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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게임

2022.05.23 조회 33,619 추천 679


 001-인생 게임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바벨의 초대를 받았다.」
 
 뭐, 그렇다고 새카만 암흑 속을 살고 있지는 않다.
 
 아주 좁은 시야로 보이는 흐릿한 형체들. 그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다.
 
 「등반가 길드의 접수원이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아직까지는.
 
 「주점에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망막색소변성증.
 이름부터 어려운 희소 질환.
 
 「Lv 1, 종족 하프만, 성별 남, 이름 트랄 몬크.」
 
 어느 순간 밤눈이 안 좋아졌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병이 진행되었다.
 
 「트랄이 당신의 파티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우울증도 심하게 왔고 자살 충동까지 느꼈었다. 지금은 부정-분노-공포-흥정의 단계를 거쳐 수긍의 과정에 도달한 지 오래다.
 
 바람이 있다면 완전한 암흑이 찾아오는 시기가 조금은 멀었으면 하는 것.
 
 「트랄이 프란체스카와 연인이 되었음을 쑥스럽게 고백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당신은 탑의 9층에 들어섰다.」
 
 다행히 오늘은 창문가에 들어오는 햇빛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
 
 건조해진 목이 따가웠다.
 
 더듬더듬,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찾아 목구멍에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시원한 냉수가 전신 구석구석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침 대용으로 칼로리바 하나를 뜯어 입에 물고 침대로 돌아왔다.
 
 “폰이 어디 있지?”
 
 양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뒤적였다.
 
 밤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버릇. 딱히 더 잘 보이게 되는 것도 아니건만 자꾸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세수할 때 만져보면 깊은 주름이 파인 게 느껴지곤 했다. 성질 더러워 보이려나? 내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찾았다.”
 
 베개 밑에 숨어있던 스마트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바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빅스리, 바벨 실행시켜줘.”
 
 스마트폰의 인공지능이 앱을 실행시켰다.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BGM.
 
 《바벨》, 나의 인생 게임.
 
 텍스트로 구성된 미궁 탐사물. 사운드 보이스 기능을 이용해 플레이할 수 있다. 최고의 그래픽카드인 상상력을 이용해서!
 
 “는 개뿔······.”
 
 「갈림길에 도착했다. 트랄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프란체스카가 오른쪽 길에서 미약한 신성을 느꼈다.」
 「왼쪽과 오른쪽. 당신은······.」
 
 “오른쪽으로.”
 
 나에게나 인생 게임이지.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그래픽을 보여주는 VR 게임이 나오는 요즘이다. 당연히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거의? 나 말고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흔한 공략카페조차 없으니까. 과거 머드 게임의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나 한 번쯤 해볼까?
 
 「프란체스카가 ?? 여신상을 발견하고 감격했다.」
 「파티원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회복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람들도 괴랄한 난이도 때문에 금방 떨어져 나갈 게 분명하다.
 
 내 플레이 타임은 이제 3만 시간이 코앞. 공략 하나 없이 맨몸으로 때워야 했다지만, 정말 미친 난이도였다.
 
 1층부터 10층까지 이루어진 바벨의 미궁.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9층을 클리어할지도 몰랐다.
 
 「트랄이 구석에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무시해.”
 
 여기까지 도달한 건 나도 처음이기에 함정의 패턴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보물 상자는 가끔, 아주 가끔 치명적인 함정인 경우도 있다. 거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의 신상.
 
 이건 무시하는 게 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트랄이 진귀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한다.」
 「프란체스카가 신의 제단 근처이기에 안심하고 열어도 될 거라 조언했다.」
 
 “무시하라고! 씨발!!”
 
 회차를 반복할 때마다 만나게 되는 새로운 동료들은 각양각색의 가치관과 성격을 지녔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을 보는 듯한 그들은 가끔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트랄이 상자를 열었다.」
 
 “아오! 트랄 저 새끼!”
 
 찰나의 순간, 제발 별일 없기를 기도했다.
 
 「?? 여신상이 칠흑으로 물들며 기괴하게 웃었다.」
 「심연이 트랄을 빨아들인다!」
 「프란체스카가 트랄의 손을 잡았다.」
 
 “씨발!”
 
