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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마병엑시온 1권-1

2015.02.06 조회 4,852 추천 48


 Prologue
 
 1.
 
 고대의 인간들은 신과 같은 신통력이 있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지혜로웠고, 하늘을 날고 심해를 헤엄치는 등, 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들의 지혜는 더욱 늘어났고, 급기야는 창조주의 영역에까지 힘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인간에 의해 세상의 질서가 흔들렸으며, 그 질서를 조율하는 절대적인 존재들조차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창조주는 큰 벌을 내려 인간이 쌓아올린 찬란했던 문명을 소멸시켰고, 인간이 지닌 신통력 자체를 빼앗아 가버렸다.
 창조주는 신통력을 인간들이 결코 찾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 감추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이 바로 인간의 내면이었다.
 찬란했던 고대인의 문명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어둡고 긴 야만의 암흑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천년의 시간이 지났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지혜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의 부산물로 검과 마법, 그리고 강철의 거인 타이탄의 시대가 도래 했다.
 하지만. 깊고 어두운 심연 속에서…….
 고대인의 지혜가 결집된 유산 하나가, 천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서서히 태동하고 있음을 인간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2.
 
 영차! 영차!
 “어이! 힘 내!”
 “거의 다 됐다고! 어서 당겨!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소리에 맞춰 수많은 일꾼들이 긴 밧줄에 바짝 달라붙어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루멘왕국의 북서부를 가로지르는 바몬 산맥 어딘가에서 우연히 던전이 발견되었고, 그 던전의 매끈한 석문을 열기 위해 일꾼들이 달라붙은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나고 있었다.
 일꾼들 모두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그들의 온 몸에서 비 오듯 쏟아졌다.
 영차! 영차!
 마침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던 석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드드드!
 “무너진다!”
 “모두 피해라!”
 쿠르릉! 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자, 그곳에는 높이 5미터에 폭이 3미터나 되는 공간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귀족과 마법사, 그리고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은 채,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들 모두 실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던전을 나왔다.
 바깥을 지키던 마법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 던전을 나온 마법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던전으로 직접 들어가 보라는 듯 턱짓을 하는 것이었다.
 마법사가 참지 못하고 던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라이트닝 볼을 허공에 띄워 어둠을 밝힌 뒤, 마법사는 던전 깊숙이 진입했다.
 생각보다 던전은 크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던전의 중심부에 이르렀고, 그곳에는 넓은 홀이 하나 형성되어 있었다.
 마법사의 입에서 절로 허탈에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고작 이딴 걸 얻자고 돈을 그리 쏟아 부었단 말인가?”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거나 최상급의 마정석과 고위 마법서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타이탄 한 기가 석상처럼 서 있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던전에 숨겨둔 타이탄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
 마법사는 ‘그래도!’하는 마음에 타이탄으로 다가가 살폈다.
 모양은 제법 멋있었다. 아니, 명장의 손이 닿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멋있고 아름다운 타이탄이었다. 등에 화려한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타이탄을 움직이는 엔진인 마정석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갑은 너무 허약해, 일반 기사가 휘두르는 검에도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크기도 너무 작았다. 아마도 난쟁이들을 위해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돈질밖에 모르는 머리 텅 빈 귀족 여인네들의 노리개로 사용되면 딱일 것 같았다.
 마법사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던전을 보호하고 있던 고위 마법진의 위력에 비하면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황금 한 덩어리를 보호하려고 천만금을 쏟아 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마법사가 처진 어깨를 하고 던전을 나왔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혹시!’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법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닦아서 광만 좀 내면, 기사아카데미 정문 옆에 장식용 석상으로는 쓸모가 있을 것 같소.”
 모두들 툴툴거리며 등을 돌렸다.
 영차! 영차!
 일꾼들이 던전에서 고물 타이탄을 끄집어내느라 내지르는 구령소리가 주위를 요란하게 울렸다.
 
 
 1장 : 아이작 프롬
 
 
 내 이름은 아이작 프롬.
 루멘 왕국 변방에 척박한 땅을 소유하고 있는 프롬 자작가의 둘째이자 막내아들이다.
 사람들은 나를 ‘꿈꾸는 소녀’라는, 그리 영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부른다. 거친 영지의 상황에 걸맞지 않게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내 성격 때문이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말을 타고 검을 휘둘러야 하며, 나아가 타이탄 오너(Titan Owner)가 되어야 한다는 철두철미한 신조를 지닌 아버지께서 이런 나의 성격을 달가워 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어느 날, 동방의 대륙에서 왔다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낭인을 내 스승이랍시고 갑자기 데려왔다.
 아! 사내다운 사내라면 형 하나로 충분한데, 왜 아버지는 내게까지 그걸 강요하시지 정말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가 밉지만, 어이하랴! 형과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항할 논리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결국 아버지의 말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전부 이웃 왕국의 국경영주 샤르망 남작 때문이다. 샤르망 남작가와 우리 프롬 자작가는 대대로 원수처럼 지내왔다. 덕분에 영지는 상시 준전시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경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제발 주신께서 샤르망 남작의 영지를 통째로 들어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쨌든 겉보기에는 용감하게 적진을 돌파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그 피를 받아 마시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생긴 동양의 낭인, 아니 내 스승, 마스터 운차크는 의외로 사람됨이 차분하고 조용조용했다.
 아마도 그의 이런 성격을 진작 알았다면, 뛰어난 검술실력을 견식 했던 아버지도 결코 그를 나의 스승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로서는 다행스럽게 그지없는 일이었다. 힘들게 검을 휘두르거나, 기초체력을 연마한답시고 연병장을 뻔질나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대신 스승 운차크는……. 훗! 운차크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마스터께 실례인줄은 알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이름인 걸 어떡하겠어? 누가 마스터의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작명센스 하나만은 지질이도 없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어쨌든 운차크 스승님은 내게 명상을 시키신다. 명상의 요지는, ‘생각을 흘러가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 생각의 흐름 자체에서 나의 존재를 분리해낸 후, 사물을 관조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참된 자아를 깨닫게 되고 또 큰 지혜를 얻게 되는데, 거기서 얻는 효능은 마나연공법이나 검술 따위를 배워서 얻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뭐 믿거나 말거나 한 그런 것이다.
 다행히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앉아서 주위를 관찰하거나, 공상에 잠기는 게 내 특기였다. 그리고 집중력이 좋아 마나수련만큼은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스승이 가르친 명상수련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수련을 하자,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절로 들어올 만큼 감수성이 예민해지게 되었다. 이건 아버지가 의도하시던 방향과 완벽히 정반대다. 아마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스승을 때려죽이려 하실 지도 모르겠다.
 스승도 그 점이 염려되었는지 내게 틈틈이 검술과 스탭을 가르쳐주셨다.
 스승이 가르쳐준 검술은 우리 가문에서 비전으로 전해오는 검술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렇다면 위력도 더 강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 검술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자면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한데,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 펼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빛 좋은 개살구라 하던가?
 옛날 옛적에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마나수련법이 동방에 있었다고 스승이 말했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나라도 지어낼 수 있겠다.
 이처럼 실전에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이 검술과 스탭이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있다는 사실이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버지의 흡족한 눈길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스탭의 현란함은 직접 그걸 하는 내 눈도 핑핑 돌 정도니, 보는 사람들은 어련하겠는가?
 이렇게 실제로는 명상법을 배워 감수성을 갈고 닦았지만, 겉으로는 화려한 검술과 스탭을 보여주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엉터리 검술을 배워서인지, 아니면 나의 자질이 원래 형편없어서인지는 몰라도, 검술은 전혀 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운차크 스승님은 명색이 검술선생으로 초빙을 받아 왔는데, 제자가 너무도 자질이 없고, 또 제대로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 고민에 잠기셨다.
 결국, 내게 평소의 그분답지 않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셨다. 동방 대륙에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비기가 하나 있는데, 그걸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괜히 이런 일에 말려들면 뼈 빠지게 고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내가 배우겠다고 나설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스승께서는 자작이신 아버지와, 곧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지로 돌아올 형의 체면을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이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께는 좀 미안하지만, 형을 걸고넘어지는 방법을 스승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머뭇거리자 스승이 다시 나를 꼬드겼다.
 비기의 전승자까지 될 필요는 없고 그걸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호신할 정도로만 익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배운 제자가 나중에 술집에서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체면 구기는 일은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스승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나는 배우지 않겠다고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육체적인 한계를 왔다 갔다 하는 수련을 꽤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내 생애에서, 뭐 생애라 할 것도 없지만, 이처럼 힘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행히 수련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다. 스승께서 최근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젠, 어디 가도 맞고 다니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말이다.
 결국 내 검술실력이 늘지 않은 이유는 자질 때문이 아니라 노력과 마음이 부족했다는 게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였다.
 스승께서는 내게 자만하지 말고, 마나를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쉬지 말고 수련하라고 하셨다. 그렇게만 되면 웬만한 기사와 싸워도 지지 않는다나?
 내가 도대체 기사와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부터, 나는 더 이상 비기의 수련을 하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명상과 마나연공법에만 매달렸다.
 스승께서도 내가 비기를 수련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셨지만,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직접 내 검술 실력을 평가하겠다고 나서신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련에서, 나는 스승으로부터 처음 배웠던 엉터리 검술을 펼치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노발대발 하셨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를 기만했다는 이유로 맞고 또 얻어맞았다.
 아아! 정말 억울하다. 내가 배운 게 ‘비기’만 아니라면, 그걸 발휘해 아버지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드렸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달리 ‘비기’이겠는가? 위기의 순간이 아니면 절대 꺼내놓지 말아야 하는 게 바로 ‘비기’ 아니겠는가.
 결국, 운차크 스승님은 그 날로 쫓겨났다. 그래도 자식의 스승으로 있었던 체면을 생각해서 감옥에 집어넣지는 않았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스승님은 내게 하루도 쉬지 말고 명상과 비기를 수련하라고 당부하신 후, 길을 떠났다. 그래도 꽤 오랫동안 가르치고 배우던 재미가 쏠쏠하던 스승이 떠나니 무척 슬펐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검술을 가르침 받았다.
 아버지는 인정사정없이 나를 두들겨 패기 일쑤였고, 덕분에 내 온 몸은 멍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서서 아버지와 대판 부부싸움을 했고, 그 다음부터 나는 검술 수련의 질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연공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완고한 주장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마나수련은 내 적성에도 맞았으니 말이다.
 검술의 기대를 접은 아버지는 차라리 내게 마법사가 되라고 하셨다. 아랫배의 마나홀이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니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마법사로 전환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법사라…….
 강철의 거인 타이탄이 뛰어다니는 이 시대에, 마법사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직업이다. 마법을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제법 실력을 쌓아도 타이탄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메카닉 메이지(Mechanic Mage)가 되어, 마탑의 공장이나 연구소에 처박히는 게 고작이다.
 그게 아니면 워 메이지(War Mage)가 되어 전장을 누벼야 하는데, 전장에서 척살대상1호가 바로 워 메이지이며, 실제로 워 메이지의 사망률이 중장 기사를 상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워 메이지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신 모양이다. 남자가 뭐라도 할 줄 아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니 기필코 마법사 스승을 초빙해 왔던 것이다.
