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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키퍼 1권-1

2015.02.06 조회 6,813 추천 59


 Prologue
 
 발키스 산맥의 지배자.
 위대한 고룡 골드드래곤 아론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레어 안에서 산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울음을 토했다.
 레어 천정에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붉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의 중심에 거대한 유성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궁극의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
 혼돈과 무질서를 주관하는 사악한 마룡 블랙드래곤 키카로스가 아니고서는 저렇게 거대한 운석을 소환하지 못할 것이다.
 아론의 거대한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과 함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으! 키카로스! 네놈이…, 네놈이…….”
 아론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내려오고 있는 운석의 크기로 보아 대륙 전체를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아무리 키카로스가 혼돈을 주관하는 악룡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제거하려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론이 치를 떠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비록 만 년을 살아온 위대한 고룡이지만 저렇게 큰 메테오를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가. 디멘션 게이트!”
 
 디멘션 게이트.
 
 질서와 조화를 주관하는 골드드래곤에게 허락된 마법. 하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천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잠들어야 할 정도로 마나 소모가 극심한 대마법이다.
 “놈 또한 메테오 마법을 펼치기 위해 마나를 소모했다 하더라도 오백 년의 수면이라면 충분히 힘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내게는 천 년이 필요하다.”
 오백 년의 공백. 마룡 키카로스가 세상을 지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아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천 년 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이 땅의 생명들이여, 부디 마룡 키카로스의 폭정 아래서 참고 견디어라!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구나.”
 골드드래곤 아론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더니 레어의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곧장 운석을 향해 다가갔다.
 우우우웅!
 아론의 거대한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일어났다.
 “오프닝 디멘션 게이트!”
 강력한 힘이 담긴 용언이 하늘을 울렸다.
 그의 몸에서 일어난 황금빛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이루더니 운석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가공할 힘을 품고 떨어져 내리던 운석이 황금빛 소용들이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장관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경이로웠다.
 마침내 황금빛 소용돌이가 운석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번쩍!
 온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밝은 섬광이 번뜩였고, 다음 순간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였다.
 골드드래곤 아론이 자신의 몸을 던져 운석과 함께 차원을 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때,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크고 시커먼 실루엣이 하늘에 드리워졌다.
 “크크크크크!”
 블랙드래곤 키카로스.
 골드드래곤 아론의 단 하나뿐인 적수이자 파괴와 죽음을 주관하는 혼돈의 지배자 키카로스는 자신의 거대한 검은 동체를 하늘에 띄운 채 점차 희미해져가는 차원게이트의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아론. 결국 내 의도대로 차원게이트를 열었구나. 네놈과 나는 둘이고 상극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존재다. 네 의지가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나의 의지 또한 공존하게 되리라. 크크크크!”
 음산한 키카로스의 목소리와 함께, 기이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검은 기운은 곧장 사라져가는 차원게이트 속으로 스며들었다.
 “크하하하하! 나는 이제 500년간의 수면에 들어가리라. 그리고 그 후의 세상은 내가 지배할 것이다. 크하하하하!”
 커다란 광소와 함께 키카로스의 거대한 동체가 밝은 빛을 뿜어내더니 그 자리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한편, 차원게이트를 통과한 아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전의 세상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푸른 하늘이었다.
 “이럴 수가……. 이 세상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단 말인가?”
 아론이 기대한 것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어느 행성이었다. 메테오가 떨어져 행성 전체가 불탄다 해도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다. 그건 이전의 세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행성이라는 뜻이었다.
 “이 행성에도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을 터, 메테오가 떨어진다면 모두 멸종하고 말 것이다.”
 그는 서서히 소멸해 가는 차원 게이트를 지켜보며 분루를 삼켰다.
 “어쩔 수 없구나. 나의 모든 힘을 개방해 메테오를 막을 수밖에.”
 원래 아론은 메테오만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은 후, 차원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최후의 힘까지 모두 사용해 행성을 구하려고 결심했다.
 아론의 몸에서 강렬한 황금빛이 다시 일어나더니 메테오 전체를 실드로 감쌌다. 메테오가 떨어진다 해도 그 위력을 최대한 감소시키기 위해서였다.
 붉게 타오르던 메테오가 푸른색 실드에 감싸이더니 마침내 지상으로 떨어졌다.
 번쩍!
 태양이 터져 나가는 듯한 섬광이 작렬했고, 짧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그 정적을 뚫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곧이어 터져 나왔다.
 쿠앙!
 아론은 붉은 화염이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하늘위에서 지켜보다가 서서히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세상의 멸망은 막았다. 하지만 마나의 씨앗만 남았구나. 이제 다시 힘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겠어. 아!”
 긴 탄식과 함께 골드드래곤 아론의 거대한 몸체는 어느 이름 모를 섬 위로 떨어졌다.
 화염이 지나가고, 붉게 타오르던 하늘이 잿빛으로 변했다.
 광대하게 펼쳐져 있던 원시림은 수많은 거대 파충류들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곧 지독하게도 차갑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열대의 축복받은 땅에서 살던 크고 작은 수많은 생물종들이 겨울과 함께 밀려온 거대한 빙하 속에서 얼어 죽었고,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생을 이어갔다.
 아론의 몸체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비늘로 보호되고 있었기에 화염폭풍과 빙하를 견뎌냈다.
 하지만 수십, 수백만 년이 흐르는 가운데 먼지와 흙이 쌓여 단단히 굳었다. 결국 아론의 거대한 몸체는 섬의 일부가 되어 묻히고 말았다.
 
 
 1장. 한승윤
 
 퍽!
 경쾌한 격타음과 함께 호리호리한 체격에 다소 큰 키의 사내가 비틀거리며 물러나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토악질을 시작했다.
 “우웩!”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등학생이다.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에도 서명고 3학년 5반 한승윤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불량기가 다분한 학생 한 명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으으…….”
 승윤은 어금니를 갈아붙이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최지철.
 서명고 최고의 주먹이며 쌈짱이다.
 “등신 같은 놈, 한 방 맞고 토악질이냐? 더럽게…….”
 승윤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최지철은 졸업 후 조폭 조직의 똘마니 행동대원으로 스카우트될 정도로 뛰어난 싸움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승윤은 몸을 가볍게 푸는 정도의 상대에 지나지 않았다.
 “찌질이 새끼. 반에서 주먹 좀 쓴다고 나대지 마라. 오늘은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하고 참는다. 얘들아 가자.”
 그의 주위에 있던 서너 명의 또래 학생들이 승윤을 향해 한 마디씩 떠들었다.
 “저런 새끼는 아예 밟아놔야 하는데…….”
 “지철아. 너무 봐 주는 거 아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캬악 퇘! 재수 없다. 가자.”
 승윤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거머쥐었다.
 반에서는 일빠(쌈짱)였지만, 교내짱을 먹고 있는 최지철에 비하면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한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던 승윤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쓰바…….”
 승윤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승윤은 잠시 최지철과 그의 패거리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더니 등을 돌렸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가방을 주워 들고 걸음을 옮기던 승윤은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으! 왜 이렇게 어지럽지? 헉! 피가…….”
 승윤은 급히 손으로 코를 막았다.
 붉은 피가 봇물 터진 듯 승윤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젠장! 왜 갑자기 코피가 나는 거야. 얼굴은 맞지도 않았는데…….”
 승윤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피가 멎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코피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승윤은 갑자기 겁이 났다.
 하루를 멀다 하고 싸움질을 벌이다가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쏟아지듯 피가 흘러내린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마침내 코피가 멎었다.
 승윤은 피범벅이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몸이 나른한 게 하체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승윤은 힘겹게 걸음을 옮겨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승윤아! 도,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상의가 피로 젖어 있어?”
 “아, 아냐! 코피가 좀 났어!”
 깜짝 놀라 묻는 어머니의 말에 승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승윤의 상의에 묻어 있는 피의 양은 너무 많았다.
 어머니가 승윤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어이구, 이놈아! 허구한 날 싸움질이냐? 응? 도대체 언제 사람 되려고 그래! 내가 속상해서 못살아!”
 “에이 씨! 남자가 싸울 수도 있지, 뭘 그래?”
 승윤은 어머니에게 오히려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핑 돌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승윤아! 승윤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승윤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헤마토로직메리그넌시.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너무 어려워서 발음도 제대로 안 된다.
 환자복을 입고 있던 19살의 한승윤은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던 간호사들에게 다가갔다.
 “저…, 방금 뭐라 하셨죠? 헤마토…, 뭐라고 하시던 것 같은데.”
 간호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린 급한 환자 때문에 이만…….”
 간호사들이 급히 자리를 옮겼다.
 승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호사들의 눈치를 보니 자신의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쳇!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런다고 내가 못 알아낼까봐?”
 승윤은 간호사들의 입에서 나온 이 어려운 단어를 알아보기 위해 병원 한 쪽에 있는 휴게실로 갔다.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고 인터넷을 띄운 후, 그는 이 단어를 검색창에 쳐 넣었다.
 “어디보자……. 헤마토구균은 아니고, 헤마토크리트도 아니고……. 응? 적혈구? 적혈구라면 피를 말하는 것 같은데. 내 적혈구가 어쨌다는 거야?”
 승윤이 입맛을 다시며 계속해서 인터넷을 살폈지만, 특별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다.
 “아! 그렇지. 병에 관련된 거니까 의학용어사전을 뒤져봐야겠다.”
 승윤은 다시 인터넷을 뒤졌다.
 “헤마토, 헤마토……. 아! 이거다. 헤마토로직메리그넌시! 그런데 이, 이건…….”
 여러 번의 오류를 거쳐 간신히 찾아낸 의학 전문용어.
 그 용어를 확인하는 순간 승윤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Hematologicmalignancy : 혈액암.
 
