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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무적 1권-1

2015.02.10 조회 3,230 추천 26


 1. 흑건회(黑巾會)
 
 제령(劑嶺).
 하남성과 호북성 사이에 있는 소도시다. 지리적으로 두 성의 경계에 위치해 있지만, 이곳을 둘러싼 산세가 워낙 험하다보니 외부 사람들의 출입조차 용이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령이 그나마 소도시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 가지 약초 때문이다.
 
 감초(甘草).
 성질은 평(平)하고 맛이 달며[甘] 독이 없다. 온갖 약의 독을 풀어 준다. 9가지 흙의 기운을 받아 72가지의 광물성 약재와 1,200가지의 초약(草藥) 등 모든 약을 조화시키는 효과가 있고, 오장육부에 한열의 사기(寒熱邪氣)가 있는 데에 쓰며, 9규(竅)를 통하게 하고 모든 혈맥을 잘 돌게 한다. 또한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만든다.
 
 황제의경에 실린 감초의 효능을 설명한 말이다.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듯이 약을 조제할 때 감초는 반드시 들어간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쓰이는 약초다.
 이렇듯 감초가 중요한 약재라는 사실은 명확하나 굳이 왕래가 쉽지 않은 이곳 제령까지 약재상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원 천지를 아무리 둘러봐도 감초의 대량 재배가 가능한 곳은 몇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감초는 물이 풍부하되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지방에서 잘 자라는데, 그런 조건을 갖춘 몇몇 지역들 중 한 곳이 바로 제령이다.
 사람이 모이면 상권이 형성되고, 더불어 상인들에게 기생하는 무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곳 제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드는 파리 떼처럼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돈을 뜯는 건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워낙 산골이고 바닥이 좁다 보니 여기서 활개를 친다고 해봐야 그들의 수준은 뻔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
 이곳 제령에도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제령 시내에서 한참 외곽으로 떨어진 후미진 곳에 예전에 창고로 쓰였을 법한 허름한 폐가가 몇 채 서 있다. 너무 낡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듯 보이는 폐가 중 한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서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창고 안은 마치 태풍이 훑고 지나가기라도 한 듯 온통 난장판이다.
 그곳에는 약 40여 명의 사내가 서 있거나 쓰러져 있었다. 쓰러져 있는 자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전신이 온통 상처투성이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중상자가 대부분이다. 꼼짝할 수 없도록 두 손을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린 그들은 원독에 찬 눈빛으로 적의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흉기를 꼬나든 적의인들은 얼굴 가득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적의인들 중 수뇌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앞으로 성큼 나서자, 옆에 있던 수하가 잽싸게 나무 상자를 가져다 사내 앞에 놓았다.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수하가 준비한 상자 위에 올라섰다.
 중년 사내는 자기 앞에 꿇어앉아 있는 흑의인들을 한번 스윽 둘러본 뒤에 의기양양하게 입을 뗐다.
 “오늘은 우리 혈매파가 제령을 평정한 역사적인 날이다. 너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흑건회 놈들과 싸워…….”
 그때 갑자기 흑의인들 가운데 한 명이 그에게 악을 쓰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개새끼들! 비열하게 암수나 쓰는 주제에 무슨…….”
 말을 하던 중년 사내는 인상을 확 구기며 살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저 새끼 죽여!”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적의인 몇 명이 우르르 달려가 사내를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퍼벅!
 “이 새끼, 감히 대형께서 말씀하시는데…….”
 “아주 보내 버려!”
 울컥.
 그들의 무자비한 발길질을 견디지 못한 사내는 결국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셋째야!”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형님!”
 제압당해 있던 흑의인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사내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미동조차 없었다. 꿇어앉아 있던 흑의인들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중년 사내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그들의 증오 어린 눈길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흡족한 표정으로 피를 토하며 널브러진 남자를 내려다 보던 중년 사내는 다시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그 뭐냐, 음…, 이런 씨팔! 저 새끼 때문에 잊어버렸잖아!”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말이 떠오르지 않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보며 욕을 퍼부었다.
 그때 꿇어앉아 있던 흑의인들 중 험악한 인상의 애꾸눈 사내가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흥, 막내가 오면 네놈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거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애꾸눈의 흑의인에게 다가갔다.
 “큭큭, 내가 그 정도도 생각 안 했을 줄 아나? 여기서 백날이 아니라 천날을 기다려 봐라, 그놈이 오나. 네놈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놈은 벌써 황천 구경을 하고 있을 거다. 크하하하!”
 애꾸눈 사내의 안색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돌변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네놈이…….”
 중년 사내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흐흐흐, 그동안 너희 흑건회 놈들이 그놈을 믿고 얼마나 까불었는지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그의 말에 흑의인들을 둘러싸고 서 있던 적의인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애꾸눈 사내는 희망이 사라졌는지 참담한 표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을 웃어대던 중년 사내는 돌연 정색을 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들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살고 싶으냐? 아니면…….”
 말을 잠시 멈춘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소검을 꺼내 목을 베는 시늉을 해보였다.
 “죽고 싶으냐?”
 그의 제안은 간단했다.
 살고 싶으면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보통 건달패 간의 세력다툼에서 한쪽이 무너지면 이긴 쪽에서 다른 쪽 수하들을 흡수하게 된다. 이것은 불필요한 희생을 막고, 무너진 쪽의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단번에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수뇌들은 사정이 다르다. 대부분 죽임을 당해 암매장 되거나 손목이나 발목의 힘줄이 잘려 병신이 된 채 마을 밖으로 쫓겨난다. 얼마 전까지 대등한 관계였던 그들이 순순히 수하가 될 리도 만무했지만, 혹 밑으로 들어온다 해도 나중에 뒤통수를 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의 말에 흑의인들 중 절반 이상이 슬금슬금 애꾸눈 사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애꾸눈 사내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악을 썼다.
 “너 같은 새끼한테 굴복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 차라리 죽여라!”
 곁에 있던 사내도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발버둥쳤다.
 “크핫핫핫, 우리 흑건회에 배신을 때릴 너절한 놈은 없다. 사내답게 깨끗하게 죽여라, 이 개자식아!”
 그러자 동요하던 흑의인들 태반의 눈빛이 비장하게 바뀌었다. 비록 건달패의 무리지만 의리를 저버리고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는 험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개자식이라고 욕한 사내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쉭!
 “커헉!”
 원독에 찬 눈빛으로 중년 사내를 노려보던 흑의인은 목덜미에 붉은 피를 뿜어내며 힘없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넷째야!”
 수뇌로 보이는 흑의 중년인이 쓰러진 자를 안타까운 목소리로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이미 목숨이 끊어졌는지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적의의 중년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흥, 아무리 뚫린 게 입이라지만, 겁도 없이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여! 또 죽고 싶은 새끼 있으면 나서라!”
 흉흉한 시선으로 흑의인들을 보던 중년 사내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천천히 상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쾅!
 창고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적의인들은 깜짝 놀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새끼야?”
 적의인들은 문 앞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침중한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중년 사내는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네…, 네놈은 혈랑 마대위! 어떻게 네놈이 이 자리에……?”
 그때까지 꼼짝 못하고 있던 흑의인들의 반응은 사색이 된 중년 사내와는 정반대였다. 마치 이제야 살았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반겼다.
 “막내야!”
 “크흑, 형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혈랑(血狼) 마대위(馬大偉).
 스무 살의 나이에 흑건회 서열 5위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싸움 실력의 소유자다. 타고난 싸움꾼으로, 그가 싸울 때의 모습은 미친 늑대를 연상케 할 만큼 흉폭하고 잔인했다. 그의 옷은 항상 격렬한 싸움으로 인해 선혈에 흠뻑 젖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피에 굶주린 늑대, 혈랑이라 불렀던 것이다.
 혈랑 마대위라 불린 사내는 창고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가 입고 있는 흑의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선혈이 배어 있었지만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차갑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창고 안을 둘러본 후, 애꾸눈 사내를 향해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형님! 제가 좀 늦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께서는……?”
 으드득!
 그는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두 명의 흑의 사내를 보더니 이가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이빨을 갈아붙였다. 그의 음성에서 진득한 살기가 묻어났다.
 “이 개새끼들! 감히 형님들을…….”
 중년 사내는 그 살벌한 기운에 짓눌렸는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리고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질긴 새끼군,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저 자식을 죽이란 말이야, 죽여!”
 중년 사내의 외침에 주위에 서 있던 적의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꼬나들고 우르르 사내를 향해 몰려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지만 아무도 선뜻 달려들지는 못했다. 자신들을 쏘아보는 혈랑 마대위의 눈빛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없이 살기에 찬 눈빛으로 적의인들을 노려보던 마대위가 느닷없이 앞으로 달려들며 굉량(宏量)한 음성을 토해냈다.
 “갈!”
 적의인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라 움찔하며 뒷걸음질치자, 앞으로 달려들 것처럼 보이던 마대위는 뒤로 돌아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대위가 자신들이 두려워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한 적의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를 뒤쫓아 갔다. 적의인들이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 별안간 창고 문이 닫혔다.
 꽝!
 중년 사내가 소리쳤다.
 “빨리 문을 열어!”
 그의 명령에 적의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힘껏 밀었지만 잠긴 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흑의인들이 제압당해 있던 곳 바로 옆쪽의 창문이 부서지며 두 개의 인영이 뛰어 들어왔다.
 와장창!
 그들은 민첩하게 움직이며 손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소검을 이용해 결박된 흑의인들을 풀어주었다.
 “어서 밖으로!”
 문 앞에 서 있던 중년 사내는 그 모습을 보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고함을 질렀다.
 “노, 놈들이 도망친다! 저놈들을 잡아라!”
 적의인들이 도망치는 흑건회 사내들을 잡으러 달려갔으나 그들은 이미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도망친 후였다. 적의인들이 그들을 쫓아 창밖으로 몸을 날리려고 하자, 갑자기 밖에서 불길이 확 솟구쳤다.
 “헉! 부, 불이…….”
 누군가 창고 주위에다 기름을 뿌려놓았는지 창고 안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창고 안은 곧 아비규환으로 변해 버렸다.
 “사, 살려줘!”
 “으아악!”
 사방에서 창문이 부서지며 적의인들이 창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뒹굴어 옷에 붙은 불을 끄기에 정신이 없었다.
 우지끈. 콰쾅.
 잠시 후 창고는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렸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십여 명의 적의인은 그 속에서 시커먼 숯검댕이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무슨 소식 말인가?”
 약초꾼 왕삼에게 만두 장수 이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렸다.
 “어젯밤에 월영교 근처의 버려진 창고에서 큰 불이 난 것 말일세.”
 “아, 그거 말인가? 나도 들었네. 그 큰 창고가 흔적도 없이 타 버렸다면서?”
 이호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왕삼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야기를 듣던 왕삼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 혈매파와 흑건회가 거기서 대판 싸웠다고?”
 그러자 이호는 기겁한 표정으로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 사람, 목소리 좀 낮추게.”
 “그, 그래…….”
 왕삼은 주위를 힐끔거리며 이호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불은 왜 난 건가?”
 “흑건회의 혈랑조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더군. 듣자니까 혈매파 사람들 열 명 이상이 타 죽었다는 거야.”
 이호의 대답에 왕삼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그렇게나 많이? 허, 무식한 놈들. 사람 목숨을 무슨 버러지 목숨으로 생각하나…….”
 “원래 혈매파와 흑건회가 다시 구역을 나누기 위해 모였던 건데, 혈매파가 기습을 했다는군. 초반에는 흑건회가 완전히 밀리는 듯 했지만 혈랑이 나타나 제압당해 있던 흑건회 사람들을 구하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는 거야.”
 왕삼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혈랑이? 허,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삼이 별안간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이호를 보았다.
 “헌데 자네는 그런 일을 어찌 그렇게 자세히 아는가?”
 “왜 일전에 내가 혈매파에 사촌 동생 놈이 있다고 말했잖은가.”
 왕삼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 동생 놈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꼼짝없이 타 죽을 뻔했다더군. 어젯밤에 시커멓게 그을려가지고 우리 집으로 도망쳐 왔길래 그놈한테 캐물었지.”
 왕삼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곧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린 도대체 누구에게 상납금을 내야 하는 거지?”
 “그거야 낸들 아나. 혈매파나 흑건회 둘 다 어제 일로 꽤 큰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거든.”
 그때 왕삼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호에게 슬쩍 맞은편을 향해 턱짓 했다.
 그의 눈에 느긋한 걸음으로 시장 길을 무리지어 걸어가는 흑의 사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섯 명의 흑의인이 가운데 있는 사내를 빙 둘러싼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서둘러 길을 비켜 주었다.
 “혈랑과 그의 수하들이군. 헌데, 별로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이호가 조심스레 소곤거리자, 왕삼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저놈들은 언제 봐도 섬뜩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흑의 사내들은 서슬 퍼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시장을 한 바퀴 쭉 돌아 길을 빠져나갔다.
 