 라모트 마법연합 소속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스승은, 뱁새처럼 쭉 찢어진 눈에, 무척이나 신경질적이고 완고한 성격을 지닌 노인이었다.
 당연히 이런 노인이 나와 성격이 맞을 리가 없다.
 처음 마법입문서를 탐독하고 마법의 기초를 배울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마법의 근간을 이루는 마나 배분율의 계산과, 좀 더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게 어렵기는 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그리고 스승이 진도를 쭉쭉 빼는 나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마법에 대한 자질이 꽤나 괜찮았던 모양이다.
 타이탄 제작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막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초를 떼고 초급으로 넘어가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초급과정에서는 본격적으로 마나를 발휘해 마법을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배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심장에 마나의 순환경로를 만들어야 하는데, 마법사들은 그걸 두고 마나써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도무지 마나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야 말이지. 억지로 마나를 심장으로 끌어올리면 아랫배가 찢어지게 아프고 온 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던 것이다.
 이 증상을 마법사 스승에게 이야기하자 스승이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혹시 마법이 아닌 검술이나 체술 같은 걸 배우지 않았느냐?”
 나는 당연히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법스승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그건 아랫배에 있는 마나홀이 이미 활성화 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운차크 검술스승으로부터 동방의 비기를 배우느라 땀을 좀 빼기는 했는데, 그 때문에 벌써 마나홀이 활성화 되었다니 말이다.
 마법사 스승은 싹수도 없는 나 때문에 괜히 시간만 허비했다며 짐을 싸들고 떠나버렸다.
 마법과의 인연은 그길로 끝났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게 된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셨다. 자질도 없는 검술을 배우느라 마나홀을 활성화시키는 바람에 마법사가 되는 길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말이다.
 결국 그 후로 아버지는 내게 두 번 다시 뭘 배우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오히려 포기할 수 없었다.
 운차크 스승이 가르쳐준 비기를 익히는 것 보다 마법이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열심히 마법을 익혔다. 고통을 참고 마나를 심장으로 밀어 넣어 마나써클을 완성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노력하면 되는 일이 있고, 또 아무리 기를 써도 도저히 성사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배울 수 있었다. 마나홀이 활성화되고 나면 죽었다 깨어나도 심장에 마나고리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이 세상에는 검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이른바 마검사들이 수두룩하게 늘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운차크 스승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던 게 떠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그길로 마법수련을 멈추었을 것이다.
 내가 마나 연공법에 대해 스승에게 질문을 하자 스승은 이런 말을 남기셨다. 마나는 그냥 마나일 뿐이라고. 검술을 쓸 때 활성화시키는 마나홀 안의 마나나, 마법사가 마법을 쓸 때 회전시키는 심장의 순환써클 안의 마나나, 쓰임새만 다를 뿐 같은 기운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왜 이제야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긴 끝에 작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깨우침에 따라 마법수련을 계속해나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나는 자작가의 둘째아들로서 풍족한 삶을 영위했다.
 물론,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마나연공법도 성실히 수련했고, 그리고 명상을 통해 감수성을 갈고 닦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느덧 나도 15살이 되었다. 소년기를 벗어나 이제 청소년이 된 것이다. 키도 제법 컸고, 얼굴에는 여드름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왠지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불끈 치솟는 힘을 주체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다.
 이렇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고군분투하며 지내고 있는데, 반가운 사람이 돌아왔다.
 바로 우리 영지의 자랑이자 프롬 자작가의 장남이며, 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형이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형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성문은 활짝 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개선장군 환영하듯 형을 반겼다. 형은 옛날부터 영지의 자랑이었던 것이다.
 주위에서 한 인물 한다는 뼈대 있는 가문의 아가씨들이 예쁘게 치장하고 모두 몰려나왔다. 그녀들은 형과 눈이라도 한번 맞추기 위해 좋은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검술 천재라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던 형은 아버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며, 세상에서 최고로 아끼는 아들이다. 20살의 나이에 타이탄 오너가 되어 금의환향했으니, 이처럼 대대적인 환대를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겠다.
 형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거금을 들여 타이탄 한 기를 추가로 구매했다.
 원래 타이탄 한 기를 얻기 위해서는 무지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가 있는데, 아버지는 이미 그 절차들을 모두 해결해 놓고 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문학적인 거금이 들어가는 타이탄을 구매한 덕분에 영지의 살림은 바닥을 길 정도로 어려워졌다. 그러나 7기의 타이탄을 갖추게 됨으로서 명실공이 팀 기동전술의 구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타이탄에 대해 나는 별 관심도 없었고, 따라서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팀 전술이 가능한 타이탄 분대와 그렇지 못한 타이탄들 간의 전력차이는 무척 크다는 상식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상식을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게 바로 오늘이다.
 형이 조종하는 타이탄이 참가하는 정식 팀 전술기동훈련이 지금 성 앞, 널찍한 평원 한가운데서 막 벌어지려는 참이다.
 ‘이런 날, 내가 빠질 수야 없지!’
 나는 성문 밖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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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법 따가운 햇살이 내려쬐는 5월 어느 날 한낮이었다.
 프롬 자작의 영지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도시를 형성하고 있는 체스터 성 앞 널찍한 평원에는 수많은 주민과 병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마탑의 귀하신 마법사 양반들도, 오늘만큼은 체면 불구하고 성벽의 망루 위에 올라가, 곧 있을 타이탄 팀 전술기동훈련을 기다렸다.
 원래 타이탄의 기동훈련은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다. 적의 첩자, 특히 이웃 왕국 영주인 샤르망 남작의 개들이 지켜보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스터 성의 군주 윌터 프롬 자작은 이번 기동훈련을 일종의 무력시위라 생각하고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영지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으니, 샤르망 남작은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하자는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성의 주민들은 물론, 거래 차 들렀던 다른 도시의 상인들, 그리고 체스터 성을 찾은 이웃영지의 손님들까지, 보기 드문 타이탄 기동훈련을 코앞에서 참관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윌터 자작의 둘째아들인 아이작 프롬은, 성문 밖에 평원 한쪽에 만들어진, 소위 귀빈석이라는 곳에서 앉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빰빠라 빰!
 갑자기 팡파르가 울리더니 성문에 몰려 있던 주민들이 탄성을 지르며 좌우로 비켜섰다.
 몇 명의 기사들이 가벼운 경갑을 착용한 채, 주민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와아!
 함성이 울려 퍼졌다.
 주민들이 기사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마침내 7명의 기사들이 평원 한가운데 와서 섰다.
 그들 중 위엄 있는 얼굴의 장년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나 귀빈들도, 그와 얼굴이 마주치자 무릎을 굽히거나 가볍게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캐슬 체스터의 주인이자 그 일대를 다스리는 군주인 윌터 프롬 자작이다.
 아이작 프롬이 벌떡 일어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윌터 자작은 자신을 향해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막내아들을 발견하고는 혀를 찼다.
 자작의 곁에는 준수한 외모를 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서 있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강렬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바로 윌터 자작의 장남이자, 대를 이어 군주가 될 라니언 프롬이다.
 윌터 자작은 왼팔로 라니안 프롬의 한쪽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오른쪽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올렸다.
 순간 성 안팎의 주민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와아!
 윌터 자작님 만세!
 라니언 공자님 만세!
 윌트 자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후,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함성이 점차 잦아지더니 침묵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듣기 좋은 연설이라도 한 마디 한다면, 주민들의 호응도가 더욱 뜨거울 것이지만, 자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 마디의 말보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작이 함께 나온 기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 모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곧이어 나지막한 진동음과 함께 검은 이공간이 입을 벌렸다.
 비잉!
 이공간이 점차 크게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이잉! 그그긍!
 육중한 발걸음소리가 평원을 울렸다.
 거대한 철탑을 연상시키는 강철의 거인.
 타이탄은 깊고 큰 족적을 남기며 신화속의 거인처럼 평원을 거닐었다.
 사람들은 타이탄이라 불리는 이 거인들이 7기나 소환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벽 위, 어디선가 나지막한 대화소리가 그때 들렸다.
 “모두 나이트급 타이탄이야! 4미터 내외의 키에 출력은 40기가파워(GP:Giga Power)에 달해. 무게만 해도 10톤이 넘을 테니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워우! 나이트 급이 저 정도라면 가디언 급 타이탄은 도대체 얼마나 크다고 강하다는 말이야?”
 “후후, 상상 초월이지. 그리고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몇 대 없다는 기간트 급을 보면 기절할 걸?”
 “기, 기간트 급이라고? 너, 봤냐?”
 “가디언 급까지는 한번 봤는데, 기간트 급은 구경도 못 했다.”
 “쳇! 그러면서 아는 척 하기는…….”
 “쉿! 이제 시작할 모양이야! 조용히 해!”
 라이더의 탑승이 완료된 타이탄들이 마침내 대열을 짓기 시작했다.
 우선 거대한 활과 화살로 원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한 아처 유닛(Archer Unit:궁수) 2기가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화살을 날리는 강력한 반탄력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앞뒤로 두 개의 지지대가 더 뻗어 나와 땅에 박혀들었다.
 그긍! 위이잉! 쿠궁!
 한번 고정되면 다시 움직이기까지 적지 않은 딜레이 타임(Delay Time:지연시간)이 필요한 아처를 보호하기 위해, 랜서 유닛(Lancer Unit : 창병) 2기가 크고 두꺼운 타워실드를 들고 그들의 앞을 가렸다. 그리고는 긴 창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이렇게 되면 워리어 유닛(Worrior Unit:전사)의 강력한 차지공격으로부터 아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다.
 랜서 유닛의 좌우에는 두터운 외장갑을 장착하고, 대검과 라운드 실드로 무장한 워리어 유닛 2기가 대기했다.
 아처가 원거리에서 적 타이탄의 접근을 저지하거나 파괴하는 동안, 랜서가 아처를 최대한 보호하고, 최후에는 워리어 유닛과 함께 근접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렇게 타이탄 6기가 기본적인 병진을 형성하면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쉽게 깨부술 수 없는 철옹성으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한 유닛 한 기가 더 추가되면 타이탄 분대는 방어 면에서 뿐만 아니라, 공격 쪽으로도 강력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그 특별한 유닛이 바로 레인저 (Ranger:수색, 유격)다.
 레인저 유닛은 나이트 급 타이탄 중에서도 가장 작고 가볍다. 하지만 마정석의 출력은 동급 최강이라는 워리어 유닛과 맞먹는다.
 가볍고 작은 동체에 강력한 출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탁월한 동체시력과 센서를 지녔고, 스스로의 몸을 주변의 환경에 동화시켜 은폐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지닌 능력이 이처럼 많으니 할 수 있는 임무도 다양하다.
 침투, 수색, 경계, 기습에서 암살까지…….
 잘 키운 레인저 하나, 열 워리어 부럽지 않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당연이 레인저 유닛은 나이트 급 타이탄 중에서 가격이 제일 비싸며, 오너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가장 크다.