 ‘혀, 혈액암이라면 백혈병…?’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그의 어머니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다가와 당분간 학교를 가지 않고 쉬어도 된다고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승윤은 암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냥 백혈병이라면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요즘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런데 아까 간호사가 ‘인백혈구’어쩌고 하던데, 그건 뭘까?’
 딸칵! 딸칵!
 마우스 누르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인백혈구 항원형 : 백혈병의 한 종류.
 인백혈구 항원형은 환자와 일치하는 골수를 이식해야 함. 일치하는 골수를 찾을 확률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면을 주시하던 승윤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젠장! 나가 죽어버리면 될 거 아냐!”
 꽝!
 승윤이 주먹으로 키보드를 내리쳤다.
 ‘삑!’하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 화면이 맛이 갔다.
 부서진 키보드 자판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다른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승윤을 힐끔 거리며 뭐라 수군거렸다.
 캬악! 퇘!
 승윤은 바닥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은 후, 의자를 거칠게 밀어버리고는 휴게실을 나왔다.
 병실로 돌아온 승윤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그의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 승윤아. 무슨 일이니? 왜 그래?”
 승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환자복을 거칠게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옷장에 있던 자신의 청바지와 면티를 꺼내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승윤아!”
 그의 어머니가 고함을 지르며 승윤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요!”
 “왜 그러니? 도대체 왜 그러냐고!”
 승윤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승윤의 어머니는 놀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너 설마…….”
 “그래요. 나도 알아요.”
 “스, 승윤아!”
 “나 그냥 나갈래요.”
 “안 된다! 잘 치료하면 살 길이 있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치료비는요?”
 “누가 네게 치료비 걱정하랬어? 당장 환자복으로 다시 갈아입어라.”
 “소용없어요! 제게 맞는 골수를 기증받기 전까지는 치료할 수 없다고요!”
 “기증자들 중에서 찾아보면 나올 거다.”
 “그 확률이 얼만지 아세요?”
 “그, 그야…….”
 “헛돈 쓸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나가요.”
 “승윤아! 헛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이 어미가 네 치료비 하나 마련하지 못할 것 같으냐?”
 “아버지 월급으로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무슨 수로 치료비를 마련해요! 그냥 때려치워요! 나가 죽으면 그뿐…….”
 짝!
 승윤의 왼쪽 뺨에서 불이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갑자기 쏟아졌다.
 “어, 어머니…….”
 “승윤아! 이 자식아! 이 어미 가슴에 그렇게 대못을 박고 싶으냐? 이 어미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승윤의 모친이 승윤의 팔을 잡고 실성한 듯이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크흐흑!”
 승윤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왜 내가 그런 병에 걸려야 하냔 말이에요! 왜!”
 “승윤아! 흑흑흑!”
 두 모자는 병실 한가운데서 끌어안고 울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환자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한승윤은 고집불통에 독불장군이다.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억지로 시키면 건성으로 그때그때를 때울 뿐 정말 성심을 다해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공부 또한 마찬가지다.
 복잡한 수학공식을 왜 외우고 또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거나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서?
 그래서 좋은 직장을 얻어 장가 잘 가려고?
 처갓집 덕 보려고?
 개 또라이 같은 생각이다.
 개똥철학일지는 몰라도 승윤에게는 그게 인생의 전부가 절대 아니었다.
 만년과장으로 있는 승윤의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승윤의 아버지는 일류대를 나왔고, 번듯한 대기업에 다닌다. 하지만 입사 초기에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승진의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과장에서 진급이 멈춘 지 칠 년만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
 그 후,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는 했지만,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월급이 많지 않아 살인적인 서울의 물가와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승윤과 그의 동생인 승혜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러기에는 모든 여건이 너무 힘들었다.
 저축은 고사하고 보험료와 차량할부금 넣기도 빠듯한 생활이 이어지더니 결국 자동차에 차압딱지가 붙었다.
 승윤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자신만의 독불장군식 개똥철학을 가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승윤에게 공부를 하는 것, 아니 학교를 다닌다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 하는 것보다 큰 스트레스는 없을 것이다. 승윤은 스트레스에 민감한 체질이었고, 고3이 되자마자 몹쓸 병을 얻고 말았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승윤은 절망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묘하게도 해방감이 느껴졌다.
 ‘더러운 세상, 내가 떠나면 그뿐이지!’
 자포자기였지만, 그런 심정이 깊어질수록 해방감은 더욱 커졌다.
 결국 더욱 힘들어진 건 승윤의 가족이었다.
 약조차 제대로 먹으려 하지 않는 승윤을 달래는 것도, 그의 울분을 듣고 다독이는 것도 모두 승윤 어머니의 몫이었다.
 치료비와 약값은 꼬박꼬박 들어갔고, 그렇지 않아도 빠듯하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승윤의 가족은 자그마한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월급만으로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직금을 받아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승윤의 어머니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약한 몸을 이끌고 파출부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가 자주 집을 비우게 되자, 여동생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보챘고 질 나쁜 친구들까지 사귀었다. 그리고는 거리를 방황하더니 가출까지 밥 먹듯 했다.
 승윤 아버지의 사업이라도 잘 되었다면 어떻게든 수습이 되었을 텐데 그 또한 어려웠다. 평생 동안 책상머리에서 펜대만 굴리던 사람이 갑자기 사업을 시작하니 잘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승윤의 아버지는 가까운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퇴직금을 모두 날린 후, 그 충격에 몸져누웠다.
 말이 가정이지 풍비박산 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 된 것이다.
 승윤은 더 이상 살기가 싫었다. 어떻게든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부모님, 그리고 방황하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니, 승윤은 자괴감만 들 뿐이었다.
 만약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다면 승윤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승윤과 맞는 골수를 지닌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병원비와 약값만 계속해서 나간 게 벌써 1년이었다.
 승윤은 나날이 쇠약해져갔고, 이제 그에게 남은 생은 6개월 남짓이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그래. 내가 떠나자. 내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밖에 없어.’
 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매일같이 싸움질이나 하고, 반항만 하고 살았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승윤은 부모님에게 남길 편지를 쓰기 위해 백지를 폈다.
 
 부모님 전상서.
 
 죄송합니다…….
 
 제목과 시작은 적었지만 그 아래에 채워야 할 내용은 도저히 쓸 수 없었고, 눈물만 백지 위에 뚝뚝 떨어졌다.
 “젠장! 뒈지러 가는 마당에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승윤은 백지를 거칠게 구긴 후, 방구석에 던져버렸다.
 죄송하다는 한 마디만 적힌 백지는 그렇게 버려졌다.
 승윤은 고달픈 삶에 지친 가족들을 뒤로하고, 한밤중에 커다란 배낭 하나를 맨 채 몰래 집을 나왔다.
 배낭 안에는 텐트와 코펠 등, 야영을 할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책 한 권도 있었다. 공부와는 담을 쌓은 승윤이지만 그 책만큼은 좋아했다. 벌써 승윤이 열 번도 더 읽었지만 묘하게도 아직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였다.
 ‘제길! 무인도에 들어가서 풀이나 뜯어먹다가 죽으면 되지.’
 승윤은 그 길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
 
