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짐꾼이 건넨 약을 빨았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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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조회 63,056 추천 1,051


 1.
 
 요즘 같아선 동이 트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진다.
 
 학창 시절엔 워낙 아침 잠이 많아 지각을 밥 먹듯이 했던 나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잭에게 귓불 몇 번 쥐어 틀린 이후론 나조차 모르고 살던 생체 시계가 정확한 기상 시간을 알려 주곤 한다.
 
 “으그그그그긋.”
 
 방문이자, 집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뒤엔 한껏 기지개를 키며 밤새 굳었던 관절을 풀어 준다.
 
 그리곤 곧장 물지게를 메고 울타리를 나선다.
 
 목적지는 산중턱의 샘터.
 
 물을 길어 정오 무렵까지 돌아오려거든 바지런히 걷고 산을 타야 한다.
 
 길을 나설 땐 어쩔 수 없이 이웃의 2층 집이 눈에 밟힌다.
 
 2층에다 방이 8개나 되는, 으리으리한 저택이다.
 
 그 집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잭.
 
 모자 안 쓴 슈퍼 마리오처럼 생긴 중년 아저씨다.
 
 내가 일하는 가게의 사장님이기도 하고.
 
 사실 내가 머무는 독채도 원래는 사장님 집 헛간을 개조한 거다.
 
 저택과 허름한 오두막이 같은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이유다.
 
 “나도 언젠가는 꼭···.”
 
 잭이 말하길, 자기 가게에서 20년 쯤 근속하며 열심히 모으면 나도 그런 집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여태 10년을 보냈으니, 이제 딱 절반 남았네.
 
 “그나저나···. 여기 넘어온 지도 벌써 10년이나 됐구나.”
 
 이곳 바그다뮤에서 나는 외노자였다.
 
 외국이 아니라 무려 다른 차원에서 넘어 온 외계인 노동자 말이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10년 전 그날을 선연히 떠올릴 수 있었다.
 
 원룸.
 야동 시청 중.
 바지춤에 슬며시 손이 내려가던 순간.
 갑작스레 허공에 생겨난 타원형의 원반.
 
 마치 게임 속 포탈처럼 이글이글 발광하던 그것에,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고 말았다.
 
 그 호기심의 대가로 이처럼 차원 이동을 당해버린 거고.
 
 그때 그냥 그 잠깐의 유혹을 견디고 포탈을 무시해버렸더라면.
 
 잠시 헛것을 본 거라며 내리던 바지나 마저 내렸더라면.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첨단 문명을 누리며 평범한 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를 이 세상에 뱉어냄과 동시에 포탈은 곧장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래도 뭐.
 
 요즘 같아선 이곳에서의 삶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얼핏 다른 생김새 탓에 처음엔 마주치는 족족 살짝 놀라거나 데면데면하게 굴기도 했지만.
 
 워낙 동네가 좁고 사람도 없다 보니 이제는 다들 가족같고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가끔 아랫동네 내려가면 놀려대기 바쁘던 아해들마저 지금은 정겹게 손까지 흔들어 준다.
 
 이제와 이곳에서 나에게 화를 내거나 싫은 소리를 해대거나 불퉁하게 굴거나 면박을 주거나 하는 위인은 잭 말고 아무도 없었다.
 
 생명의 은인이지만,
 악덕 고용주이기도 한 잭.
 
 어제도 마감 때 시약 한 병 재고 안 맞는 거로 그 난리를 피우며 나를 갈궈댔었지.
 
 결국 범인이 사라인 거로 밝혀진 다음엔 자기도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흘리며 도망치듯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진짜, 내가. 사라만 아니었어도···.”
 
 사라는 잭의 딸이다.
 
 그리고 엄청난 미인이다.
 
 그런데 열다섯 살이다.
 
 어서 5년만 더 지나길 기다리는 중이다.
 
 ···는 개소리고, 사실 이 동네엔 법적 미성년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부모가 허락하면 열다섯, 그보다 어린 나이에도 시집 장가를 간단다.
 
 마치 그 옛날 우리네 조상님들이 그러했듯 조혼이 흠이 아닌 세상인 것이다.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허락이다.
 
 잭은 낌새가 항시 날 못미덥게 여기는 듯했다.
 
 고로 그가 나를 사위로 들일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사라, 그 아이는 늘 내게 친절하고 상냥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날 따르기도 아주 잘 따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사라에 대한 내 감정 또한, 이성애異性愛라기보단 가족애에 더 가깝다.
 
 마치 저세상 미모의 여동생을 둔 오라비의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내가 이 세계, 이 가게에서 여태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부녀의 환상적인 밀당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아빠가 갈굼의 화신이라면
 딸은 용서와 화해를 부르는 여신이랄까.
 