 혈랑 마대위는 흑건회의 본거지로 알려진 화양객잔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급히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형님들은?”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대위는 객잔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애꾸눈의 사내와 중년 사내가 심한 부상을 입었는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그래, 시장 사람들의 동태는 어떻더냐?”
 애꾸눈의 사내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으나, 그의 얼굴엔 고통의 빛이 완연했다.
 “대부분 어제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음…, 혈매파 놈들은?”
 “그놈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꾸눈의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수고가 많았다. 큰 형님의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조직은 막내 네가 관리해야겠다.”
 “알겠습니다. 그쪽은 걱정 마시고 형님들께서는 몸조리나 잘 하십시오.”
 마대위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다섯 명의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대위가 조장으로 있는 혈랑조 조원들이다.
 마대위는 그들을 이끌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쌍칼,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애들이 몇이냐?”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어제 구역을 돌아보느라 창고에 가지 않았던 열다섯 명 정도입니다. 형님.”
 “음…, 너희들은?”
 다섯 사내는 일제히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좋아.”
 마대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지금 즉시 혈매파를 친다.”
 그의 명령에 사내들은 기겁을 하며 물었다.
 “저…, 형님. 대형께서 허락하셨습니까?”
 마대위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형과 둘째 형님께선 부상 때문에 당분간 휴식이 필요하시다. 따라서 형님들께서 완쾌되실 때까지 흑건회는 내가 지휘한다.”
 혈랑조 조원 다섯 명의 얼굴에 일말의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혈매파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일을 대형의 허락도 없이 시행한다는 건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호라!”
 느닷없는 감탄사에 그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흑서(黑鼠) 초팔.
 검은 생쥐란 뜻이다. 앞으로 나선 키가 작은 사내는 얼굴이 가무잡잡해서인지 흑서라는 별호와 잘 어울렸다. 작고 왜소해 보이지만 제령 일대에서는 독종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 사내가 제령을 주름잡고 있는 혈랑조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들 중 유일하게 글자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시절 마을 서당에서 잡일을 거들며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웠고, 또 잔대가리를 굴리는 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따라서 마대위의 지시를 가장 빨리 이해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까지 덥석 내놓을 줄 아는 자는 그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환히 웃으며 앞으로 나선 것이다.
 “드디어 결심을 하셨군요, 형님!”
 마대위는 흑서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으면 어서 준비해!”
 “옛, 형님!”
 흑서는 대답하기가 무섭게 혈랑조 5명을 이끌고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갔다.
 
 얼마 후 제령 외곽의 한적한 공터에 20여 명의 사내가 모였다. 모두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살벌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다.
 꿀꺽!
 어디선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혈매파와 혈전을 벌인 지 하루 만에 떨어진 소집령에 잔뜩 굳은 표정들이다.
 혈랑 마대위가 천천히 걸어 나와 그들 가운데 섰다.
 그는 자신의 앞에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수하들을 찬찬히 둘러본 후 결연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어제 혈매파 놈들의 비열한 짓거리로 인해 본회의 형제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침중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마대위는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도저히 혈매파 놈들을 가만 둘 수 없다! 내 두 눈에는 그들에게 목숨을 잃은 형제들이 복수를 해달라고 울부짖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흑서 초팔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질렀다.
 “맞습니다, 형님! 혈매파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형님을 따르자!”
 그제서야 주저하던 사내들은 흑서 초팔을 따라 무기를 치켜 올리며 함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대위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혈매파의 본거지를 기습할 생각이다. 나를 따르겠느냐?”
 사내들은 살기에 찬 모습으로 무기를 빼들며 공터가 떠나갈 듯이 함성을 내질렀다.
 “와!”
 혈매파의 본거지를 기습한다는 말에 모두 흥분한 듯 했지만 유성추를 들고 있는 사내만은 왠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종만리,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철구(鐵毬) 종만리(琮萬理).
 그는 흑건회 서열 2위인 무정혈수(無情血手) 천소백(千昭伯)의 직속 수하로, 흑건회 전체에서 서열 10위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형님, 대형의 허락은 받으셨습니까?”
 마대위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일순 주위가 조용해지며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유성추를 잡고 있던 종만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대형의 허락도 없이 독단으로 혈매파를 기습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마 대형께서는 여쭤 봐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다.”
 종만리의 낯빛이 돌변했다.
 “대형께서 허락지도 않은 일을 형님께서 하신다면 이는 하극상에 해당합니다.”
 마대위는 그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욱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형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형제들의 복수를 해야겠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마대위의 말에 동조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종만리와 몇몇 사내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대위는 강렬한 눈빛으로 사내들을 응시했다.
 “나는 진작에 우리 흑건회가 혈매파를 제령에서 몰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흥, 그 새끼들과 권역을 나누는 따위의 웃기는 짓거리는 내 체질에 맞지 않아.”
 사내들은 다시 함성을 지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종만리와 몇몇 수뇌급 사내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대위는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종만리, 너는 우리 흑건회가 제령을 일통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냐?”
 “저 역시 원하긴 합니다만…….”
 종만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제령 일통은 그로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혈매파의 전면전은 많은 피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흑건회 회주는 입 밖에도 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바라던 이야기를 마대위로부터 들으니 속이 다 후련했다.
 그는 다시 한번 침중한 목소리로 마대위에게 물었다.
 “대형의 분노는 어찌 감당하려고 하십니까?”
 “모든 건 내가 책임진다.”
 종만리는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대위가 비록 자신의 막내 동생뻘 밖에 안 됐지만, 싸움 실력으로 치자면 제령 전체를 놓고 보아도 그를 따를 자가 없다. 거기에 과감한 결단력과 통솔력을 갖추었고, 형제들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의리까지 있다. 건달들 중에서 이만한 인물을 찾아보기는 아마 어려우리라.
 종만리는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라 나머지 수하들도 모두 마대위의 뜻에 따르겠노라며 함성을 질렀다. 마대위는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우렁차게 외쳤다.
 “형제들! 이제 제령을 접수하러 가자!”
 
 
 2. 혈전(血戰)
 
