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 제일의 명문가라면 누구나 남궁세가를 꼽는다.
남궁의 검은 무겁고 진중하며 그 도리가 하늘에 닿는다.
하여 부르기를 창천제일검.
뭇 무인들이 존경하고 세간의 우러름을 받는 집안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마어마한 가문의 하인이다.
“소백아, 뭐 하고 있어? 어여 물을 길어오지 않고!”
“네, 네! 지금 가요!”
남궁세가라고 모두가 남궁의 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성씨는 중하고 무겁다.
남궁 씨를 가진 인간이 막일에 동원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해서 나같이 비루한 종자가 남궁의 품 안으로 들어와서 품삯을 받으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쯧쯧. 이렇게 굼떠서야. 네놈 어미도 그것보다는 빨랐다.”
“헤. 헤헤. 서두르겠습니다, 도련님.”
“그 말 할 시간이면 이미 갔다 왔겠어. 굼벵이 같은 놈.”
나는 어머니부터 이대 째 남궁가의 녹을 받고 있다.
배불러 남궁가로 기어들어 온 걸 당시 총관이 받아 주었다나.
혹시 나도 남궁가의 사생아는 아닐까 기대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포기했다.
눈 씻고 봐도 그들과 나는 닮은 구석이 없다.
남궁의 핏줄은 그 고귀함 만큼으나 출중한 외모와 골격으로 혈통을 자랑한다.
남궁씨를 가진 자 치고 추레한 이가 없다.
모두가 용이과 봉황이다.
나처럼 밑바닥을 기는 지렁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보같이 또 뭉그적거린다고 혼났지?”
“어······. 흐흐. 걱정해 준 거야?”
“뭐라니. 피. 하여튼 둔하기가 벽 씨 아저씨네 거북이보다 더하다니까.”
그렇다고 내가 내 삶을 비관하는 건 아니다.
남궁 씨의 위대함과 비교해서 내가 하찮을 뿐이지, 그럭저럭 삶은 살만하다.
내 앞에서 새초롬히 웃고 있는 항아만 해도 그렇다.
남몰래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
나이가 좀 더 차고 받는 녹이 늘면 어르신께 정식으로 말해서 혼례도 올릴 것이다.
또래 중에서는 가장 미색이 뛰어나니 나도 썩 운 없는 놈은 아니다.
“항아야, 이번에 품삯 받으면 저잣거리로 같이 구경이나 하러 갈까?”
“저잣거리 가서 무얼 하니? 동네 놀음패들 구경이야 담 너머로도 충분한데.”
“저번에 네가 노리개 하나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사줄게. 저번 달부터 품삯을 모았으니까 충분할 거야.”
“정말? 고마워, 소백아!”
볼에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이 떡 벌어지고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항아처럼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를 이렇게나 좋아해 주다니.
내 팔자가 남궁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못나진 않다.
“일 끝나고 봐, 항아야.”
“응. 열심히 해.”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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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등불이 다 꺼지고 종소리에 대문마저 다 걸어 잠근 시간.
창고를 다 정리하고 가장 늦게 정원 쪽으로 나왔다.
하인들 숙소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중앙 통로로는 갈 수 없었다.
그 길은 남궁세가 사람만 쓸 수 있었기에 나 같은 하인은 별수 없이 빙 둘러가야만 했다.
“······으으. 무섭네.”
달도 안 뜬 밤이라 주변이 깜깜했다.
게다가 하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정원에서 밤만 되면 귀신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대 남궁세가에 무슨 귀신인가 싶지만, 실제로 흐느낌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제법 많다.
오줌보를 콱 잡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기를 수 분.
흐윽······흑. 흑. 흐윽.
“힉!?”
바람결에 섞인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아이고 이게 그 귀신이구나.’ 솜털이 쭈뼛 섰다.
사방은 캄캄한데 여자의 흐느낌만 울려 퍼지는 상황. 간이 암만 커도 배짱부리긴 어려웠다.
