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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고전게임의 고양이 검성

프롤로그

2022.05.11 조회 18,071 추천 615


 위대한 게임이 있었다.
 무분별한 자기 복제로 명줄이 끊기다시피 한 서양 RPG의 불꽃을 다시 지핀 세기의 명작.
 
 시대를 초월한 압도적인 자유도와 뭐든 상호작용이 가능한 선구적인 시스템. 웅장한 서사와 매력적인 캐릭터.
 그야말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게임이었다.
 
 “불편하네. 어렵고.”
 
 모두 옳은 말이었다. 기준이 20년 전이라서 문제지.
 플랫폼에서 무려 99% 할인하길래 산 게임이었다. 단돈 500원에 즐기는 전설의 명작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죽어서 널브러진 주인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TRPG 룰을 PC로 이식해서 만든 게임이라던가.
 TRPG의 높은 자유도를 가져오는 건 분명히 성공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 룰의 정신 나간 난이도까지 가져와 버렸다.
 
 “아니, 길 가다 벼락 맞아서 죽는 건 무슨 미친 전개냐고.”
 
 그냥 어려운 정도가 아니었다.
 1레벨 주인공은 그 흔한 고블린도 목숨 걸고 결투해야 잡을 수 있었다. 고블린이 둘만 덤벼도 황천길이 눈에 아른거릴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사위 신이 보우하길 바라며 고블린을 클릭하는 것뿐이었다.
 
 오크? 어딜 가나 동네북이었던 오크는 꿈도 못 꿨다.
 길 가다 오크를 보는 순간 내년 오늘 제사상 앞에서 조상님이랑 같이 밥 먹을 생각이 없다면 발이 빠지도록 도망쳐야 했다.
 
 적이 강한 건 그래도 납득할 수 있다. 왜 현대에도 무슨 소울이니 링이니 하는 정신 나간 난이도를 가진 게임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연재해로 비명횡사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세상에 벼락 맞아 죽는 주인공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희대의 악당이라 천벌 받아 죽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악당도 벼락 맞아서 죽진 않는다.
 
 “이건 못 참지. 진짜.”
 
 게임을 시작하고 9번째 파티 전멸. 한 시간도 안 되는 동안 이룩한 성과였다.
 원래도 치트나 에디트에 거부감이 없던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치트를 쓰는 내가 나쁜 게 아니라 게임을 이렇게 어렵게 만든 제작진이 잘못이다.
 
 합리화를 끝내고 곧장 에디터를 찾아 내려받은 나는 곧장 플레이어 캐릭터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너무 강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스탯은 생성할 때 올릴 수 있는 수치에서 가장 높은 정도로. 이 정도만 해도 이 세계관에서는 초인에 발을 걸치는 정도라고 하니 딱 적당했다.
 
 아이템도 중요했다.
 처음부터 전설의 무구를 들면 역시 재미를 해치니까 마법 무기가 아닌 것 중에서 제일 좋은 물건 정도만 내 캐릭터에게 쥐여줬다.
 그 외에 집어넣은 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액세서리 정도?
 
 초반에 풍족하게 쓸 만한 돈도 빠트릴 수 없었다. 마법 무구를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일반적인 소비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만 넣었다.
 
 -해당 저장 기록에 비정상적인 수정이 감지됐습니다. 정말 계속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계속해야지.”
 -비정상적으로 수정한 저장 기록으로 연결하시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정말 계속하시겠습니까?
 “왜 자꾸 물어보냐. 제작진 진짜 답답하네.”
 
 이때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에디트나 치트에 적대적인 제작진이야 고전 게임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기에 무시한 게 실수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모니터에 뜨던 글자처럼.
 
 무슨 말이냐고? 어느 날 갑자기 21세기를 살아가던 현대인이 고전 게임 캐릭터가 됐다는 말이다.
 하다못해 어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고인물이면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뭣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에 아예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 에디터 덕분에 힘 좀 세고 나쁘지 않은 무구 좀 가진 몸만 큰 어린아이.
 내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고 공포에 질렸지만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과 마법의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죽으니까.
 
 다행히 세계 멸망이 다가온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스토리를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하도 죽다 보니 답답해서 찾아본 공략에서 얼핏 본 바로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방인, 그것도 좀 튀어 보겠다고 이족 보행하는 고양이 인간을 선택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설정상 다른 대륙에서 온 아예 다른 인종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땡전 한 푼 없는 이방인으로 비참하게 뒷골목에서 구걸하다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는 그렇게 뚝배기가 깨져가며 구르고 또 굴렀다.
 이게 게임 속 세상이라면, 혹시라도 클리어를 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그렇게 시작한 지옥 같은 나날 속에서 닭 모가지도 못 비틀던 여린 청년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사람 모가지를 써는 노련한 검사가 됐다.
 
 모험이라고는 뒷산에 운동 삼아 올라가는 것밖에 모르던 내가 대륙 제일의 모험가라는 위명까지 얻었다. 대미궁의 정복자, 고대 신전의 돌파자라는 허명도 얻었다.
 결국에는 검성이라는 위대한 이름까지 얻었다.
 
 모두 헛짓이었고 헛된 희망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클리어는 없었다.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60년이 흘렀다.

작가의 말

처음으로 문피아에서 공모전에 도전합니다. 

독자님의 바쁜 일상 속에 잠깐이나마 즐거움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33)

co*****    
회귀인가? 아니면 노년 간지?
2022.05.11 15:05
삼류하사    
카짓검성!!!!
2022.05.11 17:08
Kaidro    
2022.05.12 12:20
유동까마귀    
재밌어보이네요
2022.05.12 16:58
문피아제    
떼껄룩
2022.05.16 04:16
조D    
떼껄룩
2022.05.18 06:43
dirk    
아 고양이는 못참지
2022.05.19 00:49
Enju    
안녕하세요
2022.05.19 20:59
나래로    
떼껄룩
2022.05.19 22:27
n5************    
떼껄룩
2022.05.25 12:05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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