 경상남도 남해군.
 대진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다.
 남해 고속 터미널.
 서울 발 고속버스 한 대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초여름이라 본격적인 관광객들이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텐트와 배낭 등을 둘러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승객은 앳된 얼굴의 청소년이다. 왠지 우울해 보이는 표정에 창백한 안색을 한 그는, 바로 서울을 떠나 무작정 남해의 무인도로 향한 한승윤이다.
 승윤은 왁자지껄 떠들며 즐거워하는 관광객들을 우울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 승윤은 삼십 분도 걷지 못하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하늘이 빙빙 돌고 코피가 쏟아졌다.
 워낙 힘이 없어 배낭 안에 넣어두었던 빵과 우유를 꺼내 먹었지만 모래를 씹는 느낌이었다.
 ‘휴! 그래도 힘을 내려면 먹어야지.’
 승윤은 억지로 빵과 우유를 모두 먹고 마신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승윤은 남해에서 유명한 금산 입구에 다다랐다.
 마음 같아서는 금산 꼭대기에 있는 유명한 절인 보리암에 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승윤의 체력이 너무 약했다.
 결국 승윤은 금산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다가 쉬기를 반복한 끝에, 승윤은 마침내 바다가 보이는 어촌에 도착했다.
 미조라는 곳이다.
 남해의 대표적인 어항인 미조의 포구에는 적지 않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승윤은 마지막으로 슈퍼에 가 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물건과 식량을 산 후, 포구로 나갔다.
 뱃전에 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에게 승윤이 말했다.
 “아저씨. 배 좀 빌립시다.”
 오랜 뱃일로 구릿빛 피부를 가진 중년의 어부가 승윤의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학생 혼자가?”
 “예.”
 “대학생?”
 “서 서명…, 교육대학에 다닙니다.”
 “서명교육대라꼬? 흠!”
 어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윤의 키는 제법 컸지만 얼굴은 아직 앳된 것이 아무래도 대학생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처음 듣는데……. 하긴 요즘 워낙 대학들이 많이 생겼으니……. 어느 섬에 갈라꼬 하노?”
 “그냥……. 아무도 없는 조용한 섬에…….”
 “무인도를 말하는 기가?”
 “예.”
 “아니, 학생 혼자 무인도 가서 뭐할라꼬?”
 “푹 쉬다 오려고 그럽니다. 조용히 공부도 좀 하고…….”
 “무인도에서 혼자 생활하는 건 쉽지 않은데……. 준비는 제대로 했나?”
 “물론입니다. 필요한 물건들은 다 있습니다.”
 “밥은 우째 묵을라 하노?”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돌아올 땐 또 우짤라고?”
 어부가 자꾸 캐묻자 승윤은 짜증이 났다.
 “아저씨! 갈 건지 말 건지만 대답하세요. 다른 배 알아볼 테니까. 짜증나게 씨…….”
 승윤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어부가 급히 소리쳤다.
 “잠깐! 가! 간다고!”
 승윤이 잠시 어부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얼마면 되요?”
 “거리에 따라 다른데…….”
 승윤이 지갑을 열어 남은 돈 전부를 꺼냈다.
 “15만원 드리죠.”
 어부가 흠칫 하더니 혀로 입술을 핥았다.
 “20만원은 줘야 기름 값이…….”
 “쳇! 그럼 마세요. 배가 이것밖에 없나…….”
 승윤이 매정하게 등을 돌리려 하자 어부가 급히 그를 잡았다.
 “알았다. 얼른 타라.”
 승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에 올랐다.
 어부가 그물을 대충 정리한 후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꼭 무인도여야 한다고 했제? 가만있자…, 오데가 좋겠노…….”
 갈만한 섬이 떠올랐는지 어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가 좋겠다.”
 어부가 곧바로 배의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통통통통!
 규칙적인 엔진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승윤을 태운 어선은 쉽게 말해서 통통배다.
 통통배는 근해 어업을 주로 하는 배를 일컫는데, 지금 승윤의 귀에 들리는 규칙적인 엔진소리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마침내 바다로 나온 승윤은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아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넓은 바다에 나오자 가슴이 탁 트였다.
 “아! 좋구나…….”
 승윤의 표정이 다소 밝아진 것을 본 어부가 말을 걸었다.
 “웬만하면 사람 사는 섬으로 가는 게 어떻겠노? 경치 좋고 조용한 섬마을이 있는데.”
 “아무 말씀 마시고, 조용한 무인도에나 데려다주십시오.”
 어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쁜 짓 저지를라 카는 건 아이제?”
 승윤은 내심 뜨끔했지만 짐짓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나쁜 짓이라니요?”
 “그러니까, 요즘 세상이 하도 어지럽다보니 젊은 얼라들이 자살도 많이 하고 해서…….”
 “그런 게 걱정되시면 그냥 배 돌리시죠. 돈도 돌려주시고. 그리고 자살할 거면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지 미쳤다고 이 먼 곳까지 와요?”
 “아, 알았다. 더 이상 안 물어볼께.”
 승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도시 사람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했던 것이다.
 잠시 후, 어부가 남쪽 바다를 가리켰다.
 “저기다. 용도라 한다.”
 “용도…….”
 멀리 자그마한 섬 하나가 보였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다.
 “용가리라도 사는 모양이죠?”
 “남쪽 해안가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기라. 그런데 그 바위가 용대가리하고 빼다 박았거든. 그래서 용도아이가.”
 “훗!”
 문득 승윤은 자신의 신세가 용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씁쓸했다.
 마침내 용도에 도착한 승윤은 섬에 발을 내디뎠다.
 어부가 배를 뒤로 빼며 승윤에게 소리쳤다.
 “여긴 하루에 한두 번씩 어선들이 지나다니니까, 나오고 싶으면 손을 흔들어라. 그라먼 태워줄끼다.”
 승윤은 어부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대충 손을 흔들어준 후 해변으로 올라갔다.
 용도는 전체적으로 완만한 비탈을 가진 섬이었다. 숲도 우거졌고 섬 중앙에는 야트막한 산도 있었다.
 승윤은 우선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섬을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서다.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코피가 났다.
 잠시 피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쉬다가 승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남쪽 해안가로 나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승윤은 깜짝 놀랐다.
 정말 용머리와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해안가에 있었던 것이다.
 용머리바위, 혹은 용두암은 명승지에 가면 가끔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게 제주도에 있는 용두암이다.
 하지만 지금 승윤의 눈앞에 나타난 용머리바위는 제주도의 용두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용과 닮아 있었다.
 ‘세상에! 정말 용머리와 닮았잖아.’
 승윤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 용머리바위 위로 올라갔다.
 용머리바위는 제법 높았지만 올라가기에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승윤은 용머리에서 미간에 해당하는 부분에 걸터앉았다.
 탁 트인 바다가 승윤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 좋구나…….”
 승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 승윤은 자신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깨끗이 잊고 있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다가 승윤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
 얼마나 잠을 잤는지 알 수 없었다.
 승윤이 눈을 떠보니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아! 잘 잤다. 세 시간이나 잤구나.”
 승윤은 기지개를 켰다.
 딱딱한 바위 위에서 한참동안 기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결리거나 아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몸이 개운한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켜보니 조금이나마 활력이 돌았다.
 병에 걸린 후, 이렇게 가뿐한 적이 몇 번 있었나 싶을 정도다.
 승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역시 바다라 그런지 공기 하나는 좋은 모양이다. 몸에서 힘이 나는 걸 보면.”
 승윤은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용머리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산을 올랐다.
 ‘텐트를 칠만한 곳이 있어야 할 텐데…….’
 승윤은 적당한 공간을 찾아 숲을 둘러보았다.
 그때, 승윤의 두 눈이 갑자기 빛났다.
 산 중턱 양지바른 곳.
 그곳에 다 허물어져 가는 폐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것이다.
 “여기 이런 게 있을 줄이야…….”
 승윤의 눈에는 그 폐가가 서울의 고급 아파트보다 훌륭해 보였다.
 승윤은 곧바로 폐가로 들어가 내부를 살폈다.
 벽 곳곳이 허물어지고 구멍이 나 있었지만 그래도 지붕은 멀쩡했다. 그리고 간단한 가재도구와 아궁이, 그리고 전 주인이 쓰다 남긴 식기도 보였다.
 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우물까지 있었다. 깨끗이 청소하고 닦기만 하면 그런대로 사는데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승윤은 다시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피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텐트는 칠 필요도 없겠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여기서 자유롭게 한 번 살아봐야겠다! 하하하!”
 승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2장. 용머리바위
 
 용도에서 생활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폐가는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 생활에 큰 불편이 없었다. 승윤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져온 낚시도구를 이용해 고기를 잡았다. 용도 주위의 바다에는 의외로 고기가 많아 쉽게 잡혔다.
 그리고 주변 산에는 산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바닷물을 이용해 간을 하고, 산나물을 물에 데쳐먹거나 구운 생선을 싸서 먹었다.
 승윤은 먹고 사는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고 나자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폐가의 벽에 기대어 앉아서 승윤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승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음은 편하고 안락했지만, 몸에는 힘이 별로 없었다.
 코피를 한 번 쏟고 나면 30분가량 누워 있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승윤은 약해졌다.
 “후후후,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닌데…….”
 승윤은 아무 생각 없이 순간만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책이나 봐야겠구나.”
 승윤은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자유로운 삶과 마음의 수련.
 
 책의 제목이다.
 저자는 아비지트라는 인도인이었다.
 저자소개에 따르면 아비지트는 인도에서 영혼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한다.
 그 책에는 명상하는 법,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얻은 승윤은 벌써 여러 차례 읽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척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승윤이 죽음을 앞둔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이 책을 꼭 가져온 것도 최대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책을 읽던 승윤이 갑자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책에 있는 수련법이나 그대로 따라해 볼까?”
 잠시 생각하던 승윤은 뭔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명상 수련이나 해보자. 이걸로 마음의 평화라도 얻게 되면 아프다고 골골거리는 것보다 백배는 낫겠지.”
 승윤은 책에 나와 있는 그림처럼 가부좌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결국 한참 끙끙대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젠장! 무슨 놈의 다리를 그렇게 꼬아? 대충 앉으면 되지.”
 승윤은 가부좌 대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평생을 시끌벅적한 현대의 대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이 명상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 물론, 스스로의 존재까지 잊어야 한다.
 당연히 승윤에게 그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승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쓰벌! 내일 모레 죽을 놈이 명상은 무슨 명상이야!”
 승윤은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책을 내팽개치고 다시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때, 바람이 불어왔고, 땅에 떨어진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더니 멈추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구하지 말라.
 
 책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구절이 승윤의 눈에 들어왔다.
 ‘죽을 각오로 해야 한다고…?’
 승윤은 갑자기 ‘훗!’하고 웃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각오로 무인도까지 왔는데 뭐가 무섭겠어?’
 승윤은 다시 한 번 명상 수련을 시도했다.
 
 처음부터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생각을 관조하라.
 