소리가 들린 쪽의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흐윽. 흑. 도련님······
“어?”
하지만 몇 걸음 뛰기도 전에 걸음을 세워야 했다.
흐느낌 사이로 익숙한 단어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세가 안에서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몇 없다.
혹시나 귀신이 도련님을 홀리기라도 한 걸까 싶어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도련님을 구하면 큰 상을 받을지도 몰라.’
용기가 뭐 대수겠나.
뭔가 바라는 게 있으면 생기는 게 용기다.
찔끔 샌 오줌보를 다시 콱 틀어쥐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산한 바람 사이로 흐느낌이 더욱 짙어졌지만, 이 악물고 나아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발견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오래된 사당이었다.
끼익.
문틈이 비명을 내지르며 열렸다.
동시에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사당의 안쪽, 그림자 사이로 헐벗은 남녀가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섞이던 흐느낌은 귀신의 곡이 아니라 열락의 신음이었다.
‘진짜로 도련님이?’
빌어먹을 호기심은 몸을 채근했다.
살짝 멀어진 틈으로 대가리를 밀어 넣고 요분질 중인 두 사람을 살폈다.
벽에 걸린 등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와 얼굴을 비쳤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열락에 흥분한 듯 붉어진 눈매.
남궁세가의 적통, 남궁진이었다.
“······”
그리고 그 아래에 깔려서 허덕이는 여자.
다름 아닌 항아였다.
아침나절만 해도 나를 걱정하던 바로 그 항아였다.
함께 저잣거리로 나간다고. 노리개에 함박웃음을 짓던.
바로 그 항아가 맞았다.
숨이 멎고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덜컹.
“누구냐!?”
부실하게 쌓아 둔 나무 상자가 다리에 걸려서 무너졌다.
허리를 휘두르던 도련님이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서 내 목을 틀어쥐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나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컥! 컥. 도련님 접니다, 소백······”
“쯧. 네놈이 감히 날 염탐해?”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지나가는 길에 귀신 소리가 들려서······”
“귀신? 큭큭큭. 항아 저 계집의 신음 소리가 그리 컸더냐?”
나는 무어라 답을 하지 못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항아가 왜 저기에. 어째서. 머리에서는 의문만 가득이었다.
“항아야, 이리 오너라.”
“······네, 도련님.”
그 항아가 도련님의 손짓에 천천히 다가왔다.
옷자락으로 겨우 치부만 가린 채. 어딘가 불편하고 짜증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표정.
“네가 평소에 이 얼뜨기와 친하게 지냈었지?”
“친하게 지내다니요.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도련님.”
“왜? 소문에 의하면 이놈과 미래를 약속했다고 하던데.”
“도련님, 짓궂으셔요. 제가 어찌 이런 모자란 인간하고 미래를 약속한단 말입니까. 전 그저 이 못난 놈이 부모도 없이 혼자 있는 게 안쓰러워 몇 마디 나눠 주었을 뿐이에요.”
“햐, 향아야?”
도련님께 몸을 기대고 날 흘겨보는 시선이 너무 낯설었다.
한없이 냉정하고 한없이 깔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쿡쿡쿡. 요 앙큼한 계집이 냉정한 구석이 있구나.”
“아잉, 도련님도 참. 저깟 하인 나부랭이가 어찌 도련님과 비교가 되겠어요. 주제도 모르는 놈의 헛소리는 너무 신경 쓰지 마셔요.”
“그래, 그래. 내 어여쁜 우리 향아를 봐서 네놈의 그 눈깔은 후벼 파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마. 대신 어디 가서 오늘 일을 입이라도 벙긋한다면 네놈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알겠느냐?”
“······네, 네.”
내가 무어라 답을 할까.
향아는 내 여자다! 그녀를 걸고 결투를 하자?
미친 소리. 상대는 남궁세가의 적장자. 나 같은 하인 따위는 마당을 쓰는 비질에도 목이 날아갈 뿐이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은 시체 위에서 비웃겠지.
