과 가족들이 그 소리를 듣고 퍼뜩 눈을 떴다.
 “태성아!”
 모두들 윤태성의 침대로 모였다. 걱정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윤태성은 그들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가슴에서 울컥 하는 게 올라왔다.
 “사장님. 가게는요?”
 “이 녀석…, 지금 가게가 문제냐?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어! 도대체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벌인 거야?”
 사장의 말 가운데 ‘하마터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다리의 화상이 심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장 부인이 윤태성의 손을 꼭 잡았다.
 “태성아. 괜찮니? 아프지 않아?”
 “예. 괜찮아요.”
 “휴우! 정말 다행이다. 천운이야. 생선가게 장 씨 아저씨가 조금만 늦늦게 너를 쓰러뜨렸어도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을 뻔했어.”
 “화상요?”
 “그래. 다행히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라더라. 흉터는 좀 남겠지만 잘 조리하면 나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예…….”
 “도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불이 났으면 빨리 도망쳐 나왔어야지.”
 “그게…, 저도 모르겠어요. 다리가 그냥 가게 안으로 막 뛰어 갔어요.”
 “어휴! 너도 참…….”
 “가게는 어때요?”
 “또 가게 이야기를……. 가게 걱정은 말고 빨리 몸이나 나아.”
 “아참! 그 놈들…….”
 사장이 눈빛을 빛냈다.
 “혹시 양아치 폭주족 놈들이 벌인 일이냐?”
 “예. 놈들이 가게 앞을 지나면서 화염병을 던졌어요.”
 “음. 그렇지 않아도 소방관이 그러더라. 휘발유를 이용한 방화라고 말이다. 그런데 넌 어떻게 빠져 나왔어?”
 “실은 제가 가게 홀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밤새 말이냐?”
 “예. 각목 하나를 들고 졸고 있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뛰어나가 각목을 마구 휘둘렀죠.”
 “세상에! 그렇게 위험한 짓을…….”
 “또 벽돌을 던질까봐 그랬는데, 갑자기 불덩어리를 던지더군요. 그게 화염병이었어요.”
 “아! 그래서 불이 입구에서 시작됐구나.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소방관이 그러더라. 만약 화염병이 가게 안으로 날아 들어와서 불이 붙었더라면 건물 전체로 번졌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요? 정말 큰일 날 뻔 했네요.”
 “그러게 말이다.”
 “한데,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그래. 경찰도 본격적으로 수사를 하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놈들을 잡는 건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도 그런 놈들은 꼭 잡아야 하는데…….”
 “일단 네 몸이 먼저다. 아무 생각 말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 잘 챙겨먹고 누워 있어. 알았지?”
 “예……. 그런데…….”
 “왜?”
 “병원비가…….”
 사장이 미간을 좁히더니 윤태성의 이마에 가벼운 꿀밤을 먹였다.
 “떽! 너보고 언제 병원비 걱정 하랬냐!”
 “그래도 이렇게 입원해 있으면…….”
 “화재보험 들어 놨다.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돼.”
 “아, 예.”
 윤태성은 보험으로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게 걱정도 하지마라. 보험처리 하면 인테리어 공사비 정도는 나올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게가 좀 지저분해졌다 싶었는데, 이 기회에 깨끗이 고쳐야겠다.”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 네가 다쳤는데!”
 “전 괜찮아요.”
 “녀석!”
 사장이 여전히 가게 걱정만 하는 윤태성의 모습을 보고 실소를 흘렸다.
 “그만들 가보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음. 정말 괜찮겠냐?”
 “그럼요. 가게 정리도 하셔야 할 테니 빨리 가보세요.”
 “그래. 알았다. 지영이가 남아서 병간호 할 테니 우린 그만 가마.”
 “지영이가요?”
 윤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침대 옆에 서 있는 김지영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 누님이 함께 있을 줄 테니까.”
 “아,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너 학교 가야 하잖아.”
 “학교는 며칠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걱정 마. 엄마, 아빠! 어서들 가봐. 태성이는 내게 맡겨두고.”
 사장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돌봐줘라.”
 “엄마가 나중에 도시락 사가지고 올 게.”
 사장과 부인은 윤태성에게 다시 한 번 몸조리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김지영이 윤태성의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잠이나 한 숨 더 자.”
 “괜찮아. 실컷 잔 것 같아. 한데, 지금 몇 시야?”
 “저녁 6시쯤 됐어.”
 “그럼 내가 하루 꼬박 잔거네?”
 “진통제와 진정제 때문에 그래.”
 “진통제라고?”
 “응. 의사가 그랬어. 진통제 놓지 않으면 무지 아프다고 말이야.”
 “음! 괜찮은 것 같은데…….”
 “그게 다 진통제 때문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누워 있어.”
 “그래. 알았어. 고마워.”
 “고맙긴……. 내가 오히려 고맙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윤태성이 먼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그럼 눈 좀 붙일까? 오랜만에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훗! 그래. 그렇게 해.”
 윤태성이 베개에 머리를 묻었고, 그녀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윤태성은 눈을 살짝 뜨고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김지영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잠시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던 윤태성은 또다시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진정제의 약효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고 이내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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