 승윤은 생각을 관조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책에 쓰인 대로 머리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승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걸까?’
 승윤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좀 지난 것 같았고, 자신은 분명히 깨어 있었지만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아! 그게 혹시 명상의 상태…?’
 승윤은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 다시 해 보자.’
 승윤은 눈을 감고 명상 수련에 들어갔다.
 또다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
 승윤이 무인도에 온지 한 달이 지났다.
 식량도 거의 떨어졌고, 물고기를 잡거나 산나물을 캘 힘도 거의 없었다.
 승윤은 하루를 꼬박 굶은 후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쓰벌! 돌팔이 새끼들……. 일 년 반은 살 수 있다고 해놓고…….”
 의사가 승윤에게 내린 진단은 일 년 육 개월이었지만, 그건 대략적인 수치일 뿐이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영양보충을 충분히 했을 경우에 해당하는 시한이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승윤처럼 몇 달 더 단축될 수도 있었다.
 “큭큭큭큭!”
 승윤의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라 있음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신 짧은 생이나마 살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승혜…….”
 승윤의 기억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건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어머니를 생각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해 드리고 착하게 사는 건데…….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정말 효도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승윤은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제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갑자기 떠오른 책의 구절이 승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승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도 두려움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은 책에 쓰인 대로 명상을 한 덕분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고요해지자 크고 작은 주변의 소리들이 승윤의 귀에 들어왔다. 풀벌레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들이 생생하게 들렸다.
 문득, 승윤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남쪽 해안에서 보았던 용머리바위였다.
 승윤은 이상하게도 용머리바위에 마음이 가는 것을 느꼈다.
 승윤이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기왕 죽는데 방구석에 처박혀서 뒈질 순 없지.”
 승윤은 마지막 힘까지 모두 짜내어 방을 나가 용머리바위로 향했다.
 헉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힘겹게 걸어간 끝에, 승윤은 간신히 용머리바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승윤은 처음 용도에 왔을 때처럼 바위 위로 올라갔다.
 미간 사이에 자리 잡고 앉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두 번밖에 보지 않았던 용머리가 너무도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쏴아아! 철썩!
 저물어가는 태양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파도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승윤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곳이 죽기에는 딱이군. 내가 죽으면 갈매기들이 살을 뜯어먹고 배를 채우겠지? 큭큭큭.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착한 일을 죽은 후에는 한 번 할 수 있겠구나. 큭큭큭.”
 키득거리던 승윤이 갑자기 맹렬한 기침을 토하더니 코피를 흘렸다.
 승윤은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우웅!
 어디선가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용머리바위였다.
 승윤은 자신이 쓰러진 용머리바위가 은은하게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따가운 아침 햇살에 승윤은 눈을 떴다.
 “으음! 여, 여긴…….”
 너무도 밝은 햇살 때문에 승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내, 내가 천국에 온 건가?”
 승윤은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윤의 두 눈이 커졌다.
 “아! 내, 내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모습이 승윤의 눈에 들어왔다. 승윤은 여전히 용도의 용머리바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게다가 몸에서는 기이하게도 활력까지 넘치고 있었다.
 “내, 내가 죽지 않았어.”
 승윤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모든 걸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눈을 뜬 승윤은 삶이라는 이렇게 소중한 것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산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승윤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이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해 보자.’
 단단히 결심을 굳힌 승윤은 우선 생각에 잠겼다.
 다 죽어가던 자신이 어떻게 활력을 되찾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시원하고 맑은 바다의 공기 때문인가? 아냐! 여기나 산위의 집이나 공기 차이야 없겠지. 그럼 무엇 때문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승윤은, 문득 자신이 앉아 있던 용머리바위에 생각이 미쳤다.
 “아! 혹시 이 용머리바위가…….”
 승윤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시험을 해보면 자연히 알 수 있을 일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명상을 해보면 알겠지.’
 승윤은 바다를 바라보고 편안히 앉은 채 명상 수련에 들어갔다.
 의외로 ‘깨어있되 생각에서 벗어난 상태’가 빨리 찾아왔다.
 승윤은 그런 상태로 꽤 오랫동안 용머리바위에 앉아 있다가 눈을 떴다.
 “아!”
 승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위는 어느새 어두운 밤이었다.
 바람과 파도소리가 들렸고, 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승윤이 몸을 일으켰다.
 의외로 가뿐함이 느껴졌다.
 ‘이럴 수가……. 정말 용머리바위 때문이었어.’
 승윤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고 보니 처음 용도에 온 후 여기서 잠을 잤지. 그때도 무척 몸이 좋았었는데……. 그렇다면 이 용머리바위가 영험이 있는 장소란 말인가?’
 세상에는 자연의 좋은 기운이 모이는 요지가 있다. 풍수지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승윤은 용머리바위의 위치가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앞으로도 여기서 명상 수련을 계속해보자. 혹시 알아? 병이 치료될지.’
 승윤은 헛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날부터 승윤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용머리바위에 앉아 명상 수련을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흘렀다.
 승윤은 자신의 몸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던 코피가 하루 두세 번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병이 치료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호전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승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머리바위에서 명상수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어느덧 승윤이 용도에 들어온 지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승윤에게 용도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같이 느껴졌다.
 처음 그곳에 왔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던 코피가 이제는 멎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이 뛰고 숨이 차올랐지만, 이제는 그런 증상들도 말끔히 사라졌다.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대부분 토악질로 뱉어버리던 위장이 이제는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를 시킬 정도로 튼튼해졌다.
 믿을 수 없게도, 승윤은 이 무인도에서 병을 완치했던 것이다.
 그동안 승윤이 무인도에서 병마와 싸운 과정은 피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로 남았을 따름이다.
 쏴아아! 철썩!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 가 바위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승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랜 병마와 싸워 이긴 승자의 행복한 미소였다.
 “휴우! 용도로 오길 잘 했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용도에서의 생활은 승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었다.
 그는 습관처럼 들고 다니던 책을 들어올렸다.
 많이 헤져 제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책제목의 일부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드러나 있었다.
 승윤은 책의 저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스리고 대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그처럼 자세히 쓸 수 있다니 말이다.
 ‘인도에서 영혼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이유가 있었어. 그분은 분명히 깊은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일 거야.’
 따지고 승윤이 들고 있는 이런 책들은 서점에 많이 있다. 특히 청소년 코너에 가면 주옥같은 말씀들이 적힌 책들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고, 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승윤은 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단지 책을 읽었을 따름이지만, 그는 책에 쓰인 대로 꾸준히 실천을 했다는 사실이다.
 꾸준한 실천.
 말은 쉽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마 한승윤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생명을 갉아먹는 병과 싸우지 않았다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승윤은 바닷가 용머리바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바위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이 바위는 정말 용의 머리와 너무나도 닮았다. 세상에 용머리바위라는 이름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바위는 세상에 없을 거야.’
 특히 승윤이 앉아 있는 지점은 용머리에서도 미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대자연이라는 위대한 조각가가 정성들여 조각을 해 놓은 듯 양쪽에 움푹 파인 눈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승윤은 병마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아직도 용도를 떠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난 이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해온 덕분에 승윤은 이제 눈을 감고도 느낌만으로 주변의 환경을 훤히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승윤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건 승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승윤이 이 ‘흐름’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불과 삼 개월 전, 자신의 몸에서 병마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였다.
 처음에는 단지 바람이나 기류의 움직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힘이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나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에서도 어김없이 그 흐름이 있었다.
 승윤이 흐름을 쫓아가면 바람의 방향이나 파도의 모습까지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때로는 구름의 모습을 예측한 후, 그 예측대로 구름이 형체를 갖추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승윤은 지금도 그 ‘흐름’을 느끼며 스스로를 흐름 속으로 동화시키려 노력했다. 흐름과 자신이 동화되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바람이 되기도 하고 파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하늘의 구름이 되어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윤은 편안함과 자유를 느꼈다.
 세상 그 어떤 법이나 규율, 혹은 관습에도 억매이지 않은 무한한 자유였다.
 미지의 이 힘을 정확히 뭐라고 부르는지는 승윤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 흔히들 말하는 ‘기(氣)’, 혹은 스타워즈라는 영화에서 나왔던 ‘포스’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마나’일지도 모른다.
 사실 승윤에게 그 힘을 뭐라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승윤이 그 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승윤의 불치병이 치료된 것도 그 힘의 작용 덕분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승윤은 분명히 그랬을 거라고 확신했다.
 “음!”
 용머리바위에 편안히 앉아 있던 승윤이 갑자기 신음성을 흘렸다.
 뭔가 새롭고 강렬한 기운이 어디선가 느껴졌던 것이다.
 2년이 넘는 세월동안 용머리바위에 앉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기운이었다.
 ‘이건 또 뭐지?’
 승윤은 새로운 기운의 실체를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 기운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기운이 비롯되는 곳은 놀랍게도 용머리바위였다.
 실체를 느끼자 그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 승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승윤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왠지 자신이 그 기운에 잡아먹히고 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우!”
 승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용머리바위를 살폈다.
 “기이한 일이구나. 어떻게 용머리바위에서 그처럼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을까?”
 승윤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승윤은 한동안 용머리바위에서 느꼈던 기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흐름’의 힘과 비슷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훨씬 강력했다. 마치 거대한 흐름의 힘이 자그마하게 압축되어 뿜어져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설마 흐름의 힘이 용머리바위 어딘가에 압축되어 있다가 내가 그 기운에 동화되자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라면…….’