 왕국들이 정하는 최고의 타이탄 오너, 즉 탑 블레이드에 꼽히는 유닛들 중, 레인저 유닛이 절반을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라니안 프롬이 바로 이 레인저 유닛의 오너다. 검술 방면에 극히 우수한 자질을 지닌 그가, 워리어 오너가 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굳이 레인저 유닛을 선택하게 된 것도, 분대단위의 타이탄 팀 기동전술을 완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탓!
 먼저, 레인저 유닛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평원의 풀이 뿌리째 뽑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준마조차 따를 수 없을 정도의 가공할 스피드로, 적 아처 유닛의 화살 공격을 가정한 회피동작까지 수행해가면서 달리는 레인저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그때,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나더니 마차 몇 대가 나타났다.
 두두두두!
 마차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네 마리의 말들이 끌고 있었기에 무척 쾌속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마부는 보이지 않았다.
 이 마차들은 바로 적 타이탄을 가정한 표적이었다.
 레인저가 순식간에 마차 한 대를 따라잡더니 왼쪽 팔목에 붙어 있던 소형 석궁을 발사했다.
 아처의 거대한 활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근거리에서는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석궁이었다.
 파바밧!
 연속적으로 발사된 석궁의 쿼렐(Quarrel:석궁의 화살)이 마차의 장갑을 뚫고 푹푹 박혀들었다. 만약 상대가 마차가 아니라 타이탄이었다면 큰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통제하는 마부가 없으니 놀란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구 치달렸다.
 레인저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마차 한 대에 접근하더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달렸다. 그때, 갑자기 레인저의 두 눈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스파크는 허공에서 작고 둥근 마법진의 형태로 변하더니 마차의 옆면에 날아가 박혔다.
 순간 멀리서 진영을 갖추고 있던 아처 유닛 한 기가 사람 팔뚝만큼 굵은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끼끼끼끼…….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거대한 강철궁이 서서히 휘어졌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이 활에서 시위로, 그리고 시위에서 화살로 전달되었다.
 파지지지!
 화살촉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고, 그 순간 아처가 시위를 놓았다.
 텅!
 거대한 악기의 현을 퉁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몸체를 받치고 있던 두 다리와 지지대가 땅 속으로 푹 파여 들어갈 만큼 강력한 반탄력과 함께 충격파가 파문처럼 번져나가 주위를 강타했다.
 우웅!
 도대체 얼마나 강한 힘이 화살에 실려 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시위를 떠난 그 큰 화살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놀랍게도 화살은 허공에서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더니, 레인저 유닛이 마법진을 박아 넣은 마차로 날아가 정확히 명중하는 것이었다.
 콰직!
 화살은 마차를 통째로 관통한 후 땅 속 깊이 박혔고, 그 충격에 마차가 허공으로 붕 떴다가 30여미터 뒤쪽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히히힝!
 네 마리의 말들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마차와 함께 패대기쳐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에서 경이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철마차를 정확히 화살로 명중시킬 수 있다는 건, 상대가 타이탄이라도 마찬가지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처와 레인저 유닛이 타게팅(Targeting) 마법공조를 이룬 결과였지만, 이 놀라운 시범은 구경꾼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젠 워리어 유닛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쿵쿵!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육중한 소리와 함께 10톤이 넘는 거인들이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레인저 유닛이 보여주었던 스피드와 회피동작 등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강력한 외장갑으로 무장한 워리어의 돌진은 그 자체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의 박력이 있었다.
 마침내 워리어 유닛 2기는, 철마차 2기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꽈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말들은 핏떡이 되었고, 마차는 형편없이 우그러진 채 한참을 굴러가 처박혔다. 가공하기 이를 데 없는 차지공격이었다.
 워리어들은 재빨리 움직여 다른 마차들을 따라잡았고, 이번에는 각자 쥐고 있던 대검으로 철마차를 두드렸다.
 꽝! 꽝!
 한번 대검에 맞을 때마다 형편없이 파여 나가는 철마차의 외장갑은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박스 같았다.
 순식간에 다섯 대의 철마차 모두를 휴지조각처럼 으깨버린 워리어들이 다시 진영으로 돌아왔다.
 왠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고, 쇳소리와 육중한 타이탄의 기동음으로 가득 찼던 평원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말 한 마리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전마 한 필의 가격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극적인 전시 효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마침내 타이탄 분대 기동전술훈련이 끝났다.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 최고다!
 짝짝짝짝짝!
 성의 주민들은 물론, 타 영지에서 온 손님과 상인들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마도 그들 중에 샤르망 남작의 첩자가 있었다면 간담이 서늘해 졌을 게 분명했다.
 나지막한 진동음과 함께 다시 이공간이 소환되었다.
 타이탄은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이공간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타이탄을 귀환시킨 윌터 자작과 그의 기사들이 당당한 모습으로 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모두들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들이다.
 그때, 아이작 프롬이 달려가 아버지와 형의 팔짱을 나란히 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버지! 형! 오늘 최고였어요!”
 모두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2장 : 기습
 
 
 루멘 왕국과 국경을 맞닿아 있는 토루카 왕국은 지리적인 여건이나,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왕국이 탄생한 이래 크고 작은 전쟁들이 무수히 있어왔고, 지금도 영지전 수준의 국지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토루카 왕국 최남단 지역의 군주인 샤르망 남작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루멘 왕국의 프롬 자작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 두 가문의 역사는 거의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피로 점철되어 왔다.
 샤르망 남작이 거주하고 있는 캐슬 미라노 내성 깊숙한 영주의 집무실에, 기사 한 명이 다급히 뛰어 들어간 것은, 프롬 자작이 타이탄 기동전술훈련을 실시한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타이탄 7기로 기동전술 훈련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남작님.”
 “그것도 모두가 지켜보는 성 밖 평원에서?”
 “장갑을 입힌 마차로 가상의 적을 가정하고, 그걸 파괴하는 시범까지 보였다더군요.”
 “후후, 뻔한 수작이군. 힘을 과시하겠다는 의도야.”
 “7대의 타이탄이면 기본적인 방어와 공격 전술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만만치 않습니다.”
 토루카 왕국과 루멘 왕국의 국경이 맞닿는 변방의 영주 샤르망 남작이 습관적으로 코끝에 난 검은 사마귀를 매만지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야 뭉쳐 있을 때 이야기지…….”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가볍게 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샤르망 남작에게 보고를 하고 있던 사내가 얼른 머리를 숙이더니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샤르망 남작의 시선이 벽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큰 지도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바로 루멘 왕국과 토루카 왕국을 비교적 자세히 표현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두 왕국의 경계점, 즉 국경 부근에 찍힌 한 점을 향했다.
 다음 순간,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프롬 자작! 언젠가 네놈의 성을 사그리 불태우고, 가문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빠드득!”
 
 @
 
 아이작 프롬은 5월의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잎이 넓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바람이 실어다주는 온갖 자연의 향기에 취해 그는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흐읍! 하아!”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가 다시 내뱉기를 수차례, 아이작 프롬의 입가에 그려졌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도 평화로워, 준전시상태를 상시 유지하고 있는 영지의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이작 프롬은 팔베개를 하고,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진녹색의 넓은 나뭇잎들 사이로, 정오의 태양이 반짝이며 아이작의 눈을 쪼아댔다.
 “아! 좋다! 여기서 이러고 평생 살았으면…….”
 쏴아아!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아이작의 온 몸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아이작은 누운 채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높고 긴 성벽이 보였고, 그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을 영지민들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이작이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하루를 아옹다옹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힘든 생활에 비한다면, 자신의 삶이 너무 편하고 또 풍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플러타너스 나무에게 말을 걸었다.
 “큰 잎 나무야.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뿌드드드!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굵은 나뭇가지들이 조금씩 흔들리면 묘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아이작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나무의 목소리 같았다.
 아이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무의 따뜻한 마음이 은근히 전해오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이작이 갑자기 허공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을 쓰며 말했다.
 “윈드 블로우!”
 그의 손길에 따라 공간이 살짝 일렁이더니 산들바람이 일어나 불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건 분명히 마법이었다.
 아이작은 분명히 동방의 검술스승으로부터 비기를 익혔고, 그 때문에 마나홀이 활성화되어 마법은 배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작이 갑자기 안색을 찌푸리며 가슴을 문질렀다. 은은한 통증을 느낀 탓이다.
 잠시 후,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아리하게 퍼져 나오던 통증이 사라졌다.
 아이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 이제 겨우 마나써클을 만들었으니 아직은 조심해서 사용해야겠다. 자칫 무리하다가는 심장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만약 아이작의 마법스승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기겁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랫배에 활성화된 마나홀을 지닌 채 심장에 마나써클을 만든 일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이작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냈고, 지금은 아주 조금이나마 마법을 쓰는 것도 가능한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등을 깔고 누워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저쪽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작! 아이작 프롬!”
 아이작이 몸을 일으켜 세워 그쪽을 바라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아이작이 누워 있던 언덕 아래쪽에서 단아한 얼굴의 중년여인이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한쪽 팔에는 큼직한 피크닉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지 꽤나 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이 얼른 달려가 그걸 받아들었다.
 “어머니. 이게 뭐죠? 힘들게 이까지 왜 들고 오셨어요?”
 나타난 여인은 아이작의 어머니인 프롬 자작부인이었다.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대답했다.
 “휴! 네가 또 점심을 거르고 혼자 청승떨고 있는 것 같아 이 엄마가 직접 왔지.”
 “그럼 도시락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
 “그래. 어서 먹어라. 배고플 텐데.”
 “고맙습니다, 어머니.”
 아이작은 어머니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한 후,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자리를 깔았다.
 아이작이 피크닉 바구니를 열자 우유병과 먹음직한 샌드위치 세트가 들어있었다.
 “우와!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이작은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잠시 후, 두 모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드러누워 플라타너스 나무그늘이 주는 작은 은혜를 마음껏 즐겼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아이작이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더니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형이 돌아와서 기쁘시죠?”
 “그야 물론이지. 넌 어때?”
 “저도 좋아요. 형이 타이탄 라이더가 되었다니, 정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고맙긴요? 당연한 걸 가지고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호호, 착한 녀석. 이 엄마는 네 형보다 네가 더 좋단다.”
 “에이, 설마요! 잘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얘가! 무슨 소리니? 이 엄마가 설마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 아뇨! 그렇다는 게 아니라…….”
 자작부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작! 네 아버지가 네게 좀 심하게 대했던 건 이 엄마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형을 좀 지나치게 아끼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아버지가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란다. 그리고 그건 이 엄마도 마찬가지야.”
 “후후, 알아요. 제가 왜 그걸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미안해요. 아버지와 어머니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얘야.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말거라. 넌 이미 이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란다.”
 “헤헤, 어머니도 제게 자랑스러운 어머니세요.”
 아이작이 혀를 살짝 빼물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자작부인이 그런 막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두 뺨을 손가락으로 잡고 흔들었다.
 그때, 멀리서 다급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땡땡땡!