 콰지직!
 탁자가 사내의 발길질에 날아가 벽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이런 씨팔, 다 된 판에 그놈이 나타나다니……”
 혈매파의 대형 구미귀(九尾鬼) 전휴(田携)는 인상을 구기며 씩씩거렸다.
 눈에 가시 같던 흑건회를 박살내고 제령을 집어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야심이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수하들까지 십여 명 이상 불에 타 죽어 버렸다. 피가 거꾸로 치솟을 만큼 화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자기 앞에 머리를 푹 숙인 채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야,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다섯 놈이 겨우 한 놈을 못 이겨?”
 두 사내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헌데, 그놈이 워낙 운이 좋아…….”
 꽝!
 이번에는 의자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전휴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기습은 그놈의 운이 좋아서 실패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섯 놈이 덤벼서 셋이 맞아죽고 너희들 둘만 도망쳐 올 수 있어? 이 병신 같은 놈들아!”
 사내 한 명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놈의 주먹이 얼마나 무서운지…….”
 퍽!
 “에라, 이 멍청한 새끼들.”
 두 사내는 찍 소리도 못하고 얻어맞은 머리를 문지를 뿐이다. 혈매파의 서열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휴의 친동생인 전진과 전적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에 대해 감히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되느냐?”
 전휴가 묻자 전진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들까지 포함해서 전부 스물다섯입니다.”
 구미귀 전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열세 놈이나 죽어 나자빠졌으니 앞으로 흑건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그때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전적이 얼른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흑건회는 졸개들이야 여섯 놈밖에 죽지 않았지만 수뇌가 둘이나 죽었으니 실질적으로는 저쪽의 피해가 더 큽니다. 졸개들이야 또 모으면 그만 아닙니까.”
 “음, 그건 그렇지…….”
 이번 싸움에서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면 흑건회의 서열 3위와 4위인 철각(鐵脚) 이웅(伊雄)과 대력수(大力手) 호연강(胡延剛)을 죽인 것이다. 그들은 흑건회를 받치고 있는 다섯 개의 기둥 가운데 둘이었으니, 결과적으로 흑건회가 혈매파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셈이다.
 가만히 앉아서 손실을 따져보던 전휴는 그나마 화가 조금 풀리는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흐흐, 아이들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흑건회를 쳐야겠다.”
 그러자 전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형님. 헌데 그…….”
 전휴는 동생이 말을 못하며 머뭇거리자 짜증스러운 얼굴로 다그쳤다.
 “뭐야?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혈랑 말입니다.”
 혈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전휴의 얼굴은 순식간에 다시 험악하게 변했다. 제령을 일통하려는 찰나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으니 혈랑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전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새끼가 뭐?”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놈의 실력이 워낙 대단하기도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리 호들갑이냐? 자세히 말해 봐.”
 “저와 셋째가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혈랑에게 4개의 비도를 날렸을 때입니다.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20보 정도면 백발백중인 저희들의 실력을요. 물론 그놈이 피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하나쯤은 몸에 박히리라 생각했죠. 비도에 독을 잔뜩 발라두었으니 놈이 중독 되는 것과 동시에 수하들 셋이 한꺼번에 치고 들어가면 간단히 목을 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헌데, 하필 비도를 던지는 그 순간 놈이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집으려고 허리를 굽히지 뭡니까.”
 “허리를 굽혀?”
 전휴는 전진의 말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비도를 던지는 것과 때를 맞춰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다니, 어찌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전에 알아차린 게 분명해. 흠…, 눈치가 빠른 놈이군.’
 전씨 형제의 비도를 날리는 솜씨는 제령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을 만큼 유명하다. 그런데 비도를 던지는 찰나 고개를 숙였다는 건 마대위가 사전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잠시 떫은 감을 씹은 듯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갑자기 두 사내에게 호통을 쳤다.
 “그런데 수하들이 그놈과 싸우는 동안 도대체 네놈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전적이 주춤 뒤로 물러서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희들이야 비도를 던져 놈을 중독 시키는 역할만 맡기로…….”
 전휴는 당장 그들을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힘겹게 억눌렀다.
 동생들이 수하들 셋과 힘을 합쳐 혈랑과 싸웠더라면 놈을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동생들의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르나 그건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중요한 건 두 동생이 지나치게 몸을 사렸기 때문에 제령을 일통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그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혈랑 마대위를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나 그렇기도 했지만, 창고에서 탈출하면서 화상을 입은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수하 한 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대형!”
 전휴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뭐야?”
 “크, 큰일 났습니다. 기습입니다!”
 뜬금없는 수하의 말에 전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 기습이라니, 어떤 새끼가 기습을 해왔단 말이냐?”
 “흐, 흑건회…, 그리고 혈랑이…….”
 수하의 말에 전진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혀, 혈랑이라고! 형님, 어서 피하시지요!”
 전휴는 한숨을 내쉬었다. 혈랑이라는 말만 듣고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동생들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선을 떠는 동생들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몇 놈이나 왔더냐? 상황은 어떻고?”
 “그, 그게…, 잘 모, 모르겠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그때 사내들의 욕지거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와장창!
 전휴가 깜짝 놀라 급히 뒤로 물러서는 찰나 방문과 창문이 부서져 나가며 흑건회와 혈매파 패거리가 서로 뒤엉킨 채 쏟아져 들어왔다.
 채쟁! 와장창!
 넓은 방 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구미귀 전휴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멈춰라!”
 혈매파 인물들이 싸움을 멈추고 급히 뒤로 물러서자 흑건회의 수하들 역시 무기를 거두고 한쪽에 나란히 모여 섰다. 그 사이로 사내 한 명이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전진과 전적이 동시에 소리쳤다.
 “너, 넌 혈랑!”
 매서운 눈빛으로 사내를 쏘아보던 전휴가 위협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
 “개새끼들, 비열한 짓거리로 본회의 형제들을 해치다니.”
 대뜸 그의 말을 자르는 마대위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뚝뚝 흘러 내렸다.
 전휴는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일순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놈들이 열둘 그리고 우리가 열다섯이로구나.’
 그때 마대위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내가 대형을 대신해서 직접 네놈의 목을 따 주마. 자, 덤벼!”
 전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흐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구나.”
 말을 하며 그는 자신의 양쪽 옆에 서 있던 전진과 전적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슬금슬금 마대위의 좌우로 움직여 그를 포위했다.
 마대위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냉소를 흘렸다.
 “크크, 역시 하는 짓거리가 개새끼들이군.”
 마대위의 비웃음에 발끈한 전휴는 주위를 둘러싼 수하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저놈은 내손으로 직접 처리하겠다.”
 부하들이 모두 뒤로 물러서자 전휴는 마대위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 혈랑이라는 이름은 오늘로서 제령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헉!”
 그러나 전휴는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황급히 옆으로 피해야 했다. 마대위가 그를 향해 의자 하나를 걷어찬 것이다.
 와장창!
 마대위는 의자가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 어느새 전휴의 전면으로 달려들었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전휴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전휴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마대위가 계속 따라붙으며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핏!
 마대위의 주먹이 전휴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스쳤을 뿐인데도 그는 어깨뼈가 내려앉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젠장, 저놈의 주먹이 이렇게 강하다니…….’
 전휴는 그때서야 마대위가 왜 혈랑이라는 별호 말고도 철권이라 불리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며 피하던 전휴는 조급한 마음에 동생들에게 소리쳤다.
 “비도를 던져!”
 전진과 전적은 마대위가 전휴에게 몸을 날리는 순간부터 줄곧 비도를 던지려 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대위의 신형이 전휴에게 바짝 붙어 있어, 비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그가 아닌 전휴에게 꽂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대위가 노린 것도 이것이었다. 그는 전휴에게 더욱더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주먹을 날렸다.
 휙! 휙!
 “크흑!”
 전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마대위의 공격을 피했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주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으윽…….”
 전휴의 입에서 연신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진과 전적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들은 비도를 날릴 만한 틈을 찾기 위해 신형을 이리저리 옮겼지만, 마대위 역시 교묘하게 전휴의 주위를 돌며 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대위는 언뜻 전휴의 얼굴에 떠오른 죽음의 공포를 보았다. 일순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마대위는 무슨 속셈인지 전휴에 대한 공격을 한 박자 늦추었다. 바로 그때, 기회를 노리던 전휴가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비도를 꺼내들었다.
 탓!
 마대위의 신형이 전휴의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마대위는 자신의 좌측에 있던 전진에게 달려들며 그의 후미로 숨어들었다.
 쉬쉭!
 그와 동시에 전휴의 손에서 비도 2개가 날아갔다. 그 비도에는 삶의 의지가 만들어 낸 본능적이고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퍽!
 “으아악!”
 전휴는 전진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도가 동생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들었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마대위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에 급급했다.
 쉬쉿!
 “윽!”
 전휴의 비도는 연이어 수하들의 몸에 꽂혔다. 마대위가 신형을 교묘하게 움직이며 혈매파 사내들 사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피하는 그들을 방패삼아 마대위는 전적에게 접근해 갔다.
 쉭!
 “큭!”
 전적은 공포심에 마대위를 향해 비도 4개를 날렸지만 애꿎은 수하 두 명만 죽였을 뿐이다.
 마대위의 일권이 전적의 아랫배에 꽂히자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대위는 새우처럼 상체를 앞으로 굽히는 전적의 허리 아래쪽을 파고들었다.
 쉭!
 퍽!
 순간 전휴가 날린 비도가 전적의 머리에 꽂혔다. 비명 하나 없는 깨끗한 죽음이었다.
 마대위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전적의 시신을 전휴 쪽으로 힘껏 밀어냈다. 전적의 시신은 전휴가 던진 2개의 비도를 더 맞은 후 전휴와 정면으로 충돌해 버렸다.
 우당탕!
 강한 충격에 전휴는 겨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두 동생의 몸에 꽂힌 자신의 비도를 본 그는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다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대위의 수하 몇이 그를 뒤쫓았다.
 마대위도 전휴를 쫓아가려다 멈칫했다. 한쪽에 모여 있는 혈매파 사내들을 굴복시키는 일이 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으아아!”
 갑자기 혈매파의 인물 두 명이 괴성을 지르며 마대위에게 달려들었으나 곧바로 흑건회 수하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대위는 살아남은 혈매파 수하들을 향해 걸어가며 살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 죽고 싶은 새끼 있나?”
 혈매파 수하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잠시 동안 짙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형님!”
 그러자 나머지 혈매파의 수하들 모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마대위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마대위는 그들 앞으로 다가가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혈매파는 사라졌다. 이 시간 이후로 너희들은 모두 흑건회의 형제다.”
 혈매파 인물들이 일제히 대답하였다.
 “예, 형님!”
 마대위는 주위의 흑건회 수하들과 혈매파 사내들을 번갈아 바라본 후 싸늘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전의 원한은 모두 잊어라. 차후 그걸 입 밖에 내는 새끼는 내가 직접 때려죽이겠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제야 비로소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마대위가 제령의 암흑가를 일통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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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건회의 본거지인 화양객잔 안이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이 많으면 으레 작은 소음이라도 있을 법한데, 50여 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안쪽만 주시하고 있다.
 객잔 내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실.
 흑건회의 대형 대력도(大力刀) 주양인(侏洋仁)과 서열 2위인 무정혈수(無情血手) 천소백(千昭伯)이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었다.
 드르륵!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마대위와 함께 혈랑조원 5명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형님!”
 천소백이 고개를 돌려 마대위 뒤에 서 있는 혈랑조를 슬쩍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방금 복수를 하고 왔습니다.”
 “뭐, 뭐야?”
 천소백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고, 주양인은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보, 복수를 하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혈매파를…….”
 마대위는 천소백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양인을 바라보았다.
 “끄응!”
 주양인은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감히 내 허락도 없이 혈매파를 쳤단 말이냐?”
 마대위는 주양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주양인이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혈매파는 이제 제령에서 사라졌습니다.”
 “뭐, 뭐야?”
 주양인과 천소백이 깜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그때 혈랑조원들 중 흑서 초팔이 끼어들었다.
 “사실입니다, 대형. 혈랑 형님께서 친히 저희들을 이끌고 가서 혈매파를 박살냈습니다. 이제 제령은 우리 흑건회의 것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대형!”
 그의 말을 따라 나머지 혈랑조원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대형!”
 낭보다.
 주양인으로서는 마대위가 자신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혈매파를 쳤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복수를 한 셈이니 벌떡 일어나 마대위를 안아주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주양인은 마대위의 뒤에 서 있는 혈랑조원들을 살펴보았다.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굳은 그들의 얼굴에 공경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떠올라 있지 않다. 게다가…….
 ‘가슴이 왜 불쑥 솟아나와 있지? 뭘 숨기고 있기에……. 혹시?’
 천소백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인지 혈랑조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막내! 저놈들은 왜 이 방에 들어와 있는 것이냐?”
 마대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막내야!”
 순간 주양인이 우수를 들어 천소백을 제지한 후 조용히 말했다.
 “막내, 너의 의도가 뭐냐?”
 마대위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의도라니요? 대형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쯤 되면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천소백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 너 이 새끼. 감히 형제의 의를 저버리고 반역이라도 꾀할 참이냐?”
 순간 마대위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사라지고 그는 천소백을 지그시 쏘아보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째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저로서는 무척 섭섭합니다. 제령의 일통은 우리 흑건회의 숙원이 아니었습니까? 비록 대형의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흑건회의 숙원을 이룬 저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는 없죠.”
 천소백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뭐, 뭐라고? 네, 네가 감히…….”
 주양인이 다시 우수를 들어 천소백을 제지한 후,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대위를 쏘아보았다.
 “그건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구나.”
 그 말에 마대위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가 어찌 감히 대형께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둘째 형님께서 지금까지 본회의 이익에 앞서 개인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데 바쁘셨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주양인이 흠칫하며 천소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소백이 당치도 않다는 듯 소리쳤다.
 “개인적인 욕구라니, 무슨 근거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마대위는 냉소를 친 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흥, 얼마 전 양씨 부부가 운영하는 포목점의 상납액을 대폭 인상하셨더군요. 하지만 제가 찾아본 본회 장부의 액수는 인상하기 전과 같던데, 그 차액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요? 그리고 제양루와 진양객잔의 상납액 역시 상당히…….”
 “그만!”
 천소백이 갑자기 소리치며 마대위의 말을 끊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양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내, 내가 상납액을 올린 건 사실이나 결코 개인적으로 착복한 적은 없다.”
 그러더니 마치 뭔가를 사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주양인을 쳐다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형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더군다나 지난 달 혈매파와의 사소한 충돌 때문에 관에 찔러둔 돈도 꽤 됩니다, 대형.”
 주양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구구한 변명에 열을 올리는 천소백을 바라보았다.
 ‘허, 둘째가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던 것도 몰랐다니…….’
 주양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에는 자신이 두 눈을 부릅뜨기만 해도 설설 기었던 수하들이 아닌가? 이제는 자신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천소백마저 딴 주머니를 찰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를 욕하기에 앞서 약해진 통솔력을 아쉬워해야 할 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
 마대위가 싸늘한 목소리로 천소백에게 말했다.
 “그동안 모아두신 게 꽤 될 테니,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시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천소백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막내! 네놈이 감히 나에게 은퇴를 종용하는 것이냐?”
 마대위가 두 눈을 치켜뜨고 자기를 노려보자 천소백은 주양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대형! 말씀 좀 해주십시오. 여기가 어디라고 이놈이 감히 저를 위협한답니까?”
 주양인은 사나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쳐라!”
 “대형…….”
 천소백은 대형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주양인이 매서운 눈초리로 마대위를 노려보았다.
 “네 녀석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 흑건회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냐?”
 마대위는 가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대형께서 계신데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흑건회의 안정만을 생각하셨지,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는 잊어버리신 대형의 모습이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주양인의 한쪽 눈이 꿈틀거렸다. 그건 그가 아주 분노했을 때 하는 버릇이다.
 하지만 마대위는 주양인의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2년 전만 해도 누구보다 높은 기백으로 제령을 호령하던 대형이 아니셨습니까? 헌데 지금은…….”
 “지금은?”
 마대위는 머리를 살짝 숙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약해지셨습니다.”
 꽝!
 주양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칠게 방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나 이내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대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형께서 운영하실 만한 가게를 하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양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마대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차마 소리쳐 수하들을 부를 수는 없었다. 수하들을 부른다면 마대위를 제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전에 자신이 먼저 그와 혈랑조에게 맞아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흑건회의 대형이라지만 단신으로 혈매파의 전씨 형제를 제압할 정도의 실력은 없었다. 한동안 마대위를 노려보던 주양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 버렸구나…….”
 주양인은 잠시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마대위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 대형!”
 당황한 천소백이 황급히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양인은 화양객잔에서 나간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제령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라지자 마대위는 천소백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둘째 형님도 그만 쉬시지요.”
 천소백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대위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네, 네놈이 감히…….”
 마대위는 조금 더 언성을 높여 천소백을 다그쳤다.
 “허, 그동안 모아두신 걸로 부족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천소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객잔을 나가 버렸다.
 제령은 이제 마대위의 것이 된 것이다.
 