 승윤은 자신의 추측이 옳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말고 내일 다시 한 번 해봐야겠다.’
 승윤은 묘한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
 날이 밝았다.
 폐가를 나선 승윤은 곧바로 용머리바위를 찾았다.
 그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자 이내 ‘흐름’의 힘과 동화되었다. 그러자 어제 느꼈던 기이한 기운이 다시 용머리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승윤은 그 기운을 ‘흐름’으로 바라보고 조용히 관조했다.
 흐름을 느끼고 관조한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승윤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지 않았다면, 결코 그도 ‘흐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용머리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은 어느새 승윤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승윤이 움찔 하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승윤은 지금까지 이토록 강렬하고 거친 ‘흐름’을 느껴본 적은 단연코 없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지금 승윤의 온 몸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으으…, 안 되겠다.’
 승윤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엉덩이와 용머리바위가 아교로 단단히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 일어나야해…….’
 승윤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강력한 힘이 승윤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오더니 아랫배를 헤집었다.
 “크윽!”
 승윤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몸속으로 파고 들어온 기운은 승윤의 몸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작은 뱀 한 마리가 몸속으로 들어와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옮겨 다니는 듯했다.
 승윤은 지독한 고통에 온 몸을 뒤틀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곧이어 몸속을 헤집던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더니 뇌를 헤집었다.
 수백 발의 폭죽이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폭발하는 충격이 승윤의 온 몸을 흔들었다.
 그의 두 눈이 한껏 커지더니 이내 초점을 잃었다.
 승윤은 결국 앞으로 푹 고꾸라지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승윤이 다시 깨어난 건 먼동이 터오는 새벽이었다.
 “으음!”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승윤은 눈을 떴다.
 기이한 일이었다. 지독한 고통 때문에 기절했는데, 지금은 온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던 것이다.
 그리고 아랫배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아랫배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이질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몸을 단단히 잡아주고 안정시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느낌일까? 아랫배에 뭔가 들어 있는 듯한데…….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승윤은 지난밤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모두 잊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쏴아아! 철썩!
 끼룩! 끼룩!
 파도가 치고 갈매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
 승윤은 마치 그런 광경을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신비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세상이 달라 보여!”
 그랬다.
 지금까지 승윤이 보았던 모든 것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을 감고 명상에 들었을 때에만 느껴졌던 ‘흐름’이 지금은 두 눈을 뜨고도 명확히 보였던 것이다.
 파도나 바람, 그리고 갈매기의 날갯짓까지 모든 만물은 흐름에 편승해 움직였고, 그 흐름의 실체가 명확히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승윤은 흐름의 실체를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승윤은 탄성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가뿐하고 온 몸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승윤은 용머리바위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바다를 바라보며 두 팔을 활짝 별렀다.
 풋풋한 바다 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와 폐를 통해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바다의 흐름, 그리고 그 위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승윤은 저도 모르게 허공에다 대고 소리쳤다.
 “세상 모두가 내 안에 있다!”
 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한동안 그렇게 서서 바다와 하늘을 느끼던 승윤은 시장기를 느꼈다. 그러고 보면 용머리바위에 앉았던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승윤은 고개를 숙여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아!”
 승윤이 탄성을 내뱉었다.
 해변 가 바위틈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의 모습은 물론, 파도와 해류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두운 바다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승윤은 크고 작은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은 물고기나 바다 속에 사는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이었다.
 너무도 신비로운 광경에 승윤은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원래 승윤이 사는 용도 주위에는 사시사철 파도가 거세고 강한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승윤도 바다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특히 파도가 강한 용머리바위 주변의 바다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다.
 산에서 캔 칡뿌리로 짠 그물을 드리워 운 좋은 날 걸려드는 고기를 잡아먹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승윤이 보는 바다는 달랐다.
 강한 조류와 파도가 밀려오는 곳이 어딘지, 그리고 어느 시점과 방향으로 가면 조류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승윤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곧바로 바다를 향해 다이빙을 했다.
 첨벙!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승윤의 모습이 사라졌다.
 승윤은 바다 속을 헤엄쳤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승윤의 몸은 다리에 스크루를 단 것처럼 빨리 움직였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암석 주위를 헤엄쳐 다녔고, 암석에는 온갖 생명체들이 달라붙어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바다 속에 서 있는 듯했다.
 승윤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좌측에서 제법 커다란 빛이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승윤의 눈이 빛났다.
 빛을 뿜어내는 물고기의 정체를 이내 알 수 있었다.
 ‘돌돔이다!’
 돌돔은 원래 바다 속 깊은 곳에 사는데 이따금 수면 가까이 올라오는 놈들이 있었다. 승윤은 지금까지 돌돔을 잡은 건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다친 놈을 줍다시피 해서 잡은 게 전부였다. 어쨌든 그때 먹어보았던 돌돔의 맛은 어떤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승윤은 틈만 나면 돌돔을 잡으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작살이나 그물조차 없었지만 돌돔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윤은 돌돔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다의 흐름과 돌돔의 움직임이 승윤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저쪽에서 이렇게 왔다가 여기서……. 이때다!’
 승윤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돌돔의 꼬리가 승윤의 손에 정확히 잡혔다. 아니, 돌돔이 승윤의 손안으로 스스로 빨려 들어왔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승윤은 환희를 느꼈다.
 돌돔이 강한 힘으로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이 센 어른이라도 미끈거리는 돌돔을 맨손으로 붙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승윤의 손은 마치 강철 집게라도 된 것처럼 돌돔의 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승윤은 물속에서 환하게 웃었다.
 바다 속으로 들어온 후 숨을 쉬지 않은지 한참이나 되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승윤은 기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손으로 돌돔을 잡다니…….’
 승윤은 커다란 돌돔을 잡은 채 수면위로 헤엄쳤다.
 곧이어 물 밖으로 나온 승윤은 자신이 들고 있는 돌돔을 쳐다보았다.
 ‘바다 속에서 내가 이걸 손으로 잡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노련한 낚시꾼이 아니라면 잡아 올리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돌돔. 그 돌돔을 바다에 들어가 손으로 잡아냈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꼬르륵!
 때마침 배에서 시장기가 느껴졌다.
 승윤은 입맛을 다셨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배부터 채우자.’
 곧바로 산위로 뛰어갔다.
 폐가까지로 한 걸음에 달려 올라간 승윤은 곧바로 앞마당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돌돔을 바비큐처럼 올려놓았다.
 돌돔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에 승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짙은 석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고, 그 아래로 검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승윤은 황홀한 표정으로 석양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큰 행복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늘과 바다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승윤에게 드러냈다. 진정한 의미의 ‘관조(觀照)’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승윤은 언제까지라도 석양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차! 내 돌돔!’
 승윤은 문득 불 위에 올려놓은 돌돔을 상기하고는 관조에서 벗어났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돌돔이 승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윤은 돌돔이 꽂혀 있는 나무를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 쩝쩝쩝!
 “캬하!”
 승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돌돔의 살이 혀에서 살살 녹는 느낌이다. 세상에서 이보다 맛있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마리의 커다란 돌돔을 모두 먹어치운 승윤은 깊은 포만감과 함께 졸음을 느꼈다.
 승윤은 불가에 그대로 쓰러져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다음날 아침, 승윤은 눈을 떴다.
 “아함!”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고 나자 온 몸에서 활력이 샘솟았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불편한 땅위에서 잠들었지만, 결리는 곳은 전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편안한 침대에서 비단금침을 덮고 잔 기분이었다.
 승윤은 재빨리 일어난 후, 솟아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풀쩍 뛰어보았다.
 그의 몸이 1미터 가까이 위로 솟구쳤다.
 ‘헉! 내가 이렇게 높이 뛰어 오르다니…….’
 보통 사람이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면 50센티를 뛰어오르기도 어렵다. 운동선수라도 70센티가 평균이고 8, 90센티 이상을 뛰려면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승윤은 1미터나 뛰어오른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농구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부럽지 않을 수준이다.
 용도에 살면서 운동이라고는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병마와 싸우기도 바빴던 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미터나 점프를 했다는 것은 승윤으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승윤은 점프를 하는데 절반의 힘도 쓰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보다 두 배는 더 높이 점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윤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내 몸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승윤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바다에 들어갔을 때, 한참 동안 숨을 쉬지 않았잖아. 그리고 초옥까지 한 걸음에 달려왔지만 숨이 가빠지거나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어. 아! 설마 내가 슈퍼맨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승윤은 주위에 있던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힘을 주었다.
 우지직!
 승윤의 두 눈이 커졌다.
 어른 팔뚝만큼 굵은 나뭇가지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간 것이다.
 승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 도대체 이게……. 용머리바위에 가봐야겠다.’
 승윤은 곧바로 산 아래로 뛰어갔다. 주위의 경물이 휙휙 스치고 지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용머리바위에 도착했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한달음에 뛰어왔지만 숨결은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다.
 승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건 뭐…, 우사인 볼트가 부럽지 않군.”
 승윤은 용머리바위에 올랐다.
 자신의 몸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용머리바위에서 뿜어져 나왔던 기이한 힘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승윤은 용기를 내어 용머리바위위에 다시 정좌를 하고 앉았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 명상에 들었다. 주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용머리바위에서 뿜어져 나왔던 그 거칠고 강렬한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승윤은 몸을 일으켰다.
 승윤은 용머리바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용머리바위가 지니고 있던 힘은 모두 승윤 자신에게 옮겨져 온 듯했다.
 “고맙다, 용머리바위야.”
 우우웅!
 용머리바위에서 기이한 소리가 순간적으로 들려왔다.
 바람소리였는지 아니면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낸 소리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승윤은 용머리바위가 자신의 목소리에 대답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3장. 용도를 떠나다
 