 아이작과 그의 어머니가 안색을 굳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종소리는 영지에 급박한 일이 생겼을 때 울리는 경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프롬 자작령에서 경보가 울릴만한 일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드물게 일어나는 대형 몬스터의 출현이거나, 아니면 이웃영지인 샤르망 남작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했을 때였다.
 아이작은 피크닉 바구니를 그냥 내버려둔 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성을 향해 뛰었다.
 어떨 때에는 하루를 멀다 하고 울리는 경보였지만, 오늘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아이작의 뇌리를 스쳤다.
 한 달 전에 보여주었던 타이탄 기동전술훈련이 샤르망 남작에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꽝!
 체스터 성의 군주 윌터 프롬 자작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덕분에 자작령과 샤르망 남작의 영지가 전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큰 지도의 한 귀퉁이에 주먹 자국이 생겼다.
 윌터 프롬 자작이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으드득 갈아 붙였다.
 “챔버 요새를 불태우고, 병사는 물론 여자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몰살시켰단 말인가? 샤르망의 타이탄이?”
 그의 앞에 서 있던 몇몇 기사들 중, 온 몸을 피로 칠갑을 하고, 곳곳에 패여 나가거나 우그러진 갑옷을 입은 기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영주님.”
 금방 피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죽는 게 기사로서의 의무이자 미덕이지만, 그는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적의 침입을 군주에게 알려야 하는 전령으로서의 의무가 그에게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놈들이 아직도 그곳을 점령하고 있단 말이지?”
 “제가 빠져나올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몇 기의 타이탄이 공격해 왔더냐?”
 “제가 본 건 모두 4기였습니다.”
 “기종은?”
 “워리어 3기와 렌서 1기였습니다.”
 자작이 무거운 신음성을 흘렸다.
 “음. 붉은 학살자……. 그 놈도 있었겠구나.”
 “그, 그렇습니다……. 부, 분명히 보았습니다. 요새의 방벽을 깨뜨리고 안으로 난입한 후,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여, 여자와 아이들을 바, 발로 짓이기고…….”
 “그만! 알았으니 되었다. 너는 가서 부상을 치료해라.”
 “아닙니다. 다시 싸우러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영주님.”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보다 중요한 게 있다. 그건 바로 동료의 복수다. 상처부터 치료한 후, 복수의 길을 찾아라.”
 영주의 말에 기사가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크흑! 아, 알겠습니다. 영주님.”
 병사 둘이 들어와 그를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윌터 자작은 눈을 감고 분노를 삭였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격동했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4기의 타이탄을 출동시켰다면 놈에게 남은 타이탄은 2기. 설사 양동작전을 구사한다 해도, 대응이 가능하다. 더구나 붉은 학살자, 놈이 그곳에 있다고 했으니…….’
 자작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샤르망 남작의 타이탄들 중 가장 강력하며, 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놈이 바로 붉은 학살자로 불리는 나이트급 워리어 타이탄이었다.
 윌터 자작은 오늘이야말로 붉은 학살자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살육이 주는 희열에 취해 마음껏 즐기고 있으려무나. 곧 이 손으로 네놈의 목을 따주마.’
 마침내 뭔가 결정을 한듯 윌터 자작이 주위에 있던 기사들 몇 명을 지목하며 이름을 불렀다.
 “놀란, 로이드, 드라다.”
 윌터 자작에게 지목당한 기사들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예! 영주님.”
 “너희들이 나와 함께 출동한다.”
 “알겠습니다.
 자작의 아들인 라니언 프롬은 자신이 호명되지 않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윌터 자작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성을 지켜라. 양동작전일 가능성이 있다.”
 “제 타이탄이 가장 빠릅니다.”
 “그러니 여기 있으라는 것이다.”
 라니언 프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작의 말에 실린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작의 말이 이어졌다.
 “네 어머니와 동생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라니언 프롬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윌터 자작은 그길로 일어나 타이탄 오너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두두두두!
 그들이 탄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모습을 망루위에서 지켜보던 라니언 프롬이 소리쳤다.
 “모두 일급 비상경계에 들어간다. 마탑에 알려 타이탄 접근경보 마법진을 재점검하고 범위를 최대한 확장시키라고 알려라.”
 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한 후, 마탑으로 달려갔다.
 땡땡땡땡!
 잠시 후, 요란한 종소리가 마탑에서 울려 퍼졌다.
 라니언 프롬이 무거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접근경보 마법진이 성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까지 활성화 되었다. 이제 타이탄은 물론, 이공간 봉인아이템을 지닌 타이탄 오너조차도 들키지 않고 성으로 진입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타이탄이 갓 만들어졌던 300년 전에는 이런 마법진이 없었다. 따라서 적대관계에 있는 왕국의 도시에 타이탄 오너가 숨어들어간 후, 갑자기 타이탄을 소환해 휩쓸어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기사도는 땅에 떨어졌고, 암투와 기습이 난무했으며, 대량의 양민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수많은 도시들이 유령화 되어 텅 비었고, 대타이탄 방어가 가능한 수도와 영주의 성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방은 황폐화되었고, 곳곳에 몬스터가 들끓기 시작했다. 때문에 모든 왕국은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후, 대마법사 피콜리니가 때마침 타이탄의 존재와 이공간 봉인아이템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진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인간들의 사회는 그때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타이탄을 이용한 급습의 효과가 반감되었고, 재빨리 출동한 상대국의 타이탄들에게 포위되어, 오히려 기습했던 타이탄들이 파괴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타이탄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런 손실은 뼈아픈 것이었다.
 그와 함께 타이탄 오너들의 인식 자체도 도시나 성에 대한 급습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은 그런 기습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타이탄의 가공할 위력을 생각한다면 도시나 성의 방어에 만전을 기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불공대천의 원수인 샤르망 남작의 영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었다.
 라니언 프롬은 멀리 언덕 쪽에서 성문을 향해 뛰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와 아이작이…….’
 그가 재빨리 내려가 말을 탄 후, 빈 말 한 필을 더 이끌고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데려왔다.
 “아이작! 어서 어머니와 함께 내성으로 들어가라.”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인 후, 어머니와 함께 자작가가 있는 내성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라니언 프롬은 다시 성벽 위 망루로 올라갔다.
 마탑에서 그제서야 마법사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와 성문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본 라니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삐죽 솟아있는 거대한 마탑으로 향했다.
 ‘저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늑장을 부린단 말인가. 쯧쯧쯧.’
 마법사들이 성벽위에서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자, 타워실드를 든 방패수들이 그들의 주위를 철저히 감쌌고, 그 뒤쪽으로는 궁수들이 자리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는지 검과 방패를 들고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기사들이 지켰다.
 타이탄에 비할 수는 없지만 워메이지의 전술적 가치는 꽤나 컸다. 워메이지는 적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동시에, 상대편 워메이지의 마법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워메이지들이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한 라니언의 시선이 다시 성 바깥을 향했다.
 
 두두두두!
 네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윌터 자작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체스터 성이 가물거리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성에 남아있는 가족과 주민들이 걱정되었다. 아처 2기와 레인저 1기만을 성에 남겨두고 온 게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챔버 요새까지 밀고 들어온 샤르망의 타이탄, 특히 붉은 학살자라 불리는 워리어급 타이탄을 파괴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까웠다.
 윌터 자작은 이를 악물고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
 네 필의 말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체스터 성에서 멀어져 갔다.
 잠시 후, 말이 달리느라 일으킨 먼지가 가라앉고 나자 근처 숲속에서 다섯 명의 기사들이 말을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경장 차림을 한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날개를 펼친 가고일의 모양이 작게 음각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샤르망 남작가의 문장으로, 타이탄 오너에게만 수여되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그들 중, 긴 은색머리를 기른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후후후, 윌터 자작! 네놈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잿더미가 된 집과 가족들의 시체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군.”
 그의 곁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베란 백작에게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 다행입니다.”
 순간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빠드득! 놈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들 앞에서 한 달이나 알랑거린 생각을 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이제 분을 그만 삭이십시오. 덕분에 4기의 타이탄을 빌려 양동작전을 구사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프롬 자작가를 사그리 밟아주면 기분이 꽤 풀리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흐흐흐.”
 그의 시선이 천천히 체스터 성을 향했다.
 마치 맛 좋은 먹잇감을 앞둔 육식동물처럼, 짙은 살기가 파브리스 로이드의 두 눈에서 흘러나왔다.
 파브리스 로이드.
 샤르망 로이드 남작의 장남이며, 작위계승 1순위에 올라있는 로이드 남작가의 입지적인 인물이다.
 10여 년 전, 1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타이탄 오너로서의 자격을 취득했다. 그가 졸업할 당시, 토루카의 왕립 기사단이 러브콜을 했을 정도로 천재적인 타이탄 운용능력을 지녔다.
 지금은 붉은 학살자라는 이름으로, 나이트급 타이탄 중에서 비교적 거구에 속하는 워리어 유닛의 오너로 더욱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 챔버 요새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체스터 성과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 숲속까지 다가와 있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웠다.
 파브리스가 체스터 성을 향해 말의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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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루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라니언 프롬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멀리서 한 떼의 기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서 오는 자들인가?”
 그는 병사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한 후, 그들을 계속 주시했다.
 마침내 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올 무렵, 갑자기 마탑의 꼭대기에서 밝은 빛과 함께 붉은 색의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라니언 프롬이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마법진이 타이탄과 이공간 봉인 아이템을 감지한 것이다.
 멀리서 다가오던 기마들이 점차 속도를 늦추더니, 말에서 네 명의 기사들이 뛰어내렸다. 그들의 발이 땅을 딛기 무섭게 뒤쪽에서 검은 이공간이 입을 벌리더니, 거대한 강철의 거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라니언이 자세히 살펴보니 워리어 유닛 3기와 랜서 유닛 1기였다.
 그런데 워리어 1기의 외장갑이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다른 워리어 유닛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세상에 저런 특징을 지닌 워리어 유닛은 흔하지 않다.
 라니언 프롬의 입에서 신음성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붉은 학살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챔버 요새에서 살육에 취해 있어야 할 붉은 학살자가 시공을 건너 뛴 듯 체스터 성 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설마 챔버 요새를 습격한 타이탄은 붉은 학살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라니언은 더 이상 그런 생각에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가장 빠른 말과 전령을 보냈다. 아버지와 기사들의 말머리를 다시 돌려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타이탄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며 시간을 끌어야 했다.
 라니언은 의외로 침착한 표정이었다. 적 타이탄 4기가 코앞서 소환되었지만 조금도 두려운 표정을 짓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타이탄이라고는 해도 워메이지와 아처 유닛 2기가 버티고 있는 성에 접근해 성벽을 허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라니언이 이를 갈았다.
 “그래! 다가오기만 해라. 아처의 화살맛을 보여 줄 테니.”
 라니언이 성벽 위 저쪽 편에 있던 타이탄 오너들에게 손짓을 했다. 곧이어 두 개의 이공간이 입을 벌리더니 타이탄 2기를 토해냈다. 바로 아처 유닛이었다.
