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인생이다. 나이 서른, 의지를 놓아버렸다. 삶 그 자체에 대한 의지 말이다.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달려간다기보다 이제 머지않은 것 같다. 남 탓할 것도 없고, 세상 탓은 더더욱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부 내 탓이니까.
언제부턴가 나태함이란 늪에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늪에 덜 잠겼을 때는 일말의 불안감이 나를 움직여 보려 했다.
그러나 이젠 머리끝까지 늪에 잠겨 그 불안감마저도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더 최악은 자기 혐오감마저 무뎌졌다는 것이다. 그저 텅 빈 공허밖에 남지 않았다.
월세 날이 가까워지면 한 며칠 막노동을 할 뿐이다. 월세를 치르고 나면, 라면 하나로 하루 두 끼를 감당한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면만 먹었다가 저녁엔 국물을 데워 식은 밥을 말아 먹는 생활을 이어간다.
이제는 반지하 월세방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냥 노숙 생활을 해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의외로 분명했다. 컴퓨터를 할 수 없으니까.
지저분한 수염,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 백수 박춘배는 구석에 곰팡이가 펴있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반지하 단칸방에 누워서, 흐리멍텅한 눈으로 천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쫓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 월세 날에는 꼭 죽어야지.’
그러나 박춘배의 눈엔 어떤 비장함이나 슬픔, 의지가 깃들어있지 않았다. 우울함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이 같은 결심도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 자책도 과거에 하도 많이 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마저 닳아 없어졌으니 정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깊은 후회가 있다면 지난날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지 못했단 것이었다.
공부도 나름 열심히 했고, 대학도 어느 정도 좋은 대학을 나왔으나 결국 백수였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공부 같은 거 아무 쓸데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여자도 만나고 클럽도 다니고 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거기서도 인생에 대해 배우고 발전하는 게 있었을 텐데.
독서실과 골방에 처박혀 공부만 하다 서른 살이라니. 그게 너무 억울하고 후회스러웠다.
누군가는 서른 살이면 아직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무기력에 짓눌려 삶에 대한 에너지를 상실해버린 상태였다.
‘진짜 인생에서 만끽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다.’
아무래도 나이를 잘못 처먹은 듯한 박춘배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천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이내 바퀴벌레가 구석의 얇은 틈으로 사라지자, 잠시 누운 그대로 있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컴퓨터를 켰다.
저녁이라 어두컴컴한 방안에 마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모니터에서 빛이 났다. 박춘배는 동태 같은 눈으로 모니터 너머의 세상을 응시했다.
쓰레기더미 같은 바탕화면을 뒤지는 법도 없이, 익숙하게 인터넷에 접속하여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살폈다. 가상현실게임 ‘베르텍스’에 관해서였다.
베르텍스는 그 어떤 스크린샷이나 영상 자료도 없고,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도 없었는데, 게임이 출시되었을 때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상화폐, NFT, 메타버스 등으로 대변되는 가상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커지다가, 드디어 베르텍스로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텍스는 그 등장만으로도 문화, 사회현상을 넘어 인류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누군가는 불가역적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도 했다.
도대체 가상현실게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초인공지능 ‘아타르’가 관리한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공식적인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기에, 실제 플레이를 해본 베타 테스터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어떤 게임인지 알 수 있었다.
게임의 배경은 빛의 시대, 황금의 시대, 왕들의 시대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시대는 인류 역사의 신화시대나 고대, 그리고 중세 정도의 문명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현실과 다른 점은 신과 마왕, 괴물과 괴수, 마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는 세 시대 중 하나를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으며, 레벨은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레벨은 일반인 수준, 2레벨이 아마추어 격투가, 3레벨이 챔피언급, 4레벨은 전설적 영웅, 5레벨은 초인이라는 식이었다.
베타 테스트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인터넷상에서 4레벨을 달성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커뮤니티에 접속하면 유명 플레이어들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서로 의견이 다른 유저 간의 말다툼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게임 내 쓸 만한 철검이 현실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며,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무구는 수억에서 수십억, 전설급 무기는 값을 매길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걸 보면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역전된 게 아닌가 싶은데, 이것에 대한 우려도 지속적으로 표출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우려는 여론 귀퉁이에 몰려 간단히 묵살되었다. 곧 죽어도 베르텍스를 플레이하려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넘쳐났으니까.
베타 테스터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베르텍스가 구현하는 판타지 세상이 생각만큼 꿈과 희망이 가득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레벨 업은 고사하고, 일단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규 유입 플레이어들에게 꼭 클랜에 가입할 것을 권장하며, 자신의 클랜을 홍보하는 말로 끝맺었다.
베르텍스의 세계가 그토록 가혹하다면 왜 굳이 플레이하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었다.
누군가는 신이 되는 걸 꿈꾼다 하고, 누군가는 그저 현대의 상식과 도덕관념을 벗어던질 수 있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 말은 안 하지만, 지금 박춘배가 생각하는 비슷한 이유로 게임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현실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실 어디든지 상관없다는 마음 말이다.
박춘배는 인터넷 사이트 탭을 이리저리 넘기다 결국 한곳에 머물렀다. 그것은 베르텍스에 접속할 수 있는 장비를 파는 마켓이었다.
헬멧처럼 생긴 장비 아래 가격이 적혀 있었다.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0을 하나씩 세었다. 모두 9개였다. 터무니없는 숫자에 알고도 맥이 빠졌다.
베르텍스 베타 테스트 동시접속자 수 1억 명. 박춘배는 그 1억 명에 들지 못했다. 정식 서비스가 내일이었다.
대출이라도 나오면 일단 사고 열심히 게임 해서 장비 팔아 갚을 텐데. 대출이 나올 리가 없었다. 누가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단 말인가.
박춘배는 하릴없이 다시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만 뒤적거렸다. 접속 장비를 사서 자랑질하는 놈들이 넘쳐났다. 그러다 인터넷상의 아무개와 쓸데없는 일로 말싸움을 몇 시간이나 벌이다, 그만 화가 나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혼자 씩씩거리며 눈을 감았다. 백수새끼라는 말이 결정타였다.
‘그래도 난 인격적으로 공격하진 않았는데. 비겁한 놈... 너무해...’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니 이런저런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현실을 생각하다 괴로워서 다시 망상에 빠져들었다. 베르텍스를 플레이하며 유명인이 되고 부와 명성을 거머쥐는 상상이었다. 그러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지난날 알고 지냈던 친구들, 그 밖에 여러 추억이 떠올랐다.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전쟁이라도 났으면, 하는 생각도 했으나 잠시였다. 그렇게 서서히 잠들었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걷히고, 반지하 창문으로 아침 빛이 들어올 때, 박춘배는 다시 깨어났다. 옆으로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니 천장에 붙어있는 바퀴벌레가 보였다.
“안녕.”
박춘배는 잠긴 목소리로 현재 유일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부스스 일어나 출출한 배를 채우기보다 컴퓨터부터 켰다.
어제 말싸움을 벌였던 놈이 아직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이 날 조롱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약간의 자존감 없는 우려와 함께 익숙한 커뮤니티를 켰다.
오늘부터 정식 서비스 시작인데, 커뮤니티 사이트가 온통 난리였다. 다른 사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온 인터넷이 난리였다. 뭐야, 이게.
세상이 망하거나 전쟁이 난 건 아니었다. 누군가 게시판을 도배하고 있었는데, 문장에서 넘치는 희열과 광기가 느껴졌다.
「특이점이 왔다!」
댓글(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