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패륜으로 시작하는 조선생활

1화

2022.05.11 조회 68,103 추천 1,600


 솨아아아.
 
 비 오는 소리가 말의 귀를 적셨다.
 
 봄이 이제 막 비껴간 저녁은 여전히 서늘했다. 급히 나온 길에는 등불마저 부족하여 사위가 어둑했다.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어느새 동이 트고, 저물었던 시간이 지나.
 
 마침내, 강 하나를 건넜을 무렵.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느냐.”
 
 검은 비단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쾅, 하고 발을 굴렀다.
 
 끼이이이─
 
 젖은 나루가 귀신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루를 끊고 배들을 모두 가라앉혀라. 가까운 곳의 인가도 전부 철거하란 말이다! 뗏목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할 것 아니냐!”
 
 금군들은 당혹하여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북방 야인도 아니고, 돌섬의 해적들이다. 그런 자들이 배를 불태운다 하여 한강보다 작은 강을 건너지 못할 리 없다.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이들도 절반이 넘는다.
 그런데 지금 건너가서 배를 가라앉히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사람 사는 집을 무너트리라니.
 어찌 만민의 어버이 되시는 주상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허나 신하들은 당혹스러운 마음에 서로를 바라보며 주춤거릴 뿐, 발을 떼지 못했다.
 
 “무엇 하느냐! 지금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중년 사내는 피로한 얼굴 가득 불쾌함을 담아 소리쳤다.
 분에 못 이겨 쾅 하고 발을 구르자, 나루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튀어 그의 옷을 적셨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건 신경도 못 쓸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이 나라 조선의 왕이다. 군주다. 그런 자신의 명을 일개 신하들이 이리 우습게 알다니!
 
 그때였다.
 
 “전하, 고정하소서.”
 
 젊다기보다는 어린 목소리가 그의 귀를 어지럽혔다.
 왕은 그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더욱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세자는 말을 삼가라.”
 “전하. 아직 전하의 신하들이 강 건너에 있사옵니다. 어찌 그들을 버리려 하십니까.”
 “버려?! 버린다고!?”
 
 왕은 일부러 몸을 과장되게 휘저었다. 정곡을 찔린 것을 감추기 위해서인가,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나는 신하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이 한 몸에 대조선 200년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을 세자란 놈이 아직도 모르느냐!!”
 
 일국의 왕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이다.
 신하들도 그저 두려워할 뿐, 특별히 반박하거나 분노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쨌든, 왕이 잡히면 대국은 끝이므로.
 하지만, 그다음 말은 아니었다.
 
 “너는 아직도 이 이치를 모르느냐. 어리석구나, 어리석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너 같은 아둔한 놈보다 신성군을 세자 위에 올렸어야 했다!!”
 
 비가 강하게 내려서 다행이었다. 정승들의 식겁하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렸으니.
 
 ‘이미 한번 숙청을 불러왔던 건저 문제가 다시 부상할 수 있다.’
 ‘하나 지금은 전시요. 적을 목전에 두고 지휘관을 바꿀 순 없는 법이외다.’
 ‘엄밀히 말하면 세자가 지휘관은 아니긴, 한데 말이지요.’
 ‘하면 지금 세자를 바꾸자는 말씀이오!? 이 강바닥에서?’
 
 그때.
 세자의 나직한 말이 빗소리를 뚫고 모두의 귀에 닿았다.
 
 “그리하소서.”
 
 귀를 의심하는 신하들과 말문이 막힌 아비이자 군주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제 겨우 이팔청춘의 세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적을 쫓아 보내고, 종묘와 사직을 다시금 바로 세운 뒤에는, 부디 전하께옵서 바라는 대로 하시옵소서.”
 
 다만, 하고 떨리는 손을 소매로 감춘 소년이 왕을 향해 똑바로 서며 말했다.
 
 “그전까지 조선의 세자는 소신이옵니다. 소신은 세자로서 아래로는 만백성과 신하들을 지킬 것이며, 위로는 전하의 성심을 받들기 위해 간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 건방진 놈이······!”
 
 안 그래도 일그러졌던 왕의 얼굴이, 피로와 분노로 얼룩져 제 원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뭉개졌다.
 
 평소 노회한 정객들인 신하들을 제 손 위 꼭두각시들처럼 다루었던 왕의 모습은 거기 없었다.
 그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늙고 지친 일개 사내만이 거기에 있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도둑이 제 발을 저리듯 아들의 말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다만 발을 구를 뿐이었다.
 비에 젖은 강나루에 고인 물이 잠방잠방 소리를 내었다.
 
 “내, 내 네놈의 역심을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이 감히······!”
 “소신의 마음에는 그저.”
 
 세자의 눈길이 잠깐 강 상류에 닿았다.
 하지만 찰나였던 데다, 그를 정면에서 보는 이는 왕뿐이었기에 그것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이 나라 조선의 안녕과─ 천명(天命)을 섬길 생각뿐이옵니다.”
 