 아처 유닛 2기는 서로 10여 미터 떨어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긍! 위이잉! 철컹!
 두 개의 지지대가 아처의 앞뒤에서 뻗어 나와 바닥에 단단히 틀어박혔다.
 라니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도 타이탄을 소환했다.
 비잉!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날렵하게 생긴 레인저 유닛이 이공간을 열고 나왔다.
 라니언은 타이탄 머리 위로 훌쩍 뛰어올라 후면에 열려 있는 탑승구 속으로 들어갔다.
 위잉! 철컹!
 기계음과 함께 탑승구가 닫혔고, 곧이어 레인저 유닛의 두 눈이 노랗게 빛났다.
 성을 향해 다가오던 적 타이탄들이 멈추었다. 정확히 아처의 사정관 밖이었다.
 라니언의 타이탄이 성벽 위에 우뚝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뭐가 두려운 거냐? 어서 다가와라!’
 라니언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적 타이탄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불리한 것은 그들일 것이었다. 머지않아, 전령이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성을 떠났던 타이탄 오너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니 말이다.
 그때, 붉은 학살자를 비롯한 3기의 타이탄들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선 랜서 유닛 한기를 선두에 세우고, 그 뒤에 붉은 학살자를 포함한 워리어 유닛3기가 일렬로 서서 등 뒤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성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라니언의 눈이 커졌다.
 “저건 일자공격대형! 놈들이 랜서 유닛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성에 접근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라니언이 성벽 위의 아처 유닛을 향해 다급한 마법통신을 날렸다.
 [놈들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면 곧바로 공격하세요!]
 [알겠습니다.]
 [예. 소영주님.]
 곧이어, 아처 유닛들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끼기기기!
 거대한 활이 유선형으로 휘어지며 강력한 힘이 시위로 집중되었다.
 곧이어 ‘텅’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슈아아악!
 퍼벅!
 아처의 화살 2발은 정확히 랜서유닛의 타워실드에 박혀들었다.
 그 정도의 충격이라면 아무리 랜서유닛이라고 해도 뒤로 나뒹굴고 말 충격이었지만, 의외로 잘 버티고 서 있었다.
 역시 라니언이 걱정하던 대로였다. 일자공격진형은, 아처가 버티고 있는 성을 공격하기 위해 아군의 타이탄 한기를 방패로 삼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전술이었다.
 상대가 이 전술로 나온다면, 아군이 직접 성 밖으로 나가 진영을 흩뜨려놓지 않는 한 아처의 화살이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또 다시 날아간 화살 2발이 랜서의 타워실드에 박혔다. 그런데 이번의 것은 훨씬 강력해 실드를 뚫고 랜서 본체까지 파고 들어갔다.
 그 충격에 랜서의 발걸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바로 뒤에 있던 타이탄이 랜서를 부축한 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었다.
 라니언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자신이라도 나가서 상대의 대형을 흩뜨려 놓아야 했다.
 텅!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벽을 박찬 라니언의 레인저 유닛이 높이가 10여 미터나 되는 성벽을 그냥 뛰어내렸다.
 쿵!
 엄청난 소리와 함께 타이탄의 발목이 땅속으로 푹 박혀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가볍게 빠져나와 자세를 잡았다.
 라니언의 타이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더니 적 타이탄에게 다가갔다.
 일자대형을 짓고 있던 적 타이탄들이 그제서야 멈추었다. 상대 타이탄이 나온 이상 그들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니언의 타이탄이 적 타이탄 20여 미터 앞에서 멈추었다.
 타이탄에게 있어 20미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만약 워리어 유닛이 도약해 검을 휘두른다면, 채 1초도 걸리지 않아 사정권에 들어올 것이었다.
 하지만 라니언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워리어나 랜서 유닛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레인저 유닛의 민첩함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는 레인저 유닛을 보유하지 않았다.
 라니언의 목소리가 확성마법을 통해 타이탄으로부터 울려나왔다.
 “샤르망의 개들!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찾아왔느냐?”
 거대한 워리어 유닛, 붉은 학살자가 일자대형의 가장 후미에서 옆으로 나왔다. 대담하고 자신감에 찬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쿵!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검붉은 타이탄의 색체가 주는 강인한 위압감에 라니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곧이어 붉은 학살자의 목소리도 확성마법을 통해 울려나왔다.
 “라니언 프롬. 윌터 자작의 장남이며, 최근 레인저 유닛의 오너가 된 애송이. 후후, 맞느냐?”
 라니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상대의 조롱과 도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붉은 학살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자작의 아들이면 나와 대화가 좀 통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군. 하지만 상관없지. 이제 곧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히게 되면 내 머릿속에서 네놈이 존재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질 테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프롬 자작가의 존재 자체가 깨끗이 지워질 지도 모르지. 후후후.”
 라니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라니언 프롬은 오늘 신께 맹세컨대, 네놈은 물론 더러운 로이드라는 성을 가진 모든 인간들을 이 지상에서 말살시켜버리고 말겠다.”
 차가운 목소리가 붉은 학살자의 동체에서 흘러나왔다.
 “네놈에게 그럴 능력이, 아니 기회조차 있을지 의문이구나. 그런 말은 지옥에 가서 지껄이도록 해라!”
 붉은 학살자가 다시 동료 타이탄의 후미에 따라붙었다.
 타이탄의 일자대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니언의 존재를 의식해서인지 무척 조심스러웠고, 아처의 화살공격은 물론, 라니언을 극도로 경계했다.
 라니언의 레인저가 그때 움직였다.
 그의 레인저 유닛은 무서운 속도로 옆으로 튀어 나가더니 왼손에 장착된 소형 석궁을 발사했다.
 파바바밧!
 쿼렐이 연사되자 워리어들이 라운드 실드를 들어 중요부위를 가렸다.
 몇 개의 쿼렐이 라운드 실드에 막혀 튀어나갔지만, 한두 개씩은 각각의 워리어 유닛의 동체에 꽂혔다.
 그러나 워리어 유닛의 외장갑은 두껍고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석궁의 쿼렐이 외장갑에 꽂히기는 했지만 본체까지 관통하기에 약했다. 더구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방패로 가리고 있었기에 워리어 유닛들은 거의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움직였다.
 라니언은 검을 빼들었다. 워리어 유닛의 대검에 비하면 절반의 크기와 무게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오너의 능력에 따라 오러의 힘이 더해진다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텅!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붉은 학살자가 대열을 이탈해 뛰쳐나왔다.
 라니언은 압도적인 덩치와 무게를 바탕으로 차지공격을 감행해오는 붉은 학살자를 피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가가각!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와 붉은 학살자의 거대한 동체가 레인저가 서 있던 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였다.
 기기기깅!
 붉은 학살자가 천천히 동체를 돌렸다.
 왼쪽 어깨부분의 외장갑에 약간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레인저가 스쳐 지나가며 휘두른 검에 베인 흔적이었다.
 이처럼 워리어의 차지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검을 휘두르는 기술은 라니언의 특기였다.
 이 기술은 높은 레벨의 실력자들이나 쓸 수 있는 고급 기술로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초급자가 사용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라니언이 검술에 있어서 얼마나 뛰어난 자질과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붉은 학살자의 동체에서 파브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술은 제법이구나. 하지만! 후후……. 상대를 잘못 골랐다.”
 텅!
 또다시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워리어 유닛의 차지공격이 다시 쇄도했다.
 라니언은 몸을 약간 굽혀 검을 옆으로 늘어뜨렸다.
 폭발적인 힘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이상적인 자세였다.
 붉은 학살자의 동체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었다.
 라니언의 타이탄이 막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갑자기 붉은 학살자의 동체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췄다.
 그의 우측 다리가 앞으로 뻗어 나온 채 땅 속에 무릎까지 파묻혀 있었다. 10톤이 넘는 거구를 일순간에 멈추기 위해 발휘된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라인언의 레인저는 미처 검을 채 휘두르지도 못하고 좌측으로 물러섰다.
 그 순간, 붉은 학살자가 다시 땅을 박찼다.
 텅!
 가공할 속도로 돌진해오는 워리어의 차지공격에 정면으로 부딪치고도 무사할 수 있는 레인저 유닛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니언은 마나를 있는 데로 끌어올려 마정석에 불어넣었다.
 기이이잉!
 순간 최대출력을 발휘한 레인저의 동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우측으로 멀어졌다.
 그 순간, 코앞까지 다가왔던 붉은 학살자가 대검을 휘둘렀다.
 위잉!
 공간이 통째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거기에 정면으로 걸려들었다면 레인저 유닛은 단번에 두 동강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라니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워리어 유닛 자체가 지닌 가공할 힘과 파괴력은 기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더 있는 듯 했다.
 붉은 학살자는 더 이상 라니언을 추격하지 않았다. 레인저 유닛이 작정을 하고 도망치려고 하면 워리어 유닛으로는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라니언의 레인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그때, 엄청난 굉음이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꽝!
 샤르망 남작의 랜서와 워리어 타이탄이 일자대형을 형성한 곳이었다.
 체스터 성벽 위에 있던 아처가 발사한 화살들이 랜서의 방패를 뚫고 들어가 팔을 파고들었다.
 랜서 유닛은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두 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왔다.
 3미터의 길이에, 팔뚝만큼 굵은 화살에 실린 힘은 막강하다. 강철로 만들어진 마차가 수십 미터나 날아가 버릴 정도의 파괴력이 그 안에 숨어있다.
 투깡!
 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 개의 화살이 랜서의 방패를 뚫고 깊숙이 박혔다. 뒤에서 2기의 워리어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충격이었다.
 이번에는 타격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패를 뚫은 화살이 랜서의 외장갑까지 꿰뚫고 본체에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그그긍!
 랜서의 움직임이 불안정해졌다. 이제 한두 번의 화살공격을 더 받는다면, 완전히 작동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었다.
 뒤에서 랜서를 부축하고 있던 워리어 유닛이 랜서의 양 팔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렌서를 완전히 방패로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라니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건 아군 타이탄은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는 오너의 생사까지 염두에 두지 않은 행위였다.
 투깡! 투깡!
 몇 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었고, 화살들은 랜서의 방패를 관통해 본체까지 파고들었다.
 랜서 타이탄 유닛은 완전히 작동불능에 빠졌고, 오너의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워리어 유닛은 렌서의 팔을 놓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싸웠을 동료를 계속해서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진격했다.
 라니언의 마음이 급해졌다.
 근접전에서 취약한 아처 유닛이 워리어 2기와 맞선다는 건 재앙이었다.
 성벽 위에서 굵은 불덩어리가 날아왔다. 워메이지들이 본격적으로 마법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땅이 뒤집어지고 나무뿌리들이 뻗어 나와 타이탄의 다리를 휘감기도 했다.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긴 창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타이탄의 동체를 두드렸다.
 화려한 불꽃이 타이탄의 동체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어떤 마법도 타이탄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강력한 대마법방어진이 새겨진 타이탄의 동체를 뚫고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건 같은 타이탄뿐이었다.