 용머리바위에서 기이한 힘을 얻고 난 후, 승윤의 용도 생활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섬 주위를 마구 뛰어다니거나, 기쁨에 복받쳐 미친 듯이 웃어도 누구 하나 눈총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배가 고프면 물고기를 잡아먹고, 잠이 오면 아무 곳에서나 엎어져 잠들었다.
 바위위에 편안히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도 좋았고, 저녁 무렵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도 행복했다.
 아무리 몸을 심하게 혹사해도 아프기는커녕 지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몸을 심하게 혹사시킨 다음날에는 활력이 더욱 솟구쳤다.
 승윤은 자신이 하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항상 어두운 표정만 짓고 다니며 싸움질이나 하다가 학급에서 왕따를 당했고, 성적조차 하위권에서 맴돌다가 몹쓸 병까지 얻었던 과거의 한승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건강하고 밝은 정신으로 가득한, 게다가 ‘흐름’의 힘까지 느낄 수 있는 대한민국의 아주 특별한 청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너무 ‘건강’해졌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어느 정도 힘을 조절할 수 있었지만, 흥분하거나 당황하면 저도 모르게 강한 기운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기운이 솟구치면 승윤은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다.
 용도에서 살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세상으로 나갔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상당히 난감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승윤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승윤은 마음을 수련하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음. 예전에 처박아 두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
 승윤은 초옥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승윤이 갑자기 안색을 굳혔다.
 책장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책 내용 전체가 머릿속에 훤히 펼쳐졌던 것이다.
 물론 수백 번도 더 읽었기에 거의 모든 문장을 외울 수 있었지만, 책의 모든 내용이 단 한 순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건 처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소 난해하고 모호한 내용들도 머리에 뚜렷하게 떠오르더니 어느 정도 실체와 개념이 잡혔다.
 순간, 승윤은 깨달았다. 용머리바위에서 얻은 기운으로 육신만 강해진 게 아니었다. 머리 또한 놀랄 정도로 좋아졌던 것이다.
 승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한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내, 내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승윤은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과거를 떠올리자 거의 모든 일들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평소 잠재의식 깊이 잠자고 있던 특별한 기억까지도 남김없이 의식의 세계로 풀려 나왔다.
 승윤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인과(因果)’가 보였다.
 승윤이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어났던 좋은 일과 나쁜 일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특별한 시점에서 자신이 품었던 생각과 행동들이 씨앗이 되어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타난 결과가 바로 승윤에게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특히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평소 품어왔던 부정적 생각, 그리고 함부로 내뱉은 말들이 세상을 거쳐 떠돌다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 그래. 모든 건 다 내 탓이었구나.’
 승윤은 비로소 깨달았다.
 말과 생각에도 힘이 있다.
 특히 행동에서 비롯되는 힘은 더욱 크다.
 작용과 반작용은 물리적인 세계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좋은 말이나 행동은 복으로, 나쁜 말과 행동은 화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건 어르신들이 평상시에 항상 하는 말씀들이다.
 하지만 그 말들의 의미가 이처럼 가슴 깊이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정말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야.’
 승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가족이 떠올랐다.
 ‘부모님들이 나 때문에 얼마나 속상해 하셨을까? 그리고 승혜…….’
 승윤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고통만 생각했지 가족들이 받은 충격과 아픔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제야 비수처럼 승윤의 가슴을 찔렀다.
 순간 기이한 느낌이 승윤의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건 뭐지?’
 승윤은 그 기운에 집중했다. 그러자 끈이 나타났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관조와 흐름의 능력을 발휘하자 그 실체가 분명히 느껴지는 특별한 인연의 끈이었다.
 승윤은 그 끈에 마음을 실었다. 그리고는 끈이 연결된 곳을 따라 계속 흘러가 보았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산과 들, 도시들이 휙휙 지나가더니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아!’
 승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끈이 연결된 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지금의 세상에서 승윤과 가장 깊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승혜야…….’
 그들의 모습이 정확히 보이거나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승윤은 끈을 통해 연결된 그들의 마음이나 상태를 잘 알 수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다소의 어두운 부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활기찬 기운을 뿜어내며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승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들 잘 계시는구나. 정말 다행이다…….’
 승윤은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자신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가족들이 얼마나 좋아 할지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갑자기 집을 떠나버린 자신으로 인해 부모님들이 얼마나 속상해 했을지 생각만 해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살 수는 없겠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서도 항상 조심하며 흥분하거나 화내지 않도록 조심해서 살면 괜찮겠지.’
 이렇게 승윤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는 용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날이 밝았다.
 용도에 들러올 때 가져온 게 별로 없었으니 나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방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배낭을 둘러메고, 용도에 들어올 때 입었던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배가 정박했던 해안으로 갔다.
 그곳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자 마침 지나가는 어선이 있었다.
 승윤은 어선을 향해 풀쩍풀쩍 뛰며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려는 듯 보이던 어선이 결국 뱃머리를 돌렸다.
 잠시 후, 어선은 승윤이 서 있던 해안가로 다가왔다.
 승윤이 용도로 타고 들어온 어선보다는 훨씬 큰 배였지만, 용도 주위는 수심이 매우 깊어 해안까지 다가오는데 다행히 문제가 없었다.
 “아저씨! 저 좀 태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전의 승윤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예의바른 말투였다.
 “학생 혼자가?”
 “예.”
 “언제 들어왔노?”
 “며칠 됐습니다.”
 “그래? 오데 갈라고?”
 “아무 곳이나 상관없습니다. 육지에만 데려다 주십시오.”
 “지금은 고기 잡으러 가야 되는데…….”
 “부탁드립니다.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배고파 죽겠습니다!”
 어부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순간 승윤은 어부가 뱃삯을 바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승윤은 난감했다. 섬에서 죽을 생각으로 들어왔기에 나갈 계획은 조금도 세워두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태워주세요.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사례를 하겠다는 승윤의 말에 어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배를 댈 테니까 어서 타라!”
 마침내 어선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승윤은 자신과 배 사이의 거리를 대충 가름하다가 3미터 정도의 간격이 되었을 때 풀쩍 뛰었다.
 탁!
 가볍게 배에 올라탄 승윤을 보고 어부들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도의 해안은 거친 바위와 파도로 유명한 곳이다. 자칫 떨어지기라도 하면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치거나 파도에 휩쓸려 큰일 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승윤은 제자리에 그냥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3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건너뛴 것이다.
 과감한 행동과 운동신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부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승윤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학생이가?”
 “예.”
 “운동 좀 했나 보네? 거기가 어디라고 건너 뛰노?”
 “제가 운동신경이 좀 좋습니다.”
 “그래도 무사하기 다행이제…….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은 육지로 몬간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돈도 없는데, 고기 잡는 거나 도와드리죠.”
 “머라꼬? 돈이 없다꼬?”
 어부의 안색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대신 제가 일은 좀 잘 합니다. 한 사람 몫은 거뜬하게 해치울 수 있습니다.”
 어부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승윤이 밝게 웃으며 주위에 널려 있는 어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부는 그런 승윤을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고로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 법이다.
 “배에 탄 사람을 내리라 칼수도 없고……. 진짜 일 잘하나?”
 “물론입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뱃일도 해봤나?”
 “뱃일은 처음이지만……. 제가 힘이 좀 셉니다.”
 “뱃일을 힘으로 하는 줄 아나……. 그거 큰 착각인기라.”
 “제가 배우기도 금방 배웁니다.”
 “쯧쯧쯧, 어제 꿈에 용대가리가 나오더만 여기 올라꼬 그랬나 보네. 어쩔 수 없제. 일단 어구 정리 하고, 옆에 아저씨들 시키는 거나 잘 해라. 알았제?”
 “예.”
 승윤은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어부 두 명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승윤이라고 합니다.”
 어부들이 승윤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따, 점마 인사성 하나는 억수로 밝네.”
 “힘도 좋게 생깄네. 일 잘해라이.”
 승윤이 넉살좋은 표정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알았심더. 시키만 주이소.”
 “어라! 서울 촌놈이 갱상도 말도 할 줄 아네.”
 “뭐꼬, 진짜 금방 배우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승윤은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승윤이 어구를 정리하다가 자신이 탄 어선이 상당히 크지만 선원들은 두 명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저, 아저씨. 이 큰 배에 왜 선원은 두 분밖에 없습니까?”
 “그게 쫌 이상하제? 원래 이 배는 먼 바다까지 나가서 조업하는 밴기라. 하지만 요즘은 잡히는 고기가 너무 적어서 멀리까지 몬나가는 기라. 그러니 선원들 줄 뱃삯도 없어서 두 명밖에 안태운다 아이가.”
 “아! 그렇군요.”
 “한때는 이 배타고 대마도 너머까지 가서 고기 잡고 그랬다. 선실 아래에 커다란 냉동고도 있다 아이가.”
 “예…….”
 어선은 용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남쪽 바다 한가운데 멈췄다.
 “자! 인자 시작이데이. 빨리 이 밧줄을 땡기라.”
 “옙!”
 승윤은 곧바로 뛰어가 어부와 함께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물과 연결된 도르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승윤과 함께 밧줄을 당기던 어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니 진짜 힘 좋네! 혼자 땡기도 되겠다.”
 “하하하, 그럴 게요. 아저씬 다른 일 하세요.”
 “그래. 한번 맡겨 보께.”
 어부는 승윤에게 밧줄을 넘긴 후, 자신은 다른 어부와 함께 그물을 바다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배의 선장인 중년 어부는 배를 천천히 몰면서 그물이 바다에 제대로 깔리도록 했다.
 마침내 그물 치는 일이 끝났다.
 어부들이 승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젊은 놈이 힘 하나는 끝내주네. 니 때문에 일찍 끝났다.”
 “선장님요! 자가 생각보다 일을 잘하네예. 나중에 한 대가리 쳐주이소.”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래 잡으머 염통주고 상어 잡으머 꼬랑지 주께.”
 “아따, 선장님요. 여기서 고래하고 상어를 우째 잡습니꺼?”
 “혹시 아나? 어제 꿈에 용대가리 나왔는데, 진짜 고래 잡을지.”
 “그냥 로또를 사지예?”
 “고래가 바다의 로또 아이가? 밍크고래 큰 놈 하나 잡으먼 돈이 얼만 줄 아나?”
 “밍크고래가 돌았다고 여기와가 그물에 대가리 박겠심니꺼?”
 “마 시끄럽다. 니가 자꾸 그런 소리 하머 오던 고래도 도망가겄다.”
 “아따 선장님도 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윤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물을 쳐놓았으니 오후에 거두어들일 때까지는 할 일이 없었다.
 “고래라…….”
 승윤이 바다를 향해 마음을 열었다.
 그러자 온갖 흐름들이 느껴졌다.
 수많은 생명들이 바다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어떤 생명들은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물고기 떼, 즉 어군이었다.
 어선이 그물을 내린 곳도 어군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하지만 어군은 꼭 가던 길로만 지나다니지 않는다. 운 좋게 그물에 걸리기만 하면 말 그대로 대박이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물고기들은 꽤 있구나. 한데 고래는 어디 있을까?’