 
 3. 혈랑 마대위(血狼 馬大偉)
 
 마대위가 혈매파의 수뇌 세 명과 단신으로 싸워 둘을 죽인 후 흑건회의 대형마저 내쫓고, 제령의 암흑가를 휘어잡은 사건은 금세 상인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상인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의 다음 행보를 주시했다.
 건달패인 흑건회가 하는 일은 상인들로부터 일정 금액을 상납 받고, 그 대가로 외부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상인들을 지켜 주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리 대단치 않고 오히려 단순한 일 같지만, 그들 사이에 관부라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이 끼어들면 의외로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흑건회도 대부분의 건달 조직처럼 상인들로부터 상납 받은 은자로 관부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흑건회, 상인 그리고 관부라는 서로 다른 무리가 유기적으로 공생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대위는 제령을 일통한 후, 상인들에게 단 두 가지 사항을 주지 시켰다.
 
 첫째, 덤비는 놈은 무조건 죽는다.
 둘째, 상납일과 상납금을 어기는 자도 죽는다.
 
 상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제령을 휘어잡은 건달패거리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새로 제시한 규칙은 그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인들은 애초부터 덤빌 생각도, 상납금을 내지 않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상인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오직 한 가지, 바로 상납금의 액수였다. 사람이 바뀐 후 상납금액이 올라가지 않은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마대위 또한 상납금액을 올렸고 여기저기서 상인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상납금의 인상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렇듯 크게 반발한 이유는 그 인상 폭이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무렵, 마대위는 수하들에게 절대 금기사항 한 가지를 발표했다. 내용인즉 수금일 외에 절대 상인들을 방문하지 말라는 것이다.
 흑건회 수하들이야 불만스러웠지만 상인들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동안 혈매파나 흑건회의 건달들이 수시로 상점에 들락거리며 행패를 부리고, 팔기 위해 내놓은 물건들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집어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상인들이 손해를 보는 금액은 상납금액의 배가 넘었다. 그러니 만약 흑건회가 수금일 이외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상납금액을 올려도 그들에겐 오히려 이익이 되는 셈이다.
 그는 불만을 토로하는 수하들을 쉽게 다독거렸다. 수뇌들에게 돌아가는 상납금 액수를 줄여 수하들에게 더 많이 나누어 준 것이다.
 