 “후우-.”
 
 잡념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샌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우선은 양쪽 물통에 한가득 샘물을 길어 놓았다.
 
 그리곤 비치된 바가지로 한 사발 떠 목도 축였다.
 
 “크으-.”
 
 시리고 청량한 기운이 뱃속을 지나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약숫물 자체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
 
 잭은 이 물을 베이스로 각종 음용수를 제조 및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마치 건강원과 비슷한 개념의 가게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그곳의 점원이었고.
 
 “···쩝.”
 
 솔직히 처음 한동안은 모종의 자괴감에 사로잡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설이니 웹툰이니.
 그런 거 보면 차원 이동해서 다들 그럴듯한 능력을 얻거나 배운 다음에 호위호식하며 잘만 살아가든데 말이다.
 
 “하다 못해 급여라도 제대로 챙겨주길 하나.”
 
 물론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긴 했다.
 
 문제는 그 돈, 실물의 대부분을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가 없다는 거다.
 
 몇 년 전, 부지불식간 내 꿈을 털어놓은 게 화근이었다.
 
 언젠간 사장님 댁처럼 큰 집을 지어 살고 싶어요.
 
 그 한마디 말로 인해 그 달부터 내 월급의 대부분은 장부에서나 구경 가능한 숫자가 되어버렸다.
 
 꿈을 빨리 이루려면 저축과 투자로 자산을 불려나가야 한다며.
 
 외노자인 너는 그쪽 생리에 어두울 테니 자신에게 맡기라면서.
 
 무려 급여의 70퍼센트를 떼가고 있었다.
 
 처음엔 호구 짓 같아서 꺼림칙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내 대신 종종 아빠 장부를 확인해 보는 사라가 말하길, 내 돈이 착실히 불려지고 있다고 하니 이제와 딱히 불안한 건 없었다.
 
 “뭐, 잭은 못 믿어도 사라는 믿을 만 하니까.”
 
 내가 매일 물을 길러 오는 이곳 샘터는 끝장나게 전망이 좋은 자리이기도 하다.
 
 목을 축일 때마다 굽어보고 둘러보는 산 아래 세상은 절경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그 중 한 지점엔 유독 내 시선이 오래 머물곤 했는데, 다름 아닌 집터로 점 찍어둔 자리였다.
 
 사실 더 마음에 드는 곳이 따로 있긴 했었다만, 최종적으론 그나마 사장님 댁에서 제법 가까운 위치로 정했다.
 
 내가 멀리 이사할 경우, 사라가 몹시 슬퍼할 듯해서다.
 
 ···아님 말고.
 
 *
 
 “후우-. 후우-.”
 
 가게 근처에 다다랐을 때, 내 호흡은 평소보다 다소 거칠어져 있었다.
 
 시간을 맞추려 스스로 걸음을 보챈 탓이었다.
 
 그럼에도 평소 때보다 약간 늦은 시각에 도착하고 말았다.
 
 하산이 지체된 이유는 뜻밖에 약초를 발견한 탓.
 
 ‘돌로레’라고.
 
 흡사 인삼을 닮은 이쪽 세계의 제법 귀한 식물로써, 어지간한 건강 음료의 베이스가 되는 약초다.
 
 돌로레는 워낙 약효가 뛰어나, 첨가되면 최소 세 배 이상의 값을 받을 수 있다.
 
 고로 지각으로 인한 잭의 잔소리 쯤은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으리란 계산에서, 나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 돌로레를 캐 왔다.
 
 그런데 뭔가···.
 
 “다녀왔··· 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가게 안의 공기가, 어쩐지 평소완 다르게 느껴졌다.
 
 저 끝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잭의 분위기가 썩 심상찮다.
 
 나는 물지게를 내려놓고서 가만히 다가가 그를 불렀다.
 
 “저기-. 잭. ···잭?”
 
 연이은 부름에도 미동조차 없는 모습.
 
 대체 무슨 이유로 그리 분위기를 잡는 걸까.
 
 난 좀 더 세심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시선이 반쯤 열린 문 너머의 뒷뜰에 고정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시선을 쫓던 나는 순간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허업!”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며 세상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오색으로 어우러져 이글이글 타오르는 타원형의 빛무리.
 
 그것은 다름 아닌 포탈이었다.
 
 나를 이 세계로 데려다 놓은 바로 그 빌어먹을 차원 이동문 말이다!
 
 “돌아갈 게냐?”
 “······!”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귓가로, 불현듯 잭의 음성이 묵직하게 흘러 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그러나 그러하기에 더욱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사오 년 전쯤이었다면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터다.
 