 라니언의 레인저 유닛이 쏜살같이 움직이며 워리어 유닛들을 교란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붉은 학살자의 차지공격을 받아야 했다.
 라니언은 더 이상 타이탄들이 성벽에 접근하는 걸 멈추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즉시 마법통신으로 아처유닛에게 연락을 취했다.
 [접근전에 대비하십시오. 더 이상 적의 접근을 차단할 수 없습니다.]
 곧이어 기계음과 함께 아처 유닛은 지지대를 집어넣고 라운치 모드(Launch Mode : 발사모드)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철커덩! 위잉! 그긍!
 근접 전투모드로 돌입한 아처의 왼쪽 팔에서 넓은 절편이 삐죽 솟아나더니 부채살처럼 퍼져 라운드 실드를 형성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기러기의 날개처럼 휘어진 거대한 화살의 끝부분을 잡고 시위가 안쪽으로 항하도록 했다.
 실제로 아처는 근접전에서 활을 검처럼 휘둘렀고, 시위부분이 검날의 역할을 했다. 두껍고 질긴 시위에는 특수한 마법까지 걸려 있어, 워리어 유닛의 대검에 못지않은 날카로움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자, 랜서를 앞세우고 달리던 워리어들이 그제서야 방패막이로 쓰던 랜서를 놓고는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쿵쿵쿵쿵!
 타이탄의 육중한 발걸음소리가 평원을 울리더니 마침내 엄청난 굉음이 성벽에서 터져 나왔다.
 꽈꽝!
 10톤이 넘는 워리어 두기의 차지공격에 성벽이 크게 흔들렸다. 타이탄의 공격에 대비해 워낙 튼튼하게 지어진 성벽이라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비틀거릴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워리어 유닛들이 성벽에서 조금 물러나더니 다시 성벽으로 돌진했다.
 꽝! 꽈광!
 크고 단단한 돌로 쌓아올린 성벽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이번에는 워리어가 주먹으로 성벽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꽝! 꽝! 꽝!
 성벽은 타이탄의 주먹 아래에서 사정없이 으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타이탄들의 머리 위로 워메이지의 마법공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땅이 뒤집히고 화염이 폭발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마법공격도 타이탄의 주먹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평원에서 붉은 학살자와 맞서 있던 라니언은 적 타이탄들이 성벽에 큰 구멍을 뚫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라니언은 붉은 학살자를 따돌리지 않고서는 아처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처가 워리어와 근접전을 펼쳐 이길 수 있을 확률은 40%미만이다. 내가 도우지 않으면 끝장이야.’
 라니언은 성을 등지고 서 있는 붉은 학살자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후후후. 애가 타는 모양이지? 어때? 나와 일대일로 겨뤄 보는 것이? 어차피 내가 비켜주지 않으면 아처를 도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라니언의 레인저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들었다.
 깡! 까강!
 붉은 학살자의 대검과 레인저의 소검이 불똥을 튀기며 부딪쳤다. 귀가 멍할 정도의 쇳소리가 평원을 울렸고, 이따금 레인저의 왼팔에 장착된 석궁에서 쿼렐이 발사되는 소리까지 들렸다.
 싸움은 치열했다. 레인저는 빠르고 날쌔게 움직이며 워리어를 압박했고, 워리어는 강력한 차지공격과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레인저를 단칼에 베어버리려 했다.
 붉은 학살자의 외장갑에 수많은 상처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동체에 꽂힌 쿼렐도 다섯 개가 넘었다.
 하지만 붉은 학살자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움직였다. 상처는 붉은 학살자가 많이 입었지만, 오히려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하는 건 라니언의 레인저였다.
 워리어의 단 일검에 자신의 타이탄이 작동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라니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던 중,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두 기의 워리어가 마침내 성벽을 허물고 그 안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레인저의 눈을 통해 라니언에게 전해졌다.
 라니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처가 입게 될 피해도 걱정스러웠지만, 병사와 주민들 그리고 내성에 피해 있는 가족을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라니언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는 동화율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타이탄의 동체 전체에 새겨져 있는 뉴런활성화(Neuron Activate) 마법진에 마정석의 기운이 급속도로 주입되었다.
 60%를 오락가락하던 동화율이 70%까지 치솟았다.
 타이탄의 센서를 통해 보고 느끼던 감각들이 더욱 현실화되면서 마치 타이탄을 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덕분에 타이탄의 움직임에 대한 통제와 제어 능력은 증가되었지만, 반대로 물리적 타격을 받았을 때 느끼는 고통의 강도도 더욱 강해졌다.
 이처럼 동화율(싱크로나이징 레이트:Synchronizing Rate)은 양면의 날을 지닌 검과 같다. 올릴수록 강해지지만 타격을 받았을 때 느끼는 고통도 커지며, 마나소모량도 증가한다.
 라니언의 레인저가 더욱 빨라진 움직임으로, 정교한 검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붉은 학살자가 순식간에 수세에 몰리더니 외장갑 곳곳에 깊은 칼자국이 새겨졌다.
 라니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체스터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붉은 학살자가 잔뜩 웅크렸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때 흘러나왔다.
 “후후, 동화율을 끌어올렸나 보군. 급하기도 했겠지. 하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붉은 학살자의 동체가 라니언의 뒤를 따라 체스터 성을 향했다.
 체스터 성 안으로 진입한 라니언은 워리어 유닛을 상대로 악전고투 하고 있는 아처들의 모습을 보았다.
 파워와 장갑의 강도에서 애초에 아처는 워리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처가 강한 것은 원거리에 있을 때였고, 이처럼 근접전에서는 워리어 유닛이 최강이었다.
 라니언이 가세하자 수세에 처해 있던 아처들의 숨통이 터였다. 붉은 학살자는 성 안으로 진입한 후, 웬일인지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구경만 했는데, 그게 오히려 라니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두 기의 워리어 유닛을 상대로 아처 2기와 라니언의 레인저 1기는 잘 싸웠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레인저와 아처의 약한 장갑으로는 워리어 유닛의 저돌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처들의 외장갑이 많이 파괴되었고, 이제 본체에까지 타격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레인저 유닛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급격히 끌어올린 동화율 때문에 라니언은 더욱 큰 고통을 받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때,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붉은 학살자가 마침내 움직였다.
 라이언은 순간 긴장했다. 이 상황에서 붉은 학살자까지 가세하게 된다면, 아군 타이탄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짧아질 것이었다.
 워메이지들의 마법공격이 붉은 학살자를 향했다.
 붉은 학살자에게 마법공격은 귀찮게 달라붙는 모기의 성가심 정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라운드 실드나 외장갑으로 그냥 마법공격을 퉁겨내면서 그가 움직인 방향은 내성이었다.
 라니언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내성은 자신의 가문, 즉 가족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붉은 학살자가 들이닥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급히 몸을 빼 붉은 학살자를 저지하려 했지만, 상대 타이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를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워리어 2기가 작정을 하고 길을 차단하고 나서자 라니언의 레인저로서도 쉽게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상대 워리어 2기가 레인저를 가로막느라 허점을 보이는 사이, 아처들이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깡! 까강!
 워리어 유닛의 외장갑이 깨져 파편처럼 튀어나갔다.
 가볍지 않은 타격이었지만 그래도 워리어는 라니언의 레인저를 계속 잡고 늘어졌다.
 초조해진 라니언이 소리쳤다.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이놈들아!”
 붉은 학살자가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주위의 집들을 몸통으로 쓸어버리며 내성을 향해 달려갔다. 집안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의 파편처럼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라니언은 눈이 뒤집어지는 듯 했다.
 건물 수십 채를 쓸어버린 붉은 학살자가 내성의 문을 들이받았다.
 꽝!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문이 움푹 들어갔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꽝! 꽈광!
 붉은 학살자의 차징은 계속되었고, 굉음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일부 용감한 기사와 병사들이 화살을 날리고 창을 던지기도 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쿠앙! 우당탕!
 결국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내성의 정문이 뒤로 넘어갔다.
 붉은 학살자는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병사들을 무시하고, 중장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돌격해오는 용감한 기사들을 밟거나 방패로 쳐서 날려버렸다.
 거대한 나이트급 워리어 유닛의 발길을 막을 수 있는 건 내성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붉은 학살자는 마침내 내성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프롬 자작가에 도착했다.
 2, 3백여 명의 용감한 기사와 병사들이 창과 칼을 치켜든 채 입구를 막고 있었다.
 워리어 유닛 안에 탑승해 있던 파브리스 로이드가 그 모습을 보고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무슨 영웅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타이탄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용감한 기사라……. 이야기꺼리로는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끔찍하지.”
 붉은 학살자가 대검을 들어올렸다.
 길이만 해도 3미터, 무게는 500키로가 넘는 강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슈앙!
 마치 태풍이 부는 듯한 바람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 10여 명이 이 한 번의 칼질에 사방으로 날아갔다.
 붉은 학살자는 그래도 대열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각난 병사들의 신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졌고, 그들이 흘린 피로 땅이 젖었다. 끔찍한 살육과 파괴의 현장이었다.
 때마침 달려온 라니언의 타이탄이 아니었다면, 병사들은 몰살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놈!”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라니언의 레인저가 검을 휘둘렀다.
 슈악!
 붉은 학살자가 방패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쿠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붉은 학살자의 방패가 반이나 박살나 날아갔다.
 붉은 학살자가 급히 물러섰다. 레인저 유닛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선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라니언의 레인저는 어느새 병사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왼팔에 장착되어 있던 석궁은 부서졌고, 주요부위의 외장갑들도 성한 것이 없었다. 마치 거대한 분쇄기에 빨려 들어갔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두 눈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 학살자의 동체에서 파브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화율을 치사량까지 끌어 올렸구나. 그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고 받아 주지.”
 텅!
 땅을 박차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붉은 학살자가 앞으로 달려갔다.
 쿵쿵쿵쿵!
 라니언의 아처는 점차 확대되어 오는 붉은 학살자의 동체를 쳐다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피했다가는, 뒤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라니언은 붉은 학살자의 차지공격을 몸으로 받았다.
 쿠왕!
 엄청난 격돌음과 함께 라니언의 레인저가 붉은 학살자의 동체를 가슴으로 받은 채, 땅에 두 개의 고랑을 파며 뒤로 밀려났다.
 레인저의 관절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삐꺼덕거렸고, 안에 탑승해 있던 라니언은 가슴이 함몰되는 듯한 충격에 피를 토했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버텼다.
 우드드드드!
 가슴의 외장갑이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안으로 밀려들었다.
 “아아아악!”
 지독한 고통에 라니언이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컸던지 거의 밀폐된 타이탄의 내부에 있던 그의 고함소리가 바깥에까지 울려나왔다.
 붉은 학살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라니언의 타이탄이 붉은 학살자의 어깨에 붙어 늘어졌다. 밝게 빛나던 레인저의 두 눈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붉은 학살자가 한 손으로 레인저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레인저는 더 이상 반항할 힘도 없는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붉은 학살자가 레인저를 집어던졌다.
 꽝!