 마대위가 흑건회의 회주로서 웬만큼 자리를 굳혀가던 어느 날, 그에게 완전히 와해되었던 혈매파의 대형 전휴가 꽤 많은 수하를 이끌고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다. 마대위로서는 전휴를 놓쳤을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결과다.
 전휴는 마대위와 싸우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아우 둘을 죽인 후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그리고는 제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도시 호령에 가서 줄곧 숨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곳 건달 조직인 홍운회 회주를 만난 전휴는 제령 상권의 절반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스무 명의 수하를 지원받았다. 뿐만 아니라 홍운회 회주가 소개시켜준 무림인에게 도움을 받기로 하고 자신 있게 제령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대위로서는 제령을 일통한 이후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쾅!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안주 접시들이 한차례 요동쳤고, 이어 큰 소리가 화양객잔 안을 가득 메웠다.
 “흥! 무림인? 난 그딴 거 몰라. 내가 믿는 건…….”
 마대위는 방금 탁자를 내려친 투박하고 거친 자신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들어올렸다.
 “바로 이거야.”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흑서 초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형님! 상대는 무림인이라니까요. 그것도 검을 쓰는 무림인 말입니다.”
 “씨팔, 내 주먹이 그 새끼의 검보다 못하다는 거냐?”
 “무, 물론 형님의 주먹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대위의 뒤를 이어 혈랑조의 조장이 된 흑서 초팔은 그의 주먹이 두려운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마대위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잔소리 말고 그…, 무슨 천하라고 했지?”
 “혈우천하, 혈우천하 장천익이라고 했습니다.”
 혈우천하(血雨天下).
 천하에 피비를 내리게 한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명호인가? 초팔은 자신이 이런 자와 싸워야 한다면 분명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대위는 냉소를 칠 뿐이다.
 “흥, 그 새끼에게 전해. 내일 아침…, 아니, 음……. 그렇지, 사흘 뒤 회운평에서 붙자고.”
 “아, 알겠습니다. 헌데 수하는 몇이나 데려가실 겁니까?”
 “일단 혈랑조만 데려간다.”
 그러자 초팔은 어이가 없는지 곧바로 되물었다.
 “예? 상대는 무림인인데 겨우 다섯만 데려가신다고요?”
 마대위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그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예? 왜, 왜요……?”
 퍽!
 “윽!”
 초팔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마대위가 손바닥으로 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이다.
 “새꺄,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겠냐? 평소에 머리가 잘 돌아가 조장까지 시켜줬더니 갑자기 돌대가리가 된 거야!”
 “아, 알겠습니다. 그럼 한 열 명 정도를…….”
 마대위는 술잔을 들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짐짓 여유로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날랜 애들로 골라 한 스무 명만 근처에 숨겨둬라.”
 “스무 명이나요?”
 “전휴는 간교한 놈이야.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이 꽤 많은 졸개들을 끌어 모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우리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지.”
 “알겠습니다, 형님.”
 탁!
 마대위는 술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초팔은 난데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했는지 자기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실 곳이라도……?”
 마대위는 대답도 하지 않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그러나 발걸음과 달리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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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운평.
 이곳은 제령 외곽에 있는 작은 들판으로 마대위가 어릴 때부터 즐겨 뛰어놀던 곳이다. 9살 이후 줄곧 제령에서 자란 그는 이제 자신이 뛰놀던 곳에서 무림인과 한 판 대결을 펼쳐야 한다. 마대위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회운평을 거닐었다.
 ‘흠, 이곳에 있던 나무는 벼락을 맞았나 본데…….’
 그는 새까맣게 타서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노송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 나무 아래에 토끼굴이 자주 생기곤 했는데…….’
 마대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수하들 앞이라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그 역시 무림인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절대로 놈이 검을 들게 해서는 안 돼.’
 마대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갖가지 상황을 그려보며 주위의 경물과 하나하나 대비시켜 보았다.
 비록 상대가 혈우천하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가졌다 할지라도, 강호의 무림인들이 보기엔 삼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일개 낭인검객에 불과할 것이다. 하오문에서조차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제령의 건달들 간 세력 다툼에 관여하는 자가 제대로 된 무인일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자라 해도 마대위에게는 버거운 상대일 게 뻔했다.
 마대위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주위의 수풀과 나무 그리고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마치 뇌리에 깊숙이 박아두려는 듯이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우르릉!
 갑자기 뇌성이 울리고 전광이 번뜩였다. 남쪽 하늘에서부터 검은 구름이 먹물처럼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마대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가 오겠군…….’
 순간 그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마대위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몇 개의 작은 구덩이를 찾았다. 자신이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요즘 아이들도 두더지나 토끼를 잡기 위해 구덩이를 판다. 특히 비가 오는 날 땅이 물러진 후에는.
 마대위는 구덩이 앞에 쭈그려 앉은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깡! 깡!
 슈욱! 슈욱!
 담금질과 풀무질 소리가 쉴 사이 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허름하기 하지만 제령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대장간이다. 오 노인이라 불리는 대장장이가 주인으로 3대째 가업으로 대장장이 일을 해오고 있었다.
 마대위는 회운평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대장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감님.”
 오 노인은 열기가 매우 더운지 윗도리를 벗어젖힌 채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젊은이 못지않은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허, 이거 오랜만이구나.”
 오 노인은 마대위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오 노인을 잘 따랐다. 자식이 없던 오 노인도 마대위를 친손자처럼 대해 주었다. 마대위는 미소 띤 얼굴로 오 노인에게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있고 말고 할 게 뭐 있느냐? 늘 하던 일이나 하며 사는 게지. 허허.”
 마대위가 다소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 영감님.”
 “그래, 무슨 일이냐? 말해 보거라.”
 “혹시…, 갑주 같은 것도 만들 줄 아세요?”
 오 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갑주? 갑자기 무슨 갑주가 필요하다는 게야?”
 그는 자신이 무림인과 싸우게 된 사정을 오 노인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흠, 무림인들은 주먹으로 커다란 바위도 부순다는데 네가 맨 몸으로 감당할 수는 없지.”
 “그래서 이렇게 영감님께 부탁드리는 거죠.”
 오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갑주란 게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인체의 굴곡에 꼭 들어맞아야 할 뿐 아니라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무게와 유연한 이음새를 갖춰야 하지. 그러니 제대로 된 갑주를 만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다.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드는 건 불가능해.”
 오 노인의 말을 들은 마대위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휴…, 할 수 없죠. 달리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이만 가볼게요.”
 힘없이 인사를 하고 대장간을 나가려는 그를 오 노인이 다급히 붙잡았다.
 “이런 건 어떻겠느냐? 굳이 갑주를 구할 것이 아니라 상반신을 보호할 수 있게끔 철판을 대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양 팔에도 각반처럼 둥근 철판을 댄다면 얼추 갑주 구실을 해낼 수 있을 게야.”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마대위가 오 노인의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어 놓을 테니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거라.”
 “영감님, 정말 고맙습니다.”
 오 노인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된다. 네가 쓰러지면 은혜원의 아이들은 누가 돌보겠느냐?”
 표현은 못했지만 항상 자기와 은혜원을 생각해주는 오 노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그는 오 노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대장간을 나섰다.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회운평 한가운데 마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가볍게 뛰어보기도 하고 주먹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안색을 찌푸리며 어깨 근육을 풀었다. 가슴과 배를 가린 철판과, 팔꿈치를 제외한 나머지 팔 전체를 감싸고 있는 철각반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철각반을 두른 상태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아예 싸워볼 엄두도 못 낼 게 뻔하다. 마대위는 미친 듯이 연습하다가 몸이 녹초가 되면 그 자리에 쓰러져 잠시 쉬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시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며 연습을 했다. 그의 수련은 다음 날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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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운평은 이틀간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회운평에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다.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오 장을 격해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하고 서 있었다. 한쪽은 마대위와 그의 친위대인 혈랑조 수하 다섯 명이었고, 또 다른 쪽은 적삼을 입은 사내 여섯 명이었다.
 적삼 사내들 중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이 코를 한차례 실룩거리더니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둘째와 셋째의 복수를 해주마.”
 그 중년 사내는 바로 예전 혈매파의 대형이었던 전휴였다.
 마대위가 냉소를 치며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전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섰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날카롭고 위협적인 눈빛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매서운 눈초리로 전휴를 응시하던 마대위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흥! 네놈도 곧 동생들을 따라가게 해 주마.”
 전휴는 죽은 두 동생이 생각났는지 움켜쥔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네놈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전휴는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뒤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형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전휴의 뒤에 서 있던 적삼 사내들도 일제히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텄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적삼 사내들 사이로 의외로 젊어 보이는 남자가 건들거리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건달들 사이에선 강한 자가 윗사람의 대우를 받는 법이니, 젊은 사내가 나온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대위의 일 장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우두둑!
 마대위는 양 손의 손가락 관절을 한차례씩 꺾은 후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주시했다. 허리에 매달린 한 자루의 검을 제외하면 자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건달의 모습이다. 강호의 고수들은 자신의 기세를 뿜어내어 상대를 제압한다는데, 마대위는 눈앞의 사내로부터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야.’
 마대위는 상대를 잠시 노려보다가 말했다.
 “흥, 무림인이라고?”
 혈우천하 장천익의 쭉 찢어진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듣는 이의 신경을 긁어댈 법한 쇳소리가 울려 나왔다.
 “건달 나부랭이 주제에 겁 대가리를 상실하고 까불다니…….”
 순간 뒤에 서 있던 적삼의 사내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놈에게 뜨거운 맛을 한번 보여 주십시오.”
 마대위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혈랑조원들의 표정이 구겨지며 당장이라도 적의인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흥분하였다. 그러나 마대위는 우수를 들어 그들을 제지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그는 상대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두 눈으로 주시할 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먼저 흥분하는 것은, 기름통을 짊어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마대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내가 지면 흑건회는 오늘부로 이곳 제령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자 장천익이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
 “흥! 사라지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아니, 아예 그럴 기회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일순 마대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단순한 세력 다툼의 차원이 아니라 흑건회 모든 수하들의 목숨이 걸려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의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스윽.
 마대위의 좌보가 앞으로 나가며 그의 몸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상대를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좌보를 축으로 뒤쪽의 우보를 상대의 일직선상에 놓았다. 그는 몸의 중심을 좌보에 실어 우보를 쉽게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이는 가장 작은 동작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상대가 어느 방위에 있든지 최단거리로 뛰어들어 공격하기 위한 마대위만의 독특한 자세였다.
 그의 자세를 눈여겨본 장천익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큭큭, 일격필살이 특기인 모양이지?”
 마대위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안색을 회복하고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잔말 말고 덤벼, 새꺄!”
 장천익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철권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강한 주먹을 가지고 있다기에 어느 정도 긴장하고 왔는데, 이제 보니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보기에 상대는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일개 파락호일 뿐이다.
 “이 어르신께서 너 같은 놈을 상대로 검을 뽑았다는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면 창피해서 어찌 다닐 수 있겠느냐.”
 마대위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겉으로는 오히려 인상을 구기며 길길이 날뛰었다.
 “씨팔, 날 어떻게 보고……. 어서 검을 뽑아! 너 같은 새끼는 한 주먹감도 안 돼!”
 장천익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로구나. 네놈 소원대로 황천구경을 시켜주마.”
 휘익!
 마대위가 쏜살같이 상대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일권을 내지르자 장천익은 일순 숨을 멈추었다.
 퍽!
 “헉!”
 마대위는 안색을 찌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우수를 매만졌다. 마치 철벽에다 주먹을 내지른 듯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장천익은 입 꼬리를 올리며 마대위를 비웃었다.
 “흐흐, 내경이 깃든 주먹이라면 모를까, 그따위 솜뭉치로 뭘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서서히 마대위에게 다가왔다.
 “잘 보아라. 주먹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핏!
 마대위는 뻗쳐 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분명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왼쪽 뺨이 칼에 베인 듯 갈라지며 선혈이 흘러내렸다.
 “으윽.”
 제대로 맞았더라면 두개골이 함몰될 만큼 강하고 빠른 일격이다. 마대위는 신음성을 흘리며 급히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대의 주먹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타당! 탕!
 “크헉!”
 마대위의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도 교묘하게 꺾여 들어오는 장천익의 주먹을 모두 피할 순 없었다. 양쪽 옆구리와 명치를 거의 동시에 얻어맞자 그는 내장이 모두 뒤집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마대위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만약 옷 속에 철판을 대지 않았더라면 이 일격에 숨이 끊어졌으리라.
 한편 장천익은 자신의 주먹에 전해진 이질감에 안색을 찌푸렸다.
 “옷 속에 뭘 숨겨두었느냐?”
 마대위는 억지로 고통을 참고 일어서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외쳤다.
 “흥! 내 피부는 철벽처럼 단단하다!”
 “철벽? 아! 큭큭, 옷 속에 철판을 숨기고 있었군.”
 그러나 장천익은 곧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겨우 철판 따위로 나의 주먹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이지. 네놈이 고통을 자초하고 있구나.”
 휙!
 장천익의 주먹이 다시 날아왔다. 검을 빼들 필요도 없이 마대위를 때려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마대위는 날렵하게 허리를 굽혀 자신의 어깨로 상대의 배를 들이 받았다.
 퍽!
 그러나 상대는 꿈쩍도 않고 오히려 무릎으로 마대위의 가슴을 쳐올렸다. 마대위는 다급히 양 팔을 교차시켜 가슴을 보호했지만 충격이 만만치 않았던 탓에 그대로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마 철각반을 두르지 않았다면 두 팔이 부러졌으리라.
 마대위의 우측 어깨와 두 팔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으나 고통은 없었다.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이미 강한 충격에 신경이 마비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상처는 그 여파가 뼛속까지 미치기 때문에 당장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마대위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허공을 선회하던 매가 토끼를 잡아채기 위해 급강하하듯 매섭게 내려 꽂히는 상대의 주먹을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한동안 장천익의 주먹세례를 피하기만 하던 그가 황급히 좌측으로 굴렀다.
 푹!
 장천익의 주먹이 손목 부분까지 흙 속에 묻히면서 땅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록 빗물로 인해 땅이 많이 물러졌다고는 하지만 방금 장천익이 보여준 힘은 마대위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으로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장천익이 그를 노려보았다.
 “쥐새끼 같은 놈!”
 탓!
 장천익의 신형이 다시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마대위의 눈엔 상대가 날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그의 주먹은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날카로웠고 뱀의 독니처럼 치명적이었다.
 타당, 탕!
 마대위는 정신없이 난타당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몸통을 둘러싼 철판 덕분이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끔찍한 공포와 고통을 겪게 한 후에 비로소 그에게 죽음을 안기려는 장천익의 의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계속되는 난타의 고통 속에서 마대위의 정신은 더욱 몽롱해져 갔다. 마치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가는구나…….’
 그가 정신을 놓아 버리려는 찰나 자신의 짧은 일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서 한 소녀와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씨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마대위는 입안의 살을 씹었다. 지독한 통증에 온몸이 저릿해지며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빛을 잃어가던 그의 두 눈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려는 순간 상대의 주먹은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핏!
 “큭!”
 급격히 목을 옆으로 꺾은 덕분에 정타는 피할 수 있었지만,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주먹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마치 거대한 범종의 타종음을 바로 앞에서 듣는 것 같았다. 마대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다시 날아오는 상대의 주먹을 주시했다.
 퍽!
 “크헉!”
 그는 장천익이 내지르는 일곱 번의 주먹질 중 네 차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번을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마대위는 장천익이 잠시 주먹질을 멈춘 사이, 그가 숨을 고르느라 짧게 호흡하는 소리를 들었다.
 일순 마대위의 두 눈이 빛났다.
 ‘그래! 무림인도 숨을 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지.’
 마대위는 호흡과 기공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간의 싸움 경험으로 터득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 맞으면 무지 아프다는 것이다.
 휙!
 다시 상대의 주먹이 날아와 마대위에게 몇 차례의 타격을 입힌 후 호흡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마대위의 얼굴에 뭔가 깨달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수풀이 우거진 지점을 스치듯 본 후 다시 날아오는 상대의 주먹을 피해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로 장천익이 바짝 따라 붙었다.
 휙휙!
 몇 차례의 주먹이 지나간 후 어느 순간 마대위는 상대의 기세가 극히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공격이다!’
 마대위는 장천익이 자신 있게 우보를 앞으로 내뻗으며 수풀이 우거진 땅의 한 부분을 밟아가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정면으로 몸을 날렸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을 보듯 승리를 확신하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던 장천익의 얼굴에 일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단단한 땅인 줄 알고 힘껏 밟은 곳에 작은 구덩이가 패여 있었기 때문이다.
 “헉!”
 그는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고, 흐트러진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 허둥거렸다.
 퍽!
 장천익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지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마대위의 주먹이 그의 단전에 손목 부분까지 깊숙이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끄으…….”
 장천익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고 눈이 하얗게 뒤집어졌다. 무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단전을 강하게 가격 당했으니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의 내공이 몸속에서 폭발할 듯 흩어지며 경맥 속으로 치달렸고, 그 충격으로 기경팔맥이 모두 끊어져 버렸다.
 마대위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아래쪽으로 끌어내림과 동시에 자신의 무릎으로 쳐올렸다.
 퍽!
 “윽!”
 신음성과 함께 마대위는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장천익의 앞니가 부러지면서 그의 무릎을 파고든 것이다.
 뒤로 허물어지는 장천익의 가슴을 밟고 허공으로 도약한 마대위는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자신의 이마로 상대의 안면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우직!
 뜨거운 핏물이 마대위의 안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장천익이 코뼈가 뭉그러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대위는 일순 휘청했다.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지쳤기 때문이다.
 “형님!”
 혈랑조 수하들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와 마대위의 곁에 섰다. 그는 즉시 자세를 바로 잡은 후 고개를 돌려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서 있는 전휴를 노려보았다.
 전휴가 망연자실해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네, 네놈이 이기다니. 어찌 이런 일이…….”
 전휴는 마대위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우수를 들어올렸다.
 “와아!”
 함성이 터져 나오며 전휴의 뒤로 십여 장 떨어진 수풀 속에서 무기를 지닌 20여 명의 적의인이 뛰쳐나왔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함성이 마대위의 뒤쪽에서 일어났다.
 “와!”
 그들은 바로 마대위가 숨겨두었던 흑건회의 수하들이었다. 전휴는 이가 부서져라 부드득 갈았다.
 “이, 이런 교활한 놈!”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은 전휴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혈랑을 상대로 싸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뒤로 돌아서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수하들에게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 돌아간다.”
 “와아!”
 흑건회 수하들의 함성을 들으며 마대위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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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자신의 손가락만큼 굵은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다. 벗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려 보았지만, 그럴수록 거미줄은 더욱 강하게 그를 옭아맸다. 온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결같이 밝고 즐거운 모습들이다. 자연스레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헤헤, 나 잡아봐라.”
 “잉잉, 언니 웅이가 놀려.”
 맑은 웃음소리가 멀리 울려 퍼졌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먹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찰나지간에 온 하늘을 뒤덮었다.
 우르릉!
 뇌전이 번쩍이고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아이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녔지만 곧 흠뻑 젖고 말았다.
 “꺄아아!”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먹구름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광 속에서 잠시 나타난 그림자들의 형상은 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었다. 그것들은 아이들을 향해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움직이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온몸의 힘을 모두 쥐어짜 소리쳤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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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것이다.
 “형님, 깨어나셨습니까?”
 다섯 명의 사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한 여인이 마대위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
 마대위의 물음에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영산에 있는 은신처예요.”
 마대위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간호하느라 며칠 밤을 샜는지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고운 피부를 가진 탓에 초췌한 모습마저도 아름다웠다.
 마대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자 사내들 중 한 명이 문 쪽을 향해 슬쩍 턱짓을 했다. 이어 두 사람만 남겨두고 그들 모두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마대위는 아직 말하는 것조차 힘에 부친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령령,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그녀는 마대위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대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며 울먹거렸다.
 “오라버니. 흐흑,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흑흑.”
 마대위는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우수로 그녀의 머리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잠시 후 그녀는 진정이 됐는지 울음을 그치고 차분하게 좀 전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흘이에요.”
 “사흘?”
 그는 안색을 찌푸렸다. 자신의 부상보다 사흘간 밤낮 없이 간호하느라 고생했을 여인의 노고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윽!”
 마대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신음과 함께 다시 쓰러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그를 부축해서 다시 자리에 편안하게 눕혀 주었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의원 말로는 최소한 석 달 이상 정양을 해야 한대요.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운이라고 했어요.”
 마대위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석 달이라고? 흥! 도적 같은 의원 놈들이 약값을 뜯어내려는 수작이겠지. 난 이제 괜찮으니 너야말로 어서 가서 좀 쉬거라.”
 여인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어허, 좀 쉬라니까. 이러다 너까지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녀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한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
 “왜 그래? 괜찮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시 어지러워서…….”
 그러나 그녀가 또다시 비틀거리자 마대위는 여인을 부축하기 위해 일어나려다 이내 오른쪽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마대위는 급한 마음에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어서 좀 들어와 봐!”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놀란 표정의 사내들이 뛰어 들어왔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서 령령을 방으로 데려가거라. 의원도 부르고.”
 그들은 침상 앞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령령을 발견하자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형수님, 괜찮으십니까?”
 수하들이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나가자 마대위는 매우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이름은 매령령으로 은혜원이라는 고아원에서 마대위와 함께 자랐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서로 의지하며 자랐기 때문에 친남매 이상으로 정이 깊었다. 이제는 표정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마대위는 언젠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녀와 가정을 이루리라 생각했지만 정확한 시기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바로 두 사람이 돌보고 있는 은혜원의 고아들 때문이다. 그럴 듯한 고아원을 지어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힐 수 있을 때까지 두 사람의 행복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의식을 되찾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늘 입버릇처럼 도둑놈이라 욕했던 의원의 지시도 철저하게 따랐다. 그리고 지니고 있던 은자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 몸에 좋다는 온갖 보약을 지어 먹었다. 심지어 그가 물심양면으로 보살피고 있는 은혜원에 보낼 은자까지도 타지의 용하다는 의원들을 청해오기 위해 모두 써 버렸을 정도다.
 과하다 싶을 만한 지출이었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건달은 튼튼한 몸이 유일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대위가 자신의 부상을 가볍게 생각하여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나섰다가 또 다른 세력다툼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는 것은 물론이요,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마대위가 무너진다면 자연적으로 흑건회도 해체되고 수하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운영비를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은혜원의 고아 15명도 배를 주려야 할 것이다. 더욱이 혈육처럼 아끼는 매령령은 어찌 홀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도 전에 제령을 노리는 또 다른 건달들이 있다면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내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가 혈우천하 장천익이라는 무림인을 때려 죽였다는 소문이 과장에 과장을 더하여 제령 일대에 퍼져 있었다. 그전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건달들도 그의 놀라운 무용담을 전해들은 뒤로는 감히 흑건회에 덤벼들 생각조차 못하게 됐다. 마대위는 본의 아니게 제령 일대 건달들 중 최고의 싸움꾼으로 통하고 있었다.
 마대위는 그로부터 정확히 석 달 후, 온몸을 도배하다시피 했던 부목과 붕대를 모두 풀었다. 그러나 마대위가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여 전신의 관절을 부드럽게 풀고, 그 사이 약해진 근육에 힘을 싣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4. 실락원(失樂園)
 