 승윤은 관조의 범위를 넓게 확대했다.
 ‘고래야. 고래야…….’
 순간, 어디선가 묘한 울음소리가 승윤의 머리를 울렸다.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곧장 파고드는 낮고 긴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들었던 고래의 울음소리가 분명했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승윤은 고래의 울음소리를 더욱 크게 들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울음소리를 통해 고래의 마음이 승윤에게 직접 전해졌다.
 순간, 승윤은 온 몸이 저리는 전율을 느꼈다.
 고래는 단순히 의미 없는 울음을 우는 게 아니었다. 울음소리는 미묘한 강약과 고저, 그리고 리듬이 있었다.
 그건 분명히 어떤 언어였고, 또 승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고래가 전하는 의사를 승윤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반갑다. 환영한다. 그리고 만나고 싶다는 의미였다.
 승윤은 고래에게 마음을 보냈다.
 승윤의 마음이 주변에 흐르는 흐름을 타고 바다 멀리까지 전달되었다.
 잠시 후, ‘푸우!’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먼 바다에서 솟아오른 물기둥은 점차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시커멓고 커다란 생명체가 수면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저, 저기 뭐꼬?”
 “고, 고래 아이가? 고래다!”
 어부들이 외치는 소리를 선장이 듣고는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선장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리쳤다.
 “지, 진짜 고래네! 저기 와 여기 나타났노?”
 “선장님! 저기 우리가 그물 치논 데 아입니꺼?”
 “맞다! 잘 하머 오늘 로또 맞겠다!”
 선장과 어부들이 잔뜩 흥분한 채 소리쳤다.
 원래 고래 포획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쳐놓은 그물에 우연히 고래가 걸려 죽었을 경우에는 해경을 불러 고래의 몸에 작살자국이 있는지 확인한 후 그물의 주인이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고래를 바다의 로또라 하는 것이다.
 승윤은 고래와 마음을 주고받느라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승윤은 고래의 마음을 엿보면 볼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간들과는 달리 고래의 마음에서는 완전한 질서와 조화가 느껴졌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랫동안 도를 닦아 세속의 욕심과 욕망에서 벗어난 도인과도 같은 마음이었다.
 문득, 자연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생물학자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 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를 쓰는 종족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그 종족은 바로 고래이며 고래 중에서도 혹등고래의 언어는 워낙 복잡해 인간의 과학기술로도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설을 세웠다.
 만약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과 지능을 지닌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미개한 언어를 지닌 인간보다는 혹등고래와 가장 먼저 대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승윤은 생각했지만, 지금 직접 고래와 마음을 나누어보니, 그 생물학자의 가설이 분명히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래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고 거칠어졌다.
 절박함과 고통이 느껴진다.
 승윤이 두 눈을 번쩍 뜨고는 고래를 살폈다.
 “저, 저런!”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어선이 쳐 놓은 그물이 걸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선원들과 선장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물에 걸렸다! 이제 쪼끔만 있으면 질식해 죽을끼다!”
 “선장님. 머합니까? 어서 해경에 연락하이소. 고래가 그물에 걸렸으니까 와서 확인하라꼬예!”
 승윤은 어서 고래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선원과 선장들의 환호성을 듣자 난감해졌다.
 그들로서는 고래 한 마리를 잡음으로서 거금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고래의 울음소리가 더욱 절박하게 변했다.
 승윤은 더 이상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승윤이 배의 난간으로 다가가다가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
 “어어어!”
 승윤이 팔을 마구 흔들더니 바다로 떨어졌다.
 첨벙!
 “뭐꼬? 야가 아디 갔노?”
 “저, 저기다! 바다에 빠짔다아이가!”
 선원들이 급히 구명튜브를 바다로 던졌다.
 하지만 승윤은 잠시 허우적대더니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선원들과 선장의 안색이 일순 굳었다.
 그들은 발버둥치는 고래와 승윤을 삼켜버린 바다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편, 승윤은 바다 속을 미끄러지듯 헤엄쳤다.
 얼마 가지 않아 그물에 걸려 발버둥치는 고래의 모습이 보였다.
 승윤은 전력을 다해 고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고래의 발버둥이 워낙 거세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승윤이 고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가만있어. 내가 구해줄게.’
 승윤의 마음이 고래에게 가서 닿았는지 고래가 발버둥을 멈추었다.
 승윤은 즉시 고래에게 손으로 고래의 큰 몸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고래의 눈이 승윤을 향했다.
 승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반갑다, 고래야. 그리고 미안해. 나 때문에…….’
 고래가 승윤의 마음을 알았는지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승윤은 곧바로 그물을 벗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래의 커다란 몸은 그물에 단단히 끼어 있어 쉽게 벗겨낼 수가 없었다.
 승윤이 이를 악물고는 그물을 잡고 힘껏 당겼다.
 순간, 아랫배를 채우고 있던 묵직한 기운이 온 몸으로 확 퍼져 나갔다.
 그러자 승윤의 온 몸에서 강력한 힘이 발휘되었다.
 우두둑!
 고래를 붙잡고 있던 그물이 썩은 새끼줄처럼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승윤은 고래의 커다란 몸 이곳저곳을 헤엄쳐 다니며 그물을 뜯어냈다. 하지만 고래의 몸은 워낙 컸고, 거기에 얽혀 있는 그물은 너무 많았다.
 숨을 쉬지도 않는 상태에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쓰고 있으니 승윤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용머리바위에서 기이한 힘을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물속에서 마냥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승윤은 고래가 점차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물 밖으로 나가 숨을 쉴 틈조차 없었다.
 승윤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부어 그물을 뜯어냈다.
 이제 고래의 옆 지느러미를 붙잡고 있는 그물 하나가 남았다.
 승윤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은 채 전력을 다해 지느러미로 헤엄쳐갔다. 그리고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 그물을 잡아 뜯었다.
 우드드득!
 결국 고래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그물이 찢겨나갔다.
 고래가 크게 요동치더니 수면으로 솟구쳤다.
 푸우!
 크게 숨을 들이쉰 고래는 다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승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이 바다에 버려졌다.
 의식이 점차 가물가물해지더니 주위의 푸른 바다가 점차 검어지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래도 고래는 구했으니…….’
 승윤이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순간, 갑자기 등에 충격을 느꼈다.
 승윤의 몸이 급속도로 수면으로 솟구치더니 허공을 5미터나 날아올랐다.
 “푸하하!”
 승윤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시커멓게만 보이던 주변이 다시 밝아졌다.
 첨벙!
 승윤의 몸이 다시 바다에 빠졌다.
 그러자 커다란 물체가 승윤의 등을 받쳐 다시 수면위로 올려주었다.
 바로 승윤이 구해준 고래였다.
 “아! 네가 나를…….”
 승윤은 팔을 뻗어 고래의 커다란 주둥이를 안았다.
 뿌우우!
 고래의 울음소리가 승윤의 마음으로 들어왔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의미였다.
 ‘아니야. 내가 오히려 고마워. 나 때문에 죽을 뻔 했잖아.’
 승윤은 그렇게 고래와 함께 수면 위를 떠다니며 마음을 나누었다.
 ‘이제 그만 가. 난 배로 돌아가야 해.’
 뿌우우!
 ‘그래.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린 함께 있는 거야.’
 고래는 잠시 승윤의 주위를 맴돌더니 다시 먼 바다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고래의 물기둥을 지켜보던 승윤이 어선을 향해 헤엄쳤다.
 승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본 선원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저기 사람이가 물고기가?”
 “인어 뺨치겠다!”
 승윤은 30미터가 넘는 거리를 금방 헤엄쳐와 구명튜브를 잡았다.
 선원들이 그를 끌어올려 주었다.
 “휴우!”
 승윤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승윤아! 니 괜찮나?”
 “우째 된 기고? 고래가 니를 살려줬데이. 그거 아나?”
 승윤은 짐짓 힘이 하나도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아요.”
 “어이구! 조심 좀 하지. 죽을 뻔 했다 아이가?”
 선원들이 승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선장은 고래가 사라진 바다를 바라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선장의 입장에서는 로또에 당첨되었다가 복권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승윤이 선장에게 다가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고래를 놓친 것 같아…….”
 선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내일 모레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다. 고래가 도망간 기 니 잘못이가? 그물이 약해서 찢어진 거 아이가.”
 “그래도…….”
 “휴! 무슨 고래가 저리 힘이 세노. 얼마 전에는 저거보다 더 큰 고래도 그물에 잡혔다 카던데…….”
 승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승윤은 선장과 선원에게 피해를 입힌 셈이었다.
 자신이 고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게 아닌가.
 ‘뭔가 보상을 해줘야 할 텐데…….’
 승윤이 고민하고 있자 선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다. 일단 그물부터 다시 올리라. 빨리 고치야 다시 칠 거 아이가?”
 “예.”
 승윤은 곧바로 선원들을 도와 그물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물을 모두 걷어 올린 선원들은 찢어진 곳을 재빨리 고치기 시작했다.
 선장이 답답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머하노? 빨리 해라. 시간 다 가겄다.”
 “하고 있심니더. 쪼께만 기다리소. 생각보다 그물이 마이 찢어졌네…….”
 승윤도 선원들을 돕고 싶었지만 찢어진 그물을 꿰매고 수선하는 일에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들 곁에 물끄러미 서 있던 승윤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는 뱃머리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승윤이 바다를 보고 관조를 시작했다.
 수많은 바다의 생명체들이 승윤의 머리에 훤히 그려졌다.
 한두 마리씩 개체로 움직이는 고기도 있었지만 어군을 형성한 놈들도 있었다.
 승윤은 어군을 형성한 고기떼를 주목했다.
 어군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승윤의 머리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다!’
 승윤은 선장과 선원들을 도울 방법을 알았다.
 어군은 모두 새 개였다.
 승윤은 그중 좀 더 밝은 빛을 내고, 또 큰 힘이 느껴지는 어군을 찾았다.
 ‘음. 저 쪽에 있는 어군이 가장 크고 밝은 빛을……. 응? 저건 뭐지?’
 승윤이 흠칫 하더니 몸을 떨었다.
 상당히 크고 강력한 힘을 지닌 어군이 남동쪽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 어군으로 하자.’
 승윤은 남동쪽에서 오는 그 어군이 움직이는 경로를 예측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흐름의 방향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승윤이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선원들이 그물 수선을 끝냈다.
 승윤이 선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선장님! 저 쪽에 어군이 있습니다.”
 “머라꼬?”
 “고기떼가 있다고요!”
 “니, 어디 아프나? 물속에 있는 고기떼가 우째 보인다 말이고?”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걸 분명히 봤습니다.”
 “진짜가?”
 “예. 만약 거짓말이라면 제가 한 달 동안 무보수로 배에서 일하겠습니다.”
 “뭐? 니 제 정신이가?”
 “정말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음!”
 “어서 저쪽에 그물을 치세요.”
 선장이 잠시 승윤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다. 그리 말하는데, 한 번 믿어보자. 머하노? 빨리 그물 칠 준비 안하고?”
 “알았심더! 승윤아! 니 진짜 봤제? 확실하나?”
 “분명히 봤습니다.”
 선원들은 다소 미심쩍어 했지만 승윤이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선장은 곧바로 승윤이 가리킨 방향으로 배를 몰았다.
 승윤은 잠시 바다를 살피더니 정확히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요. 저기서 저기서부터 북쪽 방향으로 그물을 치면 되요.”
 선원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선장을 쳐다보았다.
 선장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하노? 승윤이 시키는 대로 안하고?”
 선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바다에 그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승윤도 그들이 그물 내리는 일을 거들었다.
 마침내 바다에 그물이 드리워졌다.
 선장과 선원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물을 쳐놓은 바다를 쳐다보았다.
 곁에 있던 선원이 승윤에게 물었다.
 “승윤아. 니 진짜 본 거 맞나?”
 “예. 봤어요.”
 “고기떼 중에서 가끔 수면 위로 뛰어 오르는 놈들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거 참 보기 어렵데이.”
 “제가 운이 좋았나 보죠.”
 “고기 못 잡으머 니 진짜 한 달 동안 배에서 일 할끼가?”
 “잡으면 되죠.”
 “젊은 놈이 배짱 하나는 끝내 준데이.”
 “두고 보세요. 분명히 잡힐 겁니다.”
 승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강력한 힘의 흐름이 그물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다.
 
