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내게 무림은 기연이다

마흔다섯 강소천

2022.05.12 조회 78,841 추천 1,424


 “유감이지만 이번에도 누락일세.”
 
  삼검단 부단주 진명호의 통보에 강소천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승급 비무에서 참패했을 때부터 예상한 결과였다.
 
  새삼 낙담할 이유도 없고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진급누락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무림맹 안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무력단체인 삼검단에 들어온 뒤부터 해마다 겪는 연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싸구려 죽엽청으로 쓰린 속을 달래며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작년까진 분명 그랬는데······
 
  올해는 달랐다.
 
  “새삼 유감스럽지만, 삼검단에 머무는 건 이번 달까지네. 그동안 고생했어.”
 
  부단주는 더 분발하라고 질책하지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가보라고 손짓하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해직을 통보했다.
 
  강소천은 승급 비무 전에 바로 이 자리에서 부단주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올해로 마흔다섯.
 
  무공 경지는 잘봐줘도 고작해야 이류.
 
  자신이 속한 삼검단 이조 안에서는 그럭저럭 먹히는 실력이지만, 역시 나이가 문제였다.
 
  삼검단 단원들 중에서 제일 연장자인 건 물론이고,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부단주보다도 자신이 나이가 많았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맹을 떠나야 한다는 최후통첩에 비무대 위에서 이를 악물고 검을 잡았다.
 
  하지만 채 십여 합도 겨뤄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보초 근무를 서고 표국에 파견을 나가고 잡무에 시달리느라 무공을 연마할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갈 데는 있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묻는 말이었다.
 
  열일곱 살에 무림맹에 들어와 마흔다섯 살이 된 올해까지, 무려 이십팔 년 동안 줄곧 삼검단에서 먹고살았다.
 
  이제 와서 갈 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열일곱 살 때 쫓기듯이 떠나온 본가가 생각났다.
 
  만파검문(萬派劍門)
 
  한때는 절강성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문파였지만, 강소천이 태어났을 때쯤엔 이미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후손들 중에 두각을 나타내는 기재가 없기도 했지만, 개파조사가 남긴 비전 검법과 심득이 실전된 게 결정타였다.
 
  무림 문파는 고수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돈 들어올 구멍도 사라지고 다른 문파들의 공격과 견제를 이겨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고수를 배출하는데 실패하자 문주인 아버지는 정치적 영향력이나 인맥을 쌓아서라도 가문을 살리려고 몸부림쳤다.
 
  그 과정에서 무림맹과 연을 맺으려고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던 강소천을 하남성 성도로 보냈다.
 
  어릴 때부터 서자로 천대받으며 눈칫밥만 먹어왔던 강소천은 감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집을 떠나 무림맹 최하급 조직에 입단한 뒤로 처음 몇 년 동안은 가끔씩 서신을 받았다.
 
  무인들 특유의 어설픈 필체와 건조한 문장으로 쓰여진 서신엔 타향살이하는 피붙이에 대한 걱정은 한 문장도 없었다.
 
  온통 빨리 공을 세워 출세해서 가문에 보탬이 되라는 독촉뿐이었다.
 
  강소천은 가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를 악물고 무공을 연마했다.
 
  하지만 본가에 있을 때 제대로 무공을 배우지 못한 터라 시작이 늦었고, 하급 무사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고해봤자 삼재검법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손에 굳은살이 배이고 찢어져서 피가 날 정도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지만, 무공은 크게 늘지 않았다.
 
  몸만 축날 뿐이었다.
 
  아버지는 서신으로 실망과 질책만 쏟아내다가 오 년쯤 지나자 버리듯이 연락을 끊었다.
 
  강소천도 본가에 더는 서신을 보내지 않았고, 휴가를 받아도 절강성엔 가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연이 끊어지고 십여 년 뒤에 아버지가 죽었다.
 
  만파검문은 이제 완전히 쇠락했다.
 
  문파가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해도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은향루라고 알지?”
 
  부단주의 물음에 정신이 든 강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거기서 사람을 구한다더군. 생각 있나?”
 
  강소천은 숨길 수 없는 모멸감으로 눈매를 찌푸리며 부단주를 바라봤다.
 
  은향루는 창기들이 몸을 파는 홍루 중에서도 질이 아주 나쁜 곳이었다.
 
  거기서 일하는 문지기들은 대부분 사파에 가까운 왈패나 불한당들이었고, 드나드는 손님들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하급이지만 그래도 자신은 무림맹에서 잔뼈가 굵은 무사였다.
 