 넓은 대전 중앙에 ‘패황전’이란 거대한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아래쪽에 십수 명의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적삼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사위를 짓누를 것만 같은 위엄이 풍겨 나오는 이 적삼 노인은 바로 세외의 패자인 천외패황궁의 지존인 패황(覇皇) 연무종(延武琮)이다.
 많은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음에도 패황 연무종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일 각이 흐르자, 영원히 침묵을 지킬 것만 같던 그의 입에서 장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허락한다, 즉시 시행하라.”
 패황 연무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측에 따로 무리 지어 앉아 있던 노인 네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가운데 있던 노인이 다소 흥분한 듯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존! 재고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패황 연무종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입을 연 노인을 바라보았다.
 “태상장로께서 장로회의 의견을 모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이 안건은 바로 시행될 것이오.”
 “으음…….”
 태상장로 유문회는 연무종 바로 앞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는 30대 초반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마룡(魔龍) 연운비(延雲飛).
 패황 연무종의 열두 아들 중 셋째로, 부궁주이며 실질적으로 천외패황궁을 이끌고 있는 실세다. 뛰어난 자질과 두뇌로 형제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물론,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이곳에서 자신의 실력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태상장로가 볼 때, 천외패황궁의 이전(移轉)과 같은 중대한 사안을 계획하고 시행하기엔 그는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태상장로 유문회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 원로회에서는 궁의 이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같이 중요한 일은 많은 경험을 요하는…….”
 갑자기 연운비가 일어나 그의 말을 끊었다.
 “태상장로님, 저를 믿어주십시오.”
 유문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한동안 연운비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휴! 본 원로회에서도 이 일을 찬성하는 바입니다.”
 유문회는 천외패황궁의 궁주인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패황 연무종은 살짝 머리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대전 내 모든 사람이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연무종은 줄지어 앉아 있는 수뇌들 사이로 걸어갔다. 대전의 문에 이르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연운비를 쳐다보았다.
 “부궁주.”
 “예, 궁주님!”
 연운비는 급히 달려와 부복하였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이번 일은 부궁주가 직접 처리하게.”
 “알겠습니다. 궁주님.”
 연무종이 대전을 완전히 빠져나간 후에도 연운비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태상장로 유문회는 걱정스러운지 침중한 안색을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때가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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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언덕 아래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은 바닥이 보일만큼 맑았다.
 풍덩!
 “까르르!”
 아이들 몇 명이 열기를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들의 웃음소리는 강물에 실려 유유히 흘러갔다.
 강 옆으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 위에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쏴아.
 장원을 둘러싼 푸른 대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제령의 입구인 회운평과 비월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은 은혜원 아이들의 낙원이다. 세파에 시달린 듯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령령아, 아이들을 좀 불러 오거라. 하 노사님께서 오실 시간이 다 되었구나.”
 “예, 어머니.”
 매령령은 은혜원의 대모인 소원화의 말에 따라 비월강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강가에는 많은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었는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령령은 미소를 띤 채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이제 그만 놀고 들어가야지! 하 사부님께서 오실 시간이야.”
 “아, 누나!”
 “언니!”
 아이들은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달려와 그녀에게 매달렸다.
 “누나, 조금만 더 놀다가 가면 안 돼?”
 “언니, 우리가 지금 아칠을 골려주고 있었단 말이야.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그녀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돼. 어머니께서 하 사부님을 청해 오시려고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벌써 잊은 거니?”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갈게요.”
 아이들의 태도에 매령령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신 글공부를 마치면 내가 맛있는 누룽지를 만들어 줄게.”
 “정말?”
 “약속한 거야, 누나!”
 매령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한달음에 은혜원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은혜원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은밀하게 아이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절정고수의 초절한 내력이 집중된 듯 기광이 어린 그의 눈길은 아이들을 따라 은혜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잠시 머문 사내의 시선은 고아원 뒤에 형성되어 있는 좁은 계곡을 지나 그 안쪽으로 넓게 펼쳐진 분지에 이르자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는 잠깐 동안 은혜원 부근의 지형을 유심히 살폈다.
 “완벽하군. 천혜의 요새가 있다면 바로 저곳일 게야.”
 그의 두 눈이 다시 은혜원으로 향했다.
 “정확히 입구에 위치하고 있군. 저곳은 알아서 처리하도록. 조용히 말이야.”
 주위가 잠시 술렁거리는가 싶더니 세 개의 그림자가 사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놀라울 만큼 은밀하고 빠른 신법이었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붉은 노을이 은혜원을 비추고 있었다. 매령령은 빨랫감을 잔뜩 들고 강으로 가기 위해 은혜원을 나서고 있었다.
 “끼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 앞에 세 명의 적의 사내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뚝 그치고 소원화가 놀라 뛰어 나왔다.
 “령령아, 무슨 일이냐? 아니, 누구시죠?”
 령령이 소원화 쪽으로 기다시피 다가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소원화는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긴 후 불안한 표정으로 낯선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세 명의 사내는 굳은 표정으로 은혜원을 둘러보았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모습이다. 셋 중 한 명이 소원화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곳 주인이오?”
 소원화는 머리를 끄덕인 후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헌데, 무슨 일로……?”
 “얼마요?”
 소원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얼마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적의 사내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을 사겠단 말이오. 그러니 원하는 가격을 불러 보시오.”
 사내의 뜬금없는 말을 들은 소원화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젠 이곳을 팔라니…, 이 무슨 예의 없는 짓이죠?”
 여인의 대꾸에 적검(赤劍) 방류청(旁流淸)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철저하게 강자존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그로서는, 일반 양민과 소위 협상이라는 것을 하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절정고수와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렵군.’
 하지만 일을 조용히 처리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난생 처음 사과라는 것을 해야 했다.
 “이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소. 이곳을 사고 싶어서 왔소.”
 소원화는 사내들을 잠시 노려본 후 싸늘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고아원이에요. 누군가에게 팔거나 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냥 돌아가도록 하세요.”
 사내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은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고아원이라면 돈이 들어가는 데가 많을 텐데…, 은자는 원하는 대로 주겠소.”
 소원화는 흠칫 놀랐다. 은자에 욕심이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사내들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결코 쉽게 포기하진 않으리라. 그녀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팔 수 없어요. 여긴 은혜원을 거쳐 간 많은 아이들의 추억이 어린 소중한 곳이에요. 은자 몇 푼에 팔아넘길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러니 그만 돌아가 주세요.”
 그러나 적의 사내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다소 강압적으로 나왔다.
 “돈 몇 푼이라…, 은자라면 얼마든지 부르는 대로 주겠다고 했을 텐데……. 좋게 말할 때 이곳을 넘기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갑자기 매령령이 두 손을 허리에 척 걸치고 소원화의 앞으로 나서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말이죠? 당신들이 뭘 모르는 모양인데 이곳은 우리 오라버니가 돌봐 주는 곳이에요. 흥, 오라버니가 이 사실을 알면 당신들은…….”
 소원화가 그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령령아, 그만하거라.”
 적의 사내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매령령을 바라보았다.
 “돌봐주는 오라버니라…, 그게 누구지?”
 매령령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적의 사내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흥, 제령에서 혈랑 마대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요. 당신들도 치도곤을 당하기 전에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매령령의 대답에 적의 사내는 잠시 뒤쪽의 사내들과 전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팔 의향이 없다는 말이군. 알겠소.”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소원화는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령령아, 왠지 좀 불안하구나.”
 “대위 오라버니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오라버니 이야기를 하니까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모습을 좀 보세요.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녀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빨랫감을 들고 강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그게, 저…….”
 은혜원을 방문하고 돌아온 방류청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연운비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곳을 돌봐주는 놈이 있는 모양인데, 그놈까지 처리해야만 일을 조용히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놈이 누구냐?”
 “마대위라고 하는 놈입니다.”
 연운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대위라…,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명호가 무엇이냐?”
 “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곳을 휘어잡고 있는 흑건회라는 건달패의 대형으로서 혈랑이라는…….”
 퍽!
 술잔 하나가 그의 이마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방류청은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파락호 한 놈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냐? 이 멍청한 놈 같으니……. 당장 가서 처리해!”
 “예!”
 휙!
 세 개의 인영이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연운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본 궁의 중원 진출이라는 대 역사를 창조하려는 마당에 그깟 조그마한 고아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놈들을 수하라고 데리고 있으니……. 나도 참 한심하군.”
 연운비는 곁에서 비 맞은 강아지마냥 파르르 떨고 있는 기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여인의 미모는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녀는 지금 겁에 질려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장 죽이기엔 아까운 계집이군.’
 그의 손이 천천히 기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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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풀벌레들이 유난히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허름하게 지어진 작은 측간의 문이 살짝 열리며 한 쌍의 눈이 반짝였다.
 ‘에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똥을 누는 건데…….’
 하루에 열 번도 더 들락거리는 측간이지만 어두운 밤에는 결코 오고 싶지 않다. 무섭기 때문이다.
 “끄응…….”
 퐁당.
 “윽, 또 묻었잖아. 에이, 더러워.”
 아이의 짧은 다리로는 다시 튕겨 올라오는 누런 똥물을 제때 피할 수 없었다. 아이는 구겨진 인상으로 대충 뒤처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춤을 추켜올리던 아이는 갑자기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두려움을 쫓기 위해 열어두었던 측간의 문틈 사이로 하늘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날아와 마당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 설마 귀신?’
 아이는 겁에 질려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문틈으로 밖을 계속 내다 보았다.
 세 개의 그림자는 허공을 너울거리는 듯 날아 은혜원 건물 쪽으로 날아갔다.
 ‘지, 진짜 귀신이다…….’
 아이는 그대로 기절하며 뒤로 넘어갔다.
 