 「트랄, 그와 함께했던 유쾌한 모험이 그리울 것이다.」
 「프란체스카, 그녀는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파티의 길잡이와 힐러를 동시에 잃었다. 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집어던졌다.
 
 시체조차 남지 않았기에 되살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부활 물약인 엘릭서도 남아있지 않지만.
 
 새로운 동료를 육성하려면 얼마의 시간을 쏟아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하, 트랄 새끼······.”
 
 잠시 침대에 앉아 머리를 식혔다.
 
 금방 손이 심심해져 던져버린 스마트폰을 주워 들었다.
 
 “10층 찍고 복귀해야겠지.”
 
 탑의 새로운 층에 도달하면 레벨이 오른다. 10층을 찍고 내려가는 게 당연한 선택.
 
 거기다 10층 포탈이 더 가까울 거다. 길잡이와 힐러를 잃은 상태라 되돌아가다 게임 오버를 당할지도 몰랐다.
 
 갈림길로 되돌아가 게임을 진행했다. 다행히 별다른 무리 없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당신은 10층으로 가는 포탈을 발견했다.」
 
 “가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올라가시겠습니까?
 
 “응?”
 
 평소 듣던 음성이 아닌 것 같은 미묘한 이질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안 올라가겠냐. 올라간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
 
 
 -짹짹.
 
 귓가를 간지럽히는 참새 소리가 나를 깨웠다. 도대체 언제 잠든 거지? 분명히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창문을 열어놨었나? 바닥은 또 왜 이리 차가워.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나?
 
 몸이 으슬으슬한 게 몸살이라도 걸릴까 두려웠다.
 
 눈을 떴다.
 
 차디찬 돌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이, 보여?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왼손 엄지 뿌리 쪽에 옅은 화상자국이 보였다.
 
 내 손이 맞······.
 
 “없어?”
 
 오른손등에 있어야 할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왼손의 화상자국과 오른손등에 흉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번갈아 보며 질문을 던졌다.
 
 두 상처의 차이는?
 
 왼손의 화상은 어릴 때 라면을 끓이던 도중에, 오른손등의 흉터는 시력을 잃은 뒤 넘어져서 생겼었다.
 
 “부상 시기인가.”
 
 오른쪽 바지를 걷어 올려 정강이를 살폈다. 사물이 거의 안 보이기 시작할 때 벽돌 모서리에 찍힌 흉터가 있어야 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정강이.
 
 이번엔 손가락으로 미간을 더듬었다. 버릇 때문에 깊게 파인 주름을 찾았다.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잿빛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길과 좌우로 보이는 낮은 주택들. 유럽에 배낭여행 갔을 때 방문했던 시골 마을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이른 아침인가?”
 
 주변 파악을 마친 나는 복장과 소지품을 확인했다.
 
 검은 면티에 삼선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는 칼로리바 껍질 쓰레기 하나. 정신을 잃기 전 내 마지막과 일치했다.
 
 나는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상자에 걸터앉아 상황을 정리했다.
 
 하나, 게임을 하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니 유럽 시골풍의 어느 골목길이고.
 둘, 어째서인지 신체가 시력이 나빠지기 전으로 돌아간 상태며.
 셋, 복장과 소지품은 게임을 하다 정신을 잃기 전과 똑같다.
 
 “설마.”
 
 나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새벽녘이라 쌀쌀한지 발이 시렸다.
 
 시선이 절로 발바닥을 향했다. 집에서 신고 다니던 낡은 실내화가 보였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걸 내려다봤다.
 
 “그나마 저거라도 신고 있어 다행······.”
 
 「관찰, 성공.」
 「실내화, 실내에서 신는 신발. 고무로 만들어져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귓가로 들려온 작고 익숙한 음성.
 스마트폰 인공지능 빅스리의 목소리.
 
 나의 인생 게임 《바벨》
 아무래도 정말 ‘인생 게임’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이 기이한 현상을 탐구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나무상자, 그리고 주머니에 있었던 쓰레기는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두 가지 물건을 ‘관찰’해내는 데 성공했다.
 
 「검은 면티, 100% 면 재질. 활동하기 편하다.」
 「삼선 트레이닝 바지, 박음질이 튼튼하게 되어있다. 운동하기 좋다.」
 
 실내화, 면티, 바지.
 