  아무리 밥줄이 떨어져 생계가 막막해졌다지만, 창기들 기둥서방이나 하라니······
 
  강소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공이 이류라고 자존심까지 이류인 건 아니었다.
 
  허나 찻잔을 매만지며 덤덤하게 자신의 시선을 받아내는 부단주의 얼굴엔 그 어떤 멸시의 감정도 없었다.
 
  나름 챙겨주려고 꺼낸 제안이란 걸 알기에 화를 내기도 뭣했다.
 
  그렇다고 덥썩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강소천이 힘겹게 대답하자 부단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내일 중으로 답을 주게. 그 자리도 없어질지 모르니까.”
 
  강소천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섬돌을 내려서자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게 얼굴로 쏟아졌다.
 
  강소천은 멈춰서서 고개를 젖혔다.
 
  탁 트인 높고 파란 하늘을 보고 있자니, 궁지에 몰린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비좁은지 새삼 실감이 들었다.
 
  새들은 길 없이도 하늘을 잘도 날지만,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생에 길이 없다는 건 객사하기 딱 좋은 팔자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대로 맹에서 나가면 잘해봐야 중소 표국의 객원표사로 구르다가 산적들과 동귀어진하거나, 낭인이 되어 칼밥 좀 먹다가 고수들 칼날에 목이 잘릴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은향루는 아니다······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강소천은 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외성 안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다들 일은 안 하고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고 내당의 무인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신단끼리 또 한 판 한 건가?”
 
  사이가 좋지 않은 주작단과 백호단을 떠올리며 걸어가다가 낯익은 얼굴이 보여 강소천이 손을 들었다.
 
  “어이, 장 형!”
 
  강소천이 소리치며 알은체를 하자 잰걸음으로 걷던 중년 남자가 돌아봤다.
 
  전서구를 관리하는 비응당에서 근무하는 장성거였다.
 
  “어어, 강 형.”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이렇게 뒤숭숭해?”
 
  장성거는 주변을 살피며 다가와서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삼장로가 만풍대를 끌고 호북성으로 갔어.”
  “거긴 왜?”
 
  강소천이 갸웃하자 장성거가 피식 웃으며 혀를 찼다.
 
  “아직 소식 못 들었소?”
  “무슨 소식?”
  “검존(劍尊)의 검총(劍塚)이 발견됐다는구려.”
 
  진짜라면 경천동지할 소식이지만, 강소천은 맥빠진 실소를 지었다.
 
  “또?”
 
  일 년 전, 독고세가의 셋째 아들 독고연후가 강호를 주유하다 우연찮게 장보도(藏寶圖)를 하나 발견했다.
 
  무림엔 온갖 기인이사와 멸문한 문파들이 넘쳐나기에 그들이 남긴 장보도 또한 심심찮게 나돌았다.
 
  물론 대부분이 무공에 눈이 먼 무인들을 등쳐먹으려는 가짜였다.
 
  기적처럼 진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무림엔 한바탕 피바람이 불곤 했다.
 
  독고연후는 평소 연이 깊은 무당파 장로에게 장보도의 진위 판별을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장보도가 전대 무림 사존 중에 하나였던 검존 목순염이 남긴 진품이라는 소문이 무림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목순염은 제대로 된 사문도 없고 남긴 제자도 없었다.
 
  오직 검 한 자루만 들고 독보강호했던 출신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절대고수였다.
 
  하지만 무공의 경지만큼은 의심의 여지없이 압도적이었다.
 
  마흔이 되기도 전에 화경에 이르렀고, 일설에는 무림에서 자취를 감출 때쯤엔 전설의 경지인 현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대 십대고수들은 물론이고 같은 사존에 속하는 다른 절대고수들 중에서도 그를 꺾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검(劍)은 만병지왕(萬兵之王)으로 불리며 무림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병장기지만, 검으로 ‘존(尊)’의 칭호를 얻은 건 검존이 유일했다.
 
  그런 전설적인 고수가 남긴 검총이라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무림맹은 물론이고,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삼류 무인들마저도 피가 끓어오르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검존의 장보도 얘기를 들었을 때, 강소천도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마음이 설레고 뒤숭숭했었다.
 
  연이어 검총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진지하게 퇴직을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검총이라고 찾아낸 것들은 죄다 옛 왕조 시대 귀족들의 무덤이거나, 멸문한 문파의 유산이거나 다른 은거기인들의 은신처로 밝혀졌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렇게 가짜로 판명된 검총만 해도 다섯 개가 넘었다.
 