 그때였다.
 쿠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강 상류에서 급작스러운 격류가 흡사 천리마처럼 내달려 왔다.
 유난히 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비가 와 불어난 강물에서는 충분히 위험할 만했다.
 
 특히.
 
 뭍으로 올라가지 않고, 강나루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어느 중년 사내에게는.
 
 “어, 어어억!?”
 
 물결이 왕의 옥체를 범하고.
 균형을 흐트러트려.
 몸이 기우뚱하고 기운 그 순간이었다.
 
 “으, 으어어억!”
 “전하!”
 
 세자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왕의 옷소매에 닿았으나, 이미 젖어 버린 소매는 미끌, 하고 세자의 손을 빠져나갔다.
 
 “사, 살려!! 으아아악!”
 “전하!!”
 “아바마마!!”
 
 비가 오는 강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피란을 나오느라 등촉도 없었다.
 왕의 육신은 순식간에 급류에 휘말려 가라앉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세자가 황급히 뛰어들려 하였으나, 병사들 몇이 그를 붙들었다.
 
 “이 손 놓아라!!”
 “저하! 고정하소서! 저하!”
 “저희가, 저희가 가겠습니다!!”
 
 왕이 사라진 나루에는 빗소리만이 자리했다.
 몇몇 금군들이 몸에 밧줄을 묶고 열심히 물속을 휘저어 찾아보았지만, 어둡기 그지없는 강물 아래에서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영의정 이산해가 빠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께서 실족(失足)하셨습니다. 세자 저하.”
 
 세자, 광해군이 고개를 돌렸다.
 노회한 정객인 이산해는 세자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집에는 한 시도 가장이 자리를 비울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어야 하옵니다. 부디 보위에 오르시어 종묘와 사직을 지키소서.”
 “지키소서, 저하!!”
 
 이산해만큼은 아니지만, 호송 행렬의 신하들은 모두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노신들.
 적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지휘권자가 소실되는 걸 바라는 이들은 없었다.
 
 광해군은 나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녁 비가 깔려 그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잠깐 하늘과 강을 한 번씩 보았다.
 
 깊은 한숨을 쉬며 잠시 이마를 손으로 짚어 얼굴을 가린 새 왕은 일부러 만들어 내는 듯한 북받친 어투로 조용히 말했다.
 
 “알았다. 마땅히 국장을 치르고 즉위식을 해야겠으나, 왜적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난이 끝난 이후 정궁(正宮: 경복궁)을 되찾으면 거행토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 목소리 아래에 깔린 떨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하들은 없었다.
 그들은 왕을 잃었을 뿐이지만, 저 소년에게는 왕이자 아버지를 잃은 것이므로.
 그래서.
 
 “무관들은 신속히 배를 몰아 아직 오지 못한 이들을 마저 강을 건너게 하라. 뱃사공들에게는 후일 후히 보답한다는 증서를 주라.”
 “예. 전하.”
 
 그들은 저 손 아래, 새 왕이 보이기 싫어하는 표정이······.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자. 개성이 코 앞이다.”
 
 몸을 돌린 광해군은 행렬의 첫머리로 다가갔다.
 원래 타고 온 말이 아닌, 아버지가 타던 어마(御馬)에 몸을 실은 그는, 왕이 앉던 편안한 안장에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여기서 시작이군.’
 
 갈 길이 멀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문득 속으로 뇌까렸다.
 
 ‘좆 같은 임진강 용신 같으니······ 일 잘해 준 건 고맙지만, 기왕 보내는 거 좀 더 어릴 때로 보내 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조선의 왕세자, 이혼.
 
 아니, 현대인 의정부시청 문화교육과 공무원 이현은 그렇게 천천히 비 오는 400년 전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
 
 ***
 
 선조 25년 4월 30일 기미년 기사.
 
 ─새벽에 상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상이 근심에 노하던 중 물살이 상을 덮쳐 훙하다.

작가의 말

첫 걸음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떼어봅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댓글(64)

골곤    
어후 중간중간 엔터 좀 넣어주세요. 어휴
2022.05.11 11:28
고스름도치    
수정했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2022.05.11 18:55
간수    
또 어떤 미래인이 빙의한것인가?
2022.05.14 21:01
I레이저I    
시작부터 선조 OUT
2022.05.17 20:39
난의향기    
잘 보고 갑니다.
2022.05.18 09:06
정치검    
런선조 런승만
2022.05.18 11:49
양마루    
건필
2022.05.18 12:14
fa******    
좋다
2022.05.18 14:50
모기탠트    
오 출발 좋네요. 선조 물싸다구 괜찬았음. ㅎㅎㅎㅎ
2022.05.18 22:58
bl*********    
강력한 일본 책사가 시작부터 죽었군 개이득
2022.05.21 22:30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