 레인저가 자작가의 벽에 부딪치자 벽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고 말았다.
 붉은 학살자가 서서히 다가갔다.
 기사와 병사들이 용감하게 붉은 학살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붉은 학살자가 거대한 발을 들어 올려 자신의 앞을 막아선 병사들을 짓밟으려는 순간, 자작가 안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둬!”
 붉은 학살자의 시선이 허물어진 자작가의 벽 안쪽을 향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소년이 레인저의 머리 부분을 감싸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붉은 학살자를 분노에 찬 눈길로 노려보더니 다시 레인저를 향해 소리쳤다.
 “형! 죽으면 안 돼! 형!”
 붉은 학살자가 그 순간 들었던 발을 내렸다.
 병사 한 명이 그 아래 깔려 납작해졌다.
 붉은 학살자는 보란 듯이 두 팔을 휘저었다.
 크악! 악!
 비명이 잇달아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수십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붉은 학살자가 온 몸을 병사들의 피로 물들인 채, 과연 학살자다운 모습으로 레인저 앞에 나타났다.
 “형이라……. 그렇다면 네 녀석이 바로 자작가의 둘째 아들인 아이작 프롬이겠구나.”
 아이작이 붉은 학살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 아마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붉은 학살자에 탑승해 있던 파브리스는 백 번도 넘게 죽었을 것이었다.
 “후후,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프롬 자작가의 벌레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는데, 굳이 찾지 않아도 제 발로 나와 주는구나. 헌데, 네놈의 어미는 어디 있지?”
 아이작이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파브리스가 다시 말했다.
 “입을 열지 않겠다? 좋아. 그럼 자식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도 나오지 않는지 두고 보자.”
 붉은 학살자가 서서히 다가들더니 레인저의 다리를 힘껏 밟았다.
 우지직!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레인저의 발목이 짜부라졌다.
 레인저의 동체 안에서 또다시 비명이 들렸다. 라니언이 고통을 참지 못해 지르는 비명이었다.
 지금 그는 타이탄과 동화율을 최고치까지 끌어올린 상태였고, 따라서 타이탄이 받는 충격이 고스란히 몸에 느껴졌던 것이다.
 아이작이 소리쳤다.
 “그만! 그만 해! 어머니는……. 어머니는 이미 기절하셨단 말야!”
 “후후, 자작부인께서 기절을 하셨다? 그럼 제 발로 나오긴 틀렸군. 좋아! 자작가 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주지. 그럼 그 중에 자작부인도 포함되겠지?”
 붉은 학살자가 거대한 대검을 들어올렸다.
 “우선 네놈부터 처리해 주마.”
 대검이 무서운 속도로 아이작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콰직!
 아이작의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의외로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아이작이 눈을 떴다.
 자신의 코앞에 붉은 학살자의 대검이 꽂혀 있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이건……. 혀, 형!”
 아이작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검이 레인저의 가슴을 뚫고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붉은 핏물이 레인저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랗게 반짝이던 눈빛도 서서히 꺼졌다.
 아이작이 소리쳤다.
 “형!”
 붉은 학살자가 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는 아이작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거대한 타이탄 한기가 나타나 자작가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작의 두 눈이 커졌다. 달려오는 타이탄의 익숙한 외형은 그가 죽어서라도 잊을 수 없는 그의 가문의 것이었다. 바로 아이작의 아버지인 윌터 프롬 자작의 워리어였다.
 붉은 학살자가 멈칫 하더니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은 순간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는 심장의 마나써클을 순환시켰다.
 “슬라이드!”
 붉은 학살자가 아이작을 향해 막 검을 내리치려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덕분에 그의 검은 아이작의 옆에 떨어졌다.
 꽝!
 “이, 이런 개 같은…….”
 쌍소리와 함께 붉은 학살자가 잠시 버둥거렸다.
 어이없게도 꼬마의 슬라이드 마법에 미끄러졌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붉은 학살자가 그대로 땅을 박찼다.
 텅!
 그 순간,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거대한 대검이 떨어졌다.
 꽝!
 붉은 학살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큰 타격을 받았을 일검이었다. 곧이어 윌터 자작의 타이탄이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작은 가슴을 감싸 안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작! 라니언!”
 아이작은 가슴의 통증 때문에 말하는 건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심장의 마나써클에 무리가 갈 정도의 마법을 발휘한 후유증이었다.
 자작은 처참한 레인저 유닛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타이탄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그걸 타고 있는 오너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학살자, 이 놈!”
 자작의 워리어가 저만치서 도망치고 있는 붉은 학살자를 쫒기 시작했다.
 붉은 학살자의 오너 파브리스는 내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자작이 체스터 성으로 되돌아아 오기 전에 자작가를 몰살시켰어야 했다.
 ‘젠장! 레인저 유닛에 막혀 쓸데없는 시간을 너무 허비했구나. 자작의 타이탄이 돌아왔다면, 다른 타이탄도 마찬가지겠지.’
 그는 상황판단이 빨랐다. 그동안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붉은 학살자라는 위명을 얻은 채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붉은 학살자가 작정을 하고 도망치자, 자작의 워리어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성벽을 넘어, 이미 도망친 두 기의 워리어들과 함께 평원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뒤를 따라 자작의 타이탄들이 추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멀어진 그들을 따라잡기는 버거워 보였다.
 프롬 자작은 붉은 학살자를 추격하지 않고 자작가로 다시 되돌아갔다.
 자작가 앞에서 타이탄의 조종석을 뛰쳐나온 윌터 자작은, 땅에 눕혀진 채 차가운 주검이 되어버린 아들의 시신과 마주쳤다.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라니언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붉은 핏물이 눈물과 함께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라니언……. 내 아들이……. 크흑!”
 아이작 프롬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혀, 형이……. 형이 죽다니! 나는 믿을 수 없어!’
 그는 내심 절규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 도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때, 기절했다가 깨어난 자작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처참하게 부서진 레인저 유닛과 그 옆에 쓰러져 자작의 품에 안긴 라니언의 모습을 보며 일순 비틀거렸다.
 시녀들이 곁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자작부인은 시녀들을 뿌리치고 라니언의 주검을 향해 달려갔다.
 “라니언! 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눈을 떠 보거라 얘야! 라니언!”
 어머니의 서글픈 절규가 잠시 들려오는가 싶더니 그녀는 다시 기절해버렸다. 더 이상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작 프롬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형!”
 그의 고함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3장 : 로렌 기사 아카데미
 
 
 핫! 핫! 이얍!
 끊임없는 구령소리와 기합소리가 불철주야 그치지 않으며, 수많은 생도들의 꿈이 영글어 가는 곳. 바로 기사 아카데미가 그러한 곳이다.
 루멘 왕국에는 많은 아카데미들이 곳곳에 난립해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을 키워내고 싶은 지방 영주들의 욕심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탄 오너를 양성할 수 있는 아카데미만큼은 한정되어 있다. 왕국의 수도에 있는 그레고리 왕립 아카데미, 그리고 벨룽의 지그문트 마법·기사학부, 그리고 내가 다니고 있는 로렌 기사 아카데미(Rolen's Knight Academy)가 바로 그곳이다.
 로렌 기사 아카데미는 오래 전 루멘 왕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구국의 영웅 로렌 경을 추모해 세워진 아카데미로 28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연히 로렌 아카데미가 있는 장소는 로렌 경의 후손인 콘라드 공작이 다스리는 콘라드 시다. 콘라드 시는 콘라드 공작령으로 더욱 잘 알려진 곳인데, 왕국에서도 무척 중요한 외교, 정치, 경제적 요충지다. 다시 말해서, 루멘 왕국이 지닌 부와 권력, 군사력등 모든 역량의 1/3이 결집된 곳이 바로 콘라드 공작령이라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로렌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라니언 형이 붉은 학살자의 손에 죽은 후, 나는 복수를 위해 타이탄 오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영지와 작위를 이어받을 자식이라고는 나 밖에 남지 않았고, 따라서 아버지도 내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시험해 보겠다는데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그동안 나의 나약한 모습만 보아 오셨던 어머니께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식도 잃을까 두려워 걱정을 태산같이 하셨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의 근심을 들어드리기 위해 영지와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로렌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콘라드 공작령에 들어왔을 때, 내가 그동안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높이의 마탑들, 그리고 거리 양쪽을 빼곡하게 매우고 있는 건물들에 나는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그때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내 스스로의 모습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에 그런 촌뜨기는 없을 것이다.
 로렌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어, 역사, 지리 등 전반적인 교양과목에 있어서도 합격점이 엄청나게 높았을 뿐더러, 로렌 기사 아카데미 본연의 목적인 타이탄 오너 양성을 위한 검술자질 테스트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교육을 받아온 덕분에 전반적인 교양과목에 있어서는 톱클래스의 점수를 받았지만, 검술자질 테스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전국 곳곳에서 날고 긴다는 뼈대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입학하려고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니만큼, 어느 한 분야에서 삐끗하기만 해도 입학은 물 건너 가버리기 일쑤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술자질 테스트에서 내게 위기가 찾아왔다. 시험관이 말하기를, 내가 지닌 검술 실력이나 자질로는 아무래도 합격하기가 어렵겠다는 것이다.
 비록 내게는 동방대륙에서 온 운차크 스승이 가르쳐준 비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타이탄 오너가 되기 위한 자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불합격 판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때문에 당시 내가 느꼈던 절망감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문득 운차크 스승이 가르쳐준 무술 하나가 생각나 나는 다시 시험관에게 매달렸다.
 결국 시험관을 설득한 나는 한 번의 시범을 더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고, 거기서 운차크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스텝을 보여주었다.
 물론 검술과 합쳐서 사용할 수도, 실전에서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스텝이었지만, 시험관의 눈을 현혹시키는 데 있어서만큼은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시험관은 눈이 핑핑 돌아가는 내 스텝을 보고는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움직임 같으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뭔가 중요한 비밀을 안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쓸데없는 움직임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지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몇 번에 걸쳐 스텝 시범을 더 보여주었고, 담당 시험관은 다른 몇몇 시험관들과 의논하더니, 마침내 결론을 냈다. 한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스텝이라고 말이다.
 덕분에 나는 로렌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물론 현란한 스텝을 살릴 수 있는 레인저 유닛의 오너가 되기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로렌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하는데 성공했으니, 앞으로 타이탄 오너가 되고, 나아가 붉은 학살자에게 복수를 하며,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이어받아 군주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길이 험난하리라는 걸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수강신청과 기숙사 배정을 받은 다음날부터 가시밭길이 펼쳐질 줄은 정말 몰랐다.
 에드문트 콘라드.
 바로 내 앞길을 가시밭길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였을 때였다.
 나는 동급생들과 함께 서로 인사도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는 그런 걸 기대했다. 동급생들의 나이가 나에 비해 두세 살 어리기는 하지만 마음만 맞는다면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웬 걸! 동급생들 모두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자기들끼리 나를 보고 수군거리면서 내 근처에 오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결국 텅 빈 식탁 위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에드문트 콘라드, 콘라드 공작령을 다스리는 공작가의 귀한 자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있던 아이들도 콘라드 공작령에서 날고 긴다는 귀족가의 자식들이었다.