 @@@@@
 
 “끄응…….”
 마대위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려고 하자 온몸이 욱신거려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장천익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를 어느 정도 치료했다지만, 그의 근육과 뼈는 지독했던 그때의 타격을 모두 기억하는 모양이다.
 ‘젠장, 비가 오려나…….’
 마대위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계속 불안했다.
 ‘왜 이러지?’
 그는 바람이라도 쐬려는 마음에 방을 나섰다.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대나무 숲이 모옥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대위는 답답한 마음을 씻어 보려는 듯 대나무 숲을 헤치고 숲 밖으로 나갔다.
 ‘흐읍!’
 맑은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가 은신처에 숨어 상처를 치료한 지 다섯 달이 지났다. 자신의 부상을 틈탄 습격의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대위는 비월강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공터에서 주먹을 이리저리 뻗어보고, 다리를 차올렸다. 땀이 조금씩 배어 나옴에 따라 뻐근했던 고통이 차츰 쾌감으로 바뀌었다.
 ‘내일은 제령에나 한번 가볼까? 그러고 보니 은혜원에 들른 지도 꽤 됐네.’
 마대위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곤히 잠들어 있을 은혜원의 아이들을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차례 기지개를 켠 후 몸을 돌리려는데 그의 눈에 갑작스럽게 치솟는 화광이 보였다.
 “아니 저긴, 설마…….”
 마대위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강 건너편을 주시했다. 분명했다. 불길이 치솟는 곳은 은혜원이 있는 쪽이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큰 소리로 사람들을 깨웠다.
 “령령! 얘들아!”
 곧이어 잠이 덜 깬 목소리가 하나 둘씩 들려왔다.
 “음…,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마대위가 다시 소리쳤다.
 “씨, 씨팔 큰일 났다! 은혜원에 불이 난 것 같다!”
 “불이라고요?”
 매령령과 혈랑조 수하들이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그들은 은혜원 쪽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럴 수가!”
 “은혜원 쪽이 분명합니다!”
 마대위는 허둥지둥 강가로 달려 내려갔다. 매령령과 흑건회의 수하들이 그를 뒤따랐다. 마대위는 강기슭에 숨겨둔 배를 찾았다. 그는 뒤처져 오는 수하들을 보며 재촉했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 튀어와!”
 배가 크지는 않았지만 마대위 혼자 옮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섯 명의 수하와 매령령이 힘을 합치고 나서야 배는 조금씩 강가로 끌려나왔다.
 첨벙!
 잠시 후 배를 물에 띄운 마대위와 수하들은 미친 듯이 노를 저어댔다.
 
 같은 시각, 은혜원의 측간에서 정신을 잃었던 아이는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깨어났다.
 아이는 화광이 치솟고 있는 은혜원을 보며 사색이 되었다.
 ‘어, 엄마. 불이…….’
 엄마와 형제들에 대한 걱정은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했다. 아이는 정신없이 뛰어나가 소리쳤다.
 “불이야! 불이야!”
 그러나 제령에서도 외딴 곳에 위치한 은혜원에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이 뛰어올 리 만무했다. 한동안 목이 터져라 ‘불이야!’를 외치던 아이는 갑자기 뭔가 생각한 듯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마치 허공을 부유하듯 세 개의 그림자가 은밀한 곳으로부터 날아올라 아이의 뒤를 쫓아갔다.
 