  “이번엔 진짜라네. 현허진인(玄虛眞人)이 확인했다는구만.”
  “현허진인이?”
 
  장보도 판별을 부탁받은 무당파 장로까지 달려갔다니 강소천도 그제야 좀 솔깃해졌다.
 
  “위치가 어딘데?”
  “호북성 화을산(和乙山)이라네.”
  “호북성?”
 
  화을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무당파가 자리 잡은 호북성에서 검총이 발견됐으니 아마 지금쯤 무당파에서 접수했을 것이다.
 
  삼장로가 무력대를 끌고 달려가봤자 이미 늦었을 것이다.
 
  “알았네. 그럼 다음에 보세.”
 
  숙소로 돌아온 강소천은 침상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번 달도 딱 오 일 남았다.
 
  “여기도 이제 끝이구나······”
 
  무려 이십팔 년을 몸담았던 곳이다.
 
  집에서 태어나 자란 세월보다 십일 년이나 더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냈다.
 
  남들은 손자를 볼 나이에 자신은 아직 독신이었다.
 
  무림맹 무사들 중에서도 가정을 꾸린 이들은 많지만, 그것도 일류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다.
 
  하급 무사들 대부분이 빠듯한 월봉으로 먹고살며 아낀 돈으로 홍등가에서 욕정을 풀거나, 마작판에서 좌절된 인생의 낙을 찾는다.
 
  강소천도 몇 번 동료들을 따라 가봤지만, 어느 쪽도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쉬는 날엔 장서각에서 빌린 책이나 보며 소일거리했는데,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쓰는 동료들에겐 그게 상당히 아니꼽고 희한하게 보였다.
 
  하급 무사 때려치우고 과거를 보라는 둥, 환관처럼 살 거면 차라리 동자공을 익히지 그랬냐는 둥 놀림 받기 일쑤였다.
 
  처음엔 강소천도 그냥 귓등으로 흘려들었지만, 이제는 진짜 그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학문의 천재들이 우글거리는 대과는 어림도 없지만, 하급 관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여자와 이렇게까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면, 동자공을 익히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어디서 가르쳐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앞으로 뭘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까?
 
  아니, 더 살 필요가 있을까?
 
  이런 지루하고 가망없는 인생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후우우우우.”
 
  숨통을 조여오는 절망적인 생각들을 몸밖으로 밀어내려고 강소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숨을 들이쉬었을 때, 방금 전에 본 들뜬 얼굴들이 떠올랐다.
 
  “검존의 검총이라······.”
 
  검을 찬 무인들 중에 인생역전의 기연을 꿈꿔보지 않은 자가 있을까?
 
  지금쯤 소문을 듣고 득달같이 모여든 무림인들로 호북성 일대가 들끓고 있겠지.
 
  비록 그들 중 그 누구도 검존의 기연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먼발치에서나마 전설의 유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다면 평생의 안줏거리는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자니 강소천도 문득 마음이 동했다.
 
  “······한 번 가볼까?”
 
  여기서 호북성까지는 관도를 따라 걸으면 이틀 거리였다.
 
  화을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호북성 안이라면 하루나 이틀 정도면 충분하다.
 
  절정고수가 경공을 발휘하면 하루 안에도 닿을 거리지만, 이류 무사에 불과한 강소천은 아무리 걸음을 서둘러도 사흘은 필요했다.
 
  “그래, 가보자. 씨발, 한 번 구경이나 해보자!”
 
  강소천은 침울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떨쳐내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존의 검총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니 우울한 마음은 저만치 멀어지고 회광반조 같은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소천은 선반에서 질기고 두꺼운 무명으로 만든 보자기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댓글(56)

겨란거자    
느낌이 좋네요
2022.05.12 11:39
제대로산나    
전작보고 믿고 봅니다
2022.05.12 13:15
제대로산나    
정치력 영향력이나 -> 정치적 영향력이나 일거 같아요
2022.05.12 13:17
데이우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2022.05.12 13:54
적책기    
와 글 사이사이에 하급무사의 감정묘사가 묻어나오네요. 느낌이 좋습ㄴ디ㅏ.
2022.05.12 13:42
요기용    
소식듣고왔습니다~ 선작부터 꾹~
2022.05.12 14:44
sw****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5.12 23:07
보람이맘    
잘보고갑니다
2022.05.13 00:12
할배짱    
좀더 쌓이면 보려 했는데.. 못참겠습니다..
2022.05.13 15:45
푸른달바람    
시작이 좋네요. 전작이 워낙 좋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2.05.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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