“그럼, 못다 한 운우지락을 나눠볼까?”
“아아······도련님. 저 못난 놈이 보고 발정 날까 두렵사옵니다.”
“쿡쿡. 저놈도 사내 아니더냐. 어찌 아랫도리는 제대로 세우는지 궁금하기는 하구나.”
“도련님과 비교하면 뜰의 솔잎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하하! 그거참 재미있는 비유로구나. 들었나, 솔잎? 어물쩍거리지 말고 썩 시야에서 사라지거라.”
“······”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쥔 채.
그냥 그렇게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게 나.
하인, 소백의 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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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하루 같이 지나갔다.
그날이 마치 꿈인 것처럼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갔다.
딱 하나 다르다면, 그 날 이후로 날 벌레 보듯 보는 향아 정도.
살갑게 다가와 웃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나와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에잉. 쯧쯧쯧. 이놈아,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보다 못한 주방 이모가 찬을 더 얹어 주며 내게 한마디 했다.
“그 앙큼한 계집이 어디 너만 지분거린 줄 아냐? 좀 괜찮다 싶은 애들은 죄다 꼬리를 쳐 놨어. 창고지기 구일이 놈도 헛간에서 일하는 공도 놈도 마찬가지야. 치마 살랑거리며 간만 봐 둔 거지.”
“그, 그럴 리 없어요. 저랑 결혼하기로 한 걸요.”
“미련하기는. 그 계집 눈에 네가 차겠냐? 넌 그냥 여분이라고. 혹시나 몰라서 한 다리 걸쳐둔 거지.”
평소에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
항아는 원래 유명했다고.
그럼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는 내게 이모님은 딱 잘라 답했다.
“말했으면 네가 들었겠냐? 눈깔 뒤집힌 놈은 처맞기 전까지는 모르는 게야. 그래도 넌 일찍 정신 차렸으니까 지금이라도 앞가림해. 엄한 계집에게 넘어가지 말고.”
“······”
“에잉. 밥이나 처먹고 울어.”
눈물에 밥을 말아서 후루룩 넘겼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된통 당했다는 걸 실감한 셈이다.
남궁 성씨만은 못해도 제법 살만하다고 생각했던 내 삶이······
고작 작은 여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소백아, 어디 갔냐? 창고 정리해야지!”
“네, 네! 지금 나가요!”
그리고 그것조차 슬퍼할 여유가 많지 않은 게 내 삶이라는 걸.
호되게 부르는 목소리에 부리나케 일어났다.
뭐, 어쩌겠는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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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씻어준다고 누가 그랬던가.
계절이 바뀌고 옷감이 두툼해질 시기가 다가오자 항아를 봐도 썩 아프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말조차 섞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기분은 참담했지만, 죽진 않고 살아는 졌다.
다만······
“빌어먹을.”
가끔 바깥 일 하던 형님들이 들고 오던 춘화에 내 자식놈이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침이면 기둥 같고 항아의 분 냄새에는 허리를 굽히고 엉거주춤 걸어야 했던 내가······
지금은 축 늘어진 버섯 꼴이 됐다.
상단을 따라왔던 의사 어르신께 몰래 물어보니 심리적 요인이라고 한다.
크게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왕왕 그런다고.
“쯧쯧. 어린 나이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약으로 어려워. 마음을 잘 다스리고 좋은 짝을 만나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 팔자에 같이 노력해줄 짝까지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고개 못 드는 자식놈 사정을 알면 누가 시집을 올까.
서럽기 짝이 없어서 의사 어르신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정 힘들면 저잣거리 방중술이라도 찾아보든가.”
“방중술이요?”
“그래. 양생(養生)의 효력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냐.”
계속 달라붙는 내가 귀찮았는지 넌지시 건넨 두 번째 방안.
‘방중술을 찾자!’
내 인생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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