 배가 강기슭에 닿을 무렵,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뛰어내렸다.
 첨벙! 첨벙!
 그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헤치며 다급하게 뭍에 올랐다.
 “어머니! 얘들아!”
 “아삼! 유희!”
 정신없이 어머니와 아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 올라간 마대위 일행은 막상 무섭게 타들어가는 불길과 맞닥뜨리자 그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불을 꺼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불길이 매우 거셌기 때문이다. 만약 은혜원 안에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마대위와 매령령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머니. 크흑!”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불길은 의외로 빨리 잦아들었다. 순식간에 은혜원을 잿더미로 만든 불길이 더 이상 새로운 먹이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끈한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마대위와 그의 수하들은 조심스럽게 잿더미 속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잿더미를 들출 때마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그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는 마음에 고통을 참으며 묵묵히 움직였다.
 부스럭.
 아이들의 방이라 짐작되는 곳을 파헤치던 마대위가 하얀 두개골 하나를 찾아냈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는 더러워진 소매로 백골을 조심조심 닦은 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시 잿더미를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마대위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나란히 누워 있는 세 구의 백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안고 있던 두개골을 놓아두고 사방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 마대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떤 새끼들이 이런 짓을……?”
 그 소리에 수하들이 다가왔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그들은 마대위가 파헤친 곳을 쳐다보더니 크게 놀랐다. 일곱 구의 백골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수하들 역시 분을 참지 못했다.
 “형님, 아이들이 잠든 채로 타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형님. 어제 봤던 정도의 불이라면 열기와 연기 때문에 자다가도 깼을 겁니다. 그럼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을 텐데, 이렇게 자는 듯 누워 있다는 건 아이들이 이미…….”
 마대위가 우수를 들어올리자 수하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마대위는 매령령에게 다가가더니, 정신이 나간 듯 멍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령령, 정신 차리거라.”
 그러나 매령령은 넋이 나간 채 잿더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대위는 그녀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짝!
 “아! 오, 오라버니…….”
 “령령, 정신이 드느냐?”
 매령령이 갑자기 은혜원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오라버니, 어머니와 아이들은?”
 마대위는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잘 듣거라. 요사이 무슨 일 없었느냐?”
 “자, 잘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보거라. 평소와 달랐던 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기억해야만 해.”
 매령령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어, 어제…….”
 마대위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코앞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제 낯선 사내 세 명이 은혜원에 찾아왔었어요.”
 “세 명의 사내? 무슨 일로?”
 “은혜원을 사고 싶다고 했어요.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면서…….”
 순간 그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절대 팔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그랬더니?”
 “그런데도 계속 팔라고 하기에 제가 오라버니 얘기를 했어요. 제령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인데, 혼나기 전에 그만 가라고…….”
 마대위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들에게서 특이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느냐?”
 “붉은색 옷에…, 아! 검을 차고 있었어요.”
 “검?”
 그녀의 말에 마대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백주대로에 검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무림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한, 제정신을 가진 무림인이라면 고아들을 죽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심지어 마교도라 할지라도 양민을 함부로 해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이 고아들을 죽이는 극악한 짓을 저질렀다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말 그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마이거나, 뭔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대위는 후자일 거라 추측했다. 피에 굶주린 살인마라면 굳이 화재로 위장할 필요가 없다. 편안하게 자고 있던 아이들은 미처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들의 손에 죽어갔을 것이다. 방화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리라. 소름끼치도록 깨끗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을 죽여서까지 입을 막아야 할 정도라면 놈들에게는 그만큼 은밀하고 중요한 목적이 있겠지? 그리고 은혜원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서 죽이려 할 게 분명해.’
 만약 얼마 전의 마대위라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고 복수를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혈우천하 장천익과의 싸움을 통해 무림인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 버린 마대위는 갑자기 천길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위험이 자신의 명줄을 끊기 위해 지척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대위는 잠시 생각을 하다 결단을 내렸다. 어쩌면 이런 결단력이 그를 제령에서 최고의 세력인 흑건회의 회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침중한 목소리로 수하들에게 말했다.
 “잘 들어라. 흉수는 무림인들이다. 은혜원을 잿더미로 만든 걸 보면 이곳과 관련된 모든 자들도 죽이려들 게 뻔하다. 그러니…….”
 마대위는 매령령과 혈랑조 수하들의 얼굴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부로 흑건회는 해산한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도록.”
 수하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흑건회를 해산할 수는 없습니다.”
 마대위는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람만 살아 있다면 회는 언제든지 다시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복수도 할 수 있지.”
 일순 그들의 눈이 빛났다.
 복수!
 친혈육은 아니지만 수년간 정을 쌓아온 아이들이다. 비록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파락호들이지만 은혜원의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형들이었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은혜원 아이들을 자식이나 동생처럼 여겼다. 혈랑조원들은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가슴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들의 의지가 하나로 모아졌다.
 마대위가 다짐하듯 다시 말을 이었다.
 “뭉쳐서 도망간다면 위험이 너무 크다. 그러니 각자 흩어져 도망쳐라. 살아 있다면 그리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내년 중양절에 호북성 무한의 황학루에서 다시 만나자.”
 “호북성 무한이요? 형님, 거긴 너무 멀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무한이 가장 적당하다.”
 수하들이 그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다. 저릿한 무언가가 그 사이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살아남아라.”
 “형님!”
 마대위는 매령령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수하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대위는 다시 한번 은혜원의 잔해를 돌아보았다.
 ‘어머님! 지금은 힘이 없어 도망가지만 이 원수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는 매령령과 함께 회운평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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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았나?”
 “없어.”
 “그쪽은 어때?”
 적삼 사내 세 명이 마대위와 흑건회 수하들이 숨어 있던 모옥과 그 주위를 샅샅이 뒤진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산을 거의 뒤엎다시피 수색했으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내들은 모옥 앞에 꿇어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어이, 꼬마. 여기 말고 다른 은신처는 없나?”
 아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독한 공포심에 무릎이 다 까져 선혈이 배어 나오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아이는 그저 악귀 같은 이 적삼 사내들이 얼른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산에는 분명히 없다. 무공을 익히지도 못한 놈들이니 우리가 놓쳤을 리가 없어.”
 적검 방류청의 말에 옆에 있던 또 다른 적삼 사내가 말했다.
 “그곳으로 다시 가서 살펴볼까? 불을 질렀으니 지금쯤 소식을 듣고 나타나지 않았을까?”
 세 사람의 눈빛이 교차하는 찰나 그들은 상대의 의중을 확인했다. 두 명의 적삼 사내가 몸을 날리며 한 마디 던졌다.
 “꼬마를 처리해.”
 “모옥도 깨끗이 태우고.”
 방류청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쳇! 귀찮게 됐군.’
 방류청이 손가락을 살짝 퉁기자 아이는 머리에 구멍이 난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아이의 시체를 모옥 안에 던져 넣은 후 열양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양 손으로 모옥의 벽을 쓰다듬자,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곧 등을 돌려 은혜원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잿더미로 변한 은혜원에 다시 세 개의 그림자가 날아와 내려섰다. 마대위의 은신처를 뒤지고 온 적삼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누군가 왔다 갔군.”
 그들은 불타고 남은 잔해 속에 백골이 드러나 있는 곳을 주시했다. 방류청이 입을 열었다.
 “놈들이 분명해.”
 “어떻게 길이 엇갈렸지?”
 “흩어져서 살펴보세.”
 은혜원 주위를 둘러본 세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모였다.
 한 적삼 사내가 말했다.
 “배가 있더군.”
 “배?”
 그가 비월강 쪽으로 턱짓을 했다.
 “강을 건너 왔어.”
 “젠장, 꼬마가 다리를 건너 그곳으로 달려가는 동안 놈들은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왔군.”
 방류청이 흥미로운 듯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사냥이나 해볼까?”
 그의 말에 두 사람은 눈빛을 빛냈다.
 “사냥이라…, 큭큭, 좋은 생각이야.”
 “당장 시작하지!”
 그들은 은혜원 주변의 땅과 나무들을 주의 깊게 살핀 후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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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 오라버니. 더 이상은 못 가겠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마대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은 매령령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회운평을 지나 호북성 쪽으로 방향을 잡은 터라 조금이라도 빨리 제령에서 멀어져야 했다.
 “령령, 도저히 못 가겠느냐?”
 “헉헉! 오라버니. 저, 저는 더 이상……. 헉헉!”
 마대위는 등을 내밀었다.
 “업히거라.”
 “시, 싫어요. 그럼 둘 다 잡혀요. 헉헉, 차라리 오라버니 혼자 가세요. 헉헉.”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두 번 다시 그런 말 말거라.”
 “오, 오라버니…….”
 그녀는 마대위의 말에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그의 등에 업혔다.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지키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령령을 업은 마대위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쉬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추적자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가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산속 깊이 들어가 숨는 것과 많은 사람들과 섞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제령 인근에 번화한 마을이 없으니 후자의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마대위는 하남성과 호북성의 경계에 위치한 적운산 깊숙이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다. 적운산은 산세가 험하고 숲이 우거져 사람이 들어가 숨을 경우 찾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마대위와 매령령은 20여 리를 걸어서야 겨우 적운산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험준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탄한 길이었으나 갈수록 경사가 급하고 바위도 많아 무척 고된 산행이 되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나뭇가지와 날카로운 바위에 옷이 찢어지고,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겼다. 그는 정작 자신의 상처는 신경 쓰지 않았으나 그녀의 몸에 나는 생채기를 보며 매우 가슴 아파했다.
 “령령, 좀 쉬었다 갈까?”
 매령령은 고개를 휘저었다. 그녀는 상황이 매우 다급함을 알고 있었기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며 고집스럽게 산을 올랐다.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들의 머리는 너저분했고 옷은 넝마처럼 변해 버렸다.
 적운산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몇 배는 더 험했다.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쏴아아!
 어디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천근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고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쏴아…, 콰콰콰!
 물소리는 점차 커져 마치 천둥소리처럼 숲 속을 울렸다.
 “아, 이건……. 폭포예요, 오라버니.”
 “엄청나구나. 이곳에 이렇게 큰 폭포가 있다니…….”
 두 사람은 거대한 폭포의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십 장 높이에서 떨어진 물은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얀 포말을 자욱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대위는 벼랑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찔함에 저절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아마도 적운산 중턱에 있다는 대운폭포인 모양이로구나. 어쨌든 이쪽으로는 갈 수 없으니 조금 내려가서 방향을 다시 잡아야겠다.”
 마대위는 그녀와 함께 폭포에서 물러섰다.
 “헉!”
 갑자기 마대위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매령령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는 적삼 사내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당신은…….”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적삼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대위와 매령령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혈랑 마대위인가 보구나.”
 마대위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매령령을 끌어당겨 자신의 뒤쪽으로 숨겼다.
 적삼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늘 내 운이 나쁘지는 않군. 너와 저 계집아이만 처리하면 내 손으로 셋을 죽이는 셈이니 말이다.”
 마대위는 셋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셋이라면……?”
 “후후, 한 놈을 죽이고 오느라 좀 늦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네놈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겠느냐?”
 그 말에 마대위는 일순 울컥하고 분한 마음이 끓어올랐다.
 “누구를…, 누구를 죽였느냐?”
 “크크크, 어차피 죽을 목숨, 누가 먼저 죽었느냐에 너무 궁금해 하지 마라.”
 사내가 마대위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풍겼다.
 “으으…….”
 마대위는 매령령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싸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고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그때 적삼 사내의 우수가 붉게 달아올랐다. 사내의 손에서 뻗치는 후끈한 열기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마대위의 얼굴을 따끔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저, 저걸 맞으면 그대로 죽는다.’
 마대위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오라버니, 위험해!”
 매령령의 비명에 놀란 마대위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벼랑 끝에 그들이 서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이다. 마대위가 원독에 찬 눈빛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적삼 사내의 우수를 노려보았다.
 “으드득, 개만도 못한 새끼들……. 귀신이 되어서라도 네놈들을 꼭 씹어먹고야 말겠다.”
 적삼 사내는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크크,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시체가 된 자가 서른둘이다. 거기다 네놈의 원한이 보태진들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이만 죽어줘야겠다.”
 그의 우수가 움직이는 듯 싶더니 허공을 가릴 듯 덮쳐왔다. 마대위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느껴졌다. 마대위가 놀라서 눈을 뜨자, 어느새 매령령이 앞쪽으로 돌아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 돼!”
 마대위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몸을 옆으로 홱 제쳤다.
 순간 뭔가 뜨거운 기운이 가슴을 스쳤다.
 “으아악!”
 아찔한 통증이 가슴으로부터 피어올랐다. 마대위와 매령령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폭포 속으로 떨어졌다.
 “쩝, 반반한 계집인데 좀 아깝군.”
 적삼 사내는 벼랑 끝에 서서 잠시 폭포 아래를 내려다 보더니 신형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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