 상의, 하의, 신발이면 게임상에서 착용 가능한 장비가 나오는 부위였다. 나는 ‘관찰’이 가능한 것들이 무엇인지 감이 왔다.
 
 “아이템······.”
 
 어쩌면 그 밖에 게임상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
 
 덜컹.
 건너편 집의 문이 열렸다.
 
 “으하아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가 기지개를 쭉 켠 후 눈을 비비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머리 위로 솟아난 고양이 귀,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꼬리가 시선을 어지럽혔다. 나는 그녀를 ‘관찰’했다.
 
 「Lv ??, 종족 묘인족, 성별 여, 이름 ??」
 
 귓가에 들리는 메시지가 내 생각에 확신을 줬다.
 
 “미친.”
 
 눈이 다시 보이는 것.
 
 당연히 기뻐서 동네방네 소리치고 다닐만한 일이다
 
 끼이익.
 
 “아, 씁. 웬 거지새끼가 새벽 댓바람부터 남의 집 앞에서 재수 없게. 안 꺼져? 팍, 씨!”
 
 여기가 게임 속 세상만 아니라면.
 
 문을 열고 나온 맨발의 소인이 나를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칼자국, 허리춤에 멘 단검을 매만지는 오른손. 어린아이 같은 체구지만 포스가 조폭이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했다.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 때 성질 더러운 하프만을 살짝 관찰했다.
 
 「Lv 2, 종족 하프만, 성별 남, 이름 ??」
 「기분이 매우 안 좋다.」
 
 “방금 분명히 한국어가 아니었어.”
 
 -바벨에 흘러들어온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함에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에 놀라곤 했다.
 
 바벨의 역사에 관한 책을 조사하다 보면 나왔던 문구가 떠올랐다.
 
 “일단 큰길로 나가보자.”
 
 나는 묘인족 여자와 하프만이 향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을 훔쳐보는 것만큼 그들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가장 많이 보인 건 인간. 엘프와 드워프도 가끔 보였다.
 
 “으음······”
 
 틈틈이 관찰해보니 대부분 레벨이 1 또는 2. 그 이상은 ??로 표시되는 것 같았다. 도중에 한번, 관찰 대상의 이름을 알아내기도 했다.
 
 나지막이 상태창, 스테이터스, 인벤토리 등등의 단어들을 중얼거려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타인과 아이템을 관찰할 수 있는데 나의 상태를 알 수 없다는 건 또 이상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터.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번화한 거리에 도착했다.
 
 탁 트이는 시야.
 대로를 환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하는 상점들.
 
 탑의 0층, 거주지역 ‘바벨’의 시장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의류를 판매하는 것으로 보이는 가게가 보였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손때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거울. 시력을 잃기 전, 기억 속의 내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찰, 대성공.」
 「Lv 0, 종족 인간, 성별 남, 이름 시온 한.」
 「착용 장비, 검은 면티, 트레이닝 바지, 실내화······.」
 
 나의 정보를 나열하는 음성 메시지를 들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 밤눈이 조금 어둡다.」
 
 움찔, 나는 안색을 굳히며 손을 멈췄다.
 
 밤눈이 어두워지는 야맹증.
 내가 앓던 희소 질환의 극초기 증상이었다.

댓글(31)

천케이    
오늘부터 정주행 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2022.06.04 12:08
허밍기    
츄천글 보고 정주행 시작!
2022.06.06 18:17
푹찍    
추천글 따라왔습니다!!
2022.06.07 01:37
푹찍    
확실히 캐릭터 개성하고 스토리가 좋네요.
2022.06.07 02:25
RockerL    
흥정? 보통 수용아닌가요?ㅋㅋ
2022.06.07 16:13
gdhy    
스타트맛나고~
2022.06.07 16:41
삼류하사    
갓소설!!!!!!!!!!!
2022.06.07 22:51
꿀버섯    
맹인궁수가 아니잖아...
2022.06.08 19:58
라이프제로    
이름부터가 미래를 예상시켰다 트랄새끼...
2022.06.09 12:11
원투쓰리..    
트랄 닉값하네 ㅋㅋ
2022.06.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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