 
 4장. 뜻밖의 횡재
 
 바다는 조용했다.
 고기떼는커녕 멸치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은 입술이 마르는지 연신 혀로 핥았다.
 선장도 목을 길게 빼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바다를 쳐다보았다.
 “아저씨. 어차피 그물을 치고 한참 후에 걷잖아요. 왜 그렇게 초조해 하십니까?”
 “쩝! 다 잡은 고래를 놓치고 나니까 그렇지 뭐.”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만선으로 돌아갈 테니.”
 “만선? 니 요즘도 그런 게 있는 줄 아나?”
 “그럼, 없습니까? 배 가득 고기를 채우고 돌아가는…….”
 “그거 다 옛날이야기다. 요즘은 반만 채워도 재순기라.”
 “아! 그렇습니까?”
 “그기 다 지구 온난환가 뭔가 하는 거 때문아이가.”
 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어획량이 확 줄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긴 했지만, 그게 이처럼 심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 바다를 쳐다보던 승윤의 두 눈에서 눈빛이 반짝였다.
 쏴아아아!
 갑자기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얀 포말이 광범위한 바다를 뒤덮은 채 남동쪽에서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선장이 그 모습을 보고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저, 저거 다랭이(참다랑어. 참치) 아이가?”
 “마, 맞심니더! 다랭입니더!”
 “우하하하! 다랭이다!”
 선원들은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다랭이가 뭡니까?”
 “다랭이도 모르나? 참치아이가. 참치! 하하하하!”
 “아! 참치!”
 원래 참치는 동해 쪽에서 가끔 잡히던 어종이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최근에는 남해 먼 바다에서도 드물게 잡히곤 했다.
 하지만 참치의 이동경로는 예측하기 어렵고, 또 워낙 빨라 그물을 쳐놓고 기다려서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머하노? 빨리 작살 들어라!”
 선장이 배를 몰고는 그물 가까이로 다가갔다.
 쳐 놓은 그물에 갇혀 퍼덕거리는 커다란 참치들이 보였다.
 두툼한 몸통을 지닌 참다랑어는 큰 놈들은 3미터까지 자란다. 특히 일본 오오마 근해에서 잡히는 오오마혼마구로의 경우 큰 놈은 한 마리당 가격이 억대를 호가한다.
 하지만 지금 그물에 걸린 놈들은 대략 1미터 내외의 크기였다. 그 정도만 해도 마리당 백만 원은 너끈히 받을 수 있었다.
 선원들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를 만큼 큰 금액이다.
 “승윤아! 니는 냉동고를 깨끗이 비우고 스위치 올리라!”
 “냉동고는 어딥니까?”
 “저쪽 선실 아래다!”
 승윤이 곧바로 선실 아래로 뛰어갔다.
 제법 널찍한 냉동고가 그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잡다한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승윤은 그것들을 모조리 밖으로 끌어내고는 스위치를 올렸다.
 위이이잉!
 냉동고가 작동되는 것을 확인한 후, 승윤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원래 참치는 잡는 즉시 냉동을 시켜야 한다. 참치가 죽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온이 50도까지 올라가며 부패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살이 시커멓게 변하는데, 그런 참치는 상품 가치가 거의 없었다.
 갑판에서는 선원들은 곧바로 작살로 참치를 찌른 후, 갈고리로 찍어서 배 위로 건져내기 시작했다.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참치의 무게가 문제였다. 마리당 4, 50키로그램이나 나가는 참치를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작업은 무척 힘들었다.
 게다가 선장은 배를 조종해야 했기에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돈 덩어리나 다름없는 참치였기에 선원들은 죽을힘을 다해 끌어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작업하자 갑판에는 수십 마리의 참치들이 수북이 쌓였다.
 “서, 선장님! 그물이 찢어질라캅니더!”
 “지금 그물이 문제가! 빨리 한 마리라도 더 건지내라!”
 선원들은 죽을힘을 다했지만, 일은 더디기만 했다.
 삼십 분이 지났지만 건져낸 참치는 50마리도 되지 않았다.
 선장이 발을 동동 굴렸다.
 “하이구! 돈 덩어리가 눈앞에 있는데…….”
 결국 승윤이 나섰다.
 승윤은 선원들이 참치를 건져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후 작살과 갈고리를 들었다.
 ‘저렇게 찍어서 아가미에 갈고리를 걸고 칼로 목을 딴 후에…….’
 승윤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작살로 참치를 찍었다. 그리고는 퍼덕이는 참치의 아가미 부근에 정확히 갈고리를 건 후 무서운 힘으로 끌어올렸다.
 1.5미터 가까운 참치 한 마리가 단번에 배 위로 끌려올라왔다.
 선원들은 워낙 바빠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선장은 경악한 표정으로 승윤을 쳐다보았다.
 “저, 저기 인간이가?”
 승윤은 조금도 쉬지 않고 다시 참치 한 마리를 더 건졌다.
 ‘그물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결국 시간이 많지 않은데…….’
 승윤이 고함을 질렀다.
 “큰 놈이 더 비쌉니까?”
 선장이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이가! 메타당 가격이 10배로 뛴다!”
 승윤이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큰 놈이 어디 있지…?’
 그때, 승윤의 눈에 상당한 크기의 참치 한 마리가 보였다.
 ‘저 놈이다!’
 승윤은 곧바로 작살을 찔렀다.
 푸드드드득!
 어마어마한 힘 때문에 작살이 부러질 듯 요동쳤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주변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승윤은 재빨리 갈고리를 놈의 아가미에 걸었다.
 “영차!”
 승윤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참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참치는 피를 대량으로 흘리면서도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푸드득! 푸드드득!
 커다란 참치의 동체가 서서히 수면위로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으이샤! 으이샤!”
 갈고리가 부러질 듯 휘었지만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다.
 마침내 승윤은 참치를 배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휴우!”
 초인적인 힘을 지닌 승윤이었지만 잠시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선장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승윤이 잡아 올린 참치를 쳐다보았다.
 대충 보아도 2미터는 족히 되는 놈이었다.
 “대, 대박이다! 승윤아! 대박이야! 우하하하하!”
 선장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승윤은 다시 바다로 눈을 돌렸다.
 바다에 쳐 놓은 그물이 그 순간 찢어졌고, 참치 떼는 무서운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놈!’
 승윤이 작살을 들었다.
 그의 눈에 수많은 참치들이 배를 스치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 놈도 아니고……. 아! 왔다!’
 승윤은 신중하게 작살을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리더니 바다를 향해 작살을 푹 찔러 넣었다.
 작살은 정확히 뱃전을 스쳐 지나가던 참치의 아가미 바로 아래에 꽂혔다. 심장이 있는 부분이다.
 붉은 피가 확 뿜어져 나왔다.
 승윤은 곧바로 갈고리를 뻗어 참치의 아가미에 정확히 걸었다.
 푸드드드득!
 엄청난 힘이 갈고리에 전해졌다.
 ‘헉! 갈고리가 부러지겠다.’
 승윤은 갈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조금 뺐다.
 참치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승윤이 다시 갈고리를 잡아당기자 참치가 물 밖으로 끌려나왔다.
 하지만 놈의 힘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승윤은 결국 참치를 놓아줬다 당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참치의 요동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됐다! 지금이다!’
 승윤은 갈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커다란 참치의 머리통이 수면 밖으로 나왔다.
 승윤은 참치를 배위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워낙 무거워 쉽지 않았다. 물 밖으로 나온 참치는 부력이 사라져 훨씬 무거웠던 것이다.
 ‘힘을 더 주면 갈고리가 부러지고 말 거야.’
 승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선장이 소리쳤다.
 “너그들 승윤이 도와라! 빨리!”
 “다랭이 잡고 있는데예?”
 “그냥 놔주고 승윤이 도와라 안 하나! 빨리!”
 “알았심더.”
 선원들은 끌어올리고 있던 참치를 바다에 내팽개치고는 승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승윤이 시름하고 있는 참치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저, 저기 다랭이가 고래가?”
 “바, 밧줄! 밧줄 어데갔노?”
 선원 한 명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밧줄을 찾아 뛰어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참치의 입과 아가미를 꿰어 묶었다.
 승윤은 갈고리를 놓고 밧줄을 잡았다.
 “영차! 영차!”
 세 사람이 밧줄에 달라붙어 참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선장이 주먹을 불끈 쥔 채 쳐다보다가 키를 내팽개치고는 갑판으로 달려왔다.
 “나도 거들자!”
 선장까지 네 명이 밧줄에 달라붙어 당기자 결국 참치는 서서히 끌려 올라왔다.
 승윤이 마음만 먹는다면 혼자서도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사람으로 보일 것 같지 않아 적당한 힘만 썼다.
 영차! 영차!
 마침내 참치의 커다란 머리가 뱃전으로 올라왔다.
 “우와! 크다! 빨리 땡기라!”
 선장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영차! 영차!
 마침내 참치가 거대한 동체를 갑판위에 놓였다.
 “헉헉헉!”
 “하아! 하아!”
 선장과 선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고! 꿈에서 본 용대가리하고 다랭이 대가리하고 똑같이 생깄네.”
 선장이 크게 외치면서 참치를 얼싸 안았다.
 선장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연신 참치의 몸통과 지느러미를 만지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승윤이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얼마짜린데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간단하게 말하께. 아까 잡다가 놓친 고래 있제?”
 “예.”
 “그 고래하고 비슷하다 보면 된다.”
 “예? 참치 한 마리가 고래하고 비슷하다고요?”
 “덩치 봐라. 3메타짜리 아이가? 무게는 300키로그람까지 나간다. 이거는 부르는기 값인기라.”
 “아!”
 놀라운 일이었다. 3미터짜리 참치가 고래 한 마리 값이라니 말이다.
 “내 정신바라. 이라고 있을 때가 아이제. 머하노? 빨리 참치 손질부터 해라!”
 “예, 선장님!”
 선원들이 곧바로 칼을 가져와 참치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는 내장과 피를 뽑아냈다.
 “승윤아! 니는 힘이 세니까 참치를 냉동고에 옮기라. 그리고 아가미에 갈고리 걸어서 매달아라.”
 “예.”
 승윤은 내장이 제거된 참치의 아가미를 잡고 냉동고로 끌고 갔다. 내장과 피가 제거되었지만 참치는 여전히 무거웠다.
 마침내 잡아 올린 참치를 모두 냉동고에 모두 넣는데 성공했다.
 선장과 선원들 모두 파김치가 되었지만, 승윤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참치의 내장과 피로 범벅이 된 갑판에 퍼질러 앉아 쉬고 있던 선원들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장을 바다에 던지고, 물을 뿌려 피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바다에 뿌려진 내장을 주워 먹기 위해 갈매기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끼룩! 끼룩!
 승윤은 난간에 기대어 선 채 갈매기들이 내장을 주워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누군가 승윤의 어깨를 툭 쳤다.
 
 
 다음에 계속...

댓글(2)

까만천사    
참나 이걸 작가는 출간하기전에 한번이라도 읽어봣나요?? 선결제 때문에 끝까지 보긴 햇는데 돈이 아깝네 오타에 오류에 전개는 늘어지고 분량 늘리느라 전페이지마다 전에내용 다시올리고 운월 작가님 다시한번 읽어보시고 퇴고 확실히 합시다 수정이 안된다 앞으로 운월 이란 이름이 들어간 찿는사람이 없을겁니다
2017.08.10 20:48
cutesd    
이것을올리는문피아도 참나 독자를 호구로알지
2017.08.13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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