 나는 이렇게 귀한 집안의 자식들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혹시 우리 가문의 명성이 생각 외로 높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비웃고, 또 한바탕 모욕까지 주고 갔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언제 나를 봤으며, 또 그런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냔 말이다.
 결국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때까지도 동급생들의 따돌림은 계속되었고, 에드문트 콘라드와 그의 일당들이 사흘을 멀다하고 나를 찾아와 비웃거나 괴롭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동급생 한 명을 화장실에 붙잡아 놓고 협박하다시피 해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동급생은 내 협박에 못 이겨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에드문트 공작의 둘째아들이 나를 괴롭힌 이유는 라니언 형 때문이었다.
 라니언 형도 나와 같은 로렌 기사 아카데미를 다녔었는데, 당시 형의 학업성적이 워낙 뛰어나 따라올 학생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검술실력도 워낙 출중해 동급생은 물론 상급생들조차 형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와 영광은 형이 거의 싹쓸이를 하다시피 했고, 덕분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에드가 콘라드, 즉 에드문트 콘라드의 형이며 콘라드 공작가의 장남이었다.
 사실 에드가 콘라드의 학업성적과 검술실력도 무척 뛰어났고, 만약 형이 없었다면 그가 형의 자리를 차지했을 게 분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형의 존재 때문에 그는 항상 그늘 속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나는 왜 에드문트 콘라드가 일당들과 함께 나를 찾아와, 얼마나 잘났는지 두고 보겠다거나, 당장 검술을 겨뤄서 누가 강한지 알아보자고 떼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형이 당했던 2인자의 설움을 내게 대신 풀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동급생들이 나를 따돌린 것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따돌림으로서, 콘라드 공작령의 지배자 가문의 뜻을 자신들도 따르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이려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나의 아카데미 생활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눈앞에서 형이 죽어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정도의 어려움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후에 저승에 가서 어떻게 형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피투성이가 된 형의 모습이 꿈속에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덕분에 기숙사에서 나와 방을 함께 쓰겠다는 학생이 없어졌다. 내 비명소리에 소름이 돋는다며,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나가버렸던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어느덧 꿈속에서 형을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 학생으로서 본연의 모습을 찾아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형의 죽음을 잊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을 하고, 또 나를 미워하던 동급생들의 미움과 따돌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검술에 있어서의 내 자질이 형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1년 후였다.
 교양과목에서는 톱클래스였지만, 검술에서만큼은 간신히 낙제를 면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검술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왜 기를 쓰고 수련을 해도 검술실력이 늘지 않는지 나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운차크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비기를 수련하면 온 몸 구석구석 마나의 흐름이 잘 느껴지는데 반해, 검술은 그렇지 못했다. 마나의 흐름이 곳곳에서 끊기기 일쑤였고, 그러니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래가지고는 타이탄 오너 라이선스(License : 자격증)를 딸 수나 있을지 장담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가문의 흥망성쇠와 형의 복수가 내 어깨위에 놓여 있는 현실에서, 나는 정말 큰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아무리 기를 쓰도 검술이 늘지 않는 이유가, 운차크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건, 그로부터 1년이 더 흐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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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밤이었다.
 빡빡한 교양과목의 수업과 검술수련, 그리고 대타이탄 전략 및 전술 수업 등을 모두 마치고 나면 저녁 늦은 시간이 된다.
 이때쯤이면, 로렌 기사아카데미의 학생들 대부분이 파김치가 되어 늘어진다. 그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늦도록 그날 배운 수업내용을 복습하고, 또 다음날의 수업을 위한 과제물을 준비한다.
 이렇게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나면, 어느덧 밤 1시가 훌쩍 넘어버리게 된다. 결국 학생들의 취침시간은 2시정도가 된다. 아침 6시 기상시간을 생각한다면 4시간 남짓 수면을 취하는 것이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마나연공과 체계적인 검술수련으로 단련된 학생들에게 그 정도면 모자라지는 않는 수면시간이다.
 도서관의 불이 꺼졌고, 기숙사의 학생들도 모두 잠든 한밤이었다.
 기숙사 뒤편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을 따라 올라가면 오래 전부터 형성된 공동묘지가 있다. 예전에는 로렌 기사 아카데미 출신의 전쟁영웅들이 묻히는 영광스러운 장소였지만, 지금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고, 망자를 달래기 위해 곳곳에 세워진 석상들이 더욱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반영구적 라이트닝 마법이 걸린 하급 마정석들이, 가로등에 매달려 희미하게 빛나는 이 공동묘지 한가운데, 키가 큰 청년 한 명이 유령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청년은 검도 들지 않은 채, 주먹을 이러 저리 뻗어내고, 발차기까지 하곤 했는데, 그 동작들이 너무도 유려해 누가 보았다면 탄성을 질렀을 정도였다.
 그리고 청년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주먹에 실린 힘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검이나 창이 아닌, 주먹과 다리를 단련해 몸으로 싸우는 전사들을 라운파이터(Round Fighter)라 한다. 타이탄이 개발된 후 거의 사라진 라운파이터의 계승자가 로렌 기사 아카데미 뒤편의 공동묘지에서 수련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이채로운 것이었다. 지금은 대륙 전체를 둘러보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게 라운파이터이기 때문이다.
 “후우!”
 깊은 숨소리와 함께, 라운파인팅을 수련하던 청년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꼽 아래쪽으로 내렸다.
 마침내 수련이 끝난 것이다.
 곧이어, 희미한 가로등 아래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아이작 프롬이었다.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앳된 얼굴은 모두 사라졌고, 큰 키에 탄탄한 체구, 그리고 강인해 보이는 표정을 한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운차크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비기의 수련을 모두 마치고 나자, 아이작은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진 느꼈고, 기분도 무척 상쾌해졌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내 침울하게 변했다.
 운차크 스승의 비기를 꾸준히 수련해온 덕분에, 이제는 단단한 돌이라도 잡고 으스러뜨릴 악력과, 큰 나무둥치도 한 주먹에 박살낼 힘을 얻었다. 맨주먹으로 붙는다면, 아니 상대가 설사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카데미의 학생들 그 누구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타이탄 오너가 되는 데 있어서는 말이다.
 검이나 창, 혹은 활만 잘 다뤄도 타이탄 오너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너의 능력을 극대화시켜줄 적절한 타이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운파이터에게 적합한 타이탄이 있다는 소리는 세상 그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라운파이터의 능력이 일반 검술가나 창술가 등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그보다는 기술의 세밀함 자체에 문제가 있다.
 타이탄은 오너와 공조를 이루어 작동하게 되는데, 아무리 공조를 잘 이루어도 거기에는 한계라는 게 있다. 일반적으로 타이탄과 오너의 동화율은 60%에서 왔다 갔다 하는 데, 이 정도의 동화율로는 라운파이팅의 세밀한 기술들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
 라운파이터가 제대로 기술을 발휘하자면 최소한 타이탄과의 동화율이 80%이상은 되어야만 하는데, 세상에 그런 능력을 지닌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운차크 스승이 가르쳐준 비기를 상당한 수준까지 수련했지만, 아이작 프롬이 실망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차피 검이나 창도 손이 움직이는 연장선상에 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라운파이팅의 기술들을 검술에서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아이작이 가로등 옆에 세워두었던 롱소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카데미의 검술시간에 배웠던 여러 가지 기본 검술들을 펼쳤다.
 자세도 좋았고, 베는 힘이나 스피드도 괜찮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마나를 활용해 검술을 펼치려고만 하면 막히는 것이었다. 마나의 흐름이 어긋나거나 심지어 끊어져버리기도 했다. 이래가지고서는 도저히 고급 검술을 펼칠 수 없었다.
 아이작이 몇 날, 몇 달을 두고 고민해 오다가 최근에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게 바로 이 문제였다.
 라운파이팅 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오른 요즘, 아이작은 그 기술을 수련할 때마다 뭔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라운파이팅 기술 전반을 꿰뚫고 있는 기본적인 마나의 흐름과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운차크 스승이 가르쳐준 비기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 문제가 있는 기술을 가르쳐주어서 그런지, 아니면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빼고 가르쳐주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현재 라운파이팅의 기술들이 한계에 이르렀고, 나아가 검술조차 제대로 배우기 어렵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운차크 스승으로부터 비기를 배우지 않는 건데…….’
 아이작이 지금 후회를 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운차크 스승을 찾아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영지에서 쫓기듯 떠난 그를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있겠는가.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은 절망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처참하게 죽어간 형의 모습도, 붉은 학살자에 대한 기억도 모두 잊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한심하고 나약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가로등 아래 앉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힘들었던 아카데미 생활에서 그를 지탱해준 힘이 바로 이 명상이었다.
 감정의 분출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있어 명상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운차크 스승으로부터 배운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이 명상이 가장 나았다.
 나와 너,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자 아이작의 마음은 어느새 주변의 자연과 동화되어 하나가 되었다.
 풀벌레와 날짐승들의 울음소리, 식물들이 자라는 소리는 물론 달빛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아이작의 귀를 파고들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의 마음이 자연과 완벽하게 하나 된 어느 순간, 그는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환청 치고는 너무도 생생한 목소리에 아이작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연과 하나 되었던 그의 마음에, 다시 자아가 자리 잡았다.
 “오늘 또 들리네……. 정말 유령인가?”
 아이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손바닥에서 땀까지 났다.
 공연히 묘지의 유령을 깨우지 않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작은 혹시나 싶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신화적인 괴물들의 모습을 본 딴 석상들이 여기저기에 서서 음산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이작이 석상과 묘지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
 가느다란 탄성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납골당 뒤쪽 어둠침침한 곳에 타이탄 한 기가 석상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묘지에서 꽤 오랫동안 수련해왔던 아이작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구석진 곳이었다.
 “멋지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 타이탄을 만져보았다.
 철도, 나무도 아닌 무척이나 이질적인 느낌이었지만, 왠지 낯설지 않았다. 약 3미터의 키에 망토까지 둘렀고, 등 왼쪽 편에 검 자루처럼 뭉툭한 뭔가가 삐죽 솟아 있었다. 팔, 다리는 물론, 허리도 무척 가늘어 인간의 체형과 거의 일치했다.
 아이작은 이처럼 훌륭한 타이탄이 묘지나 지키는 석상으로 쓰이게 된 이유를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보기만 아름다웠지 실용성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런 타이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싸우는 건 고사하고 공간이 좁아 오너가 탈 수도 없겠다. 왜 이런 타이탄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아이작은 잠시 타이탄 곁에서 머물렀다.
 묘지를 지키느라 덩그러니 서 있는 타이탄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해 보였고, 어쩐지 자신의 신세와 비슷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작이 타이탄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네 신세도 나 못지않게 한심하구나. 묘지를 지키는 석상으로 서 있다니 말야. 에휴!”
 아이작은 타이탄을 조금 더 만져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때, 타이탄의 작은 눈에서 노란 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가 사라졌지만 아이작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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