 아니, 대답조차 생략한 채 곧장 저 애증의 빛무리로 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빌어먹게도 너무 정이 들어 버렸다.
 
 맑고 깨끗한 천혜의 환경이며,
 
 그러한 자연을 닮은 이곳의 사람들까지.
 
 이 모든 걸 두고 떠나자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강렬한 그리움이 일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의 편리했던 삶이며, 친구며 지인들의 근황도 몹시 궁금해졌다.
 
 돌아가면 다 누리고, 다 만날 수 있을 텐데.
 
 ···시발.
 나더러 어떡하라고.
 
 “갈 것이냐 물었다.”
 
 거듭된 물음에도 나는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어떤 선택을 한다 한들, 평생의 후회로 남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남고자 한다면, 스스로 저 문을 닫아라. 가고자 한다면···. 막지 않으마.”
 
 잭이 덤덤한 기색으로 비켜셨다.
 
 나는 그의 배려가 몹시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조타수는 늘 나 자신이어야 한다.
 끌려 다니지 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라.
 
 잭이 늘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말들이었고, 그 중 틀린 말도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
 “발견 직후보다 직경이 퍽 줄었어.”
 “······!”
 
 그의 말마따나 포탈은 점차로 그 크기가 쪼그라드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수 분 내에 완전히 소멸할 듯했다.
 
 그래서 고민은 길지 못했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나는 결국 금세 문을 닫고 돌아섰다.
 
 나를 바라보는 잭의 표정이 퍽 놀란 듯했다.
 
 멋쩍음에 나는 대강 둘러댔다.
 
 “못 가겠어요. 그동안 사장님께 맡겨 놓은 월급이 아까워서라도 말입니다. 누구 좋으라고 그 돈 다 놓고 떠납니까? 못 떠나죠.”
 
 물론 본심은 따로 있었지만,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기엔 잭과 내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다.
 
 그래도 알아서 걸러 들었겠지?
 
 “좀 늦어서, 오픈 시간 맞추러면 바지런히 움직여야 해요.”
 
 나는 짐짓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으론 변명도 잊지 않았고.
 
 “참. 오늘은 제가 왜 늦었냐면요. 글쎄 내려오다 돌로레를 봤···.”
 
 퍽-.
 
 나의 바그디뮤에서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둔탁한 소음과 동시에 뒷머리에 가해진 충격.
 
 뒤이어 잠시 후 내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른 듯한 느낌.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나는 돌아와 있었다.
 
 내가 살던 차원.
 
 지구.
 
 고향 대한민국으로.
 
 *
 
 1,000일 전.
 
 지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증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추정 70만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문자 그대로 증발되어 버린 것.
 
 목격자들의 증언은 한결 같았다.
 
 갑작스레 허공에 나타난, 이글거리는 타원형의 무엇이 실종자를 집어 삼켰다고.
 
 곧장 세계 각국 정부의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진상을 밝혀낸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던 차.
 
 인류에게 또 한번 뜻밖의 기이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대규모 실종 사태로부터 500일째 되던 날.
 
 지구 전역 곳곳에서 갑작스레 아치형 기둥이 나타난 것이다.
 
 흡사 성문을 따로 떼어 놓은 듯한 모양의 그것은 높이와 너비가 각각 50M, 30M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후에 ‘게이트’라 명명된 이 물체는 지형지물을 가리지 않고 생겨난 탓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시켰다.
 
 대한민국의 경우만 봐도 생성된 8개의 게이트 중 1개체가 대낮에 고속버스터미널 위로 떨어져 내린 바람에 교통이 마비되는 등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었다.
 
 하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곧 아치 사이 공간이 뒤틀리며 흉측한 마물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기 시작했으니까.

댓글(51)

하우저    
잭이 툴툴거려도 주인공 챙겨주네요
2022.06.06 05:20
흠집    
맡겨놓은 돈 주기 싫어서 떠민거 아님?
2022.06.09 09:41
추운검    
독체 >>> 독채
2022.06.09 12:08
글짓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2022.06.09 12:27
페르딕스    
???? 훈훈한 장면이었는대 설마 돈 떼 먹으려고???
2022.06.10 08:02
k8*************    
돈은 못주지
2022.06.11 10:20
백백오    
뜻밖에 > 뜻밖의
2022.06.11 11:39
li********    
잭이 말을 무뚝뚝하게 해서 그렇지 주인공 잘 챙겨주네요
2022.06.11 13:34
ReDArachne    
호윗호식 ‐----> 호의호식
2022.06.11 17:14
글짓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6.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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